13. 역반(逆反)
계백은 고구려에 밀서(密書)를 전하고 돌아 왔다.
백기는 그런 계백을 위해 집에서 함께 저녁을 먹기로 했다. 계백은 다른 생각 때문에 백기의 표정을 살피는 빛인데 함께 자리를 한 주랑도 계백에게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계백, 고구려의 근황부터 보고하게."
"좌장님, 신주정 군단은 병력을 전진 배치했고 고구려 군도 감악산에 전방 지휘소를 새로 설치했답니다. 이렇게 되면 아국의 병력은 언제라도 움직일 수가 있게 되지 않겠습니까?"
백기는 고개만 끄덕이는데 계백이 다시 입을 열었다.
"소관은 돌아와서 고구려의 국서를 상좌평님께 전했습니다. 함께 계셨던 위사좌평께선 소관에게 이런 질문을 하셨습니다,"
"뭘 물어보시던가?"
"소관이 이번에도 육로를 택해 돌아왔느냐고 물으셨습니다."
"그래서?"
"육로로 오며 고구려 군의 감악산 포진도 확인했다고 보고했습니다."
백기는 그런 대답에 고개만 끄덕였고 계백이 말을 이었다.
"상좌평께선 소관에게 대단하단 칭찬을 하셨고, 위사좌평께선 소관이 보고한 일들을 벌써 알고 있었다며 그건 고구려 국상인 을지문덕이 자신에게 서찰을 보내서 알았다고 했는데 좌장님도 그 사실을 아십니까?"
"나는 몰랐다."
"을지문덕은 왜 좌장님껜 그걸 알리질 않았을까요? 불공평합니다."
"을지문덕은 종종 그럴 때가 있다."
백기는 목돈이 계백에게 그런 말을 한 속셈을 알고 있었다. 자신이 을지문덕과 더 가까운 사이임을 슬쩍 진도에게 과시를 한 것이었다.
계백은 좀 주저하다 다른 말을 꺼냈다.
"소관은 이번에 장안성에서 뜻밖에도 높은 분을 만나 뵈었습니다."
"뜻밖의 높은 분을 만나 보다니?"
"고구려의 건무 왕제를 뵈었습니다."
백기는 의아한 표정으로 반문했다.
"계백, 자네가 무슨 일로 건무 왕제를 만났단 말인가?"
"건무 왕제께서 직접 소관을 부르셨기 때문입니다."
"건무 왕제가 자네를 직접 불렀다고?"
"그 이유는 다갈촌 철장님의 따님인 여선부인 때문입니다."
"다갈촌 철장의 따님 때문이라고?"
"예, 철장의 따님은 건무 왕제의 후궁이 된 신분이십니다."
"철장의 딸이 건무 왕제의 후궁이 되었다고?"
"예, 여선부인은 소관이 장안성에 왔다는 소문을 어떻게 전해 들으신 모양입니다. 때문에 건무 왕제에게 부탁을 하셨답니다."
"무슨 부탁을 했단 말인가?"
"소관을 한번 만나볼 수 있게 해달라는 청을 넣으셨답니다."
백기는 더욱 뜨악한 표정을 지으며 반문했다.
"자네를 만나게 해달라고? 무슨 이유로 그런단 말인가?"
"다갈촌의 철장은 양신 야좌를 어려서부터 양자로 삼았답니다. 그런데 이번 다갈촌 검술대회가 끝난 뒤 갑자기 어디로 사라져 버렸답니다. 지금까지 백방으로 찾고 있으나 종무소식이라 철장의 걱정은 이만저만 크지가 않답니다. 여선부인은 양신 야좌가 혹시 백제로 오지 않았을까 해서 소관을 만나보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럼 양신이란 자가 백제로 왔다는 말인가?"
"백제로 왔다면 소관을 찾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걸 보면 오지 않은 게 확실합니다. 그런 대답을 여선부인께 드렸습니다."
주랑은 그 말을 듣고 끼어들었다.
"어머나! 여선부인은 바로 저하고 꼭 닮았다는 분이 아녜요? 이번엔 맨 정신으로 다시 만나보셨을 텐데 저하고 정말로 똑 닮았던가요?"
"그렇소. 이번엔 맨 정신으로 봤고 너무도 똑 같아 더욱 놀랐소."
백기는 그 말에 갑자기 표정이 굳어들면서 언성을 높였다.
"계백, 쓸데없는 소리는 작작 하라. 지금 그런 일로 왈가불가할 때인가? 앞으론 내 앞에서 고구려 다갈촌 얘기는 다신 꺼내지도 말라."
주랑은 부친의 말을 듣고 이상한 표정이 되었다. 다갈촌에 관한 말만 나오면 부친이 필요 이상으로 과민반응을 보이고 언성도 높아지기 때문이었다. 계백은 머쓱해서 고개를 떨군 채 숟가락질만 했다.
주랑은 방안의 분위기가 무거워지자 슬그머니 몸을 일으켜 방을 나섰다. 정원의 오동나무 밑으로 가서 그곳에 놓인 평상에 앉아 있는데 조금 뒤 뒤따라 나온 계백이 다가들었다.
"계백 오라버니, 그렇지 않아도 잘 오셨어요. 저는 여선부인이란 분에 관한 얘기를 좀 더 듣고 싶어 여기서 기다리고 있던 참예요."
계백은 백기가 있는 사랑채 쪽에 흘끔 눈길을 던지고 입을 열었다.
"실은 나도 낭자에게 해줄 말이 있어서 왔소. 그 이유는 내가 고구려 왕제를 뵙고 난 이튿날 찾아온 사람이 또 있었기 때문이요. 그 사람은 고구려 왕실 검사단의 사범으로 이름은 도해선이라고 했소."
"그 사람은 무슨 일로 오라버닐 찾아 왔는가요?"
"나는 도해선으로부터 양신님이 다갈촌을 떠난 이유를 알게 되었소."
"그 분이 무슨 이유로 떠났단 말인가요?"
"양신님과 여선부인은 혼약을 맺었던 사이였음을 알게 되었소."
"어머, 그런데 지금은 헤어지게 되었단 말이 아닌가요?"
주랑은 까닭을 모르게 관심이 커지면서 계백의 말을 기다렸다.
"두 분은 정인 사이로 혼약을 맺었던 사이요. 그런데 여선부인이 왕실의 간택을 받게 되자 양신님은 실의에 빠진 채 어디로 떠나버렸다오."
"약혼녀를 빼앗긴 남자의 마음이 오죽하겠어요? 슬픔을 못 이겨 고향을 등질 수밖에 없겠군요? 저는 양신이란 분에게 동정이 가네요. 왠지 모르게 나는 남의 일 같지가 않게 여겨져 가슴이 아프기까지 하네요."
"도해선이란 사람은 내게 더욱 놀라운 얘기를 들려주었소."
"어떤 얘기를 들으셨기에 그러세요?"
"여선 부인의 출생에 관한 얘기요."
"여선 부인의 출생에 관한 얘기라니요?"
"오늘은 좌장님에게 여선부인에 관한 얘기를 한번 여쭤보려고 했었소. 왠지 좌장님은 그 일을 아실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요. 그런데 좌장님이 너무도 화를 내시는 바람에 얘기를 꺼낼 수가 없었소."
"그 말씀을 하시니 저도 아버님이 너무도 이상하게 생각이 되요. 고구려의 다갈촌 얘기만 나오게 되면 왜 그토록 화를 내시는지 도무지 모르겠어요. 그런데 아버님게 뭘 여쭤보려고 하셨어요?"
"낭자, 여선부인의 출생지가 어딘지 아시오?"
"어딘데 그러세요?"
"이곳, 사비성이라오."
주랑은 그 말을 듣고 까닭을 모르게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거기다 여선부인은 다갈촌 철장과 백제 여인 사이에서 태어났다오."
"백제 여인이 모친이라고요? 그 여인이 누군지는 알아보셨나요?"
"도해선은 거기까진 모른다고 했소. 다만 백제 여인은 출산하고 산후조리가 잘못 되어 젊은 나이로 세상을 뜬 것만 알고 있었소. 때문에 철장은 여선부인이 갓난애 때 고구려로 데려와 키웠다는 말을 했소."
"모친이 산후조리가 잘못 되어 세상을 뜨게 되었다고요?"
주랑은 반문하고 멍청해지는 표정이 되었다. 자신도 낳아준 모친이 똑 같은 경우였기 때문인데 계백은 그런 주랑의 사정을 알아서 말했다.
"다갈촌 철장은 그 이후로 지금까지 독신으로 지내고 있다오."
"철장이 독신으로 지낸다고요?"
"철장은 혼자서 여선 부인을 키웠다오. 계모에게 구박을 받을 까봐 재혼을 하지 않았다오. 나는 그 말을 듣고 어쩌면 좌장님과 똑 같은 경우가 이렇게 또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소."
주랑은 그때부터 머릿속이 혼란에 빠져들었다. 자신과 똑 닮은 사람이 고구려에 있다는 것도 반신반의할 일인데 자신과 똑 닮은 여선부인의 출생지도 사비성이라면 이젠 관심을 넘어서 어떤 의문에 잠기지 않을 수가 없었다. 거기다 양쪽의 모친이 산후 조리가 잘 못되어 젊어 타계한 것도 똑 같았다. 또 어려서 하녀가 자신을 두고 원래는 쌍둥이 중 한 짝이란 말을 했었던 적이 있었다. 그때부터 자신의 한 짝은 어디서 살고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어 부친에게 묻기까지 했는데 강한 부인만 당했었다.
그런 대화를 나누고 난 두 사람은 침묵 속으로 빠져들었다. 주랑은 어두운 밤공기에 짓눌린 것에서 벗어나려 듯 목이 잠긴 음성을 흘려냈다.
"혹시 여선이란 분의 나이를 모르시나요?"
"낭자, 나도 그 말을 하려던 참이었소. 놀랍게도 동갑이요."
"네?! 저하고 동갑이라고요?"
주랑은 이젠 마구 떨리는 가슴을 진정시킬 수가 없었다.
"낭자, 이만 나에게 품었던 오해를 풀 수가 있겠소? 오해가 풀린다면 한시름을 놓겠으나 나로선 양신님 때문에 마음이 무겁고 걱정이 크오."
주랑은 안타까운 표정으로 물었다.
"양신이란 분은 대체 어디로 갔을까요?"
"도해선은 신라 야장선을 타고 간 것을 본 사람이 있다는 말도 했소."
"그 분의 심경이 오죽했으면 신라의 야장선을 탔겠어요?"
"도해선은 양신님이 여선부인에 대한 연모의 정은 죽어도 못 접을 자라는 말도 했소. 그러므로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떠났을 것이라고 했소."
"왜 안 그렇겠어요?"
"그런데 나는 도해선이란 자가 어딘지 수상하단 느낌이 들었소."
"왜 수상하단 느낌이 드세요?"
"내가 보기에 그 자는 양신에 대한 감정이 썩 좋지가 않을 사람 같았소. 왠지 모르게 그 자가 양신님을 찾고 있다는 느낌을 떨칠 수가 없었소. 아니 그 자는 분명 양신님을 해치려고 들 자란 생각마저 들었소."
"대체 왜 그런 느낌이 드셨단 말예요?"
"그 자는 내게서 뭘 알아내려는 태도가 역력했었기 때문이요."
"그 사람이 그러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도해선은 내게 이런 말도 했소. 신라의 남가라엔 지물촌이란 큰 야장촌이 있는데 거기서 초여름에 야장과 왜인들 간에 큰 충돌이 벌어졌다오. 그때 야장들 틈에 웬 고구려인이 끼어 있었는데 검술이 매우 능해서 왜인들의 콧대를 납작하게 눌러놨다오. 그로인해 신라인들은 모두가 통쾌하게 여겼다는 소문도 전했소. 그런데 도해선이란 자가 내게 그런 얘기를 들려준 걸로 봐서 그가 다방면으로 양신님의 행방을 찾는 게 아닐까하는 의문이 들게 되었소."
"양신이란 분은 검술이 능하고 신라 야장선을 타는 걸 본 사람도 있다면 저도 신라로 가서 그런 일을 벌였을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드네요?"
"낭자도 그런 생각을 하는군요? 내 생각인데 도해선은 아무래도 사람을 직접 남가라로 보내 양신님을 찾아본 것 같았소. 나 역시 이번 출정만 아니면 남가라로 가서 양신님을 한번 찾아보고 싶은 마음이요."
"그 분을 만나서 뭘 어찌하겠다고 그런 말씀을 하세요?"
"나는 양신님을 백제로 데려 오고 싶은 마음이라 그렇소."
주랑은 계백의 대답을 듣고 좀 놀라는 표정이 되었다.
"계백 오라버니는 그 분 때문에 신라 땅으로 들어갈 생각이세요?"
"그렇소. 마음만 먹으면 얼마쯤이라도 갈 수가 있소. 남가라 포구는 백제 상선도 자유롭게 드나드는 곳이라 배를 이용하면 되는 일이요."
"그래도 거긴 적국의 땅인데 위험하지 않겠어요?"
"상인으로 가장을 하면 되고 신라엔 도움을 청할만한 사람도 있소."
"신라에 도움을 청할만한 사람이 있다니 그건 또 무슨 말씀예요?"
"나는 다갈촌에서 해론이란 신라 사람을 사귀었소. 양신님, 해론님과 더불어 나는 서로가 흉금 없는 대화도 나눴소. 그처럼 세 사람은 뜻이 맞아서 마침내 중요한 약조를 하기에 이르렀소."
"아니?! 적국인들끼리 무슨 중요한 약조를 한단 말인가요?"
"세 사람은 비록 적대국 사이지만 그 것에 구애받지 않고 교유를 하기로 했소. 세 사람이 그런 마음을 먹게 된 데는 서로가 믿을 만한 인품과 사리 분별이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소. 그런 판단에서 생겨난 신뢰감을 바탕으로 교류를 하며 지낼 방법도 찾아보자는 약속도 하게 되었소."
"그게 가능할까요? 아녀자의 소견으론 걱정부터 들어요. 젊은 남성들 간의 이상적인 소망에 지나지 않을 뿐 현실은 다르다는 생각이 드네요."
"나도 낭자가 우려하는 바를 모르지 않소. 그러나 사나이란 때론 모험심을 가질 필요성이 있소. 아무리 적국 사이라 해도 서로가 마음이 통하면 교유도 하고, 그걸 실천에 옮길 용기도 있어야 사나이가 아니겠소?"
"그러시면 아버지께 한번 말씀을 드려보시지 그래요?"
"지금은 안 되고 가잠성 공취가 끝나면 말씀을 한번 드려 보겠소."
주랑은 그런 말까지 나누고 나니 자신에게도 어떤 믿음 같은 게 생기는 것 같았다. 그것은 자신과 여선 부인은 어딘지 무관한 사이가 아니란 생각 때문이었다. 그리고 양신에 대해 남다른 관심도 생겼다.
계백은 그런 주랑의 속내를 읽었는지 앞으론 두 사람이 양신에 대한 관심을 갖고 행방을 알아보는데 협력하자는 말을 나누게 되었다.
출정을 사흘 앞 둔 어느 날 목등은 계백을 불렀다. 그리고 내일 백기의 집을 방문해서 의논할 일이 있음도 전하게 했다. 그 말을 전해들은 백기는 저녁 때 술상을 차려놓고 계백과 힘께 기다렸다.
"계백, 목방장이 무슨 의논을 하겠다는 말은 하진 않았나?"
"좌장님, 소관이 그걸 물어봤지만 그렇게만 알라는 말만 했습니다."
그때 밖에서 하인의 음성이 들렸다.
"목방장께서 오셨습니다."
백기는 계백과 눈길을 나누고 입을 열었다.
"목방장, 어서 들어오게."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목등은 큰 기침을 하며 방문을 열었다.
"목등입니다."
목등은 방 안으로 들어서자 계백과 주랑이 함께 앉아있는 걸 보고 눈 꼬리가 실쭉해졌다. 주랑이 그만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려고 하자 손을 급히 내저으며 말했다.
"낭자, 오래 간만에 보게 되어 반갑소. 그렇지 않아도 함께 얘기를 나눌 게 있어서 왔소. 누구보다도 낭자가 꼭 들어야 할 얘기이므로 자리를 지켜 주었으면 좋겠소."
주랑은 목등의 말을 듣고 부친을 돌아다보았다. 백기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고 주랑은 마지못하듯 도로 주저앉았다.
"목방장, 무슨 의논을 할 게 있어 왔는가?"
백기가 궁금해 하자 목등은 자못 의연해진 태도로 대꾸했다.
"좌장님과 긴히 나누지 않으면 안 될 말씀이 있어서 왔습니다."
"긴한 일이란 게 대체 뭔가?"
"소장은 막상 말씀을 꺼내자니 좀 주저가 됩니다."
목등은 말하고 흘끔 주랑을 보았다. 백기는 출병에 관한 의논을 하려는 것으로 여기면서도 혹시 또 따른 무슨 문제가 생기지 않았을까 하는 의문이 일어 표정이 좀 굳어들었다.
"좌장님, 소장은 먼저 목부터 축이고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목등은 말하고 상 위에 놓인 술병에 눈길을 주었다.
"그러게나."
백기는 술병을 들고 잔에 술을 따라주었다.
"목방장, 들게."
목등은 술잔을 받고 단숨에 비워냈다.
"소장은 좌장님을 찾아뵙게 되기까지 여간 고민이 크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끝내 결단을 내리고 찾아뵙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백기는 목등의 태도가 어딘지 평소와 달라서 좀 이상하게 여겼다.
"좌장님, 한 잔 더 마셔야 되겠습니다."
목등은 갈증을 느끼는 사람처럼 입맛까지 다셨다. 계백이 얼른 술병을 집어 들자 목등은 눈을 부릅떴다.
"계백, 누가 자네보고 술을 따르라고 했는가?"
계백이 슬그머니 술병을 도로 상위에 내려놓자 목등의 입에서 엉뚱한 말이 흘러나왔다.
"좌장님, 계백과 주랑 낭자를 왜 한 자리에 앉혀 놓으십니까?"
백기는 좀 어이가 없으나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안 될게 뭔가? 어려서부터 오누이처럼 흉허물 없이 자란 사일세."
백기는 대꾸를 하면서도 속으론 불쾌했다. 더욱이 술좌석에서 주랑을 넘보는 말까지 했다는 목등인데 한 술을 더 떠 그런 말 같지 않은 소릴 지껄이다니 내심 괘씸한 생각도 들었다.
목등은 이번엔 주랑을 돌아다보았다.
"주랑 낭자, 내게 술을 한 잔 따라주실 수는 없겠소?"
주랑은 말없이 불쾌한 표정만 지었다. 계백도 사뭇 속이 뒤틀려서 안색이 울그락 불 그락이었다. 백기는 목등이 이렇게 나오는 데는 무슨 이유가 있을 것이란 생각에 입을 열었다.
"주랑아, 목방장은 이번 출정에서 날 보좌하는 중책을 맡게 되었다. 장도를 축하하는 의미로 한 잔 따라 드려라."
주랑은 내심 불쾌하고 내키지가 않을 일이나 술병을 집어 들고 따랐다. 계백은 못마땅해서 험악해진 표정으로 엉덩이를 들썩거리게 되었다. 백기는 그러는 계백에게 엄한 눈길을 보냈다.
목등은 술잔을 들고 자못 흐뭇한 표정으로 주랑에게 목례를 했다.
"낭자, 오늘 내가 이곳에 온 이유는 바로 낭자를 도울 방법을 찾고자 함이요. 지금부터는 서로 간에 그에 관한 일을 의논해 봅시다."
목등은 술잔을 죽 비우고 나서 잔을 또 주랑 앞으로 내밀었다.
"낭자, 내친 김에 한 잔 더 채워주시오."
주랑은 아니꼬움에 술병을 목등에게 집어던지고 싶었다. 그러나 그런 태도를 보이게 된 데는 무슨 까닭이 있을 것이었다. 다시금 술을 따랐고 계백은 부아가 치밀어 어쩔 줄 몰라 했다.
백기도 불쾌감을 금치 못했다. 화가 폭발할 것 같은 지경이나 목등의 태도가 하도 심상치가 않아 지그시 바라다보기만 했다. 목등은 싸늘해진 분위기를 모른 체 하듯 술잔을 조금씩 핥듯 마셨다.
계백은 마침내 더는 참을 수가 없었다.
"방장님, 이거 너무 무례하시지 않습니까?"
목등은 빈정대는 말투로 그 말을 받았다.
"같잖은 놈, 앞으론 날 부장님으로 부르지 않으면 안 된다!"
계백은 참다못해 주먹으로 상을 내리치고 말았다. 그 바람에 상은 우당탕 엎어지고 음식 그릇들이 방바닥에 뒤집혀져 난장판이 되었다. 목등은 일그러진 표정으로 계백에게 소리쳤다.
"이런 버르장머리 없는 놈을 보겠나?"
계백도 욕설을 내뱉는 목등에게 맞받아치고 말았다.
"그건 누가 할 소린지 모르겠습니다."
"계백, 네 놈이 지금 죽으려고 환장을 했느냐?"
목등은 소리를 지르고 벌떡 자리에서 일어섰다. 계백도 따라 일어섰고, 백기는 그 모양을 보고 마침내 노기 띤 음성을 터뜨렸다.
"감히 뉘 앞에서 이 따위 행패들인가?"
백기가 호통을 쳤지만 목등과 계백은 험악한 눈초리로 서로 노려볼 뿐이었다. 백기는 억지로 마음을 눅이고 타이르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내 말들이 안 들리는가? 둘 다 자리에 앉게."
목등과 계백은 시근덕거리며 도로 자리에 주저앉았다.
주랑은 하녀들을 불러 방을 치우게 했다. 계백은 방안이 대강 정돈이 되는 동안에 분을 삭이지 못해 씨근덕대었다. 목등은 그 모양을 보면서 비웃음 같은 것을 짓고 있었다.
새로 본 술상이 방안으로 들여졌다.
백기는 목등이 찾아와서 행패까지 부리는 이유가 무엇인지 알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러자면 냉정해질 필요가 있다는 생각에 먼저 술병을 들고 세 개의 잔에 술을 가득가득 채워놓았다.
"모두들 술잔을 들고 쭉 비우세."
백기가 먼저 술잔을 비워냈다. 목등은 심호흡을 하고 술을 입에 부어 넣었고, 화가 풀리지 않은 계백은 술잔을 들지 않았다. 주랑은 침묵 속에 목등에게 시선을 박고만 있었다.
"자네들 두 사람은 누구보다 내겐 신망이 큰 사람이다. 그런 두 사람이 출정을 앞두고 이런 작태를 보이다니 대단히 실망스럽다."
두 사람은 그런 말을 들으면서도 귓전에도 없다는 듯 서로 노려보기만 했다. 백기는 목등은 그렇다 치고 계백마저 자신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하는 태도에 화가 나 버럭 소리를 질렀다.
"계백."
"예?"
"목방장은 이번 출정에서 날 보좌하는 중책을 맡았다. 어떠한 경우가 되건 간에 상관에게 오만불손한 태도를 보이는 건 용납되지 않을 일이다. 계백은 당장 무릎을 꿇고 사과를 드려라."
계백은 불만이 컸지만 억지로 무릎을 꿇고 앉았다.
"방장님, 죄송합니다."
목등은 그런 계백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백기에게 말했다.
"좌장님, 소장이 오늘 찾아뵙게 된 이유를 말씀드리겠습니다."
백기는 너무도 당당하게 말을 꺼낸 목등에게 고개만 끄덕였다.
"좌장께선 요즘에 이상한 소문이 떠도는 것을 아시고 계십니까?"
"목방장, 이상한 소문이 떠돌다니?"
"백가면에 관한 얘기입니다."
백기는 그게 무슨 소린지 모르는데 주랑은 긴장하는 표정이 되었다.
"좌장님, 혹시 백가면이 목가장에 침입한 소문을 들으셨습니까?"
"나는 처음 듣는 소릴세."
"그 뿐만 아닙니다. 제 부친과 겨루기까지 했습니다."
"백가면이? 그러고도 무사히 빠져 나갈 수가 있었단 말인가?"
"좌장께선 백가면에 대해 어찌 생각을 하십니까?"
"어찌 생각을 하다니? 자네 부친과 겨루고 무사했다면 무공이 보통이 아닌 잘세. 하긴 자네 부친이나 나나 나이를 먹어 전과 같을 순 없지."
"좌장님, 백가면은 백가검법을 쓰는 자입니다."
목등은 말하고 주랑 쪽으로 슬쩍 시선을 돌렸다.
"목방장이 날 찾아온 이유가 대체 뭔가?"
"좌장님은 백가면이 백가검법을 썼다는 것에 어떤 생각을 하십니까?"
"사비성에서 검술을 좀 익혔다는 자들 치고 백가와 목가검법을 쓰지 않는 자가 몇이나 되겠나? 백가면이 우리 검법을 쓴 게 사실인지는 모르겠으나 나로선 그에 대해 특별히 할 말은 없네. 다만 우리 무문에서 그럴만한 자가 있었다면 그게 누군지 매우 궁금해지지 않을 수가 없네."
백기는 말하고 스스로 의문에 잠기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 봐도 떠올릴만한 자가 없었다. 굳이 꼽자면 계백과 주랑인데 두 사람은 그럴 리가 만무한 일이었다.
그때 조금 전과는 다르게 계백이 확 누그러든 태도로 입을 열었다.
"백가면은 억울한 일을 당한 사람들을 돕는 정의의 사도로 알려졌습니다. 더욱이 그 일을 하는 것은 어떤 개인적인 사심에 의한 일이 아닙니다. 때문에 많은 사람들로부터 호응을 얻고 있는 편입니다."
목등은 계백이 백가면을 두둔하는 말을 하자 눈을 부릅떴다.
"계백, 나도 그걸 몰라서 꺼낸 말이 아니다. 백가면이 목가장에 침입해서 뜻을 이루지 못한 것도 안 됐다는 생각을 하는 사람이다."
백기는 목등이 하는 말을 듣고 좀 어리둥절했다. 또 의외로 표정이 잔뜩 굳어져 불안한 표정을 보이는 주랑을 보며 이상한 생각도 들었다.
그때 주랑은 목등이 찾아 온 이유를 비로소 알게 되었다. 내심 크게 당황하며 조마조마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사비성에선 자신을 백가면으로 지목하는 소문이 퍼져 막다른 골목으로 몰린 심경이었다.
"좌장께서도 백가면이 정의의 사도라고 생각을 하십니까?"
목등의 도전적인 질문에 백기는 왠지 모를 곤혹스러움을 느꼈다.
"백가면이 그런 일을 했다면 정의로운 자일세. 허나 목가장엘 들어가 우리 검법을 썼다는 것은 여간 신경이 쓰이지 않을 일일세."
"좌장님, 근래에 제 부친한테 무슨 말씀을 들으신 건 없으십니까?"
"백가면에 관해서 말인가?"
백기가 떨떠름하게 반문하자 계백이 끼어들며 항의조로 말했다.
"방장님은 무슨 의도로 그런 질문을 하십니까?"
목등은 계백의 말을 무시하듯 백기에게 또 물었다.
"좌장님, 만약에 백가면이 좌장님의 측근이라면 어찌 하시겠습니까?"
백기는 비로소 안색이 변했다.
"목방장, 무슨 소리를 하는가?"
"측근에 그럴만한 사람이 있다면 누구로 보십니까?"
목등은 추긍 조이고 백기는 대답을 못했고 계백이 입을 열었다.
"방장님, 백가 무문을 노골적으로 의심하시는 이유가 뭡니까?"
"계백, 끼어들지 말라."
목등이 눈을 부릅뜨자 백기는 계백을 제지했다.
"계백, 조용히 있어라."
백기는 목등을 향해 굳은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목방장, 내게 할 말이 있어 왔다면 그만 속 시원하게 털어놓게."
목등은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입을 떼었다.
"소장이 여기에 온 것만으로도 전 부친께는 불효자가 되는 짓입니다."
"부친에게 불효자가 되다니?"
"소장이 여기에 온 것은 다름 아닌 주랑 낭자 때문입니다. 그러나 막상 말씀을 꺼내자니 저도 매우 주저가 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주랑 때문에 왔다니 그게 무슨 소리인가?"
백기는 안색이 변하면서 주랑을 바라보았다. 그렇지 않아도 계속 고개를 푹 숙인 채 불안한 기색이 역력해진 태도라 이상하기만 했다.
목등은 허리춤에서 물건을 하나 꺼내놓았다.
"좌장님, 이 물건을 한번 봐주십시오."
"이건 향낭주머니가 아닌가?"
백기는 향낭주머니를 집어 들고 보다가 서서히 안색이 굳어들었다.
"좌장님, 처음 보시는 물건입니까?"
목등의 말에 백기는 답변을 못하고 주랑에게 눈길을 돌렸다. 주랑은 전전긍긍하듯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고개만 더욱 떨어뜨렸다.
"좌장님, 향낭주머니의 문양을 보십시오. 그걸 보면 목씨가문에서 백씨가문으로 출가한 분이 지녔던 물건임을 잘 아시게 될 것입니다."
백기는 갑자기 목이 잠긴 음성으로 물었다.
"목방장, 이걸 자네가 어떻게 갖게 되었는가?"
"백가면이 목가장에 침입했을 때 떨어뜨리고 간 것입니다."
"백가면이? 위사좌평께서도 이걸 보셨단 말인가?"
"그렇습니다."
"이걸 내게 보여 주라고 하시던가?"
"아닙니다. 소장은 아버님 모르시게 가지고 왔습니다."
"몰래 가지고 왔다고? 어찌하려고?"
백기의 반문에 목등은 담담하게 대꾸했다.
"좌장님께 돌려드리려고 가져 왔습니다."
"내게 돌려주겠다고? 그게 진심인가?"
목등이 고개만 끄덕이자 백기는 비로소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게 되었다. 백가면이 정의의 사도로 칭송을 받는다고 하지만 그게 주랑일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런데 백가면의 정체가 드러난 이상 목돈은 유야무야로 넘기지 않을 사람인 게 분명했다.
"목방장, 향낭주머니가 내 집 물건인 것을 부인하진 않겠다."
백기는 그렇게 시인을 하고 주랑에게 시선을 돌렸다.
"주랑아, 네가 백가면일 줄은 몰랐다."
주랑은 아무 대꾸도 못하고 계백이 대신 입을 열었다.
"좌장님은 잘못 아시고 하신 말씀입니다. 백가면은 주랑 낭자가 아니고 바로 소관이 저지른 일이었습니다."
"자네가 백가면이라고?"
백기의 반문에 주랑은 창백해진 얼굴을 쳐들었다.
"아버지, 목가장엔 제가 들어갔어요."
백기는 딸의 말을 못 들은 체하며 자작으로 술을 따라 연거푸 마셨다. 착잡한 심경으로 향낭 주머니만 들여다보는데 주랑이 입을 열었다.
"아버지."
백기는 눈을 감은 채 대답했다.
"주랑아, 나는 아들이 없음을 늘 한탄해 왔다. 그러나 이젠 어느 집의 아들도 부럽지 않을 장한 딸을 둔 것에 자긍심을 느끼고 있다."
"아버지! 죄송해요. 목가장에 끌려간 여인의 집안 사정이 하도 딱해서 그만 경솔한 짓을 저질렀어요. 그동안에 반성을 많이 했어요."
주랑은 말하고 무릎걸음을 쳐서 부친에게 다가들었다. 그리고 복받치는 감정을 못 이겨 부친의 무릎에 얼굴을 묻었다. 백기는 딸의 등을 가만히 쓰다듬어 주면서 말했다.
"주랑아, 너는 어려서부터 계집애답지가 않았다. 성격이 사내대장부 못지않게 활달했고 의협심도 매우 강했다. 거기다 익힌 검술로 의로운 일을 했다니 나로선 흐뭇함을 금치 못하겠다."
백기는 말하고 이번엔 목등을 돌아다보았다.
"목방장, 내가 지금 한 말이 불만스럽겠지만 솔직한 심경일세."
"소장도 향낭주머니를 돌려드리는 걸로 일을 끝내고자 합니다."
"자네 뜻은 고맙지만 나로선 자네 부친의 심경을 헤아리지 않을 수가 없겠네. 내일 부친을 만나 사과를 드리겠네."
"좌장님, 저는 모른 체 하시는 게 좋겠다는 생각입니다."
"모른 체 하는 게 좋겠다니 그럴 수는 없잖은가?"
"사과를 하시면 제 아버님의 체면만 더 깎이시게 될 일입니다."
"체면만 더 깎이게 될 일이라고?"
"아버님은 지금 좌장님께 아무런 내색도 하시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목전에 둔 출병을 위해서도 그런 일로 낯을 붉히게 되선 좋을 게 없다는 생각이십니다. 나중에 지나간 일로 얘길 나누시는 게 좋겠습니다."
백기는 목등의 간곡한 말에 찜찜한 마음이나 수긍이 가는 듯 고개를 끄덕였지만 목돈은 사과를 받고 끝낼 사람이 아님을 잘 알고 있었다.
"제 아버님은 이번에 좌장님에 대한 기대가 너무도 크십니다. 그러므로 개인적인 감정 때문에 대사에 악 영향을 끼칠 일이 일어나지 않게 되길 바라고 계실 것입니다."
"목방장, 그런 말을 해주니 나로선 고맙기 그지없네."
"좌장님, 계백과 주랑낭자는 그만 자리를 피하게 해 주십시오."
두 사람이 몸을 일으켜 밖으로 나가고 나자 목등이 입을 열었다.
"폐하께선 죽마고우인 좌장님과 아버님이 이번에 모처럼 협조 관계가 이뤄져 가잠성 공취에 대한 성공 가능성이 더 커졌다고 기뻐하십니다."
"나도 그러실 것으로 생각이 되네."
"폐하께선 두 분께 바라시는 점이 있습니다. 이번 기회에 두 분이 일심동체로 왕실 보위에도 힘을 합쳐주실 걸 바라시는 눈치십니다."
"신하로 왕실을 보위하는 일은 당연하지 않는가? 그런데 목방장은 이런 말을 부친으로부터 듣고서 내게 말을 하는 것인가?"
"좌장님, 소장은 폐하로부터 직접 들은 말씀입니다."
"자네가 직접들었다고?"
"소장은 곧 왕실과 혼사를 맺게 되었습니다."
"목방장이 왕실과 혼사를 맺게 되었다고? 누구와?"
"초계부인입니다."
백기는 목등의 대답을 듣고 무겁게 고개만 끄덕였다. 그렇게 된다면 앞으로 조정안의 역학구도에 큰 지각변동이 일어날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다. 목등이 그 사실을 직접 자신에게 알리는 것도 존재감을 과시하려는 의도임을 알 수가 있었다.
"목방장, 자네와 초계부인의 혼사를 상좌평도 알고 계신가?"
"모르십니다."
"목방장, 그렇다면 자네 부인은 앞으로 어떻게 되는가?"
"제 처는 친정으로 돌아간 지가 이미 반년이 넘지 않았습니까?"
"그렇다고 해도 엄연한 부부 사이가 아닌가?"
"돌아갈 때 헤어질 걸 전제로 제게 먼저 통고한 쪽도 그쪽입니다."
"나도 자네 부친과 상좌평 사이에 금이 간 것을 모르지 않으나 이렇게까지 될 줄은 몰랐다. 다만 상좌평과 자네 부친 간의 일로 출병에 무슨 영향을 주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좀 드네."
백기는 그렇게 말하고 혹시 국왕과 상좌평의 관계 역시 매우 나빠졌음을 추측하게 되었다. 그런데 목등이 입을 또 열었다.
"좌장님은 앞으로 운이 크게 풀리게 되실 걸로 소장은 믿습니다."
"내 운이 크게 풀리다니 왜 그런 말을 하는가?"
"이번 출병으로 가잠성 공취 가능성이 매우 크기 때문입니다."
"나도 그렇게 생각을 하지만 자넨 어떤 면에서 그렇게 보는가?"
"좌장님도 아시겠지만 신라의 신주정은 원병을 보내기가 힘듭니다."
"자네는 신주정이 왜 원병을 보내기가 힘들다고 보는가?"
"지금 왜국이 신라를 치겠다며 병력을 움직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왜국이 병력을 움직인다고?"
백기는 그렇게 묻고 자기도 모를 일들을 목등이 많이 알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그건 범연히 들어 넘길 수가 없다는 판단에 물었다.
"왜국이 신라를 치려고 병력을 움직인다는 말인가?"
"예, 신라는 그 때문에 신주정 군단의 병력 중 1만을 빼어 급히 남가라 쪽으로 비밀리에 이동시켜 대비로 들어간 걸로 알려졌습니다."
"그게 정확한 정보인가?"
"고구려의 을지문덕 국상은 아버님께 그런 서찰을 보냈습니다."
"그런가?"
백기는 그 말을 듣고 자존심이 좀 상하는 기분이었다. 그런 서찰을 받은 목돈도 그 사실에 대해 일언반구가 없었기에 좀 섭섭하게 여겼다.
"소장은 좌장님께 이런 말씀을 드려도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목방장, 무슨 말인지 해 보게."
"이번 출병에 주랑낭자도 함께 데려가셨으면 하는 생각입니다."
"출병에 주랑을 데리고 간다?"
백기는 반문하다 한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국왕은 병마총관(兵馬摠管)인 백기를 불러 출병 날짜를 앞당기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리고 출병도 야밤에 행하게 하고 좌평들은 전원 왕궁으로 들어와서 백기의 출정을 전송하게 했다.
갑작스런 백제군의 출병은 사비성은 거의 빈 상태로 만들었다. 그런 가운데 국왕은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좌평들이 궁성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했다. 좌평들은 당분간 왕궁에서 기거하라는 국왕의 엄명을 받고 무슨 이유인지 몰라 수군댔지만 전처럼 불평을 할 엄두를 못 내었다.
국왕은 전에 없이 갑옷을 입고 장도를 찬 채 남은 왕궁 수비병을 직접 지휘를 했다. 좌평들은 자못 삼엄해진 궁성 안의 분위기와 국왕의 눈치를 보면서 지내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튿날 아침에 궁성 안에선 뜻밖의 사태가 벌어졌다.
의자 왕자가 수비병을 지휘하는 두 명의 방장들과 함께 들어왔다. 그런데 목돈의 심복인 방두(枋頭)에 의해 진도의 심복인 욱진(旭辰)이 포승줄로 묶인 채 끌려들어 왔다.
그 광경을 본 좌평들은 너무도 놀라서 수군거렸고 진도는 낯 색이 창백해지고 말았다. 그 뒤를 따라 한 여인도 들어왔다. 그녀는 좌평들도 잘 알 만큼 유명한 주막(酒幕)의 여주인이었다.
그때 국왕이 나타났다. 목돈은 그 광경을 보면서 엷은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국왕은 좌평들을 둘러보고 나서 무겁게 입을 열었다.
"짐은 이런 일이 꿈에도 일어날 줄은 몰랐다. 통탄할 일이다."
국왕의 말에 좌평들은 아무도 입을 못 떼는데 의자가 입을 열었다.
"지금부터 대역무도한 욱진에 관한 신문을 시작하겠습니다. 먼저 방두는 어제 밤 주막에서 일어난 일들을 소상히 밝혀라."
방두는 의자의 명령에 입을 열었다.
"저는 어제 밤 욱진 방장이 권하는 독주를 마실 뻔했습니다."
좌평들은 그 말에 크게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 반응은 크게 엇갈리는 것이었다. 좌평들도 어느 정도 예견을 한 사건임을 아는 자가 없지도 않았다. 의자는 다시 입을 열었다.
"지금 사비성은 텅 빈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그런데 그 틈을 타서 반역을 일으키려는 자가 있습니다. 곧 왜국의 병력을 태운 선단이 도착하게 됩니다. 진도는 지금 왜국 병력이 오게 된 목적을 밝혀라."
의자의 반말에 사색이 된 진도는 입을 못 열고 국왕이 말했다.
"진도가 답변을 못하면 짐이 대신 하겠다. 진도는 반역을 일으키고자 왜국의 우마코 대신에게 병력 지원을 요청했고 곧 도착하게 되었다."
국왕의 입에서 나온 청천벽력 같은 말에 좌평들의 시선은 진도에게 쏠렸다. 사색이 된 진도는 떨리는 음성으로 겨우 입을 열었다.
"폐하, 신에게 무슨 말도 안 될 모함의 말씀을 하십니까?"
"말도 안 되는 모함? 그렇다면 욱진으로 하여금 방두에게 독주를 먹여 죽일 것을 지시한 일도 그대는 부인을 할 셈인가?"
국왕의 호통에 진도는 몸을 부들부들 떨면서 대답했다.
"폐하, 신은 전혀 모르는 사실이옵니다."
"진도, 네가 부인만 한다면 증언을 할 자를 세울 수밖에 없다."
"폐하, 신은 무슨 모함에 걸려든 것 같사옵니다."
진도는 겨우 대답을 했고 국왕이 호통을 쳤다.
"진도, 뻔뻔스럽다."
국왕은 전에 없이 계속 반말을 쓰며 강한 태도로 나왔다. 좌평들은 점점 두려움을 느끼듯 조신한 태도를 보이고 분위는 한결 숙연해졌다.
"여인아, 너는 방두를 독살시키는 일에 깊숙이 관여했던 당사자이다. 지금부터 너는 이 사건의 전말을 숨김없이 전부 다 증언하라."
국왕의 명령을 받은 주막집 여인이 입을 열었다.
"폐하, 이년에게 있었던 일들을 소상하게 밝히겠습니다."
그렇게 입을 뗀 여인은 다음과 같은 얘기를 들려주었다.
출병을 앞두고 욱진이 여인을 찾아와서 남편의 행방을 물었다. 그렇지 않아도 하루 전에 외출했던 남편이 돌아오지 않아서 여인은 걱정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욱진은 남편을 살리려면 자신이 시키는 대로 하라는 요구를 했다. 방두를 독살시킬 음모에 가담하지 않으면 남편은 목숨을 잃게 된다고 했다. 여인은 남편을 위해서 응하기로 했다. 그리고 출병 전날 밤중에 욱진과 방두가 주막에 왔다. 여인은 욱진이 시킨 대로 독을 탄 술병을 얹은 상을 방에 들여놓았다. 그때 그걸 알고 있던 의자 왕자 역시 수십 명의 병사들을 끌고 나타났다. 의자는 방으로 들어가서 직접 술을 따른 뒤 욱진에게 마실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욱진은 독이 든 술을 마실 수가 없었다. 의자는 욱진이 여인에게 준 독약을 거두고 욱진을 포박해 왕궁으로 끌고 와서 여인의 증언으로 사실이 다 밝혀졌다.
의자는 그런 사실을 대체 어떻게 알게 되었을까? 그는 어려서부터 민가(民家)에서 초계부인이 대신 키워졌다. 그래도 의식주만은 풍요하게 누릴 수가 있었다. 의자는 궁색하지 않을 만큼 돈을 쓸 수가 있어 일찍부터 색주가(色酒家)를 드나들며 건달들과 어울렸다. 그렇게 한 이유는 자신의 보신을 위함도 있고 팔가들의 동향을 은밀히 파악해서 부왕에게 몰래 보고하기 위함이었다. 때문에 욱진의 음모는 그물망 같은 건달들의 촉수를 벗어날 수가 없어 의자에게 보고가 되었다.
자초지종을 알게 된 좌평들은 놀라며 수긍과 탄식을 동시에 흘려냈다. 왕궁의 수비병은 이제 국왕에게 장악되어 진도를 추종하는 좌평들은 얼굴이 노래졌다. 자신들의 반발이 생사여탈권을 쥔 국왕에게서 어떻게 나타날지 그 결과도 어떻게 벌어지게 될지 몰라 숨들을 죽여야만 했다.
의자는 주막에서 가져온 술병을 따른 술을 욱진에게 또 권했다.
"욱진, 술잔을 들고 마셔봐라."
욱진은 고개를 떨군 채 술을 마시려 하지 않았다.
"누구의 지시를 받고 독을 탄 술을 방두에게 먹이려 했는가?"
욱진은 진도 쪽을 외면한 채 한참을 주저하다 겨우 입을 떼었다.
"저는 내신좌평님의 지시를 따랐을 뿐입니다."
"방두를 죽여야 할 이유는 무엇인가?"
"가잠성 출병 후 신은 먼저 수비병들을 장악하게 되었습니다."
욱진의 대답에 진도는 몸을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
"욱진, 진도는 부인을 할 것인데 네가 다 밝혀라. 수비병을 장악한 뒤 우마코의 병력이 도착하면 너는 어떤 임무를 수행하게 되었는가?"
욱진은 차마 대답을 못하는데 의자가 추궁에 나섰다.
"욱진, 그대의 죽음은 내가 막아준다. 차마 대답을 할 수가 없으면 내 말을 듣고 맞을 땐 고개를 끄덕이고 틀릴 땐 고개를 저어라. 진도는 폐하를 옥좌에서 밀어내고 자신이 그 자리를 차지하려고 들지 않았는가?"
의자의 말에 욱진은 고개만 끄덕였다.
"그런 일을 돕는 임무로 어떤 대가를 받게 되는가?"
"죽어 마땅할 자가 뭘 더 숨기겠습니까? 위사좌평입니다."
의자는 그 대답을 듣고 병사들에게 모두를 끌고 나가도록 명령했다. 잠자코 있던 국왕은 비로소 무겁게 입을 떼었다.
"짐은 이제부터 좌평들의 말을 듣겠다."
국왕의 말에 좌평들은 모두 바닥에 이마를 처박고 울부짖었다.
"폐하, 신등에게 합당한 처분을 내리옵소서."
"역적, 진도를 당장 처형하옵소서."
좌평들은 모두가 독안에 든 쥐와 다름없게 되었다. 모두는 스스로 죄를 청함으로써 진도의 반역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해다. 그것은 일순간에 왕권의 강화와 진도의 죽음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폐하, 신의 목숨을 거머쥐었다고 지나친 자만은 아직은 이르오."
죽게 된 진도는 일말의 기대감 속에 허세를 부렸다.
"짐이 자만을 하기엔 이르다니 왜 그렇단 말인가?"
"오늘 당도하게 될 우마코 대신의 병력은 2천여 명이요. 왕궁 수비병은 1천에 불과한데 왜국의 2천 병력을 막기가 어려울 것이요. 이 몸은 그 전에 죽음을 면치 못하겠지만 폐하도 무사하진 못할 것이요."
"진도, 이제야 모든 걸 실토하려는가? 너는 가잠성 출병을 위해 팔가들의 사병을 전부 내놓게 닦달을 했다. 그 이유는 사비성도 텅 비게 만들어 짐의 목숨을 노릴 목적이었다. 그러나 너무도 허술한 계책이었다."
"폐하, 너무도 허술한 계책이라니 그건 무슨 소리요?"
"우마코 대신이 2천 병력을 보내지만 쇼토쿠 섭정도 짐을 지원할 2천 병력을 목돈의 선단에 태워서 은밀히 뒤쫓아 온다. 우마코의 병력이 왕궁 공격에 나서면 충돌이 곧 벌어질 것이니 너는 두고 봐라."
국왕의 말에 진도는 너무도 놀라 더는 입을 떼지 못했다. 좌평들도 진도와 연계된 자와 그렇지 않은 자들 간의 반응이 확연히 갈렸다. 국왕은 그런 기색들을 살피면서 또 입을 열었다.
"진도, 이렇게 된 원인이 어디에 있는지 짐작이 가는가?"
국왕의 질문에 진도를 뺀 좌평들은 고개만 주억거렸다.
"진도는 백제의 반역자이고 우마코는 왜국의 왕위를 넘보는 반역자다. 우마코는 신라 침공을 빙자해 축자주에 집결시켰고, 그중 일부 병력을 빼돌려 진도를 지원하는 것이다. 그 목적은 진도에게 도움을 주고 자신도 나중에 도움을 받으려는데 있다. 그렇지만 백제와 왜국 왕실의 유대는 보통 두텁지가 않다. 쇼토쿠는 늘 우마코를 감시해서 진도의 음모를 파악해선 짐에게 알려 왔다. 쇼토쿠가 짐을 지원할 병력을 보내는 것은 하등 이상할 게 없는 일임은 좌평들도 모두 잘 아는 일이 아니가?"
좌평들은 그 말을 듣고 모든 상황은 끝났다고 보았다. 그런 분위기 속에 국왕은 평소와 다르게 위엄을 세웠다.
"의자는 진도의 반역을 진압시킨 일등 공신이고, 목돈은 2등 공신이다. 짐은 목돈을 상좌평에 임명하고 의자는 위사좌평에 임명해서 왕궁 수비병을 총 지휘하는 임무를 맡기겠다."
국왕의 말에 좌평들은 찍 소리도 없이 모두 수긍하는 태도를 보였다.
"짐은 반역자 진도를 투옥시키고 처분은 나중에 내리겠다."
국왕의 말이 떨어지자 병사들에 의해 진도는 끌려 나갔다.
"짐은 이제부터 왜국 병력들끼리 일을 해결하는 일만 지켜보겠다. 좌평들은 각자 정해진 숙소로 돌아가서 근신하며 대기하라."
좌평들은 국왕의 명령에 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신등은 폐하의 명을 받들겠습니다."
국왕은 좌평들이 물러나자 심호흡을 하는데 의자가 입을 열었다.
"폐하, 곧 왜국 병력이 도착하게 됩니다. 신은 출동하겠습니다."
"오냐, 이제부터 너는 짐을 대신해 계획을 차질 없이 수행하라."
의자는 수비병 5백을 이끌고 출동했다. 포구에 이르자 진도의 선단이 도착하고 있었다. 호쯔미는 진도의 병력이 마중 나온 걸로 여겼다. 그러나 뜻밖에 의자 왕자가 눈에 띄자 이상하게 여기며 혼자서 하선했다.
"의자 왕자께서 접대를 해주시다니 영광입니다."
"나는 접대를 하러 나온 게 아니고 통고를 하고자 나왔소."
"왕자님, 제게 무슨 통고를 하시렵니까?"
"호쯔미님은 배에 병력을 싣고 왔소. 그러나 반역자 진도를 돕는 일은 할 수가 없게 되었소."
"왕자님이 포구로 나오신 이유는 상륙을 막으려는 데 있습니까?"
"아니요."
의자는 대답하고 바다를 가리켰다.
"마침 쇼토쿠 섭정이 보낸 병력도 곧 도착하게 되었소."
호쯔미는 고개를 돌리다가 표정이 굳어들었다. 오는 동안에 웬 대 선단이 뒤를 쫓고 있음을 알았지만 그게 쇼토쿠의 병력일 줄은 몰랐다.
"반역자 진도는 이미 체포되어 처형을 기다리고 있소."
"지금 진도 상좌평이 체포되었다는 말씀을 하셨습니까?"
"그렇소, 내 말이 미덥지 않으면 갇혀 있는 감옥으로 함께 갑시다."
호쯔미는 대꾸를 못했고 의자는 준엄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폐하께선 왜국과 우호관계를 매우 중요시하오. 그런데 이런 일이 생기다니 너무도 참담한 심경이라 식음을 전폐하고 계시오. 그럼에도 호쯔미님은 병력을 상륙시켜 왕궁을 공격한다면 어떤 일이 일어나게 되겠소? 쇼토쿠님의 병력에 의해 저지를 당하는 일전은 불가피해지고 유혈 충돌이 일어날 것이요. 이 대로 회항을 하면 어떻겠소?"
"왕좌님의 말씀을 잘 알아듣겠습니다. 이대로 회군을 하겠습니다."
사세판단이 빠른 호쯔미는 대답하고 주저 없이 다시 배에 올랐다. 그리고 회군에 들어가자 따라온 쇼토쿠의 선단도 따라서 회항했다.
의자는 왜국 병력을 돌려보내고 궁궐로 다시 들어갔다. 국왕은 좌평들을 다시 불러 모은 뒤 의자의 보고를 듣게 했다. 좌평들은 그에 대해 아무런 말을 못하는데 목돈이 입을 열었다.
"폐하, 이젠 역적 진도를 처분할 차례입니다. 당장 목을 베소서."
목돈의 건의에 국왕은 고개를 저었다.
"짐은 관대한 처분을 내리려 진도와 가족들은 왜국으로 추방한다."
좌평들은 그 말에 머리를 바닥에 처박으며 이구동성으로 외쳤다.
"폐하, 신등은 너그러우신 처분에 감복하며 충성을 맹세합니다."
국왕은 말없이 고개만 끄덕여 보였다. 진도를 처형하면 우마코와 관계를 악화될 수밖에 없었다. 그건 국익에 도움이 되지 않을 일이었다. 차라리 진도를 살려 추방하고 그의 선박과 재산을 몰수하기로 했다. 그것을 의자에게 주어 직접 외국과 교역을 시키면 왕실의 재정을 획기적으로 늘릴 수가 있다는 판단이었다.
의자는 부왕의 속셈을 알고 있음으로 회심의 미소만 머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