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쇠나라 14. 가잠성

14. 가잠성

by 정완기

14. 가잠성(椵岑城)

어느덧 계절은 초가을로 접어들고 있었다.

찬덕은 성의 병력을 동원해 북문 밖의 야산에서 땔감 나무를 베어들이게 했다. 해론이 그 일을 도우려고 하자 양신도 따라나섰다.

"해론, 병사들이 벌목을 해서 많은 나뭇동을 성안으로 끌어들이고 있는데 성안에 있는 야장방에서 저렇게 많은 장작을 다 쓴단 말인가?"

"아버님 말씀인데 성을 방어하는 데도 장작이 쓰인다고 하셨네."

"장작으로 어떻게 성을 방어할 수가 있단 말인가?"

"장작은 땔감만이 아니고 훌륭한 방어용 무기가 된다네. 말린 장작을 성벽 위에 울타리처럼 쌓아놓고 적병들이 성벽을 넘어올 때 불을 붙이면 위력적인 방어벽을 칠 수가 있다네."

"해론, 자네 말을 듣고 보니 그럴 수도 있겠는 생각이 드네."

"나는 본 적이 없는데 아버님은 여러 번 큰 효과를 봤다고 하셨네."

두 사람이 그런 얘기를 나누는 동안에 북문에 이르렀다. 그러자 그곳을 지키고 있던 아란도가 두 사람의 앞을 가로 막았다.

"해론 낭두, 자네도 벌목에 나서려는가?"

"예, 부장님."

아란도는 턱으로 양신을 가리켰다.

"이 자도 함께 데리고 나갈 생각인가?"

"예, 부장님."

"무슨 소린가? 뭘 믿고 이 자를 데리고 밖으로 나갈 생각을 한단 말인가? 게다가 이 자는 장도까지 지녔군? 장도부터 압수해야 되겠다."

양신은 그 말에 표정이 확 굳어들었다.

"양신, 내 말을 못 알아듣는가? 장도를 이리 내놔라."

아란도가 다그쳤지만 양신은 전혀 응할 태도를 보이지 않았다. 해론이 당황해 하며 나섰다.

"부장님, 양신님은 장도를 지녀도 됩니다."

"해론, 무슨 말 같지 않은 소릴 다 하는가?"

"부장님, 장도는 전군님이 양신님에게 돌려주셨습니다."

"나도 비슷한 말을 성주님한테 들었다.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전군님의 개인적인 생각이실 뿐이다. 볼모에 지나지 않는 자가 무기를 지니는 것은 국법으로 금지된 것을 모르는가?"

아란도의 말에 양신이 무겁게 입을 떼었다.

"만약에 장도를 강제로 뺏으려고 드신다면 가만히 있지 않겠습니다."

양신의 단호한 말에 아란도는 좀 찔끔하다가 이내 눈을 부릅떴다.

"지금 뭐라고 했는가? 가만히 있지 않겠다고? 이 자가 눈에 뵈는 게 없는 모양인가? 성주님이 감싸 주니까 제멋대로 하려고 드는군?"

아란도는 이죽거리듯 말했으나 상대방의 검술 실력을 잘 알기 때문에 실력행사로 들어갈 마음을 먹을 순 없었다. 해론은 위기에 몰린 양신을 위해 적극 변호를 해야 만 했다.

"아란도 부장님, 저는 이런 말씀은 드리고 싶진 않았습니다. 그러나 어쩔 수 없이 밝혀야 하겠습니다. 전군님은 이런 일이 생길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셨던지 양신님에게 장도를 돌려주시면서 특별히 당부를 하신 말씀이 있으십니다."

"전군님이 무슨 당부를 하셨단 말인가?"

"어떤 경우에도 장도를 남에게 절대로 넘기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장도를 남에게 넘기지 말라고? 전군님이 왜 그런 말씀을 하신단 말인가? 그렇다고 해도 나로선 국법에 따라 장도를 압수할 수밖에 없다."

아란도가 강박하는 태도로 나갔지만 양신은 강하게 대꾸했다.

"나는 서라벌로 돌아갈 때까진 장도를 결코 내놓을 수가 없습니다."

"이제 보니 이 자는 제 정신이 아닌 자였군? 나는 네가 도주할 우려가 큰 자로 보고 있다. 때문에 사전 방지로 취하는 조치이다."

아란도가 강경한 태도만 보이자 양신의 입에서 뜻밖의 말이 나왔다.

"제가 도망을 칠까봐 그러시나 그런 걱정은 하지 마십시오."

"도망을 치지 않겠다고? 그 말을 어떻게 믿는단 말인가?"

아란도가 비웃음을 띄자 양신은 무거운 음성으로 대답했다.

"신라의 화랑도는 신의가 강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화랑도인 해론님은 불이익을 감수하면서까지 절 지금까지 보호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그런 해론님에게 어찌 누를 끼칠 수가 있겠습니까? 저 역시 고구려인으로 긍지를 더럽히지 않게 한번 내뱉은 말은 지킬 것입니다."

아란도는 그 말에 묘한 표정이 되었다. 그는 상대의 강하고 의연한 태도 앞에 더 이상 자극은 삼가는 게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곧 끌려가서 죽음을 자에게 굳이 긁어 부스럼을 만들 필요는 없는 일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이틀 전 신주정으로 떠난 보급 대 편에 양신을 압송해 갈 병력 지원을 요청해 두었다. 그 이유는 양신을 압송하는데 성주가 협조를 하지 않을지도 모르겠다는 우려 때문에 신주정 병력이 올 때까진 감시만 잘 하기로 마음을 고쳐먹었다.

사흘 뒤 신주정에서 급파한 1백여 병력이 가잠성에 들어왔다. 아란도는 자신이 거느릴 병력이 생기자 태도가 확 달라졌다. 그때부터 다시 눈초리가 달라져 양신 또한 어떤 위기의식을 느끼게 되었다.

찬덕도 신주정 병력이 들어오자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야장방의 야좌인 개지(介只)를 불렀다. 두 사람 간에 무슨 의논을 했는지 양신의 거처를 개지의 집으로 옮기는 조치가 취해졌다.

가잠성의 야장방은 본래 고구려가 만든 것이었다. 철산지를 차지할 목적에 남방으로 영토를 확장한 뒤 중원경(中原京)을 설치했다. 그리고 가잠성을 축조한 뒤 야장들을 이주시켰다. 그러나 신라는 진흥왕 때 중원경을 점령했고 그때부터 가잠성의 야장들은 신라 백성이 되었다. 그런 연유 때문인지 야장들은 양신에게 친근성을 보였다.

개지는 양신의 사정을 알게 되자 걱정이 되었다. 더욱이 신주정으로 끌려가면 목숨을 잃게 됨을 알아서 양신의 가잠성 탈출을 도울 마음에 성주에게 적극 협조하는 태도를 보였다.

저녁에 해론은 양신을 야장촌으로 데려가면서 말했다.

"양신, 오늘 밤엔 성벽을 넘어 여길 떠나야 하네."

양신도 해론이 갑자기 꺼낸 말에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서라벌에서 봤던 아란도가 가잠성에 나타나면서 왠지 모를 불안감이 일었다. 그런데 숙소마저 옮기자 아예 밀두도를 몸에서 떼어놓질 않았다.

"양신, 날 위해서라도 꼭 성을 나가야만 하네. 알겠는가?"

해론은 그런 말을 한 번 더 다짐하고 야장촌을 떠났다.

양신은 그럴 경우 해론과 부친이 걱정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성을 나갈 마음을 정하고 저녁을 먹은 뒤 잠자리에 들었다. 밤 한 밤중에 단행할 결심을 하고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깜박 잠이 들었다.

새벽녘인 듯싶었다.

양신은 눈이 번쩍 뜨였다. 어디선가 함성 같은 소리가 아련히 들려왔다. 자기도 모르게 벌떡 몸을 벌떡 일으켜 등에 멘 밀두도를 확인한 뒤에 잠긴 방문을 조금 열고 밖을 내다보았다.

그때 개지가 방문 밖 쪽마루에 앉아 있는 게 보였다. 그는 밤중에도 아란도가 양신을 해치러 올지 몰라 망을 보고 있었다. 개지는 등 뒤의 인기척을 느낀 듯 몸을 일으켜 세웠다.

가까운 곳에서 무슨 소리가 들리자 개지는 급히 마당으로 내려가 대문 쪽으로 다가들었다. 양신도 동시에 방에서 나왔다. 그때 한 떼의 병사들이 대문 밖을 지나 어디로 황황히 사라졌다.

조금 있다가 병사들이 또 지나가자 개지가 물었다.

"무슨 일이 일어났소?"

"백제군이 침공했소."

병사 하나가 씹어뱉듯 던진 말에 양신은 귀가 뻔쩍 뜨였다. 순간 까닭 모를 반가움 같은 게 일었지만 이내 후회가 일었다. 왜냐하면 잠이 들어서 탈출을 못했기 때문이었다.

양신은 한 밤중에 탈출을 했어야만 했다. 그런데 백제군에 쳐들어 와서 또 갇히게 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병사들이 성벽으로 올라가는 상황이라 탈출이 불가능해져 자책감에 사로잡혔다.

그때 병사 하나가 대문 안으로 뛰어들었다.

"야좌님 댁에 고구려인이 있습니까? 이름은 양신이라고 하오. 만약에 있다면 빨리 나와서 나를 따라 함께 갑시다."

개지는 병사를 의심하면서 물었다.

"무슨 일로 그런단 말이요?"

해론 낭두님이 빨리 데려오라고 하셨습니다."

"해론 낭두가? 백제군이 쳐들어 온 마당에 군인도 아닌 사람을 그것도 고구려인을 어디로 데려간단 말이요?"

양신도 반신반의로 자신을 데려가려는 병사의 얼굴을 쳐다봤다. 해론이 보냈을 수도 있고 아란도가 보낼 수도 있어 함부로 움직일 수가 없는데 병사는 개지에게 양신을 가리키며 물었다.

"야좌님, 혹시 이 사람이 고구려인이오?"

개지는 짧게 대꾸했다.

"그렇소만."

병사는 이번엔 양신에게 재촉했다.

"고구려인은 얼른 날 따라 나서오."

병사는 앞장을 서려다 뒤를 다시 돌아다보았다. 양신이 그 자리에서 움쩍도 하질 않자 또 재촉을 했다.

"날 의심하는 모양인데 해론 낭두는 이런 말도 했소."

"해론 낭두가 무슨 말을 했다는 말씀이요?"

"고구려인이 없으면 다행이고, 행여 그대로 있다면 매우 위험하다. 그러므로 자기 곁에 두게 하려는 것이니 의심을 하지 말라고 했소."

때마침 멀리서 아련히 들려오던 함성 소리가 점점 커지고 있었다. 야장들도 모두 집밖으로 뛰쳐나왔다. 매우 어수선해진 분위기 속에 양신은 어쩔 수가 없다는 듯 개지에게 말했다.

"일단 따라가 보겠습니다. 야좌님도 동행해 주시겠습니까?"

"물론이요."

양신과 개지는 병사를 따라 나섰다. 그러자 일부 야장들도 서로 눈짓을 나누고 따라붙었다. 모두는 침묵 속에서 양신을 보호해 주겠다는 결의에 찬 눈빛들을 드러내 보이고 있었다.

화살들이 어두운 새벽하늘을 뚫고 성 안으로 날아들었다. 밤하늘을 날아온 화살들이 여기저기에 꽂히는 가운데 성병들은 위험 속에서 정신없이 이리 뛰고 저리 뛰고 있었다.

일행이 남문에 가까워질수록 더욱 소란스러웠다. 하늘은 이미 어둠이 조금씩 걷히고 있었다. 우중충해 보이는 남문의 문루 위에선 장수들이 병졸들을 지휘하느라 무어라 외쳐대고 있었다.

장수들은 째지는 음성으로 무슨 지시를 내렸고 명을 받은 병졸들은 사방으로 흩어져 나갔다. 그런가 하면 어디로부터 달려온 병졸들은 장수에게 급하게 무슨 보고를 했다.

그때 어수선한 남문의 문루 위에서 해론이 외쳤다.

"양신, 이리로 올라오게."

개지는 그제야 안심이 된다는 듯 양신의 손을 놓았다. 그리고 야장들을 데리고 오던 길을 급히 되돌아갔다. 양신은 혼자서 문루로 올라가면서 해론에게 말했다.

"해론, 자네가 부른다기에 왔네."

해론은 다가드는 양신에게 나직이 말했다.

"이 고지식한 사람아. 지금까지 뭘 하고 있었나? 어제 밤에 그렇게 빠져나가라고 일렀건만 왜 여직까지 여기서 어정대고 있단 말인가?"

"깜박 잠이 들고 말았네. 눈을 뜨니 새벽이었네. 그러나 인명은 재천이라고 하지 않는가? 내 앞일은 운명에 맡길 수밖에 없다는 생각일세."

양신은 해론에게 미안함과 동시에 고마움을 느꼈다. 성을 빠져나가지 못해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 걱정과 후회가 되었다. 그러나 한편으론 잘 되었다는 생각도 들었다. 만약에 탈출을 했더라면 크게 부끄러울 짓이었다. 아란도에게 신의를 쳐들며 탈출하지 않겠다고 말하고 딴 짓을 할 사람이 되었을 뻔했기 때문이다. 또 탈출할 경우 성주와 해론이 어려움에 빠지게 될지도 몰랐다. 지금까지 자신을 잘 보살펴 준 사람들에 대한 도리가 아니고 비겁한 짓을 않게 된 것을 다행으로 여겼다.

"해론, 어찌 되었건 나로선 자넬 배신하지 않은 것만도 다행일세."

"뭐가 다행이란 말인가? 앞으론 내 곁에서 절대로 떨어지지 말게."

양신은 고개만 끄덕이고 여명이 밝아오는 성 밖으로 눈길을 돌렸다. 아직은 어슴푸레한 시야 속으로 사물들을 제대로 구별할 수가 없음에도 멀리 들판 끝을 뒤덮은 무수한 깃발들이 희미하게 드러나고 있었다.

양신이 물었다.

"해론, 백제군의 군세가 어느 정도인지 아는가?"

"방금 전에 돌아온 척후병은 만여 명에 가깝다는 보고를 했네."

"그렇다면 대단한 군세가 아닌가?"

"나는 전선은 처음 서봐서 잘 모르겠네. 그런데 아버님의 표정이 매우 심각하신 걸 보면 큰 위기에 직면했음은 틀림없다는 생각일세."

"해론, 가잠성의 군세는 얼마나 되는가?"

"천여 명에 불과한데 어제 새로 1백여 명이 보태졌네."

"나는 잘 모를 일이나 그렇다면 매우 불리한 상황이 아닌가?"

양신의 말에 해론은 한숨을 흘려냈다.

"아버님은 아무래도 백제군이 무슨 낌새를 채고 들이닥친 것 같다는 말씀을 하셨네. 때문에 성의 방어가 쉽지가 않겠다는 걱정도 하셨네."

해론은 말하고 무슨 생각을 했는지 양신의 팔을 잡고 끌었다. 그리고 구석에 있는 수문장의 집무실로 들어갔다. 그곳에 놓인 책상에 앉더니 붓을 들고 종이에 큰 글씨로 썼다.

"해론, 뭘 쓰고 있는가?"

양신의 질문에 해론은 성 밖을 가리켰다.

"양신, 자넨 지금이라도 성을 나가야만 하네. 가만히 있으면 안돼."

"이런 상황 속에 내가 어떻게 성을 나갈 수가 있단 말인가?"

"나는 백제군에 이 성안에 고구려 사람이 있는 걸 알리려고 하네."

"알려서 어쩌려고?"

"자네가 성을 나가면 해치지 말라는 말을 쓰겠네."

"해론, 내 걱정은 그만하고 성을 방어하는 일에나 힘을 쓰게."

"양신, 자넨 신주정에서 1백여 병력이 온 이유를 모르고 있네. 아란도 부장은 자넬 체포해 신주정으로 끌고 갈 병력을 요청해서 온 걸세. 그러므로 지금이라도 성을 빠져나가야지 죽음을 면할 수가 있네."

"해론, 자네가 지금 한 말이 사실인가?"

"양신, 사실이 아니면? 살고 싶으면 내 말대로 하게."

해론은 자신이 쓴 내용을 양신에게 나직이 읽었다.

"가잠성에 고구려인이 있다. 다갈촌 야장방의 야좌인 양신이다. 고구려인은 금년 다갈촌 검술대회에 참가했던 계백이란 백제인을 찾으려고 한다. 해치지 말고 계백님을 찾을 수 있게 편의를 봐 달라."

해론이 그런 내용을 적은 종이를 화살대에 매는데 무덕이 들어왔다.

"해론 낭두, 그게 뭔가?"

"백제군이 쳐들어 온 이유가 무엇인지 따지는 글을 썼습니다."

해론이 둘러대자 무덕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이었다.

"머리에 문자가 들면 근심이 많다더니 글을 배운 자의 딱함이란!"

"수문장님, 아무리 전쟁이라고 해도 침략을 한 이유를 물을 수가 있지 않습니까? 그렇게 해서라도 백제군을 준엄하게 따질 것입니다."

무덕은 씁쓸히 웃고 도로 밖으로 나가버렸다. 해론도 양신과 함께 밖으로 나온 뒤 종이를 묶은 화살을 활시위에 걸고 전방으로 겨누었다.

"해론, 그걸 백제군 진지로 쏘면 무슨 효과를 볼 수가 있을까?"

양신의 질문을 듣고 해론은 대꾸를 않고 활시위를 힘껏 당겼다. 화살은 퓽 소릴 남기고 백제군 쪽으로 향해 길게 날아갔다.

"양신, 이제부턴 아무 때건 기회만 생기면 성을 나가야 만하네. 자넨 고구려인이라 백제군이 해칠 이유가 없으니 주저할 게 하나도 없네."

해론이 속삭이듯 말했지만 양신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성 밖을 한참 내다보다가 먼 전방의 한 곳을 가리켰다.

"해론, 저기서 한 떼의 기병들이 달려오고 있네. 백제군 맞지?"

"백제 기병들이 아까부터 멀리서 원을 그리듯 성 주변을 돌고 있었네. 아마도 성을 완전히 포위했음을 알리고 시위를 벌이는 것 같네."

이젠 해가 떠올라 문루 주위가 완전히 훤해진 가운데 십여 명의 백제군 기병들이 접근해 들었다. 성벽의 신라군은 적을 주시하기만 했다.

백제군 기병들은 상당한 거리를 두고 멈춘 뒤 남문의 문루를 향해 일제히 화살을 날렸다. 날아든 화살들은 문루에 박히면서 우박이 쏟아지는 듯한 소리가 일어났다.

"백제군이 저렇게 공격을 하는데 신라군은 왜 응전하지 않는가?"

양신의 질문에 해론은 쓴 웃음을 머금었다.

"저건 백제군이 공격을 개시하겠다는 신호를 보내려는 것일세. 본격적인 공격을 받을 때까진 우린 화살을 아끼지 않으면 안 되네."

"그런가? 그런데 화살을 아낀다는 건 무슨 소린가?"

"우린 포위를 당한 데다 화살까지 거의 바닥이 난 상태일세."

해론은 대답하고 성안의 사정을 털어놓았다. 근래 신주정 군단에서 양곡과 무기를 다 긁어 갔기 때문이라고 알렸다. 양신은 그런 설명을 듣고 남의 일 같지가 않아 걱정이 되었다.

"해론, 그렇다면 문제가 여간 심각하지 않군?"

"아버님은 전쟁에서 첩자들의 역할이 얼마나 큰 것임을 새삼 실감하게 되었다고 하셨네. 즉 백제군은 우리 성의 물자가 바닥난 것까지 알아내고 침공을 해온 게 분명하다는 말씀도 하셨네."

"백제 첩자들이 그런 사정까지 알아내고 침공을 했단 말인가?"

"아버님은 적이 우리 성안의 내부 사정을 샅샅이 꿰뚫어 파악한 뒤 대군세로 밀어붙인 것이므로 사태가 여간 심각하지 않다고 하셨네."

"해론, 신라도 원군을 보낼 것이니 그때까지 버티면 되지 않겠나?"

"아버님 말씀으론 이번엔 원군을 기대하기가 어렵다는 판단이실세. 왜냐하면 지금 신주정 군은 옴짝달싹할 수가 없게 된 상황일세. 거기다 얼마 안 되는 우리 성의 기병들마저 신주정 군이 차출해 갔네."

"왜 그렇게 되었단 말인가?"

"고구려 군이 움직였다고 하네. 그 동태가 여간 심상치가 않다네."

"그건 고구려가 쳐들어 올 태세를 보였다는 말인가?"

"그럴세. 신주정 쪽도 전쟁 발발 일보 직전의 상황이라네."

"그러면 다른 데서 원병을 기대할 수도 있지 않은가?"

"천상 먼 남쪽에서 올라 올 원병을 기대를 걸어야 하네. 그러나 밀어닥친 백제 군세가 너무 커 버텨낼 시간을 벌 수가 있을지도 의문일세."

양신과 해론이 그런 얘기를 나누고 있는데 갑자기 문루 밑이 어수선해지고 아란도가 외치는 소리가 일어났다.

"고구려인 양신은 문루에서 내려오라."

아란도는 신주정에서 보낸 100여명의 병력을 끌고 와서 외쳤다.

양신은 자신을 올려다보는 아란도와 눈길을 마주쳤다. 상대의 독을 품은 눈길에서 전율 같은 것을 느꼈다. 문득 막판으로 접어들었다는 위기의식이 전신을 휩싸고 들었다.

아란도는 다시 외쳤다.

"해론 낭두, 내 말을 잘 들어라. 듣지 않으면 큰 벌을 받게 된다. 고구려인을 당장 밑으로 내려 보내지 않으면 내가 직접 올라가겠다."

해론은 아란도의 말에 착잡한 표정으로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러자 양신이 한 걸음 썩 나섰다. 죽을 때 죽더라도 비굴한 태도를 보이지 않겠다는 비장한 각오로 아래에 대고 외쳤다.

"나는 내려가지 않겠소."

아란도는 양신의 대꾸에 더욱 험악한 표정으로 협박을 했다.

"순순히 내려오지 않으면 올라가서 널 끌어내리겠다."

"아무 잘못도 없는 날 뭣 때문에 끌어내린단 말이요? 나는 살생을 저지르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사람이요. 그러나 순순히 당하진 않겠소. 이제부턴 누구든 간에 강제로 체포하려고 드는 자는 가만 두지 않겠소."

아란도는 병사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당장 쫓아올라가 저 자를 끌어내려라."

병사들이 칼을 빼어들고 곧장 움직이려고 하자 양신도 마주 칼을 빼들었다. 그야말로 일촉즉발의 사태가 벌어질 찰라 멀리서 찬덕이 말을 타고 달려오며 큰 소리로 외쳤다.

"아란도, 멈추어라."

병사들은 누각으로 오르려다 성주를 돌아보고 동작을 멈추었다.

찬덕은 합개로부터 아란도가 병력을 끌고 남문으로 갔다는 보고를 받고 급히 달려온 것이다. 그는 문루 밑에 이르자 말에서 뛰어내린 뒤 아란도 앞으로 다가들며 꾸짖었다.

"아란도, 적의 침공을 당한 마당에 무슨 짓거린가? 고구려인은 내 책임 하에 있다. 앞으로 신주정 병력도 내 휘하에 두겠다. 아란도는 지금부터 보급창고로 가서 합개를 도와라."

"소장은 성주님의 부하가 아닙니다."

"아란도, 이 성안에선 누구건 간에 내 명령을 따라야만 한다. 따르지 않는 자는 군법으로 다스릴 것이다."

"소장은 성주님의 명령을 따를 수가 없습니다."

아란도가 계속 반발하자 찬덕은 수문장에게 명령했다.

"무덕, 이 자를 체포해서 옥에 가두어라."

"예, 성주님."

수문장은 즉각 부하들을 시켜 아란도를 포박해 버렸다. 아란도는 강제로 끌려가면서 찬덕에게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성주님, 이러시면 나중에 크게 후회하게 됩니다."

찬덕은 못 들은 척 문루로 올라가서 양신에게 다가들었다.

"양신, 안심하게."

"성주님, 죄송합니다."

양신은 아직도 겁먹은 표정을 풀지 못하고 있었다. 찬덕은 그런 그의 어깨를 툭 치면서 말했다.

"자넨 공교롭게도 남의 나라 전쟁터에 서게 되었군? 허나 전쟁이란 게 어떤 것인지 사나이로 한번 겪어 보는 경험도 좋지. 앞으론 해론 곁에서 절대로 떨어져 있지 말 것도 당부해 두겠네."

"성주님 말씀대로 하겠습니다."

찬덕은 갑자기 껄껄 웃었다. 심각한 사태 속에서도 일부러 의기소침한 장수와 병사들에게 여유 있는 태도를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곧 벌어질 전투를 감당해야 할 일로 속은 타들어갔다.

"장병들은 들어라. 백제군은 곧 공격을 개시할 것이다. 적이 성벽을 기어오를 때까진 한 대의 화살도 헛되이 날리지 말라. 부득이 쏠 때는 적병을 명중시켜야 한다. 이번에 침공한 백제군은 병력도 많고 더욱이 적장은 야전의 귀재로 소문난 자이다. 적진에 펼쳐 세운 공성기들을 보면 만반의 준비를 하고 밀어닥친 병력임을 알 수가 있다. 그러나 적이 아무리 강한들 우린 적절한 전술을 쓰면 충분히 막을 수가 있다. 우린 싸우면 언제나 승리한 최강의 전사들이므로 기가 죽을 게 없다."

찬덕은 일장 연설을 마치고 문루에서 내려가 성청 쪽으로 향했다. 잠시 벌어진 소동으로 어리둥절했던 성병들도 각자 위치를 지켰다. 그런 가운데 무덕이 양신과 해론 앞으로 다가들었다.

"고구려인 양신, 나도 그대의 사정을 들어서 대강 알고 있네. 해론 낭두는 화랑도의 신의와 명예를 지켰고 양신도 고구려인의 긍지를 지켜내는 것을 보면서 나는 두 사람을 다 같이 참다운 사나이들로 생각한다."

그때 병사 하나가 달려와서 외쳤다.

"수문장님, 적진에서 원수기를 세웠습니다."

모두는 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백제군 진영에 세운 깃대에 단 큰 깃발이 바람에 휘날리고 있었다. 백제국 병마총관 백기란 글자까지 알아 볼 수가 있었다.

"해론 낭두, 적의 깃발에 뭐라고 쓰였나?"

글자를 못 읽는 무덕이 해론에게 물었다.

"백제국 병마총관 백기라고 쓰였습니다."

"적장이 백기란 말인가?"

무덕의 안색이 좀 굳어들고 있었다. 해론은 원수 깃발 옆에 세워진 또 다른 깃발의 글씨도 읽었다.

"또 다른 깃발엔 부장 목등이라고 쓰였습니다."

"목등까지 왔단 말인가? 골치 아픈 자들이 짝을 지어 왔군!"

"수문장님, 왜 골치 아픈 자들이라고 하십니까?"

"백제엔 무문이 많고 무술을 연마하는 젊은이가 많다. 그 중에서 백가와 목가무문은 쌍벽을 이루는 걸로 알려져 있다. 병마총관 백기는 백가무문의 문주이고, 목등은 목가무문 문주의 아들이다."

양신은 벌서부터 목등이란 깃발 밑에 서 있는 한 장수에게 눈길을 주고 있었다. 상체를 빳빳이 세우고 이쪽을 바라보는 사내는 어딘지 무술인의 범상치 않음을 드러내는 자세를 보였기 때문이다.

무덕은 혀를 끌끌 차며 투덜거렸다.

"아무래도 이번 싸움은 쉽지가 않겠는 걸!"

해론은 그러는 무덕에게 반발하듯 물었다.

"수문장님, 왜 초장부터 맥 빠질 말씀만 하십니까?"

무덕은 오랜 동안 전쟁터를 전전한 경험이 많았다. 낙천적이고 수다스러운 편이나 자신이 격은 전쟁 경험들을 말로는 제대로 설명을 할 수가 없어 중얼거리듯 대꾸했다.

"실전 경험이 없는 초짜들은 알 턱이 없는 일들이 많다."

이번엔 양신이 물었다.

"수문장님, 백제군의 목등이란 장수에 대해 아시는 게 있으십니까?"

무덕은 다시 백제 진영으로 눈길을 돌리고 한참 응시하다 대답했다.

"목등이란 자는 칼잡이로 백제에선 유명하지."

"칼잡이라니요?"

양신의 반문에 무덕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목등은 검술이 대단한 자일세. 지난해 저자는 소수의 병력을 끌고 당항성 포구에서 기습 공격을 벌였었네. 그때 벌인 전투는 소규모였지만 맞섰던 우리 병사들은 여러 명이 목숨을 잃었다."

해론이 갑자기 외쳤다.

"수문장님, 백제군 진영에서 움직임이 일어났습니다."

백제군 진영에선 창과 칼날들이 햇빛에 번쩍대기 시작했다.

"공격을 앞두고 적장이 전군의 사열을 받고 있는 것이다."

무덕의 말에 해론은 강한 불쾌감을 느꼈다.

"적장이 전쟁터에서 저런 짓거리로 힘을 과시하려고 들다니! 우리 병사들의 기를 죽이려는 수작이나 누가 떨 줄로 아는감?"

"적은 모처럼 대병력을 끌고 왔으므로 위세를 부릴 만도 하겠다. 그러나 싸움은 해봐야 안다. 해론 낭두는 전쟁터에서도 예의를 차릴 필요가 있다며 적 진영에 글을 보냈지 않나? 백제군이 답을 하려는 모양이다."

"수문장님, 백제군이 그 답례를 저렇게 크게 한다는 말씀입니까?"

"나는 농담으로 해본 말일세. 그러나 적장이 전군의 사열을 받는 데는 우리 쪽에 겁을 주기보다 고도의 심리작전을 펼치려는 의도가 있네."

"수문장님 말씀대로 저도 적이 고도의 심리작전을 펼치려는 것엔 동감이지만 아무리 허세를 피워본들 큰 소득은 없지 않겠습니까?"

"해론은 모르는 점이 있다. 고양이도 쥐를 몰 땐 도망갈 구멍을 터준다. 백제군은 항복을 권하려고 먼저 시위를 벌이려는 것이다."

"적이 항복을 권한다고 우리가 먹혀들 일이겠습니까?"

"그건 장담할 수가 없네. 변성의 병사들은 일 년에도 몇 차례씩 생사를 가늠할 긴박한 상황을 겪는다. 죽음의 그림자가 어른거리게 되면 병사들의 마음은 하루에도 번씩이나 흔들리지 않을 수가 없게 된다."

무덕은 그런 말을 하고 다시 적진으로 눈길을 돌렸다.

해론은 백제군 진영에서 자못 여유를 부리는 것에 큰 반발심이 치밀었다. 그러나 성 안의 사정을 생각하면 위축감이 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럴수록 결기를 세우게 되었다.

그때 적진으로부터 단기의 기병이 남문을 향해 흙먼지를 날리며 달려왔다. 군관으로 보이는 자는 남문 문루를 백여 보쯤 거리를 두고 멈추었다. 그리고 날린 화살이 긴 포물선을 그은 끝에 남문 기둥에 꽂혔다.

무덕은 병사가 뽑아온 화살을 받아서 해론에게 넘겼다.

"해론 낭두, 뭐라고 쓰였는지 읽어 보게."

해론은 화살대에 감긴 종이를 떼어 펴들었다.

가잠성 성주에게

가잠성은 본래 백제 땅이다. 계유년에 탈취를 당한 지 58년 만에 다시 찾으려고 한다. 성주는 금일 해가 지기 전에 성을 비우고 떠나라. 회답이 없으면 그냥 무찌르겠다.

신미(辛未) 칠월 백제국 병마총관 백기

"나는 이걸 성주님께 가져다 드리고 오겠다."

무덕은 적이 보낸 글을 들고 성청으로 달려갔다.

양신과 해론은 문루 위에서 화살을 날린 백제군 군관에게 눈을 떼지 못했다. 해론은 분노에 찬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본래부터 백제 땅이란 게 어디에 있다는 거야?"

양신은 갑자기 떨리는 음성으로 해론에게 말했다.

"해론, 방금 전 화살을 날린 백제군 기병을 자세히 봤나?"

"아니."

"나는 어딘지 낯이 매우 익다는 생각이 드네."

"낯이 익은 자라고?"

"멀리 있지만 왠지 모르게 백제의 계백님과 닮아 보여서."

"계백님을 닮았다? 나는 멀어서 잘 알아볼 수가 없는데 그럴까?"

해론은 반신반의 하는데 양신이 확신에 찬 듯 대꾸했다.

"나는 시력이 좋은 편이라 분명하게 봤네. 특히 마상에서 뻐기듯 상체를 젖히고 앉은 그 특유의 태도는 영락없이 계백님일세."

"하긴 나도 그럴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드는 걸!"

"그런데 백제에선 야장들도 전쟁터에 동원을 시키는 것일까?"

"양신, 날 봤지 않은가?"

"자넬?"

"나도 야장으로 고구려에 들어갔었는데 백제라고 그렇게 하지 않을 법은 없지 않은가? 나도 계백님을 야장으로 보지를 않았네."

양신은 고개만 끄덕이는데 해론의 음성이 커졌다.

"양신, 만약에 계백님이라면 차라리 잘 되었지 않는가? 그렇다면 자넨 오늘 밤에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 성을 꼭 빠져나가도록 하게."

해론의 말을 듣고 양신은 의외로 고개를 가로 저었다.

"나는 성주님의 말씀대로 자네 곁을 떠나지 않기로 했네."

"내 곁을 떠나지 않겠다고? 당장 성 밖으로 밀쳐내고 싶네."

양신은 그 말에 씩 웃기만 했다.

서녘 하늘이 노을로 붉게 물들어 갔다.

초가을의 들판은 노을빛 아래 익어가는 벼들이 황금색을 띠었다.

어둠이 깔려들자 백제군 진영에선 총관의 장막으로 장수들이 모여들었다. 가잠성에 일단 항복을 권했으나 기대하진 않았고 선전포고를 한 것에 지나지 않을 일이었다.

백기는 공격을 앞두고 장수들과 작전 회의를 열었다.

"오늘 밤 자정에 공격을 개시한다. 병사들은 이른 저녁을 먹고 충분히 휴식을 취하게 한다. 지금부터 방장들에겐 임무를 부여하겠다."

백기는 작성해 둔 작전 지시를 꺼냈다.

"전군 방장 목라후는 남문을 맡는다. 화공으로 문루를 불태워라."

"옛, 목라후 복명합니다."

"좌군 방장 부천은 동쪽 성벽을 맡아라. 동쪽 성벽 너머에 있는 숙소와 곡식 창고들을 석포를 쏴 전부 박살을 내버려라."

"옛, 부천 복명합니다."

"우군 방장 국지모는 서쪽 성벽을 맡는다. 그 쪽은 병기 창고가 있다. 화공으로 창고들을 전부 불태워라."

"옛, 국 국지모 복, 복명합니다."

국지모가 말을 더듬자 다른 장수들이 킥킥 거렸다. 국지모는 동료들에게 눈알을 부라리다 총관의 지시가 계속되자 자세를 바로 했다.

"후군 방장 사목은 북쪽 성벽을 맡는다. 그 쪽은 적병들의 도주로가 되게 열어 둬라. 그 대신 사주 경계를 철저히 하고 감시하라. 만약에 적의 원병이 당도한다면 그 쪽으로 진입하려고 들 것이다."

"옛, 복명합니다."

백기는 각자의 임무를 부여하고 짤막한 훈시를 했다.

"가잠성을 간단히 깰 수 있는 성으로 봐선 안 된다. 성주는 훌륭한 인품을 지닌 덕장인 데다 성병들도 만만치 않을 실전 경험을 쌓았다. 우리가 대병력이라고 자만하지 말고 최선을 다해 싸우지 않으면 안 된다."

방장들은 자기들보다 나이가 어린 목등이 부장이 되어 앞으로 지시를 받게 될 일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목등도 방장들이 자신을 아니꼽게 여기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때문에 자신의 위상을 확고하게 세울 필요성에 어깨를 더욱 펴고 계백을 돌아다보며 거만한 태도로 지시를 했다.

"계백, 가잠성의 내부 사정을 방장님들에게 보고하라."

"옛, 부장님."

계백은 앞으로 나서 큰 소리로 입을 열었다.

"첩자들이 알아낸 바로는 가잠성의 총 병력은 보병 1천명과 1백여 기의 기병이 있으나 기병들은 신주정에 차출되어 성 안에 없습니다."

목등이 그 말을 끊었다.

"부정확하다. 신주정이 보낸 보병 1백 명이 성에 새로 들어갔다."

"그렇습니다. 그렇게 되면 총 병력은 1천 1백 명이 되겠습니다."

전군 방장 목라후가 입을 열었다.

"계백, 성 안에 야장방이 있다. 그에 대한 설명도 하라."

"옛, 야장방의 야장들과 그에 딸린 가족들이 2백여 명쯤 되는 걸로 알려졌습니다. 야장들은 전투에 동원되지 않게 되었습니다."

뱁새눈의 좌군 방장인 부천이 으스대듯 자리를 둘러보며 말했다.

"계백, 좀 더 정확한 보고를 해야 한다. 나는 가잠성에 대해 자네 이상으로 알고 있다. 가잠성의 야장방은 신주정 군단의 무기 제조창 역할을 한다. 비축 무기를 두는 곳을 알고 있는가?"

"좌군 방장님, 무기 창고가 있으나 지금은 텅 비었습니다."

계백의 대답에 부천은 호통을 쳤다.

"그 따위 대답이 어디에 있나? 전투에서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건 무기다. 그런 무기를 쌓아두는 창고가 텅 비다니 무슨 소린가?"

"왜냐하면 신주정 군이 무기들을 싹 쓸어가 남은 게 없습니다."

"계백, 네가 그걸 어떻게 안다고 장담을 하는가?"

목라후가 언성을 높이자 목등이 대신 대꾸했다.

"계백의 말은 맞소. 전투가 시작되면 곧 알게 될 일이나 가잠성은 화살조차 바닥이 난 상태요. 때문에 성의 함락은 쉽게 끝낼 수가 있소."

방장들은 그런 말을 하는 목등을 건방지다고 봤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론 의외로 아는 게 많아서 내심을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부장은 그동안에 조사를 철저히 했군? 마음에 든다."

백기가 추켜세우자 으쓱해진 목등은 말을 이었다.

"가잠성은 무기뿐만 아니고 식량도 고갈 상태에 빠졌소. 열흘 전에 신주정 군단에서 성안의 양곡을 싹 쓸어간 걸로 알려졌소. 때문에 성병들은 여러 면으로 당황해 하며 사기도 크게 떨어졌을 것으로 보고 있소."

목등은 말하고 계백에게 다시 지시를 했다.

"계백, 이번엔 성안의 지형지물에 관한 설명을 하라."

"옛, 가잠성은 평지에 판축을 해서 쌓은 토성입니다. 방장님들이 보시는 바와 같이 외벽은 깎아지른 형태를 이뤘지만 내부는 다릅니다. 성안은 바닥에서 성벽 위까지 완만한 경사를 이루고 있습니다. 때문에 기병들도 성벽 위까지 말을 몰고 자유자재로 오르내릴 수가 있습니다."

부천이 또 나섰다.

"계백, 그런 설명은 하지 않아도 우린 다 알고 있다. 저 성은 짐을 실은 우마차가 성벽 꼭대기까지 자유자재로 오르내린다. 장수들도 말을 타고 성벽 위까지 오르내리면서 신속한 작전 지휘를 할 수가 있다."

목라후도 입을 열었다.

"가잠성은 성문이 네 군데나 있다. 그 중 남문만 번듯하게 문루를 세웠을 뿐이다. 나머진 우마차들이 드나드는 구멍에 불과할 정도로 작다. 다만 모든 문짝들을 철판을 씌워서 화공을 퍼부어도 끄떡도 없다."

국지모도 아는 척을 했다.

"가, 가잠성, 난, 난공불락이다. 계, 계백은 막사들 지붕을 아는가?"

그의 얼굴엔 칼을 맞은 상처가 흉하게 남아 있었다. 말을 심하게 더듬고 발음도 온전치가 못해 잘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방장님, 지붕이 없다는 게 무슨 말씀입니까?"

계백이 묻자 국지모는 불같이 화를 냈다.

"임, 임마. 건 건방지다."

국지모는 얼굴이 시뻘게진 채 설명을 하려고 했다.

"말, 말대꾸 그 그만해. 분, 분명, 지붕 안탄다."

"지붕이 안타다니 무슨 말씀이신지요?"

계백의 거듭되는 반문에 국지모는 달려 나가서 칠 기세로 눈을 부릅떴다. 백기가 얼른 두 사람 사이로 끼어들었다.

"계백, 국방장은 막사의 지붕들이 철갑으로 씌워져 있어 화공에도 타지 않고 끄덕없게 버틸 대비가 되었을 것이란 말을 하려는 것이다."

국지모는 비로소 얼굴에 희미한 웃음기를 띄었다.

"방장님, 죄송합니다. 막사와 창고는 그렇지가 않습니다."

목라후가 껄껄 웃으며 입을 열었다.

"계백, 오늘 진땀께나 빼는구나? 그 정도의 설명이면 대체로 잘한 편이다. 나머진 우리가 다 알아서 한다."

방장들은 백전노장이라 그런 말에 일제히 웃으며 동감을 표했다.

계백은 부끄러움에 얼굴을 붉히는데 백기가 입을 열었다.

"성을 공격하기 전에 먼저 주지해 둘 점이 있다."

백기는 방장들의 주목을 받으며 다시 말을 이었다.

"신라 첩자들은 우리가 가잠성을 포위한 것을 신주정이나 인근 고을에 즉각 전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곧 원군이 오게 될 것인데 어느 방향일지는 모른다. 그에 대한 대비도 철저하게 해야 할 것이다."

목등이 그 말을 받았다.

"총관님, 신주정 군이 원병을 파견하긴 어려울 것입니다. 신주정 군은 지금 한수 북방에서 고구려 군과 대치 상태로 들어갔기 때문입니다."

"부장의 추측은 맞을 수도 있고 맞지 않을 수도 있다. 매사는 불여튼튼이다. 신주정이 예상을 깨고 구원병을 보낸다면 싸움의 양태가 크게 달라진다. 그렇게 되면 아군의 작전은 어려워질 수가 있다. 가잠성의 중요성 때문에 신주정 군은 물론 다른 데서도 원병을 보낼 것이다. 특히 신주정은 고구려 군과 대치 상황일지라도 기병들을 급파할지도 모른다. 부장은 신주정의 기병 병력이 얼마나 되는지 파악을 했는가?"

목등은 어깨를 으쓱하며 자신 있게 대답했다.

"신주정은 총 1천 여 기의 기병을 보유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만약에 원병을 보낸다면 기병일 것으로 소장은 예상합니다."

"부장의 판단은 정확했다. 신주정 군이 기병 5백기만 보내도 우리의 공성작전은 큰 지장을 받을 수가 있다. 오늘 밤중이라도 들이닥칠지 모르므로 부장은 신주정의 원병에 대한 방비 임무를 맡아라."

"총관님, 소장에게 원병을 막을 임무를 맡기시겠단 말씀입니까?"

"그렇다. 부장은 오늘 저녁에 바로 북방으로 발진하라."

"총관님, 목적지를 어디로 잡으면 되겠습니까?"

"신주정 기병은 여러 갈래로 길을 잡을 수가 있다. 여기서 서북쪽 70여리 전방에 넋 고개가 있다. 적은 신속한 이동을 위해서 어느 길을 잡건 간에 넋고개를 넘게 되므로 그 밑에서 매복을 하라."

"총관님, 소장에게 얼마쯤의 병력을 내주시겠습니까?"

"5백이면 부족할까?"

"총관님, 그 정도라도 임무를 수행하겠습니다."

"부장은 당장 준비를 서둘러 이 밤으로 떠나라."

"총관님, 명령을 수행하겠습니다."

"부장은 발진할 때 주의할 점이 있다. 적의 첩자들이 우리 병력의 이동을 눈치 채지 못하게 밤이라도 은밀히 움직여야 한다."

"총관님, 소장도 청이 있습니다."

"무슨 청인가?"

"소장은 병력들 중 왕궁 수비 병력을 끌고 가게 해 주십시오."

"왕궁 수비병을 끌고 가겠다고?"

"예, 수비병을 지휘하고 싶습니다."

"좋다. 그렇게 하라. 제장들도 각자 원위치로 돌아가라."

"옛, 총관님."

장수들은 복창하고 일제히 천막을 나갔다.

백기는 계백과 단 둘만이 남게 되자 물었다.

"부관은 낮에 내게 무슨 할 말이 있다고 하지 않았는가?"

"예, 총관님."

계백은 대답하고 가잠성에서 화살에 달아 보낸 종이를 꺼냈다.

"그게 뭔가?"

"총관님, 읽어보십시오."

백기는 종이를 펼쳐 들고 읽은 뒤 좀 놀라는 표정이 되었다.

"계백, 양신이라면 고구려 다갈촌의 야좌라고 하지 않았는가?"

"예, 맞습니다."

"그가 어떻게 저 성안에 있는 야장방에 있단 말인가?"

"총관님, 그 이유를 알 수가 없으나 소관은 이번에 고구려에 가서 양신 야좌가 신라의 야장선을 탔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부관, 혹시 이 일을 주랑에게 말하지 않았는가?"

"총관님께 먼저 말씀을 드린 뒤 얘기를 할까 하는 생각입니다."

주랑은 백가면 사건 때문에 이번 출정에 끼게 되었다. 백기는 딸이 사비성에 혼자 남게 되면 목돈이 무슨 짓을 벌일지 몰라 부득이 그런 결정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계백, 주랑에겐 그 얘길 절대로 해선 안 된다."

"총관님, 말씀대로 하겠습니다."

백기는 계백의 다짐을 받았지만 불안감은 여전했다. 주랑과 계백이 진중에 함께 있으므로 자주 만날 수가 있고 그런 얘기를 나눌 수가 있다는 걱정 때문이었다. 반면에 계백은 총관이 다갈촌이나 양신에 관한 얘기가 나오면 신경을 곤두세워서 이상했다. 때문에 그러는 데는 무슨 이유가 있을 것인데 그걸 딸에게 숨기려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총관님, 왜 낭자에게 양신 관한 얘길 말라고 하십니까?"

"계백, 그렇게 만 알고 있게. 더 이상 묻지 말라. 알겠는가?"

계백은 그래도 이해가 되지 않아서 또 물었다.

"총관님, 왜 그러시는지 소관도 알았으면 합니다."

"계백, 내가 하지 말라면 그렇게 하면 되지 무슨 딴 소리가 많은가?"

백기가 버럭 꾸짖자 계백은 더는 입을 뗄 수가 없었다.

"부관, 잘 생각해 봐라. 지금 전선에 나와 있는 주랑의 심경이 오죽 심란하겠냐? 공연한 말을 해서 좋을 게 하나도 없다. 주랑이 진중에서 편히 지낼 수 있게 신경을 써주려면 내 말을 따라야 한다."

"총관님 말씀대로 하겠습니다."

"이제야 내 말을 알아듣는군? 그만 나가 보게."

백기는 계백이 밖으로 내보내고 혼자서 고민에 빠졌다. 여준의 양자라는 자가 하필이면 왜 가잠성에 있단 말인가? 그걸 주랑이 알게 되면 여간 큰일이고 불안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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