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쇠나라 15. 공방전

15. 공방전

by 정완기

15. 공방전(攻防戰)



바람기도 없는 저녁 하늘에 어둠이 깔렸다.

가잠성을 포위한 백제군은 날이 어두워지자 첫 공격을 개시했다. 불화살과 석포(石砲)를 성안으로 쐈다. 화살대에 유황(硫黃) 가루를 채워 넣었기 때문에 불화살이 꽂힌 데마다 불이 붙었다.

밤하늘에 수를 놓듯 무수한 불화살이 쏟아져 들자 성 안은 큰 피해를 당했다. 특히 남문의 문루에 집중되는 불화살로 성한 데가 없이 흉물로 변하게 되었다. 불화살은 어둠마저 걷히게 만들고 쏟아지는 돌을 맞고 쓰러지는 성병들이 속출했다.

석포는 주로 가잠성의 막사와 창고들을 겨냥했다. 막사와 창고들은 돌에 맞아 지붕에 구멍이 뚫리고 부서졌다. 성병들은 불길을 잡으려고 물을 퍼다 끼얹기도 했지만 불을 막으랴 돌을 피하랴 정신을 차릴 수가 없다가 나중엔 포기 상태가 되고 말았다.

백제군은 한 식경 가량의 공격을 가한 뒤 끝냈다.

성주는 적의 공격이 그치자 성안의 피해 상황을 살피러 돌아다녔다. 모든 시설물들이 적잖은 파괴를 당하고 말았다. 무슨 대책을 세울 방도가 없어 그저 참담할 뿐이었다.

"병사들은 적이 쏘아 댄 돌들을 주워 성벽 위로 옮기게 하라."

찬덕은 고작 그런 지시나 할 뿐이었다. 성 안에서 보유하고 있는 화살이 워낙에 적어 돌이라도 무기 대용으로 쓸 생각이었다. 병사들도 그걸 알아서 돌들을 열심히 주워 모았다.

이튿날도 백제군은 전일과 같은 시간에 또 공격을 가했다.

낮 동안은 잠잠히 있다가 날이 어두워지면 불화살과 석포로 되풀이 쳐대었다. 성 안의 막사와 창고들은 부서짐이 심화되었다. 성병들은 공격이 끝나면 부서진 데를 고치기보다 돌이나 주워 모았다.

그 같은 공격을 사흘간이나 되풀이 당하자 이슬비에 옷이 젖듯 막사와 창고들 지붕들은 성한 데가 없었다. 심한 폐허로 변해가는 광경을 보는 병사들의 마음도 만신창이가 되었다.

신라군은 숫자도 적은 데다 밤마다 계속되는 공격을 받고 지칠 대로 지쳤다. 화살만 충분하면 제대로 반격을 가할 수도 있겠으나 그러질 못했다. 밤마다 사상자만 늘어나 사기는 극도로 떨어지고 울분 속에 될 대로 되라는 심경들이 되어 갔다.

목등은 병력을 끌고 북쪽으로 향하다 중도에서 행군을 멈추었다. 넋고개에 훨씬 못 미칠 데서 병력을 산속에 매복시키고 흑치료를 사비성으로 보냈다. 사비성의 상황이 너무 궁금하고 부친이 무슨 지시를 내릴지도 몰라 흑치료가 돌아올 때까지 머물기로 했다.

목돈은 백기가 모르게 출정한 아들과 서로 간에 은밀한 연락을 취하기로 했었다. 때문에 목등은 신주정 원군을 저지할 임무를 부여받자 속으로 얼씨구나 하고 응했던 것이다.

목등은 머물면서 병사들로 하여금 인근 마을들을 돌며 백성들의 흰옷을 강제로 거둬들이게 했다. 그런 흰옷을 병사들에게 입혀 들에서 일하는 농민들 사이에 끼어들어 잠복을 시켰다.

때마침 신주정의 정찰 기병 1백여 기가 그곳을 지나게 되었다.

신라군도 백제군의 복병을 경계하느라 잘 살피며 왔다. 그런데 들판에서 일하던 농부들로부터 불시 공격을 당하자 너무 놀라 급히 회군하려고 들었다. 그러나 주변의 야산에 포진해 있던 백제군이 벌 떼처럼 일어나서 포위를 당하게 되고 말았다.

신라 기병들은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한 채 순식간에 백제군에 궤멸을 당하기에 이르렀다. 1백 여의 기병들 중 절반은 목숨을 잃고 절반은 포로가 되고 겨우 도망친 자는 극소수에 불과했다.

목등은 뜻밖의 큰 전과를 올리게 되자 거기서 전진을 멈추었다.

가잠성은 백제군의 야간 공격을 닷새째 받은 끝에 남문의 문루가 불타서 없어졌다. 밤새도록 문루를 휘감고 타오른 불기둥은 날이 밝자 문루의 석축만 덩그러니 남겨 놓았다.

신라군은 필사적으로 싸워도 방어가 어려울 판에 손을 놓은 채 당하는 고통은 이만저만 크지가 않았다. 남문은 문루마저 없어진 데다 성벽의 하단도 뚫리고 있어 될 대로 되라는 심경이었다.

수문장은 머물 데가 없어져 해론과 양신을 데리고 성벽 위로 자리를 옮겨야 했다. 병사들 중엔 분하고 자포자기가 되어 겨우 몇 대씩 지니고 있는 화살마저 허공으로 대고 쏴버렸다.

양신은 해론에게 위로의 말을 했다.

"해론, 자네도 그렇겠지만 병사들의 분노와 허탈감이 너무 크겠네."

"그럴세. 아버님도 상심이 너무 크셔서 말씀을 잃고 계시네."

"해론, 지금부턴 자네가 아버님 곁을 지켜드리며 위로해 드리게."

"나도 그러고 싶으나 성벽을 지킬 병사가 부족하다며 쫓아내시므로 어쩔 수가 없네. 나는 아버님께 건의도 드려 봤네."

"무슨 건의를 드렸는가?

"이렇게 당하고만 있을 수는 없으므로 한번 짓쳐나가 적과 접전을 벌일 기회를 갖는 해달라는 청을 드렸지만 듣지를 않으셨네."

"성주님은 사정이 여의치 않으니 그렇지 왜 싸우고 싶지 않으시겠나?"

"아버님은 도리어 우리가 그러길 적은 바란다는 말씀도 하셨네."

가잠성 장수들도 여러 번 성주에게 성을 뛰쳐나가 백병전이라도 벌일 것을 건의했었다. 그러나 찬덕은 전쟁은 힘으로 싸우는 것이지 감정으로 싸웠다간 위험만 자초할 뿐이라고 듣지 않았다.

장수들은 전투 경험이 많은 성주의 말에 일리가 있다는 생각을 했다. 하긴 중과부적인 형편에 섣부른 짓을 했다간 성만 잃게 될 뿐이었다. 어떻게든 원병이 올 때까지 시켜내는 게 상책이었다.

그런데 강한 군세로 밀어닥친 백제군은 마치 전쟁놀이라도 하듯 같은 공격과 휴식을 반복하기만 했다. 밤마다 그런 작전을 펼치면서 성벽 밑을 뚫는 작업도 동시에 병행을 하고 있었다.

가잠성은 평지에 쌓은 판축(版築) 토성이라 성벽 밑을 파낼 수가 있었다. 백제군은 큰 나무 궤짝을 성벽에 붙인 뒤 그 속에서 하단 부를 파내었다. 파내는 길이가 근 10여 보에 이르는 크기로 팠다. 그리고 거기서 나온 흙은 성벽 밑에 쌓아 언덕을 만들고 있었다. 그리로 일거에 대병력이 성벽을 넘어 들려는 목적이었다.

신라군도 백제군이 성벽 밑을 파내는 걸 알고 있었지만 속수무책이었다. 막으려고 들다간 백제군의 화살 과녁이 되어 피동적인 태도만 보이자니 성은 곧 함락될 처지라 절망감만 컸다.

백제군의 공격은 엿새째로 접어들 무렵엔 성벽 밑에 잇대어 쌓은 흙더미가 중턱에 이르렀다. 그런데 그날 밤엔 공격을 가하지 않아 성병들은 웬 일인가 싶은 의문과 긴장감만 더해졌다.

"수문장님, 오늘은 적이 왜 야간 공격을 하지 않지요?"

해론의 질문에 무덕은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

"쏴댈 돌들이 다 떨어졌나 보지."

"오늘은 성벽을 기어오르는 작전을 시도하려는 게 아닐까요?"

"성벽을 기어오르면 그동안 뫄둔 돌이 충분하니 면상이나 깨 주자."

무덕은 평소에도 농담을 잘하는 편이나 더욱 자주 했다. 해론은 그게 남을 웃기기보다 자신의 답답한 심사를 달래려는 것일지도 모르겠단 생각을 하며 따라서 웃었다.

성 밖에서 갑자기 백제군이 지르는 우하는 함성 소리가 일어났다. 성병들은 급히 성 밖으로 눈길을 돌렸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아보려고 어둠 속을 살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수문장님, 이게 무슨 소릴까요?"

무덕은 한참 어둠 속을 굽어보다 대꾸했다.

"적장이 지금 순시를 돌고 있는 것 같다."

"이 캄캄한 밤중에 웬 순시를 돈단 말씀입니까?"

"자국 병사들의 사기를 진작시키고 우리에겐 겁을 줄 압박을 가하려는 수작이다. 아무튼 간에 오늘 밤도 그럭저럭 무사히 넘겼으면 좋겠다."

무덕은 그렇게 말하고 성벽 밑에 아예 몸을 길게 뉘었다. 이내 드르렁드르렁 코를 골기 시작했다. 죽음과 같은 침묵에서 주변의 병사들 중에도 성벽에 기대앉아 잠이 든 자들도 많았다. 이젠 어디서도 원병이 오질 않아 자포자기에 빠져든 것이었다.

양신은 자신이 처한 입장이 묘하단 생각을 해야만 했다. 왜냐하면 자신은 백제와 신라 사이에서 중립을 지켜야 할 입장이었다. 그런데 며칠 째 부상을 당한 신라 병사들을 치료를 하는데 매달렸다. 고구려에 적대적인 병사들을 돕는 행위가 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게 조국을 배반하는 행위라 할지라도 자신의 손길을 기다리는 부상병들을 생각하면 손을 놓을 수가 없었다. 딱한 상황을 외면할 수가 없는 동정심이 컸지만 자신의 목숨을 보호해주는 성주와 해론을 위해라도 계속해야 했다.

백제군은 오래간만에 신라군보다 우위를 점하는 위치에 서자 사기가 충천해 있었다. 그때 백기는 어둠 속에서 말을 타고 가잠성을 한 바퀴 돌았다. 이른 데마다 장졸들은 환호성으로 맞았다.

총관을 수행하는 계백은 고요한 가잠성에 자꾸 눈길을 주게 되었다. 양신이 성안에 있다는 게 반가우면서도 큰 걱정이었다. 총공세가 시작되면 안전을 보장할 수가 없기 때문이었다.

계백은 신라군이 지금은 쥐 죽은 듯 일체 응전을 하지 않지만 백제군이 총공격으로 들어가면 필사적인 항전을 벌일 것으로 보았다. 그전에 양신을 구해낼 방법을 찾고 싶었다.

백기는 무슨 생각에 잠긴 듯한 계백에게 일렀다.

"부관, 순찰은 이것으로 끝내자."

"예, 총관님."

백기는 말을 돌려 어둠 속으로 달렸다. 계백도 정신을 차리고 뒤를 급히 쫓았다. 백기가 원수 장막으로 돌아가 보니 방장들이 모여 있었다. 방장들 중에서 국지모가 입을 열었다.

"총관님, 이틀 안으로 성벽을 넘는 작전을 펼 수가 있겠습니다."

백기는 그런 보고를 받고 결정을 내렸다.

"마침 그믐께다. 어둠이 계속될 것을 이용해 총공격을 감행하자."

방장들이 회의를 마치고 돌아가고 나서 잠시 후 뜻밖에도 사비성에서 온 윤충(允忠)이 장막 안으로 불쑥 들어섰다.

"웬일인가? 윤충?"

"폐하의 어명을 받들고 왔습니다."

"폐하의 어명?"

백기는 윤충이 품에서 꺼낸 봉서를 받아 들었다.

국왕이 보낸 봉서를 뜯고 읽어보았다.

거기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담겨져 있었다. 진도가 모반을 일으켰다가 투옥이 되었고 왜국과 관계를 생각해서 처형 대신 곧 왜국으로 축출시키기로 결정했다. 가잠성 공취가 성공을 거두길 바란다고 되었다.

윤충은 거기에 더하는 설명을 했다.

"총관님, 이번의 반역 진압에서 1등 공신인 의자 왕자는 위사좌평에 임명되어 왕궁의 수비 병력을 지휘하게 되었습니다. 또 왕자를 도운 목돈은 2등 공신으로 상좌평에 임명이 되었습니다. 폐하의 그런 결정에 모든 좌평들은 순순히 따르는 태도를 보였습니다."

백기는 그 말을 듣고 국왕은 진도의 모반을 진압함으로써 왕권을 크게 강화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반면에 좌평들은 전에 없이 위축되어 국왕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근신 중일 것으로 생각되었다. 모처럼 국왕은 권위가 오르고 조정안은 대체적으로 평온을 유지하게 되고 모든 신하들이 국왕의 눈치를 보기에 급급한 사정이 눈에 선하게 떠올랐다.

"총관께선 아마도 목돈 상좌평과 목등 부장 사이에 수시로 연락병이 오가는 것을 모르고 계셨을 것입니다."

윤충의 말에 백기는 의아해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런가? 나는 전혀 몰랐던 일일세."

"폐하께선 목부장에 대한 관리감독도 잘하라는 말씀도 계셨습니다."

"윤충, 무슨 말씀인지 잘 알겠다."

"총관님, 소관은 이 밤으로 사비성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소관이 이곳을 다녀간 것을 모두에게 비밀로 부쳐주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하겠다."

윤충은 군례를 붙이고 지체 없이 장막을 나가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백기도 잠시 후 장막을 나가서 진지 안을 돌아보기로 했다. 밤마다 부산하고 시끄럽게 움직였던 전군이 오늘은 고요하기만 했다. 백기는 곁을 따르는 계백을 향해 나직이 물었다.

"목등이 넋고개로 떠날 때 부관에게 함께 가자는 말을 했다지?"

"예, 그렇지만 소관은 거절했습니다."

"목등이 무엇 때문에 자넬 데려가려고 했는지 모르겠는가?"

"부장님은 소관을 곁에 두고 의논하며 일을 처리하겠다고 했습니다."

"무슨 의논을 하려는 것인지 짐작이 가는 게 없는가?"

"총관님, 소관은 그걸 모르겠습니다."

"부관은 이 밤으로 여길 떠나 부장에게 가라."

"총관님, 소관이 가서 무슨 일을 하라는 말씀입니까?"

"이제부턴 목등 곁에 있으면서 그의 동태를 살펴라."

"총관님, 명을 받들겠습니다."

계백은 지체 없이 말에 올라 그 밤으로 넋고개로 향했다.

밤새도록 말을 몰아가는 동안에 동녘 하늘이 밝아졌다. 그런데 넋고개 밑에 이르렀다. 그러나 목등의 병력이 있는 데를 찾지 못했다. 오전 내내 일대를 돌아다녔건만 보이질 않았다.

계백은 해가 중천으로 떠오르게 될 무렵에 그만 본진으로 돌아갈 생각을 했다. 말을 돌려세우고 얼마쯤 들판을 지나가고 있는데 어디쯤에서 농부 하나가 손을 흔들고 있는 게 보였다.

"계백 부관님, 여길 어떻게 오셨습니까?"

계백은 이상하게 생각하며 자세히 보니 뜻밖에도 흑치료였다.

"흑치료, 자네가 왜 여기서 그러고 있는가? 나는 목부장님의 진지를 찾으려고 오전 내내 넋고개 밑을 헤매다 허탕을 치고 돌아가는 길일세."

"부장님은 넋고개 밑으로 가시지 않았습니다."

"넋고개 밑으로 가시질 않았다면 지금 어디에 계신가?"

"저 마을 안에 계십니다."

"저 마을에서 뭘 하고 계신단 말인가?"

"부장님은 이 부근에서 신주정 기병 정찰대를 섬멸시켰습니다. 신라군에게서 얻은 군마들로 병사들에게 승마 훈련을 시키고 계십니다."

"병사들에게 승마 훈련을 시키다니 그게 말이나 되는 소린가?"

"부장님을 만나 뵙고 직접 말씀을 들어 보십시오."

계백은 흑치료의 안내를 받아 마을 안으로 들어갔다. 목등은 계백이 나타나자 올 줄 알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계백, 내가 청할 때는 거절을 하더니 여긴 왜 왔는가?"

계백은 앞뒤를 잴 것도 없이 힐난하는 투로 반문하게 되었다.

"부장님은 이곳에서 뭘 하고 계십니까?"

"자네가 말하는 투를 보니 무슨 불만이 대단하군?"

"소관이 부장님을 감시하러 왔다니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십니까?"

"총관께선 날 곁에 두길 껄끄럽게 여기시지 않는가? 때문에 자네를 내게 보내 동태를 살피라는 명을 내리신 걸로 생각이 되네."

"부장님, 별 말씀을 다 하십니다."

"계백, 자넨 내가 부장이란 직책을 맡은 것을 어떻게 생각하나?"

"총관님을 보좌하는 직책이므로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중요한 직책이라면 날 총관 곁에 둬야 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총관님은 신주정의 원군을 막는 임무를 부여하셨다. 그것은 날 곁에서 떨어뜨려 놓기 위함이란 생각이 들지 않는가?"

"총관님은 원군을 막는 게 매우 중요한 임무라서 맡기셨습니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 임무는 다른 방장에게 맡겨도 충분히 수행해 낼 수가 있다. 그럼에도 날 굳이 택하신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내가 무공을 세우는 것을 막으려는 데 있지 않으실까?"

"무슨 말씀입니까? 부장님의 능력을 높이 사서 맡기신 겁니다."

"계백, 자네는 진정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가?"

"솔직하게 말씀을 드리면 약간 다른 문제가 없지도 않습니다."

"약간 다른 문제라면?"

"방장들은 부장님을 대할 때 어색해 하는 편임을 모르십니까? 선배들이 후배를 상관으로 떠받드는 게 썩 내키는 일은 아니잖습니까?"

"물론 그런 점도 있겠지. 그러나 두고 봐라. 방장들은 곧 내게 승복하는 태도를 보이게 될 것이다. 아니 절반쯤은 벌써 그렇게 되었다."

계백도 목등의 말뜻을 모르지 않았다. 그러나 목돈이 상좌평이 된 것을 어떻게 알았단 말인가? 알 수가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목등은 사비성과 멀리 떨어져 있지만 통하고 있었다. 또 매일처럼 정찰병을 가잠성 쪽으로 은밀히 보내 전황을 살피게 해서 상황을 훤히 꿰뚫고 있었다.

"나는 전공을 세웠는데 총관께선 지금까지 뭘 하시는지 모르겠다."

"총관님이 뭘 하시는지 모르겠다니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가잠성 공격에 너무 뜸을 들이고만 계시지 않는가? 매일처럼 야간에 석포와 불화살만 쏘게 하고 낮으론 병사들이 돌들을 모으는 일만 시키고 있으니 그렇다. 그러다가 총공격은 언제 하실지 모르겠다."

"총관님은 병력 피해를 최소로 줄일 공격작전을 구상 중입니다."

"그게 어떤 작전이란 말일까?"

"신라군을 완전히 지치게 만든 뒤 일거에 함락시키려고 하십니다."

"총관께선 성벽 밑에 굴을 뚫고 그것을 무너뜨린 뒤 진입하는 작전을 펼치려는 건 나도 다 알고 있지만 그게 언제쯤이냔 말이다."

"부장님, 오늘 낼 중으로 총격이 개시될 것으로 봅니다."

"그렇게 빨리?"

"부장님, 소관은 이만 가잠성으로 돌아가야 하겠습니다."

"계백, 왜 빨리 돌아가려고 하는가? 총관님은 내 곁에 자넬 붙여 두려고 보내셨을 텐데 그래도 되겠나? 나하고 있는 게 그렇게 싫은가?"

"소관도 가잠성 공격 작전에 참가하고 싶어서 그럽니다."

계백는 무엇보다 가잠성에 있는 양신이 걱정되어 돌아가려고 했다. 목등은 그런 말을 듣고 자신도 그렇게 해야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여기서 죽치고 있다간 전공을 세울 수가 없다는 판단이었다.

"부장님, 저는 지금 배가 몹시 고픕니다. 뭘 좀 먹게 해주십시오."

목등은 흑치료를 불렀다.

"흑치료, 계백을 데리고 가서 말고기 국밥을 한 그릇 먹이게."

계백은 흑치료를 따라가면서 물었다.

"웬 말고기 국밥을 끓일 수가 있었단 말인가?"

"신라군 군마들 중 몇 필이 죽었습니다. 때문에 우리 병사들은 오래간만에 말고기 국밥으로 포식하게 되었소."

계백이 밥을 먹고 돌아오자 목등은 이미 회군 준비를 마치고 말했다.

"계백, 지금부터 함께 가잠성으로 회군한다."

"부장님은 신라군 원병을 막는 임무를 부여받지 않으셨습니까?"

"나는 신주정에서 원병을 더 보낼 수가 없음을 잘 알고 있다. 이번에 소수의 기병들은 보낼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그럴만한 사정이 있다. 나는 포로들을 신문해서 그들은 원병이 아니고 가잠성의 정황을 살피려고 왔음을 알아냈다. 때문에 나 역시 여기서 더 머물 필요가 없다."

"부장님은 어떻게 단언하듯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신주정은 원병을 보낼 수가 없는 이유는 고구려 군과 대치 상태로 들어갔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는 가잠성 공격에 참가하겠다."

"부장님 마음대로 그러실 수는 없다는 생각입니다."

계백의 말에 목등은 반문했다.

"자넨 총관의 명을 어기고 돌아가는데 나는 안 된단 말인가?"

목등은 대답을 못하는 계백에게 또 다른 말을 꺼냈다.

"자넨 출정하기 전날 내 아버님을 뵈었다지?"

"부장님이 저한테 그렇게 하라고 지시를 하시지 않았습니까?"

"자네는 백가면을 자처하고 용서를 빌었지만 아버님은 자네가 백가면이 아님을 다 알고 계신다. 그럼에도 아바님은 일부러 모른 척하고 관대하게 넘기셨다. 그러시는 이유가 어디에 있음을 아는가?"

계백이 아무런 대답도 않자 목등은 갑자기 음성이 다정해졌다.

"계백, 내 아버님이 자넬 매우 아끼시는 걸 잘 알고 있겠지? 그 이유는 총관님처럼 자네 선친이 내 아버님에겐 죽마고우이기 때문일세."

"부장임, 제가 그걸 몰라서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내 아버님과 총관님은 다 같이 자넬 사위로 삼으려 하시니 문젤세."

"부장님, 제게 무슨 말씀을 하시려고 이러십니까?"

"내 여동생 추저가 자넬 사모하는 것도 잘 알지 않는가? 그러나 주랑낭자는 어떤가? 자네에게 시집을 갈 생각이 없다는 말을 공공연히 하고 다니네. 때문에 추저는 주랑 낭자에게 직접 그 점을 확인까지 받았네."

계백은 그 말에 묵묵부답이고 목등은 설득조가 되었다.

"자넨 팔가에 속하지 않으므로 장래를 위해선 뒷배를 봐줄 실력자가 필요함을 잘 알지 않는가? 그걸 안다면 심사숙고해볼 일이네. 총관님은 아들이 없어 자넬 아들 겸 사위로 삼으려고 하시나 자네의 뒷배를 제대로 봐 줄 사람은 내 아버님이 더 낫지 않겠나? 잘 생각해 볼 일일세."

계백은 목등의 말에 계속 침묵만 지킬 뿐이었다.

"계백, 나는 왕실의 초계부인과 재혼을 하게 되었네."

"예? 폐하의 여동생이신 초계 부인과 말씀입니까?"

"그럴세."

"부장님, 축하를 드립니다."

"축하를 받으려는 게 아니고 나는 아버님의 말씀을 전하려고 하네."

"위사좌평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신단 말씀입니까?"

"계백, 아버님은 자네와 내 여동생이 혼인하길 바라고 계시네."

목등의 대답에 계백은 다시 입을 다물었다.

"계백, 얘긴 그만 하고 지금부터 함께 가잠성으로 돌아간다."

목등은 말하고 즉시 병력을 출발시켜 가잠성으로 향했다.

백기는 목등을 맞아 여간 못마땅해 하지 않았다. 멋대로 돌아온 것은 군법으로 다스릴 일이라 크게 꾸짖고 싶었다. 그러나 목등은 신주정 정찰대를 괴멸시키고 포로 20명과 군마 70여 필을 노획해 왔다. 방장들은 그런 목등 때문에 전군의 사기가 크게 오르게 되었다고 축하를 했다.

목등은 자신의 전공을 과시하는 기색과 더불어 은근히 항의를 했다.

"총관님, 소장은 명색만 부장입니다. 총공격에서 소장을 배제시킬 생각을 하셨다면 키려고 여간 섭섭한 일이 아닙니다."

백기는 그런 말을 듣고 오해를 살 소지가 있었다고 생각했다.

"목부장, 그렇지 않아도 연락병을 보내 회군을 지시할 참이었다. 목부장이 큰 전과를 거뒀으니 가잠성 함락 가능성은 더욱 커졌다."

앞으로 목돈과 관계를 생각해 그런 대답으로 넘기고 말았다.

방장들 중에선 두 사람이 그런 말을 주고받자 아부성 발언이 나왔다.

"앞으로 목부장은 백제군을 잘 이끌어 나갈 큰 재목이 되겠소."

"암, 총관님과 합심을 하면 백제군의 전력은 더욱 막강해질 걸."

목등은 방장들의 찬사까지 듣게 되자 으쓱해서 얼굴에 고무된 표정을 지우지 못했다. 백기는 방장들이 벌써 멋 대로인 목등을 비난하긴 커녕 두둔하는 말을 해서 못마땅했으나 고개만 끄덕이고 말았다.

어느 새 방장들 사이엔 은연중 패가 갈리는 게 드러나고 있었다. 진도가 모반에 실패한데 반해 목돈은 상좌평에 올랐다. 새로운 실력자 쪽으로 붙으려고 드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방장들도 벌써 노골적으로 목등에게 잘 보이려고 자들이 생겨났다. 백기는 그런 자의 속을 훤히 들여다보았지만 전도가 유망한 후배로 아꼈던 목등을 함께 격려해 주고 말았다.

목돈은 앞으로 부친의 지위가 부상하는 대신 백기의 전도는 그리 밝지가 못할 걸로 보고 있었다. 그런 경향은 방장들도 확연히 달라진 분위기 같았다. 때문에 목소리에 힘이 더 들어갔다.

"총관님, 신라군 포로와 군마에 대한 처분을 어떻게 하시렵니까?"

백기는 선선히 대꾸했다.

"포로와 군마는 진중에 두고 적절하게 쓰기로 하세."

"총관님, 소장은 휘하 병력 중 2백 명을 뽑아 기병훈련을 시켰습니다. 승마 훈련을 시킨 병력으로 별동 기동대를 편성하고자 합니다."

백기는 목등이 별동 기동대 병력을 거느리려는 의도가 무엇인지 알 수가 없으나 나쁠 게 없다는 판단에 고개만 끄덕여 보이고 말았다.

"총관님, 소장은 신라 포로들을 활용할 방안을 제안하겠습니다."

"어떻게 말인가?"

"성벽 밑에 뚫은 굴들을 무너뜨릴 땐 큰 위험이 따릅니다. 신라 포로들을 투입시켜 그 일을 대신 하게 하는 게 좋겠다는 생각입니다."

백기는 속으로 치미는 불쾌한 감정을 억지로 누르며 대꾸했다.

"포로들을 그렇게 쓰면 안 된다."

"왜 안 된다고 하십니까? 우리 병사들의 위험을 덜게 만드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걸 나쁘게 보신다는 말씀입니까?"

"부장, 신라 포로들이 우리의 명령을 순순히 따를 지가 의문이다. 때문에 강제로 시켰다가 중요한 작전에 차질을 빚을 수도 있다. 이미 병사들이 안전하게 임무를 수행할 수 있는 방책을 강구해 시행할 것이다."

"총관님이 그처럼 안전한 조치를 취해 놓으셨을 줄은 몰랐습니다."

"포로는 성을 점령하고 나면 성벽을 원상 복구시키는 일에 투입하세."

"총관님, 이번 가잠성 공격에서 소장은 선봉을 맡고 싶습니다."

목등은 가잠성 공격에서 군공을 세우기 위함이었다. 백기는 그 속셈을 잘 알지만 망설이지 않고 들어주기로 했다. 그러지 않으면 관계가 악화될 것 같은 우려가 들었기 때문이다.

"선봉을 맡도록 하게."

백기는 허락을 하고 총공격을 내일 밤으로 하루를 미뤘다.

방장들이 흩어지자 목등은 곁에 있는 계백을 호기롭게 불렀다.

"계백, 자네에게 따로 이를 말이 있다. 내 장막으로 가자."

계백은 따라가면서 목등에게 말했다.

"부장님, 욕심이 너무 지나치신 게 아닙니까?"

"계백, 나보고 하는 소린가? 무슨 욕심이 지나치단 말인가?"

"총관님은 이미 방장들과 의논해 작전을 짜놓으셨습니다. 총공격이 하루 미뤄진 것은 부장님의 회군 때문입니다. 또 선봉장 또한 정해져 있었는데 부장님이 맡겠다면 남의 임무를 가로채려는 게 되지 않겠습니까?"

"계백, 장수가 전공을 세우려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닌가? 유능한 장수는 기회를 잘 잡을 줄도 알아야 함을 배워 두게."

"부장님, 소관을 무슨 이유로 데려가십니까?"

"따라오면 알게 된다."

"미리 밝혀주셔야 따라 가겠습니다."

계백이 불만스런 투로 걸음을 세우자 목등은 빙긋이 웃었다.

"자네에게 긴히 해 둘 말이 있어서 그런다."

목등은 억지로 따라온 계백을 자기 장막 앞에 세웠다. 그리고 큰 소리로 부관인 장개에게 일렀다.

"장개, 신라군한테서 노획한 마필 중 센말을 끌고 오게."

"옛. 부장님."

장개가 떠나자 목등의 음성이 갑자기 은근해졌다.

"계백, 출세하고 공명을 떨치고 싶은 건 사나이의 욕망일세. 그러나 능력만 가지곤 안 될 때가 많네. 그럴 때는 힘 있는 자의 지원을 받을 필요가 있다. 나는 자네에게 제의했던 말에 대해 다시 묻겠다."

"부장님, 무슨 제의를 했다고 이러십니까?"

"자네는 국가의 동량이 될 자질을 충분히 지녔네. 나는 그런 자네를 돕고자 내 누이 동생인 추저와 혼인해 줄 것을 제의했지 않았는가?"

계백이 아무런 대꾸도 않자 목등의 음성은 더욱 은근해졌다.

"계백, 서로가 상부상조를 하면 앞길이 더욱 열리게 됨을 생각하게."

"저는 그럴 생각은 없습니다."

계백이 단호하게 거절하자 목등은 씩 웃기만 했다.

"계백, 두고 봐라. 너는 내 매부가 될 것이다."

장개가 백마를 끌고 오자 목등은 계백에게 말했다.

"계백, 저 센말을 보게. 신라 정찰대 대장이 탔던 말이다."

계백은 백마를 훑어보고 마음에 드는 듯 표정이 좀 풀어졌다. 흰털은 눈이 부시게 빛나고 전체적으로 균형이 잘 잡혀서 탐이 날 정도였다.

"부장님, 누가 봐도 탐을 낼만 하겠습니다."

계백의 솔직한 대답에 목등은 빙긋이 웃었다.

"그런가? 나는 센말을 주랑낭자에게 선사하려고 한다."

목등은 말하고 계백의 표정을 지긋이 살폈다.

"무엇 때문에 그러신단 말씀입니까?"

계백은 경계하는 표정이 되었다.

"총관님도 센말을 타고 계시지 않은가? 부녀가 나란히 센말을 타면 보기가 좋겠다는 생각이다. 자네가 끌고 가서 주랑낭자에게 전하게."

"전 그런 일은 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면 다른 사람을 시키는 수밖에 없군."

목등은 계백이 거부하자 장개에게 일렀다.

"장개, 저기 총관님 장막 뒤에 있는 녹두 색 장막이 보이지? 이 센말을 그리로 끌고 가서 주랑 낭자께 전하게."

장개는 좀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부장님, 녹두 색 장막 근처엔 아무나 접근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 그럼 내가 직접 끌고 가는 수밖에 없겠군."

목등의 말에 계백은 당황히 입을 열었다.

"안 됩니다."

"뭐가 안 된다는 말인가?"

"제가 전하겠습니다. 받고 안 받는 것은 그 쪽 사정입니다."

계백은 퉁명스럽게 말하고 장개 손에서 말고삐를 뺏었다. 그러는 이유는 목등은 무슨 꿍꿍이속이 있어 주랑을 만나려는 것 같아 차단할 생각이었다. 목등은 뒤에서 남이 들으란 듯 큰 소리로 외쳤다.

"계백, 나는 자넬 꼭 매부로 삼을 것이다."

계백이 녹두색 장막 앞에 당도하자 마침 안에서 주랑이 나왔다.

"계백 오라버니, 웬 센말을 끌고 오셨나요?"

주랑의 질문에 계백은 공연히 대꾸가 퉁명스러워졌다.

"낭자는 늘 센말을 한 필 갖고 싶다고 하지 않았소?"

"그렇지만 이런 센말을 어디서 가져 왔어요?"

계백은 주랑이 탐을 내는 듯한 눈길이 되는 게 못마땅했다.

"목부장이 신라 정찰대를 섬멸할 때 노획한 말이라고 하오."

"그런데 왜 이리로 끌고 왔어요?"

"목부장이 낭자에게 선사를 한다오."

주랑은 좀 놀라다가 이내 안색이 흐려졌다.

"목부장이 무슨 이유로 제게 센말을 선사를 할까요?"

"좌장님과 낭자가 나란히 센말을 타면 보기 좋을 것이라고 했소."

계백이 대답을 하는데 이번엔 백기가 장막을 나섰다.

"계백, 어디서 그처럼 훌륭한 센말을 끌고 왔는가?"

주랑은 난처한 표정만 짓고 있는 계백을 대신해서 대답했다.

"목부장이 보냈답니다."

"센말을 내게 선물로 주려고? 이런 고마울 데가?"

"아녜요. 소저에게 선사한답니다."

주랑의 말에 백기는 좀 의외라는 듯 말했다.

"주랑아, 목부장이 네게 큰 선물을 다 하다니? 너는 센말을 갖는 걸 소원으로 여기지 않았느냐? 이젠 원을 풀게 되었구나."

백기의 대답에 계백은 항의를 하듯 입을 열었다.

"총관님,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십니까? 목부장이 말을 선사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좀 더 따져 보고 받으시는 게 좋을 듯싶습니다."

주랑도 부친이 돌려보낼 것으로 생각을 했다.

"목부장이 모처럼 보인 성의를 거절할 수는 없지 않겠느냐?"

백기는 말을 던지고 자신의 애마에 오른 뒤 일렀다.

"주랑아, 너도 센 말을 타보렴. 함께 달려보자."

주랑은 계백의 얼굴을 한번 돌아보고 센말에 올라탔다. 부친이 채찍을 놓고 달리자 그녀도 목등이 보낸 센말을 타고 뒤를 쫓았다

백제군의 가잠성 포위는 이레째로 접어들었다.

신주정 군은 원병을 더 보내질 않는 데다 가까운 사벌주(沙伐州)마저도 깜깜 무소식이었다. 성병들이 절망 상태에 빠진 가운데 찬덕은 사벌주의 군주가 내물계라 일부러 모른 체한다는 추측을 하게 되었다.

백제군이 밤마다 가하는 공격은 성병들을 어느 새 길들여놓고 말았다. 절망과 무기력증에 빠진 채 낮이면 성벽에 기대어 졸고 밤이면 적이 쏘아대는 돌멩이나 주워 모았다. 그리고 아침을 맞으면 오늘은 총격을 받지 않게 되었으면 하는 생각들을 했다.

그런데 가운데 양신은 며칠 째 혼자서 부상병들을 치료하는 일에 매달렸다. 그로인해 매일처럼 몸은 녹초가 되어서 졸음이 쏟아져 들었다. 그런 양신 곁으로 해론이 주먹밥 두 덩이를 받아들고 왔다.

양신은 밥을 먹을 기력조차 남지 않았는데 해론이 권했다.

"양신, 피곤해도 아침을 먹고 기운을 차리게."

해론이 내민 주먹밥을 받아들고 양신은 쓴 웃음을 지었다.

"해론, 고맙네."

"자네가 고마울 게 뭔가? 내가 고맙지."

대답하는 해론도 목이 잔뜩 쉬어 있었다.

성안은 눈길이 미치는 곳마다 성한 데가 없었다. 남문의 문루는 불타서 석축만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무너진 막사와 창고들은 흉물로 변한 채 식량마저 떨어져 병사들은 굶을 판이었다.

양신은 주먹밥을 입에 떼어 넣으며 물었다.

"해론, 성주님이 밤이면 내가 있는 곳을 다녀가시곤 하시네."

"아버님은 밤마다 찾아가 보지 않을 수가 없으시네. 자네가 많은 사상자를 돌보기에 정신없이 매달리는 걸 보면 눈물이 나온다고 하셨네."

"내가 무슨 큰일을 한다고 그러시나? 전쟁터를 처음 겪는 나로선 부상으로 고통을 받는 병사들을 그냥 두고만 볼 수가 없어 그럴세."

"양신, 성은 전체가 만신창이고,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한 병사들이 죽고 부상만 당하는 참담함 속에 자넬 보며 의욕을 키우게 되네."

양신은 그런 대화를 나누다 문득 어떤 의구심이 일었다.

"해론, 어제는 하루 종일 아란도 부장을 보질 못했네."

"나도 그 점을 이상하게 여기네. 아버님이 옥에서 꺼내놓은 뒤로 감시라도 하려 듯 자네 부근에서 얼쩡거렸는데 어젠 통 못 보았네."

"나는 아란도 부장이 보이질 않으면 신경이 여간 쓰이질 않네."

"양신, 자네의 불안감을 내가 왜 모르겠는가?"

"해론, 자넨 나보고 성벽에서 뛰어내려서라도 도망치라고 성화를 부렸는데 며칠 새론 그 말이 쏙 들어갔군? 내가 혹시 성벽 위에서 밖으로 뛰어내리다 다리라도 부러질까봐 걱정이 되어 그러는가?"

"양신, 자넨 전군님을 구출할 때 썼던 낙법이 있지 않은가?"

"나는 왠지 모르게 백제군 진영으로 가는 것도 주저가 되네. 백제에서도 날 첩자 취급을 할지도 모른다는 걱정이 들기 때문일세."

"근래에 와서 고구려와 백제는 사이가 매우 가까워졌다네."

"양국 사이가 가까워진 이유가 뭔지 모르나 그게 가능한 일일까?"

"고구려 군은 지금 신주정 군이 원병을 못 보내게 만들어 놓았네."

"고구려 군과 신주정 군은 늘 대치 상태로 있음은 나도 아는 일일세. 그런데 새삼스럽게 백제와 사이가 가까워졌다면 이해가 안 되네."

"아버님은 이번 침공이 고구려와 백제의 합작으로 보고 계시네. 그럴 사정이 있다고만 하시고 그에 대한 설명은 하시질 않네."

"해론, 그 일로 고구려가 더 미워진다면 나도 곤란해지네."

"양신, 고구려가 밉다고 어찌 자네를 미워할 수가 있겠는가? 고구려인으로 신라 부상병을 정성껏 치료해 주는 건 쉽지 않을 일일세. 그런 자네의 모습을 보면 어떤 땐 신라인으로 착각하기도 하네. 이기적인 생각일지는 모르겠으나 자네가 여길 떠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일세. 그런 나만이 아니고 신라 병사들 전체가 그럴 걸로 생각되네."

"해론, 농담은 고맙네만 나는 엄연한 고구려인일세."

두 사람이 그런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것은 우정과 신뢰감이 그만큼 두터워진 때문이었다. 신라 병사들도 처음에 고구려인인 양신을 곱지 않은 눈길로 보았다. 그러나 팔을 걷어 부치고 부상병들을 정성껏 치료를 해 주는 걸 보며 태도가 달라졌다. 고맙고 감동해서 병사들 중엔 양신과 마주칠 때 군례를 붙여 존경을 표시하기도 했다.

"나는 아버님의 말씀이 아니어도 백제군의 지휘자를 대단한 전략가로 보고 있네. 그 때문에 나는 더욱 절망감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네."

해론이 그런 말을 꺼내자 양신이 물었다.

"해론, 자넨 어떤 점을 놓고 그런 생각을 하게 되는가?"

"성 공격에서 석포와 화공 공격만 펼치는 작전만 봐도 그럴세. 성안의 지형지물을 훤히 꿰뚫어 보듯 공격을 가해서 초토화시켰네. 아마도 성 안의 식량 사정까지 감안을 해서 총 공격 날짜를 잡을지도 모르겠네."

양신도 해론의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전쟁을 처음 겪지만 나름대로 백제군의 작전을 평가하게 되었다. 그동안 석포와 불화살로 시설물들만 찍어내 듯 들이치며 시간을 끈 것 같았다. 성안은 식량마저 고갈시켜 신라군의 사기가 완전히 떨어지게 만든 뒤 총 공격을 할 것 같았다. 그처럼 상황을 따지고 계산을 해가면서 치밀한 공격 작전을 구사한다는 것은 혀를 내두를 일이었다.

성병들도 백제군이 성벽 밑에서 파낸 흙으로 성벽 위에 잇댄 언덕을 만드는 걸 보며 거기로 성에 진입 작전을 펼 것으로 보고 있었다. 대병력이 일시에 진입하면 막을 방법이 없었다. 때문에 성병들 중엔 목숨을 헛되이 잃지 않고자 야밤에 도주하는 자들이 부쩍 늘어나고 있었다. 백제군은 그걸 방조하고자 이미 북문 쪽에선 길을 터주고 있었다.

"해론, 나도 백제군의 대병력이 한꺼번에 진입하면 손을 쓸 수가 없을 것으로 보네. 성이 함락되면 그 뒤엔 어떻게 될지가 걱정일세."

"우린 무기도 식량도 다 떨어진 데다 싸울 병력은 날로 줄어들고 있네. 성의 함락은 경각에 달린 터라 아버님은 끝내 빈껍데기로 남은 성을 베고 죽을 일만 남았다는 말씀까지 하셨네."

해론은 대답하고 깊은 한숨만 내쉬었다. 양신은 문득 그런 해론의 팔뚝에 큰 상처가 난 것을 보고 놀라면서 물었다.

"해론, 팔뚝에 웬 상처가 났는가?"

"대단치 않으니 걱정 말게."

"어제 밤은 백제군의 공격도 없었는데 무슨 일이 있었는가?"

"이제야 말인데 오늘 새벽에 밖으로 나가서 한바탕 붙어봤네."

해론은 자신이 출격했던 일을 양신에게 털어놓았다.

성병들은 위기의식이 점점 커지는 가운데 이대로 가만히 죽을 수만 없다는 말을 했다. 해론은 그 말에 힘을 입고 부친이 모르게 나름대로 대응 작전을 세웠다. 그리고 자원한 병사들 중 30여 명을 모아 특공대를 조직했다. 줄사다리를 여러 개 성벽 밖으로 늘어뜨린 뒤 그걸 타고 성을 나가서 성벽을 파는 백제군을 급습했다.

"해론, 그런 작전을 펼치다가 상처를 입었단 말인가?"

"적병을 10여 명쯤 사살했지만 우리도 그만큼 목숨을 잃었네."

"또 나가면 이번엔 백제군이 대비했다가 덮칠지 모르네."

"나는 적이 파놓은 성벽 밑과 언덕을 보고 절망하고 말았네."

양신도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게 되었다. 신라군은 병력 수가 워낙 적은 데다 너무 지쳐서 싸울 수가 없게 되었다. 아침으로 주먹밥을 먹은 두 사람은 헤어지고 양신은 부상병을 돌보기 시작했다.

우선 물지게를 지고 가서 샘물부터 길어 왔다. 중상자들 중엔 열에 들떠서 여기저기서 물들을 찾고 있었다. 그런 부상병들은 양신이 없으면 치료는커녕 물조차 먹을 수가 없었다.

부상병들의 집합소는 병사들이 물을 찾는 소리와 신음 소리가 뒤섞여진 가운데 양신은 이리 뛰고 저리 뛰었다. 그렇게 하루 종일 돌보는 손길을 놓을 수가 없는 가운데 어느 새 땅거미가 졌다.

낮엔 그 나마의 주먹밥마저 지급이 되지 않아 부상병들은 물론 양신도 굶은 채 물로 배를 채웠다. 저녁 땐 계란만큼 크기의 주먹밥을 하나씩 받았지만 내일 아침부턴 아예 없다고 했다.

부상병들 사이에서도 백제군의 총공격이 오늘 낼이란 느낌 속에 모두는 무거워진 분위기였다. 양신도 주먹밥을 아끼듯 먹고 나서 부상병들과 함께 물을 들이켜 허기를 달랠 수밖에 없었다.

양신은 그 때문에 평소보다 물을 더 많이 길어야 했다. 여간 고단하지가 않은데 어두워지면서 모기떼가 극성을 부렸다. 여선이 시달리는 부상병들을 위해 모깃불을 피워주고 겨우 짬을 내어 쉬었다.

양신은 지친 몸을 설마른 풀무더미 위에 뉘었다. 그러자 언제나처럼 여선의 얼굴이 머릿속으로 떠올랐다. 그립고 보고 싶은 얼굴을 떠올릴 때마다 후회만 일었다. 여선이 불놀이 밤에 함께 도망치자는 말을 왜 듣지를 않았단 말인가? 그 결과는 지금의 현실에 처하게 되었다. 이젠 아무 때나 가잠성을 탈출할 수도 없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질 않는 이유는 여선 때문인지도 몰랐다. 그동안에 타국 땅에서 말할 수가 없는 괴로움과 고통을 겪지만 설사 조국으로 돌아간들 같은 하늘 아래 여선을 그리워할 고통은 더 할 것 같았다. 차라리 남의 나라 전쟁터에서나마 어정대면서 잊는 게 더 나을지도 모르겠단 생각도 들었다. 그런 생각을 하다가 깜박 잠이 들고 꿈을 꾸었다.

비석암의 장작더미가 불타고 있었다.

다갈촌의 불놀이는 절정으로 치닫는 가운데 양신은 여선과 혼례를 치렀다. 예식이 끝나자 신랑 신부는 함께 춤판으로 끼어들었다. 그런데 행복감에 젖어야 할 두 사람은 눈물만 흘렸다. 그 이유는 춤판이 끝나면 두 사람은 다시 헤어지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때 춤을 추는 두 사람 앞으로 도해선이 다가들어 여선의 팔을 잡고 강제로 끌었다.

"안 돼! 여선, 우린 헤어지면 안 돼."

양신은 그렇게 외치다가 잠에서 깨었다.

하늘엔 초라한 하현달이 떠 있었다. 시도 때도 없이 쏟아져 드는 졸음으로 잠시 눈을 붙였다가 그만 꿈속에서 여선과 혼례를 치렀다. 그때 어디서 누가 크게 외쳤다.

"위험해요."

양신은 그 말과 동시에 빼어 든 밀두도를 반사적으로 휘둘렀다. 등 뒤쪽에서 비명 소리가 일어났다. 칼날에선 검은 피가 뚝뚝 떨어지고 돌아다보니 아란도가 쓰러져 신음을 흘려냈다.

땅바닥에 쓰러진 아란도는 오른쪽 어깨가 크게 베어져 나갔다. 양신은 급히 몸을 일으켜 내려다보았다. 아란도는 심한 경련을 일으키다가 이내 숨을 거두고 말았다.

며칠 째 몸을 드러내지 않았던 아란도는 양신을 죽일 기회만 노리고 있었다. 오늘 밤엔 양신을 살해하고자 근처에서 몸을 숨긴 채 기회를 노렸다. 양신은 그걸 모른 채 지친 몸을 잠시 쉬다 잠이 들었다. 그걸 노리고 살금살금 접근한 아란도가 장도로 찌르려는데 부상병 하나가 크게 외쳤고 양신의 반격을 받고 도리어 당했던 것이다.

양신은 아란도를 베어놓은 것으로 크게 당황했다. 어쩔 줄을 몰라 부상병들을 향해 떨리는 음성으로 변명을 했다.

"나는 본의 아니게 살인을 저지르게 되었소."

그러자 어느 병사가 입을 열었다.

"제가 다 보았습니다. 비겁한 쪽은 아란도 부장이었습니다."

"나도 보았소. 나는 양신님이 죽는 줄로만 알았는데 살았소."

"양신님은 정당방위였소."

부상병들이 이구동성으로 말하는데 장수 하나가 병사들을 끌고 달려와서 부상병들에게서 상황을 청취했다. 부상병들은 하나같이 아란도의 비겁함을 지적했다. 그러나 낙담이 큰 양신은 말했다.

"어찌 되었건 간에 나로선 처음으로 원치 않을 살인을 저질렀소. 이렇게 되고 보니 성주님과 해론님을 뵐 면목이 없소. 내가 왜 진작 이 성을 나가지 못했는지 후회가 여간 크지 않소."

양신의 말에 부상병들은 도리어 위로하는 말을 했다.

"양신님은 아무런 죄가 없습니다. 우리가 증언해 드리겠소."

"우리는 양신님을 적국인으로 보고 있지 않습니다."

"양신님은 신라인의 은인이요."

부상병들이 변호하는 말을 듣고 양신은 가슴이 뭉클해지는 감동을 받았다. 장수도 수긍을 하며 병사들과 함께 아란도의 시체를 수습해서 그 자리를 떴다. 양신은 눈물만 흘려 내렸다.

처음엔 성을 떠나지 못한 것을 후회했던 양신은 그러지 않았던 것을 걸 다행으로 여겼다. 자신이 아니면 부상병들을 돌봐 줄 손이 없으므로 필요한 존재로 그 일을 계속하겠다는 마음을 다졌다.

"여러분이 절 보호해 주시면 계속 남아 있겠습니다."

부상병들은 양신의 말에 일제히 박수를 쳐 주었다.

아란도에겐 안 된 일이나 양신은 불안감이 사라졌다. 어딜 가던 이방인에 지나지 않으나 앞으론 신라에 더 머물러도 괜찮을 것 같았다. 비록 남의 나라 전쟁에 휘말렸지만 자신의 손길을 필요로 하는 부상병들을 돌보는 보람찬 일로 시름을 덜 수가 있었다. 며칠간 조국을 등진 후회도 여선을 떠올릴 수도 없이 지냈었다. 그런데 꿈에서 그녀와 혼례를 치르는 꿈은 자신에게 어떤 계시를 준 같았다. 그것으로 자신은 목숨을 건지게 된 액땜을 했다는 생각도 들었다.

백제군의 대병력은 곧 진입할 판이었다. 그러나 양신은 굳건히 부상병들을 지키기로 했다. 이젠 밤 기온이 제법 쌀쌀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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