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쇠나라 17. 깃발

17. 깃발

by 정완기

17. 깃발



뚜 뚜 뛰띠리 따리라이

둥둥 두엉둥

뚜 뚜 뛰띠리 따리라잉

둥둥둥 따아앙

뚜 뚜 뛰띠리 따리라이

둥둥 두엉둥 따앙-.

고구려의 국도 장안성에선 새벽 여명을 뚫고 왕성 고적대가 나팔과 북소리를 흘려내었다. 그윽하면서도 찌르는 듯한 음률은 마치 이승과 저승을 넘나드는 것 같은 소리라 듣는 이로 하여금 가슴을 사정없이 두근거리게 만들었다.

초겨울로 접어들고 있었다. 고적대의 음률은 계속되었다. 집집마다 사람들은 소스라치게 잠에서 깨어났다. 다반사로 일어나는 비상소집에 남정네는 물론 아낙네도 떨리는 가슴으로 움직였다.

어느 누구에게도 개인사정은 있을 수가 없다. 성 안팎은 남정네들의 긴 행렬이 이어졌다. 성안의 바둑판처럼 닦인 길이나 성 밖의 논틀밭틀을 병장기를 든 남정네들이 줄을 잇고 있었다.

남정네들은 남문(南門)으로 향했다.

고구려의 남정네들은 평생을 병역 의무를 져야만 했다. 한두 번쯤 전쟁에 참가한 것으론 남자 축에 끼지도 못했다. 전쟁터에서 적을 얼마나 죽였는지로 사나이로 행세하는 척도가 되었다.

부윰해지는 동녘 하늘 아래로 남문의 위용이 드러내고 있었다. 현란한 문채(文彩)나 장식은 없지만 기둥과 서까래를 철판으로 씌웠다. 무겁고 장중함은 철국(鐵國)의 도성다움을 드러냈다.

을지문덕은 문루의 난간 앞으로 나섰다. 5척 단신에 까무잡잡한 용모엔 위엄을 찾을 데가 없었다. 그러나 허리에 찬 5자루의 패도(覇刀)는 고구려의 국상(國相)임을 드러내는 상징이었다.

남문 밖 광장에는 5부를 상징하는 황(黃), 청(靑), 적(赤), 흑(黑), 백(白)색의 깃발들을 벌려 세웠다. 남정네들은 각자 깃발의 색깔을 보면서 자기네 부를 찾아가고 있었다.

"누러러."

"푸러러."

"발가가."

"검어어."

"허여여."

남정네들은 앳된 소년부터 귀밑머리가 희끗희끗한 초로의 사내들까지 뒤섞여 있었다. 자기네 부를 목청껏 외쳐대는 사람들의 코와 입에서 흘려내는 허연 김들이 찬바람에 흩어졌다.

고적대의 음률이 뚝 끊겼다.

요란한 말발굽 소리와 함께 말을 탄 순무병단(巡撫兵團)이 쏟아져 들었다. 도착한 순무병단이 광장에서 도열을 마치자 을지문덕의 부장(副將)인 해수(解漱)가 목청을 높였다.

"오늘부터 국상께선 판도 순무에 나서신다. 왕제 저하께서 도착하시는 대로 전송 식을 갖게 된다. 이상."

고구려 군은 해마다 늦가을에 판도(版圖)를 순무했다. 순무는 왕실의 권위를 세우고 여타 부와 이민족에 대한 통제와 감시를 강화시키려는 목적이었다. 국초(國初)엔 국왕이 직접 각부 상가들을 거느리고 다녔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고 왕권이 신장된 뒤로는 국상이 대신 각부의 우태(優台)들을 거느리고 행사를 이끌게 되었다.

이번엔 을지문덕이 특별한 순무 병단(兵團)을 꾸렸다.

각부의 고위 장수인 대형(大兄), 소형(小兄)도 참가하게 했다. 그 밑으로 말단 군관(軍官)인 선인(仙人)까지 총 5백 명으로 부대를 구성했다. 수국의 침공에 대비해 실전 경험이 많은 군관들뿐이고 병사는 한명도 없었다. 때문에 장수와 군관들이 직접 취사(炊事), 말먹이, 무기, 천막 등속을 챙기게 되었다.

고구려는 수국의 침공 앞에 거국적인 단합이 요구되었다. 그런 공감대가 형성되면서 이변까지 일어난 게 을지문덕의 국상 발탁이다. 그처럼 일개 졸개에서 몸을 일으켜 신하들 중 최고위 오른 사람은 없었다.

을지문덕은 앞으로 전쟁을 총 지휘할 책임자로 먼저 각부의 우태를 비롯해 장수들을 장악할 필요성이 있었다. 때문에 군관들로만 구성된 특별한 순무병단을 꾸리게 된 것이었다.

지난 해 수국 황제는 고구려에 다음과 같은 협박을 했다.

--요하의 넓음이 어찌 장강과 같으며 고구려 병력이 강한들 중원에 비길 손가? 짐이 고구려의 잘못을 꾸짖자면 장수를 하나만 보내도 족할 일이다. 고구려 국왕은 속히 깨닫고 입조할 것을 명하노라.

수국은 고구려 국왕의 입조를 요구하며 최후통첩까지 보냈지만 먹혀들지가 않았다. 고구려는 위기의식을 크게 느낄수록 도리어 비장한 각오와 거국적인 단합을 이뤄내는 결과를 빚었다.

문루 위에선 각 부의 우태들이 대기한 채 수국에 대한 성토를 했다.

"미치광이 양광이 한 바탕 지랄을 칠 모양인데 나는 벌써부터 몸이 근질거려서 참을 수가 없군!"

계루부 우태 고돌기(高乭起)의 말에 다른 우태들도 한 마디씩 했다.

"양광, 이놈아, 올 테면 빨리 오거라."

"13년 전 양광의 애비인 양견도 멋모르고 요하를 건넜지. 그러나 혼쭐이 나서 도망쳤지! 나는 그때 양견의 목을 베지 못한 게 천추의 한이었다. 이번엔 그 자의 아들인 양광의 목을 내손으로 베어놓겠다."

남부 우태 길삼(吉森)은 나이를 먹은 우태들을 흘끔거리다 말했다.

"노장님들의 기개와 각오가 대단들 하십니다. 허나 지긋한 연세로 너무 과욕을 부리시단 낭패를 볼 수도 있습니다. 양광과 대결은 젊은 축에 맡겨 두시고 뒤로 물러섬은 어떻겠습니까?"

고돌기는 빈정대는 소리로 들려서 벌컥 화를 냈다.

"누구보고 물러서란 말인가?"

"양광은 애비와는 다른 자로 만만하게 봐선 안 되어 한 말입니다."

을지문덕은 길삼의 말에 동감하듯 미소를 지었다.

양광은 황하(黃河)와 장강(長江)을 잇는 통제거(通濟渠)와 영제거(永濟渠) 운하를 팠다. 백성들은 사치와 방탕에 젖은 황제가 유람선을 띄우고 놀려는 걸로 알아 원망했다. 그러나 나중엔 그렇지가 않음을 알게 되었다. 운하의 완성으로 교통의 획기적인 변화가 일어났다. 남북 간의 물자 교환이 원활해진 만큼 전쟁을 수행하는 일도 유리해졌다.

을지문덕은 우태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양광은 지난 3년간 운하를 통해 남쪽의 곡식과 군수 물자를 탁현의 별궁으로 꾸준히 옮겼고 전국에 병력 징발령도 내렸소. 전쟁 물자도 충분히 비축된 만큼 명년 초에 발진할 걸로 예상이 되오."

양광은 즉위 초부터 전쟁 준비를 했다. 먼저 동돌궐을 굴복시켜 고구려 침공 시 배후에서 준동을 못하게 만들어 놓았다. 뿐더러 서역과 교역의 거점인 돈황(敦煌)을 손에 넣었다. 그 이유는 고구려의 생명줄인 서역과 교역로를 차단해 약화시킬 목적이었다.

우태들은 그런 설명에 고개를 끄덕이는데 고돌기만 반발하듯 물었다.

"합하, 양광의 협박에 벌벌 떨 우리가 아니잖습니까?"

그 말에 다른 우태들도 한 마디씩 했다.

"암, 고구려는 30만 정예 갑병이 있습니다."

"우린 무기와 식량 비축도 넉넉함으로 기 죽을 게 없습니다."

"암, 수국과 자웅을 겨룰 만한 나라는 고구려밖에 없소."

을지문덕은 그런 말만 하는 우태들에게 다시 입을 열었다.

"양광은 새외민족들에게도 병력 지원을 요구하고 있소. 동돌궐을 비롯해 거란, 해, 유연, 선비족들이 병력 지원을 강요당하고 있소."

고돌기는 그 말에 개의치 않는 듯 말했다.

"합하, 양광이 아무리 많은 병력을 동원한다고 해도 그건 전부 오합지졸에 지나지 않습니다. 급조로 꾸린 병력은 두려울 게 없습니다."

북부의 상가인 하온장(霞溫仗)이 물었다.

"합하, 아국은 수국과 맞서기엔 병력이 태부족인 형편입니다. 어떻게 해서든 판도내 이민족들 병력 지원을 얻어내지 않으면 안 됩니다. 합하께선 이민족들로부터 병력을 지원을 얼마나 얻을 수 있다고 보십니까?"

"나는 이미 말갈을 위시해 지두우, 두막루, 실위 등에 병력 지원을 요청했소. 그러나 이번 순방을 통해 지원을 촉구하고 협조를 이끌어내려고 하나 5만여 병력을 기대하기도 어렵겠다는 판단이요."

우태들은 그 말에 표정이 좀 어두워졌다.

그때 왕제인 건무가 남문 앞 광장에 도착했다.

건무는 6척 장신에 이목구비가 뚜렷한 풍모였다. 이복형인 국왕의 신임이 두텁고 군사 작전에도 능하단 평을 받고 있었다. 을지문덕은 계단을 절반쯤 내려가서 그를 맞았다.

두 사람은 나란히 문루 난간 앞으로 나섰다. 광장의 남정네들은 일제히 환호성을 질러댔다. 그 이유는 출신 배경이 판이한 두 사람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을지문덕은 특유의 낭랑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대왕 폐하의 명을 받들어 오늘부터 판도순무에 나선다. 기간은 1개월, 1만 7천 리 여정이다. 수국은 요서의 길목인 탁군에 백만 대병을 집결시키기 시작했다. 양광은 명년 봄에 국도를 떠나 근위군을 끌고 탁군에 도착하는 대로 침공을 개시하게 될 것으로 본다."

남정네들은 수국이 동원할 병력이 백만이란 말에 몸들이 위축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갑자기 광장은 숙연해지고 을지문덕은 말을 이었다.

"순무는 판도내 중요 요새지의 점검과 이민족의 협조를 구축할 목적이다. 장정들은 대왕 폐하께 충성을 바치고 건무 저하를 중심으로 전쟁에 대비할 준비와 각오를 다져 주기 바란다."

을지문덕은 훈시를 끝낸 뒤 건무와 함께 병단을 사열했다.

양신은 을지문덕의 호위무사(護衛武士)로 사열하는 두 사람의 뒤를 따르게 되었다. 을지문덕은 백기의 서찰로 양신이 조국을 떠났던 사연을 알고 자신의 휘하에 둬 보호를 해 주기로 했다. 때문에 신분을 감추고자 새로 약광(若光)이란 이름을 새로 지어 쓰게 했다. 만약에 도해선이 양신이 장안성에 있는 걸 알게 되면 해를 끼칠 수도 있다는 판단에 그동안 자기 집안에서만 머물게 했었다.

양신은 여선이 같은 장안성 하늘 아래 있음을 생각하면 괴롭기가 그지없었다. 그런데 오늘은 원망의 대상인 건무와 마주치게 되었다. 건무가 을지문덕과 병단을 사열하는 동안에 수행을 하며 따랐다. 여선을 빼앗은 사내에 대한 적의를 품이 부글부글 끓어오르면서도 한편으론 자신이 너무도 초라하고 무기력한 존재임을 절감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사열이 끝나고 순무병단은 즉각 발진했다.

양신은 시동(侍童)인 연개소문(淵蓋蘇文)과 함께 말을 타고 을지문덕의 뒤에 붙었다. 그런데 착잡한 심경으로 말을 몰고 있는 양신의 곁으로 계루부의 우태 고돌기가 다가들었다.

"호위무사, 표정이 왜 그렇게 시무룩한가?"

고돌기는 얼굴 전체가 부얼부얼한 수염으로 뒤덮인 호남아 형이었다. 그는 벌써부터 처음 보는 양신에게 궁금증을 느끼고 있었다.

"호위무사, 혹시 장안성에 예쁜 처자라도 두고 왔는가?"

양신은 엉뚱한 질문을 받고 고개를 가로 저었다.

"아닙니다."

"아니라면 없다는 말인가?"

고돌기는 대꾸를 잘 하려고 않는 양신을 상대로 수다를 떨었다.

"내가 첫 출정을 한 때는 장가를 든 지 열흘 만일세. 아내와 헤어지기가 싫어 도무지 발길이 떨어지질 않았네. 싸움터로 나갔으나 아내 생각 때문에 제대로 싸울 수가 없는 지경인데 염병할 놈의 적은 너무 강했네. 싸움은 빨리 끝낼 수가 없었고 아내가 보고 싶어 죽을 맛이었지. 그 때가 엊그제 같은데 좋은 시절은 다 가고 말았다."

양신은 입을 꾹 다물고만 있고 고돌기의 음성이 은근해졌다.

"장안성 처녀들은 눈들이 삐었는가? 호위무사처럼 잘 생긴 신랑감을 그냥 내버려 두고 뭣들을 하지? 내가 참한 처녀를 얻어 줄까?"

그 말을 연개소문이 받았다.

"우태님, 제게도 예쁜 처녀를 하나 얻어 주십시오."

"나는 예쁜 딸을 여럿 두었으나 자넨 난봉기가 있어 안 돼."

고돌기의 대꾸에 연개소문은 실쭉했다.

"호위무사는 출신지가 어딘가?"

양신이 여전히 대꾸를 않자 이번에 을지문덕이 돌아다 봤다.

"약광은 백제국 사람이요."

을지문덕은 얼결에 대꾸를 했고 고돌기는 또 물었다.

"합하, 백제인을 어찌 우리 군문에 들이게 되었습니까?"

"호위무사는 고구려에 귀화를 했소."

"합하께선 타국과 교류가 넓기로 소문이 나신만큼 여러 나라 무사를 다 거느리시는군요? 그런데 백제인이 귀화를 한 이유는 뭡니까?"

"그럴만한 사정이 있소. 그에 관한 얘기는 나중에 하기로 합시다."

고돌기는 그 말에 제자리로 돌아갔다. 임시변통의 말을 한 을지문덕은 뒤를 돌아다보고 양신에게 말했다.

"고돌기 장군은 좀 변덕스런 데가 있지만 잘 대해 드리게나."

"합하, 그렇게 하겠습니다."

정오께 순무병단은 살수(撒水) 변으로 접근했다.

근처에 있는 봉수대에선 한 줄기의 연기를 피워 올렸다. 을지문덕은 부장인 해수에게 우태들을 한 자리에 집합시킬 것을 지시했다.

을지문덕 앞으로 모여든 우태들은 계루부의 고돌기를 비롯해 서부의 연생수(淵生樹), 동부의 불황(弗黃), 남부의 길삼(吉森)이고, 북부만은 상가인 하온장이 참가하고 있었다. 을지문덕은 우태들에게 입을 열었다.

"오늘은 살수 변에서 점심을 먹고 휴식을 취한 뒤 야영을 하겠소. 지금부터 전군은 살수 변까지 속진에 들어가오. 우태들은 각자 돌아가서 준비를 하고 명령을 기다리시오."

"옛! 합하."

우태들은 군례를 붙이고 흩어졌다. 그 때부터 각부마다 전원이 분주한 움직임을 보였다. 투구를 눌러쓰고 안장을 조여 매고 대기를 하고 있는데 드디어 을지문덕의 명령이 떨어졌다.

"속진!"

명령을 복창하는 우태들의 음성이 여기저기서 터졌다. 군관들은 일제히 말고삐를 챘다. 추수를 끝낸 들판에 5백여 기의 경마(競馬)가 시작되었다. 지축을 울리는 말발굽 소리와 흙먼지가 일어났다.

집단 말달리기는 실타래가 풀려나가듯 선두는 가늘게 뻗치는 형용으로 변해갔다. 평소에 승마 연습에 충실했거나 체력이 강한 자는 앞섰고 그렇지가 못한 자들은 점점 뒤로 처졌다.

군관들은 희희낙락 말채찍을 휘두르고 기성도 질러댔다. 쌀쌀한 바람을 가르며 달리는 군마들은 몸뚱이가 땀으로 번질거리는 가운데 선두와 후미 사이는 더욱 거리가 벌어지기만 했다.

양신과 연개소문은 선두에서 달렸다. 선두는 병목처럼 좁고 길었지만 중간부터는 배가 부른 모양이 되고 후미는 다시 가늘어져 전체적으론 커다란 호리병 같은 형태를 이루게 되었다.

군관들 중에선 직위가 높을수록 대부분이 뒤로 처지고 있었다. 그 중 우태들은 거의가 후미에서 엎치락뒤치락 하는 형편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속력을 내려고 해도 쫓아갈 수는 없었다.

가장 후미에 있는 을지문덕은 전체적인 흐름을 살폈다.

우태와 고위 장수들은 그런 을지문덕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체면 때문에 꼴찌는 면하려고 안간힘을 썼으나 그 중에서도 고돌기는 거의 포기상태로 중얼거렸다.

"을지문덕이 벌써부터 혼찌검을 안길 심보로군!"

선두는 이미 살수 변에 당도해서 달리기를 멈춘 말들은 숨찬 코투레를 틀고 있었다. 고돌기는 자욱한 흙먼지 속에서 맨 꼴지로 당도하자 우태들 사이로 끼어들며 불평을 했다.

"합하가 벌써부터 심술을 부리니 앞으로 좋이 애를 먹겠어!"

그 말에 연개소문이 입을 열었다.

"우태님은 뒤에서 일등을 하셨군요?"

고돌기가 눈을 부릅뜨며 호통을 쳤다.

"시동, 나는 아직 끄떡없다."

동문서답 같은 대꾸를 하고 숨찬 목소리로 수다를 떨었다.

"나는 스무 살 나던 해 돌궐군과 처음 싸웠다. 그때 내 애마는 발목이 부러져서 탈 수가 없게 되었다지. 내가 어찌 했는지 아는가? 말을 들쳐 메고 적진으로 돌진했어. 그러자 놀란 적들은 혼비백산 도망을 쳤다."

을지문덕이 빙긋이 웃으며 한 마디 했다.

"그랬던 대장군이 그간에 훈련을 너무 게을리 했던 모양이 아니오?"

핀잔을 듣고 난 고돌기는 쑥스러운 듯 희죽 웃었다.

말들은 저희들끼리 목을 축이려고 살수 변으로 몰려갔다. 군관들은 식사 준비를 하려고 여기저기서 모닥불을 피우기 시작했다.

을지문덕은 해수, 양신, 연개소문만 데리고 다시 서남쪽으로 떠났다. 일행은 얼마 가지 않아 나직한 구릉으로 오르게 되었다. 거기선 서한만(西韓彎)의 바다가 한 눈에 들어왔다.

갯벌엔 바둑판처럼 구획을 지은 염전(鹽田)들이 펼쳐져 있었다. 양신은 그런 광경을 처음 보는 터라 물었다.

"합하, 해변에 밭들처럼 구획을 지어 놓은 데가 있군요?"

연개소문이 대답했다.

"약광님, 저긴 소금을 만드는 염전이요. 처음 보았소?"

양신이 고개를 끄덕이자 을지문덕이 설명을 했다.

"서한만은 간만의 차가 크고 일조량이 많아 고구려의 최대 소금 산지로 손꼽힌다. 소금은 철제품 다음으로 중요한 교역 품이기 때문에 왕실에서 직접 관장을 하고 있다."

양신은 조국으로 돌아올 때 탔던 백제 상선에 각종 물자가 실렸는데 그 중에는 다량의 소금도 실려 있는 것을 봤다.

"합하, 소금은 백제에서도 많이 난다고 들었습니다."

"백제는 우리보다 생산량이 훨씬 많다. 우리 소금은 북방의 유목민들에 공급을 하지만 백제는 주로 수국의 장강 이남으로 가져다 팔아서 큰 수익을 낸다. 특히 말갈족은 우리 철제품과 소금에 의지하고 있다."

양신은 을지문덕 곁에 있은 지가 얼마 되지 않았으나 여러 가지로 배우는 점이 많다는 생각을 했다. 염전을 관리하는 염청(鹽廳)에 당도하자 염좌(鹽座)인 을불(乙彿)이 나와 맞았다.

"합하, 어서 오십시오."

"을불, 오래간만일세."

을지문덕은 을불에게 양신을 소개했다.

"내 호위무사인 약광일세."

양신은 40대 중반으로 보이는 을불에게 허리를 굽혔다.

"처음 뵙겠습니다. 약광이라고 합니다."

"내 이름은 을불이요."

을불은 한 눈에 양신이 무예를 지닌 자임을 알아봤다. 을지문덕은 양신에게 을불을 소개했다.

"약광, 을불 염좌의 검술은 서한만에서 첫 번째로 꼽히네. 고구려의 뱃사람들치고 을불 염좌를 사부로 받들지 않은 자가 없네. 유사시 뱃사람들은 배를 타고 싸우게 되는데 아국의 수군이 강한 이유도 검술을 지녔기 때문일세. 을불 야좌는 앞으로 수군을 맡아 이끌게 되었다."

"합하, 과찬의 말씀을 다 하십니다."

을불이 낯을 붉히자 을지문덕이 물었다.

"염좌, 내가 지시한 일은 잘 진행되고 있는가?"

"합하의 분부대로 정염 2백 가마를 선적하고 대기 중입니다."

"이번 소금 운송은 극비리에 행해야 하네."

"합하, 그렇지 않아도 요즘에 요동 반도 남단과 요하(遼河) 하구에서 수국 선단이 이쪽으로 자주 출몰하고 있습니다. 그에 대한 경계도 철저히 하고 있습니다."

"나는 염좌만 믿겠다. 매사를 철두철미하게 처리해서 나로선 마음이 든든하네. 이번에 출항할 소금 배엔 호위 무장선을 붙이도록 하게."

"합하, 그렇게 하겠습니다."

"순무 병단은 국내성과 요동성을 거쳐 요하를 끼고 북상할 예정이다. 닷새 뒤쯤 요동성에 도착하게 될 것이다. 염좌도 그 때를 맞춰서 요동성에 차질 없게 당도할 수 있어야 하네."

"합하, 명령을 차질 없게 수행하겠습니다."

"나는 갈 길이 바빠 이만 떠나야 하겠다."

을불은 좀 섭섭한 표정으로 입을 떼었다.

"합하, 모처럼 뵙는데 점심 한 끼라도 대접하고 싶습니다."

"고맙지만 시간이 없어 떠나야 하네. 순무로 돌입한 이상 이제부턴 비상식량에 익숙해지려고 하네. 수고를 하게."

을지문덕은 곧장 말에 올라 그곳을 떠났다. 연개소문은 점심을 먹고 갈 줄 알았다가 그러질 않자 뿌루퉁해 있는데 양신이 말을 걸었다.

"시동, 앞으로 갈 요동 땅에 대해 아는 점을 듣고 싶네."

"약광님은 요동성을 가본 적이 없소?"

"못 가봤네."

"요동 땅은 인총이 많은 편이요. 때문에 유사시 병력을 가장 많이 동원할 수가 있어 매우 중요시하오. 고구려 사람은 요동에서 나는 곡식이 아니면 먹고 살기가 힘들 지경이란 말이 있을 만큼 곡창지대요. 뿐만 아니라 중원과 교역을 많이 해서 백성들이 윤택한 삶을 누릴 수가 있소. 요동성은 그런 땅의 중심이고 소노부의 주성이기도 하오."

을지문덕은 연개소문을 돌아다보면서 한 마디 했다.

"시동, 제법 자랑을 잘 하는데 한 가지 더 알아 둘게 있다."

"합하, 한 가지 더 알아야 둘 건 무엇입니까?"

"땅은 사람에게 이로움을 준다. 그러나 사람은 땅에 해로움을 끼칠 때가 많다. 내가 말하려는 뜻은 사람들이 땅을 쓸모 있게 만들기도 하지만 쓸모가 없게 만들기도 한다는 점을 강조하려는 뜻이다."

"합하, 그러시면 사람은 땅을 놓고 어떻게 해야 한다는 말씀입니까?"

"사람들은 땅을 얻는 데만 힘을 쓸게 아니라 있는 산천을 잘 관리하고 유지하면서 유용하게 쓰는 쪽으로 더 힘을 기울여야 한다는 말이다."

"합하, 저도 사람이 첫째고 땅은 두 번째라고 생각합니다."

"시동이 그런 생각을 한다면 대견한 걸? 그렇다면 땅 다음으로 중요시 해야 할 것을 든다면 무엇을 치겠는가?"

"저는 군사력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군사력도 중요하다. 그러나 땅 다음으로 중요시할 것은 바다이다. 특히 고구려는 대외교역을 매우 중요시한다. 지금까진 주로 육로를 의존을 해왔지만 앞으론 바닷길의 개척에 더욱 힘을 써야 한다."

"합하, 왜 바닷길 개척을 중요시해야 한단 말씀입니까?"

"고구려는 육로보다 해로를 통한 교역을 더 늘려나가야 한다. 그러므로 이제부턴 해로를 개척하는데 더욱 힘을 쏟아야 할 것이다."

"합하, 해로는 어떻게 개척을 해야 된다는 말씀입니까?"

"해로는 육로보다 위험이 크고 애로가 많다. 배가 항해를 할 땐 바다의 깊이, 조류, 수온, 간만의 차이, 암초 등에 관한 지식들을 갖추어야 한다. 그런 면에서 을불 염좌는 고구려의 보배로 보고 있다."

"합하, 을불 염좌를 왜 보배로 보십니까?"

"고구려에선 을불 만큼 바다와 항해에 관한 지식을 많이 지닌 자가 없다. 바닷길을 훤히 꿰뚫고 있을 뿐만 아니라 각국의 뱃사람들과 교류가 넓어서 통하는 사람들이 많은 만큼 타국 소식에도 발기 때문이다."

"을불 염좌가 그런 훌륭한 분인 줄은 몰랐습니다."

"약광과 소문은 을불을 자주 만나서 많이 배우길 바란다."

일행은 펀펀한 해안을 끼고 어디쯤을 지나다 해수가 입을 열었다.

"합하, 저기를 좀 보십시오."

을지문덕은 해수가 가리키는 곳을 바라보며 말을 세웠다.

"멈춰라."

모두의 시선이 한 군데로 집중되었다. 멀지 않은 해안가 솔밭 속에서 웬 사내가 불을 피우고 있는 게 보였다.

"합하, 저 쪽도 이상합니다."

해수는 해안에서 멀지 않는 곳에 있는 작은 섬을 가리켰다. 그 섬에는 범선 한 척이 숨어있듯 정박해 있었다.

"합하, 저 배는 고깃배로 보이지가 않습니다."

"나도 그렇게 보인다. 두 폭 돛을 세운 걸 보면 상선인 것 같다."

"상선이 왜 저런 곳에 정박하고 있을까요?"

연개소문의 말을 받아 해수가 입을 열었다.

"합하, 해안가 숲 속에도 여러 명의 사내들이 보입니다."

백사장을 끼고 심어놓은 방풍림 속에도 사내들 대여섯 명이 보였다.

"저 자들이 저기서 무슨 일을 하고 있는 걸까?"

을지문덕이 중얼거리는데 해수가 다시 범선 쪽을 가리켰다.

"합하, 고구려 배가 아닌 것 같으니 소장이 알아봐야 하겠습니다."

"그렇게 하라."

해수가 달려 나가자 을지문덕은 연개소문에게 일렀다.

"시동, 급히 염청으로 돌아가 병력을 출동시켜라."

연개소문은 명령을 받고 급히 오던 길로 말을 몰아 달렸다.

그때 방풍림 속에서 불을 지피던 사내가 해수가 다가드는 걸 보고 숲 속에 있는 동료들을 향해 무어라 외쳤다. 을지문덕은 그들이 쓰는 말이 한어임을 알고 양신에게 말했다.

"저들은 수상한 자들이다. 약광, 날 따라오게."

을지문덕은 해수가 있는 데로 향하다 무슨 생각을 하고 걸음을 멈추었다. 숲 속에 있던 건장한 사내들이 해수를 둘러싸고 있었다.

해수는 사내들에게 물었다.

"너희들은 뭘 하는 자들인가?"

사내들 중에서 연장자가 앞으로 나섰다.

"어부요. 고기잡이를 나가려던 참인데 우리에게 무슨 볼일이 있소?"

40대 중반의 연장자는 고구려 말로 대답했다. 해수는 그 자의 행색을 면밀히 살피다가 다시 물었다.

"어느 방에 속하는 어부들인가?"

연장자는 그 질문에 대답을 못했다.

"그대들은 한족으로 보이는데 그렇지?"

해수의 말에 연장자가 어깨를 으쓱했다.

"그렇소. 우린 등주에서 온 상인들인데 소금을 사려고 상륙했소."

"소금은 포구에서 거래하는 것인데 왜 여기에 상륙했는가?"

"요즘 귀국과 불편한 관계라 여기서 상륙했소."

연장자는 변명을 하다 말끝을 흐렸다.

"아무래도 너희들을 연행해서 신문을 해봐야 하겠다."

해수의 말에 연장자는 갑자기 태도가 돌변했다.

"흥! 우리를 신문하겠다니? 누구 맘대로?"

연장자는 주위를 살펴보고 고구려 군인이 단 세 명뿐이자 태도가 자못 뻣뻣해졌다. 해수는 경계심을 품으면서 엄포를 놓았다.

"건방진 자들이다! 순순히 따라 오지 않으면 강제로 연행하겠다."

"어디, 해볼 테면 해 보라지."

연장자는 당황하기는커녕 가소롭다는 표정이었다.

해수가 눈을 부릅떴지만 수적으로 우세한 한족은 느긋한 태도를 보였다. 한족들 중 사팔뜨기가 연장자에게 한어로 말했다.

"큰 형님, 고구려에 왔다가 빈손으로 돌아가는 게 꽤나 아쉽던 참입니다. 고구려 장수를 끌고 가서 물 깃는 일을 시키면 어떻겠소?"

을지문덕은 좀 떨어진 데서 그 말을 알아듣고 양신에게 지시했다.

"약광, 빨리 해수부장을 호위하게. 을불의 병력이 올 때까지 되도록이면 시간을 끌고 있게."

"예, 합하."

연장자는 자기들 쪽으로 천천히 다가드는 을지문덕에게 눈을 돌렸다. 그리고 고구려 말로 지껄였다.

"고구려 군인들은 우릴 못 본 척하고 여길 떠나는 게 좋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중원 땅으로 끌고 가게 될 것이다."

그때 멀리 떨어진 곳에 있는 범선은 작은 배를 바다에 내려놓고 2명이 올라탔다. 그들은 해안을 향해 노를 젓기 시작했다. 파도가 거세어 해안에 도달하려면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았다.

을지문덕은 한족들의 숫자를 세어보았다. 총 6명인데 거기에 2명이 더 합세하면 8명이 되었다. 해수는 그런 한족들을 향해 엄포를 놓았다.

"마지막 경고다. 순순히 항복하지 않으면 목숨을 잃을 것이다."

연장자는 빈정거리는 투로 받았다.

"너야 말로 순순히 말에서 내리려무나. 그러지 않으면 목숨을 잃거나 내 손에 강제로 끌려가게 될 것이다."

해수는 장도를 뽑아들고 말았다. 그러자 연장자도 소매 속에서 칠절편을 꺼내들었다. 그것을 보고 다른 자들도 각자 품에 숨겨두었던 단병기(短兵器)들을 하나씩 꺼냈다.

한족들이 지닌 단병기는 종류가 다양했다. 얼굴이 가무잡잡한 사내는 구환도를 거구의 사내는 파풍도를 뚱보는 건곤도를 말라깽이는 비추도를 사팔뜨기는 삼절도를 지니고 있었다.

을지문덕은 한족들이 단병기를 지닌 걸로 봐서 무술이 만만치 않을 것으로 판단했다. 때문에 마음이 초조했다. 그러나 을불이 얼른 병력을 끌고 오기만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해수, 맞서지 말고 신중히 대처하게."

을지문덕은 시간을 끌기 위해 해수에게 움직임을 자제할 것을 권했다. 그러나 거친 전쟁터를 누벼온 해수는 공격 근성이 몸에 배였고 욱하는 성미는 가만히 있게 만들지를 않았다.

"이놈들아,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르는구나? 당장 무릎들을 꿇지 않으면 목을 베어놓겠다."

한족들은 코웃음을 치듯 해수와 양신을 빙 둘러쌌다.

"목을 베겠다고? 어디 해 볼 테면 한번 해봐라."

연장자가 고구려 말로 이죽대자 해수는 말배에 박차를 가했다. 장도를 휘두르며 덮쳐들었다. 그러나 연장자는 날렵하게 칠절편을 휘둘러 막아낸 뒤 슬쩍 비켜서 버렸다.

공격에 실패한 해수는 급히 말머리를 돌렸다. 그 순간 가무잡잡이가 해수에게 덤벼들었다. 그때 양신의 밀두도가 가무잡잡이의 손에 들린 구환도를 내리쳐서 막아놓았다.

가무잡잡이는 어찌나 센 타격을 받았던지 하마터면 구환도를 놓칠 뻔했다. 그는 놀라서 몇 걸음 뒤로 물러섰고 그와 동시에 거구와 말라깽이가 한꺼번에 양신에게 공격을 가했다.

양신은 마상에서 몸을 자유자재로 움직이기가 불편했다. 여러 명을 상대하자면 지상이 좋겠다는 판단에 말에서 훌쩍 뛰어내렸다.

"약광, 말에 오르게."

해수가 다급하게 외쳤지만 양신은 듣지 않았다.

"저는 괜찮습니다."

"저들은 숫자가 많다."

해수는 만만히 볼 자들이 아님을 알기에 마상에 그대로 앉아서 방어할 태세만 취했다. 한족들은 땅바닥으로 내려선 양신을 보고 잘 되었다는 듯 서로 눈짓들을 나누며 둘러쌌다.

양신은 한족들에게 둘러싸인 채 칼자루를 이마 높이로 세웠다. 그리고 천천히 걸음을 옮기자 한족들의 포위망도 따서 움직였다. 그로인해 마상의 해수는 자연스레 포위를 벗어나게 되었다.

한족은 수적으로 많았지만 단병기들 뿐이라 장도를 상대하기는 매우 불리했다. 그러나 중원에선 무예로 이름이 알려진 고수들이었다. 한번 붙어보자는 태도를 서서히 취했다.

양신의 입에서 엉뚱한 질문이 흘러나왔다.

"부장님, 살생을 저질러도 되겠습니까?"

해수는 양신의 말에 어이가 없다는 듯 호통을 쳤다.

"무슨 소린가? 적들인데 당연하지 않는가?"

"저는 살생만은 피하고 싶습니다."

"약광, 지금 한가한 소리나 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연장자는 두 사람이 나누는 말을 알아듣고 피식 웃고 동료들에게도 그 말을 한어로 통역하자 일제히 웃어 제켰다.

"동생들, 사정이 급하니 얼른 패잡고 떠나야 하겠다."

연장자는 점잖을 떨듯 말하자 사팔뜨기가 신중한 태도로 나왔다.

"큰 형님, 애송이지만 상대해 보니 만만히 봐선 안 될 것 같습니다."

"뭐가 그렇게 두려워서 그런단 말인가?"

"저 놈의 칼을 한번 받아봤는데 어찌나 센지 팔이 저려왔습니다."

"그 정도로 세다고? 내가 한번 상대를 해 볼까? 도장의 군불 지피기는 맨 날 내 차지인데 저 놈을 잡아다가 대신 일을 시키면 되겠다."

거구가 그렇게 말을 받자 말라깽이는 그를 나무랐다.

"쓸데없는 소리로 노닥거릴 틈이 없어."

이때 멀리서 바라보던 을지문덕이 한어로 소리쳤다.

"한아들아, 숨어들긴 쉬웠으나 마음대로 빠져나갈 수는 없다."

연장자는 을지문덕의 말을 받아쳤다.

"높은 양반 같은데 멀찍이 서 있지 말고 함께 덤벼라."

그 순간 눈길을 나눈 거구와 뚱보가 동시에 양신을 공격했다. 밀두도가 다시금 갈지자를 긋자 거구가 땅바닥을 나뒹굴었다. 고꾸라질 뻔했던 뚱보는 겨우 몸을 가누고 물러섰다.

연장자는 그 모양을 안색이 변했다. 그러나 이번엔 가무잡잡이 양신을 재차 공격했다. 양신의 밀두도는 내리치고 거슬러 붙는 반격을 가했다. 가무잡잡이 땅바닥을 나뒹굴자 연장자는 급히 몸을 뺐다.

가장 먼저 쓰러진 거구는 아직도 모래 바닥에 얼굴을 처박고 있었다. 그러나 가무잡잡은 겨우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러나 두려움에 찬 얼굴로 양신에게서 떨어지려 듯 뒷걸음질을 쳤다.

연장자도 크게 당할 뻔했던 터라 안색이 창백해졌다. 상대가 어딘지 살의를 품지 않았기에 망정이지 그랬다면 자신의 명줄도 황천에 들었을 것으로 생각되어 간담이 써늘했다.

한족들은 모두 등골이 오싹할 만큼 충격을 받은 터라 땅에 서 있기는 하지만 두려움을 느껴 전의를 상실할 지경이었다. 연장자는 모래바닥에 얼굴을 처박은 거구를 일으켜 세웠다.

연장자는 양신을 나이가 어려 보여 얕보았다가 대단한 검술 실력에 기가 질려 난감한데 이때 말라깽이가 해수에게 비추도를 날렸다.

"억!"

마상의 해수는 상체를 푹 꺾었다. 비추도가 꽂힌 허벅지에서 선혈이 터져서 모래 바닥에 뚝뚝 떨어졌다. 해수는 고통을 참으려고 일그러진 얼굴로 말 잔등에서 겨우 버티고 있었다.

양신은 그 광경을 보고 선 자리에서 급히 몸을 날렸다. 허공에서 발길질로 뚱보를 걷어차자 뚱보는 다시금 바닥을 나뒹굴었다. 연장자를 비롯해 한족들은 모두 안색이 변해 버렸다.

한족들은 쓰러진 뚱보가 일어설 기미를 보이질 않자 이젠 걱정하는 눈빛으로 연장자 곁으로 모여들었다. 공동으로 대응할 태세를 취하려는 것 같으나 더는 싸울 자세를 보이지 않았다.

양신은 살상만은 피하려고 치명타를 입힐 가격은 자제해서 그 정도로 끝이 났다. 그러나 다수인 적을 혼자서 감당을 하자면 더 이상 관대한 태도만 취해선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다 적은 작은 배를 탄 2명이 해안으로 접근해들고 있었다. 한족들도 그 쪽으로 연방 눈길을 주면서 빨리 오기를 바라는 눈치들이었다. 2명이 더 가세를 하면 사정이 달라질 판이었다.

을지문덕은 상황이 어려워지겠단 판단에 더욱 다급하고 불안해졌다. 그런데 연장자는 다시금 전의를 불태우려 듯 칠절편을 감아쥐었다. 나머지도 눈길을 나누며 각자 단병기를 쥐었다.

양신은 한족들이 다시금 집단 공격에 나설 태세를 취하자 번개처럼 선제공격으로 들어갔다. 순식간에 한족 2명을 쓰러뜨렸으나 그 순간에 말라깽이가 던진 비추도가 날아들었다.

"윽!"

입에서 신음이 터지고 오른 쪽 팔뚝에서 피가 솟구쳤다. 다행히 뼈까진 손상을 입히지 않은 듯했다. 재빨리 오른 손의 밀두도를 왼 손으로 옮겨 잡을 수밖에 없었다.

말라깽이는 비추도를 던지고 빈손이 되자 쓰러진 뚱보의 파풍도를 얼른 집어 들었다. 연장자는 큰 부상을 입고 고통스러워하는 양신을 보면서 칠절편을 천천히 감아쥐면서 미소를 머금었다.

더욱이 해안에 닿은 배에선 2명이 뭍으로 올랐다. 해수는 마상에서 허리가 꺾인 채 겨우 몸을 지탱하고 있었다. 매우 절박해진 위기 속에 양신은 해수를 향해서 외쳤다.

"부장님, 합하를 모시고 빨리 여길 떠나십시오."

연장자는 그 말을 듣고 또다시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곁에 있는 말라깽이한테 눈짓을 하자마 함께 공격으로 들어갔다. 그 순간 부상을 당한 양신은 몸을 공중으로 솟구치더니 말라깽이를 발길질로 쓰러뜨렸다.

말라깽이는 양신이 걷어 찬 발길질이 얼마나 강했던지 몸에서 뼈가 부러지는 소리가 우두둑하고 일어났다. 연장자는 급히 뒤로 물러섰고 양신은 고통 속에 허리를 꺾고 숨을 헐떡였다.

한족들은 몇 차례의 공방전을 치르고 나자 모두들 몸이 굳어졌다. 그도 그럴 것은 6명이 단 1명을 당해내지 못했다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이젠 배에서 내린 2명이 다가오기만은 기다릴 뿐이었다.

그때 연장자 곁에 서 있던 사팔뜨기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그 때까지 마상에서 엎드러져 있던 해수가 어느 틈에 올가미를 던져서 목을 감에 건채 채찍을 쳐서 말이 뛰기 시작했다.

한족들은 목이 매인 채 사팔뜨기가 모래바닥을 끌려가자 기겁을 했다. 몸부림을 치는 동료를 보고 연장자는 배에서 내려서 다가온 2명의 동료들에게 다급히 소리를 질렀다.

"너희들은 빨리 쫓아가서 구해라!"

을지문덕도 그 말을 듣고 가만히 있지 않았다. 활에 화살을 메겨 쫓아가려는 2명을 향해 쏘았다. 1명의 팔뚝에 화살이 꽂혔고 남은 1명은 겁을 먹은 채 그대로 땅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연장자는 엎드린 동료에게 야단을 쳤다.

"빨리 일어서지 못하겠는가?"

을지문덕은 다시 활에 화살을 메긴 채 한족들에게 접근했다.

"합하, 가까이 오시면 위험합니다!"

양신의 외침에 연장자는 놀라면서 돌아다보았다. 그는 지금까지 멀리 떨어져 지켜보기만 하던 자가 고구려의 국상임을 알았다. 말라깽이도 사뭇 놀라는 표정으로 물었다.

"큰 형님, 저 자가 정말 고구려 국상일까요?"

"허리에 다섯 자루 패도를 두른 것을 보니 분명하다."

연장자는 을지문덕을 향해 물었다.

"그대가 고구려 국상인 을지문덕인가?"

"그렇다. 이제부터 내가 너희들을 상대해주마."

을지문덕은 양신마저 싸울 수가 없게 되자 자신이 나설 수밖에 없었다. 매우 불리한 상황이나 그렇게라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마침 활을 지니고 있어 마상에선 유리한 면이 있었다.

연장자는 화살을 메기고 자기들 쪽을 겨누는 을지문덕이 더욱 가까이 접근해 주기만을 바랐다. 그런데 을지문덕은 일정한 거리를 두고 걱정하는 눈길로 양신을 살피기만 했다.

을지문덕은 양신의 상처를 보고자 좀 더 접근하려고 들었다. 그 순간 연장자는 새로 온 동료의 장도를 뺏어들었다. 그리고 이번엔 자신감이 도는 미소를 지으며 을지문덕을 향해 입을 열었다.

"고구려 국상의 목은 내가 베어가야 하겠다."

을지문덕이 활을 겨누고 있지만 연장자는 화살쯤은 막을 자신이 있다는 태도로 접근해 들었다. 을지문덕은 그런 연장자 앞에선 피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하며 양신에게 소리쳤다.

"약광, 내게로 와서 말에 오를 수가 있겠나?"

양신은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는 없는 지경임에도 연장자가 을지문덕에 게 하려는 공격을 막아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해수는 사팔뜨기의 몸이 축 늘어지자 내버린 뒤 을지문덕에게 외다.

"합하, 여길 빨리 떠나십시오."

연장자는 을지문덕을 생포해 가면 그보다 더 큰 군공은 없다는 생각에 동료들에게 함께 덮치자는 손짓을 했다. 그렇게 불러 모은 동료들과 합세를 하려고 들어서 을지문덕은 진퇴양난에 빠졌다. 자신이 적들에게 너무 접근한 것에 후회도 일지만 큰 부상을 당한 해수와 양신을 그냥 내버려 둘 수가 없어 무리수라도 써야만 했다.

반면 한족들은 합심하면 을지문덕을 생포할 수가 있으므로 전부가 둘러싸려고 들었다. 그때 양신은 왼쪽 팔뚝에 박힌 비추도를 오른손으로 뽑아든 뒤 연장자를 향해 힘껏 던졌다.

불시에 일격을 당한 연장자는 억 소리와 함께 땅바닥에 고꾸라졌다. 비추도가 박힌 고통으로 어쩔 줄 모르고 있지만 겁을 먹은 동료들은 그만 해안가로 도망치려 듯 뒷걸음질을 쳤다.

그러는 이유는 고구려 군선들이 해안으로 접근해 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을불의 부하들은 뭍에 오르자 순식간에 한족들을 제압해버렸다. 을지문덕은 겨우 한 시름을 놓는데 을불이 다가들었다.

"합하, 무사하셨군요?"

을지문덕은 고개만 끄덕이면서 양신 쪽으로 눈길을 주었다. 그리고 다가들면서 내심 감탄을 금할 수가 없어 말을 흘려냈다.

"이 지경의 몸으로 결정적인 가격을 가할 수가 있다니!"

"저는 합하가 걱정되어 죽을힘을 다 했습니다."

"먼저 자네 상처가 어떤지 봐야 하겠다."

"합하, 견딜 만합니다."

양신이 대답을 할 때마다 상처에서 피가 터져 나왔다. 내공으로 억제되었다 풀리면서 한꺼번에 터진 피였다. 을지문덕은 급히 자신의 옷자락을 찢어서 지혈부터 시켰다.

바다에는 고구려 군선들이 속속 당도하고 있었다. 수국 범선도 나포를 당해 선원들을 전부 끌어내렸다. 을불은 체포된 자들을 해안에 모아 놓고 나서 신문을 했다.

연개소문은 을지문덕에게 보고했다.

"합하, 한족은 사망자 2명에 나머지 6명은 중경상자들입니다."

을불은 부상을 입고 신음하는 연장자를 신문했다.

"너희들이 온 목적은 무엇이냐?"

연장자는 일그러진 표정으로 겨우 대답했다.

"저희들은 등주 상인으로 소금을 사러 왔습니다."

"그대는 날 속일 수가 있다고 생각하는가?"

"감히 속이다니요? 아닙니다."

을불은 어이가 없다는 듯 말했다.

"내가 몰라볼 타국 상인은 없다."

연장자는 그 말에 입을 다물고 말았다.

"서한만을 출입하는 타국 상인들은 날 몰라볼 자가 없다. 타국 상인들의 얼굴과 국적을 전부 파악하고 있지만 너는 처음이다."

"장수님, 저희들은 처음 장사 길에 나섰습니다."

"더 이상 변명은 하지 말라. 너희들은 아국을 정탐하러 온 수국의 첩자들이다. 소속과 임무를 사실대로 밝힐 것인가? 고문을 받을까?"

연장자는 속일 수가 없다는 듯 자백을 했다.

침입자들은 수국의 등주(登州)에 기지를 둔 내호아(來護兒) 제독 휘하에 소속된 무술 요원들이었다. 서한만의 지형과 방어시설을 탐지하러 여러 차례 드나든 전력이 있는 자들이었다.

을불은 다른 쪽에 관심을 두고 물었다.

"이번에 너희들이 침투한 목적을 숨기지 말고 다 대라."

연장자는 입을 다물고만 있었다.

을지문덕은 을불을 데리고 좀 떨어진 데로 데려갔다.

"을불, 저 자들은 우리 소금 배를 노리고 온 게 분명하네."

"합하께서도 그 생각을 하셨군요? 저도 그렇게 보고 있습니다."

"우리 소금 배를 보호할 방비책을 더욱 든든히 세우게."

"합하, 저들은 소금 배를 탈취하고자 정찰을 하려고 온 게 분명합니다. 바다에서 소금 배를 탈취하고자 함선을 동원한 것입니다."

"저들이 우리 소금 배가 뜨는 걸 어찌 알았을까?"

"합하, 이미 수국의 첩자들이 잠입해 들었을 것입니다."

"을불, 신문을 더해서 침투해 있는 첩자들까지 전부 색출해 내게. 또 다른 목적도 있는지 모르니 함께 알아내게."

"합하의 명대로 하겠습니다."

"을불, 취할 조치가 하나 더 있다."

"뭡니까? 합하."

"등주 쪽에서 우리 소금 배들을 뺏으려고 든다면 앞으로도 수국 군선들의 침입이 계속 될 것이다. 우리 군선들도 그에 대비를 철저히 할 방책을 세워야 하겠다."

"합하, 차질 없게 조치를 취하겠습니다."

"나는 살수 변으로 돌아갈 길이 바빠서 이곳에 더 머물 수가 없다. 염좌는 모든 뒤처리를 책임지고 수행한 뒤 보고하라."

"합하, 수국 첩자들에 대한 처리를 어떻게 해야 됩니까?"

"먼저 왕제께 보고하고 지시를 따르게."

을지문덕은 해수의 상처도 걱정이 되었다.

"해수, 자네는 이번 순무에 참가할 수가 없겠다. 내가 돌아올 때까지 쉬면서 치료나 잘 받도록 하게."

"합하, 소장은 계속 수행해야 하는데 죄송합니다."

연개소문은 양신의 상태를 보고 을지문덕에게 말했다.

"합하, 약광님 부상도 매우 심각합니다. 해수 부장님과 함께 남아서 치료를 받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나는 어찌해야 좋을지 모르겠다."

양신은 응급처치를 받은 팔뚝이 뚱뚱 부어오른 상태였다. 을지문덕은 상처를 찬찬히 살피고 나서 생각에 잠겼다. 두고 가야 하지만 도해선 때문에 더 위험해질 수도 있다는 생각에 물었다.

"약광, 살수까지는 말을 탈 수가 있겠는가?"

"합하, 소관은 말을 탈 수가 있습니다."

"순무를 계속하면서 치료를 해보면 안 되겠는가?"

"합하, 전 견디어 낼 수가 있습니다."

"나도 자네가 남아 있으면 곤란해질 것 같아서 그런다."

"합하, 제 걱정은 하지 마십시오. 저는 갈 수 있습니다."

"좋다. 말을 타보게."

을지문덕은 끝내 어려운 결정을 내리고 말았다. 그러나 양신은 대답은 했지만 억지로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겨우 말에 오르자 을지문덕은 무거운 마음으로 말고삐를 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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