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근본(根本)
을지문덕은 살수로 돌아가며 양신이 걱정되어 자꾸 되돌아 봤다.
"약광, 정말 괜찮겠는가?"
"합하. 견딜만하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양신은 대답은 그렇게 했지만 말을 타고 가는 것조차 고통이었다.
을지문덕도 양신이 고통을 참고 있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론 그의 검술 실력을 확인하고 마음이 든든해졌다. 당분간 고통스럽겠지만 곁에 두고 순무에도 동행을 시킬 생각이었다.
세 사람은 마상에서 주먹밥과 말린 고기로 요기를 하면서 살수에 도착했다. 을지문덕은 휴식을 취하고 있던 우태들을 집합시켜 놓고 수국 첩자들이 서한만에 침입한 사실을 알렸다.
우태들도 수국의 첩자들이 소금 배를 탈취하려고 든 것을 전쟁의 서막으로 여겼다. 모두가 경각심에 잠겨 있는데 연개소문은 양신이 수국 첩자들을 잡는데 큰 활약을 했다는 자랑을 했다.
그때부터 군관들은 양신을 주목하게 되고 새삼 관심들이 커졌다. 때문에 양신의 장막으로 몰려드는 법석들을 쳤다. 그러나 을지문덕은 연개소문이 쓸데없는 말을 했다고 야단을 쳤다.
을지문덕은 살수에서 처리할 일이 한 가지 더 남아서 양신은 그대로 쉬게 하고 연개소문만 데리고 다시 떠났다. 10여 명의 군관들의 호위를 받으며 이번엔 살수 변을 거슬러 올랐다.
"합하, 이번엔 어디를 가십니까?"
"시동, 여기서 가까운 곳에 철옹성 야장방이 있는 걸 알고 있지? 강을 끼고 조금만 더 오르면 철옹성 야장들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합하, 저는 철옹성 야장방이 새로운 무기를 개발하는 곳으로도 유명하다는 소문이 난 것으로 들었습니다."
"그렇다. 삼년 전부터 요동성을 비롯해 안시성, 건안성, 오골성에 설치한 새로운 쇠뇌들은 모두 철옹성에서 제작한 것이었다."
"합하, 한족 상인들은 쇠뇌를 놓고도 이런 말을 한답니다. 양광이 고구려를 정복하면 가장 먼저 없애버릴 건 야장방이라고 벼른답니다."
"고구려의 야장방들을 전부 없애버리겠다고?"
"쇠뇌는 원래 한족의 무기인데 고구려가 한족 기술자를 돈으로 매수해 기술을 훔쳐 만들게 되었다는 말도 한답니다. 아무튼 간에 고구려가 강국이 된 것은 철 때문이므로 이번엔 모두 없애버리겠는 것입니다."
"쇠뇌는 한족이 처음 만든 것은 맞다. 그러나 한족은 우리가 앞선 강철 기술을 알아내려고 야장들을 끊임없이 납치해 갔지 않는가? 또 뜻을 못 이룰 땐 가차 없이 살해하는 잔인한 짓도 저질렀다. 철옹성은 이번에 쇠뇌의 발사 장치를 개량해서 한족보다 성능을 크게 향상시켰다."
"아무튼 간에 소생은 쇠뇌란 무기에 대해선 별 흥미를 못 느낍니다."
"왜?"
"궁술은 과녁을 맞춰야 묘미가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쇠뇌는 아무렇게나 화살을 여러 대씩 쏴서 날려버립니다. 그런 걸 가지고 궁술이라는 말을 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쇠뇌는 전쟁에서 매우 유용한 무기다. 더욱이 수국의 대 병력이 몰려들 판에 화살을 한 대씩 쏴선 감당하기가 어렵다. 병력이 적은 우리로선 대병력을 상대할 땐 한꺼번에 많은 화살을 쏴야만 유리할 수가 있다."
"합하, 쇠뇌는 화살 소모가 너무도 큰데 감당이 되겠습니까?"
"그 점 때문에 철옹성에선 화살을 대량 생산하는 기술도 새로 개발하고 있다. 바로 그 시제품 화살을 보러가는 중이다."
"합하, 그렇다면 기대가 됩니다."
"철옹성은 그 밖에도 공성기 등 다양한 무기를 개발하고 제작해 왔다. 때문에 고구려군의 전력을 강화시키는 데도 큰 기여를 하고 있다."
일행은 그런 얘기를 나누며 가다가 강변 어디쯤에 대어진 배 한 척을 발견했다. 배 주위엔 10여명의 사내들이 서 있었다. 그 중 한 명이 마주 달려와서 을지문덕에게 허리를 굽혔다.
"합하, 오래간만에 뵙겠습니다."
을지문덕은 철옹성 야장방의 적오(赤旿) 야좌에게 말했다.
"적오, 오래 기다렸는가? 사정이 생겨서 좀 늦었다."
말에서 내린 을지문덕은 턱수염이 무성한 적오를 가볍게 포옹해 주었다. 대기하고 있는 야장들은 하나 같이 가슴들이 떡 벌어지고 굵은 팔뚝을 드러내 보이는 튼실한 자들이었다.
"야장방 식구들도 전부 무고들 하겠지?"
을지문덕은 말하면서 야장들의 등을 일일이 두드려 주었다.
"합하께서 늘 염려해 주시는 덕분에 모두가 잘 지냅니다."
"나는 철옹성엘 한번 간다간다 하면서도 시간이 나질 않았다."
"군국기무로 바쁘신 합하께서 어디 시간을 내시기가 쉽겠습니까? 이번에 오신단 소식을 듣고 모두가 몰려나오려는 걸 겨우 떼어놨습니다."
"적오, 모두들 일이 바쁠 때인데 잘 했네. 그동안에 새로 만들고 있다는 화살의 시제품을 보게 해주겠다고 했는데 가져왔는가?"
"합하, 견본으로 1백 본을 가져 왔습니다. 시험해 보시고 부족한 데를 지적해 주시면 개선해 나가도록 하겠습니다."
적오의 말이 떨어지자 야장 하나가 네모진 바구니를 들고 왔다. 바구니 속에는 새 화살이 가득 담겨져 있었다.
"적오, 현재 만들어진 화살촉은 량이 얼마나 되는가?"
"이미 제작된 것만도 1백만 본에 가까울 것입니다."
을지문덕은 화살을 집어 들고 촉과 대를 꼼꼼히 살폈다.
"촉이 작아졌군! 촉을 작게 만들자면 고도의 기술이 필요하겠군?"
"합하, 그렇습니다. 사거리를 최대한 늘려야 한다는 합하의 지시대로 화살촉을 작게 만드는 데 중점을 두고 제작을 했습니다."
을지문덕은 화살을 손바닥에 놓고 무게를 재어 보고 만족해했다.
"적오, 잘 만들었다. 야장들의 수고가 무척 많았다."
"합하께서 칭찬을 해주시니 마음이 놓입니다. 앞으로 더 많은 실험을 거치면서 결함과 단점들을 꾸준히 개량해 나가겠습니다."
"적오, 최대 사거리는 얼마쯤으로 잡을 수가 있겠는가?"
"합하께서 지시하신 대로 5천 보 이상 나갑니다."
"5천 보 이상이면 기병들이 펼칠 작전 범위에 딱 들어맞겠다."
"합하, 기병들이 어떤 작전을 펼치기에 긴 사거리를 필요로 합니까?"
"수국은 상상을 초월할 대병력을 동원하게 될 것이다. 그런 병력에 맞서자면 되도록 근접전을 피하고 안전한 거리를 둘 필요가 있다. 즉 원거리 공격을 펼치자면 화살의 사거리를 늘리지 않으면 안 된다."
을지문덕은 말하고 적오에게 봉서를 하나 내주었다.
"합하, 이게 뭡니까?"
"다갈촌 철장에게 보내는 서신이다. 자네가 직접 전해야 하겠다."
적오는 수심에 잠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철장님은 너무도 상심이 커서 요즘은 끼니조차 잘 챙겨 드시질 않는답니다. 양신 야좌가 하루속히 돌아와야 하는데 야장촌은 전체가 걱정입니다. 어느 누구도 양신 야좌의 행방을 몰라 답답하기 그지없습니다."
을지문덕은 짤막하게 대꾸했다.
"곧 돌아오겠지."
"합하, 이 서찰을 언제까지 전하면 되겠습니까?"
"되도록이면 빨리 전해 주었으면 좋겠다."
"저는 내일이라도 떠나겠습니다."
"수고해 주기 바란다. 이만 헤어지기로 하세."
을지문덕은 새 화살을 인수한 뒤 말에 오르고 수행하는 군인들도 뒤를 따랐다. 다시 하류 쪽으로 말을 몰아 돌아가는 중에 연개소문이 물었다.
"합하, 새 화살이 과연 5천보를 날아갈 수가 있을까요?"
"적오는 허언을 하지 않는다."
"실험도 해보지 않고 그런 말을 어떻게 믿습니까?"
"돌아가서 시험해 볼 것이다. 나는 적오 또한 을불과 더불어 고구려의 보배로 친다. 더욱이 철옹성에서 새로운 무기를 끊임없이 개발해 낼 수가 있는 것도 적오가 있기 때문이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합하께선 고구려의 야장들만 너무 추켜세우십니다."
"그런가? 야장들은 그만한 대접을 받을 만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을지문덕은 살수 변으로 돌아간 뒤 전군을 집합시켰다. 그리고 화살을 시연(試演)할 군관을 각부에서 2명씩 선발했다. 연개소문은 그들에게 새 화살을 나눠주었다.
군관들은 5천보 가량 떨어진 전방으로 나가서 각자 은폐물 뒤에 몸을 숨겼다. 새 화살을 활에 메고 쏘자 활시위를 벗어나 날아간 화살들이 떨어진 자리에 깃발을 꽂아 착지(着地)를 알렸다.
적오의 말처럼 새 화살의 성능은 우수했다. 을지문덕은 기쁨을 금치 못했고 군관들도 박수를 치며 환호성을 올렸다. 새 화살은 앞으로 기병들의 원거리 공격에서 작전 반경을 넓히게 만들 수가 있게 되었다.
을지문덕은 시연이 끝나자 군관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제관들은 장안성을 출발해서 살수 변에 이르기까지 살펴본 게 있는가? 산줄기는 어떤 방향으로 뻗고 물길은 몇 군데나 건넜고 지나오는 동안에 본 마을들의 분포와 호수들을 살펴봤는지를 묻고 싶다."
을지문덕의 질문에 한 명도 대답을 하는 군관이 없었다.
"지휘관이라면 지형지물을 철저히 살피는 습관을 지녀야 한다. 그건 누가 시켜서 하는 게 아닌 필수적으로 몸에 밴 습관으로 만들라. 왜냐하면 지형을 잘 알지 못하곤 적합한 작전을 짤 수가 없다."
고돌기가 입을 열었다.
"합하,그만 순무 일정을 밝혀주셨으면 합니다."
"나는 일정을 밝히지 않겠소."
"합하, 그러시는 이유가 무엇인지요?"
"이번 순무를 하면서 군관들은 불시에 닥칠 상황에 대처할 훈련도 겸하기로 했소. 제관들은 항상 긴장감을 늦추면 안 된다. 앞으로 순무 지역을 거치면서 지형지물도 일일이 살펴 기억해 두기 바란다. 앞으로 맞게 될 적은 초유의 대병력이 될 것이므로 전면전은 피하고 적병들을 이리저리 끌고 다니는 후퇴작전을 쓸 수밖에 없다. 그런 땐 지형지물을 잘 이용해야 효과적인 타격을 가할 수가 있다. 거기엔 순발력도 필요하므로 이번 순무에선 그에 대한 훈련도 병행해 나갈 것이다."
군관들은 그 말을 듣고 벌써부터 긴장감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처음엔 을지문덕의 말에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으나 그 말뜻을 곰곰이 씹어보면서 분위기는 서서히 무거워졌다. 때문에 모두는 진지해진 표정으로 경청하는 자세를 취하게 되었다.
"오늘은 이곳에서 휴식을 취하고 내일 출발한다. 제관들은 살수 변의 지형지물을 다시 살펴두고 이곳에서 적을 막을 작전도 짜보길 바란다."
을지문덕은 그런 지시를 내린 뒤 양신이 누워있는 천막으로 갔다.
"약광, 상처는 견딜만한가?"
"예, 합하께선 어딜 다녀오셨습니까?"
"자네가 알 만한 사람을 만나보고 왔다."
양신은 무슨 소린가 의아해하며 반문했다.
"제가 알 만한 사람이 누구란 말씀입니까?"
"철옹성 야장방의 적오 야좌를 만났다."
양신은 그 말에 아무런 대꾸를 하지 않았다.
"나는 철장에게 보낼 서신을 적오에게 맡겼다."
양신은 놀람과 동시에 걱정스런 표정이 되었다.
"합하, 철장께서 소관을 찾고 계신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걱정이 크실 철장께 혹시 소관에 관한 얘기를 쓰시진 않으셨습니까?"
"철장은 자네의 행방을 몰라 애를 끓이고 있는 걸로 알고 있다. 나는 자넬 장안성에 두면 위험하다는 판단에 순시에 데리고 나섰음을 알렸다. 또 그런 사정을 다른 사람들에게 말하지 말 것도 당부해 두었다."
그 말을 듣는 양신은 두 눈에서 눈물만 흘려 내렸다.
"약광, 울지 말라."
을지문덕의 말에 양신은 울먹이는 음성으로 대답했다.
"합하, 저는 지금이라도 다갈촌으로 달려가고 싶습니다. 그렇지만 그럴 수도 없고 사부님께 용서를 빌 자격도 없는 자로 괴롭기만 합니다."
"나도 자네의 그런 심경은 이해가 되나 지금은 갈 수가 없다."
"저는 사부님의 은공을 저버린 배신자입니다."
"자학이 너무 심하다. 철장에게 용서를 비는 건 나중에 해도 된다. 지금은 그보다 더 중요한 일을 해야 할 때다. 그러므로 자네는 마음을 다잡고 임무 수행에 힘을 써라. 무슨 말인지 알아듣겠는가?"
"합하, 소관이 어떻게 마음을 다잡을 수가 있겠습니까?"
"약광, 그보다 자네 머릿속엔 치정으로 가득 차 있는 게 더 문제다."
양신은 치정(癡情)이란 말이 무슨 뜻인지를 몰라서 의아해 했다.
"자넨 애염병이란 몹쓸 병을 앓고 있다."
"합하, 제가 애염병을 앓다니 그건 어떤 병입니까?"
"나도 겪어보질 못해 잘 모르겠다만 그건 여인 때문에 생기는 병이다. 너무도 지나친 갈망에서 생겨나는 병이라고 한다. 사내가 그런 병에 걸리게 되면 제대로 사람 구실을 할 수가 없게 만드는 나쁜 병이다."
양신은 그제야 무슨 뜻인지 알만해서 입을 다물고 말았다.
"남녀 간의 연정은 아름다운 것임엔 틀림없다. 그러나 너무 지나치면 치정이 될 수밖에 없다. 다시 말해 도를 넘는 그리움은 사람을 추하게 만들고 불행해지게 된다. 그러므로 끈질긴 치정을 끊어내야 만 한다."
양신은 한숨을 흘려내며 대답했다.
"합하의 말씀대로 제가 그런 병에 든 걸 부인하진 않겠습니다. 그렇지만 병을 떨쳐내려면 앞으로 많은 시간이 걸려야 될 것 같습니다."
"시간이 흐르기만 기다리질 말고 과단성 있게 끊어내라."
"합하, 저는 너무도 힘들어 조국으로 돌아온 걸 후회하게 됩니다."
을지문덕은 그 말에 호통을 치고 말았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릴 하는가? 나라가 풍전등화에 몰린 판이다! 앞으로 조국을 위해 전쟁터를 누비다 보면 다 잊게 되고 말 것이다."
"합하, 그렇지만 가슴에 쌓인 분노를 어떻게 떨쳐낼 수가 있겠습니까? 장안성을 떠날 때 왕제를 본 이후로 증오심만 더욱 커지고 말았습니다."
"약광, 불측하다. 왕제께 증오심을 품다니 그건 어리석고 위험하다."
"합하, 저도 그걸 잘 알지만 적개심을 떨쳐낼 수는 없습니다."
"이젠 왕제의 여인이 되었으니 잊어야 한다. 또 왕제 저하가 자네로부터 그 여인을 직접 빼앗은 건 아니잖은가? 모두 도해선이 꾸민 일로 알고 있는데 그 때문에 그 자는 언제고 자네를 해치려고 들 것이다."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는데 저는 그렇지가 못합니다. 목숨을 보전하기 위해 모든 걸 잊고 타국 땅으로 다시 떠나버리고 싶습니다."
"정신을 차려라. 지금은 조국이 위기에 처한 때다. 조국을 구하자면 적과 싸워서 물리치는 길밖에 없다. 오직 그 일만을 생각하라."
을지문덕은 양신이 아무런 대꾸도 않자 또 달래려는 말을 했다.
"약광, 친구의 자식은 내 자식도 된다. 나는 자넬 곁에 두고 어떻게 해서든 마음을 다독이고 다스리게 해주겠으니 우리 함께 노력해 보자."
양신은 그런 간곡한 말을 듣고 할 수 없이 대꾸를 해야만 했다.
"합하, 소관도 노력을 해보겠습니다."
"약광, 또 생각할 점은 자네가 언제까지 왕제와 모르는 사이로 지낼 수는 없다. 이번 순무가 끝나면 왕제를 찾아뵙고 처남으로 정식 인사를 드리게. 그렇게 하지 않으면 어떤 위험에 처하게 될지 모르겠다."
양신은 그 말의 의미를 잘 알고 있었다. 결국은 여선을 포기하는 걸로 귀결을 지으라는 말인데 대답이 나오질 않았다. 을지문덕은 그만 몸을 일으켜 장막을 나갔는데 밖에서 연개소문이 서 있었다.
"합하, 토론장으로 모시고 가려고 방금 여기에 왔습니다."
을지문덕은 내심 의문이 들어 걸으면서 물었다.
"시동, 방금 전 장막 안에서 내가 약광과 나눈 얘길 들었는가?"
연개소문은 좀 머뭇거리다 대답했다.
"예, 소생은 조금 들은 게 있습니다."
"조금 들은 게 있다면 혼자서만 알고 있길 바란다."
을지문덕의 말에 연개소문은 입을 열었다.
"합하. 말씀이 나왔으니 여쭙고 싶은 게 있습니다."
"뭔가?"
"소생은 답답한 일은 참지를 못하는 성미입니다. 제 입을 봉해 놓으시려면 약광님에 관한 얘기를 다 들려주셨으면 합니다. 그러시지 않는다면 저는 이 사람 저 사람을 붙잡고 더 알아보려고 묻게 될 같습니다."
"뭘 더 알고 싶은가?"
을지문덕의 반문에 연개소문은 호기심에 찬 눈초리가 되었다.
"합하께선 양광님이 백제 사람이라고 하셨는데 그게 아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왕제의 후궁이 되신 여선 부인은 다갈촌 철장의 따님인데 약광님과는 무슨 사연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에 대해 알고자 합니다."
을지문덕은 솔직히 대답을 할 수밖에 없었다.
"약광은 백제인이 아니다. 다갈촌의 야좌이며 철장의 양자다."
"합하, 약광님은 여선 부인과 어떤 사인데 잊으라는 말씀을 하십니까? 약광님이 애염병을 앓는다면 그건 상사병이 아닙니까? 그런 병을 여선 부인 때문에 앓는다면 거기엔 무슨 이유가 있지 않겠습니까?"
연개소문의 말에 을지문덕은 너무 당황해하며 입부터 막으려고 했다.
"시동, 이 얘길 남들에겐 발설을 않겠다는 약속을 하겠는가?"
"합하께서 전부 말씀을 해 주신다면 약속을 하겠습니다."
을지문덕은 걸어가며 양신의 처지와 사정을 대강 들려주었다.
해가 서산에 걸린 살수 변은 바람결이 쌀쌀해져 갔다.
백사장에선 각부의 군관들이 모여 각기 난상토론을 벌이느라 시끄러웠다. 을지문덕은 연개소문과 함께 군관들이 모인 자리에 당도했다.
"제관들이여! 살수변의 방어 작전 계획을 세우고 토론에 열중하는 걸 보니 흐뭇하다. 이제부터 각부는 취합한 의견을 발표해 주기 바란다."
가장 먼저 계루부 대표인 고돌기가 군관들의 집중되는 시선 속에 뻐기듯 걸어 나왔다. 헛기침을 터뜨린 뒤 거만하게 입을 열었다.
"계루부는 압록수 이남의 방어를 주로 맡게 될 것인데 살수 방어 작전을 수립한다는 것엔 울화가 치밉니다. 결론부터 말하면 요하에서 살수 변까진 1천 5여 리쯤 됩니다. 고구려 군은 돼지 떼 같은 수국 군이 압록수를 건너도록 내버려 두진 않을 것인데 살수 방어 작전은 말도 안 되고 적들이 살수 변에서 얼쩡거릴 일은 결코 상상도 못할 일입니다."
계루부 군관들은 그 말에 박수로 호응을 했지만 여타 부는 조용했다.
고돌기는 분위기가 써늘함을 느끼며 을지문덕을 향해 말했다.
"합하께 한 가지 질문을 드릴 게 있습니다."
"고돌기 대장군, 무슨 질문인지 말씀해 보오."
"적이 살수는커녕 압록수에 이르기 전에 궤멸시켜야 합니다. 만약에 그렇지 못할 경우 합하께선 어떤 대비책이라도 세우신 게 있습니까?"
"그건 최악의 경우고 압록수 이남의 방어만 계루부가 맡게 되오."
"합하, 너무도 냉정한 답변을 하셔서 좀 섭섭합니다."
고돌기의 말에 계루부 군관들은 박수를 치려다 말고 고개만 끄덕였다. 그러나 여타 부 군관들의 반응은 싸늘했고 을지문덕도 아무런 대꾸를 않자 고돌기의 음성은 더욱 따지려는 투가 되었다.
"합하께선 제가 한 말에 어떤 오해가 있으실 것 같아서 더 말씀을 드려야 하겠습니다. 합하께선 전투 때마다 치밀한 작전을 세우시고 철두철미하게 수행해 오신 분입니다. 그런데 장안성의 앞뜰이나 다름없는 압록수의 이남 방어 작전을 세우지 않으셨을 리가 없지 않습니까?"
고돌기의 말에 계루부 군관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고돌기 대장군, 이 자린 적을 막을 작전을 짜고 그걸 발표하는 자리요. 나는 계루부의 작전 계획을 모르는데 무슨 말을 할 수가 있겠소?"
고돌기는 좀 머뭇거리다 대답을 했다.
"계루부는 아직 계획을 세우지 못했습니다. 합하께서 어떤 조언을 해 주신다면 그것을 참고로 삼아 계획을 세우겠습니다."
을지문덕이 입을 떼었다.
"계루부가 담당할 서한만 평야지대는 방어에 취약성이 매우 크오. 특히 적의 함선들이 상륙 작전을 펼칠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에 수륙 양면의 방어 작전이 요구될 수밖에 없겠소. 앞으로 건무 전하께선 계루부 병력을 총 지휘하시고 압록수 이남의 방어에만 책임을 지게 되셨소."
고돌기는 그런 멀을 듣고 건무로부터 들은 말을 떠올리게 되었다. 그건 이번 전쟁에서 건무와 을지문덕이 병력의 통솔권을 반씩 나눠 행사하게 된 점으로 그걸 여타 부가 알게 되는 건 자존심이 상할 일이었다.
"합하께선 어느 지역의 방어를 주로 담당하게 되십니까?"
"나는 압록수 이북의 요동지역에서 여타 부 병력만을 지휘하게 되오."
고돌기는 그 대답에 야릇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일이 그렇게 되었군요? 합하께선 적의 수군이 서한만에 상륙할 위험성이 매우 크다는 말씀을 하셨는데 그렇게 되면 계루부는 수륙 양면의 이중 방어 작전을 짜야만 하므로 어려움이 더 클 수밖에 없습니다."
고돌기는 건무와 을지문덕이 동등한 위치에 서게 되었음을 여타 부에 서도 알게 되었기 때문에 그런 대답을 하고 제 자리로 돌아갔다. 이어 서부의 우태인 연생수가 을지문덕에게 군례를 붙였다.
"합하, 솔직히 말씀을 드리면 서부는 담당할 지역이 너무 넓어서 무슨 작전을 짠다는 것조차 엄두를 내기가 어려워 그저 난감할 뿐입니다."
을지문덕도 그 말에 이해가 되어서 입을 열었다.
"연생수 대장군, 고구려의 전통적인 기병전술은 어디서나 통한다는 말도 있지 않소? 그러니 기병 작전에 치중해서 막아낼 수밖에 없겠소."
"합하, 무엇보다 적의 대병과 맞설 병력이 너무 적은 게 문제입니다."
을지문덕도 답답함을 금치 못하겠으나 격려를 할 수밖에 없었다.
"서부는 어느 부보다 관할 지역이 넓은 데다 가장 먼저 침공을 받게 되오. 타격도 가장 크게 받을 것이나 그래도 막강한 기병 병력을 보유하고 있소. 되도록 적과 전면 대결을 피하고 소규모 기병대로 치고 빠지는 유격전을 펼치는 게 효과적이니 유격 훈련도 강화시켜 주시오."
연생수는 을지문덕이 권하는 유격전술도 통할 것 같지가 않았다.
"합하, 터무니없게 적은 병력으론 어마어마한 대병력을 유격 작전으로 맞선들 무기력하기 짝이 없을 것입니다. 병력을 보강할 방법도 없고 근접전을 피하며 원거리 공격을 펼쳐야 하는데 그러자면 화살 소모량이 많아질 수밖에 없으니 그에 대한 대비책을 세우기도 큰 문제입니다."
모두가 그 말에 공감하는데 을지문덕은 다시 입을 열었다.
"병력을 갑자기 늘리기엔 원천적인 한계가 있소. 때문에 이번 순무에 기대를 걸 수밖에 없소. 유목민들로부터 병력과 군마를 지원받을 중요한 교섭을 하겠소. 또 장기전으로 들어갈 경우를 대비도 해야만 하오."
을지문덕이 하는 말을 듣는 군관들은 위축감만 더해질 뿐이었다. 거기다 장기전으로 들어갈 경우 병력은 물론 백성들까지 쌓인 피로감을 감당할 수가 없어 결국은 위기는 파국으로 치닫게 될 수도 있었다.
군관들이 한숨을 흘려내는 가운데 연생수는 제자리로 돌아갔다.
을지문덕은 그런 모두를 보며 막막하고 절망감만 커졌다. 그러나 더욱 자신감을 갖고 보다 합리적인 대처를 해야 모두를 실의에서 벗어나게 만들 수가 있다는 생각에 입을 열었다.
"한 가지 희소식이 있소. 중요한 화살은 철옹성에서 대량 생산에 들어갔소. 그러므로 모두는 기대를 걸고 힘을 합쳐 극복해 내야 하오."
북부 상가인 하온장은 세 번째로 나섰다. 40대 중반인 그는 한 달 전에 부친인 말굴이 타계를 해서 상가직을 이었다. 북부 군관들은 상가에 대한 예우를 하고자 전부 기립했다.
젊은 하온장의 음성은 우렁우렁하고 컸다.
"북부는 여러 이민족과 접촉이 많고 뒤섞여 삽니다. 때문에 눈만 뜨면 싸움이 벌어지는 곳입니다. 양광이 쳐들어오게 되면 그 자의 목을 베어놓을 각오로 싸우겠다는 말씀밖에 더 드릴 게 없습니다."
하온장은 짧은 대답을 마치고 휘적휘적 걸어서 제 자리로 돌아갔다. 북부 군관들은 의젓하고 믿음직한 젊은 대인에게 박수를 치며 환호했다.
네 번째는 동부 우태인 불황이었다. 그는 다른 부의 우태들과 다르게 완전 무장을 한 채 국상에게 군례를 붙였다. 그런 뒤 말갈족 억양이 섞인 특유의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동부 용사들은 한족 돼지들한테 독화살 맛을 톡톡히 봬 줄 각오입니다. 싸우면 이기는 동부 용사들은 이번에도 한번 본때를 보여 주자!"
불황도 그 말만 하고 성큼성큼 걸어 제자리로 돌아갔다.
남부 우태인 길삼이 마지막으로 나섰다. 겉치레가 심한 편인 그는 어느 새 투구를 벗고 화려한 복두로 갈아 썼다. 군관들은 그가 뻐기듯 걷자 일제히 부러운 눈길을 보냈다.
"합하, 남부도 이렇다 할 작전은 없습니다. 수나라 돼지 떼가 몰려오면 남김없이 때려잡겠다는 각오만 섰을 뿐입니다. 이상입니다."
길삼은 짧게 말하고 을지문덕에 정중한 경례를 붙였다. 그러나 제 자리로 돌아가는 발걸음은 마냥 느리기만 했다. 자신의 화려한 치장을 되도록이면 오래 과시해 보이고 싶어서였다.
5부 대표의 발언들이 끝났으나 이렇다 할 작전을 낸 부는 하나도 없었다. 을지문덕은 실망이나 첫술에 배가 부를 순 없다는 자위를 했다.
"앞으로 이런 토론은 자주할 것이요. 그럴 때마다 새로운 구상이 나올 것을 기대하겠소. 다만 수국의 많은 병력이 침공해 올 길도 여러 갈래가 될 것으로 예상이 되오. 그런 점을 감안해서 각부는 거래하는 유목민들과 유대관계를 더욱 강화시키기에 힘을 기울여야 하오. 또 군마를 지원받을 길도 모색해야 만하오. 이것으로 토론을 마치겠소."
을지문덕은 토론을 끝내고 자기 장막으로 돌아갔다. 따라온 연개소문은 약광과 함께 쓰는 숙소인 천막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못마땅한 눈길을 보내며 생각에 잠겨들었다.
연개소문이 그러는 이유는 평민에 지나지 않을 약광이 자신에게 귀족 대접을 하려고 들질 않기 때문이다. 뿐더러 약광은 연장자임을 앞세워 자신에게 말까지 놓으려고 들었다. 거기다 을지문덕도 자신과 약광을 동등하게 대우하는 태도를 보였다. 뿐더러 약광의 후원자가 되어줄 것까지 부탁을 해왔다. 때문에 여간 못마땅하지가 않아 언제고 무례하고 건방진 약광의 코를 한번 납작하게 눌러 줄 셈이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생각을 하면 약광이 밤마다 잠을 못 이루는 모습을 보는 데다 그 사정을 알게 되고 나니 어느 정도는 반감이 누그러들고 동정심도 좀 생겼다.
양신이 또 한숨만 흘려내자 연개소문은 물었다.
"약광님, 밤마다 잠을 못 이루는 것 같은 데 대체 왜 그러오?"
연개소문은 양신이 아무런 대꾸도 않자 다시 입을 열었다.
"나는 약광님이 그러는 이유를 오늘에야 알게 되었소."
양신은 뜬금없는 말을 듣고 의아해 하듯 물었다.
"시동, 내 사정을 알게 되었다니? 그게 무슨 소리요?"
"나는 먼저 약광님에게 물어 볼 게 있소."
"뭘 묻겠다는 것이요?"
"약광님은 여인들을 품어 본 적이 있소?"
"여인들을 품어 본적이 있느냐고?"
"있으면 있다 없으면 없다로 대답만 하시오."
양신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대꾸를 하지 않았다.
"나는 여인들을 품은 경험이 많은데 약광님이라고 왜 없겠소?"
"시동은 나이도 어린데 벌써 여인을 많이 품어봤단 말이요?"
"나이가 무슨 상관이오? 사내구실을 제대로 하느냐가 중요하오."
연개소문의 당돌한 대답에 양신은 자존심이 좀 상했다.
"나도 경험은 있소."
연개소문은 갑자기 손뼉을 쳤다.
"내 추측이 맞는군!"
"무슨 추측이 맞는다는 거요?"
"약광님이 품었던 여인은 혹시 여선부인이 아니오?"
양신은 거의 소스라치듯 놀라 숨이 탁 막혀 들었다.
"시동,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가?"
"약광님과 여선부인은 혼약을 맺었던 사이가 아니오? 그런데 왕제에게 빼앗기고 말았으니 얼마나 억울하고 원통한 심경이겠소?"
연개소문은 너무도 궁금해서 꺼낸 말인데 양신은 입이 얼어붙었다.
"나는 약광님의 심경을 이해할 수가 있겠소. 고구려인이 백제인 행세를 하면서 밤잠을 못 이루는 이유를 알게 되어 동정을 금치 못하오."
양신은 좀 떨리는 음성으로 물었다.
"시동은 나에 관한 일을 대체 어떻게 알게 되었소?"
"합하로부터 들었소."
"합하께서 그런 말씀을 하셨단 말이요? 그게 정말인가?"
"정말이 아니면 그걸 내가 어찌 알 수가 있겠소?"
"시동, 나에 관한 일을 남들에게 비밀로 붙여 줄 순 없겠소?"
양신의 말에 연개소문은 화제를 돌렸다.
"약광님, 혹시 여선부인의 근황에 대해 아는 게 있소?"
"여선의 근황을?"
양신은 여선이란 말이 나오자 속부터 울렁거렸다.
"여선부인은 지금 새달궁에서 살고 계시오."
"새달궁은 어느 궁성을 말하는 것이요?"
"새달궁은 별궁으로 건무 왕제의 개인 저택이요."
"그런가?"
"약광님은 보기와 다르게 엉큼한 구석이 있소. 어쩌면 그렇게도 백제인 행세를 잘 할 수가 있소? 그러나 나는 약광님을 사나이 중 사나이로 보고 있소. 그러므로 내 말에 개의치 말고 마음을 편히 가지오."
양신은 그 말에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약광님도 흠을 잡을 데가 없지도 않소."
"어떤 점을 내 흠으로 잡소?"
"의외로 마음이 너무 약한 게 흠이라면 흠이겠소."
연개소문의 단정적인 말에 양신은 고개를 끄덕이게 되었다.
"내게 사나이답지 못한 점이 있다는 건 부인하지 않겠소."
양신이 순순히 대답을 하자 연개소문은 좀 미안해했다.
"약광님, 내 입에서 괜한 소리가 나온 것을 사과하오. 약광님이 사나이가 아니라면 어떤 자를 두고 사나이라고 말을 하겠소?"
"시동, 왜 말을 이랬다저랬다 하는 거요?"
"나는 합하로부터 들은 말이 있기 때문이요."
"합하께서 무슨 말씀을 하셨기에 그러오?"
"약광님은 신라 땅에서 고구려의 참 사나이 기백을 보여주었소. 때문에 신라 사람들은 의리의 사나이로 보고 크게 소문이 났소. 나로선 그 일에 매우 감동을 했고 자긍심마저 느끼지 않을 수가 없었소."
"합하께선 별 일도 아닌 일을 가지고 과장을 하신 것이요."
"나는 약광님의 그런 겸손한 태도 또한 마음이 끌리게 되오."
"시동, 나를 조금이라도 이해한다면 나에 관한 일을 남들에게 말하지 않았으면 하는 것일 뿐이요. 그에 대한 약속을 해 줄 수가 있겠소?"
"나도 사나이로 한번 뱉은 말은 철저히 지키기로 약속을 하겠소."
"시동, 나는 그 말을 믿고 크게 안심이 되오."
"그렇다면 나도 약광님에게서 약속을 하나 받고 싶소."
"어떤 약속이요?"
"약광님은 밤마다 잠을 잘 못 이루고 있소. 그 이유는 여선부인 때문으로 보나 그렇다고 해서 타국 땅으로 다시 떠나지 않기를 바라오."
"그렇다면 시동은 내가 떠나지 않게 꽉 좀 잡아주겠소?"
"약광님이 떠나지 않겠다는 약속을 한다면 부탁할 게 또 있소."
"시동, 어떤 부탁을 하려오?"
"약광님은 그만 여선 부인을 잊어주기 바라오."
연개소문의 말에 양신은 한동안 침묵만 지키다 입을 떼었다.
"나도 잊고 싶소. 그렇지만 당장은 쉽지가 않을 일이요."
"약광님, 왕제는 앞으로 보위를 승계하게 될 신분이요. 그런 분의 여인이 된 여인을 잊지를 못하겠다면 어찌되겠소? 제발 어리석은 마음은 그만 접는 게 여러 모로 좋을 것으로 판단이 되어 하는 말이요."
양신은 그 말을 듣고 한숨만 쉬었다.
연개소문은 왕실에 관한 일들을 소상히 알고 있었다. 그 이유는 건무의 정실(正室)인 동화부인(同和夫人)이 이모(姨母)였다. 그리고 외삼촌인 계도(桂櫂)는 시의(侍醫)로 있었다. 그런데 얼마 전 모친이 외삼촌과 나누는 얘기를 엿듣고 여선 부인에 관한 일을 처음 알게 되었다.
여선은 장안성으로 와서 3개월간 궁궐 법도를 배운 뒤 건무와 동침을 했다. 그런데 반년도 채 못 된 지금 만삭의 몸이 되었다. 때문에 새달궁에선 장안성에 오기 전에 임신했을 걸로 보고 있었다. 그런데 동화부인은 공주만 둘뿐이고 아들이 없었다. 만약에 여선이 아들을 낳게 되면 문제가 생길지도 몰랐다. 그런데 여선이 양신의 씨를 밴 것으로 추측이 되자 겨우 한 시름을 놓게 되었다.
순무 병단은 살수를 떠난 뒤 북진해서 압록수 하구에 당도했다. 군관들은 나룻배로 도강을 하고 거기서 야영으로 들어갔다. 양신과 연개소문은 날로 친해져서 이젠 속내까지 드러내는 사이가 되었다.
저녁을 먹고 잠자리에 들자 연개소문이 불쑥 입을 열었다.
"약광 형."
연개소문은 자기도 모르게 그런 호칭이 나왔고 양신도 놀랐다.
"시동, 지금 날 형이라고 불렀소?"
"그렇소."
"왜? 그렇게 부른단 말이요?"
"왠지 모르게 그렇게 한번 불러보고 싶었소."
"가만히 보면 시동은 여간 괴짜가 아니로군!"
"날 괴짜라고 했소? 그건 맞는 말이요. 그러나 내가 이렇게 된 데는 형의 솔직한 속내를 한번 알아보고 싶은 마음이 있어서요."
"내게서 무슨 속내를 듣겠다는 말이요?"
"진정한 사나이라면 사랑하는 여인을 되찾으려는 건 당연하다는 생각이요. 그런데 형에게 그만한 뱃장과 각오가 있는지는 모르겠소."
연개소문의 입에서 흘러나온 뜻밖의 말에 양신은 담담하게 대꾸했다.
"시동, 그댄 괴짜일 뿐만 아니라 아주 악동이요. 어떻게 남의 아픔을 그처럼 대수롭지 않게 후벼 파는 말만 할 수가 있을까?"
양신은 대답을 형이란 호칭을 계속 쓰는 상대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런데 나는 형이 여선부인을 포기할 사람으로 보질 않소."
"어떤 면에서 그렇게 본단 말이요?"
"세상사는 예측 불가능한 일이 많지만 형은 포기도 하지 않을뿐더러 그걸 해낼 능력을 지녔고 마음만 먹으면 언제고 해낼 수가 있을 사람이요. 나는 그런 사람을 진정한 사나이로 보오."
양신은 이제 아무런 대꾸도 않는데 연개소문이 말을 이었다.
"나는 형이 진정한 사나이가 되는 것을 한번 보고 싶소."
연개소문의 말에 양신은 좀 놀리듯 물었다.
"합하께선 시동을 쉰둥이라고 부르시는데 왜 그렇게 부르실까?"
"아버님이 날 쉰 살에 본 늦둥이기 때문이요."
"그랬군? 합하께선 시동을 두고 이런 말씀도 하셨소."
"합하께서 어떤 말씀을 하셨소?"
"시동은 나이가 어리나 쉰 살 먹은 사람처럼 궁량이 클뿐더러 야망도 크다는 말씀을 하셨소. 그래서 시동을 지켜보겠다는 말씀도 하셨소."
"솔직히 말해 사나이로 야망이 없으면 되겠소? 나는 배울 점이 많은 형이 도리어 큰 야망을 품어 볼만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오."
양신은 자신이 지나친 과대평가를 받는다는 생각에 반문했다.
"시동, 나 같은 사람이 무슨 야망을 품을 수가 있겠소?"
연개소문은 자못 굳어든 음성으로 대답했다.
"사나이로 야망이 없다면 어디 사나이라고 하겠소? 그건 함부로 드러낼 일도 아니지만 내가 털어놓을 땐 아마도 형을 첫 대상으로 삼겠소."
"나를 첫 대상으로 삼는다? 그건 큰 영광이 아닐 수가 없군!"
"나는 형이 점점 좋아지고 있소."
"시동이 날 좋아한다면 그 이유가 무엇인지 알고 싶군?"
"나는 형을 범상치가 않은 사람으로 보기 때문이요."
"날 범상치 않게 본다? 그런 말을 들어서인가 나도 시동이 좋아졌소. 서부대인의 자제라서가 아니라 내 마음을 끄는 점이 있기 때문이요."
"우린 서로가 좋아하는 사이라면 제안을 하고 싶은 게 있소."
"어떤 제안을 하려고 하오?"
"나는 형과 의형제를 맺고 싶소."
연개소문의 말에 양신은 내심 크게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나로선 좋은 일이나 그게 가능한 일일까?"
"가능하지 않을 게 뭐가 있겠소?"
"자네와 난 신분의 차이가 너무 크니까 그럴세."
양신의 말에 연개소문은 그걸 알기나 하는 사람일까 싶었다. 매사에 턱도 없이 당당한 태도만 보이는 것은 이해가 되지 않을 일이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형하곤 그런 걸 따지고 싶지가 않소."
"왜 그렇단 말인가?"
"형은 항상 당당함에 차 있는 사람으로 보이기 때문이요."
"내가 그처럼 당당함에 차 있는 사람으로 보인단 말인가?"
"지금은 난세이기 때문에 분수를 모르고 설치는 자가 많소. 하잘 것 없는 재주만 지녀도 신분 상승을 위해서 마구 나대는 판이요. 그런데 그처럼 큰 능력을 지닌 형은 통 티를 내지를 않는 터라 그렇소."
"그래서 의형제를 맺고 싶단 말인가?"
"나도 그러고 싶었지만 실은 합하의 권고가 컸소."
"합하께서 그런 권고를 하셨다고?"
"나도 처음엔 당치도 않을 일로 생각했소. 그런데 합하께선 형의 근본이 원래는 대단한 신분이었다는 말씀을 하셨소."
"내 근본 신분이 대단했다고?"
"형의 선대는 우리 가문보다 더 높은 신분이었다오. 때문에 의형제를 맺고도 남음이 있다. 우리가 서로 돕는 사이가 된다면 각자는 물론 국가의 장래를 위해서도 크게 바람직한 일로 여긴다는 말씀도 하셨소."
양신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을 말이었다. 아마도 의형제를 맺게 하려고 지어낸 말일 듯싶었다. 반면에 연개소문은 서부를 위해서 장차 약광을 자신의 밑에 두려는 속셈이 없지도 않았다.
연개소문의 말을 듣고 양신도 의형제를 맺으면 좋겠다는 생각이었다.
"시동, 옛날엔 대장장이 신분이 매우 높았던 것을 아는가? 시동과 의형제를 맺는 건 분에 넘칠 일이나 장유유서에 따라 내가 형이 되지."
연개소문은 무겁게 고개만 끄덕였고 양신이 물었다.
"시동, 내가 제대로 형 노릇을 해도 용납을 하겠는 말인가?"
"물론이요."
"시동이 날 형으로 삼겠다니 지금부턴 동생으로 부르겠다."
양신의 말에 연개소문은 진지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나는 형에게 먼저 꼭 해두고 싶은 말이 있소."
"무슨 말인가?"
"내 형 노릇을 할 사람이라면 한 여인에게만 매달리는 사나이가 되면 안 되오. 그건 진정한 사내대장부로 볼 수가 없겠소."
"동생, 이 세상엔 한 여인에게만 매달리는 대장부도 있어야 하네."
"대장부란 게 별 게 아니잖소? 나는 한 여인에게만 매달리기보다 열 계집도 마다 하지 않을 사내가 더 당당한 대장부가 아니겠소?"
"나라고 열 계집을 마다할 사람은 아니므로 그런 걱정일랑 말게나."
"형, 그렇다면 요동성에 들어가서 한번 봅시다."
"시동, 요동성에 들어가서 뭘 보겠다는 말인가?"
양신의 반문에 연개소문은 묘한 웃음만 지었다.
순무 병단은 압록수 변에서 하루 밤을 묵고 아침을 맞았다. 거기서 동북쪽으로 방향을 틀어 국내성(國內城)으로 향했다. 양신과 연개소문은 을지문덕 뒤에서 말머리를 나란히 했다.
두 사람은 서로 간에 관심이 늘어난 만큼 대화도 많아졌다.
"형, 중원 땅엔 오래간만에 통일 왕조가 들어 선 뒤로 고구려는 적잖은 위협을 느끼는데 한삼국도 이젠 통합을 서두를 때가 된 것 같소."
"나도 한삼국의 통합은 바람직한 일로 여기지만 쉽지가 않겠네."
"한삼국의 통합은 고구려의 주도로 백제와 신라를 흡수해야만 하오."
"나는 그렇게만 생각을 하지 않네."
"형, 그렇게만 생각을 하지 않는다니 그게 무슨 소리요?"
"내가 원하는 통합은 시동이 생각하는 것과는 다르네."
"형과 내가 다를 게 뭐가 있소?"
"내가 바라는 통합은 한삼국 백성들이 전쟁의 질곡에서 벗어나는 것을 전제로 해야 하네. 즉 고구려만 그 일을 꼭 해야 한다는 법은 없네."
양신의 대꾸에 연개소문은 매우 의외란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 을지문덕은 두 사람의 대화에 큰 흥미를 느끼듯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형은 왜 그런 생각을 하게 된 것이요?"
"고구려 사람은 백제나 신라보다 나라가 크고 강하므로 고구려가 해야 만 한다는 생각은 잘 못일세. 신라와 백제는 영토는 좁아도 인구수는 고구려와 맞먹네. 한삼국의 통합은 백성들이 원하는 쪽으로 돼야 하네."
연개소문은 매우 못마땅한 듯 반문했다.
"형은 백제나 신라가 한삼국을 통합할 수가 있다고 생각하오?"
"못하란 법도 없지 않는가? 나는 고구려가 통합을 원한다면 그보다 먼저 해야 할 일이 있네. 그건 백성들이 잘 사는 나라가 되는 일일세."
을지문덕은 그런 말을 듣고 자기도 모르게 끼어들었다.
"참으로 약광은 대단한 생각을 하는군! 나도 동감이다."
연개소문은 또 반발하듯 물었다.
"합하께선 무슨 이유로 그런 생각을 하신단 말씀입니까?"
"한삼국 중 고구려가 강대국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철산지가 보다 많기 때문이다. 그러나 앞으론 철만 가지곤 강국이 될 수가 없다. 한 나라의 국력은 백성들이 근본이다. 백성들의 숫자를 늘리자면 잘 사는 나라가 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약광의 말이 옳다고 본다."
"합하, 한삼국은 어디나 백성들이 사는 것도 비슷할 것입니다. 그런데 저로선 고구려는 그렇지가 못하단 뜻으로 하시는 말씀 같습니다."
연개소문의 말에 양신이 또 입을 열었다.
"나는 신라와 백제 땅을 돌아보고 두 나라 백성들이 사는 모습을 살필 수가 있었네. 거기엔 고구려와 같은 점도 있지만 다른 점도 있었네."
"다른 점이 있었다면 어떤 것인지 들어보고 싶소."
"두 나라 백성들의 애국심은 고구려보다 더 강하단 느낌을 받았네."
연개소문은 그 말을 듣고 의외란 듯 반문했다.
"형은 고구려 백성들의 애국심이 부족하다고 생각하오?"
"그 이유는 고구려의 귀족과 백성들 간의 빈부 격차가 너무 큰 때문일세. 그에 반해 백제와 신라는 덜해서 그렇다는 생각이 들었네."
"빈부 격차는 삼국이 다 같을 텐데 왜 고구려만 그렇게 보오?"
"어느 나라건 귀족들은 다 부유하게 살지만 고구려 귀족들만큼 사치가 심한 나라는 없을 것 같네. 고구려 귀족을 두고 놀고먹으며 부귀영화만 누리는 좌식(坐食) 계급이란 별명이 왜 붙었겠는가?"
"형은 무슨 말을 하고 싶어서 이러오?"
"고구려 귀족은 백성들을 노예처럼 부려먹고 너무 착취해서 누리는 부귀영화일세. 오죽하면 죽어서도 그걸 누리고자 무덤 속을 고대광실로 꾸미고 생전의 삶을 그림으로 그려놓기까지 하지를 않는가?"
연개소문은 귀족에 속하는 터라 좀 누그러진 음성이 되었다.
"형은 백성들이 잘 사는 나라를 만들어야 한다는 말을 하려는 거요?"
"그럴세. 고구려 왕실과 귀족들은 철제 무기를 타국에 팔아 부를 축적하는 데만 혈안일 뿐 백성들은 전혀 돌보질 않네. 백성들이 농사를 짓는데 필요한 농기구가 부족하면 양곡의 증산이 어렵네. 그런데 무기를 만들어 내다 파는 데만 힘을 쓰고 농기구 제작은 등한시하네. 또 부역만 너무도 강요해서 이래저래 괴로움에 시달리다 못한 백성들은 백제와 신라로 떠나네. 나라와 귀족들은 그런 실정에 대책은 세우지 않고 백제와 신라를 침공해서 백성들을 끌어오는 일만 되풀이 하면 큰 문제가 아닐 수가 없네. 그러니 백성들이 잘 살게 만드는 데도 힘을 써야 하네."
연개소문은 듣기가 매우 거북했지만 입을 열었다.
"형의 말대로 무기보다 농기구만 많이 만들면 적을 막을 방위능력을 약화시키게 되어 국방력이 위축되는 결과를 빚을 수도 있게 되오."
양신은 그 말에 자신의 소견을 더 밝혔다.
"고구려는 삼국의 통합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네. 그러나 통합이란 한 나라의 왕실이나 귀족들만 주체가 되는 건 바람직하지 않을 일일세."
"그럼 어떻게 통합을 해야 한다는 말이요?"
"통합은 한삼국 백성들이 다 같이 원하는 쪽으로 이뤄져야 하네."
"한삼국 백성들이 다 같이 원하는 쪽으로?"
"어느 나라 백성들이건 굶주리지 않고 평화롭게 살기를 바라고 있네. 전쟁은 지배계층의 야욕에서 빚어지는 것으로 백성들과는 무관한 일일세. 그러므로 통합을 위한 전쟁을 일으키기보다 백성들이 고통의 질곡을 벗어나게 만드는 일에 힘을 써야 하는데 그건 바랄 수가 없지 않는가?"
연개소문은 속으로 반감만 커져 반발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나도 전쟁의 부정적인 면을 잘 알고 있소. 그러나 인총이 많은 한족의 침략을 막기 위해선 고구려가 국력을 키워 삼국을 통합해야만 하오."
"고구려는 백성들을 늘리기보다 더 시급한 일은 내부적인 통합일세."
"백성을 늘리기보다 내부적이 통합이 시급하다는 건 무슨 뜻이요?"
"국초엔 연맹체가 국가 발전에 기여가 컸지만 지금은 불리하네."
"연맹체가 불리하면 해체를 해야 한다는 말이요?"
"고구려의 각부 병력을 상비군으로 모두 합쳐야 효과적일세."
을지문덕은 양신의 말을 듣고 내심 식견이 상당함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너무도 이상적이라 우려가 되는 점도 있어 입을 열었다.
"한삼국은 화로(火爐)의 세발처럼 병립함으로써 나라마다 역년이 길어질 수가 있었다는 말도 있네. 그러므로 고구려는 한삼국과 외교를 강화해서 백제와 신라의 협력을 이끌어낼 수만 있다면 수국의 침략을 막는데도 큰 효과를 거둘 수가 있다는 생각일세."
연개소문은 그 말을 받아 한 마디 했다.
"형은 그런 생각만 한다면 어디서도 발붙일 데가 없겠소."
"나도 고구려에선 그럴 것으로 보고 있네."
"그러나 형은 남들이 못할 생각을 많이 해서 얘길 더 듣고 싶소."
"한삼국 간의 끊임없는 충돌은 철산지의 쟁탈전이 원인일세. 철은 바로 고구려의 내부적인 갈등의 요인이 되지 않는가?"
"그렇긴 한데 그걸 해소시키자면 어떻게 하면 좋겠소?"
"왕실이 철산지를 전부 통합해 관리를 강화시켜야 하겠네."
"무슨 소리요? 폐하께선 이번에 각부에 철산지 관할권을 되돌렸소."
"관할권을 되돌렸다고? 그게 사실인가?"
"왕실은 그동안 여타 부의 철산지 관할권을 빼앗아 왕권강화에 이용해 왔소. 때문에 연맹체를 해체시키려고 들다가 갈등만 심화시켰소."
"왕실이 각부에 관활권을 되돌렸다면 앞으로 부작용만 더욱 커지겠네. 수국은 바로 그 점을 노리고 정복의 야욕을 드러냈는지도 모르겠네."
연개소문은 설사 맞는 말이라고 해도 동의하고 싶지가 않았다.
"형은 왜 타당성도 현실성도 없는 말만하고 자꾸 하오?"
"시동, 국가적인 위기를 극복하면 백성들의 애국심을 분발시킬 수가 있을 때만 가능하네. 그런데 고구려는 어떤가? 귀족들은 국방의 책임은 자신들만이 책임을 지겠다는 생각을 하네. 그리고 각 부마다 사병을 불리는 데만 관심을 두니 국가적인 큰 통합은 영 기대할 수가 없네."
"나는 통합된 상비군만 큰 힘을 발휘한다는 법은 없다고 생각하오."
"물론이지만 상비군이 발휘할 힘과 백성들이 자발적으로 나설 때의 어느 쪽이 더 쎌까? 그런데 고구려의 현실은 왕실과 귀족들이 백성들을 부속물처럼 취급하고 착취의 대상으로만 삼으려고 하네. 그렇게 해선 백성들의 애국심을 기대할 수가 없으므로 한정된 힘밖에 쓸 수가 없네."
연개소문은 그 말을 듣고 을지문덕 쪽으로 말을 돌렸다.
"합하, 세상엔 한족들처럼 타국 침략을 많이 한 나라도 없다고 합니다. 더욱이 고구려에 대한 침략이 유독 많은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요?"
"그것도 철에서 찾게 된다. 또 수국이 고구려를 가장 큰 경계의 대상으로 삼는 것도 철 때문이다. 특히 두만강 변엔 철성(鐵城)이 있다는 소문이 중원 땅에 날 지경이었다. 때문에 한족들은 일찍부터 철에 눈독을 들인 침략을 했는데 양광의 침략도 철이 큰 작용을 했을 것이다."
을지문덕은 그런 말로 시작해서 긴 설명이 이어졌다.
지금으로부터 5백여 년 전 한(漢)나라의 무제(武帝)는 사방으로 정복 전을 펼쳤다. 그 목적 중엔 영토의 확장보다 철산지 확보에 더 중점을 두었다. 한족은 철의 자급자족이 어려운 편이라 일찍부터 옥저(沃沮)로부터 철정을 수입해다 썼다. 그런데 철정을 수송해 가는 과정에서 약탈자의 습격을 많이 받았다. 그 때문에 통로를 안전하게 확보할 칠요성에 병력을 주둔시키려고 한 게 한사군(漢四郡)을 설치였던 것이었다.
"고구려의 건국도 두만강 주변의 철산지가 힘의 원천이 되었다. 그만큼 한족은 우리의 철을 두고두고 노리게 만들어 큰 우환거리로 작용을 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그러므로 두 사람은 그 문제를 놓고 자주 대화를 나누면서 해결책을 찾는데도 중지를 모으도록 하게나."
을지문덕은 그런 말을 던지고 말에 채찍을 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