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은원(恩怨)
어느 새 초겨울로 접어들고 있었다.
백제군이 가잠성을 함락시킨 지 한 달이 달포가 넘었다. 그러나 개선장군이 된 백기는 사비성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국왕은 백기가 성을 회복하려고 들 신라에 대한 방어책임을 당분간 지우려고 했다. 그리고 출병한 팔가의 사병 2천은 가잠성 수비에 묶어두고 왕궁 수비병 1천은 회군시킬 마음을 먹었다.
주랑은 개지의 집으로 거처를 옮겼다. 백기는 주랑이 해론의 보호와 간병을 위해 그러겠다는 걸 모르고 야장촌의 부녀자와 유대 관계를 돈독히 하게 만들 생각에 허락을 했다.
백기는 매일처럼 호위 병력만 거느리고 성을 나섰다. 지역 내의 마을들을 둘러보며 백성들과 친화감을 조성하기 위함이었다. 때문에 해가 지면 아무 마을이나 하룻밤을 묵으며 여론도 청취했다.
마침내 목등이 철수할 병력을 인수받으러 가잠성에 왔다. 그는 총관을 만나기 전에 심복인 장개부터 만났다. 장개는 총관의 일과를 살피고 감시하는 역할도 맡고 있었다. 때문에 그동안에 성에서 일어난 일과 사정들을 목등에게 상세히 보고했다.
목등은 사정을 파악하나서 그만 몸을 일으켰다.
"장개, 계속 수고하라. 나는 총관님을 뵈러 가겠다."
"부장님, 총관님이 개지 야좌와 너무 가까워진 것 같습니다."
"그런가? 왜 그렇게 되었을까?"
목등은 그런 말만 남기고 성청으로 향했다. 백기는 목등을 맞게 되자 내심 반감이 크게 일어서 서먹한 태도로 입을 떼었다.
"목부장, 축하네. 새장가를 들더니 신수가 다 훤해졌군?"
"총관님은 별말씀을 다 하십니다."
목등는 초계부인을 새 아내로 맞은 데다 위사좌평이 된 의자 왕자의 부장으로 발탁되어 더욱 목에 힘을 주게 되었다.
"목부장은 앞으로 왕궁에서 중요한 직책을 수행하게 된 몸인데 여긴 무슨 일로 오게 되었는가?"
"소장은 폐하의 명을 받들고 왔습니다."
목등은 대답하고 국왕이 내린 봉서를 백기에게 바쳤다. 백기는 봉서를 읽은 뒤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가잠성 주둔 병력 중 왕궁 수비병 1천만 사비성으로 회군시키라는 명령이었다.
"내일 출발할 수 있게 회군 준비 명령을 내리겠다."
"총관님, 입을 떼기가 송구스럽지만 아버님의 말씀도 전하겠습니다."
"내신좌평의 말씀이라면 나도 짐작이 가는 점이 있네."
"총관님은 그걸 어떻게 아신다는 말씀입니까?"
"계백이 보낸 서신을 읽었네."
백기는 대답하고 씁쓸한 표정을 감추지 않았다. 계백은 서신에서 목돈의 딸인 추저(秋姐)와 결혼하게 되었음을 알렸다. 그렇게 된 이유는 초계부인이 적극 일을 추진한 영향도 컸음을 밝혔다.
목등은 좀 미안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총관님, 계백의 서신에서 어느 정도는 밝혔을 것으로 압니다만, 계백의 혼사는 그보다 더 중요한 사정도 있었음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더 중요한 사정이란 건 무엇인가?"
"계백은 주랑 낭자에게 마음을 두었으나 낭자는 그렇지가 않았습니다. 반면에 소장의 동생인 추저는 계백을 여간 사모하지 않습니다. 주랑 낭자는 그걸 잘 알아서 추저에게 계백과 혼인해서 잘 살라고 했답니다. 그 점을 계백이 서신에서 밝혔는지는 모르겠습니다."
백기는 한숨이 절로 나왔다. 일이 이 지경에 이른 데는 자신의 실책이 컸기 때문이었다. 그 이유는 주랑이 양신을 만나지 못하게 만들려고 계백이 승전보를 전하는 임무를 지워 사비성으로 보낸 것인데 그게 결국은 계백과 추저가 혼인하게 된 빌미가 되고 말았다.
"총관님, 한 가지 여쭤보고 싶은 게 있습니다."
"뭔가?"
"소장은 계백을 가잠성으로 돌려보내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위사좌평께서 막으셨습니다. 왜 그러시느냐고 여쭈었더니 위사좌평께선 뜻밖의 대답을 하셨습니다. 계백이 왕궁에서 근무를 하게 대달라는 청을 총관님이 하셨다고 하시고 계백을 소장의 부관으로 삼게 만드셨습니다."
목등은 말하고 백기의 표정을 살폈다. 백기는 그 말에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고 한숨만 내쉰 뒤 딴 소리를 했다.
"목부장, 내일 병력을 끌고 회군하자면 그만 나가서 쉬도록 하게."
백기의 말에 목등은 대답을 않고 좀 뭉그적대는 태도를 보였다.
"목부장, 내게 무슨 할 말이 더 있는가?"
"총관님, 혹시 이 일도 알고 계신지 모르겠습니다."
"뭘 말인가?"
"소장이 듣기론 주랑 낭자는 야장촌에서 기거하는 걸로 압니다."
"그럴세, 주랑은 야장촌 부녀자들과 잘 어울려서 여성주란 말까지 듣고 있네. 그렇게 지내서 나로선 여간 다행스럽게 여기지 않네."
"그러나 총관님이 모르시는 점은 또 있으십니다."
"내가 모를 점이 또 있다니 그게 뭐란 말인가?"
"소장은 계백으로부터 들은 얘길 전해드려야 하겠습니다."
"계백한테 들은 얘기라니? 뭔가?"
"총관님도 야장촌에 신라 성주의 아들이 있음을 아실 것입니다."
"그렇다. 이젠 의식이 돌아왔고 상처도 많이 회복된 걸로 아네."
"총관님은 앞으로 신라인에 대한 처리를 어떻게 하시렵니까?"
"그 문제로 고민이 없지도 않네. 목부장도 잘 알겠지만 나는 그 문제는 위에 보고하지 못했네. 때문에 목부장과 의논을 하고 싶네."
"소장도 총관님과 같은 입장이나 왕성에 있는 몸이라 의논보다 조언을 드릴 수는 있겠습니다. 그런데 총관님은 주랑 낭자가 야장촌으로 거처를 옮긴 데는 다른 이유도 있음을 아시는지 모르겠습니다."
"거처를 옮긴 다른 이유라니?"
"주랑 낭자는 신라인의 간병과 보호하려는 목적도 있음을 아십니까?"
"주랑이 왜 그런 일을 맡는단 말인가?"
"계백이 낭자에게 서신을 보내 간곡하게 부탁을 했기 때문입니다."
"계백이 무슨 부탁을 했단 말인가?"
백기는 반문하며 이해가 되지 않는 데다 화까지 치밀었다.
"그 놈이 무슨 억하심정으로 그 따위 부탁까지 했단 말인가?"
"총관님, 계백보다 주랑 낭자에게도 그럴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목등의 말에 백기는 강한 의문과 함께 대답했다.
"내가 주랑에게 한번 물어보겠네."
"그렇게 하십시오. 소장은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목돈은 몸을 일으켜 밖으로 나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이번엔 야장촌으로 가서 주랑을 불러냈다. 밖으로 나온 주랑은 목등을 보고 냉랭한 태도를 보였다. 그 이유는 부친이 가잠성에 그대로 주저앉게 만든 게 목돈 부자의 농간 때문으로 알기 때문이다.
목등은 석양을 비껴 받고 선 주랑이 좀 수척해졌다고 보았다.
"낭자, 그동안 잘 지냈소?"
"부장님은 그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여기에 올 수가 있겠어요?"
"낭자는 내게 무슨 반감이 있는 것 같소? 나는 총관님과 여러 가지 얘기를 나누고 왔소. 그리고 낭자와 사전에 입을 맞춰둘 일도 있소."
"부장님은 무슨 염치로 아버님과 얘길 나눈단 말씀인가요?"
"나는 폐하로부터 1천 병력을 회군시키는 명을 받고 왔소."
"그게 저하고 무슨 상관이 있다는 말씀예요?"
"총관님은 나에 대한 신임은 여전히 크신 것을 확인했소. 그런데 낭자가 이처럼 날 쌀쌀하게 대하는 이유가 대체 뭔지 모르겠소?"
"부장님, 딴 소리는 그만 두고 할 말씀이 있으면 빨리 하세요."
주랑의 핀잔을 받고 목등은 좀 망설이듯 입을 열었다.
"나는 이 집 안에 있는 신라 군관에 대한 걱정이 커서 그러오."
목등의 말에 주랑은 좀 놀라는 빛을 보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신라 군관에 대한 걱정이 크시다니 그건 정말이신가요?"
"그에 관한 얘긴 미루고 우선 낭자에게 전할 말이 있소."
"뭘 전하겠단 말씀인가요?"
"낭자는 양신에 관한 일이 궁금하지가 않소?"
목등의 말에 주랑은 금세 안색이 굳어들고 말았다. 그렇지 않아도 많은 생각을 하고 있던 참이었다. 자신은 물론 부친, 여준, 여선, 양신이 서로 불가분의 관계가 있을 것이란 생각 때문이었다.
"낭자가 듣고 싶지 않다면 말을 하지 않겠소."
주랑은 급히 고개를 저었다.
"아녜요, 말씀해주세요."
"양신은 무사히 돌아갔소. 그런 뒤에 고구려 국상의 호위무사가 된 걸로 알려졌소. 나는 할 얘기가 한 가지 더 있지만 좀 주저가 되오."
"무슨 얘긴지 다 해보세요."
"이 말을 전하면 낭자가 상심할지도 몰라서 그러오."
"제가 상심할 일이 대체 뭐가 있다고 그러세요?"
"그렇지만 낭자가 필히 알아둬야 할 일이므로 하겠소. 고구려의 다갈촌 철장은 건강이 매우 좋지가 않다오. 양신이 배은망덕하게 집을 뛰쳐나갔기 때문인데 상심이 너무도 커서 병까지 얻게 된 것이요."
주랑은 철장에 관한 말을 듣고 왠지 모르게 걱정이 되었다.
"나는 이제부터 본격적인 의논을 하려는데 총관님이 모르실 일이요."
"아버님이 모르시는 일이 뭐라는 말씀인가요?"
"막상 말을 꺼내려고 하자니 여간 망설여지지 않소."
"망설여지시면 그만 두세요."
"낭자는 내가 하는 말에 오해가 없이 들어준다면 하겠소."
"뜸은 그만 들이시고 얼른 말씀이나 해보세요."
"총관님은 야장촌에 신라 군관이 있는 것은 아시나 낭자가 간병과 보호하는 역할까지 맡고 있는 줄을 전혀 모르고 계시오."
주랑은 그 말에 마음이 좀 무거워지며 반문했다.
"그 일은 부장님과 저만이 알기로 한 일이 아닌가요? 그런데 혹시 부장님이 그 사실을 아버님에게 알리셨다는 말씀인가요?"
"나는 발설하지 않았소. 그런데 신라 군관의 상태는 어떻소?"
"많이 좋아졌어요."
"의논을 하기 전에 낭자는 양신에게 한 말이 있다고 들었소."
"제가 무슨 말을?"
"낭자는 쌍둥이 한 짝을 만나러 고구려로 가겠다는 말이요."
주랑은 그 말을 듣고 한숨만 흘려냈다.
"솔직하게 말씀을 드리자면 그러고 싶어요. 그러나 아버님께 어떻게 말을 꺼낼 수가 있겠어요? 또 그래도 되는 일인지 큰 고민예요."
"나는 낭자의 심경을 잘 헤아릴 사람이니 조언을 해도 되겠소?"
목등의 말에 주랑은 관심이 커진 듯 태도가 달라졌다.
"낭자가 고구려로 갈 뜻이 확고하다면 내가 돕고 싶소."
"부장님은 무엇 때문에 절 돕겠다는 말씀인가요?"
"내겐 그렇게 해야만 할 책임과 의무가 있기 때문이요."
"부장님에게 무슨 책임과 의무가 있다는 말씀인가요?"
"낭자를 낳으신 분은 목씨 가문이요. 나는 낭자가 쌍둥이로 태어난 것을 처음 알린 사람이고, 양신도 그 점을 확인시켜 준 사람이라 낭자가 고구려로 가려는 마음을 먹게 만든 책임감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소."
주랑은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낭자는 내게서 무엇인가를 더 알고 싶은 게 있을 것이요."
목등의 말에 주랑은 고개를 끄덕일 뻔했다. 자신도 여러 가지 의문을 떨칠 수가 없기 때문인데 그 말을 듣고 더욱 알고 싶어졌다.
"부장님은 전에도 제게 더 해줄 말이 있다고 하셨지요?"
"나는 낭자가 듣기를 원치 않는다면 더 하고 싶지가 않소."
주랑은 고개를 떨어뜨린 채 천천히 가로저었다.
"낭자는 더 듣고 싶소? 아니요?"
목등의 말에 주랑은 또 고개를 가로저었다.
"낭자, 말로 대답을 하시오."
"듣겠어요."
"쌍둥이 자매의 생부는 고구려 다갈촌의 철장이요."
목등의 말에 주랑은 고개를 벌떡 쳐들었다. 자신의 생부(生父)가 여준이란 말을 듣자 심장이 멈출 만큼 큰 충격을 받게 되고 말았다.
"부장님, 그, 그 말씀이 사실인가요?"
"낭자가 내 말을 믿거나 말 거나 그건 사실이요. 다만 나로선 한 가지 부탁을 해야만 하겠소. 그에 대한 약속을 해주겠소?"
"무슨 약속을?"
"총관님에겐 나한테 들었다는 말은 절대로 해선 안 되오."
주랑이 고개만 끄덕여 보이자 목등은 그때부터 여준, 백기, 예지 간의 삼각관계가 빚은 사연들을 들려주었다. 17년 만에 처음 알게 된 사실 앞에 너무도 놀라고 가슴이 아팠다. 너무도 가혹한 운명의 모친이 자살로 짧은 삶을 마감했다. 그렇게 만든 두 남자가 너무도 원망스러웠다. 그냥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슬픔을 토해내려 듯 흐느껴 울기만 했다.
"낭자, 울고만 있을 때가 아니요. 낭자가 여기에 숨어 있는 신라 군관을 간병하고 있는 걸 누가 알게 될지도 모르오. 대책을 세워야 하오."
"부장님에게 무슨 생각이 있으시다면 말씀을 해 주세요."
"신라 군관의 상처는 어떻소? 상처가 대강 아물었다면 그만 이 성에서 내보내는 일을 생각해 보지 않을 수가 없겠소."
"저도 그런 생각을 하고 있지만 어찌해야 좋을지 모르겠어요."
"나는 조언을 할 뿐인데 듣겠소?"
주랑은 눈물을 닦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낭자가 여기서 신라군관을 숨겨두고 치료를 한다는 소문이 만약에 사비성에 전해진다면 큰 문제가 생기게 될 수도 있소. 그 일로 총관님이 징계를 받게 되실지 모르는데 그건 낭자도 나도 원치 않을 일이요."
"부장님에게 좋은 방책이 있으시면 말씀해 보세요."
"나는 내일 사비성으로 떠나야 하오. 신라 군관도 하루속히 이 성을 벗어가게 해야 되지만 나는 도울 수가 없소. 그러므로 한밤중에 남의 눈에 띄지 않게 성벽을 넘게라도 해야 하오. 낭자는 그 일에 도움을 받을 수가 있는 사람을 찾아야 하오. 그 일부터 해야 하겠소."
목등은 좀 겁을 주는 듯한 말을 남기고 떠났다. 주랑은 집 안으로 들어가서 해론이 있는 방을 바라봤다. 의식을 되찾고 상처도 아물어 건강은 많이 회복되어서 얘기를 좀 나눠 볼까하다 그만 두었다.
주랑은 자기 방으로 들어가자 머릿속은 모친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 찼다. 모친을 불행하게 만든 두 남자가 독신으로 사는 것도 마음을 짠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부친에겐 죄스러우나 생부와 여선을 만나고 싶은 복합적인 생각으로 괴로움만 더 커졌다.
백기는 많은 생각을 거듭한 끝에 개지 야좌를 불렀다.
"야좌, 알고 싶은 게 있는데 아는 대로 대답을 해 주겠소?"
"총관님이 물으시는 대로 전부 답변해 올리겠습니다."
"그동안에 야장촌을 드나든 백제국 장수와 군관은 누구였소?"
"총관님도 아시다시피 목등 부장과 계백 부관뿐이었습니다."
"두 사람은 무슨 일로 드나들었소?"
"계백 부관은 사비성으로 떠나던 날도 왔습니다. 혼수상태인 신라군관을 들여다보고 고구려인 양신 야좌와 무슨 얘기도 나눴습니다."
"계백이 온 것은 그때 한번 뿐이었소?"
"그렇습니다. 그 대신 목등 부장은 여러 번 드나들었습니다."
"목등 부장이 드나들면서 한 일들이 생각나는 대로 말해 보시오."
"처음에 성이 함락되고 부장은 주랑 낭자와 함께 왔습니다."
"주랑이 목등과 함께 왔다고? 대체 무슨 일로 왔다는 것이요?"
"총관님, 그 날의 일들은 야장촌에서 큰 화제가 되었습니다."
"무슨 일이기에 큰 화제가 되었단 말이요?"
"양신 야좌가 주랑 낭자를 보더니 덥석 끌어안았습니다."
개지의 말에 백기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 날 일어났던 일들을 자세히 말을 해보시오."
"양신 야좌는 낭자를 여선이라 부르며 울면서 용서도 빌었습니다."
백기는 그 말을 듣고 이젠 제 정신이 아니게 되었다.
"제가 보기엔 양신 야좌가 낭자를 여선이란 사람으로 본 것 같습니다. 나중에 목등 부장이 그 일을 설명해줘서 사정을 알게 되었습니다."
"목등이 무슨 설명을 했는지 모르오?"
"낭자는 쌍둥이 중 한 짝이고 또 한 짝은 고구려에 산다고 했습니다."
그 말에 백기의 안색이 창백해져 개지는 걱정스럽게 물었다.
"총관님, 왜 그러십니까? 괜찮으시겠습니까?"
"괜찮소."
백기는 겨우 대답했고 개지는 조심스레 또 입을 열었다.
"총관님께 더 드릴 말씀이 있는데 해도 될지 모르겠습니다."
"더 해보시오."
"낭자는 양신 야좌가 여길 떠날 때 그에게 한 말이 있었습니다."
"무슨 말을 했소?"
"낭자는 양신 야좌에게 신라 군관은 자신이 책임지고 무사히 성을 빠져나가게 만들겠다. 자신도 쌍둥이 자매를 만나러 가겠다고 했습니다."
백기는 그 말을 듣고 아예 눈을 감고 말았다.
"총관님, 저는 드릴 말씀을 다 드렸습니다."
"목등이 이번에 와서도 주랑을 만나고 갔소?"
"그렇습니다."
"알겠소. 그만 돌아가시오."
백기는 개지가 떠나자 어지럼증 같은 것을 느껴서 벽에 등을 기댔다.
자신의 인생은 이제 산산조각이 나게 되었다. 모든 걸 알게 된 주랑의 마음은 어떨 것이며 철두철미하게 감춰만 온 자신을 뭐가 되었는가? 오는 게 있으면 가는 게, 가는 게 있으면 오는 것도 있는데 자신은 왜 가는 것만 있는 것일까? 주랑을 예지 대신으로 보며 산 삶마저 무너져 버렸다. 낙담과 허탈감에 밤새도록 잠을 이를 수가 없었다.
백기는 이튿날부터 관내 순시를 돈다는 명목으로 성을 나갔다. 그리고 아무 데서나 묵고 밤을 지새우듯 술을 마셨다. 머릿속의 모든 걸 지우려는 싸움이었다. 근 열흘 만에 성으로 돌아와 주랑을 불렀다.
주랑은 부친의 부름을 받고 망설인 끝에 성청으로 올라갔다. 부녀는 이런저런 일로 얼굴을 대한 지가 꽤나 오래된 사이가 되었다.
"아버님, 주랑입니다."
"오냐, 어서 들어오너라."
부친의 부드러운 음성에 마음이 좀 놓인 주랑은 방안으로 들어갔다. 소문대로 부친 곁에는 시중을 드는 여인이 있었다. 저녁상에 차린 음식들은 그릇마다 뽀얀 김을 피워 올렸다.
여인은 인근 마을 촌장의 딸이라고 했다. 전쟁 통에 남편을 잃고 젊은 과부로 살고 있었다. 장개는 촌장과 상의를 하고 총관의 수발을 들게 한다는 명목으로 데려왔는데 백기는 의외로 마다하지 않았다.
주랑은 술을 따르려는 여인에게 얼른 손을 내밀었다.
"제가 따르겠어요."
여인이 술병을 넘기자 백기는 나가라보는 듯 눈짓을 해보였다.
"저 여인은 장개가 날 위로한답시고 억지로 들여 밀어 시중을 받게 된 게 며칠 되었다. 마음씨가 착한 편이라 그대로 있게 했다."
백기가 변명처럼 말하자 주랑은 고개를 저었다.
"아버지, 저도 이젠 다 큰 자식예요. 아버지를 위하려는 장개님의 마음을 새삼 고맙게 여기고 있으니 개의치 마세요."
주랑의 대답에 백기는 만면에 웃음을 지어 보였다.
"허허, 그렇게 생각을 하느냐? 나는 널 전쟁터에까지 끌고 나와서 주책없는 꼴을 다 보여 주게 되었다. 그런 애비를 이해해 주니 고맙다."
백기는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여전히 주랑의 안색을 살폈다.
"주랑아, 네 얼굴이 많이 상했구나?"
주랑은 부친의 얼굴이 더 초췌해졌다고 보았다.
"제 눈에는 아버지가 더 그러셔요."
백기는 그런 말을 하는 딸이 대견스럽지만 한편으론 전과 같지 않게 마음을 도리어 허전해지는 것 같아서 말을 돌렸다.
"개지 야좌는 너에 대한 칭찬이 많더라."
"무슨 칭찬을 하셨단 말씀예요?"
"야장촌은 널 여성주로 떠받든다니 나로선 여간 자랑스럽지가 않다."
"소저는 야장들이 너무 어려운 일을 하고 수고가 많은 걸 처음 알게 되었어요. 그래서 친절하게 대했을 뿐인데 그걸 고맙게 여기나 봐요."
"나는 숱한 전쟁터를 거치면서 겪은 게 많다. 그러나 이번처럼 잘 했다는 생각이 든 적은 없었다. 바로 너에게 야장촌을 관할시킨 일이다."
"야장들도 총관님이 관용과 배려가 크신 분이라며 존경해요."
"세상은 강하게만 다스린다고 다 잘 되는 게 아님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 네가 여인의 부드러움으로 야장들을 잘 대해 줘서 협조가 잘 이뤄진 것이었다. 개지 야좌도 야장들의 작업 능률이 높아졌다는 말을 했다."
부녀간은 그런 얘기를 나누면서 어색한 분위기가 조금쯤 벗겨졌다. 그러나 백기는 정작 하고 싶은 말을 꺼내기가 힘들어 딸의 눈치만 보는데 주랑이 먼저 입을 열었다.
"개지 야좌님은 아버지가 요즘 술을 너무 드신다고 걱정을 하셔요."
"앞으론 줄이마. 허나 오늘은 좀 마셔야 하겠으니 잔을 채워라."
백기는 딸이 따라주는 술잔을 단숨에 비워냈다.
"이번에 목등이 여길 다녀가면서 널 또 만났다지?"
"예."
주랑의 대답은 기어드는 목소리가 되고 부친의 시선을 피했다. 그렇게 말을 주고받던 부녀간은 끝내 무거운 침묵 속으로 빠져들었다. 백기는 자작으로 술만 따라 마셨다.
"이 아비는 그동안에 네게 못할 짓만 해왔다. 오직 내 생각만하고 모든 걸 숨기려고만 들었다. 부끄러움과 후회를 금치 못하겠다."
"아버지, 그런 말씀은 마세요. 저는 아버지를 존경하며 이해하고 있어요. 절 낳아주신 어머니가 일찍 돌아가신 건 안타깝지만 그 분도 아버지가 베푸신 사랑과 너그러움을 가슴에 품고 눈을 감으셨을 거예요."
백기는 그 말에 눈시울을 붉어지고 가슴 속으로 오열을 참아야 했다. 딸이 새삼 사랑스럽고 의젓해 보여서 끝내 입을 열고 말았다.
"주랑아, 부모 자식을 천륜지간이라고 한다. 그러나 너와 나는 인륜지간의 부녀라고 말해야 하겠다. 내가 이런 말을 하는 이유는 네게 생부가 따로 계시기 때문이다. 나는 그것을 지금까지 숨겨 왔다만, 네 생부는 고구려 다갈촌의 철장인 여준님임을 알아 두어라."
백기는 그 말을 하고나자 가슴속이 확 뚫리는 것 같았다.
"아버지가 그런 말씀은 하시게 만든 저는 죄스럽기만 해요."
주랑은 그런 말을 하고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주랑아. 네가 울면 내 마음은 더 아프다. 그만 그쳐라."
"아버지, 저는 진심으로 용서를 구하니 용서해 주세요."
"아니다. 네가 용서를 구할 일이 아니다. 네게 생부가 계셔도 나와 너는 부녀지간임에는 변함이 없을 것이다. 주랑아, 내 말이 맞지?"
"아버지가 그런 말씀을 해 주시니 저는 고맙고 송구스러워요. 저는 언제까지나 아버지의 딸이고 지금까지 행복하게 산대로 살아가겠어요."
백기는 그러는 딸의 손을 잡고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나는 네게서 그런 말을 듣고 나니 마음이 크게 놓인다. 그런데 여준님의 건강이 매우 좋지 않을 걸로 알려졌다. 이제라도 너는 고구려로 가서 생부를 한번 만나 뵙는 게 도리라는 생각에 권해야 하겠다."
"아버지, 저를 고구려로 보내시겠다는 말씀인가요?"
"나는 이제라도 네가 천륜을 잇게 해 주고 싶다. 그런다고 해서 나와 너의 인륜지간이 끊어지진 않을 것이니 늦지 않게 떠나야 하겠다."
"아버지."
주랑는 목이 메어 부르고 부친의 무릎에 얼굴을 쳐 박았다.
"주랑아, 여준님의 병환은 시간을 더 지체할 수가 없을지도 모르겠다. 네가 나중에 후회를 하지 않으려면 되도록 빨리 가서 뵈어야 한다. 너는 마침 사비성을 떠나 이곳에 와 있으므로 길을 떠나도 남들의 입 초시에 오를 일은 없게 되었다. 고구려는 곧 전쟁터로 변할 상황에 처해서 하루라도 빨리 서두르지 않았다간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겠다."
주랑은 입을 다물고만 있지만 속마음은 동요하고 있었다. 생부를 한번 만나보고 싶은 마음을 도저히 접을 수가 없었다. 더욱이 생부는 병환이 깊은 데다 곧 전쟁의 소용돌이에 말려들게 되었다. 자신도 하루 속히 움직이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었다.
백기는 대수롭지 않게 화제를 돌렸다.
"요즘 신라 군관의 건강은 어떠냐?"
주랑은 고개를 떨군 채로 대꾸했다.
"거동을 할만 해졌어요."
"신라 군관이 여기에 더 있는 것도 내겐 좋을 게 없다."
"아버지, 신라 군관을 내보내도 되겠어요?"
"나는 타계한 신라 성주의 자식까지 목숨을 잃게 하고 싶지 않다."
"아버지, 그렇지 않아도 목부장도 신라군관을 이 성에서 내보야 한다는 말을 했어요. 저도 그 일을 놓고 생각해 보겠다는 대답을 했어요."
"좋다. 마음을 정했으면 서둘러야 하겠다. 목등의 심복인 장개 방장은 너는 물론 신라군관도 감시하고 있으나 개지 야좌가 널 도울 것이다."
백기의 말에 주랑은 크게 놀라며 반문했다.
"장개 방장이 어떻게 알았단 말씀인가요?"
"목등을 믿으면 안 된다. 그들 부자는 겉과 속이 다르다."
"아버지, 그러시면 신라 군관을 어떻게 하실 생각이신가요?"
"나는 네가 신라 군관과 함께 성을 탈출하는 방법을 찾고 있다."
"아버지, 제가 그래도 될까요?"
"내가 신라 군관을 내보내면 목돈은 그걸 이용해 날 누르려고 들 것이다. 그리고 그냥 잡아둬도 그걸 자신에게 유리한 쪽으로 이용하려고 든다. 나는 그런 일은 신경을 쓰지 않겠다. 개지 야좌의 말로는 신라 군관이 널 생명의 은인으로 여긴다고 했으니 함께 성을 빠져나가면 네가 고구려로 가는 걸 도울 것이니 한시라도 지체하질 않길 바라고 있다."
"제가 해론님과 함께 성을 나가면 아버님이 걱정돼서 그래요."
"내 목숨을 좌지우지 할 수가 있는 분은 오직 폐하 한 분 뿐이시다. 내 걱정은 말고 너는 신라 군관과 함께 성을 나가라. 그러면 고구려로 갈 수가 있다. 개지 야좌는 그에 대한 계획까지 세워두었다."
"아버지."
주랑은 부르짖듯 부르고 나서 오열을 터뜨렸다.
"개지 야좌의 말로는 신라 군관도 성을 나갈 마음을 굳혔다. 너와 함께 성을 빠져나가 육로건 해로건 안전하게 고구려로 가게 책임을 지고 돕겠다고 한다. 나는 고구려의 국상이신 을지문덕님에게 네가 다갈촌으로 갈 수 있게 편의를 제공해달라는 청을 하는 서신을 써두었다."
백기의 말에 주랑은 마음의 혼란을 금치 못하며 반문했다.
"제가 그러고 싶다고 어찌 아버지 곁을 떠나겠어요?"
"내가 지금까지 한 말을 뭘로 들었느냐? 만약에 여준님이 어떻게 되시는 날엔 후회를 한들 무슨 소용이냐? 그 분도 널 매우 보고 싶어 하실 것이다. 다른 소리는 더 하지 말고 서둘러 떠날 준비를 해라."
백기는 엄하게 눌러 놓고 눈을 지려 감았다. 주랑은 그러는 부친이 고맙고도 죄송했다. 그러나 생부에게 무슨 일이 생길 경우 돌이킬 수가 없는 후회를 하게 될 것 같아 고개를 끄덕였다.
"주랑아, 너희들 자매를 언제까지 남남으로 살게 해선 안 될 일이다. 아비는 이런 결정을 내리고 나니 비로소 용렬한 이기심에서 벗어날 수가 있게 되었다. 마음을 다잡고 이만 물러가서 떠날 준비를 해라."
주랑은 부친의 엄한 표정 앞에 몸을 일으킬 수밖에 없었다.
백기는 그래도 멈칫대기만 하는 딸에게 돌아가라는 손짓을 했다. 겨우 몸을 돌려서 밖으로 나온 주랑은 야장촌으로 돌아가며 진한 감사와 슬픔이 가슴 속으로 섞갈려 들지 않을 수가 없었다.
주랑이 집 앞에 이르자 개지가 어둠 속에서 기다렸다.
"낭자, 이제 돌아오는군요?"
"야좌님은 쌀쌀한 날씨에 왜 밖에 나와 계세요?"
"해론님이 낭자를 기다리고 있소."
"저를요?"
개지는 음성을 낮추었다.
"해론님은 낭자를 뵙고 얘기를 나누려고 하는 것 같소."
"해론님이 저하고 무슨 얘길 나누려고 하시나요?"
"내가 총장님이 내리신 명을 전했더니 결심을 한 것 같소."
주랑은 해론의 방 앞에 섰다. 해론이 의식을 되찾은 뒤론 방엘 들어가는 걸 되도록이면 피했다. 좁은 공간에서 젊은 남녀가 함께 있는 것도 그렇고 가해자와 피해자란 묘한 입장 차가 부담감이 되었다.
해론은 방안으로 들어온 주랑을 정중히 맞았다. 처음엔 자신을 치료해 준 여인이 적장의 딸임을 알고 너무도 큰 충격을 받았다. 그것은 상처의 아픔에 비할 바가 아닌 치욕이었다.
"낭자, 밤인데 실례를 무릅쓰고 뵙기를 청했습니다."
해론은 주랑의 눈길을 받고 새삼 대찬 데가 있는 여인이란 느낌을 받았다. 주랑도 상대가 병석에 누웠던 사람 같지 않게 등잔불을 비껴 받고 얼굴에서 환한 빛을 발하는 남자 앞에 수줍음을 느꼈다.
"해론님, 이제 몸이 많이 좋아지신 것 같아요."
해론은 조금 어깨를 펴면서 대답했다.
"낭자 덕분에 회복되어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건강을 되찾으신 모습을 보니 저도 여간 기쁘지가 않아요."
젊은 이성 간의 대화치곤 이상하게도 거북함이나 어색함이 전혀 없었다. 주랑은 남성을 대등한 상대로 대하려는 태도가 역력했다. 아니 서로는 상대에 대해 잘 알아서 자연스럽기도 했다.
"낭자, 저는 성과 부친을 함께 잃었습니다. 그러나 낭자의 도움으로 회복이 되었으나 세상에 없을 기구한 운명입니다. 저는 이런저런 것을 따지지 않고 낭자와 얘기를 나누고자 합니다."
주랑은 무겁게 고개만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저도 해론님과 우연인지 악연인지 모를 인연입니다. 그러나 피차간에 사원이 없음은 틀림없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감정이 개입되지 않는 진정한 마음으로 서로 간에 의견을 나눌 수가 있을 것 같습니다."
해론은 그런 말을 듣고 자기도 모르게 두 눈에서 눈물이 설핏 비쳤다. 주랑은 그러는 상대방의 고뇌가 얼마나 큰 것임을 잘 알기 때문에 이해를 하면서 입을 열었다.
"저는 해론님의 심경이 어떠실지 잘 알고 있어요. 그래서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어요. 백제국 총관인 제 부친은 나라의 명을 받고 이번 전쟁을 지휘하셨습니다. 해론님의 부친께서도 똑 같은 입장으로 대치를 하셨습니다. 두 분은 각자 맡은 바 임무를 충실히 수행하셨으나 하늘이 마름질해 놓는 운명에 각자 휘둘리지 않으실 수가 없으셨습니다. 해론님은 불행을 당한 피해자로 저는 가해자 쪽이나 거기엔 사감은 없었습니다."
"낭자의 말씀은 사실이므로 있는 사실 대로 받아들입니다. 그런데 백제국 총관께선 제가 이 성을 나가는 걸 허락하셨다는데 그게 사실인지 아닌지를 직접 낭자의 입을 통해서 확인을 해보고 싶습니다."
"그렇습니다."
해론은 적장의 딸로부터 대답을 듣자 안심이 되었다. 그러나 내심은 고마움과 슬픔이 섞갈려 들어 마음의 평정을 찾기에 애를 써야 했다.
"낭자, 솔직한 심경을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저는 술의 힘이라도 빌려야 대화를 나눌 것 같습니다. 술을 한 잔 마셔도 되겠습니까?
"그렇게 하세요."
"아주머니가 차려 준 술상인데 낭자가 양해를 해주시니 고맙습니다."
해론은 술을 사발에 가득 따른 뒤 벌컥벌컥 들이켰다.
"낭자, 이 술은 송실주인데 낭자도 조금 드시겠습니까?"
주랑이 부끄러운 듯 고개만 젓자 해론은 다시 따라서 마셨다.
"낭자, 전혀 입에 대지를 못하면 모르나 조금만 드십시오."
해론은 말하고 쏘아보는 듯한 눈길이 되었다. 왜냐하면 상대가 자신의 비참한 심경을 알기나 할까 싶었기 때문이다. 주랑은 그런 심경을 알만 해서 조금은 억눌리는 기분으로 사발을 받아들었다.
주랑은 상대가 따라준 술을 들고 코끝에 대었다. 짙은 솔 향내가 스쳐들었다. 그러나 남자가 준 술을 마시기가 부끄러워 입술만 대었다.
"낭자, 사발을 비우고 제게도 한 번 따라 주시겠습니까?"
해론은 공연한 오기가 생기며 강요 조의 말이 나왔다. 주랑은 그제야 사발의 술을 비워내고 술을 따라 내밀었다. 해론은 그릇을 받아들고 입에 털어 넣듯 비워낸 뒤 성에 차지 않다는 듯 스스로 부어 또 마셨다.
"저는 낭자께 여쭙고 싶은 게 있습니다."
"말씀해 보세요."
"낭자께선 절 믿을 수가 있겠습니까?"
"믿어요."
"그러시면 당장 결정을 내려주십시오. 고구려로 가는 데는 배를 타는 해로와 육로로 가는 두 길이 있습니다. 저는 어느 길이던 낭자가 안전하게 국경을 넘을 수 있게 도와드려서 그것으로 보답을 하고 싶습니다."
"저는 육로이던 해로이던 상관이 없어요."
"내일 밤에 나가려고 하니 함께 움직일 준비를 해 주십시오."
"저도 결정을 했어요."
남녀는 합의를 보았다. 주랑은 얘기를 끝내자 몸을 일으켜 방을 나섰다. 밖에 있던 개지 처는 주랑의 손을 끌고 안방으로 들어갔다.
"낭자, 해론님과 낼 성을 나가기로 약속이 되었겠지요?"
"아주머니, 성을 빠져나갈 방법은 있겠어요?"
"장개 방장은 야장방 입구에 오두막을 세우고 점순네와 동거를 시작했어요. 야장촌을 감시할 목적 같은데 점순네는 우리 편예요."
주랑도 점순네와 가깝게 지내고 있었다. 장개는 인물이 반반한 그녀에게 반해 밤낮으로 붙어 지내려고 든다는 소문이 난 것을 들었다.
"점순네는 어제 내게 이런 말을 했어요."
"아주머니, 무슨 말을 들으셨나요?"
"장개 방장이 점순네에게 비밀을 털어놓았대요."
"무슨 비밀을 털어놓았을까요?"
"장개 방장은 해론님이 우리 집에 은신해 있는 것을 알고 있대요. 그리고 어제 사비성을 다녀온 보급 마차는 목등 부장이 곧 가잠성 성주로 부임을 해 온다고 전했대요. 그렇게 되면 해론님은 영 여길 빠져나갈 수가 없게 될 거예요. 그러므로 화급을 다퉈야 하지 않겠어요?"
"아주머니, 야좌님이 세우신 계획을 대강 알고 싶어요."
"내일은 점순네의 생일예요. 장개 방장은 오두막에서 군관들과 함께 술자리를 갖기로 했대요. 이미 성 밖에서 술항아리를 들여왔고 부녀자들 몇 명은 음식 장만을 하게 되었어요. 술판이 벌어지면 과부들이 군관들을 전부 취하게 만들기로 했어요. 군관들이 술에 골아 떨어져 잠을 자는 밤중에 낭자와 해론님은 성벽을 넘어 나가면 돼요."
주랑은 고개를 끄덕이고 마음이 다급해졌다.
"아주머니, 저도 지금부터 떠날 준비를 해야 하겠어요."
이튿날 주랑은 성청으로 다시 올라갔다. 백기는 딸이 해론과 탈출 의논을 끝낸 것을 이미 알고 물었다.
"오늘밤에 떠나기로 했다지?"
"소저, 아버지 말씀대로 고구려를 다녀오겠습니다."
"그렇게 해라. 목등이 곧 오게 되므로 오늘 밤에 꼭 나가야 한다. 그래도 신라 군관과 함께 움직이게 되어 걱정을 좀 덜게 되었다."
"해론님의 도움을 받으면 무사히 국경을 넘을 수가 있을 것 같아요."
"주랑아, 모쪼록 조심해라. 나하고는 이 자리에서 지금 작별을 해야 되겠다. 그만 내려가서 떠날 준비를 서둘러라."
백기는 써둔 서신을 내주고 주랑은 그것을 품에 간직했다.
"아버님, 죄송해요. 제가 다녀올 때까지 몸조심하세요."
"오냐, 잘 다녀오너라."
그런 대화를 나눈 부녀는 슬픔과 고뇌가 뒤엉킨 눈빛을 나누었다. 주랑은 마구 쏟아질 것 같은 눈물을 감추려고 몸을 돌려세웠고 백기 역시 슬픔을 억제하려 듯 고개를 떨어뜨렸다.
백기는 돌아서는 딸을 보며 비로소 눈물을 지었다. 그동안 딸과 함께 행복하게 살았지만 한편으론 무거운 짐을 벗어놓는 것 같고 어딘지 다시는 못 볼 것 같기도 했다.
땅거미가 질 무렵부터 오두막엔 백제군 군관들이 모여들었다. 점순네를 비롯해 성 밖에서 불러들인 대여섯 명의 과부들이 군관들의 술시중을 들면서 자못 떠들썩한 분위기가 되어 갔다.
반면에 야장들은 조직적으로 두 남녀를 탈출시킬 일에 나섰다. 여인들은 음식을 장만해 오두막으로 가져가고 방안에선 군관들과 어울린 과부들이 혼을 빼려 듯 연방 술을 권했다.
그처럼 야장촌이 혼연일체로 돌아가는 속에 해론과 주랑은 밤이 깊어지기만 기다렸다. 오두막에선 군관들의 웃음소리가 그치질 않고 개지 처는 집과 오두막을 오고 가며 주랑과 귀엣말을 나눴다.
밤이 깊어지자 해론과 주랑은 더욱 초조감을 느꼈다. 거기다 초저녁부터 비치기 시작한 눈발이 점점 굵어져 갔다. 조급한 마음으로 기회를 노리는데 자정이 가까워지자 오두막 쪽이 조용해졌다.
드디어 개지 처가 와서 군관들이 술에 취해 모두 잠든 것을 알리고 앞장을 섰다. 해론과 주랑은 개지 처의 뒤를 멀찍이 떨어져 따랐다. 가는 길에 순찰병과 마주칠지도 몰라 긴장을 했다.
탈출할 장소는 북쪽의 성벽으로 정했다. 가는 도중에 순찰병 조우할 경우 충돌을 피할 수가 없고, 성에서 벗어난다고 해도 수 십리 이상 멀리 가지 않으면 위험에 처할 수도 있었다.
남녀는 탈출할 장소가 가까워지자 각기 등에서 장도를 빼어들었다. 오는 동안에 몇 군데 있는 초막들을 무사히 통과했다. 마지막 남은 초소에서 순시병들이 나오지 않기만 바라고 있었다. 그렇게 되면 탈출은 실패로 끝날 수밖에 없어 조마조만 마음으로 걸었다.
마침내 두 사람은 목표로 한 장소에 이르렀다. 해론은 재빨리 성벽 가까이 있는 큰 소나무 기둥에 밧줄을 비끄러맸다. 밧줄의 끝자락을 성벽 너머로 던져 늘어뜨리고 말했다.
"아주머니는 그만 돌아가셔도 됩니다."
개지 처는 그 말에 고개를 저었다.
"걱정 말아요. 두 분이 성벽을 넘으면 제가 밧줄을 치워야 해요."
해론은 개지 처의 말대로 하기로 하고 다시 밧줄이 단단히 매어졌는지를 확인한 뒤 주랑에게 일렀다.
"낭자, 먼저 내려가십시오."
주랑은 개지 처의 손을 잡고 속삭였다.
"아주머니, 고마웠어요."
"낭자. 무사하게 가기만 빌겠어요."
"아주머니, 아버님을 잘 보살펴 주세요."
주랑은 말을 남기기 무섭게 밧줄을 잡고 성벽을 넘어 밖으로 나갔다. 잠시 후 성 밖에서 주랑이 안착을 알리는 신호로 밧줄을 흔들자 해론도 개지 처에게 당부했다.
"아주머니, 제가 이 성에 다시 돌아오는 날까지 제 아버님 묘소를 잘 돌봐 주실 것을 부탁드립니다."
"저도 해론님을 다시 뵙게 될 날만 고대하겠어요."
해론도 잽싸게 밧줄을 타고 성벽을 넘어 사라졌다. 잠시 후 해론이 안착한 신호로 밧줄을 흔들어 주었다. 개지 처는 밧줄을 급히 풀어 가지고 그곳을 떠나버렸다.
개지 처는 마음속으로 눈이 그만 그치기를 빌면서 집에 당도했다. 개지는 아내로부터 탈출이 성공했음을 알고 즉시 총관에게 보고를 하려고 성청을 향해 치달아 뛰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