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석별(惜別)
밤새 온 눈은 그쳤고 아침을 맞았다.
온 누리는 눈에 덮였고 하늘은 활짝 개었다. 어젯밤에 군관들과 고주망태로 술을 마셨던 장개는 해가 떠도 잠을 깨지 못했다. 병사 하나가 급히 달려와서 그를 깨웠다.
장개는 잠이 덜 깬 채 보고를 받다가 그대로 밖으로 뛰쳐나갔다. 병사와 함께 한달음에 달려간 곳은 북쪽 성벽의 한 자락이었다. 제정신이 아닌 채 성벽 밖을 내려다보았다.
병사가 가리키는 성벽 밑에서부터 뻗어나간 두 사람의 발자국들이 쌓인 눈 위에 찍혀 있었다. 안에서 밖으로 나간 게 틀림없는 발자국인데 신라인 군관이 탈출한 것임을 직감했다.
장개는 얼마 전에야 개지의 집에 신라 성주의 아들이 숨어 상처를 치료받고 있는 걸 알게 되었다. 그러나 목등은 집안으로 들어가지 말고 밖에서만 감시할 것을 지시했다. 때문에 직접 눈으로 확인을 못했는데 발자국을 보자면 한 명이 아닌 두 명이었다. 그렇다면 은신 자가 또 있었다는 것인지 알 수가 없는 일이었다.
장개는 일단 병사에게 함구할 것을 지시하고 개지의 집으로 달려갔다.
그로선 어젯밤의 일만 해도 어딘지 이상한 점이 많았었다. 점순네의 생일인데 야장촌이 음식을 장만하고 여인들은 지나치게 군관들에게 술을 권해서 모두는 만취 상태가 되고 말았다.
장개는 야좌의 집으로 달려가서 큰 소리로 외쳤다.
"개지 야좌, 집에 있소?"
잠시 후 개지 처가 나와서 대답했다.
"방장님이시군요? 야좌님은 야장방에 계신데요."
장개는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아주머니, 나는 이 집 안에 해론이란 신라 군관이 은신하고 있는 걸로 알고 있소. 그 자는 지금 어느 방에 있소?"
개지 처는 별로 놀라는 기색도 없이 대꾸했다.
"방장님도 알고 계셨군요? 하지만 어젯밤에 이 성을 나갔어요."
장개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아주머니, 그 자가 이 성에서 나갔다고요? 어이가 없군! 어떻게 그런 말이 입에서 술술 나올 수가 있단 말이요?"
"방장님이 물으시니까 저는 대답을 했을뿐예요."
장개는 천연덕스럽게 대답하는 개지 처가 어딘지 수상쩍고 거기다 반발하는 태도까지 보여서 기가 막혔다.
"이 집은 신라 군관을 숨겨 두었고 그 자가 도망을 쳤는 데고 아무 일도 아니란 듯이 대답을 할 수가 있소?"
"방장님,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세요? 누가 누굴 숨겼다고 하세요?"
장개는 화가 치밀어서 버럭 소릴 질렀다.
"야장들이라고 잘 대해 줬더니 이거 안 되겠군?"
"방장님이 아무래도 무슨 오해를 하고 계시는 것 같군요?"
"내가 오해를 하다니?"
"방장님도 잘 아시잖아요? 야장촌은 백제군 총관의 따님이 관리감독을 해왔습니다. 주랑낭자는 저희 집에서 거처하셨고 우리는 무조건 낭자의 지시를 따르라는 명령을 받았지 않아요? 때문에 우린 낭자의 지시대로 움직였을 뿐인데 이제 와서 그런 말씀을 하실 수가 있어요?"
장개는 개지 처의 말에 틀린 점이 없어 반박을 할 수도 없었다.
"방장님도 한번 생각을 해 보세요."
"나보고 뭔 생각을 하란 소리요?"
"해론님이 여기에 계셨던 건 우리가 숨겨드렸던 게 아녜요. 처음부터 계백 부관님의 분부를 받고 한 일이고 나중엔 주랑 낭자가 오셔서 해론님을 보호하고 상처를 치료해주셨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숨겼다니 그런 억울한 말씀이 어디에 있어요?"
장개는 그 말에 목청을 더 높이지 못하고 집 안을 두리번거리듯 둘러보았다. 이제는 주랑이 나설 법도 한데 쥐 죽은 듯 조용하기만 해서 이상하단 생각이 들었다.
"주랑 낭자께선 지금 어디에 계시오?"
그러자 개지 처는 또 다른 소리를 했다.
"그렇지 않아도 저는 그 일로 성청으로 막 올라가려던 참이었어요."
"아주머니가 성청엔 무슨 일로 올라간단 말이오?"
"총관님께 말씀을 드려야 할 일이 있어요."
"아주머니가 대체 무슨 말씀을 드리겠다는 거요?"
"실은 해론님과 주랑 낭자가 함께 성을 나간 것 같아요."
장개는 얼굴이 사색이 되어 말까지 더듬었다.
"아주머니, 그, 그게 뭐라는 소리요? 주랑 낭자가 이 성을 나갔다고? 신라 군관과 함께? 그게 정말이요?"
"저는 낭자의 지시대로 총관님께 그 사실을 보고하려던 참예요."
"대체 주랑 낭자가 이 성을 왜 나간단 말이요?"
"해론님은 탈출한 게 분명하지만 주랑 낭자도 함께 성을 나가신 걸로 봅니다. 저는 낭자에게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는 생각을 해요."
개지 처의 말에 장개는 더욱 의아했다.
"아주머닌 어찌 그렇게도 태연자약하게 말을 할 수가 있소?"
"제가 태연자약하다니요? 그러신 건 도리어 부관님이 아니세요?"
"그건 또 무슨 소리요?"
"솔직히 말씀을 드리자면 낭자가 성을 나가게 된 이유는 방장님 때문이 아닐까요? 방장님은 그 원인이 뭔지 잘 아실 걸로 생각이 되네요."
장개는 그 말에 기가 막혔지만 또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뭐요? 나 때문이라니? 그건 또 무슨 소리요?"
"방장님이 점순네한테 한 얘기가 야장촌에 파다하게 퍼졌어요."
"뭐?! 내가 점순네한테 해준 말이 파다하게 퍼졌다고 했소?"
"점순네는 주랑 낭자의 생부가 고구려 철장이라는 말을 방장님한테 들었대요. 그래서 낭자는 총관님이 친아버지가 아닌 걸 알게 되었어요."
"뭐?! 뭐라고?"
장개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이건 보통 문제가 아니다 싶어 다리가 후들거렸다. 그렇지 않아도 그 얘길 점순네에게 발설한 뒤로 여간 후회를 하지 않았다. 목등으로부터 혼자만 알라는 신신당부를 받았음에도 입이 근질거려 그예 발설한 게 화근이 되었다.
"저도 방장님께 이런 말씀은 드리고 싶지가 않았어요. 허지만 그 얘기는 야장촌 사람들이 다 알게 되어 자연히 낭자의 귀에도 들어갔어요. 그때부터 낭자는 방안에만 틀어박혀 울기만 했어요. 괴로움에 끼니조차 거르고 밤이면 통 잠을 못 이루는 눈치였어요."
"아주머니, 낭자가 무슨 말을 한 게 있으면 들려주시오."
장개는 사색이 되어 음성마저 떨려 나왔다.
"생부가 따로 있다는 청천벽력 같은 사실을 알게 된 낭자의 심정이 어떻겠어요? 큰 충격을 받고 괴로운 나날을 보내던 낭자는 떠나기 며칠 전에 자신의 심경을 제게 털어놓았어요."
"낭자가 무슨 말을 했소?"
"고구려로 가서 생부와 쌍둥이 자매를 확인해보고 싶다고 했어요. 그러지 않고는 도저히 이대로 지낼 수가 없다는 말도 했어요."
"아주머니, 그럼 주랑 낭자가 고구려로 간 게 확실하단 말이요?"
"고구려로 가겠다고 말했으니 저로선 그렇게 알고 있을뿐예요."
장개는 그 말에 수긍이 가면서도 한편으로 의문이 생겼다.
"아주머니, 낭자가 고구려로 간다면 왜 신라 군관과 함께 성을 나가야 했는지 그 이유를 모르겠소."
"낭자는 그동안 해론님을 치료를 맡아 왔어요. 해론님은 그에 대한 보답을 하는 건 당연한 일이지요. 제 생각인데 해론님은 낭자가 고구려 국경을 무사히 넘을 수 있게 도와주기로 하지 않았을까 생각돼요."
"신라 군관이 고구려 국경을 무사히 넘게 도와준다?"
장개는 마침 눈이 와서 발걸음을 쫓아 추격 병력을 풀면 체포할 가능상이 있다는 상각이었다. 그러나 자신은 이 사건에 연루될 게 두려웠다. 때문에 개지 처를 구슬려 보기로 생각을 바꾸었다.
"나는 아주머니에게 부탁을 하나 해야 하겠소."
"무슨 부탁이세요?"
"아주머닌 아니라고 잡아떼겠으나 내가 보기에 이번 일은 야장촌 전체가 주랑 낭자를 도왔기 때문에 가능했소. 그렇게 되면 개지 야좌는 처형을 면치 못할 것이요. 그러나 나는 더 이상 문제를 삼지 않겠소."
장개는 신라 군관이 이렇게 빨리 도주할 줄은 몰라 방심을 했었다. 그러나 이젠 개치 처를 달래고 단속하는 쪽으로 마음을 정했다.
"나와 아주머니가 다 좋도록 서로 간에 약속을 합시다."
"방장님은 어떤 약속을 하자는 말씀인가요?"
"내가 점순네한테 한 말이 총관님 귀에 들어가지 않게 해 주시오. 만약에 그럴 경우 나나 아주머니는 다 같이 큰 날벼락을 맞게 되오."
"저도 방장님이 무슨 말씀을 하시려는 것인지 알겠어요."
"나는 이 사건과 아무런 관계가 없소. 그러나 점순네가 퍼뜨린 소문이 총관님의 귀에 들어가지 않게 단속을 해주오. 나는 그것만 바라오."
"알겠어요. 방장님의 말씀대로 모두가 입조심을 하게 만들겠어요."
개지 처의 말을 듣고 장개는 지체 없이 그 집에서 나왔다.
해론은 주랑과 함께 한 밤 중에 가잠성을 빠져나왔으나 방향을 잡을 수가 없었다. 우선 백제군의 추격부터 피해야 만해서 가잠성에서 멀지 않은 만뢰촌(萬弩村)으로 가서 도움을 청하기로 했다.
어둠 속에서 두 사람은 어림잡아 방향을 잡고 눈 속을 헤치며 걸었다. 서로 손을 잡고 걸었지만 여간 힘이 들지가 않았다. 수없이 미끄러지고 넘어지길 거듭해서 서로는 몸을 의존하듯 걸었다.
주랑은 처음에 해론의 손을 잡기를 주저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익숙해지고 몸을 밀착시키기까지 했다. 남녀는 잡은 손의 촉감을 통해 묘한 감정을 느끼며 강행군의 피로감도 덜게 되었다.
마침내 동녘 하늘이 부윰해지고 있었다.
다행히 백제군의 추격은 없었지만 불안감 속에 날이 완전히 밝자 그때부터 두 사람은 손을 슬그머니 놓았다. 부끄러움을 느끼듯 시선을 피하게 되고 쑥스러움에 대화마저 끊어졌다.
침묵 속에 계속 걷다 보니 발걸음은 느려지고 힘이 더 드는 것 같았다. 극도로 지친 몸들은 발걸음을 옮길 힘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그러나 남녀는 서로 간에 서로 이입되는 감정은 야릇하기만 했다.
주랑은 새삼 해론에게 이성으로 눈길을 보내게 되었다. 해론도 똑같은 심경으로 내면에서 복잡한 갈등이 일었다. 왜냐하면 상대는 적장의 딸이나 그녀에겐 생부가 따로 있음도 상기하게 되었다.
해가 뜨자 하늘은 언제 눈이 왔던가 싶게 푸르고 맑았다. 해론은 나지막한 언덕 위로 오르자 걸음을 멈추었다. 여기가 어디쯤인지를 가늠해 보려고 주변을 살핀 뒤 말했다.
"낭자, 이젠 상당히 멀리 왔습니다. 안심을 해도 되겠습니다."
"이대로 계속 가면 고구려 국경에 닿을 수가 있을까요?"
"국경은 여기선 아직 멉니다. 그전에 먼저 갈 데가 있습니다. 거긴 제 고향인데 고구려 국경을 안전하게 넘는 방법을 찾으려고 합니다."
"저는 어디를 둘러봐도 민가들은 보이질 않네요?"
주랑은 부근엔 인가(人家)들이 전혀 보이질 않고 여전히 불안한 표정이었다. 해론은 여기저기를 들러보고 있는 주랑에게 먼데 있는 만뢰산성 산자락을 손으로 가리켰다.
"낭자, 제가 가려는 데는 저 산자락 밑입니다."
"해론님, 그러면 잠시 쉬면서 요기를 좀 하고 갈까요?"
주랑의 말에 해론은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낭자, 먹을 게 있습니까?"
"아주머니가 싸주신 게 있어요."
두 사람은 큰 노송 밑으로 가서 앉을자리를 잡았다.
주랑은 개지 처가 싸준 보퉁이를 풀었다. 떡과 엿이 담겨 있었다. 피로와 추위에 지치고 시장기를 몹시 느끼던 해론은 주랑이 집어주는 떡을 받아 들고 덥석 베어 물었다.
"해론님, 엿을 먼저 입에 넣고 녹인 뒤에 떡을 드세요. 그러다가 목이라도 메이면 큰일 나요."
해론은 주랑의 자상한 마음씨에 고마움을 느꼈다.
"배가 고픈데 낭자가 먹을 걸 가져와서 여간 다행히 아닙니다."
두 사람은 물 대신에 눈을 뭉쳐 입에 넣고 갈증을 풀었다. 요기를 마치고 나자 피로감이 더욱 심해졌다. 다 같이 몸들이 점점 노곤해져서 꼼짝도 하기가 싫을 정도였다.
"해론님, 여기서 조금 더 쉬어가면 안 될까요?"
"낭자, 피곤하실 테니 그렇게 하십시오."
주랑은 해론에게 또 물었다.
"해론님의 고향이 저기면 그곳엔 가족들이 살고 계시겠군요?"
"저희 집은 서라벌입니다. 고향 땅에선 어려서 살았고 지금은 친척들만 남아서 살고 있습니다. 저는 서라벌보다 고향을 더 좋아합니다."
"백제인인 제가 그곳에 가면 따가운 눈총을 받지 않을까요?"
"그렇지 않을 테니 걱정 마십시오."
"왜 그렇지가 않다는 말씀을 하시나요?"
"제 고향인 만뢰촌은 옛 가락국 후예들이 모여 사는 곳입니다. 때문에 백제 사람이라고 해서 경원시하거나 질시하진 않을 것입니다."
"가락국 후예들이 모여 산다는 말씀은 무슨 말씀인가요?"
"제 조상은 본래 가락국 백성이었습니다."
"저는 가락국이 옛날에 남쪽 어디에 있었던 나라로 신라에 멸망당한 걸로 아는데 가락국 후예들이 따로 모여서 산다니 무슨 말인가요?"
"신라는 가락국을 합병하고 그 백성들을 사방으로 이주시켰습니다. 그런데 야장들은 철산지를 개발시키려고 만뢰촌으로 이주하게 했습니다. 제 증조부께서도 그때 이주하셨고 가잠성의 야장들도 대부분이 가락국의 후예들로 마음속으론 가락국을 그리워하는 편입니다."
"지금까지 가락국을 그리워한다면 보통 일은 아니겠어요."
"이젠 신라 백성들이 되고 비록 뿔뿔이 흩어져 살게 되었지만 가락국 후예들끼린 유대감이 매우 강합니다. 더러는 조국의 부활을 꿈꾸는 사람들도 있습니다만 전부가 그런 것은 아닙니다."
"그건 신라를 적으로 보는 사람도 있다는 말씀이 아닌가요?"
"일부는 그럴 수도 있지요. 특히 우리가 가려는 만뢰촌은 신라에 대한 적대감과 원한이 강합니다. 그렇지만 백제에 대한 원망 역시 큽니다."
"백제를 원망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가락국이 강성했을 때는 삼한의 남쪽 바다에 면한 땅을 거의 아우를 만큼 영토가 넓었습니다. 그런데 가락국을 가장 먼저 침략한 게 백제입니다. 그때부터 영토가 점점 줄어들고 나라는 약해지게 되었습니다. 가락국은 국력이 점점 쇠퇴해지자 이번엔 신라의 힘을 빌려 백제의 침략을 막으려고 했지만 그 일로 도리어 멸망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그랬군요? 하긴 이 세상에 전쟁이 없었던 때가 있겠어요? 전쟁은 승패가 갈려지기 마련이지요. 가잠성도 본래는 백제 땅이었으나 신라에 빼앗기고 말았다 그러다 이번에 되찾게 된 것으로 알고 있어요."
해론은 주랑의 말에 반감을 느꼈지만 가락국 얘기로 돌렸다.
"가락국이 흥성했을 때도 백성들 중엔 바다를 건너가서 왜국 땅에 새로 나라를 세운 사람들이 많습니다. 때문에 왜국 백성들 중에선 조상의 나라인 가락국을 그리워하고 되살리자는 사람들이 많다고 합니다."
두 사람이 그런 말을 나누는 동안에 어느새 태양이 산머리로 솟아 있었다. 청명한 날씨는 바람도 불지 않고 제법 푸근했다. 그러나 피로감이 심해서 두 사람은 졸음이 밀려들었다.
그때 어디서 말방울 소리들이 일어났다.
해론은 눈을 번쩍 뜨고 주변을 살피다 주랑을 흔들어 깨웠다.
"주랑 낭자."
주랑이 눈을 뜨지 않자 어깨를 가만가만 흔들었다. 겨우 눈을 뜬 주랑은 해론이 가리키는 쪽으로 시선을 주었다. 전방에서 대여섯 명의 사내들이 짐을 실은 당나귀들을 끌면서 다가오고 있었다.
"추격대가 아닐까요?"
주랑이 묻자 해론은 고개를 저으며 다른 쪽을 가리켰다.
"추격대가 아닌 상단입니다. 그런데 저 아래쪽을 보십시오."
멀리 떨어진 데선 더 큰 무리가 움직이는 게 보였다. 20여 명 가량 되는 사내들은 손에 무기를 들고 있었다. 군인들 같지는 않고 당나귀를 끄는 상단의 뒤를 쫓고 있는 게 분명했다.
"더 많은 무리들은 어떤 사람들일까요?"
"아마도 산적들인 것 같습니다. 저 상단을 덮치려는 것 같습니다."
해론의 말에 주랑은 긴장하는 표정이 되었다.
"낭자, 몸을 숨긴 채 좀 더 지켜봅시다."
두 사람은 앞으로 벌어질 사태를 지켜보기로 했다.
짐을 실은 당나귀들이 두 사람 앞으로 가깝게 다가들었다. 그 뒤를 따라붙는 무리들의 몸놀림이 빨라지면서 상단의 뒤를 바짝 접근해 들더니 순식간에 포위를 해 버렸다.
산적의 우두머리가 입을 열었다.
"제울 상단, 짐을 실은 당나귀들을 놔두고 순순히 물러가라. 그렇게 한다면 목숨만은 살려 주겠다."
상인들 중 하나가 입을 열었다.
"우리 이름을 알고 있다면 조용히 물러가는 게 좋을 것이다."
"배짱 좋게 큰 소릴 치는데 그건 아무한테나 통하지 않는다."
산적 우두머리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부하들은 일제히 칼을 빼어 들었다. 상인들도 마주 칼들을 뽑자 금세 팽팽한 대결 구도로 들어갔다. 해론은 주랑에게 나직이 말했다.
"낭자, 저 상단은 바로 내 고향인 만뢰촌에 근거지를 둔 사람들입니다. 저로선 그냥 두고 볼 수가 없으니 도와야 하겠습니다."
"해론 님, 산적들과 싸우시겠다는 말씀입니까?"
"그럴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그러시다면 저도 돕겠어요."
해론은 장도를 메고 있는 주랑이 검술을 지닌 걸로 알았다.
"그렇지만 낭자가 나서는 것은 좀."
"저도 앞가림은 하는 편이니 걱정하지 마세요."
"낭자, 나는 살생을 피해서 겁만 줘서 산적들을 쫓아 보내려고 합니다. 낭자가 힘을 보태 주신다면 염치 불고하고 받겠습니다."
두 사람이 그런 말을 나누는 사이에 벌써 상인과 산적들 간엔 접전이 벌어졌다. 산적들은 상인들에 비해 3배나 많았다. 산적들은 수적인 우세를 믿고 상단을 제압하려고 들었다.
그러나 수적으로 열세인 상인들은 비교적 검술이 능한 편이라 거의 대등한 세를 이루며 맞섰다. 이내 양쪽에선 피해자가 나와서 상인 1명과 산적 3명이 땅에 쓰러져 버렸다.
해론은 곧장 싸움판으로 뛰어들며 외쳤다.
"멈추어라."
상인과 산적들은 동시에 움직임을 멈추었다. 모두는 어디서 나타난 두 사람을 어리둥절한 눈길로 바라보았다. 해론은 돌연 그 자리에서 몸을 허공으로 솟구쳐 올렸다. 그리고 공중에서 칼을 휘두르자 베어진 나뭇가지들이 하얀 눈가루와 함께 밑으로 쏟아져 내렸다.
해론은 그런 동작을 연거푸 해 보이자 바닥은 잔가지들로 뒤덮였다. 그는 병상에 오래 누웠던 몸이라 제대로 쓸 수가 있을지를 시험해본 움직임이었는데 자신감이 생겨났다.
주랑도 지지 않겠다는 듯 기합 성과 함께 몸을 솟구쳤다.
"이 약."
그녀도 해론과 똑같은 동작을 해 보이자 산적들은 놀라움에 고개를 저으며 두목의 눈치를 봤다. 두목도 자신들보다 무예실력이 월등해서 속으로 기가 죽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해론은 산적들을 향해 명령하듯 입을 열었다.
"나는 화랑 낭두 해론이다. 나와 한판 붙어 볼 자는 앞으로 나서라." 산적들은 묵묵부답이고 해론은 거듭 엄포를 놓았다.
"나설 자가 없다면 순순히 물러가라. 그렇지 않으면 전부 체포해서 산성을 쌓는 인부로 넘기겠다. 평생을 쇠사슬에 손발이 묶인 채 돌을 져 나르고 싶은 자들은 남아 봐라."
해론의 말은 금세 효과가 나타났다. 산적들은 자신들이 감당할 상대가 아니란 판단에 몸들을 사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모두는 슬슬 뒷걸음질을 치자 우두머리는 부하들에게 악을 썼다.
"이놈들아, 도망을 치려면 부상을 당한 동료들이라도 데려가야지. 그냥 버리고 갈 작정들이냐?"
부하들은 그 말에 부상당을 한 동료들을 부추겨 세웠다. 기가 꺾인 우두머리도 다른 말은 더 하지 않고 부하들과 함께 순순히 자리를 떴다. 싸움은 그처럼 어이없게 끝이 났다.
해론은 그제야 상인들에게 신분을 밝혔다.
"나는 고향 분들을 만나서 여간 반갑지가 않습니다."
상단의 우두머리는 반가움에 앞서 무거운 마음으로 물었다.
"해론님이 아니십니까? 고맙습니다. 가잠성 성주님 전사를 하셨다는 소식에 우리들은 가슴이 아픕니다. 새삼 애도의 심경을 표합니다."
상단의 단원들도 백제군에 함락된 가잠성은 성주는 자결을 했고 아들인 해론은 행방을 몰라 그동안 걱정을 하던 중이었다. 그런데 살아있는 모습을 대하게 되어 여간 기쁘지가 않았다.
해론도 눈시울을 붉히며 물었다.
"저는 만뢰촌으로 가려는 길인데 여러분은 어디로 가는 길입니까?"
"우린 남가라를 다녀오던 중입니다. 여기서 해론님을 만나지 못했다면 물건들을 몽땅 빼앗길 뻔했습니다. 저희들과 함께 가시지요."
해론과 주랑은 일행에 끼어들어 점심때쯤 만뢰촌에 당도했다.
만뢰촌의 촌장(村長)인 제울(啼亐)은 가락국의 왕손이었다. 그의 부친인 문정(文政)은 가락국 마지막 왕의 차남이었다. 그는 신라 조정에 복속한 부왕을 따르지 않았고 이곳저곳을 떠돌다가 생을 마쳤다.
제울은 나중에 만뢰촌에 정착했고 거기서 상단을 꾸려서 한삼국은 물론 왜국과 말갈을 상대로 교역을 했다. 그렇게 해서 큰 재산을 모았고 가락국 후예들을 은밀히 도와 왔다. 해론은 부친이 가잠성 성주가 된 걸 김유신의 부친 덕으로 알지만 실은 제울의 후원이 컸던 일이었다.
만뢰촌에선 촌장(村長)에 지나지 않는 제울에게 주군(主君)이란 호칭을 썼다. 그러나 화랑도인 해론은 그런 호칭을 쓸 수가 없었다.
"해론 낭두, 촌장님께 인사를 드립니다."
"해론군, 자네 부친이 당한 불행을 무어라 위로할 말이 없네. 하나 생사를 몰랐던 자네가 살아왔으니 불행 중 다행이 아닐 수가 없겠네."
"소생만 살아남은 걸 매우 부끄럽게 여기고 있습니다."
해론은 목이 멘 음성으로 대답했고 제울도 눈물을 훔쳐냈다. 그러다 문득 주랑 쪽으로 시선을 돌리고 좀 놀라듯 고개를 갸우뚱했다.
"해론군, 함께 온 사람은 누구인가?"
해론은 좀 머뭇거리다 대답했다.
"이 낭자는 백제군 총관의 따님이십니다."
제울은 남장(男裝)을 한 주랑을 찬찬히 살피다가 반문했다.
"고구려 다갈촌의 여선 낭자, 아니 지금은 여선 부인이?"
주랑은 자신을 여선으로 보는 사람을 또 만나자 가슴이 마구 뛰었다. 때론 긴가민가한 의문이 없지도 않은데 이젠 확실해진 것이었다.
"촌장님, 저는 고구려 다갈촌의 여선이 아녜요."
제울은 그 말에 도깨비한테 홀린 사람처럼 다시 물었다.
"나는 다갈촌엘 여러 번 다녔고 그때마다 만난 사이가 아니오? 그런데 어찌 날 그렇게 모르는 사람처럼 대할 수가 있단 말이오?"
해론은 고개를 가로젓는 제울에게 말했다.
"거기엔 촌장님이 잘못 보실 수밖에 없는 사연이 있습니다."
제울은 그 말에 고개를 갸우뚱하며 또 물었다.
"해론군, 내가 자못 볼 사연이라니?"
해론은 그 말에 난처한 듯 주랑만 돌아다봤다.
"낭자, 제가 대신 말씀을 드려도 되겠습니까?"
주랑이 고개만 끄덕여 보이자 해론은 말했다.
"다갈촌의 철장님 따님과 주랑 낭자는 쌍둥이 자매간이십니다."
"쌍둥이 자매간이라고? 하긴 나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네. 고구려 장안성에 계실 분이 어떻게 여길 올 수가 있을까 하는 생각 때문일세."
제울이 그런 말을 하자 해론이 물었다.
"촌장님은 다갈촌 철장님과 잘 아시는 사이신가요?"
"나와 철장은 오랜 교분이 있네. 다갈촌에 자주 드나드는 편이라 그곳 사정이라면 거의 모르는 게 없는데 그런 말은 처음 듣게 되었네."
제울은 그렇게 대답을 하면서 한편으론 적국 사이의 해론과 주랑이 어떻게 함께 다니는 것도 큰 의문이라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해론군, 백제국 총관의 따님과 여긴 무슨 일로 왔는가?"
해론은 그 질문을 받고 가잠성에서 있었던 일을 자세히 설명했다.
제울은 사정을 알고 나자 이해가 되며 주랑을 다시 보며 고마움도 느꼈다. 그러나 여준의 딸이 무슨 이유로 백제국 좌장의 딸로 살았는지는 여전히 의문이었다. 또 여선이 장안성으로 가고 나서 다갈촌에서 양신이 사라졌다는 소문도 들었다. 그런데 양신은 신라로 왔다가 가잠성을 거쳐서 다시 고구려로 돌아간 것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
"양신 야좌가 다시 고구려로 돌아간 건 확실한가?"
그 질문엔 주랑이 대답했다.
"제 아버님이 고구려로 돌려보내셨습니다. 지금은 고구려 국상 밑에서 근무를 하고 있다는 소문을 며칠 전 전해 듣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너무도 잘 된 일이 아닐 수가 없군!"
제울은 대답을 하고 생각에 잠겼다. 사람들은 누구나 시련을 겪게 마련이지만 가잠성 사태로 빚은 사건들은 너무도 극적인 데다 의외의 일들이어서 운명의 장난처럼 무서운 것도 없겠다는 생각을 금치 못했다.
"해론군, 백제군의 추격을 피하고자 이리로 오다가 위기에 처한 우리 상단을 구하게 되었다니 나로선 여간 고맙지가 않네."
"소생이 이곳에 온 목적은 촌장님께 도움을 청하고자 함입니다."
"어떤 도움을 청하려고 하는가?"
"주랑 낭자는 고구려로 가려고 길을 떠난 것입니다."
"고구려로 가다니? 무슨 일로?"
"다갈촌 철장님과 여선이란 분을 만나보고자 그럽니다. 소생은 낭자가 고구려 국경을 넘기까지 소생이 길 안내를 맡았습니다. 그러나 육로와 해로 중 어느 쪽이 더 편하고 안전할지를 몰라 의견을 듣고자 합니다."
"여준님을 만나려면 다갈촌으로 가야 하지 않는가? 배를 얻어 타려면 시간도 걸리고 쉽지도 않을 일이므로 육로로 갈 것을 권하겠네."
그 말에 주랑이 주저하듯 입을 떼었다.
"아버님은 고구려로 가서 먼저 을지문덕 님을 찾아뵈라고 하셨습니다. 그분에게 보낼 서신을 써주셨는데 저는 먼저 그걸 전해야 합니다."
"나는 고구려 국상이 지금 판도 순무에 나선 것으로 알고 있소. 때문에 명년 초쯤이나 장안성으로 돌아갈 수가 있을 것으로 보고 있소."
해론은 그 말을 듣고 물었다.
"촌장님 말씀대로 육로를 택하려면 어떻게 길을 잡아야 하겠습니까?"
"우리 상단은 고구려로 갈 때 늘 잡는 길이 있네. 여기서 동쪽으로 나가서 불함대간(不咸大幹)을 넘은 뒤 동해를 끼고 계속 북상하면 되네."
해론은 그 말을 듣고 고구려 사정에 밝은 제울에게 도움을 청하기로 했다. 그래야만 절대적인 안전을 보장받을 수가 있다는 판단이었다.
"촌장님, 소생은 낭자에게 무사히 고구려로 들어가게 하겠다는 약속을 했습니다. 그러나 소생은 한편으로 중요한 본분을 망각하고 있습니다. 지금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서라벌로 가서 조정에 보고를 하는 일입니다. 그다음은 집에서 가서 슬픔에 잠긴 어머님을 위로해 드릴 일입니다. 그런 처지인 소생은 어찌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제울은 해론의 솔직한 심경을 듣고 무겁게 입을 열었다.
"내가 그걸 왜 모르겠는가? 거기다 낭자는 고구려가 초행길이라 위험이 따를 수도 있네. 더욱이 곧 추위가 닥칠 시기라 하루라도 빨리 떠나지 않으면 안 되었네."
"촌장님, 염치없는 말씀이나 낭자를 도와주실 순 없겠습니까?"
제울은 해론의 말이 아니어도 생각에 잠겼다. 또 여준과의 교분을 생각해서라도 마땅히 나서 도울 일이었다. 다만 지난해부터 나이를 생각해서 타국 행정은 자제하고 있었다. 그러나 여준이 병환으로 누운 소문을 들은 터라 이번 기회에 주랑과 함께 가자고 마음을 먹었다.
"내가 낭자를 데려다 주기로 마음을 정했네."
제울의 대답에 해론은 구원을 받은 사람처럼 기뻐했다.
"촌장님, 그렇게 해주시면 소생은 너무도 고맙습니다."
그날 밤에 세 사람은 밤이 깊도록 얘기를 나눴다. 해론은 평소에 제울 대한 오해와 의문이 많았던 터였다. 때문에 여러 가지 질문을 했고 제울은 그에 대해서 소신 것 답변을 해주었다.
"촌장님은 무공이 대단하신데 왜 신라 조정에서 내리는 관직을 받지 않으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외람된 말씀이나 촌장님이 관로에 나가게 되시면 나라를 위해서 큰 일을 하시게 되실 것으로 생각합니다."
제울은 그 말에 고개를 강하게 저으며 두 눈마저 부릅떴다.
"나는 가락국 왕실 혈통이다. 어찌 조국을 멸망시킨 조정에 봉공할 수가 있겠는가? 나는 관직을 얻고 공명을 떨쳐야만 보람된 삶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절개를 지키다가 죽는 것으로 족하다."
해론도 무겁게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자신도 제울이 신라에 복속한 김유신의 가문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걸 잘 알고 있었다. 때문에 그 속내를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비록 조국을 부활시킬 힘이 없고 꿈도 못 꿀 일이나 가락국 후예들을 돕는 것으로 위안을 삼는 사람이었다.
"촌장님, 소생의 짧은 생각을 용서하십시오."
"괜찮네."
제울이 비로소 빙그레 미소를 짓자 해론은 화제를 돌렸다.
"촌장님의 상단은 한삼국을 자유롭게 드나들기로 소문이 났습니다. 그렇게 할 수가 있는 데는 무슨 비결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우리 상단은 한삼국의 국경을 어디서나 무사통과할 수가 있네. 자네도 그 점에 큰 흥미를 느끼는 모양이군? 거기엔 한삼국 전체에 우리 상단이 도움이 된다는 인식이 깔려 있기 때문이란 생각을 하게 되네."
제울이 삼국으로부터 대접을 받는 것은 가락국 왕손이고 장사 수완이 컸기 때문이다. 그는 주로 금은(金銀), 세공품(細工品), 약제(藥劑) 같은 고가품을 취급했는데 고가품은 특히 귀족이나 부호들이 선호하는 물품이고 이익을 많이 낼 수가 있었다. 거기다 고객이 원하는 물품을 전부 공급할 수 있는 능력도 지녔다. 그런데 국경을 자유롭게 넘나들 수가 있어서 장사는 자연 번창할 수박에 없었다. 또 남다른 비결도 있었는데 그건 가락국의 왕손 신분을 최대한 이용하기 때문이었다. 왜냐하면 가락국의 왕손은 한삼국간에 엄정중립을 지킬 수가 있다는 믿음을 줄 수가 있었다. 그런 요소들은 돈으로 살 수가 없는 자산이라 한삼국에서 다 같이 여러 가지로 편의를 제공받을 수가 있는 요인이 되었다.
해론은 제울에 대해 또 다른 관심을 갖고 있었다.
"촌장님은 신라 조정에서 각별한 대우를 받으시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신라 조정이 그러는 이유를 무엇인지 알고 싶습니다."
"자네가 그런 생각을 한다면 이런 대답을 하겠다. 내가 취급하는 상품들 중엔 한삼국이 다 같이 중요시하는 게 있는데 그게 뭔지 아는가?"
"소생은 약제로 알고 있습니다."
"그럴세. 나는 어려서부터 약초 재배에 관심이 많아 좋은 약을 만드는 연구를 해 왔다. 그 이유는 질병으로 고통을 받는 사람들을 구해주기 위함이었다. 그건 나라에서도 해내기 힘든 일일세. 그 때문에 내가 작으나마 기여를 하고 있는 사람으로 인정을 받고 있는 게 아닐까?"
"저는 촌장님을 진심으로 존경한다는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그런가? 나는 요즘에 남 다른 관심사가 또 생겼네."
"촌장님은 어떤 관심사를 말씀하시나요?"
"나는 전쟁이 없는 세상을 바라며 그에 관한 말을 많이 하는 편일세."
"촌장님, 그건 누구나 마찬가지나 무망 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물론일세. 나는 비교적 다른 나라들은 많이 다녀본 사람이라 트인 생각을 하게 되네. 나는 타국에 가서도 전쟁이 없는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는 말을 많이 하는 편일세. 그건 한삼국 백성들이 전부 바라는 바일세."
"촌장님 말씀대로 그런 세상이 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므로 나는 젊은이들에게 기대를 걸고 있네."
"촌장님, 젊은이들에 어떤 기대를 거신다는 말씀입니까?"
"나는 젊은이들에게서 희망을 찾아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네."
"젊은이들로부터 무슨 희망을 찾으신단 말씀입니까?"
"자네는 벌써 그런 일을 실천에 옮기고 있는 사람으로 보네."
"소생이 무슨 일을 했기에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자넨 전쟁이 없는 세상이 되려면 뭐가 젤 중요하다고 생각하나?"
"소생은 갑자기 생각이 나는 게 없습니다."
"나는 한삼국 간에 평화로운 교류가 많아져야 한다는 생각을 하네. 그런데 자네는 그런 일을 벌써 하고 있으므로 여간 흐뭇하지가 않네."
"소생도 평화로운 교류를 중요하게 여기지만 너무 과찬이십니다."
"나의 주장에 가장 큰 동조를 했던 사람이 누군지 아는가?"
"소생은 모르겠습니다."
"바로 자네 부친일세. 그런데 그의 아들답게 자네가 적국인들과 교유를 하고 있음을 알게 된 나로선 앞으로 큰 기대를 걸게 되네."
"촌장님, 소생은 그런 생각까진 못하고 있습니다."
해론은 대답하고 부친의 얼굴이 새삼 떠올라 울컥할 뻔했다.
"나는 한삼국에 자네 같은 젊은이들이 많아지길 바라고 있네. 그렇게 되면 한삼국 모두에 좋은 결과를 낳게 될 것임을 확신하네."
제울은 이번에 한삼국의 젊은이들 간에 전에 없던 사건들이 일어난 것을 알게 되자 크게 고무되었다. 또 얽힌 사연들이 좋은 방향으로 영향을 주어 좋은 결실을 맺기를 마음속으로 빌게 되었다.
"자네와 주랑 낭자는 적국인 사이임에도 목숨을 걸고 서로 도왔네. 그에 감복해서 나는 주랑 낭자를 고구려로 안전하게 데려다 줄 마음을 먹게 되었네. 젊은이들의 아름다운 사연에 끼어들고 싶어서 맡았네."
"촌장님이 그런 생각을 해주시니 소생은 더욱 힘이 납니다."
"나는 이번 출행 길에서 또 다른 일도 하려고 하네."
"또 다른 일이면 어떤 것을 말씀하시는지요?"
"이번 길에 고구려 군에 약제를 공급할 생각일세."
"촌장님, 고구려 군에 약제를 왜 공급하신단 말씀입니까?"
"수국 군과 전투가 벌어지면 사상자가 많이 생겨나게 되지 않겠는가? 그렇게 되면 약제를 필요로 하게 되네."
"촌장님이 고구려 군을 돕는 건 이적행위가 아니겠습니까?"
"인도적인 차원에서 하는 일일세. 그동안에 나는 엄정한 중립을 지킴으로써 한삼국의 국경을 자유롭게 드나들 수가 있었네. 그건 계속돼야 할 일이고 교역으로 큰 이득을 취했으니 당연한 보답일세."
제울은 교역에선 무엇보다 상호 간의 공평성이 보장돼야 한다는 신념을 지녔다. 그래야만 상부상조가 가능해지고 지속적인 거래도 이뤄질 수 있다는 강한 믿음을 갖고 있었다.
"촌장님은 신라 땅에서 살고 계시므로 엄연한 신라 백성이신데 고구려를 돕는다면 그것은 신라 백성으로 도리가 아니잖습니까?"
"해론군, 이왕에 말이 나온 김에 내 소신을 더 밝히겠네. 나는 삼국 간의 교역으로 큰 득을 보기 때문에 그러는 게 아닐세. 나는 한삼국의 통합을 원치 않는 사람일세. 왜냐하면 지금처럼 병립을 하는 게 백성들에게 더 이롭고 왕조들도 긴 수명을 유지할 수가 있다고 생각하네."
"통합보다 병립이 백성들에게 더 이로울 점은 무엇입니까?"
"통합으로 커진 왕조들은 백성들의 삶이 더 힘들어지네. 그 이유는 나라가 커진 만큼 백성들에게 지우는 병역의 짐을 더욱 커지기 마련일세."
"소생은 이해가 되지 않는 말씀입니다."
"그건 당해봐야만 알 수가 있는 일이므로 더는 설명을 않겠네."
해론은 수긍이 가지 않아서 대꾸를 않자 제울이 말을 이었다.
"한삼국인은 병립하면서도 타민족의 침략엔 함께 협력해서 맞서는 지혜와 그런 전통을 세울 필요가 있고 그래야만 삼국의 왕조들은 확실한 안정을 기할 수가 있네. 아마도 수국의 고구려 침공이 일어나면 신라와 백제는 겉으로만 뇌화부동을 할 것처럼 보이나 막상 터지면 그렇지 않을 것으로 보네. 수국도 나중에 큰 착각임을 깨닫게 될 것일세."
"촌장님은 젊은이들이 어떻게 해야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나는 한삼국 젊은이들은 이성적인 사고를 갖고 서로 간에 마음을 열어야 한다는 말을 하고 싶네. 만약에 삼국이 불가침과 우호적인 관계를 바탕으로 서로가 돕는 사이가 된다면 백성들은 살기가 좋아질 것이네."
해론은 별로 수긍이 되지 않는 말이나 대답했다.
"소생은 그 말씀을 생각해보겠습니다."
"신라가 이번에 가잠성을 잃게 된 것은 자초를 한 면이 없지도 않네. 그로인해 자네 선친이 희생양이 되었음을 생각하면 분개하게 되네."
제울의 말에 해론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로부터 사흘 뒤 제울은 고구려 출행에 나섰다.
곧 엄동설한이 닥칠 시기라 먼 길을 떠나는 건 삼갈 일이었다. 그러나 제울은 장정 5명과 당나귀 10 필에 약제를 싣고 출발했다. 그는 떠나기 전에 해론의 의향을 물었다.
"해론군은 여기서 서라벌로 가는 게 좋지 않겠는가?"
"소생은 낭자가 국경을 넘는 데까지는 동행을 하려고 합니다."
"자넨 서라벌로 갈 일이 급하다고 하지 않았는가?"
제울의 말에 해론은 변명 같은 대답을 했다.
"큰 산맥을 넘으면 하슬라에 이를 수가 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하슬라에서 역마를 얻어 타면 서라벌에 더욱 빠르게 도착할 수가 있습니다."
"그것도 좋은 방법이 되겠군."
해론은 그렇게 동행을 했으나 속마음은 주랑과 헤어짐에 대한 섭섭함이 컸기 때문이었다. 이대로 헤어지면 어딘지 모르게 미진한 마음을 들고 도저히 감내할 수가 없을 것 같았다.
행정은 첫날부터 산길이 험한 데다 맵고 찬 바람이 불어대어 힘들었다. 아직은 겨울의 초입인데 날씨는 매우 쌀쌀했다. 해론과 주랑은 당나귀를 타고 일행의 맨 뒤를 따라붙었다.
해론은 날씨가 추워지는 데다 갈수록 길이 험해져 주랑을 은근히 걱정하게 되었다. 먼 여행을 다닌 경험이 별로 없을 것 같은 여인의 몸으로 잘 견뎌낼지가 의문스럽기까지 했다.
"촌장님, 고구려 지경으로 들어가면 길은 더 험해지겠지요?"
제울은 해론의 말이 주랑을 걱정하는 것임을 알고 있었다.
"해론군, 큰 산맥을 넘는 데까지는 힘이 좀 들 것이나 그다음부터는 해안을 끼고 평탄한 길로 들어가게 되네."
"하슬라에서 고기잡이배를 얻어 타고 가면 어떨까요?"
"동절기의 동해는 파도가 여간 거세지가 않네. 위험하기 짝이 없는 바다엔 고기잡이배들도 나가질 않아 타고 갈 만한 배를 구하기도 어렵네."
"다갈촌에 당도하자면 앞으로 며칠이나 걸리게 됩니까?"
"나는 열흘쯤으로 잡는데 날씨가 좋지 않으면 더 걸릴 수도 있네."
주랑은 해론이 그런 말을 하는 것은 자신에 대한 걱정이 담겨 있는 것 같아 묘한 감정이 되었다. 자신을 위해 마음을 써주는 남자가 있다는 것에 고마움과 부끄러움이 섞갈려 들었다.
"해론군, 자네가 고구려로 가는 것도 아닌데 웬 걱정이 그리 심한가?"
"제가 아니고 주랑낭자가 걱정이 되어 그럽니다."
"나는 자네 마음을 잘 알고 있으니 너무 걱정하지 말게."
제울이 농담처럼 던진 말에 해론은 얼굴만 붉혔다.
첫날은 해가 많이 남았지만 일찌감치 숙소를 잡았다. 날씨가 점점 추워지기 전에 목적지에 당도해야 했다. 또 안전을 위해서도 최대한 일정을 짧게 잡는 강행군을 해야만 했다.
상단은 앞으로 이르는 곳마다 관아가 협조를 얻어 쉽게 숙소를 잡을 수가 있었다. 관아들은 제울이 제공하는 상당량의 약제를 받고 그 대가로 편하고 뜨듯한 잠자리를 제공해 줬다.
사흘째로 접어들면서 산길이 가팔아지기만 했다. 오르막길에선 마필들도 걷기에 힘들어했기 때문에 사람들은 말에서 내려걸어야 했다. 해론은 주랑의 손을 자주 잡고 이끌었다.
험준한 산길이 깊어지면서 외딴 민가들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상단은 외딴집이 있는 곳을 알고 있어 지친 몸을 쉬며 잠 잘 곳을 찾을 수가 있었다. 그렇지만 좁은 오두막집에선 주인 가족들과 섞여서 새우잠을 자는 것만도 만족해야만 했다.
주랑은 너무 지쳐서 아침이면 밥을 잘 못 먹을 정도로 힘들어했다. 해론은 그녀의 얼굴이 점점 핼쑥해져서 안타까운 마음이었다.
"낭자, 산길은 점점 험해지고 입맛이 없더라도 든든히 먹어야 하오."
해론의 말에 주랑은 낯을 붉혔다. 자신을 챙겨주려는 말을 듣고 단원들의 눈길을 의식해야만 했다. 제울은 부끄러움과 난처함으로 어쩔 줄을 모르는 그녀를 보며 뜬금없는 말을 했다.
"처녀 총각은 다른 사람들이 안중에도 없을 때도 있지."
단원들은 그 말에 일제히 웃음들을 터뜨렸다. 그럴수록 두 남녀는 얼굴들을 붉히게 되어 자꾸만 일행들로부터 뒤로 처지게 되었다. 제울과 단원들은 그런 남녀를 돌아보며 얘길 나눴다.
"해론 군의 머릿속은 주랑 낭자로 꽉 찼는데 낭자는 어떨지?"
"낭자도 같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저러다가 두 사람이 무슨 일을 내지 않을까 싶습니다."
"썩 잘 어울리는데 한 쌍으로 보이는데 짝을 이뤄도 좋겠습니다."
해론은 가잠성을 탈출할 때부터 주랑과 손을 자주 잡았지만 이젠 별로 남들의 눈을 의식하려 들지 않았다. 처음엔 목숨을 구해준 은인에 대한 고마움이 앞섰지만 차츰 다른 감정으로 바뀌었다.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설렘이 일어나 정분(情分)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주랑도 처음엔 동정과 측은지심으로 간병을 했던 해론에게 언제부터인지 연민의 시선이 담기고 있었다. 그건 주랑도 마찬가지라서 점점 남성을 대하는 눈길이 되어가고 있었다. t
해론에게 주랑은 부친의 목숨을 빼앗은 적장의 딸에 지나지 않으므로 연정을 품는다는 건 결코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럼에도 자꾸만 끌리는 마음에 괴로움을 느껴야 했다. 이성을 되찾고자 스스로를 윽박질러봤지만 소용이 없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 주랑의 생부가 여준이란 생각을 하면서 자신을 용서하려는 마음도 일어났다.
그런데 주랑은 해론에 대한 감정이 점점 연모의 정으로 바뀌어 갔다. 해론 곁에 있으면 가슴에 설레기까지 했다. 그것은 처음으로 남성에게 이끌리는 감정이라 잠시도 떨어지고 싶지가 않았다.
그렇지만 두 사람은 부득불 곧 헤어지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 그 건 두 사람이 다 같이 심한 갈등과 우울감에 빠져들게 만들었다. 그러나 괴로울지라도 영원히 여행이 계속되기 바라고 있었다.
나흘째로 접어든 날 오후에 제울은 내일은 영(嶺)을 넘는다고 했다. 그 말을 들은 남녀는 점점 말들이 없어졌다. 주랑은 눈이라도 펑펑 쏟아져서 옴짝달싹을 못하게 되었으면 싶었다.
닷새째로 접어든 아침에 두 남녀는 말없이 자꾸 서로의 얼굴만 바라보았다. 곧 영을 넘게 된다는 것에 절망감마저 느꼈다. 그러나 일행은 무심하게 더욱 발길들을 재촉하기만 했다.
주랑은 이제 해론과 조금만 떨어져도 불안감이 일었다. 해론도 그만 가고 싶어 마냥 느리게 발길을 떼어놓게 되었다. 그렇다 보니 일행들과 간격은 아주 벌어지게 되고 말았다.
하늘은 이별을 앞둔 남녀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고 눈발을 내비치기 시작했다. 점점 거세지는 눈발은 순식간에 세상을 은백색으로 변화시켰다. 주랑은 그런 눈 속에서 주저앉고 싶었다.
깊은 산속은 그윽함만 더해지고 모두는 걷기에 힘이 들고 숨이 찼다. 해론과 주랑은 아예 말을 잃었다. 침묵 속에 흘려내는 한숨과 숨결엔 서로는 마음이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주랑은 느린 발걸음조차 아예 멈추고 싶었다. 해론도 그녀의 마음을 헤아린 듯 말없이 손을 내밀었다. 남녀는 손을 잡은 것도 모자라 서로가 몸을 붙이듯 느리게 발걸음을 옮겼다.
제울은 까마득하게 뒤떨어진 남녀의 모습을 가끔씩 돌아다볼 뿐 재촉하는 말을 하지 못했다. 그때 가장 앞서 있던 단원 중 하나가 불함대간의 등성이에 오른 듯 모두에게 외쳤다.
"이제부턴 내리막길입니다."
산맥의 등성이는 희한하게도 푸른 하늘이 열려 있었다. 그 밑으론 동해의 먼 수평선까지 시야가 탁 트여 있었다. 영마루 위로 올라 선 모든 단원들은 일제히 환호성을 질렀다.
주랑은 그 소리를 듣고 걸음을 세우고 말았다. 갑자기 가슴이 휑하니 뚫려버린 것처럼 바람이 스며들었다. 굽이굽이 올라온 산길에 내려다보고 있자니 두 눈에 눈물이 맺혀 갔다.
해론도 걸음을 멈추었다. 영마루를 넘어 주랑을 따라 고구려 땅으로 들어가고 싶었다. 심한 갈증을 느껴 눈을 뭉쳐 입 안에 넣고 돌아 선 채 가볍게 어깨를 들썩이는 것 같은 주랑을 보다 눈을 감았다.
그때 멀리서 단원이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주랑 낭자, 빨리 오시오. 해 전에 산을 내려가야 합니다."
슬픔에 잠긴 주랑은 와락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전신에 힘이 전부 빠져나간 듯 허망함마저 느껴서 주저앉았다. 해론은 그녀의 몸을 일으켜 세우고 큰 결심을 한 듯 입을 열었다.
"주랑낭자, 저는 여기서 돌아갑니다. 낭자만 생각하겠습니다."
주랑은 고갤 떨군 채 겨우 대꾸했다.
"해론님은 제 머릿속에 영원히 남아 계실 거예요."
남녀는 그런 말을 나누고 비로소 서로를 바라보았다. 해론은 와락 주랑을 끌어안고 한동안을 서 있다가 팔을 풀었다. 그리고 몸을 돌려세운 뒤 올라왔던 길을 도로 내려갔다.
주랑은 흐려져 가는 눈시울로 무슨 말을 하려다가 말았다. 앞이 잘 보이질 않아 손등으로 눈을 닦은 뒤 다시 보았다. 그러나 시야 속에 해론은 없고 해묵은 나무숲만 남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