쇠나라 21. 순무

21. 순무

by 정완기

21. 순무(巡撫)

순무 병단은 압록수의 북안을 끼고 상류 쪽으로 거슬러 올랐다. 군관들은 점심때 강변에서 식사를 마친 뒤 휴식을 취하면서 압록수 방어 작전을 놓고 진지한 토론을 벌였다.

압록수는 강폭이 넓고 수심이 깊어 천혜의 방어처가 되었다. 그러나 험한 지형 조건만을 의지하지 않고 그걸 극대화시킬 방안을 찾으라고 했다. 그러자 고돌기는 불만을 드러내듯 입을 열었다.

"합하, 압록수는 천험의 지형을 그대로 이용을 하면 될 것이지 골치 아프게 따로 방어 작전까지 세울 필요가 있겠습니까?"

"지형의 유리함만 믿지 않고 극대화시킬 방안을 모색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므로 모두가 지혜를 짜내 보도록 하시오."

을지문덕의 대답을 힐책으로 느꼈던지 고돌기는 반발 투가 되었다.

"합하, 그보다 적이 압록수에 이르지 못하게 막는 작전이 더 절실한 데 왜 압록수 방어 작전부터 거론을 해야 한다는 말씀입니까?"

"수국은 주력인 보병 위주의 전투를 펼칠 것이나 이번엔 양상이 달라질 것이요. 그 이유는 양광이 호언한 대로 10만 기병을 양성했고 또 대병력을 수송할 대선단도 꾸렸소. 대선단에 대병력을 싣고 온다면 압록수 이남에 상륙시켜 장안성을 직공 하는 사태가 벌어질 수도 있소."

을지문덕은 그런 대답을 하고 설명도 덧붙였다.

양광은 서역 출신의 곡사정(斛斯政)을 병부 시랑에 기용했다. 그 목적은 많은 군마를 구입해서 기병 훈련을 충분히 시키는 데 있었다. 그리고 많은 함선을 건조해 수군(水軍) 전력을 크게 강화시킨 것도 장안성 직공을 위한 것임을 강조했다.

연생수는 요동 방면에 대한 걱정으로 입을 열었다.

"합하, 수국이 대규모 기병을 투입하면 우린 더욱 어려워집니다."

"그렇지만 적이 아무리 상상을 초월할 병력을 투입시킨다고 해도 약점은 있게 마련이요. 그걸 찾아내어 적절한 대응 전략을 짤 수밖에 없소."

고돌기는 마땅치 않은 표정으로 또 물었다.

"합하, 너무 많은 병력에서 무슨 약점을 찾을 수가 있단 말씀입니까?"

"수국 장수와 군관들은 워낙 많은 대병력을 끌고 오는 수적인 우세를 믿고 우쭐대며 방심을 부를 수도 있고 통제가 어려울 수도 있으므로 그런 데서라도 약점을 찾을 수밖에 없겠소."

하온장이 입을 열었다.

"우린 적의 막강한 병력을 막을 병력이 너무 적어서 암담합니다."

"그렇다고 자포자기를 할 수는 없잖소? 우린 병력이 적은 만큼 그에 합당한 작전을 구사할 수밖에 없소. 되도록이면 정면 대결을 피하고 적을 피로하게 만을 작전을 써야 하오. 최악의 경우 적을 압록수 이남으로 유도해 큰 타격을 가하는 과감한 작전을 고려해 볼 수도 있겠소."

고돌기는 압록수 이남으로 적을 유도한다는 말에 다시 발끈했다.

"합하, 적을 압록수 이남으로 유도한다니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길삼은 고돌기의 반발을 견제하려 듯 끼어들었다.

"계루부 우태님, 합하께선 적은 병력으로 여러 가지 작전을 쓰지 않으면 안 된다는 점을 강조하시는 말씀일 뿐이요. 최후엔 적이 압록수를 도하하는 사태도 벌어질 경우를 상정할 수도 있다는 말씀이 아니겠소?"

여타 부 우태들이 을지문덕을 옹호하자 고돌기의 반박은 더해졌다.

"여러 가지 작전을 쓰는 걸 누가 반대를 하겠소? 문제는 적을 압록수 이남으로 유인할 수도 있다는 말씀이니 그건 더욱 용납되지가 않소."

을지문덕은 고돌기가 우려하는 바가 무엇인지 잘 알아서 대답했다.

"후퇴 작전을 위험시만 해선 안 되오. 적에게 큰 타격을 가하기 위해선 유인 작전을 쓸 필요도 있소. 전투에서 공격과 후퇴를 병행하는 다양한 전술을 구사할수록 타격을 극대화시킬 수가 있다는 뜻이요."

여타 부 우태들은 그 말에 동의하며 무겁게 고개들을 끄덕였다. 그리고 계루부 위주로만 생각하는 고돌기에게 따가운 눈총을 보냈다. 그만큼 계루부와 여타 부 간의 반목이 심해서 그걸 의식한 고돌기도 그만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을지문덕은 토론을 끝내고 자기 장막으로 돌아간 뒤 서류뭉치를 펴놓았다. 거기엔 지도(地圖)들이 여러 장 있어 연개소문이 물었다.

"합하, 이 지도는 살수 변을 그린 것 같습니다."

"그렇다."

"살수 변에선 어떤 작전을 쓰시려고 하십니까?"

"적에 수공을 가할 방법을 연구 중이다."

을지문덕이 수공(水攻)에 관한 말을 꺼내자 연개소문은 또 물었다.

"합하, 어떤 방법으로 적에게 수공을 가할 수가 있겠습니까?

"굵고 긴 쇠사슬로 강물을 막을 방법을 연구하고 있다."

그리고 설명을 덧 붙였다. 살수 양안에 쇠사슬을 여러 줄 가로지르고 그걸 의지해 통나무를 울타리처럼 세워 물을 막는다. 적이 도강할 때 쇠사슬을 끊어 막은 물을 한꺼번에 터트려서 쓸어버릴 계획이었다.

"강물을 막자면 매우 강한 쇠사슬을 만들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연개소문의 말에 을지문덕은 양신을 돌아다보았다.

"약광, 다갈촌 야장방에선 강하고 굵은 쇠사슬을 만들 수가 있다지?"

"다갈촌 야장방은 강한 쇠사슬을 만드는 기술이 있습니다."

"형, 그런 쇠사슬은 어떻게 만드오?"

"가는 철선을 외로 꼰 것과 바로 꼰 것 두 가지를 만드네. 그런 뒤 두 가지를 합쳐 다시 꼬으면 쇠의 강성이 두 배로 늘어나게 되네."

을지문덕은 고개를 끄덕이고 펴놓은 지도에 표시된 안주성에서 50여 리쯤 떨어진 협곡 어느 지점에 또 원을 그려 표시해놓고 입을 열었다.

"시동, 지금부터 야간행군에 들어간다고 각부에 알려라."

"합하, 야간행군까지 시키려고 하십니까?"

"명을 전하고 오라."

연개소문은 장막을 나가 각 부를 돌면서 명을 전했다. 야영 준비를 하고 있던 군관들은 다시 천막을 걷고 야간 행군 준비로 들어갔다. 그래도 전처럼 불만들을 터뜨리지 않았다.

을지문덕이 야간 행군을 시키는 이유는 군관들이 잠시도 해이해짐을 막으려는 의도였다. 그렇게 출발한 군관들은 밤새도록 말 잔등에서 졸음을 쫓으면서 행군을 해야 만했다.

병단은 동이 틀 무렵 동가강(冬佳江)의 강변에 이르렀다. 부윰한 새벽빛 아래 강물은 도도하게 흐르고 있었다. 동가강은 고구려 발상지로 건국 초기의 피와 땀과 애환이 서린 곳이었다.

고구려 백성들은 그런 동가강을 마음의 고향으로 여겼다. 그런 강변 앞에서 진군을 멈춘 군관들은 신푸녕스런 표정들이 되었다. 강변엔 타고 건널 나룻배들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약광, 말을 타고 강을 그대로 강을 건너갈 수가 있겠나?"

"합하, 소관은 할 수가 있겠습니다."

"그렇다면 한번 해보자."

양신은 상처를 열심히 치료한 덕분에 띵띵 부었던 팔뚝의 부기가 많이 가라앉았다. 을지문덕은 양신이 어느 정도 기력을 되찾았다는 판단에 연개소문을 돌아다보며 명령을 내렸다.

"시동, 각부에 알려라. 지금부터 말을 타고 도강에 들어간다."

연개소문은 입이 딱 벌어진 채 물었다.

"합하, 이 추위 속에 저 물속을 그대로 건너란 말씀입니까?"

"그렇다."

연개소문은 벌레를 씹은 표정으로 말머리를 돌려서 떠났다. 도강 명령이 하달되자 군관들도 당황해서 서로 얼굴들만 쳐다보았다.

어느새 산줄기 너머로 태양이 얼굴을 내밀고 있었다.

을지문덕은 양신을 돌아다보았다.

"약광, 고통스럽더라도 참게."

양신은 힘 있게 대꾸했다.

"합하, 염려하지 마십시오."

마침 건기로 접어든 강물은 수심이 그리 깊지가 않았다. 다만 좁은 협곡을 흐르는 물살은 매우 거셌다. 군관들은 선뜻 강물 속으로 들어서려고 하질 않자 을지문덕이 먼저 들어갔다.

그때부터 도강을 독려하는 우태들의 외침이 차가운 새벽 공기를 가르듯 일어났다. 군관들은 부어 터진 얼굴로 차가운 물속으로 말을 몰아넣자 금세 허벅지 아래로부터 잠겨 들었다.

고요했던 강의 수면은 거친 물결로 일렁거렸고 말들은 몸이 물속으로 점점 잠겨 들수록 격한 숨결을 토해냈다. 대가리를 잔뜩 치켜든 말 잔등의 사람은 발걸이를 딛고 기립(起立) 자세를 취했다.

사람이나 말들이나 차가운 물살을 헤쳐 나가기에 급급해 정신을 못 차릴 지경이었다. 전진만 하는 말들은 물살에 밀리지 않으려고 기를 썼고 군관들은 말 배에 박차만 가하고 있었다.

양신은 말 잔등에 붙어있기도 여간 힘이 들지 않는데 부상을 당한 팔뚝이 물에 잠기지 않게 하려고 한껏 치켜들었다. 그러자니 말 잔등에서 몸이 자꾸 밑으로 미끄러져 내렸다.

을지문덕은 양신을 돌아다보며 말했다.

"약광, 말갈기에 얼굴을 바짝 붙여라. 그래야 말도 힘이 덜 든다."

"알겠습니다. 합하."

양신은 시키는 대로 해보았더니 말의 전진이 한결 빨라지고 말 잔등에 붙어 있기도 훨씬 수월해졌다. 하얀 콧김을 강하게 내뿜으며 허우적대던 말도 한결 안정감을 유지해 갔다.

선두는 어느새 다 건넌 뒤 강변에 올랐다. 뭍으로 올라선 군관들은 입술들이 새파랗게 질린 채 건너온 강물을 멍청히 바라만 봤다. 말들도 고통스러운 코 투레를 연방 틀었다.

병단은 전원이 무사히 도강을 마쳤다. 차가운 물속에서 나온 데다 찬바람까지 불어 추위는 뼈골 속으로 파고들었다. 군관들은 급히 삭정이를 주워 모아 화톳불을 지피고 언 몸을 녹였다.

화톳불에 몸을 쬐면서 조금은 살 것 같아진 군관들은 허탈한 웃음만 연방 터뜨렸다. 그러나 앞으로 을지문덕이 또 어떤 시련을 안겨 줄지 몰라서 슬슬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양신은 뼈가 시린 물속을 벗어나자 몸을 불에 던지고 싶었다. 상처를 입은 팔뚝은 무지근한 통증이 일어났다. 상처가 대강 아물었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고통은 더 커질 것이었다.

을지문덕은 전체를 위해선 개인 사정을 봐줄 순 없지만 고통을 내색하지 않으려는 양신을 안쓰럽게 봤다. 양신도 자기를 보는 을지문덕의 눈길에 염려가 담긴 것을 알고 있었다. 남들에게 매몰차단 말을 듣고 있지만 다정다감한 면도 있음을 알 수가 있었다.

군관들은 젖은 옷을 대강 말렸고 을지문덕은 발진 명령이 떨어졌다. 병단은 전체 조용히 움직였고 말을 아끼려 듯 조용하고 자못 진지한 분위기 속에 더러는 추위를 떨치고자 비상식량인 말린 고기를 씹었다.

을지문덕은 군관들의 불평이 많이 줄어들어 흐뭇해했다. 겨울이 끝나면 곧 적과 대 격돌을 빚게 될 걸로 예상했다. 그러므로 이만한 시련쯤을 못 이겨서야 생사를 가를 전투에서 살아남기가 힘들다는 생각이고, 군관들도 그 점을 알아주길 기대하는 마음이었다.

군관들도 전쟁에서 승리하는 길은 철저한 훈련밖에 없고 실전을 방불케 할 군사 훈련이 계속되는 것을 겪고 이겨낼 각오를 마땅히 다지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으로 응했다.

대장군(大將軍)인 각부의 우태들은 상가(相加) 다음의 지위였다. 군관들도 을지문덕이 이번 순무에서 대장군들을 완전히 장악하지 못하면 지휘를 하는데 큰 어려움을 겪을 것으로 봤다.

해 질 녘에 순무 병단은 국내성(國內城)에 입성했다.

고구려의 옛 국도인 국내성은 성벽이 소박하기 그지없어 보였다. 저녁나절에 입성한 군관들은 모처럼 뜨거운 국밥으로 배를 채우고 들판의 야영보다 아늑한 천막 속에서 잠자리를 잡았다.

군관들은 편한 잠자리에 들자 하루쯤은 늦잠을 자는 것을 기대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튿날도 이른 새벽에 발진 명령이 떨어졌다. 피곤이 덜 풀린 몸들로 군소리 없이 행장을 꾸렸다.

행군을 거듭할수록 전원의 동작들은 빨라지고 일사불란해져 갔다. 그걸 보는 을지문덕은 고구려 군의 강성 면모가 드러나고 있다는 생각을 하녀 입가에 미소를 머금게 되었다.

국내성은 비교적 평탄한 분지에 자리를 잡았지만 주변은 그리 넓지가 않고 경작지도 별로 없었다. 거기다 가장 넓은 평지는 고분(古墳)들로 채워져 있었다. 을지문덕은 양신을 돌아보며 물었다.

"약광, 국내성엘 와 본 적이 있는가?"

"합하, 처음 왔습니다."

"옛 국도를 보는 소감이 어떤가?"

"겨우 하룻밤을 자고 난 소관은 별 소감이 없습니다."

연개소문이 끼어들었다.

"형, 본 느낌은 있을 게 아니오?"

"합하, 여긴 땅이 척박해 보여서 한 나라의 국도로는 적합치가 않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처음에 이런 데다 국도를 잡은 이유는 뭘까요?"

"고구려는 초기부터 교역에 힘썼던 나라여서 그럴 수밖에 없었다."

"합하, 여기선 산물이 많이 날 것 같지도 않을 걸로 보입니다."

"교역은 산물이 많이 나야만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각 처의 산물을 유통시키는 것도 교역이다. 교역은 지리적인 여건이 좋아야 유리한데 여긴 사방으로 길이 통하는 요지다. 약광은 신라와 백제의 국도를 가봤으니 거기도 무슨 특징이 있을 것인데 어떻든가?"

"신라의 국도인 서라벌도 평지로 이곳보다 더 넓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도로는 정비가 잘 되었고 특히 바다가 가까워서 수륙 양면으로 교통이 원활한 편이나 교역의 요지가 될 수는 없겠다고 봤습니다."

"백제의 사비성은 어떻던가?"

"사비성에선 짧게 머물러 자세히 돌아보질 못했습니다. 다만 강에 면하고 바다로 이어져 수륙 양면의 교통이 편리할 것 같았습니다. 한눈에 봐도 어느 나라보다 교역을 하는데 좋은 여건일 듯싶었습니다."

연개소문이 물었다.

"형, 백제나 신라 국도에도 여기처럼 고분들이 많소?"

"여긴 돌로 쌓은 고분들이 주를 이루나 신라의 왕릉들은 흙으로 봉분을 쌓아 매우 규모가 컸네. 그러나 여기처럼 수 백기의 장관은 아닐세."

"합하, 저는 고구려가 천도한 이유 중의 하나가 국도에 고총들이 너무 많이 있기 때문이란 말을 들었는데 그게 사실입니까?"

연개소문의 질문에 을지문덕이 대답했다.

"그건 틀린 말이다. 고총이 많은 것은 삼국 중 고구려 역사가 가장 길고 강성함을 반증하는 일이다. 그러나 국도를 옮긴 가장 큰 이유는 압록수와 두만강 이남 땅에 철산지는 물론 금이 나는 광산이 있고, 거기다 서한만에선 소금을 생산하고 농사도 잘 되는 편이기 때문이다."

양신은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면서 물었다.

"합하, 저 많은 고분들은 전부 왕릉들입니까?"

"전부가 왕릉은 아니다. 5부의 족장들 무덤들도 함께 있다. 왕릉과 족장의 무덤들이 혼재해 있는 걸 보면서 무슨 생각이 드는 건 없는가?"

양신은 선뜻 대답할 만이 없는데 연개소문이 입을 열었다.

"왕릉과 족장들의 무덤이 함께 섞여 있다는 것은 고구려의 왕권이 신라나 백제보다 강력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입니다."

"처음엔 그랬다. 왕릉과 부족장의 무덤들이 함께 자리를 잡을 수가 있었다는 것은 그만큼 왕권이 강하지 못했다는 반증도 되겠지."

"합하, 왕권을 강화시킬 목적으로 천도했다는 말이 되지 않습니까?"

"시동의 생각처럼 그런 면도 없지는 않겠지."

을지문덕은 그런 대답을 하고 연개소문이 나이에 비해 통찰력이 만만치가 않다는 생각을 했다. 그것으로 연태조가 자식에게 어떤 교육을 시켰는지를 미루어 짐작이 가기도 했다.

연개소문은 어깨를 으쓱하고 이번엔 양신에게 말을 돌렸다.

"형은 고구려의 장점을 든다면 무엇으로 보고 있소?"

"나는 왕릉과 부족장의 무덤들이 함께 있는 걸 매우 바람직한 일로 여기네. 비록 영토의 대부분이 척박한 땅임에도 강국으로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많은 고분들이 함께 있는 데서도 찾을 수가 있다는 생각일세."

을지문덕은 양신의 말을 듣고 더욱 다시 보는 눈길이 되었다.

"그렇다. 고구려가 발전할 수 있던 원동력은 5부 연맹에서 찾게 되나 그 점은 왕실과 여타 부 간에 긴밀한 협력이 유지될 때만 가능했었다."

연개소문이 끼어들었다.

"현실은 왕실과 여타 부는 평등한 조건의 경쟁은 아니잖습니까?"

"왕실은 여타 부를 존중하고 포용력을 갖아야 한다는 생각이다."

양신이 입을 열었다.

"합하, 신라는 귀족이나 백성들의 생활이 비교적 검박해 보였습니다. 그런데 고구려의 귀족들은 사치가 너무 심하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약광, 좋은 지적을 했다. 고구려 귀족들의 심한 사치는 백성들과 위화감을 조성할 정도이다. 초창기엔 질박한 삶과 강한 상무정신이 컸었지만 귀족들은 교역으로 부를 축적하게 되면서부터 좋은 전통을 퇴색하고 사치만 심해졌다. 그런 면은 아마도 백제 역시 비슷할 것 같다."

"소관은 백제에서 이틀간 머물러 제대로 살핀 게 없으나 들은 얘기론 그런 것 같습니다. 물산이 풍족하고 타국과 교역이 활발해 백성들도 잘 사는 편이라고 들었습니다. 소관이 보기에도 귀족들의 옷차림은 비교적 화려했지만 고구려처럼 심한 사치를 부리는 것 같지는 않았습니다."

을지문덕은 고개를 끄덕이며 고분들을 다시 가리켰다.

"저 많은 무덤들은 고구려가 강국임을 증명하고 있다. 앞으로 두 사람은 순무를 통해 이민족의 삶을 둘러보게 될 것이다. 그러나 저런 무덤들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가 없음을 큰 자긍심으로 삼게 될 것이다."

순무병단은 오전 내 행군을 계속해 동가강의 지류들을 몇 개 더 건너고 오후엔 울울한 수림 속을 통과했다. 해 질 녘에 낮은 산맥을 넘고 나자 끝없는 황야가 눈앞에 펼쳐졌다.

황야의 초입에서 병단은 야영을 하고 이튿날 다시 출발했다. 겨울을 앞둔 대지는 키를 넘는 누런 억새풀로 뒤덮여 있었다. 하루 종일 매운 서북풍과 맞서며 전진을 계속했다.

억새풀 숲을 통과하고 나자 갑자기 앞이 툭 트였다. 가지 색 하늘엔 구름이 한 점도 없고 지평선은 까마득하게 열려 있었다. 그러나 거기서부턴 도처에 늪지대가 펼쳐져 있어 말들은 걸음을 옮기기에 힘이 들었다.

모든 게 북쪽의 맹추위가 밀려올 것을 알리는 전조였다.

황야의 행군은 악전고투 속에 이틀간이나 계속했다. 그런 끝에 드문드문 관목들이 자라는 마른땅을 밟게 되었다. 녹초가 된 군관들은 그제야 농담들을 나누는 말들이 흘러나왔다.

"이제부턴 북방의 계집을 품을 생각에 몸이 근질거리는 걸."

"내가 순무에 자원한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네."

"나는 그전에 고드름이 될까 봐서 걱정인 걸."

"계집을 품자면 소금을 지녀야 한다지요?"

연장자들은 처음 나선 젊은 축들이 지껄이는 말을 듣고 실실 웃었다.

"이번 순무에선 소금 주머니를 준비하지 못한 자들도 걱정할 게 없다네. 앞으로 전원에게 소금 주머니를 하나씩 지급하게 되었네."

"계집들을 여럿 품자면 소금이 많아야 하는데 소금을 다 쓰긴 힘들 같은 형님들이 동생들에게 좀 나눠 줄 순 없겠습니까?"

"이런 때는 형님이냐?"

군관들은 그런 말을 나누며 킬킬 대었다.

해질 무렵 멀리서 우뚝 솟은 요동성(遼東城)이 나타났다. 그런데 병단은 성을 빤히 보는 데서 야영에 들어갔다. 성 안에서 편안한 잠자리를 기대했던 군관들은 서북풍이 부는 벌판에 천막을 세우면서 불평들을 터뜨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하여간 합하의 고약한 심보는 알아줘야 만해!"

"멀쩡한 성을 코앞에 두고 한 데서 재우려는 심보라니."

"글쎄 말일세. 고생시키는 걸 낙으로 삼으려는 분이야!"

"이게 다 강 훈련의 일환임을 알아두라는 뜻이 아니겠는가?"

군관들은 우선 허기진 뱃속을 채울 저녁부터 지어먹고 나자 졸음들이 쏟아져 들어 잠자리에 들었다. 양신은 을지문덕을 향해 입을 열었다.

"합하, 성을 코앞에 두고 야영을 시킨다고 군관들의 불만이 큽니다."

"북방으로 올라가면서 벌판 잠을 계속 자야 한다. 미리 강추위를 이겨낼 체험을 해 두지 않으면 얼어 죽을 수도 있다."

을지문덕의 대답을 듣고 양신은 이상한 듯 말했다.

"합하, 아까부터 시동이 보이질 않는데 찾아보겠습니다."

"찾지 말게. 서부 장막에 있다."

"시동은 무슨 일로 갔습니까?"

"그보다 자네에 해둘 말이 있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자네는 앞으로 서부로 소속이 바뀌게 될 것일세."

"소관이 왜 서부로 소속이 바뀌게 됩니까?"

"지금은 아니고 순무가 끝나면 요동성에서 근무를 하는 게 좋겠다."

양신도 을지문덕이 그런 조치를 취하는 이유를 알만했다. 장안성으로 돌아가면 계속 숨어 지낼 수는 없는 일이었다. 만약에 도해선이 알게 도는 날엔 위험해질 수도 있다는 생각이었다.

"약광은 요동성에서 근무하면 한족 말이나 돌궐 말을 배워두기 바란다. 외국어를 여럿 배워두면 써먹을 일이 많을 테니 힘써 배우게나."

"소관이 외국 말을 배워서 뭣에 쓴다는 말씀입니까?"

"혹여 전쟁이 나지 않게 되면 중원 땅을 한번 유람해 보게나."

양신은 서부 소속이 되면 어떻게 처신을 해야 좋을지 몰라 물었다.

"합하, 소관이 서부에 소속되면 시동과 의형제는 어떻게 될까요?"

"어떻게 되다니? 그대로지."

"서부에서 그걸 용납하겠습니까?"

"걱정 말게. 시동과 의형제를 맺게 된 건 서부 우태가 원한 일이다."

"서부 우태님이 그걸 왜 원하신단 말씀입니까?"

"서부 우태는 시동이 자네에게 고분고분한 태도를 보이는 걸 주목했기 때문이다. 또 자네가 시동을 잘 다룰 수가 있다는 판단일 걸세."

"합하, 시동은 절 좋아해서 그런 태도를 보이는 게 아닙니다. 합하의 눈치를 보면서 마지못해 그런 시늉을 해 보이고 있을 뿐입니다."

"아무튼 간에 이왕 시작한 형 노릇을 끝까지 잘해야만 하네."

"합하, 비록 제 신분이 미치지 못하나 끝까지 해보겠습니다."

"약광, 그냥 해 보는 게 아닐세. 고구려의 장유유서 풍습을 내세워 밀고 나가게. 행여 그게 무너지는 경우 다시는 회복이 불가능함을 알게."

"초지일관해보겠습니다. 하나 합하 밑에 함께 있을 때나 가능했으나 서부에서 귀족과 평민 간의 교유를 인정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물론, 서부에선 표가 나게 하면 안 되지."

"합하, 알겠습니다."

"자네가 시동과 의형제를 맺게 된 것은 인생사의 큰 고지를 점한 발판이 될 걸세. 다시 다갈촌으로 돌아갈 수가 없는 자네는 앞으론 군문에 몸을 담는 게 좋겠다. 또 군의 간성이 되자면 귀족의 후원이 필요하네."

을지문덕은 연태조가 서부를 위해 많은 인재를 모으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때문에 연개소문과 관계가 좋아지는 건 매우 중요한 일이고 거기서 밀고 당기는 처세술을 익힐 것을 바랐다.

양신도 연개소문이 자신을 필요로 하게 만들겠다는 생각이었다. 그렇다고 아부는 하고 싶지가 않았다. 그러지 않고 상대를 잘 다루는 기술을 습득하는데 힘을 쓸 마음을 먹었다.

"합하, 시동은 나이는 어려도 포용력이 상상한 걸로 봅니다. 때문에 소관에 대한 필요성을 느끼면 원만한 관계는 유지가 될 것 같습니다."

을지문덕은 그 말에 만족한 표정을 지었다. 양신은 다만 을지문덕이 자신을 너무 과대평가를 한다는 부담감을 느꼈다. 그래도 그 뜻에 잘 부응해 나갈 수가 있을지가 걱정이었다.

한편 서부 장막에선 연생수와 연개소문이 마주 앉아 있었다.

"삼촌, 저는 약광의 눈꼴신 태도를 언제까지 봐줘야 합니까?"

연생수는 그런 말을 하는 연개소문을 새삼 기특하게 바라보며 물었다.

"약광이 어떻게 하기에 그리도 불만이 많은가?"

"형이라고 불러 주니까 그 자가 정말 형 노릇을 하려고 듭니다."

"의형제를 맺었다면 당연한 일이 아닌가?"

"삼촌의 종용 때문이지 제가 맺고 싶어 그런 걸 맺겠습니까?"

"너는 합하께도 다짐을 했다며? 한번 약속은 영원한 약속이라고. 그걸 깬다면 사나이답지 못하니 좋은 인연으로 유지해 나가기 바란다."

"만약에 아버님이 이 일을 아시면 꾸중을 내리시지 않을까요?"

"꾸중은커녕 잘했다고 칭찬을 하실 것이다."

"삼촌, 자꾸 그 자를 부추기는 이유가 대체 뭡니까?"

연생수는 엄숙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앞으로 너에겐 많은 위기와 시련이 닥치게 될 수도 있다. 큰 어려움을 극복해 나가기 위해 훌륭한 인재들의 도움이 필요하다. 인재를 얻는 데는 귀천을 가려선 안 되고, 약광은 장차 너에게 좋은 조력자가 될 걸로 나는 확신한다. 두 사람이 협력하는 사이가 될 것을 크게 기대한다."

"삼촌, 그 자는 본래 대장장이로 본명이 양신임을 아십니까?"

연개소문의 말에 연생수는 두 눈을 부릅떴다.

"남에게 그런 말을 절대로 꺼내면 안 된다. 백제인이 아니고 다갈촌 야좌임을 나도 안다. 약광은 그의 본명이고 나중에 철장이 새로 지어준 이름이 양신이다. 양광의 신분은 우리보다 못할 게 없음을 알아둬라."

이튿날 다시 발진한 순무병단은 정오께 요동성에 당도했다. 갈색 대지 위에 서 있는 성벽은 위용이 있었다. 특히 촘촘히 설치된 노포(弩砲)들은 삼엄한 긴장감을 느끼게 만들었다.

군관들은 성 앞에서 새 군복으로 갈아입고 보무도 당당하게 입성했다. 성병들도 기치창검을 세우고 도열해 맞았다. 마침내 해산 명령이 떨어지고 군관들을 흩어져 자유 시간을 누리게 되었다.

요동성은 내성(內城)과 외성(外城)으로 나뉜 독특한 구조였다. 내성은 성청을 비롯해 병사들의 막사와 창고들이 있고, 외성은 저잣거리와 상인들의 가옥이 있었다. 외국 상인들과 거래하는 상설 호시(互市)가 열리는 상포(商鋪)들이 즐비한 저잣거리는 번화하기로 소문이 났다.

을지문덕은 연개소문과 함께 성청으로 들어갔다. 양신은 다른 군관들을 따라 성 안을 구경하러 나섰다. 거리엔 잡다한 이민족 상인들이 돌아다니는 게 보였다. 그중엔 한족 복장이 가장 많은 걸로 봐서 그쪽과 거래가 많은 것을 알게 했다.

수국 황제는 고구려 침공을 공언했건만 한족 상인들은 개의치 않는 듯 요동성을 드나들면서 거래를 했다. 때문에 처음 와 보는 양신은 전쟁을 앞둔 나라 같지가 않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성병들 중에도 피부가 희거나 까무잡잡한 타민족 용병들이 다수 보였다. 양신은 그런 용병들을 끌고 고구려가 수국과 전쟁을 제대로 수행해 낼 수가 있을지도 의문이었다.

해가 뉘엿뉘엿 지는 가운데 자유 시간을 보냈던 군관들은 중앙의 광장으로 모여들었다. 그곳엔 큰 차일이 여러 채나 쳐져 있고 수십 개의 음식상들을 줄을 맞춰 벌려놓았다.

서부 상가인 연태조가 순무 병단에 환영연(歡迎宴)을 베푼 것이었다. 그는 을지문덕과 나란히 상석에 좌정했고 밑으로 각 부의 우태들을 비롯해 예하 성들의 성주들이 늘어앉았다.

양고기와 술을 대접했다. 강행군과 야영으로 지친 군관들은 푸짐하게 차린 음식상 앞에서 왕성한 식욕을 보였다. 원기를 되찾은 듯 술잔들을 기울이며 흥겨운 분위기가 되었다.

연태조는 조정의 원로(元老)로 영향력도 매우 컸다. 그는 수국의 침공을 가장 먼저 간파하고 국왕에게 전쟁 준비를 건의했다. 국상직을 내놓고 국왕에게 요동성에서 당분간 머물며 전쟁준비를 하겠다는 청을 넣어 허락을 받고 나와 있는 몸이었다.

국왕은 전쟁의 절박성 때문에 허락을 했으나 건무는 경계의 대상인 연태조가 소노부 주성(主城)에서 머무는 것을 달갑지 않게 여겼다. 때문에 국왕에게 장안성으로 다시 불러들일 것을 건의해 을지문덕은 이번에 연태조에게 귀환 명령을 전하게 되었다.

연태조는 전쟁 준비에 관한 얘길 끊임없이 계속했다. 때문에 을지문덕은 말을 꺼낼 기회를 엿보다 겨우 연태조에게 귀환 명령을 전했다. 표정이 굳어든 연태조는 을지문덕을 데리고 자리를 떴다.

연회장의 우태와 군관들은 두 사람이 자리를 뜨자 기를 펴듯 자세들이 흐트러졌다. 술자리엔 유녀들까지 끼어들면서 자못 농탕한 분위기로 바뀌는 속에 양신 곁으로 머리칼이 노란 계집이 다가들었다.

"이렇게 잘 생긴 남자가 있는 줄은 몰랐네요?!"

계집은 비음이 섞인 음성으로 너스레를 떨며 스스럼없이 양신 곁에 앉았다. 그리고 몸을 기대며 양신의 어깨 위에 얹었다. 양신은 하관이 빠르고 몸에선 노릿한 체취를 풍기는 여인을 바라보기만 했다.

"댁이 바로 국상의 호위 선인이신가요?"

양신은 계집의 질문에 대꾸를 하지 않았다. 그런데 계집은 다짜고짜 얼굴에 입술을 가져다 대어서 너무도 당황해하며 몸을 뒤로 빼었다. 연개소문이 멀리서 그 모양을 지켜보며 웃었다.

"호위 선인은 내가 싫으신가요?"

양신은 나이를 짐작할 수가 없는 계집의 묘한 짓거리에 당황하다 멀리서 그런 자신을 보며 키득키득 웃고 있는 연개소문을 발견했다.

"이제부턴 제가 호위 선인을 모시게 되었어요."

계집의 말에 양신은 그제야 반문을 했다.

"나를 모시다니 그게 무슨 말인가?"

양신의 질문에 계집은 손을 들어 연개소문이 있는 쪽을 가리켰다.

"시동 선인께서 모셔오라고 했어요. 그만 일어나요."

"시동선인이?"

"시동 선인께서 청사 안에 따로 호젓한 술자리를 마련했어요. 제가 그리로 모시고 가서 함께 놀기로 되었으니 일어서세요."

양신은 연개소문 쪽으로 눈을 돌렸다. 연개소문 곁에도 머리칼이 노란 계집이 또 하나 있었다. 연개소문은 양신에게 오라는 손짓을 했고, 계집은 양신의 팔을 잡고 끌고 일으켰다.

계집은 양신과 팔짱을 낀 채 엉덩이를 내저으며 걸었다. 추녀 끝에 내걸린 등불 밑에서 유녀들과 어울려 농탕한 짓거리를 하고 있던 군관들은 양신을 향해 놀려대며 웃었다.

"호위무사는 검술만 능한 줄 알았더니 계집 낚는 솜씨도 대단해."

"서역 계집이 호위무사에게 반한 것 같군?"

"계집들은 호위무사처럼 잘난 사내 앞에선 사족을 못 쓰게 되지."

양신은 그런 말을 들으면서 일부러 어깨를 폈다.

계집은 걸으면서 양신에게 자신을 소개했다.

"제 이름은 만돌 예요."

만돌은 여인치곤 키가 매우 큰 편이었다. 양신도 자신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걷는 여인에게 흥미를 느꼈지만 그보단 연개소문을 의식해서 일부러 의젓한 태도를 보이듯 걸었다.

연개소문은 양신이 다가들자 한 마디 했다.

"아주 썩 잘 어울리는 한 쌍이구려."

"그런가?"

양신이 대수롭지 않은 듯 대답하자 연개소문은 앞장을 섰다. 두 사람은 각기 여인들과 팔을 끼고 성청 안으로 들어갔다. 긴 회랑을 돌아 이른 방안엔 푸짐하게 차려진 음식상이 놓여 있었다.

"호위선인, 앉으시오."

연개소문이 상석을 권하자 양신은 의아한 표정이 되었다.

"시동, 날보고 왜 선인으로 부르는가?"

"형은 이제 선인이 되었소."

"내가 선인이 되었다니?"

연개소문은 반문하는 양신에게 술부터 따랐다.

"축하하오. 형은 오늘부터 서부의 군관으로 배속을 받았소."

"내가? 서부 군관으로 배속받았다고?"

"아버님은 합하의 요청을 받아들이셨소. 형과 나는 다 같이 9 등관 선인에 보임이 될 것이요."

"시동, 그 말이 사실인가?"

"내일, 서부 우태님으로부터 보임 장을 받게 되오."

연개소문은 긴가민가해하는 양신에게 갑자기 제안을 했다.

"형, 우린 같은 계급이니 서로 관직 호칭을 쓰면 어떻겠소?"

"관직 호칭을 쓰자고?"

"나는 시동 선인, 형은 호위 선인으로 부르면 좋겠소."

양신은 연개소문이 갑자기 관직 호칭을 쓰자는 이유를 생각해 보았다. 장차 서부의 상가 직을 승계할 몸이라 이제부턴 위계질서를 잡으려는 의도가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었다.

"시동 선인, 이렇게 하면 어떨까?"

"어떻게 말이요?"

"공석에선 관직 호칭을 쓰되 사석에선 형 동생으로 부르기로 하세."

양신의 표정이 하도 엄숙해서 연개소문은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그럽시다. 여긴 사석이니 형으로 부르겠소."

연개소문은 그런 대꾸를 했지만 속은 찜찜했다. 그런 대답을 듣고 상대방이 밀리지 않으려는 태도로 느껴져 속으로 마음을 더욱 다졌다.

"서부 선인이 된 형의 소감을 한번 듣고 싶소?"

"대단히 기쁜데 나는 이제부터 요동성에서 근무를 하게 되는가?"

"순무가 끝나면 이리로 오게 되는 걸로 알고 있소."

"시동 선인, 앞으로 잘 부탁하겠네."

양신의 대답에 연개소문은 뜻밖의 말을 꺼냈다.

"우리 삼촌께선 형에 대한 기대가 매우 크심을 알아두시오."

"서부 우태께서 무슨 말씀을 하셨기에 그런 말을 하는가?"

"형에 대한 칭찬이 대단하셨소. 나로선 샘이 날 지경이요."

"우태님이 무슨 칭찬을 하셨기에 그러는가?"

"우태님은 첫째로 형의 검술 실력을 높이 평가하오. 다음은 신라와 백제를 견문한 점도 높게 사오. 때문에 내가 형에게서 많은 지도와 편달을 받을 것을 기대하오. 그렇지만 형도 알아 둬야 할 점이 있소."

"내가 알아 둘 점이란 무엇인가?"

"이번에 형이 선인으로 보임되는데 내가 적극 밀었다는 점이요."

"시동 선인, 고맙네."

"아버님도 내게 이런 말씀을 하셨소."

"대인께서 무슨 말씀을 하셨는가?"

"전에는 입 밖에 내지도 않으신 말씀인데 나보고 타국을 두루 견문하는 기회를 가져보라고 하셨소. 그런데 그 이유가 무엇인지 아오?"

"그 이유가 무엇이란 말인가?"

"형 때문이요."

"나 때문에?"

"나보고 형에게 검술을 배워 스스로 한 몸을 건사할 수 있게 만들라고 하셨소. 그런 뒤 형과 함께 중원 땅을 유람해 볼 것을 권하셨소."

"합하께서도 내게 그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었네."

"그렇다면 두 분께서 그런 얘기를 이미 나누신 게 분명하오. 어찌 되었든 간에 아버님은 내가 형과 함께 다니면 마음이 놓여서 그러실 것인데 형은 어떻게 생각하오?"

"나로선 반길 일일세."

"형, 그럼 우린 그 일부터 뜻을 같이하는 사이가 됩시다."

"나는 고맙게 여기니 모쪼록 자네 마음이 변치 않기만을 바라겠네."

"내가 형을 진심으로 대하는 것을 그렇게도 못 믿겠소?"

양신은 그 말을 듣고 빙그레 웃었다.

"나는 매일처럼 시동 선인을 다시 보게 되는데 오늘은 더 해지네."

"형, 왜 날 다시 보게 된다는 말을 하오?"

"솔직히 말하겠네. 나는 자네를 멋대로 자란 귀족 자제로만 봤네. 그러나 나이에 비해 속이 깊음을 깨닫게 되어 자네에게 더욱 끌리게 되네. 그러나 장유유서의 미덕을 지니는 사이가 되기도 바라는 마음일세."

연개소문은 그 말을 듣고 무슨 생각에 잠겼다가 입을 열었다.

"합하께선 나에 관한 얘길 많이 하셨을 것이라 형은 사전 교육을 충분히 받았겠고, 날 꼼작 못하게 만들 방법도 많이 연구한 듯싶소."

"나는 시동 선인에 대해 이런 생각도 해보았네."

"어떤 생각이요?"

"지금은 날 형으로 대하나 종당엔 날 밑에 두려고 할 것이다. 그럴 때는 내가 어떻게 대처를 해야 좋을지를 생각해 보지 않을 수가 없네."

"만약에 내가 그렇게 할 때는 어찌 하겠소?"

"시동 선인에게 눌리지 않으려고 하는 것만이 능사는 아닐 것이므로 받아들이는 쪽으로도 힘을 써야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하게 되네."

"대체 합하로부터 무슨 말씀을 들었기에 형이 그런 말을 하오?"

"합하께선 자네가 요동 벌의 호랑이가 될 인물이라고 하셨네."

연개소문은 그 말에 기분이 매우 좋은 듯 껄껄 웃었다.

"합하께선 전에 날 두고 망나니 같다는 말씀을 하신 적도 있었소. 때문에 그런 말을 듣지 않으려고 나름대로 많은 노력을 하게 되었소. 나는 앞으로 형에 대한 예우를 깍듯이 지켜나갈 것이니 걱정일랑 놓으시오."

양신은 그 말에 진실성을 느껴 고개만 무겁게 끄덕였다.

두 여인은 술시중을 들면서 두 사내가 나누는 대화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왜냐하면 연개소문은 남이 자신과 대등한 위치에 서는 걸 용납하지 않는 성격임을 잘 알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양신에게 고분고분한 태도를 보이는 게 여간 이상하고 신기하기까지 했다.

연개소문은 그런 말을 하면서 머릿속은 삼촌의 충고를 계속 떠올리게 되었다. 소노부의 장래를 위해서 많은 인재를 포용해야 하고, 유능한 자를 수하(手下)에 두려면 많은 공을 들여야 한다는 말이었다.

양신도 신분상의 차이가 큰 연개소문과 맺은 의형제가 지속되기는 쉽지가 않음을 것으로 생각했다. 더욱이 상대는 강한 사나이 기질에 야심도 커서 다루기가 만만치 않을 것이란 생각이었다.

연개소문은 갑자기 두 여인에게 밖으로 나갈 것을 지시했다. 여인들이 밖으로 나가고 단 둘만이 남게 되자 무겁게 입을 떼었다.

"형, 지금 내전에서 아버님과 합하께서 마주 앉아 계실 것이요. 그런 두 분 사이에서 무슨 얘기가 오갈지에 대한 짐작이 가는 점은 있소?"

"그걸 내가 어찌 알겠는가?"

"합하께선 아버님을 설득하시기에 진땀을 빼고 계실 것이요."

"무슨 설득을 하시기에 그러신단 말인가?"

"폐하께선 아버님에게 장안성으로 돌아올 것을 명하셨소."

"서부대인께선 지금 전쟁준비로 이곳에 와 계신 게 아닌가?"

"상가들이 국도를 떠나는 것은 원래 금지된 일이요."

"서부대인께선 허락을 받고 나오신 게 아닌가?"

"이런 판에도 왕실은 아버님이 요동성에 머무시는 걸 경계하오. 폐하께선 왕제 저하의 건의를 받고 내리신 결정이 분명 하단 생각이요."

"왕제 저하께선 어떤 점을 경계하며 그러시는 것일까?"

"아버님이 서부 병력을 직접 장악하려는 것을 경계하는 것이요."

"수국을 막기 위해 예하 병력을 장악하는 건 당연한 일이 아닌가?"

"왕실은 그걸 꺼려해서 잠시라도 경계를 늦추지 않으려는 것이요."

"그러면 서부대인께선 장안성으로 돌아가셔야만 하는 일일까?"

"아버님 고집도 만만치 않으시니 합하께선 설득에 진땀을 빼실 거요."

"시동 선인은 서부대인께서 어떤 결정을 내리실 걸로 생각하는가?"

"왕명을 어길 수 없어 돌아가시겠지만 거기엔 다른 이유도 있소."

"다른 이유란 무엇인가?"

"합하에게 힘을 실어주기 위해서라도 하셔야 할 일이 있소."

"합하에게 힘을 실어주기 위해서라도 하셔야 할 일은 무엇인가?"

"합하와 왕제가 병력 지휘권을 반씩 나눈 것을 문제로 여기시오."

"나도 그 점에는 문제가 크다는 생각일세."

"형은 어떤 문제를 생각하시오?"

"합하의 지휘권은 요동에만 국한되고, 압록수 이남은 건무 왕제가 맡는 지휘권의 이원화는 비효과적이고 불리함만을 초래할 것일세."

"나도 동감이요. 계루부는 압록수 이남만 지키려고 대병력을 묶어 놓을 것인데 그럴 경우 여타 부 병력은 워낙에 적어 요동 땅 방어를 감당할 수가 없소. 그로 인해 적의 장안성 진격은 도리어 빨라지게 되므로 아버님은 폐하께 지휘권 이원화를 철회할 것을 강력히 건의하실 것이요."

"그런 문제로 왕제가 합하를 더욱 경원하려 들 것도 걱정일세."

"아버님은 서부의 병력을 합하께 인계하고 일절 간여하지 않기로 하셨소. 그에 따라 여타 부 상가들도 모두 그렇게 하기로 합의를 보았소."

어느 나라건 왕족과 귀족 간의 대결과 경계심은 너무 커서 끊임없는 내부 투쟁을 벌이게 되었다. 그러나 고구려처럼 심한데도 없었다. 양신은 그런 생각을 하는데 연개소문이 제안을 했다.

"형과 나는 앞으로 서로에게 스승과 제자가 되는 사이가 되고 싶소."

"무슨 일로 스승과 제자 사이가 되자는 말인가?"

"형은 내게 검술을 나는 형에게 한어를 가르치면 어떻겠소?"

"그거 괜찮은 생각이로군! 나는 대환영일세."

"합의가 되었소. 그만 술자리를 파하고 각자 즐겨보기로 합시다."

"술자리를 파하고 각자 뭘 즐기자는 말인가?"

"사내들로써 계집과 잠자리에 드는 것이요."

연개소문은 그런 말을 던지고 몸을 일으켜 방에서 나갔다. 그러자 이내 만돌이 다시 방 안으로 들어왔다.

"호위 선인께선 절 따라오세요."

만돌이 교태를 짓는 표정으로 말을 해서 양신은 물었다.

"나보고 어디로 가자는 것인가?"

"침실로 가야죠. 제가 오늘 밤에 호위 선인을 모시게 되었어요."

"날 모신다고?"

양신은 그제야 무슨 말인지 알만해졌으나 선뜻 따라나설 수도 거부할 수도 없었다. 연개소문이 시킨 일이므로 서로 간에 주고받는 게 있게 만드는 게 좋겠다는 판단에 몸을 일으켰다.

만돌은 양신의 팔을 다정히 잡고 끌었다.

"호위 선인께선 제가 싫지는 않으시겠지요?"

"싫을 게 뭐가 있겠는가?"

양신은 대답하며 애써 사나이다운 태도를 드러냈다.

"시동 선인께선 저보고 호위 선인을 잘 모시라는 말씀을 하셨어요. 만약에 제가 마음에 들지 않으신다면 다른 여인을 들일 수도 있어요."

양신은 고개만 저어 보였다.

"저를 택해주셔 고마워요."

만돌은 기쁜 듯 말하고 옆에 있는 침실로 양신을 안내했다. 그리고 옷을 벗고 알몸이 된 뒤 흔들리는 젖무덤을 들이밀었다. 양신은 이튿날 늦은 아침에 겨우 눈을 떴다.

원수부 장막에선 을지문덕이 양신을 맞아 빙긋 웃었다.

"호위 선인, 어젯밤은 잘 지냈는가? 시동 선인과 벌써 의기투합이 이뤄진 진 모양인데 그렇다고 해서 방심은 금물일세."

양신은 얼굴을 좀 붉히면서 대답했다.

"소관은 노력을 하겠습니다."

"시동은 방금 전에 여길 들렸다가 서부 장막으로 갔네. 자네도 가게."

"예, 합하."

"요동성을 알면 고구려의 절반을 알 수가 있다는 말도 있다. 오늘은 하루 종일 자유 시간을 줄 것이니 성안을 구석구석 구경을 해 보게."

"소관은 합하께 여쭤 볼 말씀이 있습니다."

"뭔가?"

"요동성은 타국 상인들과 거래를 하는 곳으로 특히 수국 상인들과 거래가 많다고 들었습니다. 그러나 수국 황제가 침공을 하겠다는 마당에 수국 상인들이 드나들게 내버려 둬도 되겠습니까?"

"그럴 수도 있지 않겠는가?"

"합하, 한족 상인들 중엔 첩자도 끼어 있을 것입니다. 적이 성의 방비 상태를 알게 되는 건 방어에 매우 불리한 일이 되지 않겠습니까?"

"요동성은 감출 게 없을 만큼 개방된 성이다. 그러므로 수국 첩자들이 뭘 더 알아내고 말고 할 것조차 없을 만큼 다 드러난 형편이다."

"하하,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이제 막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출입을 막는 것보다 그냥 놔두는 게 더 득이 될 수도 있다."

"놔둬서 무슨 득을 얻을 게 있다는 말씀입니까?"

"수국 상인들은 대부분 병사들이라 그럴세."

"합하, 수국은 병사들에게 장사도 시킨다는 말씀입니까?"

"수국 장수들은 각자 교역을 하고 있네. 그 이유는 진급을 위해서 일세. 대신과 장군들에게 뇌물을 바쳐야 하므로 돈이 드네. 때문에 부하들 중 수완이 있는 자를 뽑아 장사를 시키고 있네. 그런 병사들은 정탐보다 많은 돈을 벌기 위해 거래를 할 때는 무엇이든 이용을 하려고 드네."

"합하, 어찌 그런 일들이 일어날 수가 있다는 말씀입니까?"

"심지어 많은 이익을 남기 위해 자국의 기밀정보까지 넘겨주네."

양신은 놀랍기보다 기가 막혀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합하, 요동성엔 수국 상인들 외에 다른 나라 상인들도 옵니까?"

"요동성은 수국 상인들하고만 거래를 국한시키고 있네."

그때 군관 하나가 달려와서 말했다.

"호위무사, 서부 우태님께서 부르시오."

"합하, 소관은 그만 보임장을 받으러 가야 하겠습니다."

양신은 그곳에서 물러나 급히 서부 장막으로 향했다.

그날 밤 이슥한 시각에 을지문덕은 절노부 상가 하온장의 장막을 은밀히 찾았다. 그리고 양신을 장막 밖에 세워 타인의 접근을 일체 막았다.

"합하, 어떻게 이런 시각에 오셨습니까?"

"북부 대인과 조용히 나눌 얘기가 있어서 밤 시간을 택했소."

"그러시면 밖에 보초를 세우겠습니다."

"호위 선인이 밖에서 지키고 있으니 염려하지 마시오."

"아, 그렇게 하셨습니까? 말씀을 해 보십시오."

"이번에 북부대인이 순무병단에 참가하게 된 것은 예외적인 일이요. 거기엔 다른 목적도 있을 것인데 나는 그 점에 관해 알고 싶소."

하온장은 한참 있다가 대답을 했다.

"합하께서 저에 대한 어떤 의문을 갖고 계신다면 먼저 그에 대한 말씀을 해 주십시오. 그런 뒤에 답변을 드리고자 합니다."

"북부대인이 이번 순무에 참가하게 된 것은 본인의 뜻이 아니오. 왕제 저하의 권고에 따른 일로 짐작이 되는데 그렇지가 않소?"

을지문덕의 말에 하온장은 순순히 털어놓을 수밖에 없었다.

"합하의 직감은 대단하십니다. 저는 크게 놀라며 숨길 수가 없겠습니다. 말씀대로 저는 이번 순무에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나선 것입니다."

"내 추측이 맞았다면 이제부터 의논을 하고 싶은 게 있소."

"합하, 어떤 의논을 하시렵니까?"

"북부대인은 요동 땅 방어에 대한 어떤 구상이 있는지 듣고 싶소."

"저도 여러 가지 구상을 해보긴 했지만 그저 암담할 뿐입니다."

"북부대인에게서 그런 말씀을 듣게 되다니 나로선 실망이 크오. 그렇다면 관할지의 방어를 포기하겠다는 것이요? 그걸 수는 없지 않소?"

하온장은 좀 갈등하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합하, 당연한 말씀입니다."

"계루부의 병력은 압록수 이남만 방어를 하게 되었소. 그건 요동 땅을 포기하겠다는 뜻이나 다름이 없는데 그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하시오?"

"합하, 저 역시 그 문제로 여간 큰 우려를 하지 않습니다."

"북부대인, 우려만 해선 안 되고 대책을 세워야 하겠소."

"합하, 저도 그렇게 생각하나 뾰족한 수가 없어서."

하온장이 말끝을 흐리자 을지문덕은 정색을 했다.

"부부대인의 순무 참가는 날 감시하기 위함으로 생각되오."

"합하?!"

하온장이 너무도 놀라 아무 말도 않자 을지문덕은 다른 말을 꺼냈다.

"북부 대인의 선친은 나와 친구 간이요."

"합하께선 제 스승이 되십니다. 저는 가장 존경하는 분이 국상에 오르신 걸 누구보다 기쁘게 여깁니다. 그러나 합하께서 국상의 본분을 벗어나는 태도를 보이시는 것 같아 저는 여간 걱정이 되지 않습니다."

"무슨 걱정인지 모르나 나는 국상의 본분을 충실히 이행할 뿐이요."

"합하께서 왕실에 반할 태도를 보이신다면 그건 본분이 아니십니다."

"내가 하려는 일이 때론 왕실에 반하는 일이 될 수도 있겠소. 그러나 왕실보다 고구려의 존속이 더 중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오."

을지문덕은 결연한 의지를 드러내는 대답을 했다.

"건무 전하는 합하께서 국상이 아닌 대로로 행세를 한다고 봅니다."

고구려의 대대로(大對盧) 직은 이미 없어진 지가 오래되었다. 대대로는 국왕이 임명하는 자리가 아니고 각부의 상가들 중 힘 있는 자가 스스로 차지했다. 그러나 장수왕 때 강화된 왕권으로 없애고 새로 국상 직을 만들어 임명하면서 왕실과 여타 부 간의 세력 균형은 깨어지게 되었다.

"나는 요동 땅을 고구려 영토의 중심으로 생각하오. 그런 요동을 잃게 되면 고구려는 존속 자체가 힘들어지는데 왕실은 압록수 이남만을 지키려고 든다면 멸망을 자초할 일이요. 북부대인은 어떻게 생각하오?"

을지문덕의 질문에 하온장은 굳은 음성이 되었다.

"저도 동감입니다."

"북부대인이 동감이라면 여타 부 간의 협력을 복원시키는 일에 앞장을 서주시오. 지금 여타 부는 뿔뿔이 흩어질 위기에 처했는데 그 이유는 왕실의 독주 때문이요. 나는 그걸 막기 위해서라면 대대로 역할이라도 해서 중립을 지키면서 안정을 도모해 나갈 각오를 세우고 있소."

"저도 합하의 뜻을 충분히 이해를 하지만 그러시면 안 됩니다."

"고구려는 미흡한 날 국상 직에 앉힐 만큼 사정이 심각함을 북부대인도 아시오. 그렇지가 않다면 내가 왜 무모한 생각까지 하겠소?"

"합하, 그래도 왕제 저하와 불화를 빚는 건 피해 주십시오."

"나와 왕제 저하 간의 불화를 막는 일은 여타 부 상가들의 몫이요. 왕제 저하의 독주를 막는 일에 북부대인이 앞장을 서줄 순 없겠소?"

을지문덕의 요구에 하온장은 아무런 대꾸도 하질 않았다.

"수국은 침공을 앞두고 여타 부 상가들을 회유하는 걸로 알고 있소."

을지문덕의 입에서 나온 말에 하온장은 내심 크게 놀랐다. 왜냐하면 그건 사실이었다. 양광은 여타 부 상가들이 연맹체를 이탈해서 복속해 오면 각자의 관할지를 영토로 삼게 하고 황제의 제후(諸侯)로 봉하겠다며 회유 정책을 쓰고 있었다.

하온장은 안색이 변한 채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합하께선 그걸 어떻게 아셨습니까?"

"나는 대인의 선친께서도 인정했던 정보통임을 모르시오?"

"그런 제안은 북부만 아니고 동부와 남부도 받은 걸로 알고 있습니다. 혹시 동부나 남부에서 흘린 게 아닙니까?"

"그럴 리는 없지 않겠소? 나는 수국 쪽에서 입수한 정보요."

"합하께선 수국에서 어떻게 그런 기밀을 입수하셨단 말씀입니까?"

하온장의 반문에 을지문덕은 한 마디를 더 했다.

"나는 북부 대인과 왕제 전하 사이에 오가는 일도 아는 게 있소."

"합하, 저에 대한 어떤 일을 알고 계신단 말씀입니까?"

"건무 왕제는 북부대인께 혼사를 제의한 걸로 알고 있소. 만약에 결혼 동맹이 성사되면 북부대인은 국상 직에 오르게 되는 것도 알고 있소."

하온장은 그 말을 듣고 너무 놀라 말을 잇지 못했다.

건무는 동화부인이 아들을 낳지 못한 이유로 하온장의 누이동생을 제2부인으로 맞으려 했다. 그 일이 성사된다면 왕실과 북부 간은 동맹관계를 맺게 되는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나는 전쟁 대비로 우선 연맹체를 결속시키는 일에 한 몸을 던지려고 하오. 그러므로 왕실보다 연맹체에 우선을 둘 수밖에 없겠소. 왕실이 그걸 막으려 든다면 국가는 자멸을 면치 못할 것이요. 수국의 침공을 막는 게 시급한 때이므로 누구든 간에 내부 분열을 조장하는 건 반역이요."

을지문덕의 말에 하온장은 무거운 음성으로 물었다.

"서부대인은 장안성으로 돌아가면 폐하를 알현할 것입니다. 합하께선 서부대인에게 무슨 조언을 해주신 것은 없으십니까?"

"장안성으로 돌아가면 먼저 동부, 남부대인과 관계를 강화하고 합심해서 폐하를 설득하고 왕제 전하의 독주를 막을 것을 조언했소."

"그건 여타 부 스스로 할 일이며 합하께서 나설 일이 아닙니다."

"북부대인은 왜 그런 일을 하지 않고 왕제 저하 편이 되었소?"

하온장은 그 말에 난처함과 심한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자신이 왕실 편에 선 목적은 서부를 대신해 여타 부의 맹주가 되려는 욕망 때문이나 나라가 없어지면 국왕도 국상도 없어지게 되었다.

"합하, 저도 장안성으로 돌아가 서부대인과 협조를 하겠습니다."

"북부대인, 나는 이런 제안을 하고 싶소."

"합하께선 어떤 제안을 하시렵니까?"

"북부대인은 순무를 계속해 주었으면 하오. 왕제 저하와 가리를 두는 기회를 가질 필요가 있겠고 또 자의적으로 해주었으면 하는 일도 있소."

"합하, 순무를 계속하며 제가 자의적으로 해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

"이번 순무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동돌궐과 관계 회복에 있소. 나는 그 일을 위해 시피 칸의 아우인 힐리 공자를 만나게 되었소. 그 자리에 북부대인도 함께 참석을 해주면 좋은 결과를 거두는데 도움이 되겠소."

"그러십니까? 저도 힐리 공자를 만나보고 싶던 참입니다."

을지문덕은 북부대인과 그런 합의를 보자 몸을 일으켜 밖으로 나왔다. 장막 밖에서 타인의 접근을 막고 있던 양신이 다가들었다.

"합하, 얘기가 잘되셔서 저도 기쁩니다."

"밖에서 엿들었는가?"

"고구려의 운명은 합하의 손에 달렸으니 어찌 관심이 없겠습니까?"

"약광, 전쟁은 도박이나 다름이 없다. 그러므로 국구의 일념으로 몸을 던져도 결과는 어떻게 될지 모른다. 나는 왕실과 여타 부 사이에서 위험한 줄타기라도 불사하지 않으면 안 될 만큼 마음이 무겁다."

"소관은 양광이 여타 부 상가들을 회유하는 사실을 알게 되어 매우 놀랐습니다. 만약에 상가들이 응하게 되면 그걸로 고구려는 끝장입니다."

"양광이 그런 회유책을 쓰는 것도 왕실이 빌미를 줬기 때문이다."

"합하, 수국이 서부만 빼고 여타 3부만 회유하는 이유는 뭘까요?"

"먹혀들지가 않을 곳에 헛수고를 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양신은 그 말로 왕실과 서부 간 대립이 어느 정도인지 알만했다.

연태조는 그런데다 안시성(安市城) 부근에서 발견된 큰 철광석(鐵鑛石) 광산을 독자적으로 개발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왕실이 허가하지 않을 것이라 여타 부와 공동개발을 모색하며 추진을 하려고 했다.

하온장은 건무와 접근을 피하고 을지문덕의 말을 따르기로 결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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