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망망(茫茫)
겨울 하늘의 짧은 해는 빛이 흐릿했다.
순무 병단은 동짓달 그믐께 요동성을 출발했다.
북방으로 오르는 행정은 보통 고생이 아니었다. 초행자는 모르지만 경험 있는 자는 앞으로 겪을 고난이 얼마나 심할 것임을 잘 알고 있었다. 군관들은 웅숭그린 자세로 대화도 없어졌다.
순무 병단은 요하 변을 끼고 계속 북상했다. 강의 수많은 지류들을 건너야 했는데 어느 쪽이 상류고 어느 쪽이 하류인지 가늠이 안 되었다. 건기로 접어들어 물이 줄어 말을 타고 건너갔다.
망망 무제의 대지는 어디를 봐도 하늘과 맞닿았다. 마른 풀만 가득 찬 땅은 줄기차게 바람이 불었다. 을씨년스럽기 그지없는 풍경 속에 하루 종일 가도 사람들이 사는 마을은 없었다.
해가 지면 기온이 급강하로 떨어졌다. 그러나 순무 병단은 황량한 들판에서 야영을 했다. 군관들은 하늘을 가득 채운 별빛을 위안으로 삼고 어둠 속에서 두려움과 함께 잠을 청했다.
군관들은 날이 밝으면 구원이라도 받는 양 몸을 일으켰다. 아침을 지어먹고 바로 행군을 개시했다. 갑자기 하늘은 구름이 잔뜩 끼고 까슬까슬한 눈이 내려서 군관들의 얼굴을 찔러댔다.
양신과 연개소문은 눈발이 점점 거세져 갈수록 도리어 대화가 많아졌다. 마음이 푸근해져 웃음을 자주 터뜨렸다. 을지문덕은 그런 두 사람을 돌아다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연개소문은 털모자에 덮이는 눈을 연방 털어내는 양신을 놀렸다.
"형, 눈을 잔뜩 뒤집어쓴 게 흡사 백곰 같소."
"내가 곰같이 보인단 말인가?"
"영락없소."
"나는 며칠 째 어디를 둘러봐도 인가를 찾을 수가 없으니 요동 벌은 도대체 사람들이 전혀 살지 않는 곳이란 생각이 드는군."
"형, 민가를 찾을 수가 없는 이유가 어디에 있는지 아오?"
"왜 그런가?"
"사람들은 낮은 산자락을 의지해 집을 짓소. 그 이유는 숨어서 살듯 해야만 외지 사람들 눈에 잘 띄지 않게 되오. 때문에 지금도 어디서 우리 행렬을 지켜보기만 하고 있을 것이요."
"여기선 왜 집을 숨기듯 짓고 산단 말인가?"
"약탈자들의 눈을 피하기 위함이요."
"누가 약탈을 한단 말인가?"
"여긴 이민족 유목민들이 많기 지나다니는 곳이기 때문이요."
"유목민들은 식량을 약탈하려고 드는가?"
"유목민이 탐을 내는 건 철제품이요. 여름철엔 들에서 일하는 농민들을 덮치고 겨울철은 마을을 습격해서 철제 농기구를 뺏어가오."
양신은 그 말을 듣고 신라의 경우를 떠올렸다.
"그런가? 신라도 옛날엔 왜국인이 철제 농기구를 뺏으려고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와서 마을들을 자주 습격했다네. 그럴 땐 전쟁을 방불케 할 만큼 큰 싸움이 벌어졌고 신라에선 그들을 왜구라고 부른다네."
"철 때문에 골치를 썩이는 건 어디나 마찬가지 구려?"
"철제품은 사람들의 생활을 풍족하게 만들지만 전쟁을 자주 일으키게 만들고 죽음으로 몰아넣으니 이로움과 해로움을 함께 주는 것이지."
"그렇지만 고구려는 철이 없으면 존재할 수가 없지 않소? 이런 순무도 철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요. 반면에 유목민들도 고구려에서 철을 얻지 않으면 어떻게 살겠소? 그러므로 우리에게 머리를 숙일 수밖에 없지."
"요동 땅은 매우 추워서 겨울엔 사람들이 살기가 퍽 어렵겠네."
"아니오. 사람들은 살만한 땅으로 여기오. 겨울철엔 눈이 많이 내리고 여름철은 홍수와 가뭄이 번가라 들지만 농사를 짓는데 도움이 되므로 축복으로 여긴다오. 다만 봄엔 모래바람이 심하게 불어서 죽을 맛이요."
"얼마나 모래 바람이 심하게 불기에 그러는가?"
"눈을 못 뜨고 숨을 제대로 쉴 수가 없을 지경이요. 사람들은 외출할 때마다 헝겊으로 얼굴을 감고 다니지 않으면 안 되오."
양신은 고구려의 환경이 그리 좋지 않음에도 일찍부터 철제품을 생산했고 그걸로 타국과 교역을 해서 불리한 조건을 극복했고 강국으로 발돋움을 할 수가 있었으므로 자부심을 느낄 일로 여겼다.
"나는 형에게 알려 줘야 할 게 있소."
"무엇인가?"
"순무 병단에선 형이 백제인으로 알려졌소. 그러나 계루부 우태님은 그렇게 생각을 하지 않는 것 같소. 그 때문인지 형에 대해 뭔가를 알아내려 듯한 태도를 보이고 내게도 여러 가지로 묻는 게 많아졌소."
"계루부 우태님이 뭘 물으시던가?"
"서부가 형을 군관에 보임한 걸 이상하게 여기고 있소."
"시동 선인은 뭐라고 대답을 했는가?"
"형은 출세를 하고자 고구려에 귀화했다는 대답을 했소. 부친께선 형이 검술을 지녔기 때문에 검술교관으로 삼고자 보임했다는 말씀을 하셨소. 그러므로 형은 계루부 우태님이 물으시면 그렇게 대답을 하오."
양신은 그 말을 듣고 여간 찜찜하지가 않았다.
"나는 마음에 걸리는 일이 또 있소."
"무슨 일이 마음에 걸리는가?"
"도해선은 형이 장안성에서 머물다 순무병단에 낀 걸 모를 수도 있소. 그런데 장안성으로 돌아가실 아버님을 호위할 계루부 선인이 문제요. 그는 형이 서한만에 침투한 수국 첩자들을 일망타진하는데 큰 활약을 한 걸 알고 있으므로 그 얘기가 도해선에게도 전해지게 될 것 같소."
"그건 그렇겠는 걸."
양신은 걱정들이 점점 많아져서 한숨만 흘려냈다.
요동성을 떠난 순무 병단은 이틀 후 개모성(蓋牟城)에 당도했다.
개모성은 고구려 서북단에 위치한 중요 군사요지로 유목민을 상대로 하는 호시를 여는 곳이었다. 특히 요서 땅의 3대 유목민으로 치는 선비(鮮卑), 거란(契丹), 유연(柔然)과 교역이 활발했다. 그런데 모두 수국에 복속을 했기 때문에 고구려 판도 내의 두막루(豆莫婁), 지두우(地豆于), 유연족도 흔들림이 일어날 영향을 끼칠 위험이 컸다. 특히 둘로 나뉜 유연족은 고구려에 가장 큰 문제가 될 수도 있었다.
본래 유연족의 근거지는 요하의 상류인 황수(黃水) 유역이었다. 강성할 땐 돌궐족을 예속시키기도 했으나 지금은 도리어 멸망을 당한 형편이었다. 그 뒤로 요동과 요서로 나뉘어 살고 있는데 요동 쪽은 고구려 지배를 받았고 요서 쪽은 동돌궐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
이번 순무는 판도 내 유목민들의 동태를 살피고 협조 관계를 다질 목적이 컸다. 그런데 요서 쪽 추장인 도트는 수국을 돕기로 했고, 요동 쪽 추장인 켄트는 국가를 재건할 야망을 품었다. 그러면서 양쪽은 다 같이 동돌궐에 적대적이므로 을지문덕은 다루기에 여간 큰 고민이었다.
왜냐하면 유연족의 향배는 다른 유목민들에도 큰 영향을 끼칠 풍향계(風向計) 역할을 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일을 놓고 을지문덕은 여러 면으로 연구를 하고 있었다.
개모성은 요동성보다 규모는 작지만 또 하나의 호시가 이뤄지는 곳이라 요동성만큼 중요했다. 한족과는 거래를 않고 유목민만 거래를 했고 우대 정책을 펴서 또 다른 교역의 중심지로 삼았다.
순무 병단은 마침내 개모성에 입성했다. 성의 거주민은 고구려인보다 이민족의 더 많아서 이국적인 풍물을 물씬 풍겨내고 있었다. 성주인 연노단(延奴亶)은 이미 도착해 있던 을불과 함께 을지문덕을 맞았다.
을불은 10여 척의 선박에 소금과 장창(長槍)을 싣고 와서 대기 중이었다. 그의 선단은 요하를 거슬러 오르는 동안 수국 첩자들의 눈을 피하려고 야간에만 은밀히 움직여서 당도했다.
소금은 유목민의 생필품 중 매우 중요한 것이었다. 고구려는 이번에 소금과 무기인 장창을 유목민에게 공급할 계획이었다. 을불은 소금과 무기를 배에서 내려 마차 20대에 옮겨 실었다. 순무 병단과 함께 움직여 일단 남소성(南蘇城)과 신성(新城)으로 옮겨 보관하게 되었다.
을지문덕은 개모성에서 첫 번째 중요한 일을 처리할 생각이었다. 성안엔 요서 쪽 유연족 추장인 도트의 딸이 술집을 열고 있었다. 그녀를 통해 도트와 접촉을 모색해 보기로 했다.
저녁때 연생수는 연개소문과 양신을 불렀다.
"두 사람은 나와 함께 술집에 간다."
"우태님, 그렇게 하겠습니다."
양신은 대답을 하는데 연개소문이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
"삼촌, 저는 약광 형과 따로 놀러 갈 데가 있습니다."
"약광 선인은 합하를 호위해야 하니 잔소리 말고 따라나서라."
을지문덕은 연생수를 앞세우고 저잣거리로 들어섰다. 좁고 꼬불거리는 골목길은 미로와 같아서 방향을 알 수가 없고 추녀가 낮은 집들은 퀴퀴한 냄새까지 풍겨내고 있었다.
일행은 한참을 걸은 끝에 제법 큼직한 술집에 이르렀다. 문 앞에서 개모성 성주인 연노단이 기다리고 있었다. 술집 안은 손님들로 그득 차서 어수선하고 시끄럽기 짝이 없었다.
술집 주인인 슈방은 호들갑스럽게 연생수를 맞았다.
"서부 우태께서 저희 집을 찾아 주시니 영광입니다!"
을지문덕과 연생수는 슈방의 안내를 받아 내실로 들어갔다. 방안에는 이미 상이 차려져 있었다. 슈방은 을지문덕이 누군지 모르나 연생수가 깍듯이 대우를 해서 이상하게 여겼다.
일행이 자리를 잡고 앉자. 술시중을 드는 2명의 이민족 여인이 들어왔다. 슈방은 양신과 연개소문을 가리키며 말했다.
"너희들은 이처럼 잘난 사내 분들을 만나본 적이 있는가?"
이민족 여인들은 양신과 연개소문을 번갈아 보며 대답했다.
"웬 걸요?"
"처 음예요."
여인들은 교태를 부리듯 양신과 연개소문 곁에 앉았다. 연개소문은 몸을 밀착시키며 유혹적인 눈길을 보내는 여인에게 헤죽헤죽 웃었지만 양신은 자세를 바로 할 뿐이었다.
슈방이 입을 열었다.
"우태님, 젊은이들은 이 방에 두고 자리를 옮기시지요."
을지문덕과 연생수는 그 말대로 슈방을 따라 곁방으로 옮겼다. 슈방은 을지문덕이 누군지 몰라서 눈길을 자꾸 주자 연생수가 말했다.
"부인, 이 분은 고구려 국상이시오."
"국상께서 이렇게 왕림해 주시다니 영광 예요."
슈방은 고개를 깊이 숙여 경의를 표했다. 그녀가 개모성에서 살고 있는 이유는 고구려와 교역 때문이었다. 요서 쪽 유연족도 고구려 철제품에 의존을 하는 터라 철정 구입 업무도 맡고 있었다.
을지문덕은 슈방을 향해 본격적인 접촉을 시도했다.
"부인은 부친의 명을 받고 이곳에서 머무는 걸로 알고 있소."
그 말에 슈방은 공손한 태도로 대답했다.
"합하, 저는 부친의 명령보다 고구려가 좋아서 살고 있습니다."
"부인도 수국 침공을 받게 된 고구려의 어려운 사정을 잘 알 것이요."
"저도 여러 사람들이 그런 말을 해서 걱정이 됩니다."
"부인, 요서나 요동의 유연은 다 같이 오랜 세월을 고구려와 4촌 지간이나 다름없게 가까운 사이로 지내왔소. 그러므로 유연이 위기에 처한 고구려를 모른 체할 리는 없다는 생각을 하고 있소."
"합하, 저도 전쟁이 나면 수국이 아니고 고구려가 이기길 바랍니다."
"부인은 무엇 때문에 그런 생각을 하는지 듣고 싶소."
"저는 아버님한테 들은 얘기가 있습니다. 수국이 고구려를 침공할 수는 있어도 정복할 수는 없다는 확신에 찬 말씀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을지문덕은 슈방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알만했다.
"도트 추장께선 왜 그런 생각을 하시는지 말씀해 주겠소?"
"아버님은 이번 전쟁을 수국과 고구려만의 싸움이 아니라고 보십니다. 양국은 유목민을 끌어들여 복잡한 전쟁이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을지문덕은 그제야 엷은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우린 유목민들 중 유연을 가장 큰 변수가 될 걸로 보고 있소. 그 이유는 양분된 유연이 각기 고구려와 수국 편에 서게 되었기 때문이요. 거기다 유연을 적대시하는 동돌궐은 수국 편에 서 병력을 내놓기로 했소. 때문에 요동 쪽 유연은 고구려 편을 들고 싶어도 태도를 취하기가 어렵게 되었소. 왜냐하면 고구려와 함께 망할 수도 있으므로 그렇소."
"아버님은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유연은 국가 부활이 무엇보다 중요함으로 실질적인 도움을 줄 고구려를 택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부인, 나는 그에 대한 믿음을 가져도 좋다는 말을 하고 싶소.
"저는 앞으로 고구려가 유연에 어떤 도움을 줄지 듣고 싶습니다."
"요동과 요서의 유목민들은 모두가 고구려의 철제품이 없으면 살아갈 수가 없소. 만약에 고구려가 망하면 철제품 공급받을 데가 없어지오."
슈방은 그 말에 고개만 끄덕였다.
"부인, 고구려가 멸망하면 개모성은 수국의 차지가 될 것이요. 그럴 경우 유연은 어떤 상황을 맞게 될지를 생각해 봐야 하오."
"저는 교역에서 큰 타격을 받게 될 것을 두렵게 여깁니다."
"교역보다 큰 타격은 유연족 전체가 북방으로 쫓겨나게 될 일이요."
슈방은 그 말에 어두운 표정이 되었다. 그러나 부친이 수국 편에 섰음에도 고구려는 불이익을 주겠다는 협박이 없었다. 그러나 수국은 고구려를 멸망시킨 뒤 유연족에 어떤 짓을 할지 모른다는 생각이었다.
"합하의 말씀을 아버님께 그대로 전하겠습니다."
"부인, 도트 추장이나 켄트 추장은 다 같이 나라를 회복시킬 일에 함께 노력을 기울여야 하오. 고구려는 그 일을 적극 도울 나라요. 그러므로 유연족은 최소한 중립이라도 지켜주길 기대하겠소."
을지문덕은 도트 추장이 고구려와 우호적이면서도 수국 편에 서야 하는 어쩔 수 없는 사정을 이해할 수가 있었다. 슈방도 부친이 그러면서도 중립적인 자세를 취할 것임을 잘 알고 있었다.
"합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려는 것인지 잘 알겠습니다. 그런데 아버님이 중립을 지키기 위한 좋은 방법이 있으시면 말씀해 주십시오."
"출병을 하더라도 고구려 군과 되도록이면 교전을 피하는 방법이오."
을지문덕의 대답과 더불어 연생수는 주머니를 하나 꺼내 내밀었다. 슈방은 그걸 받아 들고 속을 들여다보다 여간 놀라지 않았다. 그 속엔 굵은 금목걸이가 하나 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금 목걸이는 부인께 드리는 선물이요."
"저로선 너무 고맙지만 무슨 염치로 받겠습니까?"
슈방은 사양하는 말을 하면서도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그녀는 고구려가 철과 황금이 많이 나는 나라인 것을 알고는 있으나 너무도 과다한 선물을 받자 마음을 진정시킬 수가 없었다.
"부인, 도트 추장께 이런 말씀도 전해 주시오. 아국의 폐하께선 황금 1백 량을 들여 금관을 제작하라는 명령을 내리셨소. 그 금관은 도트 추장에게 하사할 것으로 곧 전달이 될 것이요."
고구려는 압록수 이남에서 금이 많이 났다. 금관(金冠)을 만들어 유목민 추장들에게 하사하며 우호관계를 다지는 외교(外交) 정책을 많이 썼다. 금관을 받은 추장들은 위상이 높아지는 걸로 여겨 매우 반겼다.
"합하, 고구려 대왕께서 베푸신 은의에 감복합니다. 부친께선 고구려의 멸망을 결코 원치 않으시므로 꼭 부응하실 것으로 믿어 주세요."
을지문덕은 슈방과 접촉을 끝내고 그 집을 나왔다.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 연개소문이 불만을 터트렸다.
"삼촌, 저는 자고 가는 줄로 알았는데 그게 아닙니까? 실망입니다."
"이민족 계집과 잠자리를 하다 횡액을 당할 수도 있다. 이 성에서 이틀간 편히 쉬었다 떠나는 것만도 다행으로 여겨라."
"삼촌, 이 성에선 왜 이틀씩이나 머물게 됩니까?"
"합하께선 소수 유목민 족장들을 계속 만나 보고를 받으셔야 한다."
"유목민 족장들에게 무슨 보고를 받으십니까?"
"소수 유목민이 제공할 마필들의 숫자를 파악하려고 그러신다."
고구려 백성들은 국초부터 농사와 목축을 병행했었다. 그러나 넓은 초지를 따라 이동을 하는 목축은 점점 위축되었다. 농민들은 겨울철에 다른 일을 하거나 쉴 수가 있지만 목부들은 추우나 더우나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사시사철 가축들에 매달려야 했다. 때문에 점점 목축 대신 농사를 택하게 되면서 군마(軍馬) 공급이 어려워졌다. 그 해결책으로 이민족 유목민에게 철제품을 공급하고 군마 사육을 위탁시키는 방법을 썼다. 전쟁 때만 군마를 끌어다 쓰고 끝나면 돌려보내는 정책이었다.
연생수의 설명을 듣고 연개소문이 물었다.
"유목민에게 사육시키는 군마 수는 대략 얼마나 됩니까?"
"동돌궐이 5만여 필, 지두우와 두막루는 각기 1만여 필, 소수 유목민 것을 다 합치면 1만여 필인데 그 대가로 소금과 철제 무기를 공급한다."
양신도 궁금한 점이 있었다.
"전쟁이 나면 유목민은 병력을 지원할 것으로 저는 압니다. 그런데 목숨을 거는 전쟁터에 병력을 지원하는 것은 쉽지가 않을 일 같습니다."
"철제품 공급을 받자면 어쩔 수 없이 응할 수밖에 없게 된다."
"아무리 철제품이 귀해도 그건 목숨과 바꾸는 일이 아닙니까?"
"그것도 이것도 살기 위함이다. 유목민은 농기구가 아닌 무기를 원한다. 가축을 키우고 지키는데 무엇보다 무기가 필요한데 아무데서나 구할 수가 없다. 때문에 쉽게 얻고자 전쟁터에 위험을 무릅쓰고 나선다."
"전쟁터에선 무기를 어떻게 쉽게 얻게 된다는 말씀입니까?"
"전쟁터에선 사상자가 나오기 마련이 아닌가? 유목민은 전투엔 관심이 없고 오직 피아를 가리지 않고 전사자들의 무기를 수거하려고 든다."
"유목민은 사상자의 무기를 수거한 뒤 그냥 지닐 수가 있겠습니까?"
"고구려는 유목민이 획득한 무기를 회수하려고 한다. 때문에 땅에 파묻어 감춰 두었다가 전쟁이 끝나면 파서 지니고 간다. 아니 절반 이상은 무기를 획득하는 대로 도망친다. 그러면 큰 부자가 될 수가 있다."
양신은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다 고개를 끄덕이게 되었다. 그러나 유목민 병력이 무기를 챙기는 데만 힘을 쓰고 전투엔 소극적이 될 수밖에 없다면 무슨 도움이 될까 싶기도 했다. 그러나 전쟁에선 병력의 숫자가 많으면 세를 과시하는데 큰 영향을 줄 수가 있음도 생각을 해야만 했다.
순무 병단은 개모성을 떠났다. 군관들은 소금과 장창을 실은 마차까지 몰고 요하의 수많은 지류를 건너갔다. 하루 종일 마차 바퀴가 빠지는 험로라서 고생들이 막심했다. 때문에 해가 많이 남아도 행군을 멈추고 야영을 하면서 녹초가 된 몸을 쉬지 않으면 안 되었다.
양신은 군관들이 묘한 대화를 나누는 걸 듣고 연개소문에게 물었다.
"군관들은 계집을 품을 생각에 마음이 들뜬다는 말을 하더군?"
연개소문은 빙긋이 웃었다.
"순무는 겨우내 혹한과 눈구덩이 속을 헤치며 다녀서 매우 고된 일이요. 그럼에도 군관들에게 큰 위안거리가 될 일이 없지도 않소."
"시동 선인, 무슨 위안거리가 있다는 말인가?"
"사내가 여인을 품는 것만큼 큰 위안도 없지 않겠소?"
"이런 황야에서 어떻게 여인을 품는단 말인가?"
"나도 얘기만 들었소만, 형도 이번에 한번 기대를 해 보시구려."
"시동 선인, 나보고 무슨 기대를 해보라는 소린가?"
"형도 큰 흥미를 느끼는 걸 보니 사내 본색이 드러나는 구려?"
"나도 사내일세. 그러니 그에 관한 얘길 들어보고 싶네."
"군관들은 소금을 주고 유목민 여인을 하룻밤 품을 수가 있소."
"유목민이 소금을 귀하게 여길 것은 이해가 되나 소금을 주고 여인을 품을 수 있다니 그건 말도 되지 않을 소리일세."
"형이나 나나 앞으로 순무에서 믿기지 않을 일들을 겪게 될 것이요."
"나는 처음이라 알 수가 없지만 군관들이 유목민 여인들을 품는 것은 군기문란이 아닌가? 또 여인들도 응할 리가 없지 않겠나?"
"형은 모르는 소리요. 그건 순무 행사에서 오랜 관행으로 이어진 일이요. 뿐더러 여인들이 도리어 반긴다고 하니 우리도 한번 겪어봅시다."
"여인들이 도리어 반긴다? 이해가 잘 되지 않는 일일세."
"형, 유목민은 일처다부의 습속이 있음을 몰라서 그러오."
"일처다부란 무슨 말인가?"
"우린 부자들이 아내를 여러 명 거느리고 사오. 그걸 일부다처라고 한다면 유목민은 반대요. 즉 한 집안의 주인은 여인이기 때문에 남편을 여럿 거느리고 사는 풍습이 있다오."
"남편을 여럿 둔다고?"
"심지어 가난한 집의 형제들을 한꺼번에 남편으로 삼기도 한다오."
양신은 고구려도 초기엔 그랬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어 여간 큰 흥미를 느끼게 되지가 않는데 연개소문은 실실 웃기만 했다.
고구려는 판도 순무를 겨울철에 주로 행했다. 근 1만 여 리의 매우 길고 고된 여정이라 고생들이 막심했다. 그런 터라 군관들의 일탈은 자주 벌어지게 되었다. 특히 유목민 여인들을 강제로 추행하는 일이 벌어졌다. 그로인해 유목민의 반감을 불러일으키고 마찰을 빚게 되자 고구려 조정은 악영향을 미칠 것을 방지하고 해소할 방책을 내었다. 소금을 주고 여인들의 매춘(賣春)을 유도하게 했다. 그러자 여인들은 비싼 소금을 얻고자 응해서 의외로 큰 효과를 봤다. 그 이유는 유목민은 모계사회(母系社會) 전통이 강했다. 때문에 일처다부제(一妻多夫制) 혼속(婚俗)이 있을뿐더러 그런 성 풍습에 젖은 남성들은 별로 거부감을 드러내지 않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시동선인, 군관들이 자식을 만나겠다는 건 또 무슨 소린가?"
"군관들은 유목민 여인과 관계해서 임신을 시킬 수가 있지 않소?"
"그렇겠지."
"그렇게 태어난 아이들 중 사내애는 청년이 되면 아비가 있는 고구려 보내주게 되었소. 다시 말을 하면 쫓아내는 것이요."
"사내애를 키운 뒤 왜 쫓아 보낸단 말인가?"
"유목민은 계집애는 살림밑천이라며 더 소중하게 여긴다오."
"사내애들보다 계집애들을 살림밑천으로 치는 이유는 대체 뭘까?"
"사내들은 가축이나 몰고 방목하는 일밖에 하는 게 없지만 여인들은 방목은 물론 그 밖에도 여러 가지 일들을 해서 재물을 불리게 된다오."
"그 일과 이 일이 무슨 관계가 있다는 말인가?"
"이렇게 설명을 하면 형이 잘 알아들을 것 같소. 유목민은 한 집마다 수십수백 마리의 가축을 기르지 않소?"
"그건 그렇겠지."
"가축들 중 수컷은 몇 마리가 안 되고 나머지는 다 암컷들이요. 즉 암컷은 새끼를 낳아 숫자를 불리지만 수컷은 그렇지가 못하오. 그런 이치로 생각을 한다면 비슷한 설명이 되지 않겠소?"
"농담을 할 게 따로 있지. 원 나 참."
"군관들이 소금 타령을 많이 하게 되는 이유도 뭔지 아오?"
"그건 여인을 많이 품자는 게 아닌가?"
"그야 물론이요. 또 그래야만 자식을 많이 얻을 수가 있소."
"자식을 많이 얻으려고?"
"군관들과 관계한 유목민 여인은 이상하게 사내애를 많이 낳는다오."
"유목민은 쓸모가 적은 사내는 좋을 게 없어 쫓아낸다는 말인가?"
"그렇기도 하지만 고구려에선 여간 바라는 바가 아니요."
"고구려가 바라는 바라니?"
"고구려는 병력 충원에 여간 큰 어려움을 겪고 있지 않소?"
"그렇긴 하군."
"군관들이 그렇게 얻은 사내애들이 많으면 나라를 위해서도 자신을 위해서도 여간 좋은 일이 아니기 때문에 모두가 바라는 일이요."
"그게 나라엔 좋겠으나 자신을 위해서도 좋은 일이라고?"
"군관들은 유목민 여인과 관계를 한 뒤 내주는 게 있소."
"뭘 내준단 말인가?"
"자신의 소속과 관등 성명을 적은 가죽 조각을 내주게 되오."
"왜 그런 걸 내준단 말인가?"
"여인은 그걸 지니고 있다가 사내애가 태어나 청년이 되면 가죽 조각을 들고 고구려로 가서 자신의 생부가 되는 군관을 찾게 만드오."
"생부는 그런 가죽 조각을 갖고 찾아온 자식을 받아들이게 되겠군?"
"그렇소. 군관은 그렇게 얻은 자식을 군문에 넣고 뒷배를 봐주오."
"그렇게까지 해서 자식을 군문에 넣으면 나라에 도움이 되겠군?"
"군관들은 그런 자식들을 많이 군문에 넣을수록 진급이 빨라지오."
"자식을 군문에 많이 넣으면 진급이 빨라진다?"
"본인은 물론 조정에서도 여간 바람직하게 여기질 않소."
"조정에선 병력으로 충당할 장정들이 많아지니 그렇긴 하겠군?"
"그게 바로 누이 좋고 매부 좋을 일이 아니겠소?"
"나는 군관들이 색을 밝혀 그런 줄로만 알았더니 그게 아니었군?"
"형도 계집을 여럿 품으려면 소금이 많이 필요하겠소."
"그래서 군관들 중엔 내 자식은 두막루에 있다, 지두우에 있다 하면서 자랑들을 했는데 그러는 이유를 이제야 알만 하겠네."
"암, 그런 자식이 많으면 많을수록 으쓱할 수밖에 더 있겠소?"
두 사람은 그런 말을 나누고 모처럼 한바탕 웃었다.
고구려는 넓은 영토를 지켜낼 적정한 병력을 유지할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인총이 적어서 병사 징발에 여간 큰 애로를 겪지 않았다. 때문에 타국인 용병(傭兵)을 많이 써서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지만 그 일도 쉽지가 않을 일이기 때문에 조정에선 적극 후원하고 장려하는 일이었다.
이튿날 아침에 장막을 나선 을지문덕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시동 선인, 오늘은 눈이 많이 내릴 것 같다. 전원 말 잔등에 가죽을 덮으라는 명을 전하라."
연개소문은 말머리를 돌려서 외치며 달렸다.
"말 등에 가죽을 덮으시오."
군관들은 그 명령을 받기 전에 이미 스스로 안장을 떼고 가죽 두루마리를 펴서 말 잔등을 덮고 있었다. 양신도 따라서 하며 물었다.
"합하, 앞으로 나갈 행선지는 어디가 됩니까?"
"신성으로 먼저 향하게 될 것이다."
"신성까진 얼마나 걸립니까?"
"사흘거리 길을 가면서 여러 유목민들과 접촉을 해야 한다."
연개소문은 명을 전하고 돌아와서 눈이 쌓인 땅바닥을 파헤쳤다.
"합하, 흙색이 검은데 여기서부터 흑토지대가 되는 겁니까?"
"그렇다. 흑토지대는 야영할 때 추위를 한결 덜 느끼게 된다."
요동성 주변의 땅은 색깔이 갈색인데 북쪽으로 올라갈수록 검은 색깔로 변했다. 흑토지대는 겨울철에 눈이 와도 땅이 덜 얼어서 유목민은 가축들을 끌로 몰려들게 되는 곳이었다.
그때 하온장이 와서 말했다.
"합하, 여기서부턴 제가 길안내를 맡겠습니다."
"여기서부턴 북부대인의 관할지가 되겠군?"
"합하께서 만나기를 청한 힐리 공자가 꼭 왔으면 좋겠습니다."
하온장의 말에 을지문덕은 음성이 무거워졌다.
"나는 올 것으로 믿지만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소."
고구려와 동돌궐은 서로 반목하는 사이로 변한 데다 곧 전쟁터에서 상대를 해야만 했다. 을지문덕은 그런 동돌궐과 관계 회복도 필요하나 먼저 위탁 사육을 시키는 군마(軍馬)를 제 때 인수받을 수가 있느냐가 큰 문제라서 다각도로 힘을 기울이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나는 이번에 힐리 공자로부터 군마를 인수를 받을 일을 놓고 의논을 해야 하는데 그게 잘 풀리지 않는다면 여간 큰 문제가 아니요."
을지문덕의 말에 연생수도 동감이라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시피 칸은 계민 칸보다 수국에 더 쩔쩔 매고 있으니 한심합니다."
수국은 그동안 동돌궐의 내부 분열을 일으키고자 온갖 방법을 다 썼다. 그러면서 한편으론 막대한 량의 비단을 보내 동돌궐 지배층의 사치를 조장하는 데도 큰 성과를 거두었다. 그 결과 칸을 비롯해 많은 족장들의 사치가 심해지고 수국의 앞잡이로 만들 수가 있었다.
"시피 칸은 고구려가 수국에 복속하지 않으면 교역을 끊겠다고 협박을 한답니다. 어리석은지 정신이 나갔는지 모르게 되었습니다."
"시피 칸은 그렇지만 내부 사정은 다르오. 수국에 무릎을 꿇은 것에 불만이 커서 고구려를 부럽게 여기는 족장들이 여간 많지가 않소."
동돌궐과 고구려 관계가 악화된 원인은 건무에게 있었다. 건무는 철정 값을 올리려고 철륵(鐵勒)을 이용하려고 든 데서 비롯되었다. 철륵은 동돌궐이 가장 골치 거리로 여기는 상대인데 고구려가 그들에게 철정을 공급하려고 들자 시피 가한은 크게 반발했다. 그로인해 전통적인 우방인 고구려로부터 등을 돌리고 수국 편에 서게 되었다. 때문에 을지문덕은 돌파구를 찾고자 계민 가한의 3남인 힐리 공자와 만나려는 것이었다.
하온장은 바로 철륵과 접촉했던 당사자였기 때문에 큰 책임감을 느꼈다. 때문에 이번 기회에 힐리 공자와 족장들을 만나 사과하고 화해를 모색하는 을지문덕을 측면에서 지원할 결심을 굳혔다.
"힐리 공자는 이런 말을 했다고 전해져서 조금은 마음이 놓이오."
"합하, 힐리 공자가 무슨 말을 했습니까?"
"고구려는 믿을 수가 있지만 한족은 영원한 적일 뿐이라고 했소."
두 사람은 그런 말에 희망을 걸지 않을 수가 없었다. 고구려가 한족과 대결을 벌일 땐 북방의 유목민들은 언제나 우군이 돼 주었다. 그중에서도 동돌궐과 말갈족은 가장 큰 몫을 했었던 만큼 어떻게 해서든 동돌궐을 돌려세워 놓지 못하면 절망적일 수밖에 없었다.
"합하, 현재 상황으론 시피 가한은 어렵겠습니다. 그러니 힐리 공자와 접촉을 해서 활로를 뚫는 방법을 찾지 않으면 안 되겠습니다."
하온장의 대답에 을지문덕은 무겁게 입을 떼었다.
"시피 칸도 이런 말을 했다오. 한족한테 열을 얻는 것보다 고구려에서 하나를 얻는 게 더 났다. 나는 그런 데서도 희망을 걸어보려고 하오."
"고구려와 동돌궐은 근본적으로 통하는 게 있으니 희망을 겁니다."
"나도 그렇소. 당장은 시피 칸의 마음을 돌리기 힘들겠지만 족장들은 대부분이 고구려와 교역이 끊기는 것을 원치 않소. 시피 칸도 그걸 마냥 무시하고 외면할 수만은 없을 것이므로 기대를 걸어보는 수밖에 없소."
"합하, 그래도 힐리 공자는 시피 칸의 눈치를 봐야 해서 문제입니다."
"물론이요. 그 때문에 나는 은밀한 접촉을 시도하는 것이고 족장들도 전부 동부 쪽에만 국한시켰소. 힐리 공자 역시 모험을 거는 일이요."
동돌궐은 고구려가 공급하는 철정으로 철제품을 제조해서 여러 유목민들에 팔아 막대한 이익을 취했다. 그러므로 교역의 중단으로 입는 피해는 너무도 컸다. 특히 부족장들의 주력 병력은 교역 상단의 대원들인데 교역을 못 하면 부족을 장악할 힘을 상실하게 되었다.
"나는 이번에 고구려가 새 철광산 개발할 것임을 힐리 공작에게 알리려 하오. 그건 동돌궐과 관계 복원에 큰 작용을 할 걸로 믿고 있소."
"저도 합하의 말씀에 전적으로 동감입니다."
"다행으로 여길 일은 또 있는데 그것은 동서 돌궐 간의 관계가 매우 좋지가 않은 점이요. 서역에도 철정을 생산하는 나라들이 많아서 서돌궐은 거기서 철정을 구입해 쓰오. 만약에 서돌궐과 등을 진 사이가 아니었다면 동돌궐도 서역 철정을 사들여 고구려를 의지하지 않아도 되오."
"합하, 서역의 나라들 역시 철 때문에 전쟁을 크게 벌인다지요?"
"그렇소. 옛날 그리스 국의 알렉산더 왕은 10년 간 동방원정을 한 목적 중 하나는 철산지 점령에 있고 결국 원정길에서 목숨을 잃기까지 했소."
"합하, 서돌궐의 견제로 동돌궐이 철정을 얻을 수 없다면 끝내 고구려에 손을 내밀지 않을 수가 없으니 너무 절망할 것은 없겠습니다."
두 사람은 그런 말로 자위를 할 수밖에 없었다.
눈발은 약해지는 대신 점점 찬바람이 거세게 불었다. 군관들은 눈구멍만 내놓는 천을 얼굴에 덮개로 감았다. 그렇게 해야만 심한 바람 속에서 겨우 앞을 내다볼 수가 있었다.
지평선은 어느 쪽도 보이질 않았다. 말들은 헉헉대는 숨소리와 괴로운 코 투레를 틀었다. 요하의 지류들은 어디서나 강폭이 넓지만 바닥은 말라붙었고 드문드문 물웅덩이가 있는 데로 유목민이 모여들었다.
눈은 북상을 할수록 무릎이 빠져들 만큼 쌓여 말들은 헤쳐 나가기에 힘이 들어했다. 말들은 목이 말라서 울음소리를 터뜨렸고 군관들은 웅덩이를 만나면 얼음을 깨서 먹게 해 주었다. 군관들도 속이 허할수록 추위를 더 심하게 느껴 마상에서 육포를 씹었다.
해가 질 무렵에 변덕스러운 하늘은 구름이 벗겨졌다. 회색 하늘엔 무수한 별들이 나타나 야영으로 들어갔다. 군관들은 솥을 걸고 삭정이를 모아 불을 지피고 눈을 퍼 담은 데다 기장쌀과 육포를 넣고 끓였다.
군관들은 구수한 냄새를 풍기는 죽을 먹고 어한을 풀자 말들을 병영의 가운데로 모아놓고 모닥불을 여러 군데 피워서 추위를 덜게 해 주었다.
양신과 연개소문은 저녁을 먹고 나자 천막에 들어가 일찍 잠자리를 잡았다. 두 사람은 털가죽 옷을 입었지만 피곤한 데다 너무 추워서 서로가 등허리를 맞대고 누워서 잠을 청했다.
군관들은 밤새 돌아가면서 불침번을 섰다. 한데 있는 말들은 숨을 쉴 때 콧김이 얼어붙어 콧구멍이 막혔다. 때문에 틈틈이 콧구멍에서 얼음을 파내 주지 않으면 질식사를 당하곤 했다.
날이 밝고 아침 해가 떠오르자 밤새 얼어붙은 세상의 모든 것은 겨우 움직임을 시작했다. 군관들도 천막을 나와 원기를 되찾은 듯 다시 발진을 했다. 정오껜 판도내 유목민들이 넓은 대지를 뒤덮듯 수백 두의 양 떼들을 끌고 이동해 가는 게 자주 보였다.
한 낮엔 하늘이 맑아지고 날씨도 온화해져 군관들은 추위를 덜 느끼듯 어깨들을 폈다. 판도내 유목민들도 더욱 자주 만나서 서로가 손을 흔들어 보이면서 응원하는 태도를 보였다.
병단은 어디쯤에서 서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거기서부턴 유목민의 집단 거주지가 자주 나타나기 시작했다. 드문드문 나무숲도 보이고 때로는 깃발을 단 상단(商團)들이 머물고 있는 것도 보였다.
연개소문은 을지문덕에게 물었다.
"합하, 이 지역은 어떤 유목민의 집단 거주지가 됩니까?"
"여기부턴 두막루 족의 지경이 된다."
양신은 유목민 천막들을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초원 땅은 아무리 가도 성들은 볼 수가 없군?"
"유목민은 성을 쌓을 줄 모르니 그렇소."
"두막루 족도 성을 쌓지 않는가?"
"그렇소."
"적이 쳐들어오면 어떻게 막는가?"
"자신이 있으면 맞서 싸우나 세가 불리하면 도망을 칠 뿐이오."
"오늘 밤엔 두막루 지경에서 야영을 하게 되겠군?"
양신의 말에 연개소문이 대답했다.
"형, 오늘은 밤엔 여기서 우리도 소금을 쓰게 될 것 같소."
을지문덕은 그 말을 듣고 빙그레 웃기만 했다.
순무 병단은 얼마를 더 가지 않아 두막루의 근거지에 당도했다. 군관들은 천막을 치고 야영 준비로 들어갔다. 두막루의 대수령인 낙계저(諾皆諸)가 병력을 끌고 순무 병단을 영접하러 나왔다.
을지문덕은 낙계저를 데리고 자신의 천막으로 들어갔다. 우태들은 낙계저가 끌고 온 1천여 필의 말들을 점검한 뒤 인수했다. 말들은 거기서 고구려로 보내 전투에 적응할 훈련을 시키게 되었다. 기병들은 전투를 할 때 지친 말을 갈아탈 수 있어야 원활한 작전이 가능해진다. 말들도 쉬어가면서 뛰어야 전투력을 향상시킬 수가 있게 되었다.
낙계저는 이번 기회에 고구려에 대한 요구 조건을 늘리려고 들었다. 을지문덕은 그 속셈을 알아 잘 달래 가며 타협을 원만히 이끌냈다. 그러기 위해 고구려는 새로운 철산지를 개발하는 걸 알리고 철제품 공급도 대폭 늘리는 약속을 한 끝에 두막루 기병 5천을 지원받기로 했다.
을지문덕은 타협을 보자 소금 마차 5대를 넘겨주었다. 낙계저는 특히 마차까지 제공을 받게 되어 입이 찢어졌다. 그에 대한 보답을 하려 듯 고구려 군관들에게 양고기와 술을 제공했다. 해가 진 들판에선 모닥불을 피워놓고 고기를 구워서 냄새가 진동하게 되었다.
군관들은 술을 마시며 모처럼 여흥 판을 벌였다. 흥에 겨운 나머지 신이 나는 구호를 붙이면서 춤들을 추었다.
"후이오."
"호이야."
어둠 속에선 몰려온 두막루 여인들이 군관들의 춤을 지켜보았다. 수국의 침공을 앞두고 고구려 군이 매우 위축되었을 것으로 여겼는데 그렇지가 않다는 판단에 웃음들을 짓게 되었다.
춤판이 계속되는 가운데 군관들 중 절반은 소금 자루를 들고 나섰다. 두막루 여인과 눈이 맞는 대로 짝을 이뤄 떠났다. 양신과 연개소문은 차례가 다음 날이라 밤새 병영을 지켜야만 했다.
이튿날 을지문덕은 인수한 군마 1천 필을 군관 2명과 두막루 병사 30명으로 하여금 신성으로 옮기라는 명령을 내리고 발진했다. 하루 종일 행군을 한 끝에 이번엔 지두우 지경으로 들어섰다.
을지문덕은 지두우 족장인 타루와도 똑같은 회담을 했다. 그리고 두막루와 비슷한 수준에서 합의를 보았다. 저녁에 타루 족장 역시 병단에 양고기와 술을 내어 대접을 했다.
양신은 연개소문에게 물었다.
"지두우와 두막루족이 이렇게 가까이 있는 걸로 봐서 이웃사촌이나 다름없는 관계라는 생각이 드는데 사이가 좋을지 모르겠군?"
"유목민은 국경이 거의 없다고 봐야 하므로 서로가 뒤섞여 지낼 때가 많을 수밖에 없지만 가깝게 지낼지는 모르겠소. 비록 같은 부족이라고 해도 봄부터 가을까지는 각자 풀을 찾아 흩어지게 마련이요. 그러다가 겨울철이 오면 전부 물이 있는 데로 모여들게 된다오. 그리고 함께 겨울을 지내는 걸로 알고 있는데 어디나 그렇듯 사이가 좋을 것 같진 않소."
"시동 선인, 오늘 밤 유목민 남자들은 여인을 내주고 마음이 편할까?"
양신의 걱정에 경험이 있는 군관 하나가 끼어들었다.
"오늘 밤 사내들은 한 천막에 모여서 밤새도록 술을 마실 것이요."
"지두우 말을 못 하는데 의사소통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소?"
"북방 유목민은 대부분이 고구려 말을 잘하는 편이요. 그저 고맙다는 말과 예쁘다는 칭찬을 많이 해 주면 대접을 더 받을 수가 있다오."
밤이 이슥해지자 양신과 연개소문은 어젯밤에 못 나간 군관들 틈에 끼었다. 모두는 별빛을 받으며 밤기운이 찬 황야를 걸어서 지두우족 거주지에 이르렀다. 여기저기서 개 짖는 소리들이 일어났다.
여인들을 짝으로 삼은 군관들을 자기 천막으로 데려갔다. 양신과 연개소문은 거기서 흩어졌다. 각자 여인을 따라 게르라는 천막 속으로 들어갔다. 그 속엔 노파와 젊은 여인들이 있었다.
안이 의외로 널찍한 게르는 긴 작대기들을 우산(雨傘) 살처럼 펼쳐 세우고 그 위에 양가죽을 덮어 지붕을 만든 것이었다. 맨 꼭대기엔 구멍이 뚫려서 밤하늘의 별빛이 스며들었다. 한가운데에 돌무더기를 쌓아 만든 화덕이 있고 말린 가축의 분뇨를 태웠다. 때문에 게르 안은 훈기가 돌지만 퀴퀴한 냄새가 뒤섞여 있었다.
양신은 그런 냄새를 맡고 있자니 가슴이 좀 울먹거렸다. 얼굴을 찡그리지 않으려고 애를 쓰며 소금 자루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노파는 그것을 냉큼 집어 들고 젊은 여인과 함께 밖으로 나갔다.
안내해 온 여인은 그제야 웃음을 지으며 고구려 말을 썼다.
"군관님은 매우 건장한 체격이시군요?"
양신이 대꾸를 않자 연인은 굵은 팔뚝을 손으로 만져보았다.
"어머! 이렇게 단단한 팔뚝은 처음 보네요."
여인은 그냥 웃기만 하는 양신에게 나직하게 속삭였다.
"저는 오늘 밤에 군관님의 씨를 꼭 받았으면 좋겠어요."
양신은 쑥스러워 고개를 트는데 여인이 와락 끌어안았다.
"군관님, 우리 술을 마실까요?"
여인은 미리 준비해 두었던 듯 술을 그릇에 따라 내밀었다. 양신은 그걸 받아 들고 마셨다. 여인은 양고기를 한 점 입에 넣어주었다
"군관님, 제게도 따라 주세요."
양신이 술을 따라주자 연인은 단숨에 마시고 나서 양신의 얼굴을 어루만지며 몸을 기대었다. 양신은 가만히 있기만 하기가 뭣해 입을 열었다.
"당신은 예쁘오."
여인은 그 말에 웃음을 담뿍 지으며 옷을 벗기 시작했다. 금세 알몸을 드러낸 사타구니에는 거웃이 무성했다. 양신의 옷과 신발을 벗겨 준 뒤 차가운 두 발을 끌어다 자신의 젖가슴으로 품어주었다.
양신은 두 발이 보드라운 젖가슴에서 옮겨오는 따듯한 체온을 느끼며 정신이 좀 몽롱해졌다. 여인은 밀어붙이는 대로 바닥으로 눕고 말았고 한 몸이 된 채 꿈틀대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남녀는 함께 가쁜 숨을 몰아쉬기에 얼마쯤의 시간이 흘렀다. 양신은 격정의 시간을 보낸 몸으로 축 늘어지고 마는데 여인은 수건으로 땀에 젖은 몸을 닦아주며 입을 열었다.
"군관님은 내년에도 절 찾아주셨으면 좋겠어요."
"내년에는 어떻게 될지 모르겠소."
"저는 군관님의 씨를 받아야 하겠으니 꼭 다시 와 주셨으면 해요."
여인은 대꾸를 않는 양신에게 조르듯 또 말했다.
"전쟁이 나면 많은 사내들이 죽어요. 군관님은 죽으면 안 돼요."
"누군들 죽고 싶어 죽겠소?"
"전 사내애를 많이 낳아요. 군관님이 장군이 되게 만들어 드릴게요."
양신은 그 말을 듣고 빙긋이 웃기만 하자 여인은 뜻밖의 말을 했다.
"수국과 전쟁이 나면 제 남편도 출정하게 되어요."
"그렇소? 그런데 그걸 어찌 아오?"
양신의 질문에 여인은 두막루의 추장들이 결정을 내린 걸로 알렸다. 양신은 두막루가 고구려를 위해 한족과 싸울 병력 지원을 결정한 것에 안심을 하는데 여인이 한 마디를 더했다.
"두막루 사람들은 고구려의 멸망을 절대로 원치 않아요."
양신은 고맙게 여기면서 몸을 일으켜 세웠다.
"군관님, 벌써 가려고 그러세요?"
"다른 군관이 밖에서 날 기다리고 있소."
여인은 양신을 더 잡으려 하지 않고 옷을 입게 도와주고 자신도 입었다. 양신은 밖으로 나갔으나 연개소문이 보이지 않자 그가 들어간 게르 앞으로 다가들며 큰 소리로 외쳤다.
"시동 선인, 그만 돌아가세."
그러자 안에서 연개소문이 냅다 소리를 질렀다.
"형, 내일 아침에 돌아가는 거요. 다시 그 집으로 들어가오."
양신도 밤은 깊어가고 추위를 더욱 감당할 수가 없었다. 어찌할 바를 모르며 벌벌 떨리는 몸을 잔뜩 웅숭그릴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언제 따라왔는지 여인이 등 뒤에서 끌어안았다.
"군관님, 제 남편은 내일 낮에나 돌아와요."
"나는 병영으로 그만 돌아가야 하는데 동료가 나오질 않소."
"그 집에 들어간 군관은 내일 아침에 간다고 하지 않아요?"
여인은 말하고 양신을 뒤에서 떠밀며 자기 집으로 이끌었다.
"내가 이래도 되는지 모르겠소."
"다들 그렇게 하는데 군관님은 제가 싫어서 그러시나요?"
"아니오. 나는 대단히 좋아하오."
양신은 그렇게 말하고 연개소문 쪽으로 한 번 더 외쳤다.
"시동 선인, 그만 나오게."
그러자 안에서 연개소문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날이 밝으면 돌아가야지 지금 가면 숙맥 취급을 당할 것이요."
양신은 대답을 못하고 서 있기만 하자 여인이 강하게 잡아끌었다.
"밖에서 이대로 있으면 얼어 죽게 돼요."
여인의 말에 양신은 걸음을 떼었다. 혼자 돌아가고 싶지도 않아서 다시 여인의 게르 속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여인이 눕히는 대로 자리에 쓰러졌고 잠에서 깨어보니 아침이었다.
"군관님, 날이 밝았는데 잘 주무셨어요?"
양신은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며 몸을 일으켜 밖으로 나갔다.
동녘 하늘이 부윰해지는 속에서 주변에선 여기저기에 모닥불을 지피고 두막루 사내들은 둘러싸고 몸을 녹이고 있었다. 자기 집으로 들어가질 못해서 그러는 걸로 보여 양신은 미안한 마음으로 나직이 불렀다.
"시동 선인, 시동 선인."
연개소문이 들어간 게르 속의 여인이 얼굴을 내밀고 야릇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녀의 등 뒤에서 나온 연개소문은 하룻밤 새 얼굴이 까칠해진 채 싱끗 웃으며 물었다.
"형은 좋았소?"
"그랬네."
양신을 따라온 여인과 연개소문의 여인은 합창을 하듯 말했다.
"시동 선인은 사내 중의 사내야."
"호위 선인님, 내년에 다시 와요!"
망망무제를 배경으로 숙영지로 향하는 두 사람은 발걸음이 가벼웠다. 무슨 얘기를 재미있게 나누느라 연방 파안대소를 했다. 숙영지가 가까워지자 연개소문이 말했다.
"형, 여기서부턴 의젓하게 천천히 걸읍시다."
"혹시 우리만 자고 들어가는 게 아닐까?"
"형은 뭐가 걱정이 되어서 그러오?"
"합하께서 꾸중을 내리시지 않을까 해서 그러네."
"형은 밤새 시달리고 나서도 그렇게 빨리 걸을 힘이 남았군?"
"시동 선인의 얼굴을 보니 되게 시달린 모양이로군?"
"나는 오늘 행군에서 졸다가 말 잔등에서 떨어질지도 모르겠소."
"몸이 떨어지지 않게 안장에 묶고 가게나."
두 사람이 숙영지에 당도하자 군관들은 벌써 고기 죽으로 아침을 먹고 있었다. 양신과 연개소문은 먼저 을지문덕의 장막으로 들어갔다. 을지문덕은 고기 죽을 먹다 말고 물었다.
"자네들도 밤을 새우고 왔군?"
두 사람이 아무런 대꾸를 않자 한 마디를 더 했다.
"혼쭐들이 났겠군?"
양신은 목덜미가 벌게지는데 연개소문이 변죽을 쳤다.
"계집들에게 붙잡히면 합하께도 어쩔 수가 없으실 겁니다."
"숙맥들 같으니."
을지문덕은 국물을 삼키다 웃음이 터져서 사래가 들렸다. 양신은 쿡쿡 기침을 터뜨리는 을지문덕에게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합하, 지두우 족은 원로회의에서 원병을 내기로 결정을 했답니다."
"호위선인, 그걸 자네가 어찌 알게 되었는가?"
"어젯밤 지두우 여인이 말해주었습니다."
"약광은 꽤나 쓸모가 있군! 여인이 그 말을 한 것은 반한 때문일세."
순무 병단은 다시 북상하는 발진을 했다.
이틀 뒤 판도내의 유연족 지경으로 들어섰다.
을지문덕은 추장인 켄트에게 국왕이 곧 금관을 하사하게 될 것임을 통고했다. 그리고 군마 5천 필과 병력 5천을 지원받기로 합의를 보고 소금 마차 10대를 넘겨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