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암투(暗鬪)
섣달 내내 눈이 내린 장안성은 은백의 세상으로 변했다.
고구려 첩자들은 탁군에 집결되는 수국의 병력은 이미 1백만에 이르고, 고창(高昌), 선비, 오환의 병력들까지 속속 도착하고 있다는 보고를 했다. 양광이 떠벌인 말들이 허장성세가 아니었다.
양광은 고구려에 항복과 요동 땅 절반을 내놓을 것을 또 다시 요구했다. 최후통첩을 받은 고구려는 암울한 분위기에 빠져들었다.
건무는 또 다시 국왕에게 요동 땅 절반을 베어주더라도 국체를 보존할 것 주장했다. 때문에 화전(和戰) 양면책을 놓고 고심하던 국왕도 항복 쪽으로 기울기 시작했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연태조는 그 소문을 듣고 대궐로 들어가서 결사항전을 호소했다. 요동 땅의 절반을 내주면 멸망을 면할 것이란 생각은 큰 착각임을 주장했다. 오락가락이던 국왕을 다시 항전으로 돌아섰다.
건무는 연태조가 다녀간 이튿날 대궐로 들어가자 국왕이 말했다.
"짐을 더 이상 설득하려고 들지 말라."
"폐하, 통촉하옵소서. 종묘사직을 지켜야 합니다."
"너는 요동 땅의 절반을 베어주면 왕조가 유지될 것이란 생각을 하지만 그것은 큰 착각이다. 짐은 연태조의 말이 맞는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건무는 설득을 포기하려고 들지 않았다.
"폐하, 연태조는 자신의 관할지가 없어지게 되어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일단 국체를 유지시켜야 나중에 잃은 땅을 되찾을 수가 있습니다."
국왕은 그런 말을 하는 건무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물었다.
"양광의 궁극적 목적은 고구려 멸망에 있는데 항복이 무슨 소용인가?"
"복속해서 압록수 이남만이라도 보존해야 왕실의 연명이 가능합니다."
"양광은 요동 땅을 점령하고 나면 그곳에 새외 종족들을 이주시키고, 그 다음에 새외 종족을 앞장세워 계속 침공할 것이다. 연태조는 양광이 장안성을 직공할 대규모 수군 함대도 꾸려서 화평은 끝이라고 말했다."
수국은 중원 땅에서 마지막으로 멸망시킨 진(陳) 나라로부터 막강한 수군력(水軍力)을 흡수했다. 그걸 기반으로 수백 척의 함선을 더 건조해 수륙양면에서 고구려를 압도하게 되었음을 모를 사람이 없었다.
"이래도 저래도 멸망을 면치 못하게 되었다. 짐은 항전의욕을 보이는 여타 부 상가들과 함께 이왕에 당할 멸망이라면 싸우다 죽기로 했다."
그런데 국왕도 건무도 모으고 있는 게 있었다. 그것은 양광이 여타 부 상가들을 회유를 해서 일부는 흔들리는 조짐이 일어나고 있었다.
"그만 나가거라."
국왕의 명에 건무는 몸을 일으킬 수밖에 없었다. 불만과 불안 속에 새달궁으로 돌아갔다. 동화부인은 남편의 안색이 매우 어두워보여서 시녀에게 술상을 차릴 것을 지시했다.
건무는 술상을 받고 동화부인이 직접 따라 주는 술잔을 말없이 비워냈다. 동화부인은 남편의 눈치를 살피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하, 여선이 곧 출산을 하게 된답니다."
"출산을? 언제쯤이요?"
"이 달 말이나 새해 초가 될 것이라고 합니다."
동화부인이 드디어 말을 꺼내자 건무는 술잔만 또 비웠다.
"저하, 출산을 앞둔 여선을 어찌 하시렵니까?"
건무는 벌써부터 여선의 임신을 놓고 동화부인이 문제를 제기할 것을 예상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자못 의아스러운 태도로 반문했다.
"부인, 뭘 어찌 하라는 말씀이오?"
"저는 여선으로부터 실토를 받은 게 있습니다."
"어떤 실토를 받았다는 것이요?"
"여선의 뱃속에 든 아이는 저하의 핏줄이 아니잖습니까?"
"부인은 여선을 상대로 무슨 신문이라도 하셨소?"
건무의 말에 동화부인도 좀 맞서려는 태도가 되었다.
"저하께서도 어떤 의문을 품고 계실 것으로 생각됩니다."
"부인, 내가 무슨 의문을 품을 게 있단 말이요?"
"여선은 혼약을 맺었던 사내가 있었습니다. 도해선이 그런 여선을 저하의 후궁으로 삼게 만든 게 불상사를 빚는 원인이 된 것입니다."
동화부인은 도해선에게 책임을 돌리며 여선을 내보낼 생각이었다.
"부인은 도해선이 빚은 불상사로 보나 나는 그 자의 충정을 의심하지 않소. 부인은 그보다 후사 문제를 더 걱정을 해야 되지 않겠소?"
건무의 말에 동화부인은 할 말이 없어졌다.
"부인, 여선과 혼약을 맺었던 자에 관해서 뭘 더 알아낸 건 없소?"
"혼약을 맺었던 자의 이름은 양신이고 다갈촌 철장의 양자였다고 합니다. 여선은 제게 자신을 도해선이 저하께 천거한 이유도 밝혔습니다."
"천거한 이유가 뭐랍디까?"
"몇 년 전 도해선은 검술대회에서 양신과 대결했다 패했답니다. 그런 양신에게 앙심을 품고 여선을 저하께 천거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건무는 그런 사정을 비로소 알게 되었지만 그렇다고 여선을 내 칠 마음은 없었다. 때문에 동화부인의 말을 무시할 생각이지만 양신에 관한 관심만은 커지게 되었다.
"부인, 양신이란 자가 철장의 양자였던 게 분명하오?"
"그렇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어디로 갔는지 종적을 감추었답니다."
"어디로 종적을 감추었다?"
동화부인은 잠시 망설이다가 말했다.
"저하, 여선에 관한 일을 알게 되셨으면 무슨 조치를 취하셔야 합니다. 출산을 하기 전에 궁에서 내보내는 게 마땅한 일입니다."
"부인, 무슨 말씀을 하시오? 여선을 왜 내보낸단 말씀이요?"
"저하, 여선은 다른 사내의 씨를 배고 있지 않습니까?"
"여선은 이미 내 후궁이 되었소. 그런데 단지 그런 이유 때문에 도로 내보라는 주장을 하시는 건 말도 되지 않는 소리요."
"저하, 궁궐에서 타인의 자식을 출산하게 할 순 없지 않겠습니까?"
"나는 여선이 출산을 하면 아이와 더불어 거둘 생각이요."
"저하, 어떻게 그런 말씀을 하실 수가 있습니까?"
"부인, 여선은 출산이 가능한 여인인 만큼 앞으로 내 자식을 낳을 수가 있소. 그러므로 부인은 궁 안에서 일체 잡음이 일어나지 않게 철저한 입단속을 시켜주시오. 그 밖의 일은 내가 모두 알아서 처리하겠소."
건무는 씹어뱉듯 그런 말을 던지고 몸을 일으켜 방을 나갔다.
"저하!"
동화부인은 큰 소리로 외치고 분에 못 이겨 두 주먹을 움켜쥐었다.
건무는 사랑방으로 들어가서 도해선을 급히 불러들일 것을 집사에게 지시했다. 잠시 후 도해선은 득달같이 달려들어 왔다.
"저하, 도해선 대령입니다."
"도해선, 안으로 들라."
건무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도해선은 방안으로 들어섰다. 건무는 읍하고 서 있는 그에게 가까이 다가오라는 손짓을 했다. 도해선은 무릎걸음으로 다가들며 눈치를 살폈다.
"오늘은 저하의 심기가 매우 편치 않으신 걸로 생각되옵니다."
"도해선, 세상사 뜻대로 되는 게 뭐가 있겠는가?"
"저하, 소인은 서부대인이 주도한 제가회의가 열리면 거기서 내릴 결과를 뻔합니다. 모든 게 국상의 조정을 받은 결정이 내려질 것입니다."
"여타 부 상가들이 국상의 조종을 받는다?"
"북부대인이 순무에 계속 동참한 것은 국상의 농간이 아니겠습니까?"
도해선의 말에 건무는 얼굴 표정이 어두워졌다.
건무는 하온장에게 요동성에서 연태조를 데리고 장안성으로 돌아올 것을 권했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은 결과 제가회의에서 번번이 밀리는 결과를 당할 수밖에 없었다. 제가회의는 안건을 과반수로 결정을 내려 처리하게 되었다. 다만 찬반이 동수일 때만 국왕의 결정을 따르게 되었다. 그러나 화평 쪽에 서기로 된 하온장이 없으면 건무는 뜻대로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을지문덕은 그 때문에 하온장을 동행시킨 것 같았다.
"저하, 북부대인도 서부대인이 주동하는 안시성 철광산을 공동 개발에 관심이 클 것입니다. 여타 부는 그 때문에 다시 뭉치게 되었습니다."
"여타 부가 다시 뭉치는 것은 놔둘 수가 없다."
"저하, 그러자면 국상을 그냥 놔두시면 안 됩니다. 서둘러 무슨 결단을 내리시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렇지만 전쟁을 앞두고 그런 일을 할 수는 없다."
건무는 그런 대답을 했으나 속은 부글거리고 있었다.
"폐하께서도 새 철광산 개발을 허락하신 만큼 여타 부들은 공동개발에 박차를 가하게 될 것이고 그로인해 세력을 불릴 수가 있게 됩니다."
도해선의 말에 건무는 고개를 무겁게 끄덕였다. 하녀들이 술상을 들여놓자 도해선이 술을 따랐다. 건무는 술잔을 단숨에 비워냈고 도해선은 그 심경을 알만해서 다른 말을 꺼냈다.
"저하, 요즘에 떠도는 소문이 있습니다."
"무슨 소문인가?"
"전쟁이 나면 저하와 국상이 총병력을 절반씩 나눠서 지휘를 한다는 소문이 났습니다. 백성들까지 그걸 다 알만큼 넓게 퍼지고 있습니다."
"백성들까지 알만큼 소문이 퍼졌다?"
"아마도 국상 쪽에서 일부러 소문을 퍼뜨린 게 아닐까 싶습니다."
"국상이 왜 그런 소문을 퍼뜨린단 말인가?"
"국상은 저하와 총 병권을 나누게 된 것으로 자신이 동급에 올랐음을 은근히 과시하려는 목적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나하고 동급임을 과시하기 위해서?"
"그렇습니다. 저하께선 무슨 조치를 취하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건무는 말없이 술병을 들고 도해선에게 따라주었다. 도해선은 황송스럽게 받아 마시고 술잔을 되돌렸다. 두 사람은 되풀이 술잔을 주고받으면서 이심전심으로 통하는 게 있었다.
"도해선, 너는 하나만 알려고 하지 말고 둘도 알기에 힘을 써라."
"저하, 소인이 하나만 알고 둘을 모를 게 무엇입니까?"
"폐하가 국상에게 병권을 주신 데는 그만한 책임도 따르기 마련이다."
"저하, 책임이 따르지 않을 임무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앞으로 국상은 압록수 이남에 적병이 발을 들여놓게 못하게 해야 할 책임을 진 것이다. 책임을 다 하지 못할 경우 목숨을 내놓을 것도 각오하지 않으면 안 될 것임을 너는 알아야 한다."
도해선은 그 말을 듣고 건무의 속내를 알만해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이젠 항전대열에 설수밖에 없게 되었다. 수국과 맞서자면 상하 전체가 총체적으로 결속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일은 백성들의 분발을 이끌어내는 일인데 거기엔 국상만한 적임자가 없다. 그러므로 우선은 써먹고 나서 볼 일이다."
"저하, 소인도 동감입니다. 여타 부가 결사적인 항전을 다짐하는 이유는 단 한 가지 새 철산지의 공동개발로 이익을 취하려는데 있습니다. 그걸 이용하되 후에 일어날 일은 경계하시겠다는 말씀으로 듣겠습니다."
건무도 만족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그렇다. 이제 화평은 물 건너갔고 양광의 침공은 코앞에 닥치게 되었다. 그러니 우선 급한 불부터 끄고 보자. 신라나 백제의 귀족들도 각자 상단을 꾸려 타국과 교역으로 부를 축적하고 그걸로 세력 기반을 유지해 나가긴 우리와 같다. 여타 부 상가들도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니 어쩔 수가 없다. 그에 대한 대책은 나중에 세울 일이다. "
"저하, 그렇지만 여타 부가 철광산을 운영하게 되면 앞으로 통제는 더욱 어려워집니다. 그에 대한 대책은 지금부터 세우셔야 하십니다."
건무도 그게 절실한 문제임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여타 부는 자신을 두고 국가의 존망보다 왕실의 존속만을 생각하는 사람이라고 비판했다. 그걸 의식해서라도 당분간은 자중할 생각이었다.
"도해선, 무슨 일이건 이율배반적인 면이 있다."
"저하, 전들 그걸 왜 모르겠습니까?"
"알면 되었다. 지금은 국가의 존망이 달린 때인 만큼 여타 부를 자극하는 일은 삼가 하기로 하자. 국체 보존을 위해 여타 부를 휘어잡기보다 단합을 이끌어 내고 을지문덕을 최대한 이용을 하는 게 유리하다."
"국상을 이용하는 건 쉽지가 않을 일로 생각됩니다."
"그렇다고 해서 어찌하겠나? 국상만큼 여타 부를 잘 장악할 수가 있는 자는 그밖에 없지 않은가? 써먹을 수 있을 때까지 써먹어야 한다."
도해선도 고개만 끄덕이고 건무는 한 마디를 더했다.
"내가 보위에 오르면 허수아비 왕은 되진 않을 것이니 걱정 말라."
건무는 취기가 점점 더해져 갔지만 머릿속은 차갑게 돌아가고 있었다. 이번 전쟁에서 을지문덕을 최대한 이용을 하면서 처치를 하는 것도 지금부터 시작해야 할 일로 생각하고 있었다.
"저하, 국상의 영향력이 커지는 것도 지금부터 견제를 해야 합니다."
건무는 도해선이 자신의 머릿속을 들여다보는 것 같아 물끄러미 바라보게 되었다. 음험한 만큼 머리를 쓰는 것도 비상해서 쓸모가 있음을 더욱 느끼며 손수 술을 따라주었다.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므로 입조심을 하도록 하자."
도해선이 고개만 끄덕이는데 건무는 뜻밖의 말을 꺼냈다.
"도해선, 혹시 양신이란 자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를 아는가?"
건무의 질문에 도해선은 내심 여간 놀라지 않았다.
"저하께선 그 자를 어떻게 알고 계십니까?"
"그 자는 여선과 혼약을 맺었던 사이로 알고 있다."
"저하, 그 말씀을 누구한테 들으셨습니까? 대부인이십니까?"
"그렇다. 여선이 모든 걸 실토했다는 얘기를 내게 전하더구나."
도해선은 갑자기 안색이 창백해졌다.
"저하, 소인도 양신에 관한 말씀을 드리려던 참입니다."
"무슨 얘긴지 한번 들어보자."
"저하, 소인은 근래 행방을 몰랐던 양신에 관한 일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자는 지금 국상의 호위무사로 순무 병단에 들어 있습니다."
"그 자가 국상의 호위무사가 되었다?"
건무는 동화부인과 도해선의 말을 종합해보면서 떠오른 게 있었다.
"나도 이제야 생각나는 게 있다. 순무 병단을 전송할 때 남문에서 국상을 호위하던 자를 봤는데 그렇다면 그 자가 양신이 아닌가?"
"저하, 그 자의 용모를 말씀해 보시겠습니까?"
"신체가 건장한 호남아로 보였다. 그런데 내게 보내는 눈길이 섬뜩할 정도로 강했던 것도 생각난다. 그때 내게 무슨 적의를 품고 있지 않을까하는 의문이 들 정도였다. 그 자가 등에 진 장도가 범상치 않은 물건이란 생각을 했던 것도 기억이 난다."
"저하의 말씀을 듣고 보니 양신이 분명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국상은 어떻게 그 자를 호위무사로 삼게 되었을까?"
"서로 아는 사이가 아니면 호위무사가 될 순 없지 않겠습니까?"
"그보다 더 이상한 점이 있다."
"저하, 어떤 점 때문에 그러십니까?"
"국상은 그 자가 철장의 양자인 것을 알고 있을 것이었다. 그렇다면 마땅히 내게 소개를 시켰어야 할 게 아닌가? 그런데 왜 그러질 않지?"
"소인도 그게 의문입니다."
건무가 의문에 잠기는데 도해선이 다른 말을 꺼냈다.
"저하, 수국 첩자에 관한 일부터 말씀을 드려야 하겠습니다."
"수국 첩자들에 관한 일이라니?"
"소인은 그동안에 수국 첩자 8명을 혼자서 제압한 자가 누군지 몰라서 매우 궁금하게 여겼습니다. 그런데 그게 바로 양신임을 알았습니다."
건무는 그 말을 듣고 고덕이 다갈촌을 다녀와서 했던 말이 떠올랐다.
철장에겐 검술 실력이 매우 뛰어난 양자가 있었다. 그래서 왕실 검사단에 넣을 것을 권고했더니 철장은 물론 본인이 단호하게 거절해서 왕실에 대한 무슨 불만이 있는 게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는 말이었다.
"도해선, 국상과 양신이 어떤 관계인지 조사부터 해봐라."
"저하, 그렇지 않아도 벌써 부하들은 그 쪽으로 보냈습니다."
"부하들을 어디로 보냈단 말인가?"
"순무 병단의 마지막 종착지인 추이성입니다."
"무슨 일로 보낸단 말인가?"
"소인은 양신을 없애버릴 생각입니다."
"양신을 없애겠다고? 이만 물러가라."
건무의 아리송한 대꾸에 도해선은 좀 미진한 듯 입을 떼었다.
"합하, 혹시 제게 더 하실 말씀은 없으십니까?"
"없다."
도해선은 건무의 눈치를 보며 일단 물러갔다. 그런데 사흘 뒤 보고할 게 있다며 심각한 표정으로 다시금 건무 앞에 나타났다.
"도해선, 중요한 보고를 할게 있다니 무엇인가?"
"수국과 화친을 맺지 못한 게 도리어 다행이었습니다."
"도리어 다행이었다니 그건 또 무슨 소린가?"
"저하, 수국이 화친으로 요구할 조건이 뭔지 아시옵니까?"
"수국이 어떤 요구를 할 것이란 말인가?"
"폐하의 입조입니다."
"그건 이미 알려진 일이 아닌가?"
"그게 받아들여지지 않을 경우 그 다음은 저하의 입조입니다."
"도해선, 그런 걸 어떻게 알게 되었단 말인가?"
"등주에서 사람이 왔습니다."
도해선의 말에 건무는 눈빛이 변했다.
"역계수가 왔단 말인가?"
"예."
역계수(易桂樹)는 수국의 등주(登州) 수군(水軍) 제독(提督)인 내호아의 심복이었다. 건무와 내호아는 은밀히 내통하고 사이였다. 내호아는 뇌물을 받고 수국의 내부 사정을 팔아넘겼다.
"도해선, 그 자가 이번에 무슨 일로 왔는가?"
"저하, 수국 첩자들 때문입니다."
도해선은 대답하고 서찰을 한 통을 내놓았다. 건무는 그걸 읽었다.
서찰의 내용은 수국의 침공이 한 달 이내로 이뤄질 것이다. 전쟁이 나도 서로간의 소통은 계속 이어지길 바란다. 그걸 알리고 체포당한 태산팔협(泰山八俠)을 석방해달라고 청했다.
내호아는 본래 진(陣)나라 신하였다. 축재욕(蓄財慾)이 강해 수국의 뇌물을 먹고 조국의 멸망에 일조한 인물이었다. 양광은 그 공로를 인정해서 등주 수군 제독에 앉혔다. 그러나 다른 대신들은 반역자로 사갈시했다. 양광도 자신을 또 배반할지 몰라 신임하지 않았다. 그 때문에 불만과 불안이 큰 내호아는 고구려로 망명을 타진한 게 건무와 밀통의 시작이었다. 그러나 많은 재물을 두고 떠날 수가 없어 끝내 실행에 옮기진 쉽지가 않았다. 그 대신 건무로부터 뇌물을 받고 수국의 내부 정보를 넘겨주면서 밀통을 계속 이어 왔다.
"내호아가 내게 겨우 이런 요구나 한단 말인가? 이 자와 더 이상 관계를 유지해선 더 얻을 소득이 없겠다."
"저하, 무슨 말씀이십니까? 계속 관계를 유지하셔야 합니다."
"이젠 뭘 더 얻을 게 없지 않은가?"
"내호아는 언제라도 양광을 배반할 여지가 있습니다. 더욱이 재물에 눈이 어두운 자라 이용가치가 큰 것을 왜 버린다는 말씀입니까?"
건무가 수긍하는 빛을 보이자 도해선은 말을 이었다.
"저하, 내호아가 요구하는 태산팔협을 석방시키십시오."
"태산팔협이란 수국 첩자들을 말하는 것인가?"
"그렇습니다."
도해선은 대답하고 역계수가 한 말을 전했다.
태산팔협은 무예가 뛰어났고 내호아와 동향이었다. 내호아는 태산팔협을 황제의 호위무사단에 편입을 시켜 자신을 보호하는 데 이용할 생각이었다. 그러자면 공적이 필요해 고구려의 소금배를 탈취할 임무를 부여해서 한만에 투입시켰다가 체포를 당한 것이었다.
"내호아가 태산팔협이란 자들의 구명을 부탁했다?"
"저하, 내호아는 황제의 내침을 당하게 될 경우 아국으로 투항을 할 수밖에 없는 자입니다. 앞으로 이용할 가치가 매우 높습니다."
"이용할 가치가 높다?"
내호아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으면 밀통은 끝난다. 아직은 아쉬움이 크고 내호아가 반발하면 이로울 게 없다고 판단인데 도해선이 말했다.
"저하, 소인은 태산팔협을 석방시켜 부여할 임무도 있습니다."
"무슨 임무를 부여하겠단 말인가?"
"태산팔협의 손을 빌려 양신을 처치하렵니다."
"도해선, 그게 가능한 일일까?"
"태산팔협 중 두 명은 죽고 여섯이 감옥에 갇혔습니다."
"나도 그렇게 알고 있다."
"태산팔협은 풀려나도 이대론 못 돌아가겠다고 한답니다."
"이대로는 못 돌아가면 뭘 어찌 하겠다는 말인가?"
"양신에게 복수를 하지 않곤 못 돌아가겠다는 것입니다."
"여덟 명이 못 당했던 상대를 여섯 명이 감당할 수가 있을까?"
"태산팔협은 무술이 달려서 당한 게 아니었습니다."
"무술이 달려서 당한 게 아니라니?"
"태산팔협은 숫자는 많았지만 무기가 변변치 못했습니다."
"무기가 변변치 못했다는 건 무슨 말인가?"
"첩자들은 남의 눈을 피해야 하므로 몸에 암기나 단병기를 지니고 다닙니다. 단병기로 장도를 상대하는 건 여간 불리하지 않기 때문에 당했던 것입니다. 소인은 태산팔협이 장도를 지니게 하기 위함입니다."
"태산팔협과 양신 간의 대결을 어떻게 시킨단 말인가?"
"저하, 순무 병단이 곧 돌아올 때가 되었습니다."
"그렇군. 그러면 장안성에서 그 일이 벌어지게 만들 것인가?"
"아닙니다. 양신이 장안성에 발을 들여놓기 전에 해야 합니다."
건무는 사악함이 흐르는 선도해의 얼굴을 보며 대꾸했다.
"도해선, 태산팔협을 석방시킨 뒤에 일어날 일들은 전부 네 책임이 될 것이다. 일체 잡음이 생기지 않게 해야 함을 명심하라."
건무의 허락이 떨어지자 도해선은 또 다른 말을 꺼냈다.
"저하, 장도를 여섯 자루만 내주셨으면 합니다."
"장도는 네가 마련할 수도 있지 않는가?"
"저하, 특별한 장도가 필요합니다."
"특별한 장도라니?"
"여선 부인이 입궁할 때 다갈촌에서 바친 예물 장도입니다."
건무는 의아한 눈길을 던지며 반문했다.
"무엇 때문에 예물 장도가 필요하단 말인가?"
"이번 일은 철장님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너는 이 일에 철장까지 끌어들일 생각인가?"
"양신을 유인하려면 철장의 협력이 절대적이라 어쩔 수가 없습니다."
"도해선, 이제 보니 너는 어리석기가 짝이 없는 자로다!"
"저하, 제가 왜 어리석다고 하십니까?"
"철장이 양신을 죽이는 일에 동참할 것으로 보는가?"
"철장님이 모르시게 하면 됩니다."
"어떻게 말인가?"
"여선부인은 곧 출산을 하시게 됩니다. 그 일은 철장님도 어떤 의문을 갖으실 만합니다. 그 점을 이용해서 책임을 느끼게 하렵니다."
"철장이 그 일에 대한 어떤 책임을 묻겠다는 말인가?"
"저하, 책임을 묻는다기보다 그 일을 상기시키면 됩니다."
앞으로 여선이 출산하면 임신 기간을 놓고 누구의 씨인가에 대한 의문을 갖게 되었다. 그러므로 딸을 제대로 간수하지 못한 철장에겐 책임이 따르게 됨으로 그걸 이용해 보자는 속셈이었다.
"너의 구체적인 생각을 한번 들어보자."
"저하, 이번 계획은 양신에게 죄 값을 치르게 할 목적뿐입니다."
"양신에게 죄 값을 치르게 할 목적이라니?"
"양신은 무단으로 다갈촌을 떠났고 조정의 허락없이 적국 땅에 들어갔습니다. 그 일만으로도 응분의 처벌을 받아야 마땅한데 백제인으로 속이고 순무 병단에 들어갔습니다. 그 죄는 용서받을 수가 없습니다."
"그게 큰 죄가 되겠는가?"
"계획을 성공시키자면 무슨 허물이든 씌울 수밖에 없습니다."
"허물을 씌운다?"
건무가 고개를 끄덕이자 도해선은 또 다른 말을 꺼냈다.
"먼저 철장께서 양신을 파문시키게 만들어야 합니다."
"양신을 파문시킨다?"
"그 일을 위해 철장께 보낼 서찰을 한 통 써 주십시오."
"어떤 내용의 서찰을 쓰라는 말인가?"
"철장님은 여선부인의 출산에 대한 응분의 책임을 지셔야 합니다. 서찰에서 그 점을 강조하시고 태산팔협을 돕게 만들어야 합니다."
"철장이 태산팔협을 돕게 만든다?"
"저하, 태산팔협이 예물 장도를 지니게 하자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그러면 철장께선 태산팔협에 어떤 의심을 품지 않게 됩니다."
"예물 장도를 내 주마."
도해선은 건무의 허락을 받고 물러갔다. 그리고 이튿날 밤 건무의 서찰과 예물 장도를 가지고 구조리와 함께 옥으로 갔다. 거기서 태산팔협에게 장도를 한 자루씩 내준 뒤 말을 타게 했다.
태산팔협의 우두머리인 옹장(翁章)은 도해선에게 물었다.
"선도해 나으리, 양신이란 자는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여기에 없다. 열흘 안으로 추이성에 도착하게 되었다."
"지금 그리로 가는 것입니까?"
"아니다. 일단 다갈촌으로 가서 철장을 만나게 되었다. 앞으로 거기서 머물며 구조리 선인의 지시를 잘 따르며 움직이도록 하라."
"도해선 나으리, 우리가 앞으로 할 일을 말씀해 주십시오."
옹장의 요구에 선도해는 자신의 계획을 밝혔다.
"그대들은 지금부터 옥에서 풀려나게 되다. 다갈촌으로 가서 머물면서 충분한 휴식을 취해 원기를 회복시킨 뒤 양신과 맞붙게 된다."
"저희들은 나리의 큰 배려에 감사를 드립니다."
옹장이 머리를 숙여보이자 도해선은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나에 대한 보답은 양신을 처치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도해선은 말하고 세통의 서찰을 넘겨주었다.
"서찰에 대한 설명을 하겠다. 금실을 두른 봉서는 내호아 제독에게 보내는 것이고 나머지 두 통은 다갈촌 철장에게 전할 것이다."
"예, 나리의 명령을 따르겠습니다."
도해선이 내준 서찰을 받아든 옹장은 품속에 간직했다.
"다갈촌에선 철장님과 야장들의 의심을 사지 않도록 매사에 각별한 주의를 해야 한다. 꼭 성공하길 바란다."
"우린 기필코 성공하겠습니다."
옹장은 흐릿한 미소를 지으며 대꾸했다.
일행이 북문에 이르자 파수병이 문을 열어주었다. 구조리는 태산팔협을 데리고 밖으로 나가서 이내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다갈촌의 야장들은 눈코 뜰 새가 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야 했다. 장안성에서 장도 5만 자루와 장창 10만 본을 명년 초까지 납품을 마칠 것을 명령했기 때문이다. 그로인해 야장들은 밤늦게까지 횃불을 밝히고 무기 제작에 매달려야 만했었다.
날씨가 너무도 추워서 숫돌을 돌리는 물이 얼어 작업을 하는데 무진 애를 먹어야 했었다. 야장들은 너무도 지치고 힘이 들고 침체된 분위기 속에 일을 하자니 여간 더디지가 않았다.
여준은 양신이 떠난 뒤로 술만 마시며 두문불출로 지내서 매우 건강이 나빠졌다. 그러나 을지문덕의 서찰을 받고 양신이 순무 병단에 들은 걸 알게 되자 조금씩 원기를 회복시켜 나갔다.
야장들은 너무도 힘이 들어 전에 없던 불평을 쏟아냈다.
"손이 얼어붙어 그대로 불속에 쑤셔 박고 싶군."
"이런 겨울을 나면 불알이 탱탱 얼어서 장가도 못 가겠다."
"야장의 팔자를 부럽다고 한 것은 옛날 얘기지. 나는 이 지긋지긋한 일을 면할 수만 있다면 아무 일이나 다 하겠어."
"평생을 망치나 휘두르다 죽는 신세이니 농투성이만도 못해."
"농투성이는 전쟁터에 나가 공이라도 세우면 출세라도 할 수가 있지. 야장들은 그마저도 허락이 되지 않는 신세니 무슨 희망이 있겠나?"
옛날엔 야장을 특별한 신분으로 취급되어 사람들의 부러움을 샀으나 지금은 달라졌다. 만만치 않을 무예를 지닌 자들이 많지만 써먹을 데가 없고 출세의 욕망은 꿈도 못 꾸었다. 때문에 전쟁을 앞두고 젊은 축에선 여간만 불평과 불만을 터뜨리지 않았다.
여준은 초췌해진 몸에 지팡이를 의지하고 오래간 만에 야장방에 나타났다. 야장들은 뛰쳐나가서 인사를 했다.
"철장님, 추운 날씨에 왜 나오셨습니까?"
석해가 입을 열자 여준은 숨이 찬 음성으로 대답했다.
"추운 날씨에 고생들이 심한데 혼자만 편히 있기가 미안하다."
"철장님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저희들이 잘 해내겠습니다."
석해의 대답에 모두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무기 납품을 제 때 하려면 시간이 많이 부족하지 않겠는가? 어렵더라도 거친 작업으로 우리 야장방의 명예를 깎는 일은 없어야 하겠다."
"철장님, 그런 염려는 놓으시고 그만 들어가십시오."
여준은 씁쓸하게 웃으며 물었다.
"완성된 무기의 수량은 얼마나 되는가?"
"장도 4만 자루는 이미 납품을 마쳤습니다. 나머지 1만 자루도 거의 다 만들어졌고 다음에 할 일은 창날 제작입니다."
"전부 제작을 마치려면 얼마나 더 걸릴까?"
"한 달 안으로 끝을 내야 합니다."
"모두들 수고를 해 주기 바란다."
여준은 발길을 돌리다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몸을 세웠다.
"이번에 용원성 성주가 요청한 것을 두고 다시 생각을 해보았다."
야장들은 여준이 운을 떼자 모두가 손들을 놓았다. 특히 젊은 층은 약간 긴장하는 표정들이 되었다. 용원성에서 다갈무문의 문생들을 검술 교관으로 차출하겠다는 통보를 해왔기 때문이다.
"전 같으면 어림없는 요구로 생각될 일이나 지금은 사태가 급박해진 만큼 나로서는 특별히 응하기로 결정을 내렸다."
여준은 그런 말을 던지듯 남기고 발길을 돌려서 갔다.
젊은 축들의 얼굴엔 슬근슬근 미소가 번지다가 철장이 모퉁이를 돌아가 보이질 않게 되자 일제히 환호성을 질렀다. 모두는 철장의 결정에 감사하며 기뻐서 어쩔 줄을 몰라했다.
여준은 다갈무문의 문생들이 군문에 들어가는 것을 전에는 허락하지 않았다. 그런데 양신이 군문에 든 것을 알게 되면서 생각을 바꾸었다. 형평성을 고려해서라도 전통을 깨고 문생들 스스로가 결정을 내릴 수 있게 허락을 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와, 이런 신나는 소식이 세상에 또 있을까?"
"나도 이젠 군문에 들어갈 기회를 잡게 되었다."
젊은 축은 야장으로써 고루한 자긍심은 없었다. 그런데 하고 싶은 일을 못하는 불만을 일시에 날리게 되었다. 저마다 군문에 들어가서 입신출세를 하겠다는 생각에 흥분상태가 되었다.
고구려 남정네들은 지금 군사훈련을 받고 있었다. 그러나 망치를 든 야장들은 야장방에서 헤어나질 못했다. 뿐더러 전쟁이 터지면 산성(山城)으로 들어가서 파손된 무기 수리에 매달리게 되었다.
야장들은 이제 그런 처지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뛰어난 무예 기량을 지닌 자들이 많지만 그걸 제대로 써먹을 데가 없었는데 이젠 군문에 들 수가 있게 되고 능력에 따라선 군관이 될 수가 있었다. 또 전투에서 큰 군공을 세우게 되면 출세의 길도 열리게 되었다.
특히 군문으로 빠질 기회를 잡게 된 젊은 축은 희망에 부풀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여준도 젊은 축들이 쾌재를 부를 분위기를 잘 알아서 각자 능력에 따라 출세를 하길 바라는 마음이었다.
그날 밤에 다갈촌 젊이들은 석해의 집으로 모여들었다.
검술 실력이 가장 뛰어난 석해와 장대가 모임을 주도했다.
젊은 축은 대부분이 군문에 들겠다는 분위기지만 우선 검술 실력이 뛰어난 20여 명을 먼저 선발해서 용원성으로 보내기로 하고 나머지는 무기 납품을 끝내면 움직이기로 결정을 했다.
섣달그믐께로 접어들며서 추위는 더욱 기승을 부렸다.
며칠 뒤 무기 납품을 전량 끝냈다. 석해와 장대를 위시한 20여 명은 먼저 용원성으로 출발했다. 중장년층은 모처럼 며칠간을 푹 쉬기로 했다. 그러면서 또 다른 전쟁 대비를 해야만 했다. 비상식량인 육포(肉脯)를 만들기 위해 들짐승과 야생조류 사냥에 나서기로 했다. 철장의 집 사랑채엔 덫을 만들고 활과 화살을 손질하는 일터가 꾸며졌다.
사랑방은 잡담으로 왁자지껄했다. 그 중에서 석해 애비의 목소리가 가장 컸다. 그는 아들의 검술실력이 가장 뛰어나서 늘 자랑을 했다.
"우리 석해는 군관으로 발탁될 것일세."
장대 애비가 물었다.
"어디서 석해를 군관으로 발탁을 한단 말인가?"
"석해는 장안성 수비군에 들게 되었네."
"대체 장안성 수비군에 어떻게 들어 갈 수가 있나?"
"왕실 무사단의 도해선님이 석해를 뽑겠다고 전갈을 보내오셨네."
"그런데 석해는 왜 용원성으로 간단 말인가?"
장대 애비는 큰 관심을 갖고 꼬치꼬치 묻자 석해 애비가 대답했다.
"나도 왜 용원성으로 가는지는 모르겠네."
"우리 장대도 용원성 성주님의 눈에라도 들었으면 좋겠는데."
여준은 석해가 도해선과 어떻게 관계를 맺게 되었는지가 의문이었다. 자신은 양신이 군문에 든 걸 알고도 말을 하지 않았는데 그걸 석해가 퍼뜨려서 모두가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여러 사람들은 저마다 한 마디씩 했다.
"검술 실력이 없어 군관은 못되더라도 전쟁터에서 사나이로 목숨을 내놓고 사우면 영광이지. 그러나 출세를 하겠다며 쥐나 개나 다 뛰쳐나가면 앞으로 야장방은 누가 지키고 일을 하게 될지 모르겠군!"
"전쟁터가 어떤 곳인지 몰라서 그러나 한번 겪어보라지."
"하늘도 무심하시지. 양광처럼 음탕하고 포악한 놈을 황제를 만들어 놓다니? 그런 놈 때문에 수나라 백성들은 오죽이나 고생들이 심할까?"
"중원 땅의 백성들은 그동안 노역에 끌려나가 죽은 자가 수십만이 넘는다는 소문이 났지 않은가? 양광은 천벌을 받아 마땅할 자야!"
장대 애비가 여준에게 물었다.
"철장님, 양광은 궁궐을 치장하는데 너무 많은 재물을 썼답니다. 그걸 벌충하려고 고구려의 금을 노리고 침공을 한다는 말도 들립니다."
여준은 양광의 사치벽(奢侈癖)을 들려주었다.
양광은 전국의 기암괴석, 기화요초, 진조기수(珍鳥奇獸)를 전부 끌어 모아 궁궐을 치장해서 세상에 없는 볼거리를 만들었다. 때문에 궁궐을 구경한 자들은 사팔뜨기가 된다는 우수개소리가 생길 정도였다.
"그렇다 보니 부역에 끌려가 죽은 백성들이 수십만 명이 넘는다지."
"그런 참사를 빚은 양광을 그대로 살려두시니 하늘도 무심하셔."
"우리가 고구려에 태어난 것을 큰 복으로 생각해야 되네."
"수나라에선 오죽하면 팔다리가 없는 자가 복이라고 한다네."
"철장님, 팔다리가 없는 걸 왜 복이라고 합니까?"
"팔다리가 없으면 노역에 끌려 나가지 않으니 목숨을 잃을 염려가 없지 않는가? 그래서 스스로 팔다리를 잘라낸 자들도 있다네."
"세상에 그럴 수가 다 있담?"
모두는 끔찍한 소리를 듣고 고개들을 설레설레 저었다.
며칠 뒤 다갈촌엔 구조리가 태산팔협을 끌고 나타났다. 여준은 건무가 보낸 서신을 읽고 안색이 어둡게 변했다. 서신엔 여선이 곧 출산을 하게 되었음을 알리고 덧붙인 말이 있었다. 양신이 여선을 범해 아이를 배게 만들었고 궁궐 안에서 곧 아이를 낳게 되어 큰 문제가 생겼다. 때문에 철장은 양신을 즉시 파문시키라는 명령이 담겨져 있었다.
여준은 너무나 큰 충격을 받고 말았다. 그런데다 구조리가 끌고 온 사내들은 한족 말을 쓰는데다 예물 장도를 하나씩 지니고 있어 여간 이상한 일로 여기지 않을 수가 없었다.
"구조리, 내가 보기에 저들은 전부 한족들일세. 그런데 한족들이 어떻게 예물 장도를 하나씩 지닐 수가 있단 말인가?"
여준의 질문에 구조리는 천연덕스럽게 대꾸했다.
"철장님, 저들은 한족이지만 왕제 저하의 신임을 받고 있습니다."
"저하께선 무슨 일로 한족들을 신임하신단 말인가?"
"철장님, 지금은 나라가 풍전등화의 위기를 맞고 있습니다. 비록 한족이나 고구려를 위해서 일을 하고 있는 자들입니다. 저하께선 이번에 저들에게 특수한 임무를 부여하셨습니다."
"저하께서 무슨 특수한 임무를 부여하셨단 말인가?"
"저는 그 점에 대해선 밝힐 수가 없습니다."
"저들은 여기서 무슨 일을 하려고 왔는가?"
"철장님은 그런 일을 알려고 하시기보다 저하께서 내리신 명을 받들어 이행을 하시는 게 더 중요한 일입니다."
"내가 무슨 일을 이행을 해야 한단 말인가?"
"양신을 즉시 파문하시는 일입니다."
여준은 내심 그 명령을 받들고 싶지가 않았다.
"양신 야좌의 파문은 내가 독단으로 결정지을 수가 없는 일이다. 야장방 전체의 의견을 듣고 상의할 문제라서 시간이 좀 걸릴 것이다."
"철장님, 빨리 결정을 내리셔야 합니다. 양신은 곧 추이성에 당도하게 됩니다. 철장님은 추이성으로 사람을 보내 양신을 이리로 부른 뒤 파문 통고를 하셔야 합니다."
"그런 일을 하자면 내가 직접 추이성으로 가서 양신을 데려와야 한다. 그러나 나는 몸이 좋지 않아서 움직일 수가 없다."
"철장님이 왜 거길 가신다는 말씀입니까? 서찰을 써 주십시오."
구조리가 강요조로 말을 했지만 여준은 고개만 저었다.
"나는 생각이 다르다."
"생각이 다르시다니 무슨 말씀입니까?"
"나는 먼저 장안성으로 가서 저하를 뵙고 직접 말씀을 들어봐야 하겠다. 그런 뒤에 무슨 결정을 내려도 내릴 일로 생각한다."
여준의 대꾸에 구조리는 크게 반발했다.
"철장님, 저하의 서찰을 받고 그런 말씀을 하실 수가 있습니까?"
"나는 의문이 드는 일이 있으므로 그럴 수밖에 없다."
"이건 저하의 지엄하신 명령입니다. 저는 철장님의 말씀을 저하의 명을 거역하시겠다는 말씀과 다름이 없다는 생각입니다."
"구조리, 더 이상 말하지 말라. 나는 장안성으로 떠나겠다."
"무슨 일로 장안성엘 가시겠다는 말씀입니까?"
"나는 저하께 용서를 빌고 노여움을 푸시도록 간청을 하려고 한다."
"철장님은 아직 사태 파악을 못하셔서 그런 말씀을 하시는 겁니다. 장안성으로 가시면 일을 더욱 악화시키게 될 뿐입니다."
"구조리, 나는 그대와 더 이상 말을 나누고 싶지가 않다."
여준은 단호하게 대꾸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은 양신이 죽음을 당하게 되었음을 간파했기 때문이었다. 반면에 구조리 역시 안 되겠단 생각이 들어 그만 입을 다물었다.
순무 병단이 곧 추이성에 도착하게 되었다. 구조리는 다갈촌에서 더 머물 수가 없게 되었다. 이젠 독단적으로라도 일을 처리할 수밖에 없다는 판단에 태산팔협을 끌고 북쪽으로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