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유목민(遊牧民)
순무 병단은 장안성을 떠난 지 벌써 한 달째로 접어들었다.
요하의 지류들을 수십 번 건너는 행군이 계속되었지만 강바닥이 거의 말라붙어 마차들도 쉽게 건널 수가 있었다. 마침내 요하 중류에 물줄기를 댄 혁이소하(赫爾蘇河)에 이르렀다.
병단은 혁이소하를 건너고 사흘간을 더 북상해 갔다. 그런 끝에 탁이하(晫爾河)에 당도했다. 거기서 서쪽으로 방향을 틀자 산림이 욱어진 산맥이 나타나고 주변 환경이 확 달라졌다.
사람이나 말들이 다 지치긴 마찬가지나 아늑함 속에서 여유가 좀 생긴 긴 듯 느리게 움직였다. 숲다운 숲을 만나게 되자 푸근함을 느끼면서 는 군관들은 갑자기 대화들이 많아졌다.
"어휴, 수림이 우거진 데를 만나게 되니 좀 살 것 같군!"
양신이 입을 열자 연개소문도 생기가 도는 음성으로 받았다.
"북으로 많이 올라왔건만 숲을 보니 나는 추위가 한결 덜한 것 같소."
을지문덕은 어디쯤서 행군 정지 명령을 내렸다. 군관들은 말에서 내려 기지개를 켰다. 마치 오래간만에 고향 땅을 밟기라도 한 듯 표정들이 한결 밝아지고 활기찬 분위기가 되었다.
군관들은 천막을 치고 저녁 식사를 지을 땔감을 주워 모았다. 그리고 진지 주변에 모닥불을 지폈다. 침엽수림 속엔 수십 마리씩 떼를 지은 늑대들이 들끓어서 대비를 해야만 했다.
무리를 지은 늑대들은 유목민의 가축도 마구 잡아먹었다. 때문에 밤에 군마를 습격하려고 올지도 몰랐다. 저녁 식사 후 말들을 야영지의 한 가운데로 몰아넣고 대비로 들어갔다.
어둠이 깔리면서 벌써 늑대들의 울음소리가 멀리서 일어났다. 몰려들 늑대들에 대비를 하고자 보초를 두 배로 늘렸다. 군관들은 전체가 밤새도록 한시도 방심할 수가 없게 되었다.
늑대 울음소리는 여기저기서 늘어나고 점점 가까워졌다. 보초들은 긴장하며 활시위에 화살을 걸고 사방을 지켜보았다. 그러나 고사목을 때우는 목닥불도 거의 사그라뜨리고 어둠만 더욱 짙어졌다.
늑대들이 진지 주변으로 바짝 다가든 듯 울음소리가 더욱 극성스러워졌다. 그러나 늑대들도 두려움을 느끼는지 숨어들진 못했다. 군관들은 새벽녘까지 그렇게 밤잠을 설쳐야 만했다.
먼동이 트고 무사히 아침을 맞았다. 어수선하고 불편한 밤을 지낸 군관들은 아침을 일찍 지어먹고 서둘러 출발했다. 정오께부턴 서쪽으로 휘는 황수(潢水)를 거슬러 올라갔다.
얼마쯤 가자 전방의 한군데서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눈이 밝은 양신은 깃발들이 여러 개 꽂힌 곳을 발견하고 손으로 가리켰다.
"시동 선인, 저기 군영지 같은 데가 보이는군?"
을지문덕은 실눈을 뜨고 바라보는 연개소문에게 일렀다.
"돌궐군의 깃발들이다. 잘 봐 둬라."
연개소문은 이상한 듯 물었다.
"합하, 여기가 벌써 돌궐 땅입니까?"
"동돌궐과 국경은 서쪽으로 한참을 더 나가야 된다."
"그러면 돌궐 군이 왜 우리 판도에 들어온단 말씀입니까?"
"내가 불렀기 때문에 왔다. 비밀을 고려한 조치였다."
을지문덕은 동돌궐의 힐리 공자와 미리 접촉을 해서 동돌궐의 동부 족장(族長) 30여 명과 함께 온 것이었다. 그런 만남은 비밀에 부쳐야만 해서 만나는 장소를 고구려 경내로 정했다.
양신은 순무를 시작하면서부터 을지문덕을 여러 면으로 다시 보고 있었다. 유목민의 협력을 이끌어내는 외교적 수완에 큰 감동과 흥미를 느끼면서 점점 질문이 늘어나게 되었다.
"합하, 적대로 돌아선 동돌궐 유력자를 어떻게 오게 만드셨습니까?"
"양국은 교역이 끊겨 매우 어려워진 사정이 만남을 성사시킨 것이다."
"고구려는 동돌궐에 철정을 공급 외에 또 다른 뭐가 있습니까?"
"고구려는 철정만이 아니고 소금, 피륙, 곡식도 넘긴다."
"합하, 피륙이란 게 뭡니까?"
"피륙은 옷을 짓는 천이다. 옷을 만드는 베나 비단 등이 주를 이룬다. 비단은 중원에서 많이 생산을 하지만 우린 백제, 신라, 왜국 등에서 구입해서 다시 유목민에게 넘기는 교역을 한다."
"동돌궐은 반대로 우리에게 무슨 물자를 공급할게 있습니까?"
"말린 고기와 각종 유제품(乳製品)이 주를 이룬다. 교역은 양국이 공생을 할 수가 있는 근간이 될 만큼 매우 중요해서 다 같이 힘을 쓴다."
"수국은 양국의 교역을 어떻게 방해를 할 수가 있었습니까?"
을지문덕은 양신의 질문에 다음과 같은 설명을 했다.
수국을 세운 문제(文帝)는 국초부터 서역과 교역을 매우 중요시해 독점을 하려고 들었다. 그러나 고구려, 동돌궐, 서돌궐로 연결되는 서역과의 교역은 경쟁이 매우 심했다. 때문에 방해가 되는 고구려와 동돌궐을 견제하려고 들었다. 그러나 그게 쉽지가 않을 일이라 동돌궐을 상대로 혼인정책을 썼다. 그렇게 해서 문제의 4녀인 의성공주(義成公主)를 계민 가한의 황후(皇后)로 만들어 놓았다.
돌궐족은 황후를 가하돈(可賀敦)으로 부르는데 가한 다음의 위치로 권위가 높았다. 유목민의 혼습은 모계사회 유습에 따라 남편이 죽은 여인은 형제들과 다시 혼인하는 취수혼(娶嫂婚)이 있고, 심지어는 남편의 아들이라고 해도 자신이 낳지 않았으면 결혼을 했다.
그런 혼속에 따라 의성공주는 계민 가한이 죽자 장남인 시피(始畢)의 황후가 되었다. 두 번째 가하돈이 된 그녀의 권한이 더욱 막강해지자 양광은 가하돈을 이용하려고 비단 2백만필(百萬疋)을 보냈다.
가하돈은 지지를 얻고자 비단을 신하와 족장들에게 1천 필씩 나눠줬다. 그러자 신하와 족장들은 가한보다 하후돈에게 충성 경쟁을 벌일 정도가 되고 그 결과 양광은 시피 가한을 더욱 주무를 수가 있게 되었다.
시피 가한은 양광의 사주를 받고 끝내 고구려와 교역을 끊었다. 그 결과 고구려와 동돌궐은 다 같이 재정적인 악화를 초래하게 되었다. 때문에 고구려는 철정의 새 공급처를 찾아야만 했고 동돌궐도 내부적으로 가한에 대한 불만이 커져갔다. 특히 동부(東部) 지역은 고구려의 군마(軍馬)를 위탁 사육해 주는 대신 철정을 공급받았다. 그리고 철제품을 대륙 북방에 흩어져 사는 여러 유목민 부족에게 공급해 막대한 이익을 취했다. 그러나 그게 끊기게 되자 광범위한 타격을 받고 애로가 너무도 컸다. 그럼에도 시피 가한은 족장들에게 고구려를 침공할 수국을 지원할 병력을 내놓을 것을 명령해 여간만 큰 불만과 반발을 사지 않았다.
을지문덕은 그런 사정을 이용해서 시피 가한의 이복동생인 힐리와 서신으로 접촉하며 꾸준히 설득한 결과 오늘의 만남을 성사되었다.
"힐리 공자는 어떻게 동부 족장들과 함께 움직일 수가 있었을까요?"
"힐리 공자의 근거지는 동부이다. 고구려와 교역이 끊기면 가장 타격을 많이 받는 쪽도 동부의 족장들이다. 그동안에 나는 불만이 많이 족장들을 움직이게 만들려고 꾸준히 설득을 해서 이런 성과를 거두었다."
그때 몇 기의 동돌궐 기병이 마중을 나왔다. 을지문덕은 병단을 멈추게 한 뒤 우태들과 함께 돌궐군 진영으로 들어갔다. 을지문덕은 양신과 연개소문에게 따라올 것을 지시했다.
장막 안에서 금빛 투구를 쓴 동돌궐 장수가 밖으로 나왔다.
"합하, 저 사람은 누굽니까?"
연개소문이 묻자 을지문덕은 나직이 대꾸했다.
"바로 시피 칸의 동생인 힐리 공자다."
을지문덕은 성큼성큼 다가드는 힐리에게 양 팔을 쫙 펴서 맞았다. 두 사람은 만면에 웃음을 지으며 다정하게 서로를 포옹했다. 힐리는 정중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고구려 국상 합하, 순무를 하시기에 고생이 많으십니다."
힐리는 연장자인 을지문덕에게 깍듯이 존대를 붙였다.
"힐리 공자님도 잘 지내셨겠지요?"
두 사람이 인사말을 나누는 가운데 우태와 족장들도 인사를 나누며 함께 장막 안으로 들어갔다. 양측은 각기 자리에 착석을 한 뒤 더욱 친숙함을 드러내는 태도를 보이며 금세 훈훈한 분위기가 되었다.
동돌궐 병사들은 양젖을 발효시킨 음료를 들고 들어왔다. 큰 사발에 딸아 돌렸다. 을지문덕 뒤에 서 있던 양신과 연개소문도 그걸 받았다. 양신은 사발에 입을 대려다 코릿한 냄새로 얼굴을 찡그렸다.
"형, 얼굴을 찡그리지 마오."
연개소문이 나직이 주의를 주자 양신이 물었다.
"무슨 냄새가 이리도 심한가?"
"발효된 양젖을 말린 말똥을 태워 끓인 음료요. 돌궐인은 코릿한 냄새가 진해야만 깊은 맛을 더 느낄 수가 있다며 좋아한다오."
"이건 거의 술이나 다름이 없군! 많이 마시면 취하겠는 걸."
양신과 연개소문은 그런 말을 나누었지만 을지문덕과 우태들은 아무렇지 않게 후륵후륵 마셨다. 양신은 신기한 듯 바라봤지만 실은 대접을 받고 친근감을 표시하려는 태도임을 몰랐다.
을지문덕이 먼저 입을 열었다.
"힐리 공자님과 여러 족장님들 먼 길을 오신 것에 깊은 감사를 드리오. 솔직히 말해 고구려는 지금 살아남기가 힘든 상황에 처하게 되었소. 동돌궐의 협조와 적극적인 후원이 어느 때보다 절실한데 이처럼 힐리 공자님과 족장님들이 만남에 응해주셔 여간 기쁘고 고무되지가 않소."
힐리가 그 말을 받아 입을 열었다.
"고구려 국상 합하와 상가님과 우태님들을 이렇게 만나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나는 아국의 동부 족장님들과 뜻을 함께 하며 여기에 오게 되었습니다. 양국은 전통적으로 우호관계가 돈독합니다만 고구려가 위기에 처한 마당에 서로가 도움을 찾는 것은 당연한 일로 생각합니다."
을지문덕은 그 말에 재삼 고개를 숙이고 감사를 표했다.
"동부 족장님들이 이렇게 호응을 해 주시니 희망이 솟습니다."
양국은 각기 자국어로 말을 했으나 신기하게도 서로는 상대방의 말을 알아들었다. 그러나 양신은 연개소문이 통역을 해주어야 겨우 무슨 말을 나누는지를 알 수가 있었다.
그때부터 양쪽은 대수 전에 관한 문제를 주요 과제로 삼고 우태들과 족장들 간에 협력할 방도를 놓고 의논을 했다. 족장들 중엔 회의적인 태도를 표명하는 사람도 있으나 그것도 걱정을 하는 마음에서였다.
"나는 큰 어려움에 처한 고구려를 남의 일처럼 여기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고구려에 대한 믿음이 크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번은 상황이 너무도 심각해 솔직히 말을 하자면 가망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을지문덕은 힐리의 말에 고개만 끄덕였다. 장차 수국이 끌고 올 병력이 너무도 많아 과연 고구려가 살아남을 수가 있을 지는 누구나 드는 의문이었다. 그러나 자신감에 찬 태도를 보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양광이 백만 대병을 끌고 온다고 한들 그걸 온전한 군대로 보진 않소. 하루아침에 끌어 모은 농투성이 병력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요."
그 말에 동돌궐 족장들 중에선 더러는 수긍하는 표정을 보였다.
"우리 돌궐 기병들이라면 일당백으로 패퇴시키고 남음이 있소."
한 족장이 그런 자부심을 펴자 모두는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동부 족장들은 앞으로 수국 편에서 참전하게 되었다. 그러나 고구려를 돕고자 전쟁터에서 수국 군을 상대로 싸울 수는 없는 일이었다. 더욱이 수국 병력이 농투성이 부대라고 해도 장창을 한 자루씩 지니고 있으므로 만만히만 볼 수도 없었다. 다만 수구 군의 무기를 탈취할 목적을 깔고라도 해야 할 움직임은 필요하다는 생각들이었다.
을지문덕도 그 점을 염두에 두고 입을 열었다.
"양광은 야심차게 대 전역을 벌이겠으나 성공을 거두긴 힘들 것이요. 전쟁은 도리어 내전에 휘말리게 만들고 자멸의 길을 걸을 수도 있소."
힐리는 의아한 표정으로 반문했다
"고구려 국상 합하, 수국이 왜 내전에 휘말릴 걸로 보십니까?"
"그 이유는 간단하오. 양광이 사상 유례가 없는 대병력을 동원하자면 그만큼의 무기도 필요하오. 대대적인 농투성이 병력들이 무기들을 손에 쥐게 되면 매우 위험하기 짝이 없는 일이요. 그것은 내란이 일어나게 만들 소지가 매우 커진다는 점을 지적하는 말이요."
을지문덕은 족장들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이자 설명을 더했다.
수국 황실의 선조는 원래 선비족(鮮卑族)이었다. 때문에 인재를 등용하는데 있어 한족이나 혈통을 챙기기보다 능력을 더 중요시했다. 때문에 새외족(塞外族)들 중에서 많은 발탁을 했기 때문에 한족보다 새외족 출신의 장수들이 더 많았다.
"그런데 문제가 등용한 장군들은 지금 수국 조정의 원로들이 되었소. 그들은 세월이 흐르면서 부패하고 탐욕만 심해져 거느린 장수들은 말할 것 없고 병사들까지 물이 들고 말았소. 때문에 전쟁터에선 적을 치는 전투보다 약탈로 사욕을 채우는 일에만 눈을 밝히는 무리에 지나지 않다고 봐도 과언이 아닐 것이라 나는 나름대로 전망하는 바가 있소."
을지문덕의 말에 힐리가 물었다.
"어떤 전망을 하신다는 말씀입니까?"
"그런 장수와 병력이 쳐들어온 들 요동 지역의 요새지나 성곽들엔 별 관심을 두지 않을 것으로 나는 보고 있소."
"그렇다면 수국 군은 어느 쪽에 관심을 둘 것으로 보십니까?"
"고구려의 국도인 장안성을 노리려고 들 것이요."
"그건 장안성에 약탈을 할 게 많기 때문이란 말씀이군요?"
"그렇소."
동돌궐 족장들은 그 말을 듣고 나름대로 생각하는 점이 있었다. 그렇다면야 이번 전쟁터에서 겪을 위험성은 그만큼 적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 점을 노리는 을지문덕은 또 다른 말을 꺼냈다.
"나는 이번 기회를 돌궐인이 재통합을 시도할 호기로 보고 있소."
"합하, 재통합을 할 호기로 본다면 어떻게 하란 말씀입니까?"
"돌궐인이 동서로 분열된 이유는 수국의 분열 획책에 말려들었기 때문임을 모를 사람은 없지 않겠소? 그렇다면 어찌해야 되겠소?"
을지문덕의 말에 힐리가 대답했다.
"그 결과로 동서돌궐은 다 같이 수국에 무릎을 꿇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수국에 의존하지 않으면 안 될 형편이 되고 말았습니다."
"양광은 그걸 성공시킨 다음 단계로 무슨 일을 할 걸로 보시오?"
힐리가 대답을 않자 을지문덕이 입을 열었다.
"양광의 다음 목표는 고구려와 동돌궐을 고사시킬 작전을 펴려고 할 것이요. 그걸 안다면 양국은 가만히 당하고만 있을 수는 없지 않소?"
"물론입니다. 돌궐인은 비록 동서로 나뉘었지만 통합은 결코 포기해선 안 될 일입니다. 우선 동돌궐은 서돌궐에 의해 서역과 교역이 차단된 형편입니다. 그건 서돌궐이 수국의 사주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렇소. 동돌궐은 그걸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될 절실한 처지에 처했소. 그 문제를 해결하는 길은 재통합에서 찾아야 하오. 재통합을 이루게 되면 돌궐인은 수국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대국이 될 것이요."
을지문덕의 말에 족장들은 모두가 동의하는 분위기가 되었다.
"세상에선 이런 말들을 하고 있소. 고구려가 중원을 통일한 대제국에 굽히질 않다가 망하게 되었다는 말이요. 그러나 나는 그게 잘 못된 생각임을 알게 만들어 놓을 것이요."
힐리는 호응하는 태도로 입을 열였다.
"합하, 저도 그렇게 될 것으로 굳게 믿겠습니다."
"양광은 주변국들에 복속을 하면 안전을 기할 수 있다며 위협과 회유를 했소. 그러나 거기에 넘어가 복속을 한 많은 나라들은 그 결과로 어떤 처지가 되었소? 노예 국으로 전락해 양광의 부림만 당할 뿐이요."
을지문덕이 들으란 듯한 말에 족장들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렇습니다. 양광은 협박과 회유로 동돌궐과 고구려의 동맹을 깨뜨려 놨습니다. 그로인해 수국은 서역 교역을 독차지 하게 되었고, 그 때문에 양국은 다 같이 존립마저 위태로운 처지가 되고 말았습니다."
힐리의 말에 족장들은 두 주먹을 불끈 쥐고 한 마디씩 했다.
"양국이 함께 살 길은 동맹을 다시 구축해 협력을 하는 길밖에 없소."
"무엇보다 양국은 교역을 회복시키지 않으면 다 같이 망하게 되오."
"그렇소, 양국이 연합하면 수국 군을 물리치지 못할 게 없소."
"이제라도 함께 힘을 합쳐서 싸울 방법을 토론합시다."
족장들이 너도 나도 공분하는 분위기 속에 힐리가 입을 열었다.
"족장님들 뜻이 그처럼 명확해진 이상 양국의 동맹은 회복되게 되었소. 이젠 양국이 힘을 합쳐서 수국을 무너뜨릴 일만 남았소."
그처럼 양국의 장수들은 수국에 대한 적개심으로 일심동체가 되는 분위기기가 되었다. 불과 몇 년 사이에 수국에 휘둘린 끝에 양국은 극도의 위축을 면치 못하고 멸망을 당하기에 이른 현실을 절감한 결과였다. 그러나 한편으로 생각을 하면 시피 칸의 입장도 있었다. 때문에 양쪽은 은밀히 서로를 돕는 길을 택할 수밖에 없다는 쪽으로 의견들을 모았다.
을지문덕은 그런 분위기 속에 힘을 입듯 다시금 감사를 표했다.
"힐리 공자님과 여러 족장님들에게 무어라 감사의 말씀을 드려야 좋을 지 모르겠소. 고구려는 동돌궐의 지원만 얻을 수만 있다면 수국과 당당히 맞서 꼭 패퇴시키고 말 것을 약속드리겠소."
"합하, 그런데 고구려엔 또 다른 문제가 있음을 걱정하게 됩니다."
"힐리 공자님, 어떤 문제를 걱정하시오?"
"동돌궐이 서돌궐의 견제를 받듯 고구려도 백제와 신라의 심한 견제를 받는 형편이 아닙니까? 서돌궐은 양광의 지원을 받아 동돌궐을 흡수하려는 야욕까지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런데 백제와 신라 또한 그런 야욕을 품지 말라는 법은 없지 않겠습니까?"
"수국은 지금 백제와 신라가 동조해서 고구려의 배후를 칠 것을 기대하고 사주를 하고 있소. 그러나 그게 큰 착각으로 끝날 것임을 나는 자신 있게 단언을 할 수가 있소."
"합하께선 어떻게 그런 자신감을 표하실 수가 있습니까?"
"힐리 공자의 우려는 일리가 있소. 그러나 한삼국의 경우는 다르오. 비록 그동안에 삼국 간엔 숱한 갈등들이 있었지만 외세 앞에선 똘똘 뭉치는 게 한삼국이의 속성이라 그렇소."
"합하께선 무슨 이유로 그렇다는 말씀입니까?"
"고구려는 한삼국 중 가장 강하오. 만약에 병합을 하려고 들었다면 벌써 행했을 일이요. 그러나 그러질 않았소. 왜냐하면 그게 전통이라면 전통이기 때문이요. 삼국 간엔 크고 작은 충돌을 수없이 벌여왔으나 서로 상대국을 멸망시키려고 든 적은 한 번도 없었소. 그 이유는 병립을 하는 게 도리어 모두에게 이롭고 안정을 기할 수가 있음을 잘 알기 때문이라는 말밖에 더 할 말은 없겠소."
"한삼국은 병립을 하는 게 모두에게 이로움이 있다는 말씀이군요?"
"이 세상엔 한삼국처럼 오래도록 국체를 유지해 온 나라들을 찾기도 흔치가 않겠소. 그럴 수가 있었던 이유는 바로 그런 전통에서 찾게 되오. 굳이 예를 든다면 화로는 한 발이나 두 발로는 서 있을 수가 없소. 때문에 세 발이나 네 발을 달아야만 하오. 그런데 네 발 화로는 자칫 통으로 쓰러질 수가 있소. 그라나 세발은 요지부동으로 결코 쓰러지는 법이 없소. 한삼국은 그와 같은 이치로 화로의 세 발처럼 병립을 하며 안정을 기할 수가 있다는 말이요. 그러므로 나는 돌궐인에게 이런 제안을 하고 싶소."
"합하, 어떤 제안을 하시렵니까?"
"만약에 동서돌궐의 합병이 어려우면 고구려와 더불어 삼국이 병립하는 형세가 되는 것이요. 그렇게 되면 고구려와 돌궐인의 안정성 보장은 물론 더욱 강화를 시켜 보다 큰 길로 나갈 수가 있을 것이요."
"그러자면 고구려가 멸망을 해선 안 된다는 말씀이군요?"
힐리의 말에 좌중은 웃음꽃을 피우고 분위기는 한결 밝아졌다.
"합하, 수국이 전역을 일으키면 동돌궐은 그 쪽으로 출병을 하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전쟁터에서 고구려와 적이 되어 싸우게 될 판인데 그게 큰 문제가 아닐 수가 없습니다."
"나는 그 문제의 해결은 다른 방법이 없다는 생각이요."
"합하, 어떻게 말씀입니까?"
"양국 군이 부딪히게 되면 싸우지 않고 곧장 피하는 수밖에 없소."
을지문덕의 대답에 모두는 고개를 주억거렸으나 힐리가 입을 열었다.
"합하, 그 짓을 자꾸 하면 수국 군이 눈치를 채지 않겠습니까?"
"전쟁터에서 서로 만나게 되면 정면충돌을 하는 척하는 태도만 요령껏 보일 수밖에 없지 않겠소. 그러면서 수국 병력의 무기를 탈취하는 일에 주력해 준다면 그것만으로도 고구려를 크게 돕는 방법이 되겠소."
힐리는 자신의 속셈이 찔리는 것 같아서 대답했다.
"합하, 그 일은 우리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힐리 공자, 앞으로 양국이 공생을 하자면 필수적인 일은 양국의 연합이요. 연합을 해야만 힘은 더욱 커지고 큰 그림도 그릴 수가 있소."
"합하, 더 큰 그림을 그리다니 그건 어떤 것을 말씀하십니까?"
"고구려와 돌궐인은 국가 연합체가 되는 것이요."
힐리는 그 말에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합하, 그게 가능한 일로 보십니까?"
"고구려와 돌궐인은 연맹체라 국가 연합에도 익숙한 편이요. 그러나 양국이 연맹체로 병립하기 위해선 먼저 동서돌궐의 통합이 필수요. 그러기 위해선 돌궐인의 통합을 성취시킬 수가 있는 강력한 가한이 나왔으면 하는 생각인데 어떻게 생각을 하시오?"
을지문덕의 말에 족장들은 고개를 끄덕였고 힐리는 말을 피했다.
"양국의 장수님들은 군마 인수 건과 전쟁터에서 만날 상황과 전투를 피할 방안 등 구체적인 의논들을 하시길 바라겠소. 나는 합하와 더불어 자리를 옮겨 따로 나눌 얘기가 있습니다."
힐리가 먼저 몸을 일으키자 을지문덕도 따라 나섰다. 두 사람은 곁에 있는 장막으로 들어가서 좌정을 했다.
"합하, 고구려는 안시성 부근에 새 철산지를 개발한다는 소문을 들려옵니다. 저로선 그에 대한 관심이 여간 크지 않습니다. 그런데 개발은 가능할 수가 있으며 진행은 잘 되어갈지에 대한 궁금한 점이 많습니다."
"그런 소문 때문에 양광의 침공을 불렀다는 말도 듣게 되오. 아무튼 간에 새 철광산의 필요성은 너무도 크므로 착실하게 진행될 것이요."
"새 철산지가 개발되면 생산량이 크게 늘어날 것인데 그걸 수국에 빼앗기지 않게 하기 위해서도 북방 유목민은 전체가 도와야 할 일입니다."
"양광은 고구려가 유목민에게 철제 무기를 공급하는 걸 무엇보다 싫어하고 있소. 그걸 봉쇄하지 않으면 변경의 안정을 기할 수가 없다는 판단에 원천적인 해결 방법을 찾으려는 게 고구려를 멸망시키는 것이요."
을지문덕은 그런 말을 하고 상대가 따로 보자는 데는 무슨 할 얘기가 있을 것으로 생각되었다. 그러데 힐리가 엄숙한 태도로 입을 열었다.
"저는 조금 전에 합하께서 하신 말씀 때문에 매우 당황했습니다."
을지문덕은 빙긋이 웃으며 반문했다.
"돌궐 통합을 이룩할 강력한 새 칸이 나와야 한다는 말 때문이 아니오? 공자님은 그 만한 일로 당황할 분은 아니란 생각이 드오."
"족장들 앞에서 그런 말씀을 꺼내신 건 다른 뜻이 있으실 것입니다."
"솔직히 말해 나는 시피 칸에 대한 불만이 매우 큰 사람이요. 그건 나만이 아니고 공자님과 동부 족장들 전체가 그럴 것으로 믿소."
"합하, 그에 대해선 저도 동감입니다."
"나는 공자님의 속마음을 어느 정도는 짐작이 갈만하오."
"합하, 제 속마음을 어떻게 짐작을 하신다는 말씀입니까?"
"나는 타국인이지만 누구보다도 돌궐인의 통합을 바라고 있소."
"합하께서 그런 말씀을 하시니 저는 부끄러움을 금치 못하겠습니다."
"돌궐인은 모두가 통합을 갈망하고 있을 것이요. 그러나 통일을 달성시키려면 그만한 능력과 의지를 지닌 인물이 칸에 올라야 가능할 일로 생각하오. 나는 그런 면에서 공자님에게 큰 기대를 걸고 있으면 벌써부터 주목을 하고 있었소."
"합하께선 절 너무 과대평가를 하시는 분이십니다."
"공자님은 현재 국인들로부터 가장 큰 인망을 사는 편이요. 그 이유는 수국에 대한 반감이 누구보다 강하고 돌궐인의 자존심을 지켜낼 수가 있는 분으로 보기 때문이요. 그러나 공자님은 앞으로 여러 가지로 어려움이 클 것이란 생각을 하게 되오."
"합하께선 어떤 점을 어렵게 보십니까?"
"지금 동돌궐은 어느 때보다 가하돈의 영향력이 크오. 심지어 나라 전체가 가하돈의 손아귀에 들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닐 정도요. 그런데 공자님은 가하돈의 눈 밖에 난 처지가 아닐까 싶은 생각 때문이요."
을지문덕의 말에 힐리는 동의하는 태도로 고개를 끄덕였다.
"공자님은 이제라도 가하돈의 신임을 얻을 방법부터 찾아야 하겠소."
힐리도 유념하겠다는 듯 또 고개만 끄덕였다. 가하돈은 가한의 유고시 새 가한을 지목하고 추대하는 위치에 있다. 그러므로 시피 가한의 자식들 중 자신과 피가 섞이지 않은 자나 그 형제들 가운데서 자신과 다시 혼인을 해 줄 자를 물색하고 있을 것이었다. 그런데 힐리는 새 가한으로 지목하고 추대할 확률이 너무 낮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을지문덕은 그 점을 염두에 두고 다시 입을 열었다.
"가하돈은 동돌궐의 내부 사정을 본국에 보고를 하는 걸로 알려져 있소. 그런데 공자님에 대한 가하돈의 평판은 그리 좋지가 않을 게 분명하오. 그 점을 불식을 시키는 일이 무엇보다 시급하단 생각이요."
"합하의 말씀 깊이 유념을 하겠습니다."
"나는 수국 조정과 연줄이 없지도 않는 편이요. 그러므로 거기서 얻는 정보를 제공하겠소. 공자님은 그걸 이용해서 가하돈의 마음을 사로잡을 노력을 꾸준히 해주셨으면 하오."
"합하께서 도움을 주신다면 기꺼이 따르고 노력을 하겠습니다."
"그럼 이제부턴 전쟁에 관한 애기로 돌리기로 합시다."
"합하께서 먼저 말씀을 해 보십시오."
"나는 시피 칸이 출정군의 지휘권을 누구에게 맡길 것인가도 큰 관심을 갖지 않을 수가 없겠소. 그런데 현재 동돌궐의 사정을 살펴보건대 공자님만큼 유력자는 달리 없자는 판단이요. 때문에 공자님이 지휘권을 맡을 가능성이 가장 크고 보는데 본인은 어떻게 생각을 하시오?"
"저도 여러 면으로 노력을 기울여서 어느 정도 가능성은 있습니다."
"공자님, 그렇게만 된다면 나로선 여간 안심이 되지 않겠소."
"합하에게 솔직한 말씀을 드리자면 저는 고구려를 돕는 일을 큰 도박을 하는 것이나 다름없게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가하돈이 전쟁터에서 제가 하는 행위를 알게 된다면 더욱 멀리 하려고 들 게 뻔합니다. 거기다 과연 그렇게 해서 고구려가 생존할 가능성이 있을지는 희박하다는 판단입니다. 그러므로 고민이 여간 크지가 않습니다."
힐리의 말에 을지문덕은 절로 한숨이 터질 심경이나 대답을 했다.
"나는 세상을 살만큼 살았고 겪은 점도 적지가 않은 사람이요. 그런 나로선 나름대로 보고 배운 것을 토대로 드리고 싶은 말이 있소."
"어떤 말씀인지 해 보십시오."
"나도 동돌궐이 고구려를 돕는 게 도박임을 부인하지는 않겠소. 그러나 공자님은 대망을 품을 사나이요. 그렇다면 장래를 위해 큰 모험을 해볼 필요성이 있소. 또 그런 경험을 해보는 것도 매우 중요한 일이므로 모든 판단은 공자님에게 달린 일이란 말밖에 할 것이 없겠소."
을지문덕이 그런 대답을 하자 힐리는 만족한 듯 입을 열었다.
"합하께서 그처럼 절 믿어주신다면 소홀히 들을 수가 없겠습니다."
"고맙소."
"합하, 앞으로도 계속 선신 왕래로 많은 지도와 편달을 바랍니다."
그때 동돌궐 병사가 와서 연회가 시작되었음을 알렸다.
"공자님, 연회라니 무슨 소리요?"
"합하, 그냥 헤어지기가 아쉬워서 술잔이라도 나누려고 합니다."
을지문덕은 힐리를 따라 다시 큰 천막으로 돌아갔다.
안에선 어느 새 통째로 구운 양고기를 푸짐하게 차려 놓고, 양국의 장수들은 술을 나눠 마시면서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넘쳐흐르고 있었다.
을지문덕은 하온장이 따라준 술잔을 받고 물었다.
"북부 대인, 나는 회담 결과가 궁금하오."
"합하, 동돌궐 족장들은 매우 우호적으로 회담에 임했습니다. 양국이 함께 도생할 방법도 적극 의논을 해서 합의까지 도출해 냈습니다."
하온장은 동부 족장들과 합의한 항목을 구체적으로 설명을 했다.
첫째는 전쟁터에서 양측 병력은 전투를 피할 것, 둘째는 고구려에 군마를 인계하는데 최대한 편의를 제공할 것, 셋째는 고구려 기병들이 쓸 식량으로 육포와 유제품(乳製品)을 무제한 공급할 것 등이었다. 다만 겨울철인 만큼 고구려에서 말먹이를 대기가 힘든 것을 감안해 1차로 5천 필만 인수받기로 하고 모든 일은 철저한 비밀에 부치기로 했다.
양국의 장수들은 술잔을 부딪치며 단합과 우호 관계를 마음껏 과시하는 속에 을지문덕은 답례를 하고자 입을 열었다.
"양국의 장수님들, 창끝은 땅을 넓히고 호미 끝은 땅을 일군다는 말이 있소. 고구려와 동돌궐은 서로가 창과 호미처럼 땅도 지키고 잘 가꿔나가는 데 함께 힘을 기울일 것을 제안합니다."
그 말에 모두는 또 다시 호응하는 함성을 터뜨렸다.
그것으로 양국 장수들 간의 회합을 끝냈다. 을지문덕과 힐리가 먼저 몸을 일으키자 모두가 따랐다. 순무 병단은 동돌궐로부터 군마 5천 필을 인수받고 무기와 소금을 실은 마차 15대나 넘겨주었다.
순무 병단은 군마를 끌고 돌아갈 군관들이 많아져서 인원을 반으로 줄일 수밖에 없었다. 하온장은 을지문덕에게 귀엣말을 했다.
"합하, 저는 처음에 순무에 대한 기대를 별로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처럼 큰 성과를 거두게 된 것은 그간 합하의 노고가 얼마나 크셨음을 새삼 깨닫게 만듭니다.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만족한 결과를 얻게 된 데는 북부대인의 동행도 큰 몫을 했소."
"별 말씀을 다 하십니다. 합하께서 미리 사전 정지 작업을 다 해놓으신 결과임을 모를 사람이 누구이겠습니까? 다만 저로선 한 가지 우려가 되는 점이 있습니다."
"북부대인은 어떤 점을 우려하게 되오?"
"합의를 본 사항을 문서로 작성하지 않은 점 때문에 그렇습니다."
"유목민과는 문서보다 말로 한 언약만으로도 효과는 보장이 되오."
"말로 된 언약만으로 효과가 보장될 수가 있겠습니까?"
"유목민은 서류보다 언약을 더 중요시하오. 언약은 믿음을 기반으로 하는 것이 때문에 문서 작성을 요구하면 도리어 신뢰가 깨어지게 되오. 만약에 문서를 작성했다면 그들은 돌아가면서 찢어버릴 것이요. 왜냐하면 그걸 불쾌하게 여기기 때문이요. 그리고 우리는 그보다 더 유의를 할 점이 있소."
"합하, 그보다 더 유의할 점은 무엇입니까?"
"유목민은 이익이 된다는 판단이 설 때만 합의를 지킨다는 점이요."
하온장은 그 말을 듣고 유목민의 본성을 알만해졌다는 생각을 새삼 하게 되었다. 때문에 그만 돌아갈 생각을 접고 순무를 계속하기로 마음을 굳혔다. 그러면서 을지문덕에게서 더 많은 것을 배우기로 했다.
순무 병단은 거기서부턴 동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인원과 마차들이 확 줄어들어 속진을 계속했다. 빠른 행군 끝에 어디쯤서 겨울 햇살이 희미하게 비쳐드는 수해(樹海) 속으로 들어섰다.
울창한 숲 속에는 더욱 늑대들 울음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밤에 야영에 들어가면 말들은 겁을 먹고 귀를 주뼛거렸다. 수십 마리의 늑대가 한꺼번에 덤벼들면 말 한 마리쯤은 순식간에 뼈만 남았다. 군관들은 전원이 보초를 서면서 철저한 경계를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원시림 속의 야영에선 특히 조심할 게 있었다. 혹한 속에서 늑대들의 접근을 막고 추위를 견디고자 모닥불을 지펴야 했다. 그러나 수천 년간 쌓이고 썩은 부엽토 속에선 함부로 불을 피울 수가 없었다. 그랬다간 두텁게 쌓인 부엽토로 숲 전체를 불바다를 만들 수도 있으므로 철저하게 금해야 할 일이었다.
군관들은 밤이 오자 낙엽 속에 몸을 묻은 채 어둠 속을 주시하게 되었다. 더러는 가깝게 접근한 늑대들이 아르렁대는 소리가 들렸다. 파란 눈빛이 번뜩일 때마다 활을 겨누게 되었다.
그래도 두터운 부엽토는 바람을 막아주고 온기를 보존하고 있어서 견딜 만했다. 양신과 연개소문도 밤잠은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전쟁도 이보단 덜 어렵고 공포스럽지가 않을 것 같았다.
이튿날 날이 밝자 날밤을 새운 군관들은 서둘러 몸을 일으켰다. 해가 떠오르면 추위도 늑대의 위협도 벗어날 수가 있었다. 밤새 콧김이 얼어붙어 질식사를 당한 말들이 없는 게 무엇보다 다행이었다.
곧 행군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군관들은 태반이 말 잔등에서 졸아야만 했다. 그러다가도 얼어붙은 강바닥을 만나면 말에서 내려 말발굽을 천으로 감아줘야 미끄러운 빙판을 걸을 수가 있었다.
언 강들을 몇 번이나 더 건넌 끝에 또다시 수림을 만났다. 거기서부턴 드문드문 통나무집들이 나타났다. 털가죽 옷을 입은 수렵민(狩獵民)들이 밖으로 몰려나와 병단을 지켜보았다.
마침내 눈강(嫩江)에 이르러 실위국(室韋國) 지경으로 들어섰다. 이번엔 강줄기를 끼고 북쪽으로 올랐다. 수림 속을 지나게 되면서 군관들은 생기가 돌아서 대화도 많아졌다.
최북단의 실위국 영토는 전부 살림지대로 뒤덮였고 매우 넓었다. 거기서부턴 다른 데와 달리 늑대 울음소리를 들을 수가 없는 대신 밤낮으로 호랑이들이 포효하는 소리가 일어났다.
실위국 국도인 성사근(星絲根)은 눈강의 하류에 있었다. 백성들은 대부분 수렵민(狩獵民)이었다. 겨울철만 통나무집에서 지내고 다른 철은 흑수(黑水)의 수초를 따라 이동하는 삶을 영위했다. 강엔 물고기가 하도 많아서 그냥 대바구니로 퍼 올릴 지경이었다.
지금은 겨울철이라 모두들 통나무 집속에서 지내고 있었다. 사람들은 여름내 잡은 짐승과 물고기를 갈무리하는 일에 매달렸다. 물고기와 짐승 가죽을 널어 말리는 광경은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실위국 백성은 불과 50여만 명에 불과했지만 20여 부(部)로 나뉜 채 부마다 추장들이 따로 있었다. 국가는 부족 연맹체를 이뤄 추장들이 호선으로 임금을 세웠는데 선우(單于)라고 불렀다.
선우는 엄연한 국왕이지만 추장들 위에서 군림하는 자리는 아니었다. 연맹체 회의를 주재하는 권한을 갖고 있으며 추장 회의에서 결정된 사항을 집행하는 역할만 할 뿐 통치자의 권력은 없었다.
목책으로 둘러싸인 성사근은 숲의 나라답게 백여 채가 넘는 통나무집들로 가득 들어찼다. 그 중에서 선우의 거소는 가장 크고 제법 웅장했다. 백성들은 육류와 털가죽을 고구려에 넘기고 철제품과 소금으로 바꿔 쓰면서 살았다. 때문에 돈독한 우호관계를 유지하려고 들었다.
선우인 치얼루는 직접 추장들과 함께 순무병단을 맞아주었다.
을지문덕과 하온장은 치얼루의 거소로 들어갔고 우태와 군관들은 아늑한 통나무집들에 분산이 되어 푸짐한 식사를 대접받았다. 오래간만에 술과 고기로 포식을 하며 노독을 풀게 되었다.
이튿날 순무 병단은 마차에 싣고 온 소금과 장창 5백 자루를 실위국에 넘겼다. 을지문덕은 선우를 비롯해 여러 추장들과 더불어 회담한 끝에 전쟁이 나면 실위국 병력 3천 명을 지원받기로 합의를 봤다.
이튿날 을지문덕은 치얼루의 근위병을 사열했다.
실위국 병사들은 고구려가 제공한 창으로 무장을 하고 있었다. 5백여 병사들은 강국인 고구려 군관들 앞에서 절도 있는 동작을 해보이려고 애를 쓰는 모습들이 역력하게 보였다.
치얼루는 근위병들의 늠름한 태도를 보면서 얼굴이 상기되었다.
"고구려 국상, 실위국 전사들도 고구려 군에 못지않게 용맹하오."
을지문덕은 자랑스럽게 말하는 치얼루를 치켜세워 줬다.
"선우 전하, 저도 근위군의 훈련이 매우 잘 된 걸로 보입니다."
"나는 우리 군사들이 고구려 군에 뒤지지 않을 만큼 당당해서 크나 큰 자부심을 느끼면서 앞으로 출정을 하면 큰 전과를 거둘 걸로 보오."
"저 역시 그동안에 둘러본 나라들 중 가장 믿음직해 보입니다."
"고구려 국상, 수국이 침공하면 즉각 고구려를 돕겠소."
"치얼루 선우님만 믿겠습니다."
을지문덕은 상대방의 기분을 맞춰주면서 실위국의 근위군을 꼼꼼히 살피고 있었다. 앞으로 실위국 병력을 자신의 직속 군에 편입을 시켜 전투에 투입시키면 성과를 거둘만하다는 판단이었다.
순무병단은 성사근에서 2, 3일간을 더 머물며 피로를 풀었다.
실위국 역시 고구려 철제품을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었다. 때문에 고구려가 새 철산지 개발에 착수를 했다는 소식을 듣고 기대가 컸다. 앞으로 철제품 공급을 배로 늘리겠다는 을지문덕의 약속을 받고 모두가 대환영을 하는 분위기가 되었다.
을지문덕은 치얼루와도 그동안에 서신을 주고받으며 협력 강화에 노력을 기울여 왔다. 때문에 양국은 전에 없는 강한 밀착이 이뤄질 수가 있었다. 특히 치얼루는 을지문덕이 고구려의 국상이 된 것을 누구보다 반겼다. 그 이유는 을지문덕이 자신에게 왕조(王朝)를 세울 것을 권고했기 때문이며 그의 도움도 받을 수가 있겠다는 기대감 때문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치얼루는 벌써부터 국왕이 되려는 야망을 품고 있었다. 그런데 을지문덕은 그걸 간파하고 부추김을 자주 했던 것이다. 그래서 치얼루는 마음이 잔뜩 부풀은 채 을지문덕이 오기를 바라고 있었다.
"고구려 국상, 이번에 장창 5백을 제공해 주어서 더욱 감사하오."
"선우님은 제가 보낸 서찰을 보고 생각해보신 점이 있으십니까?"
"고구려 국상은 내게 늘 해주는 희망적인 조언에 여간 고무가 되지 않소. 누군들 남아로써 한번 대망을 품지 않을 수가 있겠소? 그러나 나는 의지만 강할 뿐 큰 지혜를 얻을 참모가 없소. 때문에 고구려 국상의 지혜와 고견을 빌리려고 하오. 나로선 의지를 다지는 데 큰 자극이 되므로 계속 지도 편달을 부디 아끼지 말기를 바라며 도움을 주시오."
"전하, 먼저 힘을 축적할 방법부터 모색을 하셔야 합니다."
을지문덕은 그렇게 입을 떼고 자신의 소견과 몇 가지 방안을 건의했다. 거기엔 실위국에 공급할 철제품을 늘이면서 일부는 치얼루 개인에게 돌려서 공급하겠다는 약속도 들어 있었다. 그렇게 되면 선우는 재정적으로 우위에 설 수가 있어 추장들을 장악할 힘을 축적할 수가 있게 된다. 그것으로 왕위에 오를 강력한 발판을 마련할 수가 있게 되었다.
치얼루는 을지문덕의 약속을 받고 내심 거의 흥분 상태가 되었다. 을지문덕은 그렇게 힐리의 마음을 사로잡은 끝에 전폭적인 지지와 협조를 이끌어내는 수완을 또다시 발휘한 것이었다.
"선우전하, 새 군복을 착용한 병사들이 더욱 늠름해 보입니다."
"고구려 국상, 나는 대만족이오. 근위대 병사들이 새 군복을 착용할 수 있게 된 것도 고구려 국상 덕분이므로 더욱 감사를 드리겠소."
치얼루는 고구려가 제공한 옷감으로 군복을 만들었고, 근위군이 제복을 입게 된 것도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것만으로도 선우의 권위가 오르는 모양새가 되어서 추장들에게 한껏 과시하게 되었다.
"선우 전하께서 그처럼 흡족해 하시므로 저도 기쁩니다."
고구려와 실위국도 전통적인 우호 관계와 교류가 많은 편이었다. 그러나 을지문덕은 더욱 공을 들여 그걸 탄탄하게 다져놓게 되었다. 반면에 치얼루도 믿는 구석이 있게 되어 결연히 말했다.
"실위국은 고구려와 동맹을 맺은 것이나 다름이 없는 사이요."
"고구려는 선우 전하만 믿겠습니다."
두 사람은 말하고 서로의 손을 굳게 잡았다.
순무 병단은 성사근을 떠난 뒤 비로소 동남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순무도 거의 끝나게 되어서 군관들은 행군 속도를 빨리했다. 원시림을 뚫고 나자 얼어붙은 강들이 계속 나타났다. 몇 번이나 건너야 했지만 군관들은 전과 다르게 피곤 기를 덜 느끼는 듯 표정들이 밝아졌다.
연개소문은 행군의 무료함을 깨려 듯 양신에게 말을 걸었다.
"실위국에서 사흘간 뜨듯하게 포식을 했지만 난 글렀다는 생각이요."
"시동 선인, 왜 글렀다는 생각을 하는가?"
"나는 얼굴이 흰 실위국 여인을 품어보고 싶었는데 그러질 못했소."
을지문덕은 빙긋 웃으며 말참견을 했다.
"시동 선인, 어림없는 생각일랑 그만 두게."
"합하, 왜 어림없는 생각이라고 하십니까?"
"실위국 백성들은 풍족한 삶을 누리고 있다. 그런 사람들을 만만히 봤다간 큰 코만 다친다. 암, 그건 어리석은 자나 할 수가 있는 소리다."
연개소문이 더욱 반발하듯 받았다.
"합하, 그럼 제가 어리석다는 말씀입니까?"
"왜 어리석은지 말을 해 주마. 시동은 실위국 백성들이 집집마다 태산처럼 털가죽을 말리는 것을 보지 않았는가? 그처럼 어마어마하게 많은 양을 보고도 무슨 생각이 드는 게 없는가?"
을지문덕의 질문에 연개소문은 눈만 껌벅거렸다.
"그것은 실위국 백성들이 풍족한 삶을 누리고 있다는 증거로 자존심이 매우 센 편일세. 따라서 여인들을 소금 따위로 유혹을 하려고 드는 짓이 통할 리가 있겠나? 만약에 시동이 그런 시도를 했다면 큰 봉변을 당하고 말았을 것을 알아야 하겠다."
연개소문은 그 말을 듣고 더는 입을 떼지 않았다.
양신은 대신 부러움을 느꼈다. 고구려도 겨울이 길고 매우 추웠다. 때문에 백성들은 이만저만 고역이 크지 않았다. 때문에 귀족들은 실위국에서 많은 털가죽을 사들이나 가난한 백성들은 꿈도 못 꾸었다.
그런데 실위국 백성들은 전부 털가죽 옷을 입고 살아서 내심으로 여간 부럽지가 않았다. 그렇다면 앞으로 만날 말갈족은 어떻게 살고 있을 지가 궁금해서 물었다.
"합하, 마지막 도착지인 추이성엔 말갈족도 많이 산다지요?"
양신의 질문에 을지문덕은 대답했다.
"그렇다. 추이성은 말만 성이지 큰 부락에 지나지 않는다. 이번에 거기로 말갈족 7부의 대막불들이 전부 모이게 되었다."
추이성(樞爾城)은 성벽이 없고 주위를 목책(木柵)으로 두른 대읍락(大邑落)이었다. 대형 고혜진(高惠珍)은 그곳에 주재하며 말갈 7부와 연락을 취하고 관할도 하는 임무를 맡고 있었다.
말갈족은 고구려보다 역사가 길고 숙신(肅愼), 읍루(挹婁), 물길(勿吉)등으로 명칭이 바뀌어 왔다. 전체 인구는 고구려에 버금갈 정도로 많았지만 부족마다 독립적인 읍락(邑落)을 이룬 상태에 머문 형편이었다.
고구려는 초기부터 부여와 옥저를 아울렀지만 말갈족은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그 이유는 정복할 수가 없을 만큼 세력이 만만치 않게 강했기 때문이다. 때문에 겨우 복속을 시키는 것으로 만족을 해야만 했다. 그런데다 말갈족의 영역은 대부분이 산림지대라서 별로 탐낼 가치가 없었다. 그저 부용국(附庸國)으로 삼아 통제를 하는 쪽으로 힘을 썼다.
그런데 비해 말갈족은 고구려를 각별하게 여겼다. 다시 말하면 동족(同族)으로 인식을 하기 때문이었다. 거기다 상호간에 물자 교류가 없으면 살아 갈 수가 없어 밀착 관계를 이어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고구려에 대해선 상호 호혜평등 관계로 서로가 도움을 주고받는 것에 그치길 바랐다. 그런데 고구려는 말갈족에 병력 차출을 자주 요구했다. 말갈족은 그럴 때마다 무조건 응해주는 태도를 취했다. 때문에 고구려에겐 여간 중요하고 필요한 존재가 아니었다. 그만큼 큰 중요성 때문에 말갈족은 오랜 세월을 두고 독립적인 체제를 유지할 수가 있었다.
군관들도 말갈족을 이웃처럼 여겨서 추이성에 당도하자 마음들이 편안해졌다. 그런데 을지문덕만은 왠지 모르게 얼굴에 수심이 어려졌다.
"합하께선 이번 순무 결과를 놓고 대단히 만족을 하셨겠습니다."
양신의 말에 을지문덕은 쓴 웃음을 지었다.
"그렇게 생각되는가? 나도 대체적으론 만족을 하는 편이다. 무엇보다 최대의 관건인 동돌궐과 교섭에서 상당한 목적 달성이 이뤄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대의 결산이 될 말갈과 교섭이 쉽지 않을 것 같다."
"합하, 말갈은 고구려의 속국이나 다름없는데 왜 걱정을 하십니까?"
"그건 근래에 와서 전과 같지 않은 징후들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합하, 전과 같지 않은 징후들이란 어떤 것을 말씀하십니까?"
"나는 말갈 7부에 최소한 5만, 최대는 10만 병력을 내놓을 것을 요구하련다. 그런데 다른 곳도 아닌 가장 기대를 하게 되는 속말갈에서 이상한 기류가 형성된 기미를 보이기 때문에 여간 걱정이 크지 않다."
"합하, 속말갈이 대체 어떻기에 그러십니까?"
"속말갈의 대막불인 돌지계가 딴 생각을 품은 듯싶다."
을지문덕은 그런 대꾸하고 날카로운 음성으로 군관들에게 외쳤다.
"속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