쇠나라 25. 상련

상련

by 정완기

25. 상련(相憐)



순무 병단은 최종 도착지인 추이성에 도착했다.

을지문덕은 추이성에서 말갈족(靺鞨族) 7부 대막불(大莫弗)들과 회의를 열게 되었다. 대막불들은 추이성의 성주인 고혜진의 통고를 받고 미리 와서 대기 중이었다.

말갈족은 스스로 삼호족(森豪族)이라 칭했다. 삼림 속의 호대한 종족이란 뜻인데 백성들은 수렵과 목축을 생업으로 삼았다. 부족 형태로 대읍(大邑)은 대막불, 소읍은 막불이 다스렸다. 그 중 대막불은 흑수(黑水), 안거골(安車骨), 호실(號室), 불열(拂涅), 백돌(伯咄), 속말(粟末), 백산(白山) 등인데 전부가 모인 것은 10년만이었다.

순무 병단은 추이성에 입성했고, 을지문덕은 바로 대막불들과 합석을 했다. 말갈족은 7부 중 속말부의 대막불인 돌지계(突地稽)가 대표를 맡고 고구려 국상과 동격으로 회의를 주도했다.

추이성은 말갈족이 고구려인보다 배나 더 많이 살았다. 순무 병단 군관들은 일정이 모두 마쳐 매우 들뜬 분위기였다. 혹한도 좀 풀려서 거리를 돌아다닐 만했다. 양신과 연개소문도 다른 군관들과 이색적인 풍경이 짙은 저잣거리 구경을 하려고 나섰다.

"추이성은 고구려와 말갈족 간의 교역의 중심지나 다름이 없다지?"

양신의 질문에 연개소문이 대답했다.

"그렇소. 말갈 상인들은 육포, 어포, 털가죽 등을 가져오고 고구려 상인들은 철제품, 약제, 의복, 곡식을 가져와서 교환을 한다오."

연개소문의 말을 듣고 있던 양신은 갑자기 걸음을 세웠다.

"형, 왜 그러오?"

"시동 선인, 뒤를 한번 살펴보게."

양신의 말에 연개소문은 뒤를 돌아다보았다.

"형, 뭘 보라는 말이요?"

"아까부터 우리 뒤를 따라오는 자가 있는 것 같네."

"누가 뭣 때문에 우릴 따라온단 말이요?"

연개소문은 몇 번이나 고개를 돌려서 주변을 살폈다. 그러나 오고가는 사람들 사이로 고구려 군관들이 간간이 보일 뿐 다른 자는 없었다.

"형, 나는 누가 따라오는 것 같지가 않소."

"시동 선인도 계루부 소속의 수염이 많이 난 군관을 알지?"

"계루부 소속이라면 털보 선인을 말하는 게 아니요?"

"그럴세."

"형, 두모 선인이 저기 골목 끝에 서 있는 게 보이오."

"두모 선인은 아까부터 우리 뒤를 따라오고 있었네. 그러면서 어느 말갈인과 무슨 신호를 하듯 여러 차례 손짓을 나누는 것도 봤네."

"형, 두모 선인은 말갈인과 아는 사이라 그러는 게 아니겠소?"

"그런데 나는 그 말갈인이 어딘지 낯이 익어서 이상한 생각이 드네."

"형이 말갈인 중에 무슨 이유로 낯이 익을 만한 사람이 있겠소?"

두 사람이 그런 말을 나누는데 두모(兜牟) 선인이 다가들며 불렀다.

"약광 선인."

양신과 연개소문은 걸음을 멈추고 돌아다봤다.

"두모 선인, 날 왜 불렀소?"

"두 사람의 걸음이 어찌나 빠른지 따라잡기가 힘 드는군."

"우리는 천천히 걷고 있는데 따라잡기가 힘들다는 게 무슨 소리요? 그런데 두모 선인은 지금까지 우리 뒤를 따라 오고 있었던 것이요?"

양신이 묻자 두모는 좀 찔리는 듯 변명을 했다.

"내가 따라 다녔다니? 그저 거리 구경을 다니고 있을 뿐이었소."

"두모 선인은 조금 전에 어느 말갈인과 손짓을 나누는 걸 봤소. 그 말갈인은 누구요?"

양신의 질문에 두모는 더욱 당황하면서 둘러댔다.

"나는 이곳의 말갈 상인들을 많이 알고 있소. 혹시 물건을 살게 있으면 내게 부탁을 하오. 내가 아주 싸게 살 수 있게 해주겠소."

그때 연개소문이 손을 들어 가리키며 말했다.

"두모 선인, 말갈인이 이쪽을 보며 손짓을 하고 있소."

두모는 급히 돌아서더니 그쪽으로 손을 가로저었다.

"저 말갈 상인은 내가 잘 아는 자로 반갑다는 인사를 했던 거요. 여기서 나만큼 말갈인을 잘 알고 있는 사람도 드물 것이요. 말갈 상인들은 셈에 어두워 손가락 열 개로 헤아리나 장사 솜씨만은 끝내 주오."

두모가 쓸데없는 말만 늘어놓자 연개소문이 핀잔을 주었다.

"두모 선인은 묻는 말엔 대답을 않고 웬 딴 소리만 하오?"

"하긴 말갈인도 고구려 사람들 못잖게 활을 잘 쏘지."

두모는 당황하듯 계속 딴 소리만 하고 양신은 먼 곳에 있는 말갈인을 계속 주시하고 있었다. 그러자 먼 곳의 말갈인은 양신의 눈길을 의식한 듯 슬그머니 골목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두모 선인, 말갈인은 내가 쳐다볼 때마다 어디로 사라지곤 하는데 어딘지 낯이 익은 얼굴이라 이상한 생각이 들게 만드오."

양신의 말에 두모는 더욱 당황스런 표정으로 변명을 했다.

"호위 선인, 그럴 리가 있겠소? 나도 처음 보는 사람들 중에서 낯이 익다는 생각을 할 때가 종종 있으니 이상하게만 생각할 건 없소."

양신이 또 손을 쳐들고 가리켰다.

"말갈인이 골목에서 다시 나와 이쪽을 보고 오라는 손짓을 하오."

그 쪽을 바라보며 두모는 신경질을 부리듯 손을 가로저었다.

"저 자가 왜 그러는지 내가 가서 알아봐야 하겠소."

두모는 말하고 그 쪽으로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양신은 다시금 말갈인을 자세히 바라보았다. 말갈인 복장에 털모자를 깊숙이 눌러쓰고 있는 자는 어딘지 남이 못 알아보게 변장을 한 것 같고 문득 구조리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때 구조리는 두모가 다가들자 혀를 끌끌 찼다.

"두모, 내게로 곧장 다가오면 어찌 되나? 젠장."

두모는 그런 구조리에게 화를 냈다.

"구조리, 그러면 손짓을 하지 말았어야지. 이젠 저 쪽에서도 이상하게 생각을 하고 있는 판인데 나보고 어찌하란 말인가?"

"두모, 양신 야좌에게 아직도 말을 못했는가?"

"내가 따라 다니는 걸 눈치 채서 말을 꺼내기가 주저가 되었네."

"나는 빨리 말을 하라고 손짓을 했건만 지금까지 뭘 했나?"

"구조리, 내게 한번 맡긴 일이면 진득이 좀 기다려 주게나."

"나는 시간이 없어서 그러네. 최소한 내일까진 호위 선인이 여길 떠나게 만들지 않으면 안 되네. 만약에 일을 그르치면 자네 책임이야."

"구조리, 내가 왜 책임을 진단 말인가?"

"자넨 그렇게 대가리가 나쁜가? 도해선 조의께서 시키신 일일세. 제대로 못했다간 혼쭐이 날 게 뻔한 일인데 그걸 몰라서 묻는가?"

구조리의 말에 두모는 좀 수그러드는 태도를 보였다.

"아무튼 간에 내게 맡긴 일이면 내가 하는대로 좀 내버려 두게."

두모가 말하자 구조리는 더욱 언성을 높였다.

"두모, 한가한 소리나 할 때가 아냐. 당장 가서 말을 하게."

"구조리 선인, 만약에 호위 선인이 자넬 알아봤으면 어쩌지?"

"어차피 알게 될 일이야. 괜찮으니 얼른 쫓아가라니까."

구조리는 등을 세차게 떠밀었다. 그러나 두 사람이 그런 얘기를 나누는 사이에 양신과 연개소문은 보이지 않게 되었다. 두모는 불만스런 표정으로 다시 두 사람을 찾아 나섰다.

양신과 연개소문은 거리를 구경하고 숙소로 돌아갔다. 점심을 먹고 있는데 국상이 찾는다는 전갈이 왔다. 을지문덕은 두 사람이 나타나자 싸여 있는 장적(帳籍)을 가리키며 말했다.

"두 사람은 지금부터 할 일이 있다."

"합하, 무슨 일입니까?"

"이것은 추이성에서 파악한 말갈 7부의 호구 장적이다. 두 사람은 부족단위로 호구 수를 정확히 파악을 해 놓도록 하라."

을지문덕은 낮술을 들었는지 얼굴이 좀 불콰했다. 그동안 순무를 하면서 처리할 일들이 너무 많아서 매우 지쳐 있었다. 두 사람에게 그런 지시를 하고 옆방으로 가서 잠을 청했다.

연개소문은 쌓인 장적 앞에 앉자 투덜거렸다.

"이 많은 장적을 다 보려면 오늘은 날밤을 패게 생겼군."

양신도 엄두가 나지 않는 얼굴로 자리에 앉았다. 연개소문은 장적을 하나 집어 들고 양신에게 내밀며 퉁명스런 투로 말했다.

"지금부터 나는 장적의 호수를 부르겠소. 형은 내가 부르는 숫자를 받아 적으시오. 그동안에 형은 나한테 틈틈이 글공부를 배웠으니 이젠 실력이 얼마나 늘었는지 한번 알아봐야 하겠소."

양신은 같잖다는 듯 반문했다.

"나는 항목을 찾아 숫자만 적으면 된다는 말인가?"

두 사람은 곧 일을 착수했다. 그런데 연개소문이 숫자를 부르는 속도가 어찌나 빠른지 양신은 받아 적기가 매우 힘들었다. 때문에 양신은 연개소문의 지적과 핀잔을 여러 번 받았다.

저녁을 먹고도 일은 계속되었다. 밤을 꼬박 새우다시피 매달린 끝에 새벽녘에야 겨우 일을 끝낼 수가 있었다. 그렇게 해서 파악된 말갈족의 총 호수는 50만여 호가 넘었다.

양신과 연개소문은 일을 마치자 그 자리에 쓰러져 버렸다. 눈을 좀 붙였는가 싶은데 아침이 왔다. 을지문덕이 와서 두 사람이 파악해 놓은 장부들을 들여다보며 중얼거렸다.

"장부상 호수보다 실제로는 더 많을 걸로 예상은 했다만, 말갈인 인구가 이처럼 급속도로 팽창하고 있을 줄은 몰랐군? 다행스런 일이야."

을지문덕은 말갈 인구를 어림잡아 6백만이 넘을 것으로 추산했다. 그리고 두 사람을 깨우자 졸음을 참지 못하는 연개소문은 겨우 눈을 뜨고 부어터진 음성으로 말했다.

"합하, 방금 전에 눈을 붙였습니다. 잠 좀 자게 해주십시오."

"전쟁을 대비하자면 날밤을 새우는 연습도 해 둬야한다."

양신은 궁금한 점을 물었다.

"합하, 말갈족에게 얼마나 병력을 내놓게 하시렵니까?"

"호구 당 한 명씩 내놓으면 50만이 되겠지만 그건 무리겠지?"

"합하, 그처럼 많은 병력을 차출하는 게 가능하겠습니까?"

"최소한 절반만 내놓게 만들어도 대성공이지. 아니 절반에 절반만 돼도 더 바랄 게 없겠다. 그러므로 며칠간을 더 머물며 설득을 해야 된다. 오늘 내일 강행군으로 회의를 하면서 설득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연개소문은 밤새 고된 작업을 해서 불만이 컸지만 매사 세운 계획을 꼼꼼히 추진하는 을지문덕과 같은 사람은 고구려에 단 한 사람밖에 없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수고들 많았다. 그만 나가서 아침을 먹어라."

을지문덕은 말하고 은전 한 닢을 바닥에 던져 놓았다. 양신은 의아하게 바라보는데 연개소문이 냉큼 집어 들고 방을 나갔다. 양신이 문칮거리고 있자 을지문덕이 물었다.

"약광, 팔뚝의 상처는 좀 어떤가?"

"예, 이젠 팔을 쓰는 데는 아무런 지장이 없습니다."

"자네도 시동을 따라 어서 가게. 혼자서 돈을 다 쓰기 전에."

"예, 합하."

연개소문은 늦게 물러나온 양신에게 핀잔을 주었다.

"형, 거기서 뭘 꾸물대고 있었소?"

"합하께서 웬 은전을 다 내주실까?"

"밤새도록 우릴 부려먹지 않으셨소? 그 대가로 내주신 돈인데 얼른 챙겨야지 꾸물댔다간 도로 거둬들일 것이요."

"시동 선인은 그 돈으로 뭘 할 것인가?"

"이 돈이면 오늘 밤에 코가 삐뚤어지게 술을 마실 수가 있소. 그 뿐이겠소? 예쁜 말갈 계집도 품어 볼 수가 있을 테니 웬 떡이냐 싶소."

연개소문은 함지박만큼 입을 벌리고 웃었다. 양신은 그러는 연개소문을 잡아끌고 아침을 먹으러 갔다. 그런데 어디서 나타났는지 두모가 길에서 두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호위 선인에게 알려 줄 말이 있어서 기다리던 참이요."

"내게 뭘 알려 줄게 있다는 말이요?"

양신이 뜨악하게 묻자 두모는 단검을 하나 꺼내 보였다.

"호위 선인은 이 단검을 알아보겠소?"

양신은 단검을 받아들고 살펴보다가 물었다.

"낯이 익은 칼이요! 내 친구 것인데 두모 선인은 이 칼을 어떻게 지니게 되었소?"

"석해와 장대라는 젊은이가 호위 선인을 만나려고 이곳에 왔다가 돌아갔소. 그들은 호위 선인이 자기들을 만나 주길 바란다고 했소."

두모의 말에 양신은 매우 놀라며 반문했다.

"두 사람은 지금 어디에 있소?"

"용원성 근처에 있는 오골사란 절에서 기다리겠다고 했소."

"용원성이면 여기서 꽤나 먼 거리가 아니오?"

"그들은 다갈촌 철장의 명을 받고 호위 선인을 만나야 한다는 말을 했소. 만날 장소는 용원성 근처에 있는 오골사라는 말도 했소."

양신은 그 말을 듣고 너무 기뻤다. 그러나 무슨 일인지 궁금하면서 한편으로 이상한 생각도 들었다. 연개소문이 두모에게 말했다.

"호위 선인이 이곳에 있는 걸 그들은 어떻게 알고 왔단 말이요?"

"그걸 내가 어찌 알겠소?"

두모의 말을 양신이 받았다.

"시동 선인, 두 사람은 다갈촌의 야장들이고 내 친구일세. 더욱이 철장께서 명을 내리셨다니 나로선 만나러 가야만 하네. 그런데 합하께 말씀을 드리면 허락을 해 주실 지가 걱정일세."

"합하께선 앞으로 사흘간은 더 머물 수도 있다고 하셨소. 그동안에 무슨 일이 생기지 않는다면 다녀올 시간은 충분히 낼 수 있지 않겠소?"

연개소문의 대답에 두모가 말했다.

"여기서 용원성까진 말을 달리면 반나절 거리밖에 안 되오. 오늘 시간을 낼 수만 있다면 즉시 떠나도 해전에 거뜬히 다녀 올 수가 있소."

"시동 선인, 나는 당장 합하께 말씀을 드려보고 싶네."

양신이 급히 몸을 돌려세우자 연개소문도 따라 갔다.

"형, 나도 따라 갈 수 있게 허락을 받아내시오."

"시동 선인이 왜 날 따라가려고 하는가?"

"심심한데 길동무삼아 가주면 좋지 않겠소?"

"그래주면 나로선 더 없이 고맙지."

을지문덕은 양신이 전한 말을 듣고 좀 뜻밖이란 생각이 들었으나 철장이 부른다면 허락을 할 수밖에 없었다. 대신 내일 아침에 일찍 연개소문과 함께 떠나는 것을 허락해 주었다.

제울 상단(商團)은 하슬라를 거쳐 열흘 만에 고구려 지경으로 들어섰다. 큰 산줄기를 넘고 나선 해안을 끼고 평탄한 길을 따라 북상했다. 그러나 거리가 멀고 날씨가 추워져 발길을 재촉을 해야만 했다.

제울은 고구려 지경을 거치는 동안 거래하던 상인들로부터 여러 가지 도움을 받았다. 마필들을 자주 갈아탈 수가 있어 행정의 어려움을 한결 덜어낼 수가 있었다.

일행은 눈이 더 쌓이기 전에 신라로 돌아가야 만했다. 때문에 북쪽으로 계속 올라가서 드디어 두만강을 건넜다. 제울은 주랑을 다갈촌으로 데려다 주기보다 백기 좌장이 시킨 대로 을지문덕부터 만나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 행로를 바꾸었던 것이다.

제울은 지금쯤 을지문덕의 순무 행정이 거의 끝날 때가 된 걸로 보고 있었다. 먼저 두만강에서 멀지 않은 용원성으로 가기로 했다. 거기서 순무 병단의 종착지를 알아내고 찾아가면 만날 수가 있고, 그게 여의치가 않을 경우는 다갈촌으로 갈 생각이었다.

두만강에서 북으로 이틀쯤 가다 한 객줏집에서 묵게 되었다.

주랑은 고구려 지경으로 들어오고 나선 생부를 만날 기대에 가슴이 벅차고 하루 길이가 여삼추처럼 길게 느껴졌다. 저녁을 먹고 밖에 나갔다 돌아온 제울은 주랑에게 말했다.

"주랑 낭자. 이 집 안에 수상한 한족들이 머물고 있소."

"제울님, 수상한 한족들이라니요?"

제울 상단이 묵게 된 객주 집엔 공교롭게도 태산팔협도 묵고 있었다.

"그 자들이 한어를 쓰기에 이상하게 여겨 대화를 엿들어 봤소. 그랬더니 뜻밖에도 양신에 관한 얘기를 하고 있지 않소?"

"양신님에 관한 얘기를 하다니요?"

"낭자, 놀라지 마오. 그들은 양신을 해칠 모의를 하고 있었소."

주랑은 그만 가슴이 벌렁벌렁 뛰기 시작했다.

"어머나, 그럼 어찌 해야 좋지요?"

"나는 그 자들이 여기에 어떻게 왔는지는 모르나 분명히 양신을 해치려는 모의를 하는 걸로 엿들었소. 그런데 이상한 점은 또 있소."

"어떤 점을 이상하게 생각하시나요?"

"한족들 사이에 고구려 군관이 하나 끼어 있었기 때문이요."

제울이 말한 고구려 군관은 다름 아닌 구조리였다.

"나는 고구려 군관이 한족들과 나누는 소릴 듣고 그들이 양신을 해치려는 자들임을 알게 되었소. 한족들을 내일 용원성 근처에 있는 오골사라는 절이 있는 데로 가는데 양신도 그곳으로 오는 모양이요."

"제울님, 양신 오라버니가 위험에 처하게 된 게 확실해졌어요. 저는 가슴이 마구 뛰는데 이 사실을 알려줘야 하는데 어찌해야 좋지요?"

"나도 일이 다급해졌다는 판단에 일단 용원성으로 갈 생각이요."

"그러면 얼른 떠나야 하지 않겠어요?"

"양신은 지금 순무병단에 들어 있다오. 순무 병단의 최종 목적지는 추이성이요. 그곳에 당도한 것도 알게 되었소. 고구려 군관은 내일 양신을 추이성에서 오골사로 유인해 오겠다는 말을 했소."

"제울님은 오골사가 어디에 있는지 아시나요?"

"그걸 몰라서 한족들이 그리로 향하면 몰래 뒤를 쫓으려고 하오."

"제울님, 한족들이 양신님을 해치려드는 게 분명하다면 이상해요."

"낭자는 어떤 점이 생각하오?"

"고구려 군관은 무슨 이유로 한족들과 한 패로 움직일까요?"

"나도 그 이유를 몰라 얘기를 좀더 엿들으려고 했는데 방금 전 고구려 군관은 어디로 떠나 이제부턴 한족들을 철저히 감시를 할 수밖에 없소."

"제울님, 우리는 지금부터 한족들을 따라갈 준비를 해야 하겠어요."

"그렇게 합시다."

제울은 대원들에게 앞으로 할 일을 알리고 한족들의 움직임을 감시할 불침번을 밤새도록 번갈아 서기로 했다. 그리고 이튿날 아침에 한쪽들이 떠나자 제울 일행도 몰래 뒤를 따라갔다.

양신과 연개소문은 추이성을 떠나 오골사(悟汨寺)로 오고 있었다. 그런 두 사람을 지켜보던 구조리도 몰래 그 뒤를 쫓았다. 양신은 친구들을 만날 생각에 마음이 잔뜩 들떠 있었다.

오전 내내 말을 몰아 정오쯤에 오골사에 당도했다. 양신과 연개소문은 절의 산문각 밖에서 말을 내렸다. 그때 젊은이 2명이 다가들었다. 양신은 그들을 보다가 크게 놀라며 소리를 질렀다.

"석해, 장대."

"양신 야좌."

세 사람은 탄성을 지르며 달려들어 서로가 얼싸안았다. 모두는 반가움에 어쩔 줄 모르며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만감이 교차하는 양신은 마음이 무거워서 입을 뗄 수가 없었다.

석해와 장대도 역시 같은 심경이었다. 그러나 석해는 양신에게 하고 싶지가 않은 말을 꺼내야 해서 눈치만 봤다. 양신이 먼저 입을 열었다.

"요즘 사부님의 병환은 좀 어떠신가?"

"요즘에 와서 많이 쾌차해지셨네. 더욱이 자네 소식을 전해 들으신 뒤로는 겨우 안심을 하시며 바깥출입도 자주 하시게 되었네."

"나는 사부님은 물론이고 마을의 모든 분들에게 큰 죄를 지은 사람일세. 차마 얼굴을 들고 사부님을 어떻게 뵈어야 좋을지 모르겠네."

양신은 점점 음성이 울먹이게 되고 석해와 장대도 눈물을 닦았다.

"나는 자네들이 만나자는 전갈을 듣고 너무도 기뻐서 어제 밤은 한숨도 잠을 이루지 못했네. 아침부터 정신없이 이곳으로 달려왔네."

장대는 그런 말을 하는 양신을 의아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양신 야좌, 우린 자네를 만나자고 한 적은 없는데 무슨 소린가?"

"자네들은 추이성에 오지 않았는가?"

"우린 추이성에 가지 않았는데?"

"순무 병단의 동료 선인이 내게 자네들이 왔다는 말을 했는데?"

"양신, 나로선 도무지 모를 소리를 듣네. 구조리 선인은 우리들에게도 이리로 오라고 해서 온 것일세."

양신은 의아해 하는데 부인만 했던 석해가 장대가 석해를 바라보았다. 석해는 그 시선을 받고 좀 당황하듯 고개를 돌렸다. 양신도 이상하단 생각이 들어 두 사람을 향해 다시 물었다.

"자네들이 날 부르지 않았다면 여기는 무슨 일로 왔는가?"

석해는 양신의 질문에 곤혹스런 표정으로 주위만 살피는 눈길이 되었다. 그때 어디서 나타난 구조리가 세 사람 앞으로 다가들었다.

"양신 야좌, 아니 이젠 호위 선인이 되었지? 오래간만이요."

양신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구조리 선인은 여기에 무슨 일로 왔소?"

구조리는 석해와 장대를 거만하게 둘러본 뒤 대답했다.

"내가 두모 선인을 시켜 호위 선인에게 그런 전갈을 보낸 것이요."

"무엇 때문에 그런 전갈을 보냈소?"

"호위 선인을 만나려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그렇게 했소."

"날 만나려는 사람들이 누구란 말이요?"

"여기로 곧 나타나게 되었소. 그에 관한 설명은 석해가 하게."

석해는 구조리의 말에 더욱 당황하며 어쩔 줄을 모르는 태도만 보였다. 양신과 장대는 그러는 석해를 보면서 이상해 하는데 구조리가 윽박지르듯 또 재촉했다.

"석해, 얼른 말을 하지 않고 뭘 꾸물거리고 있는가?"

석해는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겨우 입을 떼었다.

"양신 야좌, 미안하네. 나로선 차마 입을 담을 수가 없는 말이라."

"석해, 무슨 말인데 그러는가?"

양신이 묻자 석해는 구조리를 또 바라봤다.

"석해, 빨리 말을 하게. 왜 머뭇거리기만 하는가?"

구조리가 계속 윽박지르자 석해는 힘겹게 입을 떼었다.

"양신 야좌, 철장님이 내리신 분부가 계시네."

"사부님이 무슨 분부를 내리셨는가?"

"자네한테서 밀두도를 회수하라는 명령을 내리셨네."

양신은 그 말에 무겁게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 않아도 나는 순무가 끝나는 대로 다갈촌으로 가서 사부님을 뵙고 사죄의 말씀도 드리고 밀두도를 돌려놓으려던 참이었네."

양신은 그런 말을 했으나 죄책감과 함께 까닭을 모를 슬픔이 전신을 휩싸고 들었다. 사부가 그런 명령까지 내리게 된 것에 두려움과 죄송함을 느꼈다. 그러나 밀두도를 등에서 벗어들자 마음이 허전해졌다. 그동안 타국 땅을 돌면서 의지를 했고 애환(哀歡)이 서렸기 때문이었다.

"사부님의 노여움을 생각한다면 나는 당장 달려가서 내손으로 돌려드려야 하는 일일세. 그러나 이 자리에서 자네에게 전해야만 하겠네."

양신은 아쉬움과 함께 밀두도를 석해에게 내밀었다. 그러자 장대는 이상한 표정으로 구조리를 향해 무슨 말을 하려다 그만 두었다. 그때 연개소문이 구조리에게 뜻밖의 질문을 던졌다.

"구조리 선인이 등에 진 장도는 보통 물건이 아닐 것 같소?"

구조리는 그 말을 듣고 매우 당황하는 태도를 보였다. 그런데 장대 역시 그 장도를 바라보며 이상하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아니?! 그 장도는 철장님이 장안성에 바친 예물이 아닙니까?"

양신은 비로소 구조리가 등에 진 장도 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전에 철장의 집에서 보관했던 명도(名刀)들 중 하나임을 알 수가 있었다.

"구조리 선인은 그 명도를 어떻게 지니게 되었소?"

양신의 질문에 구조리는 난처한 표정으로 대답을 못하자 석해가 대신 입을 열었다.

"지난 번 국혼 때 예물로 명도 10자루를 장안성에 바쳤네."

양신은 그게 무슨 뜻인지 알만해서 구조리에게 또 물었다.

"구조리 선인은 그 명도를 어떻게 지니게 되었소? 나로선 매우 궁금한 일이라 그에 대한 대답을 듣지 않을 수가 없겠소."

구조리는 여전히 당황하듯 말도 안 될 변명을 했다.

"이 장도가 저 산문 앞에 놓여 있기에 그냥 주워서 멘 것이요."

그러자 연개소문이 뜻밖의 말을 했다.

"구조리 선인은 어제 추이성에서 그 장도를 메고 있지 않았소?"

"내가 메고 있었단 말인가?"

구조리는 얼버무렸고 연개소문은 또 추궁을 하듯 말했다.

"구조리 선인은 추이성에서 말갈족 복장을 하고 우리 뒤를 줄곧 따라 다니지 않았소? 나는 그때 구조리 선인은 그 장도를 등에 진 것을 분명히 봤는데 길에서 주웠다니 말도 안 될 변명이 어디에 있소?"

연개소문의 말에 구조리는 대답을 못하고 입을 다물고만 있었다. 이번엔 양신이 석해에게 단도를 내밀면서 물었다.

"석해, 이건 자네 단도가 아닌가?"

석해는 안색이 변한 채 고개만 끄덕여 보였다.

"동료 선인이 내게 이 단도를 주면서 자네가 여기서 기다린다는 말을 했네. 때문에 나는 믿음이 가서 이곳으로 온 것일세."

연개소문은 다시 구조리를 추긍하듯 말했다.

"구조리 선인은 추이성에서 두모 선인을 시켜 그 단도를 호위 선인에게 보이고 이곳으로 오게 만든 장본인이 아니오? 그런 일을 직접 하면 되지 왜 남에게 시켰는지 그에 대한 해명을 해 보시오."

구조리는 여전히 입을 다물고만 있고 연개소문이 석해에게 물었다.

"이번엔 단검의 임자에게 묻겠소. 이 단검을 누구에게 주었소?"

석해는 그 질문에 대답을 못했고 장대가 입을 열었다.

"석해, 구조리님에게 내드렸다는 말을 왜 못하는가?"

양신은 그 때부터 구조리를 노려보는 눈길이 되었다. 구조리는 모든 게 들통이 나게 되자 얼굴색을 붉히면서 반발했다.

"호위 선인, 그걸 내게 아무리 물어도 대답을 할 수가 없소."

연개소문은 그런 구조리에게 압박을 가했다.

"구조리 선인, 사실대로 말을 하지 않으면 합하께 보고하겠소."

구조리는 좀 두려운듯 뜻밖의 대답을 했다.

"내가 하는 일은 모두 장안성의 지시를 받고 하는 일이요. 그러므로 호위 선인과 시동 선인은 날 추궁할 권한이 없고 더 묻지도 마오."

양신은 그래도 물러 설 수가 없었다.

"구조리 선인은 장안성의 누구 지시를 받고 있단 말이요?"

"그건 말할 수가 없다고 하지 않았소?"

연개소문은 이번엔 석해에게 시선을 돌렸다.

"단검의 주인에게 또 묻겠소. 그대는 밀두도를 회수하려고 이곳에 온 것으로 아는데 그 명은 철장으로부터 직접 받은 것이요?"

석해는 여전히 대답을 않고 구조리가 나섰다.

"철장께선 그 명령을 내게 내리셨소. 그러나 내가 말하면 호위 선인이 믿질 않고 명을 따르려 하지 않을 것 같아서 석해에게 시킨 것이요."

구조리 대답에 석해는 겨우 입을 떼었다.

"양신, 나는 구조리님의 지시를 따랐을 뿐 아무것도 아는 게 없네."

석해가 그런 말을 하자 구조리는 꽥 소리를 질렀다.

"석해, 철장께선 너희들에게도 그런 말씀을 분명히 하셨다."

양신은 석해를 윽박지르는 구조리에게 따지고 들었다.

"구조리 선인, 석해가 당신 부하요? 왜 딱딱거리는 거요? 그리고 구조리 선인이 하는 말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소. 그동안에 한 말이나 행동은 너무도 미심쩍은 데가 많으므로 해명을 들어야만 하겠소."

구조리가 다시 입을 다물자 연개소문은 석해에게 물었다.

"단검의 주인은 호위 선인과 매우 가까운 친구가 아니오? 그런데 구조리 선인은 뭘 감추려는 듯한 태도만 보이고 있소. 그로인해 우리로 하여금 어떤 의심을 품게 만드는데 그 해명을 할 사람은 단검의 주인이요."

석해는 그 말에 더욱 고개만 떨구고 있고 장대가 또 입을 열었다.

"석해, 내가 모를 무슨 일이 있는가? 속 시원하게 밝혀 보게."

구조리는 그런 말을 하는 장대에게 또다시 버럭 소리를 질렀다.

"장대, 그 아가리를 닥치지 못하겠는가?"

장대도 움찔해서 말을 더 못하자 양신이 물었다.

"구조리 선인, 선도해 조의님은 내가 순무 병단에 든 걸 아시오?"

양신의 질문에 구조리는 갑자기 태도가 뻣뻣해졌다.

"호위 선인은 그걸 모르고 있는 줄 알았소? 내가 뭘 감춘다고 보는 모양인데 도리어 찔리는 점이 있는 쪽은 그 쪽이요. 이젠 다 알려진 사실이라 내가 굳이 입을 다물고 있을 필요가 없다는 생각에 말하겠소."

"구조리 선인, 이젠 다 알려진 사실이란 건 무슨 뜻이요?"

"그건 내가 관여할 문제가 아니므로 입을 열기가 좀 뭣하오."

연개소문이 그러는 구조리를 다시 강박했다.

"구조리 선인, 말을 하겠다고 했으면 해야지 왜 또 딴소리요?"

"나는 밝힐 게 아무 것도 없는데 뭘 밝히라는 거요?"

구조리가 뚱딴지같은 대꾸를 하자 연개소문은 으름장을 놨다.

"구조리 선인이 이랬다저랬다 하면 합하께 보고를 하겠소."

"합하께 무슨 보고를 한단 말이요?"

"우릴 속여 근무지를 이탈하게 만든 건 군법에 회부될 일이요."

"시동 선인, 모르는 말은 그만 하오. 철장이 밀두도를 회수하게 된 것은 위에서 내려진 지시 때문이요. 다시 말하면 장안성의 지시란 말요."

양신은 그 말에 서서히 안색이 굳어들지 않을 수가 없었다.

"구조리 선인, 장안성의 지시라면 누가 내린 지시요?"

"그건 말할 수가 없소."

구조리가 또 뒤로 빼자 연개소문은 더욱 강경한 투로 말했다.

"구조리 선인은 이 일에 개입을 한 당사자가 아니요? 나는 합하께 보고하기 위해 호위 선인과 함께 추이성으로 데려가야 하겠소."

연개소문의 말에 구조리는 좀 꺼리는 투로 물었다.

"호위 선인은 대체 내게서 뭘 알고 싶은 게 있어서 이러오?"

"혹시 왕제 저하가 내리신 지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인데 그렇소?"

구조리는 그 말에 가타부타 말이 없이 야릇한 미소만 지어보였다.

양신은 그제야 알만하다는 표정이 되었다. 그리고 자신이 어떤 입장에 처했음을 알만해졌다. 지금까지 벌어진 일들을 놓고 추리를 해 본 결론은 이번 일에는 맨 꼭대기에 건무가 있고 그 중간에 도해선이 있고 그 밑에서 구조리가 움직이는 것이란 판단을 했다.

구조리는 양신을 누르려 듯 입을 열었다.

"호위 선인은 더 알려고 해선 좋을 게 없겠소. 이쯤에서 접는 게 본인의 신상을 위해서도 좋을 듯싶으니 얘기는 이만으로 그칩시다."

양신은 그 말에 잠자코 있는데 구조리가 한 마디를 더했다.

"호위 선인은 큰 잘못을 저지른 사람인 것을 알기나 하오?"

"내가 무슨 큰 잘못을 저질렀다는 말이요?"

양신의 반문에 구조리는 비웃듯 대꾸했다.

"호위 선인은 여선부인의 양오라비가 아니오? 그런데 장안성에서 숨어 지내며 왕제 저하께 인사도 드리질 않았소. 그 이유가 대체 뭐요?"

양신이 굳은 표정으로 대답을 못하자 구조리는 의기양양하듯 말했다.

"호위 선인은 왕제 저하를 장안성 남문에서 직접 뵙고도 인사를 드리지 않았소. 당연히 해야 할 도린데 그러질 않은 이유가 뭐요? 과거사야 어찌 되었건 저하의 처남이 되었으면 자중해야 할 처지가 아니겠소?"

구조리의 질책 비슷한 말은 더 이어졌다.

"왕제 저하께선 곧 제위에 오르실 분이요. 호위 선인은 그런 분에게 큰 무례를 저질렀소. 저하께서 매우 괘씸하게 여기실 것은 당연하오. 거기다 저하께선 호위 선인에게 어떤 의문까지 품고 계신 걸로 알려졌소. 그런저런 일들로 철장에게 파문시키라는 명을 내리신 것이요."

양신은 그런 말을 듣고 나자 두려움보다 반감이 터 컸다. 다만 여선에게 좋지 않을 무슨 영향을 끼치게 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일었다. 그때 구조리가 명령조로 입을 열었다.

"호위 선인은 지금부터 해야 할 일이 있소."

"무슨 일이요?"

"그 말은 석해와 장대를 돌려보낸 뒤에 하겠소."

구조리는 말하고 석해를 돌아다보고 명령했다.

"두 사람은 즉시 여길 떠나라. 그리고 내가 시킨 대로 하라."

장대는 그 말을 듣고 양신을 향해 급히 입을 열었다.

"양신 야좌, 철장님은 파문하지 않으려고 하시네. 장안성으로 가서 왕제 저하를 만나 뵙고 자네의 목숨을 구해 보겠단 말씀도 하셨네."

"장대, 쓸데없는 소린 그만하고 썩 꺼지지 못하겠는가?"

그러자 석해는 양신에게 급히 작별 인사를 했다.

"양신 야좌. 이만 헤어져야 하겠네."

장대가 물었다.

"양신 야좌, 다갈촌에 올 거지?"

양신이 대답했다.

"석해, 장대, 나는 다갈촌으로 곧 갈 것일세."

양신이 그런 말을 하자 구조리는 비웃듯 물었다.

"파문될 호위 선인은 무슨 낯으로 다갈촌에 갈 생각을 하오?"

구조리의 말에 양신은 고개를 저었다. 사부와 자신은 서로를 애석하게 여기며 상련(相憐)하는 사이였다. 때문에 언제나 자신의 마음속에 늘 있는 사부를 그냥 만나면 되지 무슨 병명이 필요할까 싶었다.

"석해, 나도 함께 가세."

양신이 따라 나서려고 하자 석해는 당황한 듯 말했다.

"우린 다갈촌으로 가는 게 아니고 용원성으로 가네."

그렇게 대답한 석해는 장대의 팔을 잡아끌듯 떠났다. 양신도 따라 가려고 하자 구조리가 앞을 가로 막았다.

"호위 선인은 여기서 만나야 할 사람들이 있소."

"내가 누굴 만난단 말이요?"

"왕제 저하께서 보낸 사람들이므로 만나야 만하오."

구조리의 대답에 양신은 몸을 굳히게 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석해와 장대는 길이 아닌 건너 쪽 산속으로 들어가는 게 보였다.

양신은 구조리에게 물었다.

"왕제 저하께서 무슨 일로 내게 사람들을 보낸단 말이요?"

"그건 그 사람들에게 물어볼 일이요."

"나는 만나고 싶지가 않소. 추이성으로 그냥 떠나겠소."

"호위 선인은 그들을 꼭 만나야만 하오. 만약에 피한다면 장안성으로 불려가 문책을 당하게 될 것이요. 나는 용무를 마쳤으니 이만 떠나오."

구조리는 그런 말만 던지고 말에 올라 그곳을 떠났다. 그런데 그 역시 조금 전에 석해와 장대가 들어 간 산속으로 들어갔다. 양신은 참담해지는 심경으로 서 있기만 하는데 연개소문이 말했다.

"구조리 선인은 왕제 저하를 쳐들면서 형에게 협박을 했소. 내 생각인데 우린 여길 그만 뜨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요."

연개소문은 말하고 망연자실로 서 있는 양신의 손을 잡았다.

"왕제 저하가 보낸 사람들이라니 그냥 떠날 수가 없지 않는가?"

"그렇다면 언제 나타날지 모르니 절에 들어가서 요기라도 합시다. 나는 배가 고파서 못 견디겠소. 이리로 온다니 먹고 오면 되지 않겠소?"

연개소문은 양신을 끌고 오골사 안으로 들어가서 점심을 청해서 얻어먹었다. 양신은 사부에게 죄송하고 착잡한 심경이라 또 입을 열었다.

"시동 선인, 나는 이대로 발길을 돌리기엔 사부님에게 너무 죄송스럽네. 그 사람들을 만난 뒤 다갈촌으로 가려고 하네. 부지런히 다녀오면 밤중에는 추이성에 도착할 것 같으니 먼저 추이성으로 떠나게."

연개소문은 고개를 저었다.

"형, 합하의 허락을 받고 철장을 만나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요."

양신은 앞장을 서는 연개소문을 따라 절에서 나왔다.

때마침 제울 일행도 오골사에 막 당도했다. 일행은 2필의 말들이 매어 있는 데가 있는 걸 보고 그 쪽으로 향했다. 양신은 말을 탄 여러 사람들이 오는 걸 보면서 자기를 만나러 온 사람들로 여겼다. 그런데 그들 중엔 뜻밖에도 제울이 있는 것을 보고 반갑게 외쳤다.

"제울님이 아니십니까? 여기는 어떻게 오셨습니까?"

"양신 야좌, 잘 만났소."

제울은 말에서 내려 급히 양신에게 다가들었다. 양신은 그의 뒤를 따라오는 사람에게 눈길을 돌리다가 소스라치게 놀랐다.

"여선?!"

양신은 외치면서 달려가서 말에서 내리는 주랑을 덥석 끌어안았다.

연개소문은 그러는 광경을 보고 크게 놀라고 말았다. 장안성에 있어야 할 여선부인이 어떻게 이곳에 나타날 수가 있는지 어안이 벙벙한데 양신이 여인에게 이마를 맞대어 기가 막혔다.

"여선아, 네가 여기로 오다니?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냐? 혹시 장안성에서 도망이라도 친 게 아니냐?"

주랑은 또 착각을 하는 앙신에게 말했다.

"양신 오라버니, 저는 가잠성에서 만났던 주랑예요."

"주랑이라고?"

양신은 급히 몸을 떼고 주랑을 다시 찬찬히 보는데 제울이 말했다.

"양신, 여기서 급히 몸을 피해야 되겠네."

"제울님, 저보고 왜 몸을 피하라고 하십니까?"

"자네 목숨을 노리는 한족 무리가 저 산 속에 있네."

양신은 안색이 변하면서 구조리가 그리로 간 것을 떠올렸다.

"제울님, 그들이 한족이라고 하셨습니까?"

"한족들이 분명하네. 나는 한족들과 같은 객줏집에서 머물며 그들이 나누는 얘길 엿듣고 자넬 해치려는 자들임을 알고 뒤를 따라 온 걸세."

"저를 해치려는 자들이라고 하셨습니까?"

"그럴세, 분명한 사실일세."

"한족이란 자들이 모두 몇 명이나 됩니까?"

"모두 여섯 명일세. 그런데 더욱 이상한 점은 고구려 군관이 그들과 함께 움직이는 점일세. 나로선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을 일이야."

"그 중에 고구려 군관이 끼어 있다니 확실합니까?"

양신의 질문에 연개소문은 구조리를 떠올렸다.

"혹시 고구려 군관의 형모가 어떤지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키가 작고 땅땅한 몸집인데 안색이 매우 검은 편이요."

제울의 말에 연개소문은 양신을 돌아다 봤다.

"형, 구조리 선인이 분명하오."

양신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인 뒤 급히 말했다.

"시동 선인은 혼자서 급히 추이성으로 떠나게."

연개소문이 반문했다.

"나 혼자서 떠나라니 무슨 소리요?"

"여긴 곧 위험한 사태가 벌어질 것 같네."

양신은 그렇게 이른 뒤 제울에게도 말했다.

"제울님도 일행과 함께 여길 떠나 주십시오. 여긴 위험합니다."

"형도 함께 떠납시다."

"그러면 안 되네. 한족들은 건무 저하가 보낸 자들이 분명하네. 구조리 선인의 말대로 나는 한족들을 만나지 않을 수가 없겠네."

"형, 여기에 있다간 그 자들에게 목숨을 잃을지도 모르오."

연개소문의 말에 제울도 거들었다.

"양신, 몸을 피하는 게 좋겠네."

양신은 제울에게 물었다.

"한족들이 바로 저 산속에 있는 게 분명합니까?"

"그럴세. 그들은 지금 여길 보고 있을 것일세."

제울이 가리킨 산엔 석해와 장대를 따라서 구조리도 들어갔다.

"형, 구조리 선인도 조금 전에 저 산속으로 들어가지 않았소?"

그런 말을 나누고 있는데 산 속에서 태산팔협이 나오고 있었다.

"양신, 저 자들이 바로 그 한족들일세."

제울의 말에 양신이 긴장하듯 중얼거렸다.

"저자들은 제가 한족입니다."

"형이 저 자들을 체포한 게 분명하오?"

"맞네. 체포된 수국 첩자들일세."

"그렇다면 저들이 어떻게 감옥에서 나올 수가 있었단 말인가?"

연개소문은 반문을 하며 건무 왕제가 풀어준 것이란 판단을 내렸다.

태산팔협은 모두가 지켜보는 가운데 점점 가깝게 다가들고 있었다. 제울은 걱정스럽다는 듯 양신에게 물었다.

"양신, 저 자들이 태산팔협이란 게 확실한가?"

"저들 스스로가 밝혔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양신의 대꾸에 제울은 매우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저들이 양신을 노린다면 여간 큰 문제가 아닐세. 저들은 중원 땅에서 무예의 고수들로 알려졌네. 더욱이 여럿을 감당하긴 어렵겠어!"

연개소문은 그 말을 듣고 몹시 긴장이 된듯 말했다.

"형, 아무래도 우리는 큰 위기에 몰린 것 같소."

양신은 무겁게 고개만 끄덕여 보였다.

"형, 지금이라도 여길 떠납시다."

연개소문이 다급하게 말을 했지만 태산팔협은 지근거리를 두고 멈추어 섰다. 그러더니 우두머리인 듯한 자가 앞으로 나서 양신을 손으로 가리키며 큰 소리로 입을 열었다.

"양신, 다시 만나게 되었군? 우리를 알아보겠는가?"

양신은 굳은 음성으로 반문했다.

"그대들은 어떻게 이곳에 올 수가 있었는가?"

"그런 걸 물어서 뭘 하겠단 소린가? 우리 통성명부터 하기로 하자. 나는 태산팔협의 맏형인 옹장이다."

옹장이 자신의 이름을 밝히자 양신도 응대했다.

"내 이름은 양신이다."

"우리는 서로 이름도 모른 체 악연으로 얽힌 사이가 되었군."

"그렇게 되었는데 날 만나려는 이유는 무엇인가?"

"나는 그대와 재대결을 하려고 왔다."

양신은 그 말을 듣고 물었다.

"구조리 선인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옹장은 그 질문에 희죽이 웃으며 대답했다.

"양신, 그걸 물어서 뭣하겠나? 당장 자신이 처한 처지에 대한 앞가림을 할 방도나 차리는 게 더 중요하지 않겠나?"

"묻는 말에나 대답을 하오."

"구조리 선인은 여길 떠났다."

"조금 전에 나보고 앞가림을 할 방도를 차리라니 그건 무슨 말인가?"

"나는 태산팔협의 실추된 명예를 회복하려고 왔다."

"나보고 재대결을 하자는데 어떻게 하겠다는 말인가?"

양신의 질문에 옹장은 잠시 무슨 생각에 잠긴듯하다가 입을 열었다.

"어떻게 할까?"

옹장은 그런 말을 하고 동료들을 둘러보았다.

"형님 어떻게 하고 말고가 어딨소? 얼른 저 놈의 목을 벱시다."

양신은 그 말을 받듯 제울을 향해 나직이 일렀다.

"제울님, 저 자들은 매우 위험합니다. 저 때문에 제울님이 해를 당해선 안 되므로 일행과 함께 즉시 여기를 떠나십시오."

제울이 반문했다.

"양신, 무슨 소릴 하는가? 위험 속에 우리보고 도망을 치라니?"

주랑도 가세하듯 입을 열었다.

"양신 오라버니, 저는 도망치지 않겠어요."

양신은 매우 난처한 표정으로 말했다.

"두 분은 아무런 관련도 없는 일에 끼어들지 마시오."

연개소문도 불안한 가운데 주랑에게 자꾸 눈길을 주고 있었다. 남장을 한 여인임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싸울 태세를 보이자 여간 맹랑하고 흥미가 일지 않았다.

한편 태산팔협도 저희들끼리 무슨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옹장 형님, 구조리 선인이 우리를 속인 것 같습니다."

"우릴 속이다니 무슨 소린가?"

"이곳엔 양신과 연개소문이란 자 단 둘만 있다고 했지 않습니까? 그런데 저렇게 많은 인원이 모여 있으니 어찌해야 좋겠습니까?"

다른 자가 말했다.

"저들은 우리가 묵었던 객주 집에서 보았소. 장사치로 가장하고 그동안 우리들 움직임을 살피고 있었던 게 분명합니다."

"그렇습니다. 아무래도 불리하니 고향으로 얼른 돌아갑시다."

"나도 그게 상책인 것 같습니다."

"양신의 얼굴이나 똑똑히 봐두고 나중에 도모해야 합니다."

옹장은 그런 말들이나 하는 동료들을 강하게 눌렀다.

"이런 겁쟁이들 같으니! 자신감을 갖고 용기를 내라."

"옹장 형님, 적지에서 불리할 땐 피하는 게 당연하지 않습니까?"

옹장은 뒤로 빼려는 태도를 보이는 동료들을 설득하려고 들었다.

"구조리 선인은 연개소문의 무예는 맹탕이라고 하지 않았는가? 양신을 처치하고 연개소문을 잡아가면 쓸모가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나머지의 실력을 모르지 않습니까?"

태산팔협은 대부분이 반대를 했지만 옹장은 화를 버럭 냈다.

"시끄럽다. 나 혼자서라도 싸울 테니 떠날 자는 떠나라."

옹장의 단호한 태도에 난처한 동료들 중 하나가 제안을 했다.

"일단 붙어봤다가 불리하면 그때 도망을 칩시다."

반면 양신과 연개소문도 의논이 분분했다.

"형, 가까운 용원성으로 피해 병력을 지원받아 체포하는 게 좋겠소."

"모두 여길 급히 떠납시다."

양신은 말하고 먼저 말에 오르자 제울도 단원들에게 명령했다.

"모두 말을 타라."

모두는 급히 말에 오른 뒤 북쪽으로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태산팔협도 황급히 말을 타고 뒤를 쫓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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