쇠나라 26. 재대결

26. 재대결

by 정완기

26. 재대결(再對決)



두 무리는 떼를 지어 허허벌판을 달렸다.

도망을 치는 양신과 쫓는 제울 일행은 기를 쓰듯 말을 달렸다. 그러나 약제를 실은 말들은 속력을 낼 수가 없어 추격하는 태산팔협과 거리가 점점 좁혀 들어 긴박한 상황에 처하고 말았다.

쫓기는 자와 쫓는 자는 다 같이 머릿속들이 복잡했다. 양신은 수국 첩자를 체포할 의무가 있고, 복수욕에 불타는 태산팔협은 적지에서 이럴 때가 아니라 빨리 본국으로 도망을 쳐야만 했다.

태산팔협은 점점 육박해들다가 마침내 추월해 버렸다. 추월을 당한 양신 일행은 끝내 움직임을 멈추었다. 양쪽은 드디어 대결로 들어가게 되었다. 양쪽은 모두 칼들을 뽑아 들었다.

양신은 여간 남감하지가 않았다. 상대편의 무예실력은 상당한 수준인데 제울 상단은 어느 정도인지 몰랐다. 자신은 괜찮으나 다른 사람들이 다치는 건 큰 문제로 여간 큰 부담감을 느끼지 않았다. 특히 연개소문과 주랑에 대한 걱정 때문에 더욱 그랬다.

그때 옹장이 고구려 말로 외쳤다.

"양신, 비겁하게 도망을 치다니!"

주랑은 그 말을 듣고 마상에서 성급히 내리려고 했다. 그것을 본 양신은 기겁을 하며 손을 내저어 제지시켰다. 그러나 이미 양쪽은 대결 구도로 들어간 상태가 되고 말았다.

양신은 집단 대결만은 막겠다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어떻게 막아야 할지 방법이 없었다. 우선 마음부터 진정을 시키면서 태산팔협과 협상을 시도해 볼 마음을 먹고 입을 열었다.

"나는 태산팔협의 입장을 충분히 이해할만 하오."

양신의 엉뚱한 말에 옹장은 고구려 말로 반문했다.

"뭘 이해를 한다는 말인가?"

"동료 두 명이 목숨을 잃었으므로 반감이 매우 클 것이요."

"그래서 이해를 한다? 이제 보니 아주 넉살이 좋은 자로군?"

"그렇지만 불행한 사태를 빚게 만든 원인은 그 쪽에 있지 않소?"

양신의 지적에 옹장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우린 그런 걸 따지려는 게 아니다!"

"그 쪽은 적국의 첩자들로 침입을 했고, 나는 군인으로써 체포를 하는 건 당연한 임무 수행이요. 그러다가 빚어진 일이었소."

"양신, 당연한 임무고 뭐건 간에 우린 복수를 하면 그만이다."

"이건 내 개인에 국한될 일로 그 쪽과 사감은 없소."

"나도 사감은 없지만 큰 피해를 입고 자존심이 무참하게 깎였다. 그걸 회복하기 위한 응징을 가하려는 것일 뿐이다."

옹장이 복수의 일념만 드러내자 양신은 또 엉뚱한 질문을 던졌다.

"태산팔협이란 대체 뭘 하는 사람들이요?"

그 말에 옹장은 우거지상만 짓고 제울이 대신 입을 열었다.

"양신, 태산팔협은 중원 땅에서 명성이 높은 무림의 고수들일세."

옹장은 그 말을 듣고 거만한 태도가 되며 제울을 향해 입을 열었다.

"여기에 우릴 알아주는 사람이 다 있었다니?! 노형은 누구시오?"

"나는 신라 상인으로 이름은 제울이라고 하오."

"제울님은 신라인이 맞소? 그런데 왜 고구려 땅에 와 있소?"

"장사 차 왔으며 양신과는 전부터 알고 지내는 사이였소."

"그랬구려? 솔직히 말해 우린 양신에게 큰 수모를 당한 처지요. 신라 상단의 대원들도 무예를 지녔겠지만 우리완 무관한 사이요. 제울님은 우리에 대해 아는 바가 있다면 무식한 양신에게 설명해 주시오."

제울은 고개를 끄덕이고 정중한 태도로 그 말을 받았다.

"나는 양쪽이 무슨 일로 얽힌 사연인지를 전혀 모르나 무예를 조금 익힌 터라 관심이 큰 중원 쪽의 사정을 아는 대로 말을 하겠소."

제울을 그렇게 입을 떼고 다음과 같은 설명을 덧붙였다.

중원에선 오호십육국(五胡十六國)이 난립하던 시기에 무예에 관한 사람들의 관심이 높아졌다. 때문에 무예를 수련하는 자들이 크게 늘어났는데 그중 태산노련(泰山櫓連) 유고진인(唯皐眞人)은 명성이 가장 높았다. 태산팔협은 그의 수제자 8명이 의형제를 맺고 결사체를 이룬 것으로 그 중 맏형인 옹장(翁章)은 수국에선 최고수로 치는 인물이었다.

제울은 약간 아부성을 띤 말을 했고 옹장은 거만하게 입을 열었다.

"무식한 양신, 이젠 우리가 누군지 알만 하겠는가?"

양신은 그 말에 잠자코만 있는데 제울이 다시 입을 열었다.

"옹장진인은 칠절편의 최고수요."

제울이 치켜세우는 말에 태산팔협 중 하나가 입을 열었다.

"우리가 저 자에게 당한 이유는 단 한가지요. 단병기로 장도를 상대했기 때문인데 우리도 이젠 우리도 장도를 지녔으니 한번 붙어볼 만하다."

"양신이란 자의 목은 내가 베어서 먼저 간 형제들 영전에 바치겠다."

옹장은 동생들의 분심에 찬 말들을 듣고 양신을 향해 외쳤다.

"양신, 더 이상 도망칠 생각은 말고 말에서 내려라."

양신은 그 말을 들을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대결을 피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특히 검술실력이 없는 연개소문이 실전에 휘말리게 되면 안 되었다. 때문에 어떻게든 집단 대결은 막던지 피해야만 했다.

옹장도 겉으론 강경한 태도를 보였지만 속은 그렇지가 못했다. 양신의 무술 실력이 너무 뛰어나 여섯 명이 함께 덮쳐야 얼른 요절을 낼 수가 있을 것 같은데 상대 쪽의 인원이 많아 그마저도 쉽지가 않을 일이었다.

양신은 옹장을 더 구슬리려고 정중하게 입을 떼었다.

"태산팔협 형제들 중 유명을 달리한 두 분께 심심한 조의를 표하오."

연개소문은 그 말을 듣고 반발했다.

"호위 선인, 무슨 소리요? 조의를 표하다니 말도 안 되오."

옹장은 그러는 연개소문에게 도끼눈을 떴다.

"나는 애송이 군관은 입을 닥치지 못할까? 나는 그대가 서부 대인인 연태조의 장자임을 알고 있다."

연개소문은 뜻밖의 말을 듣고 내심 여간 놀라지 않았다.

"아니?! 어떻게 내 이름을 알았단 말인가?"

"다 아는 수가 있다."

옹장은 구조리로부터 얻은 여러 정보를 갖고 있었기 때문에 그런 말을 했다. 양신은 그 말을 듣고 더욱 걱정이 커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불안감을 감추고자 애를 쓰며 부드러운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나는 옹장진인에게 이런 제안을 하겠소."

"양신, 무슨 제안을 할 게 있단 말인가?"

"우리 일행은 날 빼면 모두 그 쪽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사람들이요. 그런데 공연히 집단 대결을 벌이게 되면 많은 인명피해가 날 수도 있으므로 그걸 막자는 생각을 하고 있소."

"그래서 어쩌자는 것인가?"

"나는 당사자이므로 당연히 나서야 할 일이요. 그러나 혼자서 태산팔협의 여섯 명을 상대한다면 그 쪽의 체면을 구기는 일이 되겠소. 그러므로 그쪽의 대표가 나와서 대결을 벌이면 어떻겠소?"

"양신, 단독대결을 벌이겠다면 날 원하는 말인가?"

"그야 물론이요. 태산팔협의 맏형인 옹장진인이 나서야 하지 않겠소?"

옹장은 속으로 뜨끔했으나 겉으론 가소롭다는 표정을 지었다.

"양신, 무슨 수를 쓰려고 잔머리를 굴리고 있는가?"

"단 둘만이 해결을 보자는 데 무슨 잔머리를 굴릴 게 있겠소?"

"그대가 단 둘만의 대결을 원하는 것은 다른 속셈 때문이다."

"다른 속셈이란 게 대체 뭐란 말이요?"

"그렇게 되면 나머진 여길 뜨려는 수작이다. 용원성으로 달려가서 대병력을 끌고 오려는 속셈을 누가 모를 줄 아는가? 그렇게 되면 우린 또다시 위험에 처하게 될 것인데 거기에 속을 것으로 봤는가? 이제부터 여길 뜨려는 움직임을 보이는 자는 먼저 목을 쳐 버리겠다."

연개소문은 그런 엄포에 겁이 나면서도 자존심이 매우 상했다.

"수국 첩자들이 감히 누굴 협박하는가? 전부 포박해서 연행하겠다."

"연개소문, 우릴 포박해 연행을 하겠다고?"

옹장의 말에 다른 자가 한 마디 했다.

"연개소문, 다른 자들은 그냥 놔두더라도 너만은 내 손으로 잡아서 중원 땅으로 끌고 가려고 한다."

연개소문은 그 말에 속으로 뜨끔해서 입을 다문 채 양신만 돌아다 봤다. 양신도 태산팔협이 연개소문을 노린다면 여간 큰일 아닌데 옹장이 장도를 빼어들자 그걸 보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옹장, 그대가 어떻게 밀두도를 지니고 있단 말인가?"

옹장은 흐릿한 웃음을 머금고 대꾸를 했다.

"양신, 매우 놀랐는가? 보다시피 밀두도는 내 손에 있다."

양신은 석해에게 넘겨준 밀두도가 왜 옹장의 손에 들어간 것인지 그 이유를 알 수가 없을뿐더러 너무도 기가 차 목소리마저 떨려 나왔다.

"옹장, 내가 묻는 말에나 대답을 하라."

"밀두도는 네 친구인 석해로부터 넘겨받은 것이다."

"석해가 그냥 내줬을 리는 없을 것이다."

"물론이다. 다갈촌의 보배를 순순히 내놓을 리가 없지."

"빼앗은 것인가? 그렇다면 석해와 장대는 어찌 되었는가?"

양신은 점점 사색이 되는데 옹장은 느물거리듯 대꾸했다.

"두 사람이 어떻게 됐는지를 알면 네 속은 더욱 뒤집힐 걸!"

"옹장, 빨리 말을 해라."

"하잘 것 없는 두 놈의 목숨쯤 빼앗긴 식은 죽 먹기다. 그러나 우린 다갈촌에서 융숭한 대접을 받은 터라 염치를 차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두 놈의 목숨은 붙어 있으나 시간이 지나면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

"대체 두 사람을 어떻게 해놓고 그런 소릴 하는가?"

양신은 애가 닳는데 옹장은 더욱 겁을 주려는 듯 말했다.

"두 놈은 입에 재갈이 물린 채 결박을 당해 큰 고목에 매달려 있다. 그대로 오늘 밤을 새우고 나면 얼어 죽을 수도 있을지 모르겠다."

"뭣이?! 그 장소를 얼른 대지 못하겠는가?"

"양신, 너는 곧 목이 떨어질 주제인데 장소를 알면 어쩔 것인가?"

옹장의 말에 태산팔협 형제들은 일제히 웃음을 터뜨렸다. 양신은 그 순간 칼을 뽑으려 했으나 지닌 게 없었다. 크게 당황하고 마는데 옆에 있던 제울이 얼른 자신의 장도를 넘겨주었다.

"양신, 우리도 미력하나마 힘을 보태겠네."

제울의 말에 주랑도 거들었다.

"양신 오라버니, 저도 싸우겠어요."

양신은 그러는 두 사람을 강하게 눌렀다.

"가만히들 계시오. 이건 내게 국한된 일일 뿐이요!"

그렇게 가로막은 양신은 태산팔협의 석방은 건무 왕제에 의한 일로 여겨졌다. 때문에 그들과 충돌을 빚는 것도 여러 면으로 좋을 게 없을 일로 판단이 되었다. 그러나 석해와 장대를 구해내야 하는 건 물론이고 밀두도 또한 회수를 해야만 했다. 그러므로 충돌도 불사할 일이지만 집단 대결을 피해야만 해서 다시 무겁게 입을 떼었다.

"옹장, 그대가 원하는 것은 내 목을 치는 것뿐이 아니겠소?"

"그야 물론이다. 순순히 목을 내놓을 텐가?"

"옹장, 그대는 중원 땅에서 무예로 명성을 크게 떨치는 사람이요. 그러니 나와 단독 대결을 펼쳐서 뜻을 이룰 수가 있지 않겠소? 나도 중원의 최고수와 겨루다 죽으면 부끄러울 게 없을 것이니 그렇게 해봅시다."

양신의 말에 옹장은 좀 망설이듯 입을 열었다.

"양신, 그대가 그걸 원한다면 못할 게 없으나 생각해 볼 점이 있다."

"생각할 점은 무엇이요?"

옹장은 또 야릇한 미소를 지으면서 대답했다.

"나는 그대가 집단 대결을 무척 꺼리는 이유를 잘 알고 있다."

양신은 그 말에 비위를 더욱 긁으려 듯 입을 열었다.

"옹장, 단 둘만의 대결에 자신이 없어서 딴 소리만 자꾸 할 셈이요?"

"양신, 그대가 애원을 하듯 조르는 심경은 알만하네. 그러나 우리 형제들은 그걸 어떻게 생각할지를 모르니 의견을 들어볼 필요가 있겠다."

그런 말은 형제들에게 어떤 암시를 주려는 의도가 담겨져 있었다.

"옹장, 그대가 내리는 판단은 형제들이 모두 따라야 하지 않겠소?"

"그렇지만 내 마음대로만 해선 안 될 일도 있다."

옹장은 군색한 대답만 자꾸 했고 양신은 더욱 압박을 가하려고 했다.

"만약에 단독 대결에 응해 준다면 나로선 해둘 말이 있소."

"무슨 말을 하겠다는 것인가?"

"옹장진인이 날 제압하게 되면 가차 없이 내 목숨을 빼앗을 것이오. 그러나 그 반대가 될 경우 나는 옹장진인의 목숨을 빼앗지 않겠소."

옹장은 그 말을 듣고 자존심이 매우 상해 욱하는 감정이 치밀었다. 그러나 그걸 꾹 누르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동안 자신은 동생들에게 양신에 대한 복수를 꼭 하겠다는 다짐을 했었다. 그런데 목숨을 잃을 걸 두려워해 단독 대결은 피하려는 태도를 계속 보여선 체면이 말이 아니게 되었다. 그런데 목숨을 보장받을 수가 있다면 달리 생각할 일었다.

"양신, 그런 말을 하는 건 대신 무슨 요구를 하려는 게 아닐까?"

"그렇소. 밀두도를 내놓고 석해와 장대가 있는 곳을 대주시오. 그렇게 하지 않을 경우엔 나도 집단 대결을 불사하지 않게 될 것이요."

옹장은 그 말에 내심 마음이 좀 놓였다. 자신은 양신의 목을 베놓겠다는 큰 소릴 쳐 왔으나 혼자선 무리로 여겼다. 때문에 집단대결로 해결을 보려던 것이었는데 그마저도 쉽지가 않게 되었다. 왜냐하면 상대할 숫자가 많은데다 적지에서 오래 머물 수가 없어 그런 제의에 귀가 솔깃해지지 않을 수가 없었다.

"양신, 그대가 다른 사람들을 걱정하듯 내 심경도 마찬가지일세. 나도 형제들이 무사히 조국으로 돌아가길 바라는 마음일세."

"그러기 위해서라도 얼른 단독대결로 들어갑시다."

양신의 말에 태산팔협 형제들도 모두 고개를 끄덕여 수긍하는 태도를 보였다. 모두는 자국으로 무사히 돌아갈 것만 바라서 옹장이 응할지에 관심을 두는 태도들이었다. 더욱이 양신이 좋은 조건을 제시하며 요구하는 단독대결이라 받아들이길 바라는 마음이었다.

옹장은 동생들의 얼굴을 죽 둘러봤다. 모두의 속셈은 응할 걸 바랄 것이었다. 그런데 왠지 모르게 양신의 말에 믿음이 갔다. 또 의심 때문에 거부할 경우 자신의 체면은 말이 아니게 되었다. 거기다 자신이 상대의 목을 베어놓으면 더 할 수 없이 좋고 그렇지 못해도 자신의 안전이 보장된다면 거부를 해야만 할 일은 아니었다.

"양신, 그대의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하겠다."

"옹장, 그러면 먼저 석해와 장대가 있는 곳부터 대주시오."

"나는 오골사 부근엔 폭포가 세 군데나 있다고 들었다. 그 중 한 곳에 있는 큰 소나무에 매달아 두었다."

"그 말을 믿어도 되겠소?"

"나는 그대 말을 믿고 단독대결을 수락했는데 그댄 왜 못 믿나?"

"좋소, 다른 사람들은 말에서 내리지 마시오."

양신은 대답하고 말에서 내리자 옹장도 뒤따라 내렸다.

두 사람은 곧 대결 태세로 들어갔다. 옹장은 얼굴에 흐릿한 웃음기를 머금은 채 먼저 기선을 제압하려 듯 공격에 나섰다. 양신은 밀두도가 양 허리께를 번갈아 후려드는 공격을 당했다.

양신은 상대의 현란하고 변화무쌍한 검술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그러나 과감하게 반격으로 맞섰지만 번번이 무위로 끝이 났다. 속으로 상대의 무예가 상당한 경지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다.

반면에 옹장은 얼굴에서 점점 흐린 웃음기가 사라져 가고 있었다. 상대의 칼날을 받을 때마다 너무도 강한 힘이 실려져 여간 큰 충격을 받지 않았다. 참으로 감당하기 힘든 완력 앞에 무서움마저 일었다.

두 사람은 다 같이 처음 적수를 만났다는 생각들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위기의식을 더 느끼는 쪽은 옹장이었다. 그는 무엇보다 힘에서 밀리게 되는 것에 자신감을 잃어갔다.

양신은 시간이 흐르면서 상대의 공격이 무디어짐을 느꼈다. 다만 상대의 현란한 공격 앞에 거의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그러나 상대도 방어에서 자주 헛점을 드러내고 있었다.

한 순간에 칼날이 얽혀진 두 사람은 다 같이 동작을 멈추었다. 힘에 의해 양쪽은 요지부동이 되었다. 그런 가운데 옹장은 너무도 강한 상대의 완력 앞에 맥이 빠지고 말았다.

옹장은 완전히 압도를 당한 채 상대가 내뿜는 거친 숨결을 들으며 이것으로 끝장이란 생각이 들고 무심한 눈길 앞에 공포감을 느꼈다. 그런데 양신은 팔뚝에 더욱 가했다.

양신이 그대로 밀어붙이자 떠밀리던 옹장의 몸은 끝내 튕겨지듯 나가 자빠졌다. 그러나 쓰러진 채 반사적인 공격을 가하려던 옹장은 그만 두고 자신이 패배를 스스로 인정했다.

옹장은 몸은 완전히 지쳤지만 정신만은 또렷했다. 아무리 혼신을 다하려고 해도 체력의 한계를 느껴 한순간의 실수라도 명줄이 저승으로 이어지게 될 것임을 절감하고 있다.

그런 두 사람을 지켜보는 관전자들은 숨을 죽였다. 누구보다 태산팔협 형제들은 창백해진 얼굴로 절망감을 느꼈다. 옹장의 기(技)보다 양신의 강한 세(勢)가 누르고 만 것이었다.

예측 불허의 승패는 끝이 났다. 태산팔협 형제들은 심한 불안감을 느끼면서도 모르는 점이 있었다. 그것은 상대의 칼을 받을 때마다 옹장의 팔뚝이 마비되듯 굳어든 일이었다.

양신도 공방전을 벌이면서 자신을 공격을 받을 때마다 상대의 몸이 자지러들 듯 움츠리는 자세를 보이는 걸 알았다. 때문에 강하고 빠른 공격의 강도를 점점 높여 상대가 균형감각을 상실하게 만들었다.

옹장이 양신은 지켜보기만 해서 겨우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안도감이 들자 그렇다면 극단적인 수법이라도 써보고 싶었다. 남은 힘을 모아 과감한 반격을 가함과 동시에 쨍강하는 금속성이 일었다.

그 순간 양신은 몸이 굳어들고 말았다. 그 이유는 자신의 장도가 두 동강이 났기 때문이었다. 놀라서 자루만 남은 장도를 땅바닥에 내던지고 재빨리 허리춤에서 단검을 뽑아들었다.

옹장은 순간 극도의 위기를 벗어났다는 판단에 얼굴엔 흐릿한 미소가 되살아났다. 그리고 갑자기 괴상한 웃음을 터뜨리자 단도를 쥔 양신은 허청거리는 발길로 뒷걸음질을 치게 되었다.

양신은 뒷걸음질을 계속 치며 나무들이 더욱 밀집한 곳으로 들어갔다.

얼굴에서 웃음기를 지운 옹장은 다시 트릿한 표정이 되었다. 이젠 상대에게 끝장을 가할 일만 남았다는 생각이었다.

옹장은 거의 흥분 상태에 이르렀다. 자신의 장도가 단검보다 먼저 상대를 요절을 낼 수가 있다는 자신감 때문이었다. 다른 자가 상대에게 장도를 넘겨주지 못하게 더욱 뒷걸음질을 치게 만들었다.

양신은 최대 위기에 빠져 들었지만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극도로 긴장한 상태 속에 침착성을 잃지 않았다. 단검의 약점을 극복하려면 지형지물을 이용할 생각을 하고 있었다.

옹장은 양신의 뒤걸음질이 유인책인 걸 모르고 다가들었다. 빨리 상대를 제압할 것만 노리고 간격을 좁혀들었다. 그러다가 두 사람 간의 거리는 불과 2, 3보 간격으로 좁혀지게 되었다.

드디어 양쪽은 움직임을 멈추었다. 모든 관전자는 이젠 결판이 난 걸로 보았다. 간격이 좁혀진 만큼 두 사람 사이에선 거친 숨소리만 높아지고 있었다. 양신은 모험을 걸 기회만 엿보는데 옹장이 희죽 웃었다.

"양신, 각오는 되었는가?"

승리감에 도취된 옹장은 그 말과 더불어 장도를 휘둘렀다. 공격을 받고 뒷걸음질을 치던 양신은 발이 무엇에 걸린 듯 쓰러졌고 옹장은 밀두도로 상대를 그대로 찔러버렸다.

그러나 밀두도를 받는 양신은 찰라적으로 몸을 틀었다. 동시에 강한 발길질을 상대방에 가했고 옹장은 뒤로 나가 자빠졌다. 그야말로 극적인 국면전환이 순간적으로 일어난 것이었다.

옹장은 그때 양신이 일부러 쓰러진 것을 모르고 기회로 삼으려고 했다. 그러나 방심이 부른 가격의 칼끝은 비껴졌고 도리어 강한 발길질의 타격을 받고 기회는 위기로 바뀌어졌다.

양신은 몸을 일으켰고 땅바닥에 얼굴을 쑤셔 박은 옹장은 신음 소리를 흘려냈다. 순간적인 역전 끝에 옹장의 손에선 밀두도를 빼앗은 양신은 높이 치켜들고 보는 이들을 아연케 만들었다.

태산팔협 형제들은 아연실색으로 모두는 말에서 뛰어내렸다. 그러나 양신의 칼끝은 옹장의 목을 겨누고 있었다. 허리를 못 쓰는 옹장은 고통으로 일그러진 얼굴로 말했다.

"양신, 그대는 약속한 바를 지켜주기 바란다."

양신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칼끝을 거두었다. 그리고 태산팔협 형제들에게 다가오라는 손짓을 했다. 모두는 주뼛대듯이 숲속으로 들어와 옹장을 부축해 일으켜 세웠다.

"우린 이만 여길 뜬다."

옹장은 말하고 형제들의 부축을 받고 말에 올랐다.

"옹장 진인, 여기서 국경까지 2천 여리요. 무사히 돌아가오."

양신의 말에 옹장은 고개만 끄덕이는데 연개소문이 언성을 높였다.

"호위 선인, 저 자들을 그냥 놔둘 생각이요?"

옹장은 일그러진 얼굴로 연개소문을 향해 대꾸했다.

"애송이 군관, 양신은 대인이다. 소인이 끼어들 자리가 아니다."

"옹장, 그 따위 소리를 한 번만 더 지껄이면 아가릴 찢어놓겠다."

태산팔협 형제들은 옹장에게 재촉을 했다.

"큰 형님, 대꾸를 마시고 얼른 떠나야 합니다."

연개소문은 또 이죽거렸다.

"수국 첩자들은 고구려 판도를 쉽게 벗어나긴 힘들 것이다."

옹장은 분노에 찬 음성으로 더욱 크게 외쳤다.

"연개소문, 뭘 모르는 소리는 작작 좀 하거라."

"내가 뭘 모른다는 소리를 하느냐?"

"건무 왕제께서 우릴 석방시킨 데는 다른 목적이 있기 때문이다."

"그게 대체 무슨 목적인지 한번 들어보고 싶다."

"건무 왕제는 고구려의 생존을 위해 화평을 모색하는 분이다. 화평은 지금부터 내손에 달렸음을 안다면 너는 도리어 고마워해야 한다."

"화평? 닥쳐라! 별 미친 소릴 다 듣는다."

"전쟁을 막으려고 애를 쓰는 건 건무 왕제뿐만이 아니시다. 수국에도 호응하는 사람들이 많다. 양국의 무고한 백성들이 고통을 받지 않게 하려는 일에 너처럼 철없는 자가 끼어들 일이 아니다."

"호위 선인, 저 따위 소리를 지껄이는 자를 두고만 볼 것이요?"

옹장은 그 말에 또 받아쳤다.

"나는 고구려의 국서를 지니고 있다. 건무 왕제께선 내가 안전한 통행을 보장받을 수 있게 패찰을 내주셨으므로 그만 입을 닥쳐라."

옹장은 씹어뱉듯 그 말을 던지고 말고삐를 채었다. 뒤를 따라 태산팔협 형제들도 말채찍을 휘두르며 잠시 후 모두는 시야에서 사라졌다.

해는 이미 기울어 가고 있었다.

"제울님, 지금부터 사람을 찾는 일을 도와주셔야 하겠습니다."

"그래야 하구 말고 여부가 있겠나? 그런데 폭포가 세 군데라서."

제울의 말을 연개소문이 받았다.

"형, 우선 폭포들이 있는 장소부터 알아야 되지 않겠소?"

"곧 해가 질 것인데 장소를 모르고 움직여야 하니 낭패가 아닐세."

양신은 중얼거리자 주랑이 입을 열었다.

"일단 우리가 만났던 절로 가서 물어보면 되지 않을까요?"

"형, 그렇게 하는 게 좋겠소. 얼른 오골사로 갑시다."

연개소문의 말에 따라 모두는 급히 말을 몰았다. 얼마 후 온 길을 돌아가 오골사에 당도했다. 연개소문은 안으로 들어가서 스님들에게 사정을 알렸다. 그러자 승려들이 전부 나와서 세 패로 나뉘어 세군데 폭포를 향해서 즉시 떠났다.

양신과 연개소문과 제울은 각기 나뉘어 세 패의 스님들을 따라가기로 했다. 스님들이 앞장을 서 각기 목표지로 향해 떠났다. 주랑은 양신을 따라 가고자 동행을 했다.

스님들을 따라서 얼마를 간 뒤에 한 폭포에 이르렀다. 양신은 급한 마음에 폭포 꼭대기를 향해 치달아 뛰었다. 그러나 꼭대기에 있는 나무에 매달려 있다는 석해와 장대는 보이지가 않았다.

이미 저녁 바람은 차지고 산짐승들의 울음소리도 들렸다. 양신은 사방을 향해 친구들의 이름을 목청껏 불렀다. 스님들은 주변을 샅샅이 뒤져봤지만 어디서도 찾을 수가 없었다.

양신은 허탕을 치고 나자 불안과 초조감이 더해졌다.

"혹시 다른 데에서 찾았을지도 모르니 일단 오골사로 돌아갑시다."

스님들도 그 말에 동의하고 발걸음을 돌렸다. 오골사로 되돌아가니 역시 허탕을 친 연개소문과 제울도 먼저 와 있었다. 양신은 속았다는 분노보다 친구들이 걱정되어 속이 탔다.

그때 절에서 나온 동자승이 말했다.

"어느 군관님이 소승에게 전하고 간 말이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찾는 사람들은 저 산속에 있다고 했습니다."

연개소문이 따지듯 물었다.

"왜 진작에 알려주지를 않았소?"

"군관님은 세 군데 폭포에서 찾다가 돌아오면 그때 말하라고 했습니다. 만약에 그러지 않으면 가만 두지 않겠다고 겁을 줘서 그랬습니다."

"그 군관은 어떻게 생겼소?"

"작은 키에 몸이 땅딸하고 얼굴은 검었습니다."

"형, 구조리요. 빨리 저 산속으로 찾으러 갑시다."

동자승이 알려 준 장소는 태산팔협이 숨어 있었던 산 속이었다.

모두는 그리로 달려가 나무들이 빽빽이 들어찬 속으로 들어가서 찾아보았다. 그랬더니 한 노송(老松)에 대롱대롱 매달린 석해와 장대를 발견할 수가 있었다. 누가 큰 소리로 외쳤다.

"여기에 사람들이 매달려 있소."

모두는 그 쪽으로 달려갔다. 아니나 다를까 입에 재갈이 물린 석해와 장대가 노송 가지에 매달려 있었다. 양신은 급히 나무를 타고 올라가서 두 사람의 몸을 풀어내렸다.

밑으로 끌어져 내린 두 사람은 사지가 뻣뻣하게 굳어든 상태였다. 입에서 재갈을 벗겨 주었지만 말이 나오질 않았다. 스님들이 삭정이를 모아 불을 지피고 한참을 쪼인 뒤 장대가 겨우 입을 떼었다.

"양신 야좌가 우리를 구해주었군? 그런데 우리가 여기 있는 걸 어찌 알고 찾아 왔는가?"

"한 동자승이 구조리 선인한테 들었다며 알려 주었네."

"구조리 선인이 알려 주었다고? 우릴 이렇게 만든 건 한족들일세."

장대의 말에 양신은 그들의 정체를 알려주었다.

"그들은 다갈촌에서 묵었던 태산팔협이란 자들일세."

"양신 야좌, 태산팔협이 무슨 일로 여기에 왔는지는 모르는가?"

"태산팔협은 수국의 첩자들이었네."

"그자들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모두 수국으로 돌아가고 있는 중일세."

양신의 말에 석해는 창백해진 얼굴로 울먹이듯 입을 떼었다.

"큰일 났네. 나는 그 자들에게 밀두도를 빼앗겼네."

양신은 빙긋이 웃으며 대답했다.

"걱정하지 말게. 밀두도는 내가 도로 회수를 했지."

양신은 등에 진 밀두도를 벗어 석해에게 내 주었다. 석해는 그것을 받아들고 감격의 눈물을 흘려 내렸다. 양신은 밀두도를 어떻게 빼앗기게 되고 왜 그런 일을 당했는지를 알고 싶었다.

"석해, 이런 일을 당하게 된 경위를 설명해 줄 순 없겠나?"

석해는 그 말에 입을 다물고만 있고 장대가 대신 입을 열었다.

"어제 구조리 선인이 용원성으로 우릴 찾아 와서 성주의 허락을 받고 우리를 데리고 성을 나선 뒤 바로 이 산속으로 들어오게 되었고 우린 여기서 태산팔협이란 자들을 보게 되었네."

양신은 장대에게 또 물었다.

"장대, 그런 뒤에 일어난 일들도 자세히 말해 주게."

장대는 잠시 석해의 눈치를 보는 태도를 보이며 입을 열었다.

태산팔협은 산속에 몸을 숨기고 오골사 주변을 살폈다. 그런데 뜻밖에도 양신과 연개소문이 그곳에 도착을 했다. 그때부터 구조리는 석해와 장대에게 자신이 지시하는 대로 따를 것을 요구하며 산에서 나가 양신을 만나라고 했던 것이었다.

양신은 그 말을 듣고 석해와 장대를 처음 만났을 때 두 사람이 자꾸 구조리의 눈치를 봤던 게 생각났다. 특히 장대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 표정이나 구조리의 눈치를 보느라 못하는 것 같아 이상하게 여겼다.

"장대, 자네들은 왜 구조리 선인의 지시를 따라야만 했던 것인가?"

양신의 질문에 장대는 또 석해의 눈치를 보다가 대답을 했다.

"나는 태산팔협이 등에 예물 장도를 메고 있는 걸 보고 여간 이상한 생각이 들지 않았네. 구조리 선인은 왕제 저하께서 예물 장도를 태산팔협에게 한 자루씩 하사를 했다고 말했네. 또 왕제 저하께선 그들을 매우 신임해서 중요한 임무까지 부여했다고 했네. 그러나 큰 의문이 들지 않을 수가 없지만 그렇다고 구조리 선인의 지시를 거부할 수도 없었네."

양신이 고개만 끄덕이는데 석해가 비로소 입을 열었다.

"양신 야좌, 구조리 선인은 우리에게 자신은 물론 태산팔협이 시키는 일도 무엇이건 다 들어야 한다고 했네. 그 이유는 모든 게 왕제 저하의 지시를 받고 하는 일이므로 우리로선 따를 수밖에 없었던 것일세."

"구조리 선인은 자네들을 무슨 이유로 이리로 데려온 것일까?"

양신은 궁금한 점을 계속 물었지만 대답은 장대가 도맡아 했다.

"구조리 선인은 우리에게 중요한 임무를 맡길 게 있다고 했었네."

"중요한 임무란 게 무엇인지 모르나?"

"장안성에서 철장님께 내린 지시가 이행되려면 양신 야좌가 믿게 만들어야 한다는 말도 했네. 그런데 태산팔협은 우리가 이 숲속으로 들어오자 다짜고짜 여럿이 덮쳐서 꼼짝없이 당할 수밖에 없었던 일이었네."

"태산팔협이 자네들에게 그런 짓을 한 이유는 무엇일까?"

"나는 나중에 알았는데 밀두도를 빼앗기 위해서 그랬던 것일세."

양신은 건무 왕제가 자신을 해치려는 게 분명하단 생각이 들었다.

"내가 다갈촌을 떠난 뒤로 도해선 조의가 날 찾은 건 사실인가?"

"양신 야좌가 떠나고 반년 쯤 지나 도해선 조의는 다갈촌에 왔네. 그리고 사정을 알아 봤고 그 뒤로 석해가 장안성으로 불려가기도 했었네. 아무튼 간에 자네가 순무 병단에 든 것은 얼마 전에 알게 된 일일세."

양신은 석해를 바라다 봤다. 그가 무슨 일로 장안성엘 불려갔는지 알고 싶은데 입을 꾹 다물고만 있었다. 반면에 석해는 양신과 여선이 진달래 건조장에서 하룻밤을 지낸 사실을 도해선에게 알린 당사자였다. 때문에 이마에서 진땀을 흘릴 정도로 전전긍긍을 하다 입을 열었다.

"양신 야좌, 나는 자네에게 꼭 해 둘 말이 있네. 한족의 우두머리는 우리를 묶어놓은 뒤 밀두도를 쳐들어 보이면서 이런 말을 했었네."

"어떤 말을 했는가?"

"밀두도를 되찾고 싶으면 언제고 중원 땅으로 오라고 했네."

양신은 그 말을 듣고 중얼거렸다.

"하마터면 밀두도를 영원히 잃을 뻔 했었던 걸 막은 게 큰 다행일세."

석해는 다시 굳어든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양신 야좌가 아니었으면 이번 일은 정말로 큰 일 날 뻔했었네. 철장님은 태산팔협이 예물 장도를 지니고 있는 것에 큰 의심의 눈길을 보내셨네. 그렇지만 구조리 선인이 데려 왔고 왕제 저하의 명을 전했기 때문에 시키는 대로 따르지 않을 수가 없었던 일일세."

"태산팔협은 내게 다갈촌에서 대접을 잘 받았다는 말을 했었네."

양신의 말을 듣고 장대는 분개하며 입을 열었다.

"나는 그 일을 생각하면 후회가 크고 양신 야좌를 볼 면목이 없네."

양신은 두 사람이 하는 말들을 듣고 자신이 지금 어떤 사정에 처해 있음을 더욱 실감하게 되었다. 그런데 석해가 입을 열었다.

"양신 야좌, 자네가 밀두도를 회수할 수 있었던 것만도 천우신조일세. 그러니 우린 여기서 일단 자네와 헤어지는 작별 인사를 해야 하겠네."

양신은 그러는 석해에게 다급하게 말했다.

"나도 자네들과 함께 다갈촌으로 갈 생각일세."

"양신 야좌, 자네처럼 우리도 군인이 되었네. 용원성 성주님의 허락받고 나온 몸이라 돌아갈 시간을 지켜서 용원성으로 갈 것이네."

양신은 그런 말을 하는 석해에게 밀두도를 내밀었다.

"양신 야좌, 밀두도는 자네가 지니고 있는 게 좋을 것 같네."

"석해, 왜 그런 말을 하는가?"

"지금 구조리 선인은 어디서 우리를 지켜보고 있을 지도 모르겠네. 내가 지니고 있으면 아무래도 또 빼앗기게 될 것 같아 위험해서 그러네."

석해의 말을 듣고 장대도 거들었다.

"양신 야좌가 지녔다가 철장님께 직접 드리게. 그래야 우리도 안심이고 또 석해는 장안성 검사단에 들게 되어서 장안성으로 떠날 것일세."

양신은 그 말에 좀 놀라는데 장대가 물었다.

"양신 야좌, 언제쯤 다갈촌에 가려는가?"

"일단 추이성으로 돌아가서 보고를 하고, 시간을 낼 수가 있게 되면 곧 가도록 하겠네. 그런데 밀두도를 내게 다시 맡기면 자네들은 사부님의 분부를 어기는 일이 되지 않을까 해서 걱정이 되네."

양신이 찜찜한 표정으로 말을 하자 장대가 대답했다.

"양신 야좌, 우리에게 밀두도를 회수하라는 지시는 내린 것은 철장님이 내린 지시가 아닐세. 왕제 저하의 지시를 받고 구조리 선인이 우리들에게 내린 지시일세."

두 사람은 그 말을 남기고 즉시 말에 올라 그곳을 떠났다. 연개소문도 양신에게 갈 길을 재촉했다.

"호위 선인, 우리도 빨리 돌아가서 합하께 보고를 합시다."

"그렇게 하세."

그러자 제울이 양신에게 말했다.

"양신, 나도 국상 합하를 만나 뵈려고 왔으니 함께 가겠네."

제울은 일행과 더불어 양신을 따라 추이성으로 향했다.

순무병단은 추이성에서 닷새째 머물고 있었다.

을지문덕은 말갈 7부로부터 최소한 10만 이상의 병력 지원을 요청하고 기대를 했다. 그러나 말갈족의 대표인 속말갈의 돌지계 대막불은 비협조적인 태도를 보여서 다른 대막불들도 소극적인 반응을 보였다.

난관에 봉착한 을지문덕은 한 밤중에 돌지계의 숙소로 찾아갔다. 잠을 자고 있던 돌지계는 못마땅한 표정으로 맞았다. 그러나 을지문덕은 간곡하게 설득을 하며 협조를 구했다.

속말부는 말갈 7부 중 인총이 가장 많고 고구려와 인접해서 본래부터 강한 유대 관계를 유지해온 사이였다. 더욱이 양쪽은 언어도 비슷해서 서로를 남남으로 여기질 않았다. 특히 군사적인 문제는 항상 일체감을 보이는 뗄래야 뗄 수가 없는 돈독한 사이였다.

돌지계는 학문이 있고 말갈족의 통합 왕조를 세울 야망을 품고 있었다. 그러므로 다른 부의 대막불들은 그걸 경계하고 있었다. 고구려는 그런 사정을 말갈족을 통제하는데 이용을 했다.

그런데 수국의 양광이 돌지계에게 회유의 손길을 뻗쳤다. 돌지계는 말갈족의 전통 때문에 내부적인 통합이 어려워서 외부의 힘이라도 빌려서 목적을 달성하고 싶은데 양광은 그걸 돕겠다는 약속을 했다. 그 때문에 고구려와 사이를 벌리려는 태도를 취하게 된 것이었다.

을지문덕은 고구려에 전폭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던 말갈족의 전통이 깨어지게 너무도 큰 낙망감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었다. 때문에 압박보다 설득으로 회유를 할 수밖에 없었다.

돌지계도 양광이 자신에게 제안을 한 일들을 의심할 점이 없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비현실성과 허구성이 너무 짙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불관언의 태도로 강경한 발언까지 했다.

"삼호족은 언제까지 고구려에 부림을 당하는 걸 원치 않소."

"대막불님의 마음이 정히 그렇다면 나도 포기를 할 수밖에 없겠소."

을지문덕이 끝내 포기하는 태도를 보이자 돌지계는 눈치를 살폈다.

"나는 대막불님에게 마지막으로 드릴 말씀이 있소."

"어떤 말씀입니까?"

"나로선 부득불 다른 대막불님들이 모르는 사실을 알려야 하겠소."

"뭘 알리겠다는 말씀이요?"

"양광이 대막불님을 돕기로 한 사실이요."

을지문덕의 말에 돌지계는 움찔하는 태도를 보였다.

"양광은 고구려 여타 부 상가들에게도 똑같은 회유책을 쓰고 있소."

돌지계는 더욱 눈빛이 흔들리며 입을 열었다.

"양광이 여타 부 상가들에게도 회유책을 쓴단 말씀이요?"

"고구려에서 떼어내 제후로 봉하겠다는 제안을 했소. 아마도 대막불님에게도 똑 같은 제안을 했을 것입니다. 삼호족의 통합 왕조를 세우는 걸 적극 돕겠다는 약속일 것이요. 그러나 지금까지 상생을 해온 고구려와 삼호족 간의 연계 고리를 끊으려는 자는 절대로 용납하지 않겠소."

을지문덕의 말에 돌지계는 안색이 변했다. 만약에 그 사실을 다른 대막불들에게 알리면 배반자로 낙인이 찍힐뿐더러 자칫 목숨마저 위태롭게 되었다. 그런데 을지문덕은 자리를 박차듯 몸을 일으켰다.

"고구려 국상."

돌지계는 불러놓고 말이 없고 을지문덕도 그냥 내려다보기만 했다.

"국상, 나하고 얘길 좀 더 나눠 봅시다."

을지문덕은 붙잡는 돌지계를 선 채로 끊는 대답을 했다.

"내일 마지막 회의에서 다시 뵙도록 하겠소."

그리고 밖으로 나와 숙소로 돌아갔다. 어두운 밤길처럼 무거운 마음으로 숙소에 당도하자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양신이 입을 열었다.

"합하, 이제 돌아오십니까?"

"약광, 나는 밤이 이슥해질 때까지 기다렸는데 언제 돌아왔는가?"

"방금 전에 도착했습니다."

"너무 늦었으니 그만 들어가서 자게."

"합하, 급히 보고를 드릴 게 있습니다."

"그런가? 그러면 들어보세."

을지문덕은 앞장 서 숙소로 들어서다가 반갑게 외쳤다.

"제울님이 아니오? 오래간만이요."

"합하! 혹한 속에 순무를 하시느라 얼마나 고생이 많으셨습니까?"

"제울님은 여길 어떻게 왔소?"

"전쟁이 나면 약제가 많이 필요해질 것 같아서 가져 왔습니다."

을지문덕은 상인들의 예리한 예측이 너무도 무섭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전쟁이 나면 타국 상인들의 왕래가 끊기게 됨으로 필요한 물자를 미리 조달해 둘 필요성을 일깨워줘서 고마웠다.

"제울님, 이런 고마울 데가 있소? 엄동설한에 고생이 많으셨겠소."

"합하, 저는 백제국 좌장 백기 장군의 따님을 데리고 왔습니다."

제울의 소개로 주랑은 을지문덕에게 큰 절을 했다.

"소저는 백제국에서 온 주랑이라고 합니다."

을지문덕은 두 눈이 휘둥그레지며 주랑을 뚫어져라 바라봤다.

"낭자가 정말 백기 좌장의 여식이란 말인가?"

"예, 아버님께서 합하께 보내는 서신을 지니고 있습니다."

주랑은 부친의 서찰을 을지문덕에 바쳤다. 읽고 난 을지문덕은 참으로 신기하다는 듯 주랑의 얼굴을 또 다시 봤다. 여선과 똑 닮아서 무척이나 놀라며 여준과 백기 사이에 얽힌 오랜 사연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

"주랑아, 반갑다. 너는 내 친구의 딸이니 내가 잘 보살펴 주마."

을지문덕의 환대에 주랑은 크게 마음이 놓였다.

"합하, 소저는 철장님을 찾아뵙고 다시 아버님께 돌아가렵니다."

주랑의 말이 백기의 서신 내용과 달라서 을지문덕이 물었다.

"주랑아, 너는 철장의 딸로 고구려에서 살려고 온 게 아닌가?"

"합하, 소저는 지금까지 생부가 계신 줄은 몰랐습니다. 뒤늦게 알게 되어 너무 궁금한 마음에 왔습니다. 소저는 생부를 뵙고 여선 언니도 한번 만나보고 싶습니다. 그런 뒤에 다시 백제로 돌아갈 생각입니다."

을지문덕은 고개를 끄덕이고 양신을 돌아다보았다.

"호위 선인, 이번 출행에서 무슨 보고할 게 있다는 것인가?"

"합하, 그 말씀은 조용한 데서 따로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을지문덕은 양신과 연개소문을 데리고 옆방으로 자리를 옮겼다.

"합하, 서한만에서 체포된 수국 첩자들이 소관을 찾아 왔습니다."

양신의 말에 을지문덕은 매우 놀랐다. 연개소문이 오골사에서 겪게 된 일들을 소상하게 보고를 했다. 을지문덕은 짧게 대답했다.

"호위 선인, 태산팔협을 그대로 돌려보내길 잘했다."

"합하의 말씀을 듣고 나니 소관은 겨우 마음이 놓입니다."

"호위 선인과 시동 선인은 이번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 전쟁을 목전에 두고 자칫 내부 분열상을 빚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합하, 말씀대로 하겠습니다."

"호위 선인은 당장 길을 떠날 준비를 해야 하겠다."

"합하, 소관은 어디로 가게 됩니까?"

"우선 다갈촌부터 다녀 오게."

"소관은 주랑 낭자와 함께 가게 되는 것입니까?"

"아니다. 혼자서만 다녀와라."

"합하, 주랑 낭자도 다갈촌으로 가려고 합니다."

"주랑은 일방적으로 왔기 때문에 철장의 뜻을 알아볼 필요가 있다."

을지문덕의 대답은 어딘지 냉정함이 서린 듯해서 양신은 물었다.

"합하, 소관은 미처 그 점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사부님을 뵙고 거기서 며칠간 묵다가 오고 싶은데 그래도 되겠습니까?"

"나는 철장에게 서찰을 보내려는데 답장을 받는 즉시 돌아오게."

"소관은 언제 떠나면 됩니까?"

"나는 지금 서찰을 쓰겠으니 잠시 후 떠날 주비를 하게. 그리고 시동 선인은 지금부터 주랑과 제울 상단을 보살펴 주는 임무를 맡게."

"합하, 그런 임무를 맡겨 주시면 성심껏 수행을 하겠습니다."

연개소문은 대답하고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앞으로 주랑을 보살펴 주는 임무를 맡게 된 걸 내심 여간 반기지 않았다. 주랑에게 매료된 그로선 적극 돕고 말동무도 되겠다는 생각을 했다.

양신은 잠시 후 서찰을 받아 지니고 다갈촌으로 향했다. 가뜩이나 오골사 사건의 뒷일이 궁금한 데다 사부를 만나 뵐 수가 있게 되어 서두르는 마음으로 말을 달렸다.

주랑은 양신이 말을 타고 어디로 떠나자 연개소문에게 물었다.

"시동 선인님, 양신 오라버니는 어디를 또 가시는 건가요?"

"합하의 명을 받고 용원성을 다녀오게 되었습니다."

"시동 선인님은 왜 함께 가시지 않는가요?"

"저는 다른 임무를 맡게 되었습니다."

주랑은 고개만 끄덕여 보였고 연개소문이 입을 열었다.

"주랑 낭자, 혹시 아시는지 모르겠습니다."

"뭘 말씀인가요?"

"저는 호위 선인과 의형제를 맺은 사이입니다."

"그러시군요?"

"낭자는 호위 선인의 동생이시므로 앞으로 누님으로 모시렵니다."

주랑은 덩치가 큰 사내가 하는 말에 좀 당황하듯 반문했다.

"호위 선인이 절 누님으로 모시겠다고요?"

"누님, 절 동생으로 삼는 게 싫지는 않으시겠지요? 저는 누님보다 나이가 두 살이나 적으므로 당연히 동생이 됩니다."

연개소문은 말끝마다 누님 호칭을 붙여서 주랑은 좀 난처해했다.

"동생이 되겠다는 분이 너무 의젓하셔서 어렵고도 어색하네요."

주랑은 그렇게 대답하고 자신의 처소로 얼른 들어가 버렸다.

이튿날 저녁 때 양신이 돌아왔다. 먼 거리를 줄 창 말을 달렸기 때문에 완전히 지친 상태였다. 그런 데다 너무도 큰 일을 당한 터라 거의 제정신이 아닌 상태였다.

양신은 을지문덕 앞에 이르자 절규하듯 소리쳤다.

"합하, 사부님이 납치를 당하셨습니다."

"철장이? 누구에게 납치를 당했단 말인가?"

"수국 첩자들이 와서 합하께서 부르신다면 추이성으로 모시고 간다는 말을 했답니다. 소관은 급히 되돌아 왔는데 이곳에 오시질 않았습니다."

을지문덕은 철장이 행방을 모르게 된 점에 너무도 놀라고 말았다.

"뭣이라구?! 그 자들이 왜 철장을 데려갔단 말인가?"

"합하, 이 일은 소관 때문에 일어난 일이 아닐까 싶습니다."

양신은 그밖에도 다갈촌에서 들은 얘기들을 전했다.

한편 태산팔협은 양신과 대결을 벌인 뒤 다시 다갈촌으로 갔다. 그리고 양신이 밀두도를 내놓질 않아 을지문덕이 철장을 불러서 해결을 지으라는 명령을 내렸다고 했다. 그러나 철장은 그게 거짓임을 모르게 따를 수밖에 없었다. 철장은 왕제의 지시도 있었고 양신도 보고 싶어서 별 다른 의심을 품지를 못한 채 따라나섰다.

을지문덕은 곧 용원성 성주에게 태산팔협을 수색하라는 명령을 내리려다 그만 두었다. 건무가 독단적으로 일으킨 사건에 개입을 하는 것은 좋지가 않겠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합하, 소관은 다갈촌으로 다시 가겠습니다."

"약광, 철장의 안위가 염려되어서 그러겠지만 가지 말게."

"합하, 소관이 어찌 가만히 있을 수가 있겠습니까?"

"태산팔협은 건무 저하의 지시를 받고 움직이고 있다. 그 자들이 구조리와 함께 다니고 있다면 철장에게 큰 위험은 없을 것이다."

"소관은 그렇다고 해도 마음이 놓이질 않습니다."

"약광, 내 말을 따르게. 왕제 저하는 자네의 목숨을 노리고 있는 걸 모르는가? 또 말려들 수도 있다. 자네에 대한 무슨 음모를 계속 꾸미게 될 것이므로 나는 그에 대한 조치를 취해야만 하겠다."

양신은 불안이 컸지만 수긍이 가는 터였다. 자신이 사부를 찾으러 나선다는 것은 또 다른 함정에 빠지게 될 수도 있었다. 그게 자신을 유인하려는 술책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다만 사부를 납치해서 수국으로 데려간게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었다. 더욱이 태산팔협이 국경으로 향하는 동안엔 구조리와 함께 움직일 것이라 사부에게 위해를 가할 위험은 적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다.

"나는 내일 장안성으로 출발하게 된다."

을지문덕의 말에 양신은 물었다.

"합하, 소관은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내일 계루부를 제외한 여타 부의 우태들은 각자 주성으로 돌아가게 된다. 호위 선인은 연생수 우태를 따라 요동성으로 가서 근무를 한다."

"합하, 소관은 그렇게 하겠습니다만 주랑 낭자는 어찌 됩니까?"

"철장이 저렇게 되었는데 다갈촌으로 보낼 수는 없지 않는가?"

"소관도 그렇게 생각이 됩니다."

"주랑을 장안성으로 데려가 내 집에서 머물게 하겠다. 그리고 철장에 관한 일을 알게 되는 대로 그에 따른 무슨 조치를 취할 생각이다."

"소관은 합하의 분부대로 요동성으로 가겠습니다."

"단, 철장에 관한 일은 주랑도 시동 선인이 알게 하면 안 된다."

"합하,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나는 연생수 우태와 나눌 얘기가 있으니 그만 나가 보게."

양신이 물러나오자 연개소문과 주랑이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형은 긴 시간 동안 합하와 무슨 비밀 얘기라도 나누었소?"

"나는 요동성으로 가게 되었네."

"잘 되었소. 나도 형이 장안성으로 가는 걸 말리려던 참이요."

"호위 선인도 나와 함께 요동성으로 갔으면 좋겠네."

"형이나 가서 근무를 잘 하시오. 삼촌께서 잘 돌봐 주실 거요."

연개소문은 대답하고 싱글벙글 웃었다. 그는 주랑이 다갈촌으로 가게 되는 걸로 알고 있었다. 때문에 며칠간만이라도 함께 더 지낼 수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여간 흐뭇하지가 않았다.

주랑은 두 사람이 그런 말을 나누는 걸 듣고 입을 열었다.

"양신 오라버닐 만나자마자 다시 헤어져서 저는 너무도 섭섭해요."

양신은 그에 대한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딱하고 미안함을 금치 못했기 때문이다. 모든 게 자신으로 인해 일어난 일이라 자책감에 마음이 괴롭기 그지 없었다.

"주랑 낭자, 우린 곧 다시 만나게 될 것이요."

양신의 말을 연개소문이 받았다.

"나도 형과 동고동락을 했다가 헤어지게 되어 여간 섭섭하지가 않소. 그러나 그보다 더 서운한 일은 누님과도 곧 헤어질 일이요. 그래서 나는 누님을 다갈촌으로 모셔다 드리고 거기서 얼마 간 지내고 싶소. 합하께 그 말씀을 드리면 허락을 해 주실지 모르겠소?"

"시동 선인이 다갈촌으로 갈 이유가 무엇인가?"

"누님이 편안히 다갈촌으로 가시게 돕고 싶어 그렇소."

"주랑 낭자는 우선 장안성으로 가서 지내는 걸로 알고 있네."

양신의 대답에 주랑이 반문했다.

"오라버니, 저는 합하를 뵈었으니 다갈촌으로 가야하지 않겠어요?"

"다갈촌에 갑자기 복잡한 문제가 생겨서 그러는 것 같소."

연개소문은 그 말에 반색을 하며 입을 열었다.

"형, 누님이 장안성으로 가신다는 게 정말이요? 나로선 이보다 더 기쁠 일은 없겠으므로 잘 모시고 가겠소."

"시동 선인은 왜 누님이란 호칭을 자꾸 쓰는가?"

"형과 나는 의형제 사이니 누님과도 자연히 의남매가 되는 것이요. 형도 앞으론 낭자라고 부르지 말고 동생이라고 부르시오. 그렇게 부르면 정도 생겨나고 더욱 친근감을 느끼게 되지 않겠소?"

"그런가? 아무튼 간에 자네가 잘 돌봐드리도록 하게."

"형, 여부가 있겠소? 그런 걱정은 조금치도 하지 마시오."

주랑은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시동 선인께선 정말 절 잘 대해 주실 건가요?"

"저는 누님과 함께 있는 것만도 가슴이 설렐 지경입니다. 남아일언은 중천금이라고 했듯 누님은 제가 한 말씀을 믿으셔도 됩니다."

연개소문이 너스레를 떨자 주랑은 얼굴을 살짝 붉혔다. 주랑은 다갈촌으로 먼저 가지 못해 실망했으나 한편으론 또 다른 기대감에 부풀었다. 그 이유는 여선을 만나게 될 생각에 흥분이 되었다.

을지문덕은 말갈 7부와 최종 협상을 마친 결과 10만 병력을 지원받기로 합의를 보았다. 그런 성과를 거둘 수가 있었던 것은 돌지계가 마음을 돌려서 협조하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날 저녁에 고혜진 성주는 진수성찬을 차려 연회를 베풀었다.

을지문덕을 필두로 5부의 우태들과 말갈 7부의 대막불들이 자리를 함께 했다. 가무잡기(歌舞雜技)를 관람하며 술을 마시는 전통적인 우호 협력관계를 과시하는 자리가 되었다.

이튿날 말갈 7부의 대막불들이 먼저 떠나고 난뒤 을지문덕도 장안성으로 향했다. 여타 부의 우태와 군관들은 각자 주성으로 향하게 되어 양신은 주랑과 아쉬운 작별을 했다.

을지문덕은 고돌기가 이끄는 계루부 군관들과 함께 행군에 들어갔다. 그러나 심기는 매우 불편했다. 앞으로 철장과 양신에 관한 문제로 여러 가지 곤란한 입장에 처할 것 같았다.

다만 연개소문만은 신바람이 나듯 을지문덕에게 물었다.

"합하, 제울 상단은 왜 우리와 동행을 하게 됩니까?"

을지문덕은 연개소문에게 나직이 말했다.

"주랑은 상단과 함께 움직이는 게 좋겠다."

"합하, 왜 그래야만 한다는 말씀입니까?"

"주랑이 장안성에 들어가는 걸 남들이 알지 못하게 하련다. 특히 왕제 저하에게 알려지지 않게 해야 되므로 시동 선인도 그 점을 유의하게."

연개소문은 여선 부인과 주랑이 쌍둥이 자매인 게 알려지면 좋지 않아서 그러는 게 아닐까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합하. 주랑 누님이 장안성에 가면 어디서 기거를 하게 됩니까?"

"우리 집에서 지낼 것이다. 여러 면에서 자네 도움이 필요하겠다."

"합하, 무슨 일이든 시켜만 주시면 적극 돕겠습니다."

"주랑은 계속 남장을 하고 제울 상단의 일원으로 장안성에 들어간다."

"합하, 꼭 그래야만 할 필요가 무엇입니까?"

"특히 고돌기 우태의 눈에 띠지 않게 주의를 해야 만 해서 그런다."

"합하, 저도 무슨 말씀을 하시려는 지 알만합니다."

"앞으로 병단과 상단은 따로 움직일 것이다. 시동 선인은 상단을 인도한다는 명목으로 거기에 몸을 두고 지내면서 주랑을 돌봐주기 바란다."

"합하의 말씀을 충실하게 받들겠습니다."

"고돌기 장군이 혹시 상단에 접근할 땐 주랑을 노출되지 않게 하라."

연개소문은 그 말에 묘한 표정을 지으며 대꾸했다.

"알겠습니다. 고돌기 장군은 색을 밝히기 때문이시군요?"

"고돌기 장군은 여선 부인의 얼굴을 봤기 때문이다. 만약에 주랑을 보게 된다면 이상하게 여기며 큰 관심을 갖게 될 것이다."

"합하, 그 점을 미처 생각하지 못 했습니다."

"나는 장안성으로 가는 동안에 고돌기 장군과 늘 붙어 있겠다. 시동 선인도 늘 주랑 곁에 있으면서 경계를 늦추지 않기 바란다."

"고돌기 우태님의 눈에 절대로 띄지 않게 책임을 지겠습니다."

주랑은 가잠성을 떠날 때부터 남장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제울 상단 속에만 있어서 계루부 군관들의 눈에 띌 일이 별로 없겠으나 조심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시동은 주랑에게도 그 일을 미리 알려서 주의를 하게 하라."

"합하, 저는 그보다 다른 걱정을 하게 됩니다."

"다른 걱정이라니?"

을지문덕의 반문에 연개소문은 좀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실은 저 때문에 주랑 누님은 큰 기대를 걸고 있습니다."

"주랑이 시동에게 무슨 기대를 건단 말인가?"

"저는 주랑 누님에게 여선부인을 만나게 주선을 하겠는 약속을 했습니다. 그 때문에 주랑 누님은 하루가 여삼추로 기다리는 눈치입니다."

"주랑에게 그런 말을 했다고?!"

을지문덕은 놀라며 혀를 끌끌 찼다.

"합하, 왜 그러십니까?"

"주랑에게 왜 그런 말을 했는가?"

"주랑 누님은 자신이 여선부인과 쌍둥이 자매인 걸 알게 되어서 고구려로 온 것입니다. 그러니 서로가 만나는 일에 얼마나 관심이 크겠습니까? 저는 그 일을 도와주려는 것일 뿐입니다."

을지문덕은 미처 연개소문에게 입단속을 못 시킨 거에 뒤늦은 후회를 했다. 그러나 이젠 소용이 없게 되었으나 한편으로 연개소문을 잘 조정하면서 여러 가지 도움을 얻을 생각을 했다.

순무병단은 섣달그믐께 장안성에 도착해서 모든 일정은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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