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비련(悲戀)
새해로 접어든 정월 말 여선은 아기를 출산했다.
마두골 진달래 건조장에서 양신과 하루 밤의 인연으로 태어난 아기였다. 여선은 수심에 찬 얼굴로 젖을 빠는 아기를 내려다볼수록 양신을 빼어 닮은 게 여간 신기하지가 않았다.
새달궁의 시녀들 사이에선 여선이 낳은 아기를 놓고 쑤군거림이 일어났다. 건무의 핏줄이 아니라서 아기는 곧 궁궐에서 내보내질 것이라는 말들이 공공연히 나돌고 있었다.
시녀들은 여선이 들으란 듯 그런 말을 거침없이 했다. 여선은 여간 두렵고 난감하지가 않았다. 함께 내쳐지면 좋겠으나 아기만 나가는 건 죽음보다 더한 절망감에 빠져들 일이었다.
여선은 실의에 빠진 양신이 일시 고향을 등진 걸로 보고 있었다. 살았는지 죽었는지 걱정이 크면서도 스스로 목숨을 끊을 사람으론 보지는 않았다. 평소에 타국 땅을 유람해 보고 싶단 말을 자주 했던 터라 백제로 간 게 아닐까 하는 추측을 했다. 때문에 고구려에 또 온 계백을 통해 알아본 결과 그렇지도 않았다. 그 때부턴 신라로 간 게 아닐까하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아무튼 간에 희망의 끊을 놓지 않고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생각해 봐야만 했다. 곧 아기와 헤어지게 될지도 몰라서 그 전에 도망을 칠 마음을 먹었다. 도망치면 고구려에선 살 수가 없으므로 타국으로 가야만 하는데 신라를 머릿속에 두었다. 신라로 가서 양신을 못 만나더라도 아기와 함께 살 수만 있으면 되었다. 이젠 산후 조리가 어느 정도 되어서 더는 머뭇거릴 수가 없다는 생각이었다.
동화부인이 그런 고민에 빠져 있는 여선의 방 안으로 들어섰다. 여선은 얼른 아기를 방바닥에 뉘어놓고 몸을 일으켰다. 동화부인은 아기 쪽에 일별을 주고 나서 물었다.
"젖은 부족하지 않은가?"
"예."
동화부인은 건무의 정실(正室)이나 딸만 셋을 두고 있었다. 때문에 사내애를 낳은 여선을 보는 눈길에 부러움과 질시가 담겨질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다 같은 여인의 눈으로 봐도 여선은 눈길을 끌만한 미모였다. 그렇다 보니 남편을 떼어내기가 쉽지 않을 일로 여겨져 질투의 한숨만 절로 흘러나올 수밖에 없었다. 오늘은 벼르고 벼르던 끝에 여선의 방으로 들어온 것이었다.
동화부인은 여선과 마주 앉자 입을 열었다.
"여선, 나는 자네에게 꼭 물어봐야 할 말이 있네."
여선은 불안감 속에 눈길을 둘 데를 몰라했다.
"자넨 저 아이가 궁녀들의 입 초시에 오르는 걸 알고 있는가?"
동화부인의 질문에 고갤 떨군 채 여선은 아무런 대꾸도 못했다.
"내가 묻는 말에 무슨 대꾸가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재차 꾸짖는 투로 말했지만 여전히 입을 떼지 않았다.
"이 보게, 시녀들이 중구난방으로 지껄이는 소리를 듣지 못했나? 나는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너무도 화가 나고 불쾌감을 금할 수가 없다."
"대부인, 그저 죄송할 따름입니다."
여선이 겨우 그런 말을 흘려내자 동화부인은 혀를 끌끌 찼다.
"죄송하단 말로 될 일인가? 나는 자네에게 어떤 의문을 품지 않을 수가 없네. 또 이상한 소문에 대한 진부를 가릴 책임도 내게 있다."
동화부인은 묵묵부답인 여선에게 말을 이었다.
"아이는 어미 뱃속에서 열 달을 채우고 세상에 나온다. 그런데 자네는 저하와 합방한지가 일곱 달도 채 되지가 않았다. 그럼에도 저 아이를 누가 본들 석 달을 못 채우고 나온 아이로 여기겠는가?"
여선은 윽박지르진 않아도 이실직고를 받아내려는 말이라서 전신이 쪼그라들 지경이었다. 숨조차 제대로 쉴 수가 없을 만큼 창백해진 얼굴로 몸 둘 바를 모른 채 몸이 떨리기만 했다.
"시녀들은 자네가 궁에 들어와서 생리를 한 번도 한 적이 없다고 했네. 그것은 궁에 들어오기 전에 임신을 했다는 증거가 된다."
여선은 추궁을 받을수록 입술만 더욱 깨물었다.
"나는 저 아이에 대한 의심을 풀어야 할 책임과 의무가 있다. 자넨 사태의 심각성이 얼마나 큰지를 안다면 모든 걸 밝혀야 한다."
동화부인의 추궁은 더해졌지만 여선은 묵묵부답으로 일관했다. 화가 치미는 걸 꾹 참고 동화부인은 몸을 일으켜 밖으로 나갔다.
그로부터 며칠 뒤 순무를 마치고 돌아온 연개소문은 이모(姨母)인 동화부인을 찾아가 그동안에 자신이 겪은 일들을 소상하게 전했다.
"그러니까 여선은 양신과 혼약을 맺었던 사이였단 말이군?"
"그렇습니다. 도해선은 양신을 죽이는데 태산팔협을 이용했습니다."
연개소문은 건무가 도해선 뒤에 있음은 말하지 않았다.
"여선부인에겐 주랑이란 쌍둥이 자매가 있습니다. 그런데 백제에서 살고 있던 주랑은 이번에 생부인 철장을 만나러 고구려에 왔습니다. 그러나 철장은 태산팔협에 납치를 당해 다갈촌에 없으므로 주랑은 대신 여선부인을 만나보려고 장안성으로 왔습니다."
동화부인은 모든 사실을 알게 되자 연개소문과 장시간에 걸쳐 무슨 얘기를 나누었다. 그런 뒤 다시 여선의 방으로 갔다. 그리고 전과는 다르게 부드러운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여선, 나는 다갈촌으로 사람을 보내 알아본 게 있었다. 자네에겐 혼약을 맺은 양오라비가 있었던 걸 알게 되었는데 그게 사실인가?"
"예."
"그 자의 이름이 양신이라고 하던데 맞는가?"
"예."
여선은 모기소리처럼 작은 음성으로 대답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여선, 이제부터 내가 묻는 말에 추호의 거짓이 없는 대답을 한다면 자네에게 최대한의 선처를 베풀 마음을 먹을 생각일세."
동화부인의 말에 여선은 몸이 움츠러들며 입을 뗄 수가 없었다.
"여선, 저 아이는 혼약을 맺었던 양신의 씨인가? 저하의 씨인가?"
여선은 그 질문에 놀라움보다 양심의 가책부터 느껴야만 했다. 그러나 발설을 했다간 자신과 아기가 무슨 일을 당하게 될지 몰랐다. 극심한 공포감 속에 숨을 죽이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나는 솔직한 대답을 듣게 되면 선처를 하겠다고 약속을 하마."
동화부인의 목소리는 자못 은근해져 여선은 모기소리로 대답을 했다.
"저하의 씨가 아니옵니다."
여선의 대답에 동화부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한숨을 흘려냈다.
"여선, 저 아이는 저하의 핏줄이 아닌 게 확실하다는 말이로군?"
"예, 대부인."
"여선, 솔직하게 답변을 해 줘서 여간 고맙게 여기지 않겠다."
여선은 그 말에 간절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대부인, 아기의 목숨만은 구해주세요."
"나도 그대의 처지를 매우 동정하고 있다."
"대부인, 저는 본의 아니게 부정한 몸으로 궁궐에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죽을죄를 지었을지언정 아무런 죄가 없는 아기는 살리고 싶습니다. 만약에 아기가 어떻게 되면 저는 죽어도 눈을 감을 수가 없겠습니다. 그 전에 어떻게 해서든 이곳을 나가고 싶은 마음뿐입니다."
동화부인은 그 말을 듣고 속으론 한시름을 놓게 되었다.
"여선, 자네의 이실직고를 듣게 되어 더욱 돕고 싶은 마음이다."
여선은 얼굴에서 핏기가 되살아나 듯 반문했다.
"대부인, 그 말씀 정말이십니까?"
동화부인은 어느 정도 마음의 여유마저 생겨나듯 대답했다.
"여선, 왜 아기만 살기를 바라는가? 자네도 살아야지."
"제가 어찌 살기를 바라겠습니까? 아기만이라도 살면 되옵니다."
"어미도 살아야 아기가 살 수가 있지. 함께 살 생각을 해야 한다."
동화부인은 눈엣가시였던 여선에게 연민의 정마저 느꼈다. 여선은 한없이 다정해진 음성을 듣고 마음이 크게 들뜨게 되며 물었다.
"대부인, 모자가 함께 살 수만 있으면 뭘 더 바라겠습니까?"
"자넨 자신의 앞날을 놓고 무슨 생각을 해본 게 있을 것이다. 그걸 한번 털어놓게나. 나는 자네를 돕고 싶은 마음에서 하는 말일세."
동화부인의 말투는 점점 유순해져서 여선은 어딘지 이상한 마음이 들었다. 그러나 한편으론 매달려 보려는 마음이 생기게 되었다.
"저는 아기와 함께 어디로든 도망을 칠 궁리만 하게 됩니다."
"여선, 도망을 치겠다는 마음은 진심인가? 믿어도 되겠는가?"
"대부인, 진심이 아니면 무엇이겠습니까?"
"도망을 친다면 어디로 갈 생각인가?"
"저는 아기의 아비를 찾아가려고 합니다."
"자넨 아이의 아비가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는가?"
"그걸 모르옵니다."
"모르면서 덮어놓고 도망을 치겠단 말인가?"
"여기서 도망을 치게 된다면 앞으로 고구려 땅에선 살 수가 없게 됩니다. 그러므로 타국 땅으로 떠날 수밖에 없겠습니다."
"타국 땅이면 어느 나라로 잡게 되는가?"
"신라입니다."
"하필이면 왜 신라로 가려고 하는가?"
"아기 아비는 신라로 가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이 됩니다."
동화부인은 여선의 추측은 맞았고 양신은 다시 고구려로 돌아와서 지금은 요동성에 있는 걸 모르고 있음도 알았다.
"여선, 나는 자네의 진심을 더 들어보고 싶다."
"대부인, 저는 진심으로 모든 말씀을 드렸습니다."
"만약에 저하께서 자네의 죄를 묻지 않고 곁에 계속 두고 싶어 하신다면 그럴 땐 어떤 마음을 먹게 될 것인지 그에 대해서 알고 싶다."
"저는 대부인께서 하시는 말씀이 무슨 뜻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만약에 저하께서 자네를 놓치고 싶지가 않아 아이와 함께 궁궐에 놔두려고 하실 수도 있다. 그럴 경우 자네는 저하의 후궁으로 주저앉을 것인지 그래도 아이 아비를 찾아 떠날 것인지를 알고 싶다."
여선은 거침없이 대답했다.
"저는 당장이라도 궁을 벗어날 수만 있다면 나가겠습니다."
"자네는 양신을 그렇게도 잊지를 못하겠는가?"
그 질문에 여선은 눈물이 어린 얼굴을 끄덕여 보이기만 했다. 동화부인은 엷은 미소를 머금고 여선의 손을 잡았다. 자신도 원하는 바이고 여선의 간절한 소망이 이뤄지게 돕는 게 자신의 의무일 것 같았다.
"나는 자네의 진심을 알게 되었다. 적극 도울 방법을 찾겠다."
"대부인, 그 말씀 정말이십니까?"
"그렇다고 해서 아무 때나 도망치려고 드는 무모한 짓을 하면 안 된다. 그랬다간 도리어 일을 그르치게 되고 만다. 앞으로 모든 일은 나와 단 둘만이 알고 상의를 하면서 마땅한 방법을 찾아보기로 하자."
"대부인, 고맙습니다. 저는 대부인만 믿고 따르겠습니다."
여선은 자신을 궁에서 내보내려는 동화부인의 심정도 이해가 되었다. 때문에 믿음과 기대를 걸어볼 희망을 품을 수가 있고 모험을 걸만 하다는 생각에 어금니를 사려 물었다.
동화부인이 돌아가자 여선은 누워있는 아기를 들여다보며 말했다.
"아가, 어미가 용기를 내게 너도 도와줘야 한다."
여선은 앞으로 어떤 결과를 빚게 되건 꼭 이뤄내겠단 각오를 다졌다.
건무는 도해선과 심각한 표정으로 마주 앉아 있었다. 도해선은 자신을 노려보기만 하는 건무 앞에서 전전긍긍이었다. 그렇지만 양신을 처치해 버리겠다는 생각엔 변함이 없었다.
"저하, 소인은 이번에도 실패를 했으나 꼭 만회를 하겠습니다."
"도해선, 넌 여선이 양신이란 자와 혼약을 맺은 사인 것을 잘 알면서도 굳이 내게 천거를 한 이유는 대체 무엇이었는가?"
건무의 질문에 도해선은 난처한 표정만 지었다.
"왜 대답을 못하는가?"
"저하, 소인에게 벌을 내리시겠다면 달게 받겠습니다. 허나 저하께선 지금 여선 부인을 애지중지하고 계시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심에도 굳이 그런 질문을 하시는 이유는 무엇인지요?"
건무는 그 말에 대꾸를 않고 긴 한숨만 흘려냈다.
"저하, 새삼 그 일을 쳐드신 데는 무슨 이유가 있지 않으십니까?"
"여선은 제가 낳은 아이가 양신의 씨라고 자백을 했다고 한다."
도해선은 그 말에 너무도 놀라서 나가자빠질 지경이었다.
"저하, 여선부인한테 직접 그 말씀을 들으셨습니까?"
"나는 대부인을 통해서 들었다."
건무의 대꾸에 도해선은 언제고 터질 일이 터졌다고 생각했다.
"저하, 그래서 어찌하실 생각이신지요?"
"나는 불문에 부치기로 했다."
도해선은 좀 안심이 되는 표정인데 건무가 말을 이었다.
"문제는 여선이다."
"저하, 왜 문제라는 말씀을 하십니까?"
"여선이 궁에서 나가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도해선은 말도 안 될 소리라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수긍이 가고 생각해 볼 점도 있는데 건무가 다시 입을 열었다.
"여선도 그렇다만 그보다는 대부인이 한술을 더 뜨신다."
"저하께서 대부인께 무슨 말씀을 하셨기에 그러십니까?"
"대부인은 앞으로 큰 일이 벌어지기 전에 여선을 하루속히 궁에서 내보내야 한다고 재촉이 성화같다. 나로선 골치가 너무도 아프다."
도해선도 속으로 여선보다 동화부인이 더 문제라는 생각이었다. 거기다 여선의 임신에 대해 시녀들 사이에서 이상한 소문이 돌아 동화부인은 다갈촌에 사람을 보내 사정을 알아본 걸로 알고 있었다.
"저하께선 꿋꿋한 태도를 견지해 주시면 됩니다. 일단 버티는 태도로 나가시면 모든 건 시간이 해결해서 순조롭게 풀리게 될 걸로 믿습니다."
"나도 그 생각을 왜 못했겠나? 그러나 시달려서 속이 너무 상한다."
"저하, 소인은 그 일보다 다른 걱정이 더 큽니다."
"다른 걱정이라니 어떤 걱정을 말하는가?"
"여선 부인이 혹시 양신에 관한 소식을 듣지 않으셨을까 해서입니다."
"그 일을 내가 어찌 알겠느냐?"
"저하께선 여선부인에게서 무슨 말씀을 들으신 게 없으십니까?"
"내가 보기엔 양신이 신라로 간 것으로 추측을 하는 같다. 그러나 지금은 신라에서 돌아와 요동성에 있는 것까지는 모르는 것 같다."
도해선은 또 다른 말을 꺼냈다.
"대부인께서 양신이 요동성에 있는 걸 알리셨는지 모르겠습니다."
"대부인이 그 일을 어찌 알고 알린단 말인가?"
"연개소문이 이번에 순무에 참가했다가 돌아왔지 않습니까?"
건무는 그 말에 무겁게 고개를 끄덕이며 그렇게 되면 더욱 난처한 상황이 벌어지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인은 이번 일로 저하께 큰 심려를 끼쳐드렸습니다."
"네가 그걸 알기는 하느냐?"
"너무도 죄송하며 깊은 반성을 하고 있습니다."
"이건 반성으로 그칠 일이 아니다. 무엇보다 철장이 태산팔협에게 납치를 당해 간 게 확실해진 이상 앞으로 어찌해야 좋을지 모르겠다. 그런데 납치되어 갔다는 말은 확실한 것인가?"
"태산팔협과 함께 움직인 구조리가 한 말이므로 믿으셔도 됩니다. 소인은 앞으로 그런 실수를 다시는 범하자 않도록 주의를 하겠습니다. 스런 일이 생길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용서해주시길 바랍니다."
도해선은 태산팔협이 철장을 납치해 간 게 아님을 알지만 그렇게 둘러댈 수밖에 없었다. 건무는 자신의 눈치를 보는 도해선에게 입을 열었다.
"알겠다."
"저하, 부탁을 들리고 싶은 게 또 있습니다."
"또 무엇인가?"
"어려우시더라도 여선부인을 너그럽게 대해 주십시오. 비록 잘못이 크시다 해도 용서로 가납해 주시면 앞으로 일이 잘 풀릴 것입니다."
"내가 가납을 한들 여선이 떠나려고 한다면 어찌 하겠는가?"
"여선 부인께서도 양신을 잊자면 시간이 걸릴 것입니다. 그 점을 생각하시고 최대한 관용을 베풀어 주시면 자연히 해결될 것으로 믿습니다."
"나는 그렇게 하겠다만 또 다른 문제가 없지도 않다."
"저하, 또 다른 문제란 어떤 것을 말씀하십니까?"
"대부인께선 조만간 대궐에 들어가려고 하신다."
"대부인께서 무슨 일로 대궐엘 들어가신단 말씀입니까?"
"너는 무슨 문제인지 짐작이 가지 않는가? 대부인은 여선을 내보내지 않으면 폐하께 간하여 해결을 보려고 하시니 큰 문제이다."
"대부인께서 그런 일을 꼭 하실까요?"
"두고 보려무나."
건무의 대답에 도해선은 입이 다물어지게 되고 말았다. 그로인해 폐하께서 개입하는 사태가 벌어지게 되면 어떻게 버틸 재간이 없게 된다. 그렇다고 동화부인의 행동을 막을 수가 있는 사람도 없었다.
동화부인은 시앗을 보게 된 입장이나 그럴 수밖에 없었다. 여인으로써 무서운 질투심을 무엇으로 막을 것이며 왕실에서 타인의 씨를 낳았다는 건 더더욱 용납이 될 수가 없는 일이었다.
건무는 갑자기 목청을 높였다.
"너는 내가 하는 걱정엔 왜 아무런 말도 하지를 않느냐?"
"저하, 아무리 어려움이 크셔도 해결할 방법을 찾으면 됩니다."
"이 멍청한 놈아! 무슨 방법이 있다고 찾는단 말인가?"
"저하, 아이만 궁에서 내보내는 방법도 있지 않겠습니까?"
건무는 그 말을 듣고 더욱 화가 났다. 그러나 자신을 위로하려는 마음으로 하는 말이니 더는 꾸짖을 수가 없었다. 또 한편으론 무슨 방법을 찾을 수도 있으므로 무조건 나무랄 수만도 없었다.
"물론 네 말대로 생각을 해볼 점이 없지도 않다. 그런데 아이만 내보낼 경우 여선이 자결을 하겠다니 어찌 해야 좋을 지 모르겠다."
도해선도 여선의 심경을 이해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그보다 더 큰 문제는 동화부인의 투기심이었다. 두 여인의 모성애와 투기심이 맞물리게 된다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몰랐다.
"저하, 소인은 제안을 하나 드리고 싶습니다."
"또 무슨 제안을 하겠다는 말이냐?"
"저하께선 어떻게 해서든 대부인의 마음을 다독여 주십시오. 그러시면 나머지 일은 소인이 해결할 방법을 꼭 찾아내고 말겠습니다."
"도해선, 너는 대부인의 태도를 몰라서 그런 말을 하고 있다."
"저하, 소인인들 대부인의 심중을 왜 모르겠습니까? 그러나 대부인의 말씀만 두렵게 여기셔 여선부인과 연을 끊으시면 안 됩니다. 그 결과는 고통만 남게 되실 뿐이므로 결코 포기를 하시면 안 됩니다."
"말하기는 쉽다만 그게 어디 뜻대로 될 수가 있겠는가?"
"저하, 이런 방법을 써보시면 어떻겠습니까?"
"어떤 방법을 써본단 말이냐?"
"대부인의께서 폐하를 만나보시고 나면 폐하께선 여선부인을 내치라는 명을 내리실 것은 뻔한 일로 생각이 되옵니다."
"그렇다."
"저하께선 그 명을 받아들이시면 되지 않겠습니까?"
"뭐라고?! 받아들이라고? 기껏 한다는 소리가 그것이냐?"
건무는 울화통이 터져 냅다 소릴 내질렀다.
"저하, 폐하께서 내리실 명령을 거절하실 순 없지 않습니까? 그렇지만 여선부인을 계속 곁에 두실 방법이 없지가 않음을 아셔야 합니다."
"도해선, 곁에 계속 둘 방법이 대체 어떤 것이란 말인가?"
"여선부인을 꼭 궁 안에만 두시고 지내셔 하는 건 아니잖습니까?"
"꼭 궁 안에만 두고 지내야 하는 건 아니다?"
"여선부인의 사처를 궁 밖에 두고 드나드시면 됩니다. 그렇게 하시면 폐하께서도 무슨 말씀을 더하실 수가 없지 않겠습니까?"
"궁밖에 사처를 잡아두고 내가 드나든다?"
"그렇게 하시면 폐하께서 내리신 명을 어기지 않는 일도 됩니다."
"그건 그렇겠다만."
"또 그렇게 하시면 대부인께서도 더는 어쩔 수가 없게 되십니다. 반면에 저하께선 마음 편하게 자유롭게 드나드실 수가 있으십니다. 누구도 그걸 막고 간섭할 수가 없게 되지 않겠습니까"
"그것도 좋은 방법이로군! 그러기 위해 궁 밖에 사처를 마련한다?"
"저하, 즉시 이행하실 일만 남으셨습니다."
건무는 그제야 표정이 환해졌다. 동화 부인에겐 자신이 다른 여인과 사사로이 만나는 것을 막을 권한은 없었다.
"도해선, 머물만한 집을 즉시 물색해 봐라."
"저하, 그 일은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 대신 저하께선 당분간 굳건한 태도로 버텨 주시느냐 못하시느냐가 이 일의 관건이 되겠습니다."
"내가 못 버틸 게 무엇이겠느냐?"
"저하, 그렇지만 대분인께는 강한 태도를 취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무엇 때문에 그렇게 하라는 것이냐?"
"우선은 아이만 내보내겠다는 태도를 취하십시오. 그러면 대부인께선 여선부인도 함께 내보내라는 주장을 펴실 것입니다. 그렇게 맞서시다 마지못해 양보를 하시는 게 효과가 더 클 것입니다."
건무는 그 정도라면 못할 것도 없었다. 그렇게 하면 동화부인도 내세울 명분도 사라지고 또 다른 트집거리를 잡을 것도 원천적으로 없어지게 됨으로 더 바랄 게 없는 판단이었다.
"그만 물러가서 곧 실행에 옮길 준비를 해라."
도해선은 건무의 말을 듣고도 좀 미적대는 태도를 보였다.
"도해선 왜 그만 물러가지 않는가?"
"저하, 이번에도 태산팔협은 양신에게 또 당하고 말았습니다."
건무는 반문했다.
"그 자들이 또 당했다고? 혹시 사상자가 나왔다는 말인가?"
"사상자는 없으나 겨우 본국으로 도망칠 수가 있었답니다."
"수국으로 잘 돌아갔는지도 확인을 해보라."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런데 태산팔협은 철장을 납치해 가면서 양신에게 남긴 말이 있었답니다."
"무슨 말을 남겼는가?"
"철장을 구하려면 직접 중원 땅으로 와서 구해가라고 했답니다."
"양신을 유인하려는 속셈이군! 나는 철장의 안전이 젤 걱정이다."
건무는 난감하기가 그지없는데 도해선은 또 다른 얘길 꺼냈다.
"저하께선 걱정을 금치 못하시겠으나 천만다행인 점도 있습니다."
"천만다행인 점도 있다니?"
"태산팔협이 또 체포되어 국상에게 끌려갔으면 어쩔 뻔 했겠습니까?"
건무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태산팔협이 도주한 것을 확인해 준 자는 누구인가?"
"저하, 함께 행동한 구조리란 자입니다."
도해선은 그렇게 보고하면서 철장이 태산팔협에게 살해를 당하고 만 것은 숨겼다. 건무는 큰 분노를 느끼면서도 한편으론 다행스럽게 여길 점도 있었다. 만약에 태산팔협이 양신에게 또 체포를 당했다면 자신이 수국 황제에게 복속을 약속하는 밀서를 보내는 일이 탄로되어 위상이 크게 실추될 일이었다. 그렇게 되면 전쟁을 앞두고 정국을 주도하는데 을지문덕에게 밀리는 처지가 될뿐더러 완전히 매도를 당할 일이었다.
"저하, 철장이 납치당한 것을 여선부인은 모르시지요?"
"나는 그럴 걸로 짐작만 하고 있다. 그 일은 절대로 알게 해선 안 되므로 전적으로 네가 책임을 지고 입단속을 철저히 해야 한다."
"저하, 걱정하지 마시옵소서. 다만 양신은 저하께서 태산팔협을 석방하신 걸로 알고 있음을 아셔야 하겠습니다."
"도해선, 양신이 그걸 어떻게 알았단 말인가?"
"태산팔협이 양신에게 그런 말을 했답니다."
"그 자들은 미친놈들이 아닌가? 이렇게 되면 그 일을 국상에게도 알려지게 되어서 내 입장은 그야말로 말이 아니게 되지 않겠는가?"
건무는 너무도 화가 나서 도해선을 다시 노려보게 되었다.
"저하, 그렇지만 국상은 그런 말을 꺼낼 수가 없을 것입니다."
도해선이 그런 대답을 한데는 이유가 있었다. 을지문덕은 양신에 관한 일을 지금까지 건무에게 숨겨온 왔기 때문이다. 더욱이 전쟁을 앞두고 그런 일로 내부적인 분란을 일으켜선 좋을 게 없음으로 신중을 기할 수밖에 없을 것이었다.
"하긴 국상도 그걸 떠벌여봤자 공적으로나 사적으로나 좋을 게 없음을 알고 남들에게 말을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보다도 철장을 구출해낼 일이 더 큰 문제인데 장차 어찌해야 좋을지 모르겠다."
"저하, 소인은 곧 사람을 수국으로 보내 알아보겠습니다."
"도해선, 너는 다른 일은 모두 젖혀 두고라도 그 일부터 손을 써라."
"저하, 소인은 양신을 처치하는 일도 다시 시도할 계획입니다."
"그 자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요동성에 있습니다."
"그 자를 처치하기보다 이렇게 하면 어떻겠느냐?"
"저하, 어떻게 하라는 말씀입니까?"
"그 자가 요동성으로 가게 된 것은 국상이 미리 취한 조치일 것이다. 다시 말하면 네가 손을 못 대게 만들려는 목적이다."
건무의 말에 도해선은 고개를 끄덕이고 말했다.
"저하, 양신을 중원으로 보내 철장을 구출시키면 어떻겠습니까?"
"그건 한번 생각해 볼 여지가 있다고 생각된다. 그렇지만 국상은 날 크게 경계하는 입장이다. 서로가 경원을 할지언정 적대관계가 지속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을 것 같은데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저하, 그것은 별도의 일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러므로 언제고 국상에게 운을 한번 떠보시는 게 어떨까 하는 생각입니다."
"한번 운을 떠 본다?"
"저하, 소인의 말씀대로 꼭 해주십시오."
"알겠다."
"소인은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도해선은 몸을 일으켜 돌아갔다.
건무는 잠시 후 여선의 방으로 갔다. 방 안으로 들어선 뒤 한 귀퉁이에 뉘어진 갓난애에게 흘끔 눈길을 준 뒤 입을 열었다.
"여선, 그대가 대부인께 드렸다는 말씀을 전해 들었다."
여선은 그 말에 잔뜩 겁에 질린 표정으로 아무런 대꾸도 하질 않았다. 그러나 가슴 속으로 도사린 옹심을 다지고 있는데 건무의 입에서 뜻밖의 말이 흘러나왔다.
"여선, 저 아이의 애비는 혼약을 맺었던 양신의 씨가 분명한가?"
건무의 음성은 좀 거칠고 떨림마저 일고 있었다.
"예."
여선은 이를 악물듯 대답을 하고 말았다.
"그 자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모르옵니다."
건무는 여선이 행방을 모르고 있음을 확인하고자 다시 물었다.
"자네는 신라로 갔을 것으로 추측을 한다는데 지금도 그런가?"
"예."
"양신이 신라 땅으로 갔다면 그곳에서 살려는 생각일 것이다. 그런데 그대는 대부인께 신라로 가고 싶다는 말을 했다지?"
"예."
여선은 자신의 뜻을 확실하게 밝혀두기로 했다. 건무는 그런 태도를 보며 양신이 고구려로 돌아온 것을 모르고 있음을 확인하게 되었다. 그러나 철장이 태산팔협에게 납치를 당한 게 곧 알려질 게 문제라고 여기면서도 여선을 좀 더 달래볼 마음에 입을 열었다.
"여선, 혹시 여기서 나가고 싶은 마음이 있는가?"
건무가 불쑥 묻는 말에 여선은 자기도 모르게 대답했다.
"예."
"마음이 그럴지라도 포기를 하라. 그 이유는 궁궐의 지엄한 법도 때문이다. 한번 궁에 들어온 이상 사사로운 사정으로 다시 나갈 수는 없다."
"저하, 그렇지만 저는 사정이 다르지 않습니까? 궁에 들어오기 전에 지은 죄가 너무도 큽니다. 그 죄는 쫓겨나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그렇기는 하다만 아무리 죄가 커도 내가 용서를 하면 그만이다. 그러니 그대는 다시는 그런 말을 꺼내지 말라."
건무가 그런 대답을 하자 여선이 물었다.
"저하, 아기는 어떻게 되는지요?"
"아이는 궁에서 나가야 만 한다."
"저하, 저는 아기와 떨어져선 살 수가 없습니다."
"아이와 떨어져 살 수가 없다면?"
"아기만이 궁을 나가게 된다면 저는 자진할 수밖에 없겠습니다."
"여선, 지금 제정신으로 하는 소린가? 잘 못되어도 한참 잘못된 생각은 더하지 말라. 왕궁에 들어온 사람은 사사로운 일로 다시는 나갈 수도 없을뿐더러 자진이란 말은 더더욱 안 된다. 만약에 그런 짓을 저지를 경우 아이도 목숨을 잃게 되고 말 것이다."
건무에 말에 여선은 반발하듯 말했다.
"저는 아기와 함께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여선의 단호한 말에 건무는 눈썹을 꿈틀 움직였다.
"듣자듣자 하니 못할 소리가 없군? 내가 양신보다 못할 게 뭐냐?"
건무의 직설적인 질문에 여선은 거침없이 대꾸했다.
"저는 지금도 양신을 그리워하고 있습니다."
여선은 두려움 속에서도 죽기로써 대답을 했다. 동화부인이 시킨 대로 과감한 대답을 함으로써 자신의 뜻을 명확하게 해두겠다는 생각이었다.
"아직도 그 자를 그렇게 그리워한다고?"
건무는 기가 막힌 듯 천정을 한동안 올려다보면서 그렇다고 해도 포기할 수가 없는 오기를 느끼면서도 그럴수록 달래보기로 했다.
"여선, 그대는 단순한 생각으로 그런 말을 하는 것이다. 그러나 궁에서 좀 더 지내다 보면 생각이 달라질 것이다. 왕궁에서 사는 것은 세상 여인들이 다 동경하는 일인데 그대는 세상 물정을 너무 몰라서 그런다."
"저하, 저는 오직 고향으로 돌아가서 살기만을 바랍니다."
건무는 그런 대답을 듣고 몸을 일으켜 세우고 말았다. 자신은 장차 이 나라의 제위를 승계 받을 몸이었다. 그럼에도 여선이 안중에도 없다는 태도를 보이자 자존심이 무참히 짓밟히는 기분이었다. 분노보다 허탈감이 터 컸다.
그날 밤 건무는 일부러 동화부인의 방에서 취침을 했다.
"저하, 오늘 여선과 무슨 얘기를 나누셨습니까?"
동화부인의 말에 건무는 트릿하게 반문했다.
"부인, 내가 무슨 얘기를 나눴는지 정말 몰라서 물으시오?"
"제가 그걸 어찌 알겠습니까?"
건무는 시치미를 떼는 동화부인에게 정색을 했다.
"부인은 내가 후궁을 두지 못하게 막을 생각이요?"
"저하, 그렇지는 않습니다만 여선의 경우는 다르지 않습니까?"
"부인, 나는 여선을 절대로 내치고 싶지가 않소."
"저하께서 정히 그러시면 폐하를 다시 만나 뵐 수밖에 없습니다."
"부인, 나하고 타협을 해볼 생각은 없소?"
"무슨 타협을 하자는 말씀입니까?"
"부인이 한사코 용납을 하지 않겠다면 여선을 궁에서 내보내겠소."
"여선을 궁에서 내보내겠다니? 그 말씀 정말이십니까?"
동화부인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고 건무는 뜸을 들이다 대답했다.
"여선을 후궁이 아닌 사사로운 여인으로 계속 만나기로 했소."
"후궁이 아닌 사사로운 여인으로 계속 만나겠다니요?"
"여선을 출궁시켜서 만나면 되지 않겠소?"
"출궁을 시켜 만난다고요?"
"궁 밖에 사처를 잡아 주고 여선을 들여놓고 사사로이 만나겠소."
"궁밖에 사처를 잡아 주고 사사로이 만나겠다고요?"
동화부인은 반문하고 입을 다물었다.
"그것조차 안 되겠다는 생각이요?"
건무도 반문하고 표정을 살폈다.
동화부인은 내심 화가 치밀었다. 그러나 한번 생각해볼 필요가 있었다. 어쩌면 도리어 잘 된 일인지도 몰랐다. 왜냐하면 어차피 여선을 탈출시킬 계획인데 그걸 역으로 이용할 수가 있기 때문이었다. 즉 여선을 궁밖에 두는 게 그 일에 훨씬 유리하다는 판단이었다.
"내가 사사로이 만나는 것조차 반대를 한다면 없었던 일이요."
건무가 하는 말에 동화부인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저하, 여선을 후궁 자리에서 물러나게 하는 것은 분명합니까?"
"솔직히 말해서 그러고 싶지는 않소. 그러나 부인이 워낙에 바라는 일이므로 그럴 수밖에 더 있겠소? 나는 여선을 사사로이 만나는 여인으로 로 삼겠소. 부인은 그것조차 막을 권리는 없지 않겠소?"
건무의 음성은 나직했지만 단호했다. 그 말 속엔 불만이 가득 찼을 뿐더러 위압감도 충분히 느낄 수가 있었다. 동화부인은 반발을 하려다가 그만 두었다. 더 이상 비위를 거슬러선 안 될 일이었다.
동화부인은 또 다시 생각을 해볼 일이 있었다. 남편이 궁 밖에 사사로이 계집을 두려는 것마저 막았다간 더 큰 부작용을 일으킬 게 뻔했다. 아예 자신의 곁엔 얼씬도 않으려고 들지도 몰랐다. 우선은 여선을 궁에서 쫓아내는 것만으로 그쳐야만 했다.
"저하, 여선을 궁 밖에 둘 데가 있겠습니까?"
"지금부터 마련을 해야 하오."
건무의 대답에 동화부인은 내심 생각하는 바가 있었다.
"저하, 사처는 어떻게 마련을 하시렵니까?"
"도해선이 사처를 구하기로 했소."
건무의 대답에 동화부인은 속이 또 뒤틀렸다. 그렇게 되면 여선은 도해선의 보호 아래 들게 되었다. 남편의 비위를 더 이상 거스르지 않으려고 나긋나긋한 음성을 내었다.
"저하, 여선의 사처는 제가 구하고 관리를 해야 하겠습니다. 저도 여선을 잘 돌봐 줘야 저하로부터 미움을 덜 받을 것 같아 그럽니다."
건무도 그것마저 막아선 좋을 게 없겠다고 생각했다.
"부인이 그렇게 해주면 고맙소. 그래야 마음도 편하실 것이고."
"저하, 아무튼 간에 잘 해보겠습니다. 되도록이면 궁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는 곳을 물색해 마땅한 가옥을 한 채 마련해 보겠습니다."
"부인, 부탁하오."
건무는 대답하고 동화부인을 끌어안았다. 남편의 품에 안기는 동화부인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여선이 도망을 치게 만들 계획이 보다 쉽게 달성을 할 수가 있게 되어 혀를 쏘옥 내밀었다.
이튿날 동화부인은 여선의 방으로 갔다.
"여선, 아이와 함께 곧 궁에서 나갈 수 있게 되었다."
"대부인,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저하가 자네에게 무슨 말씀을 하신 건 없는가?"
"저는 아무런 말씀도 들은 게 없습니다."
동화부인은 이상하다는 듯 말했다.
"아기와 함께 궁 밖으로 나가서 지내게 되었다."
"궁 밖으로 나가서 어떻게 지낸다는 말씀입니까?"
"당분간은 저하를 그대로 모셔야 하겠네."
여선은 속으로 기뻐하다가 표정이 굳어들었다.
"그럼, 제가 나가나 나가지 않으나 마찬가지가 아닌가요?"
동화부인은 불만스러워하는 여선에게 빙긋이 웃었다.
"그렇지 않다. 좋은 결과를 얻기 위한 방편을 쓰려는 것이다."
"대부인, 좋은 결과를 얻는 방편은 어떤 것입니까?"
"여선, 자네가 원하는 것은 양신에게 돌아가는 게 아닌가?"
여선은 무겁게 고개만 끄덕여 보였다.
"무슨 일이건 한 술에 배가 부를 수는 없는 법일세. 자네는 우선 아이와 떨어지지 않게 된 것만으로도 감지덕지로 여겨 내 말을 따르게나."
"대부인의 말씀대로 하겠습니다."
"나는 자네가 궁을 나간 뒤 도망을 칠 계획을 구체적으로 세우겠다."
"대부인, 그게 정말 가능하겠습니까?"
"가능할지 않을지는 두고 볼 일이나 힘껏 해보는 수밖에 없다."
동화부인의 대답에 여선은 마구 눈물이 흐르게 되었다.
"여선, 그 일을 위해 우리는 서로 믿고 일심동체가 돼야 한다."
여선은 고개만 끄덕였다.
"그렇지만 앞으로도 저하의 비위를 잘 맞춰드리고 성의를 다해 모셔야 한다. 저하가 무슨 의심을 품지 않게 하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
"무슨 말씀인지 잘 알겠습니다. 시키시는 대로만 하겠습니다."
"자네가 도망을 치려는 목적은 양신에게 돌아가는 일이다. 그에 관한 소식도 전해 주겠다. 들으면 매우 기뻐할 것이다."
여선은 의아해하며 물었다.
"대부인, 제게 무슨 기쁜 소식이 있겠습니까?"
"양신이 지금 있는 곳을 알려 주겠다."
동화부인의 말에 여선은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대부인, 그 말씀 정말이십니까?"
"여선, 웬 의심이 그리도 많은가?"
"대부인,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자네 말대로 양신은 처음엔 신라로 갔었다. 그런 뒤에 백제를 거쳐서 지난 해 가을에 다시 고구려로 돌아왔다."
"다갈촌으로 돌아갔습니까?"
"아니다. 다갈촌으론 돌아갈 수가 없는 처지가 되지 않았나?"
"그러면 어디에 있습니까?"
"국상의 호위무사가 되었다."
"그렇다면 장안성에 있다는 말씀입니까?"
"장안성에서 잠시 머물고 있다가 순무 병단에 들어갔다."
"대부인, 순무가 끝났으니 장안성으로 돌아온 것입니까?"
"장안성으로 오지 않고 근무지를 옮겨 지금은 요동성에서 근무한다."
"대부인, 저는 그리로 빨리 가고 싶습니다."
"여선, 무슨 경거망동의 말을 하는가? 앞으론 더욱 말조심을 하라. 탈출계획을 실행하자면 얼마간 시간이 필요하므로 자중하기 바란다."
여선은 감격의 눈물을 흘리면서 고개만 끄덕였다.
"앞으로 양신에 관한 소식은 듣는 대로 전해 주겠다."
동화부인은 그런 말만 남기고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