쇠나라 28. 관용

28. 관용

by 정완기

28. 관용(寬容)



2월 초순으로 접어들었다.

수국은 대병력을 동원할 발진준비를 끝냈다. 그게 알려진 고구려 백성들 사이에선 싸우건 항복을 하건 멸망당할 일만 남았다는 소문이 퍼졌다. 영양왕은 완전히 체념 상태에 빠져들었다.

건무는 또다시 요동 땅을 수국에 떼어주고라도 멸망만은 면하자는 말을 꺼냈다. 국왕 역시 극심한 불안감 속에 을지문덕을 연일 왕궁으로 불러들여 여러 가지 질문과 보고를 받았다.

을지문덕은 유목민들이 지원할 병력이 상당한 수준이고 일부는 이미 발진했음을 알려 국왕이 용기를 불러일으키려고 했다. 무엇보다 국론 분열을 조장시킬 사태가 벌어질 것을 막으면서 국내성에 전선 지휘소를 차려놓고 압록수를 건너다녔다.

2월 중순 어느 날 밤 양신은 장안성의 성벽을 넘어 들어왔다. 을지문덕은 밤늦게야 지친 몸으로 잠자리에 들려는 참인데 방문 밖에서 낮은 음성이 일어났다.

"합하, 약광입니다."

을지문덕은 급히 일어나 방문을 열고 내다보니 양신이 서 있었다.

"자네가 여긴 무슨 일로 왔는가? 내가 부르지 않는 한 장안성에 절대로 오면 안 된다고 말하지 않았는가?"

"합하, 저로선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양신은 방안으로 들어와 무릎을 꿇고 앉았다. 을지문덕은 굵은 눈물을 주르륵 흘려 내리는 양신을 보며 철장 때문에 그러는 것임을 직감했으나 꾸짖듯 입을 열었다.

"대장부가 웬 눈물을 보이고 그러는가?"

을지문덕은 지금까지 철장이 태산팔협에게 납치를 당한 걸로 알 뿐이지 그 사실을 확인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므로 자신도 철장에 관한 일로는 불길한 예감을 떨쳐낼 수가 없었다.

"저는 사부님이 끌려가셨다는 수국 땅으로 가야 하겠습니다."

을지문덕은 뭐라 대꾸할 말이 없었다.

"소관은 태산팔협을 찾아가서 사부님을 구출해내야 합니다."

"약광, 그들을 찾아간다고 해서 문제를 해결할 걸로 생각하는가? 이 일엔 복잡한 사정이 얽혀 있으므로 경솔하게 움직여선 안 된다."

"합하, 그렇다고 해서 언제까지 가만히만 있을 수가 있겠습니까? 소관은 요동성 성주님의 허락을 받았습니다. 다만 움직이기 전에 합하를 뵙고 말씀이라도 드리고 가려고 장안성에 몰래 숨어들었습니다."

"약광, 군인은 개인의 사정보다 나라의 안위를 더 중시해야 함을 모르는가? 군인으로써 마음대로 행동을 할 생각을 먹어선 안 된다. 군대란 사사로운 행동은 절대로 용납되지 않으니 요동성으로 다시 돌아가라."

"합하, 사부님이 그렇게 되신 건 소관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찌 가만히 있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동안에 소관은 괴로움으로 밥을 먹을 수가 없고 잠도 잘 수가 없는 나날을 보내야만 했습니다."

양신은 자책감과 불안을 가눌 길이 없어 또다시 눈물을 흘려 내렸다. 을지문덕은 그런 양신의 심경을 이해하지만 위로하고 달래줄 방법이 없었다. 단지 어떻게 해서든 중원 땅으로 가는 걸 막을 생각뿐이었다.

을지문덕은 그날 밤은 잠을 재우고 이튿날 양신과 마주 앉았다.

"약광, 편히 잤는가?"

"합하, 모처럼 푹 잤습니다."

"약광, 지금부터 어제 못 나눈 얘기를 좀 더 해보자."

"예."

을지문덕은 호통만 칠게 아니고 이성적인 설득을 하기로 했다.

"안타까운 심정은 잘 알지만 그럴수록 냉정하길 바란다."

양신은 자신을 설득하려는 것으로 알고 입을 다물고만 있었다.

"약광, 나는 자네가 그렇게 꽉 막힌 사람일 줄은 몰랐다. 덮어놓고 혼자서 적진 속으로 들어가는 게 얼마나 어리석은 생각인지 모르는가?"

"사부님은 절 키워주신 은인입니다. 저 때문에 저렇게 되셨습니다."

"약광, 태산팔협을 석방시킨 것은 왕제 저하로 알고 있다. 그러므로 그들이 철장을 납치해 갔다면 해치려는 데 있지는 않다. 철장을 이용해서 자넬 중원 땅으로 유인하고 목숨을 빼앗으려는데 목적이 있다."

"저하, 그걸 안다고 해도 소관은 어쩔 수가 없습니다. 무엇보다 사부님의 생사를 알아보자면 중원 땅으로 가는 수밖에 없습니다."

"약광, 정히 가려면 계획과 대책을 세우고 움직여라. 무조건 적지로 들어가는 어리석음을 저질렀다간 무슨 일을 당할지 모른다. 태산팔협과 대결은커녕 고구려 첩자로 몰려 체포되어 처형을 당하고 말 것이다."

양신도 그 말에는 입을 열지 못했다.

사부를 구출하자면 태산팔협과 겨루는 것을 전제로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데 전쟁을 목전에 둔 상태에서 적국 땅에 들어가고 그런 일을 벌이는 게 가능할지는 스스로도 의문이었다. 을지문덕의 말처럼 사부를 구하지도 못하고 자신은 목숨만 헛되이 잃을 수도 있었다.

"합하, 소관도 어렵고 무모한 일임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죄의식에 사로잡혀서 나날을 보내기가 너무도 괴롭습니다. 차라리 살기보다 죽음을 택하는 게 덜 괴로울 것 같습니다."

을지문덕의 음성은 부드러우면서도 준엄해졌다.

"약광, 그걸 안다면 냉정을 되찾도록 해라."

양신의 입에선 또 다른 말이 흘러나왔다.

"합하, 소관은 도해선 조의를 한번 만나봐야 하겠습니다."

"도해선을 무엇 때문에 만나겠다는 것인가?"

"무슨 대책을 세우고 있는지 알아보고 동참을 하려고 합니다."

을지문덕은 한심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자네가 찾아가면 그자는 얼씨구나 하고 반길 것이다."

"왜 그렇게 말씀을 하십니까?"

"자네를 수국으로 보내 죽음으로 몰아넣으려고 들 테니 그렇지."

양신도 그 말에 수긍이 갔지만 반발심도 있었다.

"합하, 소관은 수국으로 가건 여기에 머물건 목숨이 위태해질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뭘 꺼리고 주저할 게 있겠습니까?"

"나도 자네 못지않게 철장의 안위를 걱정하고 있다. 그건 저하 역시 마찬가지다. 저하는 어찌 되었건 철장의 사위가 되시므로 구출을 해낼 대책을 백방으로 강구하고 계실 것이니 좀 기다려보자."

"합하, 소관은 그렇게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면 저하에 대한 감정 때문에 그러는가?"

을지문덕은 철장의 사태가 매우 심각성이 큰 것임을 잘 알고 있었다. 그 이유는 주랑 때문에 하루에 한 번씩 찾아오다시피 하는 연개소문을 통해서 여러 가지로 부정적인 얘길 많이 들었기 때문이다.

"약광, 이 밤중에 성문을 어떻게 통과할 수가 있었는가?"

"성벽을 넘어서 들어왔습니다."

"그랬다면 남의 눈에 띄진 않았겠군? 자네가 내 집에 있는 것은 비밀에 부쳐야 하므로 당분간은 일체 외출을 삼가라."

양신은 그 말을 듣고 궁금증이 일었다.

"합하, 주랑 낭자는 여기서 잘 지내고 있습니까?"

"주랑은 잘 지내고 있다. 그러나 철장에 관한 일을 모르고 있다. 알게 되면 큰 충격을 받을 것이라 당분간은 그 일을 비밀에 부치기로 했다."

양신은 무겁게 고개만 끄덕였다. 그러는 가슴 속엔 후회와 자책감이 또 일어나고 있었다. 만약에 자신이 조국으로 돌아오지 않았으면 사부가 그런 변고를 당할 일은 없었을 것이었다.

"약광, 나는 자네와 의논을 좀 해야 되겠다."

"합하, 소관과 무슨 의논을 하시렵니까?"

을지문덕은 양신의 반문에 좀 머뭇거리게 되었다.

여선부인은 얼마 전 아들을 출산했다. 그게 양신의 자식임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그 사실을 양신에게 전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를 고민하다가 말을 하지 않기로 했다.

"합하, 왜 말씀을 하시지 않습니까?"

"이 의논은 여선부인에 관한 문제이다. 그러나 그대가 포기할 마음을 먹는다는 전제로나 나눌 수가 있는 얘기이기 때문이다."

"합하, 소관은 그런 의논은 하고 싶지가 않습니다."

"자네의 심경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다. 그러나 언제까지 그 질긴 연정의 끈을 놓지 못하며 살아 갈 것인지를 묻지 않을 수가 없다."

양신은 또다시 입을 다물었다.

"약광, 안 되는 일은 안 되는 일이다. 이젠 그만 마음을 접어라."

을지문덕의 음성은 단호했지만 양신은 대답을 하지 않았다.

"언제까지 연연해서 매달리다간 아무짝에도 못 쓸 사람이 된다."

양신은 한숨만 흘려냈다.

"약광, 사람은 어떻게 살고 어떻게 죽느냐가 중요하다. 그런데 한 여인에게만 연연하다가 죽음을 당하고 말 것인가? 빼앗긴 여인을 정히 되찾고 싶으면 무슨 방법이라도 찾아보게나. 그러나 안 되겠다는 판단이 서면 즉시 포기를 해야 되지 않겠는가? 그만 결정을 내려야 한다."

양신은 계속 입을 다물고만 있었다.

"내가 자네 심경을 대신 말해 보겠다. 되찾고 싶다. 그러나 그럴만한 힘이 없다. 그렇다고 포기할 수도 없다. 그로인해 속만 태우며 부전거리는 상태이다. 이런 말이 아니겠는가?"

양신이 고개만 끄덕이자 을지문덕의 음성은 더욱 엄해졌다.

"그렇다면 그대처럼 한심한 인생도 없겠다."

"합하의 말씀대로 어느 쪽이든 결정을 내리도록 노력을 겠습니다."

"약광, 결정을 내린다면 어느 쪽이 되겠는가?"

"갑자기 말씀을 드릴 수는 없고 시간을 조금 주십시오."

"약광, 좀생이 같은 앙탈을 부려선 안 된다. 사나이로 대범성을 발휘하는 통 큰 결단을 내려주기 바란다."

"통 큰 결단은 어떤 것을 말씀하십니까?"

"여선부인을 단념하고 사나이로 새로운 길을 개척하는 것이다."

"합하께선 포기를 뜻하시는 것인데 그건 아직."

"포기는 자신을 극복할 수가 때만 가능하다. 빨리 포기하고 사나이로 큰 뜻을 한번 품어봐라. 자넨 큰 뜻을 품을 만한 충분한 자질을 갖추고 있으므로 마음만 열면 얼마쯤이라도 보람찬 일을 해낼 수가 있다."

"합하, 소관도 그러고 싶습니다만 그게 쉽지가 않을 일입니다."

"도끼날이 없어져도 자루마저 버리진 말라는 말처럼 전부를 버리면 안 된다. 희망이 없으면 새 희망을 찾으면 되고 구만리 같은 앞날을 한 여인 때문에 목숨까지 버리면 안 된다. 자네에게 큰 기대를 걸고 있다."

양신은 묵묵부답이라 을지문덕은 다른 말을 꺼냈다.

"나는 저하와 매우 불편한 사이가 되었다. 저하께선 내가 자네를 숨기고 감싼다는 생각에 매우 좋지가 않은 감정을 품고 계시다."

양신은 내심 여간 송구스럽지가 않은데 을지문덕이 말을 이었다.

"나는 오늘 저하를 만나 뵙게 되었다."

"합하, 무슨 일로 만나려고 하십니까?"

"도해선은 지금 자네 목숨을 노리고 있다. 그것부터 막지 않으면 안 되겠으므로 자네에 관한 말씀을 드리고 관용을 베풀어 주실 것도 청하겠다. 곧 국란이 닥치게 될 시기라 모두가 힘을 합쳐야 한다. 간곡하게 말씀을 드리면 좋은 결과를 기대할 수가 있을 것 같다. 그리고 자네 또한 저하를 한번 뵙지 않으면 안 되겠다."

"합하, 소관이 왜 저하를 왜 뵙는단 말씀입니까?"

"그걸 몰라서 묻는가? 자네의 목숨을 구하기 위함이다."

"합하, 소관은 목숨을 구걸하고자 왕제를 만나고 싶진 않습니다."

"그댄 여인을 되찾던 포기를 하던 간에 일단은 저하를 만나 보도록 하라. 상대의 말도 들어보고 어떤 사람인지도 알아야 되찾건 포기를 하건 마음을 정할 수가 있지 않겠는가? 정히 되찾을 생각을 하고 있다면 그 일을 실행에 옮기는 계획을 세우는 데도 만남은 필요할 것이다."

"합하께선 소관이 포기를 전제로 하시는 말씀으로 들립니다."

"솔직히 말을 하면 그렇다."

"소관이 저하를 만나면 무슨 말을 하라는 말씀입니까?"

"늦게나마 저하의 처남으로 인사를 드리게 된 것에 용서를 빌고 충성을 맹세하게. 그렇게 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가 없음을 알아야 한다."

양신은 그 말을 듣고 마음이 흔들려서라기보다 자신 때문에 을지문덕이 건무와 반목하게 됨을 원치 않아서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을지문덕은 대답을 듣게 되자 곧 집을 나섰다.

양신은 홀로 있는데 방문이 빠끔히 열리고 주랑의 얼굴을 디밀었다.

"주랑?!"

양신이 나직이 외치자 주랑은 반색을 하며 말했다.

"오라버니, 잠시 들어가도 되겠어요?"

"어서 들어오시오."

주랑은 방안으로 들어가 나직이 물었다.

"오라버니, 이곳엔 어떻게 오셨어요? 무슨 소식이라도?"

양신은 주랑이 사부에 대해서 묻는 것임을 알고 곤혹스러움에 시선을 마주치지 못하며 딴 소리를 하게 되었다.

"나는 합하의 부름을 받고 왔을 뿐이요."

"오라버니, 저는 다갈촌에 언제쯤 가게 될까요?"

양신은 그 말에 또 눈시울을 붉히게 되었다.

"오라버니, 무슨 언짢은 일이라도 있으신가요?"

"고향 얘기를 듣자니 눈물이 나오게 되었소."

양신이 계속 얼버무리기만 하는데 주랑의 입에서 뜻밖의 말이 나왔다.

"오라버니, 제겐 기쁜 일도 생겼어요."

"주랑, 기쁜 일이라니 무슨 일이오?"

"저는 여선 언니를 만나볼 수 있게 되었어요."

주랑의 대답에 양신은 놀라고 어리둥절하면서 물었다.

"주랑, 그게 사실이요? 어떻게 만날 수가 있단 말이요?"

"시동 선인이 만날 수 있게 도움을 주기로 했어요."

"시동 선인이?"

"저는 여선 언니를 만나보려고 장안성에 온 거예요."

"시동 선인은 무슨 수로 그 청을 들어줄 수가 있단 말이오?"

"왕제 저하의 정실부인은 시동 선인의 이모님이 되신답니다. 그래서 어머님께 말씀을 드렸더니 궁에 들어가 동화부인을 만나 제 사정을 전했더니 동화부인이 만남을 주선해 주겠다는 약속을 하셨답니다."

주랑은 지금 그 날이 오기를 학수고대로 기다리는 중이었다. 양신은 들떠있는 주랑을 바라보면서 만감이 교차하는 가슴으로 입을 열었다.

"주랑, 여선을 만나면 내 얘기도 할 생각이요?"

"물론이지요. 오라버니가 여선 언니를 얼마나 그리워하시는데 당연히 그 말부터 전해야 하지 않겠어요?"

양신은 그래서 좋을지는 모르겠는데 주랑이 물었다.

"오라버니는 기쁘지 않으세요?"

"나도 기쁘오. 그러나 내 얘길 전해서 좋을지는 모르겠소?"

양신의 대답에 주랑은 어두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오라버니 말씀은 알아듣겠어요. 그런데 혹시 여선 언니가 다른 생각을 하실까봐 걱정이 되어 그러신다면 저는 섭섭한 마음이 드네요."

주랑은 양신의 아픔을 느끼면서 연개소문으로부터 들은 말이 있어 그런 대답을 했다. 왜냐하면 여선이 지금도 양신을 그리워하고 하고 있음을 잘 알았기 때문이었다.

양신도 을지문덕의 충고대로 여선은 그만 잊어야 할 일이나 주랑의 말을 듣고 또 다시 마음이 흔들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주랑도 양신의 눈치를 보며 또 입을 열었다.

"오라버니의 심정을 제가 왜 짐작을 못하겠어요? 그러나 제가 함부로 말씀을 드린 것은 미안하지만 그런 말이 나올 수밖에 없었어요."

"주랑은 날 걱정해서 한 말인데 내가 그걸 왜 모르겠소?"

"저는 이제부터 오라버니께 꼭 드려야 할 말씀이 있어요."

"무슨 말이요?"

"여선 언니는 정월에 출산을 했대요."

"출산을 했다니?"

"예, 아들을 낳으셨대요."

"아들을 낳았다고?"

"저는 여선 언니를 만날 때 아기도 볼 수가 있었으면 좋겠어요."

"그런데 아이를 금년 정월에 낳았다고 했소?"

"예, 그러니까 한 달밖에 되지 않지요."

양신은 여선이 벌써 아이까지 낳았다는 말에 이젠 깨끗이 단념을 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했다. 지금까진 여선을 포기하는 게 죽음보다 더 힘든 일로 여겼지만 냉철해지지 않을 수가 없었다.

"오라버니는 앞으로 장안성에서 지내시게 되나요?"

"아니요. 다시 요동성으로 돌아가야 하오."

"시동선인은 이곳에 자주 오시므로 만나보고 가셔야지요?"

"나도 만나보고 가면 좋겠소."

"이삼일에 한 번씩 오므로 곧 오실 때가 되었어요. 저는 이만 나가봐야 하나 자주 들리겠으니 무슨 시킬 일이 있으시면 말씀하세요."

주랑이 방을 나가자 혼자 남은 양신은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문득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여선과 마두골 진달래꽃 건조장에서 함께 밤을 보냈던 일을 기억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조금 있다가 연개소문이 주랑을 따라 나타났다.

"형, 여기는 무슨 일로 나타났소? 아무튼 간에 반갑소."

"시동선인, 잘 왔네. 그동안 잘 지냈는가?"

"나야 잘 지내고 있소만."

연개소문은 그렇게 대답하고 주랑을 돌아다 봤다.

"누님, 남자들끼리 나눌 말이 좀 있으므로 자리를 잠시 피해주시오."

"그러겠어요."

주랑이 자리를 뜨자 연개소문은 낮은 음성으로 말했다.

"형, 이곳엘 오다니 제정신이요?"

"사부님 때문에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네."

"이리로 와서 뭘 어찌 하겠다는 것이요?"

"나는 사부님을 찾아 수국으로 갈 생각이었네. 대장군님의 허락을 받았기 때문에 합하를 뵙고 떠나려고 밤중에 성벽을 넘어 들어 왔네."

"합하께 꾸중께나 들었겠소. 형은 여기서 죽음을 자처하지 말고 빨리 빠져나가서 다시 요동성으로 돌아가야 하오."

"그럴 생각이나 합하로부터 들어야 할 말씀이 있어 머물고 있네."

"합하로부터 무슨 말씀을 들어야 한다는 것이요?"

"합하께선 나 때문에 왕제 저하를 만나 뵈려고 출타하셨네."

양신은 그렇게 대답하고 을지문덕과 나눈 이야기를 전부 들려주었다. 연개소문은 다 듣고 나서 심각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형, 그 일이 잘 될지는 모르겠소. 그런데 왕제 저하께서 허락을 하신다면 만나 뵈러 가야 하는데 나는 그래도 좋을지는 모르겠소."

"나는 일단 가기로 마음을 먹었네."

연개소문은 그런 대답을 듣고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러나 속으론 걱정이 여간 크지가 않아서 난감한 표정으로 말했다.

"형, 그 일은 각오를 단단히 하지 않으면 안 될 일이요. 그런데 만약에 여선부인도 만나볼 수 있게 된다면 만나볼 생각이요?"

"나는 저하의 처남이 된 사람인데 당연하지 않은가?"

"형, 처남 소린 하지 마오. 또 저하께서 설사 여선부인과 만남을 허락하신다고 해도 피해야 하는 게 도리가 아닐까 생각하오. 암, 피해야지."

"내가 가려는 것은 그럴 목적이 가장 클세."

양신의 대답에 연개소문은 한참을 있다가 입을 열었다.

"형, 모든 일이 잘 되길 바라겠소."

연개소문은 그 말을 하고 몸을 일으켜 세워서 양신이 물었다.

"왜 일어서는가?"

"이만 돌아가야 하겠소. 형이 여기에 있는 동안엔 오지 못하겠소."

"왜 그러는가?"

양신의 실문에 연개소문은 대답이 없이 가버렸다. 그제야 앞으로 자신의 상황이 좋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을지문덕과 건무는 단 둘만의 회동이 이뤄졌다. 을지문덕은 유목민의 지원 병력은 일부가 도착했음을 알렸다. 그리고 병력 운용계획에 관한 의견을 나누고 맨 끝에 가서야 양신에 관한 얘길 꺼냈다.

건무는 양신에 관한 말이 나오자 조금 당황하는 기색을 보였다. 도해선의 건의대로 태산팔협으로 양신을 처치하려고 했으나 성공을 못했고 소문만 퍼져 큰 타격을 받은 처지였다.

을지문덕도 그런 사정을 잘 알지만 앞으로도 도해선의 손에 양신이 목숨을 잃는 것을 막아야 할 절박함 속에 입을 열었다.

"저하께선 양신에 관해 알아보신 게 있으신지요?"

"그 자에 관해선 신라와 백제를 떠돌다 백제국 좌장에 의해 조국으로 돌아오게 되었고 국상이 그 자를 호위무사로 삼은 것만을 알뿐이요."

건무는 도해선이 저지른 모든 행위와 자신은 상관이 없음을 다분히 드러내려는 태도로 말을 했다. 을지문덕도 그런 유체이탈 화법이 아니면 안 될 것임을 이해하고 있었다.

"저하, 양신은 다시 타국으로 떠나려는 걸 제가 주저앉혔습니다."

"국상이 그렇게 한 이유는 무엇이요?"

"저는 철장과 오랜 친구 사입니다."

그런 말을 전제로 자신과 철장은 오랜 친구라 양신을 보살펴 주지 않을 수가 없는 사정임을 밝혔다. 더욱이 양신이 타국을 떠돌며 어떤 일들을 겪었는지를 알고 더욱 불쌍하게 여기게 되었다. 그런데 다시 타국으로 떠나려고 하니 말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기 위해 호위무사로 삼고 곁에 붙잡아 두었다. 그런 일들로 양신을 설득하고 다독이는데 시간이 좀 걸려서 건무에게 알리는 일이 늦어졌음을 밝혔다. 그러므로 부디 관용을 보여 양신을 용서하고 용납해 줄 것을 간곡히 청했다.

건무는 그런 말을 다 듣고 묵묵부답인 채 나름대로 생각에 잠겼다. 자신에 대한 세간의 나쁜 소문과 인식을 불식시켜야만 했다. 을지문덕의 청을 들어주어 그 일에 대한 부담을 더는 것도 좋을 것 같았다.

"저하, 나라는 큰 위난에 처했고 단 한 명의 장정이라도 새로울 판입니다. 양신을 훌륭한 전사로 큰 역할을 할 걸로 기대하게 됩니다. 부디 새로운 삶을 찾고 나라에 봉공할 수 있게 거두어 주십시오."

을지문덕은 양신의 잘못은 거론하지 않고 무조건 용서만 빌었다.

"나도 그 자의 검술실력이 매우 뛰어났음을 소문으로 들었소."

"저하, 양신을 처남으로 거두시면 쓸모가 클 것으로 생각됩니다."

"국상은 내가 그럴 마음이 들 것 같소?"

건무는 반문하고 을지문덕의 표정을 살폈다. 그러나 자신도 한 짓이 있어서 무조건 거부하는 태도만 보이는 것을 자제해야만 했다.

"저하께선 이번 기회에 저에 관한 오해도 풀어 주셨으면 합니다."

을지문덕이 한 술을 더 뜨는 말까지 하자 건무는 쓴 웃음을 지었다.

"국상, 나는 충분히 오해가 풀렸다는 생각을 할 수는 없겠소. 그러나 어느 정도는 이해가 가고, 양신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을 해보겠소."

"저하, 양신은 크게 반성하는 빛을 보이고 있습니다. 여선부인을 그만 잊고 새 삶을 찾으려는 태도를 확실하게 보이고 있습니다."

"국상께선 대체 어떻게 설득을 하셨소?"

"반성을 하지 않으면 사람 구실을 못하게 된다고 경고하며 달랬습니다. 처음에는 질긴 집착을 헤어나질 못하는 터라 시간이 많이 걸렸습니다. 힘이 많이 들었으나 결국은 마음을 돌리게 만들었습니다."

"국상, 그 자가 마음을 돌린 걸 뭘로 증명을 하겠소?"

"여선부인을 접고 저하께 충성을 바치겠다는 말을 했습니다."

건무는 불만스럽지만 끝내 대꾸를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좋소."

을지문덕은 그 대답으로 일은 끝났다고 생각했다. 집으로 돌아오면서 자신이 무슨 말을 했는지조차 생각이 나지 않을 만큼 여전히 긴장 상태를 벗어날 수가 없었지만 양신과 마주 앉자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합하, 가셨던 일은 어찌되셨습니까?"

"저하께서 자네를 만나보겠다는 대답을 하셨다."

"합하, 무슨 말씀을 나누셨습니까?"

"나는 시종 변명밖에 할 말이 없었다. 그동안 자네에 관한 일을 말씀드리지 못한 이유를 주로 해명을 했다. 그리고 자네가 직접 저하를 찾아뵈고 용서를 빌고 싶다는 뜻을 밝혔다는 말씀을 드렸다."

"합하, 소관이 무슨 용서를 빌게 있다는 말씀입니까?"

양신의 항의성 반문에 을지문덕은 무시하듯 대꾸했다.

"자네가 저하께 충성을 맹세하겠다는 말씀도 드렸다."

을지문덕은 일방적인 말만 계속했고 양신은 거듭 반발했다.

"합하, 어찌 그런 일방적인 말씀을 하실 수가 있으십니까?"

"그렇게 해서라도 끝장을 봐야 한다. 이건 자네가 내 말을 따르는 게 아니고 스스로 결정한 일이고 그래야 저하도 관용을 베풀 수가 있다."

양신은 자포자기 심정으로 대답을 했다.

"합하의 말씀을 따르겠습니다."

여선은 새달궁을 벗어나 새로운 거처로 곧 옮기게 되었다.

건무는 궁을 나가게 된 여선을 보며 마음이 착잡했다. 거기다 그녀의 머릿속은 오직 양신밖에 없을 것인데 만나보게 해주기로 했다. 그럴수록 자신은 그녀의 빈껍데기 육체만을 소유할 뿐이란 비애감마저 들었다. 앞으로 궁에서 나가면 자기에겐 더 곁을 주지 않으려고 들지도 몰랐다. 그럼에도 그녀에게 끌리는 자신이 초라하다는 생각이 들고 한편으론 양신의 심경은 오죽할까 싶기도 했다. 사랑하는 여인을 잃고 목숨마저 위태한 처지에 몰린 양신에게 일말의 동정심을 느끼기도 했다. 여선을 깨끗이 포기를 한다면 보상을 해주는 게 마땅하다는 생각도 했다.

이틀 뒤 주랑은 연개소문의 모친을 따라 집을 나섰다. 동화부인은 여선과 주랑의 만남이 비밀리에 이뤄지게 하려고 시녀들이 여선의 방 앞으로 얼씬도 못하게 만들었다.

여선은 며칠 전 동화부인으로부터 뜻밖의 전갈을 들었다. 지금도 그게 사실인지 아닐지 모를 정도로 의문에 잠겨 지내야 했다. 그런데 방안으로 들어선 주랑을 보고 숨이 탁 막혀들었다.

"아?!"

"정말!"

두 여인은 동시에 외침이 일어났다. 그리고 거울 속의 자신을 보는 착각 속에 혼백이 빠져나간 사람처럼 멍청해져 갔다. 아기를 낳은 여선은 모성애 같은 것을 느끼면서 천천히 다가들었다.

여선이 떨리는 음성으로 물었다.

"이름이 주랑이라고?"

"여선 언니지요?"

"내게 동생이 있었다니!"

"나도 언니가 있을 줄은 몰랐어요!"

두 여인은 믿기지 않을 현실 앞에 볼수록 신기한 듯 서로가 얼굴을 만져보고 있었다. 그런 감격 속에 낳아 준 모친의 얼굴을 떠올려 보려고 했다. 그러나 그려지지가 않는 그림이었다.

동화부인과 연개소문의 모친도 그런 광경을 보면서 눈물을 지었다.

한참 만에 여선이 입을 열었다.

"주랑, 우리가 지금 꿈을 꾸는 것은 아니겠지?"

"언니, 저는 꿈을 꾸는 것만 같아요."

두 사람은 그런 말을 나누고 서로를 또 포옹했다. 비로소 피붙이임을 확인하는 마음이 실감될 수가 있었다. 동화부인과 연개소문의 모친은 단둘만이 얘기를 나누게 하려고 방에서 나갔다.

주랑이 먼저 입을 떼었다.

"언니, 양신 오라버니가 지금 국상 댁에 계셔요."

여선은 그 말을 듣고 깜짝 놀라며 상기된 얼굴로 물었다.

"그게 정말인가?"

상기된 얼굴에 기쁨이 활짝 핀 여선은 갑자기 세상이 밝아진 것 같았다. 꿈에도 그리던 사람에게 당장 달려가고 싶었다. 반면 주랑은 그런 말을 꺼낸 것은 양신과 약속을 어긴 일이라 걱정이 되었다.

그때부터 두 여인은 음성을 죽이며 양신에 관한 얘길 나눴다. 주랑은 양신을 그리워하는 여선의 눈빛을 확인하고 나자 말을 잘 꺼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동화부인이 방으로 다시 들어와 두 사람에게 다음을 기약하고 이만 헤어질 것을 권했다.

주랑은 아쉬운 작별을 하고 나설 수밖에 없었다. 집으로 돌아가자 기다리고 있던 양신에게 여선을 만난 얘기를 들려주었다. 양신은 자신에 관한 일도 전했음을 알고 당황하면서도 마음이 들떴다.

여선 또한 주랑을 만나고 나선 기쁨과 즐거움을 모르던 얼굴에 그늘이 벗겨지고 혈색도 좋아졌다. 무엇보다 양신과 다시 만날 생각에 긴장과 기대감에 찬 나날을 보내야만 했다.

건무는 여러날 고민을 한 끝에 도해선을 불렀다.

"도해선, 철장에 관한 일은 좀 알아낸 게 있는가?"

"저하, 등주로 보낸 자가 아직도 돌아오질 않았습니다."

도해선은 철장이 살해된 것을 극비에 붙이려고 구조리의 입에 재갈을 물려두었다. 대신 철장을 납치에서 풀어낼 방법을 찾고 있다는 거짓말만 계속하고 있는데 건무가 엄한 음성으로 말했다.

"도해선, 너는 날 곤경으로 몰아넣은 장본인이다."

"예?"

"여선이 철장에 관한 일을 알게 되면 그땐 그냥 두지 않겠다."

도해선은 경고하는 건무의 표정을 살피며 다른 말을 꺼냈다.

"저하, 다갈촌에서 사람이 왔습니다."

"무슨 일로 왔단 말인가?"

"소인이 불렀습니다."

"무엇 때문에?"

"다갈촌엔 철장이 없으므로 그 문제를 의논하려고 불렀습니다."

"무슨 문제를 의논한단 말인가?"

"저하, 빨리 임시 철장을 앉히지 않으면 안 됩니다."

"임시 철장을 앉히겠다고?"

"철장께서 계시질 않아 야장방을 통괄할 책임자가 없습니다. 전쟁을 앞둔 비상사태 속에 야장방을 저렇게 내버려 둘 순 없겠습니다."

건무는 타당성이 있다는 생각으로 대답을 했다.

"그건 네가 알아서 조치하되 그 일도 알려지게 하면 안 된다."

"저하, 잘 알겠습니다."

도해선은 그렇게 대답을 했지만 이미 임시 철장에 심복이 된 석해의 애비를 선정해 두고 있었다.

"나는 국상을 만났다."

건무가 불쑥 꺼낸 말에 도해선은 의아해했다.

"저하, 소인도 국상이 저하를 만나 뵌 것을 알고 있습니다만."

"양신을 처남으로 받아들일 생각이다."

도해선은 너무도 놀랐다. 자신도 양신이 장안성에 잠입해서 을지문덕의 집에 있는 것을 알고 있으므로 그에 관한 얘기를 꺼내려던 참이었다.

"저하, 국상이 무슨 말씀을 했기에 그런 결정을 내리셨습니까?"

"양신이 마음을 돌렸다고 한다."

"합하, 양신이 무슨 마음을 돌렸다는 말씀이십니까?"

"여선을 단념하고 내게 충성을 바치겠단다."

"그 자의 단념이란 말도 되지 않습니다."

"나로선 관용을 베풀 수밖에 없지 않겠나?"

도해선은 그 말에 펄쩍 뛰었다.

"저하, 관용을 베푸시다니 당치도 않을 말씀입니다."

건무는 도해선의 반발을 예상했지만 체념하듯 말했다.

"그렇게라도 해서 여선을 단념시킬 수만 있다면 그걸로 족하다."

도해선은 한숨까지 흘려내는 건무를 보면서 어이가 없었다. 그 심경을 이해를 하면서도 이건 결코 막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저하, 국상과 나누신 얘길 소인에게 들려주실 수는 없으십니까?"

"국상은 양신을 대신해서 내게 용서를 빌었다. 그동안 여선을 단념하게 만들기에 시간이 걸렸다니 나로선 용서를 할 수밖에 없었다."

"저하, 양신은 국상의 설득이 먹혀들 자가 아닙니다."

"이미 먹혀들었는데 무슨 소린가? 마땅히 그렇게 돼야 할 일이고, 그게 모두를 위해서도 좋은 일이 아닌가? 나는 양신을 곁에 두고 충성된 신하로 만들어 볼 생각이다."

"저하, 그러시면 괴로움만 더욱 커지실 뿐입니다. 저하께선 지금도 말할 수 없는 괴로움을 겪고 계시지 않습니까? 왜 긁어 부스럼을 더하려고 하십니까? 소인은 빠른 시일 내로 처치해 후환을 없애겠습니다."

"안 된다. 나는 양신을 만나보기로 했다.

건무의 단호한 말에 도해선은 눌린 듯 한참 있다가 물었다.

"저하, 양신을 앞으로 어떻게 하실 겁니까?"

"나는 양신의 충성을 받아들이기로 했고 장차 날 보좌하게 만들 것이다. 너는 내가 가장 아끼는 측근이니 양신을 네 수하에 두고 거느려도 된다. 내가 할 말은 이것뿐이다."

도해선은 그런 명령을 받고 이번엔 또 다른 말을 꺼냈다.

"여선부인의 사처는 제가 관리를 하겠습니다."

"그대는 이미 경비인력을 배치하기로 했지 않는가?"

"드나드는 사람들을 통제할 권한을 주십시오."

"너는 이미 그렇게 하고 있지 않는가?"

"대부인께서 소인에게 병력을 철수시키라는 분부를 내리셨습니다."

건무는 그 말에 대답을 않는데 도해선이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저하, 소인은 이런 말씀을 드리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무슨 말이냐?"

"양신을 제거할 수가 없다면 소인은 저하 곁을 떠나겠습니다."

"날 떠난다고? 그 따위 소릴 또 한 번만 더 지껄이면 용서하지 않겠다. 썩 밖으로 나가라."

도해선은 그런 호통을 듣고 찔끔해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건무도 새달궁을 나서 여선의 사처로 갔다. 여선은 아기 곁에 누워 있다가 황급히 몸을 일으켰다. 건무는 여선이 며칠 새 얼굴이 밝아졌다는 생각에 한껏 부드럽게 입을 열었다.

"여선, 그대는 양신을 만나보고 싶지 않은가?"

여선은 양신이 장안성에 있는 걸 알고 있었지만 놀라는 표정만 지을 뿐 아무런 대답도 하지를 않았다. 건무는 표정을 살피듯 입을 열었다.

"여선, 며칠 내로 양신을 만나게 될 것이다."

여선은 매우 놀란 듯 두 눈을 휘둥그레 뜨기만 했다.

"내 말이 미덥지가 않는 모양인데 기대를 해도 좋다."

"저하, 언제 만나게 되옵니까?"

"내일이다."

"저하, 제발 그러지 마옵소서."

건무는 의외란 표정으로 반문했다.

"여선, 왜 그런 말을 하는가?"

여선은 겁에 질린 표정으로 몸을 떠는 듯 고개를 가로 저었다. 양신이 자길 만나러 오면 위험에 빠질 수도 있어서 한 번 해보인 태도였다.

"여선, 이상한 생각은 하지 말라. 나는 양신을 처남으로 받아들이기로 관용을 베풀 뿐이다. 앞으로 내 곁에 두고 중용을 할 수도 있다."

여선은 숨을 죽이며 건무의 표정을 더욱 살폈다.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았으면 여선도 마음가짐을 새롭게 하라."

건무는 말이 없는 여선에게 부드러운 음성으로 다독이려고 했다.

"내가 양신을 만나려는 것은 여선이 과거사를 깨끗이 접게 만들려는 데 있다. 내가 보위에 오르게 되면 여선은 제2부인이 될 것이다. 저 아이도 잘 키워서 양신에게 돌려 줄 것을 약속한다."

여선은 그 말에 이마를 방바닥에 처박으며 비로소 울음을 터뜨렸다. 그 바람에 잠을 깬 아기가 울었다. 그러자 밖에 있던 동화부인이 방안으로 들어와 바닥에 아기를 들어 안았다.

"부인, 아이를 데리고 잠시 밖으로 나가 계시오."

동화부인은 건무의 지시를 말없이 따랐다.

"여선, 양신을 만나게 되면 잊으라는 말을 꼭 하기 바란다."

건무는 그 말만 던져 놓고 방을 나가 새달궁으로 향했다.

동화부인이 아기를 안고 들어 왔다. 여선은 들뜨는 감정을 억지로 누르려고 하는데 동화부인이 아기를 넘겨주고 눈을 찡긋하며 말했다.

"여선, 아무런 대답도 않길 잘 했다. 세상엔 죽기 살기로 마음을 먹으면 못할 게 없으므로 우리의 계획은 꼭 성공을 거둬야 함을 명심해라."

여선은 기쁨과 두려움 속에 대답했다.

"저는 대부인만 믿고 따르겠습니다."

동화부인도 새달궁으로 돌아가고 여선은 아기를 끌어안았다.

겨울의 끝자락에 이른 날씨라선지 꽤나 푹은 했다.

양신은 건무의 허락 아래 여선을 만나러 가는 날이 왔다. 을지문덕은 양신에게 건무에 대한 충성을 맹약할 것을 또다시 신신 당부를 했다.

"약광, 내가 한 말을 꼭 지켜야 한다."

을지문덕이 건무와 일방적으로 합의를 본 것에 양신은 응하고 싶지가 않았다. 그러나 여선에 대한 간절함이 아무리 커도 이젠 되돌리기가 어렵다는 판단에 담담한 심경이 되려고 해도 들뜨는 마음이었다.

"합하께서 걱정을 하시지 않게 하겠습니다."

대꾸는 그렇게 했지만 여선을 만나면 마음이 또 어떻게 바뀔지 모를 일이었다. 그러므로 자신이 다짐을 두듯 대답을 했지만 자신이 없었다.

"약광, 자네가 마음을 접어야 하는 것은 이 나라의 백성으로써 본분을 다하기 위함이다. 또 여선 부인을 위해서라도 꼭 그렇게 해야만 한다."

을지문덕이 재차 간곡한 당부를 하자 양신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양신도 여선을 연연해할수록 자신의 고통만 커질 뿐이라 이룰 수 없는 인연이라면 빨리 끊는 게 좋을 듯싶었다. 또 건무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것은 생명의 위험을 벗어나기 위함으로 꼭 필요한 일일 것 같았다.

을지문덕을 무슨 생각을 했는지 집을 나서려는 양신을 잠시 멈추게 했다. 그리고 횃대에 걸린 자신의 가죽조끼를 떼어들고 내밀었다.

"약광, 가죽조끼를 속에 껴입어라."

"합하, 이걸 왜 껴입으라고 하십니까? 저하를 만나 뵙는데 가죽조끼를 속에 받쳐 입을 필요가 있겠습니까?"

양신은 그렇게 물었지만 스스로도 위험한 곳에 들어간다는 생각은 떨칠 수가 없었다. 을지문덕이 엄숙하게 말했다.

"약광, 시키는 대로 해라."

"합하께서도 제가 사지로 들어가는 걸로 생각을 하시는군요?"

"사지로 들어가기 때문이 아니고 옛 정인을 만날 사람이라 그렇다."

"옛 정인을 만날 때는 가죽조끼를 껴입어야 한다는 말씀입니까?"

"신분을 망각하고 옛 정인을 끌어안게 될지도 몰라서 그런다."

을지문덕은 농담처럼 던진 말이었으나 뼈가 든 진담이기도 했다. 양신은 말없이 겉옷을 벗고 가죽조끼를 속에 껴입었다.

"자네에겐 작아서 갑갑하겠지만 참아보게."

"합하, 답답하지만 참을 만합니다."

양신이 쓴 웃음을 짓자 을지문덕이 물었다.

"약광, 왜 웃는가?"

"합하, 무장을 했으므로 한번 안아 봐도 되지 않겠습니까?"

을지문덕은 엄한 표정만 지을 뿐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합하, 걱정하지 마십시오. 다녀오겠습니다."

양신의 말에 을지문덕은 또 엄하게 입을 열었다.

"약광, 자넨 목숨을 보전하고자 저하를 뵙는 것임을 명심하라. 저하의 신하가 되지 않고는 살아남을 수가 없다."

양신은 그런 경고성 발언을 듣고 집을 나섰다.

여선의 거처엔 대문 앞에 병사들이 지키고 있었다. 병사들은 양신의 밀두도를 거둔 뒤 하녀에게 인계를 했다. 양신이 안으로 들어간 저택은 규모는 그리 크지 않으나 번듯했다.

하녀의 인도를 받아 대청으로 올라선 양신은 가슴이 마구 두근거렸다. 심호흡을 크게 해서 마음을 진정시킨 뒤 마른기침을 터뜨렸다.

그때 방문이 열렸다.

"오라버니!"

여선은 부르짖듯 외치며 달려 나왔다. 양신도 얼결에 양팔을 펼쳤다가 도로 내리고 말았다. 여선은 양신의 손을 잡고 방안으로 끌어드린 뒤 방문을 닫고 안겨들었다.

두 사람은 극적인 해후 속에 몸들이 후들거렸다.

"오라버니! 살아 계셨군요?"

양신은 애써 진정을 취하면서 여선의 얼굴을 바라봤다. 전보다 살집이 약간 붙고 더 여성스러워진 몸매가 어딘지 좀 낯설게 느껴졌다.

여선은 먼저 양신의 손을 잡고 방바닥에 눕혀진 아기한테로 끌었다. 양신은 건무의 자식을 낳은 걸로 알고 자신의 입장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 그러나 옹알이를 하는 아기가 왠지 모르게 낯설어 보이질 않았다.

여선은 아기를 들여다보는 양신이 핏줄이 당겨 그런다는 생각을 했다. 가슴 속이 환희로 벅차올라서 하마터면 오라버니의 아들이라는 말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뻔 했다.

양신은 여선이 안겨주는 아기를 안고 들여다보며 입을 열었다.

"아기가 잘 생겼군?"

여선은 당신의 아들이란 말이 또 튀어나올 뻔했지만 한숨으로 지웠다. 그랬다간 세 목숨을 함께 잃게 될 수도 있다. 다만 양신에게 전하고 싶은 말을 눈길 속에 담으려고 했다.

양신은 왠지 모르게 그런 눈길을 이상하게 여기는데 여선이 말했다.

"다갈촌에서 오라버니 소식을 듣게 되면 아버지께서 얼마나 기뻐하시겠어요? 이젠 모두가 마음을 놓고 걱정을 덜게 되었군요?"

여선의 입에서 나온 말에 양신은 죄책감으로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팠다. 그 일만으로도 자신은 여선은 그리워할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때 건무가 방안으로 들어섰다.

"그대가 양신인가?"

양신은 자세를 바로 하고 허리를 깊숙이 숙였다.

"저하, 제가 양신입니다."

건무는 눈길을 피하려는 양신에게 억지로 웃음을 지었다.

"양신, 나는 자넬 남문 문루에서 본 적이 있다."

"저하, 죄송합니다."

"괜찮다. 그럴만한 사정이 있었다니 그걸 따질 생각은 없다. 마음을 편히 먹게나. 나도 자넬 한번 만나고 싶었다."

건무는 여선을 돌아보며 강조하려 듯 말했다.

"양신은 내 처남이므로 마땅히 척족으로 대접할 것이요."

양신과 여선이 잠자코만 있자 건무는 아이를 들어 안았다.

"양신, 이 아기는 내 아들이다."

여선은 강하게 부인하고 싶었지만 입은 꼭 다물려져 있었다. 건무는 그런 여선의 내심을 알고 있다는 듯 양신에게 말했다.

"양신, 우리 부자에게 충성을 맹서할 수가 있겠는가?"

건무는 말하고 야릇한 미소를 머금었다. 양신은 무거운 강요에 눌린 사람처럼 무릎을 꿇고 입을 열었다.

"저하, 충성을 맹세합니다."

건무는 호탕하게 웃은 뒤 여선에게 시선을 돌렸다.

"여선, 훌륭한 오라비를 두었군? 이젠 원을 풀게 되었겠지?"

"예."

여선은 모기소리만큼 작은 음성으로 대꾸했다.

"앞으로 처남은 내 곁에서 보좌해주길 바란다."

양신은 그 말에 주저를 하다가 입을 열었다.

"저하, 소관은 서부 소속 군관으로 요동성으로 돌아가고 싶습니다."

건무는 양신의 대답을 듣고 그러는 게 더 좋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런가? 그렇게 하게. 어디서 근무를 하건 내 처남이 아닌가?"

그런 대답하고 이어서 뜻밖의 말을 꺼냈다.

"여선, 백제에서 온 쌍둥이 자매가 있다지?"

여선은 매우 당황하면서 대답했다.

"예, 저하."

"나는 국상에게 여선과 주랑이 함께 지내면 어떻겠느냐고 물었다."

여선은 숨을 죽이듯 반문했다.

"저하, 왜 그렇게 하시려고 하십니까?"

건무는 대수롭지 않게 대꾸를 했다.

"그러면 두 사람에게 다 좋을 일이 아닌가?"

여선이 아무런 대꾸를 앉자 건무는 딴 소릴 했다.

"주랑은 무예가 출중하다니 처남은 관심이 크겠군?"

양신이 의아한 표정을 짓자 건무는 말을 이었다.

"국상은 주랑을 자기 집에 두고 돌보겠다고 했다. 양신도 궁량이 큰 사람이라 여러 가지로 생각을 해볼 필요가 있겠네. 나는 처남과 주랑과 짝을 지워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는 군?"

건무의 말에 양신은 매우 당황해 하는데 명령을 하듯 말했다.

"처남, 오늘은 이만 돌아가게."

양신은 건무에게 절을 하고 여선에겐 눈길도 못 준채 나갔다. 여선은 그런 양신을 뚫어져라 바라봤고 그것으로 불편한 자리는 끝이 났다.

양신은 돌아가는 발걸음이 다시 무거워졌다. 건무가 한 말이 자꾸만 머리에 떠올라 신경이 크게 쓰였다. 그렇게 걷고 있는데 어디서 날아든 화살 2대가 등에 박혔다. 급히 돌아다보니 활을 든 2명의 사내가 담 모퉁이로 몸을 숨기는 게 보였다. 화살이 꽂힌 몸은 아픔이 컸으나 쓰러질 정도는 아니었다. 속에 껴입은 가죽조끼 덕분이었다.

양신은 그때부터 뛰다시피 달리기 시작했다. 집에 이르러 대문 안으로 들어서자 주랑이 기겁을 하듯 소리를 질렀다.

"오라버니!"

을지문덕도 뛰어나와 화살이 박힌 양신을 보며 엷은 미소를 머금었다.

"가죽조끼가 아니었다면 속절없이 당할 뻔했군?"

"합하께서 절 살려 주셨습니다."

"약광, 자신이 처한 현실을 똑똑히 알만 해졌겠지?"

양신은 고개를 끄덕이며 도해선과 구조리를 머릿속에 떠올렸다. 경악을 금치 못하는 주랑은 급히 달려들어 양신의 상의를 벗기었다. 피로 물든 속옷을 벗기고 상처에 고약을 붙여주었다.

"약광, 앞으로 이런 일은 계속 일어나게 될 것일세."

을지문덕은 그래도 양신이 고구려 땅에서 발을 붙이고 살 수가 있게 된 것만으로도 더 바랄 게 없다는 생각을 했다.

"합하, 저는 여선도 아기도 안아봤습니다."

"약광, 뭐라구?!"

을지문덕이 외쳤지만 양신은 꿈을 꾸는 듯한 표정만 지었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쇠나라 27. 비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