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 대침공(大侵攻) 612
영양왕 23년 2월 하순.
북국의 혹한이 끝나기도 전에 장안성엔 흉한 바람이 불어 닥쳤다. 수국 황제가 발표한 조서(詔書)가 고구려에 전해졌기 때문이다.
--한위(漢魏) 때 요동을 정벌해서 뒤엎었다. 그러나 주륙을 가하지 않아 그 종락(種落)이 다시 번식한 게 고구려이다. 그 종락은 사군(事君)이 없고 은혜를 모른다. 때문에 외방(外邦)이 전부 받드는 중국의 정삭(定朔)을 받지 않는다. 그 백성들은 가혹한 법령과 부세(賦稅)로 고통을 받고 여러 해 겹친 재해로 큰 기근에 시달린다. 누가 그들을 구해 주랴? 짐이 천의(天意)에 순응해 육사(六師)를 이끌고 가서 섬멸하겠다.
양광은 그런 조서를 보내고 동시에 병력을 동원했다. 병력 113만 명에 잡역부까지 보태면 2백여만 명에 이르렀다. 육군은 1백여 만 명으로 좌우군(左右軍)으로 나누어 24개 군단(軍團)을 편성했다. 군단마다 보병을 주축으로 기병(騎兵), 치중병(輜重兵), 보급대(補給隊)를 두었다.
좌군을 총지휘하는 상장군(上將軍) 우문술(宇文述) 밑에 대장군 설세웅(薛世雄), 신세웅(辛世雄), 장군 조효재(趙孝才), 최홍승(崔弘昇), 유사룡(劉士龍)이 속했고, 우군은 상장군 우중문(宇仲文) 아래 대장군 형원항(荊元恒), 우문개(宇文塏), 장군 위문승(衛文昇), 장근(張瑾), 중랑장 맥철장(麥鐵杖)이 속해 있었다.
수국 군은 탁군에서 매일 1개 군단씩 발진했다. 전 병력이 떠나는 데만 1개월이 걸렸고 행렬의 길이는 1천 여리에 걸쳤다. 맨 뒤엔 황제가 어영군(御營軍) 3만의 호위를 받으며 뒤따랐다. 한편 등주(登州)에서도 내호아의 함선 1천여 척이 수병(水兵) 10만 명을 태우고 출발했다.
우중문은 요하의 중상류로 향했다. 행군해 가면서 동돌궐 군 1만이 합류했고 여타 유목민 병력들도 속속 합쳐졌다. 건기로 접어든 요하의 중상류는 강물은 얕아져서 병력과 보급품을 실은 말 마차들도 쉽게 건널 수가 있었다. 그런데 돌궐군은 무슨 까닭인지 자꾸만 뒤처지기만 해서 간격이 자꾸만 벌어지게 되었다.
우문술은 요하의 중하류로 향하다 병력의 절반은 방향을 틀게 했다. 조효재와 최홍승의 병력은 고구려의 신성 쪽으로 설세웅과 신세웅의 병력은 개모성(蓋牟城)으로 진격하게 했다.
요하의 하류에 당도한 우문술의 전 병력은 강변에서 멈추었다. 강물이 깊어 도강을 할 수가 없자 부근의 주낙배들을 전부 모으게 했다. 뒤쳐 당도할 황제와 함께 강을 건너고자 주낙배들을 이어 붙여 부교(浮橋)를 만드는 일에 착수했다.
을지문덕은 국내성에서 총괄 지휘부를 하느라 눈코 뜰 새가 없이 바쁘게 지냈다. 적을 방어할 병력을 적소적재를 가려서 배치했다. 서부는 요동 땅의 최전선을 맡아야 하는 터라 8만 병력 중 요동성에는 3만, 개모성, 백암성(白巖城), 안시성(安市城)엔 각각 1만씩 배치했다. 그리고 기병 2만과 말갈병 5만으로 합동 부대를 편성해 20여 개의 비밀 보루(堡壘)들에 분산시켰다. 북부는 2만 병력이 신성과 현토성(玄兎城)을 지키고 기병 5천과 말갈군 2만으로 합동 부대를 편성해서 10개 보루에 배치케 했다. 동부는 1만 병력으로 수저성(水底城)과 남소성(南蘇城)을 지키고 기병 3천과 말갈군 1만의 합동 부대를 6개 보루에 배치케 했다. 남부는 1만 병력으로 비사성(卑奢城)과 건안성(建安城)을 지키고 기병 5천은 실위와 달말루 병력 1만과 합동부대를 편성해서 7개 보루에 배치함으로써 요동 지역의 방어 전선을 구축했다.
계루부는 후방에서 건무가 병력 8만을 지휘했다. 근위병 2만과 수부(水夫) 1만은 장안성 방위에, 대장군 고돌기는 3만 병력으로 살수 방어, 장군 고두우(高兜于)는 2만 병력으로 압록수 방어에 임하게 했다.
3월 초순으로 접어들기까지 양측의 접전은 없었다.
을지문덕은 장안성을 떠날 때 양신을 국내성으로 데려 와서 호위 무사로 원대복귀를 시켰다. 그런데 며칠 뒤 연개소문이 주랑과 함께 국내성으로 와서 양신은 여간 놀라지 않았다.
"주랑, 여길 어떻게 왔소?"
"저는 수국 땅으로 가려고 해요."
"주랑, 뭣 때문에 수국 땅으로 간단 말이요?"
"아무도 철장님을 찾으려고 하질 않으므로 저라도 나서야 하겠어요."
주랑은 부친에게 배신감을 불러일으키게 만들면서까지 고구려로 왔다. 그러나 만나보려는 생부는 생사를 알 수가 없게 되어 참담하기만 했다.
때문에 혼자서라도 수국으로 가겠다고 하자 연개소문은 너무도 걱정이 되어 양신과 함께 갈 것을 권하며 일단 국내성으로 데려온 것이었다.
양신은 사부를 찾아 나서겠다는 주랑 앞에서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
"주랑, 사부님에 관한 얘기는 누구한테서 들었소?"
"동화부인께서 납치를 당하신 걸 알려주셨어요."
"동화부인이? 그 일을 여선도 알고 있소?"
"예, 언니는 오라버니가 가만히 계신 걸 매우 섭섭하게 여기셔요."
양신은 그 말에 여간 충격을 받지 않았다. 을지문덕도 주랑이 전선으로 왔다는 보고를 받고 여간 당황해하지 않았다.
주랑은 을지문덕이 장안성으로 되돌려 보내려고 설득했으나 막무가내로 듣지를 않았다. 때문에 생각을 하다못해 그녀와 격리를 시킬 목적으로 양신에게 연락 임무를 부여해서 요동성으로 떠나게 했다.
이튿날 양신은 연개소문과 함께 요동성으로 향했다. 두 사람은 국내성을 떠나 요동 벌로 들어섰다. 거기서부턴 지나가는 곳마다 길가의 마을들은 청야(淸野) 작전으로 텅텅 비게 되었다.
두 사람이 사흘 만에 요동성에 당도하자 연생수는 의아해 했다.
"두 사람은 무엇 때문에 이리로 왔는가?"
"합하의 명을 받고 왔습니다. 이곳의 상황은 어떻습니까?"
연개소문이 묻자 연생수는 어두운 표정으로 대답했다.
"아직은 적이 요하를 건너지 못했다."
"대장군님, 요하 중상류 쪽은 이미 뚫려서 여러 성들이 포위를 당하는 사태가 벌어지고 있다는 보고가 들어 왔습니다."
양신의 말에 연생수는 무거운 음성으로 대답했다.
"여기도 곧 사태가 심각해질 것 같다. 두 사람은 곧 돌아가라."
연생수의 말에 연개소문이 입을 열었다.
"삼촌, 호위선인은 명목상 전령 임무를 띠고 왔지만 또 다른 사정도 있으므로 당분간은 여기서 근무를 해야 할 것 같습니다."
"다른 사정이란 것은 뭔가?"
연개소문은 그때부터 주랑에 관한 일을 설명해 주었다. 그러자 연생수는 별관심이 없다는 듯 말했다.
"호위 선인은 그렇다 치고 시동 선인은 장안성으로 돌아가게."
연개소문은 연생수의 말에 강한 음성으로 대답했다.
"삼촌, 저는 전선에서 근무를 할 것입니다."
연생수는 양신이 바친 두툼한 봉서를 받아들고 뜯은 뒤 작전지시서(作戰指示書)를 꺼내 읽었다. 그리고 새삼스러울 게 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만 끄덕이자 연개소문이 물었다.
"삼촌, 무슨 지시를 받으셨습니까?"
"합하와 나는 생각이 늘 같다."
"무슨 생각이 같다는 말씀입니까?"
"합하는 요동성을 철저히 지키는 걸 기본으로 작전을 펴라고 하셨다. 나도 무리한 작전은 가급적 삼가며 전면 충돌도 피할 것이다. 대신 기병으로 유격전술을 펴서 적을 피로하게 만들 것이다."
"요동 지역은 적이 양식을 얻지 못하게 청야 전술을 펴셨더군요?"
"그랬다. 합하의 지시 사항은 모두 철저하게 이행하고 있다."
두 사람이 고개를 끄덕이자 연생수는 말을 이었다.
"적은 지금 요하를 가로 지를 부교를 만들고 있다. 나는 그보다 내호아 선단이 도착하는 대로 본격적인 도하 작전을 전개할 것으로 본다. 그때 가선 요동성도 앞날이 암울해질 것만 같구나."
"대장군님, 저는 요하 변으로 한번 나가보고 싶습니다."
양신의 말에 연생수는 반기듯 대꾸했다.
"좋다. 지금 함께 요하 변으로 나가 보자."
세 사람은 즉시 말에 올랐다.
요동성 안은 서너 달 전과는 분위기가 판이해졌다. 북적대던 저잣거리엔 사람들이 없었다. 병사들만 성벽에 까맣게 들러붙어 쇠뇌를 설치하는 일에 매달려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세 사람은 성문을 나서 말을 달렸다. 흙먼지를 일으키며 황야를 얼마 쯤 달린 끝에 드넓은 요하 변에 당도했다. 강 건너 쪽엔 키를 넘는 갈대숲이 펼쳐져 있고 그 속엔 수많은 수국 군의 군기(軍旗)들이 바람에 휘날리고 있었다.
연생수는 앞장을 서 전망대(展望臺)로 올라갔다. 양신과 연개소문도 뒤따라 올라가자 그곳을 지키고 있던 소형 자오사(仔五乍)가 연생수에게 군례를 붙이고 보고를 했다.
"대장군님, 아직은 적의 별다른 움직임은 없습니다."
양신은 가잠성에서 전투를 체험한 경험이 있었다. 그래선지 시야에 들어오는 요하 변은 한없이 열린 채 허허롭고 고요하기만 했다. 때문에 전선(戰線)의 긴장감을 느낄 수가 없으나 멀리 건너 쪽 강변엔 수국 군이 만들고 있다는 부교(浮橋)가 강변에 띠처럼 늘어진 게 보였다.
연생수가 말했다.
"부교 끝이 이쪽 강변에 닿게 길어지면 도하작전을 감행할 것이다."
그때 강 건너 쪽에서 갑자기 북소리를 울렸다. 이쪽 강변에 포진한 고구려 병사들은 긴장된 눈초리를 보냈고 연개소문은 한 곳을 가리켰다.
"대장군님, 강 건너 쪽에 우문술이라고 쓰인 깃발이 보입니다."
"그 자는 적의 좌군을 총지휘하는 상장군이다."
양신도 손을 들고 한 군데를 가리켰다
"대장군님, 적의 부교가 움직이는 것 같습니다."
"부교가 거의 완성된 걸로 봐서 곧 설치를 하려고 들 것 같다."
부교는 수십 척의 전마선(傳馬船)을 밧줄로 묶어 연결을 한 뒤 그 위에 판자를 깔아 도로처럼 만드는 것이었다. 폭은 수레들도 지나다닐 만큼 넓어서 고구려 군은 배다리라고 불렀다. 그런 부교의 길이가 늘어날수록 고구려 군의 긴장감은 더해져 갈 수밖에 없었다.
"건너 편 갈대밭에서 적의 깃발들이 움직이고 있습니다."
양신의 말에 모두는 강 건너 쪽으로 눈길을 보냈다. 많은 깃발들이 우왕좌왕하는 속에서 크고 누런 깃발이 세워졌다. 연생수는 그것을 보면서 굳은 음성으로 말했다.
"누런 깃발은 황제의 표상인데 양광이 당도한 모양이다."
연개소문은 긴장된 음성으로 물었다.
"양광이 나타나면 곧 도하 작전을 펼치게 되는 게 아니겠습니까?"
"우선 황제 깃발을 내세워서 우리 쪽을 겁먹게 하려는 술책이다."
그때 2필의 기병들이 달려와 숨이 턱에 닿은 채 보고를 했다.
"대장군님. 연대웅 장군이 지키는 요하의 하구가 뚫렸습니다."
"뭣이? 어떻게?"
"적의 수군 함대가 도착했기 때문입니다."
"그 뒤의 상황은?"
반문하는 연생수의 눈에서 불꽃이 튀는 듯했다.
"연대웅 장군은 병력을 거두어 일단 안시성으로 후퇴를 했습니다."
"돌아가서 연대웅 장군에게 전하라. 병력 지원을 할 수가 없다. 성을 베고 죽을 각오로 싸워서 지켜내야 할 뿐이다."
2명의 기병들은 숨 돌릴 틈도 없이 말머리를 돌려 달려갔다.
양신은 강변을 돌아다니는 병사들이 진흙에 발들이 빠져 쩔쩔 매는 것을 보다가 연생수에게 건의를 했다.
"대장군님, 강변을 가득 메운 마른 수초들을 베어다 진땅에 깔아놓으면 병사들이 활동을 하기가 훨씬 편해질 것 같습니다."
"그거 좋은 생각이다."
연생수는 자오사에게 바로 지시를 하는데 연개소문이 외쳤다.
"강 건너 쪽에서 적병들이 부교 위로 오르는 게 보입니다."
그때 수국 군은 부교를 강변에서 떼어내기 시작했다. 아직은 부교 끝이 이쪽에 이를 것 같지가 않은데 병사들이 부교 위로 올랐다. 그리고 한 쪽 끌을 강의 복판으로 끌어내려고 했다.
연생수를 비롯해 모두는 거기로 눈길을 주었다. 벌써 고구려 병사들 중엔 적의 부교를 향해 활을 쏘기도 했다. 부교의 양쪽엔 선박들이 들러붙어 앞자락을 강으로 밀어내기 시작했다. 시간이 흐르며 부교의 앞자락이 고구려 군 쪽 강변에 가까워지게 되었다. 그런데 성급하게 많은 수국 병사들이 부교에 올라 전진을 개시했다.
고구려 군은 즉시 화살 공격으로 들어갔다. 부교 위의 적병들은 엄폐물이 없어 그대로 화살의 과녁이 되었다. 때문에 화살을 맞고 쓰러져 부교 위엔 시체들이 늘어났다.
수국 병사들은 시체들이 늘어나자 전방으로 더 나가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나 후방에선 병력을 계속 투입시켰다. 배다리 위에선 화살을 맞거나 떠밀려서 강물로 떨어지는 자들이 부지기수로 나왔다. 그로인해 부교 위가 아수라장으로 변했고, 그걸 안 지휘부는 뒤늦게 병력 투입을 중단하고 후퇴명령을 내렸다.
고구려 군은 잠시 동안에 적에게 큰 피해를 입히자 환호성을 질러댔다. 연생수는 흐뭇했지만 무슨 생각을 하고 양신과 연개소문을 데리고 요동성으로 돌아갔다. 그날 밤에 상황은 급변하게 되고 말았다.
내호아 전함들이 도착해서 부교보다 먼저 대규모 도하작전을 펼쳤다. 강변의 고구려 군은 급히 요동성 안으로 후퇴를 할 수밖에 없었다. 드디어 밀물처럼 밀려든 수국 군에 요동성은 포위를 당하고 말았다. 성을 지키는 병력은 3만에 불과한데 밀어닥친 적은 20만이었다. 큰 전력 차로 성은 언제 함락될지 모를 형편에 처하게 되었다.
연생수는 한 밤중에 적이 도강을 했다는 보고를 받자 연개소문과 양신을 성에서 내보냈다. 성 밖으로 나간 두 사람은 보루를 지키는 연두리(淵兜俚) 장군의 기병대로 가서 합류했다.
수국 군은 대병력으로 요동성을 포위하자마자 공격을 개시했다. 그러나 병사들은 대부분이 농투성이라 군사훈련을 제대로 받지를 못했다. 지휘를 하는 하급 군관들도 정규군 병사들 중에서 임시로 승급한 자들이라 제대로 함락작전을 펼칠 수가 없었다. 때문에 장수들이 공격 명령을 내려도 병사들은 성벽엔 접근하지 않고 우하는 소리만 질러댔다.
연생수는 사전에 요동성 주변에서 크고 작은 돌맹이들을 줘 모아 안으로 옮겨 놓았다. 때문에 싸울 줄을 모르는 수국 병사들은 끌고 온 공성기(攻城機)에 쓸 돌맹이들을 구하기가 힘들어 무용지물이 되어 양측 간의 치열한 공방전은 벌어지기가 힘들었다.
거기다 급조된 수국 군 기병들은 말을 타고 모는 일조차 익숙하지가 못해 허울뿐이었다. 그런 병력을 거느린 장수들은 야간 전투는 엄두를 못 내고 밤이면 지지 속에서 일체 움직임을 중지시켰다.
양측은 전력의 격차가 너무도 큰 만큼 쓰는 전략도 서로가 달랐다. 대병력인 수국 군은 한 덩어리로 뭉쳐서만 움직였다. 때문에 병력이 적은 고구려 군은 뚫고 들어갈 엄두를 낼 수조차 없었다. 그러나 고구려 군은 전쟁 전에 기병 편제를 바꾸었다. 원래는 소형(小兄)이 지휘하는 5백 명을 단위의 부대가 기본이었지만 1백 명 단위로 쪼개어 조의(皁衣)가 지휘하는 소규모 지대(支隊)로 쪼갰다. 기병대는 보루에 숨어 있다가 밤이면 수국 진지에 야습을 가했다. 과감히 침투해서 보급품을 불태우고 진지 밖에 세워놓은 공성기들을 파괴했다. 때문에 수국 군은 해가 지면 진지 속에 틀어박혀 반격에 나서지도 않을뿐더러 일체 움직이질 않았다.
보루에 있는 연두리 장군 밑엔 말갈족과 꾸린 10여 개의 합동 부대가 있었다. 그 중에서 소형 아리(亞俚)와 사리(乍俚)가 이끄는 부대는 수국 군에게 신출귀물로 소문이 날만큼 큰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그런 아리 부대에 속하게 된 양신과 연개소문은 밤마다 야습에 참가했다. 양신은 어느 날 야습 때 적의 군마들도 탈취할 것을 건의했다. 아리는 양신의 검술 실력을 믿고 특별 부대를 꾸려고 임무 수행을 맡겼다. 그로 인해 야습 때마다 얻는 적의 군마가 수십 필에 이르렀다.
수국 군 병사들은 그처럼 전투에 열의를 보이지 않아 한 달이 가깝도록 요동 땅에선 함락을 당한 성들이 한 군데도 없었다. 수국 장수들은 매일처럼 성 공격을 닦달했으나 병사들은 밤마다 악몽 같은 야습에 시달리고 혼 줄이 나 피해만 늘고 사기는 완전히 떨어지고 말았다.
양광은 어영군 3만을 거느린 채 요서 땅에 머물고 있었다. 그러나 부진한 전투성과만 보고를 받자 화를 불같이 냈다. 나중엔 자신이 직접 전투를 지휘하겠다며 요하를 건너 요동 땅으로 들어왔다.
우문술은 황제를 맞고 면목이 너무도 없어 직접 진두지휘로 요동성에 맹공격을 펼쳤다. 그러나 함락을 당하지 않으려는 고구려 군도 필사적으로 맞섰다. 매일 벌어지는 공방전으로 고구려 군도 수백 명의 전사자와 부지기수의 부상자를 내게 되었다. 그러나 수국 군은 서너 배가 넘을 피해를 입어야 했다. 피로감이 쌓인 양측은 자연 전투가 소강상태로 빠져들지 않을 수가 없었다.
연생수는 겨우 한시름을 놓게 되자 보루에 있는 양신을 국내성으로 돌아갈 것을 명령하고 연개소문도 동행을 시켰다. 그 편에 중과부적인 병력으론 더 버틸 수가 없다며 을지문덕에게 원병을 청했다.
요동 땅은 어디나 수국 군으로 깔리게 되었고 두 사람은 그런 위험 지경을 뚫고 사흘간이나 나가서 국내성에 당도했다. 그러나 을지문덕은 원병을 보내달라는 연생수의 청에 쓴 웃음만 머금었다.
"합하, 되도록 빨리 요동성으로 원병을 보내 주셨으면 합니다."
연개소문의 말에 을지문덕은 대꾸했다.
"싸움은 이제 겨우 시작인데 벌써 원병을 청한단 말인가? 장수와 병사들은 죽기로 싸워 자체적으로 요동성의 함락을 막을 수밖에 없다."
연개소문은 매우 섭섭함을 느꼈지만 다른 성들도 사정은 마찬가지라서 이해가 되어 묵묵히 있는데 을지문덕이 다른 말을 했다.
"연선인은 장안성으로 돌아가서 상가님을 모셔야 하지 않겠나?"
"합하! 요동성이 위험한데 제가 어떻게 장안성으로 갈 수가 있습니까? 저는 겁쟁이가 아닙니다. 그동안 호위 선인과 길동무 삼아 위험한 행로를 돌파한 사람으로서 자존심이 매우 상합니다."
연개소문이 불쾌한 표정을 짓자 을지문덕은 대견하다는 듯 물었다.
"연선인, 요동성에서 전투에도 참가를 해봤는가?"
"합하, 저는 연두리 장군 소속으로 밤마다 야습에 참가했습니다."
"나는 그런 줄은 몰랐군? 그렇다면 묻겠다. 수국 군의 대병력에 포위된 요동성이 굳건하게 버텨낼 수가 있는 이유를 무엇으로 보는가?"
연개소문은 그 질문의 요지가 다른 데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합하, 솔직한 답변을 드리겠습니다. 아직도 요동성이 버텨낼 수가 있는 이유는 단 한 가지 수국 군 병사들의 전투 열의가 너무도 없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그런 대답을 듣고 싶으신 것은 아니신지요?"
양신도 그 말에 동의하고 나섰다.
"합하, 소관도 같은 생각입니다. 수국 병사들은 군사훈련을 충분히 받지 못한 것으로 보였습니다. 그에 반해 우리 기병들은 원거리 화살 공격으로 적에게 막대한 피해를 주고 있습니다. 때문에 수국 병력이 아무리 많은들 병사들은 전반적으로 위축된 상태로 이동조차 꺼리고 있습니다."
을지문덕은 그런 말을 하는 두 사람에 경고를 보내고 싶었다.
"적은 워낙에 대병력이라 아무리 막대한 병력 손실을 입혀도 좀체 줄여 놓을 수가 없고 그보다 우리 병사들이 먼저 지칠 게 문제이다."
"합하, 저도 우리 병력이 지치게 되면 그땐 끝장이란 생각입니다."
양신의 말에 을지문덕은 다른 말을 꺼냈다.
"또 다른 심각한 문제가 있다."
"합하, 또 다른 심각한 문제는 무엇입니까?"
"적은 전반적으로 서부의 성들만 집중 공격을 퍼붓고 있다. 그에 반해 북부와 동부의 성들은 느슨한 포위만 가하고 있는 점이다."
"합하, 적이 그러는 이유가 뭔지 모르겠습니다."
"적은 그런 양면 작전을 써 고구려의 내부를 분열을 획책하고 있다."
"합하, 양면 작전으로 어떤 내부 분열을 획책할 수가 있겠습니까?"
"고구려의 여타 부들을 회유해서 연맹체를 분열시키려고 한다. 여타 부에 항복을 권해서 복속을 받으려고 한다. 그러나 먹혀들지가 않을 서부에 대해서 집중 공격을 퍼붓고 있는 것이다."
을지문덕의 말에 두 사람은 더욱 의기소침해지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적은 곧 수륙 양면의 장안성 직공에 나서게 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압록수 이남으로 전선이 확대되어 더욱 위험은 걷잡을 수가 없게 된다."
"합하, 적이 장안성 직공에 나서면 그땐 절망적이겠습니다."
연개소문의 말에 을지문덕은 눈을 감으며 중얼거리듯 대꾸했다.
"그러나 적이 아무리 막강하다고 해도 약점을 찾을 수는 있다."
"합하, 적이 대병력인데 무슨 약점을 찾겠습니까?"
"어느 나라건 부득이한 경우가 아니면 함부로 전역을 일으키진 않는다. 그런데 양광은 그걸 무시했다. 부국강병과 자신의 위상을 높이고 과시하려고 무리하게 많은 병력을 동원했으나 그건 큰 독이 될 것이다."
"합하, 많은 병력을 동원한 게 왜 독이 된다는 말씀입니까?"
"많은 병력을 동원한 중원 땅의 형편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그만큼 수국 백성들의 어려움이 커서 불만이 극에 달했을 것이다. 그런 문제들이 독이 되고 우린 그런 약점을 이용해야만 한다."
을지문덕은 수국 내부에서 내란이 일어나고 그에 따른 부작용을 벌서부터 예상을 하고 있었다. 만약에 그게 현실화가 될 경우 고구려는 버텨내면서 희망의 끈을 놓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었다.
양신이 입을 열었다.
"합하, 소관은 또 다른 걱정도 있습니다."
"어떤 걱정인가?"
"요동성에서 들은 소문인데 북부와 동부에선 거의 전투가 벌어지질 않고 있답니다. 때문에 그곳의 유목민 병력들은 서부 지역으로 옮겨 있습니다. 그것도 고구려의 내부 분열과 연관을 지을 수가 있겠습니까?"
을지문덕은 그걸 모르지 않았다. 그런데 연개소문이 입을 열었다.
"형, 유목민 병력은 남의 전쟁터에서 싸울 의욕이 아예 없소. 고이 전쟁터에서 전투가 아닌 무기를 획득하는 목적만 있소. 그런데 북부와 동부에서 전투가 일어나지 않으니 전투가 있는 서부로 올 수밖에 없소."
연개소문의 말에 을지문덕은 고개를 저었다.
"그건 하나만 알고 둘을 모르는 소리다. 양광은 지금 여타 부 상가들을 상대로 복속을 시키려는 유화책을 쓰고 있기 때문이다."
연개소문이 입을 열었다.
"형, 내가 그 이유를 말해 주겠소. "
"우린 그런 병력을 믿고 어떻게 전쟁을 수행한단 말인가?"
양신이 어이없어 하는데 연개소문이 말을 이었다.
"뿐만 아니라 유목민 병사들은 무기를 수거하면 즉시 집으로 돌아간다오. 그러니 그나마 알량한 병력들조차 점점 줄어들게 되었소."
양신은 그 말을 듣고 그런 병력을 얻고자 추위 속에 고생을 하며 순무를 하며 유목민을 상대로 많은 공을 들였나 하는 회의감이 일었다.
"합하, 고구려는 전역 때마다 말갈병을 동원해 온 걸로 알고 있습니다. 이번에 말갈군도 여타 유목민 병력처럼 굴지는 않을까요?"
"말갈군의 역할이 큰 만큼 나는 회의적이진 않다. 그러나 이번엔 말갈족도 내부 사정이 크게 달라져 은근히 걱정이 되는 점이 없지는 않다."
"합하, 이번엔 왜 말갈군의 사정이 달라졌다고 보십니까?"
"말갈병은 백제와 신라를 공격할 땐 마음껏 약탈을 감행할 수가 있었다. 그 때문에 힘껏 싸우게 되나 고구려 판도 내에서 벌어진 전쟁에선 그럴 수가 없기 때문에 힘껏 싸울 것 같지가 않다. 그렇다고 해도 적에겐 심리적으로 위협을 줄 수가 있는 병력이라 무용지물은 아닐 것이다."
을지문덕의 대답에 양신이 물었다.
"합하, 수국 군은 서부 쪽만 공격할 뿐 북부와 동부에선 성들은 포위만 하고 있는데 거기엔 또 다른 무슨 이유가 있을 걸로 보십니까?"
"좋은 질문이다. 양광은 고구려의 모든 성들을 포위만 해놓고 장안성을 직공으로 끝장을 보려는 의도가 있음을 알아야 한다."
양신과 연개소문이 고개를 무겁게 끄덕이는데 을지문덕이 물었다.
"연선인은 장안성으로 가지 않겠다면 앞으로 내 밑에 있으면서 호위 선인과 함께 근무를 해보면 어떻겠는가?"
"합하께선 절 왜 휘하에 두려고 하십니까?"
"두 사람이 짝이 되어 움직이면 할 일도 많고 쓸모가 더 클 것으로 생각이 된다. 내일부터 당장 수행할 임무가 있는데 함께 했으면 좋겠다."
"합하, 어떤 임무입니까?"
"현토성과 수저성에 보낼 지시가 있다."
"합하의 말씀대로 저도 함께 가겠습니다."
"그러면 일찍들 자라. 내일 아침에 일찍 일어나 출발을 해라."
연개소문은 물러나오면서 양신에게 투덜거렸다.
"나는 공연한 대답을 한 것만 같소."
"연선인, 갑자기 그런 말을 왜 하는가?"
"나는 여기에 머물면서 주랑 누님과 지내고 싶소. 그런데 합하는 잠시도 엉덩이를 붙일 틈을 주려 하시질 않고 결국은 거기에 말려들었소."
양신은 껄껄 웃기만 했다. 두 사람은 숙소로 가서 먼지와 땀을 씻고 나자 주랑이 저녁상을 들고 왔다. 연개소문은 반갑게 인사를 했다.
"주랑 누님! 아직도 여기에 계실 줄은 몰랐습니다."
"나는 두 분이 요동성을 무사히 다녀오셔서 기뻐요."
주랑은 그렇게 대꾸하고 양신에게 물었다.
"오라버니, 요동성에서 혹시 철장님에 관한 소식은 못 들으셨나요?"
양신이 말없이 고개만 젓자 주랑은 실망하는 빛을 보였다.
두 사람은 시장기를 크게 느껴서 급히 밥을 먹었다. 수북한 밥사발이 금세 비워지고 배가 부른 연개소문은 주랑에게 너스레를 떨었다.
"누님의 음식 솜씨가 이렇게 좋은 줄은 몰랐습니다."
"나도 참 맛있게 먹었어. 연선인처럼 식성이 까다로운 사람이 칭찬을 하는 걸 보니 주랑은 음식 솜씨가 대단한 걸!"
주랑은 칭찬하는 말을 듣고도 심경이 착잡해서 말이 없었다.
"형, 난 누님처럼 음식 솜씨가 좋은 여인을 아내로 얻으려고 하오."
양신은 그런 말에 아무런 대꾸도 없이 그만 몸을 일으켰다. 주랑과 자리를 함께 하는 게 거북했기 때문이었다. 연개소문은 불만스럽게 숙소로 따라왔고 두 사람은 자리에 눕자마자 코들을 골았다.
이튿날 아침에 일찍 일어난 두 사람은 국내성을 출발했다.
3월 중순으로 접어든 산야엔 아직도 눈이 덜 녹은 데가 많았다. 그리고 드문드문 진달래꽃들이 핀 데도 있었다. 곧 신록으로 물들 산야를 배경으로 두 사람은 말 달림을 계속하고 있었다.
양신은 말을 달리면서 다갈촌의 불놀이를 떠올리고 있었다. 올해는 철장이 계시질 않아서 행사를 열지 못할 지도 몰랐다. 그러다가 불현듯 여선과 아기를 머리에 떠올리게 되며 그리움 같은 것을 느꼈다.
그때 연개소문의 입에서 단말마가 터졌다.
"형, 몸을 숙여!"
두 사람은 말을 멈추게 되고 동시에 연개소문은 양신에게 몸을 날려서 덮쳤다. 두 사람의 몸은 말 잔등에서 땅바닥으로 떨어졌고, 머리 위로 여러 대의 화살들이 스쳐 지나갔다.
그때 전방에선 수국 기병들 10여 기가 두 사람을 지켜보고 있었다. 연개소문은 땅바닥에서 활을 겨누어 쐈다. 적병 하나가 마상에서 굴러 떨어지자 나머지는 두 사람에게 돌진해 들었다.
적병들은 땅바닥에 있는 두 사람을 순식간에 둘러쌌다. 양신은 재빨리 몸을 일으킨 뒤 칼을 뽑아들었다. 적병들도 수적인 우세를 믿고 다행히도 말에서 내려 서 일제히 양신을 덮쳐들었다. 그러나 순식간에 적병은 서너 명이 땅바닥에 쓰러져서 나머지는 황급히 말에 올라 도망을 쳤다.
"형, 하마터면 우린 여기서 죽을 뻔했소."
연개소문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양신은 계속 주변만 살폈다.
"연선인, 쓰러진 적병들이 어떤지 살펴봐야 하겠네."
"형, 죽었는지 살았는지 살펴보겠다는 것이요?"
"목숨이 붙어있는 자가 있으면 신문을 해 볼 필요가 있네."
양신은 사주를 경계를 하고 연개소문은 쓰러진 적병들에게 다가들며 살폈다. 두 명은 다 같이 칼을 받은 몸인데 한 명은 죽고 또 한 명은 신음 소리를 흘려내었다. 연개소문은 산 자에게 한어로 말했다.
"내가 묻는 말에 바른대로 대답을 하면 살려주겠다!"
수국 병사는 두려움과 고통 속에 일그러진 얼굴로 대답했다.
"예, 예, 목숨만 살려 주십시오."
"어느 부대 소속인가?"
"설세웅 대장군 소속입니다."
"너희들은 무슨 일로 어디로 가던 길인가?"
"정찰병으로 나왔습니다."
연개소문은 의외란 듯 양신에게 말했다.
"형, 적이 벌써 여기까지 진출하고 있을 줄은 몰랐소."
"연선인, 먼저 우리가 가야만 할 수저성, 개모성, 현토성 쪽의 상황이 어떤지 물어보게."
양신의 주문에 연개소문이 다시 물었다.
"너희가 처음에 공격을 한 고구려 성은 어딘가?"
수국 병사는 고개만 가로저었다.
"공격을 가했던 성이 있을 것인데 왜 이름을 대지 않는가?"
"요하를 건너 처음 만난 성이 있었는데 이름을 모릅니다."
"성에 꽂혀 있던 군기의 색깔을 말해 보라."
"처음 포위한 성엔 검은 색 깃발이 꽂혀 있었습니다."
"검은 색 깃발이면 개모성과 현토성인데 둘 중 어딜까?"
연개소문은 중얼거리고 다시 물었다.
"포위했던 성의 주변이 평야지대였는가 아니면 주변에 산이 있나?"
"주변에 산들이 있었습니다."
수국 병사의 대답을 듣고 연개소문은 중얼거렸다.
"그렇다면 현토성이군!"
"현토성의 상황을 물어보게."
양신의 말에 연개소문은 다시 물었다.
"검은 깃발을 단 성을 공격했는가?"
"포위만 했었지 공격은 하지 않았습니다."
"왜 포위만 하고 공격을 가하지 않았는가?"
"그건 모르옵고 병력 5만으로 포위를 해둔 채 주력은 진군했습니다."
"주력은 어디로 향하게 되는가?"
"저는 압록수 쪽으로 향하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압록수 쪽으로? 그 밖에 포위한 성들은 또 없었는가?"
"어젠 흰 깃발을 단 성을 포위했습니다."
"수저성이로군. 거기선 공격을 가했는가?"
"그 성도 5만 병력으로 포위만 해놓고 10만 병력이 계속 진군해 여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리고 저는 전방 수색 임무를 맡고 나왔습니다."
연개소문은 적병의 대답을 듣고 양신에게 말했다.
"형, 내가 보기엔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소."
"그렇다면 합하의 말씀대로이네."
"그렇소. 서부완 전투 양상이 판이하오. 북부와 동부에선 성들을 포위만 하고 주력은 계속 이동을 한다면 그건 무슨 이유일까?"
"합하의 말씀처럼 압록수로 이동을 하는 게 분명하지 않는가?"
연개소문도 그 말에 수긍이 가듯 고개를 끄덕인 뒤 적병에게 물었다.
"그동안 야간에 고구려 군의 기습을 받은 적은 있는가?"
"그런 일은 어디서도 없었습니다."
수국 병졸의 대답을 듣고 연개소문은 중얼거리듯 말했다.
"형, 그러니 여긴 긴장감조차 느낄 수가 없을 정도요."
"그렇지만 다른 문제가 여간 심각하지가 않네."
그런 말을 나누는데 어디서 날아온 화살이 연개소문의 왼쪽 팔뚝에 박혔다. 연개소문은 억 하는 신음을 터뜨리고 허리를 꺾고 양신은 끌어안고 주변을 살폈다. 전방에 수국 기병들 10여 기가 이쪽을 보고 있었다.
양신은 급히 연개소문을 부축해서 말에 태웠다. 적의 기병들과 상당한 거리를 두고 있지만 일단은 도망을 치기로 했다.
"연선인, 말을 달릴 수가 있겠는가?"
"얼마간은 달릴 수가 있을 것 같소."
"적병들이 쫓아오기 전에 여길 떠나세."
두 사람은 말을 타고 오던 길로 되돌아 도망을 쳤다. 양신은 달리면서 적군이 쫓아오는지 연신 뒤를 돌아다 봤다. 다행히도 적군은 죽고 부상을 당한 동료들이 있는 데서 멈추어 섰다.
양신은 연개소문을 산속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그리고 연개소문을 말에서 끌어내린 뒤 화살을 뽑고 응급처치부터 했다. 그런 다음 거기서 은신을 하고 있다가 해가 지자 조심스럽게 동부의 주성인 수저성(水底城)으로 향했다. 서부도 그렇지만 고구려의 성들은 어디나 한밤중엔 자유롭게 드나들 수가 있어 두 사람은 수저성 안으로 들어갔다.
동부 우태인 불황은 연개소문을 보고 여간 놀라지 않았다.
"연선인, 어쩌다가 그런 부상을 입게 되었는가?"
"합하의 전령으로 나왔다가 적에게 당했습니다."
양신의 대답에 불황은 안색이 굳어들었다.
"상처는 어느 정도인가?"
"아직은 견딜 만합니다."
연개소문의 대답을 듣고 불황은 농담을 하듯 한 마디를 했다.
"서부대인의 자제님도 슬슬 사나이가 되어 가는군?!"
"대장군님, 수저성도 적의 공격을 받지를 않았습니까?"
"보다시피 포위만 당한 채 지낸다. 적의 정찰병을 어디서 만났나?"
"적두봉 산자락 밑이었습니다."
불황은 연개소문의 대답을 듣고 그게 놀라는 표정이 되었다. 그러나 어딘가 찔리는 데가 있는 사람처럼 말을 더듬듯 또 물었다.
"뭐라고?! 적이 적두봉 밑까지 진군을 했다는 게 사실인가?"
적두봉은 수저성에서 불과 20여리 밖에 안 되는 후방에 위치해 있었다. 그런데 성안에만 틀어박혀 있던 불황은 그 사실을 몰라서 얼굴을 붉히게 되는데 연개소문은 불만스럽게 입을 열었다.
"대장군님, 그걸 어찌 모르셨단 말씀입니까?"
"본의 아니게 그렇게 되고 말았다."
불황은 그렇게 대답을 해놓고 양신이 내놓은 봉서를 뜯어보고 나서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합하께선 천리안을 가지신 분이로군!"
"장군님, 왜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양신의 질문에 불황은 뒤통수를 긁적이며 대답을 했다.
"사실 여기선 아직까지 이렇다 할 전투를 벌인 적은 없었다. 그런데 국내성에 계신 합하께선 적군이 오합하 하구까지 진출해 있음을 알려주셨다. 거기다 자네들은 적두봉 밑에서 불시 공격을 받고도 여기까지 왔다니 나로선 실로 면목이 없을 노릇이다."
불황은 반성하는 태도를 감추지 않았다. 수국 군이 수저성을 포위해 놓고 주력을 압록수 쪽으로 전진시키는 걸 모르고 있었다. 그 일로 자신은 한심하고 부끄러움을 느끼며 한숨과 함께 입을 열었다.
"적의 정찰병과 조우했던 상황을 좀더 자세히 설명을 해보게."
"대장군님, 우린 교전 끝에 적군 한 명을 잡아서 신문을 했습니다."
"그랬는가? 뭘 알아낸 게 있는가?"
"우리가 만났던 적의 정찰병은 설세웅 휘하 소속이었습니다."
"설세웅이 거느린 총병력이 얼마나 되는 지도 알아봤는가?"
"설세웅의 병력은 20만입니다. 그 중 5만으로 현토성을 포위해놓고 대병력을 이끌고 다시 수저성에 이른 것 같습니다. 여기도 5만 명으로 포위해놓고 10만여 병력은 압록수 쪽으로 진군한 걸 알게 되었습니다."
"성세웅은 아마도 정규군을 주축으로 한 10만여 명을 압록수의 하류 쪽으로 진군을 시킨 게 분명하군. 수국의 작전 목적은 거기에 있군!"
불황의 말에 양신이 물었다.
"적이 압록수 하구로 나가는데 대장군님은 어찌하실 것인지요?"
불황은 더욱 반성을 하는 표정만 짓는데 양신이 입을 열었다.
"대장군님, 소관은 연선인과 함께 서부에 있을 때 밤마다 적진에 야습을 감행했습니다. 적의 공성기를 파괴하고 진지 속의 보급품에 불을 지르는 작전을 수행했습니다. 제가 적군을 통해 알아본 바는 현토성이나 수저성이나 적군에 야습을 감행한 적이 없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불황은 그 말에도 침묵만 지켰다. 그러나 그렇게 된 이유가 있었다. 동부대인 도창이 출격하지 말고 수성만 하라는 엄명을 내렸기 때문이다. 그런데 양신은 작심을 하듯 또 입을 열었다.
"대장군님, 동부에 와보니 무풍지대나 다름이 없었습니다. 저로선 여간 이상하게 생각되지 않습니다. 동부 기병들도 보루에 있을 것인데 적에 야습을 가하지 않는다면 서부와는 천양지차의 일이 아니겠습니까?"
불황은 더욱 부끄럽기 그지없었다. 출병을 않고 성 안에만 틀어박혀 지낸 변명을 군색하나마 하려고 입을 떼었다.
"합하께선 가급적이면 적과 정면충돌을 피할 것을 명령하셨다. 그 명을 따르다 보니 적에 대한 대응이 미흡했던 것을 부인하지 않겠다."
"대장군님, 합하께선 성곽 위주의 방어에 치중하라는 지시를 내리셨지만 동부는 전쟁과 무관한 땅이란 생각이 들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양신의 말에 불황은 뜻밖의 대답을 했다.
"그랬다. 그러나 북부와 동부는 적에게 말려들었기 때문이다."
"대장군님, 적에게 말려들었다니 무슨 말씀입니까?"
"그 일은 동부만 아니다. 북부도 마찬가지이다. 양쪽의 우태는 상가님의 지시를 따를 수밖에 없으므로 소극적인 대응을 한 것은 사실이다."
불황이 반성하는 마음으로 속내를 털어놨고 양신은 또 물었다.
"대장군님, 소관은 목숨을 걸고 말씀을 더 드려야 하겠습니다."
"무슨 말인가?"
"각부의 우태님들은 엄동설한에 순무를 하셨고 군관들도 수행을 했지 않습니까? 그 목적은 사상초유의 위기를 맞은 조국을 구해내기 위함이었습니다. 때문에 유목민에게 굽혀들고 도움을 청했습니다. 그렇다면 이번 정쟁은 우태님들이 주도하에 이끄실 일입니다. 소관은 순무 때 합하와 북부대인께서 나누시던 말씀을 엿들은 게 있습니다."
"무슨 말을 엿들었는가?"
"양광은 고구려의 내부분열을 획책하고자 여타 부 상가님들에게 복속을 회유했답니다. 고구려를 정벌하고 나면 복속한 여타 부 상가님들을 제후로 봉하고 관할지를 영토로 삼게 해줄 뿐만 아니라 왕을 칭할 수 있게 해주겠다는 제의를 했답니다."
불황은 그 말을 듣고 내심 여간 분개하지 않았다.
"그 말은 확실한가? 그대는 책임을 질 수가 있겠는가?"
"확실합니다. 소관은 목숨을 걸겠습니다."
"더 아는 점은 없는가?"
"여타 부 중 서부만 빼고 양광의 회유를 다 받은 걸로 압니다."
불황 역시 그렇지 않아도 어떤 의문을 품고 있었다. 동부대인의 태도 때문이었다. 수국의 침공 전부터 전쟁 방비에 어딘지 회의적인 태도를 자꾸만 보였던 것이다. 이제 생각해 보니 그것이 방어에 소극적인 태세를 취하는 현상으로 나타났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나는 앞으로 수저성을 철저히 방어하고 야간 기습을 시작하겠다."
불황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오자 양신은 고개를 떨군 채 대답했다.
"대장군님의 말씀에 소관은 더욱 목숨을 아끼지 않기로 하겠습니다."
"합하께선 적의 압록수 도하를 어떻게 막으려 하실지 모르겠군?"
양신은 불황의 질문에 망설임 없이 입을 열었다.
"대장군님, 합하께선 이런 말씀도 하셨습니다."
"무슨 말씀을 하셨는가?"
"양광은 요동 땅의 성을 한 곳만 함락시켜도 만족한다고 하셨습니다."
"한 곳만 함락을 시켜도 만족한다고?"
"함락한 성을 발판 삼으면 요동 전체를 점령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요동 전체를 그렇게 점령할 속셈이란 말이지?"
"대병력을 요동에 깔아두면 수국 땅이 절로 된다고 하셨습니다."
불황은 심각한 표정만 짓는데 양신이 말을 이었다.
"합하께선 성들을 위주로 하는 방어에만 치중했지만 앞으론 적극적인 공격 작전도 펼쳐야 하지만 적병들에 대한 선무공작을 펼쳐서 병영을 이탈하고 집으로 돌아가게 만드는 작전도 펼치려고 했으나 이젠 적의 장안성 직공에 대한 대비가 더 시급해졌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나도 적의 압록수 도강부터 막아야 한다는 생각이다."
"그런데 합하께선 또 다른 생각도 하시는 듯합니다."
"또 다른 생각을 하신다니?"
"적의 압록수 도하를 유인할 필요성도 있다는 생각을 하십니다."
"적의 압록수 도하를 유도한다? 그건 너무도 위험한 일이 아닐까?"
"대장군님, 고구려는 기적이 일어나지 않고는 멸망을 면치 못하게 되었습니다. 이판사판에 뭘 가릴 게 있겠습니까? 태부족인 병력으로 적의 대병을 막자면 비상수단이라도 쓰지 않을 수가 없다는 생각이십니다."
"합하께선 어떤 비상수단을 쓰려고 하시는가?"
"현재 압록수를 놓고 남과 북으로 방위선을 나눈 게 문제입니다. 그로인해 가뜩이나 적은 병력을 효과적으로 운용할 수가 없습니다."
"나도 그 점은 같은 생각이다. 적은 병력으론 유격전을 위주로 한 작전을 펼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소규모 부대로 적의 대군을 공격하는 건 계란으로 바위를 치기나 다름이 없어 비효과적인 작전이다. 나도 화끈한 타격을 한번이라도 가하고 싶은 마음인데 꿈도 못 꿀 일이다."
양신은 그 말에 힘을 입듯 대답했다.
"합하께서 예상을 하시는 점은 이렇습니다. 양광은 대병력을 둘로 나눠 한쪽은 요동의 성들을 포위 상태로 묶어 두고 또 한쪽은 정예 부대 위주로 압록수로 집결을 시킬 것으로 보십니다. 그것은 장안성 직공을 목표로 하는 일입니다. 곧 내호아의 수군 함선들을 압록수 하구로 이동해 올 것이며 대대적인 도하작전을 펼칠 걸로 보고 계십니다."
"합하께선 그에 대한 무슨 대책을 세우고 계신가?"
"합하는 적의 대병력이 도하 작전을 펼치는 것을 막긴 힘들다는 판단이십니다. 왜냐하면 압록수 이남의 방어는 계루부 단독으로 하게 되는데 양광이 투입시킬 병력은 그보다 몇 배나 많기 때문에 더욱 비상수단이라도 쓰지 않을 수가 없다는 생각을 하고 계십니다."
"나도 매우 심각한 일로 보는데 비상수단은 어떤 것이 되겠는가?"
"합하께선 적의 압록수 도하를 막을 수가 없다면 건너게 내버려 둔 뒤 좁은 지역으로 몰아넣고 대회전을 펼칠 작전을 구상 중이십니다."
"압록수 이남에서 대회전을 구상하신다?"
"요동 쪽에서 병력을 최대한 차출해서 압록수 이남으로 이동시켜 계루부 병력과 합치면 효과적인 타격을 가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십니다."
불황은 그 말에 타당성 여부를 떠나 의미심장한 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이왕에 희망이 없는 전쟁이라면 마지막으로 파격적인 수단이라도 써보지 않을 수가 없겠다는 고충의 일단을 엿보게 되는 마음이었다.
"얼마 전 국내성에서 합하를 뵈었을 때 들은 말씀이 있다. 고구려가 상상을 초월할 수국의 대 병력과 맞서 싸우려는 것 자체가 비정상이다. 이왕 멸망을 당할 것이라면 비정상적 수법도 가릴 수가 없다고 하셨다."
"대장군님, 오죽하면 그런 말씀까지 하셨겠습니까? 그런데 왕제 저하께선 나무만 보시고 숲을 보려고 하시질 않으니 절망감만 더해집니다."
"그건 무슨 뜻으로 하는 말인가?"
"소관은 왕실을 큰 나무로 보고 5부 연맹체를 숲으로 봅니다. 그런데 왕제 저하는 숲이 없어도 큰 나무는 살 수가 있다는 생각을 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처럼 숲을 무시하시면 여타 부는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옳은 말이다. 나는 합하 편에 서려는 사람이다."
"대장군님, 그러시면 오늘 밤에 야습에 나가야 하시지 않겠습니까?"
"오늘부터 야습에 나서겠다."
불황의 대답에 연개소문이 입을 열었다.
"대장군님,저도 부상만 아니면 참가하고 싶습니다."
"연선인은 안 돼네. 호위 선인만 참가한다. 나는 화공을 쓰겠다."
그날 밤 양신과 연개소문은 숙소에서 피곤한 몸을 눕히고 깜박 졸은 듯한데 아침이 밝았다. 불황은 두 사람을 자신의 지휘소로 불렀다. 그리고 양신에게 성 밖을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수국 군은 어디서나 저렇게 성들을 포위하고 있다. 그러나 상당한 거리를 두고 시늉만 하는 포위이므로 우린 자유롭게 움직일 수가 있다. 그리고 야습을 막을 시설로 진지의 둘레엔 해자까지 파놓고 있다. 그러나 적이 그러는 이유를 알게 된 이상 그걸 역으로 이용할 것이다."
불황의 말에 양신이 질문을 했다.
"대장군님, 적장인 설세웅에 대해서 아시는 점이 있으십니까?"
"설세웅은 전술이 매우 다양한 장수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우리 성을 둘러싸고 있으나 상부로부터 무슨 지시를 받았는지 공격은 않고 있다."
양신은 그런 대답을 듣고 자신이 생각하는 바를 말했다.
"소관은 서부에서 느낀 점이 있었습니다. 수국 병력은 대부분이 강제로 징발된 농투성이라 전투가 벌어지면 꽁무니부터 빼려고 듭니다. 때문에 장수들이 아무리 효과적인 작전을 펼치려고 해도 되지가 않습니다."
"그건 여기도 마찬가지이므로 야습을 해 볼만 하다는 생각이다."
불황은 해가 지고 어둠이 깔리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양신과 함께 병력을 이끌고 성을 빠져나갔다. 말발굽 소리조차 죽이듯 한 보루에 이르자 동부의 기병들도 이미 대기 상태에 있었다.
동부의 기병은 5천 여 명에 불과했지만 치두남(蚩兜男), 낭야(囊也), 물길(勿佶), 회갑(匯匣), 도부(刀付) 등 5명의 소형들은 백전노장들이었다. 불황은 소형들에게 물었다.
"화공에 쓸 유황은 충분히 갖췄는가?"
치두남이 대답했다.
"예. 충분히 준비했습니다."
"오늘밤 작전 계획은 이미 잘 숙지하고들 있겠지?"
"옛, 대장군님."
소형들이 일제히 복창을 하자 불황은 각자에게 임무를 부여했다.
"치두남, 사전에 공격할 장소는 정확히 파악했겠지? 적진의 동쪽에 접근해서 남에서 북으로 이동하며 보급품에 불붙은 유황 섶을 투척하라."
"옛, 대장군님."
"낭야, 북쪽에 접근해 동에서 서로 빠지며 적병을 짓밟기만 한다."
"옛. 대장군님."
"물길, 치두남과 낭야의 공격이 시작되면 적의 군마들을 탈취하라."
"옛. 장군님."
"회갑과 도부는 변두리를 회전하며 적병들이 혼란에 빠지게 만든다."
수국 군의 진지는 낮은 능선으로 둘러싸인 분지 속에 위치해 있었다. 동부 기병들은 희미한 별빛을 의지해 말발굽 소리를 죽이며 접근한 각기 위치를 잡고 수국 군 진지로 접근했다.
한편 불황은 양신과 함께 한 산등성에서 지켜보았다. 어둠 속에서 늑대 울음소리가 들려오자 불황도 입으로 같은 소리를 흘려냈다. 그것은 부대 간의 소통과 공격 명령이 되기도 했다.
선봉인 치두남이 가장 먼저 움직여 작진으로 돌진했다. 이어 낭야, 물길, 회갑도 따라서 돌진했다. 그리고 각자는 맡은 바 임무 수행에 들어갔다. 고구려 기병들의 지축을 울리는 말발굽 소리로 뒤덮여졌다.
수국 군은 그동안 한 번도 야습을 당한 적이 없어 태만으로 잠을 자다가 뜻밖의 야습을 당했다. 혼비백산으로 잠자리에서 뛰쳐나온 병사들은 병장기를 못 갖춘 채 놀라서 서로 몸들을 부딪치며 갈팡질팡 뛰었다.
고구려 기병은 주로 불을 붙인 유황 섶을 보급품을 쌓아둔 곳에 던졌다. 불이 붙자 불길이 치솟아 오르고 더러는 폭발음을 냈다. 놀란 수국 병사들은 보급품이 불타거나 말거나 아랑곳하지 않고 진지를 벗어나려고 어둠 속으로 도망을 쳤다. 그러나 외곽을 도는 고구려 군에 의해 무차별 공격을 당했고 수많은 희생자를 내고 말았다.
설세웅도 뜻밖의 기습을 받고 휘하 장수들과 함께 어찌할 바를 몰랐다. 수습을 제대로 못하고 우왕좌왕을 하는 동안 고구려 기병들은 야습을 끝내고 철수해 버렸다. 수국 군은 최단시간 내에 전광석화와 같은 기습을 받고 막심한 피해를 당해야만 했다.
이튿날 동이 틀 무렵 설세웅은 바위틈에 몸을 숨기고 있다가 기어 나왔다. 밤새 쑥대밭으로 변해버린 진지 속을 허탈한 표정으로 둘러봤다. 오랜 군력과 전공이 높은 명장임에도 큰 피해를 입고 나자 체면이 말이 아니게 되었다. 함께 숨어있었던 막료 장수들은 마치 죄를 지은 자들처럼 모여들면서 설세웅의 눈치만 살피고 있었다.
진지 안의 피해를 대충 파악해보니 사망자는 수백 명이고 부상자는 파악을 할 수조차 없을 만큼 컸다. 거기다 도망을 친 병사들은 부지기수이고 외각에 울타리를 삼아 배치했던 동돌궐 병력은 어디로 사라지고 말다. 외각의 동돌궐 병력은 고구려 군이 침입할 때 소리를 질러서 위험을 알리는 임무를 맡고 있었는데 그러질 않아 피해가 더욱 컸던 것이었다.
설세웅은 화가 나기보다 불길한 느낌이 커서 1만 병력으로 수저성 포위해 둔 채 자신은 전진한 주력과 합류를 하기 위해 황황히 그곳을 떠났다. 한편 불황은 설세웅이 떠났다는 보고받자 포위를 남은 적에 대한 공세를 더욱 강화시킬 마음을 먹었다.
양신은 연개소문의 상처 치료를 하느라 수저성에서 사흘간을 머물렀다. 불황은 치료를 더 할 것을 권했으나 양신은 자신의 임무 수행을 마치고자 연개소문과 함께 현토성으로 향했다.
불황은 기병 10기를 붙여 두 사람이 가는 길을 호위해 주었다. 양신은 말을 몰면서 연개소문의 상처가 걱정되어 연신 물었다.
"연선인, 무리하면 안 되는데 수저성에서 그대로 쉴걸 그랬잖나?"
연개소문은 겉으론 고통을 참으며 대답을 했다.
"나는 견딜 만하니 너무 걱정을 하지 마오."
양신은 가잠성에서 백제와 신라가 벌인 전투를 봤지만 불황처럼 전광석화와 같은 기습 작전을 펼치는 건 처음 봤다. 기병전은 역시 고구려 군이 최고라는 생각을 하면서 적이 또 어디서 나타날지 몰라 사방을 경계하며 나가려다 보니 행정은 느릴 수밖에 없었다.
해질녘에 어디쯤에 이르러 풀을 베고 있는 촌로들을 만났다.
"노인장들께선 어디에 쓰려고 그렇게 많은 풀을 베고 계십니까?"
양신이 묻자 한 노인이 대답했다.
"보루에 있는 기병들의 말먹이 여물을 만들어서 대려는 거요."
"그 보루는 어느 부의 관할입니까?"
"북부요. 그런데 군관님들은 어디로 가는 길이오?"
"현토성으로 가고 있습니다."
"현토성은 다 왔소만 성안으로 들어가긴 어렵게 되었소."
"밤엔 여기도 성을 드나들 수가 있지 않습니까?"
"여기도 며칠 전까진 그랬는데 갑자기 사정이 달라졌소."
"왜 갑자기 사정이 달라졌다는 말씀입니까?"
"어디로 떠났던 설세웅이 이리로 되돌아 왔소. 그리고 어제부턴 성에 대한 전에 없던 대공세를 펼치고 있소. 이틀간이나 양쪽은 치열한 공방전을 펼쳤는데 오늘은 겨우 그치게 되었소."
연개소문은 양신에게 말했다.
"수저성에서 당한 설세웅이 이리로 와서 보복을 한 모양이요."
그 말을 듣고 한 노인이 양신에게 물었다.
"수저성이 적과 싸우고 있다면 여간 반가운 소식이 아니요."
다른 노인도 그 말을 받았다.
"그러나 적의 공격이 거세지면 현토성은 위험해질 수도 있겠어."
"아무튼 간에 나는 이번과 같은 희한한 전쟁은 생전 처음 보겠어!"
노인들은 하나같이 이상하고도 실망이 큰 전쟁이란 표정들이었다.
현토성은 그동안에 포위상태로 있으면서 한번도 공격을 받은 적은 없었다. 그런데 사흘 전 수국 군이 까맣게 밀려들어 성을 공격해 성 안에서도 처음으로 공방전을 벌여만 했던 것이다.
양신은 노인들이 들려준 얘기를 듣고 현토성 역시 전투가 한번도 없다가 처음으로 공격을 받게 된 것임을 알게 되었다. 잘 된 일인지 한심한 일인지 모르나 북부 역시 양광의 회유를 받고 흔들렸던 게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었다.
"노인장, 현토성을 잘 내려다 볼 수가 있는 장소가 있습니까?"
양신의 질문에 지도자인 듯한 노인이 나섰다.
"내가 안내하겠으니 따라 오시오."
양신은 수저성 기병들을 그 자리에 대기를 시켜 두고 연개소문과 함께 지도자 노인들과 몇 명의 노인들과 함께 뒷동산 위로 올라갔다.
석양빛에 물들어 가고 있는 현토성은 전투가 그쳐서 고요했다. 성벽에 꽂힌 검은 깃발들이 어딘지 초라해 보였으나 그래도 아직은 건재함을 보여주는 상징처럼 느껴져 반가웠다. 반면 수국 군 진지에선 장수들의 깃발들이 수십 개가 넘었고 호대한 군세를 한껏 과시하고 있었다.
양신은 고립무원의 위기에 빠진 현토성을 보며 가슴이 막막했다.
"저런 형세라면 얼마나 버틸지 걱정일세."
연개소문은 침울한 음성으로 그 말을 받았다.
"지금쯤 요동성은 어떤 지경에 처했을지 모르겠소."
지도자 노인이 입을 열었다.
"군관님들은 여기서 강 건너 쪽 불구경을 하는 듯 지켜보기만 하겠소? 우리는 오늘 낼 중으로 적진에 야습을 가할 계획이오."
"노인장들이 전투를 벌이시겠단 말씀입니까?"
연개소문이 놀라며 묻자 지도자 노인이 대답했다.
"우리는 늙어서 곧 죽을 몸들이요. 남은 목숨이나마 나라를 위해 값지게 쓰기로 마음을 모았소. 적에 야습을 가하고 죽기로 결의를 했소."
"노인장들이 야습을 하는 게 가능하단 생각들을 하십니까?"
"우린 젊어서 여러 번 전쟁터를 누볐소. 이젠 늙은 몸이나마 적의 야적장을 불태울 수는 있겠소. 우린 2백여 명쯤이 모든 준비를 끝냈소."
양신은 그 말을 듣고 가슴이 뭉클해지는 감동을 받았다.
"노인장들의 각오는 대단하시나 야습은 군대에 맡겨야 합니다."
지도자 노인은 그 말을 반박하듯 받았다.
"무론이지만 고구려 군이 적과 싸우려고 들지를 않는 한심한 작태를 보이고 있소. 그러니 분개한 늙은이들이라도 나서야 하지 않겠소?"
다른 노인들도 너도 나도 분개한 음성으로 말했다.
"고구려 백성들은 농노와 다름없이 뼛골 빠지게 일을 해왔소. 그처럼 힘들게 일해서 귀족과 군대를 먹여 살려 왔소. 그런데 앉아서 먹고 사는 자들은 본분을 잃고 한심한 꼴들만 보여주니 부아가 터져 못 살겠소."
"오죽하면 늙은이들이 목숨을 걸고 싸우려고 하겠소?"
"큰 타격을 못 가해도 병사들에게 싸우는 모습을 보여주려고 하오."
연개소문은 노인들의 말에 감동하면서 한편으로 거북함도 느껴 마음이 무거웠다. 그건 신분적인 차이에서 오는 반감이지만 현재와 같은 상황 속에선 수긍이 가는 터인데 양신은 그런 노인들 편에 서듯 호응을 했다.
"당연한 말씀들이십니다. 귀족들은 대오 각성을 해야 합니다."
양신은 분개한 백성들 못지않게 귀족들에 대한 환멸을 느끼고 있던 터였다. 그런 귀족들보다 핍박만 받는 백성들이 목숨을 걸고 적을 공격하려는 것에 눈물겨운 동류의식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연개소문도 귀족들에 대한 반감이 큰 백성들의 분위기에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러나 적을 치겠다는 노인들의 의지에 경의를 표하게 되었다. 지도자 노인이 다시 입을 열었다.
"우리는 이미 작전을 짜 두었소. 그러나 행동들이 느려서 적진에 침투를 하는 게 어렵소. 적의 진지는 외각을 동돌궐 군이 감싸고 있으므로 뚫고 들어가긴 별 걱정 없소. 그러나 보급품 야적장을 지키는 보초들이 있소. 몇 명 되지는 않으나 우리는 해치울 수가 없소. 군관님이 그들을 제거해 주는 일만이라도 맡아 줄 수는 없겠소?"
양신은 그 말에 가슴이 아프고 의분과 격정이 치밀었다.
"적의 보초들은 제가 맡겠습니다."
"군관님이 맡아주신다면 우리는 성공할 자신이 있소."
노인들은 양신이 합세할 뜻을 밝히자 희색이 만면해졌다. 그러나 양신은 노인들이 과연 그런 일을 해낼 수가 있을지가 의문인데 연개소문도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노인장들의 충정은 이해가 되오. 나도 현토성의 위급한 상황을 보고 가만히 있을 수가 없소. 그렇지만 마음이 그렇다고 해서 위험한 일로 모두가 헛되이 목숨만 잃게 될 일은 다시 생각을 해보는 게 좋겠습니다."
지도자 노인은 그 말을 불쾌하다는 듯 받아쳤다.
"군관님은 늙은이들이라고 너무 얕보시는군!"
양신은 그러는 노인에게 물었다.
"노인장들께선 적진에 보급품을 쌓아둔 장소를 알고 계십니까?"
"우린 하루 종일 산등성이로 올라가서 적진을 살피고 있소. 무기와 식량을 쌓아 둔 야적장을 손바닥을 들여다보듯 다 알고 있소. 그건 진지의 동편에 치우쳐 있기 때문에 접근을 하기도 쉬운 편이요."
"그럼 제가 혼자서 적의 무기와 식량을 불태우겠습니다."
양신의 대답에 노인들은 한 마디씩 했다.
"혼자선 안 되오. 여럿이 나서 동시에 해야 성공 가능성이 크오."
"암, 여럿이 힘을 합치지 않으면 실패하기가 십상이지."
"군관님이 적의 보초들만 맡아주면 나머진 우리가 해결하겠소."
노인들이 한 마디씩 하자 양신도 끝내 그 말을 쫓을 수밖에 없었다.
"저는 노인장들과 함께 나서 적의 보초를 맡겠습니다."
양신이 적극 응하는 태도를 보이자 노인들은 박수로 화답을 했다.
"우리를 돕기로 한 군관님은 이름이 어찌되오?"
지도자 노인이 묻자 양신이 대답했다.
"약광 선인입니다."
"약광 선인, 함께 온 기병들도 우릴 도와 줘야 하겠소."
수저성 기병들은 그만 돌아가야 해서 서로들 얼굴만 바라보았다.
"우리는 유황 섶을 지고 가야만 하오. 거기까지 짐을 옮기고 부싯돌을 쳐서 불을 붙이기까진 너무도 시간이 많이 걸릴 것이요. 그러므로 우리가 신호를 하면 야적장 쪽으로 불화살을 쏴 주시오. 우리는 불화살을 주어 그걸 야적장에 꼽는 일을 맡겠소."
수저성 기병들도 그 정도의 부탁이라면 기꺼이 들어줄 일이라 호응을 했다. 노인들은 그때부터 인근 산속에 있는 다른 노인들에게 연락을 취하러 흩어졌다. 해가 저무는 가운데 50여 명 가량이 더 모여들었다.
현토성을 포위한 수국 군도 지원을 받은 동돌궐과 여타 유목민 군을 지진 외곽에 배치시키고 있었다. 노인들은 유목민 지원군은 자신들이 침투하는 걸 발견해도 모른 체 할 것으로 자신을 했다. 또 다급할 땐 그들의 천막 속으로 숨어들 수도 있다는 생각이었다.
보름달이 떠서 밤의 시야가 꽤나 넓게 열렸지만 그건 불리한 면도 있었다. 한 밤 중에 수저성 기병들은 유황 섶을 적진 가까이에 옮겨놓았다. 수저성 기병들이 돌아오자 양신은 노인들과 함께 소리 없이 야적장으로 접근해 들었다. 그리고 먼저 적진에 침투해서 야적장의 파수병들을 전부 처치해 버렸다. 그러자 노인들은 유황 섶을 지고 거침없이 움직여 적진으로 들어가서 유황섭을 야적장에 뒤덮고 신호를 보냈다. 수저성 기병들은 신호에 따라 일제히 불화살을 쏘았다. 노인들은 각자 날아든 불화살로 유황 섶에 불을 붙이기 시작했다.
양신이 노인들의 일도 도우려고 하자 지도자 노인은 마구 떠밀었다.
"약광 선인, 빨리 여길 떠나시오."
"저는 노인장들과 함께 있겠습니다."
"우린 여길 죽을 자리로 삼았소. 약광 선인은 다른 전투에서 적병을 한 명이라도 더 죽여야만 하오. 그러니 빨리 떠나오."
양신이 듣지를 않자 다른 노인도 나서 마구 떠밀어냈다. 어쩔 수 없이 물러난 양신은 곧 야적장 전체가 불길에 휩싸이는 걸 바라보기만 했다. 그제야 야습을 당한 것을 알게 된 수국 병사들이 잠자리에서 뛰쳐나왔다. 처음 당한 야습 앞에 우왕좌왕만 할 뿐 불길을 잡으려 하질 않았다.
화광이 충천해지는 광경을 보며 양신은 눈물을 흘리며 그곳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노인들의 숭고한 행동을 보면서도 다시 뛰어들 수가 없어 가슴이 미어진 채 돌아서며 참담하고 부끄러운 심경이었다.
연개소문은 멀리서 불길에 휩싸인 수국 군 진지를 바라보다가 침통한 표정으로 돌아온 양신을 맞았다.
"형, 통쾌하기 그지없는 광경이요."
양신은 고개를 끄덕이고 수저성 기병들에게 말했다.
"우린 지금부터 해야 할 일이 생겼다."
연개소문과 수저성 기병들은 의아하게 그를 바라보았다.
"방금 전에 노인들은 적에 야습을 가했소. 그렇다면 우린 어찌할 것인가? 명령 불복종으로 처벌을 받는 한이 있어도 우리도 야습에 나설 수밖에 없소. 수저성 기병들도 나와 뜻을 함께 할 자가 있으면 나오시오."
그 말에 수저성 기병들은 저마다 울분에 찬 말들을 했다.
"호위 선인님, 저는 참가하겠습니다."
"저도 여기서 매일 밤 야습을 감행하겠습니다."
연개소문이 양신에게 물었다.
"수저성 기병들은 일단 돌아가야 하지 않겠소?"
그런 말을 듣고 수저성 군관이 입을 열었다.
"우린 어디서라도 싸워야만 하겠소."
양신은 그 말을 듣고 이제부턴 북부의 보루들을 돌면서 노인들의 일을 알리고 분발을 시켜 야습에 나서게 만들 생각을 하면서 입을 열었다.
"좋소. 이제부터 북부의 보루들을 돌면서 노인들이 야습을 알립시다. 그렇게 해서라도 각성을 시켜야 하겠소. 수저성 군관은 병력을 남겨두고 혼자서 돌아가 불황 대장군님께 이 일을 보고해 주시오."
수저성 군관은 양신의 의도를 알아듣고 대답했다.
"호위 선인 말씀대로 나도 돌아가면 동부의 보루들을 돌겠습니다."
수저성 군관은 기병 1명만 대동하고 즉시 그곳을 떠났다.
양신은 남은 수저성 기병들을 이끌게 되었으나 좀 막막해졌다.
"여기서 가까운 북부 보루가 어디에 있는지 몰라서 문제인 걸."
그 말에 수저성 기병 중 하나가 대답을 했다.
"가까운 곳에 북부 보루가 있는 곳을 압니다. 안내를 하겠습니다."
양신은 그 기병을 앞장을 세우고 즉시 움직였다. 얼마쯤 달려간 뒤 성자산(城子山) 기슭에 이르렀다. 어느 새 해가 밝아오는 가운데 그곳의 보루로 들어서자 책임자인 조의가 나왔다.
"기병들은 어디 소속이며 무슨 일로 왔나?"
"국상의 호위무사입니다. 조의님께 알려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뭘 알리겠다는 말인가?"
"조의님, 어젯밤 현토성에선 야습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아니면 적이? 어느 쪽이 야습을 가했단 말인가?"
조의는 좀 놀라는 빛으로 반문했다.
"현토성 병력이 아니고 그 지역의 노인 50여 명이 적진의 보급품을 전부 불태우는 야습을 감행했습니다. 우리는 그걸 도왔습니다."
"적에 야습을 가했다고? 그게 사실인가?"
"함께 온 기병들은 수저성 소속인데 물어보십시오. 소관은 합하의 명령서를 전해야 하는데 현토성에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명령서는 조의님이 대신 받으시고 노인들이 야습을 감행한 사실도 보고해 주십시오."
양신의 말이 전해진 성자산 보루의 북부 기병들은 술렁댔다. 병사들은 못 참겠다는 태도로 서로 눈길을 나누다가 장수를 향해서 외쳤다.
"조의님, 우리도 가만히 죽치고 있기만 하면 되겠습니까?"
"노인들이 목숨을 던지는데 어찌 가만히 엎드러져 있겠습니까?"
"옳소, 우리도 야습에 나서야 합니다."
보루의 기병들이 너도나도 한 마디씩 하는 가운데 더 많은 병사들이 몰려들고 동조하는 태도로 와글와글 대었다. 양신은 조의에게 경례를 붙이고 나서 큰 소리로 말했다.
"소관은 북부의 다른 보루에도 돌아다니며 알리겠습니다. 노인들이 야습을 감행해 적의 보급품에 불을 지르고 산화한 소식을 전하겠습니다."
양신은 말하고 바로 보루에서 물러나왔다. 그러자 성자산 보루의 기병들 중 몇 명이 따라 왔다. 그리고 양신이 다른 보루로 가려는 길을 안내하겠다고 나섰다. 양신은 연개소문에게 말했다.
"시동 선인, 나는 여기서 자네와 헤어져야 하겠네."
"무엇 때문에 나와 헤어지겠단 말이요?"
"나는 북부의 보루들에 노인들의 야습을 알려 분발을 촉구하는 일을 하려네. 그러나 부상을 당한 시동선인은 더 돌아다니긴 위험하네."
"그럼, 난 어쩌란 말이요?"
"수저성으로 들어가 우태님에게 말씀을 드리게. 그러면 국내성까지 호위병을 붙여 주실 것이니 일세. 합하께 이 일을 보고해 주게. 나는 북부의 보루들을 돌면서 할 일을 다 마친 뒤 돌아갈 것일세."
"형, 알겠소. 조심하면서 다니기 바라오."
연개소문은 2명의 수저성 기병들의 호위를 받으며 즉시 떠났다. 양신은 현토성 기병의 안내를 받아 다른 보루를 향했다. 그렇게 해서 북부의 보루들을 전부 돌고난 뒤 국내성으로 돌아갔다.
노인들의 야습은 북부와 동부의 분위기를 확 바뀌게 만들었다. 병사들은 이상한 전쟁을 놓고 성토를 벌였고 장수들도 자성하는 목소리가 나왔다. 심지어 상관의 명령이 없는데도 병사들 스스로 야습에 나서면서 적에 대한 반격은 요원의 불길처럼 번지게 되었다.
그동안 방심에 빠진 채 지내던 수국 군은 고구려 군의 적극적인 공세를 받고 크게 당황해 했다. 어디서나 밤마다 기습공격을 당하게 되자 두려움에 떨면서 진지를 떠나는 탈주병들이 속출하게 되었다. 그런 탈주병들은 그들끼리 합쳐 소규모 집단을 이룬 채 막막한 요동 벌을 떠돌기 시작했다. 탈주병들의 규모는 날로 커지고 방향감각도 없는 채 이리저리 헤매고 있었다. 그러다 고구려 병사나 백성들과 마주치면 경계심조차 없이 길을 물었다.
"요하, 어디?"
고구려인은 수국 병사들이 조국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하려고 요하가 있는 방향을 손으로 가리켰다. 피차가 힘들고 어려운 처지라서 돕는 형국이었다. 그리고 고구려 군은 활기를 되찾게 되었다.
양광은 그때까지 요동성에 매달려 진두지휘를 했지만 병력의 희생만 늘뿐 성과는 지지부진이라 여간 화를 내지 않았다. 거기다 동부와 북부에 기대를 걸었던 회유책도 먹혀들질 않게 되고 고구려 군의 야습만 심해졌다. 휘하 병사들의 동요로 점점 불리해지는 상황이라 이번엔 고구려 백성들을 당대로 회유 술책을 쓰기로 했다.
--황제의 신민(臣民)이 되면 10년간 조세를 감면해 주겠다. 고구려 백성들은 절대로 해치지 않을 것이니 안심하고 들에 나와 농사를 지어라.
그러자 고구려 백성들은 무슨 뱃장인지 하나 둘 들로 나와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그렇게 하질 않았다간 굶어죽을 판이라 어쩔 수가 없었다.
양광은 고구려 백성들이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는 보고를 받고 내심 쾌재를 불렀다. 그리고 고구려 국도에 가할 직공에 더욱 박차를 가하기로 했다. 우문술과 우중문에겐 각처에 흩어진 예하 부대에서 정예 병력을 추려 압록수 하구로 집결시킬 것을 명령했다.
때마침 내호아 수군 함선들도 압록수 하구에 당도해서 도강을 도강 준비를 마쳤다. 압록수 이남의 계루부 병력은 적의 도강 작전이 임박해졌다는 판단에 극도로 긴장상태로 빠져들었다.
그런 상황 속에 을지문덕은 구상했던 작전을 실천에 옮기려고 했다. 양신은 북부와 동부의 보루들을 돌며 충동을 시키는 일을 마치고 국내성으로 돌아 왔다.
"합하, 요동에서 별 성과를 못 거둔 양광이 장안성 직공에 나서려는 걸로 알고 있는데 그에 대한 대책을 어떻게 세우셨습니까?"
"나는 곧 전선 지휘소를 옮길 생각이다."
"합하, 지휘소를 어디로 옮기려고 하십니까?"
"묘향산으로 옮기려고 한다."
"묘향산은 압록수 이남에 있지 않습니까?"
"그렇다."
"합하, 왕제 저하와 상의를 하시고 옮기려는 것입니까?"
"상의를 하지 않겠다."
을지문덕의 대꾸가 의외로 단호해서 양신은 걱정이 되었다.
"합하, 압록수 방어를 하기 위한 작전은 어떻게 펼치시렵니까?"
"나는 압록수 도강을 무리하게 막지 않으려고 한다. 그리고 압록수 이남의 험준한 지형을 이용하는 작전을 펼 칠 생각이다."
"압록수 이남에서 펼칠 작전이 더 유리하겠습니까?"
"요동 땅의 병력 중 일부를 계루부 군과 합쳐 대회전을 치르겠다."
"합하, 왕제 저하께서 그걸 거부하실 수도 있지 않습니까?"
"거부할 수가 없게 만들면 된다."
"합하, 어떻게 그렇게 할 수가 있다는 말씀입니까?"
"사람은 누구나 이기적이고 타산적이라 거부를 하지 않을 것이다."
"합하, 그 말씀은 왕제 저하를 두고 하신 말씀입니까?"
"왕제 저하가 아니면 누구이겠는가?"
양신은 그 말에 고개만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합하, 소관은 그만 잠자리에 들겠습니다."
연개소문은 양신 함께 숙소로 돌아가면서 말했다.
"형은 이제 합하와 맞상대로 의논을 하는 인물이 되었소?"
양신은 대꾸 없이 씩 웃기만 했다.
어느 새 계절은 완연해진 봄빛에 젖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