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 전황(戰況)
요동의 봄은 남서풍으로부터 시작된다.
인간의 부질없는 다툼은 아랑곳하지 않는 계절은 싱그러운 꽃향기를 훈풍에 실어날았다. 그러나 전운(戰雲)이 가득 깔린 대지엔 연일 군마들이 일으키는 흙먼지로 가득 찼다.
고구려 군의 공세가 격화되면서 요동 땅의 수국 군은 포위한 성들에 눌러 붙은 행태에서 흔들림이 일어났다. 그에 따라 탈출병들이 더욱 늘어나 떠도는 가운데 내호아 함대가 서한만에 나타났다.
내호아는 본래 고구려 침공을 반대했던 입장이었으나 전쟁이 터진 뒤론 황제의 명령에 적극 따랐다. 자신이 장안성을 공격해서 큰 전공을 세울 욕심에 해포(海浦)에 병력을 상륙시켰다.
건무도 장안성의 방어책을 세우고 대비를 했지만 적이 상륙하자 위기의식이 커졌다. 그러나 내호아 군을 되도록 내륙 깊숙이 유인을 해서 타격을 가하는 게 유리하다는 판단이었다.
내호아는 총 6만여 병력을 거느리고 장안성을 향해 진격을 개시했다. 반면에 고구려 군은 전면에 나타났다간 별 저항도 없이 후퇴만 거듭해서 내호아는 장졸들에게 큰 소릴 쳤다.
"내 손으로 고구려의 심장부에 비수를 꽂아 끝장을 내겠다."
수국 장졸들은 총관이 자신에 찬 말을 해서 마치 전쟁을 다 이긴 것처럼 어깨들을 으쓱대었다. 그런데 어디쯤에서 고두우 장군이 이끄는 고구려 기병 1천기가 진격을 가로 막았다.
건무는 수국 군을 내륙 깊숙이 끌어들이려고 고두에게 지시를 했다. 너무 후퇴만 거듭하면 의심을 사므로 적당히 공격과 후퇴를 반복할 것을 명했는데 고두우는 그것에 싫증이 났다.
"나는 매일 패배자 행태를 보이는 후퇴만 거듭하고 싶지가 않다."
고두우는 적에 한번 본때를 보여 주고 군공도 새우고 싶었다. 해가 지고 적군이 야영으로 들어갈 기다렸다가 돌격 명령을 내리고 선두에서 적진 돌입을 감행했다. 그러나 수국 병사들은 천막을 비운 채 밖에서 야습에 대비했다. 고구려 군이 깊숙이 침입하게 놔뒀다가 일시에 덮쳤다.
수국 군은 수십 배가 넘는 병력으로 벌 떼처럼 고구려 기병들은 공격했다. 마상의 고구려 기병들은 갈고리 창에 끌려 땅바닥에 떨어지고 맥을 못 춘 채 처참하게 살해당했다.
뒤늦게 적의 술책에 말려든 것을 깨달은 고두우는 급히 퇴각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이미 병력의 태반을 잃는 타격을 입고 허겁지겁 적진에서 도망쳐 나올 수밖에 없었다.
수국 장졸들은 첫 승리를 거두자 환호성을 올렸다. 내호아는 들뜬 분위기 속에 용기백배로 야간 진군을 계속했다. 그러나 부총관인 주법상(周法尙)이 말렸다. 성급한 진군은 위험성이 크니 주력이 압록수를 건너고 나면 합동 작전을 펼 것을 건의했다. 그래도 내호아는 전공을 세울 욕심에 듣지를 않고 연신 진군만 독촉했다.
이때 건무는 장안성 외각에서 방어진을 치고 대비했다. 그러나 멋대로 공격을 감행했다 참패를 당한 고두우가 쫓겨 오자 대로했다. 이미 내호아 군은 밀려들고 공격을 받게 되었다.
건무는 곧 수세로 몰려 버틸 수가 없다는 판단에 후퇴를 했다. 그러나 장안성 안으로 쫓겨 들어갔다. 그러나 수국 군이 바짝 추격해들어 미처 성문을 닫지 못해 꼬리를 물듯 적도 성안으로 쏟아져 들었다. 고구려군은 외성을 적에 넘겨주고 내성으로 다시 쫓겨 들어갔다.
장안성은 크기도 컸지만 3중 구조의 독특한 축조방법을 쓴 성곽이었다. 외성엔 부호 상인들이 거주했고, 내성은 관청과 귀족들의 저택이 있었다. 왕궁은 맨 뒤쪽에 쌓은 별성(別城)에 두었다.
수국 병사들은 외성 안에서 고구려 군을 수색했다. 그러나 집들마다 텅텅 비어져 있자 곧장 다른 쪽으로 관심들이 쏠렸다. 전쟁터는 의례 있듯 병사들은 순식간에 약탈자로 변해 갔다. 약탈로 군의 기강은 걷잡을 수 없이 무너졌다. 뒤따라 들어온 내호아는 그 광경을 보고 놀라 퇴각 명령을 내렸으나 약탈에 혈안인 병사들은 그 명령이 들리지 않았다.
건무는 적병들이 외성 안을 가득 차자 내성 벽에서 화살을 퍼부었다. 양손에 약탈품을 쥔 수국 병사들은 제대로 반격에 나설 수도 없는 채 도망을 쳐야 했다. 그러나 좁은 성문으로 한꺼번에 몰려들었으나 빠져나갈 수가 없어 아수라장이 되었다. 탐욕이 부른 대가는 수많은 목숨을 잃게 만들었다. 설사 요행이 성문을 빠져나간들 밖에서 대기 중인 고구려 기병들에게 무참히 죽음을 당해야 했다.
내호아는 어처구니없게 부하 장졸들을 떼죽음을 큰 피해를 입고 천신만고 끝에 해포로 도망을 쳤다. 그리고 남은 병력을 거두어 급히 압록수 하구 쪽으로 이동해 버렸다.
한편 요동 벌판에서도 고구려 군의 반격은 날로 거세어져 수국 군은 패잔병과 탈주병들만 더욱 늘어났다. 고구려 군은 도처에 흩어진 탈주병들을 마주치면 못 본체 하고 지나갔다.
수국 군 패잔병과 탈주병들은 굶주림 때문에 다시 타 부대로 들어갔다. 그로인해 부대마다 병력들이 섞여 서로 얼굴을 모르게 되었다. 그처럼 이합집산이 심해져 어느 부대이고 장수들은 통솔을 제대로 할 수가 없었다. 고구려 군은 그런 틈을 노려 병사들 중 한어를 할 줄 아는 자를 투입시켜 유언비어를 퍼뜨리게 했다.
"전쟁터에 그대로 남아 있다간 모두 요동 땅의 백골이 된다."
"요하 하구로 가면 수국으로 돌아갈 수 있는 배를 탈 수가 있다."
고구려 군의 그 같은 심리전(心理戰)은 먹혀들어 수국 군의 탈주병들은 요하 하구로 향했다. 본국으로 돌아가는 길을 묻고자 고구려 군에 접근해서 서슴지 않고 도움을 청했다. 그로인해 수국 장수들은 전투보다 탈출병을 막기에 골머리를 더 썩였다. 병사들에게 흩어지면 모두가 죽는다고 설득을 했고 안 되면 참수까지 했으나 막을 수가 없었다.
양신과 연개소문은 을지문덕의 명령을 받고 다시금 요동성으로 향했다. 가는 동안에 수국 탈주병들을 수없이 만났지만 피차가 적대감을 느끼지 않고, 해가 지면 우거진 갈대밭에서 함께 자기도 했다.
두 사람은 가던 길에 백암성에 들렸다. 거기도 성을 포위한 수국 군은 기치창검만 벌려 세운 채 공격이 없었다. 성 안에선 연나(延那) 장군이 3천여 병력으로 지켰고 성 밖에선 소형 연두리(淵兜俚)가 여러 보루들에 둔 기병 1천기와 합동작전을 펴고 있었다.
연두리는 보루로 찾아 온 연개소문을 보고 여간 놀라지 않았다.
"합하께선 상황이 아무리 급하기로 서부대인의 장자에게 전령 임무를 맡겨 전선에까지 내세우신단 말인가?"
"소형님, 전령은 호위 무사가 맡은 임무입니다. 저는 단지 서부의 상황이 걱정되어 자청해서 따라 나왔을 뿐입니다."
"연선인은 동부에서 야습에도 가담을 했다는 소문도 들었소."
"소형님, 야습은 호위 선인이 주도한 것입니다. 저는 따라 다녔을 뿐이고 그로 인해 저도 동부와 부부의 사정을 두루 살피게 되었습니다."
연두리는 연개소문이 몇 달 새 꾀나 의젓해졌다는 생각을 했다.
양신은 자신이 북부에서 노인들과 함께 수국 군 진지에 야습을 가했던 일로 전국적으로 이름이 알려진 것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 연두리는 양신의 검술이 대단함을 알기에 함께 다니는 걸 든든하게 여겼다.
"호위 선인은 혹시 합하께서 요동성에 내릴 지시가 뭔지 아는가?"
"예, 합하께선 서부 병력 중 일부를 차출하려고 하십니다."
양신의 대꾸에 연두리는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서부에서 병력을 차출하겠다고? 차출할 병력이 있어야 하지?"
"합하께선 압록수 이남에서 적과 대회전을 계획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병력이 너무 부족해 여타 부 병력들을 차출하지 않을 수가 없으십니다."
"호위 선인, 요동성은 응할 형편이 못 되어 가도 헛수고일세."
"소형님, 그래도 소관은 임무를 수행해야 합니다."
연두리는 고개를 돌려 연개소문에게 말했다.
"연선인은 이왕에 왔으니 성주님을 만나 뵙고 가게. 성주님은 연선인을 여간 보고 싶어 하시지 않으니 나와 함께 가서 뵙게."
연두리는 두 사람을 데리고 보루를 나섰다.
이미 밤이 깊어져 어둠 속은 수많은 반딧불이 스멀거리는 듯 빛을 내었다. 세 사람은 기병 10기와 함께 백암성으로 향했다. 가는 길에 개구리들 울음소리가 시끄럽게 났다.
"소형님, 이 부근에 큰 연못이 있습니까?"
양신의 질문에 연두리가 대답했다.
"수국 군 진지에서 개구리와 맹꽁이들이 우는 걸세."
"수국 진지엔 웬 개구리와 맹꽁이들이 저렇게 많습니까?"
"그럴만한 이유가 있지. 잠시 말에서 내려 한번 둘러보겠는가? 수국 병사들이 곤히 잠을 자고 있으므로 조용히 접근해 가야 하네."
양신과 연개소문도 흥미 반 호기심 반으로 말에서 내렸다.
"소형님, 여긴 제방을 쌓은 데가 아닙니까?"
"수국 군은 어디서나 진지 둘레에 이처럼 해자를 판다. 그 이유는 야습을 하는 우리 기병들이 넘어들지 못하게 하는 방비책일세. 해자에 빗물이 고여서 개구리와 맹꽁이들이 살고 있네."
연개소문은 갑자기 욕지기가 나서 말했다.
"웬 악취가 이리도 심합니까?"
"수국 병사들은 먹다 남은 음식 찌꺼기를 해자에 버리고 용변까지 보네. 그런 해자이다 보니 진지 주변은 고약한 늘 냄새를 풍기게 되네."
연두리의 설명을 듣고 양신은 어둠 속의 진지를 자세히 살폈다. 그러나 막사 같은 것들은 보이지가 않았다.
"소형님, 어두워서 그런지 막사들이 보이질 않습니다."
연두리가 껄껄 웃자 연개소문이 나직이 말했다.
"소형님, 그렇게 웃으면 적의 초병들에게 발각 당하지 않겠습니까?"
"걱정 말게. 우리가 접근해도 초병들은 뛰쳐나오는 법이 없네."
연두리는 두 사람에게 설명을 했다. 수국 군도 처음엔 천막을 숙소로 썼다. 그러나 고구려 군의 야습 때마다 불화살을 맞고 타버렸다. 그때부터 화공을 피하고자 땅을 파고 위에 지붕을 덮는 숙소를 만들게 되었다.
그때 진지 안에서 적병들이 내는 기침 소리가 일어났다.
"땅속은 공기가 습해서 병사들은 각종 질병에 시달린다. 대부분이 순박한 농민들로 전쟁터에 끌려나온 터라 고생들이 많아서 안 되었다."
연두리가 딱하다는 말을 하자 연개소문은 좀 놀리듯 그 말을 받았다.
"소형님도 인정을 보이실 때가 다 있으니 여간 뜻밖이지 않습니다."
"내가 그럴 수밖에 더 있겠나? 적병들은 오직 목숨을 부지해서 고향으로 돌아갈 생각들만 하며 전투를 피하려고 드네. 그처럼 가여운 적병들에게 어찌 동정심을 느끼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군관이 나직이 입을 열었다.
"소형님, 수국 군이 잠을 깰지 모르니 그만 떠나는 게 좋겠습니다."
일행은 마치 이웃에 들렸다 가는 사람들처럼 그곳을 떠났다.
수국 군은 어디서나 야간에는 교전을 피하는 걸 원칙으로 삼는 듯했다. 백암성 역시 밤중에 드나드는 데 하등 어려움이 없었다. 성주인 연나 장군은 연개소문을 맞아 얼굴이 상기되었다.
"연선인, 온 전선을 돌아다니고 있다는 소문이 여기까지 났네."
"장군님, 저는 이번에 전쟁을 직접 체험하는 기회로 삼고자 합니다."
연개소문의 대답에 연나 장군은 대견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합하 밑에서 근무하면서 좋은 경험을 많이 쌓는 것도 좋지."
연나 장군은 이번엔 양신에게 눈길을 돌렸다.
"호위 무사는 연선인과 의형제를 맺었다지?"
"덕분에 소관은 많은 도움을 받고 있습니다."
"그런가? 합하께서 이번엔 무슨 임무를 부여하셨는가?"
연두리가 대신 설명을 하자 연나 장군은 음성이 무거워졌다.
"나도 양광이 대병을 압록수로 집결시키는 걸로 알고 있다. 장안성을 공격하려는 것인데 계루부 병력으론 막기 힘들 것 같다. 그렇다고 해서 여타 부의 병력을 빼어내기도 쉽지가 않겠으니 문제로다."
양신이 그 말을 받았다.
"합하께선 이번 전쟁애서 서부의 역할이 가장 크고 어려움도 가장 많다고 보십니다. 그렇지만 서부가 솔선수범으로 병력을 지원해 주면 다른 부들도 외면하지 못하게 될 걸로 기대를 걸고 계십니다."
"병력 지원은 대장군께서 결정하실 일이라 어떻게 될지 모르겠네. 그러나 요동성은 여기처럼 출입조차 쉽지가 않은 곳이다. 연두리 소형은 기병 1백기를 지원해서 두 사람을 요동성까지 철저히 호위하게."
백암성을 나온 양신과 연개소문은 연두리와 함께 기병들의 호위를 받으며 다시 요동성으로 향했다. 이튿날 오후에 서부 소형 아리가 있는 보루에 이르자 연두리는 두 사람을 인계하고 백암성으로 돌아갔다.
서부에선 요동성만큼 사정이 어려운 데는 없었다.
수국 황제가 있는 곳이라 매일처럼 공격이 이뤄졌다. 때문에 다른 데와 달리 야간에 성을 출입하기가 어려워서 외부에서 무기와 식량을 반입을 하기조차 힘들었다. 그 해결책은 보루의 기병들이 야간 기습에 나섰고, 공방전이 벌어지는 틈을 타 성문을 열고 겨우 출입을 했다.
그날 밤도 아리의 기병들이 야습에 나섰고 그 틈을 타 양신과 연개소문은 요동성에 입성을 했다. 그런데 서부 전선을 총지휘하는 연생수는 의외로 여유가 있는 태도로 두 사람을 맞아주었다.
연개소문은 좀 안심이 되는 듯 놀리는 투로 말했다.
"삼촌, 전쟁 통에 오히려 신수가 훤해지셨습니다."
연생수는 조카의 농지거리에 눈을 흘겼다.
"모르는 소린 작작해라. 성 안에만 틀어박혀 지내자니 답답해 죽겠다. 하루속히 양광을 내쫓고 사냥에 나설 수가 있기만 바라고 있다. 그런데 호위 선인은 버릇없는 동생과 지내느라 속이 많이 썩겠군?"
양신이 미소만 짓자 연개소문은 반박하듯 말했다.
"삼촌, 저는 전과 다릅니다. 합하께선 제가 점잖아지고 예의가 바르다는 칭찬을 아끼지 않는데 왜 삼촌만 깎아 내리려고 드십니까?"
연생수는 연개소문에게 밉지 않게 눈을 흘기고 을지문덕의 봉서를 뜯고 읽었다. 내용은 서부 병력 중 5천을 지원해달라는 요청이었다.
"나는 합하의 청을 들어드리기로 하겠다."
연생수가 선선히 말하자 양신과 연개소문은 의외란 듯 서로 눈길을 나누었다. 연생수는 두 사람에게 눈을 좀 붙인 뒤 내일 아침에 다시 보자는 말만 남기고 급히 어디로 갔다.
두 사람은 이튿날 늦게까지 잠을 자고 싶은데 연생수가 병사를 보내 깨웠다. 연생수는 두 사람을 데리고 성의 안 밖을 둘러보러 나섰다. 성안은 식량과 무기를 보관하는 창고들이 적의 석포와 화공에 불타버려 절반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나는 처음 적의 공격을 받았을 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악몽을 꾸게 된다. 대 병력이 개미떼처럼 성벽을 기어오르려고 들었다. 그걸 막느라 병사들은 물론 부녀자들까지 나와 필사적으로 싸우지 않을 수가 없었다."
연생수는 말하고 한숨을 내쉬자 연개소문이 물었다.
"삼촌, 창고들이 거의 다 없어졌는데 식량을 어디에 보관합니까?"
연생수는 쓴웃음을 지으며 대꾸했다.
"성 안에는 보관할 데가 없어졌으나 별로 걱정을 하지 않는다. 산성에 비축해 둔 것을 수시로 들여다 먹어서 굶주림을 느끼진 않는다."
"요동성 포위상태는 다른 곳보다 심한데 어떻게 들여옵니까?"
"우문술은 많은 정예 병력을 투입해서 무척이나 어려웠다. 그러나 이젠 정예 병력들을 압록수 하구로 돌려서 한시름을 놓게 되었다."
"지금 포위하고 있는 병력을 얼마나 됩니까?"
"양광은 장안성 직공을 위해 우문술 예하의 정규군만 추려서 압록수 하구로 보냈다. 지금도 근위군 3만을 위시해 10만여 병력으로 성을 포위하고 있다. 다만 남은 병력들은 징발된 농민군이라 싸울 줄 모른다. 말발굽 소리만 울려도 쥐 죽은 듯 진지 안에만 틀어박혀 일체 반격에 나서려고 하질 않으니 겨우 숨통이 트이게 되었다."
"삼촌은 그래서 신수가 더 훤해지셨군요?"
"자네들도 전선을 누비며 수국 군 진지들을 많이 둘러 봤을 것이다. 적은 어디서나 진지를 고수한 채 일체 이동을 삼가고 있다. 때문에 어느 쪽이 포위를 했고 어느 쪽이 당했는지가 구별이 안 될 지경이다. 때문에 우린 마차까지 이용해 언제라도 식량과 무기를 반입하고 있다."
양신은 연생수의 말에 또 다른 의문을 느꼈다. 요동 땅을 지나오는 동안에 여기저기에 버려진 마차들이 많았던 게 생각이 났다.
"대장군님, 장마철로 접어들고 땅이 질퍽대서 마차들이 굴러다니기가 매우 어려울 것입니다. 때문인지 버려진 마차들을 많이 봤습니다."
"버려진 마차들은 다 수국 군 것이다."
"대장군님, 수국 군은 왜 그처럼 마차들을 많이 버렸습니까?"
"적은 마차 바퀴가 진창 속에 처박히면 꼼짝을 못해 내버린다."
"마차가 빠지면 꺼내서 다시 써야지 어쩌려고 그럴까요?"
"아국 기병들의 공격을 당할게 두려워 급히 도망치고 말아 그렇다."
"그런 사정이라면 아군의 마차들도 다닐 수가 없지 않겠습니까?"
"요동 땅은 봄에 질기로 소문났다. 때문에 마차의 바퀴를 크게 만들고 여러 개를 달아서 마치 지네발 같은 형태로 특별하게 만든다. 그래야만 웬만한 진창 속에서도 바퀴가 처박히질 않고 잘 굴러다닐 수가 있다."
수국 군은 마차 3만여 대에 무기와 식량을 싣고 왔다. 그러나 건조한 화북(華北) 지역에서 쓰던 마차들이라 대부분 바퀴가 둘 뿐이었다. 그런 마차들은 진창에 빠지면 옴짝달싹을 못해 결국은 내버리게 되었다.
세 사람은 동쪽의 성벽 쪽에 이르렀다. 양신과 연개소문은 성 밖을 내다보다가 입이 딱 벌어졌다. 드넓은 대지 위는 수국 군 병사들로 가득 채워져 어마어마한 군세 앞에 숨이 막혀들 지경이었다. 그런 가운데 멀리 제(帝)라고 쓰인 누런 깃발을 세운 커다란 3층 누각이 보였다.
연개소문이 먼저 3층 누각을 가리키며 물었다.
"삼촌, 누런 깃발을 내건 매우 큰 누각은 언제 지어 놨습니까?"
"저건 움직이는 누각으로 관풍행전이라고 한다."
"움직이는 누각이란 게 다 있습니까?"
"양광은 저 누각 속에서 기거하며 타고 돌아다니기도 한다."
관풍행전(觀風行殿)은 수십 개의 바퀴가 달린 큰 마차 위에 얹은 누각이었다. 그런 마차를 1백여 필의 말들이 끌고 이동을 했다. 황제는 그걸 타고 다니면서 위엄을 높이고 세를 과시하려고 들었다.
"양광은 관풍행전 속에 들어앉아 전쟁을 놀이를 하듯 지휘를 한다. 그러나 요즘은 저 속에서 여간 분통이 터지고 속이 타지 않을 것이다."
"삼촌은 저따위 것을 당장 불태워버리지 왜 두고만 보십니까?"
연개소문이 분연히 말하자 연생수는 고개를 저었다.
"관풍행전을 그냥 내버려 두는 게 우리에겐 도리어 득이 크다."
"삼촌, 무슨 득이 크단 말씀입니까?"
"양광이 관풍행전을 타고 다녀야지 말을 타고 돌면 우리가 피곤해진다. 요즘은 전황이 더욱 좋지 않아져서 저 속에서 주색으로 화를 달래고 있다. 그 대신 우리와 수국 병사들은 함께 고달픔을 면할 수가 있다."
이번엔 양신이 물었다.
"대장군님, 양광은 근위군을 일체 전투에 투입시키지 않는 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러는 이유가 대체 뭔지 모르겠습니다."
"처음엔 근위군도 전투에 투입을 시켰으나 피해만 커서 그런다."
"양광은 근위군을 매우 아끼는 모양이군요?"
"근위군은 황제를 보호할 병력이므로 아낄 수밖에 없지. 더욱이 본국에서 반란이라도 일면 근위군을 끌고 회군해 진압을 하는데 써야 한다."
그때 성 밖에서 갑자기 수국 병사들이 우하고 함성을 질러댔다.
"삼촌, 전투가 벌어진 것 같습니다."
"저 함성은 순시에 나선 양광이 이곳에 이르렀음을 알리는 것이다."
연생수의 말을 듣고 양신과 연개소문은 성 밖을 내다봤다. 그랬더니 휘황찬란한 관풍행전이 눈앞에서 움직이고 있었다. 양광은 하루 한 차례씩 그렇게 요동성을 한 바퀴씩 돌면서 전투를 독려했다.
관풍행전이 지나가는 곳마다 지금까지 가만히 있었던 수국 병사들이 갑자기 성을 향해 화살을 날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건 싸우는 시늉을 해보일 뿐이고 황제가 지나가면 다시 조용해졌다. 그런 지경이니 황제가 매일처럼 독려를 한들 이렇다 할 전과를 올릴 수가 없게 되었다.
양광은 자신도 요동성 함락은 점점 요원한 일로 생각되었다. 거기다 자국의 병력은 피해만 늘어나서 속이 부글부글 끓여야 만했다. 때문에 장안성 직공에 기대를 걸고 우문술과 우중문을 닦달하게 되었다.
연개소문은 좀 느긋해진 태도로 연생수에게 물었다.
"양광은 요동 땅을 점령한 것이나 다름없다고 떠벌인다지요?"
"누구 맘대로? 나는 양광의 뜻대로 돼가게 내버려 두진 않을 것이다."
"삼촌은 앞으로의 전황에 대한 어떤 희망이 있다고 보십니까?"
"나는 합하의 압록수 이남의 대회전 계획에 큰 기대를 걸고 있다."
"그 때문에 합하와 건무 저하간의 반목이 더 커지지 않을까요?"
"건무 저하는 합하의 계획에 결국은 동조를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삼촌, 어떻게 그런 짐작을 하실 수가 있겠습니까?"
"왕제 저하도 양광이 동부와 북부를 회유한 것을 알게 되었다. 그 때문에 합하가 여타 부의 병력을 끌어다 압록수 이남에서 대회전을 치르려는 계획을 내심으론 도리어 고맙게 여길 수밖에 없게 되었다."
양신은 앞록수 이남의 대회전이 을지문덕의 독단적인 계획임을 알고 있었지만 연생수에게 그걸 말하지 않으며 수긍하는 빛만 보였다.
"이제부터 수국 병사들이 하는 짓거리나 구경을 하러 가자."
연생수의 말에 연개소문이 물었다.
"삼촌, 수국 병사들이 무슨 짓거리를 하기에 구경을 합니까?"
"요샌 우리 병사들이 적과 장기판을 벌이면서 잘 지내고 있다."
연생수는 말하고 두 사람을 반대쪽 성벽으로 데려갔다. 그곳은 관풍행전이 이미 지나가 완연히 달라진 광경을 보여주고 있었다. 양측이 조용하고 평온한 분위기 속에 병사들은 휴식을 취하거나 부서진 병장기를 손질하고 있었다. 그런데 한 군데 펼쳐놓은 장기판(將棋板)이 있었다. 아군과 적이 장기를 두는 상상도 못할 광경이 벌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성벽 안에서 고구려 병사 하나가 밖에 대고 큰 소리로 외쳤다.
"종선 1, 횡선 2의 청차는 종선 3, 횡선 4로 옮긴다."
장기판에선 청차(靑車)가 그 말대로 움직여 놓여졌다. 그러면 성 밑 가까이에 와 있던 수국 군 병사가 그 말을 한어로 통역해서 자기 쪽 진지로 소리치면 잠시 뒤 수국 진지로부터 답변이 왔다.
"종선 6, 횡선 8의 홍마는 종선 3, 횡선 6으로 간다."
그 말에 고구려 쪽 장기판의 홍마(紅馬)가 자리를 옮겼다.
장기를 지휘하던 소형 아리(亞利)가 연생수를 보고 벌떡 일어섰다.
"대장군님, 어서 오십시오."
"아리, 판세가 어떤가?"
"아직은 1승 1패입니다."
"승패에 연연해하지 말라. 적당히 이기고 지면서 즐기면 된다. 적들의 유일한 위안거리조차 힘들게 만들면 안 된다. 적병을 잘 다독여 줄수록 그만큼 성안은 편안해지는 걸 잊지 말게."
"대장군님, 우린 늘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판판이 힘겹기만 해서 그럽니다. 묘수를 한 수 써주십시오."
"전쟁에 지는 것도 아닌데 훈수까지 들고 싶진 않다."
연생수의 대답에 병사들은 웃음을 터뜨리고 아리가 말했다.
"대장군님, 수국 병사들에게 위로의 말씀이라도 해주십시오."
"그렇게 하자."
연생수의 대답에 아리는 성 밖을 향해서 외쳤다.
"수국 병사들이여, 요동성 성주께서 격려의 말씀을 하시겠다."
수군 진영에선 그 말이 전달된 듯 손을 흔드는 병사들이 보였다. 싸우고 싶지도 않고 오직 고향으로 돌아갈 생각들뿐이라 고구려 성주가 무슨 말을 해줄 지에 관심을 두게 되었다.
연생수는 성 밖을 향해 큰 소리로 외쳤다.
"수국 장병들이여, 고생들이 많다. 고구려는 전쟁을 원치 않는다. 나는 수국 병사들이 무사히 고향으로 돌아갈 수가 있게 도우려고 한다."
수국 군 진영에선 그 말이 전해지자 환호성이 일어났다. 연생수는 이어서 고구려 군이 여러 가지로 도움 주고 있는 사항들을 열거하는 말을 했고, 수국 병사들은 또 다시 환호성으로 화답을 했다.
연개소문은 그런 일이 놀랍고도 어이가 없어 한 마디를 했다.
"삼촌, 참으로 별 희한한 전쟁터를 다 보겠습니다."
"호위 선인은 돌아가서 오늘의 일을 본대로 합하께 보고를 하게."
"예, 대장군님. 소관은 오늘 밤으로 국내성으로 떠날 예정입니다. 서부에서 병력 차출에 응하신 것을 빨리 보고하고 싶습니다."
"나는 다른 여타 부도 호응할 것으로 본다. 고구려인은 이 땅에서 쫓겨나면 옮겨 갈 데가 없어진다. 그것을 안다면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힘을 합쳐 지켜내지 않으면 되고 합하의 대회전도 성공할 것으로 믿는다."
연생수는 확신에 찬 음성으로 말했고, 한껏 고무가 되는 양신과 연개소문은 엄숙해진 표정으로 눈물까지 흘러나왔다. 두 사람은 밤이 이슥해지자 요동성에서 나갔다.
"형, 요동성의 안정을 보고 나니 나는 마음이 편안해졌소."
"나도 올 땐 걱정이 컸으나 돌아가는 지금은 희망을 품게 되었네."
"마음의 안정을 이루게 되니 나는 다른 얘기를 꺼내고 싶소."
"연선인, 어떤 얘긴가?"
"나는 국내성을 떠나기 전 날 동화부인이 보낸 서신을 받았소."
"어떤 서신인가?"
"그 내용은 형을 비롯해 여선부인과 주랑 누님에 관한 얘기요."
"연선인, 서신 내용을 자세히 말해 주게."
"나는 말을 꺼내기 전에 형의 솔직한 심경부터 듣고 싶소."
"솔직한 심경을 듣다니 무슨?"
"형은 여선부인을 진정으로 포기할 수가 있겠소?"
양신이 대답을 않자 연개소문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형은 결코 포기를 할 사람으로 보지 않소."
"연선인, 그에 관한 말은 그만 했으면 좋겠네."
"형은 새달궁에 들어가서 저하께 충성을 맹세를 했다고 했소. 그건 여선 부인을 포기한다는 뜻인데 나는 그걸 진정으로 보진 않소."
양신은 대답을 않고 침묵만 지켰다.
"도해선은 언제고 형을 죽이고 말 거요. 그리고 그 뒤엔 저하가 있소. 형은 그런 점을 감안해 결국은 고구려를 떠나지 않으면 안 되오."
연개소문은 여전히 대꾸가 없는 양신에게 말을 이었다.
"나는 두고 볼수록 주랑 누님이 너무도 딱해 못 견디겠소."
"그 심정은 나도 똑 같을세."
"주랑 누님은 철장님의 안위 때문에 언제고 수국 땅으로 떠날 것만 같소. 그걸 안다면 형도 무슨 생각을 해야 만하지 않겠소? 오늘은 그에 대한 형의 의견을 들어야 하겠소. 나는 형을 돕고자 해서 그러오."
"나도 마음이 편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어찌해볼 도리가 없네."
양신의 대답에 연개소문은 비로소 본론을 꺼냈다.
"주랑 누님이 태산팔협을 찾아 수국으로 떠나는 건 못 막게 되었소."
"나도 그 일로 여간 큰 고민이 아닐세."
"주랑 누님은 형을 이젠 믿지 않는 것 같소. 때문에 여인의 몸으로라도 혼자서라도 떠나려는 것이요. 형은 그걸 보기만 할 생각이요?"
양신은 더욱 입을 꾹 다물고만 있었다.
"형은 전쟁이 끝나면 수국으로 떠날 생각임을 나도 알지만 주랑 누님은 그걸 기다릴 수가 태도가 아니오. 곧 일을 저지를 태세요."
"연선인, 나로선 답답할 따름이니 자네가 한번 설득을 해보게."
"나도 했으나 안 되오. 지금이라도 형이 혼자서 떠나면 안 되겠소?"
"나는 그러고 싶네. 그러나 합하의 허락을 받을 수가 없지 않는가?"
"이 전쟁은 형 한 사람이 있고 없는 것으로 승패가 갈리진 않소. 주랑 누님의 무모한 행동을 막고 사전에 대처를 할 사람은 형밖에 없소."
양신은 한참 있다가 대꾸를 했다.
"연선인, 이젠 다시 생각을 해 보겠다."
5월 초순으로 접어들었다.
요동 땅은 초여름으로 접어들고 날씨는 연일 비를 질금거리게 되었다. 비는 지독한 황진(黃塵)을 가라앉혀 주고 산야를 싱그럽게 변화시켰다. 그 대신 날씨는 점점 더워지기 시작했다.
양광은 좀체 호전되지 않는 전황 속에 압록수 도하작전을 전개하라는 명령을 연일 독촉했다. 때문에 좌우군의 수뇌부는 병력 집결이 덜 된 채 합동 부대를 편성했지만 움직일 수는 없었다.
우문술과 우중문은 성화를 부리는 황제에게 장안성 직공 부대 편성을 완료했음을 보고했다. 그러나 아직도 병력들이 다 모이질 않은 데다 장졸들은 고구려의 심장부로 진입을 꺼려했다.
한편 을지문덕은 항복을 하겠다는 소문을 흘려내기 시작했다. 그 소문을 전해들은 우문술과 우중문은 기대감이 없지도 않은데다 황제가 압록수로 오게 된다는 소식이 전해져 대책 회의를 열었다.
우문술과 우중문은 도하 작전을 놓고 서로 뜻이 맞지 않았다. 우문술은 소극적인데 반해 우중문은 적극성을 띠었다. 그러나 예하의 장수들은 대체적으로 도하작전에 회의적이었다.
오늘도 원수부(元帥府) 장막에 양측 장수들이 모여들었다. 그리고 후덥지근한 날씨 속에 갑론을박으로 입씨름을 벌이기만 했다. 그로 인해 갈등이 야기되고 서로 간에 비방하는 말들만 난무했다.
우문술은 황제에게 아부를 일삼는 우중문을 비웃었다. 반면에 우중문은황제의 부마(駙馬)인 아들 덕에 높은 자리를 차지한 우문술은 대병력을 지휘할 능력이 부족하다고 깔봤다.
황제는 그런 두 사람의 시기를 알고 그걸 이용했다. 두 사람을 조종해서 상승효과를 기대하면서도 우중문을 더 신임했다. 우중문은 우문술의 예하 병력이 도착이 늦는 걸 비난했다.
"나는 아직도 좌군은 압록수에 이르지 못한 병단들이 많다는 말을 듣게 되니 한심함을 금치 못하겠소. 어디에 처박혀들 있는지 원!"
우문술은 자신의 예하 부대 집결이 늦는 걸 궂은 날씨 탓으로 돌렸다.
"이놈의 요동 땅은 날씨조차 더럽군! 봄이랍시고 눈을 못 뜨게 황토 바람만 불어 제키더니 어느 새 여름으로 접어들었군! 연일 비가 질금거려서 온통 진흙구덩이를 만들어 놓으니 병마가 제대로 움직일 수가 있나? 그로 인해 병력들의 도착이 자연히 늦어질 수밖에 있나? 나라면 이처럼 더러운 땅은 탐을 내고 싶지가 않겠구먼."
우중문은 변명만 늘어놓는 우문술에게 반박을 했다.
"좌익위 대감, 날씨 탓만 할 게 아니요. 좌군 예하 부대들 중엔 아직도 요동 땅을 헤매거나 심지어 숨는 부대들까지 있다는 말을 들었소."
"우익위 대감, 우군은 뭐가 나은 게 있다고 그런 소릴 하오?"
"폐하의 독촉이 지엄하신 걸 몰라서 그런 말씀만 하시오? 좌군의 집결이 늦어져 압록수 도하작전에 못 들어가는 책임을 누가 져야 하겠소?"
"좌군의 집결이 늦는 건 그만한 사정이 있는 걸 알면서 왜 그러오?"
"좌익위 대감은 무슨 핑계를 댈게 있다고 그런 말씀을 하시오?"
"우군은 요하의 상류를 쉽게 건넜지만 좌군은 그럴 수가 없잖소?"
"우군은 압록수와 거리가 퍽 먼 데도 먼저 도착을 했소."
"아무튼 간에 좌군의 집결이 늦는 걸 가지고 탓만 해선 안 되잖소?"
"심해도 너무 심하니 나로선 그럴 수밖에 없소."
"우리가 도하 작전을 서두르는 것만은 능사가 아니요. 압록수를 건너는 일은 여러 가지로 신중을 기할 필요성이 있기 때문이요."
우문술의 말에 우중문은 입을 삐죽거리다 입을 열었다.
"좌익위 대감, 곧 본격적인 장마철이 닥치게 되고 폐하께선 매일 도하 작전을 서두를 것을 독촉이시니 더 이상 꿈지럭댈 수가 없지 않소?"
우문술은 듣다 못해 버럭 역정을 냈다.
"우익위 대감, 충분히 준비를 갖추고 작전을 펴도 성공할 가능성이 있을까 말까요. 그게 장수들의 공통된 의견인데 왜 무시하려고만 드오?"
우중문도 그 말엔 찔끔했다. 장수들이 고구려 국도 직공에 큰 부담감을 느껴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는 걸 잘 알기 때문이다. 거기다 내호아가 독단으로 장안성 공격에 나섰다 대배한 소문도 흘러들고 있었다.
"좌익위 대감! 폐하께선 역대 최고의 군세를 동원하셨소. 꺼우리들의 국도를 깨기는 식은 죽 먹긴데 맨 날 신중타령만 할 순 없지 않소?"
"우익위 대감, 우리가 없앨 꺼우리들 속담에 이런 말이 있소. 호랑이를 잡으려면 그 소굴로 들어가야 하는데 우리가 바로 그 짝인 셈이요. 병법을 조금이라도 안다면 무리한 공격이 부를 화를 조심해야 되오."
우문술이 병법까지 쳐들자 우중문은 자존심이 몹시 상했다.
"좌익위 대감! 누구한테 병법을 쳐드는 거요? 폐하께서 연일 다그치시는데 나중에 문책을 당하게 될 경우 누가 책임을 질 것이요?"
두 사람의 설전이 격화되자 우문술 소속의 설세웅이 입을 열었다.
"답답한 심경은 상장군님들만이 아니십니다. 전투보다 더 급한 문제는 군사들을 먹일 식량의 부족을 해결할 일입니다. 탁군을 떠날 때 1인당 3개월 치씩 지녔던 양식을 지금은 어느 병사도 남은 자가 없습니다."
장수들은 그 말에 전부 동의하는 태도로 고개들을 끄덕였다.
우중문도 예하 부대의 악화된 식량 사정이 젤 걱정이었다. 그러나 설세웅이 그런 말을 쳐든 데는 또 다른 의도가 있다고 봐 도끼눈을 떴다.
"설장군, 그건 병사들 탓이 아니고 수송대가 역할을 제대로 못해서 그렇게 된 것임을 모르는가? 수송대가 처음부터 제 역할을 다 해줬다면 병사들 개개인이 무엇 때문에 무거운 양식을 지고 다닐 필요가 있겠나?"
우문술은 수송 업무의 총 책임자로 발끈했다.
"우익위 대감, 수송대는 무기와 전략 물자의 수송을 감당하기도 힘든 판이요. 병사들이 각자 분배받은 식량까지 떠맡을 수는 없겠소."
수국 병사들은 출병 때 각자 식량을 지급받고 그걸 등에 지고 요하까지 행군해 왔다. 그러나 전투가 벌어지자 무게를 감당하며 싸우기가 여간 힘이 들지 않았다. 때문에 땅을 파고 뭍은 자들이 많았고 그 결과는 굶주림을 당하는 사태를 빚게 만들었다.
우문술은 식량 문제만 나오면 우중문이 자기 탓으로 돌리려는 것에 여간 부아가 치밀지 않았다. 더욱이 식량 사정이 젤 나쁜 것은 우중문 예하 부대들이라 공박할 거리로 삼으려고 입을 열었다.
"우익위 대감 예하 부대는 땅에 묻은 식량을 파내면 되지 않겠소?"
"그건 우군만 아니고 좌군도 마찬가지가 아니요?"
우중문도 우문술을 비난할 거리로 다른 일을 쳐들었다.
"좌군의 장수들은 양곡을 버린 죄로 생떼 같은 병사들의 목숨을 처형 시켰다니 세상에 그런 천인공노할 짓을 어떻게 저지를 수가 있담!"
우문술은 화를 더는 참을 수가 없어 막말이 나오고 말았다.
"우중문, 그대는 위턱 아래턱 없이 따지고만 드는가? 계급은 같지만 나는 선임자이다. 나이도 나보다 어린 자가 맞먹으려고 들다니!"
"좌익위 대감, 회의를 하는 자리에서 위턱 아래턱은 왜 따지오?"
"그대는 항명을 하는 것이나 다름없으니 군법 회의에 처할 일이다."
"좌익위 대감, 이게 군법까지 쳐들고 나설 일이요?"
"그럼 우군 예하는 어떤가? 병사들은 양곡만이 아니고 배갑, 장초, 화약, 무기 등 군수품까지 버린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럼에도 우익위 대감은 병사들에게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은 건 잘 한 일로 여기나?"
"좌익위 대감, 모함하지 마시오. 우군은 폐하가 요동 땅에 발을 붙이실 수가 있게 교두보를 확보한 공이 있지만 좌군은 뭘 한 게 있소?"
상관들의 다툼을 보다 못한 유사룡이 입을 열었다.
"그만들 하십시오. 폐하의 명을 받드는 신하들이 자중지난을 벌이면 되겠습니까? 병사들은 굶주리는 데다 썩은 땅의 물까지 먹고 각종 질병에 시달립니다. 가뜩이 저하된 전력으로 싸우기가 힘든 판에 내부 분열까지 일으키게 되면 모두가 죽음을 면치 못하게 됩니다."
대장군 형원항이 그 말을 거들었다.
"폐하께선 꺼우리의 국도 함락을 재촉하시지만 솔직히 말해 우리가 그에 부응할 여건이 됩니까? 백만이 넘을 병력을 끌고 오면 뭘 하겠습니까? 도무지 싸우려고 들지를 않는 농투성이 병력들로 할 수가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런데 상장군들께선 무슨 대책을 세우기보다 연일 다투기나 하시면 되겠습니까?"
다른 장군들도 그 말에 동조했다.
"맞는 말이요."
"상장군들께선 힘을 합쳐주셔도 모자랄 판입니다."
"전부가 똘똘 뭉쳐도 살아남기가 힘들 판에 그만들 하십시오."
우문술은 부하 장수들의 지적에 얼굴을 붉히며 말을 돌렸다.
"식량 문제는 내호아 선단이 본국에서 실어올 것이니 곧 해결될 것이요. 점심때가 되었으니 우리 요리나 먹으며 마음들을 가라앉혀 봅시다."
장수들은 그 말에 구원이라도 받은 듯 찌푸린 얼굴들을 겨우 풀었다.
우중문이 먼저 부관에게 상을 들일 것을 명령했다. 다른 장수들도 각자 전속 요리사들에게 음식을 들이게 했다. 그때부터 회의장 안은 푸짐한 요리들이 탁상 위에 차려졌다. 모두는 언제 다퉜느냐 싶게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되어 요리를 먹었다.
장수들은 각자 출신지마다 고유한 요리들을 차려낸 데다 향기 좋은 백주(白酒) 잔을 기울이며 모두가 사이좋게 나눠 먹었다. 어느 새 장막 안은 웃음과 담소로 가득해졌다.
황제는 출정에 궁궐의 숙수(熟手) 2백여 명을 끌고 왔지만 장군들도 각자 전속 숙수를 데리고 왔다. 그런데 데다 모두는 내노라 할 식도락가들이라 요리엔 일가견들이 있었다. 서로 간에 음식 재료의 산지를 따지고 숙수의 솜씨를 평가하는 걸 화제로 삼았다.
우문술이 입을 열었다.
"나는 꺼우리들에게 항복을 권할 서찰부터 보낼 생각이요."
그 말에 모두는 말없이 고개들을 주억거렸다.
을지문덕은 압록수로 집결한 수국 병력은 이럭저럭 30여 만에 이르렀을 보고받았다. 그러자 곧 국내성에서 철수해 압록수를 건넌 뒤 묘향산 밑에다 새로운 지휘소를 설치했다.
건무는 적의 대규모 병력이 곧 장안성 직공에 나설 판에 을지문덕의 합세를 내심으로 반겼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론 적과 다시 화평을 추진할 물밑 작업으로 들어갈 생각이었다.
어느 날 수국 진중엔 군관 하나가 급히 원수 장막으로 뛰어 들었다.
"좌익위 대감, 꺼우리 국상이 서신을 보내 왔습니다."
우문술은 군관이 전하는 서신을 급히 뜯어서 읽었다.
유명대국(有名大國) 좌익위 대장군 우문술 귀하
아국은 귀국과 선린을 유지하고 싶으나 어떤 오해로 불행한 무력충돌을 빚기에 이르러 유감이요. 본인은 무력 대결을 그칠 방도를 찾고자 귀 진중을 방문하길 원하오. 회답을 기다리겠소.
임신년 초하 고구려 국상 을지문덕
우문술은 서신을 읽고 우중문에게 넘겨주었다. 그런 뒤에 모든 장수들도 돌려가면서 읽었다. 수국 장수들은 내심 환호성이라도 지르고 싶었지만 꾹 참고 겉으론 담담한 표정들을 지었다.
군관이 다시 입을 열었다.
"서신을 가져온 고구려 군관이 밖에서 답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문술은 보란 듯이 좌중을 둘러보는데 우중문이 먼저 입을 열었다.
"좌익위 대감, 어떻게 처리하실 생각이오? 나는 꺼우리 국상이 무슨 속임수를 쓰려는 것 같아서 경계심을 품게 되지 않을 수가 없소."
우문술은 못마땅한 듯 대꾸했다.
"꺼우리들이 지금 우릴 상대로 무슨 속임수를 쓸 형편이 되겠소? 그렇지 않아도 건무란 자로부터 무슨 제안이 올 것으로 기다리던 참이었소. 그런데 꺼우리들 중 강경파의 수괴로 알려진 을지문덕이 이런 제안을 해왔으니 어찌 반기기 않을 일이요? 을지문덕은 꺼우리 군대를 총지휘하는 자로 우리 진지를 직접 방문하겠다는 데 뭘 더 의심할 게 있다는 말이요? 나는 굴복하려는 뜻으로 받아들여도 좋다는 생각이요. 어흠!"
대부분의 장군들도 그 말에 동조하는 표시로 고개들을 주억거렸다.
"좌익위 대감, 내가 보기엔 글의 내용이 마땅치가 않소."
"우익위 대감! 뭐가 마땅치 않다는 말이요?"
"이 글에는 굽히려는 데가 전혀 없다고 보오. 게다가 국서라면 황제의 연호를 써야 마땅한데 임신년 초라고 썼소. 이런 시건방진 서찰을 어디 받아들일 수가 있겠소?"
우문술은 이의만 제기하는 우중문에게 짜증이 났다.
"우익위 대감, 이건 을지문덕의 개인 서찰이고, 폐하께 올리는 게 아니고 내게 온 것이요. 우선 나하고 의논을 해보자는 것인데 뭘 그걸 따지려고 드오? 나는 을지문덕이 우리 진지를 방문하겠다는 것만으로도 대 환영이며 이 자리의 모두로부터 중의를 먼저 들어 봅시다."
설세웅이 먼저 찬동하고 나섰다.
"좌익위 상장군님의 말씀을 지지합니다. 전쟁 중에 적장이 타국 진지를 방문하겠다는 것은 굴복의 뜻으로 받아들여도 좋다는 생각입니다. 그러나 우익위 대감께서도 방문을 허락해 주시기 바랍니다. 을지문덕을 만나 얘기를 들어본 뒤에 무슨 결정을 내려도 내려야 할 일입니다."
다른 장군들도 그 말에 호응하듯 발언들을 쏟아 냈다.
"옳소. 이 판국에 망설일 게 뭐가 있겠습니까?"
"화친은 꺼우리보다 우리가 먼저 제의해야 할 형편입니다. 싸우지도 않고 적을 굴복시킬 수가 있다면 그보다 더 바랄 게 뭐가 있습니까?"
"꺼우리도 이젠 더 버티기가 힘들 것입니다. 멸망의 두려움 앞에서 굽혀드는 것입니다. 받아들인 뒤 수틀리면 다시 들이쳐도 됩니다."
우문술은 여러 장수들의 호응에 힘입어 결정을 내렸다.
"나는 지금 허락한다는 답신을 보내겠소."
우중문이 그 말을 또 걸고 넘어졌다.
"폐하께 먼저 보고를 드린 다음에 답신을 보내도 늦지 않소."
"물론 그래야 할 일이요. 허나 밖에서 적병이 답신을 기다리고 있다지 않소? 이런 일은 시간을 끌어서 좋을 게 없소. 또 폐하께 소소한 일까지 보고를 다 드리다간 어느 세월에 전쟁을 끝낼 수가 있겠소?"
우문술의 단호한 태도에 모든 장수들도 동조를 했다. 우중문도 대세에 밀려서 그만 입을 다물었다. 우문술은 유사룡에게 답장을 쓰게 했다.
고구려 국상 을지문덕 귀하
천자(天子)께서 친정하신 진지에 귀하의 방문을 허락하오.
대업 7년 초하 수제국(隋帝國) 좌익위 상장군 우문술.
"서신을 가져온 적병을 들게 하라."
우문술의 명령이 떨어지자 군관은 다시 밖으로 나갔다. 잠시 후 장막 안으로 양신이 들어섰다. 그는 우문술에게 고구려 식 군례를 붙였다. 그러자 우문술은 양신에게 물었다.
"그대의 신분을 밝혀라."
통역 군관이 고구려 말로 전하자 양신은 대답했다.
"본인은 고구려 군관으로 국상의 호위무사 직책을 지녔습니다."
수국 장수들은 양신의 늠름한 태도를 보면서 고구려 군인의 당당한 기상을 새삼 느끼지 않을 수가 없는데 우문술이 답서를 내주며 말했다.
"고구려 국상의 방문은 빠를수록 좋다."
양신은 서찰을 받아들고 군례를 붙인 뒤 뚜벅뚜벅 걸어서 밖으로 나갔다. 말을 타고 천천히 적국의 진지를 빠져나갔다. 그때 호위병으로 위장한 측지(測地) 군관들은 번뜩이는 눈초리로 진지 안을 살폈다.
수국 병사들은 양신이 지나가는 곳마다 한어로 외쳤다. 양신은 무슨 말인지 몰라 안내하는 수국 군관에게 물었다. 수국 군관은 고구려 말로 기꺼이 통역해 주었다.
"아국 병사들이 소망을 말하고 있소. 전쟁을 빨리 끝낼 수 있도록 고구려가 항복하여 복속을 하면 전쟁이 끝난다는 말들을 하고 있소."
양신은 수국 병사들의 무질서한 모습들을 보며 오합지졸들의 딱한 처지에 대한 동정을 금치 못했다. 겉으론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지만 속으론 곧 결판을 내주겠다는 옹심을 다졌다.
우문술은 그날 즉시 황제에게 보고를 했다.
수국 황제는 전쟁을 시작한지 반년 만에 고구려가 무릎을 꿇는 걸로 받아들여 여간 반갑지가 않았다. 수국 장졸들도 이젠 싸움이 끝난 걸로 여기며 기쁨과 흥분 상태에 빠져들었다.
을지문덕은 적진 방문이란 모험을 건데는 복합적인 생각이 있었다. 수국의 병부시랑 곡사정(斛斯政)을 통해 알아낸 게 있기 때문이었다. 양광은 전투를 벌이지 않고도 요동 땅을 그대로 깔고 앉으면 수국의 영토가 된다는 속셈을 깔고 있었다. 그리고 되도록이면 빨리 적군을 압록수 이남으로 유인을 해서 최후의 타격을 가해 몰아내려고 했다.
양신은 그날 이후로 을지문덕의 방문 날짜를 잡기 위해 수국 진지를 두 차례나 더 드나들었다. 그런 끝에 마침내 방문 날자가 확정되고 을지문덕은 국왕에게 그걸 보고해 윤허를 받았다.
양광은 고구려의 굴복을 자랑하고 싶어 만조백관을 불러모았다.
"이 세상에서 짐에게 무릎을 꿇지 않을 자가 누구이겠는가?"
황제는 의기양양이자 장졸들은 이제 살아서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된 기쁨에 젖어들었다. 들뜬 분위기로 고구려 백성들에게 식량을 내주고 술을 담가서 바치게 했다. 그때부터 병사들은 해가 높이 떠도 잠자리에서 일어날 줄을 모를 만큼 해이해져 갔다.
양광은 그걸 뒤늦게 알게 되자 모골이 송연해졌다. 만약에 그걸 알고 고구려 군이 공격을 한다면 도륙을 당할 판이었다. 해이해진 기강을 바로잡고자 만조백관을 관풍행전 앞에 집합시켰다.
"백관과 제장들은 들어라. 짐은 마침내 요동 땅을 손에 넣을 수가 있게 되었다. 그러나 장졸들의 기강은 말할 수 없게 해이해지게 되었다. 그런 장졸들로 애써 얻은 땅을 어찌 지켜낼 수가 있겠는가?"
황제의 꾸짖음에 신하들은 지당한 말씀이라 머리를 조아렸다. 그러나 도저히 분이 풀리지가 않는 양광의 입에서 무서운 말이 흘러나왔다.
"짐은 출병 이후 많이 참은 게 많았다. 관직이 높거나 문벌을 믿고 짐이 낭패를 당할 때마다 비웃는 자들이 있음을 알고 있다. 짐을 만만히 보고 입을 놀린 자들의 목을 베어 효시를 하겠다."
신하들은 그 말에 간담이 써늘해진 채 동요했다. 황제가 위세를 과시하고 복종을 요구하는 데 그쳤으면 좋으련만 말이 또 나왔다.
"짐은 지금부터 목을 벨 자들을 호명하겠다."
백관들은 아연실색으로 얼굴이 백지장처럼 변해버렸다. 황제의 성격상 단순히 겁만 주려는 의도가 아님을 잘 알기 때문이었다. 함께 있는 속국(屬國)의 왕들조차 몸들이 벌벌 떨렸다.
양광은 평소 마음에 들지 않아했던 자들을 호명했다. 중랑장 이상의 고위직 장수들로 모두 8명이었다. 모두는 목이 베일만큼 큰 죄를 지은 게 없음에도 몸을 사시나무 떨듯 끌려 나왔다. 그리고 전원은 목들이 칼날에 베어져 나갔다.
백관들은 땅바닥에 머리를 처박고 울부짖었다.
"폐하, 충성을 맹세하옵니다. 굽어 살펴 주옵소서."
황제는 그렇게 분풀이를 한 뒤 그 날로 우문술과 우중문에게 그 사실을 알렸다. 그리고 적의 항복을 못 받거나 적의 국도를 함락시키지 못할 경우 똑 같은 신세가 될 것임을 경고했다.
6월 중순으로 접어들었다.
을지문덕은 5방색 깃발을 휘날리는 고구려 기병 3백 기의 호위를 받고 수국 군 진영에 당도했다. 그리고 의장병을 벌려 세워 세를 과시했다.
우문술은 군악대의 연주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을지문덕을 영접했다. 을지문덕이 장막 안으로 안내를 받을 때 양신도 밀착 경호를 하면서 따라 들어갔다.
장막 안에선 수국 장수들 전원이 고구려 국상을 향해 군례를 붙여 깍듯한 예우를 했다. 그러나 우중문만 삐딱한 태도로 을지문덕을 지켜보았다. 일국의 국상 치곤 풍신이 너무 보잘 것 없어 과연 본인인지 의심이 들었다. 그러나 허리에 두른 5자루의 패도를 보고 믿음이 갔다.
마침내 고구려와 수국 군 수뇌부의 대좌가 이뤄졌다. 수국 장수들은 중원의 대국이 소국을 대하는 우월감을 은연중 드러내는 가운데 우문술은 을지문덕에게 차를 권했다.
"아국 황제 폐하께서 특별히 내리신 차입니다."
"그렇습니까? 상장군께서도 한번 우리 진지를 방문해 주시오. 아국의 좋은 차를 한번 대접하고 싶소."
의례적인 말을 주고받고 우문술이 먼저 발언했다.
"황제 폐하께선 뒤늦게나마 고구려의 뉘우침을 가상하게 여기시오. 나 역시 여간 다행한 일로 여기지 않소."
그러자 우중문이 끼어들었다.
"황제 폐하께선 고구려의 항복에 세 가지 조건을 제시하셨소."
우중문은 말을 잠시 끊었다가 거만하게 다시 이었다.
"첫째, 고구려 국왕은 입조해 조회에 참석할 것. 둘째, 요동 땅을 대국에 바칠 것. 셋째, 고구려 국왕의 자제를 볼모로 보낼 것."
을지문덕은 별 표정의 변화가 없이 대답했다.
"귀국이 제시한 조건을 아국 대왕 폐하께 보고하겠소. 아국의 대왕 폐하께서도 수국에 제시하는 조건이 있으므로 전하겠소."
역시 말을 끊었다가 이었다.
"첫째, 수국 병력은 즉시 산해관(山海關) 너머로 철군할 것, 둘째, 수국 군대가 아국 백성들에게 끼친 피해를 보상할 것, 이상이요."
을지문덕의 말을 듣고 수국 장수들은 아연 동요하는 기색이 되었다. 특히 우중문은 기가 막힌 듯 눈알을 부라리며 호통을 쳤다.
"고구려 국상, 지금 제 정신으로 하는 소린가? 이 자리에 온 목적이 무엇인가? 소국의 사직을 보전하려는 게 목적이 아니었던가?"
을지문덕은 그 말에 동문서답을 하듯 대꾸했다.
"아국 백성들은 본인이 여기에 온 사실조차 모르고 있소."
우중문은 더욱 어이가 없는 듯 혀를 차며 반문했다.
"꺼우리 국상, 지금 무슨 뚱딴지같은 말을 하고 있는가?"
을지문덕이 대답했다.
"내가 귀국과 강화 협상에 나선 것을 만약에 고구려 백성들이 알게 된다면 나는 앞으로 목숨을 부지할 수가 없게 될 것이요."
우문술도 황당해서 입을 열었다.
"고구려 국상, 나는 무슨 말을 듣고 있는지 모르겠소?"
우중문은 그러는 우문술을 무시하듯 을지문덕에게 또 소리쳤다.
"꺼우리는 지금 전국토를 점령당해 곧 멸망을 당할 판이다. 그럼에도 국상이란 자가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고 헛소리만 할 셈인가?"
을지문덕은 담담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아국은 귀국에 요구할 조건이 하나 더 있소."
우문술이 물었다.
"뭐요?"
"귀국에 칭신을 하는 대가로 요서 땅을 떼어 주기 바라오."
을지문덕의 입에서 그처럼 생급스런 말이 나온 것은 적의 도하작전을 촉발시키려는 데 목적이 있었다. 아무튼 간에 아연실색이 된 수국 장수들은 부아가 치밀고 화가 나서 떠들었다.
"을지문덕, 지금 요서 땅을 베어 달라고 했는가?"
우문술도 기가 막혀 말이 나오지 않는데 우중문이 소리를 질렀다.
"꺼우리 국상, 대국의 병력이 한 번만 더 움직이면 평양의 궁궐은 송두리째 기둥뿌리가 뽑혀나갈 것이다. 어디서 그 따위 말이 나오는가?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린 꺼우리 국왕의 목을 베러 가겠다!"
을지문덕도 지지 않고 맞섰다.
"상장군, 감히 아국 대왕 폐하를 모욕하다니! 무모한 전역을 일으켜 자국은 물론 고구려 백성들까지 난간으로 내몰아 넣은 쪽이 어딘가? 세상의 지탄을 면치 못할 터에 적반하장도 유분수가 있지!"
"뭐라고? 이런 발칙한 자는 그냥 놔둘 수가 없다!"
우중문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자 을지문덕은 음성을 낮추었다.
"오늘은 쌍방의 요구 조건을 교환하는 자리로 그칩시다. 나는 닷새 뒤 다시 와서 쌍방 간의 요구 조건에 대한 회답을 듣는 자리를 갖겠소."
을지문덕은 말하고 몸을 돌려세웠다.
우중문은 벼락 치듯 또 소리를 질렀다.
"을지문덕, 네가 죽으려고 환장을 했냐?"
우문술도 한 마디를 거들었다.
"고구려 국상, 여기가 어디라고 그처럼 무례한가? 그대는 이 자리에서 항복 문서를 바치지 않곤 그냥 떠날 수가 없음을 알아라."
을지문덕은 상대의 노골적인 위협 앞에 태연자약하게 반문했다.
"내가 떠날 수가 없다면 잡아매 두기라도 하겠다는 말이요?"
"그렇게 한다면 어쩔 것인가?"
"귀국은 공자를 받드는 나라로 알고 있는데 뜻밖이요?"
"뭐가 뜻밖이란 말인가?"
"날 보내지 않겠다면 그냥 머물 수밖에 없겠소. 그러나 이 몸을 잡아둔다고 고구려가 항복을 할 걸로 생각한다면 큰 오산이요."
"오산이라고?"
"고구려에선 나 같은 존재는 강변에 흩어진 자갈들만큼이나 많소."
을지문덕은 말하고 도로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우문술은 갑자기 우중문에게 눈짓하고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장막을 나가자 장수들도 우르르 뒤따랐다. 밖으로 나온 우문술이 입을 열었다.
"우익위 대감, 을지문덕을 윽박지르기만 해선 안 되겠소."
"좌익위 대감 뭐가 안 될 게 있단 말이오?"
"을지문덕은 굽히려고 왔으나 자존심도 있고 바라는 점도 있을 것이요. 우리가 상대의 감정을 너무 자극해선 협상이 될 수가 없소."
"좌익위 대감은 꺼우리 국상이 협상을 하러 온 자로 보시오?"
"우익위 대감, 협상이 아니면 왜 죽음을 무릅쓰고 왔겠소? 폐하께선 내게 강화 교섭을 일임을 하셨소. 나는 어떻게든 관철을 시키겠소."
우문술의 말에 우중문은 코웃음을 쳤다.
"좌익위 대감 헛수고는 마시오."
"협상을 할 땐 어느 쪽이건 유리한 국면에 서려고 들기 마련이요. 을지문덕이 터무니없는 조건을 내걸지만 그게 먹혀들 걸로 바라서 하는 말이 아니요. 깎이게 될지라도 여러 요구들 중 단 하나라도 얻으려는 목적으로 말도 안 될 요구를 하는 것이요. 그러므로 타협을 이뤄내긴 어렵소. 타협은 쌍방 간이 합당한 선에서 가능한 점을 생각해야만 하오."
우문술의 말에 장수들은 동조하는데 우중문은 계속 뻗대었다.
"좌익위 대감은 폐하의 심중을 알기나 하고 그런 말씀을 하오?"
"폐하의 심중이 어떠시기에 그러오?"
"폐하께선 본래 강화엔 뜻이 없으시오. 꺼우리가 항복한다고 해도 이참에 평양성 궁궐을 불태우고 아예 멸망을 시켜버리려고 하시오."
"우익위 대감, 솔직히 말해서 그게 가능한 일로 보시오? 폐하께서 대병을 동원한 목적은 요동 땅을 얻는 데 있었소. 이젠 그걸 다 차지하게 되었으니 그걸로 만족해야 하오. 고구려 멸망까지 바라는 건 너무도 지나친 과욕이고 우린 지금까지 말할 수 없게 많은 인명 피해를 당했소."
"좌익위 대감은 그래서 꺼우리 국상을 계속 상대하겠단 말씀이요?"
"우익위 대감, 무턱대고 압록수를 도하해 적의 심장부로 들어가는 건 너무도 위험하오. 어떻게 해서든 강화를 성립시켜야만 하오."
"좌익위 대감, 압록수를 건너가는 게 뭐가 두려워서 이러시오?"
우중문이 반대의 뜻을 굽히질 않자 우문술은 다른 말을 꺼냈다.
"나와 우익위 대감은 폐하께 각기 다른 건의를 한 걸로 알려졌소."
"그럴지도 모르겠소만. 그런데 갑자기 그 일을 왜 쳐드시오?"
"나는 애초 폐하께 요동의 중요한 성들을 포위해 놓고 전투는 되도록 피할 것을 건의했소. 그렇게 해야만 고구려 백성들이 안정감을 갖게 되오. 그런 다음에 본국의 백성들을 이주시키면 자연스럽게 황제의 땅으로 굳히게 되오. 폐하께서도 내 건의에 타당성이 있다는 판단에 고구려의 항복과 복속을 받아낼 협상에 공을 들이란 뜻을 내비치셨소."
"폐하께선 내게 고구려를 기필코 멸망시키란 명을 내리셨소."
두 사람의 주장이 그렇게 달랐지만 장수들은 대부분이 협상 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우문술은 그걸 잘 알아서 우중문을 설득하려고 들었다.
"우익위 대감, 내호아는 혼자서 큰 전공을 세우려고 적도를 공략했다가 대패를 당했소. 그 결과는 수륙양면 작전마저 어렵게 되었소."
장수들이 그 말에 동의를 하자 우중문도 더는 우길 수가 없었다.
"폐하께선 꺼우리 국상이 항복할 기미를 보이지 않을 땐 내게 구금시키란 명령을 내리셨소. 일단 구금을 시킨 뒤 항복을 족칩시다."
그러자 유사룡이 반대하는 입장을 표명했다.
"황제는 사해의 만민을 교화할 책무를 지니셨습니다. 그런데 중원의 대문명국이 오랑캐들이나 하는 짓거릴 따라서 할 수는 없습니다. 그랬다간 만천하에 폐하의 위엄이 깎이시게 됩니다. 폐하께서 사리에 맞지 않으실 일을 하실 땐 막는 게 신하들의 책무이며 올바른 섬김입니다."
설세웅도 그 말을 거들었다.
"그렇소. 폐하께서도 내심 회담의 결렬을 원치 않으실 것입니다. 그런데 회담을 진행하던 중에 잡아 둔다면 어찌 협상이 되겠습니까?"
우중문도 모든 장수들이 상황이 악화되는 것 원치 않는데 자신만 의를 무시하기에 부담감을 느껴야 했다. 그런데 우문술이 협상을 주장했다.
"나도 대국이 이적과 같은 짓거리를 해선 안 된다는 생각이요. 을지문덕을 잡아두면 고구려 병사들의 반감만 격화시키게 되어 우린 더욱 곤경에 처하게 만들게 되오. 들어가서 협상을 계속해 나가기로 합시다."
우문술은 말하고 앞장을 서 장막 안으로 들어갔다. 우중문을 비롯한 장군들도 따라 들어가서 자리에 착석을 했고 우문술이 입을 열었다.
"오늘은 양국의 요구 사항을 교환하는 자리로 그치기로 하겠소. 양국이 각기 제시한 요구 사항을 검토할 시간이 필요하오. 닷새 뒤에 다시 만나서 답을 주고받기로 하겠소. 고구려 국상은 어떻게 생각하오?"
"나는 기꺼이 받아들이겠소."
"좋소, 이젠 양국 간에 원만한 타협이 이뤄질 일만 남았소. 나는 지금부터 고구려 국상의 노고를 위로하는 소연을 베풀고자 하오."
우문술의 말을 을지문덕은 정중하게 사양했다.
"상장군의 호의는 매우 고맙게 여기오. 그러나 그런 자리는 강화 협상이 성사된 뒤에 하는 게 좋겠소. 나는 오늘의 회담 결과를 아국의 대왕 폐하께 보고하는 일이 급해서 이만 떠나야 하겠소."
을지문덕은 말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자 우중문은 좀 당황하듯 무슨 말을 더 하려는데 우문술이 눈짓으로 제지를 시켰다. 장막을 나선 을지문덕은 말에 오른 뒤 명령을 내렸다.
"출발."
고구려 기병들은 빠르게 말을 몰아 수군 진지를 벗어났다.
수국 군 장수들은 몸들이 비대해 느린 걸음으로 장막을 나왔다. 그리고 이미 까마득한 전방에서 분진을 일으키며 달리는 을지문덕을 바라보는데 우중문은 갑자기 아차 싶은 생각에 입을 열었다.
"좌익위 대감, 우린 아무래도 낭패를 본 것 같소."
"우익위 대감, 무슨 낭패를 봤다는 말이오?"
"아무래도 우린 을지문덕에게 속은 것 같소."
"속다니?"
"꺼우리 국상의 태도로 봐선 굴복할 빛은 전혀 찾아볼 수가 없었소. 그 자는 강화를 목적으로 온 게 아니고 우리 진지를 정탐하려고 왔을 뿐이요. 나는 급히 추격 병력을 내어 다시 잡아들여야 하겠소."
"우익위 대감, 말도 안 되는 소리는 그만하시오."
"좌익위 대감, 나는 그 자를 끌어다가 좀 더 알아볼 게 있소."
우문술이 막으려고 했지만 우중문은 명령을 내렸다.
"위장군, 당장 기병을 끌고 추격하오. 을지문덕에게 좀 더 나눌 얘기가 있다며 강제로라도 끌고 와야 하오. 만약에 오지 않으려고 들면 그 자리에서 사살해도 좋소."
장군 위문승(衛文昇)은 즉시 1천여 기병을 끌고 출동했다. 그리고 허겁지겁 따라 가서 압록수에 이르렀다. 고구려 기병들은 아직 강변에 머물고 있으나 을지문덕은 배에 올라 강을 반쯤 건너고 있었다.
위문승은 강상을 향해 큰 소리로 외쳤다.
"고구려 국상, 멈추시오."
을지문덕은 배 위에서 마주 외쳤다.
"무슨 일로 그러는가?"
"나눌 얘기가 더 있으니 돌아오시오."
"더 나눌 얘기가 뭔지 모르나 닷새 뒤에 다시 만나면 되오."
을지문덕은 그런 대답을 던지고 선실 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배는 이미 강 건너 편 강변에 가까워져 갔다. 닭 쫓던 개꼴이 된 위문승은 어쩔 수 없이 진지로 되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우중문은 그냥 돌아온 위문승의 보고를 받고 분통이 치밀어 어쩔 줄을 몰라 했다. 화를 참을 수가 없어 탁자를 내리치며 소리를 질렀다.
"좌익위 대감, 이번 일의 모든 책임을 지시오."
우문술은 자신에게 분풀이를 하는 우중문을 갖잖게 봤다.
"우익위 대감, 나보고 무슨 책임을 지라는 말이요?"
"꺼우리 국상이 도망을 치게 만든 책임이요."
우중문이 버럭 소릴 질렀지만 우문술은 태연스럽게 대꾸했다.
"우익위 대감, 그만 진정하고 하회를 기다려 봅시다."
우문술의 비꼬는 태도에 우중문은 얼굴이 더욱 시뻘게졌다.
"좌익위 대감, 이 지경에 내가 어찌 진정을 할 수가 있겠소? 그러는 대감은 혹시 꺼우리 편이 아닌지 모르겠소."
우문술도 모멸감을 참지 못해 마주 소리를 질렀다.
"우익위 대감, 건방진 입을 그만 다물지 못하겠는가?"
"좌익위 대감, 어따 대고 반말이오?"
"나도 그대의 건방진 태도를 이젠 더는 두고 볼 수가 없다."
우문술은 말하고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러면서 속으로 황제를 원망하게 되었다. 전쟁을 수행하는 데 있어 총지휘권을 한 사람에게 맡겨야지 그러질 않고 좌우 둘로 나누었기 때문이다.
"좌익위 대감, 꺼우리 국상에게 속은 게 원통하지도 않소?"
우중문의 질문에 우문술도 걱정이 없진 않으나 대답했다.
"내가 을지문덕에게 속았는지는 더 두고 봐야 할 일이요."
"그럼에도 하회를 기다리는 건 너무도 어리석은 짓이요."
"우중문, 그만 좀 지껄여라."
우문술이 호통을 치자 우중문은 한 마디를 더했다.
"좌익위 대감, 그렇게 당하기만 해선 앞날이 암담해질 것이요."
"우문중, 내 걱정은 말아라. 설사 내가 속았다고 한들 걱정할 게 뭐냐? 그렇게 되면 내가 앞장을 서 고구려 장안성을 박살내주겠다."
"좌익위 대감! 어디가 장안성이란 말이오?"
"우중문, 내 말이 어딘지를 몰라서 묻는가?"
"꺼우리의 국도는 평양이요. 오랑캐의 국도를 어디라고 대국과 동급의 호칭을 쓸 수가 있단 밀이요? 무식하긴!"
수국의 국도는 대흥(大興)이나 그걸 높인 호칭으로 장안이라고도 했다. 때문에 고구려의 국도를 평양성(平壤城)으로 불렀다.
우문술도 더 이상은 참을 수가 없었다.
"우문중, 그 아가리 좀 닥치지 못하겠는가? 그까짓 없어질 적도가 장안성이면 어떻고 평양성이면 어떻단 말인가? 네가 남의 속을 이리도 뒤집어 놓고 무사할 것으로 생각을 하는가?"
우중문은 계속 깐족대기만 한 게 미안했던지 몸을 돌려 장막에서 나가버렸다. 우문술은 분이 풀리지 않아 씨근덕대며 내뱉었다.
"방자한 놈, 언제고 두고 보자!"
을지문덕은 수국 진지 방문 결과를 보고하러 궁궐로 들어갔다. 그 자리엔 관심이 큰 건무도 배석하고 있었다.
"폐하, 수국의 항복 조건은 세 가지나 됩니다. 첫째는 폐하의 입조이고, 둘째는 왕실 자제를 볼모로 보낼 것이며, 셋째는 요동 땅을 넘기라는 요구입니다."
"말도 안 될 소리로다."
국왕은 단 한 가지도 받아들일 수가 없는 조건이라 격분할 뿐이었다. 그러나 속은 타들어가는 심경인데 건무가 입을 열었다.
"폐하, 이번 전쟁은 아국이 감당할 도를 넘게 되었습니다."
"짐도 알고 있다."
국왕은 겉으론 결연한 태도를 보였지만 속은 절망적이었다. 국도를 치려는 수국 군의 압록수 도하 작전이 임박한 가운데 협상이 잘 되기만 바랐다. 그러나 복속은 모르나 항복을 전제로 하는 협상은 원치 않았다.
"살려면 죽고 죽으려면 산다는 말도 있다."
국왕의 말을 듣고 건무가 을지문덕에게 물었다.
"국상은 화평엔 뜻이 없음에도 적진을 방문한 이유는 무엇이요?"
"저하께서도 아시지 않습니까? 제게 수국 진지에 들어가 항전과 화평 양쪽에 대한 가능성을 타진해 볼 필요성이 있다고 하셨지 않습니까?"
건무는 그 말에 대답할 말이 없었다. 다만 강화 쪽에 역점을 두고 있는 자신은 을지문덕이 상황을 악화시킬 결과를 초래하지 않았을까 하는 의문이 들어 마음이 불편했다.
"저하, 저도 무조건 강화를 반대하지 않고 성공을 바랍니다. 그러나 이번 기회에 적정을 살펴서 강화든 항전이든 유리한 쪽을 택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상대를 해보니 항복을 해도 소용이 없겠다는 생각입니다."
"국상, 왜 항복을 해도 소용없다는 생각을 하오?"
"양광은 우리가 항복을 하건 항전을 하건 간에 고구려를 멸망시키려고 합니다. 더욱이 지금 요동 땅을 점령한 것이나 다름없는 형편이라 우린 총력을 기울여 한번 무찔러나 보고 끝을 내도 낼 일입니다."
"국상은 진정으로 적을 쫓아낼 수가 있다고 생각하오?"
국왕은 그런 두 사람 사이의 설전이 계속될 것 같아 두 손을 내저었다. 이젠 강화파인 건무와 항전파인 을지문덕 사이에서 자신은 확실하게 한 쪽을 택할 태도를 보이기로 했다.
건무는 국왕이 손만 내젓고 말이 없자 을지문덕에 또 물었다.
"국상, 내호아 함선들 중 절반이 서한만을 떠난 걸 알고나 있소?"
"압니다. 직공군의 압록수 도강 작전을 수행을 도울 것입니다."
"국상, 압록수를 도강할 수국 병력은 30만이 넘는 걸로 알려졌소. 그런데 국상은 국내성의 전선 지휘소를 묘향산으로 옮겼소. 그 일보다 먼저 적의 압록수 도하를 막는 작전을 펴는 게 급선무가 아니겠소?"
"저하, 본인은 나름대로 내린 판단에 의한 일입니다."
"국상은 대체 어떤 판단을 내렸단 말이요?"
"요동 지역은 매우 넓고 아국의 병력은 터무니없게 적습니다. 다행히 적은 모두 성벽을 포위만하고 공격을 하지 않아서 버티는 것입니다. 따라서 요동의 병력 중 일부를 압록 이남으로 끌어내려 대회전에 투입시키면 승산이 있다는 판단입니다. 저하께서도 적을 압록수 이남으로 유인을 해서 대회전을 치르는 게 유리함에 동조를 하셨지 않습니까?"
국왕은 그 말을 듣고 금시초문이란 표정인데 건무는 반발하듯 물었다.
"여타 부의 병력 지원이 얼마나 된다고 대회전이 가능하겠소?"
"저하, 여타 부는 모두가 병력 차출에 동의를 해서 2만을 돌리게 되었습니다. 계루부 병력 8만과 모두를 합치면 10만이 넘고 압록수 이남의 험한 지형을 잘 이용하면 해볼 만하다는 생각입니다."
을지문덕의 대꾸에 건무는 뜻밖의 말을 꺼냈다.
"나는 계루부 병력을 장안성 방어에만 투입시킬 생각이요. 그러므로 국상은 여타 부의 병력만 가지고 적과 대회전을 치러 주시오."
국왕은 을지문덕을 바라보며 위로를 하듯 말했다.
"그동안 국상이 관할해온 요동 땅은 한 군데도 성이 함락되지 않았소. 그것만으로도 짐에겐 큰 위안이 되오. 강화는 물 건너가면 남은 길은 항전밖에 없소. 짐은 국상의 역량에 큰 기대를 걸 뿐이요."
국왕이 항전할 뜻을 완전히 굳히자 을지문덕이 대답했다.
"폐하, 양광은 다른 속셈을 품고 있습니다. 요동 땅을 대부분 점령한 상태로 만들어 놓았기 때문에 앞으론 점령 상태를 장기간 유지시켜 나가면서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소기의 목적이란 무엇인가?"
"양광은 대 병력으로 요동 땅을 깔고 앉아만 있어도 자국 영토로 변하게 되고 자국의 백성을 대거 이주시켜 완전히 굳히겠다는 속셈입니다."
국왕은 그 말에 비로소 이해가 되는 듯 중얼거렸다.
"국상의 말대로라면 짐은 기필코 내쫓는 결판을 지어야 하겠다."
"폐하, 신이 입수한 정보 중엔 양광은 올 가을까지 장안성을 함락시키지 못할 경우 요동 땅에 절반의 병력을 둔전병으로 남기고 일단 회군할 계획이라고 합니다. 둔전병은 내년 봄부터 농사를 짓기 시작하고 본국에서 가족들을 이주시키게 되면 영구적인 영토가 되고 아국의 백성들도 자연적으로 수국 백성으로 흡수하게 될 것을 노리고 있습니다."
"양광이 그런 속셈까지 품고 있다면 아주 영악한 자로다!"
"양광은 벌써 요동 땅에서 임금 노릇까지 하고 있습니다. 제나라에선 하지도 않던 짓거리까지 하면서 아국 백성을 회유하고 있습니다."
"양광이 무슨 짓거릴 한단 말인가?"
"양광은 예하 장졸들에게 약탈을 금하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그리고 아국 백성들에겐 안심하고 나와 농사를 지으면 3년간 조세를 걷지 않겠다는 소문을 퍼뜨려 벌서 들에 메밀 씨를 뿌리는 농민들이 많습니다."
국왕은 한숨만 흘려낼 뿐 더할 말이 없는데 건무가 입을 열었다.
"폐하, 양광은 장안성 직공 부대를 정예 병력으로 편성할 것입니다. 때문에 신은 대회전이 가능할지 모르겠다는 걱정이 너무도 큽니다."
국왕은 그 말에 단호한 대답을 했다.
"싸워라. 짐은 국상에게 일시 군국기무를 맡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