쇠나라 31. 풍전등화

31. 풍전등화

by 정완기

31. 풍전등화(風前燈火)


수국 군은 닷새 뒤 온다던 을지문덕이 며칠을 넘기고도 감감무소식이자 속았음을 알게 되었다. 우중문은 즉각 그 사실을 황제에게 보고했다. 황제는 노발대발로 분을 참지 못해 우문술의 총지휘권을 빼앗아 우중문에게 넘기고 명령을 내렸다.

"평양성 직공군은 우중문이 총지휘한다. 무조건 평양성으로 진격하라. 짐의 명령을 따르지 않는 자는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목을 치겠다. 짐은 압록수로 가서 그걸 지켜보겠다."

황제의 명령이 떨어지자 수구 군 진지는 아연 긴장했다. 장수들은 황제가 압록수로 절대 오지 않을 걸로 보나 그렇다고 진군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우중문은 지체 없이 전 군에 발진 명령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조재(趙才)와 어구난(魚俱難)의 함선 1백 척을 동원해 압록수 도강에 들어갔다. 그런데 고구려군이 막지를 않아 무사히 건널 수가 있었다.

고구려의 운명은 이제 바람 앞에 등불이 되었다.

건무는 5만 병력으로 장안성 방어만을 맡고자 입성을 했다. 국왕은 수국 군 중 정규 병력이 압록수를 건넜다는 보고를 받고 이젠 국가의 운명이 을지문덕에게 달렸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짐은 국상만 믿을 뿐이다."

"폐하, 적은 식량 사정이 매우 악화된 걸로 알려졌습니다. 그런데 서한만의 내호아 선단엔 많은 양곡이 실려져 있습니다. 우선 압록수를 도강한 적이 그걸 먹지 못하게 만들어야 하겠습니다."

건무는 그건 자신이 이미 실패한 작전이었는데 을지문덕이 또 거론을 하자 자존심이 좀 상했다. 그러나 성공을 거두길 바랄 수밖에 없고 을지문덕은 왕궁을 나서 묘향산으로 향했다.

이때 새달궁의 집사가 을지문덕을 따라나섰다. 그는 동화부인의 명을 받고 묘향산에 있는 연개소문에게 주랑을 장안성으로 급히 데려올 것을 명령받고 동행을 한 것이었다.

을지문덕은 속으로 잘 되었다는 생각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주랑이 위험한 전쟁터에서 데리고 다닌다는 건 여간 큰 부담이 아니었다. 도착하자 즉시 불러다 놓고 말했다.

"주랑아! 그만 집사를 따라 장안성으로 떠나거라."

"합하, 소녀보고 왜 장안성으로 가라는 말씀인가요?"

"동화부인께서 무슨 일이 있어서 급히 돌아오라는 명을 내리셨다."

"동화부인께서 왜 그러실까요?"

"여기가 너무 위험해서 그러실 것으로 생각된다."

"합하, 소저는 남정네들 못지않게 제 앞가림을 할 수가 있습니다. 위험은 하지만 그대로 합하 곁에 있겠습니다."

주랑이 버티는 뜻을 드러내자 집사가 말했다.

"동화부인께선 무슨 상의를 하고 맡길 일도 있다고 하셨소."

주랑은 동화부인이 무슨 상의를 하자는 것인지는 모르나 고갤 저었다. 그러자 을지문덕의 입에서 뜻밖의 말이 나왔다.

"나는 전황이 호전되는 대로 호위 선인과 함께 수국으로 떠나게 해 주겠다. 호위 선인도 내일 서한만으로 가게 되었으므로 함께 들 떠나라."

연개소문이 물었다.

"합하, 호위 선인은 무슨 일로 서한만에 가게 됩니까?"

"서한만에서 을불이 펼칠 작전을 돕게 하련다."

을지문덕은 양신이 들어오자 두툼한 봉서를 내밀었다.

"내일 일찍 서한만으로 떠나게. 이걸 을불에게 전하라."

이튿날 새벽녘에 주랑은 명을 거역할 수가 없어 길을 떠났다. 하루 종일 말을 몰아 해 질 녘에 장안성이 가까워졌다. 거기서 일행은 헤어졌다. 양신은 서한만으로 두 사람은 장안성으로 향하는 작별을 했다.

"연선인, 주랑과 장안성에 들어가서 잘들 지내게."

"오라버니, 저는 여선 언니를 찾아뵙고 안부를 전할게요."

연개소문은 양신에게 말했다.

"주랑 누님은 내가 잘 보살필 것이니 형은 큰 공을 세워주시오."

전선에서 함께 고락을 나눴던 세 사람은 헤어짐에 아쉬움이 컸다. 양신은 혼자서 말머리를 돌려 서한만으로 나갔다. 해안이 가까워지자 적군을 경계하며 한 밤중에야 염청에 당도했다.

을불은 반갑게 양신을 맞았다.

"호위선인, 그렇지 않아도 합하의 지시를 기다고 있던 참일세."

"염좌님, 내호아 군이 압록수로 이동해 간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아닐세. 내호아는 떠났다가 다시 돌아왔네. 주력이 압록수 도하를 마치면 합류를 하려고 돌아왔네. 적과 우린 서로가 개 닭 보듯 지내고 있을 뿐이고 충돌은 없네."

"적과 대치 중에 전투가 없다니 참으로 이상한 전쟁입니다."

"건무 저하에게 큰 타격을 받은 뒤론 대체로 얌전한 편일세."

을불은 봉서를 뜯어본 뒤 무릎을 탁 쳤다.

"역시, 합하께선 생각이 남다르시군!"

양신은 희색이 만면해진 을불에게 물었다.

"염좌님, 어떤 지시를 받으셨기에 그러십니까?"

"새로 양곡을 싣고 온 수국 선단이 해안에 정박 중일세. 합하께선 적의 수송선들을 침몰시킬 방도를 알려 주셨네. 적선들을 공격할 배를 만드는 설계도를 그려 보내셨네. 곧 제작에 들어가야 하겠네."

"어떤 설계도입니까?"

을불이 내민 설계도엔 전마선 2척을 포개 놓은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전마선 한 척은 바닥으로 삼고 또 한 척은 뒤집어 포개면 지붕을 씌운 모양이 되었다.

"염좌님, 이런 괴상한 배를 무엇에 씁니까?"

"설계도처럼 만든 배들을 타고 야간에 우리 수부들이 타고 몰래 접근해서 적함들의 양쪽 뱃구레에 붙어 구멍을 뚫는 공격을 가는 것일세."

"염좌님, 뭘로 구멍을 뚫는다는 말씀입니까?"

"도끼로 찍어내면 구멍을 뚫기는 간단한 일일세."

"도끼질을 하면 적병들이 가만히 있을 리가 없잖습니까?"

"적병들은 위에서 활을 쏘거나 불더미를 쏟아 내려고 하겠지. 그러나 우린 지붕을 덮은 배라서 들어앉아 끄덕 없이 구멍을 뚫을 수가 있네."

"적함들이 닻을 거두고 도망을 치면 그만이 아닙니까?"

"그럴 수도 있으므로 되도록이면 빨리 구멍을 뚫어야 하네."

"염좌님. 괴상한 배를 빨리 만들고 봐야 하겠습니다."

"내일 당장 착수할 생각일세."

이튿날 을불은 수부들에게 설계도를 내놓고 작업을 시작했다. 20척의 전마선을 가지고 쉽게 괴상한 배 10척을 만들어놓았다. 그날 밤에 1백여 명의 수부들은 괴상한 배들을 나눠 타고 밤바다로 나갔다.

괴상한 배들은 정박 중인 수국 함선들 옆구리에 소리 없이 달라붙었다. 수국 함선들은 뱃전에 등불을 달아 놓고 경계를 했지만 괴상한 배들이 들러붙을 것은 상상조차 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뱃전에서 도끼질 소리가 나자 수국 함대의 보초병들은 놀라서 비상을 걸었다. 잠을 깬 병사들도 뛰쳐나와 밑을 내려다보니 괴상한 배들이 뱃구레에 들러붙어 구멍을 뚫고 있었다. 기상천외한 공격을 받게 되자 여간 황당하지 않았다. 배 위에서 밑으로 활을 쏴 공격을 가했지만 지붕을 덮은 배들이라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수국 병사들은 뱃전에서 도끼질을 당하자 배안에서 구멍을 막으려고 했다. 그러나 배 밑창에 잔뜩 쌓여 있는 양곡 섬을 들어낼 수가 없어 우왕좌왕할 뿐이었다. 그러는 사이에 뚫어진 뱃구레로 바닷물이 쏟아져 들면서 배들은 서서히 가라앉게 될 판이었다.

때마침 사리 때라서 파도마저 매우 거칠어서 함선들은 좌우로 심하게 흔들렸고 물은 더욱 쏟아져 들었다. 수국 병사들은 속수무책으로 어쩔 줄을 모른 체 발만 동동 굴렀다. 그대로 있다간 갈아 앉는 배와 함께 바닷속으로 빨려 들게 되었다. 겁이 난 병사들은 함선들이 침몰해 들기 전에 바다로 뛰어들었고 성한 배들은 닻을 풀고 바다로 도망을 쳤다.

양신은 이튿날 을지문덕에게 그 결과를 보고하러 떠났다.

수국의 장안성 직공군(直攻軍)은 보병 20만, 기병 5만을 주축으로 공성 장비를 맡은 공병(工兵)과 해포에 상륙해 있는 내호아 군 3만도 합세를 해서 30만이 넘었다.

압록수에서 고구려 국도까진 6백 여기에 불과했다. 우중문은 고구려 군의 저항을 고려해 하루에 60 리씩 신중하게 진군했다. 그리고 전군은 한 덩어리를 이룬 채 진군을 했다.

고구려 군은 유목민 지원 병력들이 소리 없이 떠나서 여타 부 병력 2만과 계루부 군 2만으로 방어에 임했다. 병력은 적으나마 요소마다 수국 군을 막을 일곱 군데다 방어선을 쳤다.

1, 2차 방어선은 북부 우태 전내(佃乃)가 총지휘를 맡았다. 소형 사우(乍于)는 기병 3천으로 천마산(天摩山) 산성의 계루부 보병 1천과 함께 압록수 남쪽의 고진천(古津川)을 지켰다. 소형 궁흘(弓屹)도 기병 2천으로 미라산(弥羅山)에 진을 치고 연계 작전을 펴기로 했다.

3, 4차 방어선은 동부의 우태 불황이 총지휘를 맡았다. 소형 조우지(俎于支)는 기병 2천으로 좌현(左峴)에 포진했고, 소형 낭야는 보병 3 천으로 임해(壬海)를 지켰다. 그리고 늙은이와 부녀자들까지 동원해서 적이 협곡을 지날 때 밑으로 돌을 굴리는 일을 마꼈다.

5, 6차 방어선은 남부 우태 길삼이 총지휘를 했다. 거기선 수국 선단의 해안 상륙작전도 대비하게 했다. 소형 가리(伽俚)는 기병 2천으로 이천야(二千野) 평야에 포진했고 소형 막연(寞嚥)은 보병 1천으로 칠악산(七岳山) 자락을 지키게 했다.

마지막 7차 방어선은 살수 이남의 도회령(都會岺)에 쳤다. 그곳엔 을지문덕의 지휘소가 있고 연합 부대 1만여 병력이 있었다. 북부 상가 하온장이 연합 부대를 이끌게 되었다.

계루부의 대형 고두우는 도회령의 배후인 오도산(悟道山)에 병력을 포진시켰다. 소형 응백라(凝伯喇), 두라문(兜喇們), 을불리(乙弗俚)는 각자 병력 2천씩을 끌고 대회전에 합류하게 되었다.

그 무렵 살수 중류의 물막이 공사도 끝이 났다. 강의 양안에 고정을 시킨 굵은 쇠사슬로 강을 가로질러 놓고 그것을 의지해 통나무들로 벽을 친 뒤 잎이 무성한 나뭇가지로 틈을 막고 물을 가두었다.

남쪽으로 진군해 가는 수국 군은 10열 종대를 이룬 채 근 10여 리에 뻗쳤다. 전체가 한 덩어리를 이룬 것도 모자라 안전을 도모하고자 해안을 끼고 진군을 했다. 그러나 장졸들은 적의 심장부 깊숙이 들어가는 것을 꺼림칙하게 여겨 발걸음이 무겁기만 했다.

고구려 기병들은 한 덩어리로 진군하는 수국 군에 매일 유격전을 펼쳤다. 그러나 소규모 부대로 외각에서 화살 공격을 가하는데 그치는 수준이라 별 타격을 입히지 못한 채 계속 밀리는 형세였다.

우중문은 자신의 작전이 먹혀든다는 판단에 평양성에 당도하기까진 적의 공세에 반격을 못하게 했다. 워낙에 많은 병력이 한 덩어리로 뭉친 채 진군을 해서 별 피해를 입지 않았다. 그러나 30만 대병이 한 덩어리를 유지하며 진군을 하자니 속도를 낼 수가 없었다. 특히 산들을 만나면 복병의 기습을 두려워해 장졸들은 잔뜩 움츠러들기만 했다.

우중문은 그런 장졸들을 연신 격려를 해야만 했다.

"장졸들은 걱정 말고 진군하라. 바다에선 우리 함선들이 따라오고 있지 않은가? 만약에 위태한 사태를 맞게 되면 언제라도 함선에 옮겨 타고 육지를 벗어나 고향으로 돌아갈 수가 있다."

우중문의 말대로 아닌 게 아니라 바다엔 각종 보급품을 실은 함선들이 따라오고 있었다. 그런데 압록수를 도강하자마자 비보를 접하게 되었다. 본국에서 새로 온 양곡선단이 큰 타격을 받은 소식이었다.

우중문은 불안해하는 병사들을 안심시키려고 들었다.

"장졸들은 걱정하지 말라. 본국에서 양곡을 실은 다른 선단이 또 오고 있다. 소규모의 꺼우리 기병대는 하등 두려울 게 없다. 우린 매일처럼 기습을 받지만 잘 끄떡없게 버텨왔지 않는가? 앞으로 평양성은 불과 2백 리에 지나지 않다. 진군 속도를 높이자!"

수국 군은 이럭저럭 고진천에 이르렀다. 1차 방어선을 맡고 있던 소형 사우는 어마어마한 대병력 앞에 입이 딱 벌어졌다. 물이 얕은 강을 그대로 건너오는 적을 공격할 엄두조차 못 낼 지경이었다.

고구려 군은 거대한 덩어리를 이룬 채 전진하는 수국 군을 뚫을 데가 없어서 외각에서 화살 공격을 하는 게 고작이었다. 사우는 병력을 끌고 적의 측면을 돌아서 후미로 접근했다.

우중문은 고구려 군의 빈약한 공세를 비웃기만 했다.

"꺼우리들은 병력이 너무 적어서 정면 공격은 엄두도 못 낸다. 지금처럼 한 덩어리로 뭉쳐서 당도하면 평양성은 하루아침에 손에 넣는다."

수국 군 보병은 거침없이 고진천을 건넜지만 무거운 공성기(攻城器)를 끄는 공병(工兵)들은 뒤로 처지게 되었다. 사우는 그걸 노렸고 고구려 기병들이 들이쳤다. 급습을 당한 수국 공병들은 본진과 멀리 떨어진 데다 막을 길이 없어 공성기를 내버린 채 앞으로 치달아 뛰었다.

우문술은 공성기를 잃은 보고를 받자 낙담이 너무도 컸다.

"우익위 대감, 평양성을 공격하자면 무엇보다 공성기가 필요한데 그걸 다 잃었으니 장차 뭘로 성을 공격해야 한단 말이요?"

"좌익위 대감, 평양성을 지키는 병력은 실제로 5만도 못 되는 걸로 알려졌소. 우리 병력은 여섯 배나 넘소. 병사들이 평양성의 성벽 돌멩이를 한 개 씩만 뽑아내어도 무너뜨릴 수가 있소."

"하긴 겁쟁이 꺼우리 군은 스스로 성문을 열고 항복할지도 모르겠소."

두 사람은 말도 안 될 소릴 나누고 쑥스러운 듯 웃었다. 그러나 허세를 부리는 대화를 나누면서도 속은 불안하기만 했다.

우중문은 공성기를 잃은 분풀이로 앞으로 눈에 띄는 대로 마을들을 전부 불태우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 같은 만행을 저지르면서도 전 병력은 안전을 위해 해안선을 끼고 진군을 계속했다.

고구려 군은 그 때문에 육지 쪽과 후미에서만 공격을 가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런 공격은 화살 손실만 클 뿐 별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수국 군의 진군 속도만 빠르게 만들었다.

우중문은 진군을 독려하면서 흰소리를 쳤다.

"꺼우리 놈들은 공격을 하는 시늉만 내다 도망칠 뿐 별 것도 아닌 것들이다. 접시만 한 산성에 숨어들 것인데 쫓아가 성을 파헤쳐 버릴까?"

우문술은 추격 군을 내려고 하는 우중문을 말렸다.

"우익위 대감, 그냥 무시하고 지나칩시다. 작은 산성 따위를 일일이 손을 보려고 들다간 어느 세월에 적도에 닿겠소?"

"하긴 그렇겠소. 좌익이 대감 말씀대로 그냥 갑시다."

병사들은 그런 말을 전해 듣고 속으로 비웃었다. 요동 땅에선 매일처럼 고구려 군의 기습공격에 쩔쩔매며 반격도 못했는데 그걸 어느새 잊고 허세를 부리는 게 가소롭기까지 했다.

아무튼 간에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는 위기의식 속에 진군을 계속했다. 그러면서 한편으론 자국 선단이 따라오는 바다 쪽에 시선을 두고 선단이 보이지 않게 되면 불안해했다.

고구려 군도 적의 공성기를 파괴했을 뿐 별 전과를 거두지 못한 채 1차 방어선만 뚫렸다. 사우의 병력은 2차 방어선인 미라산으로 이동해서 전내의 병력과 합쳐 다시 대비로 들어갔다.

수국 군의 선봉인 형원항은 미라산 자락으로 접근해 들었다. 그곳을 지키고 있던 전내는 과감하게 돌격 명령을 내렸다. 고구려 기병들은 활을 쏘며 적에 질풍처럼 정면 돌파까지 시도했다.

형원항 군은 전에 없이 과감한 공격을 받고 움츠러들었다. 그동안 전열을 흐트러뜨리지 않고 뭉치는 데만 익숙했던 병력들이라 백병전은 엄두도 못 내었다. 병사들은 그저 방패를 뒤집어쓴 채 해안 쪽으로만 도망을 쳤다. 후미에 있던 위승문 부대는 전체가 산속으로 숨어들었다.

전내의 기병들은 모처럼 승기를 잡자 수국 군 본진에 대한 공격도 과감하게 펼쳤다. 수국 병사들은 파고드는 고구려 군의 공격 앞에 뭉치려들던 태도가 무너지고 이탈을 해서 덩어리는 걷잡을 수 없게 깨졌다.

수국 장수들은 도망치는 병사들을 막고자 악을 썼다. 그러나 한번 흩어진 이상 돌이킬 수 없고 악화 상태로 치달았다. 끝내는 장수들도 도망치는 병사들 틈에 끼어들고 말았다.

전부 흩어진 수국 병력은 거의가 해안가로 몰려들었다. 어떤 자는 아예 바닷물에 몸을 담그고 있기까지 했다. 형원항도 해안가에 이르러보니 우문술과 우중문이 먼저 와 있었다.

"형장군, 교전을 치른 무슨 성과가 있었소?"

우문술의 질문에 혼쭐이 났던 형원항은 호기롭게 대꾸했다.

"꺼우리 군이 앞을 가로막을 때마다 전부 섬멸시켰습니다."

우중문은 형원항이 당한 걸 알고 있었는데 천연덕스럽게 거짓말을 하자 화를 내기보다 실소를 금치 못했다. 우문술도 속으로 거짓말을 잘도 한다는 생각을 하면서 입을 열었다.

"형장군의 병력이 많이 준 걸 보니 전투가 격렬했던 모양이군?"

"오래간만에 전투다운 전투를 벌이고 보면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그때 역시 도망을 쳤다 돌아온 위승문이 한 술을 더 뜨는 말을 했다.

"상장군들께서 여기까지 무사히 오실 수가 있게 된 게 누구 덕인지 아십니까? 형장군과 소장이 길을 터놓은 덕분임을 아셔야 합니다. 병력이 준 것은 병사들이 길을 잃고 미처 본대를 찾아오지 못해 그렇습니다."

우문술도 형원항을 감싸주는 태도를 보였다.

"형장군은 선봉에 서서 노고가 매우 컸소. 오늘은 여기서 행군을 멈추고 야영을 하면서 전열을 가다듬는 게 좋겠소."

우중문은 그 말을 듣고 심기가 불편해서 동의하려고 하지 않았다.

"좌익위 대감, 해가 질려면 아직도 먼데 야영은 이르오. 황제 폐하와 대국의 체면을 세우기 위해서라도 하루속히 평양성을 함락시키지 않으면 안 되오. 나는 야간 행군이라도 하고 싶을 정도로 마음이 급하오."

우문술도 고개를 끄덕여 동의를 할 수밖에 없었다. 되도록이면 충돌을 피하고 평양성 공격에 전력투구를 하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었다.

"우익위 대감의 말씀대로 진군 속도를 높이기로 합시다."

두 사람은 압록수 도강 이후론 전과 다르게 죽이 맞는 편이었다. 그런 변화는 위기의식이 커진 만큼 자연히 대립은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서로가 협력하고 의지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가 없기 때문이었다.

고구려 군은 1, 2차 방어전이 뚫려 사우와 궁흘은 후퇴한 뒤 을지문덕의 지시대로 도회령으로 향했다. 남쪽으로 가던 중에 좌현(左峴)에 있는 3차 방어선에 들려서 적의 공성기를 파괴한 전과를 자랑했다.

동부 소형 조우지는 그 말을 듣고 크게 자극을 받았다. 자신도 적에 큰 타격을 가해서 전공을 세우고 싶었다. 그런데 막상 어마어마한 대병을 맞게 되자 두려움이 일었다. 무모한 공격을 하는 건 자살행위나 다름없다는 판단에 화살 공격만 하다가 임해 쪽으로 후퇴했다.

임해는 고구려 군의 4차 방어선을 친 이천야 평야를 배경으로 바다에 면한 큰 대처(大處)였다. 그곳을 맡고 있는 불황은 후퇴해 온 조우지의 보고를 받자 자신은 적에 본때를 한번 보여주기로 했다.

해가 질 무렵 수국 군은 임해로 밀려들었다. 우중문은 가옥들이 가득 찬 대처를 보고 병사들에게 또 불을 지르게 명령했다. 전군은 가옥들이 불타는 불빛 속에서 야영에 들어갔다.

불황은 수국 군에 의해 임해가 불타는 걸 보며 이를 갈았다.

"오늘 밤 놈들에게 불보다 더 뜨거운 맛을 보여주겠다."

밤이 깊어지길 기다렸던 불황은 조우지와 냥야의 기병 5천을 자신이 직접 지휘하며 적의 숙영지로 접근해 갔다. 이때 수국 군 본진은 압록수 도강 이후로 이렇다 할 고구려 군의 공격을 받은 적이 없어서 방심 속에 행군에 지친 몸으로 잠자리에 들었다.

불황의 공격 명령이 떨어지고 동부 기병들은 적진의 중심부로 돌진해 들어갔다. 그리고 수국 병사들을 무방비 상태 속에 잠을 자다가 무참히 살육을 당하는 사태를 빚고 말았다.

수국 군 본진은 불시에 여지없이 짓밟혀 수천여 명의 사상자가 나는 야습을 당하고 얼이 빠진 채 아침을 맞았다. 우중문은 비상 대책회의를 열었고 장수들은 분노와 적개심에 전의를 불태우는 분위기가 되었다.

장수들은 호대한 병력이 소수의 고구려 군에 번번이 당할 수만은 없다는 반성들이 일었다. 모두는 이러다간 살아 고향으로 돌아갈 수가 없다는 위기의식만 팽배해지게 되었다.

때문에 장수들만이 아닌 병사들도 두려움 속에 분개했다. 지금까진 고구려 군에 대한 적개심이 그리 크진 않았으나 동료들이 무참히 떼죽음을 당하고 나자 달라졌다. 소극적인 대처로 개죽음을 당하기보다 한번 싸워나 보고 죽자는 심리로 스스로 자구책을 찾게 되었다.

"우리도 고기 값이라도 하고 죽어야 하겠다."

병사들 입에서 그런 말을 내뱉는 진영 안의 분위기는 확 바뀌어졌다. 우중문은 병사들의 태도가 결연해진 가운데 무슨 생각을 했던지 그 자리에서 하루 밤 야영을 더 하기로 했다.

적개심에 찬 병사들은 상관이 시키지도 않는데 진지 내부에 수많은 구덩이를 파는 등 장애물을 설치했다. 고구려 군이 또 야습을 해 오기만 바라며 만반의 대비를 하고 밤을 기다렸다.

불황은 이튿날도 수국 군이 그 자리에 머물러 있자 욕심이 또 생겼다. 어제 밤보다 더 큰 성과를 거둘 야습을 가하려고 밤이 오기만 기다렸다. 그러나 수국 군이 대비를 할 줄은 몰랐다. 자만심에 차 또다시 선두에서 적진 돌입을 감행했다. 그러나 어둠 속에서 창칼을 세운 수국 군은 휘몰아치듯 적진 한 복판으로 돌입한 고구려 기병들을 반격했다.

고구려 기병들은 순식간에 모두 구덩이에 빠져 말에서 떨어졌다. 수국 군은 벌떼처럼 일어나 거꾸러진 고구려 군을 창칼로 난도질을 했다. 적개심에 차서 형체조차 알아볼 수가 없게 만들었다.

불황도 뒤늦게 위기에 처했음을 깨닫고 급히 퇴각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돌이킬 수가 없는 피해를 당한 뒤라 적진을 벗어난 병력은 절반도 못 되고 겨우 목숨을 건진 채 처참한 몰골로 도망을 쳐야만 했다.

을지문덕은 불황이 대패한 소식을 전해 듣고 한탄만 흘려냈다.

"지나친 욕심이 무리수를 둬서 1천여 기병을 희생시키다니!"

수국 군은 개전 이래 처음 싸움다운 전투를 벌였고 대승까지 거두었다. 괄목할 전과를 거둔 장졸들은 승리감에 도취했고 우중문과 우문술은 모처럼 파안대소를 터뜨렸다.

"좌익위 대감! 이젠 꺼우리의 산천경개를 구경하면서 가도 되겠소."

"나는 여기서 눌러 살아도 좋겠다는 생각이 다 드오."

"좌익위 대감! 넉넉잡고 사나흘만 더 가면 꺼우리 궁성에서 궁녀들을 끼고 놀 수가 있겠소. 나는 감히 그걸 장담을 하겠소."

"우익위 대감, 살수를 건너면 평양성까진 하루거리에 지나지 않다오. 사나흘씩 걸리기보다 이제부턴 야간 진군도 강행해서 빨리 갑시다."

"내호아가 패퇴한 게 우리에겐 도리어 여간 잘 된 일이 아니었소. 그 자가 평양성을 먼저 함락시켰다면 우리 체면은 말이 아니게 될 뻔했소."

"물론이요. 이젠 폐하께 전할 승전보는 우리 몫이 되었구려!"

"암, 앞으로 폐하께서 믿을 사람은 대감과 나밖에 더 있겠소?"

"이를 말씀, 우리 두 사람은 더욱 협력해서 승리를 쟁취합시다."

수국 군은 그때부터 야간 진군까지 감행했다. 대병력의 위력을 믿고 고구려 군이 정면 돌파 공격해오는 것도 두렵지 않다는 자신감까지 생겼다. 거침없는 진군은 빠르게 계속되었다.

"장졸들이여! 평양성을 얼른 함락시키자. 보화를 손에 넣자!"

우중문의 재촉에 장졸들도 호응을 했다. 거기엔 물욕도 생겨서 발걸음을 더욱 빨라지게 만들었다. 그러나 바다와는 점점 멀어지고 갈대숲이 우거진 이천야 평야에 이르렀다. 우문술은 우중문에게 말했다.

"우익위 대감, 이 들판을 지나면 드디어 살수 변에 닿는다오. 그런데 벌판 어디에 복병이 숨어 있을 것 같아 대비를 해야 되겠소."

우중문은 한결 구순해진 음성으로 대답했다.

"여부가 있겠소? 그러나 꺼우리 군은 복병보다 기습에 능한 작전을 쓰는 편이요. 그러므로 복병은 그리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지가 않소?"

"그랬으면 오죽 좋겠소만 꺼우리 군의 움직임은 도무지 종을 잡을 수가 없소. 복병이고 기습이고 간에 있을 만한 데는 없고 없을 만한 데서 나타나므로 여간 힘들게 하질 않는구려!"

"좌익위 대감, 분명한 사실은 꺼우리 병력이 매우 적다는 점이요. 우린 대병력으로 하찮은 병력들에게 언제까지 휘둘리기만 하는 점이요. 그러므로 평양성까진 지금처럼 한 덩어리로 진군해 가면 별 탈은 없을 걸로 생각되오. 대신 정찰만은 철저히 하면서 계속 나갑시다."

한편 을지문덕도 고민이 여간만 깊지가 않았다. 적에 이렇다 할 타격을 가하지 못한 채 4차 방어선까지 뚫렸다. 그리고 상당한 병력이 피해를 입었다. 호대한 적이 살수를 그대로 건너고 나면 장안성은 암담한 사태에 직면하게 될 수도 있었다. 때문에 적의 기세를 어느 정도 꺾어놓지 않으면 더욱 기승을 부리게 되어 도저히 감당을 못할 결과를 초래하게 될 것 같았다.

수국 군은 드넓은 이천야 평야 제대로 들어섰다. 그곳은 남부의 소형 가리가 3천 병력으로 5차 방어선을 치고 있었다. 수국 군은 거기서 진군을 멈춘 채 점심을 먹고 전후 좌우의 정찰을 철저히 하면서 다시 과감하게 발진을 하기로 했다.

발진 전에 장근과 최홍승은 기병 5 백기씩을 끌고 정찰에 나섰다. 양 군은 우선 동서로 각기 갈라져 나갔다. 그런데 얼마 가지 않아 양쪽은 다 같이 소규모 고구려 기병들을 만났다. 적의 병력이 얼마 되지 않아 서 공격을 가하자 그대로 도망을 쳤다.

장근은 도망치는 고구려 기병을 신이 나서 추격했다. 그런데 최홍승 쪽도 똑같은 상황이 벌어졌다. 양쪽은 똑 같이 적을 맹렬하게 추격했다. 그런데 고구려 군은 양쪽이 다 같이 수국 군의 본진이 있는 데로 향했다. 그렇게 되자 수국 군 본진의 병력들은 고구려 기병들이 양쪽에서 장근과 최홍순 군에 쫓겨 오는 걸 보게 되었다. 양쪽에서 모여든 고구려 기병들은 한 곳에서 마주치게 되자 함께 방향을 틀더니 키를 넘는 갈대밭 속으로 들어갔다. 역시 양쪽에서 신바람 나게 추격해온 수국 기병들도 양쪽이 합쳐진 채 갈대밭 속으로 고구려 군을 쫓아 들어갔다.

장근과 최홍승은 본진 앞에서 고구려 기병들을 요절내는 광경을 한번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갈대밭 속엔 고구려 병사들이 파놓은 구덩이가 수백 개가 있고 거기엔 고구려 군이 매복을 하고 있었다.

수국 군 본진의 장졸들은 그 광경을 흥미진진하게 지켜보고 있었다. 그러나 수국 기병들은 갈대밭 속의 구덩이 속으로 빠져들고 무참하게 목숨들을 잃어 갔다. 잠시 후 고구려 군은 수백여 필의 군마를 노획해서 어디로 달아나 버렸다. 수국 군 본진은 그제야 아차 싶었다.

우중문은 구출 작전을 펴지도 못하고 당했다. 최홍승은 겨우 돌아왔으나 장근은 목숨을 잃고 말았다. 뜻밖의 패배를 당한 우중문은 앞으론 고구려 군과 각개 전투는 일절 금한다는 엄명을 내렸다.

수국 군 본진은 서둘러 진군을 개시했다. 그런데 소규모 고구려 기병들은 사방에서 계속 나타나 맹렬한 공격을 가했다. 고구려 기병들은 달리는 마상에서 화살 공격이 능했다. 때문에 수국 병사들은 방패를 머리에 얹고 앞으로 내달려야 했다.

을지문덕은 불황이 야습에서 큰 타격을 받은 뒤로 작전을 바꿨다. 전술을 바꾼 고구려 기병들의 접근 공격은 그칠 줄을 몰랐다. 그처럼 과감한 공격은 효과가 금방 나타났다. 수국 군은 움츠러들고 다시 한 덩어리를 이룬 채 이동을 하게 되었고 칠악산에 근접해 갔다.

칠악산은 남부 소형 막연이 2천 병력으로 지켰다. 그곳은 이천야 평야가 한눈에 들어왔고 새로운 쇠뇌가 설치되었다. 고구려 군이 소나기처럼 퍼붓는 화살을 받고 한 덩어리로 움직이던 수국 군은 다시금 대오가 무너져 가기 시작했다.

더욱이 바다에서 상당히 멀리 떨어진 평야지대로 고구려 기병들의 움직임은 활동 영역이 넓어져 더욱 유리해졌다. 반면에 수국 기병들은 마상 활쏘기가 능한 고구려 기병들을 상대할 엄두를 못 내고 본진의 외각을 호위하는 역할을 하고 있을 뿐이었다.

고구려 기병들이 마구 엄습해 드는 공격을 가하자 수국 군은 점점 여러 덩어리로 나눠진 채 겨우 살수 변에 이르렀다. 그리고 쫓기듯이 수심이 얕은 강물을 그대로 건너갔다.

이때 을지문덕은 도회령에서 적의 대병력을 내려다보게 되었다. 살수 강물이 보이지 않게 건너오는 병력을 지켜보며 가슴이 답답해 막아놓은 강물을 터뜨릴 명령을 내리는 것조차 잊고 말았다.

"약광 선인은 지금부터 서한만으로 다시 가라."

"합하, 무슨 일로 가게 됩니까?"

"바다에서 이동하는 수국 함선들을 파악하고 대비책을 세우게 하라."

"합하, 지금 당장 떠나겠습니다."

을지문덕은 양신이 떠나고 나서도 어마어마한 적의 대병력 앞에 큰 충격을 벗어나질 못하고 있는데 하온장이 뛰어들었다.

"합하, 적병들이 살수를 도강을 끝냈습니다."

"나도 여기서 다 보았소."

"합하, 적의 대병이 강을 건널 때 물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처럼 많은 대병력의 선두가 곧 삼천야로 육박해 들 것인데 어떻게 대처를 해야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을지문덕은 무거운 음성으로 대꾸했다.

"계획대로 삼천야 평야에서 대회전 치를 것이요. 나는 곧 부대 배치를 시작하겠소. 북부대인도 병력을 이끌고 맡은 위치로 즉시 이동하시오."

"합하의 명을 따르겠습니다."

하온장이 물러가자 이번에는 계루부 소형 응백라(凝伯喇)와 두라문(兜喇們)이 나타났다. 안주성을 지키던 두 사람은 수국 군이 살수를 도강했다는 보고를 받고 놀라서 달려왔다.

응백라는 숨찬 음성으로 불평부터 터뜨렸다.

"합하, 살수의 물이 줄어들어 너무 쉽게 건너는 결과만 빚었습니다."

을지문덕은 수공을 못한 책임감을 느끼며 대꾸했다.

"막아놓은 물은 쓸데가 또 있을 것이다."

"합하, 여기도 적, 저기도 적으로 적군에 완전히 파묻힌 형국입니다. 그렇게 된 이유는 압록수도 살수도 막지를 않았기 때문입니다."

두라문은 을지문덕에게 더욱 노골적인 불평을 터뜨렸다.

"합하께선 삼천야에서 대회전을 치를 계획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것이나 다름없게 되는 게 아닐까 걱정입니다."

"왜 약한 소리부터 하는가? 즉각 병력을 끌고 삼천야로 떠나라."

을지문덕의 명령에 두 사람은 불만스런 표정으로 돌아서 나갔다.

이미 해가 저물기 시작했다. 도회령을 떠난 응백라와 두라문은 삼천야로 가지 않고 오도산(悟道山)에 지휘소를 두고 지키고 있던 고두우 앞에 나타났다. 고두우는 두 사람에게 물었다.

"소형들은 무슨 일로 이리로 왔는가?"

"수국 군이 살수 도강을 마친 것을 알리려고 왔습니다."

"뭣이?! 적이 벌써 도강을 마쳤다고?"

고두우는 즉각 비상 경계령을 내린 뒤 응백라와 두라문에게 삼천야로 떠나 대회전에 참가할 것을 지시했다. 그러나 두 사람은 듣지 않았다.

"내 명령을 못 들었는가? 빨리 떠나지 않고!"

"대형, 삼천야로 나가는 것은 사지로 내몰리는 꼴이 됩니다."

"사지로 내몰리는 꼴이라니?"

"대형께선 그 많은 대병과 대회전이 가능하다고 생각하십니까?"

고두우가 대꾸를 못하자 응백라가 입을 열었다.

"국상 때문에 고구려는 멸망을 재촉하는 꼴이 되고 말았습니다."

두라문도 거들었다.

"국상은 적의 압록수 도하작전을 그대로 방치했습니다. 때문에 6차 방어선까지 뚫렸고 적은 살수까지 건너 마지막 7차 방어선만 남았습니다. 솔직히 말해 적을 안방까지 불러들인 꼴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삼천야에서 무슨 수로 무찔러 내쫓을 수가 있을지 난감할 따름입니다."

고두우는 신음처럼 중얼거렸다.

"적이 너무도 대병력이라 이건 누구도 어찌해 볼 수가 없게 되었다."

"우중문의 작전은 국상보다 한 수 위인 것 같습니다."

"우중문이 한수 위라고?"

"우중문은 압록수를 도하를 감행한 이후 줄곧 대병을 한 덩어리로 진군해서 우리 병력이 범접을 못하게 만들었습니다. 동시에 해안만 끼고 진군해서 아군의 공격 폭을 확 줄여서 여의치 못하게 만들었습니다."

고두우는 응백라 말에 고개를 끄덕였으나 한편으로 생각하면 계루부도 한심한 작태만 보여 와서 반성을 하게 되었다. 왕실은 요동 땅을 적에게 내던져 놓고 압록수 이남만 지켜서 명맥을 유지하려 속셈을 드러낸 점은 여간 부끄럽게 여기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적의 대병이 한 덩어리로 움직인 작전은 주효했다. 그러나 계루부는 요동 땅을 내팽개친 점을 반성하며 힘을 합쳐 대회전에 임해야 한다."

"여타 부들도 방어가 어려워서 그냥 통과시킨 게 아닙니까?"

응백라의 말을 받아 두라문도 동조하는 말을 했다.

"그렇습니다. 국상은 계루부 병력을 지원받아 삼천야 평야에서 대회전을 치를 계획이나 그 작전은 성공할 가능성이 거의 없다고 봅니다."

고두우는 두 사람이 하는 말에 한심함과 절망감을 느끼게 되었다. 때문에 을지문덕이 대회전을 성공시켜서 적의 대병력을 최대한 줄여 놓지 않으면 장안성은 돌이킬 수가 없는 위기에 처한다는 생각이었다.

"대형, 계루부 병력은 여기서 철수하는 게 좋겠습니다."

응백라의 말에 고두우는 반문했다.

"철수를 하다니?!"

"대형, 계루부의 전 병력은 장안성 성벽을 의지하고 싸우는 길밖에 없습니다. 저는 이 밤으로 장안성으로 들어가 저하와 합류를 하겠습니다."

그때 정찰을 나갔던 소형 을불리(乙弗俚)가 돌아왔다. 그는 갈증을 못 이기듯 냉수를 벌컥벌컥 들이 킨 뒤 고두우에게 보고했다.

"대형, 우리 병력도 삼천야로 빨리 이동해야 합니다."

응백라가 그 말을 퉁명스럽게 받았다.

"을불리 소형은 삼천야 평야에서 적을 막을 수가 있다고 생각하나?"

두라문도 꾸짖는 말을 했다.

"응백라 소형은 지금 그런 말을 할 때가 아니다. 살수 방어선이 무너진 마당에 삼천야 대회전이 무슨 소용이 있다고 그런 말을 하는가?"

을불리는 반발 하듯 받았다.

"나도 어렵다는 판단이오. 그러나 그렇다고 여기서 팔짱만 끼고 있을 순 없습니다. 대형, 병력을 삼천야로 빨리 이동시켜 주십시오."

고두우는 그 말에 대답을 못하는데 응백라는 또 강하게 반대했다.

"우린 저하의 명령만 따라야 한다. 지금부터 장안성으로 가겠다."

"대형, 응백라 소형의 항명을 왜 그대로 두고 보십니까?"

을불리 말에 고두우는 건무의 눈에 날 게 두려워서 대답을 했다.

"나도 장안성으로 들어가겠다. 나를 따를 자는 함께 움직인다."

응백라와 두라문이 고개를 끄덕이자 을불리는 목에 핏대를 세웠다.

"대형, 장안성으로 들어가는 것은 나중에 해도 될 일입니다. 이판사판으로 삼천야에서 싸우다 죽으려는 사람들은 왜 생각을 하지 않습니까?"

고두우는 여전히 입을 다물고 있었다.

"대형, 저는 오늘 밤 삼천야에서 죽겠습니다."

을불리는 그런 말을 남기고 그곳을 떠났다.

한편 도회령에선 을지문덕이 장수들과 마지막 작전회의를 열었다. 모두는 아직도 합류해오지 않는 계루부 병력을 초조하게 기다렸다. 그때 을불리가 숨이 찬 모습으로 뛰어들었다.

"합하, 늦어서 죄송합니다."

을지문덕이 물었다.

"고두우 장군도 도착을 하셨는가?"

"저 혼자서만 참전하게 되었습니다."

을불리의 대답에 모두는 놀라움과 실망감에 표정이 어두워졌다. 모두는 그 이유에 대해서 묻고 싶은데 을지문덕이 짧게 대꾸했다.

"을불리 소형, 고맙다."

"합하, 병력이 열세라고 해서 소규모 기습전만 펴선 안 되겠습니다. 고두우 대형은 그 때문에 별 성과를 못 거두었다고 불만이 큽니다."

을지문덕은 담담한 음성으로 말했다.

"오늘 밤은 적도 피로감이 쌓였을 것이다. 야습에 나설 기병들은 전원이 몸을 말안장에 묶은 채 돌진해서 본때를 한번 보여 주자."

장수들은 을지문덕의 결의가 대단함에 숙연해졌다. 그러나 수국 군도 이젠 고구려 기병을 갈고리 창으로 찍어 땅바닥으로 끌어내릴 줄을 알게 될 만큼 달라졌다. 그에 대비해 희생자를 줄이고자 아예 몸을 줄로 안장에 묶어놓으려는 것이었다. 모두는 죽어도 말안장 위에서 죽자는 비장감에 젖어들면서 무겁게 고개들을 끄덕였다.

"오늘로 적을 일당백으로 무찔러 모든 걸 끝장내기로 할 것이다."

을지문덕의 결연한 말에 을불리가 가장 먼저 호응을 했다.

"합하, 오늘밤 소장은 삼천야에 목숨을 던지겠습니다."

"을불리 소형, 목숨을 던지겠단 허약한 소리는 하지 말라."

"합하, 소장은 마음이 약해서가 아닌 죽을 다지려는 각오입니다. 고두우 대장군은 병력을 끌고 장안성으로 떠났음을 알려야 하겠습니다."

을지문덕은 그 말에 매우 놀라듯 반문했다.

"고두우 대장군이 장안성으로 후퇴를 한다고?"

"합하의 작전을 믿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장안성에서 저하를 도와 수성 전에 임하겠다는 것인데 소장도 그런 결정에 이해는 됩니다."

하온장이 그 말에 분개하듯 입을 열었다.

"그럴 수가?! 이렇게 되면 우리 병력은 3만이 채 못 되는 군."

3만여 병력으로 30만을 상대로 작전을 펼치는 것은 누구라도 무리수로 여길 일이었다. 뿐더러 수국 군도 이젠 야습에 대한 철저한 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런 속으로 고구려 기병들이 진입을 했다간 독 안에 든 쥐 꼴이 되어 일망타진을 당할 수도 있는 일이었다.

을지문덕은 무슨 생각을 했던지 갑자기 입을 열었다.

"대회전은 취소다."

뜻밖의 말에 하온장이 물었다.

"합하, 그러시면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지금부터 전 병력을 장안성으로 후퇴시킨다."

"합하, 합동작전으로 장안성 방어 작전을 펼치겠다는 말씀입니까?"

"장안성으로 들어가는 게 아니오."

"그러시면 어떻게 하신다는 말씀입니까?"

"적은 장안성을 공격하려면 포위를 해야 만하오. 그렇게 되면 성을 에워싸야 함으로 한 덩어리로만 움직였던 대병력은 흩어질 수밖에 없소."

"대병이 흩어지면 공격하기가 쉽다는 말씀이십니까?"

모두는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회의적인 표정은 지우질 못했다.

"앞으로 계루부 군과 장안성 공동 방어 작전에 임하겠다. 대병을 맞을 장안성은 극도의 위험부담이 커지고 말았다. 적의 대병력은 분산하게 되면 우린 적의 배후 공격이 가능해져 유리해질 수가 있다."

장수들은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고 을지문덕은 명령을 내렸다.

"전 병력은 지금부터 장안성으로 야간 이동을 개시한다."

잠시 후 전군은 소리 없이 남쪽으로 이동을 시작했다.

한편 삼천야 평야에서 야영에 들어간 수국 군은 장졸들이 저녁밥을 먹기조차 귀찮을 정도로 지쳐 버렸다. 그러나 고구려 군의 야습에 대비할 준비를 마치고 무기들을 잡고 기다려야 했다.

우중문은 밤이 깊도록 고구려 군의 야습이 없자 우문술에게 물었다.

"좌익위 대감, 꺼우리의 국도가 지척으로 가까워졌는데 오늘 밤은 왜 공격을 가해 오지 않는지 모르겠소? 조용한 게 좀 이상하오."

"글쎄올시다. 이쯤에서 저항이 없다는 건 그만큼 방어능력을 상실했다고 봐도 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조심스럽게 해 보게 되오."

우문술의 말에 우중문은 그럴 법하단 생각으로 대꾸했다.

"꺼우리 군은 전부 평양성에 들어가 농성을 할지도 모르겠소."

"우익위 대감의 생각대로만 된다면 그건 우리가 바라는 바요. 꺼우리 군이 전부 평양성으로 들어가 수성 전을 펼치려고 든다면 우린 성을 함락하기가 쉽게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요."

"어찌 되건 간에 이젠 부딪혀 보는 수밖에 없게 되었소."

그런 말을 나누는 동안 밤은 더욱 깊어져만 갔다. 고구려 군의 야습은 없어 야습에 대비하고자 병사들은 밤을 홀딱 새워야 만했다. 아침을 맞은 장졸들은 허탈하면서도 한결 밝아진 표정들이었다. 무사히 지낸 것만으로도 큰 위안을 삼는 분위기였다.

우문술이 말했다.

"우익위 대감, 여기서부턴 바다가 더욱 멀어지게 된다오. 이쯤에서 함선에 실린 공성기들을 부려놓고 육로로 끌고 가는 게 어떻겠소?"

"좌익위 대감, 나도 그런 생각을 하고 있던 참이었소."

"우리가 고진천에서 잃은 공성기들은 전부 소형들뿐이고 대형들은 함선에 실려져 있어서 다행이요. 꺼우리들은 그걸 모르고 안심할 것이요."

우중문은 그런 말을 하고 즉시 명령을 내렸다. 그때부터 병사들은 배에서 공성기들을 끌어내린 뒤 끌면서 진군으로 들어갔다.

을지문덕은 삼천야에서 철수한 뒤 후방의 대보산(大寶山) 자락에 진을 치고 있었다. 정찰병들은 적이 그곳으로 접근해 드는 걸 보고했다. 고구려군은 숲 속에 모습을 감춘 채 전방을 지켜봤다.

그때 서한만 염청에 갔던 양신이 돌아왔다.

"합하, 전과 같은 작전으로 수국 함선들을 바다로 쫓아냈습니다."

을불이 적함들을 해안에서 바다로 쫓아낸 것을 수국 군이 알게 되면 큰 불안감을 느끼게 될 것이었다. 그것만도 큰 효과가 있다는 판단을 한 을지문덕은 갑자기 엉뚱한 말을 했다.

"나는 시를 한 수 짓겠다."

말하고 휴대한 지필묵을 꺼내놓고 붓을 들었다. 종이를 펴놓고 시(詩)를 한 수 적었다. 그리고 먹물이 마르길 기다렸다가 시가 적힌 종이를 화살 허리에 말아 매 놓고 양신에게 내주었다.

"호위 무사, 이 화살을 수국 군 진영으로 쏘고 오게."

"예, 합하!"

양신은 말을 타고 달려 나가 수국 군과 적당한 거리를 두고 화살을 활에 걸고 쐈다. 이때 수국 군 진영에선 병사 하나가 날아든 화살을 주워 들고 곧장 원수부로 달려갔다.

우문중은 화살을 받아 들고 대에 감긴 종이를 풀어냈다. 그리고 시를 읽고 나서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곁에 있는 우문술에게 넘겼다.

"좌익위 대감, 을지문덕이 대감에게 시를 한 수 지어 보냈구려."

"내게 시를 지어 보냈다니 그게 무슨 소리요?"

우문술은 종이를 받아들고 읽었다.

신기한 책략은 천문을 꿰뚫고(神策究天文)

기묘한 계산은 지리를 통달했네(妙算窮地理)

전쟁에 승리한 공이 이미 높았으니(戰勝功旣高)

족한 줄 알았거든 그만 둠이 어떨까(知足願云止)

우문술은 읽고 나서 한숨을 흘려내듯 중얼거렸다.

"을지문덕이 시도 잘 짓는 사람인 줄은 몰랐소."

"좌익위 대감, 그런 시를 받아서 어깨가 으쓱해지시겠소?"

우중문이 놀리자 우문술은 쑥스러운 듯 대꾸를 했다.

"우익위 대감, 그런데 말이요. 을지문덕이 날 추켜세운 의도가 어딘지 항복을 하겠다는 뜻은 아닌 것 같은 생각이 들게 만드는 구려."

"나도 애초부터 을지문덕이 항복을 할 자로 보진 않았소."

두 사람은 그런 말을 나누고 어딘지 불길함을 느껴야 했다. 하긴 적도에 당도를 한들 멸망을 시킨다는 보장은 없었다. 무리한 공격을 하기보단 강화를 전제로 항복을 받아 내는 길을 모색하는 게 더 바람직하단 생각에 회의감만 일었다.

"좌익위 대감, 꺼우리 병력이 어디에 숨어 우릴 지켜보고 있을지도 모르겠소. 그러니 정찰을 더욱 강화하면서 진군을 하는 게 좋겠소."

"지금까지 한대로 뭉쳐서 진군하는 게 좋지만 생각해 볼 점이 있소."

"무슨 생각을 해볼 게 있다는 말씀이요?"

"평양성에 당도하면 가장 먼저 할 일은 우리 함대가 어디에 있는지부터 파악을 해둘 필요가 있소. 그건 매우 중요한 일이기 때문이요."

우문술의 말에 우중문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그만큼 큰 불안감 속에 진군을 해야만 했다. 이튿날도 고구려 군이 얼씬도 않는 가운데 장안성에 당도할 수가 있었다.

수국 군은 공성기를 끌고 곧장 장안성의 남문 앞으로 밀려들었다. 그런데 성 안팎이 너무도 고요하기만 해서 장졸들은 으스스한 분위기 속에 숨들을 죽이지 않을 수가 없었다.

형원항은 통역 병과 함께 남문 앞으로 다가들어 크게 외쳤다.

"고구려 국왕은 듣거라. 대국의 황제 폐하께서 며칠 안으로 이곳에 당도하실 것이다. 그전에 성문을 열고 항복하면 사직을 보전할 수가 있으나 끝까지 저항을 하면 전부 도륙을 면치 못하게 될 것이다."

문루 위에선 사람은 보이지 않고 목소리만 흘러나왔다.

"나는 고구려국 왕제인 건무요. 대국에 항복하려고 땅문서와 호구 장적을 조사하고 있소. 사흘간의 말미를 주면 바치고 항복을 하겠소."

우중문과 우문술은 반신반의 속에 여간 반기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전쟁에 진절머리를 치던 장졸들도 얼굴에 화색들이 돌았다. 모두는 터져 나오려는 환호성을 가까스로 눌러야 했다.

형원항은 다시 외쳤다.

"좋다. 사흘간만 기다려 주겠다."

수국 군은 병력을 물린 뒤 부근에 진지를 구축했다. 장졸들은 철저한 경계 속에 회답을 기다리며 모처럼 편안한 휴식을 취할 수가 있었다.

"우익위 대감, 고구려 국왕의 항복을 받을 장소를 어디서 하면 좋겠소? 나는 적의 궁궐 안에서 받기보단 밖으로 끌어내는 게 좋을 것 같소. 그러자면 미리 굴복단을 만들어 놔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요."

"나는 궁궐로 들어가 항복을 받는 게 더 위엄이 설 것 같소."

"그럼 고구려 왕이 원하는 대로 들어주기로 합시다."

김치 국부터 마시는 두 사람은 들뜬 환상에 사로잡혀 있었다.

드디어 약속한 날짜가 왔다. 그런데 오전 내내 기다려도 성안에선 아무런 회답이 없었다. 우중문은 참다못해 정오께쯤 형원항을 남문 앞으로 다시 가게 했다.

"오늘은 항복할 날이다. 해가 중천에 뜨도록 왜 통기가 없는가?"

통역 병이 고구려 말로 복창을 하자 문루에서 반문이 나왔다.

"그쪽은 대체 무슨 통기를 바라고 있었단 말인가?"

"호구장적 조사를 다 끝났으면 성문을 열고 나와 바쳐라."

"다시 생각을 해보니 장적조사를 할 필요가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장적 조사를 할 필요가 없다니 그건 무슨 소린가?"

"일단은 싸워보고 나서 지게 되면 바쳐도 늦지 않을 일이다."

형원항은 퉁명스런 대꾸를 듣고 나서 속은 걸 비로소 깨달았다.

"꺼우리들아, 당장 성문을 깨고 들어가 요절을 내야 듣겠는가?"

"어디 해볼 테면 해 봐라!"

우중문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는데 우문술이 다가들어 외쳤다.

"마지막 경고다. 즉시 항복을 해라."

성 안에선 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물건들을 밖으로 내던졌다. 땅바닥에 마구 쌓이게 된 것은 내호아 군이 빼앗긴 군기(軍旗)들이었다.

잠시 후 비로소 건무가 문루 위에서 몸을 드러냈다.

"수국 장수들은 들어라. 내호아가 겁 없이 덤벼들었다가 대패를 당한 걸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또다시 패배의 전철을 밟지 않기를 충고한다. 너희들 진중엔 양곡이 다 떨어진 걸로 알고 있다. 여기서 어정거리다간 전 병력이 굶어 죽기가 십상이다. 내준 군기들이나 수습해서 물러가라."

우중문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아 공격 명령을 내렸다. 공격으로 들어 간 수국 군의 화살들이 하늘을 뒤덮듯 성안으로 날아들었다. 그리고 공성기를 성벽에 끌어다 붙이고 기어올랐다. 그러자 성 안에선 쇠뇌로 쏘는 화살들이 비 오듯 쏟아져 나왔다.

이때 어디서 나타난 을지문덕의 병력이 수국 군의 배후를 공격했다. 수국 군은 앞뒤로 적을 맞게 되자 크게 흔들렸다. 쓰러지는 병사들이 속출하는 불리함을 견디다 못해 성벽에서 물러나 각자 도망을 쳤다. 숲 속으로 들어가서 몸을 숨기려고 했으나 거기도 고구려 기병들이 쫓아와서 여지없이 살해를 당해야만 했다.

도처에서 핏물을 튕기는 백병전이 일어났다. 그러나 잔뜩 위축이 된 수국 병사들은 육탄전에 능한 고구려 군을 당할 수가 없었다. 더욱 뿔뿔이 도망을 쳤지만 지형을 몰라 우왕좌왕을 할 뿐이고 종횡무진으로 덮쳐 드는 고구려 기병들에 의해 죽음을 당해야 만했다.

수국 군은 아무리 병력이 많아도 흩어지면 맥을 못 추었다. 단 하루 동안에 벌어진 사태는 전사자와 부상자를 수만 명이나 내기에 이르렀다. 장수들은 병사들이 도망친 숫자를 알 수가 없고 스스로 포로가 된 자들만도 부지기수에 이르렀다.

고구려 군은 단 하루 동안 벌인 전투에서 압승을 거두었다. 반면에 처참한 패배를 당한 우중문과 우문술은 겨우 목숨을 부지해서 도망을 치는 병사들 틈에 끼어들었다. 모두는 제정신이 아니게 밤새도록 갈팡질팡 해안가로 몰려들었지만 어딜 봐도 바다엔 함선들이 보이질 않았다.

날이 밝자 해안가는 어디나 수국 군으로 뒤덮였다. 우문술과 우중문도 바닷가에 서 있는 신세가 되었다. 철저히 유린을 당한 채 허탈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그런 두 사람을 장졸들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만신창이가 된 수국 장졸들은 허기마저 져서 시냇물을 퍼마셨다. 우중문은 서 있을 기력조차 없듯 땅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리고 바다만 둘러보고 서 있는 우문술에게 물었다.

"좌익위 대감, 어찌해야만 좋겠소?"

"먼저 할 일은 남은 병력부터 파악을 해야 되지 않겠소?"

우중문은 장수들을 불러서 부대마다 인원 점검하게 했다. 그 결과 남은 병력은 10여 만도 되지 않았다. 많은 인원이 죽음을 당했지만 산 자들은 도주할 길을 찾을 생각들만 했다.

"좌익위 대감 이대로 가면 앞으로 살아남을 자가 없겠소."

장수나 병사들이나 상장군 두 명이 그런 대화를 나누는 걸 엿듣고 절망감만 깊어 갔다. 거기다 보급선들은 해포에 있던 내호아와 그 병력을 싣고 해안을 떠나 버린 것을 알게 되었다. 패잔병 신세로 적지에 남게 된 모두는 각자 도주할 마음을 먹을 뿐이었다.

을지문덕은 그런 수국 병사들을 상대로 선무 공작을 펴기 시작했다. 침공해 온 길을 따라 조용히 후퇴를 하면 공격을 하지 않을 것과 살수 변에 양곡을 쌓아두겠으니 밥을 지어먹고 허기를 덜 것을 권했다.

그런 소문이 퍼지자 수국 병사들은 의심 속에 술렁거렸다. 고구려 군에 대항해 무자비한 공격을 받고 처참하게 죽기보다 차라리 그대로 해보자는 마음에 무리를 지어 북쪽으로 떠났다.

우중문은 도망을 치는 병사들에게 호소를 했다.

"우린 아직 10여 만의 병력이 남았다. 그동안 위기를 맞을 때마다 뭉쳐서 이겨냈다. 한 번만 더 분발해 평양성을 깨뜨리자. 그렇지 못하면 전부 살아남을 수가 없으므로 다시 전열을 가다듬어야 한다."

그러나 장졸들은 냉담하기만 했다. 다시 평양성으로 진격을 했다간 개죽음만 당할 뿐이고 타고 도망칠 배들도 없었다. 차라리 고구려 군이 낸 소문을 믿거나 말거나 살수로 향할 뿐이었다.

우문술은 우중문을 설득했다.

"우익위 대감, 평양성을 재공격하는 것은 포기를 합시다."

우중문은 안색이 변한 채 통박을 주었다.

"좌익위 대감. 그런 말씀이 입에서 나올 수가 있소?"

"불리한 대결보다 남은 병력을 지키고 함께 살 길을 모색해야 하오."

우문술이 설득을 하려고 들자 장수들은 역시 동의를 했다.

"우린 다시 평양성으로 가지 않겠습니다."

"우선 살고 볼 일이요. 나는 여기서 조국으로 돌아가렵니다."

"암, 빨리 움직입시다."

장수들이나 병사들이나 다 같은 말들만 했다. 절망감에 빠진 병사들은 더 이상 상관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다는 듯 무리를 지어 떠났다. 장수들도 그것을 막지 않았고 우문술은 또 우중문을 달랬다.

"우익위 대감, 싸움보다 더 두려운 건 굶주림이요."

장수들 중 하나가 그 말을 받아 소리쳤다.

"살수 변에 양곡을 쌓아 두었다고 하니 일단 가 봅시다."

허기진 병사들이 싸울 수가 없음은 누구도 부인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우중문은 슬금슬금 도망치는 장졸들을 향해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도망자는 군법에 의해 참수하겠다."

그러나 걸음을 멈추는 병사들은 하나도 없었다. 우중문은 자신의 명이 통하지 않는 데다 완전히 전의를 상실한 군대를 지휘할 수도 없다는 판단에 결국은 자신도 도주 행렬에 끼어들고 말았다.

"회군하겠다. 그러나 회군도 대오를 짓는 게 더 안전하다."

그건 명령이 아니었다. 그리고 10여 만에 이르는 장졸들은 다시 대오를 짓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거대한 패잔병 집단은 고구려 군의 공격을 받지 않을까 하는 반신반의 속에 북쪽으로 나갔다. 다행히도 고구려 군의 공격은 일어나지 않았다. 해가 질 무렵 살수 변에 당도하자 아닌 게 아니라 살수 강변 양 안엔 정말로 양곡과 솥들이 놓여 있었다.

수국 장졸들은 반가움과 의구심이 엇갈리는 가운데 강의 양안에 나뉘어 밥을 지어먹고 허기를 끌 수가 있었다. 굶주린 배를 채우자 포만감과 식곤증이 일어나 강변에 몸들을 뉘었다.

우중문과 우문술도 서늘한 강바람을 맞으며 식사를 마쳤다.

"좌익위 대감! 우리가 적의 술책에 걸려든 게 아닌지 모르겠소?"

"우익위 대감, 뭐가 그렇단 말이요?"

"혹시 독을 넣은 곡식으로 지은 밥을 먹은 게 아닌지 걱정되오."

우중문이 배를 채우고도 의문을 품자 우문술은 짜증을 냈다.

"병사들은 먼저 곡식을 닭들에게 뿌려주었다오. 곡식을 먹은 닭들은 기운차게 날갯짓만 잘 쳤다니 그런 걱정일랑 잡아매 두시구려."

우문술은 장안성 공격이 실패로 끝나고 나서부턴 다시금 전처럼 비꼬는 말투가 되었다. 우중도 심기가 뒤틀려서 어투가 비딱해졌다.

"좌익위 대감은 너무 무사태평한 게 문제요. 꺼우리가 멀쩡한 양곡을 내주었을 땐 무슨 꿍꿍이 속이 있을지도 모르오. 의심을 해볼 필요가 있소. 매사는 불여튼튼이라 나로선 책임감을 느껴서 한 말이요."

"우익위 대감, 적은 여기까지 단 한 차례 공격도 가하질 않았소."

"그렇다고 해도 꺼우리들을 믿어선 안 되오."

"적이 곡식을 쌓아 둔 데가 어디요? 강의 남북 양 안에 모두 놔두었소. 기습 공격을 가하기 위해서라면 양곡을 한 군데만 쌓아 뒀을 것이요. 그런데 그러질 않은 걸 보면 쓸데없는 의심은 품지 맙시다."

우중문도 그 말에는 더는 입을 뗄 수가 없었다. 장졸들은 강의 양안에 넓게 펼쳐진 채 야영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모두는 앉은자리에서 잠이 들어갔다.

수심이 낮아진 살수는 강의 양변에 모래사장이 더욱 드넓어졌다. 수국 장병들은 천막도 없어서 모래바닥에 그대로 몸을 뉘인 채 밤하늘을 올려다보면서 하나둘씩 잠이 들었다.

고요한 밤은 점점 깊어져만 갔다.

그런데 수국 병력이 물러나자 장안성에선 건무가 고두우에게 임무를 하나 부여했다. 급히 살수의 물막이를 해놓은 장소로 가서 한 밤중에 가둬놓은 강물을 터뜨리게 했다. 막료 장수들은 을지문덕이 수공(水攻)을 가하지 않은 것을 성토하는 분위기였다. 한편 을지문덕 예하 장수들도 수공을 가할 기회라며 건의를 했다. 그러나 을지문덕은 고개를 저었다.

"패퇴시킨 걸로 족해야지 많은 인명을 더 앗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

장수들도 인명(人命)을 중시하는 지문덕의 뜻을 존중하기로 했다. 그러나 고두우는 현장에 당도하자 막은 강물을 터놓았다.

어느 때쯤 수국 군은 누군가의 입에서 다급한 외침이 일어났다.

"홍수가 났다!"

장졸들은 그런 소리를 가물가물하게 듣는 순간 태산 같은 물 더미에 휩쓸려 들었다. 격한 물살은 한순간에 강변을 휩쓸어버렸다. 날벼락을 맞고 대부분이 목숨을 잃은 중에는 신세웅 대장군도 끼었다. 우중문과 우문술을 비롯한 장수들은 높은데 있었으므로 요행히 목숨들을 건졌다.

압록수를 건너간 자는 2천7백여 명이란 기록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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