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 도주(逃走)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속에 장안성은 승전 분위기로 들떴다.
국도를 포위했던 수국 군이 썰물처럼 물러가자 백성들은 거리로 뛰쳐나와 환호성을 올렸다. 백마를 탄 국왕도 외성까지 나와 북과 꽹과리를 치는 백성들과 함께 기쁨을 나누었다.
"고구려 만세!"
"국왕 폐하 만만세."
그러나 들뜬 분위기는 아직은 국도뿐이었다. 요동 땅의 중요한 성들은 포위 상태를 벗어나지 못한 상태였다. 을지문덕은 살수에서 거둔 승리의 여세를 몰아 요동 땅에서도 반격전을 펴 나갔다.
고구려 인은 거의가 스러졌던 희망의 끈을 다시 이어지게 만들었으나 전쟁을 종결시킨 건 아니었다. 이제부턴 포위를 당한 요동의 성들을 풀어내고 양광을 요하 너머로 쫓아내야 만했다.
을지문덕은 전선 지휘소를 다시 국내성으로 옮겼다. 건무는 수국 군을 압록수 너머로 쫓아내고 승기를 잡게 되자 계루부 병력을 끌고 요동 땅에서 을지문덕과 합류를 하기로 했다.
장안성은 일상을 되찾게 되고 동화부인은 조정의 신료 부인들과 호국 불공을 드릴 행사를 추진했다. 건무는 국내성으로 떠나기 전날 동화부인에게 여선을 다시 새달궁으로 옮기게 할 것을 당부했다.
"부인, 여선과 주랑이 더욱 자주 만나게 하고 잘 돌봐 주시오."
동화부인에겐 그동안 자신이 계획한 일을 실천에 옮길 기회가 왔다. 도해선이 남편을 따라가게 된 것도 크게 안심이 될 일이었다.
"저하, 여기 걱정은 마시고 적을 하루속히 퇴치해 주세요."
"부인, 고맙소. 그런데 며칠 전 여선과 주랑이 함께 울었다는 말을 들었소. 대체 두 사람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기에 그랬단 말이요?"
동화부인은 그 말을 듣고 도해선이 새달궁에 심어놓은 첩자부터 색출해내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을 하며 대답했다.
"저하, 그럴 수밖에 없는 사정이 있었겠지요."
"부인, 그럴 수밖에 없는 사정이란 게 무엇이요?"
"주랑이 그만 백제로 돌아가야 하겠다는 말을 꺼냈답니다."
"부인, 주랑이 백제로 돌아간다고? 그 말이 사실이요?"
"주랑은 생부인 철장을 만나고자 불원천리 길을 달려온 게 아니겠어요? 그런데 국상은 다갈촌으로 가는 걸 막고 있대요. 저는 국상이 왜 그러는지 이해가 되지 않아요. 저하께선 혹시 그 일에 대해 아시는 게 있으시다면 듣고 싶어요."
건무는 양심의 가책을 크게 느끼며 대답했다.
"부인, 그걸 내가 어찌 알겠소?"
"여선도 그 문제로 매우 섭섭해하며 슬픔에 잠겨서 지낸답니다."
"부인, 그렇게 슬퍼할 뭐가 있다는 말씀이요?"
"근래 다갈촌에선 아무런 소식도 전해져 오는 게 없대요. 더욱이 철장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게 아닐까 해서 불안과 걱정을 많이 하는 눈치 들예요. 저하께선 그에 대해 무슨 아는 점이 없으신가요?"
"부인, 나 역시 아는 게 없소."
"저하께서 주랑이 다갈촌으로 가게 해 주실 순 없겠습니까?"
동화부인은 그런 말을 하고 남편의 눈치를 살폈다.
"국상이 막을 때는 무슨 이유가 있을 것이요. 내가 사정을 알아보겠소만 철장에게 별 일은 없을 것이므로 너무 걱정을 하지 않게 해 주구려."
"저하, 국상이 막는 데는 그럴만한 무슨 까닭이 있지 않겠어요? 저는 애를 태우는 여선과 주랑을 보기가 너무 딱해서 국상이 원망스러워요."
"내가 국상에게 이래라저래라 할 수는 없소. 낼 국내성으로 떠나게 되었으니 거기에 가서 알아보긴 하겠소. 철장은 개인적인 무슨 사정이 있어 소식을 못 전해올 수도 있을 것이요. 부인도 두 사람을 잘 다독여 주고 보살펴 줄 것을 부탁하오."
"저하께선 국사에 너무도 바쁘시므로 이만 말을 접어야 하겠으나 만약에 철장에게 무슨 일이 생겼다면 여간 큰일이 아니겠어요?"
건무는 매우 난처해서 철장을 비난하는 말이 흘려냈다.
"철장은 모를 점이 너무도 많은 사람인 것 같소. 그동안 주랑을 백제에 두고 감쪽같이 숨겨 온 사람이요. 그런 일러 미뤄 볼 때 무정함이 있는 사람 같소. 그 때문에 두 딸은 오랜 세월을 헤어져 살지 않았소?"
"아무튼 간에 철장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은 분명한 것 같아요."
"부인, 쓸데없는 말은 그만하시오."
"주랑은 생부를 꼭 한번 만나는 걸 소원으로 여기고 있어요. 그걸 알면서 그토록 못 만나게 하는 국상의 심보는 대체 뭔지 모르겠어요."
"나도 그런 점이 없지도 않아서 못마땅하게 여기오."
"저는 이상하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어요. 그렇다 보니 주랑은 할 수 없이 백제로 되돌아갈 마음을 먹게 될 수밖에 없지요."
"부인, 나도 그 때문에 당부를 드리오. 어떻게 해서든 주랑을 잘 달래어 여선과 함께 여기에 있게 만드시오. 주랑을 붙잡아 둘 수가 있는 사람은 오직 부인뿐이라는 생각을 하오."
"저하께서 주랑을 그렇게 잡아두려 하시니 저는 어떤 의심이 드네요."
"부인, 내게 무슨 의심을 한단 말이요?"
"혹시 주랑마저 탐이 나서 그러시는 건 아니신지 모르겠네요."
동화부인의 말에 건무는 펄쩍 뛰었다.
"무슨 소리요?! 나는 여선이 주랑과 헤어지는 걸 섭섭하게 여겨서 그럴 뿐인데 부인은 무슨 당치도 않을 의심을 하고 있단 말이요?"
"저하께서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저로선 조금쯤 안심은 되네요."
"부인, 어찌 되건 간에 주랑이 백제로 떠나지 못하게 하자면 여선과 자주 만나게 해 줘서 마음을 돌리게 하는 방법밖에 없겠소."
동화부인은 못 이기는 체 대답했다.
"저하의 말씀대로 신경을 쓰면서 노력을 해보겠어요."
"부인, 나는 연개소문이 주랑을 매우 좋아한다는 말을 들었소."
"젊은이들이니 그럴 수도 있지 않겠어요?"
"나는 두 사람을 짝 지워 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소."
"저하, 주랑은 백제 사람인데 어디 쉬운 일이겠어요? 더욱이 서부대인께선 격이 맞지 않을 며느리를 맞을 생각을 할 리가 없지 않아요?"
"부인, 격이 맞지 않다니 무슨 말이요? 주랑을 길러준 백기란 사람은 백제국의 좌장이요. 귀족 가문인 데다 백제국 군무를 장악한 총수요. 서부대인과 비견하면 대등한 신분이라 손색이 없을 혼처로 생각하오."
동화부인은 남편이 듣기 좋게 하려고 입을 열었다.
"저하, 제가 서부대인께 한번 말씀을 드려볼까요?"
"그래 보시오. 나는 근래에 와선 부인을 다시 보고 고마워하오."
"그런 말씀을 다 하시니 믿기지가 않네요."
"나는 부인이 여선을 너그럽게 대하며 여러 면으로 배려를 해주는 걸 보며 감동하오. 이번엔 나라를 위해 귀족 부인들을 거느리고 불공을 드리는 일까지 주도하고 있으므로 어찌 그렇지가 않겠소?"
"저하, 나라가 위난에 처한 때입니다. 남정네들은 목숨을 바쳐 싸우고 있는데 부녀자들로선 불공을 드리는 일밖에 더 할 게 있겠어요? 저는 정성을 다해 빌어 보겠습니다."
"부인, 불공은 어느 절에서 드리게 되오?"
"초문사와 이불란사 두 절에서 드리게 되었어요."
"부인, 두 절에 시주를 넉넉히 해주시구려."
"저하, 모든 일은 제게 맡겨 두세요."
초문사(肖門寺)와 이불란사(伊佛蘭寺)는 고구려에선 쌍벽을 이루는 대 사찰이었다. 그러나 동화부인이 두 절에서 백관 부인들과 불공을 드리면서 병행해 또 다른 중요한 일을 할 생각이었다.
이번에 두 절을 오가며 드리는 불공행사엔 많은 백성들도 참가할 것이었다. 그렇게 되면 매우 혼잡이 벌어지게 되고 그 틈을 타 여선과 주랑을 서한만으로 빼돌려 배에 태울 계획이었다.
"나는 불공에 참석하지 못하지만 부인이 대신 많이 애를 써주오."
"저하께선 이번 출정에서 적을 완전히 몰아내기에 힘을 써 주셔요."
"부인, 전세는 어느 정도 역전이 된 마당이요. 나는 부인의 바람대로 적을 요동 땅에서도 깨끗이 구축해 낼 자신감을 갖고 떠나는 거요."
"저하만 믿고 무사하시기만을 빌겠어요."
"부인, 침모들이 새 옷을 짓고 있다는 말을 들었소?"
"저하께선 별 일을 다 알고 계시네요? 그래요. 특별히 새 옷을 지어 입고 불공을 드리면 정성이 더해질 것 같아서 그렇게 하는 거예요."
"잘하셨소. 혹여 부인의 옷만 짓는 건 아니겠지요?"
"저하께선 저만 새 옷을 지어 입을까 봐 걱정이 되셨나요? 걱정 마세요. 여선과 주랑이 입을 옷도 함께 짓고 있습니다."
"부인, 참으로 잘하셨소."
건무는 그 대답을 듣고 입이 함박만큼 찢어졌다. 그러나 동화부인이 그러는 데는 다른 목적이 있었다. 여선과 주랑이 똑같은 옷을 입혀 남들이 구별을 못하게 만들려는 목적이었다.
"부인, 나는 오래간만에 부인과 함께 잠자리에 들고 싶소."
동화부인은 모처럼 그런 말을 하는 남편에게 고개만 끄덕였다.
6월도 다 지나가고 있었다.
양신은 을지문덕의 명령서를 오골성에 전하고 다시 국내성으로 향했다. 그런데 구조리가 10여 명의 무리를 끌고 길목을 지키고 있었다. 양신은 그걸 모른 채 밤낮으로 말을 몰았다.
도해선은 그동안 구조리를 시켜 전선에서 양신에 대한 위해를 수차례나 가하게 했었다. 그러나 활을 쏘는 저격은 번번이 실패로 끝나 이번엔 직접 무리를 끌고 직접 덮치기로 했다.
양신도 전선을 누비며 여러 수차례 날아드는 화살을 맞을 뻔했다. 처음엔 전쟁터라 그러려니 여겼다. 그러나 차츰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여선을 만나러 새달궁에 들어갔다 나오던 날도 화살 공격을 받았다. 때문에 도해선이 자신의 목숨을 계속 노리는 게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었다. 전쟁터라 조심을 해야 할 일이나 도해선의 시도가 집요한만큼 철저한 대비와 경계를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구조리는 양신이 국내성으로 돌아가는 길목을 지키고 있다가 부하들과 함께 다가드는 양신을 둘러쌌다.
"호위 무사, 기다렸다."
"뭣 하는 자들인가?"
양신은 반문하며 재빨리 말에서 뛰어내렸다. 그와 동시에 양측은 접전이 벌어졌다. 그러나 양신은 순식간에 10여 명을 제압해 버렸다. 서너 명은 땅에 쓰러지고 나머진 도망을 쳤다. 그런데 어둠 속에서 어떤 자가 신음과 함께 입을 열었다.
"호위 무사, 나는 그대에게 해둘 말이 있다."
치명상을 입은 구조리가 숨을 몰아쉬며 겨우 흘려낸 말이었다.
"구조리 선인, 괜찮겠소?"
양신의 말에 구조리는 겨우 대답을 했다.
"나는 도해선이 시키는 일을 거부하지 못해 이 지경을 당했소. 자업자득이니 누굴 원망하겠소? 다만 도해선 뒤에 저하가 있음을 알아야."
구조리는 말을 다 하지 못하고 숨을 거두었다.
양신은 구조리에게 사부에 관한 일을 물어보려고 했지만 끝내 알아낼 수가 없었다. 국내성으로 돌아가 을지문덕에게 그 일을 보고했다.
을지문덕은 양신을 고구려에 더 두어선 큰일 나겠단 생각을 했다. 이젠 양신이 원하는 대로 조속히 수국 땅으로 보내 철장의 일을 알아보게 하기로 결정을 내렸다.
"약광, 곧 수국으로 떠나도록 하게."
"합하, 그 말씀 정말이십니까?"
을지문덕은 조금 망설이다가 말했다.
"나는 어떤 기대를 걸 수가 없다는 생각이다."
"합하, 무슨 말씀을 하시려는 것입니까?"
"내 추측인데 아무래도 철장은 이 세상 사람이 아닌 것 같다."
을지문덕이 망설이다 한 대답에 양신은 음성이 떨렸다.
"합하, 사부님을 두고 하신 말씀입니까? 그 이유를 말씀해 주십시오."
"철장이 납치를 당해 갔다는 것은 구조리가 퍼뜨린 말이었다."
"합하, 그 점은 소관도 잘 알고 있습니다."
"나는 그 말은 믿음성이 없어 회의감을 느낀다. 그 때문에 나는 자네나 주랑이 수국으로 가려는 것을 막고 있었던 것이다."
"합하, 무슨 근거로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나도 철장에 관한 일은 백방으로 알아보고 있었다. 태산팔협이란 자들은 개모성 부근에서 요하를 건너 도주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들의 길 안내를 해준 자가 구조리였다. 그러나 그때 통과시켰던 개모성의 한 군관으로부터 알게 된 사실이 있다."
"합하, 어떤 점을 알아내셨습니까?"
"북부 군관은 철장의 얼굴을 모르나 도주한 자는 6명이라고 했다."
"합하. 태산팔협은 두 명이 목숨을 잃고 여섯 명이 남아 있습니다."
"만약에 거기에 철장이 끼었다면 모두 일곱 명이 돼야 하지 않나?"
"합하, 그건 그렇습니다."
양신이 말끝을 흐리는데 을지문덕이 말했다.
"약광, 그렇다면 철장은 끌려가지 않은 게 된다."
"합하, 그렇다고 해도 전 어떻게 된 사정인지 꼭 알아내야 합니다."
"물론 그래야 한다. 그러나 태산팔협이 있는 델 찾아가 철장의 사정을 이 알아보는 일은 여간 무모하고 위험하지가 않을 일이다."
"저는 사부님에게 무슨 일이 생기셨다면 원수를 갚겠습니다."
"그러나 무리한 일을 했다간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 그러므로 그쪽이 알지 못하게 은밀하게 알아보는 수밖에 없다. 적지에서 그런 일을 하는 게 얼마나 불리하고 어려움이 큼을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을지문덕이 고뇌에 찬 표정으로 말했고 양신은 고개를 끄덕였다.
"합하, 소관은 여선과 주랑이 걱정하는 바를 더는 볼 수가 없습니다. 책임감도 크게 느끼므로 적진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습니다. 다만 주랑이 따라나서려고 해서 어찌해야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약광, 이렇게 하면 어떨까?"
"어떻게 말씀입니까?"
"주랑이 마침 장안성으로 갔으니 이 틈에 혼자서 떠나라."
"합하께선 소관이 수국으로 떠날 땐 주랑도 함께 보내주시겠다는 약속을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주랑이 가만히 있을 리가 없지 않겠습니까?"
"약광, 나도 그런 약속을 한 것을 후회하고 있다. 주랑이 혼자서 떠날 태세를 보여서 우선은 붙잡아 놓고 볼 일이라 그럴 수밖에 없었다."
"합하, 아무튼 간에 주랑은 혼자서라도 떠날 것입니다. 더욱이 소관이 혼자 떠나면 더 가만있지 않을 것이므로 걱정이 큽니다."
"나는 일단 주랑을 강제로 백제로 돌려보낼 생각이다."
"백제로 돌려보내면 거기서도 중원으로 갈 것입니다."
"백기에게 부탁을 하면 붙잡아 매 둘 수도 있을 것이다."
을지문덕은 그렇게 대답했지만 어찌할 바를 모를 지경이었다. 두 사람은 막을 방법을 놓고 이런저런 얘기를 나눈 끝에 양신이 먼저 가서 자리를 잡은 뒤에 주랑도 떠나는 걸로 정했다.
양신은 또 다른 생각도 들어서 입을 열었다.
"합하, 제가 혼자 수국 땅에서 철장에 관한 일을 알아보는 게 매우 위험함으로 주랑과 함께 가면 서로 의지가 되고 도움이 될 것도 같다는 생각이 드는데 그 점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을지문덕은 그 말을 듣고 또 다른 생각을 했다. 젊은 남녀가 함께 가서 뜻이 맞으면 결혼도 할 수가 있고 앞으로 중원 땅에서 그냥 눌러살게 되어도 좋겠다는 생각이었다.
"그 방법도 좋겠다."
양신은 그런 대답을 듣고 물었다.
"합하, 수국으로 가는 길을 어떻게 잡으면 좋겠습니까?"
"육로는 어려움이 많고 전쟁 중이라 위험도 따르니 배편이 좋겠다."
"소관은 수국으로 가는 배를 얻어 탈 방법을 찾아보겠습니다."
"나는 이미 을불에게 수국으로 가는 배편을 부탁해 두었다."
"합하, 그러시면 소관은 을불 염좌님을 만나봐야 하겠습니다."
"지금 시동 선인은 장안성에서 그에 관한 일을 맡아서 추진하고 있다. 오늘 낼 중으로 무슨 소식을 가지고 이리로 오게 되었다."
"합하, 연선인이 그런 일도 하고 있을 줄은 몰랐습니다."
"나는 을불에게 배편만이 아니고 자네가 수국 땅에서 머물 데도 알아보게 했다. 연선인이 오는 대로 여길 떠날 준비를 해둬라."
"합하, 막상 주랑과 함께 떠나게 해 주시니 마음이 편해집니다."
"약광, 중원 땅에 가는 건 철장의 행방을 찾는 일에만 국한되지 않고 다른 임무도 지니게 된다. 나라를 위해 매우 중요한 임무도 맡기련다."
"합하, 그건 어떤 임무입니까?"
"자네는 고구려 땅에선 살 수가 없지 않은가? 중원 땅에서 전쟁 수행을 위해 수국의 사정을 정탐해서 내게 보고를 해주기 바란다. 그리고 앞으론 넓은 땅에 자리를 잡고 새로운 삶을 개척해 나가길 바란다."
양신은 그 말에 무겁게 고개만 끄덕여 보였다.
저녁나절에 장안성에서 온 연개소문은 양신부터 찾았다.
"연선인, 그렇지 않아도 자네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네."
"형의 건재한 모습을 보니 무엇보다 마음이 놓이고 기쁘오."
연개소문은 양신의 손을 잡고 눈물까지 글썽였다.
"연선인, 웬 눈물까지 보이고 그러는가?"
"여기에 도착하자마자 도해선의 심복인 구조리가 형을 해치려다 도리어 당했다는 얘길 듣고 여간 놀라고 분개하지 않았소. 도해선은 앞으로도 형을 끝까지 그냥 놔두지는 않을 것 같소."
"연선인, 날 그처럼 염려해 주다니 고맙네."
연개소문은 양신의 손을 잡고 외진 곳으로 끌고 갔다.
"나는 합하를 만나 뵙기 전에 형과 먼저 나눌 얘기가 있소. 그러나 형과 헤어질 생각에 마음이 착잡해서 말을 꺼내기 힘드오."
"연선인, 나와 헤어질 생각을 한다니? 그럼 내가 수국으로 가는 걸 자네도 알고 있었단 말인가? 혹시 자네가 그 일을 합하께 권했는가?"
"나는 권한 적이 없는데 합하로부터 허락을 받았소?"
"그럴세. 뿐만 아니라 주랑과 함께 떠나게 되었네."
양신의 대답에 연개소문은 내심 놀라며 물었다.
"주랑 누님과 함께 떠난다고?"
"그럴세."
"그러면 나도 털어놓을 말이 있소."
"연선인, 내게 털어놓을 말이 있다니?"
"나는 장안성에서 형이 놀라자 빠질 일을 해 왔소."
"내가 놀라자 빠질 일이라니 그게 뭐란 말인가?"
"나는 동화부인이 꾸미시는 엄청난 일을 돕고 있었소."
"엄청난 일이란 게 어떤 것인가?"
"여선부인과 주랑 누님을 은밀히 백제로 빼돌리는 일이요."
양신은 너무도 놀라 숨이 막혀들 지경이었다.
"뭐라고?! 그게 사실인가? 왜, 백제로 빼돌린단 말인가?"
"왜라니?! 여선부인을 형에게 돌려주려면 그 방법밖에 더 있겠소?"
양신은 도무지 모를 소리인 데다 믿기지도 않았다.
"연선인, 동화부인께서 뭣 때문에 그런 일을 하신단 말인가?"
"형, 동화부인이 그러시는 이유는 구구하게 설명을 하진 않겠소. 다만 형이 일아 둘 것은 여선부인도 형에게 돌아가고 싶어 한다는 점이요."
양신은 그저 어리둥절할 뿐인데 연개소문이 설명을 더 했다.
연개소문이 국내성에서 장안성으로 돌아간 것은 동화부인의 지시에 따른 일이었다. 그때부터 동화부인은 연개소문에게 자신의 계획을 밝혔다. 여선과 주랑을 백제로 보낼 속셈이었다. 그 일을 도와줄 것을 부탁받고 이모님의 간곡한 청을 거부할 수가 없었다.
"그로부터 남몰래 그 일을 도왔소. 염좌님에게 백제로 가는 배편을 구해 줄 것을 부탁했고 동화부인과 염좌 간에 오가는 모든 연락을 도맡아 처리하면서 다른 계획을 세우는데도 힘을 보태드렸소."
"연선인, 합하도 내가 수국으로 가는 배편을 구해놓을 것을 을불님에게 지시하셨네. 그러면 나는 어느 쪽으로 가는 배를 타야 할까?"
"어느 쪽이라니? 백제로 가야지. 그러나 합하껜 비밀이요."
양신은 그 말을 듣고 그만 흥분 상태가 되고 말았다.
"나는 일단 백제로 가는 수밖에 없겠네."
"마땅히 그래야지. 남포엔 곧 남만 상선이 들어오게 되었소. 그 배는 모두를 태운 뒤 곧장 백제로 데려다 줄 것이니 걱정은 마시오."
"을불님은 내가 백제로 가는 것에 어떤 의문을 품지 않으실까?"
"형, 물론 그럴 수밖에 없겠지만 그 점은 내가 해결을 하겠소."
"나는 또 다른 의문이 생기네."
"또 어떤 의문이오?"
"배편을 주선하는 을불님은 누가 타고 가는지를 알고 계시는가?"
"주랑 누님이 백제로 돌아가려는 걸로만 알고 있소."
"그럼 여선도 함께 타고 가는 건 모르시지 않는가?"
"모르오. 그러나 나중에 한 사람이 더 탈 수도 있지 않소?"
"여선이 백제로 가는 배를 타는 것은 또 다른 문제일세."
"그건 나중에 걱정할 일이고, 그 정도만 알고 있구려."
"내가 함께 타고 가면 나중에 을불님에게 문제가 생길 것 같네."
"문제가 생기면 동화부인께서 잘 해결을 해 주실 것이요."
"여선과 주랑은 남포에서 배를 타게 되는가?"
"그렇소."
"아무래도 나는 그 배를 남몰래 타야 할 것 같네."
"동화부인께선 남 몰래 탈 방법도 강구하실 것이요."
양신은 두 사람과 함께 백제로 갔다 다시 중원으로 떠날 생각이었다.
"배를 언제 타게 될지 모르나 합류할 방법도 알아야 하겠네."
"나도 남포에서 배를 타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요. 거긴 사람들의 눈을 피하기가 어려워서 다른 장소를 정해야 하겠소."
"다른 장소는 어디가 좋을까?"
"남만 상선을 압록수 하구로 보내 따로 타면 어떨까?"
"남만상선을 마음대로 움직이게 할 수가 있을까?"
"그러기 위해 동화부인께선 많은 돈을 쓰려고 하오."
양신은 고개만 끄덕이고 연개소문이 빙긋 웃었다.
"형은 이 정도로 일이 추진된 것을 놓고 어떤 생각을 하오?"
"어떤 생각을 하다니? 그저 동화부인과 자네에게 고마울 따름일세."
"형은 여선 부인을 드디어 되찾게 되었소."
"연선인, 고맙네. 그런데 수국에 수행할 새임 무가 있어 걱정일세."
"철장에 관한 일 때문에 그러시겠소."
"사부님에 관한 일도 있지만 합하로부터 새로운 임무를 부여받았네."
"합하께선 형에게 또 무슨 임무를 부여하셨단 말이요?"
"수국의 내부 사정을 정탐해 보고를 하라는 임무일세."
연개소문은 나라를 위하는 일이나 고개만 끄덕이고 말았다.
"형은 일단 두 분과 함께 백제로 갔다가 다시 수국으로 가야 하는데 그럴 때 주랑 누님도 따라가려고 할 것 같아 걱정이요."
"나하고 여선이 잘 설득을 하면 막을 수가 있을 것일세."
"꼭 그렇게 만드시오. 나는 형만 믿겠소."
양신은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또 다른 걱정이 생겼다.
"나는 이 사실을 합하께 알려드려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일세."
"형, 무슨 소릴 하오? 합하가 아시면 절대로 안 될 일이요."
연개소문의 단호한 대답에 양신도 그럴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었다.
"합하께 말씀을 드리지 않는 것은 너무도 못할 짓이 아닌가?"
"형, 합하가 아시게 되면 사정이 크게 달라지오. 동화부인께선 저하와 도해선이 이곳에 와 있는 걸 호기로 삼아 벌이는 일임을 명심하오."
"그렇겠군! 나도 마음을 접고 각별히 조심을 하겠네."
"형은 국내성을 떠나는 일부터 의심을 사지 않게 해야 하오. 그러기 위해 합하께선 무슨 업무를 부여해 떠나는 구실을 만드실 것이요."
"그러시겠지. 그런데 또 다른 걱정이 있네."
"형은 무슨 걱정이 그리도 많소?"
"나로선 동화부인과 연선인에게 무어라 고마움을 표할 수가 없겠네. 그런데 나중에 이 일로 무슨 책임을 질 일이 생기면 어떡하지?"
"동화부인과 나는 그에 대한 충분한 대비책을 세워두었소."
"어떤 대비책인가?"
"동화부인은 모든 걸 주랑 누님의 탓으로 돌리면 끝난다고 보시오."
"연선인은 물론 배편을 구해 주신 을불님도 연루가 되었네. 나중에 의심을 사고 책임을 지게 된다면 나로선 여간 괴로울 일이 아닐세."
"형, 그런 걸 따지기보다 형의 앞가림이나 잘해나갔으면 하오."
"아무튼 이 은혜를 어찌 갚아야 할지 모르겠네."
"도해선은 여선 부인과 주랑 누님에 형까지 사라지면 눈에 불을 켜고 찾을 것 같소. 그러나 형이 수국으로 가서 나라를 위한 임무를 수행한다면 되찾기를 포기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걸뿐이요. 또 모두가 타국으로 떠나버리면 더 이상 어찌해 볼 도리가 없겠다는 생각도 드오."
"나는 연선인과 을불님이 무탈하기만 빌겠네."
"하긴 나도 동화부인과 함께 무슨 의심을 살 꼬투리나 단서를 남기지 않도록 조심을 하겠소. 그러니 형은 너무 걱정하지 말고 수국 땅에서 지내면서 자신의 안위에 대한 각별한 주의를 하길 바라오."
"그래야 하겠으나 내 앞날은 예측 불허가될 것 같네."
"형, 아무튼 간에 이 일은 이렇게 정리가 되는 것이요."
"어떻게 말인가?"
"형은 합하로부터 새 임무를 부여받고 수국으로 가는 것이고, 여선부인은 주랑 누님이 백제로 빼돌려 데려간 것이 되오. 그리고 나중에 무슨 문제가 발생할 경우 동화부인이 모든 책임을 지시는 것이요. 나는 모든 내용을 속속들이 알고 도왔지만 모르쇠로 나갈 것이요. 그렇게 정리가 되면 이제부터 형은 국내성을 떠날 합하의 명을 받으러 가는 거요."
양신은 을지문덕을 만나기에 큰 양심의 가책을 느꼈지만 이제는 돌이킬 수가 없게 되고 만 일이라 연개소문을 따라가는 발걸음이 무겁고 제대로 떼어지지가 않을 정도였다.
을지문덕은 작전 명령서를 쓰다가 연개소문을 보고 반갑게 맞았다.
"연선인이 왔군? 수고가 많다. 염좌로부터 무슨 소식이 있는가?"
"합하, 닷새 뒤쯤에 남만상선이 도착할 걸로 예상하고 있습니다."
"닷새 뒤라? 그동안에 약광은 마지막 임무를 수행해줘야 하겠다."
을지문덕은 양신이 수국으로 떠나기 위한 구실이 필요하기 때문에 걸맞을 임무를 부여하려는 것인데 연개소문이 입을 열었다.
"합하, 호위 선인을 그만 좀 부려 먹으십시오."
"약광 만큼 믿고 맡길 사람이 없는데 어쩌겠나? 연선인은 이미 약광을 먼저 만나 봤을 것인데 그저 날 떠보려고 하는 말이겠지?"
연개소문은 그 말에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약광은 내일 안시성으로 떠난다. 거기서 임무를 마친 뒤엔 백암성으로 가라. 연선인은 남포에 갔다가 백암성으로 간다. 두 사람은 백암성에서 함께 남만상선을 타는 곳으로 간다. 이것으로 작별이다."
"합하, 명을 받들겠습니다."
양신은 무거운 음성으로 대꾸를 했다. 연개소문은 양신이 부여받은 임무로 도해선의 의심을 사지 않고 국내성을 떠날 수가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한 마디 더했다.
"합하, 호위 선인이 수국으로 가게 허락을 해주셔 고맙습니다만 적국에서까지 또 임무를 수행하게 만드시는 건 너무 지나치십니다."
"철장의 일은 알아보면서도 해낼 수가 있는 임무라 맡겼다."
연개소문은 항의조로 한 마디를 더했다.
"합하, 그렇다고 첩자 노릇까지 시키십니까?"
"물론 위험한 일이나 연선인은 약광에게 한어를 가르쳐 주지 않았는가? 인젠 상당한 구사 능력을 지니게 되어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때문에 적지에서 활동을 하는데 별 어려움은 없을 것이다. 또 철장에 관한 일을 알아보며 조국을 위한 임무를 병행할 수가 있다. 나는 수국이 곧 망하게 될 걸로 본다. 약광은 앞으로 중원 땅에서 뿌리를 박고 사는 게 좋겠고, 거기서도 크게 출세를 할 수가 있는 사람이다."
을지문덕은 이상한 말까지 한 뒤 연개소문에게도 당부를 했다.
"연선인은 앞으로 내 곁에 있어 주었으면 한다."
연개소문이 고개를 끄덕이는데 양신은 여선과 함께 고구려를 떠나는 걸 꿈에도 모르는 을지문덕을 더 보기가 괴롭고 배반자가 된 심경으로 몸을 일으키고 말았다.
"약광, 한 가지 더 해둘 할 말이 있다."
"합하, 어떤 말씀이신지요?"
"안시성에 가선 사람들한테 수국으로 떠난다는 말을 자주 하라. 근래엔 요하 하구에서 수국을 오가는 배들이 부쩍 늘었다고 한다. 거기서 배편을 알아보는 척하고 요하를 건너 육로로 가는 방법도 물어보는 둥 그런 소문이 퍼지게 만들어라."
"합하, 왜 그런단 말씀입니까?"
"나중을 위해서 그런 소문을 낼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을지문덕은 그런 대답을 하고 두 개의 봉서를 양신에게 내밀었다.
"약광, 하나는 안시성에 전하고 또 하나는 지니고 수국으로 가라."
"합하, 수국에서 누구에게 전하는 봉서입니까?"
"수국의 병참 기지를 총괄하는 양현감이란 고위 관리가 있다."
"그 사람에게 전하라는 말씀입니까?"
"바로 전하진 말게. 그냥 지니고 있다가 수국의 사정을 파악해 가면서 혹시 쓸모가 있겠다는 생각이 들 때는 양현감을 찾아가서 전하게."
"합하, 수국에서도 소임을 충실히 수행하겠으니 부디 건강하소서."
양신은 머리를 땅에 처박듯이 큰 절을 올렸다. 마구 쏟아지는 눈물을 주체하질 못한 채 밖으로 나오자 연개소문이 위로의 말을 했다.
"합하께선 해도 너무 하시나 어쩌겠소? 형은 잘 해낼 것이요."
"연선인, 전쟁 중이라 그러실 수밖에 없잖은가? 자네가 잘 모시게."
"국내에선 도해선이 형을 죽이려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아서 쫓겨 가는 신세인데 적지에서도 위험한 임무를 수행하게 되니 그렇소."
양신은 대답 없이 흐르는 눈물만 닦아냈다. 무엇보다 나라를 위해 노심초사인 을지문덕 곁을 떠나는 게 가장 마음에 걸렸다. 앞으론 자신이 맡았던 임무들을 연개소문이 대신해서 잘해주기만 바랐다.
이튿날 양신은 안시성으로 연개소문은 서한만으로 떠났다. 연개소문은 서한만의 염청에 당도해 을불을 만났다.
"염좌님, 합하와 만난 일을 알려드리려고 합니다."
"연선인, 수고가 많소. 그런데 이런 일에 관여를 하며 열심히 뛰어다니는 연선인을 보면서 여간 의외란 생각이 들지 않소."
"염좌님, 저는 일이 잘 될지 않을까 걱정을 할 뿐입니다."
"나는 양쪽 배편을 다 구해 놨으니 이젠 한 시름을 놓아도 되오."
"저는 염좌님께 배편을 구하는 일을 비밀에 부쳐 주실 것을 부탁합니다. 염좌님은 배를 탈 사람들이 누군지 궁금하시겠지요?"
"궁금하긴 하나 연선인이 말을 하지 않으니 어찌하겠소?"
"백제로 가는 배를 탈 분은 백제국 좌장의 따님이십니다."
"배를 탈분이 여인이란 말씀이오?"
"그렇습니다. 그분은 장안성에서 어린아이가 딸린 여인의 수발을 들어주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함께 백제로 가려는 것입니다."
"연선인, 한 명이고 두 명이고 그게 무슨 대수이겠소?"
"그런데 계획을 변경하게 되었습니다. 수국으로 가게 될 호위무사도 백제로 가는 배를 타고 일단 백제로 갔다가 수국으로 가게 됩니다."
"백제로 가려던 호위 선인이 왜 갑자기 백제로 간단 말이요?"
"호위 선인은 백제에 아는 사람을 만나보고 갈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한쪽 배는 취소를 해야 하겠군요?"
"염좌님, 일단은 그냥 놔두십시오."
"그게 쉽지가 않을 일인데 어쩌지요?"
"선주에게 후한 사례를 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그건, 연선인이 알아서 해주었으면 좋겠소."
"염좌님, 아무튼 간에 이 일은 남들이 모르게 하는 일입니다."
연개소문이 하는 거듭 당부에 을불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장안성으로 들어간 연개소문은 새달궁으로 갔다. 동화부인은 연개소문의 보고를 받고 나서 물었다.
"호위 무사는 여선을 되찾게 되었단 말을 듣고 어떤 반응을 보였나?"
"이모님, 그걸 말로 표현을 할 수가 있겠습니까?"
"국상은 왜 갑자기 호위 선인이 수국으로 떠나는 걸 허락했을까?"
"철장에 관한 일 외에 수국 땅에서 수행할 임무도 부여받았습니다."
동화부인은 그 말을 듣고 한동안 무슨 생각에 잠겼다가 물었다.
"호위선인도 함께 백제로 떠나는 걸로 염좌에게 알렸단 말인가?"
"그렇습니다. 저는 이모님이 걱정을 하실 바를 미리 예견해서 일을 번거롭게 하지 않려고 그 일을 호위선인과도 의논을 했습니다."
"어떤 의논을 했는가?"
"호위 선인도 일단 백제로 가는 배를 함께 타고 간 뒤 백제에서 수국으로 가는 배를 타고 가서 임무를 수행하기로 했습니다."
"그렇게 계획을 변경시킨 것을 국상도 알고 있는가?"
"국상은 모르시는 일입니다."
"연선인, 그렇다면 참으로 잘한 일일세."
"그렇습니까?"
동화부인은 뜻밖의 돌발 사태로 계획이 바뀌게 된 걸 내심 여간 반기지 않았다. 그 이유는 자신도 계획을 바꿀 생각 때문이었다. 그리고 다음 일은 자신이 직접 을불을 만나 처리하기로 했다.
"연선인, 수고가 많았다. 불공을 드리는 날도 자네가 맡아 수행해야만 할 임무가 매우 중요하므로 끝까지 잘해주길 바라네."
"이모님, 저는 두 분을 무사히 배에 태워드릴 테니 걱정마십시오."
"암, 그래야지. 나는 모든 걸 연선인만 믿고 추진하는 것일세."
동화부인은 이튿날 주랑과 더불어 남몰래 장안성을 나가 을불을 찾아갔다. 그리고 은밀한 의논을 한 뒤 을불에게 그 사실을 연개소문이 절대 모르게 할 것을 당부하고 돌아왔다.
여선은 불공을 드리기 전날 밤 꿈속에서 부친을 만났다. 그런데 여준은 딸에게 말했다. 앞으론 애비를 볼 수가 없게 되었으므로 주랑과 잘 살라는 말을 했다. 때문에 침울함에 젖어 있어 있었다.
"언니, 주랑이 왔어요."
밖에서 주랑의 음성과 방문이 열리고 안으로 들어섰다.
"주랑아, 나는 어젯밤 꿈자리가 하도 사나워서 마음이 울적하다."
"언니, 무슨 꿈을 꾸었기에 그러셔요?"
"꿈속에서 아버님이 앞으론 너와 함께 잘 살라는 말씀을 하셨다."
주랑은 그 말을 듣고 눈물이 왈칵 솟아져 나왔다.
"아버님은 우리가 잘 살기를 바라시는 마음에 그러셨을 거예요. 또 우리가 이렇게 만나게 된 것은 어머님의 혼령이 도우신 걸로 생각돼요."
"주랑아, 근래 꿈속에선 통 뵐 수가 없었던 아버님이라 이상하다."
"아버님은 무사하실 거예요. 오늘 나는 언니에게 좋은 소식을 전할 게 있어서 왔어요. 그래서 언니가 그런 꿈을 꾸게 된 게 아닐까요?"
"무슨 좋은 소식을 전하겠다는 것인가?"
"연선인이 국내성에 갔다가 돌아왔어요."
"그럼, 오라버니 소식을 들을 수가 있었는가?"
"언니, 양신 오라버니는 큰 변을 당할 뻔하셨대요."
여선은 크게 놀라며 반문했다.
"또 큰 변을 당할 뻔했다니 어떤?"
"임무를 수행하고 있던 중에 10여 명의 자객들의 습격을 받았대요."
"어머, 오라버닌 무사하신가?"
"오라버니는 자객들을 전부 제압해 버렸대요."
주랑의 대답에 여선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오라버니가 무사하다니 나로선 더 바랄 게 없겠다."
"언니, 그보다 더 중요한 일이 생겨서 너무 기뻐요."
"무슨 일인데 그러는가?"
"오라버니는 곧 수국으로 떠나는 허락을 받으셨대요."
"그 말 정말이냐?"
여선이 매우 놀라는데 주랑은 목소리를 죽이듯 입을 열었다.
"우리도 불공 길에 나서면 함께 수국으로 떠나게 된대요."
"뭐라구?! 오라버니와 함께 수국으로?"
여선은 기쁨으로 가슴이 마구 쿵쿵 뛰었다.
"주랑아,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가 있단 말인가?"
"나는 방금 전에 대부인으로부터 그 얘기를 듣게 되었어요."
"주랑아, 내가 지금 또 꿈을 꾸고 있는 게 아닌지 모르겠구나?"
"언니, 꿈이 아녜요. 그런데 한 가지 걱정이 없지도 않아요."
"무슨 걱정이냐?"
"우리가 수국으로 가는 건 목숨을 거는 일이나 다름없어요. 그런데 언니는 아기를 밴 몸이라서 여러 가지로 어려움이 클 것 같아서 그래요."
여선은 그 말에 한숨을 쉬고 고개가 수그러들었다. 이번엔 건무의 자식을 배고 있기 때문이었다. 동화부인도 그 때문에 여선을 더욱 떠나게 만들려는 것임을 여선도 모르지 않았다.
주랑은 임신한 몸으로 먼 여행을 하는 걸 걱정하는데 여선이 말했다.
"내 걱정은 말아라. 아무리 어렵더라도 아버지를 찾는 일이 중요하지 않느냐? 내 목숨은 어찌 되건 간에 자식 된 도리를 다 해야 한다."
그런 말을 나누는데 동화부인이 방안으로 들어섰다."
"여선, 주랑으로부터 얘기를 들었는가?"
여선은 떨리는 음성으로 대답했다.
"대부인, 고맙습니다. 이 은혜를 어찌 갚아야 되겠습니까?"
"여선, 그런 말은 그만 두고 앞으로 할 일이나 잘해야 한다."
"백제로 가는 줄로 알았더니 수국으로 가게 되어 더 기쁩니다."
여선이 그런 대답을 하자 동화부인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나는 두 사람을 백제로 보낸 뒤 양신도 백제로 보내려고 했다. 그런데 뜻밖의 일이 일어났으니 모두는 수국 땅에서 잘 살기를 바란다."
동화부인은 그런 말을 하고 주랑에게 당부를 했다.
"주랑, 내일은 차분한 마음으로 움직여야 한다. 주변 사람들에겐 어떤 의심도 사지 않도록 매사에 주의를 기울여 줄 것을 당부하겠다."
그런 말을 하고 이번엔 귀엣말로 또 무슨 얘기를 한동안 나누었다. 주랑은 다 듣고 나서 대답했다.
"대부인, 말씀을 철저히 지켜내겠습니다."
드디어 불공을 드리는 날이 왔다. 동화부인은 여선 모자와 함께 마차를 타고 새달궁을 나섰다. 마차는 휘장을 쳐 속이 들여다보이질 않았다. 거리엔 초문사로 향하는 귀족 부인들의 마차들도 줄을 이었다.
연개소문은 주랑과 더불어 초문사 근처 숲 속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동화부인의 마차가 도착하자 주랑을 놔둔 채 혼자 절 안으로 들어가서 동화부인으로부터 무슨 지시를 받고 나왔다.
귀족부인들은 동화부인과 함께 온 여선을 보고 감탄의 말들을 했다.
"곱기도 하여라."
"하늘에서 하강한 선녀 같네요."
"저렇게 예쁘니 저하께서 오죽이나 아끼실까?"
귀족부인들은 여선에 대한 관심이 커서 화제로 삼았다. 미모가 뛰어난 소문은 들었지만 눈길을 뗄 수가 없을 만큼 아름다워서 수군댔다. 동화부인은 일부러 행사를 느리게 진행시켰다.
동화부인은 해가 질 무렵에 이번엔 이불란사로 향했다. 이불란사는 해안에 가까운 곳이었다. 거기서도 해가 지기까지 불공을 드렸다. 그리고 컴컴해지자 새달궁으로 돌아가기 위해 떠났다.
이제부턴 가는 길에 여선을 감쪽같이 빼돌려 남만상선에 태우는 일만 남아 있었다. 밖이 완전히 어두워진 속에 동화부인과 여선은 마차에 올랐다. 곁에 있는 사람들의 얼굴조차 구별하기가 어렵게 어두워졌고 귀족 부인들도 각자 집으로 떠났다.
동화부인은 새달궁으로 가다가 어디쯤서 소피를 보겠다며 마차를 세웠다. 그리고 아기를 안은 여선과 함께 마차에서 내려 숲 속으로 들어갔다. 숲 속에는 연개소문과 주랑이 대기하고 있었다.
여선은 그곳에 남고 대신 주랑이 빈 포대기를 안은 채 동화부인을 따라 마차에 올라탔다. 주랑은 마차를 타고 가다가 어디쯤서 마차 밖으로 몸을 날려 길가의 숲 속에 떨어졌다.
마부는 물론 다른 마차에 탄 사람들도 그걸 모른 채 가던 길을 계속 갔다. 탈주한 주랑은 연개소문과 여선이 있는 장소로 되돌아 뛰었다. 그때부터 세 사람은 남포로 말을 몰아 떠났다.
남포에 이르자 포구에 대기 중인 남만상선에 을불이 두 여인을 태웠다. 선주는 곧 배를 띄웠다. 그런데 밤바다에서 남으로 향하는 게 아니고 북쪽으로 나갔다. 그러나 을불은 그걸 전혀 몰랐다.
주랑은 배에 오르자 동화부인이 내준 금덩이가 든 두 개의 주머니 중 작은 것을 선주에게 넘겼다. 선주는 동화부인의 부탁을 이미 받았기 때문에 지시대로 움직여 주었다.
연개소문은 배가 어두운 밤바다로 미끄러져 나가자 압록수 하구로 향했다. 아들을 못 낳은 이모와 목숨이 위태한 양신과 여선과 주랑을 위한 일로 뿌듯한 가슴으로 압록수 하구로 말을 달렸다.
"전쟁이 끝나면 나는 주랑 누님을 만나러 백제로 간다."
그러나 남만상선이 수국 땅으로 곧장 가는 줄은 꿈에도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