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쇠나라 33. 구축

33. 구축

by 정완기

33. 구축(驅逐)


요하 하구에서 가까운 안시성은 샛강이 감도는 절벽을 의지해 쌓은 천험의 요새(要塞)였다. 양신은 성주에게 을지문덕의 작전 지시를 전하는 걸로 마지막 임무를 끝내자 마음이 급해 그 밤으로 성을 나섰다.

성주인 연발 장군은 양신에게 기병 10기를 호위로 붙였다. 기병을 이끄는 군관은 오골성까지 안전을 기하고자 해안가를 끼고 남하했다. 양신은 수국에 갈 일로 긴장과 불안감에 젖어서 을지문덕이 퍼뜨리라고 한 말을 잊고 있었다.

"안시성 군관께 여쭙고 싶은 게 있소."

양신이 말을 걸자 군관이 대답했다.

"호위 선인, 뭔지 말씀을 해 보십시오."

"나는 중요 임무를 띠고 곧 수국에 가게 되었소. 그런데 안시성 부근의 포구들은 타국 상선들의 출입이 부쩍 늘었다는 소문이요. 전쟁 통에 교역이 행해질 수가 있을지는 모르나 나도 배를 탈 수가 있겠소?"

"교역이 아닌 다른 이유로 가도 물론 탈 수가 있소."

"타국 상선들은 교역이 아니고 무슨 일로 온다는 말이요?"

"수국의 탈주병들을 상대로 돈벌이를 하려고 태워주는 거요."

"아니?! 탈주병들을 상대로 무슨 돈벌이를 할 수가 있단 말이요?"

"그 이유는 가면서 뭔가 눈에 띄는 것을 보고 설명을 하겠소."

양신은 무슨 말인지 몰라 달빛에 젖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해안을 낀 평야지대는 송이 풀꽃들이 한창 피는 시기였다. 낮에는 붉은색의 꽃들이 장관을 이루나 밤에는 달빛 아래서 보라색을 띠었다. 그때 어디쯤서 심한 악취가 흘러오고 있었다.

"갑자기 웬 고약한 냄새가 이리도 심하게 나는 것일까?"

양신이 중얼거리자 안시성 군관이 대꾸했다.

"시체들이 썩는 냄새요."

"시체라면 수국 군이요?"

"그렇소. 이 부근엔 시체들을 쌓아 둔 데가 많아서 그러오."

군관은 손을 들어 한 군데를 가리키며 말을 세웠다.

"호위 선인, 저기를 보시오."

양신은 안시성 군관이 가리키는 쪽으로 말을 몰고 다가들었다. 가까이 갈수록 악취가 코를 찔렀다. 그곳엔 수십 구의 시체들이 포개져 쌓인 채 달빛을 받고 번쩍거리고 있었다.

안시성 기병들은 멀찍이 떨어진 데서 멈추고 다가들려 하질 않았다. 양신은 악취로 속이 메슥거리고 토할 것 같아 더는 접근하질 못하고 코를 싸쥐고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안시성 군관이 말했다.

"저 시체들은 낮엔 파리 떼가 들끓고 해가 지면 들짐승들이 대가리를 처박소. 그 처참한 광경을 차마 눈으로 볼 수가 없소."

양신도 기가 막히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나는 그동안 요동 땅을 거의 안 돌아다녀 본 데가 없었소. 때문에 어디서나 적군의 시체를 보게 되었지만 여기처럼 많은 데는 처음이요."

"수국 군은 본국으로 보낼 시체들을 배에 싣기 전에 한 군데 모아 두려고 전부 이리로 보내왔기 때문이요."

"시체들은 왜 전부 알몸이 되었는지 모르겠소. 우리가 그랬소?"

"우리가 왜 그런 짓을 하겠습니까?"

"그럼 누가 저런 짓을 한단 말이요?"

"수국 군 패잔병들의 소행이요."

"패잔병들은 왜 그런 짓을 한단 말이요?"

"수국은 시체 운송을 남만 상선들에 맡겼소. 그런데 남만 상선은 시체를 실어 나르기보다 탈주병들을 태우는 게 더 돈벌이가 되오. 그 소문을 듣고 탈주병들도 이리로 몰려들게 되었소."

"탈주병을 태우는 것과 시체가 알몸이 된 게 무슨 관계가 있소?"

"탈주병들이 남만 상선을 타자면 그만한 대가를 지불해야 하오."

"얼마 큼의 대가를 지불해야만 되오?"

"처음엔 군복을 한 벌만 주면 태워줬는데 지금은 세 벌 이상이요. 때문에 죽은 동료들의 시체에서 군복을 벗겨내게 되는 것이요."

"그렇다고 해서 어찌 동료 시체에서 옷을 벗길 수가 있단 말이요?"

"고향으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무슨 짓인들 못하겠소?"

양신은 안시성 군관의 말을 듣고 비로소 이해가 되었다. 그러나 죽은 자에 대한 비윤리적인 태도는 살인보다 더한 짓들이라 분개했다.

"남만 상선을 타면 수국 땅 어디까지 갈 수가 있소?"

"요서 땅의 적당한 해안에다 내려 주고 만답니다."

양신은 수국 군 탈주병이 늘면 늘수록 적의 전력은 약화되고 지휘 체계도 무너져 고구려에 유리해질 것 같았다. 그러나 너무도 끔찍한 광경 앞에 몸이 떨리는데 안시성 군관이 말했다.

"그런 소문이 점점 퍼지면서 요즘은 요서의 수국 어부들까지 주낙배를 끌고 와서 돈벌이에 가세를 서해 날로 북적이게 되었답니다."

"어부들까지 돈벌이 때문에 그런단 말이요?"

"수국에선 양광이 곧 패퇴해서 회군을 하게 될 것이란 소문이 파다하다고 하오. 때문에 상인들은 어부들을 시켜 그런 일을 하게 만든다오."

"상인들은 왜 그런 짓을 시킨단 말이요?"

"상인들은 헌 군복을 수집해 두면 앞으로 큰 돈벌이가 된다오."

"헌 군복을 어디에 쓰오? 수국 백성들이 사서 입는 것일까?"

"약삭빠른 상인들은 미래를 내다보고 장삿속으로 하는 짓이요."

"미래를 내다보고 장삿속이라니 그건 무슨 말이요?"

"양광은 가을이 오면 일단 철수를 할 것이요. 그러나 그걸로 전쟁을 끝낼 위인이 아니라고 본다오. 내년 봄에 재침공에 나설 걸로 보오."

"재침공에 나선다? 나도 그럴지도 모르겠단 생각은 드오."

"수국은 내년에 다시 동원령을 내리고 백성들은 또다시 끌려 나오게 될 것인데 그렇게 되면 생길 문제들이 많이 생긴 다오. 나라에선 무기만 지급하지 군복을 지급하기가 어려울 형편이라오. 때문에 백성들은 각자 가 군복을 지어 입기가 힘들어 헌 군복이라도 사 입을 것이라오."

"수국은 부고가 넘쳐나는 나라로 알려졌는데 왜 그렇단 말이요?"

"이번 전역으로 넉넉했던 재정은 전부 바닥이 난 지경이라오."

"하긴 재정이 거덜 날 정도로 허비가 컸을 것이요."

양신이 맞장구를 치자 안시성 군관은 다른 말도 했다.

"수국 상인들은 군복만 아니라 무기도 사들이고 있다오."

"무기들도 사들인다?"

양신은 중얼거리고 나서 짐작이 갈만한 일로 여겼다.

수국은 전역에서 병력만 아니고 무기 손실도 매우 컸다. 무기 제작엔 많은 물량의 철정이 필요한데 한꺼번에 많이 확보하긴 쉽지가 않다. 장사꾼들은 그걸 알고 그러는 것으로 짐작했다.

양신은 새벽녘에 백암성에 당도했다. 백암성을 포위했던 수국 병력은 포위를 풀고 어디로 떠나 없었다. 쉽게 성 안으로 들어가자 먼저 와서 기다리던 연개소문이 반갑게 맞았다.

"형, 나는 얼마나 초조하게 기다렸는지 모르겠소."

"연선인, 내가 타고 갈 배편은 준비가 되었나?"

양신의 질문에 연개소문은 고개를 끄덕이는 데 성주인 연나 장군이 들어오며 반갑게 외쳤다.

"호위 선인, 무사히 다녀왔군?! 지금 안시성 쪽의 상황은 어떤가?"

"안시성은 아직 수국 군의 포위가 풀리지 않았습니다."

"안시성은 그렇지만 다른 데는 사정이 달라졌다. 수국 군은 여러 군데서 포위를 풀고 각 처에서 요동성으로 향하고 있다는 소문이다. 양광은 요동성으로 총병력을 집결시키라는 명령을 내린 것 같다. 그런데 많은 병사들이 안시성 쪽으로 간다는 소문도 들려 갈피를 잡을 수가 없다."

"성주님, 안시성 쪽으로 가는 병력은 대부분이 탈주병들입니다."

"탈주병들은 왜 그쪽으로 가는 것일까?"

"본국으로 도망치려는 탈주병들이 집단으로 움직이는 것입니다."

"그런가? 나는 그쪽의 철광산을 점령하려고 병력을 투입시키려는 게 아닐까 하고 큰 우려를 금치 못했는데 그렇다면 안심이 되는군."

"소관은 안시성을 다녀오는 길에 처참한 광경을 목격했습니다."

"어떤 광경을 목격했기에 그러는가?"

"전사한 수국 군 시체들이 알몸으로 쌓여 있는 광경입니다."

양신은 자신 봤던 광경을 설명했고 그 얘길 듣고 난 연나 장군은 어이가 없어하면서도 요동성에 대한 걱정은 떨쳐낼 수가 없었다.

"그 지경에 이르렀음에도 양광은 요동성만은 포위를 풀지 않을 것 같다. 뿐더러 요동성을 함락시키는데 더욱 박차를 가할 모양이다."

"성주님, 소관은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다른 생각을 하다니 어떤 생각인가?"

"양광은 성동격서의 전법을 쓰려는 게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듭니다."

"양광이 성동격서의 전법을 쓴다? 무엇 때문에?"

"가을철로 접어들었습니다. 요동 땅은 곧 혹한의 겨울철이 닥치게 됩니다. 그러나 양광은 성을 한 군데도 떨어뜨린 데가 없습니다. 거기다 장안성 직공에서 태반의 병력을 상실하고 말았습니다. 이래저래 철수를 고려하지 않을 수가 없는 상태에 있습니다."

"호위 선인의 말대로 철수를 한다면 오죽이나 좋겠나? 그러나 합하도 말씀을 하셨지만 나도 양광은 어떻게든 요동성을 함락시켜 근거지를 한 군데라도 만들어 놓고 철수를 할 것으로 본다. 그러기 위해 요동성으로 총병력을 집결시키려는 것으로 보고 있다."

"성주님, 양광이 그러는 데는 또 다른 의도가 있다고 봅니다."

연나 장군은 그런 말을 하는 양신을 지긋이 바라보았다. 검술만이 아니고 지모와 궁량도 뛰어나다는 생각을 해서 각별한 관심을 두고 있었던 터라 구체적으로 의견을 한번 들어보고 싶었다.

"이번 전쟁에서 호위 선인은 중요한 연락임무를 수행하고자 넓게 전선을 돌아다녀 본 사람이다. 거기다 적잖은 전공까지 세워서 호위선인은 고구려 군의 귀감이 되는 유일한 군관이란 생각을 하고 있다."

"성주님, 지나친 과찬의 말씀이십니다."

"과찬이 아니다. 합하께서도 호위 선인의 능력을 잘 아시고 그런 임무를 부여하셨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번에 적국에서 수행할 새 임무를 새로 부여하신 것이다. 합하께선 이런 말씀을 하신 적도 있다."

"합하께서 어떤 말씀을 하셨기에 그러십니까?"

"자기에겐 두 명의 수제자가 있는데 하나는 시동 선인이고 또 하나는 호위 선인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런데 특히 호위 선인은 장차 대 전략가가 될 수가 있는 소질이 충분하단 말씀도 하셨다."

"성주님, 그런 말씀은 당치도 않겠습니다."

양신이 겸양의 태도를 보이자 연개소문이 그 말을 받았다.

"성주님 말씀에 저도 동의합니다. 저는 합하의 제자 중 한 명이 될지는 모르나 호위 선인의 크나 큰 궁량은 따를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따를 수가 없게 많은 군공을 세웠음에도 아무런 대접도 못 받고 도리어 이 나라에서 쫓겨나는 몸이 되었으니 통탄스러울 뿐입니다."

연개소문이 분개하자 연나 장군도 언짢은 표정으로 고갤 끄덕였다.

"그러게 말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생각하면 잘 된 일일 수도 있다."

"성주님은 무엇 때문에 잘 된 일로 보신단 말씀입니까?"

"사나이는 넓은 세상을 견문해 둘 필요가 있다. 나도 젊어서 중원 땅을 여러 번 돌아다녔기 때문에 한족들의 습속을 어느 정도는 아는 편이다. 때문에 이번 전쟁을 무난히 치러낼 수가 있었다는 생각을 한다."

연나 장군의 말에 관심이 커진 양신이 입을 열었다.

"성주님, 소관은 전혀 모르는 한족에 관한 말씀을 듣고 싶습니다."

"한족의 특성은 한 마디로 이익에 밝고 경쟁심이 강하다는 점이. 그게 큰 장점이면 큰 결점은 단결력의 부족이다. 이번에 양광은 그처럼 호대한 병력을 끌고 왔음에도 이렇다 할 전과를 못 거둔 것은 그런 결점 때문이다. 나도 합하의 생각대로 양광은 요동성을 손에 넣고 나서 철군할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런데 호위 선인은 다른 예상을 하는 것 같은데 그에 대한 소견을 한번 듣고 싶다."

양신은 그 말에 대답했다.

"소관은 합하께 이런 건의를 드렸습니다."

"어떤 건의인가?"

"수국 군은 요동 땅에서 엄동설한을 보내긴 힘이 들기 때문에 철군을 하지 않을 수가 없음은 누구나 예견이 되는 일입니다. 그러나 요동 땅에서 성을 하나도 점령하지 못하면 체면이 말이 아니게 되고, 전략적으로도 아쉬움이 너무 크기 때문에 차선책으로 요동성보다 점령을 하기가 쉬운 성을 노리게 될지도 모른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양광이 다른 성을 노린다면 안시성이 되는 것일까?"

"소관은 안시성보다 개모성이 될 걸로 봅니다."

"개모성이라고?"

"개모성을 노리는 목적은 크게 두 가지로 보겠습니다."

"두 가지란 어떤 것인가?"

"개모성에 사는 인총은 이민족의 숫자가 절반이 넘기 때문에 전투가 벌어지면 내부적인 동요가 크게 일어날 우려가 크다는 점입니다."

"두 번째 이유는 무엇인가?"

"양광은 개모성마저 함락이 어려울 땐 철수를 할 수밖에 없는데 거기에도 문제가 있습니다. 철수는 무엇보다 안전을 기해야 하는데 그 문제를 해결하는 데도 개모성 부근에서 찾을 수가 있다는 점입니다."

"안전한 철수를 왜 개모성 쪽에서 찾는단 말인가?"

"벌써 가을철로 접어들었고 개모성은 요하의 중상류에 접해 있습니다. 가을엔 요하 중상류는 강물이 크게 줄었기 때문에 급한 상황에 몰릴 경우 배를 타지 않고도 대병력이 그대로 강을 건너 갈 수가 있습니다."

"그렇겠다! 개모성 부근의 요하는 강폭이 매우 넓은 대신 물이 얕아서 사람도 마차들도 그냥 건너다닐 수가 있다. 합하의 말씀대로 그런 생각을 하는 호위 선인을 큰 전략가가 될 만한 사람이다!"

"성주님, 소관은 많은 전령 임무 수행하느라 요동 땅을 두루 다녀 본 결과 그런 생각을 해보게 되었을 뿐입니다."

연나 장군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호위 선인은 양광에게 또 다른 고민이 있다면 어떤 걸로 보는가?"

"합하의 말씀을 토대로 해서 소관의 생각을 덧붙여 보겠습니다."

"말해 보게."

"소관의 추측으론 지금 수국 백성들의 고통과 불만은 여간 크지 않을 것입니다. 때문에 큰 불만은 내란을 일으키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양광은 철군을 서두르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입니다."

연나 장군은 그 말도 타당성이 크다는 판단에 입을 열었다.

"나도 수국의 내부적인 불안성이 큰 것에 동의한다. 그러나 어마어마한 대병력을 동원시키고도 아무런 소득이 없이 철군을 하게 될 경우 양광의 체면이 여간 크게 깎이지 않을 것이다. 그런 우려 때문이라도 개모성 공격에 적극성을 띠게 될 것으로 예상이 된다. 그러나 개모성이라도 함락시키지 못하면 내부적인 반란이 일어날 확률은 커지게 될 것이다."

"성주님은 그 이유에 대해서 말씀해 주십시오."

"거기에도 한족의 습성이 큰 작용을 하게 될 것이다. 한족은 아무리 큰 덩어리로 합쳐도 개인적인 이해타산에 따라 모래알처럼 쉽게 흩어지는 게 된다. 그건 이번 전쟁에서도 바로 큰 결점으로 드러난 경우가 되겠다. 때문에 유례가 없을 만큼 많은 탈주병들이 생겨나고 부대 간의 협조가 잘 이뤄질 수가 없었고 그 때문에 우린 크나 큰 위기를 모면했다고 말을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양광은 앞으로 어떻게 나갈 것으로 보십니까?"

"한족은 이익을 추구할 수만 있다면 적과도 손을 잡는 걸 불사하지 않는다. 때문에 이번에 양광이 전역을 일으킨 이유에도 이익을 추구하려는 목적이 컸다고 볼 수가 있다. 양광은 이번 전쟁에서 되도록 고구려 백성들을 안심하게 만드는데 힘을 썼다. 그러나 떠나게 된 마당엔 달라질 것이다. 앞으론 약탈을 조장하게 될 것이라 병사들은 고구려 백성들의 농기구를 비롯해 철제품들을 몽땅 뺏으려고 들 것이다. 그렇게 해야 병졸들로부터 환심을 살 수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는 내일부터 농민들에게 농기구를 간수해 산속으로 피신하라는 명령을 내리겠다."

"성주님, 한족의 장점은 어떤 것으로 보십니까?"

"한족은 대인 관계를 매우 중요시한다. 그것도 이익을 위해서이지만 한번 맺은 관계는 오래 유지를 하려고 드는데 그건 큰 장점이 되겠다. 호위 선인은 수국에 가면 그 점을 유념해 대인 관계부터 힘을 쓰게."

연나 장군은 적지로 들어갈 양신의 어려움이 클 것이나 능히 극복하고 헤쳐 나갈 능력을 지닌 사람으로 보고 마음 편히 작별했다. 양신은 연개소문과 백암성을 나서 압록수 하구로 향했다.

양신은 말을 몰면서 궁금한 점부터 물었다.

"연선인, 지금쯤 두 사람은 남만 상선을 타고 당도했을까? 또 압록수 하구에 도착하면 나는 어떤 방법으로 그 배를 타게 되는가?"

"형은 압록수 하구로 가서 내가 시키는 대로만 하면 되오."

"연선인, 나는 자네에겐 어떻게 보답을 해야 좋을지 모르겠네."

연개소문은 그 말을 듣고 다른 말을 꺼냈다.

"형은 아들까지 찾고 은애 하는 여인과 함께 살게 되어 기쁘겠소."

"그럴 수가 있게 된 건 꿈만 같고 모두가 연선인의 덕분일세."

양신은 말하고 씩 웃었다. 그러나 연개소문은 한껏 들뜬 양신의 앞날을 축복해주면서도 착잡한 마음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는 주랑과 헤어지게 되었기 때문이다.

"형은 앞으로 수국 땅에서 임무를 수행하고 난 뒤엔 꼭 백제로 돌아가야 만하오. 그러자면 무엇보다 살아남아야만 하오. 나도 언제고 백제로 가서 형과 주랑 누님을 다시 만나 볼 수가 있게 되길 기대하오."

"암, 살아남아야지. 그렇게 되도록 노력을 기울일 것이나 수국 땅에선 또 무슨 일을 겪게 될지는 예측 불허라 마음을 놓을 수가 없네."

연개소문은 그 말에 고개만 무겁게 끄덕였다.

압록수 하구의 해안가에 이르자 말에서 내렸다. 두 사람은 말에서 내렸고 연개소문이 양신에게 깃발을 하나 내밀었다.

"형의 이름을 크게 쓴 깃발이요."

"이런 깃발을 무엇에 쓴단 말인가?"

"압록수 하구에 이르면 바다를 지켜보고 있다가 큰 배가 해안으로 접근해 들면 그 기를 흔들면 남만상선 쪽에서 알아보고 육지로 작은 배를 보내 줄 것이요."

"그렇게 하겠네."

연개소문은 그런 말을 남기고 하고 다시 말을 탔다.

"형, 나는 이만 여기서 돌아가겠소."

"연선인, 내가 배를 타는 것을 보지 않겠나?"

"물론 그러고 싶소. 그러나 배에 타고 있을 주랑 누님을 생각하면 이곳에 더 있을 수가 없겠소. 형은 이런 내 마음을 헤아려 주기 바라오."

"연선인, 그 마음을 잘 알고 있네."

"형, 나는 주랑 누님을 보내고 싶지가 않소. 내가 처음 순정을 바쳐본 여인이었소. 나는 그동안에 고백을 못했지만 그런 마음을 누님이 알아줄지는 모르겠소."

"주랑도 잘 알고 있을 것으로 생각이 되네."

"나는 남포에서 누님에게 고백을 하려다가 그만두었소."

"연선인, 왜 고백을 하지 못했는가?"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주랑 누님의 마음이 아니겠소? 날 헤아려 주는 마음이 있는지 그걸 알 수가 없어 용기가 나지 않았는데 후회가 되오."

"연선인,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만나보지 그러나?"

"그러면 더 괴로울 것 같소. 대신 형에게 당부를 할 게 있소."

"어떤 당부를 하려는가?"

"되풀이하는 말인데 형은 수국 땅에서 꼭 살아남아야 하오."

"나도 왜 그러고 싶지가 않겠나?"

"형의 목숨이 붙어있어야만 나는 다시 볼 수가 있소."

"그렇겠군! 연선인, 나는 꼭 살아남겠네."

"형, 그럼 주랑 누님도 잘 보호해 주오."

연개소문은 말을 마치고 양신이 타고 온 말도 끌고 어둠 속으로 떠났다. 혼자 남은 양신은 갈구했던 이름이 밖으로 흘려냈다.

"여선!"

새달궁의 집사(執事)가 국내성에 왔다. 그리고 동화부인이 쓴 서신을 건무에게 바쳤다. 건무는 너무도 의외란 생각으로 서신을 읽고 난 뒤 두 손을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

건무가 읽은 서신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주랑이 백제로 갈 뜻을 굽히질 않아 을불 염좌에게 돌아갈 선편을 구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런데 새달궁에서 함께 지냈던 주랑은 불공을 드린 날 밤 여선을 데리고 도망을 쳐서 난감할 따름입니다.

"여선이 도망을 쳤다고?!"

건무가 놀라자 집사는 모기소리처럼 작은 음성이 되었다.

"저하, 무어라 드릴 말씀이 없사옵니다."

건무는 밖에다 대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도해선, 어디에 있느냐? 들어오라."

놀란 도해선이 뛰어들어왔다.

"저하, 무슨 일이 있사옵니까?"

"이 서신을 읽어 봐라!"

도해선은 서찰을 읽은 후 안색이 하얗게 변했다.

"소인은 양신이 어디에 있는지부터 알아야 봐야 하겠습니다."

"갑자기 양신을 왜 쳐드는가?"

"저하, 그럴 필요가 있습니다."

"그럴 필요가 무엇인가?"

"소인은 양신이 저지른 일로 의심이 들기 때문입니다."

"그 자가 어떻게 그런 일을 저지를 수가 있었단 말인가?"

"양신은 주랑과 은밀하게 연통을 하면서 일을 꾸민 게 분명합니다."

"그게 무슨 소린가? 국상은 철장에 관한 일을 알아보게 하려고 그 자를 수국으로 보내게 된 것은 너도 잘 알면서 그런 소릴 하는가?"

"저하, 소인은 늘 경계를 소홀히 하지 않다가 국내성으로 오게 되는 바람에 일을 당하게 되고 말았습니다."

"국상은 남포에서 배를 타고 간다고 했는데 혹시 거기서?"

"저하, 그렇습니다. 양신은 안시성으로 가지 않았을 것입니다."

"무슨 증거로 그러는가?"

"저하, 갑자기 수국으로 떠나게 되었다는 말이 돌 때부터 소인은 어딘지 수상쩍은 데가 있다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국상은 너 때문에 양신을 수국으로 보낸다는 말도 했지만 너는 그 자에 대한 반감이 커서 무리한 추측을 하는 게 아닐까?"

"저하께선 먼저 국상부터 만나보셨으면 합니다."

"국상을 왜 만나보라는 것인가?"

"이번 일을 전하시고 반응을 살피실 필요가 있겠습니다."

건무는 고개를 끄덕이고 몸을 일으켜 세웠다.

"당장 가서 만나보겠다."

잠시 후 건무는 을지문덕의 장막 안으로 들어섰다.

"저하, 그렇지 않아도 제가 찾아뵈려던 참이었습니다."

건무는 그 말엔 대답을 않고 들고 간 서신을 내밀었다. 을지문덕은 서신을 받아 읽은 뒤 안색이 굳어들었다. 그리고 매우 난감한 표정으로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저하, 어쩌다 이런 일이 생기게 되었단 말씀입니까?"

"국상은 이 일을 놓고 무슨 짐작이 가는 게 없소?"

을지문덕은 상상도 못 할 사건이 터진 터라 은근히 걱정이 크지 않을 수가 없었다. 충격과 동시에 건무가 그 일을 놓고 자신에게 어떤 의심을 두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컸다.

"저하, 제가 무슨 짐작을 할 수가 있는 게 있겠습니까?"

"까마귀 날자 배 떨어진 격이라 그렇소. 국상이 호위 선인을 수국에 보내자 사건이 터졌으니 나로선 이상한 생각이 들지 않을 수가 없소."

"저하께선 이 점부터 먼저 생각해 주십시오."

"어떤 점을 말이요?"

"서신엔 주랑이 백제로 가는 배편을 구했던 걸로 되었습니다. 그러나 호위 선인은 남만상선을 타고 수국으로 갔으니 정 반대 방향입니다."

"그 자가 백제로 가는 배를 함께 타고 갔을지도 모르지 않소?"

을지문덕도 그 말을 전적으로 부인만 할 수도 없다는 생각이었다.

"저하, 곧 을불 염좌에게 사실 여부를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국상, 아무래도 그 자가 여선을 데리고 도망을 친 것 같소."

건무는 점점 양신과 함께 간 것에 강한 의심을 두는 태도를 보였다.

"저하, 저는 그럴 가능성은 전혀 없다고 봅니다만."

"무슨 근거로 그런 말을 하는 것이요?"

"이런 설명을 드리고 싶습니다. 대부인의 서신을 보면 주랑은 불공을 드린 날 밤에 떠난 걸로 되었습니다. 그러나 호위 선인이 국내성을 떠난 것은 그보다 이틀 후였습니다. 또 호위 선인이 안시성으로 간 것도 확인을 할 방법이 있으므로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오."

"안시성으로 가지 않고 곧장 남포로 갔을 수도 있지 않소?"

건무의 말투는 점점 추궁조로 바뀌어 갔다. 을지문덕도 까닭을 모르게 연개소문을 떠 올리며 어딘지 모를 의문이 생기게 되었다.

"저하 그럴 수도 있을지 모르겠으나 우선 호위 선인이 안시성으로 갔는지부터 알아보고 다시 생각을 해 볼 일입니다. 안시성엔 그가 도착한 날짜와 떠날 날짜가 기록으로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을지문덕의 말에 건무는 다른 말을 꺼냈다.

"안시성에 사람을 보내면 그걸 확인할 수가 있음은 나도 알고 있소. 그러나 그 자가 남포로 가서 배를 함께 탔다면 국상은 어찌할 것이요?"

건무의 질문에 을지문덕도 대답을 할 말이 없었다. 만약에 그런 일이 일어났다면 분노와 낭패감을 주체할 수가 없을뿐더러 건무가 무슨 일을 벌일지 몰라서 두려움마저 일었다. 그런데 또다시 연개소문이 머리에 떠올랐다. 그에 대한 어떤 의심이 일었기 때문이다.

"저하의 의문과 분노하심은 이해가 되옵고 송구스럽습니다. 그러면 제가 사람을 백제로 보내어 알아보겠으니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오."

"나는 사실 여부만 알아보려는 게 아니오. 여선을 데려오지 않으면 안 되므로 나 역시 도해선을 백제로 보낼 생각이요. 그러므로 국상은 백제국의 좌장에게 서찰을 써서 여선이 돌아오게 만드는데 도움을 주시오."

"저하, 지금 서신을 쓰겠습니다."

을지문덕은 즉각 지필묵을 챙겨 글을 썼다. 건무는 서찰을 받아 들고 나서도 회의적인 표정과 분개한 감정을 드러내는 음성으로 말했다.

"국상, 혹시 백제가 아닌 수국으로 간 것은 아닌지 모르겠소?"

"저하, 저는 수국 쪽에도 알아볼 길은 있습니다."

건무는 그런 대답을 들었으나 절망적인 심경은 떨칠 수가 없었다. 더욱이 땅이 넓은 수국에서 사람의 행방을 찾긴 백사장에서 바늘을 찾기나 다름이 없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저하, 양신은 수국에서 자리를 잡게 되면 제게 연락을 취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야만 새로운 임무를 지시하고 보고를 받을 수가 있습니다."

건무는 그 말에 좀 희망을 걸듯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을지문덕은 낙망에 빠진 건무를 위로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막판으로 몬 수국 군에 대한 군사 작전도 급해서 입을 열었다.

"저하를 찾아뵈려던 말씀을 드려야 하겠습니다."

"무슨 일이요?"

"저하, 섭섭하게 들리시겠으나 지금은 수국 군의 움직임에 대비할 일도 급하게 되었습니다. 그 일을 의논하러 찾아뵈려던 참이었습니다."

건무는 고개만 무겁게 끄덕여 보였다.

"저하, 적을 살핀 결과 이상한 동태를 주목하게 되었습니다."

"어떤 점이요?"

"요즘에 요동성은 전에 없이 적의 총병력이 집결되고 있습니다."

"적은 지금까지 요동성 공격에만 매달렸으니 그럴 수밖에 없지 않소?"

"양광이 요동성 공격을 강화시킨 데는 다른 목적도 있는 듯합니다."

"다른 목적이 있다는 건 무슨 말이요?"

"요동성이 아닌 다른 성을 공략하고자 방향을 틀 것 같습니다."

"국상, 다른 성이라면 어디가 되겠소? 안시성이요?"

"안시성이 아니고 개모성입니다."

"개모성을?"

"양광은 요동성 함락이 어렵다는 판단 때문에 일단 총병력을 집결시켜 공격을 강화하려는 것처럼 보이 뒤 개모성으로 이동할 것 같습니다."

"요동성 공격을 강화시키는 게 아니고 개모성을 공격한다?"

"2, 3일 내로 개모성으로 병력을 발진시킬 것으로 예상합니다."

"국상의 말대로 요동성이 아닌 개모성이라면 왜 그러는 걸로 보시오?"

건무의 질문에 을지문덕은 언젠가 양신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양광은 요동 땅에서 중요한 성을 하나 취해 거점으로 삼는 큰 목표는 실패했습니다. 그러나 요동 땅에 머물 발판이 있어야 장기전으로 들어갈 수가 있다는 생각은 변함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동성 함락은 어렵기 때문에 조금 쉬울 수가 있는 개모성으로 목표를 바꾼 것입니다."

"국상의 예상은 나도 가능성은 크다고 보오."

"계절은 이미 가을로 접어들고 겨울엔 전투가 불가능합니다. 때문에 개모성이라도 차지할 수가 있다면 거길 근거지로 삼아 내년 봄에는 전면적인 공세를 재 시도해 볼 수가 있겠다는 의도인 것 같습니다."

"아무튼 간에 개모성도 요동성만큼 매우 중요한 성이요. 만약에 개모성을 잃게 된다면 요동성 못지않게 큰 타격을 받게 될 수도 있소."

"저하, 우린 병력은 물론 무기마저 고갈 상태가 되었습니다. 더욱이 개모성을 적에 내주면 유목민과 연계마저 끊기는 타격을 받게 됩니다."

건무도 심각한 표정으로 물었다.

"국상은 그에 대한 어떤 대책을 세우고 있소?"

"우리도 병력을 개모성 쪽으로 돌려 대비를 해야 하겠습니다."

"그런데 나는 한편으로 의심이 드는 바가 없지도 않소. 혹시 양광은 요동성으로 집결시킨 병력 중 일부를 다시 압록수 쪽으로 돌려서 장안성 공격을 재 시도하려는 게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일게 되오."

"저하, 적이 대병력을 개모성 쪽으로 이동시키려는 징후는 이미 여러 군데서 포착됩니다. 저는 양광이 장안성 재공격을 시도할 만큼 어리석진 않다고 봅니다. 양광은 또 다른 불안감을 느끼는 게 있습니다."

"양광이 또 무슨 불안감을 느낀다는 말이요?"

"개모성 공격마저 여의치가 않으면 철수할 수밖에 없습니다. 철수를 할 땐 안전을 기해야 하므로 요하의 중상류 쪽을 택하려는 것입니다."

"국상은 양광이 후퇴를 할 자로 보시오? 그 자는 그럴 리가 없소."

"그럴 이유는 또 있습니다. 지금 수국 내부에선 반란이 일어날 조짐이 여러 군데서 보인다는 소문이 들려오고 그럴 가능성도 큽니다."

"수국 내부에서 반란이 일어날 조짐이 보인다?"

"수국 백성들은 무리한 전역으로 여간만 큰 고통을 겪지 않았습니다. 그로 인해 민심의 이반이 커지고 반란 징후를 보이고 있습니다. 도처에서 도둑 떼가 횡행하고 있다는 게 전초전입니다. 뿐만 아니라 수국 군 진중에선 장졸들의 동요가 너무 커서 이래저래 문제가 큽니다."

"나도 그 점은 벌써부터 짐작을 하던 바요. 그동안에 내호아와 밀통이 단절되었는데 다시 해 와서 수국 내부 사정을 어느 정도 알게 되었소. 모반자들의 준동이 점점 심해져 고무적인 일로 보고 있소."

"저하, 그건 우리에겐 큰 희망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거기다 수국 장수 중 병부시랑으로 있는 곡사정은 제게 망명까지 타진해 왔습니다."

"곡사정은 서역 출신인데 무슨 사정이 있는 게 아니오?"

"근래에 양광의 눈에 나서 불안감을 크게 느끼고 있는 듯합니다."

"그렇다면 그 자의 망명도 유도를 해보시오."

"저하의 말씀을 듣고 저는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제가 호위 무사를 수국으로 보낸 데도 그와 연관된 일을 시킬 목적이 있었습니다."

"그에 연관될 일이란 건 어떤 것이요?"

"저는 수국의 양현감을 모반을 일으킬 첫 번째 자로 꼽고 있습니다."

"국상은 양현감하고 친교가 있는 걸로 아는데 왜 그렇게 보오?"

건무의 질문에 을지문덕은 설명을 더 해주었다.

수국의 예부 상서인 양현감은 양광한테 부친이 목숨을 잃어 원한이 컸다. 그러나 자신도 살자면 전역에 출전해 군공을 세워야 했다. 그런데 양광은 후방의 병참과 병력 수급을 관장하는 일을 맡겼다.

"양광은 전과를 올리지 못한 채 회군을 하면 그 책임을 다른 데서 찾을 것입니다. 장수들도 병참과 병력 수급이 잘 이뤄지질 않아 전과가 부진했다고 불평을 했답니다. 그 책임을 물을 때 일 순위에 들 양현감은 이왕에 죽을 판이라면 반발이라도 해보지 않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양현감이 모반할 확률은 매우 크게 될 것이요."

"저하, 저는 그런 양현감의 모반을 획책할 공작을 펴고자 합니다."

"어떻게 말이요?"

"호위무사를 수국으로 보낸 데는 그 점도 유념한 일입니다. 철장의 일도 알아보며 양현감과 접촉해서 모반을 조장하게 하렵니다."

건무도 전쟁을 유리한 국면으로 전환시키는 데는 수국의 모반 세력을 부추기는 것도 한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동감과 큰 기대를 걸고 돌아가면서도 도무지 울분을 가눌 수가 없었다.

도해선은 어두운 표정의 건무에게 물었다.

"저하, 국상으로부터 무슨 말을 들으셨습니까?"

"국상에게서 신통한 대답을 들을 수가 없었다."

"그럴 줄 알았습니다. 소인은 지금부터 남포로 떠나겠습니다."

"남포로 가면?"

"먼저 을불 염좌부터 만나서 추궁을 해보겠습니다. 그렇게 되면 모든 상황을 파악할 수가 있고 그런 뒤에 다음 행동으로 옮기겠습니다.

"다음 행동이라니?"

"양신의 행방을 알아내려면 수국으로 가는 것도 불사하겠습니다."

"국상은 네가 백제로 가서 도움을 받을 수 있게 소개장을 써주었다. 그런데 만약에 양신이 수국으로 갔다면 문제가 달라지는 게 된다."

"소인은 일단 백제로 먼저 갔다가 안 되면 수국으로 가겠습니다."

"네가 수국으로 간들 무슨 일을 할 수가 있겠는가?"

"소인은 수국에서 도움을 받을 데가 많은 걸 잘 아시질 않습니까?"

"아무튼 간에 먼저 백제부터 갈 일이다."

"우선 을불 야좌부터 만나야 어디로 가야 할지를 알게 됩니다."

도해선은 대답하고 즉시 밖으로 나가 말에 올랐다.

황제는 전무후무의 대병력을 동원한 친정(親征)의 결과는 사면초가에 몰린 신세가 되었다. 이젠 더 이상의 무리수를 두기보다 철수를 해서 내부 단속을 하는 게 더 시급했다. 장수들의 건의를 받아들인 형식을 취해서 전 병력이 개모성으로 이동할 것을 명령했다. 요동성을 포위한 10만 병력은 그냥 놔두고 30여 만 명이 움직였다. 그만한 병력을 유지할 수 있었던 원인은 탈주병들이 다시 모여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출병 때의 절반도 못 되는 오합지졸들로 개모성에 당도했지만 포위를 하지 않고 강변에 진지를 구축하게 했다.

을지문덕은 산속에 10여 만 병력을 포진시키고 적의 동태를 관찰했다. 그런 가운데 건무가 주재하는 작전회의를 열었다. 장안성 방어에선 이렇다 할 전공을 못 세운 터라 이번엔 자신이 총지휘를 할 속셈이었다.

건무는 위엄을 세우면서 입을 열었다.

"국상, 양광은 근위군을 비롯해 30여 만에 가까운 병력을 끌고 왔소. 개모성 공격에 들어가면 우린 장안성 때처럼 배후 공격을 해야 하오."

"저하, 적이 개모성 공격에 나설지는 의문이 듭니다."

"공격에 나설지 의문이라니 무슨 소리요?"

"양광은 개모성 공격마저 포기하고 철수로 들어갈 수도 있습니다."

을지문덕은 그런 대답을 하고 부연 설명을 붙였다.

수국 군은 요동성을 포위한 10만 병력마저 철수시켜 곧 철수를 할지도 모른다는 예상을 했다. 그러기 전에 마지막 공격을 한 번 더 가할 필요성을 제기했다. 수국 병력은 강변에 진지를 두고 있기 때문에 밀어붙이면 그대로 요하 너머로 구축할 수도 있다는 주장을 폈다.

건무는 을지문덕의 말을 듣고 이의를 제기했다.

"국상은 적을 쉽게 구축할 수가 있다고 생각하오? 강변에 포진한 호대한 병력을 공격하는 건 매우 위험하고 별 소득이 없을 일이요."

"저하, 적에게 큰 타격을 가하려는 게 아니고 빨리 쫓아내려는데 목적을 둔 작전입니다. 적은 대병력으로 관풍행전을 울타리처럼 둘러치고 요동성에서 올 병력을 기다리고 있는 것 같습니다. 도착을 하면 양쪽의 병력이 합쳐 개모성을 공격하느냐 철수하느냐를 놓고 저울질을 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그때까지 기다렸다간 자칫 개모성이 위태로워질 수도 있으므로 지금 요하 너머로 빨리 쫓아낼 작전을 펴는 게 유리하겠습니다."

을지문덕의 주장은 전쟁을 빨리 종식시키는 데 있었다. 그런데 건무는 자신의 전공을 세우고 싶어서 공격 작전을 펴면 자신이 모든 지휘를 맡고자 즉각 동의할 의사를 표했다.

"국상, 좋소. 더욱이 적의 대병력은 평지에 자리를 잡고 있소. 그런데 평지에서 전투는 우리가 불리할 수도 있지 않겠소?"

"저하, 그런 면도 있습니다. 그러나 대 병력이나 적의 병졸들은 사기가 극도로 떨어졌기에 빠른 기병들이 과감하게 중앙의 관풍행전으로 파고드는 작전을 펴면 전체가 흩어져 그대로 강을 건널 수도 있습니다."

"중앙 돌파는 피하고 외각에서 화살 공격을 가하는 게 좋겠소."

건무의 말에 장수들이 고개를 끄덕이자 을지문덕은 다시 말했다.

"전하의 말씀대로 하는 것도 좋겠습니다. 이젠 적의 살상에 중점을 두기보다 요하를 건너가게 만드는 데 목적이 있습니다. 오늘 밤이라도 외각에서 불화살 공격을 가해 적에 동요를 일으키게 만들고 기병들은 적이 도강을 할 때 쓸 배들을 불태우는 작전을 펴면 동요가 커질 적병들은 자연히 강물 속으로 뛰어들 게 될 만들 수가 있을 것입니다."

을지문덕의 말에 건무는 뜻밖의 말을 했다.

"국상은 지금 진땀을 흘리고 있는데 지금부터 쉬는 게 어떻겠소?"

건무의 말대로 서늘해진 계절임에도 을지문덕의 얼굴에선 많은 땀을 흘리고 있었다. 다른 장수들이 보기에도 피곤한 기색이 역력해 모두가 이상한 눈길을 보내지 않을 수가 없었다.

"국상은 안 되겠소. 지금부터 모든 작전은 내가 총지휘를 하겠소."

건무는 그것으로 회의를 끝내고 장수들이 자기 위치로 돌아가게 했다.

하늘엔 휘황한 보름달이 대지를 환하게 비추고 있었다.

이때 수국 군 진영에선 황제가 장수들을 관풍행전에 모이게 명령했다. 그리고 전투가 아닌 무사히 퇴각할 방법을 찾는 논의로 들어갔다. 장수들은 요동성을 떠날 때부터 퇴각을 기대했던 분위기라 내심 쌍수를 들어 환영하는 분위기로 각자 의견을 적극 내놓았다.

"폐하, 강변에 진지를 두었기 때문에 당장 철군에 들어가는 게 좋습니다. 시간을 더 끌어서 좋을 게 없으므로 지금 도강 명령을 내리소서."

황제는 굴욕적인 패배를 당한 채 철군을 하게 되어 체면이 말이 아니라 미련과 불만이 컸다. 때문에 장수들이 한 번 더 개모성 공격하자는 말이 나오길 기다렸지만 실망했다. 하긴 공격 명령을 내렸다간 내부적인 동요만 커질 우려가 없지도 않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때 군관 하나가 뛰어 들어와 다급하게 고구려 군의 공격이 개시된 것을 알렸다. 모두 밖으로 뛰어나가 보니 하늘을 불화살들이 뒤덮고 강변에 정박시킨 자국 배들이 불타고 있었다.

관풍행전은 금방 큰 동요가 일어났다. 황제와 장수들은 철수할 때 자신들이 탈 배들마저 잃게 되면 큰일이었다. 불안감과 위기의식에 장수들은 각자 본 대로 달려가고 말았다.

수국 병사들은 강변이 불바다가 되고 고구려 기병들이 진지 내로 진입해 들자 말할 수가 없는 공포심 속에 저마다 강물로 향해서 뛰었다. 그리고 다투어 물속으로 들어가 건너갔다.

고구려 군은 적군을 강물로 밀어 넣기 위해 불화살을 계속 퍼부어댔다. 황제도 관풍행전을 나와서 둘러보니 병사들은 목부가 모는 순한 양 떼처럼 물속으로 꾸역꾸역 들어가고 있었다.

고구려 기병들은 저승사자들처럼 날뛰었지만 도망치는 수국 병사들은 해치질 않았다. 그때 직공군을 이끌었다가 대참패를 당한 우문술과 우중문은 황제를 양쪽에서 부축해 강변으로 뛰었다.

황제는 겨우 전마선에 몸을 실을 수가 있었다. 그러나 장수들은 물이 깊지가 않아 뱃전을 잡고 그대로 걸었다. 배 위에서 떠가는 황제는 왠지 모르게 헛웃음이 나오는 걸 억지로 참았다.

이때 그런 광경을 지켜보는 을지문덕 곁으로 연개소문이 다가들었다.

"합하."

"연선인. 약광은 수국으로 떠났는가?"

"예."

"혹시 여선 부인도 함께 갔는가?"

을지문덕의 질문에 연개소문은 망설이다 입을 떼었다.

"합하, 그걸 어떻게 아셨습니까?"

"나는 그럴 줄 알았다."

"합하, 모두 동화부인께서 주도하신 일입니다."

을지문덕은 한숨만 내 쉬는데 연개소문이 딴 소릴 했다.

"합하, 마지막 대회전은 그야말로 점입가경입니다."

고구려 기병들 중 일부는 관풍행전으로 엄습해 들고 있었다. 수국 군 진지의 중심은 공동(空洞) 현상이 커지기만 했다. 을지문덕은 갑자기 무슨 생각을 했는지 말했다.

"연선인, 빨리 양광의 관풍행전으로 가봐라."

"합하, 거기로 가서 뭘 하라는 말씀입니까?"

"우리 병사들이 불을 놓지 못하게 막아야 한다."

"합하, 그냥 태워버리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관풍행전 내부에 있을 물품들을 확보할 필요가 있다. 중요한 서류나 값진 물품들을 놓고 갔을지도 모르니 그걸 챙기도록 하라."

"합하, 명령대로 하겠습니다."

연개소문은 대꾸하고 질풍처럼 말을 몰아가며 외쳤다.

"합하의 명령이다! 관풍행전을 불태우지 말라."

고구려 기병들은 관풍행전에 미처 불을 지르지 못했다. 거기엔 아직도 수십 필의 말들을 매어 있어 풀어내고 있었다. 연개소문은 안도하며 입구로 가서 안을 향해 한어로 외쳤다.

"안에 남아 있는 수국 병사들은 투항하라."

그러나 안에서 아무런 반응이 없자 병사들을 거느리고 안으로 들어갔다. 행전의 누각은 침단목(沈檀木)을 쓰고 1층은 비단으로 현란하게 치장되었다. 텅 비어 있어서 이번엔 계단을 밟고 올라갔다. 황제의 침실인 2층엔 각종 문갑과 금은보화로 만든 기물들이 흩어져 있었다. 그런 흔적들로 봐서 경황없이 빠져나간 것을 알 수가 있었다.

"물건들을 빠짐없이 챙겨 밖으로 내가라."

연개소문의 명령에 병사들은 물건들을 밖으로 들어냈다. 궤짝들을 열어보니 그 속엔 미처 챙겨가지 못한 전적과 서류들이 가득 담겨 있었다. 잠시 후 을지문덕도 관풍행전으로 왔다. 끌어낸 물품들 중 서류 종류부터 찬찬히 살피며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각종 서류들은 중요한 정보 덩어리들이다."

을지문덕은 관풍행전에서 끌어낸 물건들을 전부 마필에 실어 개모성으로 옮기게 했다. 그런 다음 병사들로 하여금 불을 지르게 했다. 화려한 관풍행전은 곧 불길에 휩싸여 들었다.

관풍행전을 태우는 불길은 점점 거세지며 멀리 강물까지 환하게 비춰놓았다. 강을 다 건너 간 황제의 눈에도 용틀임을 치는 불길에 휩싸인 관풍행전이 보였다. 그런데 까닭을 모르게 시원섭섭했다.

"내년엔 기필코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말겠다."

황제는 그런 말을 중얼거렸다. 그러나 대 전역은 태산명동(泰山鳴動) 서일필(鼠一匹)의 소동처럼 끝이 났다. 대륙을 삼킬 듯했던 대침공의 결과는 요하의 강물만 흐려놓는 것으로 그쳤다.

고구려 군은 적군을 쫓아냄으로써 완승을 거두었다. 그러나 수많은 인명을 잃고 국토가 파괴당하는 지옥 같은 시간이었다. 그걸 벗어난 을지문덕은 승리감보다 숙연한 마음이었다.

"고구려가 승자이다!"

연개소문이 외쳤다. 을지문덕은 그 말을 탄식처럼 받았다.

"세상엔 전쟁처럼 비참한 것도 없지만 영원히 끝나지도 않는 것이다."

을지문덕은 그런 말을 하고 어지럼증을 느끼며 주저앉을 뻔했다. 몸을 바로 세울 기운이 없어서 연개소문을 향해 간신히 말했다.

"연선인, 날 좀 부추겨주게."

연개소문은 얼른 손을 뻗어 붙잡으려고 했지만 을지문덕은 그대로 땅에 주저앉았다.

"합하, 왜 이러십니까?"

을지문덕은 또 부탁했다.

"연선인, 날 잠시 붙잡아 다오."

연개소문은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합하, 어디가 편찮으십니까?"

을지문덕은 연개소문에게 기대인 채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합하, 어디가 아프신 겁니까?"

"전신에 힘이 없다."

연개소문은 끌어안고 부추겨 일으켜 세우는데 을지문덕의 몸이 수수깡처럼 가볍다는 느낌이 들어서 내심 여간 놀라지 않았다.

"합하, 몸이 왜 이렇게 가벼워지셨습니까?"

을지문덕은 힘겹게 대답을 했다.

"나라가 빈껍데기로 남게 된 것처럼 내 몸도 그렇게 되었나 보다."

연개소문은 그제야 을지문덕이 무슨 병에 걸린 것임을 알 수가 있었다. 수척하고 쇠잔해진 몸은 자꾸 쓰러지려고만 했다. 부쩍 늙어버린 얼굴은 창백했고 눈빛이 흐려진 눈 가엔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다.

"나는 아무래도 더는 살지를 못할 같다."

연개소문은 그 말에 너무도 놀라고 이상하지가 않았다. 을지문덕이 언제부터 이렇게 되었을까를 가만히 생각하며 의문에 잠겼다. 그보다 크나 큰 슬픔이 일어 목이 멘 음성으로 물었다.

"합하, 왜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나는 얼마 전부터 몸이 수척해지고 기운이 없어졌다."

"합하, 무슨 이유로 그렇게 되셨단 말씀입니까?"

"연선인에게 이런 말을 해도 좋을지 모르겠다."

"합하, 무슨 말씀인지 해 보세요."

을지문덕은 망설이는 빛으로 겨우 입을 열었다.

"자네만 알게. 나는 저하께서 국내성으로 오신 뒤부터 식사를 함께 하게 되었네. 그로부터 내 몸은 조금씩 축이 나기 시작한 것 같아."

"저하와 식사를 하면서부터 몸이 축나셨다니요?"

연개소문이 놀라 반문하자 을지문덕은 또 주저하듯 말했다.

"저하의 장막에서 식사를 하고 나면 번번이 속이 메슥거렸다. 그런 증상을 느끼면서 몸에서 힘이 떨어져 나가는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을지문덕의 대답에 연개소문은 자기도 모르게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몸은 분노로 떨리고 두 눈에선 주르륵 눈물을 흘러내렸다.

"합하, 저는 저하를 의심할 수밖에 없습니다."

"나는 저하보다 도해선이 더 그렇다."

"합하, 그런 줄 아시면 왜 거기서 식사를 계속하셨습니까?"

"나는 그만 죽을 때가 되었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랬다."

"합하, 그런 말씀이 어디에 있습니까?"

"나는 그동안에 저하를 거스르는 일을 너무 많이 했기 때문이다."

"당장 합하를 장안성으로 모시고 가야 하겠습니다."

"그래선 안 된다. 지금부터 개선장군은 저하이시다."

연개소문은 고개를 강하게 저으며 외쳤다.

"고구려는 합하가 구해내셨습니다."

"나는 그보다 수국 땅에서 지낼 양신과 연선인이 걱정이 된다."

"합하, 왜 그런 걱정까지 하십니까?"

"나도 그렇지만 연선인도 저하의 눈 밖에 크게 나게 되어 그렇다."

을지문덕은 그런 말과 함께 연개소문의 손을 꼭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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