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 만춘장(萬春莊)
남만상선은 황해(黃海)를 건너는 항해를 계속했다.
양신과 여선은 극적인 해후로 가슴 저민 이별의 아픔을 끝냈지만 조국을 등지는 몸이 되었다. 거기다 앞으론 적지에서 여준의 행방을 찾고 태산팔협을 상대할 어려움에 직면했다.
바다는 어디를 봐도 일렁대는 물결뿐이었다. 여선은 하루 종일 그런 바다 끝 수평선에 시선을 던지고 있었다. 이따금 어두운 표정으로 양신의 눈치를 살폈다. 몸에 건무의 씨를 배고 있기 때문이었다.
주랑은 그런 언니의 심경을 가장 걱정했다. 그러다 어느 날 끝내 그 사실을 양신에게 알려주고 말았다. 양신은 난처함보다 여선의 입장을 안쓰러워하면서 위로의 말을 했다.
"나는 여선의 곁에 있게 된 것만으로도 좋으니 너무 상심치 마오."
여선은 그 말에 무너지듯 양신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고 말았다.
남만상선은 마침내 황하 하구에 당도했다.
하구는 어디가 바다고 강인지 모를 정도로 넓고 많은 배들이 떠다니고 있었다. 거기서부터 큰 상선(商船)들은 물결을 거슬러 내륙으로 가야 했다. 그러나 속력이 느려져 강의 양안에서 말들이 품삯을 받고 끄는 대로 올라가야만 했다. 남만상선도 그렇게 황하를 거슬러 영제거(永濟渠)에 닿았고 거기선 운하(運河)의 수로(水路)를 통해 여양(黎陽)으로 갔다.
여양은 내륙에 있는 큰 포구로 물산의 집산지를 이뤘다. 남만상선의 선주인 갈석(葛石)은 여양에 당도하자 혼자서 배를 내렸다. 을불의 당부로 양신의 가족이 기거할 곳을 마련해 주려고 여양의 대저택인 만춘장(萬春莊)을 찾아갔다.
만춘장의 주인인 사근(沙近)은 거상(巨商)이었다. 갈석은 그에게 검술 실력이 뛰어난 자를 밑에 두고 써 볼 것을 건의했다. 사근도 마침 세상이 불안해져 가족과 재산을 지키고자 일단 만나보겠다고 했다.
갈석은 사근으로부터 그런 대답을 듣고 시장에서 한족(漢族) 의복을 여러 벌 사서 가지고 배로 돌아갔다. 그리고 양신의 가족은 한족 복색으로 갈아입게 하고 만춘장으로 데려갔다.
사근은 양신과 가족을 만나보고 마음에 들었던지 응낙을 했다. 을지문덕의 호위무사였던 양신은 도주를 한 처지인 데가 주랑의 부친은 백제국 좌장이라 믿음성이 있다는 판단을 내렸다.
그날 저녁 사근은 진수성찬을 차려 양신의 가족을 대접했다. 그 자리엔 아내와 외동딸인 사오(仕吾)도 합석을 시켰다. 앞으로 한 가족처럼 지내자며 자기네 집안 내력을 들려주었다.
사근의 조부는 원래 백제인으로 교역에 종사하다가 산해관(山海關)으로 이주했다. 다시 여양으로 옮기면서 장사가 번창해져 막대한 부를 축적했다. 사근은 그의 손자로 여양에서 다섯 손가락에 드는 호상(豪商)으로 행세를 하고 있었다.
이튿날부터 양신의 가족은 만춘장의 후원 별채에서 기거를 시작했다. 그런데 사근의 처는 매우 못마땅해했다. 미모가 뛰어난 여선과 주랑을 한 집에 두고 사는 게 싫고 불안했기 때문이었다.
수국 백성들은 황제가 일으킨 전역으로 여간 큰 고통을 겪지 않았다. 그로 인해 도적떼까지 전국적으로 횡행을 해서 극도의 혼란을 면치 못했다. 양신은 가족과 그런 데서 정착을 할 수밖에 없었다.
계절은 어느새 초겨울로 접어들고 있었다.
황제는 고구려 원정에 실패하고 회군한 뒤 국도가 아닌 낙양성(洛陽城)으로 들어갔다. 그 목적은 추락한 위신을 만회할 재침공 준비를 하기 위함이었다. 먼저 원정에 실패한 이유를 열의를 다하지 않은 신하들의 탓으로 돌려 책임 추궁을 했다. 특히 우문술과 유사룡은 생포할 수가 있었던 을지문덕을 놔준 죄로 쇠사슬로 묶어 끌고 왔다.
우문출이 처형을 당하게 되자 그의 며느리가 된 남양(南陽) 공주가 황제에게 간청해서 겨우 목숨을 건졌다. 그러나 유사룡은 처형을 당해 신하들은 모두 공포에 떨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해가 바뀐 정초에 황제는 2차 출병을 천명했다. 운하엔 병력과 군수물자를 수송하는 배들이 북적대기 시작했고 여양은 다시금 긴장감 속에 술렁거리는 분위기로 바뀌어 갔다.
그 무렵 을지문덕이 위독하단 소식과 3개월 후 다시 오겠다던 갈석이 고구려에서 체포돼 처형을 당한 소문이 전해졌다. 양신은 자신 때문이란 생각에 괴로움이 큰 데다 자신이 여양에 있는 걸 도해선이 알게 된 점으로 불안했다. 조국에서 살 수가 없어 쫓겨 온 처지인데 다시금 안전한 데를 찾아 숨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사근은 매일 부두에 있는 상포(商鋪)로 출퇴근을 했다. 호위를 맡는 양신도 따라서 출타를 했다. 그럴 때마다 거리 구경도 하고 수국 백성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살필 수가 있었다.
여양은 각처에서 상인들이 몰려드는 대처로 본바닥과 타지 사람들이 뒤섞이는 곳이었다. 때문에 고구려 출신에 대한 어떤 편견을 갖는 사람들 없어 별로 걱정은 되지가 않았다.
그런데 여선이 두 번째 출산을 하고 면목이 없어 양신에게 말했다.
"서방님, 저는 어찌하면 좋겠어요?"
양신은 그 심경을 이해해서 신경을 썼고 위로의 말도 했다.
"여선, 무슨 소리요? 크게 축하를 받을 일이요. 뿐더러 고구려 왕실 핏줄인 아기는 잘 키워 언제고 건무에게 돌려보내야 하오."
여선은 마음을 써주는 양신에게 미안함을 느끼면서도 위안을 받았다.
두 사람은 불안과 중압감 속에 앞으로 수국 땅에 정착해 살아갈 일도 큰 걱정이었다. 그러면서도 양신은 무엇보다 조국에 대한 걱정이 커 틈만 나면 운하로 나가 사정을 살폈다.
백성들은 황제가 고구려 재침공을 천명했지만 하나같이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 그러나 이미 운하엔 수송선들이 꼬리를 물고 떠다니고 제방엔 병사들이 묵는 천막들 속에 상인들은 술과 음식을 팔았다.
양신은 가끔씩 음식을 사 먹는 병졸들 틈에 끼어들어 얘기도 듣고 대화도 나누며 그 속내를 떠보았다. 그럴 때마다 병사들은 불만에 차서 황제를 비난하는 말들을 거침없이 쏟아냈다.
"망나니 황제 때문에 병사들만 개죽음을 당할 판이지."
"염병할 황제는 언제까지 사람들은 요동으로 끌고 가서 죽일 건가?"
"나는 발진할 때까지만 여기에 엎드러져 있다가 도망칠 거야."
"도망을 치려면 당장 쳐야지 왜 출발 때까지 죽치고 있는가?"
"그럴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지."
"그게 무슨 이윤가?"
"곧 낙구창에서 군량미를 실어오게 될 것일세. 병사들에게 양곡을 지급하면 그걸 받아 들고 도망쳐도 늦지는 않을 것이라 죽치고 있네."
"내가 왜 그 생각을 못 했을까? 병사들의 태반은 집에 먹을 게 없는 형편일세. 나는 되도록이면 많은 양을 지급해 주기만 기다리고 있네."
양신은 그런 말을 듣고 한마디를 던졌다.
"모두가 반역자들이나 할 소릴 하니 그러다 큰 코들 다치겠소."
병졸들은 그런 말을 하는 양신을 비웃었다.
"뭐가 두려울 게 있겠소? 봐하니 행세께나 하는 집안 자제 같소만 물정을 몰라도 너무 모르는군! 지난해 출병 때 끌려 간 병사들 중 절반이 못 돌아왔소. 우리 보고 그냥 끌려가서 죽으란 소리요?"
"암, 그럴 순 없지! 황제는 앞으로 중원 땅의 남정네들을 전부 씨를 말리고 말 것이야. 그걸 알고도 죽을 데로 순순히 끌려갈 순 없지!"
"황제는 이번에도 백만 대병을 출병시킨다고 큰소릴 치나 말대로 될 걸로 볼 사람은 아무도 없지. 헛소리에 지나지 않을 테니 두고 보게."
"나는 이번에 끌고 갈 병력이 30만도 못 될 것일세."
"지난해 고구려 성을 떨군 데가 대체 한 군 데라도 있는가? 이번에도 또 치중병기를 많이 끌고 간다만 한심하게 쫓겨 올 작태만 보일 걸!"
병졸들의 입에선 하나같이 부정적인 말만 나왔다. 양신은 그런 말에 위안이 되어 그곳을 떠나 이번엔 관청들이 있는 거리로 갔다. 마침 한 떼의 기병들에게 둘러싸인 수례가 지나갔다.
길가에 서 있던 한 노인이 불만스럽게 투덜댔다.
"양상서가 바쁘게 설치고 다닌다만 쓸데없는 짓이로다."
관청 청사 앞에선 멈춘 수례에서 내린 금빛 투구에 갑옷을 입은 비대한 몸집의 사내가 청사 안으로 들어갔다. 양신은 노인에게 물었다.
"노인장께 여쭙겠습니다. 투구를 쓴 저 장수는 어떤 분이십니까?"
"저 자가 바로 한심한 양상서가 아닌가?"
노인은 씹어 뱉듯 대답했다.
"혹시 양상서는 양현감이란 사람이 아닌지요?"
"그럴세."
양신은 그 말을 듣고 을지문덕이 준 봉서를 떠올리게 되었다.
"노인장께선 왜 양상서를 두고 한심하단 말씀을 하십니까?"
"황제는 백성들을 전쟁터로 내몰아 다 죽게 만들고 전비에 충당할 재물을 마구 훑어내고 있지 않는가? 그런데 양상서가 그런 일에 앞잡이 노릇이나 하고 있으니 어찌 한심한 자로 보지 않겠는가?"
"양상서는 황제의 명을 따를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그렇기는 하지만 지금 각처에선 반란을 일으킬 조짐을 보이네. 반란을 일으킨다면 첫손가락에 들 자가 바로 양상서가 아닌가? 그런데 황제의 개 노릇이나 하려고 드니 어찌 한심하게 보지 않을 수가 있겠나?"
"노인장은 왜 양상서가 반란을 일으킬 사람으로 보십니까?"
"그걸 몰라서 묻는가? 양상서의 아비는 황제에게 죽음을 당했고 본인 또한 목숨을 구걸하듯 살아가는 형편이 아닌가? 그럼에도 아비를 죽인 자 밑에 엎드러져 시키는 일만 하고 있다니 딱하기 그지없는 자일세."
노인은 불경스러운 말을 마구 뱉건만 듣는 사람들 중에선 탓을 하려는 자가 없었다. 그만큼 황제에게 등을 돌렸다는 반증이라 양신은 고무된 채 발길을 돌렸으나 집으로 가는 발길은 무겁기만 했다. 그 이유는 생부의 행방을 찾아 수국에 온 주랑의 불만이 점점 늘어나기 때문이었다.
양신은 아직도 사부에 대한 대책을 세우지 못하는 형편이었다. 적지인 데다 태산팔협을 함부로 찾아 나서긴 너무 위험하고 그럴 사정도 못 되었다. 그런데 주랑은 혼자라도 나서겠다는 말을 자주 했다. 그런 압박을 받을 때마다 을지문덕이 한 말을 떠올리게 되었다. 사부가 태산팔협에 끌려오지 않았다는 것인데 그걸 차마 주랑에게 말할 수가 없었다.
어느 날은 고민을 하다가 사근에게 사정을 털어놓고 의논을 했다. 그 사정을 알게 된 사근은 곧 수소문에 나섰다. 그리고 태산팔협의 우두머리인 옹장은 근위군 중랑장(中郞將)이 되어 황제의 호위 임무를 맡았고 형제들은 전부 군관이 되어 함께 근무하는 걸 알아냈다.
양신은 그렇다고 곧장 움직일 수가 없었다. 가족이 딸린 몸으로 태산팔협을 상대하는 덴 큰 제약이 따랐다. 혼자서 감당하겠다는 마음에 여선과 주랑은 백제로 갈 것을 권했다. 그러나 두 여인은 그걸 원치 않아했다. 그런 중에 만춘장에선 큰 소동이 벌어졌다. 사근이 야밤에 주랑을 겁탈하러 방에 침입했다 일격을 당하고 쫓겨났다. 그 사건으로 양신의 가족들은 만춘장에서 더 있고 싶지가 않아졌다. 그러나 갈 데가 없고 나가도 또 무슨 위험이 닥치게 될지 몰라서 시름만 깊어질 뿐이었다.
3월 초로 접어든 계적은 아직도 날씨는 쌀쌀했다.
사근은 망신을 당한 뒤로 매일처럼 비취루(翡翠樓)에서 작부를 끼고 술을 먹었다. 부인은 매일 양신이 에남편을 집으로 데려오게 만들었다. 하루는 비취루로 가던 양신은 다리 밑에 쓰러진 사람을 발견했다.
화북(華北) 지방의 겨울은 황토 바람이 거세어 사람들은 어깨를 웅숭그린 채 종종걸음을 쳤다. 양신은 물이 마른 개울 바닥이나 찬 땅에 누워있으면 큰일이란 생각에 다리 밑으로 내려갔다.
개울 바닥엔 지팡이를 쥔 노인이 얼굴을 바닥에 처박고 있었다. 입성은 괜찮은 편이라 걸인으로 보이진 않았다. 양신은 여린 신음소리만 흘려내고 있는 노인에게 말했다.
"노인장, 이런 데 누워계시면 큰일 납니다."
노인은 눈을 멀거니 뜨더니 겨우 대답을 했다.
"누가 날 죽이려고 다리 밑으로 밀쳤소. 나는 일어날 수가 없소."
양신은 노인을 안아 일으켰으나 몸을 가누질 못했다.
"제가 도와드리겠으니 여길 나가시지요."
"나는 허기가 너무 지고 힘이 없어 걸을 수가 없구려."
노인은 눈자위가 푹 꺼져 있고 몸은 꽁꽁 얼어붙어 걷지도 못했다. 양신은 불쌍한 마음에 노인을 부추겨 업고 개울 바닥을 벗어났다.
"제가 요기를 좀 시켜 드리겠습니다."
양신은 노인을 등에 업은 채 비취루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안에선 손님들이 불평을 쏟아냈다.
"걸인이 어딜 들어오는가? 주인장, 얼른 내쫓소."
"요즘은 늘어나는 게 거지와 도둑 떼밖에 없군!"
그때 한 손님이 손을 내저었다.
"저 노인은 걸인이 아니요."
"걸인이 아니라면?"
"전에 여양의 참군을 지낸 분이요."
그 말에 술청 안은 좀 술렁거렸고 양신이 입을 열었다.
"여러분, 노인장은 개울 바닥에 쓰러져 계셨습니다. 너무 허기가 지고 몸조차 얼어서 움직일 수가 없으십니다. 구석에서 몸을 녹이고 식사를 하게 해드리려고 하오니 너그럽게 양해를 해주시기 바랍니다."
양신의 말에 손님들은 좀 수그러드는 태도를 보였다. 손님들은 노인의 신분도 그렇지만 만춘장의 호위 책임자로 있는 양신의 무예가 상당하다는 소문이 나 함부로 대하려 하질 않았다.
그때 주인인 왕서방이 비굴한 웃음을 지으며 다가들었다.
"누구신가 했더니 만춘님이셨군요?"
양신은 수국 땅에 와선 새로 만춘이란 이름을 쓰고 있었다. 사근이 자기 저택의 이름을 붙여 부르자 남들도 따라서 불렀다. 왕서방은 방 안으로 들어갔다 나오더니 공손하게 말했다.
"사근님이 참군님을 방 안으로 모시라고 하십니다."
양신은 그 말에 노인을 부추겨 방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술을 마시고 있던 사근이 작부들을 밖으로 내보내며 몸을 일으켰다.
"참군 나리, 오래간 만입니다."
사근은 말하고 자신이 앉았던 상석을 노인에게 내주었다. 그리고 왕서방에게 뜨거운 죽과 고기 안주를 더 시켰다.
"만춘, 참군 나리를 어떻게 모셔오게 되었는가?"
"노인께선 옥단교 밑 개울 바닥에 쓰러져 계셨습니다."
"아니?! 이 추위 속에 개울 바닥에 쓰러져 계셨다니?"
사근이 크게 놀라는데 노인은 잠자코 죽만 퍼먹었다.
"이 놈의 세상이 어찌 돌아가는 판국인지 모르겠군. 여양 참군을 지내셨던 분이 다리 밑에 쓰러져 계시는 지경에 이르다니?"
사근은 혀를 끌끌 찼다. 왕서방이 새로 시킨 음식과 술을 한 병 더 가지고 들어왔다. 가의는 전에 비취루를 자주 찼던 고객이었기 때문에 지난 일을 생각해 손수 술을 따라주며 말했다.
"이 술은 제가 참군 나리께 내는 것이니 천천히 드시고 가십시오."
노인의 이름은 가의(價宜)로 전엔 여양의 치안을 담당하는 참군(參軍)이었다. 그러나 술을 너무 좋아하고 첩을 두어 딸을 낳았는데 그런 첩의 비위를 맞추느라 본처를 구박했다. 견디다 못한 본처는 자신이 낳은 아들 둘을 데리고 고향 땅으로 갔다. 그런데 가의는 엎친데 겹친 격으로 관직마저 잃고 첩은 다른 사내와 도망을 쳐 딸인 계영(啓英) 남았다. 가세도 점점 기울어서 어린 딸은 품삯을 받고 남의 일을 해 겨우 생계를 꾸릴 수가 있었다. 그럼에도 술을 끊지 못해 술집마다 외상값만 늘고 나중엔 어디서나 내침을 받는 신세가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일을 나간 딸이 집에 돌아오지를 않았다. 한 달이 넘게 찾아다니던 끝에 외상값 때문에 딸이 술집에 붙잡혀 술시중을 드는 걸 알게 되었다.
가의는 주인에게 내놓으라고 했으나 외상 술값을 갚으면 내주겠다는 대답만 돌아왔다. 갚을 돈은 없고 매일처럼 찾아가 빌고 사정을 했지만 번번이 문전 박대를 당했다. 오늘도 거길 갔다가 돌아오는 길인데 옥단교를 건너는 그의 등을 누가 떠밀어서 개울 바닥으로 떨어진 것이었다.
사근은 그 말을 듣고 누가 한 짓임을 대번에 알았다. 가의의 외상 술값이 젤 많은 술집의 주인인 경도(坰悼)로 추측했다. 그는 미모가 뛰어난 계영을 첩으로 삼고 싶어 했던 것도 알고 있었다.
"나는 아무래도 경도의 손에 죽음을 당하고 말 것 같네."
가의는 술기운이 좀 돌자 한탄처럼 중얼거렸다. 그 역시 경도가 자신을 죽이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사근은 고개만 끄덕였고 양신이 물었다.
"누가 노인장께 무슨 일로 그런 짓을 저지른단 말씀입니까?"
"속셈은 뻔하지. 날 죽이면 계영을 차지할 수가 있다는 생각이지. 오늘은 다리 밑으로 떠밀었지만 앞으론 내 집에 침입해서 또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를 자야."
가의는 말하고 불안감에 몸까지 부르르 떨었다. 양신은 그러는 노인이 너무도 딱하고 안 되어 동정심이 일었다. 더욱이 밤길을 노인 혼자서 집으로 돌아가는 것도 위험하단 생각에 입을 열었다.
"노인장은 집으로 모셔갈 가족을 부르시는 게 좋겠습니다."
"나는 하나뿐인 딸과 살고 있어 부를 사람이 없네."
가의는 대답하고 또 술잔만 비웠다. 양신은 술을 너무 많이 마시면 안 되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가의는 연방 빈 술잔을 비워가면서 거나해진 음성으로 말했다.
"이제야 좀 살 것 같네. 젊은이 때문에 살았는데 누군지 모르나 고맙기 그지없소. 앞으로 젊은이한테 어떻게 보답을 해야 좋을지 모르겠군."
양신은 잠자코 만 있는데 사근이 입을 열었다.
"나리, 이 젊은이는 제 밑에서 일을 하는데 이름은 만춘입니다."
가의는 좀 전과는 다르게 의젓한 자세로 사근에게 물었다.
"그런가? 훌륭한 젊은이를 밑에 두었군?"
"나리, 만춘은 검술이 뛰어나서 만춘장을 든든히 지켜줍니다."
사근은 말할 때마다 가의에게 연신 허리를 굽혔다. 양신은 참군이 어떤 관직인지 모르나 상당히 높겠다는 생각을 하며 한편으론 경계심을 품지 않을 수가 없는데 가의는 불콰해진 얼굴로 말했다.
"젊은이, 우리 통성명이나 하세. 내 이름은 가의일세."
양신은 좀 긴장된 음성으로 대답했다.
"소생의 이름은 만춘입니다."
사근은 가의에게 양신의 신상에 관한 설명도 덧붙였다.
"만춘은 고구려인인데 전쟁 통에 중원 땅으로 이주를 했습니다. 제 밑에 두고 쓰게 되어 만춘장의 택호를 붙여 새 이름을 지어줬습니다."
가의는 그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이다 입을 열었다.
"요즘처럼 부박한 세상에 나는 보기 드문 인품을 지닌 젊은이를 만나 큰 도움을 받아 여간 다행히 아닐세. 만춘은 인물이 준수하고 기골이 장대해서 군문에 들어가면 장군으로 출세를 할 사람으로 보이네."
"노인장, 별말씀을 다 하십니다. 소생은 만춘장의 식객에 지나지 않는데 너무 과찬의 말씀을 하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양신의 대답에 가의는 표정이 좀 엄숙해졌다.
"내 생명을 구해준 은인이라 하는 말이 아닐세."
"소생은 신분이 높으신 분을 만나게 된 것만도 영광으로 여깁니다."
사근이 그런 말을 나누는 두 사람 사이로 끼어들었다.
"만춘, 자네가 나리를 댁으로 모셔다 드리게."
"사근님, 그렇게 해도 되겠습니까?"
"암, 밤길이 어두우니 당연히 모셔다 드려야지."
양신은 사근의 허락을 받고 가의를 부축해서 비취루를 나섰다.
가의는 집으로 돌아가자 양신에게 안으로 들어올 것을 권했다. 집 안은 불도 때지 않는 듯 냉기가 돌았다. 양신은 서재에 책들이 가득 차서 주인이 학덕을 지닌 사람임을 알 수가 있었다.
가의는 차를 끓여 내놓았다. 양신은 차를 마셨지만 찻잎을 넣고 끓였는지가 의심스러울 만큼 맹물이었다. 가의는 차를 마시며 양신의 정체와 됨됨이를 더 알아보려고 들었다.
"만춘은 무슨 사정이 있기에 중원 땅으로 왔는가?"
양신은 고구려에서 살 수가 없게 된 자신의 처지를 밝혔다. 그러자 가의는 궁금한 점이 더 생긴 듯 이것저것을 자꾸 물었다. 양신은 결국은 구체적인 사정을 모두 다 밝혀놓게 되었다.
가의는 양신의 말을 듣고 모든 사정을 알게 되자 동정이 갔다. 더욱이 고구려 왕실과 얽힌 사정으로 미뤄볼 때 안심해도 좋을 믿음이 가기 때문에 도움을 줄 방법을 찾아보고 싶었다.
"만춘은 고구려로 다시 돌아갈 순 없고 중원 땅에서 살아야 하겠네."
"소생은 앞으로 중원 땅에서 자리를 잡기도 여간 어렵지가 않겠습니다. 왜냐하면 중원 땅에서도 언제 위험에 빠질지 모를 일도 있어서 앞날이 예측 불허로 불안하기만 한 처지입니다."
"중원 땅에서 또 무슨 어려운 사정이 있기에 그런단 말인가?"
양신은 끝내 태산팔협과 얽힌 사정을 밝혔다. 거기다 사근은 처제를 넘보고 있어 걱정이 많다는 하소연을 했다. 가의는 그런 처지를 더욱 동정을 금치 못해서 입을 열었다.
"만춘, 나는 힘은 없으나 자네가 중원 땅에서 살아갈 수 있게 돕고 싶은데 우선 만춘장에서 계속 살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드네."
"소생은 그래서 마련이 많습니다. 새로 거주할 데를 찾아야만 하는데 그게 쉽지가 않고 앞으로 태산팔협과 대처해나갈 일도 큰 걱정입니다."
"만춘은 여러 가지로 사정이 너무도 딱하나 잘 헤쳐 나가야지!"
양신은 조금 머뭇거리다 입을 열었다.
"참군님, 소생이 이런 말씀을 드려도 될지 모르겠습니다."
"무슨 말인가?"
"참군님께 청을 드리고 싶은데 차마 입이 떨어지질 않습니다."
"무슨 청인가? 내가 도움을 줄 수가 있는지 한번 들어보세."
"소생은 만춘장을 나와서 참군님 댁에서 살 수는 없을 지요?"
가의는 그 말에 선선히 대꾸했다.
"그건 나도 바라는 바일세. 자네도 보다시피 이 집은 너무 큰 데다 나는 사는 딸과 단 둘 만이 살아서 적적하기가 그지없네. 자네가 내 집에서 함께 살고 싶다면 나로선 대환영일세."
"참군님, 그렇게 해 주시겠습니까? 저는 당장 옮겨 오겠습니다. 소생은 얼마간의 재물을 지닌 게 있어 당분간 먹고 살 걱정은 없습니다."
양신의 말에 가의는 귀가 번해지듯 반문했다.
"자네는 무술도 지닌 터라 나로선 함께 살게 되면 이처럼 험한 세상에서 안심이 됨으로 그 또한 얼마나 좋은 일이겠는가?"
"참군님, 저는 함께 사는 것만도 백골난망일 뿐입니다."
"고마운 쪽은 도리어 날세. 내일이라도 당장 이사를 오게나."
양신은 기쁨을 금치 못하는데 가의가 불쑥 말을 꺼냈다.
"나는 술집에 잡혀 있는 딸을 생각하면 너무 마음이 편치 못할세."
"참군님, 술청에 지신 빚이 얼마나 되는지 모르겠으나 그 돈만 갚으시면 따님을 구해내실 수가 있다는 말씀입니까?"
"물론이지. 그런데 그럴 돈이 없으니 걱정일세."
"소생은 참군님이 빚을 갚고 따님을 구해내시는 걸 돕겠습니다."
"내 딸을 구해내는 일을 돕겠다고? 그럴만한 돈을 지녔단 말인가?"
"소생은 지니고 있는 패물을 팔아서 작은 거처를 얻어 볼 생각을 하던 중이었습니다. 그런데 참군님 댁에서 살 수가 있다면 그 돈을 내놓겠습니다. 다만 술청에 갚을 돈이 얼마나 되는지가 문제입니다."
가의는 갑자기 안색이 밝아지고 흥분된 상태가 되었다.
"만춘, 그 말 정말인가? 그렇게만 해 준다면 나는 살 수가 있게 되겠네. 다만 내가 진 외상값은 은전 백 냥이나 되는 거액일세. 자네는 그만한 돈을 융통할 만큼의 패물을 지니고 있는지 모르겠네."
"참군님, 소생이 지닌 패물은 액수가 얼마나 될지를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해서든 백 냥이라면 마련을 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가의는 그 말을 듣고 너무 기쁘고 감격해 제정신이 아니게 되었다. 남의 사정을 생각할 겨를도 없이 염치 불고로 매달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만춘, 꼭 그렇게 좀 해 주게. 그래야 딸을 구해낼 수가 있겠네."
"따님을 구출해 내시면 소생이 여기서 오래 살게 해 주십시오."
가의는 그 말을 듣고 확실한 보장이 될 말을 했다.
"두 말할 나위가 있겠는가? 그건 오히려 내가 바라는 바일세. 그래서 나는 자네에게 이런 제안을 하겠네."
"참군님, 어떤 제안을 하시렵니까?"
"만춘, 아예 문서를 만들어 서로 간에 확실한 믿음을 갖게 하세."
"어떤 문서를 만들자는 말씀입니까?"
"자네가 내놓을 돈으로 내 집의 절반을 사는 문서를 만드세."
"소생은 참군님 댁에서 살 수만 있어도 좋으니 그러진 마십시오."
"나로선 너무도 고마운 터라 문서를 만들어야 하겠네. 그러니 부디 돈을 마련해 날 구해주게. 나는 이제 자네에게 매달릴 수밖에 없겠네."
"참군님, 돈 걱정은 하지 마십시오. 다만 마련하는데 시간이 좀 걸릴지도 모릅니다. 어떻게 해서든 돈을 꼭 마련해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양신의 대답에 가의는 구원을 받는 심경으로 또 다른 말을 했다.
"만춘, 그런데 한 가지 생각해 둬야 할 점이 있네.
"어떤 점을 생각해야 합니까?"
"자네가 만춘장을 나오면 사근과는 척을 지는 사이가 되고 마네. 때문에 미리 마땅한 핑계거리를 만들어 두는 게 좋겠다는 생각일세."
양신도 수긍이 가서 표정이 좀 어두워졌다. 그러자 가의가 말했다."
"나는 다만 염려되어 한 말일세. 사근과 척을 지는 건 좋지가 않겠다는 뜻으로 한 말이니 그 점을 유념해 두게나."
"소생도 무슨 말씀인지 아오나 이사는 꼭 해야 하겠습니다."
양신은 그런 말을 남기고 만춘장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여선과 주랑에게 이사 갈 데가 생긴 것을 알렸다. 두 여인은 너무도 기뻐 밤잠을 못 이룰 정도이나 걱정이 아닐 수가 없었다. 돈은 없고 새달궁을 떠날 때 동화부인이 내준 금덩이와 패물을 지녔는데 그 걸로 마련을 해야만 했다. 아무튼 간에 희망에 들뜨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튿날 여선은 사근의 처를 만나 이사를 갈 뜻을 밝혔다. 그리고 패물을 내놓고 처분해서 돈을 마련해 주길 부탁했다. 사근의 처는 반가움에 후하게 쳐서 2백 냥이나 내주었다. 패물이 탐난 게 아니고 남편이 눈독을 들이는 주랑을 내보내게 되어 여간 기쁘지가 않았다.
양신은 마침내 1백 냥을 가지고 가의의 집을 찾았다. 돈을 받아 든 가의는 꿈인지 생시인지 몰라했다. 곧 양신을 데리고 경도를 찾아가 외상값을 갚고 계영을 풀어낼 수가 있었다.
계영은 집으로 돌아오게 되자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양신을 평생의 은인으로 여기겠다며 감사를 표했다. 양신은 그보다 자신에게 더 절실한 말부터 꺼냈다.
"참군님, 소생은 가족들과 하루라도 빨리 만춘장을 나오고 싶습니다. 너무도 조급한 말씀이나 언제쯤 이사를 오면 되겠습니까?"
"만춘, 내이라도 당장 옮겨 와서 살게나."
가의는 대답하고 자기 집의 절반을 양신의 소유로 만드는 문서를 만들어 내주었다. 양신이 받지 않자 엄숙하게 말했다.
"만춘, 양신은 나중에 다른 말이 나올지도 모르니 간직해 두게."
한편 사근은 아내로부터 양신이 이사를 가겠다는 말을 듣게 되자 여간 괘씸하지가 않았다. 무슨 보복이라도 하고 싶지만 자신이 한 짓도 있고 가의의 집으로 가는 것이라 막을 수도 없었다. 그런데 여선과 주랑을 무척 따르고 정이 많이 든 사오가 울고불고 야단을 쳤다. 때문에 딸에게 양신의 가족을 만나러 다니는 걸 허락하는 것으로 끝을 내야만 했다.
양신은 가의의 집으로 이사를 했다. 그런데 가의는 돈이 없어 조석 끼니를 해결할 수가 없는 형편이었다. 그럼에도 딸이 또다시 남의 일을 나가는 걸 싫어서 못하게 했다.
여선은 이사를 한 뒤 주인집의 어려운 사정을 바로 알게 되었다. 때문에 계영에게 돈을 내주고 양곡 등 식재료를 사 오게 해 함께 먹기로 했다. 계영은 염치가 없으나 사양하지 못하고 고맙게 여겼다.
양신은 할 일이 없어져 가의에게 말을 꺼냈다.
"참군님, 소생은 조언을 구하고 싶은 게 있습니다."
"무슨 말인지 해 보게."
"제겐 백 냥의 돈이 더 있습니다. 그걸로 장사를 하고 싶은데 무슨 장사를 해야 좋을지 몰라 참군님의 의견을 듣고자 합니다."
가의는 그 말을 듣고 큰 흥미를 느끼듯 대답했다.
"나는 평생 관리로 지낸 터라 장사에 관해선 아는 게 없네."
"그러시겠군요?"
"자네는 무예가 특출해서 고구려 국상의 호위무사를 했다지?"
"그렇기는 합니다만."
"자네가 군문에 들어가는 방법을 찾아보면 어떨까 싶네."
"군문에 들면 가족과 떨어져 지내야 하므로 피하고 싶습니다."
"가족과 함께 살면서 근무를 할 자리를 찾으면 되지. 하다못해 관청의 문지기 자리라도 얻으면 박봉이나마 생계를 꾸리는데 큰 도움이 되네."
양신은 그렇게만 되면 얼마나 좋을까 싶었다. 왜냐하면 무엇보다 중요한 점은 가정의 안정이었다. 만약에 관청에 들어갈 수만 있다면 신분 보장이 확실해지고 큰 배경이 될 수가 있었다.
"소생은 고구려 출신인데 관청에 들어가는 게 가능하겠습니까? 혹시 관청에서 저에 대한 어떤 의심을 두지 않을까 걱정이 됩니다."
"자넨 제 나라에서 살 수가 없어 중원 땅으로 도망을 치지 않았는가? 그런 사정이 있는 자를 관청에선들 무슨 의심을 할 게 있겠는가?"
"참군님, 그렇다면 소생이 관청에 들어갈 방법은 없겠습니까?"
양신이 관심을 보이자 가의는 이런 대답을 했다.
"내가 한번 힘을 써보고 싶네만."
"참군님, 그렇게 해주실 수가 있으시면 꼭 이루게 해 주십시오."
"나는 가까운 시일 내로 양상서를 한번 찾아뵐 생각일세."
양신은 그 말을 듣고 다시 떠오른 생각이 있었다.
"혹시, 양상서라면 예부 상서 양현감을 두고 하신 말씀인가요?"
"그럴세."
"참군님은 양상서와 잘 아시는 사이신가요?"
"양상서는 전에 내가 낙구창에서 근무할 때 모신 상관일세. 그러나 지금은 소원한 사이가 되었지. 그 이유도 다름 아닌 계영 때문일세."
"참군님, 무슨 일이 있었기에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양상서는 계영을 첩으로 삼길 원했지만 내가 거부를 했네. 이번에 나는 계영을 구출하고자 도움을 청할 생각을 해봤으나 그만뒀지. 그러나 자네 도움으로 해결을 봤으니 자네 일자리를 구하러 나서 볼 생각일세."
"참군님, 부디 힘을 써주시길 부탁드립니다."
"만춘, 그런데 그 일은 뇌물을 쓰지 않고는 힘들 일일세."
"얼마나 들지 모르겠으나 백 냥을 더 내놓을 수가 있겠습니다."
"그런가? 염치없는 소리나 그 돈을 전부 내게 주게. 관청의 문지기 자리도 이백 이상 들어야 하겠지만 나는 절반이면 어떻게 해볼 수가 있을 같네. 아니 솔직히 말해서 오십 냥은 먹고 살 가용에 쓰려고 하네."
"참군님, 아무튼 간에 소생은 백 냥을 다 드리겠습니다."
"만춘, 그렇게 되면 나도 좋고 자넨 일자리를 얻어서 좋을 걸세."
"소생은 앞으로 참군님을 의지하고 보호를 받아야 할 처지인데 관청의 문지기 자리를 얻는데 쓸 돈을 어찌 아낄 수가 있겠습니까?"
"만춘, 고마운 건 날세. 세상이 험난해져 불안한데 무예를 지닌 자네와 함께 사니 여간 든든하지가 않네. 나로선 당연히 힘을 써야지."
가의는 양신으로부터 돈 백 냥을 또 손에 넣었다. 그런데 그 돈으로 매일처럼 술만 마시고 일자리를 구하러 관청에 가겠단 말은 쏙 들어갔다. 그도 그럴 것은 양현감에게 부탁을 했다간 또 계영을 넘볼지 몰라 다시 난처한 입장에 처하게 될 수도 있었다.
양신은 나머지 돈을 건넨 뒤로는 가의의 눈치만 보게 되었다. 그런데 열흘이 넘도록 가의는 양현감을 만나러 갈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재촉할 수도 없어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그 무렵 을지문덕이 타계한 조국은 피폐해지고 고립무원에 처해 멸망을 면치 못할 것 같다는 소문이 들려왔다, 양신은 절망감만 더해지면서 자신이 적지로 온 목적을 다시 생각해 보게 되었다. 자신은 단지 살기 위함만은 아니고 조국을 도울 일을 찾고자 함이었다. 그렇다면 사나이로 운명에 맞설 결심 끝에 을지문덕의 봉서를 양현감에게 전하고자 관청으로 찾아가게 만들었다.
양현감은 서찰을 읽고 나서 양신에게 물었다.
"그대의 이름이 약광인가?"
"그렇습니다."
"을지문덕은 그대의 검술 실력을 고구려 최고라고 했네. 자네가 조국을 등지지 않을 수가 없는 사정도 알게 되었다. 그대는 앞으로 수국 백성으로 살아갈 것인지 본인의 입에서 나온 대답을 듣고자 한다."
"상서 대감. 소생은 중원 땅에 정착해 뿌리를 내리렵니다."
양현감은 그 대답을 듣고 야릇한 미소를 머금더니 몸을 일으켰다.
"약광, 날 따라나서라."
앞장을 서 밖으로 나가서 수례에 오른 뒤 양신에게도 말을 내줘 타게 했다. 잠시 후 두 사람은 양현감의 집에서 다시 마주 앉았다. 양현감은 양신의 속내를 듣고 싶어 구체적인 질문을 던졌다.
"을지문덕은 대국과 고구려 간의 전쟁을 원치 않는다. 양국 백성들을 불행으로 몰아넣을 뿐 서로 득이 없다고 했는데 그대의 생각은 어떤가?"
"소생도 전쟁을 빨리 끝내 양국의 백성들이 고통을 덜게 해줘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양국의 평화를 위해선 무슨 일이든 하겠습니다."
"을지문덕이 자넬 내게 천거한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는 것이었다."
양신은 정곡을 찔리는 질문을 받고 도리어 마음은 편안해졌다. 을지문덕이 보낸 목적을 알지만 스스로도 조국을 위해 사나이로 운명을 걸고 몸을 바치는 일을 해보겠다는 마음이었다.
"그대가 날 찾아온 목적을 솔직하게 한번 털어놔 봐라."
양현감의 말에 양신은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소생은 조국의 멸망을 막고 싶을 뿐입니다."
"약광, 자네는 참으로 대담한 자로다!"
양신은 그런 말을 듣고도 조금치도 두려움이 일지 않았다.
"좋다. 나를 도와라."
"대감의 명을 성실히 받들겠습니다."
"그동안 중원 땅으로 와서 겪은 일들을 밝혀 봐라."
양신은 만춘장에 들어가게 된 일로부터 사근에게 당한 일, 그로 인해 전 참군인 가의의 집으로 이사를 하게 된 사정을 밝혔다. 그런데 양현감의 입에서 뜬금없는 말이 흘러나왔다.
"나는 자네를 각별히 여겨 우리 가문의 성씨를 쓰게 하겠다."
"대감께서 그렇게 해주신다면 소생은 더할 수 없는 영광입니다."
"좋다. 자네는 이제부터 양만춘이다. 나는 당부할 말도 있다."
"무슨 당부이신지요?"
"가의에겐 내가 뇌물을 받고 자네한테 군관직을 팔았다고 하게."
양현감의 말에 양신은 의아해서 반문했다.
"대감, 사실이 아닌데 당치도 않을 말을 왜 하라고 하십니까?"
"양만춘, 자네가 앞으로 내 곁에 있으려면 그렇게 하는 게 좋겠다."
"대감의 말씀이 무슨 뜻인지 모르나 그렇게 하겠습니다."
"나하고 나눈 대화는 극비에 부칠 일이다. 내일부터 출근하라."
양신은 관청을 나와 집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누구에게도 양현감을 만난 일을 말하지 않고 이튿날 관청으로 출근을 했다. 양현감은 상조(桑助) 참군을 불러 지시를 했다.
"상조, 양만춘을 대정직에 보임했다. 내 호위무사로 근무를 하게 된다. 양만춘 대정에게 군관 복을 한 벌 내주도록 하라."
"예."
상조는 양신을 데리고 밖으로 나온 뒤 은근한 음성으로 불렀다.
"양만춘 대정."
"예, 참군님."
"자넨 양상서와 연줄이 큰 것 같은데 나하고도 잘 지내보세."
상조는 말하면서 야릇한 웃음을 머금었다. 양신은 상대가 어딘지 사악한 데가 있어 보여서 경계심을 품게 되었다. 그러나 호감은 가지 않아도 앞날을 위해 가깝게 지낼 마음을 먹었다.
"참군님, 앞으로 소관을 잘 이끌어 주십시오."
"암, 어려운 일이 있을 땐 무엇이건 주저 말고 내게 말을 하게. 나로선 들어줄 수 있는 한 양대정을 적극 도우며 상부상조를 해 나가세."
"저도 참군님을 잘 받들어 모시겠습니다."
양신은 퇴근하자 비로소 가의에게 양현감을 찾아가서 대정직을 얻게 된 경위를 알렸다. 가의는 그 말을 듣고 내심 여간 놀라지 않았다. 독단적으로 양상서를 찾아가 뇌물을 바치고 대정직을 얻은 양신을 함부로 대할 상대가 아님을 새삼 깨달았다. 위압감마저 느끼게 되어 더 자세한 일을 묻지도 못하고 그저 축하를 한다는 말만 하고 말았다.
양신은 관청에서 근무를 시작한 지 며칠이 안 된 어느 날이었다. 퇴근해 집에 돌아오니 사근이 찾아와 기다리고 있었다. 사근은 전과는 다르게 사뭇 비굴한 표정마저 지은 채 입을 열었다.
"양만춘 대정님에게 축하 인사 차 왔소."
"사근님, 축하라니요? 별말씀을 다 하십니다."
"먼저 나의 지난 과오에 대한 용서를 청하오."
"그런 말씀은 하시지 마십시오. 저는 이미 다 잊은 일입니다."
"양대정에게 그런 말을 드게 되니 크게 안심이 되오."
"따님이 자주 찾아와서 식구들과 잘 지내줘서 고맙게 여깁니다."
"나도 잘 알고 있소. 특히 만춘 대정의 부인은 사오를 친동생처럼 여기며 아껴주시므로 나로선 늘 고맙게 여기고 있소."
"저는 사근님께 큰 신세를 진 사람입니다. 그 은혜를 잊지 않을 것입니다. 사오양만 아니고 양쪽 식구들이 서로 친척처럼 지내고 싶습니다."
"나도 그렇게 되길 기대하겠소. 그래서 만춘 대정에게 작은 성의나마 가져온 선물이니 받아 주오."
사근이 선물꾸러미를 내놓자 양신은 손을 내저었다.
"사근님, 저는 말직이나마 관직에 든 사람입니다. 이런 걸 받으면 안 됩니다. 성의만을 고맙게 여기며 사양하오니 이해를 해주십시오."
양신은 선물을 도로 내밀었다. 그러나 사근은 양신과 좋은 관계를 유지해야 양현감의 눈 밖에 나지 않아야 한다는 판단과 그걸 피하고자 장사꾼의 이해타산을 깐 선물 꾸러미를 놔둔 채 도망치듯 돌아갔다.
가의는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양대정, 그 선물꾸러미는 내가 받은 걸로 하세."
양신은 쓴웃음만 짓고 말았다.
어느새 봄빛이 완연해졌다.
여선과 주랑은 한결 얼굴들이 밝아졌다. 그러나 부친에 대한 일로 속마음은 여전히 무기만 했다. 수국 땅으로 왔건만 부친의 안위는 여전히 알 수가 없고 어떻게 해야 좋을지 막막하기만 했다.
양신도 그 점을 잘 아는 터라 시름이 깊은 아내와 주랑이 걱정하고 있었다. 그러나 관직에 든 몸으로 함부로 움직일 수도 없어 고만이 컸다. 그런데 주랑은 끝내 더는 못 참고 말을 꺼냈다.
"형부, 전 얼굴도 모르는 아버지를 생각하면 이대론 더 못 있어요."
"나도 처제의 심경을 잘 알고 있소. 그러나 태산팔협은 황제의 근위군에 들어 있소. 그런 태산팔협 앞에 나서는 건 죽음을 자초하는 일이요. 때문에 나름대로 생각을 하고 있는 게 있으니 조금만 더 참아주오."
주랑도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어느 날 상조가 양신에게 뜻밖의 질문을 던졌다.
"양만춘 대정은 고구려 사람이었다지?"
"그렇습니다만, 참군님은 그 얘기를 누구한테 들으셨습니까?"
"사근님일세. 자네는 고구려에선 살 수가 없어 도망을 쳤다더군."
양신은 그날 이후로 상조에 대한 찜찜한 마음이 생겼다. 그러나 내색을 하진 않았다. 자신이 수국에 온 목적만 다시 떠올렸다. 적지에 온 것은 가족과 함께 살려는 것보다 조국을 위해 싸우는 게 더 중요했다. 최우선이 될 일을 위해 최선을 다하기로 마음을 굳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