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쇠나라 35. 인과율

35. 인과율

by 정완기

35. 인과율(因果律) (613)


수(隋)국을 건국한 문제(文帝)는 신하들이 강력한 권력을 쥐지 못하게 막았다. 그 점을 자식들에게도 철저히 교육시켰기 때문에 양광도 신하들에 대한 감시를 강화시키며 독주가 심해져 갔다.

지난해 든 흉년으로 굶주림과 전역에 시달린 백성들은 황제에 대한 반감이 극에 달했다. 그런 속에 요동으로 끌려가면 죽는다는 무향요동낭사가(無向遼東浪死歌)란 노래가 유행했다.

황제는 2차 침공은 요동성 함락에만 집중하기로 했다. 반면 고구려는 을지문덕의 타계로 위기의식이 더욱 커졌지만 왕실과 여타 부가 다시 뭉쳐서 한 덩어리를 이루게 되었다.

전선을 총지휘하게 된 건무는 계루부 병력 중 절반을 요동성 방어에 투입시켰다. 성안에선 연태조가 진두지휘로 수국 군의 공격을 막는 가운데 수국의 곡사정이 고구려로 망명을 했다.

그런 상황 속에 양현감의 불안감은 더욱 커졌다. 황제는 병력과 물자 공급이 원활치 못하면 문책을 경고받았는데 지방관들이 이행을 하지 않아 그 책임을 고스란히 떠안게 되었다.

그런 때 이밀(李密)이 양현감을 찾아왔다. 그는 2차 침공마저 실패할 경우 황제의 책임 추궁을 받을 것이라며 반란을 부추겼다. 그러나 양현감은 크게 화를 내고 쫓아 버렸다.

양현감은 그렇게 했으나 그 말은 사실이라 속은 편치 못했다. 가만히 있을 수만도 없지만 반란을 일으키는 건 여간 큰 모험이 아니고, 그럴만한 용기도 능력도 없어 고민과 갈등만 컸다.

어느 날 양신은 운하에 머무는 병사들의 분위기를 양현감에게 전했다. 그 말을 듣고 양형감은 은근히 반란을 부추긴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런데 반감은커녕 믿음이 가는 대상처럼 여겨졌다.

양현감은 고위 관직에 있는 자신이 반란을 일으킬 경우 나라를 세울 명분쯤은 내세워야만 했다. 그러나 아무런 준비가 되어있지 않은 터에 양대정은 어딘지 모르게 의욕을 불러일으키게 만들었다.

때문에 양신에게 넌지시 말을 꺼냈다.

"며칠 전 내가 반란을 일으킬 것을 부추기는 자가 찾아왔었다."

"소관이 감히 말씀을 여양 사람들은 전부가 대감께 기대를 걸고 있습니다. 언제 대의의 기치를 세우게 되실지를 기다리는 분위기입니다."

양현감은 자기도 모르게 대답이 튀어나왔다.

"그러나 동원할 병력이 없지 않은가?"

"운하에서 대기 중인 병사들이 있지 않습니까?"

"운하에 대기 중인 병사들을 이끈다?"

"병력을 끌고 결행의 기치를 세우시면 백성들도 모여 들것입니다."

양신의 노골적인 권고를 듣게 된 양현감은 결단을 세우고 말았다.

"나는 병력과 물자 수송을 중단하겠다. 양대정은 대흥엘 다녀와라."

"대감, 소관은 무슨 일로 대흥에 가게 됩니까?"

"이밀 선생을 모셔오기 위해 양적선 장군을 만나 뵈러 간다."

양적선(楊積善)은 양현감의 동생이었다. 낙구창(洛口倉) 수비책임자로 있는 양적선도 형의 반란을 부추기고 있었다. 양현감은 양신을 양적선과 이밀 쪽에 연락을 취하는 임무를 맡길 생각이었다.

"대감, 소관은 길을 몰라 어떻게 찾아가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걱정할 것 없다. 잘 뚫린 국도를 따라 서쪽으로 계속 가면 낙구창에 당도한다. 장님도 쉽게 찾아갈 수가 있으므로 걱정을 말고 떠나라."

양현감은 서찰과 특별 전령패(傳令牌)를 양신에게 내주었다.

"이 전령패를 지니면 어느 곳이나 마음대로 통과할 수가 있다. 내일 아침 일찍 떠나서 낙구창의 양장군 별장부터 찾아가라. 서찰을 전하면 양장군이 무슨 지시를 내릴 것이고 그걸 그대로 따르기만 하라."

양신은 일찍 퇴청해 집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여선과 주랑에게 공무로 낙구창을 다녀오게 된 것을 알렸다. 두 여인은 양신이 며칠간 집을 떠나는 게 걱정되어 무사히 다녀오기만 바랐다.

이튿날 양신은 일찌감치 길을 떠나 서쪽으로 향했다. 넓은 길의 양켠은 들판이 끝없을 모르게 전개되었다. 반듯반듯하게 정리가 잘 된 농경지에도 전쟁의 상처는 잘 드러나고 있었다.

한창 밀과 보리가 자랄 시기라 초록빛 일색이었다. 그런 푸른빛을 띤 밭들 가운데 듬성듬성 맨 흙에 잡초가 무성한 데도 있었다. 주인들이 전쟁터로 끌려 나가 묵힌 땅들이었다.

오랜만에 말을 달려보게 된 양신은 가슴이 탁 트이게 되었다. 그러나 큰길에도 나다니는 행인들이 별로 눈에 띄질 않았고 드문드문 나타나는 마을들도 사람이 사는 것 같지가 않았다.

큰 길만 따라 계속 간 끝에 황하에 접한 낙구창에 당도했다. 그곳은 내륙임에도 큰 포구가 있고 많은 배들이 들어찬 신기한 광경이 펼쳐졌다. 황하와 낙수(洛水)가 교차하는 지점으로 주변은 넓은 들이 펼쳐져 있어 한눈에 곡창지대임을 알 수가 있었다.

양신은 양적선 장군의 별장으로 가는 길을 물으려고 했으나 길에는 사람들이 눈에 띄질 않았다. 그때 멀리로 큰 저택이 하나 보여 일단 그쪽으로 가보기로 하고 가다가 어디쯤에 정자와 우물을 만났다.

정 오게가 지난 시각에 갈증도 일어 우물에서 물을 떠 마셨다. 갈증을 풀리자 허기를 느껴 말안장에 묶어둔 보퉁이를 풀어 들고 정자 위로 올라갔다. 거기서 점심 요기를 마쳤다.

그때 말을 탄 군관 2명이 양신 앞에 나타났다. 삼십 대 초반쯤의 오위(伍尉)들이었다. 양신은 상급자들에게 군례를 붙였다. 두 사람 중에서 키가 작은 오위가 입을 열었다.

"대정, 여양에서 왔는가?"

"그렇습니다."

"대정은 지니고 있는 서찰을 우리에게 내놓게."

양신은 뜻밖의 말을 듣고 반문했다.

"오위님, 서찰을 내놓으라니 무슨 말씀입니까?"

"양상서가 양적선 장군에게 보내는 서찰이 아닌가?"

"그건 제가 직접 전해야만 합니다."

"잔소리 말고 내놓으라면 내놔."

오위들의 강압적인 어투에 양신은 좀 위축된 채 대답했다.

"오위님, 그렇게 할 수는 없습니다."

"상관의 명령을 따르지 않을 생각인가?"

양신은 다그치는 말을 듣고도 거부했다.

"저는 제 상관의 지시만 따를 뿐입니다."

"네 상관인 양상서보다 우리는 더 높은 분의 명을 받들고 있다."

"양상서보다 높은 분이라니 그분은 누구십니까?"

"황제시다."

양신은 그 대답을 듣고 이건 심상치가 않다는 생각을 했다.

"빨리 내놓지 않으면 황제의 명으로 널 체포하겠다."

키가 큰 오위가 다짜고짜 으름장을 놓았다.

"오위님, 절 무슨 죄로 체포를 한다는 말씀입니까?"

양신의 반문에 키가 작은 오위는 음성이 더 커졌다.

"너는 반역자인 양상서를 돕고 있는 자가 아닌가?"

양신은 반역자 소리를 듣고 내심 크게 긴장했다. 그리고 상대가 자신이 서찰을 지닌 걸 어떻게 알고 있는지도 의문이었다. 어찌 되었건 간에 서찰을 내주면 안 된다는 마음을 더욱 굳혔다.

"양상서가 반역자라니 무슨 말씀입니까? 거기다 오위님들은 제가 서찰을 지니고 있는 것을 어떻게 알고 계십니까?"

"우리는 네가 고구려 놈인 것까지 다 알고 있다."

양신은 그 말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고 말았다. 수국 땅에서 자신의 정체를 아는 자가 있다면 태산팔협 밖에 없을 일이었다. 그런데 키가 작은 오위의 입에서 뜻밖의 말이 나왔다.

"그대 이름은 양신이 아닌가?"

양신은 이제 놀라움에 가슴이 터질 것처럼 뛰기 시작했다. 뭐라 대꾸를 못하고 있는데 키가 큰 오위가 이죽거리듯 물었다.

"양신, 우리를 못 알아봤는가? 아니면 모른 척하려는 것인가?"

양신은 내신 이렇게 태산팔협을 다시 만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어찌할 바를 모른 채 두 사람을 뚫어져라 바라다보기만 했다. 어렴풋이 기억이 나는 얼굴들이라 몸이 굳어들었다.

"고구려 다갈촌 풀무장이가 수제국의 대정이 될 줄이야?"

키가 큰 오위가 비웃는 투로 하는 말에 양신은 마음을 진정시키기에 애를 써야 했다. 어떤 대응해야 좋을지 모르나 얼결에 중얼거렸다.

"그대들은 태산팔협이었군?"

"그렇다, 이놈아."

양신은 욕설을 듣고 불쾌감보다 냉정해지려고 했다. 그리고 갑자기 떠오른 것은 가족들의 얼굴이었다. 동시에 당황감과 난감함에 일단은 충돌을 피하고 볼 일이란 판단부터 내렸다.

"나는 중원 땅에 와서 태산팔협이 유명한 검객들을 알게 되었소."

"그런가?"

양신의 공손한 어투에 키가 큰 오위는 반문하며 어깨를 으쓱했다.

"나는 두 오위님의 이름부터 알아 두고자 합니다."

키가 작은 오위는 좀 어이가 없다는 듯 입을 열었다.

"이놈 봐라? 제법 여유가 만만한 태도를 보이는군? 네가 물으니 대답해 주지 않을 수가 없다. 내 이름은 오달이고 아우님의 이름은 육손이다. 네가 우릴 찾아서 중원 땅으로 와 준 것을 환영한다."

양신은 도망칠 기회를 노리고자 또 입을 열었다.

"이왕이면 여러 분들 이름과 태산팔협의 내력도 알려 주십시오."

"그래? 기특하기가 짝이 없는 자로군!"

키 작은 오위는 자랑스럽게 자신들에 관한 설명을 했다.

자신들은 유명한 유고진인(喩皐眞人) 노련(櫓連)의 가장 뛰어난 제자들 여덟 명으로 첫째는 옹장, 둘째는 각대(珏岱), 셋째는 지공(芝空), 넷째는 악목(岳木), 다섯째는 구회(絿匯), 여섯째는 왕달(汪撻), 일곱째는 오달(吳達), 여덟째는 육손(陸損)이다. 그중에서 각대와 악목은 고구려에서 목숨을 잃었음을 밝혔다.

양신은 원치 않을 악연을 진 태산팔협을 미처 못 알아본 자책감이 일었다. 그러나 도망을 쳐야만 해서 주의를 다른 쪽으로 돌릴 겸 사부에 관한 일을 묻고자 예의를 차리는 태도를 취했다.

"유명을 달리하게 된 태산팔협의 두 형제분들에게 애도를 표하오."

오달은 상대가 자꾸 이상한 말만 해서 머리를 흔들며 입을 열었다.

"이제 보니 제법인 자인 걸? 예의를 다 차릴 줄도 알고."

"남은 여섯 명은 모두 군문에 들었소?"

"그렇다. 모두가 황제의 근위군에서 근무를 하고 있다."

"그런데 두 분은 왜 황제를 수행하지 않고 이곳에 와 있소?"

"이번 2차 출정에선 옹장, 지공, 구회 형님만 황제를 수행한다."

"세 사람이 이곳에 남아 있는 이유는 무엇이요?"

오달은 계속 얼토당토않을 질문만 받고 기가 찬 듯 대꾸했다.

"양신, 네가 알고 싶은 게 바로 그것이었는가? 알려주마. 우린 양현감을 감시하는 임무를 띠고 낙구창의 양적선 밑으로 오게 되었다."

양신은 사정을 대강 알게 되자 정작 물어볼 게 있었다.

"이젠 나의 사부님에 관한 일도 들려주시오."

"사부라면 다갈촌 철장을 말하는가? 제 나라 땅에서 누워 있다."

오달이 대수롭지 않게 하는 대답에 양신은 가슴이 탁 막혀 들었다.

"뭐라고?! 고구려 땅에 누워 계신다고? 돌아가셨단 말인가?"

"철장은 저 세상 사람이 되었다. 아마도 저승에서 각대와 악목 형님들로부터 어지간히 큰 시달림을 받고 있을 걸로 생각된다."

양신은 갑자기 터지려는 울음을 억지로 참고 물었다.

"사부님은 고구려 땅 어디에 묻히셨는지 말하라."

"곧 죽을 놈이 그걸 알아 뭣하겠는가?"

"빨리 대답이나 해라."

양신의 호통에 오달은 비웃음을 머금었다.

"자세한 장소를 알면 그냥 도망을 칠 생각인가?"

"묻는 말에 빨리 대답이나 하라."

양신이 다그치자 육손은 이죽거리듯 대답했다.

"네가 죽기 전에 사부가 있는 쪽을 향해서 절이나 올려 둬라."

오달은 분노를 참기에 애를 쓰는 양신을 달래듯 말했다.

"그만 철장이 묻힌 데를 일러 주마."

그런 말을 나누는 사람은 이미 대결 상태로 들어간 것이나 다름없었다. 처음엔 도망을 치려고 했던 양신은 사부가 돌아가신 걸 확인하자 마음이 변해 두 명부터 응징을 가하고 싶었다. 그러나 전엔 상대들이 장도를 지니지 않아 검술실력을 가늠을 할 수가 없었다. 거기다 상황도 전과 달라진 데다 이곳에 있는 또 한 명이 어디에 있는지 몰라 물었다.

"이곳에 있는 또 한 명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걱정 말라. 왕달 형님도 곧 오시게 되었다."

오달은 느긋한 태도로 대답을 했고 육손은 양신을 윽박질렀다.

"양신, 잔소리는 그만하고 서찰이나 어서 내놓아라."

양신은 그 말을 듣기 무섭게 훌쩍 말 잔등에 뛰어올랐다. 일단 피하고 보는 게 상책이란 판단에 달리기 시작했다. 양적선의 별장이 아닐까 추측되는 큰 저택 쪽으로 향했다.

방심을 했던 오달과 육손도 급히 말을 타고 추격했다.

"양신, 서지 못하겠는가? 도망을 친들 갈 데가 어디냐?"

두 사람은 쫓아가며 사람들이 들을 수 있게 고래고래 외쳤다.

양신은 말을 달리면서 또 1명은 어디서 나타날지 몰라 사방을 연신 두리번거려야 했다. 거기다 향하는 데가 양적선의 별장인지도 확실치가 않으나 2명부터 먼저 상대하는 게 유리하다고 판단했다.

마침내 별장에 당도했지만 대문이 굳게 닫혀 있었다.

"문을 열어 주시오. 양적선 장군께 서찰을 전하러 왔소."

양신은 여러 번 큰 소리로 외쳤지만 담장 안쪽에서 교교하게 아무런 반도 없었다. 그런데 오달과 육손 또한 끝내 당도하고 말았다.

"양신, 서찰을 내놓고 죽겠는가? 죽음을 당하고 내줄 건가?"

오달은 비웃음을 머금은 표정으로 다시 요구를 했다.

양신은 그냥 담장을 뛰어넘어 들어갈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양적선의 별장이 아니면 더욱 불리해질 수도 있었다. 별장 안을 들여다보고자 주변을 살피는데 정자가 있는 작은 동산이 보였다. 동산으로 올라가 내려다보려고 말머리를 돌려 치달아 올랐다.

오달과 육손도 뒤쫓아 오르는 동산은 3면이 깎아지른 절벽을 이루고 언덕 위는 좁은 공간이 있었다. 오달과 육손은 퇴로가 차단되어 더는 도망을 칠 수가 없게 되자 한 마디씩 했다.

"양신, 근사한 데다 죽을 자리를 잡았구나?"

"고약한 놈이로다. 신선이나 놀 곳에 피 칠을 하려고 들다니!"

두 사람은 그렇게 주절댔지만 말에선 내리지 않았다. 일단 외길을 막아놓아 독 안에 든 쥐로 만들어 느긋한 표정들이었다. 오달은 왕달이 오기만을 기다릴 속셈에 딴 소리를 했다.

"양신, 한어 실력이 제법 상당하군?"

양신은 궁금한 점을 또 물었다.

"대체 내가 낙구창에 오는 걸 어떻게 알았는가?"

"곧 죽을 놈이 웬 놈의 궁금한 점이 그리도 많을까?"

"내가 죽을 때가 되었다면 사실을 알고나 죽으련다."

육손은 그런 대답을 듣고 측은하게 여겼던지 대답했다.

"죽을 놈의 원을 못 풀어 줄 것도 없지. 네가 죽게 된 이유부터 알려 주마. 너는 곧 모반을 일으킬 양상서 밑에 있기 때문이다."

양신은 도망을 칠 방법을 찾으면서 또 물었다.

"내가 묻는 말에 대답이나 하라."

"양상서 밑에 있는 상조 참군은 우리 편이다."

오달의 대답에 양신은 내심 너무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상조 참군이?"

"황제 폐하께선 양현감이란 자를 믿지 않으신다. 때문에 옹장 형님은 손을 써 상조 참군을 포섭해 놓았다. 우린 상조 참군을 통해 양현감의 동태를 손바닥을 들여다보듯 다 알고 있다."

양신은 우선 피해야 하는데 뜻대로 될 것 같지가 않았다. 더 큰 문제는 또 한 1명이 합세하게 되는 일이었다. 그렇다면 먼저 2명을 상대해 꺾을 수밖에 없다는 생각에 말에서 훌쩍 뛰어내렸다. 그리고 밀두도를 뽑아들자 오달과 육손도 할 수가 없는 듯 말에서 내렸다.

양쪽은 서로 간에 거리를 둘 공간도 없는 가운데 양신이 선제공격으로 들어갔다. 오달과 육손은 수적인 우세를 믿고 협공으로 맞섰다. 그러나 두 사람은 양신의 공격을 막으려고 들뿐 반격은 하지 않았다.

양신은 두 명이 시간을 끄려는 것임을 간파하고 적극 공세를 폈다.

"야, 잇."

기합성과 함께 자꾸 몸을 솟구쳐 올렸다. 그럴 때마다 두 사람은 키를 넘는 높이 치솟는 상대를 보며 입들을 딱 벌였다. 그리고 각자는 공격을 피하기에 허둥거리는 자세가 되었다.

양신은 두 사람이 시간을 끌려는 태도만 보여서 공격도 여의치가 않았다. 그러나 두 사람은 강하게 쉭쉭 휘두르는 상대의 칼날 소리를 들을 때마다 몸들이 움츠러들게 되었다.

두 사람은 두려움만 커지고 상대의 칼날을 받을 때마다 전신에 소름이 끼쳐 들었다. 이제까지 이처럼 힘이 강한 자는 처음이라 무섭기까지 했다. 말로만 듣던 고구려 제일의 검객임을 실감하고 있었다. 자신들이 과욕을 부렸다는 후회가 일어 도망칠 생각만 하고 있었다.

때문에 협공을 살려서 반격은커녕 막아내기조차 어려워져 당황감만 커졌다. 아니 상대의 점점 거세지는 공격을 피하기에 급급해졌다.

양신은 상대해 볼수록 자신감이 생겨서 더욱 거칠 게 몰아붙였다. 두 사람은 협공의 이점을 살리지 않고 허둥대며 방어조차 힘들어하는 걸 느낄 수가 있었다. 그런 중에 오달이 목청껏 외쳤다.

"여기에 도적이 나타났다."

"모두들 나와서 잡아라."

육손도 따라서 소리를 질러댔다. 부근에 있을 또 한 명의 형제를 부르려는 것인데 그러던 육손의 입에서 단말마가 터졌다.

"억!"

양신의 밀두도가 육손의 오른쪽 어깨 죽지를 베어놓은 것이었다. 그걸 본 오달은 도망을 치려고 몸을 돌렸으나 밀두도는 그의 옆구리마저 찔러들었다. 신음과 함께 무릎을 꿇었다.

오달은 어깻죽지가 땅에 떨어진 채 숨을 거두었고, 육손은 옆구리에서 피가 솟구치는 몸을 비틀거리며 도망을 치다가 낭떠러지 밑으로 굴러 떨어졌다. 그 순간 양신도 허리를 푹 꺾고 말았다.

어느새 나타난 왕달이 장기인 마름쇠를 던졌기 때문이었다. 그는 몸을 숨기고 싸우는 광경을 지켜보고 몸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러다 방심한 양신에게 마름쇠를 던져 쓰러뜨린 것이었다.

왕달은 그제야 몸을 드러내고 장도를 쓱 뽑아 들었다. 그리고 양신의 목을 치려고 다가들었으나 그것은 방심이 부른 오산이었다. 움직이질 못하던 양신이 번개처럼 휘두른 칼에 쓰러졌다.

양신은 허벅지에서 피가 솟구쳐 나오는 몸으로도 3명을 모두 처치해 버렸다. 전쟁터를 누비면서 어느새 몸에 밴 증오심이 여지없이 발동된 것이나 끝내 쓰러져서 정신을 잃었다.

며칠이나 지났을까. 양신은 어느 호사스러운 방안에 뉘어진 채 눈이 떠졌다. 의식이 돌아와 몸을 일으키려고 하다 심한 통증을 느꼈다. 비로소 태산팔협과 싸운 생각이 났지만 어떻게 여기에 누워 있는지는 몰랐다. 누가 옮겨놓고 치료를 한 모양인데 이 상태가 안전한 것인지 곤경에 처한 것인지는 알 수가 없었다. 심한 갈증을 느껴 신음소리를 흘려냈는데 방문이 열리고 한 여인이 방 안으로 들어섰다. 여인은 멀뚱히 자길 바라만 보는 양신에게 반색을 하며 입을 열었다.

"양신님, 깨어나셨군요?"

양신은 여인을 자세히 바라보다 눈빛이 달라졌다. 그녀는 2년 전 요동성에서 하룻밤의 인연을 맺은 적이 있는 만돌이었다.

"혹시 만돌이 아니오?"

만돌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양신님, 절 알아봐 주시니 고마워요."

"여기는 어디요? 나는 어떻게 여기로 오게 되었소?"

"여긴 양적선 장군의 별 장예요."

양신은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사흘 전 양신님은 정자가 있는 동산에서 결투를 벌였지 않아요?"

"그렇소만, 내가 안전한 상태로 생각해도 되겠소?"

"안전해요. 양신님은 혼수상태로 업혀 왔어요. 그러나 무공이 높았기에 망정이지 보통 사람 같았으면 목숨을 잃었을 것이라고 해요."

만돌은 그날 별장의 하인들은 동산에서 벌어진 싸움이 잠잠해지자 올라가 보았다. 그랬더니 큰 부상을 입은 양신만 목숨이 붙은 채 의식을 잃었고 상대했던 3명은 목숨을 잃었다고 했다.

"내가 누군지도 모르면서 왜 옮겨왔단 말이요?"

"하인들은 양신님이 밖에서 서신을 가져왔다고 외치는 말을 들었대요. 대문을 열기 전에 문틈으로 내다보니 뒤미처 군관들이 들이닥쳤고 죽이겠다는 말을 해서 문을 열지 못했대요. 그런 뒤 언덕 위에선 혈투가 벌어졌다는 거예요."

"내가 처치한 군관들은 어찌 되었소?"

"장군님이 시체 셋을 모두 치우게 만드셨어요."

만돌은 그런 말을 하고 다시 몸을 일으켰다.

"양신님, 잠시만 기다려 주시면 제가 장군님을 모셔 오겠어요."

양신은 만돌이 방을 나가자 비로소 안도의 한숨이 흘러나왔다. 잠시 후 기침소리가 일어나고 뚱뚱한 체구의 양적선이 방 안으로 들어섰다.

"양만춘 대정, 깨어났군?"

양적선은 억지로 몸을 일으키려는 양신에게 손을 내저었다.

"그대로 누워 있게. 자네가 내 별장 근처에서 그런 일을 당했기에 망정이지 다른 곳에서 그랬다면 큰 일 날 뻔했네."

"장군님이 거두어 주셔서 살아나게 되었습니다."

양적선은 궁금한 점부터 알려고 해서 양신은 그날에 일어났던 사건을 소상하게 밝혔다. 얘기를 다 듣고 난 양적선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양만춘 대정이 서찰을 빼앗기지 않은 것은 천만다행이 아닐 수가 없다. 그런데 그 자들이 양대정이 이곳에 오는 것은 어떻게 알았을까?"

"장군님, 그에 대한 중요한 보고를 드릴 게 있습니다."

"중요한 보고라니? 어떤 것인가?"

"그 자들은 상서 대감과 장군님을 감시하고 황제에게 보고했습니다."

양신의 말에 양적선은 더욱 안색이 변했다.

"그럴 수가?! 나도 비슷한 의심이 든 적이 없지는 않았네. 아무튼 양만춘 대정이 모두 처치를 했기에 망정이지 큰일 날 뻔했네."

"장군님, 여양으로 가셔서 먼저 취하실 조치가 있습니다."

"무슨 조치를 취하란 말인가?"

"상조 참군은 제가 처치한 근위군 소속 오위들과 밀통해 왔습니다."

"상조 참군이?! 안 되겠다. 당장 여양으로 가서 형님께 보고를 해서 조치를 취해야 하겠다. 자네는 당분간 여기서 치료를 받고 있게."

양적선은 그 말을 남기고 급히 방을 나갔다. 조금 있다가 만돌이 다시 방 안으로 들어왔다. 양신은 그녀에 대한 의문이 있어 물었다.

"만돌은 어떻게 수국 땅에서 살고 있소?"

"말씀을 드리자면 길어요."

만돌은 그렇게 입을 열고 자신에 관한 일을 밝혔다. 부친은 요동성에서 장사로 생계를 꾸렸는데 수국의 침공 소문이 나자 위험을 피하려고 가족들을 끌고 수국 땅으로 이주를 했다. 그런 부친이 수국 군에 강제로 징발되어 전쟁터로 끌려 나갔다. 때문에 자신은 가족들의 부양을 맡게 되고 술청들을 전전해야만 했다. 그러다가 양적선의 눈에 들어 첩이 되었고 그때부터 이 별장에서 살게 되었다고 했다.

이틀 후 양적선은 여양에서 돌아왔다.

"만춘 대정, 형님은 자넬 보배처럼 여기고 계시네. 큰 걱정을 하시며 자네의 약도 지어 보내셨다. 얼른 쾌차해져 돌아오길 바라고 계신다."

양현감은 상조 참군이 자신을 감시하고 있는 줄을 꿈에도 몰랐다. 그러나 크게 분개하면서도 모른 체 그냥 놔두기로 했다. 그 자를 역으로 이용해 역으로 써먹을 필요성이 있기 때문이었다.

"장군님, 소관은 걱정이 큽니다."

"무슨 걱정 때문에 그러는가?"

"소관이 집을 오래 비우게 되어 가족들의 걱정이 크기 때문입니다."

"그렇겠네. 낼 나는 여양으로 다시 가는데 가족에게 알려주겠네."

"소관의 이번 일은 감추시고 며칠 내로 돌아갈 것만 알려주십시오."

"그렇게 하겠다."

양적선은 이튿날 여양으로 떠났다. 양신은 사흘 뒤 마음이 조급하고 몸조리를 그만해도 운신이 가능할 것 같아 만돌에게 말했다.

"만돌, 나는 내일 여길 떠날 생각이요."

"아직은 몸을 움직여 좋을 게 없지 않겠어요?"

"말을 탈 수가 있겠소. 날 간병하는데 많은 애를 써줘서 감사하오."

만돌은 저녁때 주안상을 차려 들고 들어왔다.

"오늘 밤은 양신님께 조촐한 환송연을 베풀려고 해요."

양신은 그녀가 권하는 술을 성의를 생각해 한 잔만 받기로 했다. 만돌은 이별주라며 혼자서 술병을 다 비우고 난 뒤 신세타령을 늘어놓았다.

"저는 여기서 사는 게 감옥살이와 같고 겁이 난요. 진작 벗어나야 한다는 생각을 하던 참에 양신님을 다시 만나게 되었어요. 저는 양신님을 다시 만나게 된 것을 기회로 이 집을 나갈 마음을 굳혔어요."

"무엇 때문에 이 집을 나갈 생각을 하오?"

"지금 양상서 형제가 반역을 일으키려고 한다는 소문이 파다해요."

양신은 뭐라고 할 말이 없어 고개만 끄덕였다.

"저는 양신님을 걱정하고 있어요. 위험한 자들 밑에 더 있다간 목숨이 위태해지게 돼요. 더 이상 연루가 되지 않게 저하고 떠났으면 해요."

양신은 마지못해서 대답을 했다.

"나는 처자식이 있어 어디로 떠나기는 쉽지가 않겠소."

"저도 양신님의 사정을 들어서 알고 잘 있어요. 타국 땅에 와서 살기가 힘들어 군문에 드셨지요. 그러나 하루속히 그만두셔야 해요."

"군문에서 나가면 우리 가족은 먹고살 길이 없어지게 되오."

"그러시다면 저는 양신님에게 한 가지 제안을 하겠어요."

"내게 어떤 제안을 하겠단 말이요?"

"양신님이 절 곁에 있게 해 주시면 생계를 걱정하지 않게 하겠어요."

"만돌이 내 곁에 있으면 생계 걱정을 않다니 그게 무슨 소리요?"

"저는 그동안에 적잖은 돈을 왔어요. 절 첩실로 받아들여 주시면 양신님의 가족이 전부 호의호식을 하며 살 수가 있게 해 드리겠어요."

만돌은 술을 빙자해서 자신의 속내를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그러나 양신은 당치도 않을 소리만 해서 고개를 무겁게 가로저었다.

"저는 요동성에서 양신님과 하루 밤의 인연을 맺은 뒤로 하루도 잊은 적이 없는데 그런 저를 왜 받아 줄 수가 없다는 말씀을 하시는가요?"

양신은 매우 난처해 달래는 투로 말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가족이 있는 몸이니 이해를 해주시오."

"그렇지만 저는 양신님을 사모하다 못해 마음의 병이 생겼는데 이렇게 다시 만나게 된 것을 하늘의 뜻으로 여기니 제발 절 받아주세요."

만돌은 매달리는 말을 계속했지만 양신은 그럴 수는 없었다.

"만돌, 날 생각해 주는 마음은 고맙지만 나는 첩실을 드릴 형편이 못 될 뿐만 아니라 그러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음을 밝히겠소."

"돈은 제게 있으므로 어려운 형편은 그만 쳐들어 주세요."

"나는 아내 이외의 다른 여인을 원치 않소."

양신은 야박하나 잘라 말을 했지만 만돌은 물러설 태도가 아니었다.

"양신님은 지금 어떤 형편에 처해 있는지 알고나 그런 말을 하세요?"

"내가 어떤 형편에 처했다는 말이요?"

"양신님은 반역자 양상서를 받들고 있지 않아요? 하루속히 양상서 곁을 떠나지 않으면 본인의 목숨은 물론 가족들도 무사하지 못하게 돼요. 황제가 돌아오기 전에 빨리 여양을 떠나야 하는데 제가 돕겠어요."

만돌의 말에 양신은 무겁게 고개를 저었다.

"수국 땅에선 반란을 일으키려는 사람들이 많소. 그 이유가 어디에 있는가 하면 백성들이 도탄에 빠졌기 때문이요. 그럼에도 황제는 거듭 고구려 침공에 나서 양국의 백성들은 큰 인명 피해를 당하고 그로 인한 고통이 얼마나 크오? 내가 양상서를 돕는 건 고구려를 위하는 일이요."

"어머, 양신님이 그처럼 무모한 생각을 하는 사람인 줄은 몰랐어요."

"나는 비록 위험에 빠진다고 해도 조국을 위하는 게 우선이요."

양신의 결연한 태도에 만돌은 반발을 하고 말았다.

"양신님은 절 첩실로 받아들이지 않으려고 둘러대는 말이에요."

"만돌, 미안하오. 그러나 나에 대한 마음을 접어주기 바라오."

"양신님은 지금 첩을 거느리고 살면서 나는 왜 안 된다고 하나요?"

"내가 첩을 거느리고 살다니 그게 무슨 소리요?"

"양장군한테 다 들었어요. 양신님은 두 명의 여인을 거느리고 사는 걸로 알려져 있어요. 그 두 명 중 하나는 첩실이 아니고 뭐겠어요?"

양신은 그 말을 듣고 어이가 없었다.

"만돌, 큰 오해요. 또 한 여인은 내 처제요."

그러자 만돌은 한 술을 더 떴다.

"처제도 함께 살면 첩이지요. 내가 그녀보다 예쁘질 못한 가요?"

만돌은 말하고 갑자기 옷을 벗기 시작했다. 2년 전 요동성에서도 알몸 공세를 퍼붓던 행티를 재연하려고 들었다. 실오라기 하나 남지 않은 몸에서 흔들이는 젖무덤을 그대로 밀어붙였다.

"만돌, 이러지 마오."

양신은 막무가내로 덮쳐 드는 만돌의 상체를 두 손으로 꽉 잡았다.

"양신님, 그러시면 하룻밤만이라도 절 안아 주세요."

만돌이 사정조로 말을 했지만 양신은 단호하게 밀쳐냈다.

"나는 이 밤으로 여길 떠나야 하겠소."

"양신님은 내가 그토록 싫은가요?"

"싫어서가 아니고 그래선 안 되기 때문이요."

"싫지도 않은 계집을 왜 내치는가요? 그건 냉혈한이나 하는 짓이에요. 그동안 상처를 돌봐 준 공을 생각해서라도 그럴 수는 없지 않겠어요?"

"나는 만돌의 도움을 받은 건 매우 감사하게 여기오. 그러나 양장군님을 모시는 여인을 범할 수는 없소. 미안하오. 이만 떠나야 하겠소."

양신은 몸을 벌떡 일으켜 세웠다.

"저도 양신님을 따라 이 집을 나가겠어요."

"무엇 때문에 날 따라나선단 말이요?"

만돌은 날카롭게 외쳤다.

"반역자의 집에 더 있다간 죽음을 당할 일만 남았으므로 그래요."

양신이 몸을 일으켜 세우자 만돌은 등에다 대고 악을 썼다.

"갈 테면 가라지. 그러나 내게 진 신세는 갚아야 하지 않겠어요?"

만돌의 말에 양신은 몸에서 염낭 주머니를 떼어냈다.

"내가 지닌 돈은 이게 전부요."

"이 정도로는 안 돼요. 다른 물건을 더 내놔요."

양신은 독이 오른 여인의 요구 앞에 난감하기 그지없었다.

"내겐 달리 더 내놓을 물건이 없으니 나중에 더 주겠소."

"나중엔 안 되고 지금 등에 진 장도라도 내놓아요."

"만돌, 다른 것은 몰라도 장도만은 안 되오."

"그럼 허리춤의 단검이라도 내줘요."

"단검을? 이건 내 신표로 지닌 것이요."

"신표라면 더 잘 되었군요? 사랑을 얻지 못한 여인이 사랑하는 사내의 신표라도 대신 지니고서라도 살면 좋겠어요."

양신은 좀 걱정이 들면서 물었다.

"혹시 이 단검으로 자결이라도 할 생각은 아니오?"

양신의 말에 만돌은 비웃음을 머금었다.

"양신님의 사랑을 못 받는다고 자결할 사람으로 보이세요? 그럴 생각은 추호도 없으니 양신님이나 목숨을 잘 부지하길 바라요."

만돌의 냉랭한 음성으로 말했다. 양신은 할 수 없이 허리춤에서 단검을 꺼내들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만돌은 계속 소요를 일으켜 집안의 다른 사람들이 몰려들 것 같았다.

"단검을 받으오."

"양신님은 내 가슴을 아프게 한 대가는 꼭 치르게 해 주겠어요."

만돌이 독기 서린 포악을 퍼붓자 양신은 등골이 서늘해진 채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마구간에서 말을 꺼내 타고 한 밤중에 10여 일 전 왔던 기억을 더듬어 여양으로 방향을 잡고 말을 몰았다.

양신은 이튿날 오전에 여양에 당도했다. 먼저 집으로 가고 싶었지만 관청으로 갔다. 양현감은 이밀과 함께 있다가 양신을 보고 크게 반겼다.

"양만춘 대정이 돌아왔군! 상처는 어떤가?"

"대감, 움직일 만합니다."

곁에 있던 양적선이 입을 열었다.

"양만춘 대정, 왜 벌써 왔는가? 가족들은 내가 안심을 시켰네."

양현감은 양신에게 이밀을 소개했다.

"양만춘 대정 인사를 드리게. 포산공 이밀 선생님이시네."

양신은 이밀에게 허리를 숙여 인사를 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대정 양만춘입니다."

"자네가 낙구창에서 이름난 무림의 고수를 셋이나 제압했다지?"

이밀은 양신에 관한 얘기를 들었지만 20대 초반의 젊은이 인 줄은 몰랐다. 검술실력이 대단함도 그렇지만 좀체 결단을 못 내렸던 양현감을 움직이게 만든 당사자임을 알고 마치 동지를 대하는 눈길이 되었다.

"양만춘 대정은 가족들 걱정이 클 것이니 어서 집으로 가보게."

양현감의 말에 양신은 주저 없이 관청에서 물러났다. 집으로 돌아가자 여선과 주랑은 기쁨의 눈물을 흘렸고 가의와 계영도 안도의 한숨을 겨우 놓을 수가 있었다. 모두는 관청이 알린 대로 양신이 도둑 떼를 만나 부상을 당한 걸로 알 뿐 태산팔협과 겨룬 것은 모르고 있었다.

저녁때 사오가 음식을 잔뜩 싸들고 찾아왔다.

"서방님, 사오양이 그동안 서방님 걱정을 얼마나 했는지 몰라요."

19세의 동갑 나기인 여선, 주랑, 계영은 15세인 사오를 친동생처럼 여겼다. 평소 외로움을 타는 사오는 양신이 없는 동안엔 더욱 매일처럼 놀러 와서 잠도 자면서 더욱 가까워졌다.

주랑은 무료를 달랠 겸 계영과 사오에게 검술을 가르쳤다. 두 사람은 열의를 보이며 적극 배웠다. 사오는 양신의 상처에 좋은 약들을 구해오는 등 물심양면으로 도우려 해서 양신은 고마움을 표했다.

"나는 사오양의 신세를 너무 져서 어찌 갚아야 좋을 모르겠소?"

그런 말을 들은 사오는 얼굴을 붉히며 대꾸했다.

"저는 주랑 언니한테 검술지도를 받는 보답을 하고 싶어 그래요."

"고맙소. 나는 사오양을 한 가족처럼 여기고 있소."

사오는 양신에게서 그런 말을 듣자 두 눈에서 눈물마저 돌았다. 양신이 집을 비운 사이엔 가족 못지않게 걱정이 컸고 그게 지나쳐 가슴속 한 구석에선 사모의 정까지 생겨났다.

사근과 아내는 처음엔 딸이 양신 가족과 너무 가까이 지내는 걸 막으려고 했다. 그러나 뜻대로 되지가 않았고, 나중엔 모친도 딸과 함께 자주 찾아다니며 점점 가까워지게 되었다.

양신은 대강 몸을 추스르자 다시 관청 근무를 시작했다. 이밀은 그런 양신에 대한 관심이 커서 가깝게 대하며 대화를 많이 나누려고 했다. 양신은 그러는 이밀이 이상해서 가의에게 물었다.

"참군님, 이밀이란 분에 대해 아시는 게 있으십니까?"

"이밀은 황제가 관직을 내려도 받지 않았던 사람일세."

"왜 관직을 피한단 말씀입니까?"

"이밀은 양상서와 함께 전에는 황제의 가문에 못지않을 위치에 있었기에 자존심도 있고 어떤 야심을 품을 만한 사람일세. 거기다 변덕스럽고 의심이 많은 황제와 가까이 해선 목숨을 잃거나 패가망신할 위험성이 크다는 판단 때문일세."

"야심을 품는다면 스스로 일어날 것이지 왜 양상서 밑으로 들까요?"

"이밀은 많은 무리를 모을 여건은 못 되네. 때문에 그런 위치에 있는 양상서를 이용할 속셈에 밑으로 들어간 걸로 보고 있네. 그렇지만 나는 양상서나 이밀이나 다 같이 천자가 될 만한 큰 그릇은 못 된다고 보네."

"전국적으로 반란이 걷잡을 수 없게 일어나는 형세인데 앞으로 황제는 가 많은 반란자들을 전부 진압할 수가 있을지는 의문이 듭니다."

"황제는 도처에서 일어나고 있는 반란에 대해선 크게 신경을 쓰지 않을 것이나 양현감은 다를 걸세. 그 이유는 양현감이 병력을 모을 수가 있는 여건을 갖춘 자라 곧 진압에 나설 걸로 보네. 황제에겐 아직 반란을 종식시킬 힘이 충분히 있어서 양현감을 진압할 수가 있다고 보네. 그렇게 될 경우 그 여파는 양대정에게도 미칠 것이라 큰 걱정일세."

양신도 자신의 문제를 벌써부터 생각하고 있었다. 여양에선 양현감의 모반을 기정사실화될 걸로 보는 사람들이 많았다. 때문에 자신은 양현감 밑에 더 있는 건 매우 위험함으로 어디로 피해야 하는데 갈 곳이 없었다. 그런데 가의는 말을 이었다.

"황제가 양현감의 모반을 진압한다면 체포와 색출 바람이 크게 불 것일세. 피비린내를 부를 사태 속에 양대정도 무사하지 못할 것이고 함께 사는 나 역시 연루될 위험성이 크다는 점을 부인할 수가 없네."

양신은 한숨만 흘러나오데 가의는 자신의 생각을 꺼냈다.

"양대정이 나를 믿는다면 내 의견대로 따라 주겠는가?"

"참군님, 무슨 말씀이신지요?"

"그동안에 나는 자네 덕분에 살았지만 그만 여양을 떠날 생각일세."

"참군님이 여양을 뜨시려는 이유는 저 때문이 아닙니까?"

"양대정 말을 부인하지 않겠으나 자넬 원망하지 않네. 나는 자네 가족을 내 핏줄처럼 여겨서 내 가족과 함께 안위를 걱정하고 있네."

양신은 그 말을 조금도 의심치 않고 믿었다. 자신은 조국을 구할 일념에 무모한 짓을 너무 많이 한 터라 수국 땅을 벗어나야만 했다. 때문에 가족에게 그만 백제로 떠나자는 말을 꺼냈지만 오직 생부에 관한 일만 생각하는 주랑이 완강히 반대해 어찌해야 좋을지 난감했다.

"내 고향 태원으로 함께 간다면 나는 자네 가족을 도울 수가 있겠네."

가의의 말에 양신은 귀가 번쩍 뜨이며 구원을 받는 심경이 되었다.

"참군님, 그렇게만 해주시면 따라가겠습니다."

"잘 생각했네. 그럼 이 집을 처분해 태원에 살 집을 마련해야 하겠네. 집을 처분하려면 시간이 좀 걸릴 것이나 지금부터 떠날 준비를 하세."

두 사람은 함께 떠나기로 약속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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