쇠나라 1.불놀이

1.불놀이(611)

by 정완기

1. 불놀이(611)

한 대의 불화살이 날았다. 불화살은 석양에 물드는 하늘에서 길게 포물선을 그은 끝에 강 건너 쪽 비석암 밑에 치쌓은 장작더미에 꽂혔다. 백사장을 가득 메운 사람들은 환호성을 터뜨렸다.

"아!"

"와-."

불화살이 꽂힌 비석암의 장작더미에 불이 붙었다.

다갈촌(多曷村)에선 해마다 춘삼월 그믐밤에 불놀이를 했다. 쇠를 다루는 야장(冶匠)들이 불의 소중함을 알리려는 행사였다. 불놀이는 야장들만이 아닌 인근 촌락의 사람들도 함께 어울렸다. 강변 모래톱에 술 항아리와 음식상들을 펼쳐 놓고 먹고 마시며 놀았다.

천신(天神)께 제사를 지내는 제관(祭官)과 쇠를 다루는 야장들은 특수 신분이었다. 돌멩이를 녹여 쇠를 뽑고 유용한 도구를 만드는 기술을 지닌 야장들은 선망의 대상이었다.

야장촌의 우두머리는 야좌(冶座)였다. 고구려 야장방의 시원(始原)인 다갈촌엔 야좌 위에 철장(鐵長)이 있었다. 철장은 고구려 전체에서 단 한 명으로 야장들의 정신적인 지주가 되었다.

야장들은 무기도 만들지만 검술(劍術) 연마에도 힘을 썼다. 무예를 지니는 것을 큰 긍지로 여겨서 다갈촌엔 무문(武門)까지 두었고 그 명성은 타국에까지 알려져 있었다.

봄이라고 하나 북국(北國)의 밤은 기온이 몹시 찼다.

비석암의 불길은 거세게 타올랐다. 용틀임을 치듯 암벽 전체를 휩싸고 들며 어둠을 대낮처럼 밝혀놓았다. 그런 가운데 다갈촌의 야좌인 양신(陽辰)은 누구를 찾는 듯 사람들 사이를 돌아다녔다.

그때 양신 앞으로 젊은이 두 명이 다가들었다. 한 사람은 백제의 계백(階伯)이고 또 한 사람은 신라의 해론(奚論)이었다. 두 사람은 이번 검술대회에서 양신과 더불어 진석(眞席)에 든 영광의 주인공들이었다.

다갈촌의 검술대회는 1, 2, 3등을 진석(眞席)으로 쳤다.

금년 대회는 고구려, 백제, 신라 순으로 10대 후반들이 진석을 휩쓰는 이변이 일어났다. 그 바람에 해마다 진석에 들던 돌궐의 흑발(黑魃)은 4등, 장안성 왕실 검사단(劍士團)의 구조리(臼鳥利)는 5등으로 밀려났다.

해론이 먼저 입을 열었다.

"양신님, 여기서 뵙게 되는군요?"

양신은 나란히 선 두 사람을 기이한 듯 바라보았다. 오래간만에 불놀이에 참가한 백제와 신라 야장들은 어디서도 함께 어울리는 모습을 볼 수가 없었기에 의외란 듯 묻게 되었다.

"계백님, 해론님, 저녁 식사들은 하셨습니까?"

양신이 묻자 성격이 활달한 계백은 자기 배를 손으로 탁탁 쳤다.

"다갈촌의 내장탕은 별미 중 별미입니다. 하도 맛이 좋아 저는 두 그릇씩 먹게 됩니다. 오늘도 너무 먹어 배가 터질 지경입니다."

"다행입니다. 저는 음식들이 입에 맞지 않을까 걱정을 했습니다."

양신의 대답을 이번엔 해론이 받았다.

"저도 순대 맛이 어찌나 좋은지 식사 때마다 번번이 과식을 합니다. 순대가 그처럼 맛있는 음식인 줄은 처음 알게 되었습니다."

"과찬들을 해주시니 고맙습니다. 두 분은 산책 중이십니까?"

"아닙니다. 우린 양신님을 찾아 백사장을 돌아다니는 중입니다."

"두 분은 무슨 일로 절 찾아다녔단 말씀입니까?"

양신이 묻자 계백이 받았다.

"양신님, 이번 대회에서 우리 세 사람은 진석에 들지 않았습니까?"

"그렇습니다만?"

"우린 나라는 각기 다르나 젊은이들로 한번 어울려보고 싶습니다."

계백의 말을 해론이 받았다.

"오늘로 검술대회를 모두 마쳤습니다. 저는 이대로 헤어지기가 너무 섭섭해 저녁을 먹고 계백님을 찾아갔습니다. 그랬더니 계백님도 저와 같은 생각이라 양신님과 함께 어울려 보자는 얘길 나누게 되었습니다."

"아, 그러셨군요?"

양신이 반기는 기색을 보이자 계백과 해론은 서로 웃음을 나누었다.

"양신님, 우리와 함께 어울려 주실 순 없겠습니까?"

"저도 그러고 싶었습니다."

해론은 양신의 대답을 듣고 기쁨을 금치 못했다.

"양신님이 선뜻 응해주시다니 대단히 감사합니다."

양신은 자신이 먼저 꺼냈어야 할 말인데 그렇지 못했던 점을 미안하게 여겼다. 자신은 그동안 불놀이 행사를 주관하는 책임을 맡고 너무도 바빠 거기까진 미처 생각을 못 했었다.

"처음 불놀이 행사를 주관하는 책임을 맡아 정신이 없었습니다. 때문에 두 나라 야장님들께 세세한 배려를 못한 점 사과드립니다."

"양신님이 그런 말씀을 하시니 도리어 저희들이 송구합니다."

계백의 대답을 듣고 양신은 마음이 좀 놓였다. 그렇지 않아도 울적함을 달랠 길이 없던 참인데 두 사람의 출현은 구원이라도 받는 심경이었다. 함께 어울려 술도 마시고 세상 얘기도 나누다 보면 괴로움을 잠시 잊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제가 두 분과 어울릴 자리를 마련하겠습니다."

양신의 대답에 두 사람은 기쁨에 활짝 웃었다. 그때부터 세 사람은 죽이 맞는 친구들처럼 나란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어느새 비석암의 장작더미는 거의 다 불에 타 어마어마한 참숯불 더미로 변해 갔다. 사람들은 북소리에 맞춰 화축가(火祝歌)를 합창했다.

불꽃이 인다, 불길이 오른다.

불씨를 구하러 허여여 산으로 간다야

불길을 잡으러 발가가 산으로 가누나.

푸러러 물길 따라 누러러 땅을 누비고

거머어 쇠를 캐어 녹이는 대장장이들

연년세세 불씨를 지켜 내리라.

불길이 수그러들며 밤하늘은 다시 야음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불에 달구어진 비석암은 이글거리는 열기를 계속 토해고 있었다. 뿜어내는 유백색의 빛은 강 건너 쪽인 백사장까지 전해졌다.

계백과 해론은 거대한 참숯불더미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처음 보는 장관 앞에 몸들이 굳어져 있었다. 사람들은 비석암의 황홀한 빛에 취하듯 신음 같은 소릴 흘려내며 그쪽을 향해 절을 했다.

양신은 넋이 나간 듯 서 있는 계백과 해론에게 말했다

"두 분도 비석암을 향해 소원을 빌어보시지요."

"양신님, 소원을 빌어보라고 하셨습니까?"

"비석암이 빛을 발할 때 소원을 빌면 다 이뤄진답니다."

"예쁜 처녀들이 많은 다갈촌에서 장가를 들게 해달라고 빌까?"

해론의 대답에 계백은 껄껄 대며 웃었다.

"그거 좋겠소. 나도 약혼자가 없다면 그렇게 빌겠소."

"이제 보니 두 분은 매우 엉큼들 하신 걸?"

양신의 말에 계백은 느닷없이 말을 꺼냈다.

"양신님, 제가 낮에 부탁을 드린 말씀을 혹시 잊진 않으셨지요?"

"계백님, 무슨 부탁의 말씀입니까?"

"다갈검법을 한 수 지도받고 싶단 말씀을 드리지 않았습니까?"

양신은 그제야 안색이 약간 굳어들었다.

"저는 그저 농담으로 하신 말씀으로 알았습니다."

"양신님, 농담을 할 게 따로 있지요."

"그럼, 진정이셨다는 말씀입니까?"

"물론이죠. 지금이라도 잠시 시간을 내주실 순 없겠습니까?"

이번 검술 대회에서 최종 결승전에서 맞붙은 두 사람의 결과는 양신은 1등 계백은 차석이었다. 대결 후 양신은 위로의 말을 건네려고 다가들었을 때 계백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왔다.

양신은 처음엔 엉뚱한 청으로 여겨 미소만 지었다. 그런데 계백은 진지한 표정으로 거듭 청했다. 양신은 난처해 억지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는데 계백은 승낙을 받아낼 표정이었다.

'이제 보니 한 수를 배우겠다는 게 아니고 재대결을 원하는군?'

양신은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며 계백을 다시 보았다. 그 표정엔 결승전에서 패한 아쉬움이 짓게 남아 보였다. 무예로나 패기로나 남에게 지고는 못 견딜 성미 같아 보였다.

"양신님, 거듭 청해도 되겠습니까?"

계백의 끈질긴 청에 양신은 슬며시 오기가 일었다.

"그럼, 지금이라도 잠시 시간을 내보겠습니다."

"양신님, 감사합니다."

계백의 얼굴엔 금세 화색이 돌았고 양신은 강의 상류 쪽을 가리켰다.

"계백님, 저 위에 숫돌 칸이 있는 데를 아시죠? 거기로 가서 기다려 주십시오. 저는 잠시 철장님을 뵙고 나서 가겠습니다."

양신은 말하고 돌아선 뒤 큰 장막을 향해 걸었다. 그러나 마음이 너무 무거워 발걸음을 멈추었다. 큰 장막 안엔 대면하고 싶지 않은 사람들이 있었다. 다시 비석암 쪽을 돌아보며 중얼거렸다.

"제발, 빕니다. 여선이 장안성으로 끌려가지 않게 해 주소서."

그렇게 빌다가 이내 고개를 가로젓게 되었다. 어려서부터 여선(餘鮮)을 아내로 맞게 해달라고 비석암에 빈 게 몇 번인지 모르는데 효험은커녕 이젠 영원히 헤어지게 되었다.

양신은 눈물이 주르륵 흐르는 얼굴로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어려서 괴질로 부모를 잃고 고아(孤兒)가 된 자신을 철장인 여준(餘準)이 거둬 키워줬다. 그때부터 여선과는 오누이처럼 자랐고 미운 정 고운 정이 다 들다가 나이가 차며 서로 간엔 이성의 감정이 싹트기 시작했다.

여준은 근래 그걸 눈치채고 둘을 혼인시킬 마음을 먹었다.

그런데 뜻밖의 일이 벌어졌다. 장안성에서 대형(大兄)인 고덕(高德)과 왕실 검사단(劍士團)이 다갈촌에 왔다. 사람들은 장안성의 고관이 불놀이에 온 걸 달리 생각했다. 오래간만에 불놀이에 참가한 백제와 신라의 야장들을 감독할 목적으로 온 걸로 알았다. 그러나 고덕은 왕실 사자(使者)로 왕제(王弟)인 건무(建武)가 여선을 첩실로 맞겠다는 통보를 하려고 온 사람이었다.

다갈촌은 왕실과 혼사를 큰 경사로 여겼다. 건무는 장차 왕위를 잇게 될 몸이라 여선은 빈(嬪)으로 승격될 수도 있었다. 때문에 다갈촌은 물론 이웃 마을도 축하 인사 차 여준의 집으로 몰려들었다.

그러나 당사자인 여선은 하루아침에 절망의 나락으로 굴러 떨어진 처지가 되었다. 양신은 그동안 바쁜 일에 매달려서 처음엔 여선을 빼앗기게 된 사실조차 제대로 인식을 못해 얼떨떨했다가 뒤늦게 충격을 받고 분노와 반발심으로 바뀌어 갔다.

여준도 속이 숯덩이처럼 타들어 갔다. 그러나 왕실과 혼사는 불가항력적인 일로 감히 거부할 수가 없었다. 난감함 속에 어쩔 수 없이 여선을 보내야만 하는데 문제는 양신이었다. 너무도 큰 절망에 빠져 괴로운 나머지 어디로 떠날지도 몰랐다. 경거망동을 못하게 하고자 궁리를 하다가 생각해낸 것은 이번 검술 대회에서 양신이 대망의 3연패를 달성하게 되면 밀두도(密頭刀)를 상으로 내리겠다는 공언(公言)을 했다.

밀두도는 철장이 대대로 물려받는 상징성을 지닌 장도였다. 그걸 물려준다는 것은 철장직을 물려준다는 뜻이었다. 양신은 마침내 대망의 3연패를 달성했고 여준은 시상식에서 밀두도를 넘겨주려고 했다. 그러나 사랑하는 여인을 잃게 된 양신은 모든 게 다 부질없게 여겨져 극구 사양을 했으나 여준이 하도 완강하게 넘겨 어쩔 수 없이 받아 들고 만사가 귀찮고 남들에게 축하를 받는 것도 싫어 혼자서 비석암 밑으로 숨어들었다.

해 질 녘부터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강변 백사장에 꽂힌 깃발들이 나부꼈고 강물에 떠내려 온 얼음장들은 일렁이는 물결을 타고 번쩍거렸다. 양신은 그런 광경을 보며 손등으로 눈물을 닦아냈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는 사이에 해는 지고 불놀이를 할 시간이 되었다. 양신은 강 건너 쪽 백사장에서 점점 붐비는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을 때 둥구미를 든 여선이 양신 앞에 나타났다.

"여선아, 무슨 일로 여길 왔냐?"

여선의 얼굴도 며칠 새 몰라보게 핼쑥해졌다. 그녀는 그렇게 묻는 양신을 보며 아릿한 아픔이 가슴속으로 배어들었다. 그러나 바닥에 앉으면서 살짝 눈을 흘기기며 말했다.

"내가 오라버닐 얼마나 찾아다녔는지 알기나 해요? 오후 내내 속을 태우면서 찾아다녔는데 여기에 혼자 있을 줄을 누가 알았담!"

양신은 속으론 미안했지만 딴청을 떨듯 물었다.

"내가 저 강물 속으로 뛰어들기라도 했을까 봐 걱정이 되었냐?"

"그래요. 그런데 왜 여기서 혼자 청승만 떨고 있어요?"

"청승을 떨다니? 나는 불놀이를 할 장작더미를 점검하고 있었다."

여선은 괜한 소릴 하는 양신의 속을 모르지 않았다. 말없이 둥구미 속에서 김이 오르는 국밥을 담은 목판을 꺼내 바닥에 놓았다.

양신은 미인송(美人松) 장작더미가 풍기는 은은한 향기 속에 여선의 체취를 느끼게 되자 절로 한숨이 흘러나와서 입을 열었다.

"지금 저녁을 먹으러 가려던 참인데, 네가 대신 챙겨 왔구나?"

"이제 가면 먹을 게 남아 있겠어요? 국밥은 벌써 동이 났어요."

"음식 준비를 넉넉히 하라고 시켰는데 사람들이 그렇게도 많이 왔는가? 혹시 저녁을 못 먹는 사람이라도 생기면 안 될 일인데."

"오라버닌 별 걱정을 다 하네요. 먹을 게 국밥뿐인가요? 육포랑 떡이랑 지천인데 남 걱정은 말고 오라버니나 잘 챙겨 먹어요. 며칠 새 끼니때마다 뜨는 둥 마는 둥 한다고 주방 어멈이 걱정을 하고 있어요."

"주방 어멈은 쓸데없는 말을 다 하는구나."

장안성 사자가 온 뒤로 통 밥맛이 없어진 양신은 두 뺨이 움푹 들어가고 턱에 돋은 터럭들만 더욱 뻣뻣해졌다. 여선은 그 속내를 짐작할 만한 해서 슬픔을 가눌 수가 없었다.

"어디, 출출하던 참인데 뜨듯한 국물로 배를 채워 볼까?"

양신은 짐짓 명랑한 투로 말하고 목판을 내려다보았다. 푸짐하게 말은 국밥과 구수한 냄새를 풍기는 순대가 한 접시 곁들여져 있었다.

"여선아, 너도 같이 먹을래?"

숟가락을 집어주는 여선의 손끝이 파르르 떨렸다.

"내가 오라버니처럼 지금까지 아무것도 먹질 않았을 것 같아요?"

여선은 눈물이 왈칵 쏟아지려고 해서 두 눈을 지르감고 말았다. 양신도 그녀의 속눈썹이 촉촉이 젖어드는 걸 보며 가슴이 미어졌다. 식욕은 없지만 여선의 성의를 생각해 국밥을 한 숟가락 듬뿍 떴다. 거기에 순대까지 얹어 입에 퍼 넣고 볼이 미어지게 씹기 시작했다.

식사 때마다 양신의 밥숟가락은 소담스러웠다. 여선은 그걸 두고 식탐이 많은 사람이라고 놀렸다. 그러나 지금은 우정 그렇게 하는 것으로 보여 뜬금없는 말이 나오고 말았다.

"오라버니 3연패는 마을 처녀들의 응원 덕분인 걸 알아야 해요."

양신은 그 말에 고개만 끄덕여 보이는데 여선이 또 입을 열었다.

"오라버니를 좋아하는 처녀들이 많아서 참 좋겠다!"

그런 말에 양신은 쑥스러운 듯 대꾸했다.

"너는 별소릴 다 한다."

양신은 그런 대답하고 마침 여선이 잘 왔다는 생각을 했다. 그렇지 않아도 왕실과의 혼사 건을 놓고 단 둘이 얘길 나눠보고 싶던 참이었다. 그런데 막상 대하고 보니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그 점은 여선도 마찬가지였다. 너무도 엄청난 일을 당해 무슨 말을 하기조차 두려워 기껏 한다는 게 또 딴 소리를 흘려냈다.

"해론 님과 계백님도 오라버니와 같은 또래의 총각들이라지요?"

"너는 그걸 어찌 알게 되었냐?"

"마을 처녀들은 두 분에 관한 얘기로 시간 가는 줄을 모르는데 나라고 왜 모르겠어요? 마을에선 두 분에 대한 관심들이 매우 커요."

"마을 처녀들이 그 두 사람에 대한 관심이 그렇게 큰 줄은 몰랐다."

"두 분은 인물도 좋고 무예까지 뛰어났으니 왜들 안 그러겠어요?"

"그렇다면 우리 마을 총각들에겐 야단난 일인 걸!"

양신의 말에 여선이 물었다.

"왜요?"

"마을 처녀들이 모두 타국 총각들에게 마음을 빼앗겼으니 그렇지."

여선은 혀를 날름 뽑더니 혼잣말처럼 쫑알거렸다.

"나는 해론님을 응원했는데 겨우 3등에 그쳐서 보람이 없네요."

"여선아, 나도 궁금한 게 있다."

"오라버니는 뭐가 궁금한데요?"

"마을 처녀들이 계백님과 해론님에게 관심이 크다고 하는데 그러면 네가 보기엔 둘 중에서 누굴 더 좋아하는 것 같아 보이더냐?"

"해론님은 미남이고 계백님은 사나이다워 두 패로 갈렸어요."

"두 패로 갈렸다?"

"오라버닌 이상한 소문이 돌고 있는 걸 아세요?"

"무슨 소문이냐?"

"계백님과 해론님은 야장들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말들을 해요."

"야장이 아니라면 뭐라는 소리냐?"

양신의 질문에 여선은 정색을 하며 대답했다.

"오라버닌 그분들의 정체를 한 번도 의심을 해 본 적이 없나요? 두 사람은 야장들 틈에 끼어든 군인들이래요. 때문에 두 사람을 두고 고구려의 내부 사정을 정탐하러 온 첩자 들일 지도 모른다고 수군거려요."

양신은 아녀자들 입에서까지 그런 말들이 나오는 이유를 모르지 않았다. 그만큼 나라 안엔 수국(隋國)과 전쟁이 박두했다는 소문이 돌았고 백성들은 큰 위기의식을 느끼고 있었다.

"백제와 신라 야장들은 오래간만에 다시 발길을 잇게 되었다. 손님들에게 그런 의심을 품는 건 도리가 아니니 너라도 나서 줘야 하겠다."

양신은 엄숙한 표정을 짓고 말했고 여선이 반문했다.

"나보고 무슨 일에 나서라는 말인가요?"

"아녀자들 입에서 그런 말들이 나오지 않게 단속을 해라."

두 사람은 그런 얘길 나누고 있지만 마음속은 그게 아니었다. 다 같이 정작 하고 싶은 말을 털어놓기가 주저되어 딴 소리만 하게 되었다. 그러나 양신도 말을 꺼내려고 입을 열었으나 엉뚱한 질문은 던졌다.

"여선아, 오늘 밤에 넌 뭘 할 거니?"

여선은 손가락으로 모래바닥을 콕콕 찍고 있다가 뜨악하게 물었다.

"내가 뭘 하다니요? 그게 무슨 말이에요?"

양신은 말을 더듬듯 입을 열었다.

"이를테면 혼처가 정해진 너는 수의를 지을 건지 탈춤을 출 건지."

여선은 갑자기 두 눈썹을 치켜세우고 몸을 발딱 일으켜 세웠다.

"그러는 오라버니는 대체 누구하고 탈춤을 출 건가요?"

앙칼지게 받아친 여선은 분한 눈초리로 양신을 노려보았다. 그러다가 몸을 홱 돌려 그 자리를 떠났다. 양신은 그녀를 잡으려고 몸을 벌떡 일으켜 세웠지만 걸음을 뗄 수가 없었다.

"내가 지금 무슨 소릴 지껄인 거야? 여선의 속이 오죽이나 상하고 괴로울 것인데 송곳으로 가슴을 찌를 빙충맞은 소리나 하고 있다니!"

양신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주먹으로 가슴팍을 팍팍 쳤다. 뒤늦게 후회를 했지만 이미 엎지른 물이라 양손으로 머리카락을 움켜쥐었다.

불놀이 밤엔 다갈촌 처녀들이 두 패로 갈리게 된다. 혼처가 정해진 처녀들은 따로 모여 수의(壽衣)를 짓고 그렇지가 않은 처녀들은 총각들과 어울려 탈춤을 추게 된다.

혼처가 정해진 처녀들의 혼수품 중 가장 중요시하는 것은 수의였다. 혼전에 미리 지어둔 수의를 전쟁에 나갈 남편이 갑옷 밑에 입게 하면 안전하고 설사 전사(戰死)를 하게 되어도 사후(死後)에 다시 부부의 연을 맺게 된다는 걸로 믿고 있었다.

여선은 혼처가 정해졌으므로 수의를 짓는 곳에 끼어들게 되었다. 그러나 사정이 그렇게 되었다고 한들 다른 사람도 아닌 양신에게 그런 말을 듣는 건 너무도 야속하고 기가 막혔던 것이다.

양신은 넋이 나간 채 혼자 앉아 있다가 불놀이 준비를 할 때가 되어 몸을 일으켰다. 도강선을 타고 강을 건너간 뒤 비석암을 향해 불화살을 쐈다. 그렇게 불을 붙인 것으로 자신의 임무는 모두 끝나자 여선을 찾아 나설 마음을 먹었다. 백사장의 사람들 사이를 돌아다니며 찾고 있던 중 계백과 해론을 만나게 된 것이었다.

양신이 다시 걸음을 옮겨 내키지 않는 큰 장막으로 들어갔다. 그 속엔 고덕과 여준이 상좌에 앉고 밑으로 각처의 야좌들이 죽 늘어앉았다. 여준은 들어선 양신을 보고 큰 소리로 외쳤다.

"양신아, 오늘처럼 네가 장하게 보인 적은 없다!"

"사부님, 혹시 제게 시킬 일이 없으신지 여쭤 보려고 왔습니다."

"이제부턴 젊은 축들끼리 어울려 신명 날 춤판에나 들어가렴."

그 말에 왕실 검사단의 우두머리인 도해선(道解先)이 입을 열었다.

"철장님, 춤판이 제대로 이뤄질지 모르겠습니다. 지금 다갈촌 젊은이들은 전부가 어디에 처박혀 있는지 코빼기조차 볼 수가 없답니다."

도해선의 말을 받아 곁에 앉은 구조리가 맞장구를 쳤다.

"다갈무문은 금년 검술 대회에서 양신을 빼면 전체적으로 참패를 당했습니다. 그러므로 어디서들 홧술께나 퍼 마시고 있을 것입니다."

구조리의 말처럼 다갈무문의 성적은 매우 저조했다. 양신이 3연패로 그나마 체면을 세웠을 뿐 10등 안에 든 자가 하나도 없었다. 때문에 한창 소란을 떨 백사장은 예년과 달리 조용하기만 했다.

여준은 편치가 않은 심기로 혀를 끌끌 찼다.

"검술 대회가 어디 금년뿐인가? 더욱 정진해서 내년을 기약해야지."

말은 그렇게 했으나 마음은 무겁기만 했다. 지난해부터 건강이 좋지 못해 도장엘 자주 나가보질 못했다. 지도는커녕 제대로 관심을 갖지 못했던 터라 입을 다물게 되었다.

"사부님, 저는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오냐, 나가서 신명 나게 놀아보렴."

양신이 몸을 돌려세우는데 도해선이 입을 열었다.

"양신, 올 해도 자네 해가 되었군. 대단해!"

도해선의 말투엔 어딘지 야시랑 거리는 구석이 없지도 않았다. 그는 자타가 인정하는 고구려의 대표 검인인데 3년 전 검술대회에서 처녀 출전을 한 양신에게 패한 뒤로 다신 출전하지 않았다.

고덕은 도해선이 하는 말을 듣고 여준을 돌아다봤다.

"철장, 나는 양신이 있는 다갈무문을 여간 부럽게 여기지 않소."

"대형님, 과찬의 말씀을 다 하십니다."

"과찬이 아니요. 양신이 왕실 검사단에 들면 좋겠는데 어떻소?"

여준은 그 말에 손사래를 쳤다.

"검사단은 촌구석 사람이 감히 넘겨다 볼 데가 못 됩니다."

고덕은 여준의 대꾸가 겸양의 말로 들리지가 않았다.

"철장, 양신은 왕실과 인척이 되게 되었소. 그러므로 왕실 검사단에 들 자격은 충분하니 나는 이번 기회에 장안성으로 데려갔으면 하오."

"대형님의 말씀은 고마우나 다갈무문은 벼슬을 바라지 않습니다. 저는 문생들에게 권력 밑에 든 칼은 불의에 쓰이기 쉽다고 가르쳐 왔습니다."

여준의 정중한 거절에 고덕은 양신에게 직접 의향을 물었다.

"양신 야좌는 어떻게 생각을 하나? 철장과 같은 생각은 아니겠지?"

"대형님, 저도 사부님과 같은 생각입니다."

양신마저 서슴없는 거부에 고덕은 음성이 뻐드름해졌다.

"야좌는 왜 그런 생각을 하는지 그 이유를 알고 싶다."

"저는 장안성으로 가고 싶지가 않기 때문입니다."

고덕은 이번엔 화가 좀 나서 한마디 해 붙였다.

"뭐라고? 장안성엘 가고 싶지가 않다고? 우직한 자로군!"

도해선은 머쓱해서 울그락불 그락인 고덕에게 말했다.

"대형께선 너무 섭섭해하지 마십시오."

"도해선 조의, 자네가 한 번 설득을 해 보게나."

고덕의 말에 도해선은 정중하게 대답했다.

"대형의 말씀도 감히 듣지를 않는 자인데 소관은 오죽하겠습니까?"

"조의와는 경우가 다르지. 양신은 조의에게 감사해야 하지 않겠나?"

양신은 가뜩이나 장안성에 대한 반감이 큰 판에 고덕의 입에서 알 수가 없고 당치도 않을 말이 흘러나오자 반발하듯 묻게 되었다.

"대형님, 제가 도해선 조의에게 감사를 해야 할 게 뭐가 있겠습니까?"

"양신은 그걸 아직 모르고 있었는가?"

"대형께선 제가 뭘 모른다는 말씀을 하십니까?"

"자네 누이동생이 왕실의 은의를 입게 된 게 누구 덕인지 모르나?"

양신은 비로소 안색이 서서히 굳어들었다.

"그게, 누구의 덕이란 말씀입니까?"

"허, 정말로 모르고 있었군? 이번 혼사는 도해선 조의가 왕제 전하께 천거해서 이뤄진 일이 아닌가? 자네가 그걸 안다면 그럴 수는 없지."

도해선은 그 말을 듣고 양신에게 묘한 웃음을 날렸다.

그는 3년 전 양신에게 체면을 구기고 나서 앙심을 품고 골탕을 먹일 궁리를 했다. 그러다가 왕제에게 미모가 뛰어난 여선을 후궁으로 삼을 것을 권했다. 건무가 그걸 받아들임으로써 양신에겐 복수를 하게 된 셈이었다. 양신은 그런 사정을 알 턱이 없는 데다 지난해 술자리에서 도해선이 했던 말을 새삼 떠올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양신은 여선 낭자완 피를 나눈 남매가 아니라지?"

그때 그런 말을 들은 양신은 낯만 붉힐 뿐 대꾸를 하지 않았다.

"양신, 귀신은 속여도 내 눈은 못 속이네. 두 사람은 의남매라지만 서로가 은애 하는 사이가 아닌가? 난 그걸 벌써부터 눈치를 챘지. 철장도 근래에 두 사람을 짝을 지워주겠단 말씀을 하신 걸로 알고 있네."

양신은 계속 침묵만 지키는데 도해선이 한마디를 더 했다.

"양신, 사부께 얼른 혼례를 올려달라고 조르게나. 왜냐하면 사람의 앞일이란 도무지 알 수가 없기 때문에 나로선 그런 충고를 하게 되네."

도해선은 그런 말까지 하고 나서 뒷구멍으로 딴짓을 했다. 양신은 치미는 분노를 감당할 수가 없고 마음 같아선 가증스러운 자의 목이라도 쳐주고 싶었으나 고덕과 사부 앞에선 무람되이 굴 수가 없었다.

양신은 장막을 나왔으나 분노로 가슴이 벌렁거리고 견딜 수가 없는 슬픔으로 거친 숨결만 토해냈다. 눈물이 흐르는 얼굴로 밤하늘을 올려다보다가 계백과 한 약속을 떠올리고 걸음을 떼었다.

다갈촌 야장방은 주로 무기를 생산했기 때문에 다른 데선 볼 수가 없는 시설들이 많았다. 그중엔 창칼을 대량으로 가는 숫돌 시설이 있었다. 그건 강물을 끌어다 폭포를 만들고 내리쏟는 물의 낙차를 이용해 돌리는 물레방아에 연결된 숫돌로 칼날을 가는 것이었다.

양신은 도저히 대련을 할 기분이 못 되었다. 그렇지만 약속을 어길 수가 없어 무겁기 그지없는 발걸음을 터벅터벅 옮겨 숫돌 칸으로 향했다. 마침내 숫돌 칸에 이르자 계백이 달려 나왔다.

"양신님, 와 주셨군요?"

"계백님,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한 것 같습니다."

"너무 떼를 쓴 것 같습니다만 저는 한수 지도를 받으렵니다."

계백은 남의 속을 모르는 벌써 대결 자세를 취했다. 양신은 그냥 술이나 실컷 퍼먹고 싶은 심경이나 차라리 칼이라도 휘둘러서 울분을 씻어내고 싶은 심기로 마주 서 입을 열었다.

"계백님, 지도란 당치가 않고 저도 백제 검법을 한 수 익히렵니다."

양신은 칼을 뽑아 들다가 그게 밀두도임을 비로소 깨달았다. 낮에 사부가 강제로 메어준 대로 지고 있었지만 그걸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갑자기 야릇한 호기심이 일어났다.

계백은 이제부터 재대결을 한다는 마음을 다졌다. 심호흡을 한 뒤 뽑아 든 칼자루를 이마 높이로 치켜세웠다. 왼쪽 발꿈치를 슬쩍 치켜들자마자 기합성을 터뜨리고 공격에 나섰다.

"에, 잇."

"야, 잇."

양자는 기합성을 터뜨리고 곧장 대결로 들어갔다. 두 개의 칼날이 얽혀 들자 허공에서 쨍강대는 금속성을 일으켰다. 계속 어지러이 돌아치는 칼날은 밤하늘에 무수한 섬광(閃光)들을 일으켰다.

계백은 공격 일변도로 나가는데 비해 양신은 방어 위주로 맞섰다. 한 순간 계백의 칼날이 양신의 정수 박이로 일 파고들었다. 양신이 맞받아쳐내자 계백의 칼날은 다시 회돌이를 쳤다.

"흑!"

양신은 신음을 터뜨리며 찰나적으로 어깨를 움츠렸다. 그 순간 그의 몸에서 떨어져 나간 천 조각이 허공에서 너울거렸다. 양신의 왼쪽 어깨 죽지 동달이가 베어져 나간 것이었다.

검술의 대련은 정(定), 활(活), 변(變)의 순서로 펼치게 되었다. 그러나 계백은 정과 활을 접고 곧장 변용으로 건너뛰었다. 너무도 정도를 벗어난 공격을 받고 난 양신은 상대를 이윽히 바라다봤다.

계백은 그만큼 조급증을 내었고, 양신은 그 점에 큰 부담감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자신이 어깨 죽지를 조금만 덜 움츠렸다면 큰 부상을 입을 뻔했다. 자기도 모르게 혀를 차려다 말았다. 그럴수록 자신은 차분한 자세를 취해야 하겠다고 생각했다.

검술은 상대의 눈빛을 보면서 대응해야 만했다. 한 순간의 눈빛이라도 놓치면 모든 것을 잃게 될 수도 있었다. 그러나 밤이라 별빛을 의지해선 상대의 표정을 살피긴 힘이 들었다.

양신은 자신의 어깨에서 베어져 나간 천 조각이 땅바닥에 떨어진 것을 바라보았다. 몸이 좀 떨리는 것은 야기(夜氣) 때문만은 아니었다. 한편 공격을 멈춘 계백은 양신을 이윽히 바라보았다.

계백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은 상대의 어깨 동달이를 전부 베어내려고 했다. 그런데 절반만 베어진 이유가 무엇일까 하는 생각을 하다 상대가 어깨를 움츠려 들인 결과임을 깨달았다. 놀랍게도 자로 잰 듯 몸을 움츠려 절반쯤만 내준 것이었다. 상대는 그렇게 해서 기량을 과시하고 이쪽의 체면도 슬쩍 세워 주었다. 그러나 어깨 동달이를 절반밖에 못 베어낸 만큼 자존심이 절반쯤 베어져 나간 기분이었다. 그런 생각에 더욱 감정이 울컥해져 반사적인 공격을 펼치려다 그만두었다.

양신도 계속 미동을 않고 서 있는 계백을 보면서 미안한 마음이었다. 상대의 칼을 몸으로 피한 건 만용이고 상대를 무시하는 처사가 될 수도 있으므로 크게 반성하는 마음이었다.

"계백님, 이번엔 제 차례입니다."

양신의 말에 계백은 칼끝을 약간 숙여 보였다.

"야, 잇!"

기합성과 함께 공격을 펼쳤다. 또다시 얽혀 든 두 개의 칼날은 차가운 금속성과 섬광들로 밤하늘을 명멸시키던 어느 한순간 계백은 몸을 기우뚱하며 중심을 잃게 되고 말았다.

계백은 힘이라면 누구한테도 밀리지 않는 자부심을 갖는데 상대에게 힘마저도 밀려 뒷걸음질을 쳐야 했다. 굴욕감을 느껴서 기합성을 지르며 더욱 공격 일변도로 나갔다.

"에, 잇."

"야, 잇!"

양신은 기합성을 냈지만 그때부터 방어로 전환했다. 반면에 계백은 연속적인 공격을 펼치다가 약점을 노출시켰다. 양신은 그 틈새를 포착하고 번개처럼 상대의 가슴께를 후려놓다.

계백은 급히 물러 선 뒤 눈길을 밑으로 내려뜨리고 말았다.

"어?!"

허리띠에서 잠금 쇠가 감쪽같이 떨어져 나갔다. 흠칫 놀라며 이게 어찌 된 일인지 몰라 망연자실하고 말았다. 비로소 상대는 기검체(氣劍體)가 일치된 고수임을 인정했다. 그처럼 정교한 검술을 지닌 상대와 더 이상 맞서긴 힘들다고 판단했다. 몸을 솟구쳐 허공에서 한 바퀴를 회전시킨 뒤 땅바닥에 내려서자 칼집에 칼을 세차게 꽂았다.

"양신님께 절검 합니다."

계백이 거친 숨결을 토하며 말하자 양신도 대답했다.

"계백님, 저도 절검 합니다."

두 사람은 같은 말을 했다. 절검(絶劍)은 서로가 앞으론 대적을 하지 않겠다는 선언이었다. 계백은 절검을 선언한 뒤 마음이 홀가분해지는 기분으로 입을 열었다.

"양신님, 정법을 생략하고 활용으로 건너뛴 점 미안합니다."

"계백님, 저 역시 외도를 쓴 점 부끄럽게 여깁니다."

두 사람이 그런 말을 나누는데 해론이 끼어들었다.

"저도 두 분께 절검 합니다."

세 사람은 다 같이 절검을 선언하고 손들을 잡았다.

"이제부터 술도 마시고 얘기를 나누는 시간을 가집시다."

양신의 말에 계백과 해론은 흔쾌히 동의했다.

세 사람은 나란히 강의 상류 쪽을 향해 걸었다. 얼마쯤 걷자 외진 자리에 누가 손을 대지 않은 음식상이 하나 남아 있었다. 모두는 자리를 잡고 양신이 술병을 들고 잔마다 술을 채웠다.

세 사람은 술잔을 높이 치켜들었다.

"천신께 감사드립니다."

양신의 외침에 두 사람도 세 번씩 복창했다. 삼국인의 큰 공통점은 다 같이 천신을 받드는 것이었다. 모두는 하늘에 감사를 드린 뒤 술잔을 비웠다. 양신은 두 사람을 향해 입을 열었다.

"올핸 백제와 신라에서 불놀이에 참가해서 뜻깊은 해가 되었습니다."

해론이 그 말을 받았다.

"삼국의 야장들이 한 자리에 모인 게 근 12년 만이라지요? 저는 이번에 불놀이에 참가할 수 있게 된 것을 큰 행운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계백도 맞장구를 쳤다.

"저도 큰 영광으로 여깁니다."

세 사람은 비로소 친근감을 느끼며 함께 웃음을 터뜨렸다.

"삼국의 젊은이가 술자리를 함께 하는 건 매우 드문 일입니다."

"모두에게 이런 어울림은 큰 인연이 될 것 같습니다."

"그렇고 말고요. 이제부턴 흉금 없는 얘기를 나눠보기로 하지요."

"솔직히 말해 저는 고구려와 백제 사람을 불구대천의 원수로 여겼습니다. 그런데 두 분을 만나 뵙고 나니 잘못된 생각임을 깨달았습니다. 저는 이번 기회에 고구려에 오길 참으로 잘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해론의 말을 받아 계백이 진지한 태도로 동의했다.

"저 역시 그렇습니다. 고구려와 신라 사람과는 상종하기도 싫었습니다. 그런데 다갈촌에서 며칠간 지내다 보니 제가 옹졸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왜냐하면 삼국 사람들은 말이 통하고 사는 모습도 비슷한데 서로가 그토록 적대시하며 지내야만 했던 이유가 뭔지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말문이 트인 세 사람은 기탄없는 대화가 이어졌다. 젊은이들이 답게 금세 서로 간의 경계심을 허물어뜨린 사이가 되었다.

다갈촌 불놀이는 천년이 넘게 이어진 행사였다. 처음엔 한삼국(韓三國)의 야장들이 국적과 명리를 따지지 않고 순수한 정리(情理)를 나누는 교류의 장을 만들고자 시작되었다. 그런데 삼국 간은 끊임없는 전쟁이 이어지고 그로 인해 왕래를 끊겼다 이어지길 반복되었다. 그게 근래에 와선 더욱 심해져 이번 회동은 무려 12년 만에 이어지게 되었다.

양신은 평소 생각했던 점을 놓고 두 사람과 얘길 나눠보고 싶었다.

"우린 같은 야장들입니다. 야장은 전쟁과 관련이 많고 그 영향을 받게 됩니다. 저는 날로 심해지는 삼국 간의 전쟁 원인을 놓고 두 분과 얘길 나눠보고 싶습니다. 저는 전쟁의 원인이 영토 확장보단 철산지를 차지하려는데 있다고 생각을 하는데 두 분은 어찌들 생각하십니까?"

그 말에 계백과 해론은 차례로 한 마디씩 했다.

"철은 무기를 만드는 전략 물자이므로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어느 나라건 철보다 더 중요시할 물자는 없지 않겠습니까? 국가의 존망을 좌우할 철산지를 더 차지하고자 전쟁이 잦을 수밖에 없습니다."

세 사람은 철 때문이란 점엔 다 같이 동의했다.

"저는 근래 고구려가 처한 사정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양신의 말에 두 사람은 관심이 큰 눈빛들이 되었다.

"고구려는 영토가 넓지만 한랭한 기후로 농사를 짓기에 어려움이 큽니다. 곡물 생산이 부족하므로 일찍부터 철산지 개발과 철제품을 만드는데 힘을 썼습니다. 그 때문에 기술이 발달한 편이고 철제품을 가지고 타국과 교역을 해서 나라의 재정을 지탱할 정도입니다. 그러나 근래에 와서 사정이 어렵게 된 것은 중원 땅에 새로 들어선 수국 때문입니다."

계백이 그 말을 받았다.

"저도 이해가 되는 말씀입니다. 수국의 군사력은 중원 역대 왕조 중 가장 막강하니다. 해론님은 그 점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하십니까?"

해론은 그런 질문을 받고 좀 굳어지는 표정이 되었다.

"신라에서도 수국이 고구려를 침공할 조짐을 보이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4년 전인가 수국 황제가 동돌궐 순행하던 중 고구려 사신과 마주쳤을 때 수국 황제가 고구려 사신에게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너희 나라 국왕이 계속 입조 하지 않으면 계민 가한을 앞세워 징벌을 가하겠다. 그게 빈말이 아닌 협박임을 누구나가 다 잘 알 것입니다."

계백은 그 말을 받아 자신의 뜻을 보탰다.

"백제에서도 그 점에 대해 잘 알고 있습니다. 수국은 북방의 강대국인 돌궐을 복속시킬 만큼 강한 군사력을 지녔다고 합니다. 고구려가 계속 입조 하지 않으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는 말들을 하고 있습니다."

양신은 입조란 말에 강한 반발심을 느껴 입을 열었다.

"입조란 당치도 않을 말입니다. 고구려도 수국의 침공에 대비해 충분한 물자 비축과 군사력을 증강시켜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다만 그 때문에 우리 야철소는 무기 생산에 박차를 가하느라 고달프게 되었습니다."

양신의 말은 해볼 테면 해보라는 투였다. 그러나 계백과 해론은 속으로 어림도 없는 소리를 한다고 여겼다. 그런 대화를 나누고 세 사람은 이상하게 침묵 속으로 빠져들었다.

수국의 백성은 숫자 4천여 만 명이 넘는 걸로 알려졌다. 주변국들은 그런 대국을 두려워하며 자진 복속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고구려만이 머리를 숙이질 않아 그냥 놔둘 것 같지가 않았다.

고구려는 영토가 사방으로 3천 여리에 이르지만 는 대국임엔 인구는 겨우 6백여 만 명에 지나지 않았다. 게다가 판도내 백성들의 절반은 잡다한 이민족으로 채워져 있었다. 그런 구성은 고구려에 우호적인 종족도 있으나 그렇지가 않은 종족도 있었다. 때문에 수국이 침공할 경우 고구려는 내부의 이민족들이 협력과 배반으로 갈릴 위험성이 있었다.

양신은 속으로 한숨을 쉬면서 입을 떼었다.

"두 분 말씀대로 고구려가 위기에 처한 건 사실입니다. 그러나 판도 내 이민족들의 향배보다 더 큰 문제는 고구려의 배후에서 어떤 움직임을 보일지 그에 대한 우려가 더 큼을 말씀드리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양신의 말에 계백과 해론은 서로 얼굴을 바라보았다. 고구려의 배후란 백제와 신라를 지목하는 게 분명했다. 그 때문에 계백과 해론은 심기가 매우 불편해질 수밖에 없는데 양신은 거기다 사족까지 달았다.

"만약에 고구려가 망하면 백제와 신라도 무사할지는 모르겠습니다."

양신은 술기운이 돌아 직설적인 표현을 썼고, 거기엔 다분히 경고성을 띤 발언이었다. 계백과 해론은 그냥 들어 넘길 수가 없었다.

"양신님, 말씀이 좀 지나치지 않습니까? 백제는 비록 영토는 좁지만 들이 넓어 농사가 잘 되고 산물도 풍족합니다. 그런 산물로 중원과 왜국은 물론 멀리 남방까지 교역을 해서 삼국 중 재정이 가장 튼튼한 편입니다. 거기다 강력한 군사력을 유지해서 자부심이 큰데 뭐가 아쉬울 게 있어 타국의 어려움을 틈타서 무슨 어부지리를 취하려고 들겠습니까?"

양신은 그에 대한 답변을 못하고 계백이 말을 이었다.

"이왕에 말이 나왔으니 한 마디 더 하겠습니다. 한삼국은 그동안에 잦은 전쟁으로 어느 나라 백성들이건 편안히 살 수가 없습니다. 저는 그런 고통을 안겨주는 잦은 전쟁의 원인을 한수 유역에서 찾게 됩니다."

해론은 그 말에 반발하듯 물었다.

"계백님은 한수 유역이 어떻기에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거긴 본래 백제 땅이 아니었습니까? 한때는 고구려에 빼앗긴 적이 있고 지금은 신라 차지가 되었습니다만 백제로 되돌려져야만 합니다."

해론은 강경한 태도로 반박에 나섰다.

"계백님 말씀은 언어도단입니다. 한수유역은 본래 누구 땅으로 정해진 데가 아닙니다. 백제가 힘이 있을 땐 백제 땅이었고 고구려가 힘이 있을 땐 고구려 땅이었다가 지금은 신라의 땅이 되었습니다. 신라는 그 땅을 생명줄이나 다름이 없게 중요시해서 힘이 닿는 한 지켜낼 것입니다."

계백과 해론이 한수유역을 놓고 민감한 반응을 보여 분위기는 싸늘해졌다. 그처럼 각자의 조국이 다르듯 입장도 다를 수밖에 없었다.

애초 불놀이의 애초 한삼국의 야장들끼리 친목 도모와 야철 기술을 서로 배우자는 데서 시작되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며 자국의 이익만을 추구하며 자기 기술은 감추고 남의 것만 얻으려고 해서 들어 본래의 취지는 사라졌다. 그리고 지금은 검술 대회를 위주로 하는 행사로 변질되었다.

이번에 고구려가 불놀이 행사에 백제와 신라의 야장을 초청한 목적은 절박해진 상황 때문이었다. 수국의 침공을 앞두고 배후에서 움직일지도 모를 양국을 무마할 목적에 화해의 손길을 내민 의미가 있었다.

반면 백제와 신라도 오래간만에 받은 초청이 유화책을 쓰려는 데 있음을 모르지 않았다. 이런 기회에 고구려의 내정을 한번 살펴볼 필요성에 오게 된 것이었다. 때문에 백제는 군관(軍官)인 계백이, 신라는 화랑도인 해론이 야장 행세를 하며 끼어들었다.

양신도 내심 계백과 해론을 야장으로 보진 않았다. 그렇지만 같은 검인(劍人)으로 공동의 관심사가 클 얘길 나눠보려던 것이었는데 그만 화제가 껄끄러운 데로 돌아갔던 것이었다.

"저는 젊은이들끼리 허심탄회한 대화를 나누려고 한 게 어찌하다 서로 간 상충될 문제를 건드릴 말이 나와 분위기가 굳어지게 되었습니다."

양신이 사과의 뜻을 밝히자 계백과 해론도 태도가 바뀌었다. 세 사람은 말없이 술잔만 부지런히 기울였다. 마땅한 대화거리를 찾자면 관심이 클 검술 쪽으로 돌 수밖에 없었다.

"다갈촌 검술 대회의 명성을 오래전부터 났습니다. 이번에 참가해보니 타국의 검인들까지 참가할 만큼 큰 대회인 줄은 몰랐습니다."

해론이 입을 떼자 계백은 또 다른 관심사를 드러냈다.

"양신님의 등에 진 장도는 범상치가 않게 보입니다."

"예, 그렇습니다. 밀두도라고 합니다."

양신의 대꾸에 계백은 뜻밖의 청을 했다.

"양신님, 밀두도를 한번 만져볼 수는 없겠습니까?"

계백은 양신이 등에서 벗어 내민 밀두도를 받아 들었다. 밀두도의 손잡이를 잡고 칼집에서 천천히 칼날을 뽑아보았다.

"과연 천하의 명도로 소문이 난 만큼 광채가 범상치 않습니다."

해론은 손을 내밀어 계백으로부터 밀두도를 넘겨받았다. 그리고 양손으로 받쳐 들고 찬찬히 칼날을 살피고 나서 양신에게 물었다.

"제가 듣기론 다갈촌에서 만든 명품은 밀두도 말고도 또 있다지요?"

"예, 일월검이 있습니다."

"일월검은 어디에 있습니까?"

"장안성의 궁궐에서 보관 중인데 저는 한 번도 본 적은 없습니다."

양신은 그런 대답을 하고 일월검에 대한 설명을 했다.

옛날에 다갈촌은 개로(開爐)라는 철장은 도검의 명장(明匠)이었다. 광개토왕(廣開土王)은 그에게 왕실의 권위를 상징할 검을 만들어 바칠 것을 명해 일월검(日月劍)과 밀두도가 만들진 것이었다.

개로는 도검을 제작할 때 쇠의 강, 중, 약 세 가지 성질을 배합해 썼다. 인간의 몸이 뼈와 살과 정신으로 이뤄졌다고 보는 그는 도검 제작 에도 그런 삼위일체 원리(原理)를 적용했다. 정철(精鐵)을 쓰되 먼저 중간 성질로 뼈대를 삼았다. 그 위에 무른 쇠를 씌워 체형(體型)을 만든 뒤 거기에 강한 성질로 날을 박았다. 그런 다음에 단조(鍛造)를 가해서 불순물을 완전히 제거했다. 그렇게 하면 무게가 반으로 줄어들고 그처럼 복잡한 공정 끝에 완성된 일월검과 밀두도는 명품 중 명품이었다.

의장용인 일월검은 길이가 3척(拓) 9촌(寸)이었다. 햇빛을 받으면 칼날이 눈을 찌를 광휘를 발했고 달빛 아래선 용(龍)의 껍질 같은 무늬를 드러내 신비함을 지녔다. 실전용인 밀두도는 길이가 3척 3촌에 칼자루를 용머리로 만들어서 용두도(龍頭刀)란 별명도 있었다.

계백은 매우 부러운 표정으로 입을 떼었다.

"도검의 생명은 강함과 날카로움에 있지만 밀두도는 바위도 벤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런 명도를 만들려면 특별한 비법이 있겠지요?"

양신은 그 말을 듣고 두 사람의 야철 지식을 알아보고 싶었다.

"두 분도 야장들이니 잘들 아시지 않겠습니까? 좋은 칼은 단조와 담금질 기술에서 좌우된다는 말씀밖에 더 드릴 게 있겠습니까?"

"양신님, 밀두도 제작에 관해 좀 더 자세한 설명을 듣고 싶습니다."

계백의 말에 해론도 고개를 끄덕이며 깊은 관심을 표했다.

"전해져 내려오는 얘기를 전해 들릴 수밖에 없습니다. 개로라는 명장은 도검 제작 때 불의 세기를 조절하고 독특한 단조 방법을 썼답니다. 그런 기술을 구사해야 칼날은 생물처럼 탄력성을 지닐 수가 있답니다."

"양신님도 그런 칼을 만드는 기술을 지니셨습니까?"

해론이 묻자 양신은 씁쓸하게 웃었다.

"저는 명색만이 야장입니다. 검술을 연마하느라 야장방엔 거의 들어가질 않았기 때문에 식칼조차 제대로 못 만드는 야장입니다."

해론은 고개를 끄덕이는데 계백이 또 느닷없는 질문을 던졌다.

"양신님의 여동생 분은 고구려 왕실과 혼사를 맺는다지요?"

양신은 그 말에 안색이 변했고 좀 머뭇거리다가 대꾸했다.

"그렇게 되었습니다."

해론도 흥미를 큰 느끼듯 끼어들었다.

"듣자니 여동생께선 천하절색 미인으로 소문이 나셨다지요?"

"그런 편입니다."

양신은 건성으로 대꾸를 하는데 두 사람은 한 마디씩 더 했다.

"양신님, 축하드립니다."

"양신님, 큰 영광이며 경사를 맞으셨습니다."

계백은 씁쓸함에 젖어드는 양신에게 한 술을 더 떴다.

"양신님은 앞으로 높은 자리에 오르게 되셨습니다."

해론도 그 말에 동의를 하자 양신은 벌떡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러나 취기로 인해 도로 땅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이때 계백과 해론은 엉거주춤한 자세로 몸들을 일으켜 세웠다.

양신은 이상하게 생각하며 주변을 둘러보다 흠칫 놀랐다. 언제 나타났는지 비석암 쪽의 불빛을 비껴 받은 여선이 서 있었다.

"여선아, 네가 여길 어떻게 왔느냐?"

여선은 나직이 대꾸했다.

"오라버니께 전할 말씀이 있어 오게 되었어요."

"사부님이 날 찾기라도 하시는가?"

"그게 아니고, 여기 계신 두 분께 전하는 말씀이 있어 왔어요."

"계백님과 해론님에게?"

"장안성 사자로부터 지시가 내려졌대요."

"무슨 지신데?"

"백제와 신라 야장님들은 예정을 앞당겨 내일 떠나게 된답니다."

자리를 박차 듯 일어선 양신이 물었다.

"뭐라고?! 예정을 앞당기게 되었다? 무엇 때문에 그런단 말인가? 멀리서 오게 초청을 해놓고 내쫓듯 보내려고 들다니 너무 무례하지 않은가?"

양신이 분개하듯 말하는데 해론은 계백을 돌아다보며 말했다.

"계백님, 낼 떠날 준비를 하려면 우린 숙소로 돌아가야 하겠습니다."

그런데 계백은 크게 놀란 표정으로 여선의 얼굴만 뚫어져라 바라봤다. 그러다가 무엇에 홀린 사람처럼 비척거리듯 걸어 여선 앞으로 다가섰다.

"주랑 낭자, 대체 여길 어떻게 오셨소?"

여선은 그 말에 당황하며 몸을 모로 틀었다.

"주랑 낭자, 왜 대답을 하지 않소?"

양신은 계백이 너무 취해서 그런다고 보고 입을 열었다.

"계백님, 사람을 잘못 보셨습니다."

"사람을 잘못 보다니요? 이 낭자는 백제국 대장군의 따님입니다."

"계백님, 너무 취하셔 사람을 잘못 보시는 겁니다."

"내가 취해서 잘못 보는 게 아니고 주랑 낭자가 분명합니다."

계백이 단정하듯 말하자 양신은 어이가 없는 듯 또 말했다.

"혹시 백제에 닮은 분이 계신지는 모르겠으나 제 여동생입니다."

양신의 말에 강하게 고개를 저은 계백은 여선에게 물었다.

"주랑 낭자, 왜 아무 말도 하지를 않습니까?"

여선은 너무도 당황하고 난처한 가운데 할 수 없이 대답했다.

"제 이름은 여선입니다. 백제국 사람이 아닌 이곳 태생입니다."

계백은 그 답변에 좀 당황함을 감추지 못하며 더듬듯 말했다.

"그 그럼, 정말이십니까? 죄송합니다. 제가 그만 무례했습니다."

해론은 사과하는 계백의 팔을 얼른 잡고 끌었다.

"계백님, 작별 인사는 내일 드리고 이만 가십시다."

계백은 해론에게 끌려가면서도 도무지 미덥지가 않다는 듯 여전히 못 미더운지 여선에게서 눈길을 뗄 줄을 모른 채 연방 뒤를 돌아보았다.

"해론님, 계백님, 편히 들 주무시오."

양신은 멀어지는 두 사람의 등에다 대고 크게 외친 뒤 우두커니 서 있기만 했다. 그런 그에게 여선이 입을 열었다.

"오라버닌 언제까지 여기에 서 있기만 할 거예요?"

"그럼, 너는 나보고 어찌하라는 것이냐?"

양신은 반문하며 여선을 바라보았다. 별빛을 받고 선 여선의 얼굴은 여느 때보다 창백해 보여서 안쓰럽기 그지없었다.

"오라버니, 저 역시 그런 질문을 스스로에게 하고 있어요."

양신은 갑자기 분을 참을 수가 없는 듯 비석암 쪽을 향해 외쳤다.

"장안성 놈들아, 그럴 순 없다. 나는 가만히 있지 않겠다!"

여선은 그러는 양신을 바라보면서 눈물을 흘러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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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유사(三國遺事) 고조선(古朝鮮);왕검조선(王儉朝鮮)

위서(魏書)[북제(北齊)의 위수(魏收)가 BC 551년 저술]에 이르길 지금부터 2천 년 전 단군(檀君) 왕검(王儉)이 도읍을 아사달(阿斯達)에 세우고 [경(經)에 무 엽산(無葉山)이라 또는 백악(白堊)이라고 하니 백주(白州) 땅에 있다. 혹은 개성(開城) 동쪽에 있다고도 하니 지금의 백악궁(白岳宮)이다.] 나라를 열어 조선(朝鮮)이라 이름 하니 당고(唐高)와 한 때라고 했다. [고기(古記)에 이르길 옛적에 환인(桓因) 제석(帝釋)을 이름이다.] 환인의 서자(庶子) 환웅(桓雄)이 자주 천하(天下)에 뜻을 두어 인세(人世)를 탐내는 지라 아버지가 아들의 뜻을 알고 아래로 삼위태백(三危太伯)을 내려다보니 인간(人間)을 홍익(弘益)할만한 하거늘 천부인(天符印) 세 개를 가지고 가 다스리게 하니 환웅(桓雄)이 무리 3천을 거느리고 태백산(太白山) 마루턱[곧 태백(太伯)이니 지금 묘향산(妙香山)이다.] 신단수(神檀樹) 아래로 내려오니 이곳을 신시(神市)라 이르고 그를 환웅천왕(桓雄天王)이라 하였다. 풍백(風伯)과 우사(雨師)와 운사(雲師)를 거느리고 곡(穀), 명(命), 병(病), 형(邢), 선악(善惡)을 맡아보아 온갖 인간의 3백60여 가지 일을 모두 맡아 다스렸다. 이때 곰과 범이 같은 굴에서 살며 항상 환신(神)에게 빌어 가로되 원컨대 사람이 되고 싶다고 하니 신이 신령스러운 쑥 한 줌과 마늘 20개를 주어 말하길 너희들이 먹고 백일 동안 햇빛을 보지 않으면 사람의 형상(形象)이 될 것이라 했다. 곰과 범이 그대로 금기(禁忌)를 따른 삼칠(三七) 일만에 곰은 여자(女子)의 몸으로 변했으나 금기를 못한 범은 사람이 되지 못했다. 그로부터 웅녀(熊女)는 혼인을 하는 사람이 없어 항상 신단수(神檀樹) 아래서 태기(胎氣)가 있기를 빌었더니 환웅이 사람의 몸을 변해 웅녀와 혼인(婚姻)해 아들을 낳으니 호(號)를 단군(檀君) 왕검(王儉)이라 했다. 당고(唐高)[중국 최초 요(堯) 임금(BC 2357-2258)]과 같다고 했다. 요임금 즉위한 무진(戊辰)지 50년인 경인(庚寅)에 단군은 임금이 되었다고 했다. 즉 BC 2333년은 무진이 아닌 정사(丁巳)이므로 실상(實相)은 조금 다르다.] 평양성(平壤城)[지금의 서경(西京)]에 도읍하고 처음으로 조선(朝鮮)이라고 하였다. 도읍을 백악산(白岳山) 아사달(阿斯達)로 옮겼는데 그 산을 궁(弓)[혹은 방(方)이라고 했다.] 또는 홀산(忽山)이라 했고, 미달(彌達)이란 곳이다. 어국(御國)하기가 1천5백 년이었다. 주(周) 호왕(虎王)이 즉위한 기묘(己卯)에 기자(箕子)를 조선 왕에 봉(封)하매 단군(檀君)은 장당경(藏唐京)으로 옮겼다. 그 뒤 다시 돌아와 아사달에 숨어 산신(山神)되었으니 수(壽)는 1천9백8세라고 했다. 당(唐)의 배구(裵구)전에 이르길 고려는 본래 고죽국(孤竹國)[지금의 해주(海州)]으로 주(周) 나라가 기자(箕子)를 봉해 조선이라고 했다. 한(漢) 나라는 세 고을로 나눠 현토(玄菟), 낙랑(樂浪), 대방(帶方;북대방)이라 했다. 통전(通典)에도 이 말과 같다.[한서(漢書)엔 진번(眞番), 임둔(臨屯), 낙랑(樂浪), 현토(玄菟)의 4군(郡)이라 했는데 지금은 3 군이라고도 해서 같지가 않음은 무슨 까닭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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