쇠나라 37. 인연

37. 인연

by 정완기

37. 인연(因緣)


여양에서 동돌궐 국도인 카라발가순까진 2천5백 여리나 되었다.

양신은 처음 가는 길인 데다 가족을 남겨두고 떠나서 마음이 여간 무겁지가 않았다. 그러나 가족과 다시 합치기 위해선 다녀오지 않을 수가 없었다. 다만 자신에게 씌워진 너무도 가혹한 운명의 굴레는 앞으로 또 무슨 일을 당하게 될지 몰랐다. 더는 하늘을 원망하고 싶지도 않고 될 대로 되란 심경이나 자신에게 해준 이밀의 약속만은 지켜지길 바랐다.

말을 부지런히 몰아가던 중 해가 졌다. 오는 중에도 길가에는 여인숙들이 있는 것을 봤는데 마침 눈에 띄어 그리로 다가들었다.

"하룻밤 유숙할 방이 있습니까?"

문 앞에서 주인을 불렀으나 여인숙은 빈집처럼 고요하기만 했다. 한참을 있다가 중년 여인이 나왔다. 그녀는 군관 복을 입은 양신을 좀 경계하듯 살피고 나서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군관님, 손님을 받기가 어렵습니다."

"아주머니, 왜 어렵다고 하십니까? 빈 방이 없습니까?"

"요즘에 여인숙들은 도적 떼의 약탈 표적이 되고 말았습니다. 며칠 전에 우리 집도 양식을 전부 털렸습니다. 때문에 며칠째 끼니를 거르는 지경이라 손님에게 식사를 제공할 수가 없어서 그럽니다."

양신은 여인의 그런 걱정을 덜어주고자 말했다.

"저는 먼 길을 떠나는 사람이라 먹을 것을 좀 지니고 있습니다. 하루 밤만 유숙할 것이며 방세도 넉넉히 내놓겠습니다."

여인은 그 말에 안색이 펴지며 대꾸했다.

"군관님, 그러시면 안으로 드십시오."

양신은 양현감이 내준 노자 돈 주머니에서 은전을 한 푼 꺼내 주었다. 여인은 두 눈이 휘둥그레지며 기쁨에 허리를 연신 굽실거렸다.

"군관님, 이렇게 많은 돈을 내놓으셔도 되겠습니까? 제가 말을 마구간에 집어넣겠습니다."

"아주머니, 그 일은 제가 합니다. 여물이나 좀 내주십시오."

"마구간 곁에 딸린 헛간에 있습니다. 여물 값은 받지 않겠습니다."

여인은 대답하고 방을 치우겠다며 안으로 들어갔다.

양신은 마구간에 말을 넣고 여물을 퍼다 주었다. 몸을 씻으려고 우물로 가는데 뜻밖에도 중원 땅에선 볼 수가 없는 장승들이 세워져 있었다. 매우 반가운 마음에 다가들었다.

꽤나 오래되어 보이는 두 장승은 칠이 다 벗겨져 있었다. 그래도 천하대장군(天下大將軍)과 지하여장군(地下女將軍) 글자의 흔적만은 알아볼 수가 있었다. 양신은 장승을 향해 먼저 절을 올리고 어루만졌다. 마치 고향으로 돌아온 듯한 향수를 느끼며 마음속으로 가족들이 무사히 지내게 해 줄 것을 빌었다.

그때 등 뒤에서 인기척이 일어났다.

"군관님은 무슨 일로 이 집에 오셨소?"

양신이 돌아보니 초로의 사내가 서 있었다.

"이 여인숙에서 하루 밤을 묵게 되었습니다."

"우리 집 사람이 군관님을 손님으로 받았단 말이오?"

"예."

초로의 사내는 변명처럼 말했다.

"정말이요? 시절이 하도 뒤숭숭하고 여행객도 흔치가 않소. 게다가 도적 떼 때문에 개점휴업이나 다름이 없는 데다 집엔 양식이 없소. 그런데 우리 집 사람이 군관을 손님으로 받아놓고 어쩌려는지 모르겠소."

"이 여인숙의 주인장이 되십니까?"

"그렇소. 군관님은 어디서 근무하고 있소?"

"저는 여양에서 근무하는데 공무 수행 차 길을 떠났습니다."

"군관님, 우물로 가서 몸을 씻고 들어오시구려."

주인은 말을 남기고 집안으로 들어갔다.

양신은 우물에서 먼지를 뒤집어쓴 얼굴과 발을 씻었다. 그리고 말안장에서 사오가 싸준 보따리를 떼어 들고 집안으로 들어갔다. 방에서 보따리를 풀고 밀떡과 육포를 꺼내놓자 주인 내외는 눈들이 번해졌다.

"나는 오늘 종일 양식을 구하러 다녔건만 파는 데가 없어 헛걸음만 치고 돌아왔소이다. 사람이 죽으란 법은 없는 모양이구려!"

여인숙들은 대부분이 행상들이 이용을 하는데 전쟁 통이라 도적 떼가 들끓어서 길손이 확 줄어서 궁핍을 면치 못했다. 주인 내외는 양신이 내놓은 먹을 것을 보고 눈들이 번해졌다.

"함께 들 드시지요."

양신의 말에 주인 내외는 허겁지겁 달려들어 먹기 시작했다. 오래간만에 배불리 먹고 나선 연신 고마움을 표했다. 양신은 그러는 모습이 너무 딱해 보여 선심을 쓸 마음을 먹었다.

"제가 은전 한 푼 더 내놓겠습니다."

양신의 말에 주인은 과하다는 듯 두 손을 내저었지만 여인은 내놓은 돈을 슬그머니 챙겼다. 주인은 고마움에 어쩔 줄 몰라하면서도 그러는 아내를 나무라지 않았다.

"군관님, 이런 고마울 데가 어디에 있겠소? 염치 불고로 받겠소."

"주인장께선 미안해하시지 마십시오. 저는 하루 밤을 편히 쉬고 가게 되었으니 좋습니다. 그런데 여긴 중원 땅에선 못 볼 장승 있군요?"

"나는 아까 군관님이 장승을 손으로 어루만지는 걸 봤소. 군관님이 장승을 알아보는 걸 보니 혹시 요동 지방 출신이 아닌지 모르겠소?"

"저는 본래 고구려 사람으로 귀화를 했습니다."

양신은 자기도 모르게 그런 말을 흘려내고 뒤늦은 후회를 했다. 함부로 할 말이 아니어서 변명을 하려고 하는데 주인이 반색을 했다.

"이런 반가울 데가 있겠소?"

"반갑다니요? 무엇 때문에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우리 조상도 본래는 고구려인이었소."

"아, 그러십니까? 그럼 고구려 말도 하실 수가 있습니까?"

양신의 질문에 주인은 고개를 저었다.

"우리 집안은 중원으로 이주해 온지가 백여 년이 넘었소. 이젠 고구려 말을 조금도 할 줄 모르게 되었소."

"장승을 세운 걸 보니 여기엔 고구려 사람들이 많이 삽니까?"

"우리 집 뒤편에 있는 마을은 전체가 고구려인 후예들이요."

"아, 그렇습니까?"

"저 장승들은 내 조부께서 정착을 했을 때 세웠소. 그 때문에 처음엔 마을 이름을 장승촌으로 지었는데 관아에선 고구려인이 산다고 해서 구려촌으로 바꿔놓았소."

양신은 구려촌(句麗村)이란 마을 이름도 정감이 갔다.

"이 부근엔 고구려 후예들이 사는 마을들이 더 있습니까?"

"여러 군데나 되지만 장승들이 남은 데는 여기뿐이요."

주인은 그렇게 말하고 설명을 덧붙였다.

구려촌은 태원을 거쳐 북방으로 통하는 중요한 길 몫이었다. 고구려를 비롯해 북방의 새외족 대상들이 많이 오가는 대로라 여인숙에 묵는 길손들이 많았다. 특히 북방의 새외족 대상들은 장승 때문에 일부러 찾아와서 묵는 자들이 많아 덕을 보는 편이라고 했다.

"새외족 대상들은 군관처럼 장승에 절을 하오."

"새외족 대상들은 왜 저처럼 절을 할까요?"

"장승은 본래 예맥족이 마을의 수호신으로 세웠던 것이요. 그게 북방으로 널리 퍼졌고 중원으로 온 고구려 후예들도 그 유습을 지키오. 그 때문에 북방의 새외족 대상들은 물론 고구려의 상단도 장승을 보고 반가워서 마치 고향 땅으로 들어 선 것처럼 마음이 편해진다고 하오."

여인숙 주인의 이름은 석부(晳付)로 구려촌의 촌장(村長)이었다.

석부는 자기네 집안 내력도 들려주었다. 증조부 때 중원으로 이주를 했고 행상(行商)으로 생계를 꾸렸다. 그걸 부친이 잇고 자신은 규모를 키워 큰 상단(商團)을 꾸려 이젠 마을 전체가 생계 수단으로 삼았다.

촌장 겸 상단을 총괄하는 우두머리나 이젠 나이를 먹어 외부 활동을 접고 여인숙을 차렸다. 그리고 유숙하는 타국 대상들로부터 장사에 필요한 정보를 수집하는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다.

양신은 그런 석부와 좀 더 얘기를 나누고 싶었다.

"촌장님, 저는 왠지 모르게 여기가 고향처럼 느껴집니다."

"군관은 중원 땅에서 산지가 얼마나 되오?"

"저는 겨우 1년을 살았을 뿐입니다."

"그러면 이번 전쟁 통에 난리를 피해서 중원 땅으로 왔소?"

"조국에선 살 수가 없는 사정 때문에 피신을 한 처지입니다."

"군관은 고구려에서 무슨 죄를 지었기에 그래야만 했소?"

양신은 그동안 마음을 터놓고 얘기할 상대가 없었다. 그런데 석부는 경우가 다르단 생각에 얘길 꺼내다 보니 자신의 신상을 전부 털어놓게 되었다. 석부는 얘길 다 듣고 남의 일 같지 않고 부인은 눈물을 흘렸다.

"군관은 여양에서 근무를 한다면 양현감의 휘하가 아니오?"

"그렇습니다. 대정으로 근무하고 있습니다."

"그럼 대정은 지금 어디를 가는 길이오?"

"저는 동돌궐로 가는 중인데 초행인 데다 길도 몰라 걱정입니다."

"양상서가 모반을 일으킨다는 소문은 여기도 전해졌소. 그런데 대정은 그의 명을 받고 동돌궐로 간다면 그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하오?"

양신은 그에 대한 대답을 하긴 망설여지게 되었다.

"그건 말씀을 드릴 수가 없겠습니다."

"내가 물어보는 것은 혹시 대정에게 무슨 도움을 줄 수가 없을까 해서요. 그런 마음이니 말하기가 곤란하면 하지 않아도 되오."

양신은 석부의 말을 듣고 다시 생각을 해보게 되었다. 상대가 고구려 후예라서 자신의 처지를 다 털어놓고 가눌 수가 없는 심란한 심정을 달랠 무슨 조언이라도 듣고 싶었다.

"저는 양상서가 동돌궐에 보내는 밀서를 지녔습니다. 그 내용을 알 수는 없지만 그 일로 또 무슨 위험에 처하게 되지 않을까 걱정입니다."

양신의 대답에 석부는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나는 밀서 내용이 어떤 것인지 알만하겠소. 대정은 가족 때문에 다녀올 수밖에 없는 처지이나 그게 도리어 잘 된 일인지도 모르겠소."

"촌장님, 도리어 잘 된 일이라니 무슨 말씀입니까?"

"양상서는 동돌궐에 무슨 청을 넣을 목적에 친서를 보는 것이요. 대정은 그 일로 양상서와 헤어지는 계기가 되었으니 전화위복이 되었소."

양신은 전화위복이란 말에 위안이 좀 되나 가족 걱정은 여전했다.

"촌장님 말씀대로 전화위복이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동돌궐을 다녀와도 그 사이에 기족이 어떻게 될지 몰라서 걱정입니다."

"대정은 초행길도 잘 헤쳐나갈 것이고 무사히 돌아올 것이요."

"초행길인데 제대로 갈 수가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온 대로를 북쪽으로 가면 태원에 이르고 거기서 더 가야 하오."

양신은 태원이란 지명을 듣게 되자 가의를 떠올렸다. 고향으로 무사히 돌아갔을지가 궁금했다. 자신은 일을 마치고 돌아오면 가족을 데리고 찾아갈 생각이라 더 알아볼 게 있었다.

"촌장님, 저는 태원 땅에 관해서 알아 둘 게 있습니다."

"어떤 것을 알고 싶소?"

"태원 자사로 있는 분에 대해서 아시는 점이 있는지요?"

석부는 그 말에 미소를 지으며 반문했다.

"나는 대정이 태원 자사에게 관심을 갖고 있을 줄은 몰랐소?"

"태원 땅엔 자사님에게 절 천거해줄 분이 계십니다. 저는 일신의 안전을 도모하기 위해 태원 자사 밑으로 들어갈 생각입니다."

양신은 그런 말과 함께 가의 참군과 얽힌 사연도 들려주었다. 그랬더니 석부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인 뒤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요즘 태원에선 서기가 비친다는 소문이 돌고 있소."

"촌장님, 태원에서 서기가 비친다는 건 무슨 뜻입니까?"

석부는 한동안 양신의 얼굴을 이모저모로 뜯어보듯 바라보고 나서 무겁게 고개를 끄덕인 뒤 어투가 좀 무거워졌다.

"태원에서 새 천자가 나올 징조가 있다는 소문을 말하는 것이요. 거기서 새 천자가 나오게 된다면 나는 태원 자사 이연 공밖에 없다고 보오."

양신은 석부의 말을 듣고 가의 또한 그런 말을 한 게 떠올랐다.

"촌장님은 이연 공이란 분이 천자가 될 걸로 보신다면 그분에게 그럴만한 무슨 이유가 있을 것인데 그에 관한 말씀도 듣고 싶습니다."

석부는 양신에게 이연의 내력을 다음과 같이 들려주었다.

이연(李淵)은 서량국(西凉國)을 세운 이고(李暠)의 후예로 조부인 이병(李昺)은 수국을 세운 문제와 함께 북주(北周)의 신하였다. 이병은 직위가 점점 높아져서 당국공(唐國公)으로 봉해졌다. 그러나 수국이 북주를 잇게 되자 이번엔 문제의 신하가 되었다. 그리고 북주에서 받은 봉호를 그대로 쓰는 특혜를 입게 되었다.

"촌장님, 당국 공이란 분의 인품은 어떠신가요?"

"이연 공은 정직과 포용력이 큰 분으로 소문이 났소. 때문에 중앙과 지방의 관인들 사이에서 두루 추앙을 받고 있소. 또 여러 면으로 큰 능력 때문에 황제는 북방 영토를 지키는 중요한 임무를 맡겼소."

"저는 앞으로 중원 땅에서 살아가자면 어려움이 클 수밖에 없습니다. 때문에 이연공 휘하로 들어가서 몸을 의탁하고 싶은 생각입니다."

석부는 그러는 양신의 심경은 이해가 되나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내가 보기엔 대정은 보기 드문 귀상이요."

"제가 귀상이라니 저는 처음 듣는 말씀입니다."

"대정의 이름과 금년에 나이가 몇인지 알고 싶소."

"20세이며 이름은 양신이 지난 중원으로 와선 양만춘으로 씁니다."

석부는 또다시 양신의 얼굴을 찬찬히 보고 나서 입을 열었다.

"금년은 대정에게 가장 신역이 고된 해요. 그러나 40대 중반을 넘으면 어려움이 풀리고 많은 수하를 거느리며 뭇 영웅들과 겨루게 될 것이요."

양신은 은전을 하나 더 받고 듣기 좋은 말을 하려는 걸로 여겼다.

"촌장님은 제가 공연히 헛바람만 들 말씀을 하십니까?"

석부는 그 말에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대정은 앞으로 많은 일을 겪으면서 내가 한 말을 징험 하게 될 거요."

"촌장님, 제 앞날에 관한 좀 더 구체적인 말씀을 듣고 싶습니다."

"대정의 초반은 파란만장의 삶을 면치 못하겠소. 그러나 후분은 매우 좋소. 흠이라면 처복이 없어 재취를 하게 될 것인데 그 이후론 모든 게 다 잘 풀리게 되어 영웅들 반열에서도 우뚝 서게 될 것이요."

양신은 후분이 좋다는 말보다 처복이 없는 말에 아연 낙담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더욱이 재취를 한다는 건 믿기지가 않아 더 말하고 싶지가 않았다. 그러나 현실적인 문제 때문에 또 묻게 되었다.

"제가 당국 공 밑으로 들어가 몸을 의탁하면 어떻겠습니까?"

"대정이 당국 공에 몸을 의탁하려는 건 안전 때문일 것이나 당장 급한 불을 끄자고 남의 밑으로 함부로 들어가는 건 삼가야 할 일이요."

양신은 수긍하는 태도로 고개를 끄덕이며 또 물었다.

"촌장님 말씀대로 경솔하게 굴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그러시면 이왕에 말을 꺼내신 김에 제게 충고가 될 말씀은 더 있으면 해 주십시오."

석부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이고 다른 말을 꺼냈다.

"전에 내가 상을 잘 본다는 소문을 들으신 당국 공의 부름을 받았소. 그때 나는 공이 장차 한 나라를 열고 천하에 군림하실 상이라는 말씀을 드렸소. 그랬더니 당국 공은 내 말을 기억해 두겠다고 하셨소. 그런데 대정도 당국 공에 버금갈 상이라 참으로 흔치 않을 상을 또 보았소."

"그 말씀은 제가 나라를 세운다는 말씀이 아닙니까?"

"그렇소. 그러므로 대정이 당국 공 밑으로 들어가는 것을 피했으면 하오. 왜냐하면 상이 같은 사람들끼리 부딪치게 되면 상극이 일어날 위험성이 매우 끔으로 그런 충고를 하지 않을 수가 없겠소."

"상극이란 어떤 것을 이르는 말씀입니까?"

"서로가 충돌을 해서 해를 입고 끼치는 일을 말함이요."

"촌장님, 정말 제가 당국 공과 비슷한 상이란 말씀입니까?"

"대정은 앞으로 여러 가지 일을 겪으면서 알게 될 것이요."

양신은 자신의 현실과 너무도 동 떨어진 말을 자꾸 듣게 되자 이라 내심 크게 황당하지 않을 수가 없는데 석부는 이런 제의를 했다.

"대정은 돌궐국을 다녀온 뒤 가족과 함께 여기서 살면 어떻겠소?"

양신은 그 말을 듣고 반색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촌장님, 그렇게 해주시면 와서 살겠습니다."

"지금은 전쟁 통이라 우리 마을의 형편이 매우 어렵소. 그러나 전쟁이 끝나면 안정을 되찾고 상단은 다시 장삿길에 나설 것이요. 대정이 우리를 도와주면 가족을 부양하는 데는 어려움이 없게 해 주겠소."

석부는 그런 대답을 하고 구려촌의 사정을 털어놓았다.

구려촌은 20여 호에 불과하나 마차를 10여 대나 보유한 상단을 꾸려서 원거리 행상을 해왔다. 때문에 마을은 비교적 풍족한 생활을 누렸건만 이번에 황제가 말들을 징발해 전쟁터로 끌고 가 큰 타격을 입었다. 전쟁으로 백성들이 살기가 어렵지만 상단도 장사가 안 되어 극도의 곤궁에 처한 형편이었다. 거기다 전쟁이 끝나도 장사 밑천을 다 까먹어서 막막하기가 그지없는 지경이었다.

"촌장님, 제가 여기서 살면 뭘 할 게 있을까요?"

"대정은 무예가 출중해 고구려 국상과 양현감의 호위를 맡지 않았소? 중원 땅은 전쟁이 끝나도 한동안은 험난함이 계속될 것이라 대정처럼 무예가 뛰어난 사람이 함께 있으면 도적 떼의 걱정을 크게 덜겠소."

양신도 고구려 후예들과 살면 좋은 은신처가 되겠다는 생각이었다.

"촌장님, 저는 돌아온 뒤 가족들과 함께 꼭 오겠습니다."

"나도 대정이 오기만을 기다리겠소."

"저는 여기서 장사 일을 배울까 합니다."

석부는 그 말을 듣고 뜻밖의 말을 또 했다.

"대정이 장사를 배우기보다 우선은 다른 일을 할 것을 권하겠소."

"어떤 일을 말씀하십니까?"

"젊은이들에게 검술을 지도해 볼 것을 권하겠소."

"촌장님은 왜 그런 일을 권하십니까?"

"전쟁이 끝나면 중원 땅은 곧 내란 상태로 접어들 것이요. 세상이 계속 불안해지면 무예를 배우려는 사람들이 늘어나게 될 것이요. 그러므로 도장을 열어 제자들을 길러내면 나중에 본인에게 큰 쓸모가 있을 것이요."

"촌장님, 제자를 길러내면 무슨 쓸모가 있다는 말씀입니까?"

"독불장군은 영웅이 될 수가 없으므로 대정은 무리를 모아 거느리기 위함이요. 그 일에 지름길은 젊은이들에게 검술을 지도하는 것이요."

양신은 머릿속이 복잡해질 말을 그만하고자 화제를 돌리려고 했다.

"그 일은 한번 생각을 해 보겠습니다. 촌장님은 사람들의 운명을 점치듯이 고구려의 앞날은 어떨 것으로 보고 계십니까?"

석부는 잠시 눈을 감았다 뜨더니 굳은 음성으로 대답했다.

"고구려는 지금이 최고 강성기요. 때문에 그렇게 많은 병력을 투입시키고도 황제는 정복을 하지 못했소. 그러나 미련을 접지 못해서 2차 침공까지 했으나 국력만 낭비하고 자신의 위기만 부르게 될 것이요."

양신은 그 말에 안심을 하는데 석부가 말을 이었다.

"고구려도 이번 환란을 이겨낸다고 해도 더 큰 위기를 맞을 것이요."

석부가 단언하듯 하는 말에 양신은 반문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촌장님은 고구려가 뭣 때문에 더 큰 위기를 맞는다고 하십니까?"

"이번에 고구려는 왕실과 을지문덕을 필두로 귀족들의 합심단결로 위기를 막았소. 그러나 국왕과 귀족들의 권력다툼이 더욱 심화될 것이요."

"촌장님의 말씀에 저도 동감입니다."

"대정은 무슨 이유로 동감이란 말을 하게 되오?"

양신은 전쟁 중에 나타났던 현상들에 대한 말을 했다.

"이번에 귀족들은 국난을 극복하는데 크게 힘을 보탰습니다. 그러나 그걸 내세워 자신들의 이익 챙기려고 들게 될 것입니다. 반대로 왕실도 지위를 공고히 하려고 귀족들에 대한 견제와 단압을 강화시킬 것입니다. 그로 인한 내부 갈등과 분열상이 다시 격화될 게 뻔합니다. 그에 반해 한족들은 어떻게 될지 모르겠습니다."

"한족도 분열과 통합이 잦소. 그러나 그 양상은 고구려완 좀 다르오."

"어떻게 다른지 듣고 싶습니다."

"분열과 통합은 어느 나라건 되풀이되는 일이요. 그런데 한족과 동이족은 각기 다른 특징이 있어 각기 다른 양상을 보이게 될 것이요."

"동이족과 한족의 양상은 어떻게 다른지 듣고 싶습니다."

"한족의 특성은 지역을 중심으로 뭉치는 데 있소. 그러나 동이족은 씨족을 중심으로 뭉치려고 드는 점이 다르오. 즉 지역을 중심으로 뭉치는 한족은 대동단결을 내세울 수가 있고, 그로 인해 큰 덩어리를 이룰 수가 있소. 그런데 연맹체인 고구려는 부족을 중심으로 뭉치려고 들다 보니 덩어리가 작을 수밖에 없고 그래서 큰 덩어리에 밀릴 수밖에 없는 거요."

양신도 그 말엔 수긍이 갈 수밖에 없었다.

"촌장님의 지적대로 그건 고구려의 큰 약점입니다. 그 때문에 하루속히 연맹체를 벗어나 한삼국 통합에 나서야 합니다. 그러나 그건 광개토왕 때 가능했을 일인데 이젠 기회를 영영 놓치게 되고 만 것 같습니다."

석부는 그런 말을 하는 양신을 물끄러미 바라보게 되었다. 그 이유는 자신이 그의 상을 제대로 보았다는 확신이 들었기 때문이다.

"좋은 지적이요. 한족은 타민족이 자기 터전에 들어와 사는 것에 포용성을 갖기 때문에 덩어리가 점점 커져 팽창해 나가서 중원 땅을 점점 넓히는 결과를 얻게 되오. 그에 반해 동이족은 어떻소? 처음엔 중원 땅을 절반이나 차지했던 적이 있었소. 그렇지만 타 종족을 수용하는 포용성보다 배타성이 강하오. 다시 말해 함께 어울려 살기를 꺼려해서 스스로 떨어져 나오려고 들다 보니 지금은 요동 땅으로 밀려나고 말았소."

양신은 그 말에는 좀 반발심이 일었다.

"고구려도 이번엔 북방의 새외민족과 연계를 강화시킨 결과 전쟁에서 큰 도움을 얻을 수가 있었고 버텨낼 수도 있었던 것입니다."

석부는 그런 반발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양신은 반성할 점을 느끼게 되며 다른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것은 자신에게 스승이 없다는 점이었다. 을지문덕의 타계로 앞으로 배움을 청할 데가 없어졌다. 그에 대한 아쉬움을 느끼던 참에 세상을 보는 눈길이 깊은 석부를 스승으로 모시고 배우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촌장님, 학식도 경험도 매우 부족한 저로선 앞날을 개척해 나가는 데 어려움이 큽니다. 제게 될 충고의 말씀이 있으시면 해주십시오."

"나는 남을 지도할만한 사람은 못되나 양대정 만은 왠지 모르게 가까이하고 싶은 마음이요. 내게 묻고 싶은 게 있으면 물어보시오."

"제가 중원 땅에서 살면서 어떻게 처신을 하면 좋겠습니까?"

"금년은 양대정에게 일생일대의 큰 영향을 끼칠 사람들과 인연을 맺는 해가 되겠소. 매우 중요한 시기인 만큼 충고를 하고 싶소. 중원 땅에서 사람들과 교유를 할 때는 유의할 점이 있소."

"그건 어떤 것이옵니까?"

"우선 포용력을 갖고 여러 계층의 사람들과 두루 사귀기에 힘을 써야 하오. 또 이번에 할 북방 여행도 좋은 경험이 될 것이요. 유목민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잘 관찰해 두면 나중에 유용하게 쓰일 데가 있겠소."

"촌장님, 유목민을 관찰할 때 특히 어떤 점에 유의해야 합니까?"

"유목민은 타국과 교역에 능하니 그걸 배울 기회로 삼는 게 좋겠소."

"저는 유목민이 교역에 능한 줄은 몰랐습니다. 그런데 촌장님은 제게 왜 교역을 배울 것을 권하십니까? 그 이유를 알고 싶습니다."

"대정은 앞으로 재물을 축적하는 일부터 힘을 써야 하겠소. 교역상술이 능한 유목민 대상들에게 관심을 갖고 관찰을 해두면 재물을 축적하는데 큰 도움이 될 수가 있소."

"재물은 살아가는데 매우 중요한 것임을 잘 알지만 제게 재물을 축적할 것을 권하시는 이유는 무엇인지요?"

"대정은 영웅이 될 상이라 많은 무리를 거느리게 될 것이요. 그러자면 많은 재물이 필요한데 재물을 모으는 데는 교역만 한 게 없소."

"촌장님의 말씀은 고마우나 제가 정말 영웅이 되겠습니까?"

"나는 대정에게 금년은 매우 중요한 해가 될 것임을 말했소. 특히 금년엔 대정의 앞날에 큰 여향을 줄 중요한 사람들과 인연을 맺게 될 것이요. 그러므로 되도록 자존하는 마음을 갖고 타인을 대하고 일단 맺게 되는 관계를 잘 유지하는 데도 힘을 써야 하오."

"촌장님, 타인과 관계를 잘 유지하는 비법도 알려주십시오."

"무엇보다 남에게 인색하지 말고 베풀기에 힘을 써야 하오. 그것은 영웅들이 갖출 가장 중요한 덕목 중의 하나가 됨을 강조하겠소."

"촌장님의 말씀을 가슴에 새겨 두겠습니다."

"그런데 대정은 먼 길을 떠나는 사람치곤 너무 준비가 허술하오."

"말 한 필에 은전도 충분히 지녔는데 뭐가 더 필요하겠습니까?"

"말과 은전 못지않게 중요한 준비를 해야 할 게 있소."

석부는 북방 여행에 필요한 사항들을 지적했다.

"내가 평복을 한 벌 내겠으니 군복부터 갈아입도록 하오. 만리장성을 넘을 때까진 장사꾼 행세를 해서 신분을 감추는 게 좋겠소. 또 사막 여행을 할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질 않소. 그 때문에 태원 땅에 들어서거든 말을 한 필 더 구입하고 여물도 충분히 싣고 떠나오. 무엇보다 먹을 물을 지닐 가죽 주머니가 필요한데 그것은 내게 있으니 내주겠소."

이튿날 양신은 석부가 챙겨 준 것을 지니고 길을 떠났다. 그러나 가던 중 무슨 생각을 하고 다시 여인숙으로 돌아갔다. 여양을 떠날 때 주먹 만한 금덩이를 셋이나 지니고 있었다. 가족에게 넘겨주질 방법이 없어 그냥 지니고 떠났는데 먼 여행길에서 분실할 위험성이 컸다.

석부는 돌아온 양신을 이상하다는 듯 바라보았다.

"촌장님은 제가 좌절하지 않고 큰 희망을 품게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 때문에 다시 용기를 갖게 된 저는 보답을 하고 싶습니다."

"어떤 보답을 하겠다는 말이요?"

"촌장님은 다시 행상에 나서야 하나 장사 밑천을 다 까먹었다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제가 금덩이를 맡겨두겠으니 장사 밑천으로 쓰십시오. 다만 나중에 똑같은 걸로 되돌려주십시오. 저도 교역을 배우고 나면 장사 밑천이 필요함으로 그때까지 맡겨둘 생각입니다."

석부는 양신이 넘겨준 금덩이가 든 주머니를 받아 들고 속을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너무도 놀라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데 양신은 말고삐를 채어 그곳을 떠나버렸다.

양신은 북으로 계속 향했다. 갈수록 길은 험해지고 민가도 적어져 밤이면 길에서 야숙을 해야 할 때도 있었다. 그렇게 북쪽으로 향한 지 이틀 만에 태원 땅에 들어서게 되었다.

태원 땅에서 하루 밤을 묵고 다시 길을 떠났다. 정오께쯤 전방에서 무기를 지닌 사람들의 움직임을 발견했다. 군인들 같지는 않아 말을 끌고 재빨리 숲 속으로 들어가서 지켜보았다.

무리들은 1백여 명 가량이고 숲 속에서 통나무를 끌어내 큰길을 막고 있었다. 복색이 가지각색이라 군도(群盜)들이란 생각이 펀 듯 들었다. 길을 통나무로 막고 나자 양켠의 숲 속에 몸들을 숨겼다.

양신은 그들이 뭘 노리고 있음을 대번에 알아차렸다. 말고삐를 나무에 묶은 뒤 몸을 드러나지 않게 전방으로 접근했다. 그때 전방에서 기병들의 호위를 받는 마차들이 오고 있었다.

기병들은 길이 막히자 멈추어 섰다. 젊은 장수는 불안한 듯 주변을 살핀 뒤 무슨 지시를 내렸다. 말에서 내린 병사들은 장애물을 치우는데 군도들이 일제히 몸을 드러냈다.

"좀 도적 떼가 감히 길을 막다니! 내가 누군 줄 아는가?"

장수가 외치자 무리의 우두머리가 그 말을 받았다.

"애송이 장수는 태원 자사의 아들인 이세민이 아닌가?"

이세민(李世民)은 거침없이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두목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무리들의 숫자가 만만치 않아 그만 음성을 좀 눅으러 들었다.

"그대는 군도의 두목인가?"

"두목이라니 말조심을 해라. 나는 의병 대장인 두건덕이다."

두건덕은 1차 고구려 침공 때 오위로 출정을 했었다. 그는 죄 없는 백성들에게 고통만 주고 신하와 장수들을 발톱에 때만치도 여기지 않는 황제에 대한 불만이 컸었다. 때문에 동료들과 술자리에 어울릴 땐 황제를 자주 욕을 했는데 그로 인해 처형을 당하게 되자 탈주를 했다. 그러자 관아에선 대신 가족들을 끌어다 처형을 했다. 그때부터 분개한 두건덕은 불량배들을 모아 관아를 들이치는 반란을 일으키게 되었다.

이세민은 은근히 위기의식을 느끼며 엄하게 물었다.

"두건덕, 그대가 우리 길을 막은 이유는 무엇인가?"

"나는 수레들이 싣고 있는 게 뭔지 알고 왔다."

두건덕의 대답에 이세민은 가슴이 뜨끔하고 말았다.

"마차에 뭐가 실린 지를 안다고?"

"그렇다. 마차들을 남겨 두고 얌전히 떠나가면 해치지 않겠다."

이세민은 큰일이다 싶어 말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내 가친께선 태원 자사로 부임하신 뒤로 오직 북방의 적을 막는 일에만 전념을 하신 분이다. 고을 백성들에겐 선정을 베푸셨음은 그대도 잘 알 것이다. 그런데 마차를 노리다니 간덩이가 부은 자가 아닌가?"

"이세민, 지금은 위세를 부릴 때가 아니다. 순순히 떠나는 게 자신의 신상은 물론 죄 없는 병사들도 다치게 않게 만드는 일임을 모르는가?"

"두건덕, 그 따위 건방진 소리는 태원 땅에선 통하지 않는다."

"이세민, 마차를 빼앗기지 않으려고 건방진 소리만 할 것인가?"

"두건덕, 너는 마차에 금궤라도 실은 걸로 아는데 그렇지가 않다."

"나도 금궤가 아닌 다른 걸 싣고 있음을 잘 알고 있다."

이세민은 그 말에 굳어진 음성으로 물었다.

"금궤가 아니면 뭐가 실린 걸로 알고 있는가?"

"마차엔 새외 종족들로부터 사들인 무기기가 실려 있지 않은가?"

두건덕의 대꾸에 이세민은 가슴이 덜컥 내려앉고 말았다.

"두건덕, 그대가 그걸 어찌 알 수가 있었단 말인가?"

"나 역시 새외 종족에게 무기를 사들이려고 흥정을 하던 중이었다."

"그럼 흥정을 계속해서 사들일 일이 아닌가?"

"그런데 갑자기 가격이 배로 올랐다. 무슨 이유인지를 알아봤더니 네가 값을 올리게 만든 장본인이었다. 나는 그만 자금이 없으므로 어떻게 해야 되겠는가? 그래서 돈을 조금 찔러 주고 알아낸 게 있었다."

이세민은 이제 낭패감을 감출 수가 없었다. 새외 종족은 자신에게 무기를 팔고 나서 이번엔 두건덕에게 약간의 돈을 받고 이세민이 무기를 싣고 돌아가는 날짜를 알려 준 게 분명했다.

"애송이 장수, 나는 그대 아비도 큰 야망을 품고 있는 걸로 알고 있다. 양현감의 반란 소식을 접하자 자신도 병력을 모으기 시작했는데 다량의 무기가 필요해지자 새외족과 접촉해 사들인 게 아닌가?"

이세민은 입을 더 열 수가 없었다.

북방의 새외 종족들은 수국의 고구려 침공으로 큰 득을 보게 되었다. 수국과 고구려 양쪽에서 하는 병력 지원을 요구로 무기를 공급받을 수가 있었다. 또 전쟁터에서 전사자의 무기도 거두어 잉여 무기가 많았다.

수국은 2차 침공에도 백성들을 동원했으나 무기를 제대로 지급할 수가 없었다. 백성들은 1차 때 지급받은 무기를 감춰두고 전쟁터에서 분실했다고 둘러댔다. 그러나 나라에선 철정 부족으로 소요 무기를 제작할 수가 없어 동원에 응하는 자들에게 내줄 게 없었다. 때문에 황제는 근위군 주축으로 출병을 하면서 이연에게 명령을 내린 게 있었다. 내탕금(內帑金)을 털어서라도 새외 종족의 잉여무기를 사들이라는 것이었다. 이연은 그 명령을 자신의 무기를 축적하는데 이용을 하고 있었다.

이연은 내란이 점점 악화되고 장기화될 것으로 보고 있었다. 때문에 자신의 야심을 달성하고자 반란 대열에 끼어들 생각이었다. 그러자면 병력 동원과 무기 조달에 막대한 자금이 필요했다. 그걸 황제의 명령으로 해결하려고 들었다. 그러나 다른 반란자들도 무기 구입에 나서 새외 종족들과 무기 교섭을 하며 값을 확 올려주었다.

"이연은 막대한 자금력을 믿고 나처럼 자금이 없어 애로를 겪는 사람에게 타격을 주려고 새외 종족들에게 값을 마구 올려줬는데 그게 오늘 제 발등을 찍게 되었다. 큰 득을 보게 된 나는 네 목숨만은 살려주마."

"두건덕, 지나친 탐욕을 부리면 큰 화를 면치 못하게 된다."

"그대 아비나 나나 황제를 타도할 무기가 필요한 것은 다 같다."

"두건덕, 쥐나 개나 반역을 일으키면 백성들은 어떻게 되겠는가?"

"이세민, 그대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오다니? 그렇다면 그대의 아비는 어떤가? 신하로 황제의 잘 못을 바로 잡을 간언은 않고 수서양단으로 사태를 관망하다 끝내 반역으로 돌아섰지 않는가? 그런 자의 자식이 누굴 훈계하려고 드는가?"

"두건덕, 내 가친은 황제의 출병 기간에 북방 영토를 돌궐로부터 지키기에 불철주야로 애를 쓰시는데 그런 분에게 무슨 망발인가?"

"얼씨구! 불철주야로 반란 계획을 세우기에 여념이 없겠지. 더욱이 황제의 측근으로 전역을 말릴 간언을 하기는커녕 나라가 어지러워지길 기다렸다가 반역을 도모하려고 드니 어이가 없을 뿐이다."

두건덕의 질타에 이세민은 다른 생각을 해야만 했다.

"두건덕, 그렇다고 반역을 일으키는 자들이 늘어날수록 백성에게 고통만 가중시키고 혼란만 키울 것이므로 이런 생각을 해보면 어떨까?"

"어떤 생각을 말하려는 것인가?"

"그대가 내 가친의 휘하로 들어올 것을 권고하겠다. 그렇게 한다면 상당한 관직에 기용이 되어 대의에 동참할 수가 있게 해 주겠다."

"이세민, 머리에 피도 마르지 않은 자가 날 구슬리려고 드나? 그런 유혹에 넘어갈 내가 아니니 쓸데없는 소린 작작하고 마차들이나 놔두고 떠나라. 그 길만이 피비린내가 벌어질 사태를 막을 수가 있을 것이다."

이세민은 난감함을 떨칠 수가 없었다. 주변은 사람들을 구경하기조차 힘든 외진 데라 무슨 구원을 청할 수도 없었다. 꼼짝없이 무기를 다 빼앗기게 되었다는 생각인데 두건덕이 명령을 내렸다.

"시간을 끌면 안 되겠다. 들이쳐라."

명령을 받은 무리들은 무기를 꼰아 쥐고 일제히 덤벼들 태세를 취했다. 꼼짝없이 당하게 생긴 이세민이 다급하게 외쳤다.

"잠깐만! 그렇다면 무기의 절반을 내주겠다."

그때 어디서 외치는 소리가 일어났다.

"잠깐 기다리시오."

모두가 고개를 돌린 가운데 양신이 다가들고 두건덕이 입을 열었다.

"너는 뭣 하는 자인가?"

"나는 행상을 하고 있소."

"그러면 가던 길이나 갈 일이지 왜 끼어드는가?"

양신은 두건덕의 말은 못 들은 척하며 이세민을 향해 물었다.

"젊은 장수님의 가친이 당국 공이신 게 맞소?"

이세민은 또래의 상대를 마주 보며 대답을 했다.

"그렇소. 내 이름은 이세민이요."

"그렇다면 내가 도와 드리겠소."

양신의 대답을 듣고 양쪽은 다 같이 의아해했고 더러는 어이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터뜨렸다. 양신은 두건덕을 행해 입을 열었다.

"이세민 장수의 말씀대로 그쪽이 여길 떠나는 게 좋겠소."

두건덕은 기가 막히고 화가 나서 호통을 쳤다.

"이런 쥐새끼 같은 놈이 무슨 소릴 지껄이는가? 아니지, 이 잔 정신이 나간 자야! 모가지가 떨어지기 전에 썩 꺼지지 못할까?"

"내 목을 떼어놓을 수가 있으면 한번 나서보구려!"

양신의 대답에 두건덕은 속으로 뜨끔했다. 양측은 다 같이 수런거림이 일고, 두건덕도 심상치가 않은 듯 부하들을 향해서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정신이 나간 자로군! 누가 나서 쫓아버려라."

그런데 부하들 중에선 아무도 앞으로 나서려는 자가 없었다. 두건덕은 당황하고 머쓱해지지 않을 수가 없는데 양신이 찌어 누르듯 말했다.

"두건덕, 부하들이 나서질 않으니 그대가 직접 나서야 하지 않나?"

두건덕은 그 말에 대꾸를 않고 갑자기 호명을 했다.

"장치, 소격, 민하 너희들이 나가 처치해 버려라."

호명된 세 명은 앞으로 나서더니 양신을 천천히 둘러쌌다. 그러자 선공으로 들어간 양신은 눈 깜짝할 사이에 3명을 모두 땅바닥에 쓰러뜨렸다. 너무도 순식간적으로 일어난 일이라 모두는 어안이 벙벙해했다.

두건덕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러나 아무리 센 자일 지라도 백여 명이 한꺼번에 덮치면 못 때려잡을 게 없다는 생각에 또 호통을 쳤다.

"전부 나서라."

그런데 부하들은 명령을 받고 아무도 움직이질 않았다. 난데없이 나타난 자의 검술이 너무 무서운 경지라 오금이 저려 발을 뗄 수가 없었다. 두건덕은 부하들이 두려움에 질려서 의기소침해진 것에 화가 나고 어쩔 줄을 몰라하고 있는데 양신이 입을 열었다.

"더 나설 자가 없는가?"

양신은 말하고 무리들 앞으로 다가들었다. 그러자 모두는 뒷걸음질을 쳤다. 두건덕은 그런 부하들에게 무슨 말이 더 나오질 않았다. 그런데 양신의 입에서 뜻밖의 말이 나왔다.

"지금 땅바닥에 쓰러진 세 사람은 모두가 생명엔 지장이 없다. 내가 저들을 칼등으로 제압을 해서 지금 정신들을 잃고 있을 뿐이다."

양신의 말에 무리들은 고개들을 갸웃거리며 땅바닥에 쓰러진 동료들을 살펴보는 눈길들이 되었다. 양신의 말이 이어졌다.

"모두는 들어라. 쓰러진 동료들을 일으켜 당장 여길 떠나라. 내 말을 따르면 무사히 떠날 수가 있지만 버티다간 이번엔 응징을 하겠다."

무리들은 그 말에 겁을 먹고 슬금슬금 뒷걸음질을 쳤다. 두건덕은 버텨보고 싶지만 상대의 검술이 보통이 아닌 데다 이세민의 부하들도 합세를 하는 날엔 무슨 사태가 벌어질지 몰랐다.

"떠나도 쓰러진 동료들은 건사하고 떠나야 하지 않겠는가?"

두건덕은 그런 말을 하고 직접 쓰러진 자들을 살폈다. 숨들이 끊기지 않은 것을 확인하고 부하들과 함께 수습해서 곧 떠났다. 긴박했던 사태를 겨우 벗어난 이세민은 양신을 향해 입을 열었다.

"고맙소, 그런데 댁은 뉘신지 알고 싶소."

"나는 일개 장사꾼에 지나지 않소. 그런데 공자께선 내 도움을 받았다고 생각을 하신다면 얼마간의 보상을 해 주었으면 합니다."

"어떤 보상을 바라는 것이요?"

"말 한필과 여물을 되도록 많이 내주셨으면 합니다."

"그야 어렵지가 않고 그만한 보상은 당연히 하겠소. 그러나 댁은 여간 범상치가 않을 사람으로 보고 있고 보상도 상당하게 해야 할 것 같소."

"상당한 보상이라면 어떤 것이 되겠습니까?"

"나는 관직을 내려 함께 일을 하고 싶소. 그러니 신분을 밝혀 주오."

"나는 관직엔 관심이 없는 사람입니다."

이세민은 그러는 상대가 더욱 궁금하고 이상했다.

"행상에 나섰다면 지금은 어디로 향하는 길이었소?"

"행상은 발길이 가는 데로 돌게 되는 일인데 그걸 알아서 뭣하겠소? 보상이 어려워서 그러신다면 나는 이만 떠나기로 하겠소."

양신이 발길을 돌려세우려고 하자 이세민은 다급하게 불렀다.

"알겠소. 요구대로 말 한 필과 여물을 충분히 내주겠소."

이세민은 말하고 부하들에게 지시했다. 그렇게 말 한 필과 여물을 챙기게 된 양신은 그 자리에서 머뭇거리고만 있자 이세민이 물었다.

"길손은 왜 떠나질 않소?"

양신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나보다 급한 분은 공자님이 아니시오? 나는 공자님이 여기서 떠나가는 걸 지켜본 뒤에 천천히 떠나도 되니 어서 떠나십시오."

이세민은 명령을 받은 사람처럼 고개를 끄덕인 뒤 출발했다. 양신은 이세민의 마차들이 멀리 사라지길 지켜보며 석부의 말을 떠올렸다. 그리고 중얼거리게 되었다.

"누가 반란을 일으키건 내겐 다 환영을 할 일이지. 그러나 나는 두건덕보다는 더 될성부른 이연 쪽을 택하는 게 바람직한 일이 되겠지?"

양신은 새로 얻은 말에 여물을 실은 뒤 다시 떠났다. 그로부터 이틀간을 더 간 끝에 앞을 가로막는 만리장성을 만나게 되었다. 장성은 도처에 무너진 데가 많다는 말을 들어 그런 곳을 찾으려고 접근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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