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 고비사막
만리장성(萬里長城)은 사람이 살기 힘든 땅에 세운 최대의 건축물이었다. 높은 산줄기를 따라 하얀 띠처럼 아득하게 이어졌다 끊어지는 신비스러운 광경은 보는 사람의 마음을 엄숙하게 만들었다.
양신이 다가들며 보게 된 장성은 높은 데는 의연하게 솟았고 낮은 데는 헐린 돌무더기에 지나지 않았다. 성벽을 지키는 군사들은 없지만 접근해 들며 좀 긴장감을 느끼게 했다.
장성은 헐린 데가 많아서 새외 종족들이 마음대로 넘나들었다. 양신도 어떤 어려움도 없이 통과할 수가 있었다. 넘고 나선 험한 산악지대가 계속 이어졌다. 다행히 험한 산협을 흐르는 개울들을 자주 만날 수가 있어 갈증도 풀고 빈 물주머니를 다시 채울 수가 있었다.
그러나 험한 산길이 끝나자 나무들이 보이지 않는 황야가 끝없이 펼쳐졌다. 생물들이 살기가 힘들 황야로 들어서면서부터 해가 지면 밤 기온이 매우 떨어져 고통스러울 지경이었다.
양신은 벗어 두었던 군복을 꺼내 덧입었다. 그러지 않고는 노숙이 불가능한데 앞으로 얼마를 더 계속될지 모르고 물주머니가 없었다면 여간 큰일이 아니라 석부에게 감사하는 마음이었다.
그러나 사막에서 이틀을 지내자 물주머니가 거의 비워졌다. 사람도 말도 갈증에 시달릴 죽음의 공포가 밀려들 가운데 이틀을 더 갔다. 그러자 황야의 끝자락에 잇대어진 초원이 시야에 들어왔다. 끝을 모르게 펼쳐진 초원은 지평선과 잇대어져 있었다.
양신은 고구려의 변경 지대가 아닐까 하는 향수에 젖어들었다.
마침내 초원 지대로 들어서면서 가축들을 끌고 이동하는 목부들을 드문드문 만나게 되었다. 말은 통하지 않으나 손짓 발짓으로 우유를 얻어먹을 수가 있어서 지친 몸은 기력을 되찾게 만들어 주었다.
양신은 목부들을 만난 때마다 카라발가순을 외쳤다. 그러면 목부들은 손을 들어 서쪽 방향을 가리켰다. 사흘간을 그렇게 나간 끝에 다시금 사막인지 황야인지를 모를 땅으로 들어섰다. 하늘은 푸르고 태양이 빛났고 지만 이따금씩 돌개바람이 흙먼지를 일으켰다.
막막하기 그지없는 황야는 끝없이 이어지고 모래와 자갈투성이로 걷는 말들은 지쳐 걸음이 느리기만 했다. 이대로 계속되면 사람과 말은 함께 쓰러져 죽을지도 모르겠다는 공포심이 일기도 했다.
양신은 말들이 끝내 잘 걷지를 못해서 내려서 걸어야만 했다. 물주머니가 빈 지 이틀이나 되었지만 풀이 없어 지나가는 목부들도 없었다. 물이 없어 심한 갈증에 시달리는 고통을 참을 수가 없었다. 허기가 져서 남은 육포를 입에 넣어도 침이 돌지 않아 씹을 수가 없었다.
그래도 말들은 이따금씩 풀포기를 발견하고 뜯어먹었다. 이대로 가다간 사막에서 죽겠다는 생각에 발길을 돌리고 싶었지만 이미 깊숙이 들어온 터라 오도 가도 못 하게 되었다. 어디쯤서 쓰러질 지경이라 땅바닥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그때 석양빛 아래로 지평선에 걸을 땐 못 보았던 흰 띠가 같은 게 보였다.
"저기 강이 흐르고 있구나!"
양신은 강을 만났다는 생각에 힘이 솟아올랐다. 그쪽으로 말고삐를 잡아끌며 다시 걸었다. 그러나 아무리 다가가도 흰 띠 같은 것은 계속 멀리에 있기만 했고 때론 온데간데없어져 버렸다.
"내가 귀신에 홀렸나?"
허깨비에 홀린 사람처럼 완전 탈진상태에 빠진 채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주변을 살피는데 아슴푸레 한쪽 사구(砂丘) 등성이에 검은 깃발들이 꽂힌 게 보였다. 혹시 허깨비를 보는 게 아닐까 해서 눈을 씻고 다시 보았다. 그랬더니 사구 밑에 천막들이 여럿 있는 것도 보였다.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그쪽을 향해 빠르게 접근해 들었다. 가까이 다가드니 천막들은 물론 주변에 1백여 필의 낙타와 말들이 꿇어앉아 있었다.
"도와주십시오."
양신은 반가움에 한어로 외쳤다. 그러나 쥐 죽은 듯 고요하기만 했다.
"아무도 안 계십니까? 길을 잃은 사람입니다."
걸음을 멈추고 더욱 큰 소리로 외치자 천막 안에서 칼을 빼 든 사내들이 우르르 쏟아져 나왔다. 그리고 눈 깜짝할 사이에 둘러싸버려 양신도 얼결에 칼을 빼들고 말았다.
"왜들 이러십니까? 목이 마릅니다. 물을 좀 주시오."
양신은 말하고 그대로 땅바닥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그러자 사내들 입에서 욕설들이 튀어나왔다.
"돼지 같은 떼 놈이 어디서 물을 찾는가?"
"원수의 한족 놈에게 줄 물은 없다."
사내들이 한 마디씩 하는 욕설은 고구려 말이었다. 양신은 조국 사람들임을 알게 되자 반가웠다. 사내들은 쫓아 보낼까 죽일까로 의견들이 분분한데 우두머리인 듯한 자가 양신에게 한어로 물었다.
"한족 놈이 여긴 무슨 일로 왔는가?"
양신은 그제야 고구려 말로 대답했다.
"물부터 주시오. 목이 말라죽을 지경입니다."
우두머리는 피식 웃으며 대꾸했다.
"이 놈이 고구려 사람인양 갈롱까지 떨려고 하는군?"
"나는 고구려 사람입니다. 물부터 주십시오."
우두머리는 좀 어안이 벙벙한 듯 동료들과 시선을 나누었다. 한족 군복에 한어를 쓰던 자가 갑자기 유창하게 고구려 말을 해서 믿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의문을 느껴야 했다.
"뻔뻔스럽게 고구려인 행세를 하려고 든다만 속을 줄 아느냐?"
"사람의 말을 왜 그리도 못 믿으시오? 고구려 사람이 분명합니다."
양신은 대답하고 칼집에 칼을 도로 꽂고 땅바닥에 다시 털썩 주저앉았다. 우두머리는 그제야 섞갈리는 태도로 말했다.
"저 자에게 일단 물부터 주게."
우두머리 지시를 받은 대원 하나가 물주머니를 양신에게 내밀었다. 양신은 허겁지겁 물을 마시고 나서 입을 열었다.
"말들도 먹여 주면 고맙겠습니다."
우두머리는 대원에게 그렇게 하라는 지시를 하고 물었다.
"고구려 사람이 왜 수국 군복을 입고 여기서 헤매고 있는가?"
양신은 이제야 좀 살 것 같은 데다 동족을 만난 기쁨에 감정이 복받쳐 울음이 터질 것 같았다. 그러나 신상을 밝히긴 주저가 되었다.
우두머리는 양신이 대답을 주저하자 다시 의심을 품었다.
"우물쭈물하는 걸 보니 우릴 속일 궁리를 하는군?"
양신은 망설인 끝에 대답을 했다.
"저는 서부 소속 군관입니다."
"서부 군관이 왜 수국 군복을 입고 있는가?"
"서부 우태님의 명을 받고 수국 내정을 정탐코자 침투를 했습니다."
"그런가? 이젠 수국의 군관이 되었단 말이로군?"
양신은 더 자세한 사정을 더 밝히긴 망설여졌다. 그러나 상대방이 수궁을 할 정도의 대답을 해 줄 필요성에 입을 열었다.
"저는 수국에 가서 군문에 들어가 병사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무예를 지녀서 양현감의 호위 무사로 뽑히고 측근에서 근무했습니다."
"그렇다면 이곳엔 무슨 일로 오게 되었는가?"
"수국에선 지금 도처에서 반란이 번져 나갑니다. 양현감은 반란을 일으킨 뒤 밀서를 동돌궐 칸에게 전할 임무를 제게 부여했습니다."
"그대가 밀서를 지녔다? 무슨 내용인지는 모르는가?"
"제 추측입니다만, 양현감은 반란을 성공시키고자 동돌궐 칸에 원조를 청하는 것 같습니다. 아무튼 간에 고구려에 이로운 일로 생각됩니다."
우두머리도 수국은 각처에서 반란이 일어나고 있는 소문을 들었다. 그중 가장 세력이 큰 자가 양현감이란 자임도 알고 있었다. 때문에 긍정적인 생각으로 양신을 반기는 눈길이 되었다.
"요즘 수국 내부 사정부터 아는 대로 들려주게."
"수국의 내란은 점점 번지고 있습니다. 가장 영향력이 클 양현감은 물론 태원자사 이연도 움직일 기미를 보입니다. 때문에 양광도 회군을 하지 않을 수가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는 판단입니다."
양신의 말에 우두머리를 비롯해 모두들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런데 여러분은 어느 부에 속하며 무슨 일들을 하십니까?"
"나는 북부의 조의로 이름은 막지일세."
막지(寞旨)는 북부 소속 상단(商團)의 대장이었다.
"조의님, 반갑습니다."
"군관의 이름은 어떻게 되나?"
양신은 제대로 밝혀 좋을지 모르겠으나 대답을 할 수밖에 없었다.
"조의님, 저는 서부 소속의 약광 선인입니다."
"아니?! 자네가 서부 소속의 약광 선인이란 말인가?"
막지는 놀라움을 표했지만 양신의 절박한 음성을 흘려냈다.
"조의님, 저는 배가 매우 고픕니다. 먹을 것부터 좀 주십시오."
"약광 선인, 나와 함께 천막 안으로 들어가세."
양신은 막지를 따라 천막 안으로 들어갔다. 막지가 마른 고기와 양젖을 내놓자 양신은 걸신이 들린 자처럼 먹어대기 시작했다.
"꽤나 주린 모양이군! 천천히 먹어야지 체하겠네."
막지는 딱하다는 듯 제지를 했으나 양신이 대답했다.
"저는 며칠간 사막을 헤매며 굶었습니다. 목이 말라 줄을 지경일 때 강이 보여서 쫓아가면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길 몇 번이나 겪었습니다."
"그건 신기루라는 허깨비일세. 사막에선 지형에 따라 석양 무렵에 흔히 나타나는데 초보자는 그것에 홀려서 목숨을 잃는 경우도 많네."
"제가 조의님을 만나지 못했다면 끝내 목숨을 잃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조의님은 전쟁 통에 어떻게 교역에 나설 수가 있으십니까?"
양신의 질문에 막지는 고개를 저었다.
"나는 교역에 나선 게 아닐세. 고구려는 극도의 식량난으로 병사들과 백성들이 굶주림을 겪네. 때문에 그동안 거래를 해 왔던 북방의 유목민들을 찾아다니며 식량을 구걸하는 거나 다름없네. 말린 고기와 유제품 등 먹을 것을 닥치는 대로 얻어내려고 돌아다니는 형편일세."
양신은 이해가 되어 걱정스럽게 물었다.
"유목민들이 무슨 대가도 받지 않고 그냥 내주겠습니까?"
"그럴세. 이젠 철제품도 팔리질 않아 대가를 치를 수가 없네. 나중에 갚겠다고 사정을 하면서 구걸하는 것이나 다름없으나 어찌하겠는가?"
유목민들은 고구려의 사정을 잘 알아서 얼마간 도움을 주었다. 그 이유는 고구려가 수국에 멸망되면 철제품 공급이 끊기게 되었다. 수국이 고구려의 철산지를 손에 넣으면 철제품 공급을 끊을 것은 불을 보듯 뻔했다. 때문에 고구려의 멸망을 원치 않아서 도울 수 있는 한도 내에서 돕는 성의를 보이고 있었다.
"조의님 말씀대로 고구려가 살아남게 된다면 저는 그 공의 절반을 북방 유목민들에게 돌려야 한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럴세. 고구려는 철제품을 팔아야 살 수가 있네. 그런데 이번 전쟁으로 유목민들도 보유량이 늘어나서 거래가 거의 끊긴 상태일세."
막지의 말을 듣고 양신은 자신이 생각하는 바를 말하고 싶었다.
"조의님, 조금만 기다려 보십시오."
"뭘 기다려 보라는 말인가?"
"수국의 내란이 확산될수록 철제품 수요도 따라서 늘게 됩니다."
"수국의 내란이 확산될수록 철제품 수요가 늘어난다?"
양신은 수국의 반란 세력들이 지금 무기를 구입하려고 북방의 유목민들과 접촉을 하고 있는 사정을 알려주었다.
"약광 선인의 말이 사실이라고 해도 우리가 걸기대는 없지 않은가?"
"유목민들은 곧 고구려에 무기 구입을 위한 접촉을 해올 것입니다."
"양광 선인, 그렇게 되면 좋겠지만 우리의 무기가 수국 쪽으로 흘러들면 그쪽 전력을 강화시키는 결과를 빚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있네."
"조의님, 수국의 내란은 이미 크게 번지고 말았습니다. 그건 양광의 힘을 더욱 빼게 만들어 고구려는 유리해지는 결과를 빚게 될 것입니다."
"약광 선인의 말이 맞네. 나는 돌아가서 대인과 상의를 해보겠네."
막지의 대답을 듣고 양신은 비로소 자신의 관심사에 관해서 물었다.
"고구려는 타국과 교역을 할 때 어느 나라를 중시해야 되겠습니까?"
"가장 중요시해야 할 상대는 역시 한족이란 생각을 하네."
"왜 한족을 중요시하게 됩니까?"
"교역은 뭐니 뭐니 해도 인총이 많은 데를 찾아야 는데 그러자면 중원 땅밖에 없네. 고구려는 산물이 부족해서 철제품을 빼면 중원 땅으로 가져가 팔 물화가 별로 없지만 사 와야 하는 물자가 많아서 그럴세."
"조의님. 우리 철제품을 중원 땅에도 팔고 있다는 말씀입니까?"
"물론일세. 우리 철제품의 수요가 가장 많은 데도 중원 땅이고 특히 의 장강 이남에 수요가 많네. 중원에 판매를 다시 모색해야 하네."
"그렇습니까? 그런데 요즘 동돌궐과 교역은 어떻습니까?"
"고구려와 동돌궐은 불가분의 관계일세. 동서 양 돌궐은 서역 쪽 물화를 구해오고 고구려는 그걸 받아 중원을 비롯해 신라, 백제 왜국 등에 넘겨서 이득을 보네. 그처럼 중요한 협조체제가 요즘은 깨어져 버렸네. 그러므로 하루 속이 관계를 개선해야 하는데 쉽지가 않겠네."
"조의님, 당분간 동돌궐과 관계 개선이 힘들다면 여타 유목민들과 협력 관계를 강화시키는 데 힘을 써야 하겠습니다. 여타 유목민들이 무기 구입을 타진해 오면 그럴 적극 활용하는 기회로 삼아야 하겠습니다."
막지는 양신의 궁량이 크다는 생각에 다시 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나는 교역에 오래 종사를 했으나 그런 생각을 못해봤다."
"조의님, 별말씀을 다 하십니다."
"약광 선인은 돌아와서 교역에 나서보면 어떻겠는가?"
"그렇지 않아도 저는 교역에 매우 관심이 큽니다. 앞으로 유목민의 교역에 관해 배우고 싶은데 특별히 유념할 점이라면 무엇이 되겠습니까?"
"유념할 점을 강조한다면 원칙을 지키는 일일세."
"어떤 원칙인지 듣고 싶습니다."
"교역에서 첫째는 거래 상대와 이익을 공평하게 나누는 것일세. 한쪽만 과다한 이익을 추구하는 건 금물일세. 두 번째는 더불어 사는 마음가짐일세. 그 두 가지만 철저히 지키면 끈끈한 유대 관계가 형성되네."
"그 두 가지 원칙을 실천해 나가려면 어떻게 해야 됩니까?"
"양쪽이 다 만족시키는 게 중요하네. 농부가 농사를 짓고 목부가 가축을 기르는 건 이익을 취하려는 게 아니고 단지 살아가는 방편일세. 그러나 장사는 이익을 많이 내는 걸 추구하게 되네. 그러나 너무 이익만 고수하면 장사가 잘 안 되고 지속할 수도 없네. 이익은 적당한 한계를 둬야 만 오랜 지속이 가능할 수가 있는데 그 바탕은 양심일세."
"그렇지만 재물을 축적하는 데는 이익을 많이 내야 좋지 않습니까?"
"재물은 누구나 바라는 바일세. 그런 면에서 때 약광 선인은 고구려와 한족은 어느 쪽이 더 장사를 잘할 걸로 생각을 하는가?"
"저는 한족이 더 잘할 걸로 생각됩니다."
"왜 그렇게 생각을 하는가?"
"저는 수국에서 얼마 살진 않았지만 한족은 이익에 밝은 편이란 말을 들었습니다. 그러므로 교역에서도 고구려보다 더 잘하지 않겠습니까?"
"양쪽은 교역에서도 오랜 경쟁 상대일세. 그러나 한족의 상술이 고구려보다 앞설지는 모르겠으나 거기엔 단점도 있음을 알아야 하네."
"상술이 능한 것에 무슨 단점이 있겠습니까?"
"중원 땅은 인총이 많고 산물이 많아서 자체적으로 장사가 잘 될 여건을 갖추고 있네. 그런 바탕에선 이익을 밝힐수록 재물 축재가 빠를 수가 있네. 그러나 그걸 타국과 교역에서도 적용을 하면 부작용이 생기네."
"어떤 부작용이 생긴단 말씀입니까?"
"되풀이 말하나 이익을 너무 밝히면 거래 상대가 피하게 되고 오랜 지속이 어려워지네. 고구려의 교역은 재물 축적이 아닌 생계 수단으로 하는 걸세. 때문에 거래가 오래 지속되길 바라네. 그러자면 상대방과 신의를 구축하기에 힘을 쓰지 않으면 안 되네. 다시 말해서 몸은 고되지만 마음이 편해야 오래 살 수가 있다는 말처럼 교역도 마찬가지일세."
막지의 말을 듣고 양신은 더 배우고 싶었다.
"돌궐족을 비롯해 유목민과 교역은 어떻게 하는 게 좋습니까?"
"거기도 마찬가지일세. 특히 돌궐족과 우리는 비슷한 점이 많고 서로에게 매우 중요한 상대일세. 그런 점에서 서로는 오랜 교역을 통해서 배우고 아는 게 많은 바탕에서 탄탄한 협력관계를 구축해 왔네. 그런데 양광이 끼어들면서 그게 깨어지고 말았네. 거기다 동돌궐 칸은 어느 쪽이 우방이고 어는 쪽이 적인지도 구별을 못하는 지경에 이르고 말았네. 그러나 동돌궐 칸도 이번 전쟁에서 깨달은 점이 클 것일세. 무엇보다 고구려가 수국의 침공을 막아낸 것은 그의 자존심에 큰 손상을 입혔네."
"조의님, 돌궐족의 중계 교역에 대해서도 알고 싶습니다."
"유목민은 산물이 보잘것없어서 처음부터 남의 물화를 이동시는 거래를 해야만 했었네. 그 점은 고구려도 비슷해서 일찍부터 돌궐족과 함께 교역에 힘을 썼네. 양쪽은 다 같이 동쪽 세상과 서쪽 세상의 물화를 서로 유통시켜서 번영을 누렸는데 지금은 그런 장사를 못하게 되었으므로 피차간에 겪는 어려움이 어떨 것임은 말로 할 필요가 없겠다."
막지는 그런 말을 하고 부연 설명을 덧붙였다.
고구려와 돌궐족은 동서의 물화를 유통시키는 일에 주력해 왔다. 그 때문에 한족, 거란족, 말갈족, 한삼국, 왜국, 남만족 등 광범위한 거래처를 뚫었고 그 결과로 발전을 이룩할 수가 있었다.
양신은 고개를 끄덕이고 다른 질문을 했다.
"요즘 서부대인 자제인 연개소문은 어떻게 지내시는지요?"
"서부대인은 돌아가셨다. 때문에 매우 큰 슬픔에 잠겨 있을 것일세."
"저는 서부대인께서 돌아가신 걸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뿐만이 아닐세. 연개소문님은 건무 저하의 미움을 크게 받고 있는 형편일세. 그 때문에 마음고생 또한 매우 클 것으로 여겨지네."
양신은 마음이 여간 무겁지 아프지가 않았다. 왜냐하면 그렇게 된 원인이 다름 아닌 자신에게 있다는 생각을 하기 때문이었다.
"타계하신 합하께선 어떤 병환을 앓으셨는지는 모르십니까?"
"그 일도 여러 가지 말들이 돌았지만 무슨 병환인지는 모르네."
양신은 눈물을 주르륵 흘러내리는데 막지는 회상조로 말했다.
"을지문덕님의 타계로 고구려 백성들은 더욱 마음을 의지할 데가 없어졌네. 북방의 유목민들조차 고구려 국상으로 계셨던 합하를 큰 긍지로 여겼던 만큼 낙심들이 여간 크지가 않은 분위기를 잘 알고 있네."
양신은 수국의 2차 침공 쪽으로 화제를 돌렸다.
"고구려는 양광의 2차 침공도 잘 버티어 낼 수가 있겠지요?"
"양광은 이번에도 요동성 포위에만 매달리고 있지만 별 걱정은 되지가 않네. 그 자는 뭣 때문에 또 쳐들어 왔는지 모르겠으나 이태에 걸친 침략을 당하는 고구려도 이제 극도로 지친 상태가 되지 않을 수가 없네."
"조금만 더 버텨주면 조국은 위기를 벗어날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돼야만 하는데 우리도 모든 게 한계점에 이르러 걱정일세."
막지도 끝내 비관적인 태도를 보여서 양신은 힘이 될 말을 했다.
"수국은 도처에서 일어나고 있는 반란의 소용돌이가 걷잡을 수 없게 커지고 있습니다. 양광도 진압을 하고자 회군하게 것입니다."
양신의 말에 막지는 고개를 끄덕이고 그만 누워서 쉴 것을 권했다. 그렇지 않아도 졸음이 쏟아지는 양신은 바닥에 눕자마자 잠이 들었다. 이튿날 천막 안으로 아침 햇살이 비쳐들 때 눈을 떴다.
"조의님, 저 때문에 출발을 못하셨군요?"
양신은 미안해 어쩔 줄 모르는데 막지는 미소만 지었다.
"무척 고단했던 모양이라 차마 깨울 수가 없었네. 얼른 조반을 들게. 우린 여기서 헤어져 각자 가던 길을 가야만 하겠네."
"조의님, 카라발가순으로 가는 길을 자세히 알려 주십시오."
"나는 자네가 갈 길을 지도로 그려봤네. 굵은 선은 대상들이 많이 지나다니는 길일세. 그리고 동그라미를 친 곳은 오아시스일세."
"오아시는 어떤 곳입니까?"
"오아시스는 사막에 드문드문 있는데 샘이 솟는 곳일세."
양신은 놀라움을 금치 못해서 또 물었다.
"조의님, 황야인 사막에서 물이 솟는 데가 있다는 말씀입니까?"
"그래서 나무도 자라고 사람이 사는 마을을 이루게 되네."
"사막에 사람이 사는 마을이 있다니요?"
양신은 만리장성을 넘은 뒤로는 마을들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어서 믿기지가 않을 말이었다. 막지는 오아시스에 대한 설명을 해주었다.
"오아시스엔 마을도 있고 대상들이 쉬어는 가는 객줏집도 있네. 거기선 돈만 있으면 숙식을 해결할 수가 있네. 내가 은전을 몇 개 주겠네."
"조의님, 저는 노자 돈을 충분히 지니고 왔습니다."
"그런가? 여긴 사막 속이지만 가장 험한 곳은 벗어난 셈일세. 여기서 북쪽으로 반나절쯤 올라간 뒤 서쪽으로 방향을 틀은 뒤 계속 직진해서 나가면 목적지인 카라발가순에 이를 수가 있게 되네."
"조의님, 저는 지도를 가지고 방향을 잡아 나가 보겠습니다만 오아시스에서 주의를 해야 할 점은 없겠습니까?"
"오아시스의 객줏집은 많은 대상들이 머무는 곳인데 사막을 떠도는 흉포한 도둑 떼도 들어갈 수가 있으니 피해를 입지 않도록 주의를 하게."
"저는 그런 자들을 잘 구분해낼 수가 없으니 걱정입니다."
"그렇지만 오아시스는 대체로 안전한 편일세. 거긴 여러 나라 대상들이 묵는 곳이라 약탈과 살생을 금하는 걸 불문율처럼 지켜지는 곳일세. 다만 밖으로 나가면 사정이 달라지네. 때문에 대상들도 떼거리를 이루고 다니네. 자네처럼 외톨이로 다니는 자를 집적거릴 수도 있어 혹여 봉변을 당할지도 모르므로 그 점을 경계하지 않으면 안 되네."
상단의 대원들은 양신이 끄는 2 필의 말발굽을 천으로 감아주었다. 말들이 사막을 오랫동안 걷을 때 피로감을 덜게 해 주기 위함이었다. 동족과 헤어진 양신은 또다시 눈물이 나왔다.
"조의님과 여러 분들 고맙습니다. 무사히 돌아가십시오."
"약광 선인도 임무 수행을 마치면 그만 고국으로 돌아오게."
양신은 고구려 상단과 작별한 뒤 지도를 보며 길을 재촉했다. 반나절을 북상한 끝에 한 구릉 위로 올라섰다. 지도엔 거기서부터 서쪽으로 방향을 틀게 되었다. 해 질 녘이 가까워지고 전방에 푸른 섬 같은 게 눈에 들어왔다. 그게 오아시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접근해 갔다. 아닌 게 아니라 그곳은 참으로 믿기지 않을 별천지였다. 삭막한 사막 가운데 맑은 연못이 있고 나무들이 자라고 있을 줄은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
집들은 돌로 지었고 공터에선 아이들이 천진난만하게 뛰어놀고 여인들이 왔다 갔다 했다. 울긋불긋한 깃발들을 단 천막들이 쳐져 있고 대상(隊商)의 낙타들이 꿇어앉아 되새김질을 하고 있었다.
양신은 낙타들이 가장 많이 있는 객줏집 앞에서 멈추었다. 한 집에서 고기 굽는지 냄새가 흘러나와서 말들을 매어놓고 안으로 들어갔다. 어둑한 실내엔 수염을 기른 사내들이 많이 들어앉아 있었다.
광대뼈가 솟은 주인인 듯한 자가 양신에게 한어로 물었다.
"묵고 갈 손님이요?"
양신도 한어로 대답했다.
"하루 밤을 묵는데 돈을 얼마나 내야 하오?"
"이곳엔 첨 온 것 같은데 우선 돈을 지니고 있는지 봅시다."
양신은 은전이 담긴 자루를 꺼내 들었다.
"자루를 열어 보이면 내가 적당히 돈을 꺼내겠소."
주인의 말에 양신은 자루를 열어보였다. 그러자 자루 속을 들여다본 뒤 좀 놀라는 기색을 하고 손을 집어넣더니 은전을 한 닢 꺼냈다.
"이 돈이면 며칠 묵을 수가 있겠소."
"나는 하루만 자고 갈 것이므로 남는 돈은 거슬러 주시오."
"여기선 밤마다 투전판이 벌어지니 객도 며칠 쉬어 가게 될 거요."
"나는 갈 길이 바쁜 사람이니 얼른 거슬러 주시오."
그때 털북숭이 사내가 다가들며 한어로 양신에게 말을 걸었다.
"봐하니 한아 같은데 동행은 없는가?"
양신은 자신을 한아(漢兒)로 호칭하는 털북숭이에게 반문했다.
"없소만, 내게 무슨 볼일이 있으시오?"
"그 돈 자루를 보니 흥미가 일어서 그러네."
"댁은 남의 돈 자루에 왜 흥미를 느낀단 말이요?"
"한아도 노름판에 끼어들 것이니 흥미를 느낄 수밖에 더 있겠나?"
"나는 노름을 할 줄 모르오."
양신의 대답에 털북숭이는 돈 자루에 슬그머니 손을 대었다.
"무슨 짓이요? 남의 돈주머니에 손을 대다니?"
"한아, 여길 나서면 이 돈주머니는 누구 차지가 될지 모를 걸세."
털북숭이의 말을 듣고 양신은 그의 팔목을 틀어쥐었다.
"젊은이, 내 팔을 놓지 않으면 그대로 사막으로 쫓겨날 수도 있네."
"오아시스에선 누구나 안전하게 지낼 수가 있다는데 무슨 소리요?"
"그건 사람 나름이지."
털북숭이는 팔을 빼내려고 용을 썼으나 꿈쩍도 할 수가 없었다. 양신의 완력이 더 해지자 아픔을 느끼는 표정이 되었다. 그러다 끝내 움켜쥔 주먹을 풀자 그만 은전들이 바닥에 쏟아져 내렸다.
다른 대상들은 그런 광경을 지켜보기만 했다. 털북숭이는 너무도 팔목이 저렸기 때문에 찡그린 얼굴을 펴지 못했다. 양신은 굳은 표정으로 털북숭이에게 명령하듯 말했다.
"바닥에 흩어진 은전을 자루에 다시 주워 담아 놓으시오."
털북숭이는 기가 죽은 듯 떨어진 은전들을 주워 가죽 주머니에 도로 담아놓았다. 그리고 이마에서 흐르는 진땀을 닦는데 누가 그의 등 뒤로 다가들며 큰 소리로 외쳤다.
"에몬, 소그드인의 명예를 더럽힌 노름꾼이 무슨 추태를 부렸나?"
덩치 큰 사내는 다짜고짜 털북숭이의 얼굴을 주먹으로 후려갈겼다. 털북숭이는 억 소리를 내며 땅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덩치가 큰 사내는 이번엔 양신을 노려보듯 입을 열었다.
"젊은이, 내가 대신 사과하겠소. 그러나 힘자랑이 좀 지나쳤소."
양신은 공연한 객기를 부렸다는 후회가 일었다. 그런데 덩치가 큰 사내는 버티고 선 자세로 양신의 얼굴을 빤히 보았다. 양신도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느낌에 입을 열었다.
"나는 여길 나가겠소."
"젊은이는 왜 여길 나가려고 하는가?"
덩치 큰 사내가 느물대는 음성으로 묻자 양신은 대답했다.
"다른 집으로 가서 묵으려고 하오."
덩치 큰 사내는 느글거리는 웃음을 머금고 강압적인 태도로 나왔다.
"나는 자네와 서로 돈주머니를 걸고 내기를 해보고 싶네."
"돈주머니를 걸고 무슨 내기를 하자는 말이요?"
덩치 큰 사내는 갑자기 껄껄 웃으며 대답했다.
"내 이름은 자발이다. 자네와 팔씨름을 한판 붙고 싶다."
"뭣 때문에 팔씨름을 벌이자는 것이요?"
"제법 완력을 쓰는 모양인데 돈을 걸고 내기를 한번 해 보자."
"나는 돈을 거는 내기를 할 생각은 없소."
"함부로 힘자랑을 했으니 그만한 대가는 의당 치러야 하네."
자발은 점점 강압적인 음성이 되고 이번엔 주인을 불렀다.
"광대뼈 주인, 그대가 와서 심판을 봐주게."
주인은 일방적인 지시를 받고 선뜻 다가들었다. 젊은 혈기의 양신도 어쩔 수가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모든 사람들이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두 사람 주변을 에워쌌다.
덩치 큰 사내는 먼저 탁자 위에 굵은 팔뚝을 세우고 기다리는 자세를 취했다. 양신도 은근히 결기가 솟아 상대의 손을 마주 잡았다. 이내 두 사람 간의 팔씨름이 시작되었다.
자발은 자못 여유가 넘치는 표정으로 굵은 팔뚝에 힘을 넣었다. 양신도 맞서면서 두 개의 팔뚝이 팽팽한 대결로 들어갔다. 양쪽은 서서히 각자 몸들이 굳어들고 요지부동의 상태로 들어갔다.
양신은 별 표정이 없는데 자발은 얼굴이 벌겋게 변해가며 이를 악물듯 기를 쓰는 모습을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은 야장방에서 단련된 양신의 팔뚝은 쇠막대처럼 막강했기 때문이었다.
자발은 끝내 입을 열고 말았다.
"잠시 쉬었다 하자."
양신은 그 말을 듣고 상대방의 손을 놔주었다. 누가 봐도 이미 승패는 끝났다. 그걸 모르지 않는 자발은 계속하다간 지는 꼴을 남들에게 보여주기가 창피해서 그렇게 끝을 내버렸다.
자발은 소그드 대상들의 우두머리 중 하나로 힘께 나 쓰기로 소문이 났다. 무예도 상당해서 누구나 두려움의 대상으로 여기는데 완전히 체면을 구기자 자신의 돈 자루를 양신에게 내밀었다.
"내기를 건 쪽은 나다. 이건 자네 차지가 되었다."
양신은 계속 고개를 젓는데 자발이 털북숭이의 이름을 불렀다.
"에몬, 이리 와봐라."
에몬은 부르는 대로 자발 앞으로 다가들었다.
"에몬, 너는 돈주머니에 손을 넣었으니 얼마쯤 들었는지 알겠지?"
자발의 말에 에몬은 고개만 끄덕였다.
"내 돈주머니에서 두 배쯤 꺼내 이 자에게 넘겨줘라."
에몬은 시키는 대로 고분고분 따랐다. 돈주머니에서 은전 20여 개를 탁상 위에 꺼내놓았다. 배를 내놔야 했지만 자발의 눈치를 보며 그 정도만 꺼내어 양신 쪽으로 밀어놓았다.
"나는 그 돈을 받을 이유가 없소."
"젊은이, 나는 한번 한 말은 거두지 않는 사람이다."
자발은 그렇게 말하고 갑자기 소그드어로 뭐라고 외쳤다. 그러자 대원들이 전부 밖으로 따라 나갔다. 양신은 우르르 밖으로 나가는 그들을 쫓아나가려는데 에몬이 팔을 잡았다.
"소용없소. 젊은이는 돈이나 빨리 거둬 넣도록 하오."
"내 돈이 아닌데 왜 거두라는 말이요?"
광대뼈 주인은 흥미가 진진한 표정으로 에몬을 가리키며 말했다.
"젊은이, 돈은 챙겨 두고 불쌍한 이 자에게 밥이나 한 끼 사구려."
에몬은 부끄러운 듯 입을 열었다.
"나는 어제부터 굶어서 움직일 기운조차 없소. 젊은이의 돈 자루를 보고 나도 모르게 못된 마음을 먹게 되었던 용서 해 주기 바라겠소."
"나도 저녁을 먹으려던 참이요. 함께 먹기로 합시다."
양신은 에몬과 함께 먹기로 하고 2인 분 식사를 시켰다. 그러자 에몬은 자발이 두고 간 은전을 양신의 돈 주머니 곁에 넣어주며 말했다.
"내 이름은 에몬이요. 젊은이 존함이 어찌 되오?"
"내 이름은 양신입니다."
에몬은 갑자기 음성을 낮추듯 말했다.
"양신님, 내 신세가 이 지경이 된 건 실은 저 자 때문이요."
"왜 주인 때문이란 말씀을 하십니까?"
양신의 반문에 에몬은 자신의 신세타령을 늘어놓았다.
에몬은 소그드 대상의 일원으로 가보지 않은 데가 없을 만큼 잘 나갔던 상인이었다. 그러나 오아시스의 객줏집에 벌어지는 투전(鬪牋) 판에 말려들었다가 지닌 돈을 전부 날렸다. 나중엔 상단의 전주(錢主)가 맡긴 돈마저 날려서 고향으로 돌아갈 수가 없게 되었다. 그 뒤론 한 해를 오아시스들을 전전하는 사막의 떠돌이 신세가 되고 말았다.
광대뼈 주인은 음식에 술도 한 자루 곁들여 주었다.
"젊은이가 적선을 하니 나도 술 한 자루쯤은 선심을 쓰겠소."
"고맙습니다."
양신은 에몬과 식사를 하며 대상들에 관한 얘기를 나누었다.
서역인(西域人) 대상들은 주로 낙타에 물화를 싣고 동서를 오고 가며 장사를 했다. 주 대상은 중원 땅인데 황제의 고구려 출정으로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그 이유는 지방의 관료들이 통행세를 배로 늘려서 장사를 해도 남는 게 별로 없었다. 때문에 타개책으로 북방의 새외족이 사는 땅을 도는 새로운 통로를 개척하게 되었다. 에몬도 그 때문에 동돌궐 땅을 자주 거치게 되고 그러다 노름에서 패가망신에 이르게 되었다.
"서역의 대상들은 주로 어떤 물화를 취급합니까?"
양신의 질문에 에몬은 그에 대한 설명을 자세히 해주었다.
대상들은 동쪽의 비단과 서쪽의 보석, 장신구 같은 고가품을 양쪽으로 유통을 시켜 큰 이익을 챙겼다. 상단은 어느 나라건 권력자나 귀족들이 자본만 대거나 직접 운영을 하기도 했다.
에몬을 그런 설명을 한 뒤 갑자기 음성을 죽였다.
"양신님, 오늘 밤에 돈주머니를 잘 간수해야 합니다."
양신은 왜 그러는지 몰라 물었다.
"이 집안에 도둑이라도 있다는 말입니까?"
"솔직히 말하면 이 집의 주인은 도벽이 있는 자요."
양신은 알겠다는 뜻으로 고개만 끄덕였다.
"대상들은 객주에서 잠을 잘 때 보초를 번갈아 세웁니다. 양신님은 오늘 밤 뜬 눈으로 새우지 않으면 돈 주머니를 지킬 수가 없겠습니다."
양신은 그런 말을 하는 에몬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천성이 그리 악하게 보이진 않고 측은해 보였다. 노름을 좋아해 가진 돈을 전부 잃은 것에 반성하는 빛도 보였다.
"에몬 님과 내가 절반씩만 자면서 지키면 어떻겠소?"
"절 믿어 주시면 그렇게 하지요. 양신님은 어디로 가는 길입니까?"
"카라발가순이요."
"그럼 내일 길을 떠난 뒤에도 카라발가순까지 함께 해드리지요."
"왜 그런 제안을 하시오?"
"가는 길에 자발을 또 만날지 모르고 그가 덮치려 들지도 모르겠소."
"날 덮치려고 들면 다시 상대를 해 줄 뿐이요."
양신은 대수롭지 않게 대답하고 에몬을 걱정하는 말을 했다.
"에몬님은 오아시스를 이렇게 떠돌면서 어떻게 살 생각입니까?"
에몬은 한숨을 쉬면서 대답했다.
"얼마간의 밑천만 있으면 등짐장사라도 해서 재기를 하고 싶습니다."
"등짐장사는 밑천을 얼마나 가지면 할 수가 있겠습니까?"
양신의 질문에 에몬은 손으로 돈주머니를 가리키며 대꾸했다.
"양신님이 자발로부터 얻은 돈 정도만 있어도 가능하겠습니다."
"그런데 돈이 생기면 또 투전판에 뛰어들게 되지 않을까요?"
"한번 실수는 병가지상사라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나는 이제 30대 초반인데 마음만 다잡는다면 무슨 일이든 성공해 낼 자신이 있습니다."
양신은 고개를 끄덕이고 제의를 해보기로 했다.
"나는 에몬님과 이렇게 만나게 된 것을 큰 인연으로 여깁니다. 에몬님의 눈빛에서 대상으로 다시 재기하려는 강한 의지를 느끼게 됩니다. 에몬님의 소망이 간절함으로 도움을 드리고 싶어 제안을 할까 합니다."
"양신님은 제게 어떤 제안을 하시렵니까?"
"나는 횡재한 돈을 에몬님의 장사 밑천으로 내드리겠습니다."
"양신님, 그 말씀 정말이십니까?"
"그 대신 에몬님은 카라발가순까지 제 길안내를 해 주시오."
"하겠습니다. 무슨 어려울 게 있겠습니까?"
"카라발가순에 가면 내가 지닌 은전의 절반을 더 드리겠습니다."
에몬은 꿈인지 생시인지 모르겠다는 듯 목소리가 떨려 나왔다.
"양신님, 정말 그렇게 해주시겠습니까?"
"나는 지닌 돈의 절반만 가져도 돌아가는 노자는 넉넉합니다."
양신의 대답에 감격한 에몬은 눈물까지 주르륵 흘러내렸다.
"양신님, 나는 상인으로 신용을 가장 으뜸으로 칩니다. 그렇게 해주신다면 돈은 빌리는 걸로 하겠습니다. 어떻게 해서든 원금에 이자까지 쳐서 꼭 갚겠습니다. 소그드 상인의 말을 한번 믿어보십시오."
"나는 에몬님을 믿고 먼저 잠을 자겠으니 대신 보초를 서주시오."
양신은 말하고 구석진 자리로 가서 몸을 뉘었다. 에몬은 양신 곁으로 다가가서 앉았다. 그때까지 두 사람을 지켜보고 있던 주인은 혀를 내두르며 자기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이튿날 두 사람은 함께 길을 떠났다.
동돌궐의 국도인 카라발가순엔 가한이 항상 고정으로 머물고 있지 않는다. 일 년 내 영역 안을 돌면서 이동하는 백성들을 통제했다. 그런데 시피 가한은 마침 국도에 머물고 있었다.
양신은 카라발가순에 당도하자 에몬에게 은전의 반을 더 주었다.
"양신님, 사시는 곳을 알려주면 나중에 돈을 갚으러 가겠습니다."
"나도 앞으로 교역 상단에 나설 계획입니다. 에몬님이 상단을 다시 꾸리면 언제고 교역 길에서 만나게 되지 않겠습니까? 그때 갚으십시오."
양신은 그런 대답을 남기도 시피 가한이 머무는 곳으로 향했다.
일국의 가한이 머무는 궁전(宮殿)은 맑은 냇물이 흐르는 곁에 목책(木柵)이 넓게 두른 가운데 크고 작은 천막들이 수십 채가 세워져 있었다. 양신은 정문 앞으로 다가들며 파수병들에게 한어로 말했다.
"나는 칸을 만나러 온 사람이요."
파수병들은 그런 말을 하는 양신에게 다짜고짜 가죽 채찍을 휘둘렀다. 양신은 피하려고 했으나 빠르고 절묘한 채찍질에 몇 대를 맞았다.
"너무 무례하지 않소? 나는 칸을 만나러 온 사람이요."
파수병들은 한어를 못 알아듣는지 수국의 군복을 입은 자에게 적개심을 느껴서 그러는지 채찍질만 계속했다. 양신은 계속 당할 수가 없어 밀두도를 빼들고 가죽 채찍을 토막을 내버렸다.
그러자 파수병들은 뒤로 물러섰고 마침 말을 탄 장수 하나가 나타났다. 40대 초반의 장수는 양신을 향해 한어로 물었다.
"그대는 수국의 군관인가?"
"저는 수국 예부상서가 칸에게 보내는 밀서를 지니고 왔습니다."
"밀서를 내놓아라."
양신은 품속에서 밀서를 꺼내 바치고 나서 물었다.
"장수님, 병사들은 왜 절 공격했는지 그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칸의 장막을 향해 먼저 무릎 꿇고 절하는 예의를 갖추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금이라도 큰 장막을 향해서 네 번 절을 올려라."
장수의 말대로 양신은 그쪽을 향해 네 번 절을 했다.
"날 따라 오라!"
양신은 앞장을 선 장수를 따라 목책 안으로 들어갔다. 가한의 거소는 흰 가죽으로 지붕과 벽을 둘러친 장막으로 가장 컸다. 그리고 꼭대기에 새의 깃털을 묶어서 꽂아놓았다.
장수는 다른 장막을 가리키며 양신에게 말했다.
"저 장막에 들어가서 잠시 기다려라."
양신은 시키는 대로 그 장막 안으로 들어갔다. 장수는 좀체 돌아오질 않고 갈증을 몹시 느꼈다. 물을 얻어먹으려고 천막 밖을 내다보았다. 그랬더니 멀지 않은 곳에 냇물이 흐르는 걸 보고 그리로 접근했다.
마침 개울가에선 두 여인이 물을 깄고 있었다. 양신은 다가들며 그녀들에게 한어로 물었다.
"실례합니다. 물을 마시게 그릇을 좀 빌려 주시겠습니까?"
여인들은 그 말에 반색을 하며 한어로 반문했다.
"중원에서 오신 분인가요?"
"예, 그렇습니다."
양신은 한 여인이 내민 그릇을 받아 시냇물을 퍼서 마셨다.
"잘 먹었습니다."
양신이 그릇을 돌려주자 여인은 호기심에 찬 듯 물었다.
"장부께선 중원 땅 어디서 오셨는가요?"
"나는 여양에서 왔습니다."
"그런데 여긴 무슨 일로 왔는가요?"
"칸께 밀서를 전하러 왔습니다."
"누가 보낸 밀서인가요?"
"수국의 예부 상서 양현감입니다."
양신의 대꾸를 듣더니 두 여인은 돌연 안색들이 굳어들었다. 그리고 몸을 홱 돌려 세운 뒤 그 자리를 떠났다. 양신은 이상하게 생각하며 다시 장막으로 돌아가서 장수를 기다렸다. 그런데 얼마 후 한 군관이 10여 명의 병사들을 끌고 들이닥치더니 양신에게 한어로 말했다.
"밖으로 나오라."
양신이 밖으로 나서자 동돌궐 병사들은 그에게 일제히 활을 겨누었다. 그런 가운데 군관은 큰 궤짝을 가리키며 명령했다.
"수국 군관은 궤짝 속으로 들어가라."
양신은 거부할 수가 없어 그 속으로 들어가며 중얼거렸다.
"나는 아직은 죽을 때가 아니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