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싸울아비
남국(南國)의 봄은 빠르게 지나갔다.
날씨가 점점 더워져 갔다. 지물촌 야장들에게 검술을 지도를 맡은 양신은 다갈검법의 기본기부터 가르쳤다. 한편으론 도장의 부사범인 열기(裂起)에겐 따로 특별 지도를 했다.
다갈검법은 강한 체력과 개결한 동작이 요구되었다. 때문에 수련생들은 체력 단련도 병행해서 매일 뒷동산을 몇 차례씩 뛰어오르고 내리길 되풀이 해야만 했다. 개중엔 강훈련에 적응을 못해 보름도 못되어 탈락을 하는 자도 나왔지만 대부분은 열심히 따라왔다.
양신은 자기보다 세살이나 연장인 부사범인 열기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그는 무예 자질이 충분한 데다 배우려는 열의가 대단했고, 게으름을 피우는 수련생들을 잘 이끌어 주는 역할도 했다.
열기는 밤이면 가끔씩 술병을 들고 양신의 숙소를 찾아왔다. 어느 날은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가 불쑥 말을 꺼냈다.
"해론 낭두님은 다갈촌 검술대회에서 2등을 했습니다. 그만하면 좋은 성적인데 서라벌에선 아쉬움과 불만을 갖는 사람들이 많답니다."
열기의 말에 양신이 반문을 했다.
"열기님은 검술실력이 상당해 다갈촌 검술대회에 참가했다면 좋은 성적을 거뒀을 걸로 생각이 됩니다. 그런데 왜 오지 않았습니까?"
열기는 좀 머뭇거리다 입을 떼었다.
"저도 참가하고 싶었지만 사정상 못했습니다."
양신은 말끝을 흐리는 열기에게 또 물었다.
"무슨 사정이 있었는지 말씀해 주실 순 없겠습니까?"
"첫째는 화랑도들 틈에 끼어가는 것에 자존심이 상했고, 둘째는 거수님이 저와 함께 가는 걸 그리 원치를 않는 눈치를 보였기 때문입니다."
양신은 그 말을 듣고 무슨 사정이 있는지는 모르나 구미와 열기는 사이가 그리 좋지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솔직히 말씀을 드리자면 저는 거수님에 대한 불만이 큽니다."
"열기님은 무엇 때문에 그러는지도 말씀해 주실 순 없겠습니까?"
양신의 질문에 열기는 좀 망설이다 대답을 했다.
"지물촌과 왜관은 철정공급 가격을 놓고 갈등을 자주 빚습니다."
"철정 공급 가격을 놓고 왜 갈등을 빚는단 말씀입니까?"
"근래에 와서 왜국은 지물촌에서 사가는 철정과 철제품 가격을 너무 깎으려고 듭니다. 야장들은 제값을 못 받게 되면 생활이 어려워집니다. 그로인해 양측은 언쟁이 많아지고 감정도 좋지가 않습니다."
"열기님, 적정한 가격을 쳐주지 않을 땐 거래를 끊으면 됩니다."
"그렇지만 왜국 상인들은 큰 고객입니다. 우리가 철제품 거래를 일방적으로 끊으면 지물촌도 큰 타격을 받습니다. 때문에 거수님과 왜인 우두머리는 관계가 좋지 않은데 태수님은 그에 대한 중재를 않습니다."
"태수님은 왜 그러실까요?"
"뇌물을 받고 왜인 편만 들어 지물촌의 사정은 이래저래 어렵습니다."
양신은 그날 뜻밖에 놀라운 사정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지물촌의 야장들은 철정이나 철제품을 왜인들과 직접 거래를 할 수가 있고 그에 따른 수익도 챙기는 예외적인 특권을 누린다는 사실이었다.
"열기님, 고구려 야장촌은 철제품을 직접 파는 건 꿈도 못 꿉니다."
양신의 말에 열기는 좀 더 설명을 했다.
"그 점은 신라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만 오직 한 군데 지물촌만 예외가 된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 기원은 신라가 가락국을 멸망시킬 때부터 시작된 일입니다. 즉 지물촌의 야장들은 자치 기구인 임나부를 세울 수 있게 한 특권에서 비롯된 관행입니다. 그게 지금까지 이어진 지물촌 야장들의 특권입니다."
"지물촌이 그런 특권을 누리다니 같은 야장으로 부러움을 느낍니다. 그런데 지물촌과 남가라 왜관 사이의 사정이 나쁜 건 왜 그렀습니까?"
양신의 질문에 열기는 굳어진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왜관의 싸울아비들 때문입니다. 그들은 무뢰배나 다름없는 칼잡이들로 근래엔 행패가 너무 심해져 우리 마을은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열기님, 지물촌이 어떤 피해를 입었기에 그러십니까?"
"왜관의 우두머리는 오만하기 짝이 없는 자인데 부하들인 싸울아비는 검술이 뛰어난 데다 안하무인격으로 굴어서 그렇습니다."
"그 자들이 안하무인으로 굴면 대체 어떤 짓을 하기에 그렇습니까?"
"왜관은 지물촌과 사이가 나빠진 것을 기화로 살상까지 빚었습니다."
"열기님, 살상을 빚기까지 했다면 무슨 이유로 그렇게 되었습니까?"
"그 이유는 거수님이 태수님의 눈치를 너무 볼뿐만 아니라 왜관에도 저자세를 취하는 태도 때문입니다. 그로인해 지난해는 싸울아비들이 우릴 얕보고 큰 불상사를 저지르기에 이르러 끝내 마을 젊은이들 세 명이 목숨을 잃게 되고 말았습니다."
"아니?! 셋이나 목숨을 잃다니 어찌 그런 불행을 당한단 말씀입니까?"
"싸울아비들은 평소 우리 마을 아녀자들에게 흑심을 품고 끼웃거리다 밭에서 일하는 아녀자들에게 몰래 접근해 겁탈을 하려고 들었습니다."
"대체 왜인들의 행패가 그 정도로 심할 수가 있단 말입니까?"
양신이 분개하는 빛을 보이자 열기는 사연을 설명해 주었다.
"왜인들은 여인들에게 납치를 해가려고 했습니다. 그러자 겁에 질린 여인들이 악을 쓰며 거부를 하는 소동이 벌어졌습니다. 그걸 본 마을의 젊은이들이 달려가서 싸울아비들과 충돌을 빚게 되었습니다."
"열기님, 그렇다고 해서 어찌 살상까지 이르게 된단 말씀입니까?"
"우리는 검술실력에 밀렸기 때문에 그렇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는 다수인 우리가 소수인 싸울아비들에게 무참히 참패를 당한 것입니다."
"열기님, 그런 변을 당하고 지물촌은 어떻게 했습니까?"
"분개한 마을 젊은이들은 보복할 것을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거수님은 그랬다간 더 큰 피해를 당하게 될지도 모른다며 말리셨습니다."
"그러면 살상을 저지른 왜인들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 자들은 지금도 아무렇지 않게 거리를 활보하고 다닙니다."
"아니?! 목숨을 셋이나 앗은 자들을 그냥 놔뒀다는 말입니까?"
"제가 거수님에 대한 불만이 큰 이유는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결과는 어찌 되건 복수를 해야 한다는 사람이 많으나 거수님은 듣지 않습니다."
"거수님은 대체 무슨 이유로 그러시는지 모르겠습니다만 관청에선 남의 나라에서 살상을 저지른 왜인들에게 어떤 조치를 취했습니까?"
"남가라 현청은 살인을 저지른 싸울아비들을 일단 체포해서 잡아들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한 달 가량 옥살이를 한 뒤 풀려났습니다."
양신은 그 말을 듣고 너무도 기가 막히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아니?! 살인자들인데 고작 한 달 간의 옥살이를 시키고 끝냈단 말씀입니까? 고구려에서 그런 일이 벌어졌다면 처형을 당할 일입니다."
열기는 끓어오르는 울분을 못 참겠다는 듯 언성이 높아졌다.
"물론입니다. 신라에서도 살인자는 처형을 당하지만 태수님은 그처럼 가벼운 처분에 그쳤습니다. 그로인해 지물촌 사람들은 너무도 분하고 억울해서 모두가 죽을 지경이지만 무슨 항의도 못했습니다."
"태수님은 뭣 때문에 그처럼 가벼운 처벌로 그치셨을까요?"
"태수님은 우리가 싸움에서 먼저 무기를 사용했기 때문이라고 탓하셨습니다. 그러나 먼저 칼을 뽑아 든 쪽은 왜인 싸울아비들이었습니다."
"태수님이 정말로 그런 처분을 내리셨다면 도무지 이해가 안 됩니다."
"우린 태수님께 사실이 그렇지 않음을 여러 번 주장했지만 듣지를 않고 왜인들 편만 들 뿐입니다. 그런데다 거수님 또한 태수님께 적극적인 항의를 않고 관아의 처분만 따르는 태도라 모두 울분을 금치 못합니다."
"태수님은 그런 처분을 내린 데는 무슨 이유가 있지 않겠습니까?"
"왜관 우두머리가 뇌물을 듬뿍 썼다는 소문이 돕니다."
"그러면 거수님은 왜 그러십니까?"
양신의 질문에 열기는 강한 음성으로 불만을 터뜨렸다.
"저는 거수님에 대해선 아무런 말도 하고 싶지가 않습니다."
"열기님, 나는 못 들었으면 몰라도 사정을 알고 나니 여간 분개하지 않습니다. 거수님이 왜 그러시는 이유를 알고 싶습니다."
열기는 좀 망설이다 입을 떼었다.
"거수님은 태수님께 감히 따지고 들 수가 없는 처지가 못 되는 것은 이해가 됩니다. 그에 대해선 제 나름대로 상각을 하게 되는 자가 있으나 말을 하고 싶지가 않습니다. 아무튼 간에 저는 억울하게 죽음을 당한 친구들의 원한을 언제고 풀어주고 말겠다는 각오를 다지고 있습니다."
"열기님, 저도 도울 수만 있다면 돕고 싶은 심경입니다."
"양신님, 그 말씀 정말이십니까? 도와주신다면 우린 여간 큰 용기가 나지 않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왜인들과 재대결을 할 여지는 있습니다."
"열기님, 재대결할 여지가 있다니 그건 또 무슨 뜻입니까?"
"왜관의 우두머리가 우리에게 답변한 말이 있기 때문입니다."
"왜관 우두머리가 어떤 답변을 했기에 그렇습니까?"
"우리가 정히 억울해한다면 재대결을 해줄 용의가 있다고 했습니다."
"그 말에 거수님은 어떤 답변을 하셨습니까?"
"그에 대한 거수님의 태도는 역시 부정적인 반응뿐입니다."
"거수님은 대체 왜 그러신단 말씀입니까?"
"거수님의 대답은 늘 같습니다. 우린 왜인 싸울아비들의 검술 실력을 감당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맞설 실력이 못 되는데 재대결을 해봤자 복수는커녕 또다시 피해만 당할 뿐이란 말씀만 되풀이 하십니다."
"그렇다고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는 건 안 됩니다."
양신의 강한 대답에 열기는 고무가 되듯 말했다.
"거수님은 겉으론 그런 이유를 대시나 실은 꺼리는 점 때문입니다."
"거수님이 꺼리는 점이 있다면 그건 무엇입니까?"
"왜관이 재대결에 붙인 조건이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조건을 붙였기에 그렇습니까?"
"왜관 우두머리인 도꼬마로가 한 제안 때문입니다. 재대결은 왜관 쪽에선 도꼬마로가 당사자인 싸울아비 4명을 거느리고 나서고 지물촌에선 거수님이 똑같이 4명을 거느리고 집단 대결을 벌여보자는 제안입니다."
"열기님, 양쪽이 5명씩이라면 공평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렇지만 거수님은 계속 부정적인 반응만 보이며 응하질 않습니다."
"거수님이 그러시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왜관 우두머리를 상대하는 걸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우리에겐 싸울아비들과 맞설만한 4명을 선발할 수도 없다는 핑계를 댑니다."
"그렇다면 방법이 없겠습니다."
"그래서 제가 왜관에 이런 제안을 해보았습니다. 즉 양측의 대표자는 나서지 않고 각기 5명씩을 선발해 집단으로 붙어보자는 제안입니다."
"열기님의 제안을 받은 왜관 쪽에선 어떤 반응을 보였습니까?"
"왜관은 그런 집단 대결로 승부가 나지 않을 경우엔 도꼬마로와 거수님이 나서 최종 맞대결로 결판을 보자는 답을 해 왔습니다."
"거수님은 그에 대해 어떤 반응을 보이셨습니까?"
"저는 무승부일 땐 거수님과 도꼬마로가 맞붙는 걸 숨겼습니다."
"그렇게 하면 안 되지 않겠습니까?"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성사가 되지 않고 복수는 영영 못하게 됩니다. 이젠 양신님 덕분에 문생들의 실력이 전체적으로 어느 정도는 늘었다는 생각입니다. 그러므로 어떻게든 복수를 하고 말겠다는 일념은 더욱 커졌습니다. 더욱이 양신님은 제 청을 받아들여 특별 검술지도를 받는 자를 네 명 더 늘려주시지 않았습니까?"
"그 때문에 그런 청을 했던 것입니까?"
"그렇습니다. 저는 동지들 4명과 함께 죽기로 싸워서 거수님이 걱정하는 도꼬마로와 맞붙게 되는 일을 없게 만들겠습니다."
"열기님 생각이 그렇다면 생각을 해보겠습니다. 저로선 싸울아비들의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모르나 열기님은 꼭 이겨주시겠습니까?"
"우린 실력에서 좀 밀릴지는 모르나 복수하고 말겠다는 강한 의지와 투지력으로 상대를 하면 어느 정도 승산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열기님의 의지가 그와 같다면 나도 열심히 돕겠습니다."
"양신님이 그처럼 응락을 해주시니 저로선 용기백배로 힘이 솟습니다. 다만 거수님에게 재대결에 관한 말을 꺼내야 하는데 그럴 때 양신님은 곁에서 적극 거들어 주실 수는 없겠습니까? 꼭 부탁을 드립니다."
양신은 열기의 청에 고개만 끄덕이게 되었다. 지물촌의 딱한 사정을 외면할 수가 없고 같은 야장으로써 의분을 느껴서 싸울아비들에게 복수를 꼭 하게 되길 바라는 마음 때문이었다.
열기는 지물촌에선 사실상 2인자 위치에 있는 데다 장차 거수직을 노리는 야심도 품었다. 때문에 되도록 구미를 무능한 자로 몰아야 자신의 위상을 높일 수가 있었다. 그런데다 왜관의 도꼬마로도 구미에게 반감이 큼을 알고 있어 그럴 이용할 속셈이었다. 때문에 자신이 왜관의 싸울아비들에 대한 복수를 하는 것보다 더 좋은 일은 없었다. 그런데 마침 양신이 지물촌에 있게 되었다. 그의 도움을 받아 지물촌 사람들의 원한을 풀어주면 크게 지지를 받을 수가 있으므로 적극 앞장을 서기로 했다.
양신은 남가라 사정을 잘 모르는 터였다. 그러나 순수한 마음으로 지물촌을 돕고 싶었다. 다만 그렇게 하는 게 나중에 자신에게 어떤 영향을 끼치게 될 줄은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단오절(端午節)을 맞았다.
예년 같았으면 지물촌 남정네들은 씨름판을 벌이고 여인들은 창포로 머리를 감는 날이었다. 그러나 금년은 양신에게 검술지도를 받은 수련생들의 기량을 펼쳐 보일 행사를 갖기로 했다.
아침부터 도장엔 마을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그동안 양신의 지도 아래 수련생들이 익힌 다갈검법을 기본기부터 펼쳤다. 일사 분란한 집단 동작을 보는 마을 사람들은 환호와 박수를 보냈다.
수련생들이 기본기를 끝내자 이번엔 열기를 비롯한 5명의 특별 수련생들이 나섰다. 특별 수련생들은 양신과 직접 대련을 펼쳤는데 실전을 방불케 할 박진감이 흘러넘쳐 관전자들은 손에 땀을 쥐었다.
관전자들은 검술 시연이 모두 끝났으나 자리에서 일어설 줄을 몰라 했다. 모두는 수련생들은 검술 기량이 괄목할 만큼 향상된 것을 보고 기뻐하며 입을 모아 양신의 노고를 치하했다.
저녁 때 마을에선 장만한 음식과 술을 내어 자축연을 벌였다. 마을 사람들은 술을 마시며 검술에 관한 얘기로 꽃을 피웠다. 그런 가운데 열기가 큰 소리로 입을 열었다.
"오늘은 여러 분께 가슴 아픈 말씀을 드려야만 하겠습니다."
사람들의 시선이 열기에게 쏠렸다.
"오늘같이 좋은 날 이런 말을 꺼내긴 매우 송구스럽습니다. 그러나 이 자리에 없는 공이, 경쇄, 석두 세 친구를 생각하면 가만히 있을 수가 없습니다. 세 친구들이 왜관의 싸울아비들에게 무참히 죽음을 당한 지 1년이 되었습니다. 원통한 세 명의 혼령들은 지금 구천을 울면서 떠돌고 있을 것인데 우린 그런 원혼들을 달래 줄 길이 없습니다. 우린 그처럼 큰 억울함을 당하고도 어제까지 복수를 하지 못해야 한단 말입니까?"
좌중은 숙연해지고 열기는 구미를 향해 입을 열었다.
"거수님, 이젠 도꼬마로의 제안을 받아들일 때가 되었습니다."
사람들의 시선은 구미 쪽으로 쏠렸고 사람들은 한 마디씩 했다.
"우리가 응징할 힘이 없다고 어제까지 그냥 내버려 둘 순 없소."
"이번 검술 시범을 보고 나니 한번 맞서 볼만하다는 생각이요."
"암, 지금까지 설욕할 염도 못 먹은 게 부끄럽기 짝이 없소."
"옳소, 우린 싸울아비들에게 복수를 해야 하오."
그때부터 좌중은 중구난방 시끄러워지고 열기는 더 부추겼다.
"여러분들은 낮에 펼친 검술 시연을 보셨듯이 저는 한번 해볼만 하다는 판단입니다. 양신님에게 특별 지도를 받은 다섯 명은 목숨을 걸고 싸울아비와 붙어볼 의욕에 차 있음을 자신 있게 말씀을 드립니다."
열기의 말에 사람들은 호응을 했다.
"암, 오늘 본 실력이면 당당히 겨룰 만하고말고!"
"당장, 싸울아비들에게 혼찌검을 안겨 줘야 해!"
"다시는 행패를 부리지 못하게 단단히 손을 봐줍시다."
여러 사람이 울분에 찬 말들을 터뜨리자 열기는 구미에게 물었다.
"거수님은 모두의 마음이 저와 같은데 어찌 하시렵니까?"
구미는 한숨부터 쉬었다.
"열기, 낸들 왜 분노하지 않을 수가 있겠나? 나도 말할 수 없는 고통의 나날을 보내고 있네. 허지만 특별 지도를 받은 몇 명은 실력이 향상된 건 사실이지만 아직도 싸울아비들과 맞서긴 어렵다는 판단일세."
열기는 반발하듯 외쳤다.
"거수님, 왜 자꾸만 그런 말씀만 하십니까?"
"열기, 자네를 빼면 나머지는 모두 무리라는 생각이라 그러네."
구미의 대답에 열기는 강하게 반박했다.
"거수님의 노파심은 잘 압니다만 젊은이들의 기를 너무 죽이십니다."
"열기, 그 심경은 이해를 하나 감정만 앞세우다간 또 불상사만 빚네."
구미가 달래려고 들었지만 열기는 굽히질 않았다.
"거수님, 그 사건 이후로도 왜관은 달라진 게 없습니다. 반성은커녕 여전히 뻔뻔한 태도만 보이고 있습니다. 얼마 전에도 들에서 일하는 부녀자를 넘보고 희롱하는 짓거리는 여전합니다. 심지어 어떤 자는 우리 마을 처녀에게 장가를 들겠다는 청혼까지 했답니다. 그건 우릴 만만히 보고 하는 짓거리인데 그걸 언제까지 두고만 보실 겁니까?"
좌중은 그 말에 또 다시 와글대었다.
"맞소. 왜인들을 응징하지 않으면 영 버릇을 못 고쳐놓소."
"거수님이 결정을 내리시면 우린 싸울 각오가 되어 있소!"
"왜관 편만 드는 태수님의 눈치는 그만 보고 우리가 해결합시다."
점점 울분에 찬 사람들은 점점 더 격한 말들만 쏟아냈다. 그에 힘입듯 열기는 사람들의 감정에 더욱 불 지르려고 들었다.
"백성들의 억울함을 돌보지 않는 태수님을 우린 믿을 수가 없습니다."
그 말에 여러 사람들이 다투어 태수에 대한 감정을 폭발시켰다.
"왜국인만 감싸 주는 관장은 우리에겐 아무짝에도 소용이 없습니다."
"거수님은 막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십니다. 스스로 해결합시다."
구미는 참다못해 모두를 향해 호통을 치고 말았다.
"조용들 하시오!"
그런 뒤 한동안 열기를 노려보다가 사람들에게 시선을 돌렸다. 열기는 여러 가지 어려운 일이 생길 때마다 앞장을 서 해결하려는 태도를 보였다. 그러나 그러는 속셈이 다른데 있음을 구미도 모르지 않았다. 책임감 때문에 매사를 신중하게 처리해야만 하는 자신을 용기와 결단력이 없어 그러는 걸로 비춰지게 만들려고 했다. 때문에 매사에 설치는 태도를 보이는 열기는 큰 골칫거리였다. 앞으론 더더욱 자신이 하는 일마다 사사건건 트집을 잡아서 사람들로부터 환심을 사려고 들 것이었다.
‘놈은 거수 자리를 넘보는 흑심을 깔고 하는 것이다!’
그런 사정을 모르는 양신은 중재를 하고자 입을 열었다.
"거수님, 제가 보기에도 왜관에 대한 마을 사람들의 원한은 너무도 크다는 생각입니다. 더욱이 태수님이 왜관만 감싸고도는 태도를 보이신다면 그건 더 큰 문제가 아닐 수가 없다는 생각도 듭니다."
양신의 말에 사람들은 또다시 불만들을 터뜨렸다. 조그만 충동에도 집단 심리는 심한 요동을 치게 만들게 되었다. 이젠 너도나도 태수를 규탄하는 말들을 봇물처럼 쏟아냈다.
"태수님은 왜관으로부터 뇌물을 챙기는 데만 혈안이요!"
"우리는 왜관만 감싸는 태수의 지시를 따를 필요가 없소."
구미는 그런 분위기를 누르려고 목청을 더 높였다.
"쓸데없는 소리는 그만들 해라!"
그 말에 좌중이 조용해졌고 구미는 음성을 누그러뜨렸다.
"모두의 원념이 그렇게 큰 것을 낸들 왜 모르겠는가? 모두의 뜻이 정히 그렇다면 나로서도 다시 생각을 해볼 수밖에 없겠다."
구미는 그런 말을 던지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열기는 날 따라오라. 양신님도 함께 가시지요."
세 사람은 구미의 집으로 가서 마주 앉았다.
"열기, 갑자기 그런 말을 꺼낸 이유가 뭔가? 자네가 싸울아비와 재대결을 추진하는 것은 알고 있으나 나로선 신중을 기할 책임이 있다."
"거수님은 제가 갑자기 말을 꺼냈다고 하시지만 그동안에 몇 번이나 건의를 드렸습니까? 이제는 거수님도 용단을 내리실 때가 되셨습니다."
그런 대답을 듣고 열기는 사뭇 도전적으로 나섰다.
"열기, 자네는 날 용기가 없는 사람으로만 몰고 있으나 또 무슨 불상사를 빚게 되면 그 책임을 자네가 질 것인가? 자넨 태수님이 조용히 넘어가길 바라시는 걸 모르는가? 내가 태수님의 뜻을 거역하고 독단적인 결정을 내릴 경우 그 이후에 일어날 사태와 책임을 자네가 지겠나?"
"거수님은 모든 걸 태수님의 탓으로만 돌리지 마십시오. 태수님의 뜻보다 마을 사람들의 의사가 더 중요합니다. 게다가 도꼬마로는 우리의 도전을 받아들이겠다는 약속을 했지 않습니까? 그렇게 되면 태수님도 어떤 결정을 내리시지 않을 수가 없는데 왜 주저만 하십니까? 이 자리에 앉아 계신 양신님도 가만히 있으면 안 된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열기가 거들어 달라는 투로 말을 해서 양신은 좀 난처했다.
"거수님, 제가 끼어들 자리가 아님은 압니다만 사정을 알고 나니 분통이 터집니다. 제 심경이 이럴진대 야장들의 마음은 오죽할까 싶습니다."
구미는 양신이 더 이상 말을 못하게 손을 내저으며 입을 열었다.
"양신님은 깊은 사정을 모르는 분입니다. 이런저런 사정을 전부 다 설명을 할 수는 없고 한 마디로 말해서 왜관과 맞서는 건 안 됩니다."
양신은 계속 대결을 꺼리는 태도만 보이는 구미에게 물었다.
"저도 태수님이 왜인들에게 너무 관대하시다고 생각됩니다. 그렇다면 거수님이 직접 서라벌 조정에 호소를 해보는 방법은 없겠습니까?"
"전들 왜 그런 생각을 못했겠습니까? 그러나 서라벌 조정도 왜국과 관계가 악화되는 걸 꺼려해서 그냥 덮으려는 눈치입니다."
구미는 밝히고 싶지 않은 말까지 했음에도 열기가 또 반박했다.
"거수님은 이것도 저것도 안 될 사정만 자꾸 쳐드십니다. 그러시면 마을 사람들에겐 다시 생각해보겠단 말씀은 왜 하셨습니까? 방금 전에 한 말씀을 다시 없던 일로 하려고 하시면 마을 사람들이 따르겠습니까?"
구미도 이젠 대답을 못하고 양신이 대신 입을 열었다.
"거수님, 저는 왜인들의 검술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는 모르나 특별 문생들의 실력이 싸울아비들에게 크게 못 미칠 걸로 생각되진 않습니다."
"양신님은 모르시는 점이 많아서 그런 말씀을 하시는 겁니다."
구미의 대답에 양신이 불쑥 제안을 했다,
"거수님, 열기님을 대표로 하는 집단 대결은 어떻겠습니까?"
그 질문에 구미는 대꾸도 않는데 열기가 거들었다.
"거수님, 저는 그렇게 할 용의가 있습니다."
구미는 자존심이 상했지만 미간을 좁히며 생각에 잠겼다.
왜관의 대표인 도꼬마로(德摩呂)는 자신이 왜국의 첫 번째 검객임을 자처했다. 그러나 구미는 왜국의 사정을 잘 아는 터라 열 손가락 안에 들 정도라고 폄하는 말했다. 그것으로 두 사람의 관계가 나빠지게 되었다. 그리고 도꼬마로는 그때부터 지물촌에서 구입하는 철제품 값을 번번이 깎으려고 들었다. 뿐더러 부하들이 지물촌과 벌이는 충돌을 막으려 하지 않고 도리어 조장하는 태도를 보였다.
도꼬마로는 구미에게 검술 대결을 벌이자는 제안도 했다. 그러나 구미는 자신이 없어 응락을 하지 않았다. 그걸 아는 열기는 자신이 대신 나서겠다고 했다. 그러나 열기의 뜻대로 해줄 경우 그 파장은 만만치가 않아서 마을의 대표 위치에도 금이 가고 궁지에 몰리게 될 수도 있었다.
구미는 자신의 검술 실력이 도꼬마로에겐 현격히 못 미침을 잘 알고 있었다. 그걸 아는 도꼬마로는 코를 납작하게 눌러줄 속셈이었다. 그럼에도 열기는 도꼬마로의 계책에 놀아나고 있어 내심 불안하고 미워할 할 수밖에 없었다. 또 거수 자리를 노리는 열기는 그 사이에 끼어들었다. 그렇지만 자신도 그걸 더는 막을 수가 없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거수님, 오늘은 이 자리에서 가부 결정지어 주십시오."
열기가 또 압박을 가하자 구미는 내심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나도 특별 수련생들의 실력이 크게 늘어 고무가 되나 아직은 싸울아비들과 대결은 지나친 욕심이 아닐까 하는 노파심을 떨칠 수가 없네."
"거수님, 저는 욕심보다 꼭 하지 않으면 안 될 의무감이 큽니다."
구미는 열기가 강한 음성으로 대꾸하자 내심 결정을 내렸다. 여론을 등에 업고 왜인과 대결하려는 열기를 끝까지 막았다간 자신의 체면만 손상될 일이므로 못 이기는 체 대답을 했다.
"열기, 자네는 어떤 대결을 하겠다는 것인지 들어보고 싶다."
열기는 구미의 반허락이 떨어지자 조금은 주저하듯 입을 열었다.
"거수님이 허용을 해주신다면 저는 그저 힘껏 싸워볼 뿐입니다. 다만 양신님에게도 부탁을 드리고 싶을 말씀이 있습니다."
"열기님은 내게 어떤 부탁을 하렵니까?"
양신은 의아히 반문하고 열기를 바라보았다.
"양신님도 대결에 나서 주셨으면 합니다."
열기는 고구려인이 나설 자리가 아님을 알지만 자신이 집단 대결에서 져야 할 위험부담이 너무 크게 느껴져서 그런 말을 하게 되었다.
"열기님, 저야 돕고는 싶지만 직접 나설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양신의 반문에 구미는 단호하게 말했다.
"양신님이 나선다는 것은 있을 수도 없는 일이요!"
열기는 실망하는 표정으로 다시 입을 열었다.
"거수님, 그래도 한 번 더 생각을 해주실 수는 없겠습니까?"
구미는 꾸짖듯 대꾸했다.
"나는 한번 내린 결정을 바꿀 수는 없다."
열기는 그 대답에 고개를 무겁게 끄덕이고 말았다.
휘영청 밝은 달이 떠 있었다.
저녁나절에 잠시 내린 소나기로 대지는 열기가 한결 식었다. 백여 명의 지물촌 야장들은 무리를 지어 마을을 떠났다. 달빛에 젖은 밤길은 여름 특유의 무거움이 깔려 있었다.
야장들은 반식경도 못 되어 남가라에 당도했다. 그리고 꽤나 넓은 왜관의 앞마당으로 밀려들었다. 마당 가운데로 들어선 야장들은 긴장감에 사로잡혀 기침소리조차 내지를 못했다.
구미는 크게 심호흡을 하고 큰 소리로 외쳤다.
"나는 지물촌의 구미 거수다. 도꼬마로를 만나러 왔다."
쥐죽은 듯 고요하기만 한 왜관 안쪽에선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야장들은 스산함 속에 두려움이 일었다. 구미가 다시금 입을 열려고 하는데 둔탁한 소리와 함께 대문이 열렸다.
야장들은 뻥 뚫린 대문 안의 어두운 공간을 지켜보았다. 어둠 속에선 아무런 움직임이 보이지 않았다. 한참을 숨을 죽이고 있는데 무장을 한 싸울아비들이 꾸역꾸역 밖으로 나왔다.
대문을 나선 싸울아비들은 50여 명 가량 되었다. 질서정연하게 움직인 그들은 대문의 양켠 담을 따라 도열해 섰다. 그런 뒤 한참만에야 도꼬마로가 나왔다. 큰 키에 깡마른 체구가 날렵해 보였다.
도꼬마로는 대문 앞에서 일단 버티고 섰다. 그리고 몰려든 야장들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 고개를 치켜들어 달을 올려다봤다. 그러다가 서서히 고개를 내린 뒤 야장들을 내려다보았다.
"가여운 대장장이들, 겁을 잔뜩 집어 먹고 있구먼!"
야장들은 도꼬마로가 툭 던진 말에 공연히 주눅들이 들었다. 도꼬마루는 이번엔 구미에게 눈을 돌려 무슨 말을 하려다가 곁에 선 낯선 자를 보고 어딘지 만만치 않을 기상을 느꼈다.
구미는 승산이 없는 대결이라 자신이 그만 무모한 일에 말려든 게 아닐까 후회가 일었다. 싸울아비들과 맞설 실력이 못 됨에도 열기에게 떠밀리듯 결단을 내렸다는 후회가 일었다.
도꼬마로는 낯선 자를 계속 보며 심상치가 않다는 느낌이 들었다. 양신도 자신을 뚫어져라 바라보는 상대의 눈길을 의식하고 있었다. 섬뜩하리 만치 강한 시선이라 눈꺼풀이 조금 떨렸다.
"대체 저 자는 누구일까?"
도꼬마로는 생각에 잠겼다. 지물촌 야장들의 얼굴을 대강 알고 있는데 처음 보는 얼굴이기 때문이다. 이번엔 구미에게 시선을 돌리고 나서 큰 소리로 거만하게 물었다.
"지물촌 야장들은 무슨 일로 한 밤중에 떼를 지어 몰려왔는가?"
구미는 좀 켕기는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도꼬마로, 그대가 한 제안을 오늘은 받아들이려고 왔다."
"구미, 내가 뭔 제안을 했다고 곤히 잠들 시각에 이 소란들인가?"
도꼬마로는 대답하며 입가에 흐린 미소를 머금었다. 구미는 그 미소가 자신을 깔보는 것으로 느껴져 분심에 찬 음성이 되었다.
"도꼬마로, 잘 알면서 왜 딴 소리를 하는가?"
"내가 무슨 딴 소리를 한다는 말인가?"
"도꼬마로, 무뢰배 부하들이 저지른 짓을 벌써 잊었단 말인가?"
"구미 거수, 그 일은 그만 쳐드는 게 좋지 않겠나?"
"뻔뻔스럽군!"
구미가 내뱉은 대답에 도꼬마로는 이죽대었다.
"아무튼 간에 제정신들이 아니게 달려 온 모양이나 대체 어찌하겠다는 것인가? 능력도 없이 시비나 걸면 얻을 게 뭐가 있겠는가? 공연히 소란들만 피우지 말고 조용히 돌아가는 게 신상에 이롭지 않겠나?"
"우린 살인마들에게 복수를 하러 왔다."
구미의 말에 도꼬마로는 사뭇 음성을 내리깔았다.
"구미, 과연 복수를 할 수가 있다고 생각을 하는가?"
"도꼬마로, 길고 짧은 건 대봐야 안다."
"구미 거수, 아무래도 오늘은 뭘 잘못 먹은 게 아닐까? 이런 소란을 피우는 걸 태수님이 아시는 날엔 무슨 혼찌검을 당하려고 이러나?"
도꼬마로가 부아를 긁자 구미는 언성이 더 높아졌다.
"도꼬마로, 혼찌검은 너희들이 먼저 당하게 생겼다!"
구미가 물러설 기색을 보이지 않자 도꼬마로는 태도를 좀 눅였다.
"구미 거수, 드디어 무슨 작심을 한 모양인가? 그러나 내 말을 잘 듣는 게 좋겠네. 그대는 이미 결말이 난 사건을 가지고 또 왈가불가를 해서 얻을 게 뭐가 있겠는가? 냉정히 돌이켜 생각해 보면 싸움을 건 쪽도 야장들이요 칼을 먼저 휘두른 쪽도 야장들이지 않는가? 구미 거수는 내가 타이를 때 순순히 돌아간다면 오늘의 일은 없던 걸로 하겠네."
"도꼬마로, 말 같지 않은 소리는 작작 해라. 오늘은 우리 손으로 살인자들에게 꼭 대가를 치러 주고 말겠다!"
"구미 거수, 내 부하들은 신라 국법에 의해 이미 옥살이를 치르고 풀려났지 않은가? 그 일을 가지고 자꾸만 트집을 잡는 건 태수님의 처분을 무시하는 처사가 되는 것임을 모라서 그러는가?"
도꼬마로의 타이르는 듯한 말투는 구미의 부아를 더욱 긁었다.
"도꼬마로, 쓸데없는 소리는 작작 해라. 나는 살인자들에게 그에 합당할 죄 값을 치르게 해주려고 왔다. 얼른 그 자들을 모두 내세워라."
"구미 거수, 기세등등해 한다만 능력이 안 되면 헛되이 목숨만 잃지 않았는가? 다시 말을 하겠다. 만약에 또 불상사를 빚게 되는 날엔 그 책임은 그대가 져야 한다. 그러니 감정을 삭이고 잘 생각하기 바란다."
"도꼬마로, 살인자들이나 내놔라!"
구미는 겉으론 강경한 태도를 취했지만 속은 달랐다. 승산이 없는 싸움이라 그대로 물러가고 싶기도 했다. 그러나 차제에 나대기만 하는 열기의 콧대를 눌러버릴 기회로 삼아야 했다.
"도꼬마로, 흰소리만 치지 말고 살인자들이나 빨리 내놓아라."
열기도 거들었다.
"도꼬마로, 약속을 이행하면 되지 않겠소?"
도꼬마로도 그 말엔 참을 수가 없다는 듯 호통을 쳤다.
"이 버릇없는 조무래기들아! 입들을 닥치지 못할까?"
"도꼬마로, 누구에게 그 더러운 입을 놀리고 있는가?"
구미가 지지 않고 맞서자 도꼬마로에게서 일갈이 터져나왔다.
"이 쥐새끼 같은 놈을! 오늘은 너희들을 전부 죽여 버리겠다."
야장들도 도꼬마로의 욕설에 욕설로 맞섰다. 그런 분위기는 도꼬마로로 하여금 잠시 주춤하게 만들었다. 또다시 충돌을 벌여서 좋을 게 없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그러나 구미가 전에 없이 기세가 등등해진 이유가 혹시 낯선 자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구미 거수, 그대가 그처럼 원한다면 소원을 못 들어 줄 것도 없겠다. 좋다, 이번엔 어떤 대결 방식을 취할 것인지 묻겠다."
"도꼬마로, 양쪽이 다섯 명씩 내세워 겨루길 제안하지 않았는가?"
"집단 대결을 하자고? 나는 구미 거수와 단독으로 겨루고 싶은데."
"도꼬마로, 잔소린 그만하고 빨리 다섯 명을 내세워라."
구미는 선수를 치듯 열기를 위시해 5명을 호명했다. 도꼬마로도 날카로운 음성으로 5명을 호명했다. 호명대로 양쪽에서 선발된 자들은 마당 가운데로 나가서 마주 섰다.
양쪽에서 선발된 10명은 마주 서자마자 곧바로 대결 태세를 취했다. 도꼬마로는 지물촌 대표들 중에 낯선 자가 낄 것으로 봤다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구미가 먼저 한 손을 높이 쳐들었다.
"싸워라!"
도꼬마로도 명령을 내렸다.
"개시!"
양쪽은 일제히 기합성을 지르며 맞붙었다. 처음엔 마주 선 대로 1대 1로 붙었다. 그러나 얼마 시간이 흐르지 않아 혼전 양상으로 바뀌고 어지럽게 휘돌아 치는 가운데 관전자들은 각자 자기편을 응원했다.
"지물촌 이겨라."
"왜관 이겨라!"
양쪽의 우열은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했다. 열기를 제외한 야장들은 전원이 수세로 몰린 형편으로 변했다. 반면 왜인들의 공격은 점점 거세져 야장들은 방어를 하기에 급급해 했다.
싸울아비들은 처음부터 체력을 안배하며 싸웠지만 야장들은 있는 힘을 다 쏟아 부어야 했다. 모두는 다갈검법을 익힌 지가 얼마 안 되어 실전에 적용을 하기엔 무리라 고전을 면치 못했다.
야장들은 이슬비에 옷이 젖듯 몸에 상처들이 늘어났다. 싸울아비들이 공격의 고삐를 죄어갈수록 힘겹게 맞서던 야장들 중 한 명이 그예 피를 흘리면서 땅바닥에 쓰러져 버렸다.
관전하는 야장들은 점점 수세로 몰리는 동료들이 안타까웠다. 낙담 속에 걱정이 커지고 응원도 점점 삭으러들었다. 양신도 고전을 면치 못하는 야장들이 앞으로 얼마나 더 버틸지 의문이었다.
대결은 열기가 혼자서 거의 감당을 하다시피 했다. 그가 없었다면 야장들은 진작 무너지고 말았을 일인데 그마저 지쳐갔다. 양신은 안절부절을 못하면서 몇 번이나 뛰쳐나갈 뻔했다.
반면 도꼬마로는 팔짱을 낀 채 느긋한 표정으로 관전을 했다. 그러면서 혼자서 줄기찬 공방을 펼치는 열기를 주목하고 있었다. 다른 야장들도 검술 실력이 상당해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물촌과 왜국은 다 같이 비슷한 남방검법을 썼다. 그런데 야장들이 쓰는 것은 북방검법이었다. 도꼬마로는 혹시 낯 선자가 검술 지도를 한 게 아닐까 싶어 더욱 주목하게 되었다.
싸울아비들은 처음에 야장들의 검술 실력이 별거 아닐 걸로 알았다가 검법이 달라진 데다 상당히 강해서 당황했다. 특히 처음 접하는 검법을 마구 휘두르는 열기 앞에선 주춤거리게 될 때가 많았다.
그러나 관전하는 야장들은 점점 조용해져 갔다. 자기편의 열세가 짙어지자 한숨이 나오고 고개를 젓게 되었다. 고군분투로 독주하던 열기마저 부상을 입고 몸에서 피를 흘려 곧 쓰러질 것 같았다.
반면 싸울아비들의 눈초리는 점점 살기가 등등해졌다. 완전한 승기를 잡았다는 판단인지 일방적으로 밀어붙였고, 그럴수록 야장들의 몸은 만신창이가 되어서 방어조차 하기가 힘든 지경이었다.
양신은 위태한 상황을 바라보다 못해 도저히 그대로 있을 수가 없었다. 돌이킬 수 없는 사태에 처하기 전에 무슨 조치를 취해야 하겠다는 생각마저 들어 자기도 모르게 외쳤다.
"열기님, 이제부턴 내가 맡겠으니 부상자를 데리고 물러나시오."
양신이 뛰어든 돌연한 사태 앞에 싸움은 일시 중단되었다.
열기도 더는 버틸 수가 없었던지 동료들과 함께 순순히 뒤로 물러섰다. 싸울아비들은 난데없이 뛰어든 양신을 어리둥절해서 바라보다가 한 명이 험악한 눈초리로 외쳤다.
"넌, 웬 놈이냐? 우릴 혼자서 상대하겠다는 것이냐?"
"그렇다."
양신의 대꾸에 싸울아비들은 코웃음을 쳤다.
"가소롭군!"
아연할 표정으로 바뀐 도꼬마로는 양신에게 눈길을 못 떼었다. 원칙적으론 안 될 일이나 이의를 제기를 못했다. 일단은 지켜보자는 생각과 낯선 자의 검술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을 알고 싶었다. 때문에 자길 돌아보는 부하들에게 고개만 끄덕여 승낙을 표시했다.
양신도 다급한 마음에 뛰쳐나왔지만 긴장이 되었다. 혼자서 5명을 상대하긴 무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칼자루를 이마 높이로 서서히 세웠지만 몸은 잔뜩 굳어들었다.
싸울아비들도 도꼬마로가 내린 무언의 지시에 따라 칼들을 고추 세웠으나 전과 같은 태도들이 아니었다. 지금까진 거침없는 공격 일변도로 기세를 부렸건만 선뜻 공격에 나서려는 자가 없었다.
양신은 마음의 안정을 취하고자 깊은 호흡을 하고 나서 달빛이 만든 자신의 그림자를 내려다보듯 눈길을 떨궜다. 왜인들은 땅바닥만 내려다보는 낯선 자의 태도가 어딘지 마음에 걸려 두려움마저 일었다. 그때 도꼬마로가 돌연 입을 열었다.
"싸우지 않고 뭣들 하는가?"
우두머리의 호통에 5명은 놀라듯 칼들을 번쩍 치켜들었다. 그러나 교교한 분위기 속에서 싸울아비들은 더는 움직일 기색이 없고, 모두는 미동도 않고 낯선 자에게 까닭 모를 속박을 당하는 것 같았다.
도꼬마로도 낯선 자의 자세를 유심히 보고 있었다. 낯선 자가 자신의 등 뒤를 크게 경계함을 알 수가 있었다. 그런데 그걸 모르는 부하 2명이 낯선 자의 등 뒤로 돌자 칼끝이 가볍게 흔들렸다.
양신을 5명의 싸울아비들에게 완전히 둘러싸인 형세가 되었다. 싸울아비들은 서로 눈짓을 나누고 일제히 덮쳐들었다. 그 순간 양신은 전광석화로 칼을 휘둘렀고 등 뒤쪽의 2명은 땅바닥에 쓰러졌다.
도꼬마로는 혀를 차고 말았다. 부하 2명이 낯선 자의 등 뒤로 돌때 아차 싶어‘안 돼!’하는 소릴 지를 뻔했다. 그러나 이미 때는 늦고 나머지 3명은 혼비백산해서 뒤로 물러섰다.
무사한 3명은 계속 뒷걸음질을 치다가 멈추었다. 방금 전 동료 2명이 어떻게 당했는지 알 수가 없고 그저 간담이 써늘해진 채 넋이 나간 사람들처럼 서로가 멍청한 시선을 나누었다.
그건 관전자들도 마찬가지였다. 어느 쪽이든 두 눈을 멀뚱히 뜨고 지켜보았건만 도무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 너무도 찰나적으로 일어나서 큰 충격에 빠진 채 어안이 벙벙한 표정들이었다.
그때 쓰러졌던 자들 중 하나가 몸을 꿈틀거렸다. 그러다가 가까스로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러나 발걸음을 떼려다가 양신을 보고 기겁을 하듯 도로 쓰러져 땅바닥에 누워버렸다.
다시 준비 자세로 되돌아간 양신은 방금 전 자신이 무슨 일을 벌였던가 싶게 천연덕스럽기만 했다. 그러나 그의 시선은 땅바닥에 쓰러진 2명의 싸울아비들을 살피고 있었다.
무사한 싸울아비 3명은 완전히 기가 죽은 표정들이었다. 모두는 낯선 자의 칼을 받아보고 나선 자신이 맞설 상대가 아님을 알았다. 때문에 그 자리에 서 있고 싶지가 않을 지경이었다.
"뭣들을 하는가? 싸워라!"
도꼬마로가 소리를 질렀다. 더 맞서고 싶지가 않은 3명의 싸울아비들은 마지못해 몸을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싸울 자세가 아닌 그저 낯 선자와 거리를 더 두려는 것일 뿐이었다.
3명의 싸울아비는 낯선 자가 자신의 등 뒤 쪽에 너무도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인 게 무서웠다. 때문에 다 같이 게걸음을 치듯 양신의 전면으로 주춤주춤 모여들게 되었다. 그러고도 마음이 안 놓이듯 서로는 어깨를 마주 댈 정도로 간격을 좁혀놓았다. 그러면서도 다리가 후들거려 발걸음이 제대로 옮길 수가 없었다.
양신은 이제 3명의 싸울아비는 관심 밖이었다. 대신 달빛을 의지해서 쓰러진 2명을 자세히 살피게 되었다. 손에 남은 감각으로 볼땐 2명에게 치명상을 입힌 것 같지가 않았다.
문득 사부의 가르침을 떠올랐다. 어떤 경우가 되건 생명의 존엄성을 잊지 말라는 말이었다. 그런데 자신은 마음대로 조국을 떠났고 타국 땅에서 살상이나 저지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싸울아비 3명은 어깨를 나란히 맞추듯 서서 낯선 자를 뚫어져라 바라보고만 있었다. 낯선 자의 칼끝이 조금만 흔들려도 몸들이 움츠려들고 자신의 칼은 무용지물 같은 무기력증을 느꼈다.
도꼬마로는 땅에 쓰러진 부하 2명 따위엔 관심 없었다. 그저 남은 3명이 분발해 다시 접전을 벌일 것만 바랐다. 그러나 좀체 움직일 기색이 없어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았다.
"이런 겁쟁이들 같으니, 빨리 싸우지 못할까!"
우두머리의 질타에 3명은 마지못해 칼들을 다시 치켜들었다. 그러나 그건 시늉뿐이고 움직임을 보이진 않았다. 모두는 전의를 완전히 상실해 서 칼을 내던지고 도망을 치고 싶었다.
양신 역시 남은 3명에겐 신경을 쓰지 않듯 천천히 발걸음을 옮겨 쓰러진 2명 쪽으로 갔다. 한 명은 상처가 그리 크지 않았고 또 한 명은 엇비슷 베인 등에서 피가 스멀스멀 흘러나와 얼른 손을 써야만 했다.
반대로 도꼬마로는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3명의 부하들에게 험악한 표정으로 어서 싸울 것을 손짓했다. 그러나 연방 손짓을 해도 3명은 아예 외면한 채 조금도 움직이질 않았다.
야장들은 이제 서서히 안도감이 들고 자못 느긋한 태도로 사태를 지켜보기만 했다. 우두머리는 계속 싸우라고 재촉하는 손짓 앞에 3명의 싸울아비는 솔개 앞의 병아리들처럼 불쌍해 보이기까지 했다.
도꼬마로는 끝내 안 되겠다는 듯 째지는 음성으로 일갈했다.
"이 자식들아, 빨리 해치우지 않고 뭣들하고 있는가? 명령이다."
그럼에도 싸울아비 3명은 움쩍도 않았다. 양신도 대결은 그만하고 쓰러진 자들을 빨리 치료해 주고 싶었다. 그런데 싸울 것만 재촉하는 우두머리가 인명을 경시하는 것 같아 입을 열었다.
"왜관의 우두머리에게 한 마디 하겠소. 부하들이 다친 걸 그냥 두고만 볼 셈이요? 대결은 그만 끝내고 부상을 당한 부하들을 빨리 치료하시오. 지금 손을 쓰면 생명엔 지장이 없겠소."
도꼬마로는 그 말을 못들은 체하는데 그 때까지 꿈쩍을 않고 3명의 싸울아비들은 쓰러진 동료들 쪽으로 슬슬 옮겨 갔다. 그리고 동료들을 들춰 업고 급히 상관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너는 누구 맘대로 이 대결이 끝났다는 소릴 하는가?"
도꼬마로는 뻐드름한 태도로 양신에게 말했다.
"그럼 앞으로 계속 하자는 거요?"
"집단 대결은 만 끝내고 나와 구미가 단독 대결을 하기로 한다."
"그대가 단독 대결을 원한다면 내가 상대를 해 주면 어겠소?"
양신의 말에 도꼬마로는 딴 소리를 했다.
"봐하니 그대는 지물촌 사람이 아닌 것 같군?"
도꼬마로의 질문에 양신은 선뜻 대답을 못했다.
"왜 대답을 못하는가?"
"내가 누군지는 알 것은 없소. 나와 단독 대결을 해봅시다."
"나와 대결할 상대는 구미 거수라고 말하지 않았는가?"
"날 상대할 자신이 없어 그러오?"
양신의 반문에 도꼬마로는 잠시 말을 못하다 입을 열었다.
"그대는 어디서 온 자인가?"
"나는 고구려 사람이요."
도꼬마로는 반신반의하듯 물었다.
"그대가 고구려 사람인 게 분명한가?"
"그렇소."
양신은 순간 거짓으로 대꾸를 못한 걸 후회하게 되었다.
"대체 고구려인이 이 일에 무슨 상관이 있어 끼어드는가?"
"나는 야장이오. 한삼국 야장들은 한 뿌리에서 나온 형제들이요. 때문에 내가 지물촌을 돕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 나선 것이요."
왜국의 검객 중 1인 자를 자부하는 도꼬마로도 엉뚱한 자와 대결을 한다는 것은 여간 난처하지가 않았다. 그러나 상대의 도전을 받아들이지 않을 경우 체면은 말이 아니게 되었다.
아무튼 간에 양쪽의 관전자들은 흥미진진한 표정들이었다.
"먼저 통성명부터 하자. 내 이름은 도꼬마로다."
"내 이름은 양신이요."
"양신이라, 고구려의 어느 무문에 속하는가?"
도꼬마로의 질문에 양신은 대답했다.
"다갈무문이오. 들어본 적은 있소?"
"들어 보지 못했다."
도꼬마로는 그렇게 대꾸했으나 고구려의 다갈무문에 대해선 잘 알고 있었다. 왜국에도 알려질 만큼 소문이 났기 때문인데 상대가 아직은 어린 청년임에도 뛰어난 검술실력을 지닌 게 꺼림칙했다.
양신도 상대의 검술 실력을 모르는 터라 겨루긴 주저가 되었다. 그러나 구미가 피하려는 상대임에도 일단 자신이 제안을 한 터라 끝까지 가보는 수밖에 없게 되었다.
한편 도꼬마로는 지켜보는 부하들을 의식하게 되었다. 때문에 자신은 가부를 결정해만 하는데 망설여졌다. 그런데 양신은 상대의 대답을 듣지도 않고 먼저 장도를 뽑아들었다.
양신이 대결 자세를 취함에 따라 도꼬마로는 빼도 박도 못할 상황에 처해지고 말았다. 압박감을 느끼는 도꼬마로는 달빛을 강하게 반사하는 상대의 칼날에 낯을 찡그린 뒤 칼을 뽑고 말았다.
즉각 양신의 입에서 기합성이 터졌다.
"야, 잇!"
도꼬마로도 반격에 나섰다. 두 자루의 칼날이 부딪히는 밤하늘엔 섬광이 명멸했다. 양신의 강하고 빠른 북방 검법과 도꼬마로의 유연하면서도 날카로운 남방 검법의 대결이었다.
두 사람이 어지럽게 휘몰아치는 공방전 앞에 관전자들은 숨을 죽이지 않을 수가 없었다. 밤하늘에서 불꽃을 튕기며 부딪는 칼날 소리가 너무도 처절해서 관전자들는 몸들을 웅숭그리게 되었다.
왜인들은 처음에 도꼬마로의 현란한 검술실력이 돋보였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그게 한낱 뽐을 내려는 움직임 같았다. 그러나 도꼬마로는 상대가 휘두르는 칼날을 받을 때마다 도끼를 받는 것처럼 타격이 너무 커 몸이 마구 휘둘렸다. 그동안에 북방검법을 쓰는 자를 상대해본 경험이 없지는 않으나 이번 상대는 달랐다. 검술 기교는 아직 덜 닦인 것 같으나 너무도 강한 체력에 실린 가격을 받을 때마다 자지러들었다.
양신의 강한 체력을 상대하는 도꼬마로는 시간이 흐를수록 체력이 급속도로 소진되었다. 그처럼 가공할 상대의 힘과 맞서고자 전력을 다했지만 얼마나 더 버텨낼지는 의문이었다.
관전자들 눈에도 그게 비쳐졌다. 양신의 공격은 점점 강도를 높이는데 반해 도꼬마로는 방어 위주로 전환될 수밖에 없었다. 한쪽은 밀어붙이고 한쪽은 밀리는 양상은 여실히 드러나고 있었다.
도꼬마로는 이젠 너무도 두려워 상대방의 거친 숨소리만 들어도 몸서리가 쳐졌다. 공연히 대결에 응했다는 후회 속에 부하들의 눈을 의식해서 기를 쓰고 버티는 수밖에 없었다.
어느 정도 자신감이 붙고 마음의 여유도 생긴 양신은 살상만은 피하려는 공격에서 한계를 두고 있었다. 때문에 체력의 한계를 드러낸 상대를 되도록 덜 거칠게 몰아붙일 수밖에 없었다.
도꼬마로는 어떻게 하면 이 나관을 모면할 수가 있을까 하는 생각뿐이었다. 그러면서 한편으론 의문도 들었다. 그 이유는 어딘지 상대가 공격에서 강약을 조절하는 것 같은 느낌 때문이었다.
관전자들의 응원도 확연히 갈려 상반된 분위를 드러냈다. 왜인들은 처음엔 우두머리가 다채롭고 화려한 공격을 펼쳐 신들이 났지만 매번 실속 없는 동작으로 끝이나 실망감을 느꼈다. 반면 야장들의 안색은 밝아지고 신들이 나서 어깨를 들썩거리게 되었다.
"야, 잇."
양신의 기합성이 터질 때마다 도꼬마로는 몸이 움츠러들었다. 상대의 거센 공격을 막기에 힘이 부치고 이젠 기력마저 떨어져 정신마저 혼몽해져서 포기 상태에 이르고 말았다.
도꼬마로는 자신의 실수가 연발되자 당혹감을 금치 못했다. 체면이고 뭐고 다 팽개치고 도망을 치고 싶으나 기를 쓰며 버텼다. 그리고 부하들이 합세를 해 주길 마음속으로 간절히 바랐다.
양신은 기력이 너무 떨어져 실수가 많은 상대를 걱정하게 되었다. 아무 때나 결정적인 공격이 가능했지만 그런 기회를 잡고도 상대가 딱해 보여 번번이 그만 두고 공격 횟수도 줄였다.
도꼬마로는 자신이 허점을 자구 드러내다간 언제고 치명타를 입을 것만 같았다. 그런 두려움에 찬 채 한편으로 이상한 생각도 들었다. 그 이유는 상대의 공격이 어딘지 적극성이 없고 일정한 한계를 두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몇 번의 실험을 해본 끝에 상대가 자신의 목숨을 노리지 않음을 확인할 수가 있었다. 그걸 느끼자 그 이유가 궁금해졌고, 그런 믿음이 생기자 일부러 위험을 노출시켜 상대를 시험을 해보았다. 양신은 그걸 간파하게 되자 그만 끝을 낼 마음을 먹었다.
"야. 잇!"
기합성과 더불어 상대를 다시 거칠게 밀어붙였다. 도꼬마로는 정신을 못 차리고 뒷걸음질만 쳤다. 그러다가 상관의 담벽락에 등을 부딪쳐 멈춘 순간 상대의 칼끝이 자신의 가슴팍을 스쳐지나 갔다.
"어?!"
도꼬마로는 기습을 당하고 나서 경악했다. 자신의 가슴팍을 내려다보니 상처도 내지 않고 감쪽같이 가슴의 단추를 도려냈기 때문이다. 그걸로 자신을 봐주고 있다는 암시로 느껴 절망감만 더해졌다.
그때 양신은 남들이 듣지 못하게 나직한 음성으로 말했다.
"이만 대결을 끝냅시다. 나는 살생을 저지르고 싶지가 않소."
도꼬마로는 멍청해진 채 자기도 모를 질문이 나왔다.
"대신 내게서 뭘 바라고 있는가?"
"지물촌 야장들에게 사과를 하시오."
"사과를 하지 않는다면?"
"그렇다면 더 봐줄 수가 없겠소."
양신의 대꾸에 도꼬마로는 죽음보다 더한 굴욕감을 느꼈다. 갑자기 몸을 돌려 세운 뒤 부하들 쪽으로 달려가며 절규처럼 외쳤다.
"전부 나서 싸워라. 지물촌 놈들을 모두 죽여라!"
싸울아비들은 우두머리의 명령이 떨어지자 다시 칼을 뽑아 들고 야장들을 향해 덤벼들었다. 삽시간에 왜관 마당은 집단 싸움터로 변해버렸고 피아를 구분할 수가 없는 혼전이 이어졌다.
양신은 아수라장이 된 가운데 도꼬마로의 모습을 찾았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의 혼전 속에선 어디서도 찾을 수가 없었다. 더욱이 운신의 폭은 좁아지고 살생을 하고 싶지 않아 칼을 휘두를 수도 없었다.
야장들은 여기저기서 비명을 지르며 땅바닥에 쓰러져 갔다. 양신은 이대로 가면 야장들이 떼죽음을 당할 것 같았다. 아비규환 속에 되도록 살상을 피하고자 칼을 휘두르며 한편으로 도꼬마로를 계속 찾다.
그때 어디서 한 떼의 군마가 나타나 앞 광장 안으로 쏟아져 들었다. 남가라 관청에서 태수가 직접 기병들을 이끌고 왔다. 야장과 왜인들는 기병들의 말발굽에 마구잡이로 짓밟혀졌다.
"싸움을 멈추어라!"
기병들의 말발굽에 수많은 사람들이 땅바닥에 쓰러진 처참한 광경 속에 마상의 김주실이 내린 불호령에 야장과 왜인들은 다 같이 움직임을 멈추고 말았다.
김주실은 조용해진 왜관 앞마당을 둘러보고 또 명령을 내렸다.
"경위는 나중에 묻겠다. 양쪽은 사상자들부터 수습을 하라."
추상같은 명령 앞에 양쪽은 그대로 뒤섞인 채 자기네 쪽의 부상자와 시체들을 수습했다. 김주실은 말에서 내린 뒤 구미 앞으로 천천히 다가들더니 그대로 귀싸대기를 후려갈겼다.
"나쁜 놈, 두고 보자!"
도꼬마로는 급히 왜관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싸울아비들만 사상자들을 수습해서 안으로 끌어들인 뒤 대문을 닫아걸었다. 야장들도 비통한 심경으로 사상자를 추스른 뒤 김주실의 다음 명령을 기다렸다.
"구미 거수, 여기가 어딘데 적국인까지 데리고 와서 왜인들과 싸움판을 벌여? 그댄 정신이 나간 놈이 아닌가?"
김주실의 엄한 추궁에 구미는 떨리는 음성으로 대답했다.
"태수님, 용서하십시오."
그 말을 못 들은 척 김주실은 양신 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양신, 그예 본색을 드러냈군?"
양신도 할 말이 없는데 구미가 변명을 했다.
"태수님, 양신님은 지물촌의 딱한 사정을 듣고 따라왔을 뿐입니다."
김주실은 싸늘한 음성으로 대꾸했다.
"주제 파악을 못하는 네놈의 변명 따윈 더 듣고 싶지 않다."
"태수님, 양신님은 아무런 죄가 없습니다."
"죄가 없다니 무슨 해괴한 소린가? 저 자가 이 싸움에 끼어들지를 않았다면 이처럼 다수의 사상자가 나올 수가 있겠는가?"
"태수님, 모든 결정은 제가 내렸습니다. 처벌도 제가 받겠습니다."
"듣기 싫다. 결정은 내가 내린다. 누구든 살상을 저지른 죄 값은 치르게 될 것이다. 꼴도 보기 싫으니 빨리 여길 떠나지 못하겠는가?"
구미는 김주실의 불호령에 눈앞이 캄캄해진 채 순순히 따랏다. 야장들은 동료 사망자와 부상자를 수습해 즉각 떠났다. 달빛이 더욱 밝아진 속에서 무거운 발길들을 끌었다.
김주실은 돌아가는 야장들의 뒷모습을 보며 알다 모를 미소를 지었다.
"곤란한 내 입장을 구미가 이렇게 쉽게 해결을 해줄 줄이야!"
양신은 야장들과 함께 돌아가며 참담하고 후회막급이었다. 이번 사태로 지물촌은 또 10여 명이 목숨을 잃고 이루 셀 수가 없는 부상자를 낸 불행을 당한 게 자기 때문이란 죄책감에 괴로워했다.
이튿날 지물촌에 나타난 남가라 관헌들은 양신을 다시 끌고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