쇠나라 4.남가라

4.남가라

by 정완기

4. 남가라(南加羅)

동해(東海)는 검푸른 파도로 일렁거렸다.

두 폭 돛을 단 신라 야장선은 거친 파도를 헤쳐 나갔다. 양신은 뱃전에 앉아 넋 나간 사람처럼 망망대해에 시선을 꽂고 있었다. 자신이 고구려를 떠난 것도 모른 채 장안성의 사자를 따라가고 있을 여선을 생각하며 견딜 수 없는 괴로움에 잠겨 있었다.

갈매기 한 마리가 야장선의 돛대 위를 따라붙듯 날았다. 때론 양신의 곁에서 알짱거리듯 감돌다가 육지 쪽으로 향했다. 갈매기가 그러길 되풀이 하는 건 자신이 도망을 친다고 비웃는 것 같았다.

때문에 갈매기가 나타날 때마다 마음이 흔들렸다. 스스로 생각해도 야장선에 몸을 실은 건 비겁한 현실도피였다. 장안성으로 끌려가는 여선은 자신이 나타나기만 눈이 빠지게 기다릴 것이었다.

당장 되돌아가서 여선을 구해 내야만 했다. 자신이 끝내 나타나질 않을 경우 여선은 무슨 일을 벌일지 몰랐다. 그런 생각에 주먹을 불끈 쥐고 뱃전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러나 때는 이미 늦었다. 배가 강을 빠져나오기 전에 내렸어야 했는데 지금은 바다 위를 항해 중이었다.

바다로 뛰어들어 헤엄을 치고 싶지만 엄두가 나질 않았다. 고개를 저으며 육지 쪽을 외면한 채 애써 냉정을 되찾으려고 했다. 돌아간들 무슨 일을 할 수가 있을 것인가? 여선은 왕실 사람이 될 운명일 것이며 사부님을 궁지로 몰아넣어 화를 당하게 될지 몰랐다. 이왕에 신라 야장선에 실은 몸이니 깨끗이 잊어야만 했다.

해론이 그런 생각에 잠겨 있는 양신 곁으로 다가들었다.

"양신님, 술이나 마십시다."

해론은 술병과 낚시질로 잡은 물고기를 회를 쳐서 들고 왔다. 울적한 심사를 가눌 길이 없던 양신은 구원이라도 받는 심경으로 반겼다.

"좋지요, 해론님."

"양신님, 방금 전에 우리 배는 신라 지경으로 들어섰습니다."

해론이 던진 말에 양신은 화들짝 놀랐다. 신라 지경으로 들어섰다는 말에 적잖이 당황하게 되었다. 자신은 조국을 배반했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리고 미지의 세상으로 가는 두려움도 일었다. 너른 바다를 두리번거리듯 둘러보았으나 거친 파도만 출렁대는 망망대해에선 어느 쪽이 고구려 바다이고 어느 쪽이 신라 바다인지 구별을 할 수가 없었다.

"해론님, 푸른 물결만 보고 여기가 신라 바다인 걸 어떻게 압니까?"

"육지에 펼쳐진 해안 풍경을 보면 구별이 됩니다."

"제가 보기엔 전부 거기가 거기인 것만 같습니다."

"양신님은 바다에서 배를 처음 타보셨습니까?"

"바다는 처음입니다."

"선원들은 조금 전 해안 풍경을 보고 고구려 지경을 벗어났다고 일러줬습니다. 해질녘에 이 배는 하슬라 포구로 들어가게 됩니다."

"하슬라는 신라의 포구입니까?"

"신라 땅에선 동북 지경의 가장 큰 포구입니다. 야장선은 거기서 하룻밤을 묵고 항해에 필요한 식수와 식량을 보급 받고 다시 떠납니다."

양신은 갑자기 궁금한 점이 많아졌다.

"해론님, 이 배는 신라의 국도인 서라벌로 가게 됩니까?"

"서라벌엔 포구가 없습니다."

"그럼 어디로 갑니까?"

"남가라 포구로 갑니다. 그 근처엔 야장촌인 지물촌이 있습니다. 이 배의 선장이신 구미님은 지물촌의 거수로 야장방을 관활하십니다."

해론은 그런 대답을 하고 설명을 덧붙였다.

구미는 야장방이 있는 지물촌(只勿村)의 우두머리로 거수(渠帥)라는 호칭을 썼다. 거수는 철제품 생산과 철제품을 타국과 교역(交易)을 하는 일체를 전부 총 관장하고 있었다.

양신은 점점 신라로 온 것에 불안감을 느끼게 되었다.

"해론님, 남가라 포구에서 왜국까진 거리가 얼마나 됩니까?"

"그리 멀지 않습니다. 이 야장선처럼 두 폭 돛을 단 배라면 남가라에서 하루만 항해를 해도 왜국 땅에 당도할 수가 있다고 합니다."

"신라에서 왜국이 그렇게 가깝다면 제겐 다행스런 일입니다."

양신이 그렇게 중얼거리자 해론이 물었다.

"양신님, 다행스럽다니 그건 또 무슨 뜻입니까?"

해론의 질문에 양신은 좀 당황해 하다가 물었다.

"남가라 포구에서 왜국으로 가는 배를 탈 수가 있겠습니까?"

"남가라 포구에선 세상 어디라도 갈 수가 있습니다. 중원의 배들을 비롯해 왜국, 고구려, 백제, 남만 등 여러 나라 배들이 드나듭니다."

양신은 그 말을 듣고 눈빛이 달라졌다.

"해론님, 남가라 포구에 고구려 배가 온다는 말씀 사실입니까?"

"양신님이 가보시면 알게 됩니다."

"고구려 배가 들어온다면 저로선 여간 마음이 놓이지 않습니다."

양신은 대답하고 얼굴에 화색마저 돌아서 해론은 의아해했다.

"양신님, 마음이 놓인다고 하셨습니까?"

"해론님, 저는 솔직히 말씀을 드리자면 후회를 하고 있습니다."

"무슨 후회를 하게 된다는 말씀입니까?"

"해론님에겐 매우 미안한 말씀이나 저는 이 배가 바다로 나서게 되었을 때부터 뒤늦게 경솔한 행동을 하고 말았다는 후회에 빠졌습니다."

"양신님은 뒤늦게 후회를 하게 된 이유가 무엇입니까?"

"저는 신라 배를 탔다는 것을 조국에 대한 배신행위로 여겨집니다. 때문에 바다로 뛰어들어 헤엄이라도 쳐서 돌아가고 싶었습니다."

"그러셨다면 진작 말씀해 주셨어야 했죠. 그러면 고구려 해안가에서 내려드릴 수도 있었는데 이젠 배를 되돌릴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해론님, 미안합니다. 태워달랄 땐 언제고 뒤늦게 딴소리를 자꾸만 해서 입장을 매우 난처하게 만들어 들이게 되었습니다. 때문에 배가 남가라 포구에 당도하면 거기서 고구려 배를 타고 되돌아갈 생각입니다."

"양신님, 신라로 오는 게 그렇게 싫으셨으면 왜 이 배를 탔습니까?"

"저는 싫어서라기보다 왠지 모르게 불안감이 커져 그럽니다."

"물론 저도 양신님이 불안해하는 마음은 이해합니다. 저 역시 처음에 고구려 땅을 밟았을 땐 그랬다는 말씀을 드렸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런 불안감은 이내 가시게 되었으므로 양신님도 그렇게 되실 겁니다."

"해론님, 만약에 신라에서 절 붙잡아 둔다면 어찌해야 좋겠습니까?"

"양신님, 저도 처음엔 고구려에서 불안감을 느꼈습니다. 그러나 그런 불안감은 곧 가시게 되었으니 그런 걱정은 하지 마십시오."

"해론님은 왜 걱정이 들지 않았습니까?"

"저는 고구려가 문명국임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신라 역시 고구려 못지않을 문명국이므로 양신님 하등 불안해하실 게 없습니다."

"해론님, 문명국은 왜 안심이 된다는 말씀입니까?"

"문명국은 적대국 사이에도 예의가 있을 땐 서로 간에 이해와 신뢰감이 생길 수가 있습니다. 저는 고구려에서 그걸 확인했습니다. 양신님도 신라에서 똑같이 확인을 할 수가 있음을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저도 해론님 말씀대로 되었으면 합니다."

두 사람은 그런 얘기를 나눴지만 각자의 속마음은 달랐다. 양신은 신라에 대한 불안감을 여전히 지울 수가 없고, 해론은 신라 조정에 양신에 대한 보고를 할 때 어떤 일이 생길지 걱정이 되었다.

"저는 벌써부터 양신님에게 묻고 싶은 게 있었습니다."

"해론님, 제게 뭘 묻고 싶으십니까?"

"저는 양신님에게 무슨 말 못할 고민이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양신은 너무도 정곡을 찌르는 말을 듣고 내심 당황했다.

"해론님은 제가 너무 이랬다저랬다 해서 그러시는군요? 제가 해론님의 심기를 자꾸만 어지럽혀 드리는 말만 해서 그러실 것입니다."

"양신님, 저는 너무도 궁금한 점이 있는데 여쭤 봐도 되겠습니까?"

"해론님은 뭐가 그리도 궁금한 게 있어 그러십니까?"

"제가 보기엔 양신님은 늘 시름에 잠겨 있는 것 같습니다."

양신은 그 말에 고갤 떨어뜨리며 동문서답처럼 대꾸했다.

"해론님도 아시다시피 고구려는 수국의 침공을 목전에 둔 형편입니다. 그러니 제 마음이 편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 때문에 해론님이 보시기엔 늘 시름에 젖어 있는 사람으로 비쳐질 수도 있다고 생각됩니다."

"저는 양신님에게 무슨 일이 있다고 봅니다."

양신은 계속 내심을 찌르는 말만 들어서 변명이 궁했다.

"앞으로 전쟁이 터지면 고구려는 단 한 사람의 전사가 새로울 판입니다. 그런 마당에 저는 한가롭게 타국으로 유람을 떠났습니다. 그런 저를 보는 해론님은 속으로 여간 딱하게 보실 것 같습니다."

"저는 양신님이 유람을 떠난 사람으로 보지 않습니다."

"해론님, 그럼 제가 무슨 일로 떠난 사람으로 보십니까?"

"양신님은 어려워진 조국을 두고 유람을 떠날 분이 아닙니다. 때문에 양신님이 이 배에 오를 때부터 전 이상하게 여겼습니다. 저는 무슨 말 못할 사정이 있어 쫓기듯 떠나는 사람으로 보여서 그럽니다."

양신은 대답이 군색해져 또 침묵으로 들어갔다.

"양신님, 실은 제게도 걱정이 없지가 않습니다."

"해론님은 어떤 걱정을 하십니까?"

"솔직한 말씀을 드리자면 양신님을 신라로 데려가는 일 때문입니다."

양신은 그 말에 안색이 다시 어두워지고 말았다.

"해론님, 무슨 이유로 걱정을 하신단 말씀입니까?"

"양신님은 신라의 허가를 받고 오신 게 아니므로 혹시 무슨 문제라도 생기게 된다면 어찌해야 하나 하는 걱정이 들어서 그럽니다."

"해론님, 제게 문제가 생긴다면 어떤 점을 두고 말씀하십니까?"

"고구려와 신라는 적대국 사이라 그렇습니다. 그 때문에 신라 조정이 적국인의 무단 입국을 불허할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어 그럽니다."

"해론님, 저도 미처 그 점을 생각하지 못해 후회를 하고 있습니다."

"저는 신라에 당도하면 먼저 서라벌 조정에 보고를 해야 합니다. 양신님의 신상과 신라에 오게 된 목적을 알려야 합니다. 때문에 저로선 정확한 보고를 하기 위해 양신님의 사정이나 사연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고구려 야장이 신라를 유람하러 왔다고 하시면 되지 않겠습니까?"

"신라 조정이 양신님의 말씀처럼 단순한 유람 차 온 걸로 받아들일지 는 모를 일입니다. 그러므로 양신님이 조국을 떠나 신라에 오게 된 사정을 제가 알아야만 조정을 납득시킬 수가 있을 것 같습니다."

"해론님, 그저 유람 차 왔을 뿐인데 무슨 사연이 있겠습니까?"

양신은 모든 사실을 밝히고 싶지 않아 그런 말밖에 할 수가 없었다.

"고구려를 불시에 떠난 걸로 보는 건 저만 아닌 모두가 그렇습니다."

"해론님, 모두가 왜 불시에 떠난 사람으로 본단 말씀입니까?"

"구미님도 양신님에겐 무슨 사정이 있는 것 같다고 했습니다."

해론의 말에 양신은 힘없이 대꾸를 했다.

"불시에 떠난 건 사실이지만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사정입니다."

"저는 개인적인 사정을 알고자 합니다. 왜냐하면 양신님은 여동생이 장안성으로 떠나는 걸 보지 않고 길을 떠났습니다. 그것도 정처 없이 떠나는 사람처럼 보였으니 거기엔 무슨 사정이 있을 것 같습니다."

해론의 조여드는 질문에 양신은 입을 꽉 다물게 되었다.

"제가 의문을 풀 수 있게 개인적인 사정이란 것을 들려주십시오."

양신은 괴로운 표정만 지을 뿐 계속 입을 다물고만 있었다. 해론은 그런 모습을 보다가 너무 딱하다는 생각마저 들어 그만 화제를 돌렸다.

"양신님, 시름일랑 저 바다에 던져버리고 함께 술이나 마시죠."

"저는 술잔을 기울이며 지금부턴 신라의 산천 구경을 해 보겠습니다."

양신은 그런 대답을 했으나 속은 난감했다. 그동안 배에서 지내며 해론과 많은 대화를 나누며 통하는 점이 많았지만 자신의 사정을 들려주고 싶진 않았다. 그러나 해론에게 마음은 점점 끌리게 되었다.

해론은 양신의 소탈한 점이 있어 마음이 끌렸다. 그렇지만 무슨 말 못할 사정이 분명 있는데 그걸 밝히려 하질 않아 난처했다. 그로인해 연민의 정과 부담감을 동시에 느껴야 했다.

"저는 양신님에게 이런 제안을 하고 싶습니다."

"해론님, 제게 무슨 제안을 하시렵니까?"

"양신님과 저는 동갑나기가 아닙니까?"

"그렇지요."

두 사람은 다 같이 금년 18세가 된 청년이었다.

"양신님, 서로 의형제를 맺으면 어떻겠습니까?"

"해론님, 좋습니다. 그런데 진정이십니까?"

"양신님은 제 말이 미덥지가 않습니까?"

"아닙니다. 그건 제가 더 바라는 바입니다."

해론은 불쑥 그런 제안을 하게 된 것은 상대에게 끌리는 점도 컸지만 보다 더 속 깊은 얘기를 나눠보려는 목적에서 한 말이었다.

"양신님, 생일을 따져 형과 아우를 정해야 하는데 전 구월입니다."

양신은 그 말을 듣고 가슴을 쫙 폈다.

"해론님, 전 삼월입니다."

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해론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양신님, 동생 절을 받으십시오."

양신은 급히 몸을 일으켜 막았다.

"형 동생 하긴 피차가 불편하므로 형제와 같은 친구가 됩시다."

"양신님, 저도 친구 겸 의형제를 맺는 게 좋겠다는 생각입니다."

"해론님, 그러면 서로 간에 말부터 틉시다."

"좋지요. 양신님."

"해론, 좋지요 가 뭔가? 좋다고 하세."

양신이 먼저 말을 트자 해론도 따라서 텄다.

"양신, 천지신명께 맹세하세."

"해론, 우린 형제와 같은 친구가 되었네."

"양신, 우리 약속이 영원히 변치 않길!"

두 사람은 술잔을 세 번씩 비워내는 맹세까지 했다.

신라의 화랑도(花郞徒)는 신의(信義)를 가장 중요시했다. 그렇지만 해론은 마음은 편치가 않았다. 왜냐하면 자신의 신분을 아직은 양신에게 밝힐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양신, 자네에게 양해를 구할 일이 있네."

"내게 무슨 양해를 구한다는 말인가?"

"이 배가 하슬라 포구에 닿으면 잠시 헤어져야만 하겠네."

"해론, 잠시 헤어지게 된다니 그건 또 무슨 소린가?"

"나는 자네의 입국 수속을 밟기 위해 먼저 서라벌로 가야만 하네. 빨리 가려고 하슬라에선 말을 타야 해서 얼마간 헤어져야 하겠네."

"해론, 나보고 혼자 이 배에 남아 있으란 말인가?"

"그럴세. 자넨 이 배를 타고 항해를 계속해야만 하네."

"나도 말을 타고 자네를 따라 함께 육로로 갈 순 없겠나?"

양신이 불안한 기색을 보이자 해론은 또 사정을 밝혔다.

"자넨 입국 허가를 받기 전엔 신라 땅에서 육로 여행을 할 수가 없네. 지물촌으로 가서 당분간 머물고 있으면 구미님이 잘 보살펴 주실 걸세."

"해론, 얼마간의 기간을 잡으면 되겠는가?"

"글쎄, 나도 그걸 모르겠네. 이 배는 사나흘쯤 더 항해를 하면 남가라에 도착하네. 나는 하슬라에서 말을 타고 밤낮으로 달라면 하루 정도로 서라벌에 당도하네. 입국 허가를 받은 뒤 지물촌으로 가겠네."

"해론, 내가 며칠간이나 기다리면 오게 되는가?"

"나도 처음 하는 일이라 며칠간 걸릴지는 모르겠네. 넉넉잡고 열흘 가량 잡으면 되지 않을 까는 하는 생각인데 혹시 더 걸릴지도 모르겠네."

"해론, 되도록 빨리 끝내고 다시 만나길 바라네."

야장선은 그 날 늦은 오후에 하슬라 포구에 당도했다. 해론은 양신과 아쉬운 작별을 하고 거기서부턴 역마를 얻어 타고 서라벌로 향했다.

그날 밤 포구에 정박한 야장선은 이튿날 다시 항해로 들어갔다. 남쪽으로 내려갈수록 봄빛이 완연해지고 해안은 어디서나 기암절벽과 송림(松林)이 어우러진 절경이 펼쳐졌다.

양신은 순풍을 받고 빠르게 항해하는 뱃전에 앉아 하염없는 눈길을 육지에 던져두기만 했다. 봄은 날로 싱그러움이 더해지고 육지의 풍광은 어디나 타국 땅으로 보이가 않았다.

눈길을 해안 풍광에 두고 있지만 머릿속은 여선에 대한 생각뿐이었다. 벌써 보고 싶고 그리워져 견딜 수가 없었다. 그녀를 잊으려고 다른 일을 생각해 보려고도 했으나 되지가 않았다.

처음 해보는 항해라 바다에 대한 두려움이 컸었다. 그러나 이내 항해에 대한 관심과 흥미가 커졌다. 바람이 일정하게 불지를 않는데도 배는 전진을 계속했다. 그게 신기해서 구미에게 여러 가지 질문을 던졌다. 구미는 양신에게 배를 조정하는 법을 설명하고 때론 직접 조종간을 잡게도 하고 밤엔 별자리를 보고 방향을 잡는 법도 가르쳐 주었다.

하슬라를 떠난 야장선이 이틀째로 접어든 날 정오쯤 구미가 말했다.

"양신님, 여기서부턴 동해가 아니고 남해입니다."

"거수님, 여기가 남해라면 이 바다 남쪽에 왜국이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왜국은 여기서 얼마를 더 가야 됩니까?"

"이 배로 곧장 간다면 내일 아침나절쯤 도착할 수 있습니다."

구미는 섬들이 많아진 남쪽 바다를 두고 다도해(多島海)로 불린다고 했다. 양신은 두만강 하구에서 고기잡이배를 타본 적은 있으니 다도해처럼 많은 어선들이 떠 있는 광경은 처음 보았다.

야장선은 마침내 남가라 포구에 닻을 내렸다. 다갈촌을 떠난 지 이fp만이었다. 짧지 않은 기간의 항해를 해본 양신은 난생 처음으로 육지에 대한 그리움과 고마움 같은 걸 느꼈다.

남가라 포구엔 수많은 배들이 정박해 있었다. 야장선보다 몇 배나 큰 배들도 많았다. 포구의 거리엔 점포들이 처마를 잇대어 늘어섰고 사람들이 북적대는 속으로 우마차가 줄지어 다녔다.

양신은 말로만 듣던 대처가 바로 이런 곳이란 생각이 들었다. 무엇보다 신라를 외지고 작은 나라로만 여겼던 생각도 바뀌게 되었다. 세상은 넓게 다녀볼 필요가 있음을 새삼 실감했다.

"양신님, 남가라 포구를 둘러본 소감은 어떻습니까?"

구미의 질문에 양신은 솔직한 답변을 했다.

"저는 이처럼 큰 대처를 처음 봅니다."

"남가라는 온갖 물자가 다 모여드는 포구입니다. 사람들은 신라의 큰 부자는 모두 남가라에서 나온다는 말들을 하고 있습니다."

양신은 남가라 포구에 대한 소감보다 다른 쪽에 관심이 가고 있었다. 그것은 고구려 배가 어디에 있는지부터 보고 싶었다. 때문에 여기저기를 두리번거리며 살피지 않을 수가 없었다.

"거수님, 저기엔 깃발을 단 집들이 모여 있군요?"

"깃발을 단 집들은 타국 상인들이 묵는 객줏집들입니다."

"거수님, 그런데 깃발의 색깔들이 여러 가지가 되는군요?"

"깃발의 색깔에 따라 머무는 나라들의 상인을 구별할 수가 있습니다."

"어떻게 구별을 할 수가 있습니까?"

"노란색 깃발은 중원의 상인들이 묵는 곳입니다. 검정색은 고구려, 흰색은 백제, 붉은색은 남만과 서역 상인들입니다."

양신은 그 말에 고구려 상인들이 머물 검정색 깃발을 찾았다. 그러다가 한 군데 보이자 여간 반갑지가 않아 가슴마저 두근거렸다.

"거수님, 고구려 배가 이 포구를 어떻게 드나들 수가 있습니까?"

"양신님은 왜 이상하게 생각이 되십니까?"

"고구려와 신라는 적대국 사이인데 이 포구에 드나들 수 있게 한다는 것은 저로선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을 일입니다."

구미는 속으로 양신이 어지간히 물정을 모른다고 생각했다.

"삼국은 어느 나라이건 타국과 교역을 매우 중요시합니다."

"그건 저도 알고 있습니다."

"어느 나라건 필요한 물자를 얻자면 적국이라도 교역을 해야 합니다. 때문에 적국의 배들이 드나드는 걸 허용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삼국은 그런 포구를 각기 한 군데씩 개방했고 신라는 남가라입니다."

"거수님, 고구려와 백제에도 이런 포구가 어디에 있는 지 아십니까?"

"양신님은 그걸 모르셨습니까?"

구미는 반문하고 알려주었다. 고구려는 남포(南浦), 백제는 고계진(古溪鎭)인데 남가라 만큼 크고 번창하진 못하다는 말도 덧붙였다.

양신은 자신은 우물 안 개구리처럼 살아왔음을 깨닫게 되었다. 세상은 넓고 신기한 일들이 많다고 했다. 자신은 이렇게라도 나오질 않았다면 바깥세상을 영 모르고 살 뻔했다다. 그런데 남가라 포구 거리엔 형모나 복장이 기이한 사람들도 눈에 띠었다.

"거수님, 저기엔 머리에 천을 둘둘 감은 사람들도 보입니다."

양신의 질문에 구미는 주변을 둘러보다가 한 군데를 가리켰다.

"저 사람들을 두고 하신 말씀이군요? 저들은 서역에서 왔습니다. 오늘은 유난히 많이 눈에 띄는 걸로 봐서 그 나라 배가 들어온 모양입니다."

"서역은 어디를 가리키는 말입니까?"

"서역은 아주 먼 서쪽 세상을 가리키는 말로 거기에도 많은 나라들이 있답니다. 서역 상선들은 수만리 바다를 오가는데 반년이 걸리는 항해를 할 때도 있답니다. 항해술이 매우 뛰어나서 세상 못 가는 데가 없는데 주로 장사가 잘 되는 나라는 어디든 가는데 남가라도 가끔 들립니다."

양신은 서역 상인들의 행색을 살피다가 입을 열었다.

"서역 상인들은 살상이 잦을 것 같습니다."

"양신님은 그걸 어떻게 아셨습니까? 서역 상인들은 장사도 잘 하지만 싸움질도 잘 해서 살상이 잦다는 소문이 날 정도입니다."

"저들이 허리에 차고 있는 칼들을 보면 그런 짐작이 갑니다."

"칼이 어떻기에 그런 짐작을 하신다는 말씀입니까?"

"칼날이 반달처럼 심하게 휜 걸 보면 돌발적인 공격에 능할 걸로 생각이 듭니다. 다시 말하면 싸움에 능하고 잦을 것 같습니다."

구미는 속으로 양신의 눈이 매우 예리하다는 생각을 했다.

"양신님 말씀대로 서역인은 체수가 큰 편이고 성질도 매우 거칠답니다. 장사에서 흥정을 하다가도 수틀리면 칼을 빼들기 일쑤랍니다. 고구려에선 서역인이 많이 산다고 하는데 양신님은 그걸 모르셨습니까?"

"저는 여기 와서 처음 서역인들은 봅니다."

"양신님, 그 말씀 정말입니까? 고구려는 병사들 중에도 서역인 용병들이 적잖이 끼어 있다고 들었는데 양신님은 못 보셨단 말씀입니까?"

"저도 그런 말은 들은 적은 있으나 실제로 본 적은 없습니다."

구미는 양신의 대답에 믿기지가 않는 표정을 지었다. 양신은 자신이 산골짜기에서 산 탓에 견문이 적음을 속으로 부끄럽게 여기고 있었다.

"거수님, 왜국은 여기서 가깝고 상인들도 많이 온다고 하셨죠?"

"왜국 상인은 가락국 때부터 철제품을 많이 수입해 가는 큰 고객입니다. 때문에 어느 나라 상인들보다 큰 대접을 받고 있는 편입니다."

"거수님, 가락국이란 나라는 처음 듣는데 어떤 나라입니까?"

"가락국은 옛날에 야장들이 세웠던 나라로 지금은 전부 없어졌습니다. 여섯 나라가 있었는데 저는 그 중에서 안라 가라국의 후예입니다."

양신은 야장들이 세운 나라들이 있었다는 말에 큰 흥미를 느꼈다. 그러나 지금은 없다는 게 왠지 모르게 남의 일 같지가 않게 여겼다.

"거수님, 가락국은 어는 나라에게 멸망을 당했습니까?"

"신라에 멸망을 당했습니다."

구미는 말하고 자신을 안라가락(安羅駕洛) 왕실의 후손이라고 밝혔다.

가락국(駕洛國)은 소국들로 병립해 있었는데 일찍부터 철제품을 생산해 왜국과 중원까지 교역을 했다. 철 생산을 못하는 왜국은 일찍부터 가락국과 신라를 침략해서 약탈해 갔다. 그러나 철 수요는 날로 늘어나 약탈만 해선 충당할 수가 없었다. 때문에 점차 교역 쪽으로 방향을 틀게 될 수밖에 없게 되었는데 이젠 가장 큰 고객이 되었다.

"거수님, 저 중에 집이 크고 유난히 큰 푸른 색 깃발을 단 곳은 어느 나라 상인들이 머무는 객줏집입니까?"

"거긴 객줏집이 아니고 왜국의 상관입니다."

"거수님, 왜국의 상관은 뭘 하는 데입니까?"

"가락국들은 철정을 많이 사가는 왜국 상인들을 위해 남가라 포구에 상관을 두게 했습니다. 왜국 상인들은 가락국 때 자기들이 묵는 상관을 세우고 철제품 수입하는 일과 교역을 관장하는 관리도 상주시켰는데 그게 지금까지 계속되는 것입니다."

구미는 왜국 상관(商館)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도 했다.

가락국들은 국가의 재정을 철제품에 전적으로 의존했기 때문에 철제품을 가장 많이 사가는 왜국 상인들을 매우 중요시했다. 때문에 왜국 상인들을 위해 상관을 지어 주며 여러 가지로 편의를 제공하며 우대를 했다. 그러다가 왜국 상인들이 자위수단으로 무장을 하는 것까지 허용했다. 그렇게 한 이유는 국가 방위를 위해 왜국인을 용병(傭兵)으로 고용할 목적이었다. 그런 왜국의 용병들은 싸울아비로 불려졌다.

"거수님, 가락국들은 국가 방위에 싸울아비란 용병을 써야 했군요?"

"그렇습니다. 무기를 생산하지만 인구가 적어서 국가 방어를 스스로 하기는 매우 힘들었습니다. 때문에 왜국인 싸울아비를 병력으로 이용했지만 끝내 신라에 전부 멸망을 당해야 했습니다."

양신은 그 말을 듣고 신라에 대한 은근한 반감이 일었다.

"거수님, 가락국이 그랬다면 왜 신라는 왜국 상관을 그냥 놔둡니까?"

"신라도 가락국 때와 사정이 별로 달라진 게 없습니다. 왜국은 여전히 철제품을 많이 사가는 고객이라 후대하지 않을 수가 없는 데다 상관을 없애려고 든다면 왜국의 반발을 일으켜 자칫 침공을 부를 위험이 크기 때문에 그냥 둘 수밖에 없습니다."

양신은 그 말을 듣고 왜국이 신라보다 강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부두엔 지물촌 야장들이 마중을 나와 있었다. 구미는 야장들에게 양신을 소개했다. 야장들은 양신을 매우 반기는 태도로 맞았다. 구미는 양신과 더불어 마차를 타고 지물촌으로 향했다.

지물촌 입구엔 임나부(任那府)란 현판이 붙어 있었다.

그날 저녁에 지물촌은 양신을 위해 큰 잔치를 베풀었다. 야장들은 양신을 환대하면서도 신라에 온 이유를 몰라 매우 궁금한 표정들이었다. 그렇게 타국 생활을 시작한 양신은 지물촌의 야장들로부터 극진한 대접을 받았다. 그러나 앞날에 대한 걱정이 컸고 여선에 대한 걱정과 그리움에 밤마다 잠을 이루지 못했다. 여선이 그리워 이대론 살 수가 없을 것 같았고, 죽으나 사나 고구려로 돌아갈 마음뿐이었다. 그러자면 어떻든 남가라에서 배를 타고 갈 방법을 찾기로 마음을 굳혔다.

매일 그런 생각을 하며 지내는 중에 어느 날 남가라 현청의 관리들이 지물촌에 나타났다. 관리들은 신라에 온 목적을 물었고 양신은 고구려 야장으로 유람 차 왔다는 답변을 했다. 그러나 관리들은 그 말을 믿으려는 눈치가 아닌 데다 현청의 허가 없인 한 발자국도 지물촌 밖으로 나갈 생각을 하지 말라는 경고를 남기고 돌아갔다.

양신은 기분이 너무 상해 자존심마저 상해 구미에게 불만을 터뜨렸다.

"거수님, 제가 무슨 죄인입니까? 신라의 산천 구경조차 관청의 허가를 받고 다니라면 저는 신라를 떠나겠습니다."

구미는 답변이 난처했지만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양신님, 신라에선 신라 법을 따라야 하십니다."

"제가 왜 신라 법을 따라야 한다는 말씀입니까? 제가 서라벌로 가서 해론님을 만날 수 있게 거수님이 여행 허가를 받아주실 순 없겠습니까?"

"양신님은 당분간 여기서 움직이시면 안 됩니다."

"제가 움직이면 안 된다는 건 감옥살이나 다름이 없지 않습니까?"

"해론님이 입국 허가를 받아 올 때까진 참으셔야만 합니다."

"저는 지물촌에 온지가 한 달이 넘습니다. 해론님은 넉넉잡고 열흘만 기다리라고 했지만 아무런 소식이 없습니다. 그러면 거수님이 사람을 서라벌로 보내 사정을 한번 알아봐 주실 수는 없겠습니까?"

"양신님, 며칠만 더 기다려 본 뒤 저도 무슨 연구를 해 보겠습니다."

"거수님, 저는 무작정 기다릴 수는 없습니다. 남가라 포구에서 아무 나라 배가 되건 간에 타고 하루속히 신라를 떠나고 싶습니다."

구미는 그 말에 크게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양신님, 태수님의 허락 없이 떠나시면 제가 책임을 져야 합니다."

양신은 그걸 모르지 않으나 신세타령처럼 또 입을 열었다.

"거수님, 제가 신라 땅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공연히 죄없는 거수님만 괴롭혀 드려 미안하기 짝이 없으나 같은 야장으로써 무슨 방법을 강구해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양신님, 이런 말씀은 드리고 싶지가 않았습니다. 그러나 저는 양신님을 보호하면서 한편으론 감시 역할도 맡고 있습니다. 비록 태수님의 지시를 받고 따르는 처지이나 저는 양신님 편임을 믿어 주십시오."

양신은 지물촌에서 지내며 바로 품게 된 의문이 또 하나 있었다.

"거수님, 해론님의 집은 이곳에 없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해론님은 혹시 야장이 아닐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구미는 이마에선 진땀이 솟을 지경이라 실토를 하고 말았다.

"해론님은 여기서 사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럼 어디에서 삽니까?"

양신이 또 묻자 구미는 머뭇거리다 대답을 했다.

"서라벌입니다."

"그렇다면 해론님은 야장이 아니라는 말씀입니까?"

"서라벌에도 큰 야장방이 있습니다."

구미는 애매한 대답만 했고 양신은 그런 그에게 더 묻질 못했다.

그로부터 며칠 뒤 관리들이 지물촌에 다시 나타나 양신을 끌고 갔다. 남가라 태수인 김주실(金柱實)은 양신을 맞아 신문을 하듯 물었다.

"그대가 고구려의 다갈촌에서 왔다는 양신인가?"

양신은 공손하게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그댄 지물촌에서 지내면서 무슨 불편한 점은 없는가?"

"모두가 잘 보살펴 주셔서 불편한 점은 없습니다."

"다행이군! 우리 관헌들이 혹시 무례하게 굴지는 않았는가?"

"그런 일은 없었습니다."

김주실은 말할 때마다 콧수염을 손으로 꼬아 붙이는 버릇이 있었다. 겉으론 자못 융숭한 태도를 보였지만 의심에 찬 눈초리는 끊임없이 양신을 탐색하듯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그대는 관헌들의 공무 집행에 매우 협조를 잘 한다는 보고를 받아 다행으로 여긴다. 그러므로 내가 묻는 말에 추호의 거짓이 없길 바란다. 그댄 신라를 유람하고자 고구려를 떠났다고 하는데 그게 사실인가?"

"예."

"나로선 그런 대답을 곧이곧대로 믿을 수가 없다."

"태수님, 어떤 점 때문에 그렇게 생각을 하십니까?"

양신의 반문에 김주실은 음성을 사뭇 내리 깔았다.

"그대의 말은 앞뒤가 맞지 않기 때문에 그런다."

"태수님, 앞뒤가 맞지 않는다면 어떤 점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대의 누이동생은 이름이 여선이라고 했던가?"

"예."

"그렇다면 그댄 고구려 왕실과 인척 관계가 되지 않는가?"

"인척이라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지 않다니 그게 무슨 소린가? 그대가 아니라고 하면 해론 낭두가 조정에 올릴 보고는 모두 허위가 된다는 말이 되지 않는가?"

"태수님, 해론 야장이 어떤 보고를 올렸기에 그러십니까?"

"해론이 야장이라니? 화랑낭두이다."

"태수님, 화랑 낭두라면 해론님은 야장이 아니란 말씀입니까?"

"물론이다."

"그러면 신라는 불놀이에 야장이 아닌 사람을 보냈단 말씀입니까?"

"해론 낭두는 단지 검술대회에서 실력을 겨뤄보고자 참가를 했을 뿐이다. 그보다 나는 그대가 신라로 온 목적에 대해 더 의심을 둔다."

"태수님이 의심을 하시는 점을 말씀해 주시면 해명을 하겠습니다."

"그대의 여동생은 고구려 왕제의 첩이 되었다. 그것은 엄연한 사실임에도 그댄 고구려 왕실과 인척이 아니란 말을 어찌 할 수가 있는가?"

태수가 추궁하려 듯 묻자 양신은 주저하다가 입을 떼었다.

"제겐 그럴 만한 사정이 있습니다. 다만 그에 대한 구구한 설명을 하고 싶지가 않아 그럴 뿐입니다. 태수님은 제가 신라에 해로운 짓을 하러 온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을 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런 의심을 받을 게 없는 사람이니 이대로 신라를 떠나게 해 주실 순 없겠습니까?"

"건방진 놈이다. 한 나라에 들어오고 나가는 게 이웃집을 왕래하는 일쯤으로 생각이 되는가? 맘대로 들어왔지만 맘대로 나가진 못한다."

감주실의 호통에 양신은 움찔해서 입을 다물었다.

"너는 왜국으로 가겠다는 말도 했다지? 그건 더 의심스럽다."

"태수님, 저는 신라를 거쳐 왜국까지 유람을 하려는 것 뿐입니다."

김주실은 갑자기 노려보는 눈길이 되었다.

"너는 입만 열면 유람이란 말만 쳐든다만 네가 실제로 하고자 하는 일을 무엇인가? 아무래도 말로 해선 실토를 할 자가 아니로다!"

"태수님, 제게서 무슨 실토를 받으려고 하십니까?"

"네가 왜국엘 가려는 목적이 무엇인지 대라."

"왜국에 가려는 건 단지 유람일 뿐이지 다른 목적은 정말 없습니다."

김주실도 더는 참을 수가 없다는 듯 목청을 높였다.

"바른대로 대답하지 않으면 중벌을 면치 못할 것이다."

"태수님, 왜국엘 가는 일로 신라에서 왜 중벌을 내린단 말씀입니까?"

양신의 반발에 김주실은 더욱 눈을 부릅떴다.

"허, 순순히 대답은커녕 반발까지 하려들다니 맹랑한 자로다!"

"태수님께 제가 어찌 반발을 할 수가 있겠습니까?"

"고구려인이 왜국으로 가는 데는 무슨 이유가 있을 것이다."

"저는 정말 개인적인 사정으로 조국을 떠났으며 신라를 거쳐 왜국엘 가려고 했습니다. 유람하려는 것이지 다른 목적은 없음을 믿어주시오."

김주실은 마지막 경고를 했다.

"너는 정탐을 하러온 게 분명하다. 순순히 다뤄선 안 되겠다."

"태수님, 제가 정탐을 하려는 자라면 몰래 들어왔을 일이지 왜 신라 야장선을 얻어 타고 들어왔겠습니까?"

양신의 음성은 간곡했으나 김주실은 혀를 끌끌 찼다.

"나는 처음부터 네가 모든 걸 순순히 밝힐 자로 보지 않았다."

"태수님, 저는 추호도 거짓 말씀을 드리는 게 없으니 믿어 주십시오."

"널 고문을 하면 당장 자백을 받아낼 수가 있으나 오늘은 관대한 처분으로 일단은 돌려보내겠다. 며칠간 말미를 주겠으니 잘 생각을 해 본 뒤 다시 부르게 되면 그땐 모든 진실을 밝히기 바란다."

김주실은 관헌들에게 명령했다.

"이 자를 돌려보내라."

관헌들이 들어와 양신을 끌어낸 뒤 도로 지물촌으로 데려갔다. 구미는 큰 걱정을 하며 기다리고 있다가 물었다.

"양신님, 큰 욕을 보시진 않으셨습니까?"

구미는 미안해서 어쩔 줄을 몰라 하는데 양신이 정색을 했다.

"저는 거수님께 여쭤볼 게 있습니다."

"뭘 말씀인지요?"

"태수님은 해론님이 화랑 낭두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구미는 당황함을 감추지 못하면서 반문했다.

"태수님이 그런 말씀을 하셨습니까?"

"화랑 낭두는 어떤 관직입니까?"

구미도 이젠 솔직히 모든 걸 털어놓을 수밖에 없었다.

"낭두는 관직이 아니고 화랑도의 간부직입니다."

"거수님, 저도 불놀이 축제에 참가한 타국 야장들 중엔 야장이 아닌 사람이 끼어든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허지만 해론님은 나와 의형제까지 맺고도 자신의 신분을 그처럼 감추었다니 너무도 섭섭합니다."

"해론님에겐 그럴만한 사정이 있었습니다. 하슬라에서 배를 내리면서 양신님에게 너무 미안하단 말을 내게 몇 번이나 했습니다. 그 이유는 자신이 화랑도란 신분을 끝내 밝히지 못한 일 때문이었습니다."

"처음엔 못했다고 해도 신라로 돌아와선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신분을 밝히는 건 개인적으로 할 수가 없는 일입니다."

양신도 그에 대해선 좀 이해가 되는 점이 없지도 않았다.

"지금 해론님은 신라 국도에서 저를 위해 무슨 일을 합니까?"

"양신님의 입국 허가를 받는데 큰 어려움을 겪는 걸로 알려졌습니다. 그처럼 애를 쓰는 해론님을 비난만 하신다면 저로선 섭섭합니다."

"거수님, 저는 너무도 답답해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그 심경은 잘 알겠으나 해론님은 양신님의 일로 동분서주하고 있습니다. 다만 일이 잘 풀리질 않아 고충이 크다는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거수님은 그런 소식을 어떻게 듣고 계십니까?"

"남가라 관헌들로부터 듣습니다."

구미의 대꾸에 양신은 속으로 또 다른 불만이 일었다. 해론은 서신이나 인편을 통해서라도 자신에게 직접 사정을 알려 줄 수도 있는데 구미하고만 소식을 주고받는 것 같아 그것도 섭섭했다.

"태수님은 제가 신라를 정탐하러 온 사람으로 오해를 하십니다."

양신의 말에 구미가 물었다.

"태수님은 양신님에게 뭘 물으셨습니까?"

"태수님은 제가 왜국에 가려는 것에 어떤 의심을 품고 계십니다."

구미는 그 말을 듣고 한숨을 흘려낼 수밖에 없었다.

"태수님이 그러시는 데는 그럴만한 이유가 없지도 않습니다."

"그럴만한 이유라니 그게 뭡니까?"

"요즘에 신라 역시 나라 안팎으로 큰 어려움에 처한 형편입니다. 그 이유는 왜국과 백제 양쪽 모두 관계가 악화되기 때문입니다."

양신은 구미의 눈치를 보면서 말했다.

"저는 신라의 상황이 어떤 것인지는 모릅니다. 그러나 내가 의심까지 받으면서 신라엔 더 머물고 싶지가 않습니다. 그러므로 하루라도 속히 신라를 떠날 방도를 차리지 않으면 안 되겠단 생각을 합니다."

"저도 양신님의 처지를 안타깝게 여기니 그런 말씀은 마십시오."

"거수님, 그냥 떠날 수 있게 모른 척 해주실 순 없겠습니까?"

"양신님은 너무 하십니다. 제가 아무렇게나 되건 말건 괜찮다는 생각이십니까? 저는 그렇다고 치고 해론님은 어찌되겠습니까? 양신님은 해론님의 장래를 크게 그르치게 되건 말건 상관이 없다는 생각이십니까?"

구미의 말에 양신도 반발을 누르고 대답했다.

"태수님은 제가 왜국으로 가려는 일조차 어떤 의심을 하시고. 왜국에 가는 목적을 밝히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제가 무슨 목적을 가지고 가는 게 아닌데 뭘 밝히겠습니까? 태수님은 다음에 부를 땐 고문을 가할 수도 있다는 하시는데 거수님은 제가 그런 일을 당하게 가만히 계실 겁니까?"

"태수님이 그러시는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근래 고구려와 왜국은 관계를 크게 강화시켜서 태수님은 신경을 곤두세우고 계셔 그럽니다."

"고구려와 왜국 사이의 일을 놓고 신라가 왜 그런단 말씀입니까?"

"큰 위기에 처한 고구려는 왜국과 우호관계를 맺을 필요성에 그럽니다. 거기엔 신라를 견제시킬 목적이 있으므로 불안을 느낍니다."

"거수님, 고구려는 위기를 헤쳐 나가기 위해 왜국과 관계를 강화시키려는 것인데 그에 대해 신라가 불안을 느낄 필요가 어디에 있습니까?"

"양신님도 아시는지 모르나 근래 고구려 사신들이 왜국을 자주 다니고 난 뒤로 왜국은 신라를 침공하겠다는 위협을 가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고구려의 사주를 받기 때문으로 볼 수밖에 없으니 그렇습니다."

"거수님은 왜국이 고구려의 사주에 왜 응할 걸로 보십니까?"

"고구려는 이번에 왜국에 철정을 공급해 주기로 결정을 내렸답니다. 그 대가로 왜국은 신라를 견제하는 역할을 맡았다는 소문도 돕니다."

양신도 그 말에는 가능성이 없지도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국은 작은 섬나라로 아는데 신라를 칠 힘이 있겠습니까?"

"양신님은 신라를 작은 나라로 여겼지만 신라에 와서 그렇지가 않음을 아시게 되지 않았습니까? 왜국도 결코 작은 나라가 아닙니다. 인총만 봐도 한삼국을 전부 합친 인총에 거의 맞먹을 만큼 많습니다. 그런 나라를 두고 어찌 신라가 경계를 하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양신은 그 말에 내심 인정을 하며 반문했다.

"왜국이 그렇게 큰 나라라면 그럴 수도 있겠습니다."

"삼한 땅에도 아주 옛날엔 수십 개의 작은 나라들이 있었답니다. 그런 소국들은 전부 신라와 백제에게 흡수를 당했습니다. 그로인해 소국의 왕족들은 바다를 건너 왜국 땅으로 갔고 각기 나라들을 세웠답니다. 그러므로 그런 소국들은 신라와 백제에 적대적입니다. 특히나 신라에 멸망을 당한 가락국 왕족들이 세우고 키워낸 나라들 중 가장 커진 게 왜국입니다. 왜국은 소국들을 통합해 나가며 날로 국세를 키우고 있습니다."

"거수님 말씀을 들으니 신라와 왜국은 사이가 나쁘겠습니다."

"신라는 옛날부터 왜구들에게 무척 시달림을 당했습니다. 왜구들은 신라의 해변 마을들을 자주 습격하는 이유는 철제 농기구를 약탈하는데 있었습니다. 그런 왜국의 군사력이 인젠 한삼국의 어느 나라와도 겨룰 만큼 강해져서 신라로선 더 큰 위협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양신은 구미의 말이 과장이 있을지는 모르겠으나 수긍이 가는 면도 있었다. 전엔 북방의 유목민들이 고구려의 철제 무기나 농기구를 훔치려고 민가들을 습격하는 일이 비일비재로 일어났기 때문이다.

"신라 철제품을 많이 의존하는 왜국이 왜 고구려 말을 듣겠습니까?"

"양신님도 그 이유를 짐작할 수가 있지 않겠습니까? 고구려는 어떤지 모르나 현재 신라는 내부적으로 철제품 수요가 크게 늘어나 자체적으로도 철정 부족을 느낍니다. 때문에 때론 철정 수출량을 줄여야 하는데 왜국은 그에 대한 영향을 받을 때마다 반발을 하게 됩니다."

"거수님, 철정 부족은 그럴 가능성이 크겠습니다. 그러나 철제품 교역은 어디나 가격 경쟁으로 갈등을 겪을 수밖에 없는 게 더 문제입니다."

"고구려는 주로 북방의 유목민들을 상대로 철정 공급을 해서 마음대로 가격 조정도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신라는 주로 왜국을 상대로 하기 때문에 사정이 다릅니다. 조금만 가격을 올려도 왜국은 반발합니다. 더욱이 국력이 커진 지금은 철정 가격을 정하는데 주도권을 쥐려고 듭니다. 뿐더러 자국의 이익을 늘리려고 신라와 백제 간의 이간질을 시켜 양국이 휘둘리게 되는 실정입니다. 심지어 왜국 상인들은 신라와 백제 사이에서 어부지리를 취하려고 농간을 부리는 행태가 날로 심해집니다."

"거수님 말씀대로 왜국이 그런 농간을 부리면 어려움이 크겠습니다."

"전에 고구려가 신라와 백제를 상대로 썼던 수법을 왜국이 씁니다."

"거수님, 갑자기 왜 고구려를 폄하는 말씀을 꺼내십니까?"

양신이 언짢게 묻자 구미는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고구려는 신라와 백제 사이를 이간질시켜 충돌을 빚게 만드는 수법에 능했는데 지금은 그걸 왜국이 배워서 신라를 위협하는데 씁니다."

구미의 음성이 좀 격해져 양신은 더는 입을 열지 못했다.

고구려는 북방의 유목민들에게 철제품을 공급하고 식량과 용병(傭兵)을 제공받는 관계를 유지해 왔다. 왜국도 처음엔 철제품을 얻으려고 신라와 백제에게 굽히는 자세를 취했으나 근래엔 국력이 커지자 철정 공급이 날로 늘어나서 여력이 있는 고구려 쪽으로 눈을 돌리게 되었다. 고구려는 그러는 왜국을 신라를 견제하는데 이용하려고 들었다. 그러다 보니 양쪽은 점점 가까워지고 유대와 결속도 날로 커질 수밖에 없었다.

"근래 남가라의 왜국 싸울아비들조차 거리에서 활갯짓을 치고 방자하게 구는 태도가 부쩍 심해졌습니다. 사람들은 그 꼴을 보고 혀를 차며 왜놈들이 저러는 건 뒤에 고구려가 있기 때문이란 말들을 합니다."

양신은 그런 말을 들을수록 왜국에 대한 관심이 더 커지게 되었다.

"거수님, 그럼에도 신라는 남가라의 왜인들이 무장을 하는 걸 왜 내버려 두는지 이유를 모르겠고 이해도 되지 않는 일입니다."

"왜관의 싸울아비들은 자체적으로 상관 보호를 해온 것은 오랜 관행입니다. 그러나 백성들은 단속을 않는 것에 불만과 걱정이 큽니다. 그럼에도 왜국의 국력이 강해져서 태수님도 미온적인 단속을 하게 됩니다."

"태수님의 미온적인 태도는 백성들만 고통을 겪게 되겠습니다."

양신의 말에 구미는 속으론 동의하면서도 또 변명이 흘러나왔다.

"그럴 수밖에 없는 큰 이유는 신라는 왜국과 철정 교역으로 국가의 재정을 크게 충당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재정 때문에 관계가 나빠지는 걸 막고자 양보를 하며 되도록이면 반발을 사지 않으려고 합니다."

"거수님, 태수님은 제가 왜국에 가는 걸 의심하는 이유는 뭘까요?"

"그건 양신님이 야장인 데다 무예를 지녔기 때문입니다."

"제가 야장이고 무예를 지닌 게 무슨 의심을 받을 일입니까?"

"왜국 땅엔 옛 가락국의 야장들이 건너가 꾸린 야장방이 많지만 모두 소규모이고 기술이 부족합니다. 더욱이 소요되는 철정을 자체적으로 생산을 못하고 무기를 만드는 기술도 부족합니다. 때문에 신라에 기술을 전수해 줄 것을 끊임없이 요구하지만 신라는 그걸 들어 줄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양신님이 왜국으로 건너가는 게 그 일과 무슨 연관이 있지 않을까 하는 오해를 살 여지는 충분합니다."

"거수님 말씀대로 그 점은 어떤 오해를 살 소지는 있겠습니다."

"거기다 근래에 왜국은 궁궐 수비병을 고구려 유이민 중에서 많이 뽑고 채워나간답니다. 양신님이 혹시 왜국으로 가는 게 제철 기술을 전수와 왕성의 수비병들에게 검술을 지도하는 게 아니까 하는 의심과 우려를 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태수님은 공연한 의심을 하십니다. 태수님이 그런 의심을 하신다면 저는 더더욱 왜국에 가지 않겠다는 말씀을 드려야 하겠습니다."

양신은 그렇게 대답을 했지만 속으론 다른 생각이었다. 해론이 입국 허가를 받아내지 못할 경우는 탈출을 시도할 수밖에 없다는 판단에 앞으론 의심을 사지 않게 그 준비를 해나가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날 이후로 양신은 밤이면 뒷동산으로 올라가 혼자서 검술 연마를 시작했다. 그러자 어둠 속에서 자신을 지켜보는 눈들이 있음을 의식하게 되었다. 그래도 모른 체하고 연마를 계속했다.

어느 날 저녁에 구미가 술병을 들고 찾아왔다.

"양신님, 적적하실 것 같아 함께 술이나 마시려고 왔습니다."

"거수님, 잘 오셨습니다."

술잔을 주고받으며 얘기를 나누다 양신이 말을 꺼냈다.

"거수님, 밤이면 절 감시하느라 고생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양신이 좀 비꼬는 투로 말을 하자 구미는 쓴웃음을 지었다.

"양신님을 감시하다니 그건 당치도 않을 말씀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밤마다 뒷동산에서 검술 수련을 하는 절 왜 지켜보고 있겠습니까? 혹시 거수님이 시켜서 하는 일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양신님이 그런 오해를 하신다면 저도 말씀을 드려야 하겠습니다."

"거수님, 무슨 말씀을 하시겠다는 말씀입니까?"

"양신님이 밤마다 뒷동산에서 검술 연마를 시작하자 마을의 젊은 축들이 몰래 지켜보게 되었습니다. 그러는 이유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거수님, 젊은 축이 무슨 이유로 절 지켜본단 말씀입니까?"

"양신님의 검술을 지켜보며 따라 하는 걸 모르셨을 것입니다."

"제 검술을 지켜보고 따라 한단 말씀입니까?"

"어깨너머라도 양신님의 검술을 배우려는 것입니다."

"거수님, 저는 그런 줄은 몰랐습니다."

"그래서 몇 번이나 양신님께 부탁드리고 싶었으나 차마 입이 떨어지질 않아 못했습니다. 그러나 오늘을 말씀을 드리기로 했습니다."

"거수님, 무슨 말씀인지 해보십시오."

"혹시 내년에도 다갈촌 검술대회에 또 초청을 받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 때는 지물촌 야장들도 당당히 출전을 해보고자 합니다."

"지물촌에서 다갈촌 검술대회에 참가한다면 대환영할 일이지요. 그런데 금년에 출전한 검인들 중엔 야장들이 한명도 없었습니까?"

양신은 다 알고 있지만 물었고 구미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해론님을 비롯해 모두 화랑도였습니다. 저는 야장들 중에서 단 한 명도 참가를 못한 일을 두고 여간 부끄럽지가 않고 불만도 큽니다."

"거수님, 야장들이 참가를 못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남가라 태수님의 지시를 따라야 했기 때문입니다."

"태수님은 어떤 지시를 내렸기에 참가를 못했습니까?"

"태수님은 지물촌 야장들의 검술 실력이 형편없다고 봅니다. 야장들이 출전할 경우 나쁜 성적을 거둘 수밖에 없고 그로인해 국위를 손상시킬 우려가 크다고 생각하셨기 때문에 대신 화랑도 중에서 상당한 실력자를 뽑아 보냈던 것입니다."

구미는 그 때문에 화랑도 중 검술실력이 뛰어난 해론을 비롯해 몇 명의 낭도들이 야장들과 더불어 고구려에 갔고 다갈촌 검술대회에 참가하게 되었던 사실을 밝혔다.

"거수님, 실력이 좀 모자라도 야장들이 출전했어야 검술대회에 의의가 있지 않겠습니까? 저는 그렇지가 못했던 점에 속상이 상합니다."

"양신님의 말씀에 동감입니다. 지금부터라도 야장들은 열심히 검술 연마를 해서 실력을 향상시키면 출전에 뽑힐 수가 있게 노력을 기울일 것인데 그게 쉽게 될 일은 아니므로 큰 기대를 걸 수가 없겠습니다."

구미의 말에 양신이 물었다.

"지물촌에도 검술 도장이 있지 않습니까? 저는 검술수련을 하는 젊은이들이 많은 걸로 아는데 거수님은 사범으로 적극 추진해보십시오."

"저는 사범이라고 해도 출전할만한 실력은 못 됩니다. 저보다 부 사범의 실력이 낳아 도장에서 검술 지도를 맡고 있습니다. 그런데 문생들의 실력이 좀처럼 향상되지 않아서 무슨 대책을 세우려고 합니다."

구미는 양신의 눈치를 보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양신님이 여기서 얼마나 더 머물게 될지는 모르겠습니다. 계시는 동안만이라도 우리 도장의 문생들에게 검술지도를 해 주셨으면 합니다."

양신은 구미의 부탁이 그냥 해보는 소리가 아닌 것 같았다. 또 같은 야장으로 지물촌의 그런 사정을 알게 되었고 무위도식으로 지내는 처지로 모른 체만 해선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양신님, 저도 염치없는 청인 줄은 잘 압니다. 그러나 젊은이들이 하도 졸라대서 오늘은 차마 입이 떨어지지가 않을 말을 꺼냈습니다."

구미가 거듭된 부탁을 해서 양신은 고개를 끄덕이게 되었다.

"거수님의 말씀대로 한번 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양신님, 고맙습니다. 당장 젊은이들에게 이 일을 알리겠습니다."

구미는 말하고 벌떡 일어서더니 휑하니 어디로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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