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서라벌
고요한 밤을 깨우는 파도 소리가 들려왔다.
남가라 태수는 양신이 야장과 왜인들 간의 충돌을 빚게 만든 장본인으로 지목했다. 때문에 감옥에 갇힌 양신은 타국 땅에서 목숨을 잃을지도 모를 위기에 처하고 말았다. 본인도 모든 게 자신이 자초한 꼴이라 누구를 원망할 수도 없었다.
구미는 감옥에 갇힌 양신을 여러 번 면회를 갔다. 양신은 구미가 찾아올 때마다 어두운 표정이라 무슨 희망을 걸 수가 없었다. 다만 곧 열기가 해론을 만나러 서라벌에 간다는 말에는 일말의 기대를 걸었다.
양신은 목숨을 잃지 않으려면 탈출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었다. 쇠창살을 부술 수만 있다면 남가라 포구에서 아무 배나 타고 어느 나라로 가건 상관이 없지만 밀두도를 압수당한 게 큰 문제였다. 그깟 칼 한 자루에 목숨을 걸까만 도저히 버리고 갈 수는 없었다.
밀두도는 철장들이 대대로 물려받는 상징물이었다. 그것을 마음대로 가지고 온 것부터가 잘못이었다. 양신은 밀두도를 잃고는 조국이든 고향이든 돌아갈 수가 없는 몸이었다.
감옥에서 지낸지 엿새째로 접어든 날 밤 중에 10여 명의 군인들이 들이닥쳐 양신을 포승줄로 묶었다. 양신은 끌려 나가 말에 태워지자 처형을 당하러 가는 걸로 생각되었다.
"날 처형을 시키려는 겁니까?"
양신의 질문에 군관은 무뚝뚝한 음성으로 반문했다.
"누가 그런다고 말을 합디까?"
"그렇지 않고서야 이 밤중에 무슨 일로 끌어냅니까?"
"서라벌로 가게 되오."
"서라벌로 간다는 게 사실입니까?"
양신의 반문에 군관도 반문했다.
"왜, 믿어지지가 않소?"
"서라벌이면 신라의 국도로 간단 말입니까?"
양신이 좀 들뜬 음성을 내자 군관은 힐난 투로 대꾸했다.
"그렇다고 하지 않았소?"
양신은 서라벌로 가면 해론을 만날 수 있다는 기대감에 찼다. 그런데 무심코 고개를 돌리다 군관의 등에 진 밀두도를 발견했다. 그 순간 가슴속으로 반가움이 전율처럼 일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처형을 하려고 끌고 간다면 굳이 밀두도를 가져갈 필요가 없었다. 아무래도 처형을 당하는 것은 아닐 것 같다는 생각에 일말의 기대를 걸 수밖에 없었다.
일행이 밤을 도와 서라벌로 가는 동안에 먼동이 트고 있었다.
군관은 양신에게 말했다.
"곧 서라벌에 도착하게 되오."
"벌써 서라벌에 다 왔습니까?"
"그렇소."
양신은 조국의 국도는 아직 가보질 못했는데 타국의 국도부터 먼저 보게 되었다는 생각에 입맛이 씁쓸했다. 그러나 해론을 다시 만날 수가 있다는 생각에 마음이 들뜨기만 했다.
동녘이 서서히 밝아지는 가운데 서라벌로 들어섰다. 일국의 국도답게 추녀를 잇댄 집들이 빼곡히 들어차 있었다. 길들도 바둑판처럼 잘 닦여져 있고 드문드문 큰 건축물도 눈에 들어 왔다.
"저긴 궁궐입니까?"
양신이 큰 건물을 보고 묻자 군관이 대답했다.
"사찰이오."
담장너머로 커다란 불탑(佛塔)이 솟아 있는 게 눈에 띄었다. 양신은 절에 다닌 적은 없지만 불탑을 보면서 마음속으로 무사히 조국으로 돌아갈 수 있게 해달라고 빌어보았다.
군관은 어느 큼직한 건물 앞에 당도하자 양신을 말에서 내리게 했다. 그리고 문지기 군인에게 인계했다. 양신은 건물 안으로 끌려 들어가면서 문지기 군인에게 물었다.
"혹시 서라벌에 사는 해론님을 아십니까?"
군인은 그 말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는 듯 양신의 팔을 우악스럽게 잡아끌었다. 작은 건물 앞에 당도하자 이번에는 옥리에게 넘겨졌고 양신은 다시금 감옥에 갇히고 말았다.
감옥에 다시 처박히는 순간 그 때가지 품었던 희망은 산산조각으로 깨졌다. 그래도 일단 서라벌로 왔으니 해론을 만나볼 수가 있을 것 이란 희망에 실망감을 꾹 누를 수밖에 없었다.
한낮이 겨운 시각에 옥리가 국밥을 가져 왔다. 양신은 몹시 시장기를 느끼던 터라 게 눈 감추듯 그릇을 깨끗이 비웠다. 한참 뒤 옥리가 그릇을 가지러 오자 물었다.
"저는 앞으로 어떻게 됩니까?"
옥리는 위 아래를 훑어볼 뿐 대꾸가 없었다. 양신은 답변을 못 들었지만 배를 채우고 나니 몸과 마음에 안정이 좀 되었다. 옥리의 심기를 거슬리지 않으려고 더 묻지 않았다.
양신은 감옥에서 이틀을 지내고 나자 다시 불안감이 커졌다. 서라벌에 왔으므로 해론이 나타날 것으로 기대를 했건만 오지 않았다. 어떻게 만나볼 방법을 찾지 않으면 안 되었다.
사흘째로 접어들면서는 밤에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뜬 눈으로 새우며 벼라 별 생각이 다 들었다. 남가라 감옥은 쇠창살이었는데 서라벌은 나무 창살이라 부술 수가 있을지 손으로 잡고 힘을 가해 보았다.
양신은 후회 속에 자괴감마저 일었다. 탈출을 하고자 했다면 남가라에서 했어야 했다. 서라벌에선 더욱 힘들게 되었다. 이젠 어떻게든 해론을 만나볼 방법을 찾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튿날 아침에 옥리가 국밥을 가져오자 말을 걸었다.
"간수님, 제 얘길 잠시만 들어 주십시오."
양신의 말에 옥리는 무뚝뚝하게 대꾸했다.
"뭔 소리를 들어달라는 게야? 남의 나라를 정탐하러 온 자가 무슨 염치로 이리도 말이 많은가?"
"저는 정탐하러 온 사람이 아닙니다. 그런 사람이라면 어찌 이 나라의 화랑도가 절 신라로 데려왔겠습니까?"
"그댄 지금 뭐라고 지껄였는가? 어느 정신 나간 화랑도가 그대 같은 적국인을 신라로 데려올 수가 있단 말인가?"
"간수님, 절 데려 온 사람은 해론 낭두입니다."
"뭐라구?! 해론 낭두라고 했는가?"
옥리는 좀 놀라는 기색을 보이다가 이내 비웃음을 머금었다.
"간수님은 혹시 해론님을 아십니까?"
양신의 질문에 옥리는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내가 어찌 알겠는가?"
"간수님이 모르신다고 해도 저로선 부탁의 말씀을 꼭 드려야 하겠습니다. 해론님이 사는 데로 가서 제 소식을 전해 주실 순 없겠습니까?"
"그댄 나보고 뭔 소식을 전해달라는 말인가?"
"양신이란 사람이 서라벌 감옥에 갇힌 것을 해론님에게 알려주십시오. 그래야만 저는 목숨을 건질 수가 있겠습니다. 제발 부탁입니다."
양신의 간곡한 청에 옥리는 음성이 좀 유순해졌다.
"그대가 해론 낭두를 안다는 게 사실인가?"
"그렇습니다. 해론님이 사는 데가 어딘지 모르십니까?"
"나는 해론 낭두가 모랑촌에 사는 걸로 알고 있네."
양신은 그 말을 듣고 가슴이 마구 뛰었다. 물에 빠진 자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경으로 옥리에게 매달렸다.
"간수님, 제가 목숨을 구할 수 있게 꼭 좀 도와주십시오. 해론님에게 양신이 지금 감옥에 갇혀 있다는 소식만 전해 주시면 됩니다."
"내가 왜 그런 일을 해야 한단 말인가?"
옥리는 거부를 했지만 속으론 응할 마음이 없지도 않았다.
"간수님, 저는 곧 처형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죽을 사람의 소원이니 적선을 하시는 셈 치시고 한번만 들어주시길 재삼 부탁드립니다."
옥리는 양신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해론 낭두가 무슨 이유로 자네 목숨을 구해 줄 것으로 생각하는가?"
"해론님과 저는 의형제를 맺은 사이입니다."
"그댄 또 뭔 소리를 하는가? 해론 낭두가 적국 사람과 의형제를 맺었다고? 예끼, 말도 안 되는 소린 집어치우게."
"간수님, 제가 거짓말을 해 봤자 금방 드러날 사실입니다. 해론님을 만나 보시고 얘길 들으시면 아시게 될 일이므로 한번 믿어주십시오."
양신은 말하고 고구려에서 해론을 만났고 인연을 맺게 된 설명을 했다. 옥리는 얘길 다 듣고 나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않아도 서라벌엔 고구려인이 남가라에서 왜인 싸울아비들과 싸워서 제압을 했다는 소문이 돌고 있었다. 그런데 해론 낭두를 쳐드는 걸 보면 혹시 이 자가 당사자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 물었다.
"혹시, 그대가 왜관의 싸울아비들을 제압한 고구려인가?"
"간수님, 저는 제압을 했다기보다 대결을 벌인 건 사실입니다."
"아니?! 자네가 왜인 무뢰배들을 혼쭐낸 바로 그 고구려인이 확실하단 말인가? 그렇다면야 나로서도 다시 생각을 해 볼 일이고말고."
"간수님, 제 소식을 해론님에게 전해 주시겠다는 말씀입니까?"
"그럴세."
옥리는 양신에 대한 호감이 생겼지만 그래도 미심쩍은 데가 없지도 않았다. 직접 해론을 만나보면 확인할 수가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저녁때 옥리는 얼굴에 미소를 가득 머금고 양신을 찾아왔다.
"내가 해론 낭두를 찾아가서 자네 얘길 전했네."
"아, 그러셨습니까?"
양신은 기쁨으로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다.
"해론 낭두는 그대가 서라벌로 온 것을 모르고 있더군. 내 얘길 듣고는 여간 놀라지 않았네. 내가 소식을 전해 주어 고맙다고 했네."
"그런데 해론님은 왜 간수님과 함께 오질 않았습니까?"
"해론 낭두는 자네에게 아무 걱정 말고 조금만 더 있으라고 했네. 날 따라오지 못하는 건 무슨 사정이 있기 때문이라 미안하단 말도 했네."
양신은 옥리로부터 전해 들은 말만으로도 크게 마음이 놓였다. 자신이 그동안에 경거망동을 하지 않았던 것을 다행으로 여겼다. 그날 밤은 모처럼 편안히 잠을 이룰 수가 있었다.
이튿날 정오쯤 옥리가 와서 양신에게 뜻밖의 말을 전했다.
"해론 낭두가 그대를 만나러 오셨소."
"간수님, 그 말씀 정말입니까?"
"그댄 속아만 살았는감?"
"간수님, 너무 고마워서 그렇지요."
옥리는 양신을 옥에서 나오게 한 뒤 앞장을 섰다. 관청의 정문에 이르자 밖에서 해론이 기다리고 있었다.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달려들어 서로 부둥켜안았다. 만감이 교차해서 한동안을 그렇게 서 있기만 했다. 해론이 먼저 입을 떼었다.
"양신, 미안하네. 그동안 자네가 고생이 많았던 것도 알고 있네."
양신은 넋두리가 나오려고 했지만 그만 두었다.
"고생이랄 건 없지만 불안해서 견딜 수가 없었네."
"그랬겠지, 밀린 얘기는 천천히 하고 우선 말을 타게."
해론은 대기시켜 둔 말에 양신을 태우고 앞장을 섰다. 두 사람은 말머리를 나란히 한 채 시가지를 벗어났다. 넓은 들판이 이어진 가운데로 들어서자 해론이 물었다.
"고구려인은 말을 잘들 타지?"
"그런 편이지만 나도 말달리기를 좋아하네."
"그럼 저기 보이는 산자락까지 말을 달려 볼까?"
"좋지."
양신은 생기가 도는 얼굴로 대꾸했다. 해론이 말 궁둥이에 채찍을 놓자 양신도 따라서 말고삐를 채었다. 두 필의 말들은 흙먼지를 자욱하게 일으키며 들판을 달리기 시작했다.
두 사람은 검술 실력 못지않게 승마 실력도 대단했다. 말들은 갈기를 세운 채 바람을 가르듯 달렸다. 얼마쯤 그렇게 질주해서 푸른 들판 가운데 있는 한 정자 앞에서 멈추었다.
"양신, 정자에서 잠시 쉬세."
"그러세."
양신은 말에서 내리며 모처럼 환하게 웃었다.
"나는 자네의 굳어진 마음을 풀어주려고 말 두 필을 준비했네. 어떤가? 말을 달리고 나니 가슴이 확 트이고 시원하지 않은가?"
"나도 오래간만에 상쾌한 기분을 맛보았네."
들판에는 초여름의 태양 아래 벼들이 자라고 있었다. 말들은 주인을 남겨 둔 채 냇가로 다가들어 물을 마셨다. 두 사람은 정자로 올라가서 난간에 걸터앉았다.
"양신, 나는 먼저 자네에게 사과부터 해야 하겠네."
"해론, 무슨 사과를 한단 말인가?"
"나는 화랑도일세. 신분을 숨기고 고구려에 갔었네."
"자네가 화랑도 신분으로 고구려에 왔던 이유를 나도 알게 되었네."
"구미 거수님이 무슨 말을 하던가?"
"그럴세. 그걸 남가라 태수님한테 확인을 하게 되었네."
"나로선 부끄럽지만 이제라도 그 점을 재삼 사과하겠네."
"해론, 자네가 자청해서 간 것도 아니잖은가? 나는 이해를 하네."
해론은 좀 붉어진 낯으로 쓴 웃음을 지었다.
"양신, 자네는 날 기다리는 동안에 얼마나 속을 태웠겠는가? 그 생각을 하면 몸 둘 바를 모르겠네. 그러나 나 역시 일이 뜻대로 되지가 않아서 밤잠을 설치는 날이 많을 정도로 속을 끓이며 지냈네."
"나도 자네가 그동안 입국 허가를 받아내려고 백방으로 뛴 걸 잘 알고 있었네. 무척 애를 썼건만 여의치가 않았음을 어찌 하겠는가?"
"양신, 나는 인편이나마 소식을 못 전한 게 무척 괴로웠네."
"해론, 나도 그 사정도 들었네. 신라 조정은 자네에게 나와 일체 연락을 하지 못하게 명령을 내린 겋로 알고 있었네. 모두가 내 탓인 걸 어찌 하겠는가? 그런데 이젠 입국 허가는 나왔는가?"
양신의 질문에 해론은 다시금 안색을 흐렸다.
"입국 허가가 나온 것은 아닐세."
"그러면 날 서라벌로 데려온 이유는 무엇인가?"
"그럴만한 사정이 있었을 것일세."
해론은 그 사정을 밝혀야 하는데 자신도 그걸 모르고 있었다. 양신은 해론이 말을 잇지 못하자 자꾸 캐묻기가 어려웠다. 어찌 되었건 간에 다시 만난 것만도 다행으로 여길 수밖에 없었다.
"해론, 입국 허가가 나오지 않았는데도 날 이리로 데려 온 것은 혹시 고구려로 돌려보내려는 게 아닐까? 그랬으면 나로선 더 바랄 게 없네."
양신의 말에 해론은 더욱 난처해져 들판 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해론 또한 그렇게 되면 얼마나 좋을까 싶은 생각에 입을 열었다.
"아무튼 간에 자네가 서라벌로 오게 된 것만도 여간 기쁘지가 않네."
"해론, 나도 자네와 함께 있게 된 것만으로도 크게 마음이 놓이네."
해론은 양신이 감옥에서 나오긴 했으나 몸은 여전히 자유롭지가 못한 처지라서 마음은 여간 무겁지가 않았다.
"해론, 신라 조정에서 나에 대한 어떤 오해나 의심을 품을 건 당연한 일로 보네. 다만 그 때문에 내 앞일이 어떻게 될 것인지 예측을 할 수가 없는데 나의 관한 무슨 말을 더해 줄 것은 없는가?"
"자네가 신라 조정의 의심을 사고 있음은 나도 부인을 하지 않네. 그에 대해선 더 보탤 말은 더 없고. 나 또한 구미 거수님처럼 자네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는 임무를 맡게 되었음을 밝혀야 하겠네."
"해론, 그렇다면 나는 서라벌에서도 자유롭지가 못한 처지로군?"
"나는 자넬 서라벌로 데려오게 만든 분들이 계신 것만 밝히겠네."
"날 서라벌로 데려온 분들은 누구이며 왜 그렇게 했단 말인가?"
"그건 자네가 남가라에서 왜인들을 상대로 보인 활약상 덕분일세."
"내가 왜인들과 벌인 활약상 덕분이라고?"
"그럴세."
"해론, 사고를 친 나로선 자네에게 면목이 없을 뿐일세."
양신이 사과의 말을 하자 해론은 고개를 가로 저었다.
"아닐세, 양신."
"아니라면 왜 그렇단 말인가?"
"자넨 그 사건으로 전화위복을 맞았다고나 할까?"
"내가 전화위복을 맞았다니 그게 무슨 뜻인가?"
"나도 처음엔 자네가 왜관의 싸울아비들과 충돌을 빚는데 개입을 했다는 말을 전해 듣고 눈앞이 캄캄해지지 않을 수가 없었네."
"해론, 왜 안 그랬겠는가?"
"그런데 그 일로 자넨 신라 사람들로부터 큰 호감을 사게 되었네. 그리고 서라벌에선 자네에 대한 동정론도 일어나게 만들었네."
"무슨 말인가? 나는 그 일로 감옥에 들어갔는데 동정론이라니?"
"자네가 왜관의 싸울아비들을 응징해서 신라인의 속을 후련하게 만든 것일세. 그로인해 자네에 대한 어떤 오해도 풀리는 계기도 되었고."
"그런가? 나는 함부로 손을 못 대는 왜인들을 대신 응징을 해주고 싶었을 뿐인데 그 때문에 남가라 사람들이 쾌재를 불렀다는 말은 들었네."
"양신, 그렇다고 너무 우쭐대진 말게."
"나는 신라를 위해서가 아니고 야장들을 위해서 한 일일세."
해론은 씁쓸한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인 뒤 말했다.
"어찌 되었건 간에 그 일로 서라벌 조정은 자네를 지물촌에 더 놔둬선 안 되겠단 결정을 내리고 그 때문에 서라벌로 옮겨오게 된 같네."
"날 서라벌로 데려와선 또 어떻게 하려는 것일까?"
"자넬 남가라에 계속 놔두면 왜인들과 또 무슨 문제를 일으킬지 몰라서일세. 아무튼 간에 그런 사고를 친 것은 전화위복이 되었네."
양신은 해론의 대답을 듣고 하고 싶은 말이 있었다.
"해론, 나도 자네에게 고백할 게 있네."
"무슨 고백을?"
양신은 좀 주저하다가 입을 열었다.
"내가 그 사건에 개입을 한 이우는 어떤 목적이 없지도 않네."
"양신, 어떤 목적이 있었단 말인가?"
"나는 남가라에서 신라와 왜국 사이가 무척 나쁜 걸 알게 되었네. 때문에 태수님은 내가 왜국으로 가려는 것에 대해 큰 오해를 하셨네. 그런 오해를 불식시키기 위해서라도 왜인들과 충돌을 빚을 필요가 있었네."
"양신, 남가라 태수님이 자네에게 어떤 오해를 하셨단 말인가?"
"내가 왜국을 도우려고 가려는 사람으로 의심을 하고 계셨네."
해론은 양신의 대꾸에 적잖은 흥미를 느끼듯 물었다.
"남가라 태수님은 무슨 이유로 자넬 의심하셨을까?"
"내가 고구려와 왜국 간의 협조관계를 다지기 위해 가는 사람으로 보셨네. 왜국에 가서 병사들의 검술을 지도하거나 제철 기술을 알려 줄 목적으로 가는 사람으로 보셨던 모양일세."
"아닌 게 아니라 자넨 그런 의심을 살만한 점이 없지도 않지."
"때문에 태수님의 의심을 해소시키기 위해 그래야만 했었네."
"양신, 자네가 그 때문에 왜인들과 충돌을 빚을 생각을 했다면? 자넨 여러 면에서 다시 볼 필요가 있고 무섭다는 생각도 드네."
해론은 새삼 양신을 보통 사람으로 봐선 안 되겠단 생각을 했다.
"해론, 날 다시 보겠다면 무슨 소린가?"
"자넨 신라에 온지가 얼마 되었다고 남의 나라 사정을 그렇게도 잘 파악하고 있단 말인가? 그래서 다시 볼 수밖에 없다는 말을 하게 되네."
"남의 나라 사정을 잘 파악해서가 아닐세. 구미 거수로부터 들은 얘기가 많아 그걸 가지고 나름대로 여러 가지로 추측을 해본 결과일세."
"구미 거수님은 자네에게 무슨 얘길 그리도 많이 했기에 그러나?"
"나는 신라가 작은 나라인 줄로 알았다가 그게 아님을 알게 되었네. 그런데 왜국 역시 소국이 아님도 알게 되었네. 때문에 신라와 왜국은 서로 경계를 하는 형편이 아닌가? 그러나 신라는 왜국과 긴장 관계가 조성되는 걸 원치 않아 되도록 비위를 거스르지 않으려는 것 같네."
해론은 그런 말을 듣고 양신을 경계하게 되는 마음마저 들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왜인들과 벌인 충돌에 가담을 했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으면 큰 곤경에서 벗어나긴 힘들 것이란 생각이었다.
"해론, 전화위복이었다면 내가 어떤 곤경에 처했는지 말해 주게."
"신라 조정은 남가라 태수께 자넬 감시 관리하는 역할을 맡겼네. 태수님은 그에 대한 불만이 크셨기 때문에 서라벌 조정에 건의를 한 게 있네. 나는 그걸 요즘에 알고 얼마나 속을 끓였는지 모르겠네."
"태수님이 어떤 건의를 했기에 그랬단 말인가?"
"자넬 산성을 쌓는 인부로 현장에 투입을 시킬 것을 건의했네."
"날 산성을 쌓는 인부로 투입시킨다?"
"만약에 그렇게 되었다면 자넨 평생을 거기서 헤어나질 못할 신가 되고 마네. 그리고 이곳저곳으로 끌려 다니면서 돌을 깨고 성을 쌓는 일에만 매달리다 생을 마칠 수도 있었을 뻔했네."
"해론, 나는 그렇게 될 줄은 몰랐네. 그렇지만 그럴 겨우 나로선 가만히 있을 순 없지 않겠나? 다만 남가라에서 탈출을 모색해 본 적은 있지만 실제로 탈출을 시도할 수는 없었음도 말해야 하겠네."
"왜 시도를 하지 않았단 말인가?"
"자네와 구미 거수님에게 화가 미칠 게 걱정되어 그랬네."
"양신, 그랬다면 나로선 고맙기 그지없지만 그래도 했어야 했네."
"해론, 나로선 탈출을 못할 또 다른 이유가 없지도 않았네."
"또 다른 이유라니?"
"나는 남가라에서 밀두도를 압수당했기 때문일세."
"그러고 보니 자네 등에 밀두도가 없군?"
"밀두도는 남가라를 떠날 때 호송 군관이 등에 지고 있는 걸 내 눈으로 봤네. 밀두도는 서라벌로 와 다시 감옥에 들어갈 때 간수에게 넘겨졌네. 자네가 밀두도에 대해 한번 알아 봐 줄 수는 없겠는가?"
해론은 그런 말을 하는 양신의 심경을 이해할 수가 있었다.
"내 생각인데 밀두도는 앞으로 병부에서 보관할 걸로 짐작이 가네."
양신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나는 밀두도 만은 어떻게든 돌려받아야만 하네."
"양신, 나는 자네 청을 들어 줄 힘이 없어 미안하네. 더욱이 자네 처지는 신라 조정이 기밀사항에 붙일 일임을 알아야 하네."
"해론, 내가 기밀사항에 붙일 처지라니 그건 또 무슨 말인가?"
"양신, 자넨 신라 조정의 인질이 되었음을 밝혀야 하겠네."
"내가 인질이 되었다고? 인질이란 또 뭐란 말인가?"
"적대국 사람을 볼모로 잡아두는 것을 말함일세."
"신라가 날 왜 볼모로 잡아둔단 말인가?"
"자네는 고구려 왕실의 인척이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일세."
"해론, 내가 왜 고구려 왕실과 인척이란 말이 자꾸만 나오는가? 남가라 태수도 그런 오해를 해서 여간 난처하지가 않았네. 자네가 신라 조정에 그렇게 보고를 했기 때문이 아닌가?"
"양신, 자넨 왕실과 인척이 아니라고 부인하지만 신라 조정은 그걸 믿지를 않네. 왜냐하면 자네 여동생 분이 고구려 왕제의 후궁으로 들어 간 것은 엄연한 사실이 아니가? 그 소문은 신라에도 전해졌네."
양신은 그 말을 듣고는 더 할 말이 없었다. 해론은 잠자코 있는 양신을 물끄러미 보면서 자신이 품은 의문을 한번 풀고 싶었다.
"나는 도리어 자네가 왕실과 인척이 된 사실을 부인하는 이유를 모르겠네. 그건 여선이란 분과 남매지간이 아니란 말이 되지 않는가?"
양신은 한숨만 흘려낼 뿐 입을 다물고만 있었다.
"왜 대답을 하지 못하는가?"
해론의 질문에 양신은 괴로운 표정을 짓다가 겨우 입을 떼었다.
"해론 나는 여선과 장래를 약속했던 사이일세."
양신은 더 이상 감출 필요가 없다는 생각에 끝내 입을 열고 말았다. 해론은 그말을 듣고 여간 놀라지 않았다. 그러면서 한편으론 동정을 금치 못하고 위로의 말보다 사과부터 했다.
"나로선 그런 줄 몰랐네. 여간 미안하지가 않네. 진작 그걸 알았으면 자네의 일은 보다 쉽게 풀릴 수도 있었을 것을 왜 이제야 말하는가?"
"나는 신상에 관한 일을 밝히는 게 싫었네. 또 내가 신라로 온 게 고구려 왕실에 알려지게 되면 여선의 신상에 좋지 않을 것 같기도 하네. 이래저래 밝히기가 주저가 되었네."
해론은 그런 대답에 이해가 되고도 남음이 있었다.
"양신, 왜 그렇지 않겠나? 나는 그런 심정은 이해가 되지만 자네의 가슴을 더욱 아프게 할 소식이 있는데 전해도 좋을지 모르겠네."
"무슨 소식이 있는가? 해론."
"지난달 고구려 국도에선 건무 왕제가 여선이란 분을 후궁으로 맞는 예식을 치렀다는 소문이 서라벌에도 전해지고 있네."
양신은 그 말을 듣는 순간 가슴에 큰 구멍이 뚫리는 것처럼 공허감을 느껴야 했다. 그러나 한편으론 여선에게 별고가 없음을 확인하게 되어 안도의 한숨을 흘려낼 수가 있었다.
해론은 뒤늦게나마 양신이 조국을 등져야 했던 사정을 조정에 보고하면 자유로운 몸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드는데 양신이 물었다.
"해론, 여기선 고구려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어떻게 아는가?"
"고구려 국도에 있는 우리 첩자들이 소식을 전해 오네."
"신라 첩자들이 고구려 국도에도 있단 말인가?"
"서라벌에도 고구려와 백제 첩자들이 들어 와 있네."
해론의 대답엔 피장파장이 아니겠느냔 여운이 깔려 있었다.
"그렇다면 내가 서라벌에 와 있는 것도 고구려에 알려질까?"
"그건 모를 일이나 이왕에 말이 나왔으니 더 해둘 말이 있네."
"또 무슨 말인가?"
"자네는 앞으로 고구려로 돌아가긴 힘든 몸임을 알아야 하네."
"내가 고구려로 돌아가긴 힘든 몸이라니 인질이기 때문인가?"
"그럴세. 그 때문에 나는 자네에게 권하고 싶은 말이 있네."
"내게 뭘 권하려고 하는가?"
"신라에 귀화를 해서 살 의향은 없는가?"
"나는 그럴 생각은 조금도 없네. 그런 말은 다신 하지 말게."
양신의 단호한 대꾸에 해론은 씁쓸한 표정만 지으며 물었다.
"양신, 자넨 여전히 탈주를 시도할 생각인가?"
"그럴세. 나는 솔직한 대답을 할 수밖에 없겠네."
"자네가 솔직한 대답을 하니 나도 탈주에 대한 조언을 하고 싶네."
해론은 그런 말을 하고 나서 무슨 소릴 하는가 내심으로 당황했다.
"해론, 자네에겐 못할 짓이나 나로선 탈출을 시도할 수밖에 없겠네. 그런데 해를 당할지도 모를 자네가 어떤 조언을 하겠단 말인가?"
양신의 질문에 해론은 힘없이 대답했다.
"나는 그 말을 하기 전에 자네의 귀화를 먼저 권하고 싶네."
해론이 딴 소리를 하자 양신은 쓴 웃음을 지었다.
"해론, 탈주를 하려는 사람에게 그런 소리가 무슨 소용인가?"
"만약에 귀화를 한다면 자넨 감시를 벗어날 수가 있네. 그런 뒤에 탈주를 하면 일이 쉬워질 수가 있고 그건 내게도 좋을 일일세."
양신은 그 말을 듣고 해론의 고민이 어디에 있음을 알만했다.
"해론, 나보고 탈주를 위해 거짓 귀화를 하라는 말이로군?"
"탈주를 할 마음이었으면 남가라에서 했어야지. 거긴 여러 나라 배들이 드나들어 얻어 타기가 쉽지만 서라벌은 그렇지가 못해서 그러네."
양신은 서라벌이 포구가 없음을 깨닫고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해론, 내 솔직한 심정은 자네를 생각하면 탈주를 할 수가 없네. 만약에 그렇게 된다면 누구보다 자네에게 못할 짓을 하는 게 아닌가?"
해론은 한숨을 쉬며 말을 돌렸다.
"양신, 그만 길을 떠나야 하겠네."
"그런데 날 어디로 데려 가는가?"
"우리 집일세. 앞으로 자넨 우리 집에서 나와 함께 살게 되었네."
"그런가? 자네에게 너무도 많은 폐를 끼치게 되는군."
"폐라니? 그런 말은 하지도 말게."
해론이 휘파람을 불자 냇가에서 풀을 뜯고 있던 말들이 정자 앞으로 되돌아 왔다. 두 사람은 다시 말에 올라 해론의 집으로 향했다.
남국의 여름은 견디기가 어려운 폭염이 연일 이어졌다. 북국에서 온 양신은 하루에도 몇 번씩 찬물을 뒤집어쓰지 않으면 못 견딜 일이었다. 어느 날 해론은 외출에서 돌아와서 말했다.
"양신, 내일은 같이 외출할 일이 생겼네."
"어디를 무슨 일로 가는가?"
"자네가 서라벌로 올 수 있게 힘을 쓴 분들을 만나 보게 되었네. 나 혼자 자넬 돕긴 한계가 있으므로 그 분들이 자네의 후견인이 되면 여러 가지로 편의를 얻을 수가 있을 같아서 만나보게 하려고 하네."
"그런 분들이라면 나는 당연히 찾아뵈고 인사를 드려야 하지 않겠나?"
이튿날 양신은 해론을 따라 집을 나섰다.
교외로 나가서 반 식경쯤 걷고 나서 나직한 산자락 밑에 들어선 마을에 이르렀다. 마을 복판의 큰 기와집을 중심으로 10여 호쯤 되는 초가들이 옹기종기 붙어 있는 촌락이었다.
해론은 양신을 데리고 큰 기와집 앞으로 다가들었다. 하인이 나와서 두 사람을 안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해론은 큰 전각 앞에 서더니 군인 특유의 큰 소리로 말했다.
"주형님, 해론이 왔습니다."
안에서 점잖은 음성이 흘러 나왔다.
"해론군, 어서 들어오게."
해론은 양신을 데리고 방으로 들어갔다. 큰 교자상을 놓고 두 사내가 마주 앉아 있었다. 한 사람은 30대 중반쯤 돼 보이고 또 한 사람은 해론과 동 연배로 보였다.
"양신, 인사를 드리게."
양신은 해론이 시키는 대로 30대 중반의 사내에게 허리를 굽혔다.
"처음 뵙겠습니다. 고구려에서 온 양신이라고 합니다."
"잘 왔소. 내 이름은 김호림이요."
김호림(金虎林)에 이어 동연배의 젊은이가 먼저 입을 열었다.
"반갑습니다. 내 이름은 김유신이오."
"양신입니다."
초인사를 나누고 김호림은 양신을 자신의 앞에 앉히고 해론과 김유신(金庾信)과 마주 앉게 했다. 여인들이 들어와 교자상 위에 음식들과 술병을 푸짐하게 차려놓았다.
화랑도의 주형(主兄)인 김호림은 복승(福勝) 갈문왕의 아들로 왕비인 마야부인(摩耶夫人)의 동생이었다. 김유신은 화랑도의 2인자인 부제(副弟) 중의 하나로 김호림을 보좌하고 있었다.
김호림은 해론이 따른 술잔을 쳐들었다.
"모두 함께 건배를 하세."
모두가 술잔을 비우자 김호림이 말했다.
"양신님은 다갈촌 검술대회에서 삼연패를 했다고 들었소."
"주형께선 말씀을 낮춰 주십시오."
양신이 공손하게 말하자 김호림은 만면에 미소를 머금었다.
"말을 낮춰도 되겠소?"
"고구려에선 장유유서가 엄해서 연장자는 말을 놓습니다."
김호림도 만족한 듯 대답했다.
"장유유서는 신라에도 마찬가질세. 허나 양신군은 고구려 왕실의 인척 신분인데 내가 그래도 되겠는가?"
"저는 고구려 왕실의 인척이 아닙니다."
"여동생이 고구려 왕제의 후궁이라고 들었는데?"
김호림의 반문에 양신은 그 사실을 또 밝힐 수밖에 없었다.
"고구려 왕제의 후궁이 된 여인은 다갈촌 철장님 따님으로 저와 혼약을 맺었던 사입니다. 이젠 왕실 사람이 되었으니 저하곤 상관없습니다."
모두는 그 말에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그것으로 양신이 조국을 떠난 이유가 충분히 해명이 되어 김호림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양신군이 지금까지 그에 대한 부인을 한 것은 이해가 가는군."
김유신이 그 말을 받았다.
"양신님, 그러시면 신라에 귀화해서 정착을 하면 어떻겠습니까?"
"저는 그럴 생각은 없습니다."
양신의 딱 부러진 대답에 분위기가 좀 어색해지자 김호림이 말했다.
"상심이 매우 클 사람을 상대로 무거운 얘기는 삼가세."
그 때부터 김호림은 대화를 주도해 나갔다. 그는 다방면으로 박학다식한 편이고 특히 검술에 대한 관심이 컸다. 그건 다른 사람도 마찬가지라 그에 관한 얘기가 주를 이루게 되었다. 그런데 김유신만은 유독 정치와 군사 방면에 관심이 큰 듯 양신에게 그에 관한 질문을 자주 던졌다.
"고구려는 터전이 좁은 평양으로 왜 천도를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김유신의 말에 양신은 좀 곤혹스러움을 느껴야 했다.
"장안성은 비록 터전은 좁으나 물산이 풍부한 곳입니다. 왕실은 재정에 큰 도움이 될 걸로 여겨서 천도를 한 걸로 들었습니다."
"천도 후에 고구려는 내부적인 결속에 크게 금이 갔다는 소문입니다. 양신님은 그런 소문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양신은 계속 되는 난처한 질문을 받고 마지못해 대답을 했다.
"광개토왕이 영토를 크게 확장한 뒤로 고구려는 타국과의 교역이 크게 늘어났습니다. 고구려도 중요한 물자는 철제품입니다. 각 부는 철정을 많이 확보하려고 들어 마찰이 생길 때가 많습니다."
김호림이 입을 열었다.
"고구려는 요즘도 새로운 철산지 개발에 힘을 많이 기울인다는 말을 들었네. 전에는 남쪽으로 눈을 돌려서 신라와 백제를 상대로 마찰을 빚는 일이 잦지만 지금은 그렇지가 않아 한시름을 놓은 셈일세."
김호림은 고구려의 내부 사정도 여러 가지로 잘 알고 있었다.
"고구려는 북방 영토를 크게 확장시킨 뒤 여타 부에도 관할을 넓혀 주었지. 그러자 여타 부들은 각자 관할지 내에서 철광산 개발에 힘을 썼네. 때문에 철제품 생산이 부쩍 늘어나게 되고 여타 부들의 재정도 늘어나며 세력도 커지게 되었지. 고구려 왕실은 뒤늦게 여타 부에 대한 제약과 통제를 강화하려고 들자 마찰을 빚게 되었네. 그런데 수국이 침공할 기미마저 보여서 안팎으로 어려움이 크게 되었네."
양신은 김호림의 말을 듣고 내심 크게 놀랐다. 자신보다 고구려 내부 사정을 더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가운데 김유신은 은근히 고구려에 대한 반감을 드러냈다.
"고구려 왕실은 여타 부와 연맹체가 매우 느슨해진 형편임에도 신라에 대한 위협은 더 심해지고 있소. 그럼에도 아국의 북방 국경지대에서 여전히 압박을 키우는 행태를 보여 우리로선 반감이 클 수밖에 없소."
김유신은 양신이 아무런 말도 않자 또 다른 일을 거론했다.
"예로부터 고구려의 야장들은 철산지를 찾아 삼한 땅을 돌아다녔소. 그 때문에 타국의 지형과 지리에도 밝소. 때문에 전쟁 땐 군대의 향도 역할도 맡소. 그러므로 야장은 경계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소."
양신은 그게 자신을 지목하는 말로 들려 변명을 하게 되었다.
"어느 나라건 야장들은 철산지에 관심이 클 수밖에 없고 새로운 철산지를 찾는 건 고구려만 아니고 한삼국이 모두 같습니다. 신라도 전에 철산지를 얻으려고 북방으로 영토를 확장해 나가지 않았습니까?"
양신의 대답에 김호림이 입을 열었다.
"국경은 대개 산줄기나 강들을 경계로 삼게 마련일세. 그러나 한삼국의 경우는 다르네. 철은 국체를 유지하는 필수 물자라 철산지를 놓고 삼국의 쟁탈전이 심할 수밖에 없네. 오늘날에 그어진 국경선은 대부분 그 때문에 그어진 걸로 알면 되겠네. 철은 국방을 위한 무기를 만들고, 백성들은 농사를 짓는데 철제 농기구가 필수품이 아닌가? 그걸 제대로 공급하지 못하면 백성들이 다른 나라로 흩어져 나가기 때문에 각국은 철산지 확보에 혈안이고 전쟁도 불사하지 않을 수가 없네."
술좌석을 파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양신은 걱정스러운 말했다.
"해론, 오늘은 내가 쓸데없는 말을 많이 한 것 같아 걱정이네. 내게 도움을 줄 분들의 비위를 상하게 만들지는 않았을까 해서 그러네."
"양신, 자네는 태생이 남의 비위를 잘 맞추진 못할 사람일세. 그러나 자네가 솔직한 태도를 보인 건 잘했다고 보네. 다만 전군님이 자네를 보통의 야장으로 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드네."
양신은 고개만 끄덕이는데 해론은 농담처럼 말했다.
"양신, 자넨 앞으로 억지로 비위를 맞추려고 들기보다 솔직한 태도를 보이는 게 바람직할 것 같네."
해론의 말에 양신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러나 김유신이 보인 고구려에 대한 반감은 마음에 걸렸다. 또 그런 사람이 자신의 후견인이 될 수가 있을까 하는 희의감도 일었다.
"해론, 내가 신라에 온 게 고구려에 알려지는 것도 걱정일세."
"자넨 숨겨진 인질이라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된다고 하지 않았나?"
"내가 숨겨진 인질이라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건 무슨 뜻인가?"
"신라는 숨겨진 인질은 필요할 때만 써먹을 것일세. 그러므로 당분간은 고구려에 알리진 않을 것이니 걱정은 하지 말게."
"필요할 때만 써먹을 인질이라 고구려엔 알리지 않는다?"
양신은 해론의 말이 농담처럼 들리지 않았다. 차라리 그렇게 된다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밀두도를 돌려받기 위해선 앞으론 좀 순응하는 태도를 보여야 하겠다는 생각을 했다.
"나는 밀두도를 되돌려 달라는 말을 꺼내려다 그만 두었네."
"잘 했네. 그건 간단히 해결될 일이 아니니 차자 방법을 찾아보세."
해론이 단념을 시켜야 했지만 그런 말을 할 수밖에 없었다.
본격적인 여름철로 접어든 어느 날 해론은 말을 두필 끌고 왔다.
"양신, 말을 타게."
"오늘은 어디를 가는데 말을 타는가?"
"오늘은 유두절일세. 신라에선 동쪽으로 흐르는 물에 몸을 씻고 하루를 즐겁게 보내는 날일세. 모처럼 함께 바람이나 쐬러 나가세."
양신은 서라벌로 온지가 1달이 가까워졌다. 해론은 아직도 양신에게 거리를 구경을 못시켜서 늘 미안하게 여겼다. 그런데 김춘추로부터 양신을 만나보겠다는 전갈이 왔다.
"양신, 자네를 보자는 분이 또 계시네."
"이번에는 어떤 분이신가?"
"아주 신분이 높으신 분일세. 이 나라 임금님의 외손자가 되시네."
"그렇게 높으신 분이 왜 날 보자고 하실까?"
"자네 검술 실력이 대단하단 소문을 듣고 관심이 매우 크시네."
해론의 말에 양신은 좋은 일일지 그렇지가 않을지 걱정이 앞섰다. 양신은 해론을 따라 동쪽으로 길을 떠나 작은 산을 넘고 나니 푸른 동해가 드넓게 펼쳐져 있었다.
"해론, 바다가 나왔군!"
양신이 외치자 해론이 대답했다.
"동해일세. 자네는 저 바다를 야장선을 타고 지나지 않았는가?"
"그렇군! 서라벌에서 바다가 이렇게 가까운 줄 몰랐네."
"저 바다에서 다시 배를 타고 고구려로 가고 싶진 않는가?"
양신이 고개만 끄덕여 보이자 해론은 쓴웃음을 지었다.
"이 부근에는 어부들이 타는 전마선들밖에 없네. 혹시 그것을 훔쳐 탄들 거친 바다를 헤쳐 나갈 수가 없으므로 탈주는 꿈도 꾸지 말게."
양신은 해론의 말 속에 뼈가 있다고 들었다. 두 사람은 이번엔 해안을 끼고 북상했다. 동해는 거친 파도가 일렁거리고 떠다니는 배들도 별로 없었다. 한 식경쯤 가서 경치가 좋은 곳에 당도했다.
양신의 입에서 탄성이 터졌다.
"여긴 절경이 펼쳐져 있군!"
"양신, 골짜기 안으로 조금만 거슬러 오르면 별천지가 있네. 자네는 오늘 열 두 폭의 폭포가 쏟아지는 장관을 볼 수가 있을 것일세."
해론은 앞장을 서 맑은 물이 흐르는 시내를 따라 계곡 속으로 들어갔다. 얼마 가지 않아서 폭포수가 굉음 같은 소리를 내며 쏟아져 내렸다. 떨어져 내린 물은 큰 소(沼)를 이루고 소용돌일 쳤다.
폭포 근처에는 큰 차일이 쳐져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두 사람이 차일 앞으로 다가들자 안에서 김유신이 나와 맞았다. 그 속엔 10대 후반쯤으로 보이는 미소년(美少年)이 앉아 있었다.
해론은 연소한 청년에게 다가들더니 정중히 허리를 굽혔다.
"전군님도 오래간만에 뵙겠습니다."
"해론님, 어서 오시오. 외국 손님도 함께 오셨구려?"
전군(殿君)이란 호칭을 듣는 김춘추(金春秋)는 화사한 웃음을 지으면서 맞았다. 연소한 나이임에도 태도가 의젓하고 화술도 좋아서 남의 마음을 사로잡기에 능하다는 소문이 났다.
"양신, 전군님께 인사를 드리게."
해론의 말에 양신은 허리를 깊이 숙여 절부터 했다.
"전군님, 처음 뵙겠습니다. 저는 양신이라고 합니다."
"반갑소. 내 이름은 김춘추요."
수인사가 끝나고 김춘추는 양신을 푸짐하게 차려진 음식상 앞으로 데려가 앉았다. 모두는 자리를 잡고 김춘추가 술병을 들고 따르려고 하자 양신은 황송한 듯 무릎을 꿇었다.
"양신님, 나는 격의 없는 자리를 만들고 싶소. 편히 앉으시오."
"전군님, 고맙습니다."
김춘추는 양신에게 술을 따라주고 나서 물었다.
"이곳 경치가 어떻습니까? 고구려에도 큰 폭포가 있겠지요?"
"저는 고구려 땅을 다 돌아다녀 보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나 불함산의 천지폭포를 한번 가 본 적은 있습니다."
김유신이 그 말에 끼어들었다.
"양신님, 불함산은 사람들의 숭앙을 받는 산이라고 알려져 있소. 그 산에 있다는 폭포를 천지 폭포라고 합니까?"
"그렇습니다. 매우 큰 폭포입니다. 산의 정상엔 둘레가 수 십리나 되는 호수인데 거기서 사시사철 어마어마한 물이 쏟아져 내립니다."
"이 폭포보다 얼마나 더 크고 높기에 그렇습니까?"
"천지폭포는 사람 키로 삼십여 길쯤 되고 쏟아지는 폭포수로 패인 소는 그 깊이를 알 수가 없습니다. 폭포수의 물소리가 하도 커서 십여 리 밖에서도 들리고 폭포 언저리엔 늘 자욱한 물안개가 낍니다."
양신은 신라인의 코를 눌러 주고 싶은 마음이 없지도 않았다. 그러나 과장만은 아닌데 김유신은 고구려 자랑을 하려는 것으로 받아들이고 못마땅한 기색으로 물었다.
"양신님, 불함산 정상에 사람들이 올라가기도 합니까?"
"옛날부터 정상에 올라가면 안 된다는 말이 전해집니다. 성스러운 정상을 밟는 사람은 벼락을 맞는다고 해서 감히 오를 엄두도 못 냅니다."
"양신님은 어느 정도까지 올라가 봤습니까?"
"큰 나무들이 자랄 수 있는 중턱까지는 올라갔습니다. 그 이상은 거센 바람이 불어서 관목들이 제대로 자랄 수가 있습니다. 거기다 하루에도 몇 번씩 천둥 번개가 치고 비가 쏟아지는 날씨를 보입니다."
불함산은 삼국인들이 다 알고 있는 터라 관심들이 컸다. 한삼국인은 불함산을 거론하게 되면 이상하게 동류의식이 생기고 마음도 열리게 만드는 데가 있었다. 그래선지 네 사람은 술을 마시면서 불콰해진 얼굴에 웃음들이 끊이질 않고 터졌다. 김유신은 그런 분위기 속에 오직 고구려 내부 사정에만 관심을 둔 터라 또 다시 얘기를 꺼냈다.
"해론은 다갈촌 야장방 시설을 견학했는데 그 규모가 어마어마하게 크고 야장들은 무기를 만드는 기술도 매우 뛰어나단 말을 전했소."
김유신은 성향이 순수해 보이는 양신에게서 뭔가를 얻어내려는 듯한 질문을 했다. 양신은 그럴 때마다 부담감을 느끼고 경계하는 마음이 생겼다. 따라서 민감한 질문엔 소극적인 태도를 보일 수밖에 없었다.
김춘추는 그런 눈치를 벌써 채고 여러 번 말을 돌렸다. 그러나 그 역시 양신을 난처하게 만드는 질문을 자주 던졌다.
"양신님, 나는 철에 관해선 아는 게 별로 없소. 그런데 철도 그 종류가 많다는 말을 들었소. 그에 대한 설명을 듣고 싶소."
양신은 상대의 마음을 사고자 성의껏 대답을 하기로 했다.
"세상엔 제철 기술을 두고 하는 말들이 있습니다."
양신은 그렇게 입을 떼고 그에 대한 설명을 했다.
철은 쓰임에 따라 연철(軟鐵), 선철(銑鐵), 강철(鋼鐵)로 나누었다. 고구려 야장들은 특히 연철 기술이 가장 뛰어났고 큰 자부심을 갖는다는 말도 했다.
"쇠는 다 같은 줄로만 알았는데 그렇지가 않군요? 연철이니 선철이니 강철이니 하는 것은 각기 쓰이는 데가 어떻게 다르오?"
"연철은 성질이 물러서 구부렸다 폈다 할 수가 있습니다. 가느다란 철사도 뽑을 수가 있고 얇게 밀어 철판을 만듭니다. 그게 가장 어려운 기술인데 여러 가지로 유용하게 쓰일 데가 많습니다."
"야장들의 제철 기술이 얼마나 좋으면 쇠를 그렇게 마음대로 주무를 수가 있을까요? 나는 상상이 안 가는데 기술이 좋은 고구려가 부럽소."
김춘추의 말을 김유신이 받았다.
"전군님, 신라도 철사와 철판을 만듭니다. 다만 고구려는 마차 바퀴의 테를 만드는 기술이 특히 뛰어납니다. 중원 땅과 북방의 유목민에게 마차 바퀴 테를 많이 팔아서 큰 수익을 취한다고 합니다."
양신은 김유신이 그런 것도 알고 있어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신라도 그런 좋은 기술을 지니게 되면 얼마나 좋겠소?"
김춘추의 말을 김유신이 또 받았다.
"전군님, 마차를 많이 이용할수록 생활의 편익이 커집니다. 그런데 신라는 기술이 좀 부족해 바퀴 테가 잘 깨지는 흠이 있습니다. 근래 남가라 지물촌도 바퀴 테를 만드는 기술이 크게 향상되었다고 하지만 아직은 결점을 많이 보완하지 않으면 안 될 수준입니다."
김유신의 말을 받아 김춘추가 말했다.
"신라는 그 대신 전투할 때 입는 철 갑주를 만드는 기술이 뛰어나기로 소문이 났지 않소? 고구려도 철 갑주 기술도 좋은지 모르겠소?"
"고구려는 기병 전술을 많이 쓰므로 활동하기에 편한 가벼운 갑주를 입습니다. 철제 갑주는 기병전을 하기에 불편해서 안 됩니다."
양신이 그런 말을 하자 김유신은 또 곤란한 질문을 했다.
"양신님도 얇은 철판을 만드는 기술을 지니고 있겠지요?"
"고구려 야장들은 얇은 철판을 만드는 기술이 뛰어난 것은 사실이나 저는 그런 기술을 지니고 있지 못합니다."
양신의 대답에 김유신은 불만스러운 듯 말했다.
"왜 그렇소? 해론은 다갈촌에 갔던 신라와 백제 야장들이 마차 바퀴 제조 기술을 전수해 줄 것을 요청했으나 들어주지 않았다고 했소."
양신이 아무런 대꾸를 않자 김유신은 또 짓궂은 말을 했다.
"양신님은 그런 기술을 지니지 않았다지만 누가 그걸 믿겠습니까?"
"저는 명색만 야장이지 제철 기술에 대해선 맹탕입니다. 그 점에 대해선 지물촌의 구미 거수님도 잘 아시는 일입니다."
"명색만 야장이라니 그런 야장도 있다는 말씀입니까?"
"저는 어려서부터 검술 연마에만 열중해서 그렇습니다. 공방에 들어가도 쇠를 단조하는 쇠망치를 휘두르는 일만 했습니다. 그 일도 기술을 익히려는 목적보다 팔뚝의 힘을 기르기 위함이었습니다."
양신이 변명을 하자 해론이 입을 열었다.
"저는 고구려에서 들은 얘기가 있습니다. 다갈촌 야철방은 기술을 다른 야장방에 절대로 전수하지 않을 만큼 엄격히 다룬답니다."
김유신은 해론이 변호를 하려는 걸로 보고 불만스럽게 말했다.
"한 나라 안에서 기술을 나누지 않는다면 볼 장을 다 본 나라로군!"
김춘추는 너무 심한 말을 하는 김유신을 제지하려 듯 입을 열었다.
"부제님도 다갈촌 검술대회에 출전했으면 좋았을 텐데 아쉽소."
김유신이 대답을 않자 김춘추는 이번엔 해론에게 고개를 돌렸다.
"해론님, 섭섭하게 들릴 말이나 요즘 낭도들 사이에선 고구려 검술대회에서 해론님이 거둔 성적을 놓고 실망이 크다는 말이 돈다고 하오."
해론도 그 말에 고개를 절로 떨구게 되었다. 무엇보다 백제보다 한 등급이 밑이라서 낭도들은 자존심이 상한 분위기였다.
"양신님이 왜관의 고수를 누러놓자 낭도들 사이에선 김유신님과 양신님이 대결을 한번 해보면 어떻겠느냐는 말들이 나온다고 들었소."
김춘추의 입에서 뜻밖의 말이 나오자 좌중은 침묵하게 되었다. 김유신도 낭도들이 양신을 통쾌하게 눌러주길 바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때문에 신경이 많이 쓰였는데 그렇다면 김춘추가 오늘의 자리를 마련한 목적이 거기에 있지 않을까 하는 의문이 일었다.
"이 자리에서 날 뺀 세 분은 모두가 검인이오. 특히 양신님은 고구려의 일인자이고 부제님 또한 신라 최고의 검인으로 명성이 났소. 나는 그런 두 분이 한번 겨뤄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드오."
김춘추가 꺼낸 말은 좌중의 분위기를 숙연하게 만들었다. 해론도 그런 말을 꺼낸 의도가 어디에 있는지 생각해 보게 되는데 특히 낯 색이 변한 김유신은 농담으로 흘려들을 수가 없었다.
그때 김춘추는 두 사람의 이름을 동시에 불렀다.
"부제님과 양신님."
김유신과 양신은 동시에 대답했다.
"예, 전군님."
"두 분이 한번 대련을 펼쳐 보이면 어떻겠소?"
그 말에 두 사람은 똑 같이 아무런 대답을 못했다.
"두 분 중 먼저 부제님의 의견을 듣고 싶소."
김춘추는 의견을 묻는 게 아닌 답변을 요구하는 태도였다. 김유신은 가부 간의 대답을 해야 하는데 입이 떨어지질 않았다. 한참 만에 헛기침을 터뜨린 뒤 겨우 입을 열었다.
"양신님은 어떤지 모르나 저는 전군님의 뜻을 받들겠습니다."
김춘추는 그 말을 듣고 이번엔 양신을 돌아다보았다.
"양신님도 응해 주었으면 좋겠소."
양신은 김춘추의 그런 요구에 여간 당황하지 않았다. 그것은 강요나 다름없을 뿐더러 김유신이 먼저 승낙을 했기 때문에 난처한 얼굴로 해론을 바라보는데 해론은 당황한 듯 눈길을 피했다.
"전군님, 저로선 생각해 볼 시간이 필요하겠습니다."
양신이 겨우 그런 대답을 하자 김춘추는 뜻밖의 말을 했다.
"나는 양신님이 신라를 떠나고 싶어 한단 말을 들었소. 그 마음을 잘 알기에 만약에 응해 주신다면 신라를 떠날 수가 있게 돕겠소."
김춘추의 말에 양신은 적이 놀라며 떨리는 음성을 흘려내었다.
"전군님, 그 말씀을 믿어도 되겠습니까?"
양신이 반문하자 김춘추는 고개를 끄덕이며 반문했다.
"내 말이 미덥지가 않소?"
"아닙니다. 다만 돌아가게 될 때는 요구를 할 게 있습니다."
"무슨 요구요?"
"제가 지니고 온 장도를 돌려받지 못하면 떠날 수가 없습니다. 전군님이 그 문제도 해결해 주신다면 응하겠습니다."
"그런 요구라면 좋소. 약속을 하겠소. 이것으로 결정은 났소."
어느덧 해는 기울고 술과 음식도 바닥이 났다.
김춘추는 취흥으로 도도해진 얼굴로 그만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폭포 밑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모두는 그 뒤를 따라 폭포 밑으로 가까이 다가들자 자욱한 물안개 속에서 귀마저 먹먹해졌다.
"우리, 폭포 위로 올라가 봅시다."
김춘추은 말하고 앞장을 서 산기슭을 타고 올랐다. 모두는 그 뒤를 따라 폭포가 시작되는 절벽 위에 이르렀다. 그곳은 물이끼가 잔뜩 끼어 매우 미끄러웠다. 김춘추는 그곳에서 호연지기를 폈다.
"야, 호."
세 사람도 따라서 목청껏 소리를 질렀다. 그때 위태위태하게 서 있던 김춘추가 갑자기 중심을 잃고 미끄러졌다. 그리고 절벽 중턱에 서 있는 죽은 나뭇가지에 옷이 걸린 채 매달리게 되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일어난 일이었다. 김춘추가 대롱대롱 매달린 나뭇가지는 곧 꺾일 것 같고 깎아지른 암벽은 접근할 수가 없었다. 남은 사람들은 모두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때 양신은 절벽 밑으로 몸을 날려 마치 나는 새처럼 접근해 갔다. 양팔로 김춘추를 껴안자 그대로 떨어져 폭포의 소에 풍덩 빠져들었다. 비석암에서 습득한 절마낙법(切磨落法)을 쓴 덕분이었다.
잠시 후 두 사람의 머리가 수면 위로 다시 떠올랐다.
양신은 푸하고 날숨을 쉬었고 김춘추도 숨을 내뿜었다. 그런 뒤 양신은 김춘추를 끌어안고 물가로 헤엄을 쳐나갔다. 그것을 본 김유신과 해론은 절벽 위에서 다급히 밑으로 뛰어 내려갔다.
김춘추는 양신을 의지해 겨우 물가로 기어 나오자 그대로 땅바닥에 벌렁 눕고 말았다. 그리고 하늘을 멍하니 올려다봤다. 그때 허겁지겁 달려온 김유신이 외쳤다.
"전군님, 다치신 데는 없으십니까?"
"양신님 덕분에 나는 살았소."
김춘추는 말하고 자기가 매달렸던 절벽을 올려다보았다. 김유신과 해론은 기쁨에 눈물만 흘리면서 김춘추를 부축해 세운 뒤 차일 안으로 들어갔다. 김춘추는 정중하게 양신에게 감사를 표했다.
"양신님이 아니었으면 나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니게 될 뻔했소."
양신은 무릎과 팔뚝에서 피가 흐르고 있었다. 김춘추는 그것을 보고 안타까운 표정으로 물었다.
"양신님, 상처가 그처럼 큰데 매우 아프겠소."
"살갗이 조금 까졌을 뿐 괜찮습니다. 전군님이 더 걱정입니다."
김춘추는 도리어 자신을 걱정하는 양신에게 더욱 고마움을 느꼈다.
"양신님 고맙소. 나는 이만 돌아가야 하겠소."
김유신은 김춘추를 말에 태우고 먼저 그곳을 떠났다. 남은 양신과 해론은 해안가로 나갔다. 양신은 바다를 보며 여기서 해안을 끼고 그대로 북상하면 고구려에 이를 수가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해론은 무슨 생각에 잠긴 양신에게 안쓰러운 눈길을 보냈다. 양신은 밀두도를 찾기 위해 김유신과 검술 대련을 갖기로 한 것인데 김춘추가 그런 제안을 한 이유가 무엇일까 하는 의문이 일었다. 아무래도 즉흥적인 제안은 아닌 것 같았다. 왜냐하면 며칠 전 김호림이 꺼낸 말이 문득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김호림은 갑자기 공주님의 뜻에 따라 김유신에게 주형 자리를 넘기려고 한다는 말을 했었다.
그때 해론이 물었다.
"주형님, 그러시면 섭섭하시지 않겠습니까?"
"나는 섭섭할 게 없네. 내가 주형 자리를 맡은 것도 공주님이 하도 졸랐기 때문인데 무슨 미련이 있겠는가? 다만 공주님이 유신을 그 자리에 앉히려면 상당한 어려움이 따를 것 같아 그게 걱정일세."
"주형은 폐하께서 지명을 하시는 자리가 아닙니까?"
"그야 물론이지. 그런데 유신은 문세가 너무 약해서 걱정일세. 그 때문에 공주님은 양신을 남가라에서 서라벌로 데려 온 것으로 보네."
"주형, 공주님이 양신을 서라벌로 데려왔다는 말씀입니까?"
"그 일은 자네만 알고 누구에게도 말하지 말게."
해론은 그런 대화를 나눈 것을 떠올리며 어떤 의문이 풀리는 것 같았다. 그 말대로 오늘 김춘추가 자리를 마련했고 김유신과 양신의 검술 대결을 제안을 한 것이며 그 뒤엔 덕만공주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덕만 공주는 외삼촌인 김호림을 주형 자리에 앉혀서 뒤에서 조정을 하려고 했던 것이다. 그러나 마음에 들지 않을 때가 너므 많아서 실망했다. 불교에 심취해 정치엔 별 뜻이 없고 화랑도 일도 제대로 보질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김유신을 부제(副弟)로 앉혀 김호림을 보좌하게 했더니 전체적으로 활기를 되찾아 갔다. 덕만은 화랑도를 완전히 장악하자면 김유신이 주형이 될 필요성을 느겼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다. 주형 은 주로 세력 가문에서 발탁하는 전통이 있고 특히 내물계의 독차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때문에 아무리 능력이 뛰어나도 문세가 약한 김유신을 주형으로 만들면 낭도들의 지지를 받기가 어려운 약전이 있었다. 더욱이 또 한명의 부제는 내물계의 좌장격인 이벌찬(伊伐湌) 후직(后稷)의 아들인 보종(普宗)이었다. 김유신이 보종을 누르고 주형 자리에 오르자면 특별한 무엇이 없고는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그런 참에 고구려인 양신이 신라로 온 것이다. 거기다 뛰어난 검술로 왜관의 유명한 검객이 도꼬마로를 눌렀다. 그 소식을 접한 화랑도들은 여간만 관심들이 크지 않았다. 그 점을 노린 덕만 공주는 김춘추와 한 가지 모의를 하기에 이르렀다. 김유신을 주형 자리에 앉히기 위해 양신을 이용할 계획을 세웠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