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사비성(泗泌城)
백제 왕궁을 감싸 안은 부소산 기슭에 위사좌평(衛士佐平) 목돈(木敦)의 저택인 목가장(木家莊)이 있다. 목돈은 왕궁 수비 책임자로 목가무문(木家武門)의 문주이기도 했다.
목가장의 용마루에 그믐달이 수줍게 걸려 있었다. 그때 후원의 담장 밖에서 흰 복면을 한 사람이 접근해 왔다. 그는 사비성에서 의협(義俠)으로 소문이 난 백가면(白假面)이었다.
백가면은 몸을 솟구쳐 목가장의 후원 담장을 넘어 들었다. 안에선 자욱하게 울려 퍼지던 풀벌레 소리가 뚝 끊겼다. 땅에 내려선 그는 자세를 낮추고 주변을 살폈다.
풀벌레 소리가 다시 이어지는 가운데 백가면은 걸음을 옮겨 별당 쪽으로 접근했다. 별당 마루 기둥에 몸을 착 붙이고 주변을 살핀 뒤 대청마루 위로 올라가서 방문 앞에 섰다.
백가면은 손가락에 침을 묻혀 창호지에 구멍을 뚫을 뒤 눈을 대었다. 방안에선 목돈이 세상모르게 코를 골며 잤다. 그 곁에는 젊은 여인이 앉아 눈물을 흘러내리고 있었다.
목돈은 색한(色漢)이었다. 그는 사비성의 여인들 중 얼굴이 반반 하단 소문을 들으면 납치해다 잠자리 시중을 들게 했다. 그런데 이번 여인은 병든 남편과 늙은 시부모를 부양하는 처지였다.
백가면은 가만히 방문을 열었다. 고요하게 타던 등촉이 잠시 바람결에 흔들렸다. 여인이 놀라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쉿."
백가면은 검지를 입에 가져다 대고 밖으로 나오라고 손짓했다. 여인은 백가면에 관한 소문을 이미 들은 터였다. 두근거리는 가슴을 누르며 잠든 목돈을 내려다보며 조용히 몸을 일으켰다.
여인은 백가면에게 손을 잡힌 채 끄는 대로 대청마루로 나섰다. 겁을 먹고 다리가 허청거려서 걸음을 뗄 수가 없었다. 백가면은 잠시 걸음을 멈추는 여인을 강하게 잡아끌었다.
두 사람은 마루를 내려가자 후원 담장을 향해 뛰기 시작했다. 그러나 여인은 마당을 절반도 못 가서 숨을 헐떡거렸다. 백가면은 여인이 숨을 돌리게 하려고 걸음을 세웠다.
"어머!"
여인의 입에서 겁에 질린 음성이 흘러나왔다. 어디서 나타났는지 3명의 사내들이 앞을 가로막았다. 야간에 순시를 하던 목가무문의 문생들이었다. 백가면은 재빨리 등에서 장도를 빼들었다.
백가면은 먼저 주변을 살폈으나 3명밖에 더는 눈에 띄는 자들이 없었다. 말없이 그들에게 길을 비키라는 손짓을 했다. 문생들 중 하나가 우렁우렁 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오라, 소문만 무성하던 백가면이 나타났군?"
그 말을 칼칼한 음성의 사내가 받았다.
"내가 오늘 백가면을 보게 될 줄 누가 알았나?"
이번엔 목쉰 음성의 사내가 호통을 쳤다.
"백가면, 여기가 어딘 줄 알고 감히 침입을 했단 말인가?"
문생들이 한 마디씩 지껄였지만 백가면은 물러서라는 손짓만 거듭했다. 우렁 한 음성의 사내가 느물대듯 물었다.
"백가면은 벙어린가? 왜 말을 못 하는가?"
"막상 들어와 보니 졸리는 모양이지."
칼칼한 음성의 사내가 빈정대자 겁에 질린 여인은 더욱 뒷걸음질을 치려고 들었다. 백가면은 그녀의 팔을 잡았다.
"그대로 있어요."
백가면은 여인을 눌러놓고 문생들에게 말했다.
"그대들이 길을 순순히 비켜 주면 다치게 하진 않겠다."
칼칼한 음성의 사내가 언성을 높였다.
"백가면, 우리 보고 다치진 않게 하겠단 말을 했는가? 이게 간이 부은 자로군? 어디서 건방진 주둥이를 놀리는 거야?"
우렁 한 음성에 이어 목쉰 음성도 한 마디 보탰다.
"오늘로 드디어 백가면의 정체가 탄로 나게 되었군!"
칼칼한 음성은 슬슬 놀리는 투가 되었다.
"백가면은 정의의 사도를 자처하는 자로 소문이 났지. 그런데 이제 보니 무례하기가 짝이 없는 자로군!"
문생들은 수적인 우세를 믿고 자못 여유 만만하게 주절거렸다. 그러나 그들도 백가면의 무예가 뛰어나단 소문은 들은 터라 선뜻 제압하려는 태도는 보이질 않았다.
백가면은 되도록이면 충돌을 피한 채 목가장을 빠져나갈 생각이었다. 반면에 문생들은 입으로만 자극적인 야유를 던질 뿐 덤벼들 기색도 순순히 길을 터줄 기색도 아니었다.
"댁들도 이 여인의 처지임을 잘들 알지 않소? 이 여인이 없으면 가족들이 굶어 죽을 딱한 사정임을 안다면 조용히 여길 나가게 해 주시오."
백가면의 말에 문생들은 꿀 먹은 벙어리처럼 대꾸를 하지 않았다.
문생들도 여인의 사정을 잘 알고 있었다. 때문에 백가면과 무모한 대결을 벌이기보다 그냥 내보내고 싶은 마음이었다. 그러나 나중에 그 사실을 문주가 아는 날엔 어떤 문책을 당할지 몰랐다.
아무튼 간에 양쪽은 다 같이 충돌을 원치 않았다. 백가면은 어렵고 급박한 상황에 처했다. 시간을 끌수록 불리해질 수밖에 없으므로 어떻게든 문생들을 설득하려고 사정 조가 되었다.
"사정을 봐주시오. 순순히 비키지 않으면 무찌를 수밖에 없겠소."
백가면의 으름장에 문생들은 좀 당황하는 기색들이었다. 맞서기보다 잠자는 동료들을 깨우고 싶은데 체면이 깎일 일이었다. 그러나 끝내 목쉰 음성이 숙소 쪽을 향해 목청껏 소리를 질렀다.
"집안에 도둑이 들어왔다."
백가면은 그 말에 어쩔 줄을 모르며 또 사정을 했다.
"나는 불쌍한 여인을 구하러 왔지 도둑이 아니요. 그건 그대들도 잘 알지 않소? 도둑은 남의 아내를 빼앗은 바로 이 집의 주인이요."
문생들에겐 그 말이 통할 리가 없었다. 또 다른 문생들도 나오게 되면 더욱 불리해지게 되었다. 백가면은 또 공격에 나서 접전이 벌어지고 문생 중 하나가 땅바닥을 나뒹굴자 두 명은 뒤로 물러섰다.
마침 달이 구름 속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이 자들은 내가 맡겠으니 어서 저 담장을 넘어서 도망쳐요."
백가면은 여인에게 말했으나 그 순간 목돈이 그곳에 나타났다.
목돈은 백가면이 침입했을 때 잠을 깼으나 자는 척했다. 다행히 침입자가 살의를 품고 있지 않음을 감지하고 그대로 코를 골았다. 그러나 여인을 방을 나가자 재빨리 몸을 일으켰다. 벽에서 장도를 떼어 들고 밖으로 나와 보니 문생들이 백가면을 가로막고 있었다. 감히 자기 집을 침입한 것에 자존심이 크게 상했다. 독 안에 든 쥐로 보면서도 문생들이 한심하게 무릎을 꿇은 것에 화가 치밀었다.
그때 땅바닥에 쓰러졌던 문생이 몸을 일으켰다.
"괜찮으냐?"
목돈의 질문에 문생은 대답했다.
"예, 문주님."
문생은 대답은 그렇게 했지만 괜찮지가 않았다. 등이 축축해진 느낌에 손을 돌리자 등줄기에서 피가 흘렀다. 그 순간 갑자기 맥이 빠지고 다리가 휘청거려서 도로 주저앉았다.
목돈은 백가면의 검술 실력이 궁금했다.
"백가면은 내가 맡을 테니 모두 물러서라."
그 명령에 문생들은 부상을 당한 동료를 부축해서 뒤로 물러났다.
"백가면, 무예가 대단하구나?"
백가면은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네가 쓰는 검법을 보니 백가무문 소속이로구나?"
목돈의 말에 백가면은 당황했다. 백가면은 문생들을 서둘러 제압하려고 선풍도(仙風刀)를 썼는데 목돈의 매서운 눈초리는 그걸 단번에 알아채서 등골이 다 오싹해질 노릇이었다.
"백가면, 그대가 오늘 밤에 내 집을 침입해서 이런 소란을 피우고 있는 걸 그 쪽 문주께서도 알고 계신가?"
백가면은 자신의 정체가 여지없이 드러나게 되자 그냥 탈출할 수밖에 없다는 판단을 내렸다. 목돈은 그런 속내를 꿰뚫어 본 듯 몇 발자국을 옮겨 진로 차단하는 태도로 버티고 섰다.
"백가면, 대답을 해봐라. 기면 기고 아니면 아니라고 말을 해야 하지 않는가? 백가무문 사람답지가 않은 태도로군!"
"저는 백가무문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사람입니다."
백가면의 대꾸에 목돈은 엄한 음성으로 질타했다.
"누굴 속이려고 드는가? 안 되겠다."
목돈은 호통을 치고 장도를 쓰윽 뽑아들자 마자 번개처럼 공격에 나섰다. 목가검법의 특기인 우벽도와 좌벽도를 번갈아 구사해서 백가면은 감당하기가 힘들고 정신을 못 차릴 지경이었다. 그래도 혼신을 다해 막아내다가 끝내 공격으로 전환할 수가 있었다. 그런데 목돈의 방어는 그물코처럼 빈틈이 없어 뚫을 데가 없었다.
백가면은 더욱 과감한 역공을 펼치자 목돈이 좀 주춤거리게 되었다. 양쪽이 다 같이 공격 일변도로 나가는 팽팽한 대결이 계속되면 그만큼 위험성도 더 커지게 마련이었다.
백가면은 이제 선풍도를 감추지 않고 썼다. 목돈의 좌우를 연속적으로 요격해 들어갔다. 목돈은 백가면이 승부수를 걸려는 공격에 자꾸만 뒷걸음질을 치게 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목돈은 자신을 천하의 고수로 자처했다. 그러나 백가면은 만만히 볼 상대가 아님을 알았다. 더욱이 백가무문의 장기인 선풍도로 밀어붙이는 위력을 감당해내기에 쩔쩔맬 때가 많았다.
대결에서 한쪽이 강공 일변도로 나가면 상대 쪽은 자연스레 방어를 취하게 되기 마련이었다. 목돈은 백가면이 쓰는 선풍도가 그동안 많은 개량이 이뤄져 대적하기가 까다로웠다.
목돈은 처음에 간단히 제압할 줄 알았던 상대에게 고전을 면치 못하자 무슨 방법을 찾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한편으론 백기(伯琦)가 꽤나 훌륭한 문생을 길러냈다는 생각도 하고 있었다.
백가면 역시 점점 두려움에 빠져 들지 않을 수가 없었다. 목가무문 문주의 검술 실력은 명성만큼이나 오묘한 데가 있었다. 그만 대결을 피하고자 갑자기 뒤로 몸을 빼 물러섰다.
목돈 또한 그 자리에서 움직임을 멈추었다. 피차간에 상당한 거리를 두게 되어 휴식을 취할 속셈이었다. 심한 피곤기로 가쁜 숨결을 고르면서 백가면을 이윽히 바라보았다.
백가면도 노련한 고수를 더 이상 상대해선 안 된다는 생각이었다. 나이답지 않게 목돈의 몸놀림이 빠르고 유연함에 적이 놀랐다. 다만 기력이 많이 소진된 것 같아 조금은 마음이 놓였다.
목돈은 자신의 나이로는 더 이상의 접전은 무리로 판단했다. 시간을 끌수록 불리해지는 쪽은 자신이었다. 그런데 상대로부터 이상한 느낌을 받아서 고개를 갸우뚱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백가면의 몸매는 어딘지 낭창낭창한 버들가지처럼 휘고 감겨드는 데가 있었다. 여리고 유연함 속엔 송곳처럼 날카로움도 숨겨져 있었다. 자신이 작은 실수라도 저지르게 되면 치명타를 입을 수도 있겠단 판단에 경계심이 일었다.
백가면도 큰 고민에 빠지긴 마찬가지였다. 목가장에서 목돈과 마주치면 어쩌나 하는 걱정을 했는데 그게 현실이 되고 말았다. 부친은 목돈을 상대하기가 매우 까다로운 자라는 말을 한 적이 있었다. 그런 고수를 자신이 상대한다는 것은 지나친 만용이 아닐 수가 없었다.
"소생은 좌평님과 대적할 자가 못 되오니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백가면은 머리를 숙여 보였다.
"그런가?"
목돈은 반문을 하면서도 고민이었다. 나이를 먹은 체력은 한계를 느껴 더 버틸 수가 없었다. 그대로 계속했다간 자칫 목숨을 잃는 위험에 처할 수도 있었다. 그럼에도 백가면은 놓칠 수가 없었다.
"소생은 좌평님께 부탁을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뭔가?"
"저 아낙네를 데리고 나가게 해 주십시오."
목돈은 그 말이 조롱처럼 들렸다. 더욱이 문생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매우 건방진 소리까지 들어 더욱 체면이 깎였다. 화가 다시 치솟고 괘씸해서 백가면을 그대로 보낼 수가 없었다.
"이런 발칙한 것을 봤나!"
목돈은 외침과 동시에 공격으로 들어갔다. 백가면도 맞서 격렬한 접전이 다시 벌어졌다. 한순간 목돈의 소매 자락 일부가 잘려 허공으로 떠올랐다. 아연해진 목돈은 동시에 여인의 체취 같은 것을 맡았다. 서너 칸 몸을 뒤로 빼고 흐려진 달빛을 의지해서 백가면의 동그스름한 어깨와 가녀린 허리를 유심히 훑어보게 되었다.
"아니?! 저건 계집이 분명한데?"
목돈이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은 백가면은 흠칫 놀랐다.
"좌평님, 소생은 이만 물러갑니다."
백가면이 떠날 태세를 취하자 목돈은 다급하게 불렀다.
"백가면, 빈손으로 돌아가서야 되겠는가?"
"하오면 저 여인을 데리고 갈까요?"
목돈은 백가면이 변성(變聲)을 쓰는 것도 알아채었다.
"아무렇게나 하려무나."
"좌평님, 감사합니다.
"왜냐하면 나는 저 계집보다 널 품어보고 싶어서 그런다."
목돈이 이죽거리자 백가면은 발끈했다. 꽥 소리를 지르려다가 대신 여인의 손을 잡았다. 그러자 목돈은 철쭉이 서서 구경만 하는 문생들을 향해 큰 소리로 꾸짖었다.
"이 멍청한 놈들아, 저 계집을 잡아야 하지 않겠는가? 언제까지 구경만 하고 있을 것이냐? 소리를 질러 전부 다 깨워라. "
목돈의 명령이 떨어지자 멀찍이 서 있기만 하던 문생들은 동료들을 깨우려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댔다. 백가면은 여인을 데리고 나가긴 틀렸다는 판단에 여인에게 급히 말했다.
"미안해요. 오늘은 구해 드릴 수가 없겠어요."
백가면은 여인의 손을 놓고 칼을 휘두르며 문생들의 포위망을 뚫었다. 그리고 후원 담장으로 달려가서 눈 깜짝할 사이에 뛰어넘어 밖으로 사라졌다. 쫓아간 문생들은 닭 쫓던 개꼴이 되었다.
목가장 안은 뒤늦게 숙소에서 쏟아져 나온 문생들로 소란스러워졌다. 목돈은 이리 뛰고 저리 뛰며 우왕좌왕하는 꼴들을 보다가 문득 백가면이 있던 자리로 시선이 갔다.
"저건 백가면이 흘린 것 같은데?"
목돈은 다가들어 보니 향낭 주머니 하나가 땅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그것을 집어 들자 계집의 체취가 배인 향기가 몽롱하게 콧속으로 스며들었다. 백가면은 틀림없는 계집이었다.
사비성의 귀족 가문은 사(沙), 진(眞), 목(木), 연(燕), 목협(木協), 국(國), 백(伯), 고(高)씨 등 8대 성씨(姓氏)가 주축을 이뤘다. 그들은 각기 고유한 문양(紋樣)을 썼는데 그것을 깃발이나 의복 등에 수(繡)를 놓았고 특히 향낭 주머니에 가장 많이 썼다.
목돈은 어두워서 잘 볼 수가 없는 향낭주머니를 허리춤에 찔렀다. 그리고 그 자리에 서서 벌벌 떨고 있는 여인을 향해서 말했다.
"네 잘 못은 아니니 그만 들어가자."
목돈의 명령을 받은 여인은 그대로 따를 수밖에 없었다. 여인은 다시 별채로 돌아가자 방구석에 등을 기대고 웅숭그리듯 앉았다.
"그만 자거라."
여인은 뭉그적거리며 이불자락을 들쳤다.
목돈은 향낭 주머니를 꺼내 들고 등촉에 비춰 보았다. 앞면은 매화(梅花)를 뒷면은 오동잎으로 수를 놓은 것이었다. 매화는 백씨 가문의 문양이고 오동잎은 목씨 가문의 것이었다.
향낭 주머니를 놓고 판단을 하건대 목씨 가문에서 백씨 가문으로 시집간 여인의 것이 분명했다. 그렇다면 백가면이 그런 향낭 주머니를 지닌 것에 어떤 의문이 생기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 향낭 주머니는 우리 가문에서 백씨 쪽으로 출가한 여인의 것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백가면은 대체 누구란 말인가?"
목돈은 아무리 생각해봐도 근래엔 양 가문 사이에 혼사가 없었다. 다만 향낭 주머니의 모서리가 헤진 걸로 봐서 꽤나 오래된 물건이었다. 미간을 좁히며 생각에 잠기다 4촌 여동생을 떠올렸다.
"이건 예지의 것이로구나."
예지(藝枝)는 미모가 빼어났고 검술도 익혀서 한때는 사비성의 젊은 총각들에겐 선망의 대상이었다. 그런 예지는 백기와 혼인을 했고 쌍둥이 딸을 낳았다. 목돈은 그제야 탄식을 하듯 중얼거렸다.
"이 향낭 주머닌 예지로부터 주랑이 물려받은 것이다."
목돈은 비로소 백가면이 주랑(珠琅)임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어미처럼 무예를 익힌 것은 몰랐다. 이른 나이에 생을 마감한 예지의 얼굴을 떠올리며 20여 년 전의 회상 속으로 잠겨 들었다.
백기와 목돈은 죽마고우(竹馬故友)였다. 두 사람은 젊은 시절에 함께 타국을 유람한 적이 있고 그러던 중 중원 땅에서 고구려인 을지문덕과 여준을 만나 사귀고 서로 간에 교유가 시작되었다.
네 사람은 죽이 맞아 중원 땅을 돌아다녔다. 그러다 태산(泰山)에서 팔야(叭揶) 무문의 문생들과 패싸움도 벌였다. 그때 네 사람이 뭉쳐 맞서질 않았다면 객지의 고혼(孤魂)이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사비성에선 백가와 목가무문이 쌍벽을 이루었다. 백기와 목돈은 양 무문의 계승자로 검술도 맞수로 젊은이들에겐 우상과 같은 존재였다. 백기의 조부는 좌평(佐平)인데 반해 목돈의 조부는 진장(鎭將)이었다. 무문의 문세(門勢)도 백가보다 목가는 열세라 자연 열등의식을 느껴야 했다.
18년 전이었다. 여준이 사비성에 나타나 백기와 목돈은 여준을 반갑게 맞고 불편 없이 지내게 해 주었다. 그런 세 사람 틈으로 끼어든 게 예지였고 그로 인해 사단이 벌어지고 말았다.
당시 백기는 예지를 연모해 상사병을 앓을 정도였다. 예지도 그런 백기에게 끌려 서로는 혼인을 약속한 사이가 되었다. 그러나 예지는 빈한한 집 딸이라 백기의 부모가 반대를 했다.
예지는 백기의 부모가 받아들여 주질 않아 괴로운 나날을 보냈고 백기 또한 우울함 속에 지냈다. 그럴 때 사비성에 나타난 여준은 두 사람의 사이를 더욱 꼬이게 만들었다.
여준은 예지를 보자마자 반했다. 그렇게 된 데는 목돈의 탓도 컸었다. 목돈은 백기에 대한 은근한 반감이 있는 데다 예지가 상심에 젖어 그 마음을 돌리게 만들려고 여준과 만날 기회를 자주 마련했다. 그런 덕분에 여준은 예지에 대한 연모의 공세를 적극 펼 수가 있었다.
예지는 처음에 여준에겐 별 관심을 두지 않았다. 백기는 예지가 여준과 자주 어울리는 것을 경계하며 불안해했다. 그러면서 목돈이 취하는 태도에 큰 불만을 품고 사이가 더욱 나빠졌다.
백기는 반감이 생겨서 네 사람이 어울리는 자리를 자꾸 빠졌다. 그럴수록 여준과 예지의 만남은 늘어나게 되었다. 예지는 백기의 부모에 대한 섭섭함에 여준과 만남을 피하려 하질 않았다.
남녀 간의 감정처럼 묘한 것도 없었다. 실의에 빠진 예지는 여준의 구애 공세 앞에 조금씩 마음이 흔들리게 되고 어느 날 남녀 간의 야합(野合)이 이뤄지게 되었다.
그것은 굴러든 돌이 박힌 돌을 뺀 격이었다. 여준은 예지의 집에 정식 청혼을 했다. 그러나 예지의 부모는 무남독녀를 타국인에게 주고 싶지가 않고 예지도 부모를 두고 고구려로 갈 수가 없었다.
예지는 여준이 혼인을 한 뒤 백제에서 살기를 원했다. 그러나 여준은 철장직을 승계해야 할 몸이라 그럴 수가 없었다. 고민에 빠진 그는 잠시 왜국을 여행하고 오겠다며 사비성을 떠났다.
그때 예지는 이미 임신을 한 몸이 되었다. 여준은 그걸 모른 채 떠났고 처녀의 몸으로 배는 점점 불러왔다. 예지는 아이를 낳게 될 일로 두려움과 걱정 끝에 목돈에게 사실을 밝혔다.
목돈은 매우 놀랐지만 무슨 대책을 세울 수가 없었다. 생각다 못해 백기를 만나 예지의 딱한 사정을 알렸다. 그러자 백기는 사랑하는 여인을 구할 마음에 혼인을 하기로 결심을 했다.
백기는 부모에게 예지가 자기 자식을 배었다고 거짓말을 했다. 그러자 반대를 했던 부모도 자기네 씨를 내칠 수가 없으므로 아들의 뜻대로 며느리로 받아들이기로 결정을 내렸다.
양가의 부모들은 곧 혼사 논의로 들어갔다. 그러나 당사자인 예지는 난처하기 그지없었다. 백기를 배신하고 남의 씨까지 밴 몸으로 혼인을 하는 건 천부당만부당한 일이었다. 그런데 양가는 혼례 날짜를 잡고 혼사 준비를 서둘렀다. 난감한 예지는 백기와 혼인할 수가 없는 이유를 부모에게 밝혀야 했지만 뒷감당이 두려워 입을 떼지 못했다. 그리고 한편으론 사랑과 아량으로 감싸 주는 백기가 고맙고 감격했다. 아무튼 간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차일피일 시간을 끌다 혼사 일을 맡았다.
예지는 혼인을 한 뒤 석 달 만에 쌍둥이 딸을 낳았다. 그러나 백기는 조금도 싫은 내색을 않고 아내와 아이들을 아껴 주었다. 예지는 심한 가책을 느끼면서도 한편으론 행복감에 젖어들었다.
여준은 1년 만에 다시 사비성에 나타났다. 그는 예지와 그녀의 부모를 적극 설득해서 고구려로 데려갈 생각이었다. 그런데 예지가 혼인을 했다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기다리고 있었다.
큰 충격과 실망에 빠진 채 목돈을 찾아가서 사정을 알아봤다. 목돈은 예지가 딱한 처지에 몰린 끝에 부득이 그런 선택을 했음을 알려주었다. 그럼에도 여준은 자신의 무책임한 태도는 반성을 않고 예지가 자길 좀 더 기다리지 않은 것만을 원망했다.
여준은 이번엔 백기를 만났다. 그리고 예지는 단념을 하더라도 그녀가 낳은 쌍둥이 자매는 엄연한 자신의 핏줄이므로 데려가겠다고 했다. 그런 요구를 받은 백기는 펄쩍 뛰었다. 그 말은 타당성이 없지도 않으나 지기 부모가 그걸 알게 되면 부부는 파경을 맞게 될 일이었다.
백기는 여준에게 양보를 해서 자신이 가정을 지킬 수 있게 해달라고 설득했다. 그러나 일방적인 패배를 당한 여준은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아 들어줄 수가 없었다. 양쪽은 그처럼 양보할 여지는 전혀 없고 감정만 더욱 악화되어 갈 뿐이었다.
그 같은 양측의 대치 상황은 점점 이성을 잃고 충돌 국면으로 치달았다. 특히 여준은 예지를 빼앗겨 억울하고 분한 마음을 누를 길이 없었다. 자신의 요구가 관철되지 않으면 부모에게 알리겠다고 위협까지 했다. 백기도 그대로 밀리면 끝장이라 강경한 태도로 맞섰다.
목돈은 그런 사태를 두고만 볼 수가 없었다. 어느 날 두 사람을 한 자리에 모아 놓고 타협을 보게 했다. 그러나 어느 쪽도 양보할 뜻이 없어 아무리 설득을 해도 합의점은 찾을 수가 없었다. 설득을 하다 하다 못해이건 말로는 해결이 안 될 일이라 양자가 검술 대결이라도 해서 승자의 결정을 따르는 것은 어떻겠느냐는 제의를 하고 말았다.
두 사람은 말도 안 되는 제안에 침묵만 지켰다. 그러나 백기는 시간을 끌다간 자칫 부모가 알게 될지 모르고, 여준은 분하지만 타국 땅에선 자신이 여러 면으로 불리하다는 판단이었다. 그런데 뜻밖에 백기가 고개를 끄덕여 보여서 여준도 따르기로 극적인 결정이 났다.
"나는 가정과 아이들을 지켜야 하므로 어쩔 수가 없겠소."
백기의 말을 여준도 강하게 받아쳤다.
"그건 내가 할 소리요. 대결 뒤엔 딴소리는 없기요."
그러나 이런 일에 검술 대결은 최선의 방법이 될 수는 없었다. 죽음을 부를 불상사를 빚을 수도 있는 매우 위험한 선택이었다. 그러나 달리 해결책이 없어 목돈을 심판으로 세우는 데까지 합의를 봤다.
두 사람의 대결은 부소산의 군창(軍倉) 터에서 펼치기로 했다. 대결은 시간제한 없이 반식 경마다 휴식을 취하기로 했다. 승패는 한쪽이 스스로 패배를 인정하면 끝이 나지만 그렇지가 못할 경우 목돈이 엄정한 판정을 내리고 두 사람은 그걸 따르기에 동의를 했다.
이튿날 백기와 여준은 즉시 검술 대결로 들어갔다. 접전이 벌어지자 양자의 검술 기량은 막상막하로 드러났다. 좀체 우열을 가릴 수가 없는 두 사람의 팽팽한 대결은 지루하게 이어지기만 했다.
정오에 시작된 대결은 해 질 녘까지 계속되었다.
어느새 땅거미가 지는 가운데 두 사람은 열 번째 휴식으로 들어갔다. 몸들이 완전히 지쳐서 움직일 기력조차 남지 않았다. 두 사람은 파김치가 된 몸으로 앉아서 상대를 바라보았다.
백기는 여준을 제압하기가 힘들겠다는 판단이었다. 때문에 대결을 그만 끝내고 싶었다. 그러나 억울함을 주장하는 상대가 그냥 물러설 리가 없고 그렇다고 자신이 양보할 생각도 없었다.
여준도 휴식을 취할 때마다 여러 가지 생각을 했다. 처음엔 자신감을 갖고 들어간 대결이지만 시간을 끌면서 그게 회의감으로 바뀌었다. 결코 상대를 굴복시키긴 힘들겠다는 판단이었다.
두 사람은 각자 자신이 이기고 말겠다는 다짐을 두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서로 만만치가 않은 상대임을 알게 되었다. 아니 자신이 먼저 무릎을 꿇게 될지도 모를 위기감마저 느꼈다.
여준은 앞뒤를 재보지도 않고 무책임하게 여인의 정조를 빼앗은 것에 대한 반성이 일었다. 더욱이 백기는 사랑하는 여인의 곤경을 감싸주고자 부부의 연을 맺었는데 자신은 철면피하단 생각도 들었다.
어느덧 해가 진 주변은 어슴푸레한 음영이 드리워지고 있었다.
목돈은 꿈쩍도 않고 앉아만 있는 두 사람을 향해 입을 열었다.
"너무들 지쳤소. 오늘은 이만 끝내는 게 어떻겠소?"
두 사람은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목돈은 다시 두 사람에게 타협안을 제시하기로 했다.
"나는 이번 일로 크게 반성을 하게 되었소. 두 분에게 위험천만한 결투를 벌일 제안을 한 것도 여간 부끄럽게 여기지 않소. 뒤늦게나마 후회를 하며 두 분에게 이런 제안을 드리고 싶소."
두 사람은 그런 말을 하는 목돈을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했다.
"먼저 백기에게 묻겠는데 오늘 벌어진 일을 예지가 알고 있는가?"
목돈의 질문에 백기는 고개만 저었다.
"예지가 모르고 있다면 이런 생각을 해보면 어떨까?"
"어떤 생각인가?"
"이번 일은 두 사람보다 예지의 생각이 더 중요하다는 생각일세."
백기와 여준은 그 말을 듣고 고개들을 주억거렸다.
"저는 목돈님의 말씀이 옳다는 생각이요."
여준이 먼저 말하자 백기도 대답했다.
"나도 같은 생각이요. 이 일은 누구 한 사람만의 잘못이 아니고 얄궂은 운명이 빚은 일이요. 때문에 나로서도 이런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잘못된 생각임을 뒤늦게 깨닫게 되었소."
백기의 말에 여준도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나도 백기님 말씀에 동감이오. 나는 백기님에게 일방적인 양보만 요구했는데 잘못이 큼을 깨달았소. 미안한 마음으로 사과를 드리오."
여준의 대답에 백기는 당황했다.
"여준님, 아니요. 나도 내 주장만 편 것을 사과드리겠소."
목돈은 두 사람의 말을 듣고 표정이 밝아졌다.
"두 분이 그런 생각을 한다면 여간 다행스럽지가 않을 일이요. 두 분의 뜻이 그럴진대 무모한 검술 대결은 당장 걷어치웁시다."
여준이 먼저 대답했다.
"나는 그 말씀에 동의하겠소."
"나도 동의하겠소."
백기도 같은 대답을 하자 목돈이 말했다.
"그렇다면 대화를 다시 해 보는 건 어떻겠소?"
그런데 여준이 먼저 뜻밖의 말을 했다.
"아이들은 어머니 품에서 크는 게 행복하오. 내가 양보를 하겠소."
백기는 그 말에 귀를 의심하면서도 내심 크게 반색했다. 그렇지만 자신만이 일방적인 양보를 받는 것은 옳지가 않다는 생각이었다.
"여준님, 고맙소. 나는 지금까지 내 위주로만 생각을 해서 부끄럽소. 여준님이 사비성에 다시 온 것도 지금까지 아내에게 알리지 않았소. 며칠간 여유를 주시면 아내의 의견을 구하고 의논을 해서 적절한 해결 방법을 찾아보겠소."
여준은 그러는 백기에게 두 손을 가로저었다.
"백기님, 그러실 필요가 없습니다. 나는 잠시 울분이 치밀어 이성을 잃고 무리한 요구를 했을 뿐이요. 다행히 지금까지 예지님이 모르고 계신다면 내가 깨끗이 물러나는 게 가장 좋은 해결책이 되겠습니다."
"여준님, 그러면 안 되오. 그 속이 오죽할 것인데 그럴 순 없겠소."
"백기님, 나는 괜찮소. 그냥 떠나겠으니 행복하게 사시오."
여준이 벌떡 몸을 일으켜 세우자 백기는 당황히 가로막았다.
"여준님, 이렇게 하면 어떨지 모르겠습니다."
"백기님, 무슨 말씀을 하려고 하오?"
"백제엔 예로부터 내려오는 풍습이 있소. 쌍둥이를 낳으면 한 짝을 남에게 주워 키우게 하오. 나는 그 일을 놓고 아내와 의논을 해 보겠소."
"백기님, 뭘 의논하겠단 말씀이오?"
"여준님과 내가 아이들을 하나씩 맡아 키우면 어떻겠소?"
목돈도 맞장구를 치며 찬성했다.
"좋은 방법이 있었군? 아이들은 어차피 헤어져 살 운명이라면 두 분이 한 짝씩 맡아 키우면 공평하고도 바람직한 일이 될 것 같소."
여준은 아무런 대답이 없는데 백기가 다시 권했다.
"여준님, 제 뜻을 꼭 받아들여 주었으면 좋겠소. 그렇게 되지 않으면 저로선 평생을 두고 무거운 마음으로 살 수밖에 없겠소."
백기의 말에 여준은 여전히 대답을 않고 목돈이 권했다.
"나도 그렇게 되면 좋겠다는 생각이요. 여준님만 받아들여 준다면 내가 책임을 지고 예지를 설득해서 일이 이뤄지게 해 보겠소."
여준은 두 사람의 설득에도 고개만 저으며 말했다.
"나는 그냥 떠나야 하겠소."
"여준님, 이건 양보만으로 간단히 끝을 내릴 일이 아닙니다. 나중에 후회가 덜 되는 쪽으로 다시 생각을 해 주시오."
"백기님, 말씀은 고마우나 내 생각은 변함이 없소."
"여준님, 어찌 되건 간에 예지가 이 일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하는지가 중요하오, 그걸 알아볼 필요가 있으니 며칠간만 더 머물러 주시오."
"나는 결정을 내렸으니 당장 백제를 떠나겠소."
여준의 단호한 거부에도 백기는 매달리듯 말했다.
"여준님, 이렇게 하시면 어떻겠습니까?"
"백기님, 어떻게 말씀입니까?"
백기는 좀 머뭇거리다 입을 열었다.
"아이들의 얼굴이라도 한번 보고 가시면 좋지 않겠습니까?"
여준은 그 말에는 갑자기 마음이 흔들렸다. 그렇지 않아도 예지와 아이들을 한번 보고 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백기님, 그렇게 해도 되겠습니까?"
백기는 여준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것으로 분위기가 반전되자 목돈이 몸을 벌떡 일으켜 세웠다. 그 일은 아무래도 자신이 맡아서 처리하는 게 좋겠다는 생각에 입을 열었다.
"나로서도 두 분의 결정에 대찬성이요. 백기, 생각해 보니 이 일도 내가 맡아서 예지를 만나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드는데 자넨 어떤가?"
백기는 그렇게 하라고 고개를 끄덕였다.
"백기, 자네는 여준님을 군창터의 주점으로 모시고 가서 화해술이나 마시고 있게. 내가 예지를 만나 답을 받아가지고 돌아오겠네."
목돈은 말을 남기기 무섭게 몸을 일으켜 그 자리를 떠났다. 백기와 여준도 몸을 일으켜 세운 뒤 묵묵히 주점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한편 백기의 집에선 예지가 찾아온 목돈을 반갑게 맞았다.
"오라버니 반가워요. 무슨 바람이 불었기에 여길 다 오셨나요?"
"동생이 보고 싶어서 왔지. 그동안 잘 지냈는가?"
"오라버니가 보시다시피 전 잘 지내고 있어요."
"암, 그래야지."
목돈은 그렇게 입을 뗀 뒤 그동안에 일어났던 일들을 그녀에게 들려주었다. 예지는 놀라움에 어쩔 줄을 모르다 몸이 굳어진 채 멍하니 앉아있기만 했다. 그렇게 한동안 침묵을 지키다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오라버니 말씀대로 저는 따르기로 하겠어요."
"좋다. 내가 여준님을 모시고 다시 이리로 오마. 너는 마음을 단단히 먹고 여준님을 맞을 준비를 하렴. 나는 이만 돌아가서 알리겠다."
목돈은 말을 던지고 부랴 사랴 군창 터로 달려갔다.
예지는 혼자 남게 되자 넋이 나간 사람처럼 눈물만 흘러내렸다. 그동안 시부모를 속인 죄가 너무 큰 것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 깊은 반성과 함께 거짓된 삶도 그만 끝내기로 마음을 먹었다.
귀여운 두 딸에게 젖을 물렸다. 그렇게 젖을 먹여 잠을 재운 뒤 방바닥에 눕혔다. 아이들을 내려다보고 또 내려다보았다. 흔들리는 마음을 가까스로 다잡고 새 옷으로 갈아입었다.
견딜 수가 없는 슬픔 속에 모질게 마음을 다졌다. 아이들을 한 번 더 들여다보고 몸을 일으킨 뒤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으로 방을 나섰다. 뒤꼍으로 돌아가서 감나무 밑에 발판을 놓고 올라섰다. 준비한 올가미 줄을 자신의 목과 나뭇가지에 묶은 뒤 발로 발판을 차 버렸다.
군창터 주점에선 그새 백기와 여준이 고주망태로 취해 있었다. 도착한 목돈이 결과를 전했지만 두 사람은 그런 말을 제대로 알아듣지도 못할 지경이었다. 목돈은 답답해서 혼자 술을 마시다가 역시 취해서 자리에 쓰러지게 되었다. 세 사람이 코를 고는 소리만 방안을 진동시켰다.
이튿날 아침에 백기의 집에서 하인 하나가 주점으로 달려왔다. 그리고 세 사람에게 예지가 목을 맨 것을 알렸다. 놀란 세 사람은 그대로 달려갔지만 예지는 싸늘한 시체로 변해 있었다.
백기와 여준은 예지 앞에서 비통한 울음을 터뜨렸다. 자기들 때문에 죽었다는 죄책감에 견딜 수가 없었다. 예지의 장례를 치른 뒤 두 사람은 약속한 대로 쌍둥이를 한 짝씩 맡아 헤어졌다.
목돈은 오랜 회상을 끝내고 긴 한숨을 흘려냈다.
백제국 조정은 좌평회의를 열었다.
내신좌평 진도(眞度), 병관좌평 사진(沙辰), 위사좌평 목돈, 내두좌평 연기(燕淇), 조정좌평 고숙(高塾), 내법좌평 국보(國甫) 등이었다. 좌평들은 중요 국사를 논의하고 결정되면 국왕의 재가를 받아 시행했다.
최고위 직인 좌평들은 사병(私兵)을 거느리고 상단(商團)을 꾸려 타국과 교역을 하는 특권도 누렸다. 좌평들의 세력은 재력에서 나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중 가장 많은 상선을 보유한 상좌평(上佐平) 진도는 교역의 규모도 큰 만큼 세력도 막강했다.
백제는 철산지가 적어 철정(鐵鋌) 생산을 늘릴 수가 없었다. 어느 나라건 철제품 사용은 날로 늘어났지만 철정 부족으로 대외 교역마저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었다. 그걸 극복하려고 고구려의 철정 공급을 받을 길을 모색했다. 그러나 양국은 관계가 좋지 않은 데다 고구려도 수국과 전쟁 준비로 철정 수급이 늘어나서 백제 요구를 응하기가 힘들었다.
그런 참에 고구려에선 을지문덕이 새 국상이 되었다. 그렇게 되자 목돈은 교분이 있는 을지문덕과 철정 공급을 교섭하게 되었다. 진도는 그런 목돈이 여간 부럽지가 않았다. 두 사람은 본래 밀착관계를 유지해온 사이였다. 목돈은 위사좌평에 오를 때 진도의 지원을 받고자 며느리를 내쫓고 과부인 진도의 딸을 새 며느리로 맞아들였다. 그런데 새 며느리는 성격이 도도해 시집 식구들을 무시하고 전처의 소생을 구박해서 집안은 불화가 잦아지고 말았다.
목등은 그런 새 아내를 매우 미워했다. 그러자 진도의 딸은 남편을 못마땅하게 여겨 친정으로 돌아가기가 일수였다. 그로 인해 양가는 점점 사이가 벌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그보다 더 큰 원인은 다 같이 이재(理財)에 밝아서 축재를 위한 경쟁을 벌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진도 또한 고구려의 철정 공급을 받는 게 절실했다. 때문에 을지문덕과 친분이 두터운 백기의 협조를 얻어야 했다. 그런데 때마침 국왕이 백기를 좌장(佐將)에 앉히려는 걸 알게 되었다.
좌장은 야전군의 군령권(軍令權)을 쥔 군부(軍部)의 최고위 직이었다. 그만큼 중요한 위치라 좌장이 어느 편에 서느냐에 따라 좌평들 간의 세력판도에도 큰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좌평들은 국가보다 개인의 이익을 더 우선시하고 끊임없는 합종연횡으로 권력투쟁을 벌이는 데만 혈안들이었다. 그런 틈바구니에서 왕권은 극도로 위축될 수밖에 없는 형편이었다.
국왕은 왕권을 강화시키고자 백기를 좌장에 앉히려는 것인데 좌평들의 동의를 얻어야 가능했다. 더욱이 현 좌장은 진도 쪽 사람이라 교체하기가 매우 힘들 일이었다. 그런데 때마침 큰 위기를 맞은 고구려가 백제에 동맹을 제의해 왔다.
백제는 한수유역을 신라에게 빼앗기게 만드는데 결정적 역할을 한 고구려는 철천지원수로 여겼다. 그런데 백기는 을지문덕이 국상이 된 계기로 고구려와 손을 잡을 것을 국왕에게 건의를 했다. 그런데다 목돈 또한 동조를 하고 나서 국왕은 유리한 국면을 맞게 되었다.
목돈과 백기는 다 같이 을지문덕과 교분이 두터웠다. 거기다 반대가 심했던 진도마저 고구려의 철정을 공급받으려고 태도를 바꾸었다. 그리고 백기의 협조를 얻으려고 접근하는 기색을 보였다.
백기는 목돈과 비슷한 수준에서 관직을 시작했다. 그러나 목돈은 좌평에 올랐으나 자신은 달솔(達率)에 머물렀다. 목돈처럼 정치적 수완도 없고 합종연횡의 줄을 잘 타지 못한 때문이었다.
국왕은 급변하는 국제 정세를 십분 활용을 해야만 했다. 또 개인적인 이익 추구에 급급한 진도와 목돈을 이용해서 목적을 달성할 계획을 세우고 은밀히 진행을 시키고 있었다.
좌평회의에 국왕이 착석하자 상좌평인 진도가 입을 열었다.
"오늘 좌평회의는 달솔 백기 장군을 좌장에 임명하는 논의하게 되었습니다. 좌평들은 충분한 토론을 해서 결정을 내려 주시오."
좌평들은 진도의 입에서 나온 말에 처음엔 의외란 표정이었다. 그러나 그렇게 된 것은 국왕과 진도 사이에 무슨 합의가 이뤄진 걸로 알아서 진도와 목돈에게 야릇한 눈길을 던졌다.
위사좌평 목돈은 왕궁의 수비군을 총지휘하나 장수들 중 절반은 진도 쪽 사람들이었다. 백기가 야전군을 총지휘하는 좌장이 되어 어느 쪽에 서느냐에 따라 자신과 진도는 우열이 갈리게 되었다.
진도 역시 그 문제를 잘 알고 있지만 낙관적이었다. 그 이유는 목돈과 백기의 사이가 좋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목돈은 죽마고우인 백기와 쉽게 화해할 수가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다.
국왕은 좌평들을 죽 둘러보며 이제부터 자신은 승부수를 던질 차례라고 마음을 다졌다. 좌평들은 자기들끼리 이합집산으로 각축을 벌이면서도 국왕을 견제할 땐 일치단결을 했다. 뿐더러 기회만 있으면 반역의 발톱을 드러내고 보위를 넘보는 잠재적이 경쟁자들이었다. 그러나 그런 속성을 최대한 이용해 진도와 목돈 사이를 조정하면 승산이 있었다.
좌평들도 국왕이 백기를 좌평에 앉히려는 속내를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자신들이 단합하면 좌장 하나쯤은 두려울 게 없었다. 그보단 각자의 세력을 키우고 유지하기에 관심이 클 뿐이었다. 다만 지금은 철제품 부족으로 교역에서 받는 타격을 극복할 방법을 찾는 게 급선무였다. 때문에 국왕의 뜻을 일단은 들어주기로 마음을 먹었다.
국왕은 그런 분위기 속에 좌평회의를 열고 마침내 백기를 좌장으로 삼을 논의에서 합의를 이끌어 낼 수가 있었다. 그걸로 좌평들을 어느 정도는 견제할 힘을 확보하게 된 셈이었다. 모처럼 정치적인 승리를 거둔 국왕은 맏아들인 의자를 머릿속에 떠올렸다. 30세에 가까운 나이로 자식을 2명이나 두었지만 왕자 대접을 못 받고 있었다. 모친이 신라의 공주라 국인(國人)들이 보위를 잇는 걸 원치 않았다. 거기다 왕비의 소생인 새상(塞上) 왕자는 외조부(外祖父)가 병관좌평 사진임으로 막강한 배경을 등에 지고 태자 책봉을 기다리고 있었다.
국왕은 왕비의 친정 세력을 무시할 수가 없는 데다 좌평들도 새상 쪽으로 기울었다. 그러나 국왕은 의자를 태자 책봉할 오랜 숙원을 풀어볼 수가 있겠다는 마음으로 좌평들을 둘러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