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왜여왕(倭女王)
왜국의 여왕 쓰이코(推古)는 19년째 보위를 지켜오고 있었다.
소가우마코(蘇我馬子)는 신하들 중 최고위 직에 있는 대신(大臣)으로 백제계 도래인(渡來人) 후손이었다. 조부 때부터 옛 가락국에서 철정을 수입해 부를 축적했다. 재력으로 세력을 구축한 뒤 전 왕인 수우쥰(崇峻)을 암살하고 조카딸인 쓰이코를 여왕으로 올렸다.
쓰이코는 보위에 오른 뒤 가장 먼저 조카인 쇼토쿠(聖德)를 섭정직(攝政職)에 앉혔다. 우마코가 왕위를 노리는 걸 알기에 섭정에게 모든 권한을 위임해 국정을 총괄시키고 우마코를 견제하게 했다.
쇼토쿠는 원만한 인품으로 정사(政事)가 바르고 학문과 예술 진흥에도 힘을 기울였다. 도덕 정치를 표방해 신하와 호족들로부터 존경과 지지를 얻어 왕실의 안정에 큰 기여를 했다.
왜국 백성들은 처음에 여왕이 보위를 얼마나 지켜낼지에 의문이었다. 그런데 호족들 중에서 왕실에 복속하는 자가 늘면서 여왕의 보위 세력이 두터워져 가서 더욱 안정을 굳히게 되었다.
쇼토쿠는 그에 힘입어 새로 관위(冠位)를 제정하고 헌법(憲法)을 공포했다. 국가 발전을 위해서 율령국가(律令國家) 체제를 구축하고 왕실의 통제력을 강화시켜 나가는 데 힘을 썼다.
왜국은 한삼국에서 유입되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지면서 인총이 날로 늘어났다. 그에 따른 철제품 수요도 급증했는데 신라가 철정 공급을 늘려주지 않아 큰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쇼토쿠는 철정 문제를 외교적으로 풀고자 신라를 설득하는 한편으로 고구려에 철정 공급을 요청했다. 그런데 우마코는 여전히 신라를 침공하겠다는 으름장을 놓으며 타결을 보려고 했다.
고구려는 왜국을 자국 편으로 끌어들일 필요성이 컸다. 때문에 담징(曇徵)과 법정(法定) 두 승려를 보내 철정 공급을 약속했다. 또 왜국이 짓고 있는 법륭사(法隆寺)에 금 3백 돈을 시주했다.
담징은 그림을 잘 그려 가지고 간 색채 물감으로 법륭사의 벽화를 그렸다. 뿐만 아니라 수력을 이용해 돌리는 연자방아를 만들어 왜국 백성들의 생활 편의에 큰 도움을 주었다.
우마코는 쇼토쿠가 고구려의 후원을 얻어내자 경쟁심에 신라 침공 병력을 축자진(筑紫鎭)에 집결시키며 더욱 대립각을 세웠다. 쇼토쿠는 그런 강경책에 대한 우려가 커 화평 쪽에 힘을 기울여야 했다. 그 일환으로 백제와 신라에 법륭사 준공식에 축하 사절을 보내 줄 것을 요청했다. 그러자 양국은 기꺼이 응하는 태도를 보였다.
신라는 나마(奈麻)직인 죽세(竹世)와 지물촌 거수인 구미를 왜국에 사절로 보냈다. 두 사람은 축자 포구를 거쳐 오면서 왜국 병력들이 집결하는 것을 봤다. 때문에 매우 착잡한 심경인데 사절을 맞는 왜국의 난파길사인 구레하라(吳原)는 삐딱한 태도를 보였다.
그 무렵 왜국은 국도(國都)에 있는 아두(阿斗) 천변에 고구려관(高句麗館)과 수국관(隋國館)을 새로 짓고 있었다. 그곳엔 먼저 지은 백제와 신라 관(館)들이 나란히 있었다.
죽세는 신라관으로 가려는데 구레하라가 무뚝뚝하게 말했다.
"두 분 사절은 신라관을 쓸 수가 없습니다."
죽세는 의아해하며 반문했다.
"왜 쓸 수가 없다는 말입니까?"
"두 분도 보다시피 아국은 수국과 고구려 관을 새로 짓고 있습니다. 그러는 김에 백제와 신라관도 깨끗하게 수리를 하고 있습니다. 내부를 다 뜯어내고 한창 공사가 진행 중이라 사용할 수가 없습니다."
죽세는 왜국이 신라관을 수리해 주는 것은 고맙게 여길 일이나 새로 짓는 고구려관의 규모가 신라관보다 두 배나 커 보여 불만을 표시하게 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아국에서도 수국과 고구려 관을 새로 짓고 있다는 소문이 났소. 그런데 와서 보니 고구려 관을 너무 크게 짓고 있소. 이렇게 되면 아국은 차별을 당하는 느낌이 들지 않을 수가 없겠소."
구레하라는 무표정하게 대꾸했다.
"고구려는 대국이므로 그만한 대접을 받는 것은 당연합니다."
"고구려만 대국 대접을 하는 건 너무 지나친 처사인 것 같소."
죽세의 불만이 그치질 않자 구레하라는 강하게 반문했다.
"지나친 일이라니 무슨 말씀입니까? 고구려의 국토는 백제나 신라에 비해서 10여 배나 더 넓습니다. 그런 대국이라면 의당 대접을 받아 마땅한데 그걸 부정하려고 드는 게 도리어 이상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구레하라는 그렇게 대답을 하고 신라 사절의 표정을 지긋이 살폈다. 그리고 왜국도 국세가 커진 만큼 신라보다 대국이란 말이 입에서 나올 뻔했다. 비위가 상한 죽세는 또 반박했다.
"한 나라의 국력은 국토의 넓이로만 따질 수는 없소. 국력은 인구수에서 나오는 것이요. 고구려는 영토가 아무리 넓다고 해도 인구수로 보자면 한삼국 세 나라는 거의가 비슷한 형편이요."
구레하라는 죽세의 불편한 심기를 잘 알면서도 한마디를 더 했다.
"인구수를 가지고 국세를 따진다면 왜국은 어떻습니까? 인구수는 물론이고 영토의 크기도 백제나 신라보다 월등하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왜국도 당연히 대국으로 대접을 해 주셔야 하겠습니다."
죽세는 그 말엔 할 말을 없는데 구레하라가 또 입을 열었다.
"아국은 신라를 차별하는 게 아니고 국세에 걸맞게 고구려를 대우하려는 것일 뿐입니다. 지금부터 두 분은 다른 숙소로 가셔야 하겠습니다."
구레하라는 말하고 신라 사절을 데리고 비조사(飛鳥寺)로 갔다. 그런데 그 절의 주지(住持)는 고구려인 운총(雲聰)이었다. 신라 사절은 이래저래 심기가 거북하고 불편할 수밖에 없었다.
죽세와 구미는 찜찜한 마음으로 저녁을 먹고 나서 바람을 쐬러 나갔다. 절의 경내를 산책하는데 한 승려가 두 사람 앞으로 다가들었다.
"소승은 신라 사행을 여기서 만나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소승은 본래 신라인이나 왜국 땅으로 건너와 살고 있으며 법명은 마주입니다."
마주(摩珠)는 쇼토쿠가 보낸 사람이었다. 쇼토쿠는 신라에 철정 공급을 늘려달라는 요청을 해놓고 있었다. 그에 대해 신라 사신은 어떤 대답을 갖고 왔는지를 미리 알아보고자 보낸 것이었다.
죽세는 반갑게 물었다.
"스님은 왜국 땅에 사신 지가 얼마나 되십니까?"
"벌써 10년이 넘습니다. 그래서 소승은 늘 고국을 그리워하며 지냅니다. 오늘은 두 분으로부터 고국 소식도 듣고 얘기도 나눠볼까 합니다."
구미도 기꺼운 마음으로 대꾸했다.
"우리도 스님과 얘기를 나누며 왜국의 사정을 듣고 싶습니다."
"소승은 신라와 왜국 간의 관계가 개선되길 무엇보다 바라고 있습니다. 그에 대한 두 분의 고견도 듣고 건의를 드릴 말씀도 있습니다."
죽세는 기대에 차서 응대했다.
"스님, 우리도 그걸 바라는 바입니다."
"소승은 먼저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두 분도 보시다시피 왜국은 지금 많은 발전을 이룩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왜국을 미개한 소국으로만 보시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구미는 그 말을 내심 마뜩찮게 여겼다.
"아국도 그걸 모르지는 않습니다만."
"왜국은 이제 율령을 반포한 번듯한 문명국입니다. 그럼에도 신라는 여전히 무시하는 태도만 보이며 동등한 대접을 하려 하질 않습니다."
마주가 왜국을 두둔하는 말만 해서 죽세는 트릿한 음성이 되었다.
"스님, 율령 반포를 가지고 말을 한다면 신라는 어떻습니까? 이미 80여 년 전 일로 거기다 연호까지 쓰고 있습니다. 그런 신라에 비해 왜국은 아직 여러 면에서 일천한 편인데 비교가 되겠습니까? 그럼에도 근래에 와선 왜국이 신라를 소국으로 본다는 소문도 들립니다."
"죽세님 말씀처럼 근래 양국은 선린우호를 해칠 일들이 많아졌습니다. 소승은 그런 점을 놓고 양국은 서로 자제를 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저도 같은 생각이나 신라에 대한 왜국의 반감이 날로 커져 문제입니다. 스님은 그 이유가 뭔지 생각하시는 점이 있으시면 듣고 싶습니다."
"소승은 철정 때문이란 말밖에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신라가 철정 공급량을 늘려주면 갈등은 당장이라도 사라질 것입니다. 그렇게 돼야만 양국의 우호관계도 호전될 수가 있고 국익을 위해서도 좋을 일입니다."
"스님, 나라 간의 우호관계는 국익만을 따져선 안 됩니다."
죽세의 말에 마주는 이번엔 다른 말을 꺼냈다.
"요즘 신라는 고립을 면치 못하는 형편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 위기를 하루속히 벗어나기 위해선 백제를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하겠습니다. 다시 말해 신라도 백제처럼 왜국과 관계 개선에 적극 나섰으면 합니다."
"스님, 신라가 백제를 타산지석으로 삼을 게 뭐란 말씀입니까?"
"죽세님은 백제의 변화를 모르시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백제는 전과 달리 여러 면에서 왜국과 동등한 관계를 유지하려는 태도를 보입니다."
"스님, 동등한 관계라면 어떤 점을 놓고 하는 말씀입니까?"
"소승은 그걸 양국이 공동의 이익을 추구하는 데서 찾고자 합니다. 동등한 관계가 형성되면 선린우호는 자연히 이뤄지게 되는 것입니다."
죽세는 고개를 외로 꼬며 물었다.
"백제와 왜국은 어떤 공동의 이익을 취할 게 있단 말씀입니까?"
"이를테면 교역에서 일방적인 이득을 취하려는 것입니다. 그런데 백제는 전과 같지 않게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왜국에 학문과 기술 전수도 매우 적극적으로 나서 왜국의 발전에 큰 기여를 했습니다. 따라서 양국 간의 우호 증진은 더욱 돈독해질 수밖에 없게 된 것입니다."
"스님, 백제가 그렇게 해서 얻는 것은 대체 무엇이겠습니까?"
"백제는 물질적인 이득보다 다른 면에서도 큰 이득을 얻습니다."
"물질보다 다른 면이라면 어떤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소승은 왜국 백성들의 삶이 백제 풍으로 물들어 가는 점을 들고 싶습니다. 그로 인해 양국 간은 친근감마저 생겨나고 유대감도 더욱 굳건해질 수가 있게 된 점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구미는 그 말에 수긍하는 태도를 보이며 입을 열었다.
"저는 스님의 말씀을 듣고 공감이 가는 점이 큽니다."
그렇지만 죽세는 여전히 삐딱한 자세만 보였다.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백제와 왜국은 본래부터 유대관계가 돈독했던 사이여서 그게 가능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신라와 왜국은 적대 관계가 오래되었음므로 갑자기 가까워지길 기대하긴 어렵습니다."
죽세의 부정적인 태도를 구미도 거들지 않을 수가 없는 듯 말했다.
"죽세님 말씀도 맞습니다. 스님도 잘 아시겠지만 왜국은 옛날부터 신라를 밥 먹듯 침략하고 약탈을 일삼았습니다. 신라는 시달리다 못해 왜국에 왕자를 볼모로 보내기도 했습니다. 그처럼 신라인은 왜국에 대한 반감과 경계심이 클 수밖에 없어 자연 감정이 좋을 수가 없습니다."
구미의 말에 죽세는 불만까지 터트렸다.
"스님은 왜국 땅으로 건너 와서 사시다 보니 왜국 편을 드실 수밖에 없겠지만 조국을 마치 남의 나라처럼 여기는 태도까지 보여 섭섭합니다."
마주는 비난에 가까운 말을 듣게 되자 말을 돌렸다.
"왜국엔 예로부터 한삼국에서 건너온 도래인(渡來人)이 많이 삽니다. 지금도 꾸준히 이어지긴 마찬가지입니다. 도래인은 대부분이 백성들이지만 그중엔 지배 계급 출신도 적지가 않습니다. 백성들은 전쟁의 고통을 견디다 못해 조국을 떠났고 지배 계급은 권력 쟁탈전에서 밀려났기 때문입니다. 그렇다 보니 조국에 대한 반감이 없을 수가 없어 대부분이 좋지 않을 감정을 품고 있는 것을 부인하지 않겠습니다."
마주의 솔직한 말에 죽세와 구미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소승은 그런 점을 감안해서 다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신라는 왜국을 배척만 하지 말고 포용하는 자세를 보여 주었으면 합니다. 그런 신라에 비해 백제는 다른 점이 많습니다. 예를 들면 왕자들을 보내 왜국과 친교를 다지기에 노력을 하는 등 친선을 유지하기 위한 노력을 계속 기울여 왔고 그 결과는 양국 간의 매우 돈독한 관계가 이뤄졌습니다."
마주가 그런 말을 했으나 죽세는 여전히 시큰둥한 태도였다.
"스님 말씀엔 일리가 없진 않으나 신라엔 무리한 요구입니다."
"그렇다면 다른 방법을 찾을 수도 있겠습니다."
"스님은 어떤 방법을 찾을 수가 있다는 말씀입니까?"
"신라엔 학문이 높고 기술이 뛰어난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런 사람들을 보내 왜국 조정에서 벼슬자리를 얻게 하는 방법입니다. 그렇게 하면 왜국과 우호관계를 증진시키는데도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스님, 신라인이 왜 구차하게 남의 나라의 벼슬 자릴 구하겠습니까?"
"나마님, 왜국 조정엔 높은 관직을 얻은 백제인은 많습니다. 그들은 본국에 도움이 될 일을 많이 하게 되므로 신라도 그러면 좋겠습니다."
"스님, 신라는 그런 일엔 관심이 없을뿐더러 신라인은 그걸 달갑게 여기지도 않습니다. 그러니 그런 말씀은 그만하십시오."
마주는 부정적인 태도만 보이는 죽세를 딱하다는 듯 바라보았다.
"나마님은 무슨 일이건 왜 해보지도 않고 부정적인 반응부터 보이십니까? 그러시면 이런 제안을 드리면 어떻겠습니까?"
"스님은 또 어떤 제안을 하시렵니까?"
"현재 왜국에서 살고 신라계 도래인을 돕는 방법입니다."
"왜국에 사는 신라계를 돕는다니요?"
"신라인은 대부분 지주들 밑에서 소작농으로 어렵게 살거나 유력자 밑에서 사병 노릇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관직을 얻은 유능한 자들도 적지가 않으므로 신라 조정은 그 점에 착안을 해야 합니다."
"신라 조정이 어떤 착안을 하라는 말씀입니까?"
"왜국 조정에서 관직을 얻은 신라인을 돕는 일입니다. 그들이 상위 직에 오르게 도와준다면 나중에 고국을 위해 보답하게 될 것입니다."
"스님은 대체 그들을 어떻게 도와주라는 말씀입니까?"
"신라 조정이 재정 지원을 하는 게 효과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죽세는 한숨이 나오는 것을 가까스로 참으며 대답했다.
"스님, 신라 조정은 그런 데다 쓸 돈은 없습니다. 설령 제가 돌아가서 스님의 제의를 조정에 건의를 한들 씨알도 먹히지 않을 일입니다. 그러므로 공연한 헛수고를 할 필요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마주는 죽세로부터 부정적인 대꾸만 나오자 항변 조가 되었다.
"신라는 그동안 왜국에 많은 철정을 팔아 큰 이득을 취했습니다. 그 돈은 국가 재정에 충당하고 있는 걸 나마님도 잘 아시지 않습니까?"
죽세도 그 말엔 고개를 끄덕이자 마주는 말을 이었다.
"나마님, 근래에 신라는 왜국에 공급하는 철정을 거의 절반으로 줄였습니다. 그 이유는 값을 올리려는 데 있으므로 왜국을 반발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나마님이 그런 문제를 잘 해결하는데 힘을 쓰셨으면 합니다."
"신라는 그동안 철정 값을 제대로 못 받고 있는 걸 모르십니까?"
죽세는 반문하고 그에 대한 설명을 덧붙였다.
한삼국은 어느 나라건 철정 가격을 1근(斤)에 미곡(米穀) 30두(斗)로 정해 거래를 했다. 그러나 왜국은 철정을 가장 많이 사가는 고객임을 내세워 근 백여 년 전 가격인 20두 값만 고집했다. 때문에 신라는 수십 년 전부터 25두로 인상을 요구했지만 왜국이 듣질 않았다. 어느 나라건 철정의 수요는 날로 늘어나는 추세라 현재는 30두가 아니면 거래가 되지 않으므로 하다 하다 못한 신라는 왜국에 대한 공급량을 줄일 수밖에 없고 그로 인해 양국 간의 관계는 악화될 수밖에 없었다.
죽세의 설명을 듣고 난 마주는 할 말이 없는 듯 말을 돌렸다.
"소승은 늘 궁금하게 여기는 또 다른 점이 있습니다."
"스님은 어떤 점을 궁금하게 여기십니까?"
"신라는 왜국과 철정에 관한 일로 사신을 보낼 땐 꼭 두 분이 오십니다. 소승이 알기론 나마님은 서라벌에서 오고 거수님은 남가라에서 오시는데 꼭 그렇게 해야 하는 무슨 특별한 이유라도 있는지요?"
죽세는 그 질문에 대답을 않는데 구미가 입을 열었다.
"그건 오래된 관행입니다."
"무슨 이유로 그런 관행이 생겼는지 말씀해 주실 순 없겠습니까?"
마주의 질문에 구미는 죽세의 표정을 살피며 입을 열었다.
"신라와 왜국 간의 철정 교역은 관교역과 사교역 두 가지 형태로 행해지는 것은 스님도 잘 아시는 일입니다. 관교역은 신라 조정이 관장하는 데 반해 사교역은 남가라 거수인 제가 관장하는 거래입니다. 다시 말하면 사교역은 야장들이 직접 하는 거래인데 그런 특별한 예외가 생겨난 것은 옛날에 가락국들이 신라에 멸망을 당한 이후로 비롯된 일입니다."
"그건 어떻게 생겨난 일입니까?"
"가락국의 왕족들은 멸망을 당하고 왜국으로 망명길에 올랐습니다. 그때 야장들을 전부 데려가려 했으나 신라는 그걸 막았습니다. 그 이유는 철정 생산의 차질이 크고 제철기술의 유출 문제가 생길 우려가 컸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야장들은 크게 반발하며 따라가려고 했습니다. 강제 억류를 당할 경우 죽음을 각오하고 손을 놓고 철정 생산은 일절 하지 않겠다고 버티었습니다. 신라는 그런 야장들을 탄압했다간 가락국 백성들 전체의 반란을 유발할 위험에 직면할 수도 있는 난감한 일이었습니다. 때문에 신라 조정은 할 수 없이 유화책을 쓰기로 했습니다. 망명 왕족들에게 야장들이 남아서 철정 생산을 계속하면 생산량의 절반은 망명 왕족들에게 팔고 그 값은 야장들의 몫으로 돌려주겠다는 조건을 거는 제안을 했습니다. 그런 조건이라면 망명 왕족이나 야장들이 반길 만해서 타협이 이뤄졌습니다. 그러나 망명 왕족들은 그 약속이 끝까지 지켜질지가 의문이었기 때문에 남는 야장들이 자치부를 세울 수 있게 해 줄 것을 요구했습니다. 신라는 그것도 받아들일 수밖에 없어 지물촌엔 임나부가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생겨난 임나부(任那府)엔 우두머리로 거수(巨帥)를 두게 되었고 속함(速含), 앵잠(櫻岑), 기잠(岐岑), 봉잠(烽岑), 기현(旗縣), 혈책(穴柵) 등 여섯 곳의 철산지(鐵産地)를 관장하는 관할권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안라가락국 왕자가 남아서 거수 자리를 맡았는데 구미는 그로부터 7대째 이르는 거수였다.
마주는 그런 설명을 다 듣고 비로소 이해가 가는 듯 말했다.
"그러니까 나마님은 신라 조정의 사신이고 거수님은 임나부 대표로 오신 것인데 제가 보기엔 두 분 사이는 그리 좋을 듯싶지가 않습니다."
마주의 말에 구미는 잠자코 있는데 죽세가 불쾌한 듯 입을 열었다.
"왜국이 철정 값 인상을 끝까지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절반의 공급마저도 끊길지 모릅니다. 그런 사태가 일어나지 않길 바랄 뿐입니다."
죽세의 말에 마주는 반발하듯 대꾸했다.
"왜국이 신라의 일방적 요구를 수용할지는 의문입니다. 우마코 대신은 가만히 있지 않으려고 벌써 병력을 움직인 걸 두 분도 보셨겠지요?"
마주의 말에 죽세는 음성이 더욱 냉정해졌다.
"왜국은 자국의 이익만을 위해 철정 값을 묶어두려고 하나 신라도 더 이상은 묵과할 수가 없습니다. 우마코 대신은 걸핏하면 신라 침공 협박을 일삼고, 그동안에 축자포구에 병력을 여러 차례 집결시키는 시위를 벌여 왔습니다만 이번엔 큰 코를 다치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나마님, 이번엔 큰 코를 다치게 된다는 건 무슨 뜻입니까?"
"스님, 신라도 왜국을 침공할 수가 있음을 아셔야 합니다."
"신라가 왜국을 치겠단 말씀입니까? 그게 가능한 일이겠습니까?"
"스님은 신라가 못할 것으로만 생각을 하십니까?"
"소승은 그게 쉬운 일로는 생각되지가 않습니다."
"스님도 아실 일이나 고구려는 곧 수국의 침공을 당하게 됩니다."
"그런 소문은 왜국에도 전해졌지만 그게 무슨 상관이란 말씀입니까?"
"고구려가 수국의 침공을 받게 되면 신라는 북방 국경 지대에 묶인 대병력을 빼낼 수가 있습니다. 2만여 병력을 움직이면 왜국의 축자주쯤은 충분히 점령할 수가 있고 그땐 축자주에만 철정을 공급할 것입니다."
마주는 그 말에 안색이 굳어들고 말았다.
왜국의 축자주는 한삼국과 가까운 섬이었다. 본토 섬 다음으로 크고 인총도 많아서 매우 중요한 곳이었다. 또 일찍부터 한삼국의 도래인(渡來人)들이 건너와 자리를 잡고 많은 소국들을 세운 곳이라 왜국의 발상지나 다름이 없는 땅이었다. 만약에 그런 축자주를 신라에 점령을 당하게 된다면 왜국은 존립 자체가 위태로워질 수도 있는 일이었다.
죽세는 그 말에 그치질 않고 한술을 더 떴다.
"신라가 축자주를 점령하면 한삼국 중 가장 막강해질 것입니다."
"나마님, 왜국도 신라 침공을 막을 힘이 충분함을 아셔야 합니다."
마주는 그렇게 대답을 했지만 죽세의 말을 허황된 일로만 치부할 수가 없었다. 한삼국 땅은 전쟁이 잦아 신라군은 실전에 강한데 반해 왜국의 병력은 내부적인 소규모 충돌에만 익숙한 터라 큰 전쟁은 불리했다. 때문에 바다를 낀 지리적 조건만 믿고 허세를 부리는 면이 없지도 않았는데 신라가 쳐들어오면 존립의 위험성이 커질 수밖에 없었다.
"나마님은 이 점도 아셨으면 합니다."
"스님, 어떤 점을 알아야 한다는 말씀입니까?"
"왜국에 사는 한삼국 도래인들은 백제계가 신라계보다 더 많습니다. 거기다 고구려 백성들도 건너와서 왜국 땅은 인구가 넘쳐날 지경이고, 백제계와 고구려계는 신라에 반감이 크다는 점을 아셔야 합니다."
마주의 말에 구미는 고개를 끄덕였으나 죽세는 강하게 저었다. 그러나 죽세 역시 속으론 긍정을 하는 면이 없지 않은데 마주가 말했다.
"왜국은 날씨가 따듯하고 비가 많이 와서 논농사에 적합하고 소출도 많습니다. 때문에 삼한 땅에선 왜국이 살기 좋은 곳으로 소문이 났고 그래서 이주자가 더욱 늘어나니 왜국은 점점 강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죽세와 구미는 부인만 할 수도 없는 말이었다. 왜국에 비해 전쟁이 잦은 한삼국 땅의 백성들은 공포에 시달렸다. 때문에 하루라도 편히 살고 싶은 곳을 찾으려는데 그 대상지는 왜국 땅으로 꼽게 되었다.
"저는 스님 말씀처럼 왜국 땅도 편안히 살만한 데는 못 된다는 생각입니다. 여긴 토호들의 세력 다툼으로 충돌이 심하지 않습니까?"
죽세의 지적을 받자 마주는 변명을 했다.
"나마님은 모르시는 말씀입니다. 왜국의 소국들은 한삼국 땅보다 백성들에 대한 착취나 괴롭힘이 훨씬 덜합니다. 백성들은 살기가 힘들면 바로 다른 데로 떠납니다. 소국들은 백성이 줄면 세력이 약화되고 국가의 존립마저 위태해집니다. 지배자들에겐 그보다 더한 두려움을 없으므로 백성들이 떠나지 않게 보살펴 주렸는데 애를 쓸 수밖에 없습니다."
죽세는 그 말을 듣고 자기도 모르게 한숨을 쉬게 되었다.
"스님, 왜국은 한삼국 백성들이 건너오게 만들 장려책도 쓴다지요?"
"그렇습니다. 왜국은 소국들을 통합해 나가는데 투입할 병력을 필요로 합니다. 때문에 도래인을 병력으로 많이 충당하게 됩니다."
한삼국 도래인은 주로 축자주에 자리를 잡게 되었다. 때문에 왜국 왕실은 근기(近畿) 지방으로 옮겨 오게 이주 장려책을 썼다. 그렇게 하면 왕실은 강해지고 소국과 토호 세력은 위축이 될 수밖에 없었다. 한삼국에선 일어나기 힘든 일로 부러움을 느끼게 할 만 일이었다.
"쇼토쿠 섭정은 백성들이 편히 사는 데만 그치지 않고 모두가 잘 살게 만들게 하려고 여러 가지로 많은 힘을 기울이고 계십니다."
"백성들이 잘 살게 해 주면 나라에서 돈이라도 대줍니까?"
죽세의 반문에 마주는 쇼토쿠를 더욱 찬양하는 말을 늘어놓았다.
"나라에서 돈을 줄 수는 없으나 백성들의 생업에 지장을 주는 각종 부역을 덜어 줍니다. 덕분에 백성들은 그만큼 삶의 여유가 생겨나고 좋은 음식, 좋은 옷, 좋은 집에서 살려는 욕구가 날로 커집니다. 신라에선 그런 왜국을 두고 신천지라고 부른다는 말도 들립니다."
한삼국의 백성들은 삶의 여유는커녕 목숨을 부지하기조차 힘들고 불안한 삶을 이어가야 만했다. 죽세와 구미는 그런 점을 생각하게 되면 심경이 착잡해지지 않을 수가 없었다.
마주는 신이 나듯 왜국 자랑을 그치지 않았다.
"왜국은 국력만 커진 게 아니고 문화 수준도 날로 높아져 갑니다."
구미도 그 말에 동감을 하듯 입을 열었다.
"저는 스님의 말씀에 느끼는 점이 많습니다. 신라는 좋은 물건을 만드는 장인들이 많았으나 지금은 그렇지가 못합니다. 그 이유는 백성들이 가난에 쪼들려 물건을 사서 쓸 형편이 못 되어 그렇습니다. 그러니 장인들은 물건을 만들어도 팔리질 않아 살길이 막막합니다. 때문에 풍요를 누린다는 소문을 듣고 왜국으로 건너가게 되고 그로 인해 신라는 변변한 장인들이 남아 있질 못하게 된 지경입니다."
구미의 말에 마주는 더욱 신이 나서 맞장구를 쳤다.
"소승도 전에는 신라 물건을 최고로 쳤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왜국이 더 잘 만들고 있습니다. 때문에 신라의 귀족과 부자들은 도리어 왜국의 물건을 사서 쓰는 사람들이 는다는 말을 전해 들을 정도입니다."
거기다 철제품은 돈과 바꿀 수 있는 값진 물품이었다. 한삼국 백성들은 왜국으로 이주할 때 철제 농기구를 꼭 챙겨갔다. 뿐만 아니라 남의 집 것까지 훔쳐가지고 갔다.
죽세는 그런 일을 생각하면 더욱 심기가 편치 않은데 마주가 말했다.
"두 분께선 그만 편히 들 주무십시오. 소승은 이만 물러갑니다."
이튿날 죽세는 이가루가(斑鳩) 궁으로 들어가서 쇼토쿠를 만났다.
"죽세님, 법륭사 불사에 축하차 와 주셔서 감사를 드립니다."
쇼토쿠가 사의를 표하자 죽세는 대답했다.
"저는 축하를 겸해 아국의 결정을 귀국에 통고하게 되었습니다."
"죽세님은 어떤 통고를 가지고 오셨습니까?"
"신라 조정은 철정의 가격을 당분간 종전대로 묶기로 했습니다."
죽세의 대꾸에 쇼토쿠는 반색을 했다. 마주 스님을 미리 보내 신라의 반응을 떠보려고 했으나 실패했다. 그런데 뜻밖의 통고를 받게 되어 여간 기쁘고 흐뭇하지가 않았다.
"감사합니다. 차제에 물량도 늘려줄 것을 바라겠습니다."
쇼토쿠가 욕심을 내자 죽세는 고개를 저었다.
"그건 어렵겠습니다. 대륙의 정세가 불안해져서 신라도 내부적인 철정 수요가 급증해 물량을 늘리긴 매우 어려우므로 양해를 바랍니다."
"신라의 사정이 그렇다면야 이 정도로 만족할 수밖에 없겠습니다."
"섭정께서 이해를 해주시므로 다른 얘길 꺼내야 하겠습니다."
"죽세님은 무슨 말씀을 하시려는 지요?"
"신라는 왜국과 철정의 사교역은 폐지하고 관교역만 할 것입니다."
쇼토쿠는 그 말에 크게 난색을 표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렇게 된다면 매우 곤란하겠습니다."
죽세는 쇼토쿠가 무엇 때문에 그런 반응을 보이는지를 잘 알았다.
철정의 사교역(私交易)은 우마코의 개인적 독점 거래나 다름없었다. 그걸 폐지하면 우마코의 반발이 여간 크지가 않을 일이었다. 그럼에도 신라가 그런 결정을 내린 데는 고도의 정치적인 계산이 깔려 있었다. 적대적인 우마코와 쇼토쿠 사이를 이용해 왜국을 조정할 목적이었다.
죽세는 쇼토쿠의 표정을 살피면서 다시 입을 열었다.
"우마코 대신이 신라에 대한 협박을 하고 있지만 개의치 않습니다."
"개의치 않는다면 그건 무슨 뜻으로 하시는 말씀입니까?"
"신라가 철정 가격을 그대로 묶어두는 것은 우마코 대신의 협박에 굴복을 해서가 아닙니다. 대신은 지금 축자주에 병력을 집결시키고 신라 에 침공 협박을 가하고 있는데 신라는 경고를 합니다. 왜국의 침공이 일어날 경우 차제에 신라도 병력을 출동시켜 축자주를 점령할 것입니다."
쇼토쿠는 마주 스님으로부터 전해 들은 말이 있었지만 그 말은 홧김에 해 붙인 소리로 치부를 했었다. 그런데 신라 사신의 입에서 직접 나오자 아연실색하게 되었다. 그동안 왜국이 철정 값을 묶어 둔 것은 우마코의 독단적인 결정이었다. 그는 신라에서 미곡 20두 가격으로 사들인 철정을 국내에서 40두 내지 50두까지 받고 팔았다. 그렇게 해서 큰 폭리를 취할 수가 있었고 그러세 크게 번 돈으로 자신의 권력을 유지할 많은 사병(私兵)을 거느리는데 쓸 수가 있었다.
우마코는 왕위를 노렸지만 쓰이코 여왕과 쇼토쿠의 강한 결합으로 왕실의 기반이 크게 다져져서 흑심을 드러낼 형편이 못 되었다. 때문에 신라를 침공하겠다며 5천여 병력을 축자주에 집결시키고 있는 신라가 아닌 다른 목적이 있었다. 그건 축자주의 소국과 토호들은 병합해서 자신의 왕조를 세우는 쪽으로 방향을 틀기 위함이었다.
쇼토쿠는 그런 속셈을 아직은 모르고 있었다. 그러나 타도의 대상인 우마코가 하는 일은 큰 문제였다. 더욱이 대병력을 동원해 신라를 침공하겠다는 것은 관계만 악화시켜 여간 우려가 크지 않았다.
죽세는 다시 입을 열었다.
"신라는 앞으로 철정 거래 방식도 바꿀 방침입니다."
"거래 방식을 바꾼다면 어떻게 한단 말씀입니까?"
쇼토쿠의 질문에 죽세는 좀 망설이다 다른 말을 꺼냈다.
"왜국엔 신라인도 많이 살고 있습니다. 그들은 본국에 철정 공급량을 늘려 줄 것을 꾸준히 요청해 왔습니다. 신라 조정은 그들의 요청을 들어줄 겸 앞으론 귀국과 하는 거래 선도 바꾸기로 했습니다."
쇼토쿠는 그 말에 좀 긴장하며 한편으론 의문도 일었다.
"철정 사교역을 없애겠다면 우마코 대신의 반발이 여간 크지 않을 것인데 거래 선마저 바꾼다면 우마코 대신을 배제하겠다는 것입니까?"
"그렇습니다."
죽세의 답변에 쇼토쿠는 큰 충격을 받은 사람처럼 눈을 감았다.
"섭정님, 아국은 그 점을 놓고 심사숙고 끝에 내린 결정입니다. 신라에 대해 사사건건 적대적인 태도만 취하는 우마코 대신과는 더 이상 거래를 해선 안 된다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새로운 거래선은 누구와 하게 됩니까?"
"하타 가문입니다."
"하타 가문과?"
신라는 철정 거래 선을 새로 하타(秦) 씨로 정한 데는 이유가 있었다. 왜국의 출운국(出雲國)엔 신라인들이 가장 많이 사는 곳이었다. 거기서 국도(國都)로 진출한 하타 가문은 가장 번성하고 큰 지위를 누리는 유력 가문의 하나였기 때문이었다.
하타 가문은 왜국에서 최초로 제방을 쌓아 저수지를 만들고 농지를 크게 개간을 했다. 그런 공로로 백성들의 추앙을 받으며 큰 영향력을 끼치는 위치에 오를 수가 있었다.
쇼토쿠도 하타 가문을 새 철정 거래 선으로 삼으려는 신라의 방침을 내심 환영을 할만했다. 그러나 하타 가문을 상대하려는 속내는 여러 가지로 생각해볼 점이 있었다. 혹시 그건 신라가 전쟁도 불사하겠단 강경한 태도와 연관이 되는 일은 아닐까 하는 의문 때문이었다.
"귀국의 결정을 거부할 뜻은 없으나 우마코 대신의 반발 때문에."
쇼토 구가 말끝을 흐리는데 죽세는 미소만 지었다. 그 속내를 짐작할 만했기 때문이었다. 반면에 쇼토쿠는 상대방의 얘기를 더 들어보지 않을 수가 없어 경청하는 자세를 취했고 그때부터 긴 밀담이 이어졌다.
한편 구미는 우마코의 집에서 머물고 있었다.
"구미 거수님, 나로선 근래 여간 걱정이 크지가 않소. 왜냐하면 지물촌과 남가라 왜관 사이에 큰 불상사가 또 일어났기 때문이요. 나로선 여간 큰 신경이 쓰이지 않을 수가 없고, 그로 인해 앞으로 임나부에 무슨 좋지 않은 일이 생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마저 들어 그렀소."
"대신의 걱정은 이해가 됩니다만 저도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구미 거수님은 내게 무슨 할 말이 있소?"
"대신께선 신라의 요구를 어느 정도는 수용해 주셨으면 합니다."
구미의 말에 우마코는 안색이 굳어들었다.
"나는 구미 거수를 내 편으로 여겼는데 이제 보니 그게 아니잖소?"
우마코의 대꾸에 구미는 움찔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철정 값을 제대로 못 받는 일로 신라 조정뿐만이 아닌 자신도 여간 큰 피해를 입지 않았다. 때문에 불만이 매우 컸지만 우마코는 임나부의 뒷배를 봐주는 크나 큰 배경이었다. 그와 같은 존재가 없었다면 철정 사교역은 없게 되었고 임나부 자체도 벌써 없어질 일로 보고 있었다.
"구미 거수가 그런 말을 꺼냈으니 나도 밝혀 둘 게 있소."
우마코는 엄숙한 표정으로 자신의 속내를 털어놨다.
"내가 신라로부터 철정을 싸게 구입하고 비싼 값으로 팔아 많은 수익을 챙기는 것으로 왜국 안에서도 비난이 큰 것을 모르지는 않소.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으면 나는 물론 임나부도 존재할 수가 없게 되오. 구미 거수님도 그 점에 대해선 잘 알고 있지 않소?"
구미는 대꾸는 않았지만 우마코가 사병을 유지하는 데 막대한 돈이 들어가는 것은 모르지 않았다. 그런데 우마코는 다시 입을 열었다.
"나로선 구미 거수님에게 처음으로 중대한 뜻을 밝힐 때가 되었소. 내가 많은 사병을 유지해온 목적은 축자주를 손에 넣으려는데 있소. 나는 축자주에 새로운 나라를 세우고 싶소. 그 야망을 달성하자면 지금까지 해온 대로 계속하지 않으면 안 되겠소."
구미는 놀라는 표정인데 우마코의 음성은 은근해졌다.
"구미 거수님, 앞으로 나를 도와 창업의 공신이 되어주오. 그렇게 하면 구미 거수님의 앞날도 창창하게 열리게 될 것이요."
우마코는 설득조로 말하는데 구미가 불쑥 물었다.
"대신께선 도꼬마로가 어떤 보고를 했는지 말씀해 주십시오."
"도꼬마로는 거수님이 고구려 야장을 지물촌으로 데려왔고 그로 인해 왜관과 충돌을 빚는 사건이 일어나게 되었다는 보고를 해 왔소."
"대신께선 그에 관해 잘 못된 보고를 받으셨습니다."
"도꼬마로가 내게 잘 못된 보고를 하다니 무슨 말이요?"
"도꼬마로가 올리는 보고 중엔 그릇된 게 많습니다. 그 자는 임나부 내부 문제까지 남가라 태수에게 일러바쳐 절 괴롭히고 있습니다."
"도꼬마로가 왜 그런 짓을 한단 말이요? 나도 거수님과 도꼬마로 사이가 나쁜 것은 알고 있소. 그러나 구미 거수님은 남가라 태수에게 너무도 굽실거린다는 말까지 전해져서 나로선 큰 불만이 아닐 수가 없소."
"남가라 태수의 감독을 받는 형편인 나로선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구미가 변명을 하자 우마코는 태도를 좀 누그러뜨렸다.
"나는 그보다 고구려인 문제를 더욱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소. 왜냐하면 고구려 첩자를 데려온 걸 신라가 문제 삼을 수도 있기 때문이요."
우마코의 음성엔 구미를 설득하려는 기미가 보였다.
"고구려인은 첩자도 아니고 신라에 해를 끼칠 이유도 없습니다."
"아무튼 간에 신라는 그 일로 무슨 트집거리로 삼을지 모르오. 나는 조만간 중대한 계획을 실행에 옮기려는 참인데 그 일엔 구미 거수님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하오. 그런 때인 만큼 더 이상의 문제를 일으킬 일은 삼가고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해 둘 것도 당부를 하고 싶소."
구미는 우마코의 말을 못 들은 체 입을 열었다.
"신라에선 벌써부터 임나부를 폐지할 것이란 소문이 돕니다. 그럼에도 제게 도꼬마로는 악감정을 품은 데다 남가라 태수에게 놀아나고 있습니다. 대신께선 그에 대한 조치부터 취하시는 게 급선무라고 여깁니다."
우마코는 불만이 큰 구미를 달래려고 고개만 끄떡였다. 그리고 신라의 내부 사정을 더 알아보려고 구미가 아는 바를 전부 말하게 요구했다.
"신라 왕실은 내물계가 왕위를 노려서 여간 큰 골칫거리로 여기지 않습니다. 그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는 길은 임나부 폐지에 있다고 보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남가라 태수로 있는 내물계의 김주실이 철정의 사교역을 사실상 장악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야장들에게 돌아갈 철정 판매 대금 중 절반을 가로 챘고, 그 돈은 내물계의 강력한 사병(私兵)을 유지하는 자금으로 쓰이고 있습니다. 때문에 왕실은 내물계의 세력을 약화시키 위해 철정 사교역을 없애 자금줄을 끊으려고 합니다."
우마코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지만 구미를 달래고 설득하려 들었다.
"나도 사교역이 폐지되면 임나부의 존재는 물론 나 또한 막심한 피해를 당할 것을 잘 알고 있소. 그러나 서라벌 조정과 맞서기 위해선 김주실을 지원하지 않으면 안 되고 거수님도 협력을 하는 게 유리하오."
구미는 그러나 우마코에게 더 이상 이용을 당하고 싶지가 않았다. 우마코도 구미의 그런 반감을 모르지 않아 불만이었다. 모두는 내물계와 계속 손을 잡아야 힘을 쓸 수 있었다. 우마코는 동맹체인 구미와 관계가 삐걱대면 안 되어 하루 종일 달래고 설득을 해야만 했다.
난파진에 백제 사신이 도착했다. 백제 역시 2명의 사신이 왔다. 하나는 진도의 심복인 사주(司舟)였고 또 하나는 목돈의 심복인 조리(條利)였다. 백제 사신을 맞은 구레하라의 태도는 자못 융숭했다.
백제 사신들도 백제관을 쓸 수가 없어 법륭사(法隆寺)로 안내되었다. 두 사람은 신축한 사찰의 거대함에 압도를 당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왜국은 그동안 하나에서 열까지 백제에게 배우지 않은 게 없었다. 그런데 이젠 여러 면에서 백제를 능가할 발전상을 이뤄서 두 사람은 착잡했다.
사주와 조리는 저녁을 먹고 나자 법륭사 주지인 승륭(僧隆)이 두 사람 앞에 나타났다. 승륭은 고구려인이었다. 두 사람은 고구려 승려가 왜국에서 가장 큰 절의 주지 직을 맡고 있는 것도 마음에 들지가 않았다.
사주는 불만스럽지만 축하의 인사를 건넸다.
"법사님, 큰 절에서 주석하게 되신 걸 축하합니다."
"예, 어깨가 무겁지만 큰 영광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그런데 두 분께선 새 사찰을 보신 소감이 어떠십니까? 이만한 규모의 큰 절을 세운 데는 한삼국 땅을 통틀어도 없을 듯싶습니다."
조리는 내심 더욱 기분이 상했지만 대꾸를 했다.
"백제는 법륭사 건축을 위해 목수, 석공, 기왓장, 화공들을 여러 차례나 지원을 했습니다. 그러나 이처럼 큰 절을 지어낼 줄은 몰랐습니다. 백제도 이만한 규모의 절이 없는데 고구려 역시 그렇지 않을까요?"
"저는 고구려를 떠난 지가 오래되어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백제가 많은 지원을 해 준 것에 대해 왜국은 매우 고맙게 여기고 있습니다."
승륭의 대답에 조리는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법사님 말씀대로 왜국이 정말로 고마워할지는 모르겠습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진심으로 고마워하고 있습니다."
사주도 부러움과 시기가 뒤섞인 투로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야 다행이겠습니다만."
승륭은 두 사람의 그 같은 심기를 모른 체 말을 이었다.
"왜국은 이만한 절을 지음으로써 국가의 위상도 한껏 상승하게 되었습니다. 나라가 이처럼 비약적인 발전을 이룩한 데는 모두 쇼토쿠 섭정이 펼친 선정 덕분으로 생각합니다. 왜국 백성들에게 그런 분이 계신 것은 여간 큰 축복이 아니란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사주와 조리도 쇼토쿠가 선정을 베풀고 있는 것은 인정하고 있었다. 그러나 승륭의 말을 듣고 있자면 고구려와 왜국이 어딘지 급속도록 가까워지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튿날 백제인으로 왜국에 귀화한 관륵(觀勒) 스님이 두 사람을 찾았다. 그는 왜국에 역서(曆書), 천문지리, 점성술(占星術) 책을 전해 주어 큰 존경을 받았다. 요즘은 왜국의 유력한 집안 자제들을 모아서 가르치며 나름대로 큰 영향력을 지닌 인물이었다.
사주는 그런 관륵 또한 못마땅하게 여겼다.
"법사님, 백제는 왜국에 모국이나 다름이 없다는 생각입니다. 왜국인에게 처음으로 글을 가르친 왕인 박사님을 비롯해 다방면에서 여러 가지 기술들을 전수해 준 장인들도 많습니다. 백제는 그처럼 왜국 발전에 큰 기여를 했건만 결과적으론 배신감 같은 것을 느끼게 됩니다."
"사주님은 어떤 점 때문에 그런 생각을 하신단 말씀입니까?"
"왜국은 귀화한 백제 장인들 덕분에 일취월장의 발전을 이룩했습니다. 그럼에도 은공을 모르고 근래엔 백제 장인들을 전부 지방으로 쫓아냈다는 소문이 들립니다. 그건 배은망덕한 처사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사주님, 그건 큰 오해입니다. 지방으로 내쫓은 게 아닙니다."
"쫓아낸 게 아니라면 뭐라는 말씀입니까?"
"쇼토쿠 섭정께선 백제 장인들의 중요성을 누구보다 잘 아시는 분입니다. 때문에 나라를 전체적으로 균등하게 발전시키기 위해 좋은 기술을 전국에 골고루 퍼지게 만들려고 장인들을 각처로 파견하신 것입니다."
사주는 그 말에 수긍이 가면서도 한 마디를 더 했다.
"귀화한 백제인은 모국보다 왜국 편을 더 드는 태도를 보입니다. 그런가 하면 왜국은 고구려에 너무 기우는 경향을 보이는 것도 섭섭합니다."
관륵은 그 점을 인정하는 터라 그에 대한 변명을 했다.
"왜국은 지난날처럼 백제를 전적으로 의지를 하지 않아도 될 만큼 여러 분야에서 발전을 했습니다. 때문에 대외적으로 독자적인 위상을 부각시키려고 드는 면이 없지도 않는 점이 있음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사주와 조리도 그 점을 인정하나 시기하는 마음을 누를 수가 없었다.
관륵은 두 사람과 더는 말을 나누고 싶지가 않은 듯 몸을 일으켰다.
"제가 드릴 말씀은 더 없으므로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두 사람은 돌아가는 관륵의 등에 대고 입들을 비쭉거렸다.
우마코의 동생인 마리세(摩理勢)는 쇼토쿠의 부름을 받고 이루가 궁에 들어갔다 나와서 곧장 형의 집으로 갔다. 그는 신라가 철정 사교역을 폐지한다는 통고를 형에게 전했다. 우마코는 그 말을 듣고 매우 분개하며 쇼토쿠와 죽세가 모종의 합의를 보았을 것으로 추측을 했다.
"마리세, 그럼에도 사교역을 당분간은 계속한다는 이윤 뭘까?"
"대신, 거기엔 조건이 있답니다."
"조건이 있다니 어떤 것이란 말인가?"
"앞으론 쇼토쿠 섭정이 사교역을 관장하기로 했답니다."
우마코는 그 말을 듣고 분노가 치밀어 이를 으드득 갈았다.
"쇼토쿠가 이젠 철정마저 관장을 하겠다고? 이런 죽일 놈! 놈이 섭정 직에 오르지 못하게 막지 못한 게 나로선 천추의 한이 되겠다."
"쇼토쿠가 섭정에 오른 건 대신이 허락하셨기 때문이 아닙니까?"
"누가 이럴 줄 알았더냐? 그러니 더욱 분통이 터진다!"
"대신께선 앞으로 이 일을 어떻게 대처하시렵니까?"
"섭정이 신라와 손을 잡은 것은 날 꺼꾸러뜨릴 속셈이다. 그러나 두고 봐라. 나는 놈을 그냥 내벼려 두진 않을 것이다."
마리세는 형의 말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전 왕을 암살하고 여왕을 세운 것도 형이다. 그런데 여왕의 보위를 넘겨받기 위해 또다시 무슨 짓을 벌일지 모를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쇼토쿠, 나는 네 놈부터 먼저 죽여 버려야 하겠다."
우마코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리자 마리세는 아연실색을 했다.
"대신, 사위를 죽이다니? 어찌 그런 끔찍한 말씀을 하십니까?"
"사위는 새로 또 얻으면 된다."
우마코의 차가운 대꾸에 마리세는 더는 입을 열 수가 없었다.
"허나 내 실책이 너무 크고 반격이 쉽지 않을 일이 문제로다."
"대신께선 그처럼 큰 실책을 하셨는데 어떻게 회복을 하시렵니까?"
마리세의 말에 우마코는 한동안 침묵을 하다 힘없이 입을 열었다.
"그동안에 쇼토쿠는 궁궐의 수비병을 교체해 왔다. 나는 그걸 알면서 관여를 않고 그냥 내버려 둔 게 실책이 너무 커서 후회가 된다."
마리세는 형의 말에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 일은 대신께서 섭정에게 수비병 중 신라 계를 덜어낼 것을 요구를 하셨고 섭정은 그에 따른 교체를 해 왔을 뿐이 아니겠습니까?"
"쇼토쿠는 내 지시를 따르는 척하면서 딴 짓거릴 해 왔다. 그동안 교체 병력을 고구려 계로만 늘렸는데 그 속셈이 어디에 있었음을 몰랐다."
쇼토쿠는 섭정이 되자 궁궐의 수비병 구성부터 바꾸려고 했다. 그런데 우마코가 그런 요구를 하자 내심 쾌재를 불렀다. 왜냐하면 왕궁의 수비병은 우마코의 장악 하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걸 자신의 장악 하로 돌릴 필요성이 있었다. 그때부터 신라 계를 속아내고 고구려 계로 채워나간 끝에 전체적으로 도래인 숫자가 균형을 이루게 되었다. 그로인해 수비군의 분위기도 확연히 달라져서 우마코는 왕궁을 드나들 때마다 왠지 모를 위축감 같은 것을 느끼게 되었다. 그런데다 쇼토쿠는 왕궁 뒤편에 고구려 계 수비병이 거주할 주택도 지어주는 환심을 샀다. 그는 고구려 계를 확실하게 장악할 의도를 드러낸 일이었다. 그 결과는 왕궁의 호위를 우마코가 아닌 쇼토쿠의 장악 하에 들게 만들었다.
우마코는 뒤늦게 그 점을 깨닫고 후회를 할 수밖에 없었다.
"쇼토쿠가 날 허수아비로 만들었다만 크게 후회하게 만들어 주마."
우마코가 중얼거리자 마리세는 참아왔던 말을 불쑥 꺼냈다.
"대신께선 그만 야망을 접으실 때가 되었단 생각을 하게 됩니다."
"뭐라고!? 나보고 야망을 접으라고? 그게 네 입에서 나올 말이냐?"
"저는 쇼토쿠 섭정이 장차 보위를 잇게 될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 나라 왕조가 백제계로 굳어진 것은 우리 가문에 의한 일이 아닙니까? 쇼토쿠도 우리 가문의 일원이니 그만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우마코는 마리세의 작심 발언에 기가 막혀 화조차 못 내었다. 그러나 동생의 충정을 이해하고 현실적인 상황도 크게 달라졌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어 무겁게 입을 열었다.
"네가 하려는 말뜻을 잘 이해하고 있다. 그렇다고 해도 나는 야망을 포기할 수가 없기 때문에 다른 길을 모색하려고 한다."
우마코의 말에 마리세는 기다렸다는 듯 입을 열었다.
"대신께서 다른 길을 모색하시는 게 뭔지 저는 알고 있습니다. 야망을 접을 수가 없으시므로 새 나라를 창업하겠다는 말씀이 아니십니까?"
마리세의 입에서 나온 건의에 우마코는 한동안을 침묵만 지켰다. 쇼토쿠의 위치가 너무도 단단히 굳어졌기 때문에 양위를 받긴 매우 힘들어진 형편이었다. 그러나 단념을 하기엔 자존심이 허락되지 않아 이젠 창업 쪽으로 나갈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었다. 다만 그걸 동생이 어떻게 알았는지 그런 말을 해서 내심 크게 놀랐다.
"마리세, 내가 창업을 한다면 어디서 할 수가 있겠는가?"
"축자주 섬은 백제국보다 땅이 더 넓습니다. 그 땅엔 한삼국 도래인들이 세운 소국들이 많습니다. 대신께선 그런 소국들을 통합해 나가며 나라를 세우십시오. 그런 결단을 내리시면 가능성은 크다는 생각입니다."
우마코는 두 눈을 지그시 감으며 중얼거렸다.
"네가 내 속을 다 들여다보고 있을 줄은 몰랐다."
마리세는 놀라지 않고 반문했다.
"저는 대신께서도 축자주를 생각하고 계실 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냐? 나는 신라 침공을 구실로 축자주에 병력을 자주 출동시킨 편이나 그 이유는 다른데 있었다. 그렇게 해서 축자주 소국과 토호들의 반응을 떠보려고 했다. 그들은 처음에 나의 잦은 출병에 경계심과 우려가 상당히 컸지만 지금은 크게 불식을 시켰다. 지금은 나에 대한 경계를 접고 방심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오늘은 그 정도로만 말을 하겠다. 너도 나름대로 좋은 계획을 세워 날 도와주기 바란다."
우마코는 동생이 돌아가자 깊은 생각에 잠겨 들었다. 조정을 장악한 쇼토쿠의 세력이 커질수록 자신의 웅신할 폭은 좁아지게 되었다. 차라리 쇼토쿠의 지원을 얻을 수 있는 쪽으로 처신을 바꾸기로 마음을 먹었다.
법륭사 행사를 성대히 치르고 나자 여왕은 매우 흡족해했다. 그것으로 왕실의 안정도 반석 위에 올릴 수 있게 되었다는 믿음도 커졌다.
"섭정, 백제와 신라가 축하 사절을 보내 더욱 성대해졌네. 그런데 고구려 사신도 왔다면 더욱 좋았을 것이란 아쉬움이 없지도 않네."
"전하, 신은 일부러 초청하지 않았습니다."
"섭정, 왜 그랬단 말인가? 고구려는 이번 불사에 많은 황금을 보내기까지 했는데 초청하지 않은 것은 이유가 무엇인가?"
"신은 한삼국이 전부 모이는 걸 피하게 하려고 그렇게 했습니다."
"그게 무슨 소린가? 과인은 앞으로 고구려가 아국에 더욱 중요해질 나라로 보네. 그런데 섭정은 왜 그런 결정을 내렸단 말인가?"
"신도 전하와 같이 고구려를 중요시합니다. 그러나 백제와 신라는 수국의 고구려 침공을 동조하고 나섰으므로 고구려 사신이 양국 사신과 부딪치면 서로가 곤란하고 아국에도 좋을 게 없다는 판단을 내렸습니다."
"하긴 그럴지도 모를 일이군."
"전하, 고구려에서 철정을 공급받게 되면 앞으로 큰 어려움은 상당히 해결될 것입니다. 그러나 신라의 공급을 더 늘리기 위한 교섭도 병행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대신이 신라의 감정을 자극해서 문제입니다."
여왕도 그 말에 수긍이 가는 터라 고개를 끄덕였다.
"대륙의 통일 왕조가 고구려를 침공하려는 큰일일세. 그런데 고구려는 복속을 하면 위기를 모면할 것인데 왜 그러질 않는지 모르겠네."
"전하, 신은 그 이유도 철 때문으로 보고 있습니다."
"철 때문에?"
"철은 무기를 만드는 가장 중요한 재료로 전력의 기본인 무기를 만듭니다. 그런데 중원의 역대 통일 왕조는 북방 유목민의 침략에 늘 시달렸습니다. 그 이유는 고구려가 유목민에게 무기를 공급하기 때문입니다. 수국은 그걸 원천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 고구려를 멸망시키려 합니다."
"고구려는 큰 위기를 맞은 게 틀림없네. 그렇다면 유목민에게 무기 공급을 그만 두면 위기를 벗어날 수가 있지 않겠는가?"
"전하, 고구려는 타국에 철제품을 팔지 않으면 국체를 유지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유목민은 철정보다 무기를 더 원합니다. 또 무기를 제작해서 팔면 이익이 몇 배나 커지니 그걸 그만 둘 수가 없습니다."
"고구려는 철정 공급을 결정하며 아국에 무슨 요구를 하진 않았나?"
"고구려는 아국과 동맹을 원합니다. 백제와 신라가 수국을 돕고자 움직일 때 아국이 군사행동을 일으켜 견제해 줄 것을 바라고 있습니다."
"섭정은 그게 가능한 일로 보는가?"
"아국은 그렇게 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실제로 움직임을 보이지 않더라도 시늉이라도 해서 백제와 신라의 움직임을 막아야 합니다. 만약에 고구려가 망하면 백제와 신라도 무사할 수는 없습니다. 한삼국이 수국의 땅이 되면 아국은 철정을 공급받을 데가 전혀 없어지게 됩니다."
"그건 여간 큰 문제가 아니로군. 섭정이 잘 대처할 것만 바라네."
"아국도 철정 수요가 날로 늘고 있습니다. 고구려가 망하면 아국은 철정 공급처를 전부를 잃게 됩니다. 그러나 고구려를 도우면 백제 신라와 관계 악화를 초래하게 될 일이 문제입니다. 때문에 관계 악화를 피하는 데도 힘을 기울이지 않으면 안 되겠습니다."
"이런 판에 대신은 신라와 전역을 일으키겠다고 나서니 문젤세."
"전하, 대신은 이번에도 무력시위로 그칠 걸로 봅니다. 실제로 출병을 했다간 도리어 아국은 큰 위험을 당하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아국이 도리어 큰 위험을 당하다니 그건 무슨 말인가?"
"신라도 너무 잦은 위협을 당하면 가만히 있지 않을 수가 있습니다."
"신라가 가만히 있지 않는다면?"
"이번에 온 신라 사신이 한 말이 있습니다. 신라는 계속 위협에 시달리다 못해 아국에 침공을 감행할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신라가 실제로 그럴만한 힘이 있을까?"
"신라는 북방 국경지대에서 대병력을 두고 고구려와 대치합니다. 신은 신라가 수국의 고구려 침공 시 협공에 나설 걸로 보진 않습니다. 대신 그 틈을 타 대병력을 돌려 아국을 침공할 수도 있다는 생각입니다."
"만약에 그렇게 된다면 아국은 큰 위기를 맞지 않겠는가?"
"신은 그 때문에 신라를 자극하고 견제하는 일을 삼가렵니다. 그러나 노력을 기울이려고 해도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몰라 고민입니다."
"암, 그렇게 해야지. 섭정은 잘 대처해 나갈 것으로 믿네."
"전하, 신은 아국 땅에서 철산지를 개발하려고 전국적인 조사를 했습니다. 그러나 이렇다 할 성과를 못 거두었습니다. 때문에 한삼국의 철정은 계속 필요함으로 유대를 강화시킬 일을 꾸준히 해나가겠습니다."
"다만 섭정은 대신이 하는 일에 너무 끼어들지 않길 바라네."
"전하, 대신은 근래에 신라를 침공하겠다며 병력 출동을 더욱 자주 일으키나 거기엔 다른 목적도 있지 않을까 하는 의심을 하게 됩니다."
"섭정은 어떤 의심을 한다는 말인가?"
"대신은 백제 사신들 중 사주란 자와 접촉을 했던 걸로 압니다."
"섭정, 대신은 또 무슨 일을 꾸미려고 그런단 말인가?"
"대신은 축자진에 창고를 짓겠다며 신에게 지원을 요청했습니다."
"무슨 이유로 축자진에 창고를 짓는단 말인가?"
"대신은 철정 수입이 원활하지 못하면 수익이 줄 수밖에 없습니다. 그걸 해결하고자 잡화를 취급해라도 수익을 더 늘리려는 것 같습니다."
"잡화를 취급하려고 축자진에 새로 창고를 지을 필요까지 있겠나?"
"타국의 상선들은 난파까지 잘 오려고 들질 않기 때문입니다."
"왜 그런단 말인가?"
"난파까지 오자면 긴 항해로 시간도 많이 걸리고 인력도 허비를 하는데 반해 온다고 한들 물건 값을 더 받을 수는 없으니 그렇습니다."
"타산에 밝은 장사꾼들이라 그럴 수밖에 없겠네."
"신은 대신이 잡화를 취급하겠다는 데도 무슨 다른 목적이 있지 않을까 하는 의심을 하게 됩니다."
"다른 목적이 있다면 무엇일까?"
"잡화 취급을 하기 위해 축자진에 새 근거지를 마련할 목적인 것 같습니다. 그곳에서 상권을 장악해 영향력을 키우기 위한 일입니다."
"대신이 축자주에서 영향력을 키울 필요성은 무엇일까?"
"대신은 축자주를 장악한 뒤 자신의 야망을 달성시킬 계획입니다."
"대신의 야망이라면 내 보위를 노리는 게 아닌가?"
"그걸 포기하고 축자주에서 가장 큰 액전국부터 노리듯 합니다."
"대신이 액전국을 왜 노린단 말인가?"
여왕의 질문에 쇼토쿠는 그에 대한 설명을 했다.
축자주의 액전국(額田國)은 백제 계가 세운 나라였다. 우마코는 액전국을 차지해 발판을 삼은 뒤 여타 소국들을 정복해 나가려는 의도를 갖고 있을 것으로 본다는 말을 여왕에게 했다.
"대신이 축자주에 통일 왕조를 세우는 게 가능하겠는가?"
여왕은 골칫거리인 대신이 그렇게라도 해줬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대신은 그러기 위해 먼저 축자진의 상인들을 장악하려 들 것입니다."
"상인들을 장악한다고 액전국을 넘볼 수가 있단 말인가?"
"신은 대신이 성공을 하건 말건 간에 소국들을 통합하는 일을 지원할 생각입니다. 그건 왕실이 할 일을 대신이 대신하게 만드는 일입니다."
"섭정에게 어떤 계책이 있다면 잘해주기만 바랄 뿐일세."
여왕은 만족하며 안심하는 표정을 지었다. 쇼토쿠는 그동안 고구려와 신라를 상대로 하는 교섭을 벌여 큰 성과를 거두었다. 더욱 지도력을 발휘해 왕실의 안정을 도모해야 하지만 한편으로 우려가 되었다.
"섭정, 대신은 원하는 목적을 위해 무슨 짓이라도 할 사람일세. 앞으로 섭정이 철정 사교역을 관장하게 되면 매우 위험해질 수도 있네."
여왕의 말에 쇼토쿠는 무겁게 대답했다.
"신도 나름대로 대처를 하겠습니다. 이번에 온 백제국 사신 중 사주란 자는 대신과 무슨 일로 접촉을 하는지 알아봐야 하겠습니다. 그 자는 백제국의 상좌평인 진도의 심복이기 때문입니다."
"진도란 자는 백제국 왕위를 노리고 있는 강신이 아닌가?"
"그렇습니다. 대신은 그런 진도와 손잡고 무슨 일을 꾸밀 기미가 보입니다. 그에 대응하고자 신은 조리에게 알아보니 백제왕도 대신과 진도가 무슨 음모를 꾸미는 것을 잘 알고 있다는 대답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섭정도 무슨 대책을 세워야 하지 않겠는가?"
"백제왕은 근래에 와서 위사좌평인 목돈의 지원을 얻게 되었답니다. 그리고 신에게도 대책을 세울 도움과 협조를 요청해 왔습니다."
"섭정, 적극 돕게. 이번 기회에 진도란 자를 아예 제거해 버리게 만들었으면 좋겠네. 백제국 왕실의 안정은 아국에도 이로울 일일세."
"전하, 신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으므로 염려하지 마옵소서."
쇼토쿠는 대답하고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왜국은 언제나 한삼국이 서로 적대하는 형국을 잘 이용해 왔다. 그것은 어떻게 쓰건 간에 국익에 도움이 될 꽃놀이패나 다름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