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여제동맹(麗濟同盟)
여름은 막바지로 치달았다.
사비성의 외성인 고부리 성엔 백제군 군사 훈련장이 있었다.
태양이 이글거리는 폭염 속에 훈련장에선 구리 빛 장정들이 창검술 훈련을 받았다. 고함 소리로 가득 찬 연병장의 사열대 위에선 30대 초반의 장수 하나가 장정들의 훈련을 지켜보고 있었다.
눈매가 매처럼 날카로운 장수의 이름은 목등(木登)이다. 군사훈련 책임자인 그는 원리원칙 대로 철두철미하게 훈련을 시켰다. 장정들의 훈련 태도가 조금만 느슨해져도 불호령을 터트렸다.
목등은 강훈련만이 전쟁터에서 목숨을 보전하는 방패가 된다고 말했다. 그가 장정들과 뙤약볕 아래 땀투성이로 하루 종일을 보내는 덕분인지 백제군의 전력이 강해졌단 말들을 했다.
목등은 곁에 서 있는 부관 방이(尨耳)에게 물었다.
"요즘 장정들의 식사는 먹을 만한가?"
"옛, 밥도 반찬도 넉넉하게 먹게 해서 모두 만족해합니다."
"강훈련을 시키려면 장정들을 든든히 먹여야 한다."
방이는 아부 근성이 발동해서 목등을 추켜세웠다.
"장정들은 방장님에 대한 칭송들이 자자합니다. 방장님이 부임해 오신 뒤로 군사훈련은 강해졌지만 배불리 먹게 되어 좋아합니다. 전에는 배가 고파 여간 고생을 하지 않았는데 지금은 그런 불만은 다 사라졌습니다."
"방이, 그만 식사 종을 울려라."
"옛, 방장님."
땡 땡 땡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장정들은 훈련 동작들을 멈추고 대오를 짓더니 막사 쪽으로 향했다. 수백 명의 장정들이 빠져나간 연병장엔 정적만 깃들었다.
목등은 방이에게 일렀다.
"방이, 가서 장정들의 배식을 살펴봐라."
"옛, 방장님."
방이가 막사 쪽으로 뛰어가자 목등은 몸을 일으켜 세웠다. 사열대를 내려와 청사가 있는 언덕으로 올라갔다. 청사 앞 팔각정 위에선 연병장 전체가 한눈에 다 들어왔다.
목등은 팔각정 위로 올라가서 정자 마룻바닥에 몸을 벌떡 뉘었다. 그는 목가장에 백가면이 침투했단 말을 전해 듣고 괘씸한 마음에 며칠간을 밤잠을 설쳤다. 피곤 기를 느껴 잠시 눈을 붙여보려는데 점심을 먹으려는 군관들이 팔각정 밑으로 몰려들며 떠들썩해졌다.
"어휴, 날씨는 점점 더워져가고 허기진 뱃가죽은 등허리에 들러붙을 정도로 배가 고파서 기운을 차릴 수가 없을 지경이야."
식사 때마다 게걸스럽게 먹는 마술(馬術)인 교관 돌치의 목소리였다.
"돌치, 엄살 좀 그만 떨게. 자넨 말만 타서 거저먹는 주제에 무슨 힘이 든다고 엄살인가? 고된 훈련을 받는 장정들이 죽어날 판이지."
궁술교관인 장개(丈介)가 핀잔을 주자 돌치는 계면쩍게 대답했다.
"하긴 우린 군관들이라 덜하지. 고된 훈련을 받는 장정들에 비하면 신선놀음을 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고 봐야지."
검술교관인 목라(木羅)가 그 말을 받았다.
"방장님은 훈련을 무섭게 시켜도 장정들의 세 끼 식사만은 든든하게 챙겨 주시니까 그래도 견딜 만하지. 먼저 방장처럼 양곡을 빼돌려 사복을 채웠을 땐 장정들이 배를 주리며 얼마나 고생들을 했는가?"
누각 위에 누운 목등은 본의 아니게 부하들이 나누는 얘기를 엿듣게 되었다. 잠을 청하기는 다 틀렸고 군관들이 나누는 얘기들이나 들어보려고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자네들 혹시 이런 소문을 들어봤는가?"
"어떤 소문을?"
"이건 쉬쉬 하는 소문인데 얼마 전 목가장에 백가면이 침입했다네."
"백가면이? 목가장엘 다 들어갔다고?"
"목가장에 갇혀 있는 한 아낙을 구출해 내려고 그랬다는군."
"색마 좌평 소리를 듣는 분이 또 남의 계집을 끌어 왔기 때문이군?"
그때부터 음성들이 낮아져 목등은 더욱 귀를 기울였다.
"소문대로 백가면의 무예가 대단했던 모양일세."
"백가면이 얼마나 대단하기에 목가장에 침입할 수가 있을까?"
"글쎄, 그날 목가장에서 백가면이 위사좌평과 한판 붙었다 지 뭔가! 허지만 좌평에겐 적수가 못되었던지 도망을 쳤다는군."
"백가면이 목가무문 문주와 겨루고도 무사히 빠져나갈 수가 있었다? 그렇다면 소문대로 무예가 대단하다는 말이 아닌가?"
"대체 백가면의 정체는 누구일까?"
"목가장에서 흘러나온 소문인데 백가면은 남자가 아니라네."
"남자가 아니면 여인이? 말도 안 되는 소린 그만하게."
"나도 첨엔 믿을 수가 없었는데 더 놀라운 소문도 있네."
"더 놀라운 소문이란 대체 뭔가?"
"백가면은 백기 장군의 외동딸일지도 모른다는 소문일세."
"백기 장군의 외동 따님이라면 이름이 주랑으로 알려졌네. 그 처녀는 대단한 미인이라더군! 요즘에 백가무문으로 들어가려는 문생들이 부쩍 늘었는데 바로 주랑낭자를 보려고 그런다는 소문이야."
"미모가 뛰어난 처녀가 검술도 대단하다니 믿을 수가 없군."
"아마도 헛소문일 게야. 아무리 검술이 대단한들 위사좌평을 상대하고도 무사히 빠져나갈 수가 있었다? 나로선 믿어지지가 않을 일이야."
"목가무문과 백가무문이 앙숙이라 누가 지어낸 말일지도 모르겠네."
군관들은 목돈과 백기가 대립하는 사이임을 알아 그런 얘길 나눴다. 그러나 듣는 목등은 심기가 여간 불편하지 않았다. 목라가 말했다.
"백가면은 어떻게 목가장에 침입할 마음을 감히 먹었을까?"
"근래 방장님은 위사좌평과 사이가 매우 나빠져 목가장을 나와 따로 사시네. 만약에 목가장에 계셨다면 백가면의 정체가 드러났을 것일세."
"암, 그렇고말고. 그런데 두 분은 사이는 왜 나빠지셨을까?"
"위사좌평은 아들 내외가 강제로 헤어지게 만들지 않았는가? 그런 방장님은 첫 부인과 금술이 매우 좋은 사이였으니 상심이 크실 수밖에."
"위사좌평은 왜 그런 처사를 했는지 모르겠군?"
"내가 들은 바로는 위사좌평이 자신의 출세를 위해서 며느리를 내쫓고 과부가 된 내신좌평의 딸을 새 며느리로 맞아들였기 때문이 아닌가?"
목등은 그 때문에 새로 맞은 아내에겐 정을 못 느껴 갈등이 심했다. 그런 데다 전 부인은 지난 해 왜국 땅으로 건너 가 더욱 심란한 나날을 보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진씨 부인도 재혼한 방장님에게 정을 못 느껴 사이가 안 좋다네. 그런데다 진씨 부인은 행실도 매우 나쁘다는 소문이 났네."
"그건 또 무슨 소린가?"
"진씨 부인은 과부가 되자 친정으로 돌아온 뒤로 하인과 붙어먹었다는군. 그놈을 잊지 못해 시집에서 구박을 한다는 핑계를 대고 친정으로 돌아가선 아예 돌아올 생각을 않는다는 소문이야."
"방장님 얘긴 그만하고 다른 얘기나 하세나."
"나는 백기 장군이 좌장이 되신 걸 쌍수로 환영을 하네. 그분이 좌장이 되신 건 이 나라의 장래를 위해 더 좋을 수는 없는 일일세."
"그러나 좌평들은 벌써부터 좌장님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려고 다툼질을 벌인다네. 참으로 한심하기가 짝이 없을 작태들이지."
"좌평들은 제 이익만 취하는 자들이므로 그럴 수밖에 더 있겠나?"
목등은 누각 위에서 본의 아니게 부하들의 말을 엿들으며 착잡한 심경이었다. 거기다 백기 장군은 사람들로부터 크게 흠모를 받는데 비해 부친의 평판은 좋지가 않아 입맛이 씁쓸했다.
"주랑 낭자는 인물이 곱다고 소문이 났으니 장차 누가 데려가게 될지는 모르겠으나 부럽기 짝이 없는 일이군."
"그래서 사비성의 헌다하는 귀족 자제 들치고 군침을 흘리지 않는 자가 없다지 않나? 언젠가 방장님도 마음을 둔 뜻을 내비친 적이 있었지."
"내가 한번 월담을 해서 못 먹을 감을 한번 찔러나 볼까."
"쓸데없는 소리들은 작작하고 어서 밥이나 먹게."
교관들은 그런 대화를 나누며 웃어대었다. 목등은 괘씸해서 호통을 칠 뻔했는데 그때 밑에서 새로 교관이 된 흑치료(黑齒了)가 달려와서 크게 외치는 소리가 일어났다.
"좌장 합하께서 오셨소."
목등은 백기가 왔다는 소리에 누각 위에서 몸을 벌떡 일으켰다. 밥을 먹던 교관들은 수저를 내던지고 연병장을 향해서 달려갔다. 말을 탄 백기 장군은 사열대 쪽으로 다가들고 있었다.
백제에선 백기를 군인들 중 으뜸으로 치며 존경해마지 않았다. 국왕도 백기를 군의 대들보로 목등은 기둥이라며 두 사람이 보완 관계가 이뤄지게 되면 대단히 바람직한 일이란 말을 했었다.
세평도 성품이 원만한 백기를 덕장(德將)으로 기개가 넘치는 목등을 용장(勇將)으로 쳤다. 때문에 그런데 이번에 백기가 좌장에 임명되자 군 전체가 환영하며 큰 기대를 걸고 있었다.
백기는 자신을 잘 따르는 목등을 장래가 촉망되는 후배로 여겨 조언도 많이 하는 편이었다. 거기다 아들이 없는 터라 정적의 아들일지라도 친자식처럼 대하며 아껴주었다.
목등은 그런 백기가 좌장에 임명된 것을 매우 반겼다. 그리고 좌평들 전부가 동의한 것을 매우 예외적인 일로 봤고, 부친과 백기 장군의 관계가 좀 원만해지길 바라는 마음이었다.
백기는 말에서 내려 청사가 있는 언덕길을 올라오고 있었다. 목등은 백기를 영접하려고 누각에서 뛰어 내려가 군례를 붙였다.
"좌장 합하, 승진을 축하드립니다."
"목방장, 그동안 잘 지냈는가?"
"소장은 승진 축하인사를 드리러 가려던 참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찾아 주시니 송구스럽기 짝이 없습니다. 곧 연병장에 장정들을 집합시켜 사열 준비를 하겠습니다."
백기는 가볍게 손을 저었다.
"오늘은 공무로 온 게 아니고 개인적인 볼 일이 있어 왔네."
"합하, 소장을 부르시면 달려갔을 일인데 어찌 몸소 오십니까?"
목등은 황송해하면서 눈치를 살폈다. 자신은 주랑이 목가장을 침입한 일로 화가 나서 술좌석에서 그녀를 첩으로 삼고 말겠다는 말을 한 적이 있었다. 그 일이 켕겨 눈치를 보게 되었다.
백기는 목등의 집무실로 들어서자 따라 들어온 계백을 소개했다.
"목방장, 새로 내 부관이 된 계백일세."
계백은 목등에게 군례를 붙이고 목청껏 외쳤다.
"방장님, 신고합니다. 좌장 합하의 부관 계백입니다."
목등은 떠나가라 소릴 지르는 계백에게 눈살을 찌푸렸다.
"계백, 자넬 벌써부터 벼르던 참인데 잘 만났다."
계백은 까닭을 모를 호통에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방장님, 어인 일로 이러십니까?"
"자넨, 요즘에 객쩍은 소리만 지껄이며 다니지 않는가?"
"소관이 무슨 객쩍은 소리를 했다는 말씀입니까?"
"자넨 고구려 다갈촌 검술 대회에서 어떤 성적을 거두었나?"
"차석입니다."
"차석을 한 주제에 자랑만 하고 건방진 소리까지 한다니 그렇다."
"소관이 무슨 건방진 소리를 했다는 말씀입니까?"
"백제엔 고구려 검법을 따를만한 검법이 없다고 지껄인다지?"
목등이 도끼눈을 뜨자 계백은 그제야 주눅이 드는 태도를 보였다.
"방장님, 그 얘긴 와전된 소문입니다."
"계백, 와전된 소문이라고? 변명은 통하지 않는다."
"소관은 고구려에서 다갈검법을 처음 접했습니다. 그 기본기는 백가나 목가검법과 비슷했으나 찌르기의 비빔이 강하고 베기의 갈김도 날카로웠습니다. 그런 얘기를 했을 뿐인데 누가 고구려 다갈 검법이 우리보다 더 월등하다는 말로 둔갑을 시켜서 소문을 퍼뜨린 것입니다."
목등은 여전히 노기를 띤 음성으로 호통을 쳤다.
"닥쳐라! 너 같은 거탈에 지나지 않는 주제가 뭘 안다고 고구려 시골구석과 우릴 견줘? 한번만 더 그 따위 소릴 지껄이면 가만 안 둔다."
계백은 목등의 불같은 성격을 알기에 재빨리 굽혀들었다.
"옛, 조심하겠습니다. 방장님!"
계백은 이마에서 진땀이 확 솟았다.
목등이 큰 화를 낸 데는 다른 이유가 없지도 않았다. 혹시 자신이 주랑을 두고 한 말을 백기가 꺼낼까 두려워 방패막이로 계백을 꾸짖으며 눈치를 살폈다. 백기는 계백을 향해 입을 열었다.
"계백, 차상을 한 주제에 웬 검술 평가는 그리도 잘하는가?"
계백은 시무룩해서 대답했다.
"죄송합니다. 합하."
목등도 조금 누그러든 음성으로 계백에게 한 마디 했다.
"계백, 자넨 고구려 시골구석의 검술 대회에서 차상을 한 것을 자랑을 삼는다는 건 백제 검인의 낯을 스스로 깎는 일이다."
계백은 좀 속이 상해 입을 굳게 다물었다. 목등은 이번엔 백기를 향해 고개를 정중하게 숙이며 말했다.
"합하, 죄송합니다. 소장이 계백을 너무 나무란 점 용서하십시오."
"목방장, 선배가 후배를 따끔하게 가르치는 건 당연한 일일세."
"합하께서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소장은 마음이 좀 놓입니다. 소장도 계백은 장래성이 엿보이는 후배라서 늘 관심을 갖고 충고를 합니다만 오늘은 좀 지나친 점이 없지도 않았습니다."
백기는 부드러운 미소만 짓고 목등은 계백을 돌아다보았다.
"계백, 자넨 고구려를 또 다녀왔다고 들었네."
"예, 조정의 국서를 전하고 왔습니다."
"합하, 조정은 고구려의 동맹 요구에 응했다고 들었습니다."
"그럴세. 그런데 을지문덕은 아국의 동의를 받기도 전에 이미 예상을 한 듯 자신이 구상한 작전을 실행시키려는 것 같 같네."
백기의 말을 듣고 목등은 계백에게 시선을 돌렸다.
"계백, 그대가 본 고구려의 상황을 전해 보게."
"예, 지금 고구려는 왕실로부터 백성들까지 혼연일체로 전쟁 준비에 임하고 있습니다. 아이들마저도 적과 싸우겠다며 벼르는 판입니다."
"고구려는 자신감이 있어서 그럴까? 허세를 피우는 걸까?"
목등이 중얼거리자 백기가 입을 열었다.
"계백은 귀국할 때 일부러 위험을 무릅쓰고 육로를 거쳐서 왔네. 그 이유는 신라의 신주정군을 정탐하기 위해서였다고 하네."
목등은 그 말을 듣고 계백을 대견하게 보는 눈길이 되었다.
"계백, 대단한 모험을 감행했군? 그건 장한 일인데 그렇다면 신주정 군을 정탐하여 무슨 소득을 얻은 것이라도 있는가?"
"소관은 신주정 군의 이상한 움직임을 포착할 수가 있었습니다."
목등은 계백 쪽으로 상체를 확 내밀었다.
"계백, 이상한 움직임을 포착했다니?"
"한수 상류 쪽에서 신라 수송 선단 수십 척이 내려왔습니다. 그 배들은 강변에다 양곡과 보급품을 산더미처럼 부려놓았습니다."
"군대가 보급품과 양곡을 공급하는 건 통상적인 일이 아닌가?"
"소관은 그것만 목격한 게 아닙니다. 이상한 점도 발견했습니다. 신라군은 보급품을 성안으로 들이지 않고 전부 북쪽으로 옮겨 갔습니다."
"신라군이 보급품을 전부 북쪽으로 옮겨 갔다고? 그렇다면 무슨 이유일까? 자넨 보급품을 어디로 보낸 것인지도 계속 추적을 했는가?"
"신라군은 백성들의 통행을 일체 통제했기 때문에 소관은 뒤를 밟을 수가 없었습니다. 대신 신주정 군이 주둔한 산성을 살폈습니다."
목등은 흥미를 부쩍 느끼듯 백기를 바라보았다.
"합하, 보급품을 북쪽으로 이동시킨다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닙니까?"
백기가 대답했다.
"계백이 현장에서 다른 것을 더 본 게 있다면 들어보세."
계백은 다시 입을 열었다.
"신라군 3천 여 병력은 완전 군장을 갖추고 산성을 나온 뒤 행군 대오를 짓고 북쪽으로 이동해 갔습니다."
"계백, 대병력이 북쪽으로 향한 게 확실한가?"
목등은 물으며 눈빛이 달라지는데 백기가 입을 열었다.
"목방장, 신주정 군이 병력과 보급품을 북쪽으로 이동시켰다면 신라가 그러는 이유가 무엇인지 한번 생각해볼 필요가 있지 않겠나?"
"소장은 신라가 무슨 군사작전을 펼치려는 것으로 생각이 됩니다."
백기는 목등의 대답을 듣고 계백을 밖으로 내보냈다.
"목방장의 추측은 맞네. 나는 그 점을 놓고 얘기를 나누려고 왔네."
목등은 그 말에 궁금증이 더욱 커지고 긴장감마저 일었다.
"합하, 만약에 신라가 이 시점에 벌써 고구려에 대한 전단을 벌인다면 소장으로선 그 이유가 어디에 있음을 알 수가 없습니다."
"그 일은 수국과 연계시켜 생각해 보게 되네."
"합하, 아국과 신라는 수국이 전역을 일으킬 때 협조하겠다는 표방을 했습니다. 그러나 아직은 시기상 너무 이르단 판단입니다."
"그야 물론이지. 다만 우린 다른 이유를 찾을 필요가 있네."
"합하, 다른 이유라면 어떤 점을 말씀하시려는 것입니까?"
"이번에 계백이 가져온 을지문덕의 서찰은 새로운 사실을 담고 있네."
"합하, 어떤 새로운 사실이 담겼기에 그러십니까?"
"신라는 지난해 고구려에 기가 찰 요구를 한 게 있었네."
"신라가 고구려에 무슨 요구를 했기에 그러십니까?"
"신라는 고구려에게 새로 국경선을 긋자는 요구를 했다네."
"신라가 새로 국경선을 긋자면 어떻게 긋는단 말입니까?"
"현 국경선에서 고구려가 백 여리를 후퇴해 임진수로 삼자는 걸세."
백기의 대답에 목등은 놀라움보다 기가 차는 표정을 지었다.
"합하, 그게 정말입니까? 감히 그런 요구를 할 수가 있었을까요?"
"신라가 그렇게 나올 수가 있었던 데는 믿는 구석이 있기 때문이 아니겠나? 한 마디로 수국이 배후에서 사주하고 조종하는 것일세."
목등은 수긍이 가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소장도 알만하겠습니다. 수국은 고구려 침공 시 신라와 동맹이 매우 중요하기 때문에 그걸 확실하게 다질 필요성에 그런 사주를 했고, 신라로 하여금 먼저 전단을 벌이게 만들 수작입니다.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신라군이 벌써 움직인다는 것은 너무도 이르다는 생각입니다."
"신라가 빠른 움직임을 보인 데는 어떤 타산이 있기 때문일세."
"합하, 신라가 어떤 타산을 깔고 그런다는 말씀입니까?"
"우리도 그렇지만 신라도 수국에 동조할 수는 없는 형편일세. 그러나 신라는 수국의 요구에 움직이는 시늉을 해보일 필요가 있지."
"합하의 말씀은 이해가 가지만 그래도 너무 빠른 것 같습니다."
"신라는 이런 상황을 이용해 고구려를 떠볼 필요도 있을 것일세. 고구려가 요구를 들어주면 큰 소득이고 안 들어줘도 손해 볼 건 없거든. 아무튼 간 고구려의 반응을 한번 떠볼 기회로 삼을 속셈일세."
두 사람은 그런 말로 시작해 신라에 대한 의견을 많이 나눴다.
신라가 한수유역을 지켜내는 게 매우 힘듬은 자타가 공인할 일이었다. 그 이유는 한수 유역의 하류 쪽은 남북의 폭이 좁은 지형적인 약점이 컸다. 더욱이 북쪽은 고구려, 남쪽은 백제와 대치한 상태로 양쪽에서 동시에 협공을 당하면 방어가 쉽지 않다. 때문에 지형적인 취약성을 개선할 필요성에 한수 하류 쪽의 영역을 넓혀야만 했다. 그런 때 마침 수국이 고구려 침공을 개시하게 되고 그걸 이용해서 해결할 방법을 찾을 필요성이 있어 미리 무리한 요구를 한번 해본 것이었다. 그런데 고구려는 신라의 그런 요구를 역이용할 작전으로 맞대응에 나섰다.
"합하, 신라가 수국의 고구려 침공에 협력할 것으로 보십니까?"
"아국이나 신라는 동조만 표방했을 뿐임을 목방장도 알만 하지 않은가? 다만 신라는 절박성이 크므로 혹여 고구려의 양보를 받아내면 전역에 휘말리지 않고도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기대 심리가 깔렸겠지. 그런데 을지문덕은 신라의 그런 요구를 받자 대응 작전에 이미 돌입을 했네. 그것은 아국은 물론 왜국과도 동맹을 성사시켰네. 그런데 을지문덕은 그걸로 일을 끝낼 인물이 아닐세."
백기의 말을 듣고 목등은 욕심이 났다.
"합하, 양국의 동맹이 성사된 이상 아국도 이번 기회에 큰 욕심을 부려 한수 유역 탈환전을 펼칠 결단을 내리면 어떻겠습니까?"
"목방장의 욕심은 이해가 가지만 그건 쉽지가 않겠네."
"그러면 아국이 고구려와 맺은 동맹은 뭘 얻을 게 있겠습니까?"
"고구려도 백제에 필요한 작전을 제안했네."
"합하, 백제에 필요한 작전은 어떤 것입니까?"
"아국이 현재 가장 필요로 하는 것은 철이 아닌가? 그런 실익을 거둘 수 있는 방책으로 신라의 가잠성을 공취해 회복하는 작전일세."
"가잠성?! 소장도 그 성은 신라의 군사적 요충지일 뿐만 아니라 부근에 큰 철산지가 있는 걸로 압니다. 성엔 매우 큰 야장방이 있고 신주정 군의 후방 병참기지 역할도 하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맞네, 아국은 가잠성을 잃은 뒤로 국력의 쇠퇴를 초래했고 반대로 거길 차지한 신라는 신신 장구를 하게 되었네. 만약에 우리가 가잠성을 회복할 수만 있다면 한수유역을 회복하는 데도 큰 발판이 될 수가 있네."
"합하, 고구려가 신주정 군의 발목을 잡아준다면 가능한 할 수도 있겠으나 이 시점에 고구려가 도움을 줄 수가 있을지 의문입니다."
"신라군은 이미 움직임을 보였지 않은가? 그건 고구려가 그렇게 만든 일일세. 아국도 곧바로 움직임을 보일 차례가 되었다는 생각일세."
"합하, 그렇다면 우린 당장 움직여야 한다는 말씀이 아닙니까?"
"그 일은 좌평회의에서 이미 결정이 났네."
"합하, 그 말씀 사실입니까?"
국왕은 며칠 전 고구려의 동맹제의와 가잠성 공취 건을 놓고 좌평회의를 열었다. 그 자리에서 목돈이 가장 앞장서 동맹의 필요성을 적극 강조한 결과 급속한 결정이 내려질 수가 있었다.
"나는 위사좌평께서 큰 역할을 하셔 매우 감사하고 기쁘게 여기네."
"합하, 가잠성을 공격하면 신라의 저항이 만만치 않겠습니다. 고구려가 신주정 군의 발목을 묶어도 남방의 병력을 끌어올릴 것 같습니다."
"현재 신라는 남방 사정도 녹녹지가 않네. 왜국이 신라를 침공 병력을 축자 포구에 집결시켰기 때문인데 문제는 아국의 사정이 더 어렵네."
백기의 대답에 목등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합하, 아국의 사정이 어떻기에 그러십니까?"
"가잠성 공취는 속전속결 작전이 필요한데 그게 어렵겠네."
"합하, 병력 동원 때문에 그러시는군요? 소장은 가잠성의 신라 수비 병력이 얼마나 되는지가 더욱 관심인데 파악이 되었습니까?"
"을지문덕님이 알려온 바론 가잠성은 보병 1천과 기병 1백 기가 있네. 기병들은 현재 신주정 군에 차출이 되어 성엔 없는 걸로 알려졌네."
"성 공격엔 3배 이상의 병력이 투입돼야 가능하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3천 병력을 출동시키려면 지방군을 총동원해야 가능한데 그러자면 시간도 걸리고 신라 첩자들의 눈에 띌 우려가 있어 기습작전은 어렵다는 생각일세."
"합하, 병력을 급히 동원할 방법은 달리 찾을 순 없겠습니까?"
"사비성 안팎에서 최대한 병력을 동원하는 방법도 모색하고 있네."
"합하, 사비성 안팎에서 동원할 병력은 한계가 있지 않겠습니까?"
"좌평들의 호응이 매우 커서 어떻게 꾸려볼 수가 있을 같네. 팔가들은 각자 집에 둔 사병들이 2백여 명씩이고 가문의 인력들을 더 동원한다면 2천까지는 꾸릴 수가 있다는 계산이 나오네."
"합하, 2천 정도의 병력으론 성을 공격하긴 부족합니다."
"때문에 나는 궁여지책을 쓸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하고 있네."
"합하, 어떤 궁여지책을 쓰시겠다는 말씀입니까?"
"왕궁의 수비병 중 절반을 차출하는 방법일세. 그렇게 되면 1천여 병력을 더 확보할 수 있으므로 3천 병력 출동이 가능해지네."
"합하, 수비병 출병은 폐하께서 허락하셔야 가능하지 않겠습니까?"
"폐하께서도 매우 중요한 작전인 만큼 이미 허락을 하셨네."
"합하, 그렇다면 문제가 해결된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갑자기 문제가 생겼네."
"합하, 갑자기 무슨 문제가 생겼단 말씀입니까?"
"자네 부친께서 어제 유보 쪽으로 태도를 바꾸셨네."
목등은 부친과 백기가 모처럼 협력할 계기가 되었음을 여간 반기지 않는데 부친이 무엇 때문에 갑자기 태도를 바꿨다니 실망이 컸다.
"합하, 제 아버님께서 무엇 때문에 그러시는지 모르십니까?"
"나에 대한 불만이 있기 때문일세."
"아버님은 합하께 무슨 불만을 품고 계실까요?"
"부친은 고구려와 동맹에서 큰 힘을 쓰신 만큼 바라는 바가 클세."
"아버님이 무얼 크게 바라시는지 소장은 모르겠습니다."
"백제가 고구려와 동맹을 맺은 근본적인 요인은 철 때문이 아닌가? 좌평들이 전부 찬성한 이유도 거기에 있네. 그런데 부친께선 고구려가 공급할 철정의 관장을 자신이 하겠다는 욕심을 내는 데서 비롯되었네."
"고구려의 철정 교섭은 아버님과 좌장님이 함께 하신 공로가 아닙니까? 아버님과 좌장님이 함께 하시는 건 당연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내가 아니고 자네의 장인이신 내신좌평이 대신하려고 하네."
"합하, 내사좌평이 무슨 공로가 있다고 그걸 원한단 말씀입니까?"
목등의 반문에 백기는 그에 대한 설명을 했다.
백기와 목돈은 고구려와 동맹을 맺기 전에 을지문덕과 철정공급을 교섭을 하고 있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진도는 백기가 좌장 임명을 받는 것에 동의하는 조건으로 자신도 철정을 공급받는 일에 관여하게 해줄 것을 요구해서 백기는 자신 대신에 끼어들게 만들었다.
"합하, 두 분이 철정 관장을 나눠 가지면 되지 않겠습니까?"
"목방장, 자네도 그런 생각하지만 부친은 아닐세."
백기의 말을 듣고 목동은 표정이 굳어졌다.
"합하, 부친께서 왜 그러시는지 모르십니까?"
"부친은 나 때문에 일이 꼬이게 되었다며 원망을 하네. 그러나 실상은 그렇지가 않네. 을지문덕은 동맹을 성사시키자면 부친과 상좌평의 관계를 고려하지 않을 수가 없었네. 그렇지 않으면 동맹이 불가능할뿐더러 성사가 된 후에도 일을 순조롭게 진행될 수가 없는 생각을 했을 것일세. 그러므로 두 분이 절반씩 철정 관장을 나누는 게 최선의 방책이란 판단을 한 것일세. 그러나 부친은 나 때문에 일어난 일이니 전체를 관장하게 만들라는 요구를 하니 들어줄 수도 거절할 수도 없는 난처한 처질세."
"합하께선 부친과 죽마고우이시니 설득을 더 하십시오."
"그렇지만 이번 경우에 사사로운 감정에 휘말릴 생각은 없네. 더욱이 나라 천체가 합심단결을 요구하는 판국에 내가 설 자리가 어딘지는 분명하게 할 수밖에 없네. 그러자 부친은 내게 또 다른 요구를 하시네."
"합하께 무슨 요구를 또 하십니까?"
"을지문덕에게 부탁해 부친의 공급량을 더 늘려 줄 것을 요구하라는 것일세. 그러나 고구려도 그게 쉽지가 않을 일일세."
백기는 대답하고 고구려의 사정을 더 설명했다.
고구려는 타국에 더 이상의 철정 공급을 할 여력이 없었다. 다만 백제는 자체적인 생산량이 워낙 적어서 특별 배려를 한 것이었다. 또 동맹을 잘 유지시키는 데도 편파적인 태도는 결코 취해선 안 됨으로 목돈의 요구를 들어줄 수가 없다는 입장이었다.
목등은 설명을 듣고 고개만 끄덕였다.
신라가 백제의 한수유역을 빼앗은 데는 고구려의 도움이 결정적이었다. 때문에 좌평들은 동맹이란 있을 수 없는 일이나 철정 부족을 해결하기 위해선 응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고구려는 가잠성을 회복해서 철산지를 차지하면 실익이 더 큼을 강조했다. 백제도 고구려가 도와준다면 해볼 만한 일로 여겨 큰 기대를 걸었다. 그런 마당에 좌평들 간에 개인적인 이익 다툼이나 벌이면 모처럼 맞은 호기를 그르칠 일이었다.
백기는 무슨 생각에 잠긴 듯한 목등을 향해 입을 열었다.
"목방장, 되풀이 말하건대 가잠성 공취는 기습을 요할 작전으로 병력 동원이 빨리 이뤄져야 가능한 일일세. 그런데 모처럼 이뤄낸 내부적인 단합에 차질을 빚게 된다면 국가적인 손실이 여간 크지가 않겠네."
목등은 그 말에 굳은 음성이 되었다.
"합하, 소장이 한번 아버님께 건의를 드려보겠습니다."
"목방장은 어떻게 건의를 드리려고 하는가?"
"대의를 위해 양보해 주실 것을 간곡히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목등의 대답에 백기는 표정이 밝아졌다.
"목방장이 나서 주면 고맙기 그지없으나 부친이 들으실지 모르겠네."
목등은 결심했다.
"합하, 소장은 어떻게 해서든 아버님의 허락을 받아내겠습니다."
"목방장, 고맙네. 나는 내일 저녁에 상좌평님을 만나게 되었네. 그때까지 부친이 어떤 결정을 내려야만 나도 입장을 정할 수가 있네."
"합하,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목방장, 나는 이만 일어서야 하겠네."
백기는 계백과 더불어 고부리 성을 떠났다. 목등도 즉시 말을 타고 곧장 위사 청사로 향했다. 목돈은 아들을 맞아 큰 소리로 말했다.
"나는 네가 올 줄 알고 있었다. 백기가 방금 전 고부리성을 방문했다는 보고를 받았다. 무슨 이유로 널 만났는지 궁금하던 참이었다."
"아버님은 소자까지 감시를 하고 계십니까?"
"널 감시하려는 게 아니고 백기의 동태를 살피고 있을 뿐이다."
"아버님은 좌장님이 무슨 일로 절 찾으셨다고 생각하십니까?"
"백기는 가잠성 공취에 관한 일로 내게 무슨 말을 전했는가?"
"좌장님은 내일 상좌평을 만나신답니다."
"네 장인과?"
"아버님은 두 분이 무슨 얘길 나눌지 짐작되는 게 있으십니까?"
"진도는 자기가 백기를 좌장에 올렸다는 생색을 내고 있다. 그러니 백기를 자기편으로 만들려고 회유공작을 펼칠 것이다."
"상좌평도 아버님처럼 고구려 철정공급에 관심이 크지 않겠습니까?"
"백기가 그런 얘길 꺼낸 뒤에 네게 무슨 부탁을 했겠군."
"소자는 대의를 위해 아버님이 이번엔 양보를 하시길 바랍니다."
"양보? 그러려면 그만한 반대급부가 있어야 하지 않겠나?"
"아버님은 어떤 반대급부를 원하고 계십니까?"
"진도는 백기를 자기편을 만들고 을지문덕과 교분을 가지려고 한다."
"그럴 것입니다. 아버님은 그걸 꼭 막을 필요가 있겠습니까?"
"막지를 못하면 나는 대신 바라는 점이 있다."
"아버님이 바라시는 점은 어떤 것인지 말씀해 주십시오."
"백기가 백제군 총관으로 가잠성 출병에 나설 때 나는 너를 부총관으로 만들어 백기를 보좌하고 겸해 그를 감시하는 역할을 맡기려 한다."
목등은 그 말에 부친의 의도가 어디에 있음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 자신도 그 말에는 관심과 기대가 커서 다른 쪽으로 말을 돌렸다.
"아버님과 총관님은 을지문덕님과 교분이 두터운 사이십니다. 그렇지만 을지문덕은 두 분 중 어느 분과 더 가까운지 모르겠습니다."
목돈은 아들의 말에 쓴웃음만 짓다가 대답했다.
"누가 더 가깝고 먼 것을 따지고 싶지는 않다. 다만 나는 이해득실을 추구하는 편이고 백기는 그렇지가 않은 점을 부인하지 않겠다. 그러니 을지문덕이 누구를 더 편하게 여길 지는 너도 알만한 하지 않겠나?"
"소자는 아버님께 여쭤볼 말이 또 있습니다."
"말해 보거라."
"가잠성 공취 작전에 투입할 병력 수급에 관한 일입니다."
"나도 그 문제로 여간 걱정을 하지 않는다."
"좌장님은 왕궁 수비병 중 절반을 차출해 투입할 계획이십니다."
"백기가 네게 그런 말을 했단 말이냐?"
"예. 폐하의 윤허를 받으셨답니다."
목돈은 고개를 무겁게 끄덕인 뒤 입을 열었다.
"가잠성 공취는 빠른 작전을 펴야 성공할 가능성이 크다. 폐하께서도 그 점 때문에 윤허를 하셨을 것이며 나도 마땅히 받들 일이다."
"아버님, 상좌평은 어떤 반응을 보일지가 의문입니다."
"그 자도 따를 것이다."
"아버님, 어떤 이유로 그런 생각을 하십니까?"
"나는 이제야 말하겠다. 폐하께선 수비병 차출에 대해 내 의견을 가장 먼저 물으셨다. 나도 타당성을 적극 건의했기 때문에 결정된 일이다."
"내신좌평은 어떤 태도를 보였는지 모르십니까?"
"이번 일은 나로서도 속으로 여간 놀라지 않았다. 왜냐하면 내신좌평이 의외로 적극적인 태도를 보였기 때문이다. 아무튼 간에 이번 출병은 나와 진도의 공동 발의로 이뤄졌지만 진도가 나보다 더욱 원했던 일이다. 그렇지만 폐하께선 진도보다 날 더 신임하시는 게 중요하다."
"소자는 폐하가 아버님보다 상좌평을 더 신임하는 걸로 아는데요?"
"전에는 그랬지만 이젠 다르다. 만약에 가잠성 공취가 성공을 거두게 된다면 나로선 상좌평직에 오를 꿈을 한번 꿀 수가 있겠다."
목돈의 말에 목등은 아연 긴장하는 표정이 되었다.
"아버님이 상좌평이 된단 말씀입니까? 더 여쭤볼 게 있습니다."
"뭐냐?"
"아버님은 이번 작전에 고구려가 적극 움직일 것으로 믿으십니까?"
"나는 고구려는 믿지 않는다. 그러나 을지문덕은 믿는다."
목돈은 아들이 어이없는 표정을 짓자 빙긋이 웃으며 말했다.
"나와 백기의 생각이 일치하는 점은 오직 그것 하나뿐이다."
"좌장님은 이런 말씀도 하셨습니다."
"어떤 말을 했느냐?"
"을지문덕이 고구려 국상 직에 오래 있기를 바란다고 하셨습니다."
"그건 나 역시 마찬가지다."
"두 분이 그러시는 이유는 대체 무엇 때문이십니까?"
"을지문덕은 백제에 이로우면 이롭지 해를 끼칠 사람은 아니다. 이번에 고구려가 아국과 동맹을 성사시킬 수가 있었던 것도 그가 국상 직에 올랐기 때문이다. 동맹에 앞장을 서고 전폭적인 지지와 협조를 한 나와 백기다. 우린 다 같이 그가 국상 직을 오래 유지하길 바란다."
"아버님은 을지문덕을 통해 고구려의 정보를 많이 입수하시는 걸로 압니다. 그러면 그 대가로 백제 쪽 정보도 제공하십니까?"
"오는 게 있으면 가는 것도 있기 마련이다."
"아버님, 어느 쪽이건 국가 정보를 빼돌리면 반역행위가 아닙니까?"
"그게 두려워서 못하면 눈과 귀를 가리고 사는 것과 다름없다. 국가 간의 정보 교환은 득실만 따져선 안 되고 이용이 중요하다. 많은 정보를 얻기보다 얻은 정보를 정확히 판단해 잘 활용을 해야 한다. 그럴 땐 한 쪽만 득을 보고 한 쪽은 손해를 봐선 상부상조가 되지 않는다."
"아버님은 을지문덕을 어느 면에서 그처럼 신뢰하고 좋아하십니까?"
"그는 화평을 중시하고 전쟁을 줄이려는 노력을 하는 사람이다."
"을지문덕을 어떤 면에서 그렇게 믿게 되십니까?"
"그는 사심이 없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아버님, 세상에 사심이 없는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사심이 없다기보다 야심이 없다는 말이 맞겠다. 을지문덕은 고구려의 최고 관직에 올랐으나 자리를 지키는 데만 연연할 사람이 아니다. 그 때문에 고구려 국왕이나 여타 부 상가들이 국상 직에 앉혔을 것이다."
"아버님, 상좌평은 소자가 아내를 집에 데려올 것을 요구합니다."
"진도가 백기에게 그런 부탁까지 했단 말인가? 네 생각은?"
"소자는 재결합을 원치 않습니다."
"알았다. 너는 나하고 나눈 얘기를 백기에게 그대로 전해라."
목등은 부친의 말에 그만 몸을 일으켰다. 자신을 부총관으로 올리려는 부친의 의도를 알고 여러 면으로 흡족해 들뜨는 심경이었다.
진도는 집에서 진수성찬을 차려놓고 백기를 맞았다. 백기와 마주 앉자 진도는 술부터 권했다. 두 사람은 한동안 술만 마셨다. 어지간히 술기운이 도는 가운데 진도가 물었다.
"백좌장, 근래 이런 소문이 도는 걸 들어 본 적이 있소?"
"어떤 소문입니까?"
"폐하에 대한 충성은 나와 백좌장을 따를 자가 없다고 말하오. 나로선 그 말을 듣고 백좌장과 더불어 큰 자부심을 느끼지 않을 수 없겠소."
"상좌평께서 그런 말씀을 하시니 저는 부끄럽고 황송합니다."
"나는 그런 좌장의 신상에 대해 늘 안타까움을 금치 못하오."
"상좌평께선 무엇 때문에 그런 마음을 가지신단 말씀입니까?"
"백좌장은 팔가에 속하나 좌평 직에 오르질 못했기 때문이요."
"그건 제 능력이 부족해서 그럴 뿐인데 어찌하겠습니까?"
"백좌장은 그게 탈이요. 그러다가 어느 천 년에 앉아 보겠소?"
백기는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는데 진도가 말을 이었다.
"전엔 팔가들끼리 서로 양보하는 미덕이 있었는데 지금은 없소."
백제의 팔가(八家)는 무왕이 보위에 오르는데 큰 공훈을 세운 가문들을 일컫는 것이었다. 때문에 그로 인해 국왕은 그들을 공신 반열에 올리고 전에 없던 특권까지 부여했다. 그 특권이란 팔가들끼리 호선(互選)으로 좌평 직에 오를 수가 있게 만들어 준 것이었다. 그렇게 한 목적은 왕실의 힘이 너무도 미약해 보호 울타리로 삼으려는데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며 팔가들의 세력이 너무 커져 그런 불문율은 깨지고 말았다. 세력이 큰 자들끼리만 좌평 직을 독차지하게 되었다. 그로인해 가장 힘이 약한 백씨와 국씨는 아예 제외된 대상으로 전락한 형편이었다.
백기도 그 점에 대해선 씁쓸한 심경인데 진도는 말을 이었다.
"나는 팔가의 대표로 백장군을 좌장 직에 추천했소."
"저도 상좌평께서 그렇게 하신 덕분에 과분한 직책을 맡게 되었습니다. 그 점을 너무도 잘 알기에 대단히 감사를 드립니다."
"백좌장이 그걸 안다면 나는 해둘 말이 있소."
"어떤 말씀을 하시렵니까?"
"나는 백좌장을 뒷받침해줄 우군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오. 그렇지 못하면 언제 다시 곤궁한 처지로 전락할지 모를 일이요."
백기가 잠자코 있기만 하자 진도는 다시 입을 열었다.
"더욱이 좌평 직은 여섯 가문만의 독점 전유물이 되었소. 그렇다 보니 백좌장은 앞으로 좌평이 되긴 어렵겠소. 나는 그걸 깰 생각이요."
진도는 백기를 포섭하고자 노골적으로 호의를 드러냈다.
"상좌평께서 제게 베푸신 호의에 늘 감사를 드립니다."
백기가 애매모호한 대답만 계속 하자 진도는 속으로 실망했다.
"백좌장, 을지문덕에게선 무슨 다른 소식이 온 것은 없소?"
"철정 공급과 관장 건은 변함이 없음을 다시 전해 왔습니다."
"그렇소?"
"을지문덕도 이번 동맹이 상좌평님과 위사좌평 두 분의 공이 큼을 잘 압니다. 그러나 아국이 철정을 고구려에만 의존해선 안 되므로 가잠성을 꼭 공취할 수 있게 상좌평님이 적극 힘쓰실 것을 바라고 있습니다."
"백좌장의 뜻과 고충을 잘 알겠소. 이젠 다른 얘기나 합시다."
"상좌평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려는지 경청하겠습니다."
"나는 가잠성 공취에 동원될 병력을 급히 꾸리는데 누구보다 앞장을 섰소. 그러나 현재 좌평들이 맡은 2천으론 부족하다는 판단이요. 백좌장은 그에 대한 무슨 복안이라도 갖고 있소?"
"좌평님들의 전폭적인 지지와 협력으로 2천여 병력은 확보된 셈입니다. 그러나 지방의 병력을 징발해 끌어올리는 데는 1개월 이상이 걸리기 때문에 궁여지책으로 세운 계획이 없지도 않습니다."
"어떤 계획을 세웠단 말이요?"
"궁궐의 수비병력 중 절반을 출정시킬 계획입니다."
백기의 대꾸에 진도는 갑자기 상반신을 확 내밀었다.
"궁궐 수비병을 동원한다? 그건 백좌장의 독자적인 구상이요?"
"그렇습니다. 상좌평께선 그 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백기는 말하고 진도의 표정을 면밀하게 살피게 되었다. 그런데 진도는 의외로 미소를 머금은 표정으로 반문했다.
"그 문제는 내 생각보다 폐하의 의견이 더 중요하지 않겠소?"
"폐하께 주청을 드려 이미 윤허를 얻었습니다."
"폐하께서 윤허를 하셨다는 게 사실이요?"
"예, 위사좌평도 찬동을 표했음을 제게 전해 왔습니다."
"위사좌평도 찬동을 했다면 언제 알려 왔소?"
"오늘입니다."
"그렇다면 내 결정을 기다린다는 말이 되는 구려?"
"예, 저는 내신좌평께서도 찬동하실 것으로 기대를 하겠습니다."
진도는 뜻밖의 판세를 맞게 되자 속으로 여간 크게 반기지 않았다. 그렇지 않아도 큰 고민이 있었다. 그런데 궁궐 수비병의 절반을 출동시키기로 한 결정은 고민을 일시에 날려버리게 만들었다. 신은 자신의 편이란 생각을 더욱 굳히게 되었다.
그렇지 않아도 자신은 보위를 탐내는 거사를 곧 일으켜 야망을 달성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그것은 가잠성 공취로 병력이 출정에 나설 때에 맞춰서 일으킬 준비를 해왔던 것이었다.
"위사좌평이 동의한 것은 나도 대환영이요."
"상좌평님이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저로선 마음이 크게 놓입니다. 그런데 위사좌평은 이런 제안도 했는데 그걸 말씀드려야 하겠습니다."
"위사좌평은 어떤 제안을 했소?"
"목방장을 제 부장으로 승진을 시켜 함께 출전시키길 원합니다."
"좌장, 그게 사실이요? 백좌장의 생각은 어떻소?"
"저는 목방장을 곁에 두고 싶습니다."
"백좌장의 뜻이 그렇다면 나도 대찬성이요."
"상좌평님, 정말 허락을 해 주시겠습니까?"
"그 대신 나도 백좌장에게 부탁할 게 있소."
"무슨 부탁이십니까?"
"나는 백좌장과 손을 잡길 바라지만 그건 무리임을 잘 알고 있소. 그러나 백좌장은 나와 위사좌평 사이에서 중립을 지켜주길 바라오."
"상좌평님, 그 점은 염려하지 마십시오."
"백좌장, 이제부턴 술이나 실컷 마십시다."
진도는 자신의 거사를 위해 되도록 많이 병력이 가잠성 침공에 투입되고 사비성에는 남지를 않는 게 유리했다. 그는 술잔을 쭉 비우고 나서 큰 소리로 뜻 모를 말을 던졌다.
"나도 백좌장도 사나이로 큰 야망을 품고 뜻을 달성해봅시다."
백기는 의아한 표정만 짓는데 진도는 미소로 응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