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 천리장성(千里長城) (631)
동돌궐의 멸망은 고구려를 또다시 암울한 분위기에 빠졌다. 힐리 가한은 침공을 받기 전부터 고구려에 병력 지원을 간청했다. 그러나 당의 눈치를 보는 건무왕은 들어줄 수가 없었다.
건무왕은 나중에 동돌궐에 병력 지원을 않은 걸 다행으로 여겼다. 힐리 가한이 체포를 당 끌려가자 당에 사신을 보내 축하하며 납작 엎드리는 자세를 취했다. 그로 인해 국내외로부터 큰 비난을 면치 못했다.
그리고 연개소문으로 하여금 멸망한 동돌궐 땅으로 가게 했다. 그 이유는 호리소코루에 근거지를 두고 말갈은 물론 북3국에서 큰 영향력을 끼치고 있다는 소문이 난 양신과 접촉을 해보기 위함이었다.
양신은 여러 곳을 통해서 연개소문으로부터 만나거나 소식을 주고받자는 제안을 받아왔지만 응답을 하지 않았다. 자신이 고구려와 어떤 연관을 맺는 것은 극히 삼가지 않으면 안 될 일이었다.
연개소문도 나름대로 양신과 연락을 취하고 싶어 그동안에 여러 면으로 노력을 기울였으나 도무지 응답을 받지 못해 국왕의 권유를 호리소코루로 갔으나 헛걸음질을 치고 돌아왔다. 그리고 국왕에게 보고했다.
당은 동돌궐을 치기 전에 설연타(薛延陀)와 위흘(圍紇)에게 무기를 제공해서 반란을 사주했었다. 힐리는 돌리에게 병력 3천을 끌고 설연타를 진압차 출동을 시켰는데 설연타의 1천 병력에 참패를 당했다.
"폐하, 그 일로 돌리 칸은 힐리 칸한테 무참한 일을 당했답니다."
"무참한 일을 당했다니?"
"돌리 칸이 패하고 돌아오자 힐리 칸은 신하들이 보는 앞에서 채찍으로 마구 때렸답니다. 아무리 분노가 큰들 너무도 심한 일이 아닙니까?"
"지나쳤군! 아무리 실패를 했기로서니 엄연한 칸 칭호를 받고 있는 돌리 칸인데 신하들 앞에서 매질까지 할 수가 있었다니?"
"폐하, 돌리 칸의 관할지인 동부 백성들은 그 소문을 듣고 너무도 분개해 차라리 당에 투항을 해서 살겠다며 떠난 자들이 많답니다."
"짐은 그래도 동돌궐이 그처럼 허망하게 망할 줄은 몰랐다."
국왕의 말에 연개소문은 내심 비웃을 머금고 대답했다.
"동돌궐의 멸망은 힐리 칸이 자초한 일로 봅니다. 칸의 권위만 세우려고 부족장들 사이를 이간질해서 군사력의 약화를 초래한 결과입니다."
"힐리 칸의 실정이 대체 어느 정도였기에 그 지경을 당했담!"
"가장 큰 실정은 내치에 있었다고 봅니다. 칸의 세력만 강화를 시키기 위해 무리한 제도 개혁에 매달린 게 큰 패착이 되었단 말들을 합니다."
"국가를 혁신하고 발전을 시키려는 제도 개혁이 패착을 불렀다니!"
"힐리 칸은 한족과 서역인을 조정에 너무 많이 기용을 했습니다. 그로 인해 도리어 자리를 잃고 밀려난 자국인 관리들의 반감과 원망을 키웠고 조정안에서 조성된 위화감은 내부 분열을 심화시킬 수밖에 없었습니다."
연개소문의 말에 국왕은 시인하듯 대꾸를 했다.
"짐도 그 점을 모르지 않으나 문제는 다른데 있었다."
국왕은 그렇게 대꾸하고 나름대로의 생각을 밝혔다.
힐리 가한은 한인(漢人) 조덕언(趙德言)을 신임해 재상에 앉혔다. 재상은 중국의 법령과 제도를 들여다 시행할 것을 건의했다. 그러나 그건 동돌궐의 사정에 맞지 않아 백성들의 반발심을 키우게 만들었다.
"폐하, 힐리 칸은 아부를 하는 자들만 곁에 두려고 했다니 그러고서 어찌 국가발전과 혁신을 이룰 수가 있겠습니까? 또 족장들 간에 편 가름을 심화시켜 내부적인 결속을 무너뜨린 게 멸망의 원인이 되었습니다."
"멸망을 당한 동돌궐 백성들의 사정은 어떤가?"
"폐하, 망해버린 나라 백성들의 사정을 아신들 뭘 하시겠습니까?"
국왕은 연개소문의 대답이 너무도 불손했지만 꾹 참았다.
"하긴 무참하게 무너진 백성들의 사정을 알아서 뭣하겠나."
"백성들의 냉담한 반응 속에 각 부족장들은 따로 놀고 있습니다."
연개소문이 하는 말들 속에 국왕에 대한 비난도 깔려 있는데 국왕도 그 점을 모르지 않아 그만 화제를 돌리게 되고 말았다.
"짐의 생각인데 양신은 서부상가와의 만남을 피하려는 것 같다."
연개소문도 그 말엔 수긍이 갔다. 그런 두 사람이 다 같이 양신과 접촉을 모색해 보려는 데는 각자의 동상이몽이 깔려 있었다.
국왕은 자신이 압박과 회유책을 반복해 쓴 결과 여타 부들은 등을 돌리게 되었다. 이젠 왕실과 여타 부 사이엔 신뢰와 기대감이 상실되어 각자도생의 길을 걷게 되었다. 거기다 당의 다음 목표가 고구려임을 잘 알려졌기 때문에 어떤 세력이건 가리지 않고 협력 관계를 맺는 게 절실했다. 너무도 막막한 심경은 양신의 힘이라도 빌리고 싶은 지경이었다.
연개소문 또한 위기의식이 여간 크지가 않았다. 당의 침공을 받을 경우 국왕은 요동 땅은 내주고 압록수 이남에서라도 살아남으려고 할 걸로 보고 있었다. 요동 땅이 사라지면 서부는 근거지가 없어지게 된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막아내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런 때 북방에서 새로운 세력으로 부상한 양신은 창업의 뜻을 둔 걸로 알려졌다. 연개소문은 그에 자극을 받게 되었다. 나라고 못할 게 뭐냐는 생각인데 그 같은 점은 여타 부 상가들 모두가 그랬다.
국왕도 그 점을 잘 알고 있었다. 때문에 와해된 연맹체의 복원은 불가능해도 서부 하나만이라도 다독여서 협조 체제를 유지할 생각이었다.
"짐은 그동안에 과오가 컸음을 인정하고 있다. 동돌궐을 거울삼아 앞으론 어떻게 대처해 나가면 좋을지 서부상가와 의견을 나누고 싶다."
"폐하, 동돌궐의 멸망 원인은 무엇보다 과다한 세금 징수도 큰 원인이었다고 합니다. 몇 년 새 겨울마다 폭설로 가축들이 많이 얼어 죽어서 백성들은 추위와 굶주림에 시달렸건만 사치가 심한 힐리 칸은 날로 세금만 올려 막심한 고통을 당한 백성들의 반감을 크게 키웠다고 합니다."
"고구려도 교역이 줄어들어 재정이 어렵게 되어 그런 면이 있다."
국왕의 대답에 연개소문도 실망과 수긍이 동시에 되었다. 이젠 타국과의 교역이 거의 끊기다시피 해서 재정을 크게 충당했던 수익원마저 줄어들어 더욱 세금에 의존도가 높아질 수밖에 없었다.
"짐은 교역은 물론 연합할 국가들 없어져서 막막할 뿐이다. 그래도 당과 맞설 의지가 확고한 서부상가가 있음은 짐에게 큰 희망이 된다."
"폐하, 황공하오나 그렇게 여기신다면 신도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말해 보게."
"한족은 주변의 종족들에게 쓰는 변함없는 정책이 하나 있습니다. 그건 분열을 조장해 쪼갤 대로 쪼개지게 만들고 서로 간에 각축을 벌이게 만듭니다. 작은 것은 큰 것을 이기기가 힘들므로 주변국들을 되도록 작게 들수록 자국의 안전을 도모하는데 유리하다는 속셈입니다."
"당은 그동안에 북방의 모든 종족들을 갈기갈기 찢어놓기에 힘을 기울인 것은 사실이다. 그에 의해 양신이 북3국을 고구려로부터 분리시키게 만들 수가 있었다. 뿐만 아니라 당은 양신이 창업을 할 수 있게 뒤에서 조장을 하고 후원하는 걸로 보고 있다."
"폐하, 그러므로 우린 내부 단합을 회복시키지 않으면 안 됩니다."
"물론이다. 그런데 대수 전 땐 양광은 여타 부 상가들을 제후로 삼겠다고 회유했듯 지금은 당이 여타 부 상가들에게 각자 국가를 세우게 해 주겠다고 회유를 하는 걸로 아는데 서부상가도 그걸 알고 있지 않는가?"
연개소문은 국왕이 자신의 속내를 들여다보면서 하는 말로 들렸다.
"짐은 서부상가와 동맹을 맺고 싶다."
국왕의 입에서 나온 너무도 뜻밖인 말에 연개소문은 놀라는 눈길이 되었다. 동맹이란 피차간에 동등성을 띤 뜻도 있는데 그게 진심일까 싶고 아무튼 간에 국왕의 절박성을 느껴 반문했다.
"폐하,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실 수가 있으십니까?"
연개소문의 반문에 국왕은 한 걸음을 더 나갈 말을 했다.
"양신도 나라를 세우겠다는데 서부상가라고 못할 일이겠는가?"
연개소문은 이번엔 숨이 막혀들 지경이었다.
"신은 당으로부터 요동 땅을 지켜낼 생각뿐입니다."
국왕은 그 말도 요동 땅에 나라를 세우겠다는 뜻으로 받아들였다. 연개소문도 국왕이 자신의 속내를 간파했을 걸로 생각되어 한 대답이나 전 같으면 있을 수가 없는 대화였다.
그런 말을 누고 난 두 사람은 침묵 속으로 빠져들었다. 국왕은 당의 침공을 받기 전에 고구려는 스스로 무너질 지경이라 걱정이 되었다. 그러나 이젠 서로 간에 깊은 속내까지 들여다본 만큼 절박한 상황을 뚫고 나가가기에 힘을 합칠 생각을 하게 되었다.
"폐하, 신은 솔직한 심경을 말씀드려 보고 싶습니다."
"짐도 서부 상가의 솔직한 심경을 한번 들어보고 싶었다."
"고구려는 5부의 연맹체 국가가 아닙니까?"
"짐이 그 말에 동의를 하라는 뜻인가?"
"폐하, 그러하옵니다."
국왕이 고개만 끄덕이자 연개소문은 자신의 계획을 밝히기로 했다.
"폐하, 신은 요동 땅을 지키기 위해서 건의를 드릴 게 있습니다."
"어떤 건의인가?"
"요하 변에 장성을 쌓기를 주청 합니다."
"요하 변에 장성을 쌓는다?"
"대규모 기병을 앞세울 당의 침공을 막을 최선의 방책입니다."
"장성을 쌓자면 많은 인력과 상당한 경비를 들여야 하지 않는가?"
"석성이 아닌 토성을 쌓으면 적은 경비로 해결이 가능합니다."
"짐도 타당성이 있다는 생각이 든다. 서부상가는 장성을 쌓을 구체적인 계획을 세워보라. 짐은 그걸 보고 깊은 논의를 해 보고 싶다."
국왕은 허락을 한 뒤 연개소문에게 그만 물러갈 것을 명했다.
며칠 뒤 당에서 장손사(長孫師)를 사신으로 보냈다. 그는 건무왕 앞에서 전에 없이 고자세 태도를 보였다. 뿐더러 고수 전쟁 때 전사한 자기네 쪽 장졸들의 해골을 전부 거둬 위령제(慰靈祭)를 지낼 것과 고구려가 전쟁에서 승리한 기념으로 세운 경관(京觀)을 헐라는 요구를 했다.
건무왕은 터무니없는 요구임에도 침략의 꼬투리를 삼게 될까 걱정이 되어 수긍하는 태도를 보일 수밖에 없었다. 가까운 시일 내 백성들을 동원해서 헐어버리겠다는 약속을 하고 말았다.
장손사는 의기양양해서 귀국을 했다. 그러나 경관을 헐게 된 고구려 백성들은 불만이 여간 크지 않았다. 그런 분위기 속에 연개소문은 축성 설계도를 국왕에게 바쳤다. 동북방의 부여성(夫餘城)에서 발해만(渤海彎)까지 이르는 1천여 리에 걸친 성벽이었다.
"1천여 리나 된다면 상당히 긴 성벽이로군! 그런데 장성을 쌓게 되면 당을 자극하게 되어 무슨 트집을 잡으려고 들지 모르겠다."
"폐하, 당이 트집을 못 잡게 할 변명거리도 준비를 했습니다."
"서부상가는 어떤 변명거리를 준비했다는 말인가?"
"농지에 물을 대기 위해서 요하의 샛강에서 물을 끌어올 수로를 판다는 구실입니다. 그렇게 둘러대면 이해를 얻을 수가 있을 것입니다."
"수로를 파는 공사를 벌인다?"
연개소문은 그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을 덧붙였다.
수로(水路) 건설을 위한 공사는 땅을 파지 않으면 안 되었다. 땅을 파면 많은 흙이 나오게 되고 그것으로 높은 제방을 쌓아 올린다. 그렇게 되면 수로는 자연스레 해자(垓子)가 되고 제방은 토성(土城)이 되어서 적을 막는 장성 역할을 하게 된다는 말이었다.
"제방과 수로를 이중 방어 시설로 활용하게 된다는 것이로군?"
"폐하, 그렇습니다. 수로를 깊게 팔수록 해자는 깊어지고 제방도 높게 쌓아 올릴 수가 있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특히 적의 기병들이 진격을 하는데 큰 장애물 역할을 하게 될 것입니다."
"좋은 생각이로군! 서부 상가의 말대로만 된다면 적을 막을뿐더러 백성들이 농사를 짓는데 쓸 물도 충분히 확보해서 일거양득이 되겠군!"
국왕의 대꾸에 연개소문은 다시 입을 떼었다.
"폐하, 장성을 쌓자면 각부마다 구역을 나눠서 착수를 해야 합니다. 그런데 여타 부 백성들을 동원시키는 데는 많은 경비가 듭니다."
"물론 많은 경비가 들 수밖에 없겠지."
"폐하, 전에 욕살들이 여타 부에서 축적한 재물이 있는 걸로 압니다."
"욕살들이 축적한 재물이라고?"
"폐하께선 그 재물을 압수해 국고에 넣으셨습니다. 그러나 엄격히 따지면 그 재물은 여타 부의 것이라는 말씀을 드릴 수가 있겠습니다."
국왕은 그런 말을 하는 연개소문을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폐하, 그 재물을 여타 부에 돌려주실 수는 없으십니까?"
연개소문의 맹랑한 말에 국왕은 어이가 없었다. 그러나 자신도 생각을 해야 있으므로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수가 없었다. 국가가 존망 위기에 빠진 터라 연개소문을 어떻게든 동맹자로 묶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 재물로 축성 쌓는 경비로 쓰겠다?"
"폐하, 그렇게 해주셔야만 가능할 일입니다."
국왕은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
"짐은 대수 전 때 여타 부의 활약이 매우 컸음을 인정한다. 그중에서도 서부의 활약이 가장 컸으므로 장성 축조 경비로 쓰게 해 주겠다."
연개소문은 그 말에 침을 꿀꺽 삼키게 되었다.
"폐하, 황은이 망극하옵니다."
"서부상가는 공사에 여타 부 백성들을 어떻게 동원할 것인가?"
국왕의 말에 연개소문은 또 다른 말을 꺼냈다.
"폐하께서 말씀을 하시므로 신은 건의를 드릴 게 또 있습니다."
"어떤 건의인지 말해 보게."
"폐하, 신은 여타 부 백성들을 동원하는데 독단이 필요합니다."
"독단까지 쓰겠다고?"
"폐하, 신에게 대대로 직을 내려 주십시오."
"대대로직은 스스로가 차지하는 자리가 아닌가?"
"대대로가 되면 신의 위상이 높아지게 될 뿐만 아니라 신은 대대로 직으로 독단을 쓸 수 있게 되고 인력을 동원하는데 큰 힘이 되겠습니다."
국왕은 마뜩지 않은 표정을 잠시 지었다가 반문했다.
"서부상가는 대대로가 되면 요동 땅을 접수하겠다는 뜻이 아닌가?"
연개소문은 정곡을 찌르는 말을 듣고 거침없이 대꾸했다.
"신의 세력 강화는 폐하께도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국왕은 그 말을 듣고 결정을 내리고 말았다.
"서부상가는 오늘부터 국상이 아닌 막리지로 행세를 하라. 막리지로써 여타 부 백성들을 동원해서라도 장성 축성을 기필코 완수하기 바란다."
"폐하, 황공하오나 신은 또 다른 소청도 그려야 하겠습니다."
"어떤 소청인가?"
"요동 지역은 대 수전 이후로 백성들이 많이 흩어져 줄어들었습니다. 때문에 축성 공사에 동원할 인력이 매우 부족합니다. 그런 애로 속에 단시간에 완성을 시키자면 신이 직접 현장에서 진두지휘를 하겠습니다."
여타 부 상가들은 장안성의 거주가 원칙이고 우태들만 주성에 나가서 관할을 해온 게 관례인데 그걸 깨겠다는 것이었다. 국왕은 깨진 들 더 달라질 게 없다는 생각에 선선히 대꾸했다.
"그렇게 하라."
연개소문은 반기면서도 긴장감을 느끼며 물었다.
"폐하, 신이 요동성으로 나가도 되겠습니까?"
"다만, 나가는 데는 조건이 있다."
"폐하, 어떤 조건입니까?"
"짐은 서부 상가와 혼사를 맺기를 원한다."
"폐하, 신과 무슨 혼사를 맺는다는 말씀입니까?"
"서부 상가와 짐의 누이동생이 부부의 연을 맺기를 바란다."
연개소문은 아연실색을 했다.
"폐하, 신에겐 이미 처자가 있는 몸이 아닙니까?"
"서부대인도 짐의 요구를 들어줘서 간화와 새로운 부부의 연을 맺는 게 조건으로 요동성으로 나간다. 그리고 함께 지내야만 한다."
간화(干和) 부인은 국왕의 이복 여동생으로 대수 전 때 남편과 사별하여 과부가 되었다. 거기다 연개소문보다 10여 세나 연상이었다.
"짐은 서부 상가의 요구를 다 들어줬으니 현명한 대답을 듣고 싶다."
국왕은 말하고 지긋이 연개소문을 바라다보았다.
연개소문은 생각에 잠겼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요동 땅을 지켜내지 않으면 자신은 나라를 세울 꿈을 이룰 수가 없다. 장성 축조를 포기하는 건 야망도 없어지는 것이었다. 자신이 대막리지가 되려는 것은 그 일의 첫걸음이었다. 요동 땅의 실질적인 주인이 되고 운신의 폭을 넓히지 않으면 야망의 꿈을 실현시킬 수가 없었다. 그렇다면 새로운 결혼은 나중에 얼마쯤이라도 파기할 수가 있다는 생각을 했다.
"신이 생각을 해볼 시간을 갖게 해 주십시오."
연개소문은 그런 대답만 남기고 궁궐에서 물러나왔다.
계절은 여름으로 치닫고 있었다. 같은 궁궐 속인 데도 수밀전(須密殿)은 적조하기만 했다. 여선은 그곳에서 궁녀들 두 명의 수발을 받으며 유폐 생활이나 다름이 없게 살고 있었다.
여선은 양신과 옹장의 대결 중 주랑이 목숨을 잃은 것을 알게 되자 억울하고 비통함에 곡기를 끊다시피 했다. 그러나 두 아들이 애타게 매달리며 권해서 닷새만에 야 밥을 먹기 시작했다.
오늘은 수밀전 댓돌 위에 놓인 화분들에 물을 주고 있었다. 여선은 화분들을 돌보는 게 유일한 낙인데 천동과 환권이 나타났다. 천동은 20세, 환권은 19세의 어엿한 청년들이 되었다.
"천동입니다."
"환권입니다."
여선은 다가드는 형제를 차례대로 안아주었다. 두 아들은 생모에게 아침저녁으로 문안 인사를 드리는 효자들이었다. 형제간의 우애도 깊어서 서로가 끔찍이 여기며 붙어 지내다시피 했다.
잠시 후 동화부인도 나타났다. 그녀는 모자간에 정겹게 얘기를 나누고 있는 모습을 바라보며 부러움과 쓸쓸함을 동시에 느꼈다. 왕자를 낳지 못한 여인의 비애가 담긴 눈길이었다.
"두 분께선 얘기들을 나누시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십시오."
천동은 그런 말을 남기고 환권과 더불어 그곳을 떠났다.
여선은 돌아가는 두 아들 중 천동에게 길게 눈길을 주었다. 어딘지 어깨가 쳐진 것 같아 쓸쓸해 보였다. 동화부인이 먼저 방 안으로 들어가자 여선도 그 뒤를 따라 들어갔다.
동화부인은 양신과 여선이 중원 땅으로 도망치는 걸 도왔다. 국왕은 그걸 기화로 서부를 뺀 여타 3부의 상가들 집안에서 새로 빈(嬪)들을 한 명씩 맞아들였다. 그중에서 동부와 남부 출신 두 빈들은 왕자를 하나씩 낳았다. 그들은 각자 제 자식을 태자로 책봉시키려고 들었다. 때문에 환권의 자리는 위태로워지게 될 수밖에 없었다.
두 빈들은 자신들이 낳은 왕자를 세우고자 일단은 서로가 협력을 하며 동화부인한테 맞서려고 들었다. 그런데 국왕도 두 빈들에게 점점 휘둘리게 되며 환권의 태자 책봉을 미루는 것 같았다.
동화부인은 먼저 혼기를 맞은 환권의 혼인을 추진하려고 했다. 그러나 당사자는 형이 먼저라며 사양을 했다. 더욱이 천동은 궁궐에서 혼인을 할 수가 없는 입장인데 두 빈들은 여선과 함께 궁궐에서 내쫓을 음모를 꾸미고 있었다.
동화부인은 국왕의 지시를 받은 게 있어 여선에게 말을 꺼냈다.
"요즘에 두 빈들은 모이면 무슨 얘길 나누고 있는지 알고 있는가?"
"소첩은 그들이 무슨 얘기를 나누건 간에 관심이 없습니다."
"여선, 둘은 천동은 물론 환권도 왕실 핏줄이 아니라고 떠드네."
여선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처지라 아무런 대답도 못했다.
"이젠 환권마저 폐하의 핏줄이 아니라고 떠드니 난감할 뿐일세."
"소첩은 그들이 뭐라고 떠들건 간에 관심이 없사옵니다."
"무슨 말인가? 환권이 태자에 못 오르게 하려는 수작들일세."
"마마, 그 일은 폐하께서 처리하실 일로 생각됩니다."
"나는 폐하께서 그들의 음모에 말려들지도 몰라 애가 닳는 지경일세. 자네도 가만히 있어선 안 될 일임을 몰라서 그러는가?"
"마마, 그렇지만 소첩이 무슨 일을 할 수가 있겠습니까?"
"나는 환권의 혼사를 추진하고 있는데 그 일마저 방해를 받고 있네."
"그들이 그마저도 방해를 한다면 무엇 때문일까요?"
"천동은 물론 환권도 폐하의 핏줄이 아니라며 곧 궁에서 함께 쫓겨날 판일세. 그들은 폐하께 축출해 버려야 한다는 말을 했다고 하네."
"소첩은 차라리 천동과 함께 궁궐에서 쫓겨나면 좋겠습니다."
"여선, 그런 소리가 어디에서 나오는가? 그것들이 한통속으로 돌아가면서 내 속은 말이 아니게 썩는 판에 자네마저 그럴 수가 있는가?"
동화부인이 꾸짖는 말에 여선은 고갤 떨구고 대꾸했다.
"마마, 죄송하옵니다."
여선의 대답에 동화부인은 이번엔 다른 말을 꺼냈다.
"천동이 근래 왕실 검사단에서 검술 수련을 받는 걸 알고 있는가?"
"마마, 저는 그 일로 너무 불안해서 애를 태우게 됩니다."
"나도 천동이 자주 자상을 입는다는 말을 들었네."
"마마, 도해선이 천동에게 검술을 지도하는 이유가 뭘까요?"
"도해선은 자로라는 조의에게 시켜서 하는 일로 알고 있네."
여선은 자로(磁路)가 도해선의 심복이라 더 걱정이 되었다.
"마마, 아무래도 도해선은 무슨 의도가 있어 그러는 것 같습니다."
"폐하께서도 도해선에게 그 점을 두고 물어봤다네. 그랬더니 천동은 자질이 있을뿐더러 스스로도 검술을 익혀 둘 필요성이 있다며 원하는 일이라 시키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자로는 천동에겐 특별히 집중적이고 강도 높은 수련을 시키고 있다네. 수련생들은 누구나가 가끔씩 부상을 입는 일이 생기지만 천동은 좀 심할 때가 있다고 변명을 했다네."
"저는 천동을 검사단에서 빼내고 싶은데 무슨 방법이 없겠습니까?"
"나도 걱정이 되어 그 말씀을 폐하께 드렸네."
"폐하께선 무슨 말씀을 하셨습니까?"
"사나이로 문무를 겸전 하는 건 좋은 일이라고 하셨네."
"천동에게 무슨 변고가 생길까 더는 마음을 졸일 수가 없습니다."
"폐하께선 부상을 당하면 도해선에게 책임을 묻는다고 하셨네."
"저는 마마께서 적극 못하게 간여를 해주셨으면 합니다."
"그래서 나도 궁여지책을 세우기로 했네."
"어떤 궁여지책을 세우기로 하셨습니까?"
"나는 천동을 궁에서 내 보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일세."
"마마, 그러시면 저도 함께 나가게 해 주십시오."
"그런데 폐하께선 천동이 나가는 걸 원치를 않는 눈치 실세."
"왜 그러실까요?"
"폐하의 정확한 속내는 알 수가 없으나 무슨 생각이 있으신 것 같네."
동화부인은 그런 말을 하고 여선의 기색을 살폈다.
"어제 폐하께서 날 부르신 뒤 천동에 관한 얘기를 꺼내셨네."
"어떤 말씀을 하셨습니까?"
"내가 여기에 온 것은 그에 대한 의논을 하려고 왔네."
"마마, 무슨 의논인지 말씀해해 주십시오."
"요즘에 폐하께선 은밀히 추진하시는 일이 있네."
"폐하께선 어떤 일을 추진하고 계시는지요?"
"지난해부터 중원 땅의 계영부인과 서신을 주고받고 계신다네."
"무슨 일로 계영부인과 서신을 주고받으신단 말씀입니까?"
"계영부인은 내란 때 이세민과 함께 전쟁터를 누빈 사이일세. 그러나 이세민이 황제가 된 뒤 입궁을 못하는 처지일세. 다만 이세민은 첩실에 지나지 않을 그녀에게 큰 권세를 누리면서 살게 해 주었다네."
"마마, 계영부인의 소식을 들으니 전 여간 기쁘지 않습니다."
"폐하께선 그런 계영부인에게 부탁을 하신 게 있으시다네."
"무슨 부탁을 하셨는가요?"
"천동의 배필을 중원 땅에서 구해달라는 부탁을 하셨네. 그런데 계영부인이 매우 반기며 마땅한 혼처를 알아보겠다는 답을 해왔다고 하네."
"마마, 저는 그렇게만 된다면 얼마나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천동은 그렇게 해서 해결을 본다지만 환권이 문제로다."
여선은 이해가 되어서 고개만 무겁게 끄덕였다.
"환권은 내가 낳은 자식처럼 여기며 내 앞날을 의지하려는 건 자네도 잘 아는 일일세.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환권을 태자로 책봉을 시켜야만 하네. 그런데 두 빈들이 막으려고 드는 건 고사하고 환권이 천동을 따라 궁궐에서 나가겠다는 태도를 보이고 있네. 여선도 어미로써 그에 대한 책임감을 갖고 적극 나를 도와줘야 하겠네."
"마마, 저는 늘 드리는 말씀이 있지 않습니까? 제겐 천동만 자식일 뿐 환권은 마마의 자식입니다. 그 말씀밖에 더 드릴 게 없습니다."
"두 빈들은 무슨 음모를 꾸미고 있어 환권은 여간 위급한 지경이 아닐세. 나로선 그에 대한 대비책을 세우고자 추진하는 일이 있네."
"마마, 무슨 일을 추진하고 계십니까?"
"환권이 태자 책봉을 받는 데는 배경이 없는 큰 약점이 있네. 때문에 나는 환권에게 배경을 만들어 줄 필요성에 큰 책임을 느끼네."
"마마, 배경을 만들어 주실 무슨 방도가 있겠습니까?"
"내 언니의 시동생인 연생수 우태에겐 출가하지 않은 막내딸이 있네. 그간에 설득을 해서 환권의 배필로 삼게 해 줄 것을 청해 두었네."
동화부인의 말에 여선은 반가운 기색을 보였다.
"마마, 그렇게 해주신다면 저로선 더 바랄 게 없겠습니다."
"나는 그쪽의 응답을 받았기 때문에 여선에겐 할 일이 생겼네."
"제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말씀을 해 주세요."
"환권이 문제일세. 형이 먼저 장가를 들고 나서 자긴 간다고 버티네. 곧 혼사를 추진해야만 하는데 환권이 저러니 자네가 설득을 해주게."
"마마, 제가 설득을 한다고 해서 들을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폐하께서 그 문제를 해결할 방책을 제시해 주셨네."
"어떤 방책입니까?"
"자네가 천동과 함께 중원으로 떠나 먼저 혼인을 시켜 주게."
"마마, 그 말씀대로 하려면 어떻게 해면되겠습니까?"
"계영 부인도 천동의 혼처를 찾았고 혼사 준비도 다 끝났다고 하네."
"마마, 저는 언제쯤 중원으로 떠날 수가 있겠습니까?"
"곧 떠날 수 있게 지금부터 준비를 하게."
동화부인의 대꾸에 여선은 양신을 떠올리게 되었다. 그러나 이내 고개를 젓게 되고 마는데 그걸 보고 이상하게 여긴 동화부인이 물었다.
"왜 그러나? 천동이 중원 땅에서 장가를 들이면 좋지 않은가?"
"아닙니다. 천동이 장가를 들고 나선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자네는 천동과 함께 중원 땅에서 계속 살게 되네. 글공부를 좋아하는 천동에겐 잘 된 일이 아닌가? 계영부인은 천동을 당의 숙위생으로 넣고 공부를 하게 되면 친 자식처럼 뒷배도 봐주겠다고 약속도 했다네."
"마마, 저는 당의 숙위생에 대해서 알고 싶습니다."
동화부인은 여선의 질문에 설명을 했다.
이세민은 교육을 중시해서 국자감(國子監)을 설치하고 명유(名儒)들로 하여금 학문을 가르쳤다. 근래엔 국자감을 크게 증축해 3천여 명을 수용할 만큼 크게 늘린 뒤 복속 국들에 숙위생(宿衛生)을 보낼 것을 요구했다. 그에 따라 백제와 신라는 호응을 해서 유학생을 보냈다. 국왕도 이세민과 관계를 개선시키는데 도움이 되고자 숙위생을 보내기로 했다.
"숙위생은 공부를 하면서 황제를 호위하는 임무도 맡는다네. 때문에 큰 영광으로 여길뿐만 아니라 우수한 자는 관리로 등용이 된다네. 그러므로 복속국의 왕실들은 다투어 자제들을 보낸다고 하네."
"마마, 숙위생은 혹시 인질이 되는 것은 아닐 런지요?"
"인질이 되면 어떤가? 자넨 중원 땅에서 그냥 눌러살게 되면 계영부인의 보호를 받을 수가 있을 것인데 무슨 걱정인가?"
"마마, 그런데 천동은 어떻게 하려 들지 모르겠습니다."
"천동은 무예를 익히기를 싫어하고 학문을 좋아하지 않는가? 폐하께선 당에 숙위생으로 가는 걸 놓고 한번 의향을 물어보셨다고 하네."
"천동은 어떤 대답을 했는지요?"
"그동안 폐하의 은혜를 크게 입었으므로 나라를 위해 봉공할 기회를 만들어 주신다면 매우 감사하게 여기며 기꺼이 가겠다고 대답을 했네."
"그랬군요?"
여선은 비로소 마음이 크게 놓이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환권은 저네와 천동의 곁에서 떨어지려고 하질 않을 것 같네. 그런 환권을 설득을 시킬 일은 자네의 몫으로 돌릴 수밖에 없네."
"마마, 혼자서 남는 걸 꺼리게 될 테지만 설득해보겠습니다. 혼기가 찬 형이 장가를 들기 위해서 가는 일이므로 기뻐할 걸로 생각됩니다."
"나는 여선만 믿겠네. 그런데 또 다른 일로 심란해질 수밖에 없네."
"마마, 무슨 일이 있으시기에 그러십니까?"
"서부 대인이 새장가를 들게 되었기 때문일세."
"서부 상가께선 왜 새 장가를 드셔야 한단 말씀입니까?"
"내가 환권의 혼사를 추진하고 있지 않는가? 그런데 폐하께선 그에 상응할 만한 정략결혼을 추진하려고 하시네. 즉 왕실과 서부대인 간일세."
"왕실엔 어느 분을 놓고 혼사를 추진하시는지요?"
"폐하의 이복 여동생인 간화부인일세."
"그분은 서부 상가님보다 10여 세나 연상이 아니세요?"
"그러게 말일세."
"서부대인께서 응하려고 드실까요?"
"폐하의 명을 어길 수는 없게 되었네. 때문에 연개소문 댁은 내게 하소연을 하려고 궁궐에 들어오겠다고 하지만 만나 줄 수가 없네."
동화부인은 그런 말을 하고 돌아갔다. 여선은 그때부터 여러 가지 생각을 하고 마음을 정했다. 자신은 양신에게 돌아갈 수는 없으나 천동은 돌려줘야 만 한다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혼자서만 남게 될 환권의 앞날이 어떻게 될지 몰라서 마음은 심란하기만 했다.
그날 밤에 국왕은 실로 오래간만에 여선의 거처를 찾았다.
"여선, 대부인으로부터 무슨 말을 들은 게 있는가?"
"폐하, 여러 가지 말씀을 들었습니다. 크신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국왕은 그 대답에 회심의 미소만 지었다. 모든 일은 자신이 세운 계획에 따른 것인데 그게 뜻대로 잘 풀릴 지에 대해선 의문이었다.
"삼 년 전인가? 남포에서 어떤 자가 우리 전함을 한 척 탈취해 갔네."
"신첩도 그런 얘기를 들은 적이 있사옵니다."
"짐은 그 자를 양신으로 보고 있다."
"폐하, 신첩에겐 이미 잊혀진 사람일 뿐입니다."
"여선은 양신에 대해선 생각하는 게 많겠지만 짐도 한편으로 생각을 해볼 때 양신에게 고마움 같은 걸 느끼는 점이 없지도 않다."
"폐하, 무슨 고마움을 느끼시는 게 있단 말씀이시 옵니까?"
"중원 땅에서 짐을 위해서 환권을 잘 기르고 보호를 해 준 일일세."
여선은 잠자코 만 있는데 국왕이 또 입을 열었다.
"여선도 중원 땅에서 살고 있는 양신이 새 장가를 든 걸 아는가?"
"예?!"
"양신이 새로 얻은 처도 여선이 아는 사람이라고 들었네."
"폐하, 제가 아는 사람이라니요?"
"여선이 중원 땅에서 지낼 때 머문 곳은 만춘장이라고 했던가? 바로 그 집 주인의 외동딸인 걸로 알려져 있네."
"만춘장이라고 하셨습니까?"
"이름이 사오라고 하던가? 그 여인에게선 아들까지 낳았다네."
여선의 눈빛에 작은 떨림이 일어나고 있는데 국왕은 몸을 일으켰다.
"여선, 잘 가게."
국왕이 방을 나선 뒤 혼자 남은 연선은 멍청한 시선을 천장에다 던졌다. 마음을 접고 있다고 하나 양신이 사오와 새 부부의 연을 맺었다는 것은 묘한 심경이 되었다. 양신이 언제까지나 혼자 살기를 바랄 순 없지만 이젠 마음의 고향마저 잃게 된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여선은 어지럼증과 오한 같은 걸 느끼며 자리에 눕고 말았다.
이때 도해선은 연개소문이 간화부인을 제2부인으로 맞는다는 소문을 듣고 왕궁으로 쫓아 들어갔다. 간화부인을 연개소문에게 빼앗기게 된 분노와 함께 견딜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국왕도 도해선의 기색이 매우 좋지가 않아 보이는 걸 보며 그 이유를 짐작하게 되었다. 그는 오래전부터 간화부인을 무척 사모하고 있다는 소문을 들은 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폐하, 그러실 수가 있으십니까?"
도해선은 저기도 모르게 항의 투의 말이 나왔다. 자신은 고돌기의 모반을 진압하는데 큰 공을 세워서 위두대형(位頭大兄)으로 승급을 했다. 그러나 그보다 더 바랐던 것은 간화부인이었다.
"위두대형은 무슨 일로 들어왔는가?"
"폐하, 간화부인을 어찌 연개소문에게 보내시려고 하십니까?"
국왕은 도해선의 심경을 이해하므로 달래는 수밖에 없었다.
"짐은 독수공방으로 지내는 간화의 외로움을 덜어주려고 그러는 것일세. 그런데 그대는 그 일에 대해 무슨 불만이라도 있는가?"
"폐하, 연개소문에게 너무도 과분한 은혜를 베푸신 것입니다."
"그대는 지금 짐이 처한 상황이 얼마나 어려운지 헤아릴 줄을 몰라서 그러는가? 짐은 서부 상가의 협력이 절실해진 터라 고육지책이라도 세우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 점을 생각해서라도 마음을 돌리기 바란다."
국왕은 지금까지 도해선이 연개소문에게 함부로 막말을 하고 적대감을 드러내는 태도를 용인을 해 왔었다. 그러나 앞으론 그것을 용납해선 안 되겠다는 생각에 경고를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반면에 도해선은 국왕에 대한 증오심마저 느꼈다. 국왕이 연개소문에게 막리지 직을 내렸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연개소문은 여타 부를 통괄할 수 있게 되는데 그건 위험천만한 일일 아니었다.
"폐하, 신도 앞으로 여타 부 통제가 매우 어려움을 잘 알고 있습니다. 때문에 연개소문을 이용하시려는 건 이해가 됩니다. 그러나 그 자를 얕잡아 보셨다간 크게 후회하시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자네 말버릇이 점점 건방져 가는구나,"
"폐하께선 연개소문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르시옵니다."
"짐도 연개소문이 큰 야망을 품고 있음을 잘 알고 있다."
"폐하, 그러시면 어찌 그 자를 앞세워 사직을 지키려는 생각을 하실 수가 있겠습니까? 그 자는 폐하를 등에 업고 여타 부의 구심점으로 부상할 야욕을 품고 있습니다. 그로 인해 큰 역효과를 부르게 되실 수도 있고 심지어 폐하께선 연개소문과 대결구도가 만들어지게 될 수도 있습니다."
"짐도 그대의 충고를 고맙게 여기며 연개소문을 경계하고 있다. 다만 지금은 위기상황은 연개소문의 힘이라도 빌리지 않을 수가 없구나."
"폐하, 신도 그걸 몰라서 그런 말씀을 드리는 아닙니다."
"그걸 안다면서 짐을 더 이상 힘들게 하지 말라. 지금은 수양제의 침공 때보다 더 큰 위기에 처한 것은 상대가 바로 이세민이라 그렇다."
"폐하, 그래도 수양제 때보단 덜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댄 결코 덜 하지가 않음을 왜 모르는가? 사직을 보존하기 위해선 무슨 일이든 하지 않을 수 없는 형편임을 잘 알고 있지 않는가?"
"여타 부는 폐하께서 너무 이랬다저랬다 하신다고 믿질 않습니다."
도해선의 심한 말에 국왕은 기가 막혀서 말이 나오질 않았다.
"더욱이 연개소문이 요동성으로 나가는 건 천부당만부당한 일입니다."
"장성 축조를 관리 감독하자면 그럴 수밖에 없지 않은가? 그렇기 때문에 짐도 간화부인을 딸려서 내보기로 한 것임을 알아야 한다."
"그러시면 연개소문의 가족들은 어떻게 하시렵니까?"
"연개소문의 처와 세 자식은 장안성에 그대로 남게 할 것이다. 자제들을 왕궁에 들여놓고 공부를 시키면서 감시를 하면 될 일이다."
국왕의 대꾸에 도해선은 할 수 없이 다른 쪽으로 말을 돌렸다.
"폐하, 또 여쭙고 싶은 게 있습니다."
"무엇인가?"
"전에 여타 부의 주성마다 욕살들이 축적해 두었던 재물이 있었습니다. 그걸 국고로 환수를 시켰는데 그에 대한 이상한 소문이 돕니다."
"이상한 소문이라니?"
"폐하께서 그 재물을 장성 축조 경비로 충당하고 나머지는 여타 부의 재정에 보탤 수가 있게 돌려주기로 하셨다는 소문이 났습니다."
"그렇다. 짐은 앞으로 누구든 간에 불법적인 수법으로 재물을 축적하면 전부 압수해 국고에 넣고 나라를 위해서 쓰게 할 생각이다."
도해선은 속으로 뜨끔했다. 자신도 그동안에 여러 가지 수법을 써서 상당한 재물을 축적해 두었다. 그러나 연개소문에 관한 일부터 막는 게 더 급선무라서 다시 입을 열었다.
"폐하, 서부 상가가 요동성으로 나가는 것만은 재고해 주십시오."
"짐은 이미 허락을 한 일이다."
"폐하, 너무도 큰 위험을 자초하신 일임을 생각해 주소서."
"짐이 초강수를 둔 것에 대해 자네가 걱정하는 충정은 모르지 않는다. 그러나 날로 심해지는 당의 위협과 요구를 따르기엔 한계가 있다. 짐이 서부 상가와 협력이 절실함은 위두대형도 잘 알 것이니 짐을 도와라."
"폐하께선 당의 요구는 무엇이나 다 들어주셨는데 신이 뭘 돕습니까?"
"위두대형은 당에 사신으로 갈 일이 생겼다."
"신이 무슨 일로 당에 가게 된다는 말씀입니까?"
"당에 봉역도를 바치는 임무를 수행해라."
이세민은 수년 전부터 침략의 야욕을 품고 고구려의 강역도(疆域圖)를 바칠 것을 요구했다. 국왕은 그게 트집임을 잘 알아서 더 이상은 미룰 수가 없어 명칭을 봉역도(封域圖)로 높여 보내기로 했다.
"폐하, 그 일에 신을 사신으로 꼭 보내셔야만 하시겠습니까?"
도해선이 은근히 불만을 토로하자 국왕은 입을 열었다.
"그대가 꼭 가야만 해서 그런다."
"폐하, 신이 꼭 가야만 하는 이유는 무엇이옵니까?"
"가는 길에 여선 모자도 데려가 계영부인에게 인도할 임무이다."
도해선은 그 말을 듣고 국왕이 또 무슨 음모를 꾸민다는 생각을 하면서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 명령을 거역할 수는 없었다. 열흘 뒤 여선과 천동을 데리고 당으로 떠나야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