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 여걸(女傑) (631)
지난해 서라벌에선 큰 지진이 일어나서 궁궐 마당이 갈라졌다. 연초엔 흰 개가 궁궐의 담장 위에서 짖었다. 진평왕의 환후가 깊어져 백성들은 흉조로 여겨 걱정들이 컸다.
내물계는 왕자가 없는 국왕의 후계자를 정할 화백회의를 열 것을 강력하게 주장하고 나섰다. 또 도성 안에선 공주가 보위를 잇는 것을 반대하는 여론이 있는 가운데 이찬(伊湌) 칠숙(柒宿)이 반란을 일으킨다는 소문마저 나돌고 있었다.
덕만 공주는 내물계가 반란을 일으킬 경우 대처하기가 쉽지 않았다. 왕궁의 수비군은 5백여 명에 지나지 않는데 서라벌 근교의 내물계 촌장(村長)들이 동원할 수 있는 병력은 10배나 되었다.
왕실의 병력은 주로 변방과 국경 방위를 맡고 있기 때문에 전방에서 병력을 빼돌리긴 쉽지가 않았다. 설사 출동을 시켜도 서라벌에 당도하기 전에 내물계에 의해 왕궁이 장악될 것이었다.
그런 약점에 대비를 하고자 풍월주인 김춘추로 하여금 낭도들을 장악하게 하고 화랑도에 대한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1천여 명에 불과한 낭도들 중 절반은 내물계라 믿을 수가 없었다.
김춘추는 수심에 싸인 덕만에게 바깥 사정을 자주 보고를 했다.
"이모님, 서라벌 주변의 촌장들은 거의가 칠숙을 지지하고 있습니다."
덕만은 그런 칠숙을 탄압할 수도 무슨 죄목을 씌워 처형을 할 수도 없었다. 그로 인해 내물계가 들고일어날 구실만 주게 될 뿐이란 판단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처지였다.
"칠숙은 이모님을 음해하는 말까지 퍼뜨리고 있답니다."
"날 음해하는 말은 주로 어떤 것인가?"
"서부 철산지 3곳을 백제에 빼앗긴 지 7년이 넘었건만 이모님은 그걸 회복하려고 들 생각을 하시지 않는다고 불만을 터뜨린답니다. 심지어 이모님은 백제와 내통을 하고 있다는 억지 주장까지 펴고 있습니다."
"전적으로 그른 말은 아니로군!"
왕실은 어떻게든 내물계를 약화시켜야 했다. 덕만이 서부 철산지 회복에 나서지 않는 이유도 거기에 있었다. 서부 철산지를 회복시키면 내물계의 군자금 원천을 되돌려 주는 꼴이 되고 만다.
내물계도 그 점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철산지 회복엔 적극성을 띠려고 하질 않았다. 전쟁을 주장하고 수행하는데 앞장을 서자면 병력과 경비를 감당해야 할 부담감이 너무 컸기 때문이다.
또 거기엔 다른 문제도 있었다. 서부 철산지의 백성들은 가락국의 후예들이라 호응을 얻기가 어려워 목적을 달성할 보장도 없었다. 때문에 말로만 떠들어 왕실에 대한 비난만 하고 있었다.
왕실은 그런 상황 속에 고구려 쪽도 신경을 서야만 했다. 신라는 당의 사주를 받고 일시 낭비성을 점령했다가 도로 내준 일이 있다. 그로 인해 고구려의 반감을 크게 샀지만 요즘은 그쪽도 사정이 매우 어려워져 보복에 나서긴 힘들 것으로 보고 자극을 삼가는 편이었다.
반면 서부 철산지의 절반을 획득한 백제는 철제품 수급에서 겪는 애로가 많이 풀려서 경계심을 덜게 되었다. 덕만은 그런 국내외 사정을 감안해서 당분간은 백제와 우호 관계를 유지하기로 했다.
칠숙은 그런 왕실을 두고 가잠성을 지키고자 백제에 서부 철산지를 내주었다는 소문까지 퍼뜨렸다. 그렇게 해서 백성들의 반감을 키우고 불만을 고조시켜 내물계의 반란을 여건을 조성하려는 목적이었다.
덕만은 그와 같은 여러 사항들을 고려해 어떤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그것은 앙앙불락인 내물계의 도발을 유도해서 제압을 하면 위기 상황을 극복할 수가 있겠다는 판단이었다.
"칠숙은 백성들이 날 배척하게 만들기 위해 선동을 하고 있다. 그게 먹혀들건 안 컨 간에 날 고립시킬 수단으로 삼을 뿐이다."
"이모님은 그에 대한 대비책을 세우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김춘추의 말에 덕만은 한숨만 흘려냈다.
내물계는 국왕이 승하하지도 않았는데 화백회의 소집을 요구하는 공세는 펴고 있었다. 거기에다 민심마저 내물계 쪽으로 돌아서는 날엔 덕만은 더욱 감당을 하긴 힘들어지게 되었다.
"이판사판으로 몰린 마당이라 무슨 결단을 내리지 않으면 안 되겠다."
"무슨 결단을 내리려고 하십니까?"
"화백회의가 열리게 되면 의장인 알천공이 결정권을 갖게 된다. 거기다 폐하의 유고시엔 그의 영향력은 몇 배나 더 커지게 될 것이다."
"저도 그 점을 가장 큰 문제로 여기고 있습니다."
"때문에 나는 폐하의 유고시에 앞서 결단을 내리고 말겠다!"
"어떤 결단을 내리려고 하십니까?"
"나는 내물계에 대한 선제공격을 가하고 말겠다."
"선제공격을 하신다고 하셨습니까?"
"방어가 아닌 공격에서 돌파구를 찾고자 위함이다."
"방어가 아닌 공격을 어떻게 하시렵니까?"
"폐하께서 계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그나마 계실 때 힘을 쓸 여력이 있으므로 먼저 내물계를 숙청하는 작전을 쓰려고 한다."
"내물계를 무슨 수로 숙청을 하실 수가 있겠습니까?"
"춘추야, 부정적인 생각은 그만하자. 앞으론 긍정적으로 나가자. 시간은 우리 편이 아니므로 앉아서 당할 수만은 없지 않으냐?"
"그러나 무슨 방법이 있어야 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내물계의 반란을 유도하는 데서 돌파구를 찾기로 하자."
"이모님, 반란을 유도한다는 건 너무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물론 위험하지만 사람이 위험에 빠져들 땐 역으로 활로를 찾을 수도 있다고 한다. 절망에 빠진 나로선 희망적인 면에서 길을 찾아보고자 한다. 절망을 희망으로 바꾸는 시도라도 한번 해보고자 한다."
"이모님 말씀에 저도 동감입니다."
"그렇다면 함께 힘을 합쳐 반란을 유도하고 제압을 해보자."
김춘추는 물었다.
"반란을 어떻게 유도하시렵니까?"
덕만의 음성은 더욱 결의에 찼다.
"위계를 쓰자!"
"어떤 위계를 쓰려고 하십니까?"
덕만은 김춘추의 질문을 받고 자신의 계획을 들려주었다. 김춘추는 다 듣고 나서 굳어진 표정이 좀 풀리고 연방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서로의 의견을 더 보태며 의논을 했다.
"춘추야, 그럼 곧 서둘러야 하지 않겠느냐?"
"이모님, 저도 그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덕만은 김춘추의 동의를 얻자 머릿속은 7년 전으로 돌아갔다. 당시 백제와 왜국의 연합 침공을 받을 때 고구려는 관망세를 취하고 있었음에도 신라는 바람 앞의 등불과 같은 형세였다.
"칠 년 전에 이모님은 실질적으로 전쟁을 주도하셨습니다."
"그랬다. 내가 주도했고 위난도 극복을 해 냈다."
"이모님의 과감한 대응은 큰 위기를 극복해 내셨으니 이번에도 그렇게 해내실 수가 있다고 저는 믿고 따르겠습니다."
7년 전 덕만은 서부 철산지의 절반을 백제에 내주면서 왜국 군을 퇴치하는데 성공을 할 수가 있었다. 그 일로부터 국인들의 긍정적인 반응을 얻고 그 능력을 크게 인정받는 계기가 되었다.
"반면 백제군을 지휘했던 의자는 태자로 책봉을 받았습니다."
"내 계획은 바로 그 점에서 기인했다. 의자는 오랜 세월에 걸친 어려운 처지를 극복하게 되었을뿐더러 이제는 누구도 넘볼 수가 없을 만큼 튼튼하게 입지를 구축시킨 것으로 알려졌다."
"반면에 이모님은 그때보다 못지않을 위기에 또 직면하셨습니다."
"그렇다. 이젠 내물계가 열겠다는 화백회의를 계속 막을 수가 없게 되었다. 명분도 약해진 데다 시간을 끌면 끌수록 내게서 백성들도 등을 돌리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나로선 위기를 극복하는데 백제의 힘을 빌리고 그걸 한데 묶어서 내물계의 반란을 유도해보려고 한다."
"이모님 말씀대로 해볼 만하겠습니다. 잘 되면 모든 위기를 일시에 해결할 수가 있으므로 시간을 더 끌 필요도 없겠습니다. 그런데 그 일에 어떻게 백제의 도움을 얻으며 그게 뜻대로 될지는 의문입니다."
"나는 의자에게 빚을 갚을 것을 요구하겠다."
"이모님이 빚을 갚으라고 하신다고 말을 들을지 모르겠습니다."
"나는 의자를 믿는다."
"이모님은 어떤 점에서 그런 확신을 가지십니까?"
"의자는 철산지의 획득으로 상당히 호전된 위치에 서게 되었다. 그게 누구의 덕임을 잘 알지만 앞으로도 나하고 연계를 가질 필요성을 잦으려고 할 것이다. 그 이유는 핏줄이 통하는 데가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모님의 믿음이 그쪽에 꼭 통할지는 미지수입니다."
"나와 의자는 약속을 한 게 있다. 양쪽이 보위에 오르기 위해선 서로가 무슨 일이든 돕기로 했다. 거기엔 핏줄이 통하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때문에 의자는 꼭 지킬 걸로 믿고 의자가 날 도울 걸로 확신한다."
김춘추는 그런 말을 하는 안쓰럽게 보이나 고개를 끄덕였다.
"춘추는 그 일을 위해서 백제를 한번 다녀와야 하겠다."
"이모님, 제가 의자 태자를 만나서 무슨 일을 하라는 말씀입니까?"
"내가 한 말을 전해라. 너는 잘 해낼 것으로 믿는다."
덕만의 절박함이 그대로 포개져 김춘추는 마음이 더 무거워졌다. 덕만은 미리 써둔 의자에게 보낼 서찰을 김춘추에게 내주었다.
"백제에 가면 의자 태자를 어떻게 접촉해야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백제국 사비성엔 고정으로 심어둔 첩자가 있지 않느냐?"
"방두라는 자인데 그를 이용하게 되면 그 정체가 드러나지 않겠습니까? 앞으론 첩자 노릇을 더는 수행할 수가 없게 되지 않겠습니까?"
"방두는 그만 본국으로 데려와 다른 일에 쓸 계획이다."
며칠 뒤 김춘추는 왜국엘 간다며 남가라로 향했다. 거기서 당의 상선을 얻어 타고 가다가 백제의 백마강 하구에서 내렸다. 그런 뒤론 육로로 사비성으로 가서 방두의 집을 찾아갔다.
방두(方兜)는 백제에서 오랜 기간 첩자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다. 그런데 김춘추가 찾아오자 여간 당황하지 않았고 더욱이 덕만 공주의 서신을 전할 일로 난감해졌다. 그동안에 행상을 하며 혼인도 해서 자식까지 둔 몸이었다. 삶도 안정되어 첩자 노릇을 그만두고 싶었다. 그런데 서찰을 전하게 되면 정체가 드러나게 되어 백제에선 더 살 수가 없게 되었다. 거부를 할 수도 없으므로 잘 아는 관리를 찾아갔다.
의자는 서찰을 받게 되자 뜯고 읽어보았다.
--이모(姨母)는 의자 태자에게 서신을 쓰게 되었네. 신라와 백제는 말을 타고 달리면 하루거리일 뿐인데 서로는 얼굴도 모른 채 살고 있네. 필설로나마 한을 덜려고 하니 그리움에 눈물만 흐르네. 의자 조카를 생각할 때마다 꽃다운 나이로 먼저 간 선화 동생이 눈에 선하게 떠오르네. 그립고 슬픔만 커져 가슴이 미어지네. 그래도 한 점 혈육을 남겼으니 얼마나 다행스럽고 고마운지 모르겠네. 양국의 왕실은 강신(强臣)들에 둘러싸여 보위를 잇기에 어려움이 클세. 이 또한 무슨 우연이란 말인가? 천하에 군림할 보위는 성인도 남에게 양보를 못할 일일세. 어떻게든 지켜내지 않으면 안 되는데 조카는 우여곡절 끝에 태자에 봉해지게 되었네. 그러나 이모는 여인의 몸이라 어렵게 되었네. 그러나 영욕과 득실을 떠나 변역(變易)으로 자리를 잃는다면 후세에 비방을 면치 못하네. 이모는 7년 전 조카와 맺은 약속을 떠올리게 되네. 이모는 조카의 청을 들어 작으나마 뜻을 이루게 도움을 주었네. 이번엔 조카가 이모를 도와줄 차례일세. 조카와 좋은 방책을 의논코자 이종(姨從) 4촌인 김춘추를 보내니 좋은 결과를 얻길 기대하네. 신묘(辛卯) 춘(春) 큰 이모 덕만(德曼).
의자는 서신을 읽고 나서 회상에 잠겨 들었다. 지난날 자신의 처지가 얼마나 암담했으면 꿈속에 모친이 나타났을까? 모친은 큰 이모에게 도움을 청하라는 말을 남겼고, 그에 따라 자신은 신라를 공격하는 마당에 큰 이모에게 도움을 청했다. 그 결과 신라의 서부 철산지 절반을 얻어 자신에겐 오늘의 일이 있게 되었다. 생각할수록 감격과 뜨거운 정을 느끼며 보답하기로 결심을 했다.
무왕도 덕만의 처지를 잘 알고 있었다. 지나간 추억을 회상할수록 감회가 크고 깊었다. 오래간만에 선화공주와의 옛 일을 놓고 추억에 젖어들면서 애틋한 그리움에 잠겨 들게 되었다.
"폐하, 소자는 김춘추를 만나봐야 하겠습니다."
"암, 만나봐야지. 네 모친을 생각해서라도 그래야만 한다."
"그렇지만 김춘추를 궁궐 안으로 불러들일 순 없습니다."
의자의 말에 무왕도 수긍을 했다. 때문에 적당한 장소를 찾다 보니 준공을 앞둔 왕흥사(王興寺)가 떠올랐다. 백제의 호국도장(護國道場)으로 삼고자 오랜 공사를 한 끝에 채색(彩飾)을 할 일만 남아 있었다.
"남들의 눈을 피하기가 쉬운 공사 중인 흥왕사에서 만나기로 하자."
무왕은 절의 공사 진행 상황을 살피겠다며 왕궁을 나섰다. 의자는 방두에게 김춘추로 하여금 먼저 왕흥사로 간 뒤 절에서 가까운 한 정자에서 기다리고 있게 했다가 만났다.
"폐하, 신라에서 온 생질인 김춘추입니다."
무왕은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떼었다.
"춘추, 오늘은 국적을 떠나 핏줄끼리 정을 나누는 자리로 삼자."
의자는 모친의 나라에서 온 이종사촌 동생을 처음 보게 되었다. 신라 왕실에 대한 친근한 감정을 느끼며 입을 떼었다.
"김춘추 동생, 나는 의자일세. 이런 날이 올 줄은 상상도 못 했네."
"제가 의자 태자님을 형님으로 불러도 되겠습니까?"
"암, 대화도 격식도 버리고 가족처럼 말을 나눠보세."
의자는 대답하고 김춘추를 거침없이 끌어안았다.
무왕은 그런 광경을 보면서 감격스러운 음성으로 물었다.
"춘추, 빙장 폐하의 근황은 어떠신가?"
"외조부 폐하께선 환후가 깊으시나 외조모님은 정정하십니다. 두 분께선 태자 형님을 한번 보기를 평생소원으로 여기십니다."
"짐도 양국 간의 관계로 인륜 도리가 막힌 걸 안타깝게 여긴다."
"제 어머님도 폐하와 의자 형님에 대한 말씀을 자주 하십니다."
"짐도 작은 처형에게 각별히 고마움을 느끼고 있네."
"폐하, 각별한 고마움은 어떤 일로 그러십니까?"
"자네 모친은 짐과 선화공주가 인연을 맺게 해 주신 분이시다."
"제 모친께서도 평생에 가장 잘한 일로 치시는 말씀을 하십니다."
세 사람은 그런 말을 나누며 동병상련을 느꼈다. 양국의 왕실은 전이나 지금이나 비슷한 사정이고 어려움도 같았다. 의자는 김춘추가 무슨 말을 꺼낼 것인지에 대한 궁금증을 느꼈다.
"외조부 폐하께선 병환이 너무 우중하십니다. 승하하시게 되면 이모님의 보위 승계는 매우 어렵습니다. 내물계는 태자가 없음을 기화로 반역을 도모해서라도 왕위 찬탈을 노리고 있습니다. 큰 위기에 처하신 큰 이모님은 폐하와 태자 형님의 도움을 얻고자 절 보내셨습니다."
"짐도 신라 왕실의 어려움을 잘 알고 있다. 자네가 온 게 그 때문이라면 서로 간에 도울 방법을 찾아보기로 하자. 지금부터 두 사람은 기탄없이 의견을 내고 의논을 해서 좋은 방향으로 방도를 도출해주기 바란다."
무왕은 그런 말을 남기고 먼저 왕궁으로 돌아갔다.
의자와 김춘추는 그때부터 덕만 공주를 도울 일을 놓고 백제가 도울 방법을 의논을 했다. 김춘추는 내물계가 반역을 일으키게 유도하고 제압을 하는데 백제가 협조를 해줄 것을 요청했다.
"태자 형님, 내물계가 반란을 일으킬 경우 왕궁의 병력으론 제압을 하기가 어렵습니다. 때문에 변경을 지키는 병력 중 일부를 미리 빼돌려서라도 대비를 하려는데 그걸 알고 움직일 고구려가 우려됩니다."
"고구려가 움직일 경우 백제에서 병력 지원을 바라는가? 근래에 고구려도 상황이 매우 좋지 않아 전역을 일으키긴 쉽지가 않을 것 같네."
"저도 태자 형님의 말씀대로 그 사정을 알고 있으나 가잠성에서 일부 병력을 빼내는 일에 주저가 된다는 점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김춘추가 그런 대답을 하자 의자는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동생이 온 것은 고구려가 아니고 백제 때문인데 안심을 하게나."
의자가 정곡을 찌르는 대답을 하자 김춘추는 시인하는 대답을 했다.
"말씀대로입니다. 믿고 더 원하는 바가 있습니다."
"더 원하는 바를 말해 보게."
"변경지대에서 군사행동이 없을 뿐만 아니라 서라벌이 위기에 처할 경우 병력을 움직여 왕실을 도와줄 것을 청합니다."
"내가 그렇게 하겠다고 하면 믿겠는가?"
"저는 믿지를 않으나 이모님이 믿고 계십니다."
"자네의 솔직한 답변이 마음에 드네."
"저는 큰 이모님과 중간에서 전달자에 불과합니다."
"이모님은 날 감동을 시킨 분이라 나도 이모님을 감동시키고 싶네."
"그 말씀을 꼭 전해 드리겠습니다."
의자는 덕만 공주의 요구는 결코 저버릴 수가 없었다.
두 사람은 그때부터 내물계의 반란을 유도하고 제압할 문제를 다루는 의견을 서로 교환했다. 의자는 자신도 도울 의견을 내면서 함께 검토를 하며 다방면으로 협조를 하겠다고 약속했다.
김춘추는 처음엔 믿음성이 없었으나 의자의 호의적인 태도와 대화를 나눌수록 믿음이 생겼다. 끝내 한시름을 놓고 그 자리에서 이번에는 육로를 이용해 귀국길에 올랐다.
의자는 왕궁으로 돌아가 김춘추와 합의를 본 사항들을 부왕에게 보고했다. 무왕도 다른 일은 몰라도 덕만이 보위를 잊게 될 때까진 적대행위를 않고 적극 도우라는 당부를 했다.
한편 방두는 정체가 드러나서 김춘추와 함께 귀국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아내가 남편의 정체를 알게 되자 정나미가 떨어져 함께 떠나길 거부했고, 자식들도 모친과 함께 살겠다고 했다.
덕만은 방두를 14급 길사(吉舍)로 승급시켜 왕궁의 수비군 군관으로 근무하게 했다. 김춘추는 그런 방두에게 지시를 내려 어느 날 칠숙의 심복인 아찬(阿湌) 석품(石品)을 찾아가게 했다.
"저는 공주님과 전군님에 대한 복수를 해야만 합니다."
방두가 불만을 털어놓자 석품은 이해를 하며 물었다.
"자네는 전군님에게 복수를 하려는 이유가 무엇인가?"
"저는 전군님과 의자가 만나게 주선을 했기 때문에 백제에서 정체가 드러났습니다. 처자식이 있는 사비성에서 못 살게 되었지 않습니까?"
석품은 의심에 찬 눈초리를 보내면서 말했다.
"자넨 목숨을 건져서 돌아왔고 승급까지 했는데 뭘 더 바라는가?"
"그동안에 저는 백제에서 장사를 해 상당한 재물도 모았습니다. 가정도 꾸려서 자식도 두었으므로 거기서 안락하게 살고 싶습니다. 그런데 하루아침에 모든 것을 전부 잃게 된 신세가 되었으니 원통합니다."
"그렇긴 하군?"
"제 인생을 망조가 나게 만든 전군님 뒤엔 덕만 공주가 있습니다."
"그건 나도 알만하네만, 날 찾아오면 무슨 수가 나겠는가?"
"요즘에 장군님께선 칠숙 대감을 모시고 정변을 일으킬 것이란 소문이 도성 안에서 파다합니다. 저도 장군님을 도와 공을 세우고 싶습니다."
"자넨 큰일 날 소리를 하는군? 헛소문을 듣고 쓸데없는 생각은 말게."
"장군님, 세상이 다 아는 사실인데 왜 그러십니까? 장군님이 절 못 믿으셔서 그러신다면 섭섭하기 짝이 없을 노릇입니다."
석품은 난처했다. 자신은 칠숙이 반란을 일으키는데 가담하고 싶지가 않았다. 그런데 그런 소문이 난 것이었다. 아마도 실제로 왕위를 차지할 가능성이 큰 후직과 알천공 쪽이 낸 것 같았다. 실제로 내물계는 칠숙의 야망을 부추겨 내란 분위기를 조성하고 왕실을 압박하려고 했다.
"방두, 나는 전군님이 의자를 만났던 이유에 대해선 알고 싶네."
"어려움에 처한 덕만 공주를 도와줄 것을 청을 했을 걸로 압니다."
"백제에서 무슨 도움을 받을 게 있다고 그런 청을 넣는단 말인가?"
"덕만공주는 내물계가 정변을 일으켜 자신을 왕궁에서 쫓아내려고 든다고 하소연을 했을 것입니다. 그처럼 위기의식이 큰 만큼 그에 대한 방비책을 세우자니 백제에 무슨 타협 거리를 제시하고 도움을 청했을 것으로 추측이 됩니다."
"백제에 병력 지원을 요청했을지도 모른다는 말인가?"
"병력 요청을 비롯해 여러 가지로 도움을 청했을 것입니다."
"여러 가지로 도움을 청할 게 무엇이란 말인가?"
"왕궁의 방비를 강화시키기 위해 신주정 병력의 일부를 서라벌로 빼돌리기 위해 무슨 대가를 지불하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이 갑니다. 그럴 경우 고구려 쪽에 대한 방비가 허술해지는 위험성이 큽니다. 그러므로 당분간 백제 군이 변경에서 군사행동을 자제할 것을 요청했을 것입니다."
"그런다고 백제가 들어줄 걸로 생각이 되나?"
"그만한 대가를 치른다면 가능할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그만한 대가를 치른다면 어떤 대가를 말함인가?"
"서부의 철산지 탈환을 미루겠다는 약속을 했을 것입니다."
석품은 방두의 말이 터무니없고만 치부를 할 수도 없었다.
"내물계를 위축시키려고 서부 철산지를 또 이용한다?! 하긴 어느 나라건 왕실들끼린 서로 밀통하네. 그런데 신라와 백제가 그처럼 밀착되어 있을 줄은 몰랐네. 하긴 양국의 왕실은 핏줄이 이어지기도 하지."
방두는 자신의 처지를 놓고 더욱 하소연을 했다.
"저는 이번 일로 첩자의 말로가 어떤 것임을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때문에 앞으론 장군님을 도와 복수도 하고 출세도 하려고 합니다."
"자네가 첩자 노릇을 그만하게 된 것은 잘된 일일세. 그러니 앞으론 백제에 남은 처자식들을 데려다가 함께 살 방도를 찾아보게나."
"저도 전군님에게 가족들을 데려와 함께 살 수 있게 해달라고 간청했습니다. 그랬더니 서라벌에서 새장가를 들라는 대답만 들었습니다."
"그렇게라도 해야 할 일이로군!"
"장군님, 아무리 하찮은 인생이라도 이대로 살 순 없습니다."
"그러면 백제로 돌아가서 가족들과 살면 되지 않는가?"
"그렇게 할 수도 없습니다."
"왜 그런가?"
"백제가 절 회유를 합니다. 이번엔 서라벌에서 백제를 위한 첩자 노릇을 해줄 것을 바랍니다. 그렇게 하면 처자식을 보내주겠다고 합니다."
"조국을 배반할 수가 없다는 말인데 이해가 가네."
"저는 전에 장군님을 열심히 보좌했었습니다. 옛정을 생각하셔서라도 부디 절 이끌어 주고 앞길을 틔워주시길 간청합니다."
"내게 무슨 힘이 있다고 자넬 이끌어 줄 수가 있겠는가?"
"장군님이 칠숙 대감을 받들고 정변을 일으키는 데 적극 앞장을 서 주신다면 저는 성공을 거두 시계 적극 돕겠습니다. 백성들도 바라지 않는 여왕의 등극은 막아야만 합니다. 그래야만 신라는 백제와 왜국을 제대로 견제할 수가 있게 되므로 나라를 위해서라도 힘을 써주십시오."
품석은 한동안 무슨 생각에 잠겨 있다가 중얼거렸다.
"방두의 말엔 일리가 없지도 않다. 내물계는 화백회의를 열어 보위를 차지하려는 데만 관심이 클 뿐이다. 화백회의에서 추대를 받기를 기대할 수가 없는 칠숙 대감은 반란을 일으킬 능력을 지니셨다. 그러므로 결국은 실력 행사로 나갈 수밖에 없는 분으로 생각을 하게 된다."
"장군님, 이런 호기가 또 있겠습니까? 저도 내물계에서 보위에 대한 야망을 품는 분은 여럿이 있으나 칠숙 대감처럼 힘을 갖추신 분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백성들의 기대를 크게 받는 칠숙 대감을 옹위해서 적극 행동에 나설 분은 장군님밖에 없습니다. 저는 장군님을 도와 칠숙 대감이 보위에 오르시는데 힘을 보태는데 기여를 하고 싶습니다."
석품은 마음이 조금 움직인 듯 입을 열었다.
"한번 생각을 해 보겠다."
"장군님, 잘 생각하셨습니다."
"방두는 덕만 공주와 김춘추의 동태를 더 살펴주게."
"장군께서 시키시면 무슨 일이든 열심히 받들겠습니다."
석품은 방두는 돌아가자 그날 밤에 칠숙을 찾아갔다. 그리고 방두의 말을 전하고 의중을 떠보자 칠숙은 무겁게 입을 열었다.
"나도 방두의 말에 신빙성이 크다는 생각일세. 덕만 공주는 금년에 나이가 쉰이 된 노회 한 여인으로 사내들 못지않게 큰 궁량도 지녔네. 그동안에 김춘추를 시켜 왜국과 관계를 개선하는 데 힘을 기울였는데 이젠 백제 쪽까지 손을 쓰고 있다니 놀랍기 짝이 없군!"
"대감, 공주가 내물계를 누르기 전에 선수를 쳐야 하겠습니다."
"국인들은 내가 정변을 일으킬 걸로 떠들어대서 여간 당황스럽지가 않으나 돌아가는 여러 사정을 알고 되니 큰 결심을 하지 않을 수가 없겠다. 앞으론 방두를 이용해 계속 궁궐 쪽 사정을 알아내도록 하게."
칠숙은 이왕지사 소문이 난 김에 이젠 적극 나서 보기로 마음을 굳혔다. 더욱이 국내외 여건과 왕실의 사정을 감안할 때 모반을 일으키면 성공할 가능성이 커졌다는 확신도 섰다.
"내가 방두를 한번 직접 만나볼 수 있게 해 주게."
석품은 칠숙의 부탁을 받은 며칠 뒤 방두를 데리고 다시 갔다.
"대감, 덕만 공주를 없애버리면 간단히 끝날 일입니다."
칠숙은 방두가 다짜고짜 꺼낸 말에 여간 놀라지 않았다.
"자넨, 매우 불경스러운 소리를 하는데 무슨 방법이 있는가?"
"대감, 대 병력이 아니어도 목적을 달성할 방법이 있습니다."
방두는 자신의 생각을 거침없이 말했고 칠숙이 물었다.
"방두, 자네가 설쳐대는 방도를 구체적으로 들어보고 싶다."
"대감, 궁성을 제압하긴 쉽지가 않으므로 덕만 공주만을 표적으로 삼는다면 쉽게 제거를 할 수가 있다는데 착안을 두셔야 합니다."
칠숙은 내심 그 말을 옳다고 여겼다. 화백회의를 연다고 해도 자신이 보위에 추대받을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후직과 알천공에게 돌아가게 될 것이므로 스스로 차지하는 쪽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왕궁에 진입을 하지 않고 어떻게 해치울 방법이 있단 말인가?"
칠숙은 방두에게 말려드는 심리상태가 된 채로 물었다.
"대감, 요즘에 덕만 공주는 궁궐을 자주 나서고 있습니다."
"무슨 일로 궁성을 자주 나선단 말인가?"
"공주는 화랑도를 장악할 목적에 그 뒤치다꺼리에 열심입니다. 요즘은 매일처럼 궁을 나가서 화랑도의 군사훈련을 참관하고 있습니다."
"화랑도에게 군사 훈련까지 시키고 있단 말인가?"
"앞으론 화랑도가 왕궁의 호위를 맡게 될 것 같습니다. 때문에 낭도들과 친화감을 갖고자 매일처럼 훈련장을 찾고 있답니다."
"그럼 그 기회를 이용을 하자는 말인가?"
"그렇습니다."
"화랑도 훈련장은 도성 안에 있는데 그런 데서 거사를 하면 국인들의 이목이 두려운 일로 비판을 받을 우려도 클세."
"화랑도의 훈련장은 얼마 전부터 부산 산성으로 옮겼습니다."
"훈련장을 부산 산성으로 옮겼다고?"
세 사람은 그때부터 오랜동안 숙의를 하고 나서 헤어졌다.
며칠 뒤 궁성 안에선 덕만 공주와 김춘추가 마주 앉았다.
"이모님, 이젠 칠숙과 석품이 드디어 움직이게 됩니다."
"어떻게 그리도 빨리 움직이게 되었단 말인가?"
"방두가 석품을 설득한 결과 칠숙이 말려들었습니다. 칠숙은 즉각 서라벌 인근의 촌장들과 모의를 했답니다. 내물계 촌장들은 이모님이 서부 철산지 회복을 늦추는 것에 불만이 매우 큽니다. 그것에 불을 질러서 병력을 내놓게 만들었는데 이건 모반에 가담할 촌장들의 명단입니다."
덕만은 김춘추가 내놓은 명단을 들여다보았다. 거기엔 화왕(火王), 상성(商城), 수창(壽昌), 장산(獐山), 임고(臨皐), 의창(義昌), 임관(臨關) 등 서라벌 근교의 대촌들이 거의 다 포함이 되어 있었다.
"칠숙과 촌장들은 이런 합의도 봤답니다. 마을마다 1백여 명씩 장정들을 동원해서 부산성 남쪽 산자락 밑의 습지대에 매복을 시켰다가 이모님이 지나가실 때 덮치기로 되었답니다."
"촌장들이 그 정도의 병력만을 동원시키는 이유는 무엇일까?"
"방두는 이모님이 외출 시 호위 병력을 1백여 명만 거느린다고 칠숙에게 제보했답니다. 때문에 칠숙은 많은 병력을 동원을 할 필요가 없다는 판에 촌장들도 은밀하게 장정들을 동원해서 거사를 하기로 했답니다."
"그렇다면 칠숙이 거사에 직접 나오게 되는가?"
"직접 나오기로 되었답니다."
"자네는 앞으로 어떻게 대처를 할 것인가?"
"저는 김유신에게 상주 병력 2천 명을 은밀히 이동시키게 했습니다. 부산성 북쪽 산골짜기에 매복시켰다 반란군을 덮치기로 되었습니다."
"칠숙의 병력이 매복할 장소는 지명이 어떻게 되는가?"
"부산성 남쪽 산자락에 있는 여근곡이란 습지대입니다. 이모님이 산성을 오가시는 길인데 풀숲이 매우 우거져 매복이 가능한 곳입니다."
"습지대의 이름이 여근곡이라고?"
"그렇습니다."
"여근곡이라면 내가 유리해질 것이란 생각이 든다."
"왜 이모님에게 유리하다는 생각을 하십니까?"
"너도 들었을 것이다. 올봄에 영묘사의 옥문지에서 때 이른 개구리울음소리가 시끄럽게 일어났단 소문이 서라벌에 돌았지 않는가?"
"저도 그 소문을 들었으나 이 일과 무슨 연관이 있겠습니까?"
"개구리들이 일찍부터 울었다는 것은 음기가 강해질 징조이다."
덕만은 그런 말을 하고 설명을 했다. 올해 영묘사(靈廟寺) 옥문지(玉門池)에서 개구리울음소리가 며칠간 크게 일어났던 것은 음기가 매우 강해질 징조이고, 그걸로 여인의 기가 성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모님 예상대로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김춘추는 그렇게 대답을 했지만 이모는 얼마나 사정이 다급해졌으면 그런 말까지 하며 기대를 걸까 싶어 안쓰럽기까지 했다. 그런데 덕만은 목소리에 힘을 주듯 말을 이었다.
"칠숙의 반군이 여근곡에 매복하는 것은 스스로 죽음을 자초하는 짓이 된다. 남자의 양물은 여자의 음물에 들면 죽게 마련이다."
"이모님 말씀대로만 된다면 반란군의 진압은 확실하겠습니다."
"내 말을 한번 믿어 봐라. 반군을 꼭 때려잡게 될 것이다."
이튿날 덕만은 결연한 태도로 궁궐을 나섰다.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서 가죽 갑옷을 속에 껴입고 김춘추가 곁을 따르게 했다. 그리고 담담한 표정인데 도리어 김춘추의 표정이 잔뜩 굳어들어 있었다.
덕만과 김춘추가 부산성에 들어가자 낭두인 진부(津夫)가 와서 보고했다. 지금까진 모든 계획이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으나 앞으로 무슨 변수가 생길지 몰라 긴장을 늦추지 않겠다고 했다.
화랑도는 아침부터 창검술 훈련을 시작했다. 1천여 명의 낭도들은 우렁차게 구령 소리를 외쳐대서 성안은 들썩거릴 지경이었다. 덕만은 누대 위에 좌정을 한 채 종일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해 질 녘이 되어 낭도들의 하루 일과를 모두 마쳤다. 저녁 식사엔 특별히 술이 나왔다. 낭도들은 환호성을 질러대며 술잔을 주거니 받거니 흥겨움에 젖어든 채 피로감을 풀게 되었다.
오후부터 김춘추에겐 은밀한 보고가 계속 들어왔다. 주로 여근곡의 상황인데 저녁 무렵엔 그게 더 잦아졌다. 김춘추를 통해서 들어오는 보고를 받는 대로 덕만은 무슨 지시를 내렸다.
칠숙의 모반에 동원된 5백여 장정들은 병장기를 숨기고 사람들의 눈을 피해 하나둘씩 여근곡으로 모여들었다. 그리고 매복한 채 궁궐로 돌아갈 덕만 공주가 나타나기만을 기다렸다.
김춘추는 갑자기 성문을 잠가놓고 낭도들에게 외쳤다.
"낭도들이여, 공주 마마께서 특별히 내리신 술을 마음껏 마셔라. 오늘은 산성에서 모두 하룻밤을 야영하며 노래와 춤을 추며 즐겨보자!"
낭도들은 환영 일색의 분위기가 되었다. 그러나 일부 내물계 낭도들은 이상하다는 듯 불안해하는 빛을 보였다. 김춘추는 내물계 중 이탈을 할 자가 생길지 몰라 성문을 잠가 버렸다.
오늘따라 어둠이 짙어졌는데도 공주는 궁궐로 돌아가질 않았다. 낭도들은 웬일인지 몰라 이상하게 여기는데 김춘추는 드디어 김유신의 병력이 움직였음을 덕만에게 보고했다.
완전히 밤이 이슥해질 무렵 김유신이 성 안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여근곡의 반란군을 일망타진했음을 보고했다. 덕만은 모든 상황이 끝나자 비로소 안심하고 성을 나섰다.
그런데 뒤늦게 내물게 낭도들 중에선 어떤 기미를 알아채고 웅성거렸다. 그러나 성문이 닫혀 나갈 수가 없었다. 한편 여근곡에 있던 김유신은 덕만에게 칠숙은 체포했지만 석품은 도주했음을 보고했다.
김유신은 포박을 당한 칠숙을 덕만 앞으로 끌고 오게 한 뒤 무릎을 꿇게 했다. 칠숙은 덕만를 올려다보며 떨리는 음성으로 빌었다.
"공주님, 제가 죽을죄를 지었으나 목숨만은 살려 주소서."
"역적 칠숙의 입에서 그런 뻔뻔스러운 말이 나올 수가 있소?"
"저는 본래 보위에 오를 자격도 없고 역심을 품을 만한 위인도 못 됩니다. 다만 석품의 꾐에 빠져서 일시 정신이 돌았던 모양입니다. 지금은 크게 죄를 뉘우치고 있습니다."
"반역자는 법에 따른 응분의 처벌을 받게 될 것이요."
덕만의 대답은 냉랭했다. 야심만만하게 반란을 일으켰던 칠숙은 죽음을 면치 못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칠숙은 압송되어 감옥에 구금당하는 신세가 되는 걸로 상황은 종료가 되었다.
이튿날 서라벌은 흉흉한 분위기로 바뀌었다. 어젯밤에 일어나 사건의 전말을 듣게 된 신하들은 창황이 궁궐로 몰려들었다. 특히 내물계 대신들은 포박당한 칠숙을 보고 안색들이 창백해졌다.
덕만은 대신들을 전부 모아놓은 자리로 칠숙을 끌어내게 했다. 그런 뒤 반역에 가담했던 촌장들의 명단을 공개했다. 모반의 증거가 명백해진 내물계는 유구무언일 뿐이었다.
"폐하께선 환후가 깊으신데 모반을 일으킨 자가 나왔소. 그동안에 폐하를 대신해 섭정으로 직무를 충실히 수행해온 나로선 충격이 너무 컸소. 그러나 모두가 다 알고 있겠으나 폐하의 유고시 나는 보위를 이어받을 것이요. 앞으로도 모든 정사를 차질 없게 이끌어 나갈 것이고, 반란 사태는 진압이 되었음을 선포하겠소. 신라는 개국 이래 최대의 위기를 맞았던 게 7년 전이요. 당시 나는 서부 철산지의 절반을 과감하게 백제에 내주고 위기를 벗어나게 만들었소.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신라의 사직은 사라져 없었을 것이요. 칠숙은 여인이 보위에 오를 수가 없다고 모반까지 일으켰지만 나는 그걸 진압하고 나라를 지켜내고 잘 다스릴 수가 있음은 증명해 보였소. 그걸 부인할 사람은 앞으로 나와 보시오."
덕만이 당당한 태도로 하는 말에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못했다.
"나는 비록 여인의 몸이지만 섭정 직을 수행한 지 10년이 넘었소. 그동안에 대과 없이 국정을 수행했고 큰 위기로부터 여러 번 나라를 구해냈소. 이 자리의 대신들 중 그만한 공을 세운 자가 있으면 나서 보시오."
덕만의 말에 아무도 입을 여는 자가 없었다.
"반역자 칠숙은 처형을 하겠소."
칠숙은 창백해진 얼굴로 부들부들 전신을 떨고 있었다.
서라벌 백성들 사이엔 칠숙이 공개처형을 당할 것이란 소문이 돌았다. 그런데 흉흉한 분위기 속에 내물계 대신들 중엔 단 한 명도 구명에 나서려는 자가 없었다.
처형을 하게 된 날 서라벌은 물론 인근 고을의 백성들까지 구경을 하려고 몰려들었다. 많은 백성들이 보는 가운데 처형장에 끌려 나온 칠숙은 큰 소리로 입을 열었다.
"부귀와 빈천은 타고난 운명인데 내가 부질없는 욕심을 부렸소. 그 결과는 이처럼 허무하게 한 세상을 끝내게 되고 말았소."
칠숙의 집안은 구족(九族)이 멸하는 화를 당하는 걸로 끝이 났다.
한편 도망을 쳤던 석품은 국경을 넘어 백제로 갔다. 그러나 며칠간 숨어 지내면서 처자식이 걱정이 되었다. 결국은 발길을 돌려 신라로 돌아와 낮엔 산속에 숨고 밤에만 걸어 서라벌로 들어갔다. 집 근처에 이르자 사람들 눈에 띄지 않게 일단 산속으로 숨어들었다.
그때 나무꾼이 있어 석품은 옷을 바꿔 입을 것을 제안했다. 그리고 나뭇지게를 지고 집에 들어갔다. 그러자 놀란 가족들은 빨리 도망을 치라며 밀어냈다. 그러나 나무꾼의 고발로 병사들이 들이닥쳤다.
석품도 감옥에 갇히게 되자 밤중에 방두가 찾아왔다.
"장군은 그동안에 어디로 피하셨소?"
"백제로 피했었네."
"나는 장군이 그처럼 어리석은 사람인 줄은 몰랐소."
"내가 어리석다니?"
"백제에서 환영을 해 줄 걸로 믿고 그리로 갔었소?"
"환영까지는 아니더라도 박대는 받지 않았다."
"반역죄를 저지른 자는 어느 나라건 배척하기 마련이요. 백제에선 무사할 줄로 알고 그리로 갔다니 참으로 어리석기가 짝이 없소."
"방두, 그런 말을 하는 자네 역시 안심할 순 없을 것이다."
"장군은 무슨 뜻으로 그런 말을 하시오?"
"내가 입을 열면 너도 나와 같은 신세를 면치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날 옥에서 꺼내 줄 방법을 찾아 주기 바라네."
"내가 감옥에서 꺼내 주면 어디로 갈 생각이요?"
"이번에는 고구려로 갈까 한다."
"고구려라고 장군을 가만히 내버려 둘 걸로 생각을 하오?"
"고구려 백성이 되겠다는데 해칠 이유가 없지 않은가?"
"모르는 소리요. 김춘추는 고구려의 권신인 도해선이란 자와 밀통을 하는 사이요. 그러니 받아줄 것은 꿈도 꾸지 마시오."
"나는 칠숙 대감의 하수인에 불과했음을 자네도 잘 알지 않는가? 자네에게 조금이라도 의리가 남아있다면 내가 살아날 길을 찾아주게."
"장군, 어디서나 죽게 될 목숨이니 조국 땅에서 묻히시오."
"방두, 자네가 계속 이렇게 나오면 나도 달리 생각을 해야 하겠다."
"달리 생각을 하겠다니 어떤 생각을 하시려오?"
"방두, 자네도 칠숙 대감을 도왔고 부추겼으니 폭로를 하겠다."
"장군, 그렇게도 모르시오? 나는 정탐하려고 가까이했을 뿐이요."
방두는 그런 대답을 남기고 낄낄 웃으며 돌아갔다.
이튿날 석품은 공개 처형을 당했다. 그런데 그날 밤에 방두 역시 누군가의 손에 죽음을 당했고 석품과 함께 거리에 시체가 전시되었다. 음험한 자의 말로는 그렇게 끝이 나고 말았다.
서라벌엔 김유신이 거느린 2천여 병력이 상주를 시작했다. 칠숙이 목숨을 잃게 되자 공포에 떠는 내물계는 숨을 죽일 수밖에 없는 가운데 당분간은 계엄 상태가 지속될 수밖에 없었다.
서라벌의 백성들 사이에선 묘한 소문이 퍼졌다.
"신라의 왕위는 성골만이 오를 수가 있고 그 일 순위는 덕만 공주이다. 공주는 신이(神異)한 능력까지 지녀 그동안에 일어난 여러 국란들을 사전에 방비를 했다. 그런데 끝내 모반을 일으켰던 칠숙도 진압을 당했으므로 앞으론 신라 백성들이 태평성세를 누릴 일만 남았다!"
그런 소문은 여왕을 반대했던 백성들의 마음을 돌려놓게 만들었다.
그해 그믐께 진평왕이 승하했다. 장례를 치르고 나서 새해 정초 덕만은 성골(聖骨)로 스스로 보위에 올랐다. 여인의 무서운 집념은 신라 최초의 여왕을 탄생시킨 것이었다. 내물계 대신들은 누구도 감히 반대를 못하고 도리어 여왕에게 성조황고(聖祖皇姑)란 호(號)를 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