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 관계(關係) (632)
당은 동돌궐을 멸망시키고 힐리 가한을 장안으로 끌고 왔다. 이세민은 힐리 가한의 대신이었던 가라록(歌邏祿)을 앉혀 간접 통치를 시작했다. 가라록은 이세민에게 천가한(天可汗)이란 존칭을 받쳐 사상 처음으로 만리장성 이북에서도 천자(天子)로 군림을 하는 존재가 되었다.
양신은 동돌궐의 멸망에 큰 충격을 받았고 흑발이 타계한 소식을 듣고는 가슴이 무너질 만큼 슬퍼했다. 부하가 독약을 탄 술을 마시게 한 것임을 알고 안타까움에 꼭 복수해줄 결심을 했다.
갈사문문의 도장이 있는 호리소코루엔 갈사 상관(商館)도 세웠다. 구려촌 상단은 북방 교역에도 나서게 되면서 호리소코루는 중원 땅과 북방의 새외 종족들 간의 중계 교역지로 변모해 갔다.
육상 교역만을 하지 않았다. 협야노가 주도하는 백제와 해상교역도 규모가 날로 커지고 있었다. 고구려에서 탈취한 전함 외에 상선 1척을 더 건조해 해상교역에서도 날로 발전을 거듭했다.
목제는 아내와 더불어 중원 땅으로 건너왔고, 영지 또한 오게 되어 두 사람은 만춘장에서 함께 기거를 했다. 두 사람은 양신에게 직접 검술을 지도를 받았다. 워낙에 열심들인 데다 경쟁까지 벌여서 실력들이 일취월장으로 늘어났다. 양신은 두 사람을 최측근으로 곁에 두기로 했다.
육상에 해상 교역까지 더해져 효과가 크게 나타났다. 양신은 막대한 재산 축적이 이뤄지자 그 돈을 각처에 둔 갈사 무문의 도장을 운영하는데 전부 쏟아부었다. 문생들에게 사례금(謝禮金)을 받지 않을뿐더러 숙식까지 제공해서 날로 늘고 있었다. 그러면서 한편으론 장군들과 교섭을 해서 실력이 뛰어난 문생들이 군관으로 발탁이 되게 교섭을 했다. 때문에 갈사무문은 군문(軍門)에서도 주목을 받는 대상이 되었다.
양신은 황제의 측근들인 위징과 이세적에게 녹봉의 몇 곱이 넘을 재정적인 지원을 했다. 두 사람은 그에 대한 보답으로 양신의 뒷배를 적극 봐줘서 서로는 더욱 격의 없는 사이가 되었다.
조정에 있건 장사를 하건 많은 정보를 모을 필요성이 있었다. 세 사람은 그런 면에서도 서로에게 도움을 주었다. 양신은 장사를 하면서 얻는 정보가 많았다. 이세적과 위징은 그걸 공유하게 되어 도움이 컸다. 그것은 세 사람 간의 유대감은 더욱 공고해지게 만들었고 두 사람은 이제 양신을 부르는 호칭도 바뀌어 대인으로 부르며 대우를 했다.
"양대인 때문에 대당은 광명개가 너무 흔해지고 말았소."
그건 사실이었다. 양신이 백제에서 수입해오는 광명개는 이세적의 소개로 장군들에게 많이 팔렸다. 그로 인해 광명개를 입은 장군들이 날로 늘어나게 되어 희소성이 떨어질 지경이었다.
"나는 양대인에 대해 다른 걱정을 하는 게 있소."
위징이 하는 말에 양신이 반문했다."
"태자 사부께선 무슨 걱정을 하십니까?"
"양대인은 아무래도 장사 밑천을 다 들어먹을 것 같아서 그러오."
위징이 농담으로 하는 말을 양신은 껄껄 웃으며 받았다.
"제가 왜 장사 밑천을 다 들어먹을 것 같다고 생각을 하십니까?"
"장사로 번 돈을 전부 도장 운영에 쏟아붓고, 우리 두 사람의 뒤치다꺼리를 하는 데도 여간만 돈이 들지 않을 것이니 그렇지가 않소?"
"제 장사는 두 분의 후원으로 잘 되고 있습니다. 저로선 그런 두 분의 체면이 깎이지 않도록 가용에 보탬이 되고자 하는 일입니다."
양신의 대답에 이세적은 껄껄 웃으며 노골적으로 맞장구를 쳤다.
"암, 오는 게 있으면 가는 게 있는 법이라고 하오."
위징은 쓴웃음을 지으며 그 말을 받았다.
"아무튼 간에 우리 세 사람은 끝까지 익자삼우로 나가야 하오."
익자삼우(益者三友)란 친구들끼리 정직, 성실, 견문(見聞) 세 가지에 중점을 두고 하는 교제를 일컬었다. 이세적도 위징의 말에 크게 호응을 하듯 세 개의 잔에 술을 따르고 권했다.
양신은 술잔을 비우고 나서 이세적에게 말했다.
"요즘에 등명개를 구입하는 장수들이 더욱 늘어나서 감사합니다."
"양대인, 그럴만한 이유가 있소. 뭣 때문에 그런지 아시오?"
이세적의 반문에 위징은 갑자기 말을 돌렸다.
"나는 요즘에 장수들이 너무 호전성을 드러내서 걱정이요."
"태자 사부께선 무슨 그런 말씀을 다 하시오?"
"토욕혼 정벌을 건의하는 장수들이 너무도 많아져서 그렇소."
"그건 당연한 건의가 아니겠소? 장수들이 강한 의욕을 드러내는 걸 응원은 못할망정 사기를 꺾을 소릴 하신다면 나로선 어이가 없겠소."
"이대장은 동돌궐 정복에서 큰 공을 세웠소. 나는 그 점을 크게 경하해 마지않소. 그렇지만 잦은 전역은 경계를 해야 할 일이요. 호전성만 드러내는 장수들을 자제시킬 수가 있는 분은 이대장 밖에 없소."
위징의 말에 이세적은 도리어 발끈했다.
"태자 사부는 쓸데없는 걱정은 그만두시오. 장수들은 모두 토욕혼부터 정복한 뒤 고구려를 도모하는 게 순서라는 말들이 중론이요. 나는 장수들이 명광개를 떨쳐 입고 대국의 힘을 만천하에 떨치길 바라오."
"이대장, 고구려는 동돌궐과 다르오. 상비군만 30만을 유지하는 나라요. 쉽게 봤다간 전조의 짝이 나지 말란 법은 없소."
이세적은 위징의 말을 듣고 양신에게 물었다.
"양대인은 고구려 원정에 대해 어찌 생각을 하오?"
양신은 난처한 질문에 대답이 궁했다.
"저는 단지 고구려와 동돌궐을 비교해보는 말씀만 드리겠습니다. 동돌궐은 병력이 부족한 데다 군사전략도 약했습니다. 때문에 대국에 쉽게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었지만 고구려는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양대인, 동돌궐은 병력이 적고 군사 전략이 없어 패했다는 말은 대국이 불로소득을 거두었단 말로 들릴 수도 있지 않겠소?"
이세적의 말에 양신은 당황히 해명을 했다.
"제 말 뜻은 그런 게 아닙니다. 유목민은 기습공격에만 능할 뿐 방어책을 세우는 덴 취약성이 큽니다. 그 점을 지적한 말일뿐입니다."
"그러면 고구려는 어떻소?"
"고구려는 공격과 방어에 다 강합니다. 특히 산성을 의지해서 펼치는 지구전에 매우 능합니다. 그 점을 간과해선 안 된다는 뜻입니다."
양신의 대답에 위징이 동조했다.
"더욱이 고구려 군인들의 강인성은 누구도 부인할 수가 없소. 양대인의 말은 동돌궐처럼 고구려를 상대해선 안 된다는 뜻으로 이해되오. 다만 근래엔 고구려 또한 국왕과 귀족들의 심한 수탈로 백성들의 원성이 커진 걸로 알려졌소. 때문에 동돌궐 짝이 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요."
이세적은 그 말에 고구려를 더 깎아내리려고 들었다.
"요즘 고구려 관리와 무사들의 규율이 크게 해이해졌소. 그 점도 망할 징조이므로 그런 약점을 잡아 토벌을 가하면 성공할 가능성은 크오."
위징은 이세적의 말에 또 우려를 표명했다.
"나는 대당의 관리와 무사들도 규율이 해이해진 걸로 알고 있소."
"태자 사부, 무슨 그런 심한 말씀이 있소? 대당은 명군이 다스리는 나라이나 고구려는 암군이 다스리는 나라요. 비교가 되지 않소."
양신도 고구려 국왕과 귀족들의 사치와 수탈이 심해져 민심의 이반을 불러일으키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문제는 당이 그런 사정을 훤히 꿰뚫고 있다는데 마음이 더욱 무거워지게 되었다.
"양대인은 혹시 지금도 고구려를 걱정하고 있소?"
이세적이 속내를 떠보려는 듯 던진 질문에 양신은 내심 당황했다. 고구려에 대한 반감이 없진 않으나 멸망까진 원하지 않는 심경이었다.
"제가 걱정할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다만 전쟁이 나면 고구려는 귀족과 백성들이 전부 나서 싸울 것이라 양쪽의 인명 피해가 크겠습니다."
위징은 동조를 하듯 고개를 끄덕인 뒤 화제를 돌렸다.
"대당은 지금 전역보다 내치에 더 힘을 써야 할 때요. 폐하께서 내치에 힘을 쓰실 수 있도록 모든 신하들은 적극 돕는 자세가 필요하오."
이세적은 그 말에 또 반박을 했다.
"태자 사부께선 그러시다가 폐하의 심기를 거스를 수도 있겠소."
"폐하의 심기를 거스를 수도 있겠다니 그게 무슨 말씀이요? 대당의 천자는 덕화로 백성들을 다스려야 천하를 안정시킬 수가 있소. 그래야만 이적들이 복속해 오고 무리한 전역도 삼갈 수가 있게 될 것이요."
양신은 언쟁을 벌이는 두 사람을 막으려고 했다.
"두 분께선 저 때문에 이러신다면 송구스럽습니다. 두 분께선 누구보다 제 마음과 처지를 잘 아시므로 그만들 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이세적은 갑자기 껄껄 웃으며 대답했다.
"양대인, 괘념치 마시오. 그런데 양대인은 요즘에 여러 지방관들과 두루 접촉을 하고 다닌다는 소문이 크게 났다고 들었소?"
"그 말씀을 듣고 보니 나는 이대장의 손바닥에서 노는 손오공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제가 산동 쪽의 지방관들을 자주 만나는 이유는 그쪽 물화를 원활하게 확보할 필요성 때문에 공을 들이고 있습니다."
양신은 그런 대답을 하고 설명을 덧붙였다.
장삿속으로 지방관들과 유대를 강화해야 거래 영역을 넓힐 수가 있었다. 산동(山東) 쪽에서 나는 비단, 철제품, 공예품 등은 질이 좋기로 유명했다. 좋은 물화를 많이 확보해야만 육로와 바다를 통한 각국과 교역이 잘 된다. 때문에 특히 내주(萊州). 치주(淄州), 제주(齊州)의 태수들에게 세찬(歲饌) 명목으로 적지 않은 돈을 쓰며 노력을 기울였다.
"양대인은 배가 2척으로 늘어나게 되어 여양의 호상들 중 단연 선두에 선 위치에 섰소. 그런 성공은 큰 노력을 기울인 결과로 알고 있소."
"제가 성공을 거둘 수가 있었던 것은 모두 두 분의 덕분입니다. 앞으론 등주 쪽에 새로운 근거지를 마련해 볼 생각을 하고 있는 중입니다."
"산동 쪽에 힘을 쏟는 이유는 무엇이오?"
"그 이유는 내륙의 포구인 여양은 해양 교역을 하는데 불리한 점이 많다는 문제점 때문입니다. 배들이 황하를 거슬러 오르고 내리는데 시간이 너무 걸리고 경비도 많이 듭니다. 때문에 등주에 해상 근거지를 따로 마련해서 그 문제를 해결해 볼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양신의 말에 이세적은 그 일을 돕겠다는 뜻을 밝혔다.
"내가 등주 수군제독인 묵구에게 소개장을 하나 써 주겠소."
이세적은 지필묵을 가져오게 한 뒤 그 자리에서 등주의 수군제독(水軍提督)인 묵구(墨丘)에게 보낼 소개장을 써 내주었다. 양신은 그걸 받아들고 감사를 표하면서 말을 이었다.
"이대장님 고맙습니다. 그런데 여쭙고 싶은 게 있습니다."
"뭔지 말씀해 보시오."
"대당이 곧 토욕혼 정벌에 나서면 그 이유는 어디에 있습니까?"
"토욕혼은 대당의 서역 교역 통로와 접해 있소. 그런데 그들의 병력이 교역로에 자주 출몰을 해서 교역에 큰 지장을 받게 만드오. 차제에 정벌을 해서 안정을 기하려는 데 그 목적을 두고 있소."
이세적은 말하고 토욕혼(吐谷渾)에 대한 설명도 해주었다.
토욕혼은 청해호(靑海湖)로부터 누란(樓欄)에 이르는 수 천리에 걸친 광대한 땅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런데 근래 기련산맥(祁連山脈)을 넘어 세력 화장에 나섰다. 그 목적은 서역과 교역을 강화시키려는 데 있었다.
동돌궐이 망한 뒤로 고구려는 당에 납작 엎드린 형세를 취하고 있으나 토욕혼은 겁 없이 도전적인 태도로 나온 것이었다. 당은 서역과 교역에서 가로 거칠 경쟁자를 못마땅하게 여길 수밖에 없었다.
양신은 설명을 듣고 나서 또 다른 질문을 던졌다.
"동돌궐의 힐리 칸은 장안성으로 온 뒤에 어떻게 지냅니까?"
양신의 질문에 이세적은 덤덤하게 대꾸를 했다.
"폐하께서 하사하신 대저택에서 편히 잘 지내고 있소."
"그렇게 하신 폐하께선 천가한으로 숭앙을 받으실만하십니다."
"폐하께선 그렇게 하셔야만 할 필요성이 있으셨소."
"무슨 필요성을 말씀하십니까?"
"힐리 칸은 한때 새북의 패자였소. 그러므로 그런 대접을 못 받을 경우 새외 종족들의 반감이 커질 우려가 있소. 분에 넘칠 대우를 받고 있으나 마음대로 밖엘 나다니질 못하는 포로 신세일뿐이요."
앞으로 서역 교역에 나설 생각인 양신은 그걸 밝힐 수는 없지만 힐리를 한번 만나서 그에 대한 자문을 구하고 싶어 입을 열었다.
"제가 힐리 칸을 한번 방문할 수는 없는지 알아보고 싶군요?"
"양대인은 무엇 때문에 그를 만나려고 하오?"
"제 생명의 은인이라 한번 찾아뵙는 게 도리라고 생각합니다."
양신은 그런 말과 수국 시절에 있었던 일들을 설명했다. 양현감의 명을 받고 돌궐에 갔던 일, 거기서 감옥에 갇혀 생사의 기로에 처했던 일들을 밝히고 힐리가 석방시켜 준 사연을 들려주었다.
"그런 사연이 있었다면 한번 찾아볼만하겠소."
"제가 한번 찾아볼 수 있도록 도와주실 순 없겠습니까?"
"내일이라도 방문을 할 수 있게 조치를 취해 놓겠소."
이튿날 양신은 힐리가 살고 있는 저택을 찾아갔다. 힐리는 찾아온 양신을 반기며 부끄러움과 기쁨이 뒤섞인 눈물을 흘렸다. 양신은 위로의 말만 계속하는데 힐리가 분노를 표출했다.
"나는 이세민보다 건무에 대한 원한이 더 크다. 혼자서만 살고자 동맹자의 구원을 거절한 배신자이다. 마땅히 피눈물을 흘리게 될 것이다."
양신은 그런 말을 하는 심정은 이해가 되어 자신의 소견을 밝혔다.
"고구려 국왕에게 큰 배신감을 느끼실 것입니다. 그렇지만 모든 일의 원인을 고구려 탓으로만 돌릴 수는 없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양신의 외람된 말에 힐리는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하긴 나라를 망친 내가 누굴 원망할 수가 있겠나? 다만 국가를 개혁시키겠다는 의욕이 너무 지나쳤던 나에게서 그 화근을 찾을 일이지."
힐리는 끝내 반성하는 태도를 보이고 말았다.
양신도 멸망의 원인을 힐리에게만 국한시킬 일만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거기엔 돌궐의 역대 가한들이 후계자를 세우려는 과욕에서 비롯된 일이었다. 그로 인해 가한의 유고시 족장들은 새 가한을 추대하는 과정에서 번번이 세력다툼을 벌였고 그건 갈등과 혼란은 빚어 내부적인 안정을 해칠 분열로 이어졌다.
힐리는 도리어 그런 병폐를 근본적으로 고치겠다며 부자 승계를 더욱 강하게 추진했다. 그러나 유목민의 전통은 용납이 되지가 않을 일이었다. 아들인 타문에게 승계를 시키려다 내부 분열만 극대화시키는 결과를 빚은 끝에 멸망까지 당하고 말았다.
"양신, 저넨 중원 땅에서 지금 교역을 하고 있다지?"
"예, 여양에 상포를 두고 장사를 하고 있습니다."
"장사가 잘 된다니? 재물도 상당히 모은 걸로 알고 있네."
"저는 북방의 여러 나라는 물론 백제와도 교역을 하고 있습니다."
양신의 대답에 힐리는 뜻밖의 말을 꺼냈다.
"나는 뒤늦게 자네를 다시 보게 되어 대단하다고 감탄을 하네."
"절 다시 보게 되셨다면 어떤 면을 두고 말씀을 하십니까?"
"나는 전부터 자넬 만만한 사람으로 보지는 않았네. 내가 관직을 주겠다는 걸 거절하고 장사를 하겠다고 해서 괘씸하게 여겼지. 그러나 나중에 알고 보니 보다 큰 야망을 품고 있는 사람일 줄 누가 알았겠는가?"
"칸께서 말씀을 하시니 해명을 드리겠습니다. 관직을 사양했던 이유는 남의 신하 노릇을 하는 게 얼마나 부질없는 짓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왜 부질없는 짓이란 말인가?"
"을지문덕님에게서 그 이유를 찾게 됩니다. 수국의 침공을 막기에 고군분투로 싸우셨건만 국왕에게 독살을 당하고 마셨지 않습니까?"
"나는 자네가 장사를 하는 이유는 큰 야망을 지녔기 때문일세. 옛 갈사국의 왕손으로 조상의 나라를 재건을 하겠는 야망 말일세."
힐리의 말에 양신은 잠자코 만 있었다.
"옛 갈사국은 고구려에 멸망한 나라가 아니었던가? 그대는 부디 고구려를 무찌르고 창업에 성공하길 바라겠네. 조상의 원혼을 풀고 을지문덕님의 한도 달래드릴 수가 있다면 그보다 더 좋은 일은 없겠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자네는 먼저 재물을 축적하고 장사를 하면서 각 처에 둔 무문에서 문생들을 길러내고 있는 매우 중요하고도 필요한 일이니 계속해야 하네."
"저로선 열심히 해보려고 하고 있지만 여간 어렵지가 않습니다."
"무엇보다 자네가 하려는 창업은 고구려 땅에선 쉽지 않을 것일세."
"솔직히 말씀을 드리자면 말갈족 땅을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
"어느 종족이건 간에 쇠퇴와 융성은 반복되긴 마련이나 말갈족은 아직까지도 통합을 못해보고 혼몽과 침체를 벗어나질 못하네. 그런 점은 자네에겐 호재가 될 수가 있으므로 자네의 성공할 가망성을 크다고 보네."
"칸께선 어떤 면에서 가망성이 크다고 보십니까?"
"지금은 한족이 다시 흥기하는 시기일세. 때문에 동돌궐은 멸망을 면치 못했고 고구려 역시 쇠망의 길로 접어들었다고 보고 있네. 그런데 당은 말갈족은 관심 밖이라 자네의 노력에 따라 기반을 잡기가 쉽겠네."
"저는 이미 말갈 땅에도 무문을 세워 문생들을 길러내고 있습니다."
"참으로 잘한 일로 기대감이 클세."
힐리는 당보다 더 고구려에 악감정을 품고 노골적으로 반감을 드러내는 터라 양신의 야망을 부추기려고 했다. 거기엔 호리소코루 도장을 맡고 있는 타문이 문생들을 장악해 나라를 재건시킬 바람이 깔고 있었다.
"자네는 호리소코루에 도장을 열고 타문을 사범으로 앉혔을 뿐만 아니라 도장에 드는 모든 경비를 대줘서 나로선 감사와 기대가 매우 클세."
양신은 그러는 힐리의 속마음을 모르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타문을 포용해서 자신의 뜻을 이루는데 도움을 얻고자 함이었다.
"저는 그 일을 놓고 칸께 당부를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무슨 당부인가?"
"제가 호리소코루에 도장을 연 게 당에 알려지지 않아야 합니다."
"나도 잘 알고 있으니 자넨 말갈족에 대한 공을 들이기에 힘을 쓰게."
"그렇게 하겠습니다."
양신의 대답을 듣고 힐리는 한숨을 내쉬었다.
"나도 지금은 반성이 크다. 누대에 걸친 성세에 젖어 안주와 안일에 빠져 든 결과 멸망을 초래하고 말았다. 자네의 말처럼 나는 고구려를 등한시했던 점이 없지도 않은데 그게 어리석었던 일임을 뒤늦게 깨닫네."
힐리는 그런 말을 하면서 다른 걱정이 있었다. 그 이유는 지난해 돌리 가한이 자진해 당으로 들어와 이세민의 보호를 받기 때문이었다. 앞으론 돌리와도 화해를 하는데 양신의 도움을 얻을 필요성을 느꼈다.
"칸께 조언을 구하고 싶은 게 또 있습니다."
양신의 말에 힐리는 의아한 표정으로 반문했다.
"어떤 조언을 구하려고 하는가?"
"저는 앞으로 서역과 교역을 시작할 길을 열고자 합니다."
"서역 교역은 큰 수익을 낼 수가 있어 해 볼 만하지."
"각처의 도장들을 운영하는데 많은 경비가 들어 그럽니다."
"그럴 테지만 쉽지가 않을 일일세. 왜냐하면 오가는 길에 있는 여러 나라들이 통행세를 요구해서 자칫 헛장사를 할 수도 있기 때문일세."
"그래도 시작을 해보려는데 그 일도 당이 모르게 해야 하겠습니다."
"옳은 생각이나 비밀 유지가 쉽지 않을 걸세."
"끝내는 알게 되게 되겠지만 최소한 자리를 잡을 때까진 모르게 하렵니다. 자리를 잡고 나면 그다음엔 무슨 방책을 세우려고 합니다. 그런 저는 칸께 서역 교역에 관한 조언을 해주실 것을 청합니다."
"내게서 어떤 조언을 구하려고 하는가?"
"먼저 서돌궐과 교역을 시작할 길을 텄으면 합니다."
"서돌궐과 하게 되면 곧 당에 알려지게 되고 말 걸세."
"왜 그렇습니까?"
"자넨 전에 서돌궐을 오가던 교역 상단에 몸을 담았지 않았는가? 때문에 자네 신분은 바로 노출이 될 수밖에 없네. 거기다 지금은 서돌궐이 당에 복속을 한 처지라서 자넬 감춰주려고 하질 않을 것일세."
"타문을 앞세우면 어떻겠습니까?"
"나는 타문이 도장의 일만 맡았으면 좋겠네."
힐리의 대답을 듣고 양신은 다른 말을 꺼냈다.
"서역과 교역은 주로 소그드 상인이 주도하는 걸로 알려졌습니다. 칸께선 소그드 상인들에 관해 아시는 바를 들려주셨으면 합니다."
"서역에 근거지를 둔 소그드 상인들은 일찍부터 동쪽 세상과 서쪽 세상을 잇는 교역의 개척자들일세. 때문에 그들은 동서 교역로에 걸친 여러 나라들과 두루 우호관계를 다져두고 있네. 때문에 동서 간의 교역로는 그들에게 장악을 당한 것이나 다름이 없다고 봐야 하네."
양신은 전에 고비사막에서 만났던 소그드 상인 에몬을 떠올렸다. 그가 다시 장사를 시작했을지는 알 수가 없으나 알아보고 싶었다. 그런데 힐리는 타문을 위해서라도 양신의 교역이 잘 되길 바라 입을 열었다.
"전에 돌궐족이 흥기한 원인이 어디에 있었는지 아는가?"
"어디에 있었습니까?"
"교역품 중 가장 수익이 큰 물화를 취급했기 때문일세."
"수익이 가장 큰 물화는 어떤 것입니까?"
"무기일세."
"철제 무기를 말씀하십니까?"
"철제 무기보다 더 중요한 물화는 활과 화살이었네."
힐리는 그런 대답을 하고 설명을 덧붙였다.
세상엔 전쟁이 없는 때가 없다. 그 원인은 약탈에서 비롯되었지만 점차 영토 확장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그런 전쟁은 병력 동원과 엄청난 경비가 들게 마련이었다. 때문에 때론 얻는 것보다 잃는 게 더 큰 역효과도 빚을 수도 있었다. 그에 비해 교역은 비용도 적고 수익도 꾸준히 거둘 수가 있으므로 어느 나라이건 매우 중요시했다. 특히 중원 땅이 오랜 내란을 겪는 동안에 고구려와 동돌궐은 교역으로 얻는 많은 이익을 국가의 재정을 뒷받침하는 데 썼다. 그런 교역 중 가장 막대한 이익을 낼 수가 있게 바로 무기 거래였다.
양신은 설명을 다 듣고 큰 흥미를 느끼게 되었다.
"무기가 큰 수익을 낸다지만 저는 그 방법을 몰라 알고 싶습니다."
"무기는 전쟁의 필수품이다. 그런데 갑자기 많은 양을 확보하긴 어렵다. 그럴 경우는 타국에서 사들이지 않으면 안 되는데 그럴 땐 파는 쪽이 우위에 서므로 부르는 게 값이라 그만큼 수익은 커지게 되네."
양신도 동돌궐이 고구려 무기를 많이 의존했던 걸 알고 있었다.
"동서돌궐은 철정이 부족한 형편인데 어떻게 무기 교역을 했습니까?"
"고구려가 무기를 대고 동돌궐은 그걸 받아 주로 중계 교역을 했네."
"무기 거래는 주로 중원 땅을 상대로 했었습니까?"
"중원보다 서역과 하는데 중점을 두었네."
힐리는 그때부터 서역과 했던 무기 거래에 관한 설명을 했다.
서역에선 지난 1백여 년에 걸쳐 끊임없이 전쟁이 일어났다. 때문에 동서돌궐은 주로 사산제국을 상대로 무기를 팔았다. 특히 소요되는 무기들 중엔 화살이 주 종목이었다. 화살은 대부분 말갈족이 생산을 하고 고구려가 그걸 수합해서 동돌궐에 넘겼다. 동돌궐은 그걸 다시 서돌궐로 넘기면 사산제국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동돌궐의 멸망으로 그게 중단되었다. 당의 눈치를 보는 고구려가 못해 사산제국은 구입할 데가 없어졌다.
"사산제국은 어디에 있습니까?"
"그 나라는 서역에 있네. 거기서 더 먼 곳엔 비잔티움이란 나라도 있다. 양국은 2백여 년에 걸쳐 전쟁을 지속해서 끊임없이 공급을 했었네."
"사산제국은 화살을 만들지 못합니까?"
"사산제국이라고 왜 못 만들겠는가? 워낙에 많은 화살을 소모하게 되어 많이 사들여야만 했네. 그런데다 근래엔 이슬람 군의 침공이 격화되면서 더욱 다량의 화살을 확보해야 하게 되었네. 그런 형편에 공급처가 없어지고 보니 여간 어려움이 크지 않네. 대량의 화살을 확보해야만 하므로 공급할 수만 있다면 사산제국의 보화를 전부 쓸어올 수가 있네."
양신은 그 말에 큰 관심을 갖게 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저는 한번 해보고 싶은 마음이 생깁니다."
"무기 거래는 국가 간이나 할 수 있지 개인은 매우 힘들 일일세."
힐리가 고개를 저었지만 양신은 미련을 떨칠 수가 없었다.
"서돌궐과 손을 잡고 할 방법을 찾을 수는 없겠습니까?"
힐리는 또 무겁게 고개를 저었다.
"서돌궐도 그걸 절실하게 바라고 있지만 어렵게 되었네."
"왜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당의 눈치를 봐야 하는 데다 사산제국과 관계가 너무도 나쁠세."
"사산제국과 관계가 너무 나쁜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서돌궐은 한때 이슬람 군이 값을 더 쳐주겠다는 제의를 받고 그쪽에도 화살을 넘겼네. 적국에 무기를 넘기는데 사산제국이 어찌 가만히 있겠는가? 그건 그렇고 자네가 개인적으로 서돌궐과 거래를 했다간 이용만 당하고, 억울함에 처해도 보복과 사정을 할 처지도 못 되지 않는가?"
양신은 그런 말을 들었지만 화살부터 대량으로 확보할 생각만 했다. 예로부터 말갈족의 석촉(石鏃) 제작은 유명했다. 고구려는 말갈족에 철촉(鐵鏃)을 대주고 생산을 시켜 동돌궐에 넘겼던 것이다.
힐리는 생각에 잠긴 듯한 양신에게 말했다.
"서역과 교역은 무기가 아니어도 큰 수익을 낼 물화는 많네. 고가품을 취급하면 무기에 버금갈 수익을 낼 수가 있네. 자넨 영양에 근거지를 두어서 여러 면으로 유리할 걸세."
"저는 일단 서역을 한번 가본 뒤에 계획을 세우겠습니다."
양신의 대답에 힐리는 또 조언을 했다.
"서역으로 물화를 이동시키는 경로는 여럿이 있네. 그러나 교역로마다 서돌궐을 비롯해 여러 나라들이 버티며 자기네 지경을 통과라는 통행료를 요구하네. 특히 초행자들에겐 과다한 통행료를 요구해 불리한 점이 많으므로 그런 일도 미리 알아보고 행하는 게 좋겠네."
"제가 알바 본 바 북방엔 넓은 땅이 끝없이 펼쳐지고 사람들이 전혀 살지 않는 땅도 있다고 하니 새로운 길을 개척하는 방법도 찾겠습니다."
"자네처럼 대망을 품은 사람은 모험심도 강하므로 잘할 것이네만 인적이 드문 땅을 통과할 땐 도적떼로 큰 위험에 처하게 될 수도 있네."
"제가 만든 상단의 대원들은 상당한 검술을 지니고 있습니다."
"하긴 자네는 여러 면에서 용의주도하고 강력한 문생들의 뒷받침을 받게 되어 무슨 일이든 성공할 가망성이 매우 클 걸로 보네. 나는 자부심이 큰 자네에게 한 가지 묻어보고 싶은 게 있네."
"어떤 것을 말씀하니까?"
"자네가 서역과 교역을 하려면 근거지를 어디에 둘 것인가?"
"당이 모르게 하려면 호리소코루가 좋지 않겠습니까?"
"그런가? 되도록 가라록이 알지 못하게 해야 할 점도 유념하게."
"그렇게 해야 되겠습니다. 저는 서역 교역에 타문도 참여를 시켜 함께 활로를 찾아볼 생각입니다."
"타문은 도장을 관할하는 일에만 집중하게 해 주면 좋겠네."
양신은 힐리가 타문을 배제시킬 것을 자꾸 요구하는 속셈을 확인한 뒤 작별했다. 그리고 그때부터 전에 동돌궐에서 만났던 소그드 상인 에몬의 근황을 알고자 구려촌 상단으로 하여금 수소문을 시켰다.
협야노는 새 장가를 들고 아들까지 낳아 단꿈에 젖어 지내고 있었다. 그가 고구려에서 데려온 수하들도 대부분 가정을 꾸렸고 해상 교역에 종사하면서 양신의 매우 큰 신임을 받고 있었다.
양신은 협야노에게 은밀히 지시를 했다.
"협야노, 곧 출행을 해야 되겠네."
"대인께선 또 어디를 가시렵니까?"
"나는 등주 포구에 교역 선단의 근거지를 한 곳 더 마련할 계획일세. 그러기 위해서 등주의 수군 제독을 만나려고 하네. 자네도 백제로 출행을 할 때가 되었으니 함께 움직여 보세."
"그렇지 않아도 대인을 뵙고 떠날 참인데 그렇게 하겠습니다."
"나는 먼저 구려촌을 들렸다가 등주로 가겠으니 거기서 만나세."
양신은 연로해진 석부는 병석에 자주 누워 들여다보고 갈 생각이었다.
"석부 촌장님을 보려고 가시는군요?"
"그럴세. 석부 촌장님을 뵙고 등주로 가겠네. 자네가 등주에 도착할 시간에 맞추어 나도 그곳에 당도할 것일세."
"대인어른의 말씀대로 하겠습니다."
이튿날 양신은 목제와 영지를 데리고 먼저 구려촌으로 향했다. 구려촌에 당도해 석부를 병문안했다. 그런데 호리소코루를 다녀온 상단이 말갈과 거래를 하고 있는 자양(仔佯) 상단에 관한 소식을 전했다.
"대인 어른, 자양의 상단이 백돌부에서 억류를 당했습니다."
백돌부는 지난해부터 상단에 통행료를 요구하고 있었다.
양신은 자신의 대처가 늦었다는 생각인데 석부가 우려를 표했다.
"양대인, 그건 심각한 문제일세. 무슨 대책을 세워야 하겠네."
"촌장님, 저는 등주의 일을 보고 바로 백돌부로 가보겠습니다."
양신은 바로 구려촌을 떠나 등주로 향하면서 영지에게 물었다.
"영지, 중원 땅으로 올 때 등주에서 만난 분이 있다고 했지?"
"예, 신라에서 온 대세라는 분인데 이번에 찾아뵐까 합니다."
"대세라는 분은 스님인데 신라의 왕족이라고 했던가?"
"그렇습니다. 이제야 말씀을 드리지만 그분은 본국에서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실패한 뒤 중원 땅으로 몸을 피해 온 것입니다."
"신라에서 반란을 일으켰다고?"
"임나부 거수였던 구미님과 함께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그런데 그분은 대부님이 전에 남가라에서 큰 활약을 하셨던 걸 알고 계십니다."
"내가 전에 남가라에 있었던 걸 알고 있다고?"
양신은 옛 안나 가락국의 왕손인 구미가 모국의 재건을 도모했다가 실패해서 왜국으로 떠난 걸 비로소 알게 되었다. 영지는 말을 이었다.
"대세님은 등주에서 승려를 자처하면서 지내시나 아직도 신라 왕위에 대한 야심을 버리시지 않고 권토중래의 꿈을 꾸신다고 들었습니다."
그 말을 듣고 양신은 관심이 더 커지지 않을 수가 없었다.
"등주에 가면 나도 대세라는 사람을 한번 만날 생각이다."
"대부님, 그러시면 제가 모시고 가겠습니다."
"등주는 중원 땅에서 한삼국 출신들이 가장 많이 사는 곳이다. 그런데 본국에서 살 때완 다르게 출신지를 가리지 않고 서로 간에 적대감도 없이 함께 잘 어울려서 사는 걸로 알고 있다. 나도 등주에 갈 때마다 그 점을 느껴 한삼국 출신들을 한 덩어리로 묶어 보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양신은 전과는 많이 달라져 매사에 적극성을 띠었다. 무슨 문제가 생기면 과단성 있고 신속하게 헤쳐 나갔는데 등주에도 새 근거지를 마련할 생각이었다. 그의 머릿속엔 벌써 대세를 앞세워 등주의 한삼국인들을 한데 묶는데 앞세울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두 사람이 등주에 당도했으나 협야노의 배는 아직 도착하질 않았다. 양신은 대세부터 먼저 만나보려고 영지를 앞세워 암자를 찾아갔다. 작고 초라한 암자는 포구에서 가까운 위치라 양신은 관심이 컸다.
암자로 들어가서 영지의 소개로 대세를 만났다.
"스님, 처음 뵙겠습니다. 여양에서 장사를 하는 양신입니다."
"양대인, 반갑소. 나는 영지를 통해 대인에 관한 얘길 들었소."
"스님께선 제가 남가라에 있었던 걸 어떻게 아십니까?"
"양대인이 무슨 사연으로 남가라에 왔는지는 모르겠으나 당시 남가라를 떠들썩하게 만든 장본인데 내가 그걸 왜 모르겠소? 뛰어난 검술로 왜인들의 못 된 버릇을 고쳐놓았고 그 명성을 내들 왜 못 들겠소?"
양신은 대세가 늙었지만 기개가 있어 보였다.
"스님께서 신라를 떠나신 사연을 영지한테 들었습니다."
"양대인은 구미님과 인연이 깊기도 하지만 나는 영지로부터 큰 야망을 품고 있는 분이란 말을 듣고 한번 만나보고 싶었던 참이요."
"스님의 말씀을 들으니 저도 잘 왔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스님께선 혹시 여기서도 구미님의 소식을 듣고 계십니까?"
"구미님은 왜국의 축자 포구에 야장방을 차렸다는 소식을 들었소."
"아, 구미님이 건재하시군요?"
양신은 구미가 야장방을 차렸다는 말에 더욱 관심이 커졌다.
"신라와 고구려는 적대 간이나 나와 양대인은 조국에서 살 수가 없게 된 처지요. 사정이 달라진 만큼 앞으론 서로 잘 지내보도록 합시다."
양신은 그 말을 듣고 크게 반겼다.
"저도 그러길 바라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스님께선 이곳에서 살고 있는 한삼국인들에 대해서 어떤 생각을 하고 계십니까?"
그 질문에 대세는 망설임이 없이 대꾸를 했다.
"이방인들인 데다 같은 핏줄들끼리므로 함께 잘 살기를 바랄 뿐이요."
"스님께서 그런 말씀을 하시니 저로선 여간 반갑고 기쁘지 않습니다."
"양대인도 이곳 한삼국인들에게 관심을 많이 가져 주셨으면 하오."
"스님, 저도 그럴 생각에 찾아뵌 것입니다. 다행히도 한삼국인들은 타국 땅에선 본국에서처럼 원수지간으로 지냈던 일이 얼마나 부질없는 짓이었음을 모두가 깨달아 마음이 편하고 희망도 생길 것 같습니다."
"양대인, 나도 이곳 한삼국인들 간에 적대감을 거둔 것을 보고 놀랍기도 하고 신기하다는 생각까지 들면서 무엇보다 기쁘기 그지없소."
대세가 동의하는 말을 하자 양신이 물었다.
"스님께선 한삼국인 모두의 뿌리가 어디에 있다고 보십니까?"
"나로선 옛 부여국인 것으로만 알고 있소."
"그렇습니다. 모두는 부여국에 뿌리를 둔 한 핏줄이 아닙니까? 그런데 위정자들은 자기들만을 생각하는 너무 어리석은 놀음에 말려든 백성들만 고통을 받아야만 했습니다. 이제 타국 땅으로 흘러온 사람들끼리라도 서로 의지하고 도와가면서 큰 어려움을 덜어내면 좋겠다는 생각입니다."
"양대인은 참으로 좋은 말씀을 하셨소."
"그래서 저는 스님과 의논을 드려보고 싶습니다."
"나와 무슨 의논을 할 게 있으시오?"
"저는 이 암자를 한삼국인들이 모이는 장소로 만들었으면 합니다."
"그렇게 되면 좋겠으나 무슨 방법이 있겠소?"
"저는 이 암자 곁에 창고를 하나 세우고 싶습니다."
"창고를 지어서 무엇에 쓰려고 하오?"
"해상교역을 할 물화를 보관할 창고로 쓰려고 합니다. 창고를 지어 각종 물화를 보관하게 물화를 들이고 내는 데 많은 인력을 필요로 합니다. 이곳의 한삼국인은 변변한 생업이 없어 고생들이 심한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해 생활에 보탬이 되게 했으면 합니다."
대세는 관심이 커지는 가운데 표정이 밝아졌으나 이내 난색을 표했다.
"창고에 물화를 쌓아 두면 도적들의 표적이 될까 두렵소."
"그 문제를 해결할 방법도 있습니다. 중원 땅의 절들은 호신을 하고자 무예를 연마하는 데가 많습니다. 창고와 함께 도장도 지어서 한삼국 젊은이들을 모아 검술을 가르치려고 합니다."
"검술을 가르친다? 그건 좋지만 젊은이들이 검술을 배우자면 사례금을 내야 해서 부담이 크오. 더욱이 이곳의 한삼국인은 거의가 삶에 쪼들림을 겪고 있는 형편들이라 그럴만한 여유가 없으니 그렇소."
"저는 사례금을 받지 않고 숙시까지 제공을 하겠습니다."
"그게 가능한 일이겠소?"
"저는 다른 데서도 많은 도장들을 세웠지만 어디서도 사례금을 받지 않습니다. 무예를 지닌 젊은이는 앞가림을 할 수가 있고 기도 펴게 됩니다. 뿐더러 실력이 뛰어나면 출세를 하는 데도 큰 도움이 됩니다."
"그건 그렇겠소만."
대세는 그보다 암자를 증축해서 번듯한 절을 만들고 싶었다. 그런데 한삼국인들이 일자리를 얻고 젊은이들은 무료로 검술을 배울 수 있다면 그것도 여간 바람직하지 않아 마음이 끌렸다.
두 사람은 그에 대한 논의를 해서 공사비는 양신이 대고 공사 진행은 대세의 심복인 구칠이 맡기로 합의를 봤다. 양신은 며칠간을 더 암자에서 머물면서 일을 추진할 준비를 했다.
등주 포구는 당의 수군 기지가 있을뿐더러 백제와 신라 간에 해상 교역을 하는 중심지였다. 양신은 여러 면으로 편리성이 커서 앞으로 도장과 창고를 짓게 되면 여러 가지로 앞 일이 잘 풀릴 것 같았다.
협야노의 배가 도착했다. 양신은 협야노에게 광명개를 하나 지니게 하고 수군제독인 묵구가 있는 관청으로 갔다. 묵구는 광명개를 선물로 받자 기쁨에 차 융숭한 태도를 보였다.
묵구는 이세적의 소개장을 읽고 양신을 다시 보게 되었다. 막강한 권력자인 이세적이 후견인인 데다 여양의 으뜸 호상임을 알고 은근히 관심이 커졌고 가까이할 필요성을 느꼈다.
양신은 등주 포구를 자신의 배들이 모항(母港)으로 쓰게 해 줄 것을 청했다. 묵구는 허가를 해주고 포구를 관할하는 관리를 불러 배들이 정박할 전용 자리까지 배정하는 조치를 취했다.
두 사람은 오랜 지기처럼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 여러 얘기를 나눴다. 양신은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뒤 이번엔 북방으로 향했다.
그 무렵 호리소코루에선 무문의 도장 곁에다 창고의 증축 공사를 벌였다. 동돌궐이 무너진 뒤 도처에서 약탈자들이 횡행해 불법천지를 이뤘고 사람들은 여간 고통을 받지 않았다. 갈사무문의 문생들은 불법자들을 퇴치시켜 평온과 안정을 되찾게 만들었다. 때문에 사람들은 양신에 대한 고마움과 기대가 커서 환영 일색이었다.
양신은 호리소코루에 당도하자 우선 주변의 야장방들 실태를 조사했다. 그 결과 돌궐인 야장들의 철촉을 만드는 기술이 떨어지는 데다 화살대로 쓸 자재를 구하기조차 힘들었다. 천상 화살 제작을 맡길 데는 말갈족으로 정하고 그리로 가서 해결책을 모색해 볼 생각을 했다. 거기선 파루도 데리고 함께 떠났다.
화살촉 생산은 말갈 7부 전체가 참가해야 효과가 컸다. 그래야만 말갈인 전체가 공평히 생계에 보탬이 될 수가 있다. 때문에 전체적인 유대관계를 구축할 구상을 해야만 했다. 그런데 화살대 제작은 재료가 수림 속에 무궁무진으로 얻을 수가 있으나 화살촉의 대량 공급이 불가능했다. 그렇다고 철정을 얻고자 고구려를 상대로 접촉을 할 수도 없었다. 그런 어려움이 있는 가운데 먼저 백돌부의 사건부터 해결을 봐야만 했다.
양신은 호리소코루에서도 서역 쪽에 관한 정보를 모았다. 그리고 전에 동돌궐에서 만났던 소그드 상인 에몬을 다시 만나고자 다른 상단들과도 접촉해 소식을 계속 알아보게 했다.
호리소코루를 떠나 백돌부로 향했다. 가는 길에 북3국의 보위부들을 차례로 들렸다. 그리고 각 보위부마다 모종의 지시를 내리고 계획에 차질 없도록 철저한 당부하고 나서 백돌부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