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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치한 삶이 좋아 Nov 06. 2022

소박하다

날마다 같은 곳을 오가다 보면 나도 모르게 멍 때리며 걷는다. 발은 급한 상황이 아니면 굳이 속도를 낼 필요가 없으므로 팔자를 그어 가며 왼발 오른발 번갈아 내딛는다. 주마간산으로 주변을 지나치니 나의 망막 깊숙한 데까지 스미어 맺히는 것은 그리 많지 않다. 설상가상으로 히스테리적인 일이 나의 신경을 쥐락펴락하는 경우엔 공중부양 상태로 걷기 때문에 그땐 아무리 좋은 산책로를 지나더라도 더 건성건성이다. 벌어지고 있는 미세한 변화에 나의 반응은 무디고 둔하기 십상이다.  

그날도 그랬다. 가을색이 농후한 어느 날, 텃밭에서 보내는 작은 소리를 제 때 감지하지 못하고 알아채지 못했었다. 낮아지는 기온 탓에 작물이 야금야금하니 별 감흥이 없다. 20여 평 정도 되는 밭을 쭈욱 둘러보는데  2분 정도면 족하다. 김장용이 대부분이라 종류도 봄보다 적은 편이기도 하고. 다행히 건강하게 자라고 있는 쌈채소류 덕분에 호사를 누리고 있는 중이다.


치커리 잎 사이로 연보랏빛 꽃 하나가 보인다. 

'뭐지?'

무지렁이인 내가 그 이름을 알턱이 없다. 네이버로 검색하니 '치커리 꽃'이란다. 잎들 사이에 우렁각시처럼 잠복하고 있다가 더는 참을 수 없어 자태를 드러냈는가 보다. 내가 눈치코치 없긴 해도 최소한 2~3일 전에도 그 꽃망울의 존재는 거기 있었을 텐데 그걸 알아채지 못했다니.

'원 참, 내가 그렇지 뭐.' 그렇다고 자책골 넣은 기분까진 아니었다. 

초면이다. 

하긴 내가 처음 본 꽃이 이것뿐이겠나. 

'치커리 꽃이 이렇게 생기었구나!' 하는 감탄사가 나도 모르게 꽃과 대면을 한 순간 입 밖으로 새어 나온다. 들국화와도 비슷하고 수수하니 참 이쁘다. 발견할 당시엔 사진으로 담는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터덜터덜 집으로 돌아오니 꽤나 아쉬웠다. 못내 참지 못하고 사진기를 챙겨 기어코 인증샷 한컷 찍고 돌아왔다. 이게 뭐라고. 

'이쁘다'. 

봄부터 여름 그리고 가을까지 잎사귀를 잘라 쌈으로도 샐러드로도 열심히 맛있게 먹고 있는 치커리는 생각보다 강하다. 지난 뜨겁고 습했던 여름도 잘 버텨내었다. 쉽사리 물러지지 않아 텃밭이 빈궁했던 시기에도 치커리 덕분에 신선한 잎을 먹을 수 있어 좋았다. 그래서 더 이쁘다.


자식 키우 듯 노심초사까진 아니더라도 자주 손길을 건네고, 발자국 소리를 들려주니 작년보다 더 풍성하니 좋다. 이 시기쯤이면 초록잎을 같이 먹자고 애벌레가 폭풍 성장을 한다. 나에게 애벌레는 동네 조폭이다. 내 구역에서 허락한 적도 없는데 떡하니 똬리를 튼다. 나무젓가락으로 집어 내기도 하고  친환경 약물을 뿌려서 개체수를 줄여 본다. 효과는 그냥저냥이다. 더러더러 구멍이 난 이파리에 거무튀튀하니 수수 알 모양들이 군데군데 보인다. 알고 보니 애벌레의 배설물이었다. 애벌레 알인 줄 알고 난리법석을 친 기억을 떠올리면 지금도 어이없고 웃기긴 하지만. 애벌레를 보고 소스라치게 놀라고 징그러움에 몸서리쳤던 지난해와는 달리 내성이 생겼는지 아니면 맷집이 강해졌는지, 올해는 다르다. 발견 즉시 장갑 낀 손가락으로 낚아채 잽싸게 땅바닥으로 패대기를 친다. 애벌레가 순간 기절 상태이고, 몇 분이 지나야 정신이 드는지 꿈틀거린다. 허둥지둥 제자리에서 버둥버둥댄다. 나는 참 못 됐다. 왜 통쾌한 거지. 내 속에 이런 잔인함이 있었던가. 또 나는 놀라고. 중년의 아지매는 정말 겁이 없다, 용감하다, 무소불위하다.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린 꼴이지만 나름 나의 행위에 대한 치졸한 변명을 한 줄 더하니 마음이 조금 가벼워진다. 그런 내가 조금 창피하고 우습다.


끝물로 매달려 있던 호박과 오이는 정말 못 생겼다. 못 생긴 게 비지떡은 결코 아니다. 통설은 그냥 썰일 뿐. 중년의 아지매 복부처럼 울퉁불퉁하니 모양새는 그래도 씹는 맛이 아삭하고 연하다. 비록 진딧물과 한바탕 전쟁을 치렀지만 여름부터 밭에 갈 때마다 하나씩 수확해 오는 손맛은 말해 뭐하겠나. 오이로 무침해서 먹고, 대충 잘라서 고추장 듬뿍 찍어 먹어도 신선하니 맛있고. 호박 부침도 좋고, 거기에 막거리 한 잔 걸치면 진수성찬이 부럽지 않다. 만만하지만 그 맛은 결코 고리타분하지 않다.  


 작은 행위 하나가 나의 일상을 풍성하게 하니 좋다. 텃밭에서 소박하지만 꽤나 화려한 이야깃거리가 만들어지니 심심할 겨를이 없다. 아들 딸이 자립해 각자의 삶을 꾸리느라 집을 떠나니 나의 보금자리는 너무도 넓다. 휑하니 벌판과도 같다. 하마터면 갈팡질팡 허부적 거릴 뻔했다.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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