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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치한 삶이 좋아 Nov 08. 2022

노 땡큐.

남편에게 특별한 일정이 생겼다. 제주도로 1박 2일 짧은 나들이 간다고. 얼마 전 퇴근 후 직장 동료들과 한 잔 곁들인 저녁식사 자리에서 으샤으샤하는 분위기에 얼결 나온 말인데 진짜 가게 된 것이라 했다. 안 봐도 비디오다. 그 때 분위기가 어땠을지.


예전에도 그랬던 적이 많았다. 남편은 주사는 없지만 술을 먹고 난 후의 행동들을 나열하자면 12권 대하소설이 될 것이다. 아마도. 생각하니 재미있을 것도 같고. 웃긴다. 해볼까나.

여하튼 같은 동네 혹은 직장 아니면 형 아우하는 이들이 모이는 자리를 사양하는 법이 없다. 결단코. 이 남자. 식사로 가볍게 시작하지만 그 뒤가 문제다. 서로들 한 잔 두 잔 부어라 마셔라 하며 술에 푹 절여진다. 하다하다 눈은 게슴츠레 앞을 주시하고 벌렁벌렁대는 코를 씰룩거리며 한 마디씩 질러댄다. 술에  몸이 지배 당하게 되고 술이 명하는 대로 행할 수 밖에. 얼토당토 않은 공약들을 마구마구 쏟아낸다. 기세 등등한 허세는 오픈런처럼 여기저기서 튀어 나온다. 제대로 몸도 가누지 못하는 것은 그래도 참을만하다. 질질 흐르는 콧물이 입으로 흘러들어가도 모르고 침이 튀기어 앞에 놓인 음식 그릇에 떨어지는 것을 보고 있자면 정말 드러워서 참을 수가 없다. 남편만 그런게 아니다. 술자리가 무르 익으면 경계가 무너지는가 보다. 어찌보면 그런 자리에서나마 자신에게 씌워저 있던 포장지를 걷어 버리고 싶었는지도, 전쟁터 같은 삶을 그렇게라도 위로 받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마음이 아프네.

호들갑스럽게 남발하던 말들 99%가 공수표가 되어도 뒷날 아무도 개의치 않는다. 술병이 나서 고생하느라 그럴 수도. 하고 싶던 말들을 술에 기대어 내뱉고 나니 맘이 한결 편안해진걸까. 모르겠다.  


이번은 달랐다. 함께 했던 사람들 중 한 분이 술이 덜 챘던 모양이다. 진짜로 제주 나들이길이 성사된 것이다. 직장 동료들과 잠시 다녀 올 거란다. 나도 제주도에 가고 싶다고 말하기 전에 묵시적으로 차단을 당한 셈이다. 

누군가 말하겠지 '같이 가지!'라고. 남의 속도 모르고. 남이 내깔리는 한마디에 상처 받기도 싫고 모냥 빠지는 것 같아서 아예 남편에게 말도 꺼내지 않았다. 나도 가고 싶다. 너무.


명퇴한 직장 동료 한 분이 제주도에 터를 잡고 있어 초대를 한 모양이다. 작은 귤밭까지 있다니 '아 좋겠다. 부럽다'라는 탄성이 절로 터졌다. 노후를 제주섬에서 보낸다... 환상이다. 남의 이야기인데 상상만으로도 내가 흥분된다. 왜지. 아지매의 심적 충동은 양은 냄비 속 물 끓 듯 속도 조절이 안된다. 너무 충동적이다. 앞뒤 안가리고. 늙다리 아재들과 동행을 한다는 건 무리지. 남편이 함께 해도 그 자리는 뻘쭘해서 가자고 해도 내가 마다할 판이다. 대신 나는 나대로 도모할 생각이다. 남편이 없는 이틀을 어찌 보낼까. 솔직히 설레인다. 

시골 살이, 특히 제주 살이는 갬성이다. 경험이 없으니 그저 부러움의 대상이다. 남편도 그런 삶을 꿈꾸고 있을 것이다. 선뜻 그러자고 못하는 나도 남편도 벙어리 냉가슴 앓듯 그러고 있다. 명분이 소멸되면 우리도 한 번 쯤 도전해 보지 않을까. 아직은 도시인으로 살아야 하는 명분이 분명하니 그에 준하게 살아가면 된다.

육지 손님 맞을 준비하고 계신 그 분은 지금 설레고 있을까. 기다림에. 제주에서 먹자고 보내 준 음식 리스트를 보니 아마 그 분도 손꼽고 있는가 보다. 출발을 앞둔 남편은 날짜가 다가올 수록 얼굴빛이 화사해진다. 짧은 일정이니 아쉬울 법도 할텐데 콧구멍으로 바람 넣을 생각에 너무 좋아라 한다. 

빳빳한 오만원권 몇 장 봉투에 넣어 출발하는 남편에게 건네주며 간지나게 생색내어 볼까한다. 

잘 다녀오시라구. 무사히 다녀오시라구. 

그리고 나는 무의도로 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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