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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치한 삶이 좋아 Nov 16. 2022

말해도 괜찮아요.

한 카페에 열 명 남짓 중년의 남녀 한무리가 앉아 있다. 남자는 남자대로, 여자는 여자대로 갈라서 담소를 나누고 있는 중이다. 언제부터인지 알 순 없지만 중년배 무리가 카페에 들어가려면 왠지 눈치를 보게 된다. 카공족이 늘면서 주변에서 눈치를 주는 것도 아닌데 자리를 잡을 때면 괜시리 구석진 자리를 찾아보게 되고, 겨우 적당하다 싶은 위치를 찾았다 해도 지근 거리에 책을 펴친 사람이 있다면 일단 망설이게 된다. 다시 주변을 둘러 본다. 비굴하니 테이블을 몰아 붙이면서 눈치없이 바닥을 끄는 소리도 만들고 덜거덕 거리는 소리도 만들어 버린다. 잠시 어수선하다. 미안함이 솔솔 올라오는데 왜 미안하지. 한 둘이 이용할 때보다 많은 숫자이다 보니 자연스레 벌어지는 현상임에도 왜 눈치를 봐야하는지. 

담소를 나누기 위한 장소이고 정당한 가격을 지불한 자리이건만 요즘 카페 분위기는 덩어리 이용객들에겐 까칠스럽기만 하다. 주문할 때도 쉽진 않다. 일단 메뉴판에 있는 음료에 대해 사실 잘 모른다. 나이 탓을 하는 것은 아니지만 생소한 용어가 즐비한 메뉴판을 읽어 가다 보면 머릿 속은 이미 메뉴판멍 상태이다. 뭔가 세련되어 보이기는 하다만 이용하는 사람에 따라선 난수표나 다름 없다는 걸 카페 주인은 알려나. 그렇게까지 어려운 용어를 쓸 이유가 있을까. 뜨아, 아아를 제외하곤 그 이외 것들은 이름이 너무 길고 복잡하여 주문자 자신들이 이미 경험했었던 맛일지라도 긴가민가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주접스레 메뉴에 대해 물어 보아도 시원한 답은 돌아오지 않는다. 메뉴판에 열거되어 있는 명사가 꼭 그렇게 외래어 일색이고 호명하기 까닥스러워야 하는지 이유를 모르겠다. 메뉴에 대한 호불호는 뒷전이다. 만만하지 않은 가격도 그렇고. 한끼 식사비와 견줄 만하니 맛에 대한 확신이 없다면 늘상 먹는 것으로 정하기 마련이다. 선택의 여지는 그들에게 협곡일 수 밖에 없다.


요즘 지어진 아파트 이름만 봐도 그렇다. 길고 낯선 외래어인 경우가 많아 시골 사는 노부모님이 결혼한 아들집에 찾아 오기가 점점 어려워지니 부모의 방문이 그리 달갑지 않으면 아파트 이름이 외래어로 된 곳에 살라는 우스개 소리도 나오는 게 아닌가. 


메뉴판이 따로 없으니 일행 중 하나가 휴대폰으로 사진을 찍어 카톡방에 올린다. 개인의 취향에 맞게 고르고나면 거의 인원 숫자랑 비슷한 메뉴가 선정된다. 주문대에서 메모된 메뉴들을 읊는 동안 그 주문을 받는 아르바이트생의 얼굴은 짜증이 나는지 살짝 일그러진다. 선택한 종류도 다양하고 사이즈도 일일이 물어야 하니 그럴 수 밖에. 생각해 보면 우리가 주눅들 일도 아닌데 흐르는 세태를 탓해 무얼 하겠나.  주문한 음료가 나오면 더 가관이다. 우유가 들어간 종류는 더 헷갈린다. 쟁반 위에 놓인 컵을 가리키며 직원이 명명하는데 쟁반을 들고가는 이는 뒤돌아 자리로 오는 도중 이미 음료 이름은 휘발된 상태다. 

음료를 준비하는 이가 포스트잇으로 몇 가지만이라도 메모로 표시를 해주었더라면, 그러한 고객을 위한 매장 직원들의 세심한 배려가 있었다면 자리에 와서 음료로 인한 혼선은 없었을 텐데... 주문자 측에서 먼저 요청했더라면 우왕좌왕하는 작은 소동은 없었겠지만도. 이래 저래 나이 듦은 늘어나는 불편함에 적응하고 익숙해져야 한다니 씁쓸하다. 


어수선하니 음료를 앞에 둔 여자들은 60 언저리 나이테이다. 젊은 날부터 휘감고 있던 나이테 스펙은 더이상 짙은 울림이 없다. 학력, 직업, 재력 등 그러한 것들이 이야기 소재로 나오지 않는다. 

끼인 세대답게 노부모 봉양에 어려움을 토로하며, 손주 양육에 대한 솔직한 심정을 허심탄회하게 털어 놓는다. 동병상련의 마음으로 말하는 이의 이야기에 귀 기울인다. 경중이 있을 뿐 어느 누구도 예외적이지 않아 보인다. 고령화라서가 아니다. 아무리 준비를 한다해도 늙음을 피할 수 없으며, 늙음은 자신을 인지하지도 곁에 있는 사람을 인지하지도 못하게 되니 자력으로 생을 꾸려가기 시간이 갈 수록 어렵게 된다. 결코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라 맘 먹고 건강에 신경 쓰고 살아왔더라도 피할 수 없는 길이고 보니 자식들 힘들게 하는 상황도 생긴다. 부모님 오래 사시길 원치 않는 아들 딸이 있을까. 단지 긴 병에 효자 없다는 말에 어느 정도 공감되기 때문이고, 때에 따라선 어느 한 사람의 희생도 불가피하기 때문이다. 그 자리에 있던 두 세명의 여자들에게도 90세 전후의 노부모가 계신다고 했다. 집에서 모시는 집도 있고, 인근에 거처를 마련해 보살펴 드리기도 하고. 식사를 챙겨드리거나 집을 관리하는 일은 그나마 수월하다고 한다. 경증 치매가 오면 정말 환장할 일이 부지기수라고 한다. 피할 수 없어 겪어 내고 있지만 나날이 힘듦이 더해진다고 한다. 여자는 그 힘듦을 조금이라도 덜어 내려는 듯 자신의 일상을 말로 쏟아 낸다. 얼마나 힘들면. 나중에 복 받을 거란 사탕발림 같은 위로가 얼마나 도움이 될까. 조용히 들어 주고 마음을 같이 하는 수 밖에. 심란한 표정들이 여자들의 얼굴에 고스란히 베어 나온다. 남이 일이 아니니.


<아내와 나 사이>
아내는 76이고

나는 80입니다 

지금은 아침저녁으로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걸어가지만 속으로 다투기도 많이 다툰 사이입니다 

요즘은 망각을 경쟁하듯 합니다

나는 창문을 열러 갔다가

창문 앞에 우두커니 서 있고

아내는 냉장고 문을 열고서 우두커니 서 있습니다

누구 기억이 일찍 돌아오나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억은 서서히 우리 둘을 떠나고

마지막에는 내가 그의 남편인 줄 모르고

그가 내 아내인 줄 모르는 날도 올 것입니다 

서로 모르는 사이가

서로 알아가며 살다가

다시 모르는 사이로 돌아가는 세월

그것을 무엇이라 하겠습니까 

인생?

철학?

종교?

우린 너무 먼 데서 살았습니다. / 이 생진 시인  

달리는 차 안에서 켜 둔 라디오로 양 희은씨가 잔잔히 읽어 가는 걸 듣다가 발췌함.



그 여자들은 이미 갱년기 문턱을 넘은 쭉정이다. 손주가 이쁘긴 한데 막상 봐달라고 하면 도망가고 싶단다. 베이비 씨터를 고용하라고 말하고 싶어도 그 비용을 대신 내 줄 만한 재력이 안되니 이래라 저래라 뭐라 말하기도 어렵단다. 언제까지 열심히 최선을 다해 살아야 하는지. 제 한 몸 건사하기도 힘든 나이로 접어드니 힘든 자식들 생각하면 그 고충을 덜어주고 싶어도 이미 골병들어 뼈마디가 온전하지 않아 선뜻 그러마 하지 못한다고 말한다. 얄팍해질 대로 얄팍해진 멘탈이 또 어떠한 상황을 초래할 지도 모르겠다고 한다. 글을 쓰고 있는 나도 미지수이긴 하다. 아직 그 단계로 접어들진 않아 시간이 있지만 딱히 명확한 결론을 내긴 어렵다. 



이제 좀 홀가분하게 살려나 했는데 발목을 잡는 일에 속 시원히 자신의 생각을 밝히기도 어렵다고 한다 그 여자들. 지쳐 보인다. 노부모와 손주의 굴레에서 절대 자유롭지 않은 여자들은 겁쟁이지만 비난 받아선 안된다. 


곧 김장철이다. 배추와 무우랑 실갱이 하다 삭신이 쑤시는 통에 파스를 전신에 도배하다하다 어쩔 수 없이 물리치료 받으러 정형외과로 가겠지. 무리한 일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전문의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지만 그 여자들 앞에 놓인 현실에 뾰족한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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