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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치한 삶이 좋아 Nov 25. 2022

미루지 말기

나다움은 내가 지키지요.

홀로 가려니 주저주저하다 눈 질끈 감고 실행하기로 맘 먹었다. 무의도 여행길. 

체력이 예전만 못하고 장거리 운전이 달갑지 않으니 속절없이 마음은 갈래길에서 서성인다. 

'굳이 거기까지'라는 생각마저 고개를 들고.

점점 귀찮아진다.


호기심이 많아 자칭 뚜벅쟁이라 할 만큼 걷기를 선호했던 나였고, 구석구석 다니다 보면 눈썰미가 남다른  덕을 톡톡히 보기도 했던 나였다. 간혹 분위기가 심상치 않은, 아우라가 느껴지는 장소를 만나게 되는 행운이 따르기도 하고. 그런 날은 '심봤다'라고 하긴 그렇고 '계탔다' 라고 표현하면 당시 나의 기분에 대한 적절한 묘사가 될라나.

본능적으로 카메라를 들이대고 메모하고. 

기억 장치에 그것들을 잘 저장하며 그 곳을 머물다 간다.  

좁쌀만한 점이라도 좋으니 

훗날 그 곳을 다시 지날 때 기억 회로를 타고 온 나의 체취를 느낄 수 있기를 기도하는 마음으로 그 곳을 머물다 간다.  

시간이 흐른 후 그 곳이 핫플레이스였음을 우연히 알았을 땐 여느 시상식에서 트로피라도 검어쥔 양 어깨를 한껏 부풀리어 우쭐거리기도 하며 

그 쏠쏠한 재미가 몸의 고단함까지 희석 시킨다 말하면 남들은 잘 믿지 않는다. 살짝 권해보지만 부메랑으로 되돌아온 것은...

'너의 열정에 박수를 보낸다. 아직 짱짱한 너의 체력이 부럽다'는  메세지를 보내는 것으로 나와 주변인들과의 공조는 이루어지질 못했다.

그로인한 마음의 동요는 없다.

상관없다고 이미 나를 세뇌시키고 다녔으니까. 

동행도, 오롯이 혼자여도 단짠의 맛은 공존하기에 굳이 콜라주 조합을 꾀하려고 애쓰지 않는다.

나는 홀로 북치고 장구치고 춤사위 한판 벌이는 모노드라마만으로도 안분지족한 삶을 사랑한다.


찌릿찌릿 미세하게  

몸이 보내는 신호가 감지되는 순간부터  스스로 발목을 잡아두기 시작했다. 어느 시점인지 가늠도 안되고... 총량의 법칙이라도 통한걸까. 과유불급을 못해서 제동이 걸린걸까.

내 몸 사용서대로 작동이 잘 안되었다.

나는 한동안 비련한 사람이 되어 내 몸을 애틋해 하며

짙은 열병앓이로 두서너 해 동안 나는 나이테에 줄을 긋고만 있었다. 희노애락의 평균치에서 절대 벗어나지 않는 삶을 한치 의구심 없이 받아들이며 그렇게 지내 왔다. 


'몸이 잘 산다는 건 편안한 것에 길들여지는 거고,

마음이 잘 산다는 건 편안한 것으로부터 놓여나 새로워지는 거고,

몸이 잘 살게 된다는 건 누구나 비슷하게 사는 거지만,

마음이 잘 살게 된다는 건 제각기 제 나름으로 살게 되는 거니까' 

/ 박완서님 동화집 , <자전거 도둑 >에 실린 '시인의 꿈'에서 발췌.


남편이 제주도에 다녀 온다는 말에 엉뚱하게 플라시보 효과가 난 모양이다.

'나도 가고 싶다.'

'섬을 걷고 있는 나를 얼마나 꿈꿔 왔는가'라는 생각에 저절로 

손은 네이버 검색창을 누르고 있었다. 

'내가 이 시간을 얼마나 손꼽고 있었는데...  갈팡질팡질에 시간만 허비했네. 애궁.'

그래서 번뇌는 짧게하고 일단 출발하는 걸로. 무의도로.

출발 전날 밤, 

가방을 챙겨 두고 잠을 청했지만 설레이는 마음이 커서 잠은 점점 멀어지기만 했다. 이런 걸 소녀 감성이라고 하나. 감사한 일이다.


'묻지마 감성이 짙은 투덕투덕한 아지매에게 가끔은 소녀이기를 허락해 주소서, 

오늘 지금 내 생애 가장 젊고 제일 아름다운 시간임을 깨달게 하소서,'






아침시간이라고 하기엔 조금 이른 오전 5시 30분경, 

창 너머 세상은 아직  동이 틀 기미가 없다. 안개까지 자욱하게 퍼져 있다. 

밥 두 숟가락 뜨고 (밥심은 절대적이므로) 집을 드디어 나섰다. 안개가 낀 탓에 초긴장 상태로 운전대를 잡았다. 

차라리 잘 되었다. 많은 생각을 하지 않아도 되니까. 


사실, 얼마 전까지

나는 참고 살아야만 되는 줄 알았다. 묵묵히 내 소임을 다하면 되는 줄 알았다. 

그러다 결국 터지고 말았다. 설겆이 하다 말고 고무장갑을 벗어 던지고 집을 나와 무작정 차를 몰았었다. 

이유는 나도 몰랐었다. 단지 내가 섬처럼 느껴졌을 뿐이었다. 

식사 후 과일을 먹으며 담소를 나누고 있던 가족이 황당해 할 것은 당연지사였고 그럼에도 나의 안중에 가족은  없었다. 

누굴 탓할 여지도 없었다. 

그들에겐 잘못이 없었으니까.

내가 웃는 그들의 얼굴에 어퍼컷을 날린 것이다.

누굴 향한 것인지 명확하지도 않은 분노가 일었다. 

눈 앞이 까매지고, 가슴은 벌렁벌렁이고, 눈물이 속절없이 흐르기만 할 뿐이었다. 

말을 하고 싶었지만 어찌된 건지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나의 정체성마저 흐릿해진다 생각하니 더 죽을 맛이었다. 나의 임파선을 탄 광열한 세포 분열이 나를 괴물로 만들어 버리려는 듯 했었다. 

한 동안 고통스러웠다. 못 견딜 만큼. 

열병처럼 나의 시간을 갉아 먹던 그 고통도 시간이 지나니 차츰 덜하다.


나로 인해 소란이 이는 것이 싫어서 그랬다. 그리고 소극적이기도 수동적이기도 한 삶을 선택해 왔다.

거기서부터 나의 사고는 어그러지기 시작했고 

어이 없게도 내가  가만 있으니 나를 가마니로 보는 것이라는 생각에 나는 더 치를 떨었다.

내가 좋아하는  것과 하고 싶은 것을 드러내지 않아도 거저  알아 주는 줄 알았다. 

나의 치명적인 오류였다.

대오각성하고

'나 전달법'으로 나를 피력하고자 연습하고 또 연습했다. 

다행히 진심이 통한 모양이다. 나의 가족이 나를 궁금해하고 내 앞에 선택지를 나열하기 시작했다. 눈치 빠른 나의 가족에게 감탄 중이다. 

고맙습니다.



바다를 접한 광명항에 차를 주차하고 운전하느라 잔뜩 뻣뻣해진 관절을 풀어야 했다. 한적한 어촌에 불쑥 찾아 온 이방인을 거부하지 않고 따스한 아침 햇살로 맞아 주니 걸음도 잘 걸리었다. 


'물에 몸을 담그고 편안히 휴식을 취하는 상상을 해 보자, 엄마 배 속에서 열 달을 보내는 아기의 무한한 평화로움이 연상되지 않는가. 스트레스가 심할 때면 엄마 배 속으로 돌아가 쉬고 싶은 욕구를 강렬하게 느끼는 사람도 있다. 이렇듯 우리는 처음부터 양수 속에서 헤엄치던 태아였고, 태아는 그 상태를 최고의 안락한 상태로 여긴다'

ㅡ 발터 슈미트, <공간의 심리학>에서 발췌.



그래서 나도 섬을 품은 바다로 가고 싶었나 보다. 탁 트인 바다는 걸림도 없어 너무 시원했다. 

가슴 속 응얼이가 녹는다. 잠시일지라도 그 허락됨이 참 좋았다. 

바다에 오기 참 잘했다. 

또 다른 바다는 어떨까 궁금하다. 

미세먼지가 있어서 희뿌연 하늘도 그 순간은 아련하니 그리 좋을 수 없다. 

간만에 내가 나에게 제대로 선물을 주었다는 느낌이 드니 그 또한 너무 좋다.  

이제 섬의 민낮을 구경해 볼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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