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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치한 삶이 좋아 Dec 02. 2022

두 여자

전화벨이 울린다. 휴대폰 액정에 '동서'라는 글자가 선명하게 보인다. 

연차 내고 하루 집에서 쉴 거라 하더니 내게 노크를 해 온 것이다. 


"동서님 ~ 안녕하셔용!" 나는 시치미 떼고 아무렇지도 않은냥 너스레를 떤다. 

"송구스럽게 어인 일로 이리 일찍 저에게 전화를 주셨나용!"

"호호호 형님~ 지금 잠에서 깼는데 몸이 말을 안 듣네요. 

형님 오늘 뭐하세요? 나 오늘 연차라 쉬는데 커피나 한잔 하실래요?"

라는 동서의 제안에 하던 일이 있으니 다음으로 미루자 하고 싶었으나 

이미 나의 입 밖으로 

"오홍, 좋지!"라는 말이 튀어나오고, 

이내 동서는

"그럼 20분 후에 형님네 아파트 앞으로 갈게요."라며 전화를 끊었다.


그 시각 나는 섞박지 담으려고 무를 썰던 중이고, 

'이것만 다하면 올해 김장철 나의 행사도 끝이다'라는 생각에 욱신거리는 뼈마디가 보내는 시그널도  관절 통증약으로 덮어버리고 젖 먹던 힘까지 동원해 용을 쓰던 참이다. 

꼴랑 두 식구 먹을 분량을 마련하는데 나의 엄살은 한 해 한 해 더 지랄스럽다. 


사실 내가 먼저 동서에게 전화를 하려다 그만두고 일을 벌인 상태라 괜스레 후회가 된다. 

음식이란 게 시작했으면 끝을 보아야 하는데 재료 썰다 말고 접어야 하니 좀 심란스런 게 아니다. 

나의 내적 저울질이 좀 이상스러울 수도 있지만 

동서와 시간을 같이 보내는 일은 내게 '쉼'과도 같아 난 당연히 그쪽을 선택한다.


다행히 무를 썰던 중이라 비닐봉지에 담아 단단히 밀봉을 한다면 

무에 바람 들 염려는 하지 않아도 되니 

두툼한 김장봉투를 찾아내서 

다라이에 담겨 있던 무들을 비닐봉지에 쏟아붓고 꽁꽁 여미여 

냉장고에 넣고 외출 준비를 하면 되는 것이다. 


집 밖으로 나온 이상 주부로서 해야 하는 일에 대한 생각일랑 꼭꼭 접어 둔 채 

온전히 자유인으로 한량끼 한껏 뿜어내며 즐기기로 맘먹고 아파트 입구에서 동서를 기다린다.

그동안 나는 인근 카페를 검색하며 거리랑 분위기, 메뉴까지 둘러보는데 

생각지 못한 문구가 눈에 들어온다.

'영업 전' 또는 '곧 영업 시작'

오전이 얼마 남지 않은 시각인데 이렇게 늦게 영업을 시작한다니... 

하긴 내가 그 시간에 동네 카페를 이용할 기회가 별로 없으니 의아해 할 수밖에. 

인근 저가 커피를 파는 카페는 이른 시각부터 주문하려는 사람들이 줄을 서고 있는 것을 

자주 보다 보니 여타 카페들도 다 그런 줄 알았다. 


그렇게 네이버 창에 정신이 팔려 동서의 차가 코앞에 멈춘 것도 모르고 있었다.

"형님~ 뭐하세요?"라는 소리가 들려 나는 화들짝 놀라고

"으응, 아니, 왔어!" 대충 얼버무리는 입모양으로 인사치레를 했다. 

일단 동네를 벗어나자는 나의 제안에 동서를 닮은 앙증맞은 자동차는 두 여자를 싣고 도로 위에 동그라미를 그리며 속도를 낸다.

 


나의 동서는 나보다 다섯 살 젊다. 

그녀와 내가 연을 맺은 지 스물일곱 해가 지나갔다.

강산이 두 번이나 변하고 또 다른 변화를 앞둘 만큼 긴 시간을 마찰 없이 어우렁 더우렁 지금까지 왔다. 

다섯 살이라는 물리적인 나이는 두 여자 사이에 아무런 영양가가 없다. 

그저 켜켜이 쌓인 세월만큼 두 여자 사이의 정겨움은 두텁고 서로에게 의지가지가 되어 왔다. 

한 집안의 두 남자를 각기 만나 호적 관계로 맺어진 인연은 

동서지간이라 부르고.  

전혀 다른 삶을 살다 어쩌다 같은 흐름 속으로 스며들어 인연을 맺고 관계를 유지해 온 두 여자는

사소한 정분이 나길 주저하지 않았고 자기를 상대에게 아낌없이 내어 주었다.


봄날 분홍스런 벚꽃과 연두스런 잎사귀가 하늘거리면 두 여자는 앞서거니 뒤서거니 황홀경에 빠지길 즐겼고,

여름날 주룩주룩 빗줄기가 수직선을 긋는 창가에서 두 여자는 진한 라테를 같이 홀짝거리며,

가을날 영롱한 블루 스카이를 나란히 머리에 이고 걷다가 나무 의자에 앉아 계절의 숨결을 느끼기도,

겨우내 하얀 눈이 주변을 덮기라도 하면 이심전심으로 서로에게 전화를 건다. 

감탄사를 연발하면서도 이내

아지매 둘 어휘력이 짧아 어쩔 수 없이 그 연발도 순식간에 사그라든다.

열혈 수다 삼매경에 빠진 채 까맣게 시간을 보내느라 힘들텐데 전혀 지치지도 않는다.

무슨 할 말이 그리도 많은지. 


어쩌면 산다는 건 말야

지금을 추억과 맞바꾸는 일

온종일 치운 집안 곳곳에

어느새 먼지가 또 내려앉듯

하루치의 시간은 흘러가

뭐랄까 그냥 그럴 때 있지

정말 아무것도 내 것 같지 않다고 느껴질 때

가만히 그대 이름을 부르곤 해

늘 그걸로 조금 나아져 

.

.

.

오늘이 멀어지는 소리

천천히 내린 옅은 차 한잔

따스한 온기가 어느새 식듯

내 청춘도 그렇게 흐를까

뭐랄까 그냥 그럴 때 말야

더는 아무 것도 머무르지 않는 게 서글플 때

숨 쉬듯 그대 얼굴을 떠올려봐

늘 그걸로 견딜 수 있어         

.

.

/  양희은 <늘 그대> 노랫말 중에서






두 여자가 대동 단결할 수 있었던 건 

'카페 투어' 때문이다. 

가끔 시간이 허락될 때 분위기 좋은 카페를 찾아가 잡다한 이야기 나누며 서너 시간을 함께 했다.

그러면서 두 여자는 서로를 더 잘 알게 되고 더 조심스레 곁에 있고자 했다. 

친구인 듯 친구가 아닌 사이로.

친구보다 오히려 속내를 털어놓기가 편한 두 여자. 


그렇게 스토리가 쌓였다. 두 여자 사이에.

얼마나 많은 고민거리를 끌어안고 사는지, 얼마나 무거운 어깨 짐을 짊어지고 있는지를

말하지 않아도 듣지 않아도 느낄 수 있었다.


시집이라는 연결고리가 느끼게 할 불편함보다는 

동질감이 앞서고 

때론 연대의식까지 자연스레 발동되다 보니 그 무게를 나눠질 방도를 찾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감사한 일이다.


뷰가 끝내 주는 북한강변 카페 창가엔 오늘도

여전히 다른 두 여자가

기꺼이 같은 곳을 바라보고 서로의 힘듦을 희석시키고 있다.


'동서야 우리 앞으로도 쭈욱 친하게 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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