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심으로 라면을 먹으려고 식탁에 앉으려던 찰나였다. 학교에서 전화가 걸려 왔다. 무슨 상황인가 겁이 덜컥 나는 마음으로 전화를 받았고 믿어지지 않는 소식을 들었다.
“서윤이가 눈 맞춤도 안 되고 의식이 없어요. 빨리 와보세요.”
제주도에 사는것을 처음으로 후회했다. 처음 간 병원에선 검사를 다 해보았지만 원인을 찾지 못하고 제주시에 있는 더 큰 병원으로 옮겨 갈 때 너무 무섭고 두려웠다. 딸아이가 숨을 쉬지 못해 기관삽관 한 채로 숨을 쉬어야 하는 상황이 믿어지지 않았다.
나에게 딸아이는 많은 의미가 있는 아이였다. 오래전 내게 상의 없이 합가를 결정한 그와 갈등이 있던 무렵
임신 초기인 나는 유산한지도 모르고 한 달가량 지냈었다. 수술받는 날 혼자 병원으로 가면서 슬픔과 미안함에 눈물이 그치지 않았다. 다시 내게로 와달라는 기도만 했었는데 공교롭게도 해만 바꿔 같은 날에 출산하였으니 어찌 다시 왔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있을까.
“하느님 왜 그러시나요? 저에게 힘이 되어 주는 딸입니다. 이 시련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세요.”
혼자 양육해 온 엄마의 어려움에 대해 모르는 아들 때문에 섭섭함과 어려움이 깊어지고 속상한 일이 많았던 터라 힘들어 하던 엄마 모습을 보면서 늘 위로해 주던 딸이 고마웠다. 내가 어렸을 때 힘든 엄마 모습을 보면서 속 깊은 딸이 되었던 것처럼 딸아이도 똑같았다. 그렇게 힘이 되는 딸아이가 영문도 모르는 일로 중환자실에 누워서 인공호흡기를 달고 있다는 것이 꿈 같았다.
첫아이도 태어나면서 선천적으로 아데노이드 비대증을 앓고 있어서 코로 숨을 쉬기 어려워 늘 입을 벌리고 숨을 쉬었다. 잦은 호흡기질환으로 병원신세를 져야했을 때 그는 이러저러한 이유로 내 곁에 없었다. 그 어려움을 나 혼자 감당해야만 했다. 코감기라도 걸리면 밤에 잘때 무호흡 증상이 생겨서 혹여나 죽을 까봐 밤 보초를 서는 생활을 6년 동안 했다. 이런 어려움 때문에 아데노이드 비대 수술을 많이 하기도 했지만 그는 큰 병도 아니고 어리기 때문에 전신 마취하는 수술을 반대했다. 그러면서도 아이와 밤에 잠을 자면서 돌보는 일은 출근해야 하므로 할 수 없다고 했다.
아들은 자신의 어린 시절을 모르니 엄마의 희생과 헌신이 어떠했는지 알지 못하고 사춘기를 지나면서는 알려고 하지도 않는다. 모두가 잠든 시간 깨어나 코밑에 손가락을 대보고 숨이 나오는지 수시로 확인하는 엄마의 마음을 알지 못한다. 언제쯤 알게 될까. 투쟁하듯 울부짖은 끝에 아데노이드 비대증 수술을 하게 되었고 경과가 좋아서 수술 다음 날 퇴원했다. 아들은 그간 못잔 잠을 보충하기라도 하듯 깨지도 않고 내리 잠만잤었다.
나는 중환자실 앞 의자에 기대어 딸아이를 떠올리며 잠시 그 옛날의 긴박하고 초조한 상황을 떠올렸다. 나에게 두 아이는 말할 것도 없이 소중한 존재들이고 내가 살아가야 할 이유이기도 했다. 자녀를 잃어버릴 수 있다는 가능성이 코 앞까지 바짝 다가왔을 때 너무 두렵고 무서웠다. 예외적으로 위급한 상황이라 그에게 알렸다. 그는 병원에 왔다가 밤이 되자 집으로 가야 한다고 했다. 다시 혼자가 되어서 기다렸다.
중환자실 보호자 대기 의자에서 누워 하루를 보냈다. 피곤함이 밀려와도 잠을 잘 수 없었고 하염없이 묵주기도를 드렸다. 어떻게 나에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는지에 대해 참담한 심경으로 울부짖다가 어느 순간 마음 속에 기도를 드리게 되었다.
“주님, 원망하지 않겠어요. 조금 일찍 먼저 가 있는 거니까요.”
고통이 고통으로 느껴지지 않은 순간이 찾아왔고 마음이 담담해졌다. 내게 주어진 모든 상황을 신앙적으로 바라볼 수 있도록 나를 이끌어 주신 것도 같다. 바로 그 무렵 중환자 실에서 호출이 와서 들어가 보니 오래전부터 깨어 있었단다. 엄마가 너무 보고 싶었다고 했다. 환자복 입은 딸을 오래 안고 울었다. 사랑한다고, 엄마 사랑한다고, 내가 듣고 싶었던 그 말을 해주었다. 그리고 내가 잠시 자리를 비운 틈을 타서 그림 한 장을 그려 두고 곤히 자고 있었다. 엄마 사랑해, 도돌이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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