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사이, 필답 대화의 서글픔.
95세 우리 아버지.
임종 몇 시간 전까지 대화는 필답으로 이어졌다.
남동생에게 늦은 밤, 전화가 왔다.
아버지가 편찮으신데 식사를 못 하신다며 이런 일은 처음이니 한번 다녀가란다.
남편과 함께 다음날 새벽 동이 트기 전에 출발했다. 서울에서 전라도 화순까지 이젠 너무 멀다. 장장 4시간 30분을 그것도 도로가 밀리지 않고 잘 달렸을 때 일이다.
장인어른 뵙겠다고 한 달에 한 번씩 빼먹지 않고 장거리 운전을 강행한 남편. 대단하고. 새삼 고맙다. 무려 18년을 다녔다.
아버지를 뵙는 순간 얼마 남지 않았구나를 직감했다. 출발은 잠깐 다녀오리라 마음먹었다. 하지만 한 달이라는 시간이 흘러 임종까지 지키게 될 줄은 생각도 못 했다.
워낙 철저하게 관리하셨고 건강하셨기에.
생각지 못했던 시간은 아버지도 딸인 나도 고통스러웠지만 한 달이라는 시간은 세상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추억을 만들어줬다.
평상시와 똑같은 음식을 드셔도 목이 타들어가 물과 콜라로 연명하신 게 21일.
마지막 일주일은 아무것도 못 넘기셨다.
그 와중에 너희는 끼니 굶지 말고 챙겨 먹어라! 그래야 간병할 수 있다며 지켜보고 계신다. 음식을 못 드시는 아버지 앞에서 잘 먹는 척 연기를 하고 돌아서서 소화제로 속을 달랬다.
눈 뜨시면 하시는 말씀, 절대 병원 가지 마라.
“하루라도 빨리 집에서 죽을 수 있게 도와다오.”를 몇 번씩 반복하셨다.
애처로움과 안타까움에 가슴이 져며왔다.
조금이라도 고통을 잊고 한 번이라도 더 웃을 수 있게 해드리고 싶어 아버지 진심이야? 병원 가시고 싶은걸 반대로 말씀하신 거 아닌가? 했더니 정색을 하시며 농담 아니니 새겨듣고 그대로 해야 한다!
혹여 내가 정신줄 놓더라도 병원은 안된다.
연말에 남편이 코로나로 일주일, 뒤따라 나도 심하게 아팠다. 하필 코로나 후유증으로 힘들어하던 시기여서 몸은 많이 지쳐 있었다.
하지만 한편으론 이 시간이 얼마나 고맙고 감사한 시간인가! 아버지의 마지막 남은 시간을 그동안 함께 해왔던 추억들을 꺼내가며 대화하고 웃고 울 수 있었으니!
20대 후반에 결혼해 70을 넘기면서 이렇게 오랜 시간 아버지와 함께 한 적이 있었나?
여행을 좋아하시는 아버지를 모시고 집 근처 철쭉꽃 만개한 만연산 고갯길, 공원에서 열리는 국화꽃 축제. 구순을 넘기신 아버지와 여수 향일암 암자까지 올라가는 도중, 포장마차에서 파는 쑥호떡을 사 먹었던 기억.
신안군에 새로 개통한 천사의 다리까지 장거리 여행도 다녀오셨다.
평소 친구분들과 다니셨던 흑염소탕 집에 식사하러 갔을 때였다. 이젠 그 친구들도 다 가버려 같이 밥 먹고 대화할 사람도 없어야,
혼자 오래 산다는 게 힘들고 외롭다 하신다.
그땐 얼마큼 외로우신지 가늠하지 못했다.
올해 6월 30일 고교동창이며 동네 친구가 세상을 떠났다. 혼자된 외로움과 우울증으로 오래 살고 싶지 않아 했지만 설마 했다.
장례를 치르고 시간이 지날수록 세상에 친구가 하나도 없는 외톨이가 된 느낌.
마음 한구석이 텅 비고 사는 재미가 없어 힘든 나날을 보냈다. 가까운 지인들이 하나 둘 세상을 떠나는 게 두려웠다.
아~ 아버지가 말씀하신 외롭다는 게 이거였구나를 실감했지만 이젠 늦었다.
왜 인간은 닥쳐보지 않으면 공감하지 못할까? 알았더라도 그게 최선이지 않았을까 싶지만,
그때는 최선이라 생각했는데 돌이켜보니 후회가 된다. 자주 시간 내어 아버지 말동무를 해드릴 걸 한 달에 한번 찾아뵙고 할 일 다 했다고 생각한 것 같다.
살아 계실 때 열심히 하면 돌아가신 후 후회가 없을 줄 알았는데 그래도 아쉬움과 회한이 남는다.
아버지와는 스스럼없이 농담도 주고받는 허물없는 사이였다. 가끔은 내가 읽은 책인데 내용이 좋으니 너도 가져가서 읽어봐라! 하시며 책도 빌려주신다. 읽다 보면 밑줄까지 그어 놓고 그 밑에 당신 생각까지 써 놓으신 걸 발견할 수 있었다. 언제나 책과 신문을 동무삼아 외로움을 달래며 사셨다
엄마를 먼저 보내시고 20년 세월을 홀로 생활하신 분이다.
벌써 우리와 헤어지신 게 1년 하고도 반이 지났다. 세상이 무너질 것 같고 슬픔에서 벗어나질 못할 고통의 연속일 거라 생각은 착각이었다. 부모는 땅에 묻고 자식은 가슴에 묻는다는 말처럼 어느새 잊고 사는 것 같다.
늦은 나이까지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 주신 우리 아버지. 그때는 몰랐다. 얼마나 든든했는지를...
기운이 없어 말씀조차 힘들어 보여
“말씀하시기 힘드시면 여기 종이에 적으세요" 했더니
좋은 생각이다. 하시며, 힘들게 적으신다.
우리 사위랑 작은딸 정말 고맙고 미안하다.
죽어가는 사람 지켜본다는 게 쉽지 않을 텐데…
너희들이 지켜보는데서 죽을 수 있는
나는 참으로 행복한 사람이라 생각한다.
이제는 내가 얼마 안 남은 거 같구나.
평소에 그리 단물이 이젠 독약보다 쓰다.
오늘 저녁이나 내일이 마지막일 거 같다.
끝까지 함께해 줘 고맙다. 고생했다.
말씀하시며 처음으로 눈물을 보이셨다.
마지막까지도 정신은 맑으셔서 난 너희들이 있어 행복했다. 하신다. 절대 병원 데려가지 마라 당부도 잊지 않으시며,
고독사를 생각하시며 빠른 시간에 내 죽음을 자식들이 먼저 발견해야 주변 사람들한테 욕먹지 않을 텐데… 많은 방법을 연구해 봤는데 부질없는 걱정을 했구나! 이렇게 옆을 지켜주는 자식이 있는데 하셨다.
순간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자식이 다섯이나 있는데 얼마나 외로우셨을까? 아무렇지 않은 척 혼자 별걱정을 다 하셨네! 해봤다.
얼마나 가슴을 후벼 파는 말인가!
죽음을 눈앞에 두고도 자식들 걱정이신데 우린 나이 드셨으니까 하며 홀로 계신 아버지 죽음을 당연시 여기고 살았는지도 모른다.
몇 년 전에 당신은 95세까지만 사실 거라는 말씀을 하신 적이 있다. 나이 드신 분이 그냥 하신 말이려니 흘려 들었다. 그 약속을 지키시기 위함이었을까? 떡 드시고 체한 것뿐… 그 길로 음식을 멀리하시며 죽음을 선택하신 거 같다. 끝까지 곧고, 의연하고, 깨끗한 모습으로 자식들에게 짐 되지 않게 가시려고 노력하시는 모습이 안타까웠다.
이젠 모든 거 내려놓고 편해지셔도 될 텐데.
점점 야위어가는 몸에 맞는 바지가 없어 “아버지 편하게 운동복 바지 입으시면 안 될까요.” 했더니 괜찮아! 하신다.
조금도 흐트러진 모습 보이기 싫은 신 거다.
고등학생 시절부터 평생을 변함없는 체중과 허리 사이즈를 유지하셨단다. 평소에도 아버지 허리랑 내 허리 바꿔요. 했는데 이젠 마른 장작처럼 변해버린 아버지 몸을 보며 부러질까 겁이 났다. 얼마나 더 고통을 견디셔야 이 세상 끈을 놓게 되시려나...
생명이란 게 태어나는 고통만큼 죽음도 고통스럽다는 걸 실감했다.
잠을 자려는데 기분이 이상했다. 아버지 닫힌 방문 앞에 쪼그려 앉아 있다 깜박 잠든 사이 무슨 소리가 들렸다. 남편이 내가 들어가 볼게 그냥 자 하더니 비명을 지른다. 혼자서 소변보시고 누우려다 쓰러지신 소리였다. 그 길로 눈동자가 허공을 맴돌며 거친 호흡을 내뱉으시다 30분 만에 숨을 거두셨다. 가실 때도 혼자셨다. 계속 옆을 지켰는데 잠깐 거실로 나온 사이 홀로 눈을 감으셨다. 보이고 싶지 않으셨나 보다.
돌아가신 뒤 몸을 쓰다듬다 발견한 수면제.
날마다 바꿔 입으신 바지 주머니에서 만약을 대비하신 듯 수면제가 한 보따리 나왔다.
얼마나 힘이 드셨을까? 한 번에 먹고 편히 눈 감을까 몇 번이고 망설이셨을 텐데 남은 자식들한테 피해 갈까 실천하지 못하고 참으셨구나 싶다. 아무도 몰랐다. 그 고통스러움을.
아버지 외롭고 고생 많이 하셨어요.
이제 푹 쉬세요. 먼저 가신 이쁜 엄마 만나세요.
**장례를 치르면서**
지혜로운 남편덕에 일사천리로 일이 진행되었다. 아버지와 나눈 대화 쪽지를 버리지 말고 잘 보관해했다. 나중에 증거 서류가 될 거니까.
집에서 사망 시, 119에 신고하면 형사들이 먼저 와서 자연사인지 타살인지 구분하고 사진을 찍었다. 연세가 있으시지만 담당 형사로서 해야 할 일이라며 단서가 될만한 걸 물었다. 아버지와 주고받은 쪽지를 보여줬다.
아~예 죄송합니다. 저희가 할 일은 여기까지입니다. 하며 돌아갔다.
구급대원들이 도착 후, 응급실 의사 사망 확인서를 확인받고 장례식장으로 갈 수 있단다. 동네 큰 병원 들려 확인서를 받고서야 장례식장으로 출발했다.
우리도 요양병원 가지 않고 내가 거처했던 곳에서 살다가 갈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