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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아름다운 시절

기억은 흐릿해져도 마음속에 선명하게 남아 있는 시간들이 있다.
어린 시절 겪었던 김포와 마포, 그리고 그 사이사이의 추억들을 담담히 더듬어 본 이야기다.
맑고 거칠고 따뜻했던, 모두들 가난했지만 정 많았던 그때 그 시절...

지금은 사라졌거나 희미해진 풍경들이지만,
누군가의 기억 속에서도 살짝 스쳐간다면, 그걸로 충분히 행복할 것 같다.


* 김포의 종소리

뎅... 뎅... 뎅...

교회의 십자가 종탑 아래서 울리는 종소리를 따라 들판을 가로질러 걷고 있다

논두렁을 타고 갔던 지름길이었다

아주 어릴 적, 그러니까... 국민학교에 들어가서부터 3년 사이...

멀리 보이는 낮은 언덕 위의 십자가 종탑이 보이는 교회를 향해 종종걸음을 옮긴다

엄마, 아버지와 함께...

그렇게 어려서부터 교회는 열심히 다녔다

너무 어릴 때라 그 교회(아마도 "제일교회"가 아닌가 싶다)에서의 기억은 많이 없지만...

종탑 밑으로 늘어진 줄에 매달려 오르락내리락하며 뎅뎅 거리는 종을 쳐다보며 재미있게 놀았던

나의 모습이 떠오른다

교회는 작고 지붕은 양철판으로, 예배당은 마룻바닥으로 되어 신발을 벗고 들어갔던

아주 예쁜 교회의 모습이 그려진다

그 교회의 아이들(친구)은 생각이 안 나지만 지금은 목회활동을 하고 계신 당시 전도사님?이었는지 하시는 분과 또 한 분의 권사님과 그의 딸과 아들...

주일저녁과 수요일 저녁이면 어른들이 교회가시고 그의 아들, 딸과 나와 내 동생 넷이서 그의 집에 모여 시간을 보냈다

이불을 펴놓고 둘씩 편을 갈라 레슬링 시합도 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마당에선 남자들끼리 오줌누기 시합도 했는데.. 가장 동생이 엄청 멀리 오줌을 누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또 지금 이름이 생각 안 나는 집사님 부부가 있었고 그 집엔 친구와 참 예뻤던

그의 누나 그리고 여동생...

그 친구는 재치가 있고 센스가 넘치는 명랑한 친구였고(40대 중반에 목사님이 되어 내 앞에 나타났다)

그들의 부모와 우리 부모는 오랫동안 친분을 쌓고 있었다

그렇게 그렇게 유년 시절은 김포 시골에서 살며 추억을 쌓고 있었다



* 출생과 마산


황해도 사리원이 고향이신 아버지, 신의주가 교향?이라고 기억하지만 정확 지는 않고... 어머니

아마도 1.4 후퇴 때 고향을 등지시고 부산에 정착하신 후 교회에서 성가대 지휘자와 반주자로 만나셔서 결혼을 하게 되었다나...

부산에서 태어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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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에서 교회의 부속 유치원에 다녔던 기억이... 사진으로도 알 수 있지만 다리를 다쳐 붕대를 칭칭 감고 무용하던 사진이 있다

사실 그 시절에 유치원에 다녔던 것만 해도 대단한 일이었던 것 같은데... 요즘이야 유아원부터 학원까지 중노동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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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중학교 선생님이셨던 아버지.. 아버지가 학교에 가시면 흉내 내느라 머리에 포마드를 발라 넘기고 책 한 권 옆구리에 끼고 가끔 학교에 가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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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시간에 전교생이 모인 운동장에서 안경을 끼신 아버지가 단상에서 애국가와 교가를 부를 때 멋지게 지휘를 하시던 모습도 기억한다

국민학교를 들어가기 전 아버지가 학교를 그만두시고 서울로 올라가 우리는 모두 서울로 갔지만 그곳은 시골과 마찬가지인 김포였다 김포공항 옆은 내가 살아본 최고의 깡촌이었다

방화동인가 개화동인가 이사를 몇 번 다녀서 정확 지는 않지만...

국민학교 입학은 미군부대 통역관?으로 근무하시던 둘째 큰아버지댁에서 원효로에 있는 "금양"국민학교에 입학을 했고 그 집에서 학교를 다니며 토요일에 김포의 가족에게로 갔다 그 후에 김포의 "송정"국민학교로 전학을 하여 본격적인 김포 생활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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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로의 이사와 시골 생활의 추억


아버지는 육군정훈학교에 교사로 직장생활을 하셔 통근버스를 타고 엄청 멀리 출퇴근을 하셨다는 것을 훗날 알았다

김포에서의 생활은 요즘 아이들이야 짐작도 못하겠지만...

겨울은 얼마나 추운지 영하 20도까지 내려갔던 기억도 있다

놀이 문화가 별로 없어 항상 집 밖에서 흙과 돌과 나무를 가지고 놀았다

엄동설한에도 추위를 모른 채 마냥 놀아 손등이 언제나 갈라지고 터져 피가 마를 날이 없었다

연탄불에 물을 데워 손은 담가 불린 다음 터서 두꺼워진 손등을 긁어내곤 했다.

구들장이 갈라져 찢어진 장판지 사이로 연탄가스에 동생이 중독되어 한밤중에 부모님이 동생을 안고 병원으로 내달음질 쳤다는 이야기도 나중에 들었다

언젠가 옆집 중학생 형이 개구리를 잡아 강제로 개미를 먹인 다음 배를 갈라 해부하여 개미를 찾던 모습도 떠오른다

한겨울엔 얼어붙은 논에서 썰매를 타고 잠자는 개구리를 잡아 하늘에 높이 던지면 파란 배경에 대자로 뻗은 개구리의 모습도 기억난다...

화장실... 그때는 정말 뒷간이었다 담벼락을 돌아 뒤로 돌아 완전히 뒤에 있던 화장실이 밤에는 너무 무서워 혼가 갈 수가 없었다

깡통을 주워 구멍을 내고 못을 박아 토막 난 초를 끼워 호롱불처럼 밝힌 후 동생에 들려 같이 화장실을 가던 기억이 난다 끙끙대면서도 "아직 거기 있지?"하고 물었다 혹시 갔을까 봐...

신문 또는 기타 두꺼운 봉투를 조그맣게 잘라 화장실 못에 끼워놓고 한 장씩 빼서 비비면 후들후들 부드러워질 때 뒤를 닦았다 당시는 두루마리 화장지가 아주 귀했으니...

봄이 되면 천지가 논이고 밭이고 들이어서 여러 가지 나물(사실 나물들 이름을 잘 모른다 지금도)과 꽃들이 만발했다 아버지가 마당에 채송화 맨드라미 나팔꽃 등등 여러 가지 꽃씨를 뿌려 아름다운 꽃들을 즐기는 전원생활이었다

잠시나마 시골의 전원생활을 했다는 것은 지금 생각하면 작은 축복이다

한여름엔 기억도 잊힌 친구들과 어울려 비포장 신작로를 따라 한참을 걸어가면 논두렁 옆 너른 수로에서 멱감고 놀던 기억도... 그때야 지금처럼 오염이 안된 흙탕물이라 뿌옇게 흐린 물이었지만 요즘 수영장과 비교가 안 되는 자연친화적인 놀이 공간이었다

집으로 돌아오던 길에 길가의 개에게 엉덩이를 물려 놀랐던 기억..(그때부터 개가 정말 싫다 무섭다)

집은 공항에서 가까워 비행기 소음이 대단했다

하지만 비 오는 날 빗소리에 묻혀 멀리 들리는 비행기 소리 "웅~~"을 빗소리와 함께 구들장에 누워 즐기곤 했다(지금도 비가 오면 그때의 비행기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그러고 보니 마산에서도 어릴 때 개에게 물린 기억이 난다... 원수 같은 개**들...

당시야 마산도 깡촌과 같아서 집 근처에 밭이 많았는데 거름으로 밭의 군데군데 구멍을 판 똥구렁텅이에 빠져 온몸이 똥으로 범벅이 되었던 기억도 뭣 때문인지 팔이 부러져 깁스를 하였던 기억도..(깁스할 때 엄청 울었다 팔을 깁스해 밥을 어떻게 먹냐고.. 어려서부터 내 성격 대단했다. 다혈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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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포 생활에 있어 이사를 몇 번 했던 것 같다 너른 마당이 있는 집에선 닭도(삐약대던 노란 병아리들의 모습이 너무 이뻤다) 있었고 토끼도.. 장독대에 메주를 띄운 간장독과 고추장독도... 옆집 아저씨가 망치로 토끼를 잡던 모습도...

피아노 교습을 하시던 어머니가 늦으시면 쌀을 씻어 밥을 했던 기억도.. 아버지가 퇴근하시면 밥을 차려 드렸다 아랫목 이불속에서 밥을 꺼내...

평소 어머니가 밥 하시는 모습을 눈여겨보곤 했는데... 아마도 나의 여성스러운 감성은 그때부터 형성이 되었나 보다)

옛날 집이야 문풍지가 찬바람을 피하는 모든 것이어서 겨울엔 방안에서도 하야 입김이 나왔다

하~아~ 재미있어 일부러 해봤지 ㅋㅋ

유리창엔 하얀 성애가 반짝이며 아름다운 모습을 연출하면 주먹을 쥐고 눌러 발바닥 모양과 여러 가지 그림을 그렸다

비가 오는 날이면 우산(비닐우산이 대부분이었지만)을 들고 아버지를 버스 정류장까지 마중 나갔다 아버지 손에 들려진 전병 과자 과자를 기대하며...

가을이 오면...

모든 것이 청정한 시절이었으니 벼가 무르익어 노랗게 들판을 색칠하면 메뚜기가 떼를 지었다

휴일엔 온 가족이 들판에 나가 메뚜리를 잡았다(나는 못 잡고 소리만 질렀다 ㅋㅋ 무서워서)

벼 줄기에 줄줄이 끼워 허리춤에 차고 집으로 돌아와 기름을 두른 프라이팬 또는 냄비에 볶아 먹었다

먹을거리가 없던 그 시절엔 최고의 영양만점 간식거리였다 (지금은 고급 안주지만)

추수가 끝나고 겨울이 되면..

들에는 탈곡을 한 볏짚을 탑처럼 쌓아 둔 볏짚단이 군데군데 서있었다

아이들과 그곳에서 중간에 볏짚을 빼고 굴을 만들어 우리의 요새처럼 들락거리며 놀곤 했다

밤하늘에 귀신 불처럼 불덩어리가 원을 그리며 장관을 이루는 쥐불놀이.. 그 깡통 속에서 빠져나온 작은 불빛은 반딧불처럼 수를 놓으며 반짝거렸다

얼어붙은 논에선 아버지가 만들어준 썰매로 얼음을 지치고 팽이치기도 참 많이 했던 것 같다

지금은 동화책 속에서나 봄직하지만...

나의 어린 시절은 이렇게 작은 추억들이 가슴에 머릿속에 쌓여 갔다

누구나 어렵게 살던 그야말로 옛날엔 회충, 요충등... 사람몸에 기생충이 많아 학교에서 일 년에 한 번씩 신체검사를 했는데 대변검사 소변검사 피검사등... 대변은 작은 비닐봉지에 담아 제출하곤 했지만 남의 변을 떠다 내는 친구도 간혹 있었다 ㅎㅎ

심하게 회충이 많은 친구들은 수업시간에 코로, 입으로 나오는 회충을 손으로 잡아 빼기도 하는 경악스러운 모습도 보였다

벼룩, 이도 많아서 밤에는 옷을 벗고 이를 잡아 엄지손톱을 비벼 잡으면 빨간 피가 톡톡 터졌다

시골은 대부분이 수도가 없는 집이 많아서 우물물을 두레박으로 길어 퍼올려 사용했고 펌프가 보급되어 편하게 되었지만 겨울엔 펌프가 얼어붙어 물을 데워 들이부어 녹였다

연탄을 꺼트리면 옆집에서 불을 빌려다 붙였고 나무로 군불을 때던 아궁이도 많아 불 때는 재미가 솔솔 했다

예전의 생활과 밀접하던 도구들이 사라져... 아니 추억들이 하나둘 사라져 갔다

어릴 때 이불에 오줌을 싸면 키를 쓰고 소금을 얻으러 다니던 아이들을 종종 볼 수 있었다(난 이불에 오줌 싼 기억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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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김포에서의 어린 시절은 황순원의 "소나기"같이 소년은 로맨스? 없이 막을 내리고 2막을 열게 되었다


* 소나기처럼 끝난 김포 생활과 마포로의 이사와 용강국민학교


3학년에 올라오면서 마포로 이사를 하게 된다

마포구 염리동..."용강국민학교"로 전학을 갔다

두 번째 전학이었으며 진짜 서울 생활이 시작되었다

당시 친할아버지는 일찍 돌아가셔서 사진에서만 얼굴을 뵈었고 친할머니는 몇 번 뵌 적이 있어 기억이 또렸하지만 일찍 돌아가셔서 할머니에 대한 추억은 그리 많지 않다

외가댁은 부산에 있어 방학 때만 되면 어머니와 부산을 내려갔다 삼등삼등 완행열차(비둘기호)를 타고...

참... 기차여행이라는 게 지금은 낭만을 찾아 일부러 타지만 예전엔 고역의 열차였다 역대합실에서 개찰이 시작되면 죽어라 하고 뛰었다 새마을처럼 특급이 아니면 모두가 입석이라 자리를 먼저 찾아 하는 사람이 임자였다

예전에 기차가 연착이 많았고 특급열차가 지나가면 역에서 기다렸다 먼저 지나가게 비켜주곤 했으니 서울에서 부산까지 8시간 이상이 걸렸으니 요즘과 비교하면 엄청 긴 시간의 여행이었다

기차여행의 즐거움 또한 있어서 계란을 삶고 김밥도 싸고 먹을거리를 준비해 끼니를 때우고 군것질을 하면서 지루함을 달랬다

어린이 표도 한 장을 아끼시려는 어머니 덕분에 거짓말 아닌 거짓말도 하고... 검표원이 검표를 할라치면 3학년까지도 학교에 안 다닌다고 말하던가 아님 반대편의 화장실에 들어가 있다 검표원이 지나가면 다시 나오곤 했다(대학 때에도 고등학생표를 구입하여 영화를 봤던 기억이 ㅋㅋㅋ)

그 복잡한 기차 내에서도 홍익요원이 수레를 끌고 음료수와 먹거리를 팔고 다녔다

"콜라, 사이다 있어요~ 김밥 있어요.. 삶은 달걀 있어요~" 먹고 싶은 마음에 어머니 눈치만 살펴 형편이 좋으면 맛난 것 얻어먹곤 했다

대전역이나 대구역엔 오랜 시간 정차하여 플랫폼 중간에 가락국수를 먹을 수가 있었다 기차여행에 빼놓을 수 없는 즐거움 중 하나였다 어른들은 가락국수를 먹다 기차가 출발하면 뛰어서 매달리는 아슬아슬한 모습도 연출되었다

기차든 버스는 차만 타면 토를 하는 난 항상 칸과 칸 사이에... 또는 화장실에서 토를 하였다

덜커덕 착 덜커덕 착.. 기차소리가 귓전을 울리고 터널을 지날 때면 매캐한 냄새가 났지만 컴컴한 굴을 통과하는 것이 재미있고 신기하게 다가왔다


* 부산 시장의 추억


부산의 한 시장에서 장사를 하시던 외할아버지...'점방'이라고 한다

설탕, 소다, 소금, 밀가루.. 기타 여러 가지 공산품을 파는 조그만 점방이었는데.. 예전엔 모두 조금씩 봉투에 담아 저울에 달아서 팔았다

노란 설탕, 하얀 설탕, 검은 설탕... 엄청 훔쳐? 먹었다

할아버지 몰래 손으로 퍼먹었으니 오줌은 노랗고 회충도 생기고...ㅋㅋ

시장골목은 꽤 규모가 있었던 것 같다 요즘 재래식 장터에 가면 그 모습이 떠오르곤 한다 외사촌 형제들과 시장길을 지나가며 오징어 말린 포 같은 먹거리를 슬쩍슬쩍 집어 먹기도 했다 시장엔 고래고기도 팔았는데 지글지글 고래불고기를 아줌마 아저씨들이 한잔의 술과 먹는 모습은 흔히 볼 수 있었다

부산진역... 지금은 부산역이 종착역이지만 그 옛날엔 부산진역이 종착역이었다

거기서 가까운 어디쯤... 수정동 인가? 범전동?...

하여튼 그곳에 외가댁이 있었다

큰 외삼촌댁 형제들.. 유택형, 근택형, 윤민누나, 흥택(나보다 한살이 많은데 그때는 친구처럼 지냈다), 그리고 작은 외삼촌댁의 윤주누나(그는 외가댁에서 살고 있었다)... 그들과 방학만 되면 외가댁에서 추억을 만들었다

그 집은 시장통에서 약간 벗어난 곳에 있었는데 계단을 내려간 골목에 높은 축대 아래에 있었던 것 같다 조그만 마당과 장독대.. 그리고 내가 가장 좋아하던 곳 다락방... 그 집의 다락방이 너무 좋아 항상 그곳에 올라가 놀고 자곤 했다

난 부산에서 태어나 마산에서 유치원을 다녔고 서울로 상경했다

그런데도 내가 방학 때 부산에만 내려가면 동네 녀석들이 "서울내기... 양파(양파를 말하는 것 같다)... 맛 좋은 고래고기".. 하고 읊조리며 나를 놀렸다(서울 놈이 양파만 먹고 맛 좋은 고래고기 먹어봤냐? 는 투였다) 또 내 귀가 컸었는지 당나귀귀라고도 놀렸다

그 옛날이었으니 지금은 흔적도 없지만 소위 말하는 거지들과 넝마주이가 참 많았던 시절이다

깡통이나 바가지를 들고 끼니때만 되면 집집마다 대문 앞에서 "밥 좀 주세요... 네~~"하고 동냥을 하였다 그래서 먹다 남은 밥 또는 약간 쉰밥들을 반찬 찌꺼기들과 같이 끼니들을 때웠다

길에는 넝마주이들이 많아 등에 커다란 망태기를 둘러메고 거리의 휴지등 고물들을 주워 팔며 생을 유지했다(요즘은 동네마다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그 일을 대신하는 것 같다)


* 마포 염리동 골목과 친구들

김포 생활을 정리하고 마포로 이사하고 전학을 했을 때는 서울에서도 변두리에 가까웠다

큰길은 비만 오면 진흙탕에 질퍽거렸고 버스종점으로 복잡하던 곳이다

국민학교땐 우리가 그러니까 전쟁 후 베이비붐을 안고 태어난 세대라 숫자가 엄청났고 학교도 많이 없어 한 반에 90명 가까이 바글바글거렸다

우리 집은 용강국민학교와 숭문고등학교의 중간쯤에 세 들어 살았다

그 집엔 "인실"이라는 한 살 어린 여학생이 있었고 친척인 남자 고등학생이 있었는데 그는 졸업 후 경마장의 기수로 취직을 나간 것으로 기억한다

그의 고등학생 모자를 빌려 쓰고 으스대며 골목에서 놀던 기억도 ㅎㅎㅎ

3학년쯤에 내가 반에서 부회장을 한 적이 있는데 고등학교 졸업 때까지 최고의 감투가 아닌가 싶다(미화반장을 한 적은 있다) 그 동네는 골목이 제법 넓었고 아이들이 많이 살아서 방과 후에는 모여서 "다방구"라는 놀이와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란 놀이를 하며 놀았고 자전거도 빌려 배웠다 요즘이야 누구나 자전거 한 대씩은 가지고 있지만 예전에 문방구나 자전거포에서 30분 단위로 빌려서 탔다

새마을 운동의 일환인지 아침마다 학생들이 동네 단위로 조를 짜서 청소를 했다 거기서도 동네의 반장역할을 했다

여름이 되면 동네마다 소독차가 하얀 소독연기를 뿜으며 지나다녔는데... 아이들은 누구나 할 것 없이 소독차 뒤를 따라 뛰었다

학교 운동장에선 "오징어", "십자가"등의 놀이를 했고 짓궂은 남자아이들은 여학생들 고무줄놀이에 고무줄을 끊어 도망가는 짓도 했다

놀거리가 그렇게 많지 않았던 시절이라 딱지치기, 구슬치기를 가장 많이 했고 계급장 따먹기도 있었다 처음엔 신문이나 폐지로 딱지를 접어 놀았지만 나중엔 문방구에서 그림이 인쇄된 딱지를 사서 놀았다 여자아이들은 주로 공기놀이, 인형놀이... 종이로 인형을 만들어 옷도 만들어 입히며 놀았다 (난 지금도 공기놀이라면 자신 있다)

"봄들이"란 구슬치기를 많이 했지만 난 땅바닥에 원을 그리고 영역을 넓혀가는 "땅따먹기"놀이가 가장 좋아하는 놀이였다

동네엔 번데기 장수 아저씨가 구르마를 끌며 아이들을 유혹했는데.. 난 번데기를 한꺼번에 엄청 먹어대 배탈이 크게 난적이 있어 그 후부턴 번데기를 한동안 멀리했다

길가엔 설탕을 녹여 소다를 넣어 부풀린 "달고나"에 빠져 정신없이 찍어낸 모양을 오려내는 아이들로 북적였다(모양대로 오리면 한 개를 더 줬다)

얼음을 갈아 색소를 뿌린 빙수도 있었고 "아이스케끼~"를 외치며 어깨에 나무상자를 메고 다니던 이도 있었다 신기하고 재밌는 건 설탕을 녹인 물로 여러 가지 동물모양을 만들던 아저씨... 그 모습이...

징~징~... 징을 들고 다니며 "뚫어"를 외치던 사람... 연탄을 때던 시절에 굴뚝이 막힌 것을 뚫어 주는 일을 업으로 삼은 사람..."칼 갈아요~"... 겨울밤엔 "찹쌀떡이나 메밀무욱~"

"똥 퍼~"... 재래식 화장실이 대부분이었으니 수시로 똥을 퍼가는 똥지개를 짊어진 아저씨들도 기억난다

참 정감가게 기억나는 잊힌 추억의 소리들이다

마포 염리동에는 고등학교 1학년까지 살았는데...

국민학교 때 한 반이었던 규원, 석현, 엽 이... 특별한 친구 세명을 만났고 모두 다 같은 동네에 살았다

그들 세명은 아주 친하게 형제처럼 지냈다 아마도 지금까지 그들 세명은 다른 친구들과 달리 끈끈한 정이 있을 것이다 (나와는 오래전에 멀어졌지만)

숭문고등학교 내의 중간엔 냇물이 개천처럼 흘렀고 조그만 다리가 운동장을 이어주고 있었다

그 학교 운동장에서 축구를 참 많이 했다

이렇게 어린 시절의 마포시절이 열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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