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 대학 시절.
한때 당구에 미쳐 살았던 적이 있다.
수업도 빼먹고 당구장에서 지내던 시절이 있었지만
그 시절을 빼면 사회생활을 하며 당구장에 간 건 몇 년에 한 번쯤?
당구 점수로는 120에서, 잘 봐줘야 150 정도.
하지만 당구를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알 것이다.
직접 치는 실력보다 ‘보는 눈’은 더 예민해진다는 걸.
네모난 모든 사물이 온통 당구 다이로 보이고
머릿속은 화려하게 당구공이 보이지만
실제로 큐대는 생각처럼 따라주지 않는 게 당구다.
언제부터 프로당구 리그가 생겼는지 모르지만,
TV와 온라인에서 경기를 중계해 주기 시작한 즈음.
어느 날 우연히 당구 중계를 보다가
나는 한 선수에게 마음을 빼앗겼다.
그녀의 이름은 스롱 피아비.
캄보디아 출신의 여성 당구인.
한국에 시집와서 며느리가 된 그녀는 우연한 기회에
당구에 입문하게 되었지만
이제 당구계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없는 존재가 되었다.
내가 그녀를 좋아하게 된 건,
단지 당구를 잘 쳐서만은 아니다. 실력도 출중했지만
그녀에게는 사람을 끌어당기는 이야기가 있다.
말하자면 그녀는 ‘코리안드림’을 실현한 살아 있는 증거이고.
코리안드림이란 말이 좀 어색하기도 하다.
우리도 어려운 시기에 '아메리칸드림'을 위해 미국등
해외로 많은 사람이 나가던 시절이 있었다.
가난한 캄보디아 시골에서 한국으로 시집와
언어도 모르고 문화도 낯선 이 땅에서
단 하나, 큐대 하나를 붙잡고 자기만의 세계를 열었다.
결혼이 인생의 끝인 줄만 알았던 여정이
이 나라에서의 새 시작이 되었다는 건
우리에게도 많은 걸 생각하게 한다.
우리는 얼마나 자주, 아니 항상,
타인의 출발선을 무시한 채 결과만 보고 판단하는가.
스롱 피아비는 큐를 들고 편견을 밀어냈고,
큐대를 밀며 차별을 뚫어냈다.
그리고 마침내 LPBA 챔피언이 되었고,
한국 여성 당구계에 디딤돌이자 상징적 인물이 되었다.
그녀를 보며 많은 여성 당구인이
자신의 꿈을 키우고,
실력을 갈고닦기 시작했다.
한국 여성당구인을 대표하는 김가영과 함께
선의의 라이벌을 형성하며
그들로 인해 한국 여자당구의 수준이 끌어올렸다.
한국에서 뿐 아니라,
그녀의 고국인 캄보디아에서는
국민적 영웅으로 불리며
생생한 코리안드림의 주인공이 되었다.
2025~2026 프로당구 시즌이 6월 15일 개막했다.
내가 당구 중계를 보는 이유는 단 하나.
스롱 피아비의 경기를 보고 그녀를 응원하기 위해서.
아쉽게도 이번 시즌 16강전에서 신예 선수에게 패하며
탈락의 고배를 마셨지만,
그녀의 여정은 결코 멈추지 않을 것이다.
프로로 활동하며 모은 상금으로
고향에 학교를 세우고, 봉사활동을 이어가는 그녀는
그야말로 아름다운 사람,
우리 사회에 꼭 필요한 진짜 롤모델이다.
그런데도 누군가는 말한다.
“몸을 너무 쓴다.”
“매너가 없다.”
“너희 나라로 돌아가라.”
그건 그녀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 사회의 문제, 우리의 시선의 문제다.
스롱 피아비는 말없이 많은 걸 가르친다.
노력은 국적을 가리지 않고,
꿈은 피부색을 가리지 않으며,
사람은 태어난 곳이 아니라
어떻게 살아왔는가로 빛난다는 걸.
나는 오늘도 그녀가 당구대에 서 있는 모습을 보며
기꺼이 응원의 박수를 보낸다.
그녀의 이름 앞에 ‘우리’라는 말을 붙이며.
우리 스롱 피아비.
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야기를 써 내려가는 사람 중 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