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 없는 무대 위에서 ... 세뇌의 세습
* 혁준 (50대 후반) : 80년대 민주화 투쟁 세대. 자부심이 강하지만 시대 변화 앞에서 혼란을 느낀다.*
* 지민 (40대 초반) : 1990년 전후 학번, ‘이해찬 세대’. 전교조 세대의 흔적 속에서 자라
회의와 냉소가 묻어 있다.
* 수현 (20대 초반) : 대학 신입생. 자유민주주의의 본질을 고민하며 선배 세대에게 도전하는 젊은 세대.
* 배경 : 대학 연극부 사무실. 낡은 책상과 의자, 한쪽 벽엔 바랜 80년대 민주화 포스터와
전교조 선전물이, 다른 쪽엔 최신 연극 포스터와 노트북, 커피 캔이 흩어져 있다.
* 조명 : 늦은 오후 햇살이 들어오다가 점차 어둑해진다.
* 분위기: 회한과 긴장이 교차하는 공간.
(혁준이 낡은 포스터를 가리키며 눈빛을 번쩍인다. 목소리는 뜨겁고 단호하다.)
혁준:
“연극은 예술이다! 그리고 예술은 시대를 이끄는 횃불이었지.
우린 군홧발 아래서 피 토하는 심정으로 민주주의를 외쳤어.
최루탄 냄새가 가득한 거리에서,
연극 무대는 우리에게 혁명의 광장이었어!”
(주먹을 움켜쥐고 책상을 세게 친다. 소리가 사무실에 메아리친다.)
지민: (팔짱을 끼고 냉소적으로)
“선배님… 저희는 그렇게 배웠습니다.
근데 솔직히 와닿진 않았어요.
그냥 ‘그렇게 해야 한다’는 압박뿐이었죠.
말하자면 세뇌의 세습이었습니다.
까라면 까는 거, 그게 법이었으니까요.
학교도 마찬가지였어요.
전교조 선생님들은 늘 말했죠.
‘시대를 바로잡는 게 혁명이다.’
북에서 들려오는 말도 곧이곧대로 믿으라 했고요.
우린 따랐습니다.
지금도 여전히, ‘까라면 까는’ 세상 아닙니까.”
혁준: (격분하며 몸을 앞으로 내민다)
“그건 네가 잘못 본 거다!
그때는 달리 방법이 없었어.
우리가 저항하지 않았다면, 지금 이 민주주의는 없었을 거다!”
지민: (눈을 치켜뜨며)
“민주주의?
선배님, 어떤 민주주의 말입니까?”
(정적. 혁준은 순간 말을 잇지 못한다. 수현이 조심스럽게 책을 덮고 끼어든다.)
수현: (차분히, 그러나 또렷하게)
“맞습니다. 민주주의라는 말만으로는 해명이 안 됩니다.
선배님이 말하는 건 사실 사회민주주의 아닙니까?
북이 주장하는 인민민주주의, 결국은 공산 사회주의의 변형이죠.”
지민: (놀라며 수현을 뚫어지게 본다)
“자식… 어린놈이 어찌 그리 잘 아는 거냐?
그래, 네 말이 맞다. 민주주의에서 ‘자유’를 빼면
껍데기뿐이지. 형식적 민주주의일 뿐이야.”
혁준: (다급하게 주먹을 움켜쥔다)
“아니야! 우리는 자유를 원했어.
군홧발에 짓밟힌 국민을 해방시키고자 한 거라고!”
수현: (단호히 목소리를 높인다)
“하지만 그 자유는 어디 있었습니까?
진보라는 탈을 쓴 정권에서도 언론은 검열당했고,
사상의 자유는 봉쇄됐습니다.
인민을 위한다는 명분 아래, 자유를 지운 민주주의였잖아요.
그건 진짜 자유민주주의가 아닙니다.
다른 얼굴의 독재일 뿐이었죠.”
지민: (고개를 숙이며 씁쓸하게 웃는다)
“우린 그걸 몰랐지. 아니, 알려고도 안 했어.
전교조가 가르쳐준 대로, 이해찬 세대가 주입한 대로 따르기만 했으니까.
민주주의는 무조건 옳다고, 혁명은 반드시 필요하다고 믿었으니까.
그게 얼마나 위험한 맹신인지…
이제야 깨닫네.” (한숨을 내쉰다.)
(수현이 자리에서 일어나 방안을 한 바퀴 돈다. 목소리는 단호하지만 절제되어 있다.)
수현:
“저도 요즘 공부했습니다.
국내 정치상황을 우리가 제대로 바로 알아야 할 것 같았어요.
권력에 길들여진 민주주의는 결국 자유를 억압합니다.
언론을 막고, 집회와 결사의 자유를 차단합니다.
자유 없는 민주주의는 껍데기입니다.
겉모습만 번지르르한, 또 다른 독재일 뿐이죠.
우리 시대의 예술은 과거의 구호를 되풀이하는 게 아닙니다.
자유를 지키고 국민을 깨우는 무대가 되어야 합니다.”
(정적. 혁준은 충격을 받은 듯 의자에 털썩 앉는다.
지민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창밖을 바라본다.
수현은 두 선배를 똑바로 바라본다.)
혁준: (낮은 목소리, 떨리며)
“… 우리가 바쳤던 젊음이, 결국 껍데기 민주주의였단 말인가…”
지민: (쓴웃음, 그러나 단호하게)
“껍데기라도 남았으니 이제라도 본질을 찾아야죠.
자유 없는 민주주의는 민주주의가 아닙니다.
현재 대한민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작금의 상황을
정확히 바라봐야 합니다.
색깔론이니, 시대가 우리를 부른다느니…
모두 허울뿐인 선동 일 뿐이죠.”
수현: (굳은 표정으로, 한 단어씩 내뱉듯)
“그 진실을 국민에게 알리는 것—
그게 이제 우리 예술의 역할 아닐까요?”
(조명이 점차 어두워지고, 낡은 민주화 포스터가 바람에 흔들린다.
세 사람의 얼굴에 교차하는 빛: 회한, 깨달음, 결심.
천천히 막이 내려온다.)
(사무실 안, 잠시 침묵. 분위기가 가라앉은 가운데, 지민이 허탈한 웃음을 터뜨린다.)
지민:
“선배님, 우리가 숭배했던 그 시절의 ‘스타들’ 있잖습니까.
시대의 아이콘, 저항의 상징이라 불리던 배우들, 시인들, 가수들…
그 사람들이 어떤 모습으로 살았는지, 이제 다 드러났잖아요.
허울뿐인 예술 뒤에 감춰진 방탕,
권력의 손짓에 끌려다니던 모습들.
우린 그들을 우상처럼 떠받들었지만,
결국은 권력의 그림자에 놀아난 배우들이었죠.”
혁준: (당황하며 고개를 젓는다)
“아니… 그건 일부일 뿐이다!
적어도 우리는 진심이었다.
우리의 무대는 거짓이 아니었어!”
수현: (냉철하게)
“선배님, 그 진심조차 결국 권력이 원하는 방향으로 흘러갔습니다.
‘민주화 예술’이란 이름이 붙여지는 순간,
거리 낭만도, 술판도, 심지어 방탕까지도
모두 ‘예술적 자유’라 포장됐죠.
그 속에서 국민은 눈이 가려졌고,
예술은 권력의 선전도구가 됐습니다.”
지민: (쓴웃음 지으며)
“맞아. 우리가 제대로 보지 못한 현실이지.
예술이 사람을 자유롭게 한 게 아니라,
사람을 길들이는 도구가 되었던 거야.”
혁준: (고개를 숙이며 손으로 이마를 짚는다)
“…그럼 우리는… 예술을 했던 게 아니란 말이냐?
우린 시대의 꼭두각시였단 말인가…?”
수현: (또렷하게)
“아니요, 선배님.
그 시대는 그렇게 밖에 할 수 없었잖아요. 선배님이 잘못한 것은 아니죠.
그러나 이제 바로 잡아야 하지 않을까요?
그 당시 학교 다니면서 데모에 참가하지 않았던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학생시절에 빠졌던 이념이 나이가 들어서도 아직 변하지 않는 게 이상한 거죠.
진짜 예술은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
허울뿐인 스타를 따라가는 게 아니라,
권력의 구호에 휘둘리는 게 아니라,
국민이 진실을 보고 자유를 지키는 것—
그것이 예술이고, 우리가 만들어야 할 무대입니다.”
(잠시 정적. 혁준은 눈을 감고 한숨을 내쉰다. 지민은 천천히 담배를 꺼내려다 멈춘다. 조명이 어두워지고, 벽에 붙은 낡은 민주화 포스터가 찢겨 떨어진다. 무대에는 수현의 굳은 표정만 남는다.)
(사무실은 어둑하다. 창밖 가로등 불빛이 스며든다. 혁준은 의자에 기대어 있고, 지민은 생각에 잠겨 있다. 수현이 한 걸음 앞으로 나선다.)
수현: (조용히, 그러나 힘 있게)
“민주주의는 자유만으로 완성되지 않습니다.
자유에는 언제나 책임이 따릅니다.
책임을 놓치면 자유는 방종이 되고,
민주주의는 다시 껍데기가 됩니다.”
지민: (고개를 끄덕이며)
“맞아. 우리가 그 책임을 놓쳤지.
자유를 외쳤지만, 책임 없는 자유는
결국 권력의 먹잇감이었어.”
혁준: (천천히 일어나 낮은 목소리로)
“그렇다면 이제라도 책임져야겠구나…
우리의 실패를, 허울뿐이던 구호를.
진짜 민주주의를 지켜내는 건,
이제 너희 세대의 몫이겠지.”
수현: (단호히)
“아닙니다, 선배님.
세대의 몫이 아니라, 모두의 몫입니다.
지금도 언론은 권력의 눈치를 보고,
법은 흔들리고, 국민의 자유는 시험대 위에 있습니다.
이건 과거만의 문제가 아니라, 지금의 현실입니다.”
(수현이 책상 위 낡은 포스터를 떼어내어 바닥에 내려놓는다. 대신 노트북을 켜 무대 중앙에 둔다.
푸른빛이 공간을 밝힌다.)
수현: (또렷하게)
“예술은 구호를 따라 외치는 도구가 아니라,
국민이 눈을 뜨게 하는 무대여야 합니다.
권력의 손짓이 아니라,
진실을 향한 목소리에 귀 기울여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가 지금부터 만들어야 할,
새로운 무대입니다.”
(혁준과 지민이 서로를 바라본다. 긴 침묵. 혁준은 고개를 천천히 끄덕이고, 지민은 담배를 다시 주머니에 넣는다. 무대 위에는 세 사람의 실루엣이 남고, 노트북의 푸른빛만 이 그들을 비춘다.)
─ 막 내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