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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로당을 아시나요?

혼란 속에서 피어난 붉은 씨앗, 그리고 그 긴 그림자.. 이석기와 통진당

by 대전은하수 고승민

* 프롤로그(prologue) : 시대가 어느 때인데 남로당 찾고, 공산주의, 사회주의와 이념에 대해서 얘기하느냐? 고 생각하는 사람은 정말 이 시대에 대한민국이 어디로 가는지 전혀 관심이 없는 사람이다.


해방의 함성 속에, 또 하나의 씨앗이 자랐다.

자유의 땅을 꿈꾸던 조선, 그 밑바닥에서 붉은 사상의 뿌리가 조용히 자라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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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그리고 사상의 혼돈>

1945년 8월 15일, 일제의 압제가 끝나자 조선은 ‘해방’이라는 이름 아래 새로운 시대를 맞이했다.
하지만 자유의 문턱에서 조선은 곧 두 개의 길 앞에 서게 된다.
하나는 자유와 시장, 또 하나는 평등과 혁명의 길이었다.
그리고 후자의 길을 선택한 이들이 있었다. 그들은 바로 공산주의자들이었다.


공산주의 사상은 1917년 러시아 혁명의 성공 이후, 연해주와 만주를 통해 한반도로 밀려들었다.
식민지 조선의 젊은 지식인들에게 “노동자·농민이 주인이 되는 세상”은 신선한 해방의 언어로 들렸고
그들은 독립과 사회혁명을 결합시켰으며, 일본 제국주의의 적이었던 소련과의 연대 속에서 공산주의를

곧 민족해방의 길로 보았던 것이다.
이것이 한국 공산주의의 뿌리였다.


<남로당의 탄생 - 박헌영의 귀환>

해방 직후 남한에서는 박헌영을 중심으로 한 조선공산당 재건파가 재빠르게 움직였다.
그들은 미군정의 통치 아래에서도 인민위원회, 노동조합, 청년단체를 통해 세력을 넓혀갔고,
1946년, 조선공산당은 남조선신민당, 남조선인민당 등 좌익 단체를 흡수해
'남조선노동당(남로당)'을 결성하였다.

남로당은 표면적으로는 “노동자의 해방”을 외쳤지만,
실제로는 소련의 노선을 충실히 따르는 혁명조직, 즉 남한 내 공산혁명 세력이었다.
박헌영은 미군정을 “새로운 제국주의”로 규정하며, 남한의 단독정부 수립을 막기 위해
각지에서 노동파업·학생운동·폭동을 조직했다.


<남로당의 폭동과 선동>

남로당은 자신들을 ‘민중의 대변자’로 포장했지만, 실상은 계급투쟁과 폭력혁명을 수단으로 삼았다.
그 대표적인 사건들이 바로 다음과 같다.


* 1946년 대구 10월 폭동
식량난과 미군정의 실정에 대한 불만을 선동해, 남로당은 전국적인 파업과 폭동을 주도했다.
경찰관, 공무원, 우익 인사들이 살해되었고, 대구 시내는 사실상 무정부 상태로 빠졌다.


* 1948년 여순사건
남로당 계열 군인들이 제주 4·3 사건 진압 명령을 거부하고 반란을 일으켰다.
“동족상잔을 막자”는 구호 뒤에는 사실상 남한 정부 전복 시도가 숨어 있었다.
이 사건은 훗날 6.25 전쟁의 전초가 되었던 것이다.


이 시기 남로당은 언론·교육계·청년층을 파고들며
“친일파 청산” “민족 자주” 같은 구호로 젊은 지식인들을 끌어들였다.
하지만 그 실체는 민족과 계급을 교묘히 혼합한 혁명 선동, 즉 ‘오리발식 이념 위장’이었다.
그 결과, 우익 인사와 독립운동가들조차 ‘친일파’로 몰려 탄압을 받았다.
이것이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이념의 왜곡’의 뿌리다.


<6·25 전쟁, 남로당의 붉은 그림자>

1949년, 남로당은 북한의 '조선노동당(김일성)'과 통합되며 사실상 북의 남한 지부가 된다.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이 남침하자 남로당 세력은 남쪽 내부 협조조직으로 움직였다.
전쟁 초기에 각지에서 우익 인사 암살, 후방 교란, 경찰서 습격이 발생했고,
이는 전선 붕괴의 큰 원인이 되었던 것이다.
이들이 바로 ‘제5열(內通세력)’이었다.


전쟁이 밀리자 일부는 북한으로 월북했고, 일부는 산속으로 들어가 빨치산 게릴라가 되어
지리산, 오대산 일대에서 ‘해방구’를 꿈꾸며 무장투쟁을 이어갔지만,
결국 1950년대 중반 완전히 소탕되었다.

한편, 남로당 수장 박헌영은 월북 후 한때 북한 정권의 핵심으로 활동했지만,
1953년 김일성에 의해 “미제의 간첩”으로 몰려 처형당했다.
그가 만든 남로당은 그렇게 자신이 만든 체제 속에서 사라졌다.


<붉은 사상의 잔존과 변형 — ‘운동권’으로 이어지다>

남로당이 사라졌다고 해서 공산주의 사상이 완전히 뿌리 뽑힌 것은 아니었다.
지하조직의 일부 인맥은 살아남았고,
1960~70년대 군사정권 시절에는 ‘민주화운동’이라는 명목 속에서 다시 고개를 들었다.

특히 1980년대 이후 대학가에서는 PD(민중민주)계와 NL(민족해방)계로 나뉜 이념운동 세력이 등장했다.


PD는 마르크스-레닌주의를,
NL은 북한식 주체사상과 반미 민족주의를 표방했다.
이들은 학생운동·노동운동·언론·교육계를 장악하며
“진보=도덕” “보수=적폐”라는 이념 프레임을 사회 전반에 뿌려 놓았다.

그때 형성된 사상적 기반이 오늘날까지 이어져 그들 끼리도 노선의 선명성 투쟁을 하였다.

정치권력의 일부, 언론, 문화, 심지어 교육계에까지 스며들어 있다.
학생들은 ‘사회정의’라는 이름으로 사회주의적 이념을 배우고,
졸업 후 그 이념을 다시 사회에 되돌려주는 순환구조가 만들어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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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이어지는 붉은 유산>

오늘날 공산주의는 더 이상 총과 폭탄을 들고 나타나지 않는다.
대신 “평등” “인권” “기후” “반전” “반미” 같은 새로운 언어로 옷을 갈아입었다.
남로당의 시대가 폭력의 시대였다면, 지금은 심리전과 정보전의 시대다.
가짜뉴스, 여론조작, 역사왜곡,
그리고 눈에 보이지 않는 중국과의 정보협력 등이 그것이다.

이념은 형태를 바꾸었을 뿐, 여전히 살아 있다.
그들은 스스로를 “진보”라 부르지만, 그 근본은 공산사회주의의 유산이며,
남로당이 꿈꾸던 “체제 전복”의 방법만이 달라졌을 뿐이다.


<현대판 남로당, 통진당과 이석기>

해방 직후 남로당이 북의 지령을 받아 남한 내에서 체제 전복을 꾀했다면, 현대의 대한민국에서도 그 잔재는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이석기와 통합진보당 사건은 그 뚜렷한 사례다.

통진당은 표면상 진보정당을 표방했지만, 내부에서는 북한 체제를 동조하고

‘유사시 국가 주요시설을 공격하라’는 식의 RO(혁명조직) 활동이 포착되었다.

이는 과거 박헌영의 남로당이 북의 명령을 받아 남쪽에서 혼란을 일으키려 했던 모습과

놀라울 정도로 닮아 있다.

결국 통합진보당은 헌정 사상 최초로 헌법재판소에 의해 해산되었고,

이석기 역시 내란선동 혐의로 실형을 선고받았다.
시대는 바뀌었지만, 이념의 뿌리는 여전히 같은 곳에서 자라난 것이다.
총 대신 선동으로, 폭탄 대신 여론 조작과 조직화로 변했을 뿐, 그 목표는 변하지 않았다.
자유민주주의를 흔들어 체제를 무너뜨리고, 혼란 속에서 ‘다른 체제’를 꿈꾸는 세력들..
그것이 바로 현대판 남로당이라 할 수 있다.


<사상의 자유, 그러나 역사적 진실은 지켜야 한다>

필자도 전쟁을 겪은 세대가 아니지만 전쟁 후 베이비 붐 세대로 격동의 세월을 눈으로 보고 듣고

경험하였기 때문에 오늘날 경제대국과 자유민주주의가 얼마나 위대한 국민들에 손에

이루어졌는지 잘 알고 있다.

다만, 현재의 젊은 세대는 과거를 전혀 모르고 교육도 우리 때와는 완전히 다른 교육을 받으면

살아와, 아직 남은 공사사회주의 세력의 선동에 휘둘리며 국가의 정체성이 흔들리는 모습이

안타깝다.


남로당의 역사는 단순히 과거의 폭동사가 아니다.
그것은 지금도 한국 사회 곳곳에서 되살아나는 이념의 잔향이다.
공산주의는 ‘가난한 자를 위한 정의’로 포장되었지만,
그 끝은 항상 자유의 억압과 전체주의의 공포로 귀결되었다.

역사는 반복되지 않기 위해 배워야 한다.
그리고 그 첫걸음은 “남로당을 아시나요?”
이 단순한 질문에서부터 시작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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