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1월 2일 일기
거의 60년 전이니까, 아주 오래된 추억의 한 조각이 떠올랐다. 부모님을 따라 상경하여 처음 터를 잡았던 곳이 아주아주 시골, 김포 방화동과 개화동. 뜰에 피어있던 채송화와 맨드라미가 눈에 아른거린다. 그 시절 이후로 나는 그 꽃들을 사진 속에서나 보았을 뿐, 내 곁에서 살아있는 실물로는 단 한 번도 마주치지 못한 것 같다. 어쩌면 세상이 변해서가 아니라, 내 마음이 그 꽃들을 피워낼 여유를 잃어버렸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나의 아버지는 시인이셨고, 북에서 피난 내려와 마산중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시던 아버지는 봄만 되면 마당에 꽃을 심으셨다. 분홍꽃, 채송화, 맨드라미... 아버지는 시를 쓰듯 흙을 만지셨고, 나는 그 곁에서 자연스럽게 시인의 정서에 조금씩 물들어 갔다. 가을이면 황금들녘에서 메뚜기를 잡아 튀겨 먹고, 겨울이면 꽁꽁 얼어붙은 논바닥에서 썰매를 타던 그 시골 풍경이 내 인생의 가장 풍요로운 배경화면이었다.
사람들은 나를 보고 예술적 감수성이 풍부하다고 한다. 생각해 보면 노래 부르기를 좋아하고, 연극도 하며, 영화에 미치고, 이제는 서툴지만 글을 쓰는 이 모든 과정은 사실 내 몸속에 흐르는 부모님의 유산인 듯하다. 하지만 현실의 삶은 녹록지 않았다. 경제적 감각도, 돈을 버는 재주도 전무한 나는 가족에게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지 못한 채 어느덧 한심한 남자로 늙어가고 있다는 자괴감이 들곤 한다.
오디션 프로그램에 나오는 무명가수들을 보면, 남의 노래를 나의 목소리를 빌려 잠시 살아났을 뿐, 결국 자기만의 히트곡이 없어 잊혀가는 그들의 모습이 꼭 나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평생을 예술의 언저리에서 서성였지만, 정작 내 인생이라는 무대에서 내세울 만한 '나만의 것'은 무엇인가 하고 스스로 생각해 보게 되지만 결국 아무것도 없다.
그러나 오늘, 실물로 본 지 수십 년이 지난 채송화와 맨드라미가 내 기억 속에서 이토록 선명하게 피어난 것을 보면 아버지가 심으셨던 그 꽃들은 사라진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었다는 것을. 비록 통장 잔고는 비어있을지언정, 내 정서의 창고에는 여전히 시인의 꽃밭이 남아있음을 말이다.
나는 이제 나이 들어 크게 할 일도 없고 해서 펜을 들고, 내 안의 아직 시들지 않은 채송화를 글로 피워보려 한다. 남의 노래가 아닌, 지독하게 서툴고 아팠던 나의 진심을 담은 '나만의 노래'를 불러 보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