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정치권 이야기를 듣다 보면 자주 등장하는 비유가 있다.
윤석열과 한동훈의 관계를 두고 카이사르와 브루투스를 떠올린다는 말이다.
카이사르와 브루투스. 그리고 루비콘강.
그 이야기가 나오면 늘 같은 문장이 따라붙는다.
“카이사르는 루비콘을 건넜다.”
그 순간 역사는 되돌릴 수 없는 길로 들어섰다고 사람들은 말한다.
그런데 나는 이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늘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정말로 루비콘강을 건넌 사람이 모든 것을 결정한 것일까.
새벽에 잠이 깨어 로마제국을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를 보고 있었다.
세계의 막강했던 제국들을 떠올리다 보니 결국 생각은 로마로 돌아왔다.
수많은 제국이 있었지만 문화와 제도, 사상의 흔적을 이만큼 오래 남긴 제국은 드물다.
화면 속에서는
카이사르가 이집트에서 클레오파트라를 만나는 장면이 흐르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그가 아끼고 키웠던 젊은 정치인 하나가 떠올랐다.
브루투스였다.
밤이 깊어질 때면 가끔 베토벤 교향곡 5번의 첫 음이 떠오른다.
빠바바 빰-.”
운명이 문을 두드리는 소리.
그 리듬을 듣고 있으면 인간의 선택이라는 것이 얼마나 냉혹한 결과를 부르는지
새삼 생각하게 된다.
역사는 카이사르가 루비콘강을 건너며
“주사위는 던져졌다”고 말했다고 기록했다.
그 순간 로마의 운명은 돌이킬 수 없는 방향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장면을 우리는 너무 단순하게 이해하는 것 같다.
마치 강을 건넌 사람 하나가 모든 것을 결정한 것처럼 말이다.
정치를 조금만 들여다보면 이야기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강을 건넌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돌아갈 다리가 남아 있었느냐 하는 문제다.
카이사르에게도 정치적 타협의 여지는 남아 있었을 수도 있다.
로마의 권력투쟁은 언제나 협상과 계산 속에서 움직였기 때문이다.
완전히 막다른 길은 아니었다.
그런데 결국 그 다리는 사라졌다.
칼이 등장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칼은 적의 손에 들려 있지 않았다.
브루투스였다.
그는 공화정을 지키기 위한 결단이라고 말했다. 로마를 위한 선택이라고도 했다.
그러나 역사는 아이러니하다.
브루투스의 칼은 공화정을 구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종말을 더 빠르게 불러왔다.
카이사르가 쓰러진 뒤 로마는 평화를 얻은 것이 아니라
더 거대한 내전 속으로 빠져들었기 때문이다.
나는 지금 우리의 정치에서도 비슷한 장면을 본다.
많은 사람들이 말한다. 윤석열이 루비콘강을 건넜다고.
하지만 내 생각은 조금 다르다.
강을 건넜다 해도 정치에는 언제나 돌아갈 길이 남는다.
갈등이 있어도 협상이 있고 충돌이 있어도 마지막 대화와 타협의 여지는 있다.
그런데 어느 순간 그 길이 완전히 끊어졌다.
누군가 칼을 먼저 뽑았기 때문이다.
내가 보기에는 그 칼을 뽑은 사람은 한동훈이다.
사실 관계를 끝까지 확인했는지,
정말 마지막까지 대화를 시도했는지,
오랜 동료이며 상관 사이에 있어야 할 최소한의 신뢰가 지켜졌는지.
나는 그 의문에 쉽게 고개가 끄덕여지지 않는다.
오랜 세월 같은 길을 걸어온 사람에게 등을 돌리는 일은 결코 가벼운 선택이 아니다.
그것은 단순한 정치적 판단이 아니라 신뢰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37년을 한 사람과 함께 살면서 나는 신뢰라는 것이
얼마나 쌓기 어렵고 무너뜨리기 쉬운지 배웠다.
그래서인지 예순일곱의 노병의 눈에는,
지금의 이 속도전 같은 정치가 무척이나 위태로워 보인다.
그런데 그 선택은 너무 빨랐다.
그리고 그 순간 나는 이렇게 느꼈다.
아, 이제 루비콘강이 건너졌구나.
칼을 뽑는 순간
정치적 운명은 완전히 달라진다.
돌아갈 수 있는 길이 스스로 사라지기 때문이다.
아마 그 역시 알고 있을 것이다. 이 길이 얼마나 돌이킬 수 없는 길인지.
그리고 순간 잘못 선택했다고 느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정치에는 잔인한 법칙이 하나 있다.
한 번 찍힌 낙인은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브루투스 역시 끝까지 자신이 옳다고 믿었을 것이다.
공화정을 지키기 위한 선택이었다고 스스로를 설득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역사는 냉정하다. 사람들은 그의 명분보다 그 장면 하나를 더 또렷하게 기억한다.
“너마저도.”
그 탄식이다.
나는 지금 우리의 정치가 그런 장면을 향해 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문득 두려워진다.
운명이 문을 두드릴 때 인간은 선택을 한다.
누군가는 다리를 놓고 누군가는 그 다리를 끊는다.
그리고 어떤 선택은 그 순간부터 다시는 되돌릴 수 없는 길이 된다.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이 장면에서 과연 누가 루비콘강을 건넌 것일까.
그리고 더 중요한 질문이 있다.
그 강 위의 다리를 누가 먼저 끊어버린 것일까.
어쩌면 역사는 루비콘을 건넌 사람보다
그 다리를 끊은 사람을 더 오래 기억할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