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사람에게 기댄다는 것 -
사람은 사회적 동물이다. 서로 돕고 가정을 이뤄 가정에서 정을 나누며 살게 되어 있다. 당연히 사람은 서로 의지하고 함께하며 살게 되어 있다. 오늘의 주제는 근원적인 문제 즉 구원과 해탈을 위한 목적으로 사람에게 기댄다는 것이 얼마나 도움이 될까를 생각해 보는 것이다.
- 보여주기 위해 사는 사람은 박수 없이는 무너진다. 하지만 내면을 채운 사람은 혼자서도 중심을 지킬 수 있다
이글 인용구의 출처는 명확하게 한 사람으로 특정되지 않았다. 니체나, 이어령 교수 등 내면의 가치와 자아 성찰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여러 글과 강연 등에서 인용되고 변주되어 온 것으로 보이는 글이다. 이 말은 타인의 인정이나 칭찬과 같은 외적인 요소에 의존하는 삶은 취약하며, 내면의 단단함을 기르는 삶이 중요하다는 것으로 많은 이들의 공감을 얻고 있다.
니체의 《자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 나의 제자들이여, 나는 이제 홀로 가련다! 그대들도 이제 홀로 떠나라! 그것이 내가 바라는 것이다. 나를 떠나서 자라투스트라에 저항하라! 아니 차라리 그를 부끄러워하라! 그가 그대를 속였을 수도 있으니... 언제나 제자인 채로 머문다면, 그대들은 스승의 은혜를 저버리는 것이다. 그대들은 어찌하여 나의 월계관을 빼앗으려 하지 않는가?... 이제 나는 그대들에게 명한다. 나를 버리고 그대들 자신을 찾아라. 그대들이 모두 나를 부인하고 나서야 비로소 나는 그대들에게 돌아오리라.
초인의 세계에서는 최종적으로는 결단코 홀로 서야 한다. 스승은 서포터스의 역할일 뿐이다. 물론 가보았던 길을 제시하는 스승은 절대 필요한 존재다. 시행착오는 또 얼마나 줄어들 것인가. 그러나 결국 스승은 서포터스의 한계를 넘지 못한다.
니체가 《자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주장한 내용을 유신론적 관점에서, 주제에 맞추어 변용해 보기로 한다.
1) 완성(해탈 또는 구원)하기까지의 노력은 결국 나 스스로 하는 것이다.
2) 완성한 나는 나만이 가지고 있는 개성과 인생이 있다. 그러므로 완성한 인간은 타인과 비교불가이다. 모두가 고유하고 독특해, 비교해서 불행해지는 것 따위는 없다.
"스승이 우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
크리슈나무르티가 자신의 교단을 해체한 것이 좋은 예이다.
지두 크리슈나무르티(Jiddu Krishnamurti, 1895-1986)는 자신을 세계의 교사로 추대하기 위해 만들어진 조직인 '동방의 별단(Order of the Star in the East)을 스스로 해체한 것으로 매우 유명하다. 이 사건은 그의 사상의 핵심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중요한 일화이다.
크리슈나무르티의 사상은 기존의 모든 종교, 철학, 스승의 권위를 부정하고, 개인의 완전한 자유와 내적 혁명을 통한 진리 발견을 강조한다.
신지학회는 어린 크리슈나무르티를 인류를 이끌 '세계의 스승(World Teacher)'으로 지목하고, 그를 중심으로 '동방의 별단'이라는 국제적인 조직을 만들었다. 수많은 추종자들이 모였지만, 1929년 크리슈나무르티는 돌연 이 조직의 해체를 선언하여 신지학회를 실망시켰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조직이, 신념 체계가, 구루가 인간을 자유롭게 할 수 없다고 주장합니다... 진리는 길 없는 대지(Truth is a pathless land)이며, 당신은 어떤 길, 어떤 종교, 어떤 종파를 통해서도 그것에 접근할 수 없습니다."
그는 자신이 새로운 권위나 종교가 되어 사람들이 맹목적으로 따르는 것을 거부했다. 그에게 진리는 조직이나 타인을 통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각자가 자신의 내면을 통해 직접 발견해야 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크리슈나무르티의 사상은 명확한 시스템이나 방법론을 제시하기보다는, 끊임없는 자기 관찰과 질문을 통해 스스로 깨닫도록 이끄는 데 중점을 둔다.
1. 모든 정신적 권위의 부정 그는 구루(스승), 성직자, 경전, 종교의식 등 모든 형태의 정신적 권위가 개인의 자유로운 탐구를 방해하는 '목발'에 불과하다고 보았다. 진정한 앎은 타인의 가르침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을 직접 관찰하는 데서 온다고 주장했다.
2. '아는 것으로부터의 자유' 우리의 생각과 행동은 과거의 경험, 지식, 전통, 기억 등 '알려진 것'에 의해 깊이 조건화되어 있다. 크리슈나무르티는 이러한 조건화가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게 하는 필터라고 말했다. 이 과거의 짐(아는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질 때, 비로소 순간을 새롭게 경험하고 진정한 창조성을 발휘할 수 있다.
3. 선택 없는 자각 그가 말하는 명상은 특정 자세를 취하거나 주문을 외우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일상 속에서 자신의 생각, 감정, 반응을 판단이나 분석 없이 그저 지켜보는 것이다. '좋다/나쁘다', '옳다/그르다'는 이분법적 판단 없이 대상을 있는 그대로 관찰할 때, 우리는 문제의 본질과 자신의 내면을 깊이 이해하게 된다.
4. 관찰자가 곧 관찰되는 것이다 우리는 보통 '나'라는 관찰자가 '내 생각'이나 '내 감정'이라는 대상을 지켜본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크리슈나무르티는 이 둘 사이에 분리가 없다고 말한다. '분노를 느끼는 나'와 '분노'는 별개가 아니며, 이 사실을 깊이 통찰할 때 내적 갈등과 분열이 사라지고 완전한 평온에 이르게 된다.
요약하자면, 크리슈나무르티는 어떠한 길이나 방법론도 따르지 말고, 오직 자신의 삶을 가감 없이 관찰함으로써 모든 속박과 고통의 근원인 '자아(ego)'의 활동을 이해하고, 그것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워지라고 역설했다. 그는 해답을 주는 스승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도록 평생을 바친 철학자였다.
벨기에의 상징주의 작가 모리스 마테를링크(Maurice Maeterlinck)가 1908년에 발표한 희곡 '파랑새'(1911년 노벨문학상 수상)는 동화적인 상상력과 깊이 있는 철학적 메시지로 전 세계적으로 사랑받아온 고전이다. 가난한 나무꾼의 아이들인 틸틸(Tyltyl)과 미틸(Mytyl)은 기나긴 여정으로 파랑새를 찾지만 끝내 찾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와, 집에서 자신들이 기르던 비둘기가 바로 그토록 찾아 헤매던 '파랑새'였음을 깨닫게 된다.
파랑새는 내 안에 있다. 행복이라는 존재는 내 안에 있는 '집안의 비둘기' 즉 '신성(또는 불성)'과 만나 하나 되어야 비로소 행복의 충족감을 선물한다. 모리스 미테를링크의 파랑새의 세계는 나와 내면에서 답을 찾아야 한다는 다분히 동양적 사고의 인생관과 세계관을 펼치고 있다.
외부에서 찾는 대표적인 행복이 부, 권력, 명예, 명성 등이다. 이들도 분명히 행복의 조건임이 맞다. 세상은 부와 권력, 명예, 명성을 위해 생명을 불사하기까지 경쟁한다. 그러나 이들을 일군 성공한 사람들 다수는 인생을 마감할 때쯤이면 무엇인가 공허함을 느낀다.
결국 완성은 내부에서 찾아야 한다. 내부에 지성소가 있다. 내부에 불을 붙여야 한다. 그곳에 신이 함께 한다. 내가 파랑새이다. 완성하면 내가 곧 부처다. 이것은 사람이나 스승에게 기대어 찾을 사항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