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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블루스콘 Oct 07. 2021

그들만의 세계

<사냥의 시간>

*스포일러를 포함합니다*


2년의 기다림 끝에 마침내 보게 된 <사냥의 시간>은 윤성현의 잠재성과 뚝심을 엿볼 수 있는 작품이었다. 디스토피아로 변해버린 대한민국의 모습을 시각적으로 표현한 것에서 이를 느낄 수 있었다. 오프닝에서 장호(안재홍)와 기훈(최우식)이 편의점에서 나와 거리를 거닐 때 카메라는 도시를 뒤덮은 희뿌연 먼지와 추위에 벌벌 떠는 실업자들, 이와 대조되는 뒤편의 초고층 건물들을 롱테이크로 훑는다. 이는 알폰소 쿠아론의 <칠드런 오브 맨> 오프닝을 오마주 한 것처럼 보인다. 이후 펼쳐지는 황폐한 한국의 모습은 현실적이면서도 훌륭한 CG가 가미된 세계관이었다.


대담한 촬영과 조명은 어떠한가. 준석(이제훈)과 그의 친구들이 도박장 건물을 바라볼 때 천천히 뒤집는 카메라는 전복의 상황을 암시한다. 이는 도박장이 털려 떼돈을 벌게 된 친구들의 인생이 전복된다는 의미이자 추격자 한(박해수)에게 쫓기게 될 거라는 암시이기도 하다. 또한 후반부로 갈수록 짙어지는 붉은 조명 역시 인물들이 처한 상황과 심정을 시각화하는 데 효과적이었다. 뿐만 아니라 총기 사운드와 프라이머리의 감각적인 스코어는 강렬하다 못해 폭발적이었다. 윤성현이 <사냥의 시간>은 극장용 영화라고 한 적이 있는데, 비로소 이해가 되었다. 즉, <사냥의 시간>은 시청각적 표현이 극대화된 장르영화이고, 윤성현이 이를 표현하는 데 재주가 있다는 증거다.


하지만 <사냥의 시간>은 실패했다. 지금까지 찬사만 해오다 갑자기 '실패'라는 단어를 써 적잖이 당황한 이들이 있을지도 모른다. 이 영화가 실패한 궁극적인 이유는 <사냥의 시간> 속 세계가 윤성현만 꿈꾼 세계이기 때문이다. 혹시 <사냥의 시간>이 어째서 미래를 배경으로 하는지 대답할 수 있는 이가 있을까? 총기가 한국에서 허용된 이유는? 한이 이토록 쉽게 주인공 일행을 찾아낸 이유를 명확히 말할 수 있는 이는 있을까? 아마 이에 대한 대답은 윤성현만 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문제다. <사냥의 시간>은 철저히 윤성현의 취향이 담긴 영화이다. 디스토피아 세계관을 좋아하고, 총기 액션과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터미네이터>처럼 공포 그 자체인 추격자가 등장하는 영화를 좋아하는 그의 취향이 듬뿍 담긴 영화이기에 관객에게 납득을 요구하지 않는다. 그저 윤성현의 취향이 '보이는' 영화인 것이다.


이는 영화 속 상황이 아무리 멋지고 강렬해도 그 감흥은 쉽게 사라지게 만든다. 가장 서스펜스가 돋보였던 세 장면을 살펴보자. 주차장 시퀀스, 병원 시퀀스, 폐건물에서 시가지로의 탈출 시퀀스. 모두 묵직한 밀도로 가득한 시퀀스처럼 보인다. 프라이머리의 과장된 스코어와 배우들의 열연, 푸르고 붉은 조명, 한의 카리스마가 풍기는 멋진 장면들이다. 하지만 이는 허술하기 그지없는 장면들이다. 먼저 주차장 시퀀스부터 살펴보자. 윤성현은 이전에 영화 속 세계가 남미 세계를 참고했다고 밝힌 바 있다. 곳곳에 총성이 울려 퍼지는 위험천만한 세계. 이러한 세계인데도 준석 일행은 숙소로 총기를 갖고 가지 않았고, 차를 망가뜨린 한도 트렁크에 실린 총을 그대로 두었다. 병원 시퀀스는 어떤가. 한은 신발을 신고 있어 발자국 소리가 다 들리고, 준석 일행의 행방을 알기 위해 준석의 번호로 전화를 거는 짓을 벌인다. 폐건물에서 시가지로의 탈출 시퀀스도 황당한데, 군대까지 다녀왔다는 준석은 후방 경계조차 하지 않고 총도 갖고 있으면서 한이 다가오는데 쏠 생각을 하지 않는다.


즉, 첫 번째 시퀀스는 총기가 허용된 디스토피아 세계관에 대한 감독의 이해가 부족함을 증명하고, 두 번째와 세 번째 시퀀스는 추격 스릴러에 대한 이해의 결여를 증명한다. 윤성현은 장르적이고 시청각적 표현에 애정만 갖고 있을 뿐, 자신의 세계를 관객에게 이해시키려는 시도를 하지 않는다. 그러니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터미네이터>를 오마주 할 뿐, 해당 영화가 내포한 상징이나 밀도, 쾌감의 반의 반도 표현하지 못한 것이다. 결국 <사냥의 시간>은 관객에게 착각을 심어주는 영화이다. 시청각적 쾌감을 강조하면서 서스펜스와 디스토피아 세계가 훌륭하게 형성된 것처럼 보이게 만든다. 하지만 시각 효과와 음향 효과는 인위적인 것이다. 감독만의 세계를 시각화하고 인물이 처한 상황을 더 심각하게 만들기 위해 과장된 사운드를 삽입하는 것은 결코 영화 자체의 밀도를 높이거나 관객에게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는 없다. 황당하고 허술한 상황의 연속, 그리고 예상에서 벗어나지 않는 클리셰의 길에서 관객이 얻는 것은 무엇인가.


다시 한번 말하지만, 이 영화는 실패했다. 그럼에도 나는 이 영화가 참 좋다. 어설프지만 대범했고 유의미했기 때문이다. <사냥의 시간>은 많은 것을 알려준다. 좋아하는 것과 잘하는 것 사이의 괴리가 이토록 클 수 있다는 것, 시네마틱한 체험은 시청각적 표현의 극대화만으로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 이제 더 이상 새로운 시도를 했다는 사실과 기술적 성취만으로 찬사를 보내기 어려워졌다는 것. 비록 윤성현이 꿈꾸던 영화는 실패했으나 나는 그의 차기작을 기다린다. 유의미한 실패 속에서 부디 그가 원하던 영화를 만들 수 있길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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