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미가 불분명한 시대, 우리가 끝까지 붙잡고 있는 행위에 대하여
글을 쓴다는 건, 한때 인간만의 영역이었다.
오직 사람만이 감정을 문장으로 표현하고,
고통을 이야기로 풀어내며,
세상의 맥락을 의미로 엮어낼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AI도 글을 쓸 수 있고, 심지어 잘 쓴다.
AI는 줄거리를 구성하고, 서사를 설계하며,
논리적이고 감성적인 글을 써내고, 문장마저 아름답다.
완성된 글을 보면, 한 사람의 마음이 아니라
하나의 시스템이 정밀하게 다듬은 작품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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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는 편리한 도구라고 생각했다.
“조금 더 매끄럽게, 조금 더 빠르게.”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이 문장은 정말 내 문장일까?”라는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
어디까지가 내 생각이고,
어디부터가 제안받은 표현인지
혼자 힘으로 썼다고 확신할 수 없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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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그 의심보다 더 두려운 것이 있었다.
“내가 쓴 이 글에 애초부터 의미가 없던 건 아닐까?”
나 말고도 얼마든지 쓸 수 있고,
누구나 쉽게 따라 할 수 있으며,
기계가 흉내낼 수 있는 감정을
내가 왜 굳이 반복하고 있는 걸까.
결국 기억되지 않는 문장이라면
굳이 내가 쓸 이유는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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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글쓰기는 기술이 아니라 끈질긴 버팀일지도 모른다.
아무도 읽지 않아도, 어딘가에 남기고 싶은 충동.
누군가에게 닿지 않더라도,
적어도 나에게만큼은 명확한 의미로 존재하는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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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우리는 여전히 글을 쓴다.
AI가 완벽히 다듬은 글 옆에,
불완전하지만 지워지지 않을 자기만의 서사를 놓아두는 일.
그 글이 뛰어나진 않아도,
잘 쓰고 싶어서가 아니라,
진짜로 쓰고 싶은 마음이니까.
적어도 그것은
‘내가 썼다’고 분명히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